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그럴까? 각자 집에 유배되어 하는 일들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밀린 독서, 밀린 빨래, 밀린 냉장고 정리, 밀린 화분 정리.... 나는 그렇다. 그 어떤 일보다 보람찬 일이 화분들 매만져준 일이다. 시들어 죽은 아이들 퇴출시키고, 훌쩍 자란 아이들 분갈이. 한 놈 한 놈 다 사연 있는 녀석들이라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그냥 화분인 것이 하나도 없다. 성질머리도 다 다르다. 까칠한 놈, 무던한 놈, 예쁜 놈, 듬직한 놈.
생일 선물로 채윤 현승에게 받은 화분이 들어오는 바람에 급 일제정리기간을 맞게 된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던 날, 처음 집, 엄마 자궁에서 나오던 그 새벽에 많이 울었겠지. 그 첫 생일 이후로 가장 많이 운 생일이 아닌가 싶다. 점심으로 미역국 전문 식당에 가서 근사한 생일상을 받고나서, 엄마 보고싶은 마음이 사무쳤다. 볼 수 없다 생각하니 더 보고싶고, 침대 홀로 얼마나 아프고 외로울까 싶으니 견딜 수 없었다. 엄마가 '나'라는 생명을 세상에 내놓은 날이다. 내 몸에서 나온 두 생명, 채윤이와 현승이가 근사한 초록 생명체를 선사해주었다. 그 어느 생일보다 생명을-나의 생명,내게 잇대어진 생명들을-실존적으로 경험한 날이다.
병들어 격리되어 치료 중인 녀석이다. 화분 가득 무성한 잎들이 어찌 하나 씩 누렇게 뜨다 말라버리나 했더니 전염병이었다. 안방 베란다에 격리되어 투약 중이다. 수시로 들여다보며 힘을 북둗우고 있다. 서두르지 않을게. 천천히 회복되기만 해. 약한 생명에 더 마음이 더 가는 것은 사랑의 속성 때문인지 모른다.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말처럼 사랑의 속성은 물과 같아서 낮은 곳으로, 아래로, 약한 곳으로 흐른다. 처음 사랑, 처음 생명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더듬어보면 딱 맞는 말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생명에, 사랑에, 낮고 약한 존재들 곁에 있으실 것.
시련의 시기, 사순을 시작하는 첫날, 재의 수요일이다. 어쩐 일인지 쉽게 지나가는 사순시기가 없는 것 같다. 수년 전, 아버님께서 급작스레 암선고 받으시던 때도 이 기간이었고, 세월호 참사 역시 고난주간이었다. 무엇이 더 힘들고 더 아팠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유사 이래 처음이라는 뉴스가 끝도 없는 시절이다. 정말 아무 일 하지 못하고 기약도 없는 날을 기다리는 유배생활과 다름 없는 하루하루를 지낸다. 하필 이 시기에 사고로 요양병원에 입원하여 면회조차 할 수 없는 엄마로 인해 내 영혼이 어딘가에 갇힌 느낌이다. 예측불가인 것은 엄마의 건강상태나 코로나19 사태나 마찬가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다가오는 크고 작은 마음의 시련은 한 발 한 발 더 벼랑끝으로 모는 느낌이다. 절망의 파도는 늘 사방에서 밀려오곤 하니까. 오는 파도는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믿음은 없지만 크게 흔들리진 말아야지, 하며 눈물이 나면 울고, 식사 때가 되면 밥을 하고, 책을 읽고, 잠깐씩 원고를 끄적이며 지낸다. 연구소 벗들에게 편지 쓰는 마음으로 연구소 SNS에 나눈 글이다. 이 글에 쓴 마음으로 지내려고 한다.
오늘 2월 26일은 '재의 수요일' 사순시기의 첫날입니다.
‘사순’은 40일을 의미하는 라틴말 ‘콰드라제시마’(Quadragesima)에서 나온 말로 성경에서 40은 ‘고행의 시기’ ‘시련의 시기’를 뜻합니다. 성경에서 재는 속죄와 참회의 표지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깊은 슬픔을 드러내거나 참회할 때 재를 뒤집어쓰곤 했습니다.
재의 수요일 예식에선 아래의 두 말씀과 함께 신자들의 머리에 재를 얹거나 이마에 십자 모양을 바릅니다.
✞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결코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는 기회, 방향을 전환하는 회개(metonoia)의 시간으로 보내고자합니다. 조국과 세계에 닥친 특별한 시련 속에서 모든 고난이 우리의 고난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고난 모두라는 리처드 로어 신부의 말을 떠올려봅니다. “타인들은 불의와 고통과 짐을 지고 갈 수 있지만, 내 집단은 그럴 수 없다”는 식의 잘 위장된 나르시시즘으로서의 기독교에 젖은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합니다.
나음터는 오늘로부터 시작하는 사순시기를 코로나19로 고통 받는 전 세계 자매형제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기도로 보내겠습니다.
재가 지니는 상징적 의미는 다양합니다. 재는 불로 태워진 것, 즉 불로 시련과 단련을 받은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열망과 열정으로 자신을 온전히 태워버리고 살아야 함을 뜻하기도 합니다. 또한 재는 남김없이 타버린 존재입니다. 더는 태울 것이 없는 순수한 인간 존재 본래의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일깨워줍니다.
사순시기가 끝나갈 무렵 ‘상처 입은 치유자들 :지도자 과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생명의 만남이 되기 위해 더욱 이 메마른 시기에 온전히 머물도록 하겠습니다.
이 암울한 날의 끝이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 지금 땅 밑에선 새싹들이 생명의 기운을 모아 얼굴 내밀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고난을 오롯이 통과한 후에 부활을 맞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이미 이겼다!’ 우리 곁에서 응원하고 계실 것을 믿습니다.
동생네 2번, 3번이 와서 이틀 자고 갔다. 고모집에 오면 맛있는 것을 주고, 특히 고기를 맛있게 해줄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온다. 기대에 부응하되 최선을 다해서 부응할 작정으로 아이들을 불렀다. 마침 집에 유배되어야 하는 상황이라 여러 끼니를 챙겨 먹일 수 있었다.
맛으로든 양으로든 메뉴 선정의 신박함으로든 기대 그 이상을 해주리라 마음 먹었다. 동생은 연년생 1번, 2번을 포함하여 삼형제를 키우고 있다. 워낙 잘 먹고, 특히 고기를 잘 먹는 남자 아이 셋이서 먹는 것 포함 모든 것을 경쟁하며 자라고 있다. 그러니까 조카들을 한 놈, 두 놈씩 따로 우리 집에 부를 때는 그 경쟁의 일상에서 생긴 결핍감을 보상하려는 뜻이 있는 것이다.
'결핍'이 아니라 '결핍감'이 문제라면 문제다. 충분히 먹었는데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는 결핍감. 모든 심리적인 문제, 중독도 결국 결핍감에서 기인한다. 무엇을 먹어도, 무엇을 누려도, 셋이 나누어야 하는 구조가 조카들 사이의 역동을 유발한다. 게다가 연년생 두 녀석은 사춘기. 작심을 하고 집에 오게 하여, 뭐든 맛있게 만들어서 충분히, 물리도록 먹게하고, 놀게 하는 것이 이 아이들의 고모된 기쁨이다. 말 안 듣는 사춘기 녀석들이 고분고분 착한 말로 "아니요. 배불러요. 그만 먹을래요" 라고 말하는 걸 보는 기쁨.
애정이든, 물건 집착이든, 결핍감의 치유는 충분히 채워져서 흘러 넘치는 경험이 전제 되어야 한다. 오랜 심리치료와 내적 여정을 통해 몸으로 배운 진리이다. 영혼의 결핍감을 밑 빠진 독이라 비유할 때, 어떻게 해도 그 독은 채울 수 없는 것인가? 유일한 방법은 빠져 나가는 물보다 들이붓는 물의 양이 더 많으면 잠시라도 채워지는 것이다. 항아리 뚜껑 열고 쏟아지는 소낙비를 맞는다면. 그것이 잠시 잠깐이라도 채워지는 경험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어쩌면 영성적 치유의 본질이다. 근본적으로 그 항아리를 큰 물에 던지는 방법이겠고, 그것이 헨리 나우웬 신부님 등이 말하는 '사랑받는 존재'에 대한 깨달음일 터. 피부를 입은 하나님으로 이웃에게 다가가라 우리를 부르셨다면, 사람 사람의 밑빠진 독을 맡기신 것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근본적으로 큰물(무한한 아가페 사랑의 샘)이 될 수 없는 한계를 지닌 인간이지만. 쉬지 않는 바가지 질을 하더라도 찰나라도 누군가의 마음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 그래야 하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20여 년 아이들 치료를 했고, 내적 여정을 이끌고 있다. 물론, 내 바가지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마음성장연구소 열고 1년, 내 마음 바가지의 크기를 처절하게 확인하고 좌절도 했지만.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에 대해 몸으로 배우도 했다. 적어도 이틀 정도, 우리 조카들 위와 마음을 맛있게, 멋지게, 물리도록 고기로 채워줄 수 있었다. 고모 자부심 뿜뿜이다.
간서치, '책만 보는 바보'라고 한다. 조선시대 선비 이덕무가 그리 불렸다고 하고, 그 이야기를 재밌게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책만 보는 바보> 가끔 조롱하듯, 안쓰러움을 담아 내가 내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바보, 책만 보는 바보" 그렇다고 비하나 연민은 아니다. 물론 이도 저도 못하고 책이나 보는 내가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 무력감이 싫지는 않은 것이다. 아니, 10년 전 그 책을 처음 읽을 때는 오직 무력한 무력감이었으나 요즘은 아니다. 이런 나라도 스스로 받아주는 마음 자락이 한 뼘은 생겼다. 그리하여 무력함이 마냥 무력하지만은 않다.
동시에 평균 일곱 권 정도의 책을 읽는 것 같다. 원고나 강의를 위해 읽는 책이 두어 권. 한 권 정도는 필사하며 읽고, 두어 권은 연구소 스터디를 위해 읽고, 그냥 좋아서 읽는 책이 한 권에서 세 권 정도. 그냥 좋아서 읽은 책이 동시에 끝이 났다. 리처드 로어 신부님의 책은 신간 알림을 신청해놓고 누구보다 먼저 따끈한 상태로 구입하여 받아보곤 하는데, 이번에 나온 『보편적 그리스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한달음에 읽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아껴 읽느라 혼났다. 새로운 원고에 몰입하기 위해서 기를 모으는 중 롤로 메이의 『창조를 위한 용기』가 눈에 들어왔다. 이 역시 빨리 읽고 끝내기가 아까워 조금 읽고 딴짓, 몇 페이지 읽고 스마트폰 보게 하는 책이었다.
두 저자가 내게 같은 말을 한다. 코로나로 인해 생명의 기운이 사라지고 있는 나날, 연결들이 끊어지는 듯하고, 폐렴의 바이러스보다 혐오의 바이러스로 더 숨이 막히는 시간을 보낸다. 갑작스런 사고로 요양병원에 간 엄마를 면회할 수 없는 안타까움. 예정된 모든 강의가 취소되며 코가 석 자, 넉 자가 되는 현실이다. 이렇게 얻은 불안한 시간, 텅 빈 시간을 책만 보는 바보로 지내는데 저자들이 말한다. 절망할 만큼 절망하라고, 그래도 죽지 않는다고. 창의성은 불안에서 나오고, 불안을 맞서는 용기 없이 새로운 통찰은 얻어지지 않는다고. 예수의 이름으로 그 무엇도 쉽게 초월하지 말라고.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한계를 초월할 수 있다고. 어설픈 순진함에 머무르지 말라고. 어쩌면 두 책이 같은 말을 한다.
유아적인 순진함에 머무르지 말고 정직하게 무질서의 세계로 발을 내딛어 두 번째 순진함이라는 깨우침의 단계, 재질서의 단계에 이르라는 격려를 들으며 『보편적 그리스도』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책만 보는 바보를 기다리는 다음 책은 『권력과 거짓순수』이다. 첫 장 첫 문장이 이렇다.
젊은 시절 나는 순수를 소중히 여겼다. 권력을 나쁘게 생각했고 싫어했으며 폭력을 혐오했다.
젊은 시절 그랬던 롤로 메이가 책을 쓰는 나이에는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지, 궁금함과 호기심 폭발이다. 일단 달려보려고 한다. 릴레이를. 독서 릴레이를. 알 수 없는 시절에 달리 할 것이 없다.
엄마의 노구는 얼마나 더 늙어야 그 늙음이 끝이 날까. 얼마나 더 무너지고, 망가져야 우리 엄마의 생기발랄하고 맑고 투명한 영혼을 놓아줄까. 침대에서 낙상하여 골절상 입은 엄마가 응급실을 거쳐 요양병원으로 가셨다. 무너진 엄마의 몸을 마음에 끌어안고 주말을 보냈다. 코로나로 면회도 되지 않는 요양병원에 엄마를 (가둬) 두었다. 지난주와 다름없이 유머 감각과 자존심이 살아 있는 엄마의 정신과 맑은 영혼이 노구에 갇히고 노인병원에 갇혔다.
응급실 침대에 덩그러니 놓인 엄마의 몸은 사람 몸 같지가 않았다. 이동 침대로 옮겨져 촬영장으로 끌려가고, 잠시 누웠다 피를 뽑히고, 또 무슨 검사를 하고. 100년 가까이 버텨온 엄마 몸이 혹사당하는 걸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살살해주세요, 살살, 살살이요......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피를 뽑아가고, 나무 같은 몸을 옮겨 촬영장으로 끌고 가는 사람들이 엄마의 몸을 본다. 몸만 본다. 안면골절로 멍들고 부은 얼굴을, 마른 나무처럼 뻣뻣한 다리를, 주삿바늘 꽂힌 메마른 팔과 태초부터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은 주렁주렁 달린 주사액을 본다. 늙도록 늙고, 망가지고 무너진 몸만 본다. 그 몸에 그렇게 또렷한 마음과 생각이, 빛나는 영혼이 담겨 있는 줄 모를 것이다.
나는 넘어진 건 생각이 안 나는디, 뼈가 부러졌단다.
아푸지. 여기 얼굴이 젤 아퍼. 손도 아푸고.
하이고, 병원비는 어쩐다니......
고맙다. 복 받어라......
요양병원에 입원절차를 밟고 돌보는 분에게 부탁할 말은 이것이다. 정신이 맑으세요. 자존심도 강하시고요. 말씀을 조심해 주시면...... 무너진 엄마의 몸을 보는 사람들이 그 부탁을 귀담아들을 리 없다.
마흔다섯, 이미 적잖이 늙은 몸으로 나를 낳았던 엄마는 병원에 갇히고. 마흔다섯 엄마의 몸에서 태어나 뼛속 칼슘을 다 뺏어 먹고 자라던 나도 꽤 늙었다. 그때의 엄마보다 한참 늙었다. 주말을 눈물로 보낸 월요일, 생일을 얼마 앞둔 월요일이다. 나를 낳은 엄마의 몸은 무너져가는데, 엄마 몸에서 태어난 날을 축하하는 생일선물을 사 주겠다는 남편을 따라나섰다. 내친김에 전부터 한번 가 보자 했던 어느 카페에 들렀다. 카페는 호텔 안에 있었고, 호텔은 하필 봉안당이었고, 또 교회였다. 교회 이름은 ‘부활교회’. 커피 마시고 한 바퀴 걷자던 발걸음이 부활교회까지 닿았다. 커다란 십자가 앞에 앉으니 잠시 잊었던 엄마의 노구가 다시 생각났다. 쇼핑하고, 커피 마시며 희희낙락하던 마음이 하릴없어졌다. 넋두리 같은 기도가 아무렇게나 새어 나왔다.
전화벨이 울렸다. 조카 J였고, 할머니 걱정이었다. 요양병원으로 가실 게 아니라 큰 병원으로 가 검사를 더 해보셔야 하는 것 아니냐고. 연이어 올케언니와 통화했다. 어머니 걱정이었다. 할 수 있는 것 최대한 해봐야 하지 않겠냐고. 방금 '부활교회' 커다란 십자가 앞에 앉아 내가 드린 기도를 알면 기겁할 일이다. 착한 딸이라면 할 수 없는 기도를 했다.
하나님, 이제 괜찮아요. 제 슬픔은 제가 어떻게 해볼게요.
엄마의 영혼 저 낡고 무거운 육신의 장막으로부터 해방해 주세요.
언니, 조카에게 말하고 싶었다. 더 좋은 병원이 아니라, 집으로 모시고 싶다고. 그날 응급실에서 본, 짐짝이 된 엄마의 몸을 말해주고 싶었다. 면회도 하지 못하는 병원이 아니라 집, 엄마 방, 엄마 침대에 누워 계시면 좋겠다고. 생각이 있고, 마음이 있는, 무엇보다 빛나는 영혼을 가진 엄마 몸을 그대로 받아주는 엄마 침대로 모시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응급실로 달려가던 그 밤, 엄마 몸을 보고 오던 길 통곡하며 했던 기도를 남몰래 자꾸 하게 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여러 일정이 취소되며 일상의 여백이 생겼다. 누구에겐 여백이고 누구에겐 상실감 불러일으키는 공백. 채윤이는 작심하고 2박3일 에니어그램 내적여정 피정을 예약해 뒀었다. 엄마가 피정비를 내주겠다는 것을 거절하고 제 스스로 신청하고, 비용을 부담하면서 말이다.
늘 하는 '제 자신'에 대한 고민이지만, 대학생이 되고 학교와 교회에서 성인 자아로 살아가는데 감당할 몫이 가볍지가 않은 것이다. 그런 앤 줄 몰랐는데 결국 엄마 아빠를 닮는 것인지 책으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록산 게이, 레이첼 에반스, 도널드 밀러, 브레네 브라운 같은 책을 딸과 함께 읽는 날이 오다니!
가면인지, 진짜 자기 얼굴인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때로 두려워서 울고 막막하여 입맛을 잃기도 하더니. 급기야 "엄마, 나 엄마 내적 여정 세미나 들어도 돼? 수강료 다 내고 들을게." 하고는 1단계 여정을 들었다. 그 어떤 수강자보다 진지하게 에니어그램에 자기를 비추고, 나의 딸이 아니라 제 자신이 되어 제 번호를 찾더니 급기야 '엄마가 어릴 적부터 찍어준 유형은 틀렸다!' 라고 결론을 내렸다.
결국 어린 시절을 만나는 시간이 필요할 텐데, 나랑 같이 하기는 어렵겠구나 싶어 피정을 추천했다. 내가 배웠던 박정자 수녀님 하시는 내적 여정으로 가서 1단계부터 다시 듣고 심화과정(어린 시절 작업) 듣는 게 어떠냐고. 무슨 뜻인지 알아 듣고는 바로 신청하고는 피정의 시간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취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알바도 빼놓았고 텅 비워놓은 시간. 갑자기 생긴 이 시간을 여느 날처럼 집에서 뒹굴거리며 보낼 수는 없다고 '엄마 여행 가자, 엄마 여행 가자' 노래를 했다. 나 역시 토요일 내적 여정을 취소해 놓은지라 여백이 생겼으니 그래 어디든 가자!
엄마가 밥 사면 제가 나서서 커피 살 줄 알고. 친구처럼 하루를 보냈다. 오가는 차 안에서 나누는 얘기는 이십 대나 오십 대나 결국 관계, 자아, 두려움 같은 문제로 어렵다는 것을 확인한다. 정말 친구 같다. 아주 닮은 친구. 어쩌면 너 엄마를 그렇게나 닮았니?
언젠가는 어린 시절의 엄마를 제대로 한 번 만나야 할 것을 안다. 채윤이가 내 세미나에 오던 날, 얼마나 마음이 복잡하고 두려웠는지 모른다. 결국 지금 겪는 자아의 문제는 생애 초기 나와의 관계에서 발생한 것일 텐데. (엄마 노릇을 잘했고, 못했고의 문제는 아니다. 엄마와 아이 존재론적인 관계 얘기다.) 내적 여정을 하고 아이들 키우면서 언젠가 한 번은 겪을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두렵지만 피하고 싶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맨몸으로 맞을 일이다. 아이가 알을 깨고 성장할 때마다 나도 함께 부서지면서 성장할 것임을 아니까. 날은 춥고, 메마른 겨울 수목원은 조금 황량하지만 같이 걷고 (사려 깊은) 수다 떨며 정겨웠다. 모녀 간의 정(情)보다 자매애에 가까운 정. 내적 여정의 젊은 벗을 하나 만난 느낌.
딱 먹기 좋은 겉절이 김치와 함께 편지 한 장을 받았다. 시어머님이 주신 것이다. 처음 받아보는 편지이다.
글쓰기의 치유력을 익히 알고 있다. 그 힘을 삶으로 경험했고, 함께 쓰고 읽는 사람들의 글과 말로 확인했다. 수년 전에 시어머님의 자서전을 써드렸었다. 신산한 삶을 살아오신 어머님, 어린 시절부터 겪은 고난을 몸이 그대로 기억하고 있어서 여러 증상을 앓으셨다. 여러 곳 병원에 모시고 다니고, 상담과 영성 피정 등에도 보내드렸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신체적 심리적으로 더 허약해지셨고, 나로서는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해낸 것이 자서전 쓰기였다. 배움에 결핍감을 가지고 계시지만 타고난 '활자 지향형'이신 어머님께 좋은 기회가 될 거라 믿었다. 한 발 물러서서 당신의 인생을 바라보고, 삶을 구술하시는 동안 새로운 관점이 생길 거라 믿었다. 이현주 목사님의 책 제목처럼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 고백하시겠지! 치유의 글쓰기의 진수를 경험하실 거라고!! 야심찬 계획이었다.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원고를 완성하고, 책으로 편집해주시던 언니가 말했다. "자기야, 이 책의 주제는 세상의 나쁜 년들아!야. 이 책에 등장하는 분들이 읽으시면 어머니 더 힘들어지실 것 같아. 자기가 서문 격으로 해명하는 글을 하나 써라" 아닌 게 아니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억울함과 자기 연민의 독백이었다. 어머님 자신이 얼마나 의로웠고, 헌신했는지.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몰라줬고, 오히려 배은망덕했는지. 얼마나 억울하고 또 억울하신지. 결국 서문 하나를 써서 집어넣고 책을 찍었다. 어머니 예상과 달리 흥행에 실패했다. 흥행은 커녕 읽는 이마다 말을 잃고 묘한 표정을 지은 것이었다.
내 좌절이 더 컸다. 책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어머님의 태도 때문이었다. 책 작업을 하는 동안 이미 지쳐있었다. 성찰을 위한, 치유를 위한 야심찬 계획이었는데.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았다. 성찰이 아니라 자아팽창에 일조한 것 같았다. '여기까지가 끝이구나' 이때로부터 어머님 치유를 위해 애쓰던 노력을 그만두었다. 전 같지 않은 내게 대놓고 섭섭함을 표현하시고, 수시로 돌려까기 하셨지만 더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는데 어제 받은 편지이다. 어머님이 자발적으로 자녀들에게 편지를 쓰시는데, 편지 내용이 감사와 사랑이다. 전에 자서전의 그 어머니 글이 아니다. 내게 하시는 감사와 사랑의 말씀에 감동이지만 관점의 변화! 이것이 더욱 놀라운 것이다. 자기 연민과 억울함의 호소가 아니라 감사와 연민이다. 자서전 작업을 통해 꿈꿨던 바로 그것!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몇 년 전 쓰신 글에서 당신 안의 어둠을 토해내길 잘하신 거다. 감사와 사랑의 진실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억울함과 분노의 늪을 정직하게 통과해야 하는 것이었다. 의지만으로 쉽게 초월되는 것이 아니다. 감정이나 감정의 정화, 내적 성장이라는 것이. 빛으로 가는 길은 그림자에 있다. 거리를 두고 나쁜 며느리를 무릅쓴 시간 동안, 에라 모르겠다, 어머니를 포기하고 지낸 시간 동안 어머니는 어머니의 여정을 걸으신 것이다. 각자 자기만 아는 자기 길을 가고 있다. 나도 내 길을 비틀비틀 걷고 있다.
자서전 <혹덩이에서 복덩이로>에 붙인 서문
“내 얘길 다 하려면 책 열 권을 써도 모자란다.” 황혼 어르신들께 자주 듣는 말입니다. 어느 인생인들 책 열 권 분량의 사연이 없을까요?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연륜이 쌓인다는 것은 인생의 이야기 분량이 쌓여간다는 뜻일 겁니다.
저의 어머니도 당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열 권, 스무 권으로 다 담아내지 못 할 이야기입니다. 몇 날 몇 일 밤을 지새워도 끝나지 않을 70 평생의 이야기를 이 작은 책 하나에 담았습니다. 어머님이 쓰셨습니다.
열 권 분량의 사연이 있다고 해서 모두 책을 쓰지는 못합니다.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70을 바라보시는 어머님은 결국 이렇게 인생을 써내셨습니다. 게다가 어머니의 고백처럼 평생 ‘배우지 못한 한’을 아프게 품고 살아오신 분입니다. 결국 이렇게 써내신 어머니께 박수를 드립니다. 어머님이기에 가능하신 일이었습니다.
상담을 하고 나면 ‘이렇게라도 털어놓으니 후련하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렇습니다. 혼자 붙들고 아파하던 것을 어디에든 쏟아내기만 해도 견딜만해지고 가벼워집니다. 이 작은 책은 어머님의 ‘털어놓음’입니다. 어린 시절을 혹덩이로 기억하시는 어머니는 오랜 세월 마음의 병을 앓아오셨고 두통과 불면증으로 고생하셨습니다. 부디 이 털어놓음으로 인해 남은 인생에 더 밝은 이야기들이 쌓여 가기를 기도드립니다.
이 책에 나오는 많은 일을 함께 경험하신 분들은 어머님과 다른 기억을 가지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기억은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개인에 의해 ‘경험’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자 자기 인생 이야기가 지어져가는 것일 겁니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치유하는 ‘내면아이 치유’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어린 시절의 치유는 다름 아닌 ‘기억의 치유’라고 합니다. 각자 기억이 다르고, 어머니의 기억 또한 세상 그 누구와도 같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머님의 내면아이 치유, 기억의 치유를 위한 아픈 고백임을 기억해주시고, 따스하게 바라봐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표지사진을 찍던 날 어머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눈은 아이처럼 반짝반짝 빛났고 표정은 더없이 행복해 보이셨습니다. 발그레 상기된 볼하며, 20여 년 가까이 어머님을 곁에서 뵈며 그렇게 예쁜 모습은 처음이었습니다. 그 순간 울컥하고 눈물이 났습니다. 스스로 혹덩이라 여기며 춥고 배고팠던 어린 시절을 보낸 어머님이, 오직 당신만을 사랑스럽게 따스하게 바라봐주는 눈길을 얼마나 얼마나 바라셨을까 싶어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험한 세월을 약하디 약한 몸으로 견뎌 오신 것은 분명 어머니 마음속엔 ‘사랑의 눈길’에 대한 기억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것의 다른 이름은 ‘믿음’일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의 눈길을 거두지 않으시는 하늘 아버지. 하나님 사랑에 대한 믿음 하나로 혹덩이 어머님이 복덩이가 되셨습니다.
어머님 남은 생애, 그 따스한 주님의 눈길을 더 많이 느끼고 발견해가시며 행복한 황혼을 보내시길 기도드립니다. 외롭고 고독한 시간에 더욱 주님을 붙드시는 믿음의 길은 사랑의 길임을 믿습니다. 혹덩이 어머님, 복덩이 어머님을 사랑합니다.
연구소에서는 [나찾수다 : 나를 찾는 수다]라는 비정기적 수다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2월에는 임신중절(낙태)의 아픔을 나누는 이야기모임입니다. 나음터를 통해 연결된 여성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말하지 못하는 그저 그러려니, 꽁꽁 얼린 감정으로 가슴에 품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 중 하나가 임신중절입니다.
법과 윤리의 잣대를 넘어선 진짜 이야기, 우리가 경험한 임신중절이 몸과 마음을 통해 남긴 삶의 무늬들을 이야기합니다. 삶을 내 목소리로 말하고 나누며 연결되는 것의 힘이 있습니다. 연결은 치유입니다. 오셔서 그저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셔도 괜찮습니다.
슬퍼도 슬퍼할 수 없는 마음, 비밀스런 상처에 연결되고 싶습니다.
임신중절 이후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 임신중절을 고통스럽게 고민하고 계신 분들, 기혼, 비혼, 싱글 여성 나이도 상관 없이 누구라도 환영합니다.
자신의 일이 될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던 임신중절 경험을 심리와 여성영성, 페미니즘 공부로 아프게 통과하며 스스로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된 내적 여정의 벗님, 윤주애 선생님이 모임을 이끕니다.
분가하며 다 가져온다고 했는데 시가에는 아직 남아 있는 우리 물건이 있다. 아이들 어릴 적 사진 앨범은 꼭 가져와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아버님 돌아가시곤 '어머님이 인생 가장 행복했던 날'을 추억하며 들춰보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채윤 현승이 어떤 시기의 사진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설에 가서 앨범에 있는 사진들을 찍어왔다.
현승이 낳고 짧은 조리원 경유하여 엄마 집에 얼마간 가 있었다. 낯선 곳이 너무 힘들고 두려운 현승이는 세상에 처음 왔을 때부터 그랬다. 지금까지 한결 같다. 처음 집, 내 뱃속에서 나오던 순간부터 울기 시작하더니 생애 초기에 그렇게 울어댔다. 그땐 몰랐는데, 저 성격에 터무니 없이 넓고 밝고 시끄러운 세상이 얼마나 두려웠겠나 싶다.
그나마 사람 몸에 닿아야 울음을 그치는 통에 조리원에서도 친정에서도 집으로 돌아와서도 어른들은 총 비상이었다. 돌아가며 안고 흔들고 몸에 붙이고 있어야 했으니. 엄마 집에서 머물던 시간 불편한 마음이 떠오른다. 내 몸이 힘들지만 늙은 엄마가 아이를 안고 있는 것, 미역국을 끓이고 밥을 하면서 종일 서 있는 것이 너무나 마음이 쓰였다. 채윤이를 보다 주저앉은 허리로 이미 몸이 많이 망가져 있었으니.
집으로 돌아오는 날 아침, 엄마가 울었다. "엄마가 늙어서 조리도 제대로 못혀주고. 니가 찬물이다 손 담그게 허고 그려서 미안허다. 엄마가 늙어서..." 나도 뒤돌아 울었다. 늙은 엄마를 고생시키고 늙은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미안하고, 이런 내 처지가 가여워서.
이 사진은 그 시기 어느 때이다. 가슴에 남아 있는 사진이다. 다시 들여다보니 엄마가 젊었다. 이미 80이 가까운 연세였지만 젊었다. 신생아의 목을 받쳐 안을 수 있을 정도로 팔에 힘이 있고, 아이와 눈 맞추고 어를 수도 있었고... 그러고 보면 늙을 때까지 늙은 것이 아니다. 산후조리 마치고 집에 돌아오던 날, 엄마의 늙음이 그렇게 슬펐는데 젊은 늙음이었다. 우리 엄마는 평생 내게 '늙음의 걱정'을 운명처럼 안겼다. 평생 늙었던 엄마, 지금은 더 늙은 엄마가 아직 내 곁에 있다.
패밀리데이는 맨 처음 가정예배의 대체 용어였다. 용어만 대체한 것이 아니고 내용도 코이노니아 가깝게 변형하게 되었다. 분가한 해부터니까 채윤이 일곱 살 쯤일까. 일주일에 한 번 저녁시간을 함께 놀고, 노래하고, 게임하고, 기도하고, 한 방에 모여서 자는 그야말로 가족의 날이었다. 한 해의 첫날, 송구영신 예배 여파로 반드시 늦잠 자게 되는 1월1일에는 '빅패밀리데이'이다. 작년의 10대 뉴스 뽑기(아, 그러고보면 이건 아이들 생기기 전부터 둘이서 했던 놀이)등으로 작년을 돌아보고 새해 소망을 나누는 시간이다. 둘 다 글을 잘 쓰고 읽을 수 있게 된 어느 때부턴가 10대 뉴스 뽑기는 마인드맵 그리기로 바꾸었다.
올해엔 신년 특별 새벽기도로 좀처럼 여유가 생기질 않았다. 음력 1월1일이 가까운 날에 2020년 빅패밀리데이를 했다.
작년 한 해를 돌아보며 각자, 또는 가족에게 의미로 기억되는 일들을 의식의 흐름대로 떠올려보기. 네 사람의 한 해가 냇물처럼 각각 흘러가다 하나의 강물로 만난다. 아, 맞아! 그런 일이 있었지! 아, 정말 그랬네! 아아, 나도 거기에 쓸 말이 있다! 2019년 마인드맵이 완성되면 작년에 썼던 기도제목을 꺼내 읽어본다. 타임캡슐에서 꺼내는 느낌이다. 여러 소망이, 기도제목이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이루지지 않는 방식으로 응답되고 있는 것을 힘 들이지 않고 확인할 수 있다. 매년 이 순간 확인하는 것은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
2020년을 희망한다. 각자 쓰고 돌아가며 나눈다. 긴 설명 없이도 알 것 같은 기도제목이다. 서로를 위해 기도한다.
십수 년을 이어온 가족의 리추얼. 아이들이 자라면서 의미와 깊이가 함께 자란다. 현승이는 '로봇이 되게 해주세요' 이런 기도제목을 나눴던 어느 날도 있었는데. 어느 해 썼던 내 기도제목, '청년부의 진정한 부흥'이 눈에 크게 들어온다. 청년부 예배 전에 예배당 뒤편에서 커피 내리던 시절, 주일 밤 12시가 되도록 눈물로 마음 나누던 시절이 있었다. 청년부의 진정한 부흥을 꿈꾸던 시절, 내 신앙은 광야였다고만 생각했었다. '청년부의 진정한 부흥'이란 익숙한 내 글씨를 보니, 광야였지만 동시에 진정한 부흥의 시간들이었지 싶다. 로봇이 되고 싶은 현승이, 키가 많이 커서 엄마를 넘고 싶었던 채윤이는 소원을 다 이루었다. 로봇 이상의 능력 있는 인간이 되어 있고, 엄마의 키만 넘은 게 아니라 생각의 깊이 까지 추월하고 있으니.
기록, 기록을 하염없이 쌓는 일은 정말 기가 막힌 일이다. 기록하지 않았으면, 기록 위에 기록을 쌓지 않았으면 발견할 수 없는 생의 의미가 있다. 그때 쓰며 알지 못했던 것을 십 년이 지나서 알게 되고, 그때 그렇게 써두었기에 오늘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된다. 거듭되는 Family Day를 지나며 아이들은 이렇게 자라고 우리는 이렇게 늙거나, 조금 후하게 표현하자면 여유로워졌다. 엄마 아빠와 아이 둘이 아니라 자기 색이 분명한 네 사람이 Family로 함께 하는 느낌이다. 머지않아 두 아이는 내 품을 떠나게 될 텐데. '넷'이 아니라 '둘'이 Family로 남을 날이 올 텐데. Family란 이름으로 쌓아온 기억, 그리고 기록은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오지 않을 2020년의 Family Day, 2020년의 가족 하루는 또 얼마나 소중한지.
상담이든 집단여정을 마치고나면 이미지로 남는 것이 눈빛인 경우가 많다. 눈빛보다 더 동적인 표현이 있으면 좋겠는데. 대화 도중 수시로 변하는 눈의 언어 같은 것이다.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아도 이미 가슴에 흐르는 눈물이 보이는 경우도 있다. 대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이미 젖은 눈도 있다. 집단여정에서 내 눈의 초점을 비켜가는 눈도 본다. 부러 초점을 다른 곳에 두어 마주침을 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실은 나는 입으로 나오는 말보다 눈가에 고인 말을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믿는다.
복음서를 메시지 성경으로 읽으면 예수님의 눈길, 눈빛이 아주 가까이 느껴진다.
어제 마가복음 3장을 읽다 심장 쿵, 그분의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하였다. 인간 예수님이 어떤 모습이었을까. 팔레스타인의 흔한 남자 얼굴이었겠지만 눈빛만큼은 남달랐으리라. 비슷비슷한 팔레스타인 남자들 중 예수님을 찾기는 쉬울 것 같다. 눈을 보면, 눈을 들여다보면 금방 그분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럴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혹시나 안식일 위반으로 예수를 잡을까하여, 그 사람을 고쳐 주나 보려고 그분을 주시했다. '
이런 눈을 본 적이 있다. 덫을 놓고 걸리기만 걸려라 번득이며 흠을 찾아내는 눈. 관음하는 눈. 어디 니가 잘 되나 보자, 며 예의주시 하는 눈. 너희끼리 무슨 짓을 하는지 보자며 하루가 멀다 하고 클릭하여 확인하는 눈. 비겁한 눈, 거짓된 눈. 비겁하게 관음하고 안 본 척 하며 악을 도모하기 때문에 사악한 눈.
그 다음 예수님의 태도에 감동하고 말았다. 비겁하고 거짓되고 사악한 눈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를 보라.
"우리가 잘 볼 수 있도록 여기 서거라."
숨어서 보는 자들에게 감추지 않고, 덫을 놓고 책잡으려는 자들의 덫에 공개적으로 걸림으로 맞선다. 거짓에 대면하여 투명함으로 맞선다. 숨어서 보는 자들 앞에 모두 잘 볼 수 있도록 환히 드러내신다.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당신이 종교와 사랑, 선과 악 사이 무엇을 선택하시는지 분명하게 언어화 한 후에 눈으로 말씀하신다. 강력한 진실을 말하신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비정한 종교에 노하여, 그들의 눈을 하나씩 쳐다보셨다'.
예수님의 진실하여 강한, 분노로 발사하는 사랑의 눈빛을 받은 비열한 눈들이 어땠을까? 하나씩 하나씩 눈을 맞출 때 그들의 영혼이 어떠했을까. 심장 멈출 듯 한 눈빛 교환을 통해 어떤 이들은 회개를, 어떤 이들은 더 큰 악을 도모하는 것을 선택한다. 결국 그들은 다른 무리까지 합세 시켜 그분을 파멸시킬 계획에 흥분한다.
그리하여 결국 그분은 몹쓸 눈빛 발사로 당신의 죽음을 자초하셨으나, 그 몹쓸 아름다운 눈빛 내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막3:1-6 메시지성경)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거기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혹시나 안식일 위반으로 예수를 잡을까하여, 그 사람을 고쳐 주나 보려고 그분을 주시했다.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잘 볼 수 있도록 여기 서거라.” 예수께서 이번에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행동이 안식일에 가장 합당하냐? 선을 행하는 것이냐, 악을 행하는 것이냐? 사람을 돕는 것이냐, 무력한 상태로 버려두는 것이냐?” 아무도 말이 없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비정한 종교에 노하여, 그들의 눈을 하나씩 쳐다보셨다. 그리고는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을 내밀어라.” 그가 손을 내밀자 그 손이 새 손과 같이 되었다. 바리새인들은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가, 어떻게 하면 헤롯의 당원들과 합세하여 그분을 파멸시킬 것인지 흥분하며 이야기했다.
싱크대는 설거지로 머무는 곳이다. 언제부턴가 내 자리가 아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1/4만의 내 자리이다. <82년 생 김지영>, 청소년 백수 '꽃친'의 시간, 등의 나비효과이다. 현실적으론 테니스엘보라는 인대염으로 팔을 잘 쓸 수 없게 되면서 지분 분할이 더욱 명확해졌다.
고구마에 싹이 나고 잎이 나면 가위바위로, 가 아니고 무조건 쑹덩 잘라서 싱크대 앞에 놓는다. 새생명으로 받들어 키우는데 참 사랑스럽다. 보랏빛 싹이 나고 자고 일어나면 쑥 커져 있다. 아침마다 내게 살아야 할 이유를 가르치는 고마운 선생님, 귀여운 아기이다.
싱크대 앞에 서는 시간은 3/4으로 줄었지만 정서적으로 여긴 내 구역이다. 내 구역 안에 생명의 기운을 배치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개운죽 한 뿌리, 꽂아놓기만 하면 알아서 잘 자라고. 자그만 다육이 염좌도 알아서 잘 생존하고 있다. 작은 생명들은 내 영혼을 흔든다. 작고 무력한 녀석들은 생존만으로 기쁨이다.
내적 여정 세미나를 금, 토 연달아 진행했다. 연구소 일이 많아지기도 하고, 같은 내용을 연달아 다른 그룹과 나눌 때 역동의 차이를 몸으로 경험하는 배움이 크기에 그리 배치했다. 예상했지만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다. 실은 보기보다 강한, 강의에 최적화된 성대와 체력으로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스물한 살 채윤이가 자아에 대한 고민으로 무거운 표정이기에 막판 취소로 자리가 난 내적여정 세미나에 초대했다. 마치고 여러 얘기를 했지만 이 말이 가슴에 남는다. "엄마, 엄마가 이렇게 힘든 일을 하는 줄 몰랐어. 전에 봤던 강의처럼 중간중간 웃기면서 막막 그냥 엄마가 하고 싶은대로 하는 줄 알았어. 나는 엄마처럼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상상도 못하겠어."
딸이 그리 말해주니 나를 보는 새로운 눈이 생겼다. 위로도 되고.
주일 예배 마치고 모처럼 여유 있는 시간에 원고도 뭣도! 모든 '일'에 대한 강박을 뒤로 하고 카페에 가 시간을 보냈다. 이래도 돼. 아무 것 하지 않고, 의무감 없이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 돼. 힘이 생겼다. 생산적인 어떤 일도 하지 않을 자유와 힘. 일정 마치고 집에 들어간 남편이 전화를 해왔다. "어디야?" "스벅" "누구랑 있어?" "나랑"
나랑 함께 있어 주었다.
연구소 내적여정이 잘 되고 있다. 사람이 잘 모이고 있다. 이틀 간 20여 명의 새로운, 익숙한 얼굴을 대한다. 강의가 아닌 영적 안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시간이다. 존재의 집중이 필요한 일이다. 연구원 네 사람과 함께 마음을 담아 준비하고 진행한다. 채윤이 말처럼 돈을 버는 일도 아닌데. 정말 좋아서 하는 일이다. 매 세미나마다 그때 그때 다른, 매너리즘 따윈 상상할 수 없는 존재와 존재로 만나는 창의적 시간이다.
신기한 것은 '자라는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 바로 에너지 충전이 된다. 이 일을 하는 이유는 '자라는 것'을 보는 기쁨이다. 싱크대 앞의 고구마 싹이 좋은 이유를 알겠다. 성장이 눈에 보이는 것만큼 나를 흥분시키는 것이 없다. 인상이 어떻든, 미성숙한 모습에 없어 보여도 오가는 대화 속에 성장의 기운이 보이면 사랑, 소망, 믿음이 한꺼번에 용솟음 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 공들여 키우는데 자라지는 커녕 시들어버리는 않는 식물,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더는 배울 것 없다는 태도를 견디는 것이 내겐 참 어려운 일이다.
강사, 작가, 특히 내적여정 안내자.
참 좋아하는 일인데, 오늘의 나를 가장 나답게 하는 일인데, 거침없이 열정을 쏟아 붓는 일인데도 내 영혼의 갈망을 온전히 채우지 않는다. 실은 매우 만족스럽지만 그 만큼의 공허감도 피할 수 없다. 세미나를 마치면 몸이 아니라 영혼의 피로가 공허감의 얼굴로 몰려온다. 좋아하는 일인 만큼, 소중한 일인 만큼 더 잘하고 싶고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려 힘을 많이 쓰기 때문일 것이다.
집에 돌아와 정장 벗고 화장 지운다고 진정한 내가 되는 것도 아니지만, 싱크대 앞 일상의 나처럼 거품 없는 나도 없다. 여유 없는 며칠 지내고 선 싱크대 앞의 고구마 싹이 쑥 자라 있는 것이 이렇게 예쁠 수가 없다. 주인 엄마 봐주지 않아도 제 몫의 성장을 일궈가는 녀석. 나의 일상이 너를 닮아야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