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남편 김P는 존대말의 사람이다. 

미융의 남편 남궁P는 반말의 사람이다.


사람들은 김P에게 함부로 많을 놓거나 시덥잖은 농담을 걸지 않는다.

남궁P는 누구보다 먼저 말을 놓고 반말을 유발한다.


우리 결혼식 때, 신랑신부 퇴장길 끝에서 흔한 꽃가루가 뿌려졌다. 

퐁퐁, 작은 폭죽도 터졌다.

폭죽 일발장전 하고 한 방에 땡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남자 집사님이 계셨다.

순간 퇴장하는 신랑 김종필과 눈이 마주쳤다.

진지한 눈빛에 기가 꺾여 차마 당길 수 없었다고, 조용히 폭죽을 내려놓았다고.


작년 말, 오랜 기다림 끝에 남궁P가 결혼을 했다.

우리 현승이를 비롯한 교회 주일하교 아이들이 축가를 불렀다. 

축가 부르러 나온 아이들, 사춘기 어간의 아이들의 표정이란 안 봐도 뻔하다.

축가팀과 마주한 신랑이 바로 스태프 모드로 전환되어 손가락 입가에 대고 웃는 표정을 주문했다.

축가를 부를 때는 아이들보다 더 건들거렸다.


우리 남편 김P와 미융의 남편 낭궁P는 많이 다르다.

미융과 나도 다르다. 나는 한국 여자, 미융은 베트남 여자.

"사모님, 이 책 다 읽었어?" 

우리 말을 꽤 잘하는 미융이지만 이런 신선한 웃음 유발하는 디테일이 있다.

"아내는 매일 책만 봐요. 여기 보면 <책만 보는 바보>라는 제목이 있어요."

남편이 대신 답했다.  

미융은 고개를 절래절래, 책을 싫어한다.


남궁P는 뭐든 잘 먹고, 음식도 눈앞에 있는 재료를 가지고 뚝딱뚝딱 만들지만

특히 떡볶이를 좋아한다. 결혼 전 현승이와 그 일당을 데려다 많이 해먹이셨다.

미융은 떡볶이를 싫어한다. 

한국 와 일하던 직장에서 늘 간식으로 나왔던(떡볶이, 김밥, 라면) 메뉴, 

그 기억 때문에 싫다고 한다.

남궁P는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함께 먹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오빠 떡볶이 좋아해. 오빠 떡볶이 먹어! 나 안 좋아해. 안 먹어!"

미융은 이러면 된다고 한다. (와, 인생 띵언!)


남편이 지금 교회에 부임하며 주일학교 사역자로 남궁P를 스카웃 했왔던 건 여러 모로 신의 한 수였다.

많은 사람에게 선물이 되었지만 주일학교 아이들에겐 큰 선물이었다.

사춘기 남자 아이들 마음을 그렇게 사로잡을 수 있는 선생님이 몇이나 되겠는가.

결혼과 동시에 이주노동자 사역으로 떠난 남궁P를 아이들은 여전히 좋아하며 찾는다.

사랑의 흔적이 남겨진 탓이다.   


남편과 남궁P는 다르고, 참 많이 다르다.

나와 남편도 다르고, 참 많이 다르다.

남궁P와 미융이 다른 점을 찾아면 헤아릴 수도 없다.


이렇게 다름에도 달달한 일상을 산다. 

이렇게 다른 사람이 한 식탁에 모여 달콤한 쉼의 만남을 가졌다.

라끌렛으로 시작하여 김치말이 국수로 끝난 메뉴는 다국적, 너무 다국적.


다름, 뭐 대수인가?




'꽃보다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기의 눈맞춤  (0) 2019.09.16
청년, 자발적이며 창조적인 교회  (0) 2019.08.17
바뀐 사이즈  (0) 2019.06.29
부럽다고 지는 건 아니라는 거  (0) 2019.06.21
여자들의 떡  (0) 2019.05.06




아침에 눈을 뜨면 창 밖 앞산의 푸르름에 인사를 한다. 그 인사는 짧다. 이내 고개를 숙여 창가의 화분에게 굿모닝! 기나긴 굿모닝 인사다. 한 놈 한 놈 건강을 살핀다. 제 몫의 푸르름을 유지하는지, 잎은 탱탱한지. 그러며 어느 놈이 목이 마른지 알게 된다. 핸드드립 동포트(꼭지 부분 가늘어 천천히 물주기가 딱이다!) 목은 마른 것 같진 않은데 어쩐지 생기를 잃은 것 같은 녀석도 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원인을 모르니 대응도 할 수 없다. 그저 소성케 되길 기도한다. 앞산 푸르름을 배경으로 잘 자라는 화초들 덕에 아침마다 생명의 기운을 받는다.


'바쁘실 텐데 어떻게 이렇게 화분을 잘 키워요' 집에 오신 분들이 빈말인지 아닌지 칭찬을 하신다. 화분이 울고 보채는 것도 아니고, 등원 하원 시간 챙겨야 하는 애들도 아니고, 세 끼 밥을 먹이거나 목욕시킬 것도 없으니 바쁘다고 돌보지 못할 애들은 아니다. 아침에 잠시 눈을 맞추고 가끔 사진을 찍어주면 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 집 화초가 잘 되는 것은 인정! 내 마음의 정원이라 여기고 싸구려 화분 몇 개라도 가까이 두고 돌보는 일상이 오래다. 어느 때부턴가 수월하다. 그다지 힘을 쓰지 않는데도 말이다. 나, 힘도 안 들이고 화초 잘 키우는 여자!


신혼 초, 노란 벽지 집에서 처음으로 화초를 들이던 때나 지금이나 죽어 나가는 애들은 비슷하다. 조금 줄었을 수도 있겠다. 잘 돌본다고 돌보지만 어깨를 축 늘어뜨리다 결국 고개를 푹 꺾어버리고 마는, 급기야 시들고 마는 애들은 어쩔 수 없다. 화초 키우기가 수월해졌다 느끼는 지점이 분명하다. 죽어 나가는 화초에 대한 과한 죄책감을 놓으면서부터이다. '에고, 또 죽였네! 난 정말 화초를 못 키워, 다 죽여!'에서 '죽을 놈은 죽고 말더라' 하는 마음이 되니 거짓말처럼 화초 잘 키우는 여자가 되었다.


변화의 방향이 밖에서 안인지, 안에서 밖인지는 모르겠다. 화초가 아니라 사람 관계에서도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젊은 날부터 '관계의 실패자다'라는 자의식으로 살았다. 알고 보면 실패한 관계 하나 둘이다. 모든 관계를 다 잘할 수는 없구나! 불가능한 목표였구나, 깨닫게 되면서 과도한 힘이 빠져나간 것 같다. 착한 크리스천 강박에 대한 인식이 생겼다고 말해도 좋다. 가장 확실한 표현은 내 한계를 인정하게 된 것이다.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일 수는 없어!


이렇듯 단순한 진리를 알아듣기까지 얼마나 기나긴 고통의 시간이었던가. 자기혐오의 시간이었던가. 자아팽창의 시간이었던가. 그 시간을 통과하며 관계에 대해 쓰고 강의할 수 있게 되었다. 관계의 실패자가 관계 강사가 되었다니! 관계의 실패자일 때나 관계 강사인 지금이나 실패하는 관계는 비슷할지 모른다. '에고, 또 실패했네, 역시 나는 관계의 실패자야'에서 '내가 애써도 안 되는 관계가 있더라, 잃을 사람은 잃을 수밖에 없더라'하는 마음이 되니 거짓말처럼 사람을 좀 아는 여자가 되었다. 


사람에게서 배워 화초를 잘 키우게 된 것인지, 화초를 키우다 사람을 배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디 한 방향이겠는가. 안팎을 오가며 습득하게 되었겠지. 누가 뭐라 하지도 않는데 말라죽은 화분을 숨기고 싶었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누가 뭐라 하지 않는데 내 안의 내가 마구 비난을 퍼붓는 것이었다. 내가 사람인 줄 모르는 탓이었다. 단번에 예수님처럼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탓이었다. 이제야 사람인 줄 안다.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가진, 희망과 절망 또한 한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죽고 싶지만 떡볶이도 먹고 싶은 사람인 줄 안다.


창밖이 저렇듯 푸른 산인데, 창가의 화초 또한 저렇듯 싱싱한 초록이라니! 

내 눈 앞의 풍경이라니! 토요일 오전, 나의 한가한 일상이라니!  

'마음의 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치심의 치유_후원의 추억  (0) 2019.09.30
The impossible dream  (1) 2019.08.30
후지게 쓰더라도 쓸 수만 있다면  (0) 2019.05.04
글로 써버릴 당신  (0) 2019.04.03
작고 낮은 것  (0) 2019.04.01

 

 

 

편의점 들어가며 심장 뛰며 설레기는 처음 일이다. 이게 다 알바 때문이다. 아무 살 것이 없는데도 자꾸 들어가고 싶어진다. 운전하며 그 앞을 지나면서도 심박수가 상승한다. 이게 다 알바 때문이다. 내가 들어가면 환하게 웃으면 맞아주는, 환한 웃음 끝, 입꼬리 부분에 부끄러움이 걸려 있는 알바 때문이다. 

   

대학생 된 채윤이가 단지 안에 있는 편의점에서 알바를 시작한 지 두어 달. 난생 처음 돈 만져보는 설렘에 월급도 받지 않았는데 '엄마, 이제 용돈 주지 마' 셀프로 용돈을 끊으려 하기에 워워, 말렸다. 알바를 시작도 하기 전에 셀프 용돈을 끊으려 하질 않나, 그렇게 목을 매던 마라탕을 '일일 일마라탕' 먹질 않나. 애가 좀 정신이 없어 보였다. 

 

왜 아니겠는가. 어려서부터 그렇게 꿈에 그리던 판매원이 되는 순간이니! 정말 놀려고 태어난, 세상 모든 것을 놀이로 만들 수 있는 신공을 가졌던 아이 채윤이. '오소 오세요옹' 띡, 띡, 띡(포스기 찍는 소리_가 입에서 나옴) '네, 이천 팔만 원입니다아'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거실에서 팔지 않은 것이 없다. 거실과 주방을 오가며 현실과 놀이의 경계가 없었으니 놀짱을 가사에 활용하는 이런 맛도 있었다(클릭!).

 

그 판매대 옆에는 꼭 어리바리한 직원이 하나 있는데 일에 집중하면 자기도 모르게 침을 흘리거나, 행동은 한 템포 씩 늦는, 장사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오직 귀여움만 장착한 직원이다. 

 

이것은 그 시절, 거실의 한 장면. 

당시 업종은 쌀가게 였고, 

배달 업무까지 겸하고 있어서 배달 차에 쌀을 싣는 중이었다. 

 

우리 집 거실의 남매, 현실 남매가 어린 시절 그 많은 놀이를 뒤로 하고 중딩이 되고, 사춘기를 겪고, 청소년 안식년을 갖고(갖는 중이고)... 하더니 같은 회사 아니고, 같은 편의점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편의점 도시락을 꾸준히 먹고 있는 현승이가 사장님과 친분을 쌓고, 신뢰를 얻더니 누나의 뒤를 이어 알바 자리까지 꿰찬 것이다. 첫 근무 하는 날 사수는 현실 누나였다. 

 

엄마는 이유 없이 자꾸 알짱거려, 밤늦게 퇴근하던 아빠는 들어와 물건 던지며 "야, 계산해!" 진상 고객 꽁트를 해. 온 가족이 들떠 있었다. 알바하고 밤을 보낸 아침, "엄마, 밤새 악몽을 꿨어. 어제 알바 하면서 편의점 문여는 소리 띠리리리리 띠리리리(엘리제를 위하여) 그 소리만 들리면 갑자기 긴장 되고 그러는 거야. 그런데 자는데 밤새 그 소리가 들렸어." 

 

그리고는 "엄마, 알바할 때는 상대의 태도에 상관 없이 해야겠지? 인사를 안 받아주는 손님은 그냥 안 받는 거겠지? 그럴 땐 너무 일일이 마음을 담아서 인사하지 않아도 되겠지?" 이 말을 듣고 보니, 이건 정말 꿀알바다! 머쓱타드(지금 꽃친에서 쓰고 있는 별칭. 설명 필요 없이 현승이 그 자체이다) 현승에게 모르는 사람에게 소리 내어 인사하기는 성격개조 훈련이다. 돈 내고도 시킬 일이다. 게다가 행동 하나, 마음 하나에 영혼을 담는 (장점이지만 과할 때는 자기를 힘들게 하는) 민감성도 조절해 보는 기회.

 

현승이, 태어나 보니 김채윤의 동생이라 세상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그런 누나를 사춘기로 떠나 보내며 이렇듯 아쉬워 한 적도 있었는데(클릭!). 어느 새 제가 사춘기가 되어 오만 지랄을 다 하...지는 않았지만 엄마 아빠 인내심 테스트를 수도 없이 했다. 한 해 쉬는 '꽃친' 덕인지, 사춘기 끝나가는 덕인지. 둘의 시너지인지, 원조 티슈남의 기백이 살아나고 있다. 

 

채윤이 사춘기 진입 직전까지 온 집안이 미친 놀이터였는데(클릭!)... 그 아이들 어디 가고 집에는 성인 넷이 바글거리고 있다. 아, 넷이 모두 경제활동을 한다!!!! 잘 논 덕에 잘 자라주었다.

 

 

 

 

'푸름이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채윤이 첫 투표, 나의 오랜 기도  (0) 2020.04.15
딸, 여정의 벗 되다  (0) 2020.02.07
축하가 필요한 수험생  (0) 2018.11.26
이김이 필요한 수험생  (0) 2018.10.15
은혜가 필요한 수험생  (0) 2018.10.15



신앙 · 사춘기 · 저자 · 분노 · 슬픔 · 시간 · 정신실


강의 제목을 오래 들여다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제목에 담긴 단어를 곱씹다 풀어 헤쳐본다. 내가 하고 싶은,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정리가 된다. 요즘은 좀 이런 식으로 하고 있다. 분노를 위한 시간, 슬픔을 위한 시간』 썩 마음에 드는 제목을 뽑았다. 통, 하고 튀어 나와 의식 안으로 떨어진 순간, 됐다! 강의 준비 끝났다! 싶었다. 내가 하고픈, 할 수 있는 얘기는 바로 이것이다. 게다가 포스터가 마음에 든다. 


 <신앙 사춘기>의 주요 독자가 이러이러한 이들일 줄 알았다. 예상이 빗나가 저러저러한 분들이 더 크게 호응을 하셨다. 한 편 한 편 구체적 얼굴을 떠올리며 글을 썼고, 상상했던 독자층이 있는데 어쩐지 빗나가고 있다. 생각지 못한 분들께 뜨거운 공감을 받기도 한다. "아니, 이 글을 언제 쓰셨어요? 우리 교회 얘기를 그대로 다 쓴 거 아녜요?" 노 장로님이 하신 말씀인데, 심지어 이 교회는 이단으로 알려진 교회이다.(최근에 배임 횡령 혐으로 징역 3년 형을 받은 목사) 물론 바로 그 교회 개혁을 위해 싸우고 있는 분들이다. 


교회 개혁에 관한 한 직간접적으로 무수한 경험을 했다. 그 경험으로 '신앙 사춘기'를 쓸 수 밖에 없었다. 경험적으로 상상되는 그림이 있다. 내겐 가장 아프고 안타까운 부분이며, '신앙 사춘기'를 눈물로 쓸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교회 개혁의 기치를 내건 건강한 작은 교회에 관심도 애정도 많다. 교회로 인해 고난을 겪고 광야로 내몰린 교인들이 마지막으로 남은 힘을 모아 일군 교회가 아닌가 싶어서 그렇다. 흔한 교회 사태를 겪은 후에 어떤 이들은 기독교 신앙을 떠난다. 또 신앙은 더 절절하되 밝아진 귀와 눈 때문에 어느 교회도 나갈 수 없는 이들도 있다. 자포자기식으로 아무데나 가까운 교회로 가 선데이 크리스천을 자처하기도 한다. 그중 가장 적극적인 선택 중 하나일 것이다. 바라고 꿈꾸는 그 좋은 교회를 우리 손으로 만들자! 이런 교회들에 마음이 간다. 당연히 끌린다. 정말 잘 됐으면 싶다. 교회가 무너진 시대 마지막 희망의 보루로 여겨진다. 그 교회들에서 일어나는 일에 귀가 커진다.

 

그러나 어쩐지 갈수록 우려가 깊어진다. 보란 듯이 잘 되어야(?) 건강한교회가 잘 되고 있다는 얘기를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언론이나 SNS에 비치는 것처럼 건강하지도, 공동체적이지도 않은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된다. ‘건강함을 표방하는 교회들의 아픈 사람을 많이 만나는 탓이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목회자는 물론 어떤 권위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사유하며 교회의 주인 되기로 한 이들이 만든 공동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은혜로, 기도로덮다 악까지 덮어버리는 획일화 된 집단보다는 갈등이 있는 공동체가 더 은혜로울 수도 있다. 갈등이 있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헌데, 그럼에도 나는 건강한 교회의 건강을 묻고, 안녕을 묻게 된다. 자꾸 묻게 된다. 갈등하고 논쟁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다고 교회의 온전함이 거기에만 달린 것은 아니다


 <신앙 사춘기> '건강한 교회 아픈 사람들' 중

이런 분들의 건강, 진정한 의미의 건강을 기도하게 된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공감 독자들을 만나 강의를 하고 조금 놀랐다. '우리 성도들 너무 많이 아픕니다. 정말 치유가 필요합니다' 강의 요청하신 리더들이 수도 없이 하신 말씀이다. 어떻게 아프실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익히 보아온 사춘기 교인들의 흔한 태도가 있지 않은가. 게다가 싸움이 진행 중이며 싸움의 대상은 독재자에 가까운 목회자이니, 이러이러한 긴장, 냉소가 흐르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예상이 빗나갔는데 완전히 빗나갔다. 긴장과 냉소 대신 여유라니, 이런 여유라니!


강의 앞뒤로 나눈 대화에서 일정 정도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여유의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아니, 몇 가지 이유를 찾았다 해도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내가 상상하는 것이 무엇이든 얼굴을 마주한 만남은 항상 상상 그 이상이라고 말하는 편이 좋겠다.  


예상은 빗나갔지만 꼭 하고 싶었던 말을 잘 전하고 왔다. 능력의 종이 안수기도 한 번 한다고 치유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일어날 수도 있다.) 치유를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다른 말로 하면 '성장'을 위해서도 시간이 필요하다. 사춘기 아이가 눈 한 번 감았단 뜬다고 어른 되는 것이 아니다. 엄마로선 속이 터져 미쳐 죽어버리겠지만 할 만큼 해야, 충분히 해야 끝이 난다. 충분히 분노하되 분노의 대상을 명확히 하여 이름 붙이고,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이름 붙여 애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분노를 위한 시간, 슬픔을 위한 시간.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시간, 내게 필요한 시간이다. 




 




'낳은 책, 나온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앙 사춘기>의 이면  (3) 2020.10.23
찌르든 싸매든  (0) 2019.08.11
숨은 신앙 사춘기 님들을 찾아  (2) 2019.07.06
외롭지 않은 신앙 사춘기  (4) 2019.06.13
개정판 정신실  (2) 2019.05.24


작년 11월에 시작한 개소식이 ‘계속식’으로 변신했습니다. 어렵사리 시간 잡아 찾아주시는 분들과 드문드문 계속식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찾으시는 분, 연구소 형편 때문에 약속 한 번 잡기는 정말로 어렵지만요. 개소식이라고 와서 시루떡 먹는 대신 잠시라도 일상에서 물러나 나로 머무는 시간을 기획했었지요. 반복하다보니 개소식의 편하지만 가볍지 않은 수다 주제는 '나에게도 마음이 있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로 모아지는 것 같습니다. 다녀가서 전해주시는 말씀이 짧지만 ‘힐링’의 시간이었다고들 하시니 보람이 있습니다. 실은, 맞이하는 저희에게 힐링의 시간입니다. 더욱 특별한 힐링타임 계속식이 있었습니다.

연구소의 시작은 길게 잡으면 25,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나리쌤이라 불리는 정신실 소장, 별쌤이라 불리는 김하정 연구원이 스물 몇이던 시절에 씨앗이 심겨졌던 것 같습니다. 한 교회 청년부에서 만났습니다. 둘 다 학부 전공 버리고 사람 돕는 일을 직접적으로 하고 싶어 대학원 준비하던 시절에 만났거든요. 가난하고 지질하고, 가진 꿈이란 것이 막연하고 허황되게만 보이던 시절이었지요.

나이 오십 즈음에 문득 돌아보니 그 시절 꾸던 막연하던 꿈이 외형적으론 이루어져 있군요. 꿈은★이루어진다. 심리치료와 상담으로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 수 있었던 두 사람이 마음성장연구소까지 차리게 된 사연에는 ‘신앙 사춘기’가 있습니다. 청년 시절부터 몸을 불사르던 교회, 그 교회가 채워주지 못하는 목마름에 힘겨워진 것입니다. 별쌤의 고백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에 가는데 설교를 듣다보면 그저 ‘혼나는 느낌’인 그런 느낌. 나리쌤의 고백처럼 일상에선 하나님이 보이는데 예배에만 가면 그 하나님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막막함. 둘 다 교회를 떠나왔습니다. 처한 상황이 다르니 한 사람은 몸으로, 한 사람은 마음으로. 

마음의 고향 같은 교회는 떠났지만 하나님을 떠날 순 없어서 둘은 영성 공부에 매진했지요. 자기 하나님을 찾는 지난한 시간이었습니다. 공부한 것에, 경험을 더하고, 거기에 하나님을 찾는 갈망을 더하여 함께 하는 시간 속에 ‘심리’와 ‘영성’에 다리 놓는 연구소를 꿈꾸게 된 것이지요. 꿈은★이루어진다.

이러는 중에도 떠나온 교회에 대한 그리움은 어쩔 수 없습니다. 아픈 마음으로 떠나와 상실감으로 남았지만 우리의 젊은 날 신앙과 열정의 기억이 머무르는 곳이지요. 한때 마음을 나누며 함께 울고 웃었던 이들이 남아 있고요. 바로! 그분들이 연구소에 찾아주셨습니다. 교회 가는 기쁨이 있었고, 공동체의 소망을 맛보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분들이죠. 10년을 훌쩍 뛰어 넘는 시간이 무색하게 즐겁고 따뜻한 시간이었습니다. 연결됨! 못과 못 사이를 가로지르는 저 빨간 실처럼 우리는 정말 연결되어 있습니다.



감이 되겠나?
정신실이 감이 되겠나 말할 때
저도 됩니다.
말하기에 망설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망설이지 않겠습니다.
그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그 친구를 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런 사람들의 친구입니다.
이런 연구원들이 제 친구입니다.
저는 마음성장연구소 소장 감이 됩니다.


상반기 내적여정 세미나 영성과정 있었습니다. 내적여정 마지막 과정입니다. 한 학기 동안 포장지 벗겨진 자신과 만나느라 애쓰신 분들을 위한 특별한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주어는... 흠.. .) 대단한 식사는 아니지만 축하와 격려를 담은 ‘집밥’의 잔치집 버전입니다. 마음으로 준비했습니다.

이런 셀프 공치사를 거침 없이 할 수 있는 이유는 주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고급인력 연구원님들의 작당이었습니다. 평소 먹던 도시락이 아니라 잔치 같은 밥을 준비하자! 길래, 저는(누구일까요?) 반대 했습니다. 안 된다! 좋은 제안이지만 당신들 힘들어서 안 된다. (속으론 ‘돈 없어! 연구소 살림 말아 먹을래?’)

연구원님들 아름다운 제안과 좋은 인맥을 힘입어 맛있고 풍성한 점심식사 했습니다. 제안하고 기꺼이 수고를 아끼지 않고, 마음 담아 차리는 식탁이 누구보다 준비하는 사람 자신에게 기쁨이며 선물인 것을 압니다. 찬사와 격려와 사랑을 담은 선물은 이미 주는 이에게 선물이지요. 지난 몇 개월 여정에 대한 찬사, 세미나 후 홀로 갈 기도 여정에 대한 격려를 담은 연구원 샘들의 마음이지요.

“우리는 영적 경험을 가진 인간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적 경험을 가진 영적 존재이다”

영성이란 무엇인가, 강의 중에 나눈 테이야르 드 샤르뎅 신부님 말씀인데요. 하루하루 밥 먹고 사는 일이 걱정인 인간적 경험, 사랑스런 사람보다 미운 사람 더 많은 인간적 경험, 응답되는 기도보다 거절이 더 많다 싶은 인간적 경험. 이 지질한 경험을 성찰함으로 신비의 문을 여는 것이 영성입니다.

살림 잘 말아먹는 연구원님들 사랑합니다.(ㅜㅜ 너네들... 정말! ❤️)
일빠로 밥 타서 맛있게 먹다 셔터 소리에 놀란 아름다운 님, 사랑합니다. ❤️
상반기 영적 여정 함께 걸어주신 벗님들, 사랑합니다.❤️




영화 <토이 스토리>에 대한 애틋한 정은 일단은 우리 아이들의 성장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3편에서 대학생이 된 앤디가 우디 일행을 떠나는 장면, 어마어마한 상실감으로 보았다. <인사이드 아웃>에서 빙봉이 망각의 심연으로 떠밀려 내려갈 때의 안타까움과도 비슷한 감정이다. 그러니까 채윤이 현승이가 어렸을 적 그렇게 애지중지 하던 와우와우 수건, 곰돌이 이불에 대한 감정이다. 아이들은 잊지만 엄마는 잊을 수 없는, 아기 적 아이들의 애착에 대한 애착 같은 것. 쓰다보니 단지 아이들 유년만은 아니구나 싶다. 망각의 심연으로 가라앉은 내 유년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여하튼 현승이 어릴 적, 엄마 중독증상이 심하던 시절에 "너는 내 친구야. 영원한 친구야" <토이 스토리> 주제가를 어깨동무 하고 부르던 날이 있었다.


가령 이런 -> 무촌에 가까운 일촌끼리의 우정 


개봉 하자마자 <토이 스토리4>를 가족들과 함께 봤다. 보니에게 간 토이들이 어찌 되는가, 아련한 설렘으로 남몰래 두근두근. 사전 정보 없이 약간 넋을 놓고 보다 목에 가시가 하나 걸렸다. "쓰레기" 폐품으로 만든 토이 '포키'가 등장한다. 보니가 현재 시점 가장 사랑하는 토이 등극이다. 사랑받는 토이로서 자신을 인식하질 못하는 포키이다. '사랑받는'은 고사하고 '토이' 정체성을 받아들이질 못한다. 쓰레기, 쓰레기라며 틈만 나면 쓰레기통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이다. 생선가시처럼 목에 걸린 건 '쓰레기'인데, 영화 때문이 아니라 한참 전부터 식도 부근에 걸려 소화되지 못하는 단어이다. 어쩌다 귀에 꽂힌 '쓰레기'라는 말이 목에 걸려 다른 무엇도 섭취하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통 먹질 못하니 마음의 힘이 다 빠져나가 이것도 저것도 다 포기하고 싶은 심정에, 점점 쓰레기가 되어 가는 찰나. 영화가 무슨 작정이나 한듯 쓰레기, 쓰레기... 한다.


토이 정체성이 확실한 우디가 이걸 보아 넘길 리 없다. 그 자신 최애 장난감의 영예를 잃고 벽장에 처박히는 존재일지언정, 주인 보니의 사랑받는 토이 '포키'를 지켜내는 우디. '너는 쓰레기가 아니야, 사랑받는 장난감이야!' 토이의 존재 의미는 주인 아이의 기쁨이 되는 것. 주인의 사랑받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이의 행복한 유년을 지켜주는 것. 1,2,3 편은 그 정체성에 눈물겹게 충실한 우디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랑받는 자아' 어디서 많이 듣던 말 아닌가. 성육신한 예수님을 향해 하늘로부터 들린 명확한 메시지 너는 내 사랑받는 아들'이다. 인간 예수님은 내내 이 정체성에 부합하는 삶을 사셨다. 사랑받는 자로서 아버지로부터 들은 메시지를 전하고, 자의로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여하튼, 쓰레기가 아니라 사랑받는 토이로서의 정체성을 일깨우려는 우디의 노력은 눈물겹다.


 

1편인가, 2편인가. 버즈의 등장 스토리가 생각났다. 버즈는 '우주전사' 정체성으로 미친 애처럼 등장했다. 지구인지 우주인지를 제가 구할 수 있다며. 아, 이때도 우디는 '너는 우주전사가 아니야. 앤디의 사랑받는 최신식, 최애 장난감이야'를 일깨우려 애썼다. 물론 질투 같은 복잡한 감정라인도 있었고. 이 스토리가 떠올라 넷플릭스로 혼자 <토이 스토리> 1,2,3을 정주행 하고 말았다. 


도덕적, 종교적 교훈으로 감상평 마무리 하는 것 촌스러운 줄 아는데. 아픈 영혼의 두 증상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자기비하와 자아팽창. 빛도 있고 그림자도 있고, 칭찬 받지만 욕도 얻어 먹고, 성공하지만 실패하는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을 마주하기 싫은 아픈 영혼이 도피하는 곳이다. 쓰레기이거나 우주전사이거나. 한 번 실패로 쓰레기가 되고, 한 번 성공으로 세상을 구원할 전능의 전사가 된다. 대부분의 일, 대부분의 나날 동안 그 사이 어디를 오가는 존재임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더 큰 힘, 더 큰 존재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실존을 모르는 토이들처럼 말이다. 고질적인 내 지병과 병증이다. 모 아니면 도, 전부 아니면 제로. 하나 실패했다 싶으면 모든 걸 잃은 것처럼 나를 팽개치고 싶은. 강하거나 약하고, 착하거나 나쁘고, 현명하거나 어리석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렇게나 어렵다. 


한 열흘 우디와 포키와 버즈를 가슴에 품고 다녔더니 목에 가시처럼 걸렸던 것이 쑥 내려간 느낌이다.



'인간의 얼굴을 가진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 교황 : 둘, 그 사이 또는 너머  (2) 2020.04.10
릴레이 독서  (0) 2020.02.23
다시, 책만 보는 바보  (2) 2019.06.30
지금 이 순간, 분별  (6) 2019.03.02
가버나움 : 왜 하필 '나'는 아닌가  (0) 2019.02.02



수요일 오후 꿈모임에 ‘고양이’가 등장했습니다. 고양이는 꿈, 특히 여성의 꿈에 의미가 큰 상징입니다. 고양이는 독립적인 동물이죠. 페르시안 고양이의 도도함이 절로 떠오릅니다. 누구의 인정이나 허락이 필요치 않은 독립적 존재로서의 여성입니다. 여성의 꿈에 고양이가 등장했다면 독립성, 단지 심리적 독립이 아니라 영성적 독립을 촉구하거나 안내하는 것일 겁니다. 이 모티브로 ‘여성성’에 대해 풍성한 나눔을 했습니다. 어쩌면 그리도 다를까요. ‘여성성’에 대한 이미지가 천차만별입니다. ‘다름’이 ‘고유함’으로 다가옵니다.

!!!

바로 그 앞의 오전 꿈모임에선 이런 꿈을 들었습니다. 어린 여자 아이를 씻기고 특별히 사타구니를 잘 닦아주려는데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모티브로 ‘타자화 된 여성성’을 나눴거든요. 남편, 남성, 아버지의 눈으로 본 나의 몸. 그리고 여성성. 결국은 한 번쯤 당해 본 성추행의 기억입니다. (네, 여성이 모이면 셋 중 하나는 성추행, 다섯 중 하나는 성폭력의 경험입니다.) 안전한 곳이기에 솔직하게 나누고 발설하는 것으로 이미 치유의 강물이 넘실거립니다.

!!!!!!

전날, 화요일 밤 꿈에선 ‘초경’의 경험이 소환되었습니다. 초경 즈음, 2차 성징을 맞은 자신의 몸을 기쁘게 환영해본 여성은 많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성적인 존재로 여성의 몸은 죄와 수치심 그 자체라고 (도대체 누가! 무엇이!) 이미 규정 당하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한 달에 한 번 월경이 찾아오면 그것을 숨겨야 하고, 생리대는 감춰야 하고, 행여 옷이 묻었다면 큰일이 난 것입니다. 월경을, 월경하는 몸을 숨기고 부끄러워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소환된 초경의 기억으로 여성성의 경험을 새롭게 바라보았습니다.

!!!!!!!!!!

놀랍습니다! 연구소 꿈모임이 일주일에 세 번인데, 연달아 같은 주제입니다. 여성, 타자화 된 여성의 몸, 여성성. 화요일 저녁으로 시작하여 수요일 오후 ‘고양이’라는 상징을 품고 집으로 돌아왔지요. 연구원 중 한 분이며, 오후 꿈모임의 멤버인 쌤이 혼자 한 달 대만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대만에서 사진이 하나 단톡방에 올라옵니다. 핑크색 우산을 쓴 고양이 사진입니다. 헐, 대박, 흐억.... 멤버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쌤, 대만에서 득도하셨나요?” 연구소에 몰카 설치하고 가셨어요? 참 놀랍습니다.

!!!!!!!!!!!!!

목요일 저녁엔 전부터 계획된 박정은 수녀님의 ‘여성과 영성지도’ 특강에 참석했습니다. 꿈모임 식구들 여럿이 함께 했지요. 꿈과 영성생활 집단여정을 통해서 이미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얘기해주셔서 자부심 뿜뿜하며 살짝 놀랐지요. 아니, 워크숍 주제를 주시는데 ‘여성의 성’입니다. 참석한 우리들 “예습 했잖아요. 우리 어제요....” 이 지점에선 놀라서 놀랍지도 않은 지경이었습니다.

!!!!!!!!!!!!!!!!!!!!

글로 읽으시면 뭐 대단한가 싶으실 텐데. 경험한 사람들에겐 놀라운 신비입니다. 신비란 말로 다 설명해낼 수 없는 것이니 여기까지 하겠습니다만. 여성, 여성적인 것, 여성성의 치유와 구원은 연결되는 것, 발설하는 것, 누가 누구를 가르치지 않고 함께 걸어가 주는 것에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의 진정성을 몰라준다! 분통 터트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 진정성을 알아달라는 절규가 절절해지는만큼 진정성은 그 진정성에서 멀어지는 것 아닌가. 타자에게 피력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내 안의 진정성을 스스로 묻고 의심하고 성찰해야 할 것이다. 스스로 드러나 타자에게 다가가는 것만이 진정한 진성성이지 싶다. '제발 나를 믿어달라'는 사람을 신뢰하게 되지 않는다. 상대에게 가닿지 않는 진정성이란 이미 틀려먹은 진정성이고, 진정성을 우기는 것이 곧 자기방어임을 깨달았을 때, 정말 큰 자유를 느꼈다.  


이 지점에서 늘 떠오르는 청년 시절 일화가 있다. 청년들과 눈만 마주치면 "우리 아내와 상담해라. 밤 12시에 전화해도 된다" 하시던 교회 어른이 계셨다. 결혼 이후엔 젊은 부부에게 그러셨다. "우리 부부는 여태 부부싸움을 한 번도 안했다. (당시 아마도 60대). 결혼생활에 어려움이 생길 때 언제든 우리 아내와 상담해라."라고 하셨다. 상담은 커녕 일상적 대화를 위해서도 찾고 싶지 않았다.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 마음을 얻는 일이다. 에로스 사랑을 물론이고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 어느 어른을 존경하는 마음. 그것은 애써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정성의 진정성을 내 편에서 설득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께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빌라도가 말했다. "말하지 않을 작정이냐? 나는 너를 풀어 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요 19:9-10)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 (사 53:7)


진정성의 숙명은 자기변호가 불가한 고결함에 닿아 있음이다. 예수님처럼. 진정성은 결국 오해로 버림받는 것으로 증명되어야 하는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픈 이유 역시 자기 정당성을 증명할 언어를 스스로 잃기로 작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도, 예수님 닮은 아름다운 사람들도 그러하다. 내 혀 끝에 매달린 수많은 해명과 변명의 말들, 내놓지 못한 그 말을 밀어내지 못한 억울함으로 빨라지는 심장박동. 내가 아직 나의 선생님 예수님의 발끝도 미치지 못함이다. 


김정숙 여사의 파란 브로치를 두고 '멍멍'하는 소릴 들었는데, 저 사진을 뉴스에서 봤다. 해명과 변명의 말대신 몸으로 다가가 눈을 맞추고 손 내미는 문대통령 부부, 두분의 행동으로 감동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진정성이 빛나는 순간들이었다. 이렇듯 비루한 해명을 해야 하는, 진정성을 증명하는 오욕이 안타깝다. 멍멍 소리에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 보유국 국민이라 참 좋은데, 되돌려 드릴 수 있다면 싶었다. 진정성을 해명할 필요 없는 자리, 양산의 '집'으로 말이다.      

 



'리멤버 04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심상정  (2) 2020.04.15
에로틱 파워  (3) 2019.10.05
벌써 세 번째 봄이네요  (2) 2017.04.13
세 번째 봄, 열일곱의 노래  (0) 2017.04.03
전도  (0) 2016.12.20



탤런트 윤유선과 고3 때 같은 반이었어요. 저는 기억하는데 그는 기억하지 못하더군요. 고3 때였고, 그는 연예인이었고, 예체능 입시 준비로 학교도 많이 빠졌죠. 그럼에도 금세 추억여행 수다로 달렸습니다. 학교 앞 떡볶이집 ‘하얀집’얘기. 무엇보다 담임 선생님! 첫 발령 받으신 젊은 남자분이었는데 한 번씩 기타 들고 들어오셔서 ‘사랑의 바람’ 같은 노래를 불러주셨으니! 반 애들이 죄다 심쿵심쿵이었지요. “우리가 그때 선생님 말고 서로에게 관심이나 있었느냐!” 하며 웃었지요.

진행자와 출연자로 한 시간 마주보고 촬영 했습니다. 마치고나서 “장난 가득한 눈동자 보니 이제 기억 난다”고 했습니다. 장난 많이 치고, 선생님 놀리던 친구!... 였었어요. 제가.... 그러고 보니.

<신앙 사춘기>에 담은 이야기로 방송출연 했습니다. 연재했던 매체 ‘뉴스앤조이’를 모르거나 모르고 싶은 분들께 다가가는 기회가 될 것 같아요.  신앙 사춘기, 가나안 교인 같은 이름조차 붙이지 못하고 내적 갈등에 휩싸이신 분들. 겉은 착한 교인으로, 내면에선 팥죽 끓는 심정으로 지내시는 분들께 닿는 글이 되었으면 싶었는데요. 아프지만 따뜻한 수다로 다가가면 좋겠네요. 




'낳은 책, 나온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찌르든 싸매든  (0) 2019.08.11
분노를 위한 시간, 슬픔을 위한 시간  (0) 2019.07.24
외롭지 않은 신앙 사춘기  (4) 2019.06.13
개정판 정신실  (2) 2019.05.24
<신앙 사춘기> 출간 펀딩  (10) 2019.04.30



언젠가처럼 다시 '책만 보는 바보'로 살고 있다. 정해진 일상을 돌리는 것은 일도 아니고, 아무렇지 않고 잘 돌리고 있지만 뭔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책만 집착하여 사는 느낌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휴대폰의 시간을 확인, '오늘은 무슨 요일, 더 자도 될까'라고 생각하자마자 벌떡 일어난다. 식구들 일어나기 전에 조용한 '혼독(혼자 독서)' 시간을 확보해야지 싶어서다. 늦은 시간 네 식구가 다 모여 야식을 먹고, 떠들떠들 할 때도 '빨리들 들어가 자라, 빨리 들어가 자라' 속으로 주문을 외운다. 역시 '조용한 혼독'의 시간에 그 중독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해야할 일을 다 하면서 책을 읽는데도 '책만 보는 바보'라고 나를 인식하는 것은 일종의 무기력감 때문이다. 그래, 내가 바보라는 느낌이 들고 뭘 잘하지 못한다는, 못할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책을 내고 책과 관련된 리워드 행사를 마치고 온 허탈감 때문일까. 꼭 그것만은 아니다. 생각보다 책이 인기를 얻지 못해서? 이유가 되기는 하지만 그것만도 아니다. 연구소 운영에 대한 부담감, 그것도 크지만 그것만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낮은 자존감' 상태라 할 수 있다. 


낮은 자존감의 주증상(어쩌면 주요 원인)은 글을 쓰지 못함이다. 블로그에 사진과 함께 두어 문장 끄적이다만 비공개 글이 수두록하다. 글을 엉덩이로 쓴다는 말이 있듯이 발행할 글이든 혼자 볼 글이든 고통을 감내하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당연히 그 고통보다 큰 보상을 기대할 때 엉덩이 붙이고 앉아 인내하게 된다. 나는 무슨 보상을 바라고 글을 쓰지? 40여년 혼자 보는 일기를 썼고 10년도 넘게 블로그를 했으니 독자의 인정과 칭찬이 주요 보상은 아닐 텐데. 글쓰기 강의할 때는 '나를 나로 세우고, 나를 지키고, 나다운 나로 살게 하는 것'이 궁극적 보상이 되었다고 호기롭게 떠벌였다.


책만 보는 바보로 산다는 무력감에 빠진 건 글이 써지지 않아서 인가보다. 블로그 글은 물론이고 마지막 일기를 쓴 날이 언제인지 모른다. "아예 쓰지 못하는 것보다 후지게 쓰는 것이 두렵다"느는 테오도르 칼리파티데스와 달리 무지랭이 얼치기 작가인 나는 "후지게 쓰는 것보다 아예 쓰지 못하는 것이 가장 두렵다."라고 저저저저번 포스팅에서 말했었다. 생각해 보면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도 멈추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었다. 일이 잘 풀릴 때도 썼다. 그러니까 글이 써지지 않는 것은 외적인 성공과 실패, 심지어 그에 대한 정서 상태에 영향받지 않는다. 뱃속 저 깊은 곳에서 힘이 쭉 빠져나간 상태로 살고 있다. 이것이 단서가 되지 않을까. 나 따위가! 나 따위가! 나 따위가 뭘 할 수 있겠어! 이런 말이 들리는 것 같다. 힘이 빠져나간 뱃속에서 이런 벌레들이 조용히 기어다니고 있나. 그래서 '낮은 자존감'이란 말이 툭 튀어나온 것인가.


어쨌든 속시원히 설명되지 않는 '바보' 상태로 살고 있다. 책만 보는 바보. 바보랑 놀아주는 책이 있어 얼마나 고마지 모른다. 바보에게 즐거움을 줬고, 주고 있는 요즘 책들을 모아 촬영을 했더니! 모두 여성 저자이다. 마리 루틴와 어슐러 르 귄 같은 분은 넘사벽 같다. 그런 글, 나도 참 쓰고 싶은데. 레이첼 에반스는 작고 후에 읽게 되었다. 저자에 대한 아무 정보 없이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본 일 년>이란 책 제목에 선입관이 생겨 더 알아보지 않았었다. 작고 후 남편 추천으로 <교회를 찾아서>를 읽었는데 와, <신앙 사춘기>는 정신실판 <교회를 찾아서>였네! 정말 멋진 크리스천 페미니스트 여성이다.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본 일 년>은 딸 채윤이가 빠져 읽고 있다. 여섯 권의 책, 모두 소중하다. 이대로 (책만 보는) 바보로 산다해도 좋을 만남이다. 



사회문화적으로 설정된 한계로 어떤 관계는 더는 깊고 진실한 관계로 나아갈 수 없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신산한 삶을 살아오신 탓에 몸과 마음이 많이 무너지신 시어머님을 돕고 싶어 많은 것을 했다. 한방 양방 가릴 것 없이 어머님이 꽂히신 병원, 상담, 치유 피정 등을 모시고 다녔다. 배우지 못한 결핍감을 안고 살아오신 세월이라 자서전을 내드리면 치유될까 싶어 구술을 기반으로 책을 만들어 드리기도 했다. 거기까지. 거기까지 하고 손을 놓았다. 내가 어떻게 한다고 어머님이 변하시는 것은 아니다! 좌절과 분노도 있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그 사회적 간극. 할만큼 했다 생각하고 거리를 둔 지 몇 년이다.


주일 저녁, 나는 강의로 함께 하지 못하고 아이들과 남편이 어머님께 다녀왔다.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왔는데 한 장 한 장 넘겨보다 울컥했다. 어른처럼 큰 몸이 된 아이들. 고목에 매미처럼 손주 어깨에 매달린 어머님이 너무도 작아 보인다. 아이들 어릴 적 풀타임으로 일할 때 먹이고 씻기고 기저귀 갈아 채우며 키우신 할머니 엄마이다. 세월이 이렇듯 존재의 사이즈를 바꿔 놓았다. “어머니, 애들 막 떠났죠? 저는 사진 봤어요.” 정말 오랜만에 어머님과 편안하게 통화했다.




'꽃보다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년, 자발적이며 창조적인 교회  (0) 2019.08.17
다름, 달음  (0) 2019.08.06
부럽다고 지는 건 아니라는 거  (0) 2019.06.21
여자들의 떡  (0) 2019.05.06
키 크는 약  (0) 2019.03.25



블로그 포스팅이 뜸한 이유는 다른 곳에 차린 살림에 마음을 빼앗기는 탓입니다. 사회적 자아로 사는 페이스북 개인 계정, 영혼을 많이 갈아 넣은 살림집 연구소 페이지 계정 등이지요. 그러나 돌아와 발뻗고 쉴만 한 집은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 블로그입니다. 연구소는 따로 홈페이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검색하고 찾으시는 분들이 찾다찾다 유령 연구소냐, 어딘가에서 봤는데 두 번은 못 찾겠다 하시네요. 연구소는 페이스북에 '상처 입은 치유자들'로 찾으시고, 카카오톡플러스친구에서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로 찾으시면 되겠습니다. 딴집 살림 어떻게 살고 있는지, 최근 소식 알려드릴까요.  



♠ 가고 싶지만 가고 싶지 않은 세미나 ♠

심화2과정 하루 여정 마쳤습니다. 차분하게 반가움 나누며 시작. “지금 마음이 어떠세요?” 한 마디 질문 앞에 누구랄 것 없이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을 돌아보면 솔직하게 나누는데요. 거의 비슷한 내용.

오늘 여기, 오고 싶지만 오고 싶지 않은 마음. 설레지만 부담되는 곳입니다. 일상에서 쓰는 사회적 얼굴은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 있어도 된다는 것을 알기에 편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마주하는 일이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님을 아니까요. 그럼에도 결국 둘러 앉았습니다. 여정을 이끄는 더 역시 세미나 있는 날 아침마다 느끼는 양가감정입니다.

여정의 실전편이라 할 수 있는 내 마음의 ‘생각’과 ‘감정’을 톺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에니어그램 내적 여정이 아니라 마주 앉아 들어주고, 자신의 이야기 들려주는 분들이 가장 투명한 거울인 것은 변함 없습니다. 함께한 벗님들 감사합니다.

영성과정 하나 남겨두고 있습니다. 1단계 들으신 분은 중간과정 못들으셨어도 신청 가능합니다.

[영성단계]

+ 일시 : 7월 13일(토) 오전 10시 ~ 오후 5시
+ 장소 : 신촌 나음터 (2호선 신촌역),
+ 비용 : 12만원/ 1일
+ 신청 링크 클릭 


♠서로가꿈 : 커플/부부 관계 세미나♠

“평생 사랑하며 살아갈 우리 사이, 잘 가고 있는 걸까?”
정기 건강검진 받듯 잠시 멈춰 점검해보고 싶은 커플, 건강한 관계를 꿈꾸는 커플을 초대합니다. 두 사람의 관계를 Prepare/Enrich 검사에 기반하여 돌아보는 시간이랍니다. 사랑을 가꾸어 가며 서로의 성장을 지향하기 위해 무엇에 주목해야 할지 짧은 강의와 이야기 나눔을 통해 알아봅니다.

+ 일시 : 2019년 6월 29일(토) 오후 2시-4시
+ 장소 : 마음성장연구소 신촌 나음터 (마포구 서강로 142 서일빌딩 5층)
+ 대상 : 커플(부부) 3~5쌍 선착순 마감
+ 비용 : 총 7만원/커플 (온라인 검사비 2만원 포함)
+ 신청 링크 클릭 

+ PREPARE/ENRICH : 결혼 만족에 대한 10개의 핵심 영역을 과학적으로 검증한 유일한 검사이며,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커플관계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관계를 세워가는데 도움을 줍니다.

+ 후속 워크샵 “서로가꿈 플러스(+)”도 곧 개설됩니다.😄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카페가 있습니다. 카페로 이동 →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림 말아 먹는 연구원의 친구  (0) 2019.07.14
여성적인 것의 구원, 치유  (0) 2019.07.12
심리학의 끝, 우리의 시작  (2) 2019.06.18
심리학의 끝, 우리의 끝  (0) 2019.04.07
연결이 치유다  (0) 2019.03.31


한결이네 가족이 과테말라에서 날아와 분당까지 와주었다. 남미에서 남서울까지다! 얼굴을 마주하니 상상했던 것보다 더 반갑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잘 지내고, 행복하여 넉넉해진 세 식구의 마음을 듣는다.  평양면옥을 찍고 바로 옆 카페로 갔는데. 몇 번 찾았던 카페, 그저 커피 참 잘 볶는 집일 뿐이었는데 새로운 장소가 되었다. 카페 벽에 걸린 그림들이 과테말라 식구들 눈엔 익숙한 것들. 과테말라 이야기에 푹 빠지기도록 무엇이 이끌고 등떠밀어 들어간 공간 같았다. 2차도 아쉬워 북카페 같은 우리집 거실로 자리를 옮겨 어른들끼리, 아들들끼리 긴긴 수다가 끊이지 않는다.


사는 게 원래 그런 것인지. 사람들 만나 나누는 얘기는 힘들고 어려운 얘기가 대부분인데 오랜만에 다른 대화의 즐거움이다. 헤어져 남편과 이구동성으로 같은 말을 했다. '부럽다. 부러운데 정말 좋다. 잘 지내시는 얘기 듣기만 해도 내 마음이 좋다.' 누군가 잘 되는 것이 부럽고 그 부러움은 곧장 나의 불행이 되는 것이 흔한 감정의 흐름이다. 그러니 부러우면 지는 것이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다. 뻔한 이 감정 라인을 심리학의 실험 연구가 하릴 없이 증명을 한다. 나와 겹치는 특성이 적은 사람이 잘 되는 일에는 별로 영향받지 않는데, 특성이 겹칠수록 질투로 인한 고통이 크다는 것이다. A그룹, B그룹, 실험군, 대조군... 실험 내용을 늘어놓을 성의는 없다. 


실험 결과도, 보편 진리를 담지한 속담도 설명해내지 못하는 경우는 있는 것이다. 특성과 처지가 우리와 많이 비슷한데, 내 처지와 영 다른 좋은 것을 가진 이 가족이 뼈저리게 부럽지만 그게 그리 고통스럽지 않다. 늘, 누구에게나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질투와 시기심으로 치자면 금메달까진 아니어도 눈감고 동메달 정도는 딸 수 있는 실력이다. 헌데 한결이네 소식은 어쩐지 부럽고도 좋다. 좋고 좋다 슬퍼지기도 하니 그리 깔끔한 감정은 아니지만 참 좋다. 며칠의 시름을 잊을 만큼 과테말라 이야기가 긍정 에너지를 주니 모처럼 '감사하네요!' 내지는 '하나님 은혜'라는 말이 목에 걸리지 않고 나왔다. 카페의 다른 자리에 앉아서, 집에 와서는 방에 박혀서 소리 안나는 얘길 나누는 아들들도 보기 좋고. (아들들 카페 씬은 도촬)


부럽다고 꼭 지는 건 아니다. 부러워서 함께 이기는 수도 있다.



'꽃보다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름, 달음  (0) 2019.08.06
바뀐 사이즈  (0) 2019.06.29
여자들의 떡  (0) 2019.05.06
키 크는 약  (0) 2019.03.25
이우 청년 북클럽  (2) 2019.02.17



현승이는 전 종류를 싫어하지만. 딱 한 장 분량의 부추전 반죽을 치워야 하겠고. 아침으로 줄 게 딱히 없기도 하여. 전을 부쳐서 달달한 오리엔탈 드레싱을 뿌리고 포크와 나이프를 함께 내놓으며 "오리엔탈 피자 스테이크야!" 하니 말을 못 하고 처묵처묵 하였다. 



냉장고 앞에만 서면 죄책감이 밀려오는 것은 한 줌 씩 남은 식재료를 두고두고 간직하다 결국 음쓰로 버리고마는 범죄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내탓만은 아니다. 김씨 일가의 짧은 입들 탓이다. 로제 파스타 먹고 싶다고 노래를 하는 채윤이를 위해서(라는 미명 하에) 냉장고에 남은 로제파스타 소스, 냉동실의 떡볶이 떡, 주말에 먹고 어정쩡하게 남은 통삼겹살을 어떻게 어떻게 대동단결 시켜보았다. "구운 삼겹살을 곁들인 로제 떡볶이야!" 딸아들이 감탄하며 먹었다. 



우린 음식이 아니라 그럴듯하게 지은 '이름'을 먹는 건지 모른다.


'음식, 마음의 환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마음 내가 아는 요리  (0) 2019.08.25
오리 빨간 국물 예기치 못한 떡볶이  (0) 2019.08.22
남자들 취향  (2) 2019.06.08
연어장 덮밥  (0) 2019.02.03
저격 취향 국수 간장  (2) 2018.12.1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