지금 집이 좋고, 좋고, 좋은 이유가 여럿이지만 무엇보다 좋은 이유는 새소리이다. 얼마 전까지 밤에 자려고 누우면 '뻐꾹 뻐꾹뻐꾹뻐꾹' 소리가 앞산에서 울렸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누군가 암호로 보내는 메시지 같기도 하다. 잠들기 전 행복 전달자였다. 아침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들의 지저귐이 가까이서 멀리서 들린다. 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아파트 자체가 이미 높은 곳에 있어서 베란다 창 앞으로 날아다니기도 한다. 휙, 바로 코 앞에 번개 같이 지나가기도.

 

새를 찾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 보는 것이 습관 중 하나인데, 거실에 앉았으면 고개를 들어올릴 필요도 없이 새가 아주 가까이 보이고 느껴진다. 이래도 되나 싶게 행복하다.

 

서점을 어슬렁거리다 신간 인문학자가 보여주는 새 이야기, 인간 이야기』를 만났다. 대뜸 집어들었다.  읽다 보니 젊었을 적 읽었던 존 스토트 목사님의 , 우리들의 선생님』 생각나 다시 끄집어냈다.두 권을 오가며 읽었다. 나쁘지 않은데 어쩐지 내가 아는 새, 내가 좋아하는 새들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 한참을 두고 읽고 또 새를 보고, 길을 걷다 하늘을 올려다 보고, 새소리를 듣다 깨달았다.

 

내가 좋아하는 새는 저 멀리 나는 새였구나! 결코 내 시야에 오래 붙잡아 둘 수 없는, 불시에 나타났다 훨훨 날아가버리고 마는, 그 새들을 좋아하는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자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집 토방에 앉아 얼마나 자주 올려다봤던가. 저 멀리 키가 큰 미루나무 위의 새 둥지, 둥지를 오가는 새들이 또렷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엄마한테 혼나고, 쓸쓸하고, 외로울 때 늘 거길 바라봤던 것 같다. 훨훨 나는 새를 보면서 '초월'을 꿈꿨다. 지금의 나를 뛰어넘고 싶은 욕구가 하늘을 보고 새를 보게 했구나 싶다. 새에 끌리는 것은 저 멀리, 여기를 초월한 어떤 세계에서의 자유 같은 것이었구나. 두 책의 저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 나를 보게 하였다. 

 

나리꽃을 좋아한다. 글쓰기나 꿈모임, 집단 여정을 이끌 때 별칭을 쓰곤 하는데 늘 나는 'nari'이다. 꾸미지 않고 제 모양대로 피어 있는 들의 나리꽃처럼 살고자 함이다. 영성적 삶의 모토 "있는 그대로"란 뜻이기도 하다. 벗들이 길에서 본 나리꽃을 그냥 지나치치 않고 사진 찍어 보내주기도 한다. 모든 들꽃에 관심이 있지만 나리꽃은 더욱 오래 들여다 보고 마음을 담는다. 

 

새를 보려면 고개를 들어야 하고, 나리꽃을 보려면 고개를 숙여야 한다. 어떤 땐 고개를 들어 저 멀리를 바라보고, 많은 경우 고개를 떨구고 땅으로 보며 산다. 요즘은 새와 나리꽃만으로 마음이 충만하다. 나리 철이 끝나가긴 하지만 나리 대신 능소화가 피고, 능소화가 떨어지면 또 다른 꽃과 들풀이 생명과 사랑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하늘의 새와 땅의 들꽃, 그 사이 공간에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이 불러일으키는 것은 생명이었다 죽음이었다, 사랑이었다 고통이었다 들쭉날쭉이다. 시간을 아껴서 '사랑이 있는 곳, 위안(consolation)'에 더 많이 머무는 것이 좋은 일이다. 메마른 곳을 일부러 찾아 맴돌 필요는 없다. 하지만 황폐(desolation)한 곳을 무작정 피할 일은 아니다. 주어진 황폐함이라면 위안의 날을 기다리며 머무르는 것이 좋다. 그런 날에 시선을 돌려 자유로 비상하는 새를 바라보거나, 제 모습 그대로 꾸미지 않고 피어있는 나리꽃과 눈을 맞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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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볶음을 밥 둘레에 두르고
부추를 쫑쫑 썰어 뿌려서
닭 부추 덮밥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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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지, 해야지 하는 일들이 몇 있는데 그 중 하나를 하게 되었다. 연구소 시작하고부터 글쓰기 강좌에 대한 요구가 있었는데 이 시절, 온라인으로 열게 되었다. 몇 자리 되지 않아 이미 마감 되었지만, 의미 있는 한 걸음이니 내 집 앞마당에 걸어두지 않을 수 없다. 제목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는 1992년에 나온 동인지 <또하나의 문화 9호>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대학 들어가던 해 창간된 <또하나의 문화>는 나를 형성한 가장 중요한 기둥이다. (기둥2: 기독교 세계관 서적, 기둥3: 사회과학 서적) 특히 9호는 출간된 시리즈 중에서 top3로 소중하다. 여성으로 살고 쓰고 읽고 사유하는 것에 대한 화두를 던져 나를 흔들었다. 고정희 시인과 조한혜정 교수에 꽂혀 읽고 읽으면서 결국 쓰고 쓰는 삶을 살게 되었지 싶다. 다시 꺼내 몇 편의 글을 읽다보니 오늘의 내가 이 책 여러 문장들에 맞닿아 있다. 치유 글쓰기, 목회자 성폭력 생존자 글쓰기 등의 모임은 이 책이 뿌린 씨앗의 열매구나, 싶은 것이다. 30년 전에 뿌린 읽고 쓰기의 씨앗이 2020년 코로나 세상에 Zoom 강좌로 피어났다. 나를 찾아가던 이야기로 또 다른 여성의 이야기 맥을 찾아가는 일을 돕게 되었다. 고민하고 방황하던 젊은 날, 곡절 많았던 지난 30여 년이 소중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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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음터 글쓰기 모임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

 

발설의 치유력은 강합니다. 말하고 쓰는 것은 가장 주체적인 행위이기에 그 자체로 치유이고 성장입니다. 종교 권력 하에서 ‘잠잠함’을 강요받은 교회 여성들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초월하는 하나님 이야기가 아니라 여기를 사는 나의 몸, 나의 기억, 나의 이야기를 쓰고 나누는 온라인 우물가(Zoom)로 초대합니다.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쓰는 여정은 필연 그 어떤 것도 아닌 그분의 이야기에 닿을 것입니다.

 

✔ 일정과 신청 안내

 

+ 일시 : 8월 5일(수) ~ 9월 9일 (수) 오후 9시 ~ 11시(6주간)

+ 인원 : 6명(선착순)

+ 수강료 : 15만원

+ 동반자 : 정신실 소장

+ 문의 : 010-2771-4445

+ 신청 링크 : https://bit.ly/2C6bBdS

 

✔ 강의와 나눔 내용 :

 

1강. 나는 쓰고 말하는 나다 : 치유하는 글쓰기의 힘

2강. 나는 나의 기억이다 : 기억으로 쓰기

3강. 나는 나의 감정이다 : 얼어붙은 감정 글로 흘려보내기

4강. 나는 나의 감정이 아니다 : 수치심 떠나 보내기

5강. 나는 나의 몸이다 : 여자의 몸, 글로 드러내기

6강.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이다 : 하나님 이미지 만나기

 

✔ 매주 글쓰기 과제가 있습니다.

모임 시간마다 바로 쓰고 나누는 글 있습니다.

필독서와 독후감 과제 있습니다.

Zoom으로 진행되는 온라인 모임입니다.

 

✔ 필독서 : <헝거> 록산 게이, 사이행성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 댄 알렌더, I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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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일동 살 때 좋아했던 <묘향 손만두>의 오이소박이 국수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

밥도 없고, 식재료도 없고, 장 봐야 할 각이지만 어떻게 한 끼 넘겨보자, 하는 뜻을 세웠다.

 

냉동실에 얼려 놓은 냉면육수 정도는 있고, 

각종 신김치 국물 모아서 체에 밭쳐 모셔놓은 것도 있고.

푸욱 삭은 오이소박이 몇 토막을 심폐소생시켜 신박한 국수가 창조되는 길이 열렸다. 창조 경제!

 

새 뜻을 세워본다.

국수에는 기름진 전이나 수육 한 점 곁들여줘야 하는데.

 

부추전 반죽 이따만큼 해놓고 어제저녁까지 먹고 털었고.

냉장고는 텅 비었...... 아, 계란!

계란 다섯 개 풀어서, 파 듬뿍 넣고 계란말이를 만들었다.  

맛이 없을 수 없지.

 

원고 하나 탈고한 수준의 성취감, 만족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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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깊이 알지 않고는 자신을 깊이 알 수 없고, 자신을 깊이 알지 않고 하나님을 깊이 알 수 없다”

『기독교 강요』 장 칼뱅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것이 신앙의 여정이라 한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반드시 자기 지식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궁극적으로 ‘치유’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로 에니어그램 1단계를 시작하여 ‘내게 하나님은 누구인가’하는 질문을 만나는 영성과정까지. 한 달에 하루씩 닷새의 시간 동안 전에 해보지 않은 질문, 전에 해보지 않은 기도의 여정으로 초대합니다.

특별히 내적 여정 저녁반을 신설했습니다. 기본 1,2단계를 6주간 여정으로 진행합니다.

 


[에니어그램 내적여정 토요반]

✔ 일시와 신청

기본1단계 : 8월 22일(토) 오전 10시 ~ 오후 5시
신청 : https://bit.ly/31SQPcu

기본2단계 : 9월 19일(토) 오전 10시 ~ 오후 5시
신청 : https://bit.ly/31QyrRj

심화1단계 : 10월 24일(토) 오전 10시 ~ 오후 5시
신청 : https://bit.ly/2ABrdFz

심화2단계 : 11월 21일(토) 오전 10시 ~ 오후 5시
신청 : https://bit.ly/3iBcmfn

영성단계 : 12월 19일(토) 오전 10시 ~ 오후 5시
신청 : https://bit.ly/2C8cD90

+ 장소 : 신촌 나음터 (마포구 서강로 142, 서일빌딩 5층)
+ 인원 : 9명 + 비용 : 12만 원/ 1일
+ 문의 : 010-4235-8020

 

[에니어그램 내적여정 저녁반]

✔ 신청 : https://bit.ly/3gD30y9

+ 일시 : 9월7일(월) ~ 10월 12일(월) 6주간, 오후 7시 ~ 9시
+ 장소 : 신촌 나음터 (마포구 서강로 142, 서일빌딩 5층)
+ 인원 : 9명 + 비용 : 단계별 12만 원/ 3주
+ 문의 : 010-4235-8020

✔ 입금계좌 : 농협 301 - 0240 - 4119 - 71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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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것은 같은 것을 좋아한다❞

 

2020년 6월 26일 금요일, 연구소 특강으로 신소희 수녀님을 모시고 '의식 성찰' 강의를 들었다. 2008년쯤, 같은 주제의 강의로 수녀님을 처음 뵈었다. 한 시간 남짓 수강자로 앉아서 뵌 것이 유일한 만남이었다. 그때로부터 기다렸다. 수녀님께 직접 배울 기회가 오기를. 엄청나게 감동적이거나, 존재를 뒤흔드는 강의여서는 아니다. 막연히 '이분은 진짜'라는 느낌이었지만, 느낌은 주관적인 것이니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른다. 적어도 내게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이었다. 강하게 끌리는 대상은 그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드러낸다. 

 

❝학생이 준비되면 선생이 온다❞

 

생각 날때마다 한 번씩 수녀님을 검색했다. 어느 순간 소속된 기관에서 이름이 찾아지지 않고, 어디서도 수녀님의 강의나 피정 동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다 작년 2019년, '영적 식별'이란 주제의 강의에서 수녀님 성함을 보게 되었다. 6주간 영적 식별 강의를 듣고, 이후에 극적으로 2박 3일의 피정에 참석하는 믿을 수 없는 만남이 이어졌다. 수녀님에 대한 정보는 1도 없었는데. 강의와 피정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수녀님의 전공이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라는 것. 신앙 사춘기의 어두운 숲을 혼자 헤맬 때, 읽고 읽고 읽다 다다른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같은 신비가들이 수녀님 전공에 닿아 있다는 것. 올해 또 6주간 강의 들으며 배우고 있다. 십수 년의 세월을 넘어 기다리던 선생님이 나타나셨다. 

 

❝그리운 하나님❞

 

삼위일체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던 어거스틴은 하나님 닮은 인간 마음 안의 삼위일체를 발견했다.(라고 수녀님의 강의를 통해 배웠다.) 지성의 삼위일체라 불리는 이것은 기억, 이성, 의지이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비출 때, 그 비추임을 알아듣는 이성이 의지에게 동의를 구하고, 의지가 예스하면서 이성과 기억과 의지가 조화롭게 성령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 된다. 그중 기억이란, 내가 누군지를 기억하는 동시에 내가 찾는 대상에 대한 기억이다. 내가 찾는 분, 그분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 심장이 쿵 떨어진다. 십수 년 전 한 번 만난 수녀님의 가르침을 기다렸던 것은, 어떤 목마름이었다.

 

수녀님 특강이 있던 날 시작 인사를 하며 그 얘길 했었다. 그 세월 기다렸던 나도 대단하고, 그 시간 생전 처음 수녀님의 강의를 듣자고 모여온 사람들도 대단하다고. 나나 그들이나 어떤 목마름, 갈망을 따라온 것이라고. 어거스틴의 말로 하면 '기억'을 더듬어 찾아온 길이 아닐까. 마침 눈에 띄는 신간이 있었는데 제목은 <그리운 하나님>이다. 사막의 교부들로부터 현대 영성가까지 여러 신비가들의 기도를 모은 작은 책이다. 책을 보는 순간 수녀님께 배운 영성가들의 가르침이 떠올랐고, 그분들의 삶과 영성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리운 하나님'이지 싶었다. 엊그제 수녀님께 그 책을 선물했다. 내가 뭐라고, 내게 배우러 오시는 분들이 늘 고맙다. 그분들께 수녀님을 소개하고, 함께 배우는 자리를 마련하게 되다니! 기적이고 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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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배한 지 얼마 안 되는 깨끗한 흰 벽을 본 아이는 신이 납니다. 마침 손에 크레파스가 있었거든요. 엄마가 스케치북에 그림놀이 하라고 주셨어요. 뭔가 자꾸 삐져 나가는 느낌. 선 하나도 긋다 마는 느낌. 너무 좁은 건가? 그때 하얀 ‘벽’을 본 겁니다. 여기야! 속이 시원하게 그어보고 그려 봅니다. 이거지! 여기였구나. 엄마가 이걸 하라고 크레파스를 준 거야! 으아, 짜릿짜릿!

잠시 후 돌아온 엄마의 표정은...... 네, 여기까지요.

미사 나음터는 정말 좁아터져서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좁은 곳에 이렇듯 빼곡히 들어앉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고, 그렇게 들어앉은 사람들 사이가 적당히 가깝고 적당히 먼 느낌으로 불편하지 않아 감사합니다. 암튼 뭐 하나 들여놓을 수 없는 공간. 지도자 과정 시작하니 화이트 보드가 필요하지 뭡니까. 필요하지만 공간이 안 되는데 어쩌겠나 싶었는데. 연구원 샘 한 분이 아무도 몰래 혼자 머리를 쓰신 겁니다.

모니터 위에 마카펜으로 막막 쓰게 만들어 놓으신 거죠. 처음 쓸 때는 살짝 후덜덜 했지요. 두 번째 되니 아주 짜릿합니다. 새로 도배한 벽지에 그림 그리는 느낌이랄까. 블랙 보드로 변신한 모니터. 지도자 과정 1기가 연구소 식구 다섯, 과정에 참여하신 분 여섯 도합 열한 개의 우주가 만나 한 주 한 주 진행되고 있습니다. 매시간 함께 새로운 질문 앞에 서며, 우리만의 돌파구, 나만의 여정을 더듬어 가고 있습니다. 함께 더듬어 가는 영적 여정이 뭔가 짜릿합니다. 으아, 짜릿짜릿!

강의로 책으로 배우고 내 몸으로 살아내서 빚어진 에니어그램, 기도, 치유 글쓰기를 모두 갈아 넣어 지도자 과정을 일궈가고 있습니다. 커리큘럼에 계획된 것 이상의 통찰에 내게서 나오고, 흘러가고, 다시 내게 흘러오는 것에 한 주 한 주 놀랍기만 합니다. 지식 전달에 멈추지 않고, 함께 경험하고 자라는 시간이 되자 마음 먹으니 연구원 다섯 분도 같은 마음이 되어 그 무엇 아끼지 않고 자신을 내어 놓으니 이런 공동체 어디 또 있겠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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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짧은 소설 모음 『내 생애 가장 큰 축복』을 읽다가 꿀재미 발견.

소설 제목은 "되면 한다" 이고,

"우리 사비 회만원이지?"

"닮은 살걀" 이런 말들.

 

이런 말장난 좋아서 껌뻑 죽는 나는 식탁에 앉아 애들에게 킬킬거리며 전해주었죠.

방역이고 뭐고 밥풀 튀면서.

"엄마, 우리 예전에 홈대 현타운"에 살 때 말야......"

웃지도 않으면서 조용히 내 싱거운 장단에 춤춰주는 사람은 역시 현승이.

홈대 현타운, 홈대 현타운....... 나 이런 거 왜 이렇게 재밌어? 

 

여기저기 만나는 사람마다 이 얘길 전하고 살아 있는 사례를 많이 모아보았습니다.

 

번둥 천개

곱은 졸목길

야치 참채죽

중고딘 알라점(친구 자신의 실수)

흼과 꾸망(친구가 강의를 듣는 중 강사의 말 중에서 주웠다고)

자둑과 방기(젊을 때 교회 목사님 설교에서, 이 날 설교 이후 몇 개월 목사님 얼굴만 보면 터져서 죽는 줄 알았음)

오백쩜 종뻔(내 경험. 매우 어려운 분의 차를 얻어 타고 가다 어디서 내려주면 되냐는 말에 명일동 500번 종점 앞에 내리고 싶은 심정을 담음)

사랑아 보영해(방송 출연자의 실수)

 

이런 거 좋아하는데 좋은 사례와 간증 있으면 댓글이든, 메시지든 전해주십쇼!

단어의 초성을 바꿔서 발음하는 이런 현상을 '스푸너리즘(spooerism)이라고 한답니다.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뉴칼리지의 학장이었던 W. A. Spooner가 이런 실수를 자주 해서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 조금 다른 꿀잼, 사진 이야기

 

엄마, 나 꿀물 좀 먹을게.

혼자 타 먹을 수 있어? 더운물에 타서 얼음 타는데......(반사적으로 일어남)

아냐, 아냐, 엄마. 내가 혼자 할 수 있어. 바로 마실게.

바로 꿀물 마시는 현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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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그렇게 책 많이 읽으면 안 돼."

"왜?'

.

.

.

.

.

.

.

.

"음, 시집 못 가."

 

라고, 남편이 예전 엄마 말을 흉내 냈다.

엄마는 내 결혼이 늦어지는 게 책 때문이라고 했었다.

시집을 이렇게 잘 와서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말이다.

 

중요한 일을 마치고 홀가분한 밤, 밤 독서.

좋은데, 너무 좋은데 표현할 방법이 없다.

흠, 다시는 시집 못 가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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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 텃밭을 일구신 장로님께서 수확한 쌈야채를 듬뿍 주셨다. 갖가지 야채 사이에 오이 한 개가 파묻혀 있었는데, '유일하게 열린 오이'라고 남편이 전해주었다. 직접 혼자 지어본 농사는 없지만, 경험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싹이 나고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을 지켜보는 설렘을 안다. 제 모양을 갖춘 열매가 매달린 것을 보고, 수확하는 기쁨도. 그놈을 어찌 먹을까? 저 오이 하나가 실 한가닥이 되어 어린 날의 기억을 줄줄 끌고 나온다. 짧게 한 교회에 몸 담았던 장로님이신데, 야채와 함께 무엇보다 유일한 오이를 넣어주신 게 특별함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리라.

 

어렸을 적, 아마 이 즈음일 것 같다. 봄 지나고 채소든 과일이든 따먹을 것이 생기는 때. 저녁 무렵이면 "사모님"하고 대문을 들어서는 언니나 오빠나, 집사님들이 있었다. 손에 든 바구니에 금방 딴 복숭아가 들어있기도 하고, 고추나 가지 같은 채소도 있다. 첫 열매. 그 해 처음 난 수확물을 목사 집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다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나도 그리 알았다. 그런가 보다, 하면서도 어떤 특권의식 같은 것은 분명히 있었다.

 

지난주에 어렸을 적 친구를 만났다. 옛 친구 만나면 지금 얘기보다 그때 얘기를 하게 되는데. 결국 시간여행이다. 그 친구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동네 친구이며 교회 친구이기도 해서 같이 많이 놀았는데, 같은 놀이도 새롭고 다양한 방식으로! 재미있는 친구였다. 풀 뜯어서 가짜 김치 담그는 소꿉놀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배추를 구하고, 집에서 고춧가루를 훔쳐다 진짜 김치를 담가 땅에 묻어 놓기도 했다. 난리 부르스를 추며 놀았다. 어른이 안 계실 때는 그 집에 몰려가 부엌에 모여 되지도 않는 뭔가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그 친구 집 부엌이 난리 부르스의 무대가 된 날이었다. 누군가 찬장을 뒤지다 가장 안쪽에서 커피병을 발견해서 꺼내 들었다. 뚜껑에 커다란 별이 하나 있는 맥스웰 커피병이었지 싶다. 그러자 집주인인 친구가 "야아, 그거 손대지 마. 그거 목사님 심방 오시면 드리는 거야!" 했다.

 

목사님은 우리 아버지다. 아버지는 커피를 좋아하셨다. 그 친구네는 동네에서도 꽤 어려운 편에 들었었다. 그런 친구 집에 당시엔 흔하지도 않은 커피가 찬장 안쪽에 들어 있고, 오직 목사님을 위한 것이라니. 그 역시 당연히 그래야 했던 어떤 의식, 목사를 특별해 대접해야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어깨가 으쓱했던 것 같고, 다시 특권의식을 당연히 하는 마음이었다. 

 

어릴 적 이런 기억, 목사 딸로서의 특권의식, 터무니 없는 특권의식은 나를 형성하는 중요한 힘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렇다. 한때, 이런 내가 몸서리치게 싫었던 적이 있었다. 남편이 늦게 목회자가 되어 다시 들어간 목회자의 세계는 당연한 특권의식의 세상이었다. 어릴 적 내가 태어나 보니 목사 딸이라서 누렸던 첫 열매를 먹는 특권 같은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것처럼. 그 세계 안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평신도 성인으로 살다 들어간 목회자의 세계의 당연함이 낯설다 못해 역겨웠다. 그때부터는 어릴 적의 나, 어릴 적 우리 가족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교인들이 땀 흘려 가꾼 열매, 첫 열매를 가만히 앉아 받아 당연한 것으로 받아먹었다니! 가난한 과부의 찬장 숨긴 커피를 독식하다니! 엄마 아버지가 조금 파렴치 하게 느껴졌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참회의 마음으로 썼던 글 <레위인 콤플렉스>가 인기를 얻기도 했다. 질풍노도의 신앙 사춘기를 통과하던 시절이다. 어릴 적의 나도, 그 글을 쓴 나도 다 나다.  무엇보다 지금의 내가 나다. 오늘 저 오이 하나가 뭉클하게 좋았다. 어떤 마음으로 보내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릴 적 "사모님, 엄마가 이거 갖다 드리래유" 하며 들고 온 바구니 속의 복숭아가 떠올랐다. 친구 집 찬장 속에서 발견한 커피병이 떠올랐다. 특권의식이니 그에 대한 부끄러움이니, 꿈같은 얘기 같고 그저 마음이 따뜻하다. 누군가를 위해 좋은 것을 아껴둘 수 있는 마음, 그 대상이 신적 권위를 대신하는 사람이라면 거룩하기까지 한 내어줌이겠지. 

 

엄마 아버지가 교인을 갈취하는 목회자 부부도 아니었다. 그 커피병 친구가 그랬다. 아직 시골의 그 교회 다니고 계신 친정 엄마에게 "신실이 엄마, 사모님 돌아가셨대" 했더니 너무 안타까워 하셨다고. "그 사모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다. 가장 사모님 같은 분이고, 그런 사모님은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었어." 하셨단다. 울컥 뜨거운 것이 다시 치밀어 올랐다. 그 말 듣는 순간 엄마 얼굴과 함께 무화과나무 생각이 났다. 꽃밭 한 구석에 커다란 무화과나무가 있었다. 열매를 잘 맺는 무화과였다. (잎이 무성했음에도! ㅎㅎ) 나는 무화과의 달착지근한 맛이 싫어서 입에 대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그 무화과나무는 우리 집을 예수님과 연결시키는 것 같아 좋았다. 어느 날 학교 갔다 집에 돌아갔는데 무슨 풀냄새가 진동했다. 잎이 무성했던 화단의 무화과나무는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었다. 교인 중 한 분이 어디가 아픈데, 무화과 잎을 끓여 먹으면 좋다는 얘기를 들은 엄마의 거침없는 선택이었다. 무화과 잎 국물을 마시고 교인이 나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날 이후로 우리 집 무화과나무는 다시 열매 맺지 못했다. 시들시들 죽고 말았다. 나는 그 무화과나무가 아깝고 아까웠다.

 

교인들 집의 첫 열매를 당연함으로 받아 먹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엄마도 아버지도 나름대로 내어줌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참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거침없이 신뢰하고 존경할 수 있었던 시절...... 사람들의 상상 속에 목사가 독재자이거나 사기꾼일 수 없었던 시절...... 거룩한 분노와 불신이 아니라 맹목적 신뢰와 존경이 교회의 기반이었던 무지몽매하여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 되돌릴 수 없는, 잃어버린 시절이다. 말라서 죽어버린 무화과나무처럼. 그 복숭아와 무화과나무가 오버랩되어 자꾸 어른거린다. 말라죽은 무화과나무가 살아나 주렁주렁 복숭아 열매를 맺는 그림을 상상했다. 

 

'상실과 고립'이란 주제로 영상 강의를 하나 했는데, 그 여파인지 상실한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다. 강의 중에 질문을 던졌다. "잃어버린 것들, 잃어버려 아쉬운 것들을 떠올려 보자"라고. 그 질문이 부메랑이 되어 이번 주 내내 잃어버린 아름다운 것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렇구나, 오이와 함께 그 질문이 나를 그 시절로 이끌었구나.     

 

한 입 깨물면 '그리움'과 '의미'의 즙이 팡팡 터질 것 같은 저 오이,

흠...... 어떻게 먹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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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면 말하고 싶어진다. 말해보면 읽고 들어야 함을 깨닫는다. 드러내야 부족함을 안다. 드러내야 잘 되면 잘 되는대로, 또 못 되는대로 채워야 함을 느끼게 된다. 쓰기·말하기를 하면 듣기·읽기는 자동적으로 따라온다.“ 『강원국의 글쓰기』 중에서

 

방송에 나가거나 인터뷰를 하기 전에는 “할 얘기도 없으면서 왜 섭외에 응했을까?” 부담감으로 잠을 설치고, 마치고 나서도 홀가분함보다는 “그 말을 왜 했지? 다른 말을 했어야지…·” 이불킥을 합니다. 그러나 결국 지나고 보면, 강원국 작가님 말처럼 드러내야 부족함을 알게 되기에 저 자신의 글과 말을 돌아보는 데는 큰 도움이 됩니다.

 

사실 저는 여전히 제 목소리, 말투, 얼굴 생김까지 낯설고 민망하여 제대로 보진 못하지만 공유하고 알려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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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을 향한 마음을 표현할 언어가 거의 없다. '내 마음속 대통령' 같은 표현도 있고, 존경이나 사랑이라 할 수도 있지만 어쩐지 다 담아지지 않는다. '노사모'였던 적은 없다. 그를 그리워하는 노란 모자의 물결 같은 걸 보며 연결된 느낌으로 적잖이 위로를 받기도 하지만 노사모라서는 아니다. 군중 속의 하나로 그분을 좋아하거나 따르는 것 아니다. 진영, 집단적 감정은 더더욱 아니다. 

 

말이 아니라 삶 때문에 좋아했고 존경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분이었다. 예수 따르는 사람이라 자처하는 어른들에게 실망하여 교회에 대한 소망이 끊어졌던 시절, 그래서 삶의 소망도 끊어졌던 때가 있었다. 그 즈음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다. 하필 그 시절이어서, 그 죽음은 트라우마가 되었다. 신앙의 빛이, 영혼의 불이 꺼진 것 같았다. 다행히 그 캄캄한 밤을 통과하며 '정답' 없이 의문을 품고도 신앙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한때 노무현 대통령을 향한 마음이 부끄러웠다. 존경하는 어른이 누구냐?는 물음에 신앙 공동체 안에서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내 마음속에 노무현 대통령 같은 어른이 없다. 어쩐지 이것이 좀 부끄러웠다. 이젠 조금 당당해졌다. 생각해보면 가장 멀리 떨어지고 싶은, 결코 닮고 싶지 않은, 정말 많은 에너지를 들여야 관계가 유지되는 사람들이 대부분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것이 더 부끄러운 일이다. 존경하는 사람을 존경하는 일은 부끄럽지 않다. 좋은 사람을 좋아하는 일은 좋은 일이다. 

 

서거 11주기 지나며 유난한 그리움으로 봉하에 다녀왔다. 장거리 운전이 힘들어 당일 일정은 어려워졌다. 교대로 운전을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일박 여행으로 계획하고 밀양에 숙소를 예약해뒀다. 전날 내적 여정 세미나 마치고 와 늦은 밤에 예약한 숙소를 취소하고 창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모님 한 분을 만나야지 싶어서다. 창원에서부터 내적 여정 세미나에 참석하고 있는 사모님이다. 아직 아이들이 어린데, 아이 둘을 데리고 ktx를 타고 올라와 시가에 맡기고는 세미나에 왔다. 코로나 19로 이후 일정에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을 얼마나 아쉬워하는지. 목마름이 전해져 왔다. 잠깐이라도 가서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남편끼리 신대원 동기라서 더욱 좋은 일이었다. 

 

끌리는 마음 어쩔 수 없다. 사람을 좋아하지만 그렇게 덥석덥석 만나질 않는다. 하지만 끌리는 사람은 바빠도 만난다. 멀리 있어도 만난다. '만나야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난다. 어렸을 때, 젊었을 때는 '만나야만 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좋은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라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 아니라고 배워서 그렇다.(도대체 누가 내게 가르친 것이냐) 애써 어려운 만남을 찾아다녔고, 기웃거리고 집적거렸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며 주먹 꽉 쥐고 애를 쓰곤 했다. 그러고 살며 꽉 쥔 손바닥은 내 손톱에 찔려 피가 날 정도였지만. 돌아보면 그것도 좋은 일이었다. '한계'는 몸으로 부딪쳐 배우는 게 제일이지. 

 

철학 상담과 영성 공부를 통해 얻은 배운 가장 큰 것은 '사랑이 있는 곳'을 거침없이 찾아가는 힘이다. 찾아간다기보다는 생명과 사랑의 흐름에 몸을 맡겨 흘러간다고 하는 게 좋겠다. 사랑은 무엇을 목적하지 않으니 힘을 빼고 목적의식을 흐릿하게 하면 어떠리. 가르치고, 배우고, 교훈을 얻고, 구축하고, 지키고, 감동을 주고...... 그 어떤 목적도 가지지 않고 그저 만나는 것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고,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퍼뜩 생각나는 사람을 거침없이 만나고. 장거리 운전이 안 되는 낡아진 몸이 되어가고 있으니, 마음의 힘도 더 뺄 일이다. 

 

 

맞아, 맞아! 그게 정말 의외지? 엄마는 호기심도 많고, 성격이 막 외향적이라서 와아아아~ 이렇잖아. 새로운 걸 막 해보고 모험적일 것 같은데 실제로 그렇지가 않아. 오히려 안 그럴 것 같은 아빠가 보면 새로운 걸 막 해보려 하고, 안 해본 걸 겁 없이 하고 그래. 보기하고 쫌 달라.

 

'엄마 아빠의 모든 것을 논평하기' 놀이에 취미를 붙인 아이들이 입을 모아 하는 얘기다. 인정, 완전 인정! 안 먹어본 것 먹기, 안 가본 길 가기(어, 이건 좋아하긴 하는데!), 신문물 받아들이기... 에 많이 주저하는 편이다. 모르는 것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머리로는 '해보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새로운 것 앞에는 주춤하며 심지어 위축되기도 한다. 그러다 딱 한 번만 해보면 '다 안다'는 식으로 팽창되곤 하니, 경박한 것도 병이다.

 

코로나 19로 약속된 3, 4, 5월 약속된 모든 강의는 취소되었다. 간간이 zoom으로 진행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일언지하!는 아니지만 여러 말로 모두 거절했다. 대면 강의도 대규모보다 적은 인원을 좋아하고, 동그랗게 둘러앉아 주거니 받거니 얘기 나눌 수 있으면 더 좋다. 강의인 듯 편하디 편한 수다인 듯 집단상담 같은 만남이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몸과 몸으로 만나는 강의에 눈빛 대화가 가능한 거리면 딱이지, 싶고. 하물며 모니터를 보고 강의를 한다는 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렇듯 여러 말로 거절했지만, zoom 같은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컸다.

 

최대한 엉덩이 뒤로 빼고 한 걸음 물러나고 물러나고 했지만 피하기 어려운 요청에 굴복하여 새물결을 맞았다. 한때 부산, 제주도에도 강의하러 간 적이 있는데 요즘은 몸이 안따라줘서 2시간 이상 걸리는 곳은 엄두도 잘 못 낸다. 한데 zoom을 타고 뉴욕에 다녀왔다. 당일치기로. 지난 월요일, 뉴욕우리교회 교우들과 온라인 강의로 만났다. 아닌 게 아니라 수강자들과 눈 맞춤할 수 없는 환경이 치명적이었다. 

 

농담이었지만 약간 진담이기도 했..... "제가 강의 정말 강의를 잘하는데, 모니터로 여러분을 뵙게 되어 실력 발휘가 안 될 것 같습니다." 시작하며 한 말을 남편이 방에 숨어서 듣고는 하루 종일 성대모사로 놀렸다. "제가요오, 강의를 정말 정말 잘하는데...... 우와, 자기 입으로 강의를 잘한대. 큭큭큭" 안 그래도 민망하여 이불 킥을 수도 없이 할 판이었는데, 남편 엉덩이를 이단앞차기로 차줄까 싶었다. 

 

강의를 잘하고 못하고, 다 지난 일 어쩌겠냐만. 계획이란 계획이 다 틀어지고만 코로나19 정국 덕에 지구 반대편 형제자매들과 연결된 것은 낯설어서 좋은 경험이 되었다. 막상 해보면 어려운 일 아닌데, 단 한 번 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 어렵고도 쉬운 한 걸음을 떼 봤다.  

 


요즘은 무슨 얘길 하다가도 결국 글쓰기 얘기다. 이번 주말 방송되는 CBS 토크 프로그램에서도, 오늘 있었던 모 언론사 인터뷰에서도 기승전...... 글쓰기!였다. 코로나 블루 얘길 하다가 글쓰기, 육아 얘기 하다 글쓰기. 이렇게 되고 있다. 보통은 책 출간 즈음에 방송에도 나가고 인터뷰도 하는데, 어쩐지 맥락 없는 자리가 자꾸 생기는 중이다. 그 자리에 가면 나도 모르게 나오는 '글쓰기' 예찬이라니!

 

정말 오랜 시간 준비한 연구소 지도자 과정이 진행되고 있는데, 긴 시간 준비한 강의보다 짧게 글쓰는 시간으로 모두들 배우는 바가 크다. 지도자 양성은 역시 글쓰기다! 자랑 삼아 페이스북에 올린 글, 옮겨 걸어놓지 않을 수 없지!

 

자기 이해를 위한 글쓰기, 치유와 성장을 위한 쓰기의 힘. 이제 덤덤해질 때도 됐는데, 여전히 새로운 감동이며 배움입니다. 내적 여정 지도자 과정에서 매주 글을 씁니다. 함께 쓰고, 집에 돌아가 혼자 쓰고, 혼자 쓴 자기 성찰의 글을 다시 공유합니다.

언제 어디서든 쓰기 시작하면 변화가 생깁니다. 쓰는 행위가 홀로 하는 것 같지만, 함께 쓰고 그것을 나눔으로 유익은 극대화 됩니다.

예를 들면 어제는 ‘내 인생 나를 가장 오해하고 있는 사람’에게 나를 항변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짧은 시간 손이 가는대로 씁니다. 글은 각 사람을 전혀 다른 결론으로 이끌었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늘 놀라고 새롭게 배웁니다. 아마 이 주제로 혼자 썼다면 자기 감정에 함몰되고 말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한 공간에서 쓴다는 것, 그리고 쓰는 이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가지는 느낌은 글의 방향에 영향을 미칩니다. 서로를 받아주는 공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기로 약속한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의식이지요.

일단 주제의 첫 번째 목표는 공간과 사람에 힘입어 '자신의 편이 되어주기'였습니다. 각자 쓴 내용은 늘 자기 안에서 꽝꽝 울리지만 언어화 되지 못한 아우성일지 모르겠습니다.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이겠지요. ‘누군가’ 나의 편이 되어 이렇게 나를 알아주고 변호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일 겁니다. 쓰는 행위는 내가 바로 그 '누군가'가 되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거침없이 내 편이 되어 자기를 변호해주는 것이지요. 실은 이게 먼저죠! 내 속내를 가장 잘 아는, 최고의 변호사는 나니까요.

한 발 떨어져서 자신이 쓴 글을 다시 봅니다. 누군가에게 항변하고 싶은 나, 그 '나'는 어떤 모습인지. 아마 내가 되고 싶은 나, 에니어그램으로 말하면 '자아 이미지'일 것입니다. 자아 이미지에 집착하여 붙들려 있다면, 그래서 자기에게 함몰되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에 됩니다. 새로운 주제가 떠오릅니다. 손이 가는대로 써봅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봐줄 때 가장 기분이 좋은가?” 거기에 덧붙여 “만약 내가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나는 무엇인가?” (제가 글쓰기 주제를 내주며 의도한 바는 이 지점이었습니다.)

사람이 글을 쓰고, 글이 사람을 이끌고, 사람들이 글을 빙자하여 자신을 내놓고, 그들이 다시 쓰고... 글은 또 어두운 자아의 숲을 헤쳐 새로운 길을 내고... 끝나지 않을 이 연결이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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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끗한 머리칼, 흐릿한 시력, 흐물흐물한 살.

거스를 수 없는 늙은 몸의 신호, 3종 세트다.

흐물흐물한 살들이 복부에 모이고, 두둑해진 배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먹어도 살은 찔 것 같지 않았던 남편의 배가 두둑해졌다.

"탄수화물 먹지 말래. 나 이제 저녁 안 먹을 거야. 닭가슴살 먹을 거야."

그 답지 않게 신경을 많이 쓴다.

 

그 어떤 욕구보다 식욕이 낫았었는데, 

절제하려 하면 이상하게 더 치솟는 것이 우리의 욕구다.

"아, 여보. 어떡해. 이것밖에 안 남았어. 밥이 자꾸 없어져. 맛있는데 너무 빨리 없어져."

 

금요일인데, 저녁으로 닭가슴살 하나를 먹겠다고 한다.

그러고 기도회 다녀오면 분명 또 냉장고 문을 열고 서서 고민에 빠질 것이다.

"현승아, 라면 먹을까?"

여드름 때문에 인스턴트 끊겠다는 아이까지 끌어들여 라면을 끓일지 모른다.

 

닭가슴살 대신 떡볶이를 먹기로 했는데.

떡은 딱 한 주먹 넣었고, 

양배추, 마늘쫑, 파프리카, 브로콜리, 양파를 산더미 같이 넣었다.

저탄수화물 떡볶이라고 하자. 

떡볶이라기보다는 족보가 야채 볶음 쪽인 것 같지만.

배부르게 맛있게 먹었다.

 

등교날이라 학교 다녀온 현승이가 떡볶이 재료를 보고 기겁을 했다.

"와, 이걸 다 넣었다고? 최악이다. 최악의 떡볶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더 늙어서 이까지 못 쓰게 되면 떡볶이 죽을 개발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부부, 떡볶이를 참 많이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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