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년들과 에니어그램 내적여정 세미나로 함께 했습니다. 꽃망울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토요일, 오후부터 저녁까지 함께 했습니다. 청년이면 그냥 마음이 가는데 교회 문제를 겪고 있는 청년들이라니 지방이지만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쉬는 시간에 한 청년이 질문을 해왔습니다. 다가와 말을 떼는 표정만 봐도 질문의 무게가 가늠 됩니다. 조금 울 것 같은 긴장감이 바로 느껴졌습니다.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강의 내용에 수긍이 되기도 한답니다. 무의식이나 인간의 심연에 대해 일정 정도 동의 하는데, 자신이 가진 기독교적 인간관과 충돌할 때 힘들다는 것입니다. 내용인즉, 무의식과의 대면입니다. 끝없는 자기분석의 요구입니다. (제 에니어그램 강의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성찰'을 강조하고 하지요. 치열한 자기성찰을 강조합니다. 각 유형의 자아상 너머 무의식적 집착과 회피를 마주하라고 하지요.)

무슨 말인지 딱 알아들었습니다. 과연 정신분석에서 요구하는 끝없는 자기분석이 답이냐, 하는 말이었지요. 끝없는 자기분석, 답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린 것처럼 기도하고, 모든 것이 내게 달린 것처럼 노력하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치열하게 자신을 돌아보되 동시에 늘 그분께 내어맡겨야 하는 것이 기독교 영성입니다. 스캇 펙의 책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여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격이 형성된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는 것은 내적 여정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에니어그램 심화과정은 그것을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하지만 어떤 상처와 결핍으로 어떤 문제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 는 것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치명적인 상처 속에서 왜 어떤 사람은 저렇듯 빛나는 아름다움을 일궈냈는가, 이지요. 저는 내적여정 안내를 하면 할수록 그 지점에 마음이 머뭅니다. 치열한 자기분석 필요해요. 열심히 하세요. 하지만 심리학의 끝과 우리의 결론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네, 저는 진정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저의 교회에 박득훈 목사님께서 설교자로 오셨습니다. 니체의 말을 인용하셨습니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 싸움 중 스스로가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볼 것이기 때문이다."

심연을 마주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고난을 통해서나 얻을 수 있는 태도이지요. 니체의 말처럼 심연만 들여다보다가는 내 그림자에 내가 먹혀 버릴 지도 모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하늘을 우러러 봐야 승리한다!”였습니다. 심연을 한 번 들여다봤다면 하늘을 두 번, 세 번, 열 번 올려다봐야 자기혐오 또는 자아팽창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적여정은 그런 것입니다. 자기분석을 위한 세미나가 아니라 치열한 성찰과 자기분석의 노력을 하다 순간순간 그 모든 걸 내려놓고 하늘 아버지와 연결되는 힘을 기르는 여정입니다.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의 내적여정 세미나는 그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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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먹고 양치질을 하려다 덩그러니 꽂힌 그의 칫솔과 눈이 맞았다.

헤 벌어진 모양이 그의 늘어진 런닝셔츠 같았다.

울컥 뜨거움이 밀려 올라왔다.


칫솔 떨어진 거 체크하고 사다 놓을 줄은 알아도 쉽게 바꿔 쓸 줄은 모르는 사람.

사다놓기 무섭게 새 것 좋아하는 두 여인이 바꾸고 또 바꾸는 사이

여전히 헤 벌어진 채로 꽂혀 있는 그의 칫솔.


새 칫솔을 하나 뜯어 꽂아 놓았다.

새 칫솔도 어쩐지 헤 벌어진 낡은 칫솔처럼 보이니 이건 무슨 조화냐.

허세를 모르는 주인을 벌써 닮은 것이냐.


그가 내게 주는 사랑은 날마다 새로운데, 

그의 칫솔은 새 것을 꺼내 놓아도 낡아 측은하니 양치질 하는 손이 느려지고 느려진다.

그의 오늘이, 그의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길 기도하다 내 이가 다 닳겠네.

아직 쓰지 않은 그의 새 칫솔을 오래 들여다 보며, 오래 양치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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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엄마 아빠가 모처럼 긴 식탁 수다를 이어가고 있었다. 

주제는 '기도'였다.

안 듣는 척 옆에 앉았던 현승이가 깜빡이도 안 켜고 끼어들었다.


그런데 뭐 주세요, 뭐 주세요, 이렇게 해주세요, 저렇게 해주세요,

이런 기도는 잘못 된 거 아냐?


아, 뭔가 신앙적 성숙미 뿜뿜 풍기는 이 느낌.

왜애? 그게 왜 잘못된 기돈데?


아니, 그러면 하나님이 안 들어주시는 거 아냐?

막 뭐 주세오, 대놓고 말하지 않고 뭔가 쫌 돌려 말해야 잘 들어주잖아.

뭐, 나는 괜찮은데 당신 뜻대로 해주세요, 이런 식으로.


천잰데!

모태 바리새인의 아들답구나!


#2


현승이 베이스기타에 입문하였다. 방에서 딩딩디딩딩 하다 툭 튀어 나왔다.


엄마, 엄마는 찬송가 말고 CCM 같은 거에서 좋아하는 곡 있어?

좋아하는 곡이 워낙 많아서. 음, 지금 생각나는 건 '오 신실하신 주'

뭐야, 자기 이름 들어갔다고 좋아하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 그 찬양 가사가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이렇거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들 얼굴에 냉소의 빛이 어른어른. 

그 입에서 나올 말이 듣기 싫어 선수를 친다.)

물론! 하나님이 자주 실망시키시지. 현실은 찬양 가사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실망했다고 한 것도 결국 나중에 보면 그닥 실망할 것도 아니었더라고. 다른 뜻으로 더 좋게 된 것고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생각지 못했던 것이 있더라고. 음냐음냐, 횡설수설, 횡횡설설수설수설, 그렇다는 거야.

(공감 1도 안 되는 표정)

그런데 신실하다는 게 무슨 뜻이야? 성실하다는 거야?

성실한데, 변함 없이 성실하다는 거야. 


그리고 설거지 하며 오토리버스 플레이어가 돌아간다.

하나님 나를 한 번도 실망시킨 적 없다는 것은 진실, 매일매일 그분께 실망하는 것도 사실.

믿어져서 부르는 건지, 안 믿어져서 더 부르는 건지.

믿음의 찬양인지, 불신앙의 찬양인지 자꾸 불렀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자칭타칭 일기 쓰다 된 작가이다.

성덕, 성공한 덕질이라고도 한다.

글쓰기의 시작은 부조리였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맨몸으로 겨울바람을 맞듯 마주한 부조리한 어른들의 세계였다.

일기 쓰다 작가가 된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은 일기 쓰다 치유가 되는 일이었다.

썼다. 부조리를 느낄 때마다 썼다.

목적 없이 썼다.

쓰지 않으면 달리 고통을 해소할 방법이 없어서 썼다.

달리 할 바가 없어서 선택한 그 일이 바로 고통을 치유하는 명약이 되었다.


다시 시작한 치유 글쓰기 모임이 4회기, 벌써 반이 지나간다. 

매력적인 여성을 발견했다.

상상 불가의 폭력 속에서 자란 이가 어쩌면 저렇게 빛나고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그 어마어마한 폭력 속에서 자기 빛을 잃지 않고, 반짝이는 저 여인은!

한 회기 한 회기 지나며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는 썼다. 

자기 고통을, 이름 붙여지지 않는 고통을 썼다. 

세상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 테니, 쓰는 나를 보는 내가 들어준다는 식으로 썼을 것이다.

생존의 필살기는 '쓰기'였다.


아, 나도 그랬던 거구나!


공선옥 작가도 그랬다.

어린 시절 친구들의 놀림과 따돌림을 받았단다. 

그것도 서러운데 선생이 놀리는 아이들 편을 들며 차별하니 가난하고 무력한 아이는 무엇에 기대랴.

기댈 바 없는 아이는 결심했다

너희들 다 글로 써버릴 거야!    


내가 아는 가장 멋진 여성 중 하나인 록산 게이도 그랬다.


시간이 생기기만 하면 글을 썼다. 아주 많이 썼다. 어린 소녀들이 잔인한 소년과 남자들에게 고문을 당하는 어둡고 폭력적인 이야기들을 썼다. 내게 일어난 일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어서 똑같은 이야기를 천 가지의 다른 방식으로 썼다. 큰 소리로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목소리를 부여하면 마음이 안정되었다. 목소리는 잃었지만 언어는 남아 있었다.

                                                                                                                                                  - 헝거록산 게이

젊은 시절에 그랬었다.

한낮의 고통이 클수록 밤을 기다리는 위안이 강렬했다.

집에 가서 쓸 수 있어. 집에 가서 쓰면 돼.

그리고 집에 가 식구들이 잠든 밤에 썼다. 쓰고 또 썼었다. 


뉴스앤조이에 연재하던 <신앙 사춘기>를 책으로 엮기 위해 글을 몇 편 더 쓰고 있다.

<신앙 사춘기> 연재는 그냥 연재글이 아니었다.

10여 년의 여정을 그대로 재경험 하는 일이었다. 

오래 농익은 분노에 성찰 한 스푼이 들어가여 화학반응이 일어나고 비로소 써지곤 했다.

분노, 억울함이 어떤 어떤 어떤 어떤 과정을 거쳐 연민이 되었을 때 글이 되었다.

어떤 어떤 어떤 어떤 과정의 지난함을 당신은 모른다.

억울함으로 금이 가고 분노로 타들어간 가슴을 당신은 모른다.

이젠 그 가슴을 아무도 몰라줘도 괜찮다.

내가 쓰고 또 쓰고 연재까지 하면서 충분히 알아줬으니.

<신앙 사춘기> 연재로 생각보다 더 많은 마음의 짐이 사라진 것 같다. 

지난 10여 년 글쓰는 힘은 '복수'였는지 모른다. 복수는 나의 힘. 

이제 더는 복수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충분히 했다 아이가! 

이제 더는 복수를 위한 글을 쓰지 않겠다.......고 작정한다고 될 일은 아니구나.


마지막 글을 남기고 있다.

저격하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활활 타버린 후 연민의 재가 남을 때,

그때까지 기다렸다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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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오셨던 오빠가 앞산을 보시며 

"상록수가 좀 있어야 겨울에도 푸르른데, 상록수가 하나도 없구나." 하셨었다. 

아, 그렇구나. 산의 갈색이 유난하다 싶었더니.


겨울산, 겨울나무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겨울나무를 보면 주문을 걸며 눈을 흐리게 떴다. 

어서 봄이 와라. 어서 봄이 와서 푸르러져라. 금방 봄이 올 거야. 봄이 올 거야.


오빠의 말씀을 듣고 보니 내게 상록수가 필요하지 않다.

이 쓸쓸하고 슬픈 겨울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오지 않은 봄을 가불하여 환상으로 도피하지 않고 그대로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겨울산의 겨울이 참 길구나 싶었다. 

작년 12월 17일에 이사 왔는데, 길가에 개나리가 피었는데 산은 아직도 겨울산이다.

겨울이 참 길구나! 그래도 산이 있고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있으니 춥지 않다. 슬프지도 않다.


남편은 "산 색이 달라졌어. 안 보여? 얘들아, 안 보이니? 보라색으로 바뀐 거야."

혼자 UFO를 본 것처럼 흥분하고 그러는데, 애들은 물론이고 솔직히 나도 감흥이 없다.

도대체 뭐가 달라져다고? 


봄은 왔지만 바람은 찬 월요일에 앞산에 올랐다.

따뜻하게 입고 노부부처럼 말 없이 1열종대로 걸어 산에 올랐다.

손톱만 한 연두색 초가 미약하게 봄을 밝힌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다음 주가 되면 일제히 봉우리를 터트리겠네!

진달래도 분홍빛 초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칙칙하다.  


종필 님의 마음을 뺏은 보라빛의 실체 확인!

고개들어 본 높은 가지에도 아기 같은 새순이 가득하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대놓고 초록은 민망하다며 겨울산 품은 갈색으로.


찬바람 쌩쌩 봄의 산을 올랐다 내려간다.

이쯤엔 시나 노래가 하나 튀어나와야 제격이지.


산 밑으로 마을로 내려가자 

내 사람들이 또 거기에 있다.

맨발로 맨발로 내려가자 

내 그리스도가 또 거기에 있다.  


홍순관 <산 밑으로>


내려오는 길목엔 쓰러져 누운 큰 나무 한 그루. 에고, 어쩌다!

그 옆엔 쓰러지는 나무에 치어 덩달아 화를 입은 작은 나무 한 그루. 에고, 너는 또 무슨 죄냐!


산 밑으로 마을로 내려가자 

내 사람들이 또 거기에 있다.

맨발로 맨발로 내려가자 

내 그리스도가 또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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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31일, 3월의 마지막 주일은 봄이다!

개나리가 피었다.

봄이구나! 가볍게 옷을 입고 나갔더니 찬바람이 품을 파고든다.

봄이지만 춥구나!

 


일주일 전인 3월 24일, 3월 셋째 주일에는 확신이 없었다.

봄인가? 아닌가?

예배를 마치고 나와 채윤이가

"봄인데, 날씨가 이런데 집으로 그냥 못 가. 엄마, 어디든 가자."

중앙공원으로 갔다. 

봄이라는 느낌 없이 집을 나왔던 건데, 봄이었고 따뜻했다!

 ​


중앙공원에 온 봄은 미미하고 작았다.

들여다 봐야 보이는 봄이었다.

노란 산수유만이 파란 하늘 배경 삼아 애쓰지 않아도 보이는 봄이었다.

"엄마가 좋아하는 꽃이야. 제비꽃. 어렸을 적엔 '앉은뱅이꽃'이라고 불렀는데 이제 그런 말을 안 써."

"엄만 어떻게 이렇게 작은 게 보여?"

"노안이지만 좋아하는 건 다 보여. 엄마가 이 꽃을 작아서 좋아하는 지도 몰라."

"엄마, 그러고 보면 엄마 하는 일은 다 약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이네. 

장애인, 그중에도 장애 아이들, 성폭력 생존자들, 여자들......."


채윤이 말에 뭉클, 위로를 받았다.

작고 약하고 낮은 사람들과 연결된 일을 한다니!

과분한 영광이다.


3월 셋째 주일, 들여다 보며 찾은 봄의 흔적과 따스함의 여운이 길다.

3월 마지막 주일, 멀리서도 보이는 개나리가 한창이더니 심지어 눈발이 날렸다.

4월 첫째 주일에는 또 새로운 얼굴의 봄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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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상담 전문가가 수선해 줄 필요가 있는 손상된 자아로 보지 않고, 

다만 하나님과 또 다른 사람들과의 연합을 통하여 생명을 찾을 수 있는 소외된 영혼으로 보아야 한다.



연구소 연구원 스터디 첫 책을 마무리 하며 마음에 새긴 한 문장이다. 진정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사람, 즉 내담자에게 요구되는 태도이다. 우리는 다르게 읽었다. 개인상담, 집단상담, 내적여정에서 만나는 누구라도 ‘수선이 필요한 손상된 자아’로 보지 않고, 연결이 끊어져 생명을 찾을 수 없는 ‘소외된 영혼’으로 보겠다는 것이다. 그런 자세로 나음터를 찾으시는 분들을 만나겠다는 의지이다. 세상에 상담소가 허다하지만 굳이 '나음터'라는 이름으로 또 하나의 상담소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이고, 우리가 상담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연구원 H와는 20년이 훨씬 넘은 인연이다.  10여 년 상담을 하다 7,8년을 쉬고 이제 다시 내담자를 만나기 시작했다. 10년 상담을 그만두도록 뽐뿌질 한 것도 나다. 그 이후 이젠 상담 다시 하라고 쪼아댄 것도 나다. 연구소를 시작하고 H가 말했었다. "언니, 나 이제 상담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쪼아대도 상담은 안 하겠다던 H가 저 말을 하기까지 통과하 지난한 시간을 나는 알고 있다. 저 구절에 대해 나누면서 고백했다. 10년 상담을 실패라 규정했노라고, 상담으로 사람을 고칠 수 없다는 결론, 자신은 상담에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고요. 그리고 다신 상담하지 않겠다며 다른 일들에 마음을 주며 살았다. 


그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자기 스스로를 수선이 필요한, 뭔가 잘못된 손상된 자아로 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필연 나 자신과 관계 맺는 방식으로 타인을 만난다. 타자를 함부로 재단하고, 규정하고, 배제하는 이들로 상처 입는 때가 있지만 그가 그러는 이유는 자신을 그렇게 대하기 때문이다. 타자를 신비로운 존재로 대하며 선의의 해석으로 여백을 둘 줄 아는 사람은 필연 자신을 그렇게 대한다. H가 지난한 내적여정을 통해 손상된 자아가 아니라 소외된 영혼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 이 간극은 얼마나 멀고 또 얼마나 가까운가! 자기와 타인을 고쳐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연결이 필요한 존재로 바라본다는 것은. 진정한 자기, 타자, 하나님과 연결이 필요한 존재임을 온몸으로 알아들는다는 것은. 


훌륭한 상담자를 만나고 신령한 영적지도자를 만나면 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는 환상에 불과하다. 누군가 날 고쳐주겠지, 가 아니라. 연결되기 위해 힘을 낼 때 문제는 해결된다. 고립시키고 고립되는 한, 치유와 성장은 불가하다. 나와 타자를, 우리와 당신들을 적극적으로 분리하는 것이 '악'이다. 상담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연구원들과 함께 정말 좋은 상담자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성찰하고 기도한다. 전문적 지식이 필요한 상담자든 그를 찾는 내담자든 인간을,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관건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고통은 수선이 필요한 손상된 자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과 진정한 내 자신과 연결이 끊어진 소외된 자아이기 때문이다. 짧은 영상은 연구소 한 벽을 장식한 치유의 실을 처음으로 연결시킨  조소희 교수님의 손이다. 특별할 것 없는 손놀림이지만 예술이다. 그분은 저런 단순한 손놀림으로 작품을 만들고 전시를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터치한다. 싸구려 무명실을 이어 만든 작품처럼 가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나'라도 연결을 포기하지 않을 때는 예술이고 작품이다. 연결이 치유이고 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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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소파에서 신문 보시고

엄마는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시고

누나는 거울 앞에 화장을 하고

나는 열심히 공부합니다


현승이네 집은 그렇지 않습니다.

방학이 일 년인 힘 센 아이가 있는 집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족이 함께 먹고 함께 일하는 현승이네 집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야 주방에서 설거지 하고

누나는 제 방에서 피아노 칩니다

엄마는 거실에서 책을 보시고

아빠는 이 멋진 장면 사진 찍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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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유치부의 *준에게 키 크는 비법을 전수 받았다.


나 : 준아, 사모님이 지금 준이 코 파는 거 봤어.

준 : 그래요? 나 코딱지 먹어요.

나 : 갑자기?

준 : 나 코딱지 잘 먹어요. 코딱지는 맛이 짜요.

나 : 으아...... 너 혹시 코딱지 먹어서 요즘 키가 그렇게 크는 거야?

준 : 맞아요. 

나 : 사모님은 키가 안 커서 걱정인데 코딱지를 먹으면 될까?

준 : 그럼요. 코딱지를 먹으면 돼요.

나 : 얼만큼 먹어야 해?

준 : 음...... 아침에 일어나 한 번, 저녁에 자기 전에 한 번 먹으세요.

나 : 그렇게만 먹으면 돼?

준 : 아아아아! 낮잠 자기 전에 한 번 더 먹어야 해요. 하루 세 번 먹어요.

나 : 오케이! 알았어! 이제 나도 키가 클 거야. 코딱지만 먹으면 되는 거지?

준 : 아니요. 밥도 먹어야 해요.

나 : 알았어. 사모님 코딱지 세 번 먹고 밥도 먹고 그럴 거야. 그래도 키가 안 크면 준이가 책임 져야 해.

준 : 응.


집에 오려고 나오면서 멀리 있는 준과 눈이 마주쳤는데 손가락 세 개 펴서 보여주며 '세 번'이라고 확인시켜주었다. 집에 와서 가족들에게 비법을 전했더니 키가 제법 훤칠한 스무 살 딸이 말했다. "그거 확실한 방법이야. 나 보면 알잖아!" 아, 맞다. 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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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못 쉬는 것은 미세먼지 때문만이 아니다.

밀폐된 공간이 뿜뿜 뿜어대는 자아 팽창의 호흡으로 충만할 때

공간은 마음의 이산화탄소로 가득 차 영적 호흡곤란 상태가 될 지 모른다. 

온통 '나'로 가득 차 빛 하나 들어올 틈 없는 자아숭배의 공간이라면 그렇다.

빈 가지 사이로 바람과 햇살의 길을 내주는 겨울나무 겨울의 숲처럼

여백이 있어야 한다. 숨 쉴 공간이 있어야 한다.





주일예배 광고 시간이었다.

마지막 광고를 마칠 즈음 회중석 뒤편에서 작지만 큰소리,

주보에 없는 소리라 더 크게 들리는, 어느 집사님 한 분의 목소리였다.

"목사님, 저기..... 광고 하나...... 오늘 점심은 버섯 밥이었는데요, 맛있게 잘하려다 보니까......

어쨌든 밥이 안 됐어요. 그래서 점심이 없어요. 

대신 버섯과 쌀을 싸드릴 테니 집에 가지고 가셔서 맛있게 해 드세요."

미소 섞인 작은 웅성거림과 함께 예배는 끝났다.

덜렁덜렁 버섯 섞인 쌀 봉지를 들고 돌아가시는 교우들의 뒷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책나눔 계획이 있던 청년부와 함께 밥솥째로 집으로 가져와 맛있게 먹었다.


 


이런 예기치 않은 사고가 좋다.

식사 당번 집사님들이 밥솥 뚜껑을 열었을 때, 

쌀과 버섯이 앉힌 그대로 있는 걸 보고 기겁을 하셨겠지만, 

어떡하냐, 어떡하냐 당황도 하셨겠지만.

그것이 주보에 없는 광고가 되고, 미소 섞인 웅성거림이 되고, 

덜렁덜렁 마음은 허전하고 손은 좀 무거운 발걸음이 되는 것이 좋다.

기계가 아니고, 로봇이 아니라서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서 그렇다.

살아 있는 사람이 하는 일이란 이렇듯 예측 불가의 공간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 공간에서 때로 당황하고, 허허 허탈한 웃음 웃으며 자아의 빽빽한 숲에 빈터가 생긴다.

'내'가 지켜내는 무엇, 무엇, 무엇들이 얼마나 하릴없는 것인가.

엄격, 근엄, 진지. 각 잡고 예배 드리던 엄근진의 숲에 사람 냄새 실어오는 바람이 불었다.


작은 교회 와서 좋았던 기억은 생뚱맞게도 이런 일, 이런 순간이었다.  

미세먼지 걱정 없이 심호흡 크게 하는 날처럼 마음의 숨 크게 한 번 내쉬는 일주일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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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지켜야 하는 것들은 사실 좀 낭비적이다. 가령 상담을 주업무로 하는 연구소를 냈다면 시간과 에너지를 상담에 올인해야 하는 것이겠으나. 중요한 것은 내담자 하나라도 더 붙들고, 프로그램을 더 효율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상담 한 건 못하더라도, 시간이 맞춰지질 안하서 내담자 한 분을 못 받더라도 우선적으로 지켜내야 하는 시간과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자본주의적으로 생각하면 가치는 사치가 되기도 한다.


상담과 여타 프로그램 진행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연구원 정모이다. 나를 포함한 연구원 네 사람 모두 바쁘지만 급한 일에 매여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모였다 하면 서너 시간은 눈 깜빡하는 순간으로 지나간다. 책 한 권을 읽고 스터디, 가지 치는 주제로 토론, 사례 연구, 거기다 솔직한 나눔까지.


처음 만나던 날, 일단 연구소 청소부터 했고. 이후로 정신 없는 준비 일정 가운데에도, 개소식 진행하면서도 책 한 권을 함께 읽고 공부했다. 상담이냐, 치유공동체로서의 교회냐? 이 주제를 지지부진 읽고 나누고 숙고했다. 그러니까 오늘 날 삶의 어려움을 가진 크리스천들은 전문 상담가를 찾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목회자를 찾아야 하는가의 문제 말이다. 치료를 받아야  하는가, 기도를 해야 하는가. 물론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는 전제를 연구소의 가치로 삼으니 어려워지는 것이다.  


<상담과 치유 공동체> 함께 읽기를 마쳐가는데 다음 책이 번호표 뽑고 기다리고 있다. 찾아오시는 내담자가 거의 여성이다. 여성의 삶은 남성의 삶과 다르고 여자의 몸을 입고 살고, 사랑하고, 결혼하는 것, 여자로 신앙하고, 교회 생활하는 것은 남자의 그것과 다르기에 연구소의 '주의'는 '여성주의' 아닐 방법이 없다. 자연스럽게 선정한 두 권의 책이 그대로 연구소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으니 신기하다.


  

연구소의 어떤 일보다 연구원 정모를 소중히 여기듯  연구원 각자 개인적 물러남의 공간, centering prayer 에도 마음을 쓰고 있다.  (향심기도 하지 않는 자, 영적 독서 하지 않는 자, 연구원 자격 없습니다! 사퇴 하세요오오! 라고 말하진 않지만 입으론 웃고 눈으론 레이저 쏘는, 헛갈려서 더 강한 압박!으로 쪼이고 있다) 자기 안의 깨어짐, 치유, 성장의 경험 없이 타인의 내적 성장을 동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소중한 것을 위해 어떤 것들을 기꺼이 낭비하며 산다. 그 시간에 공부를 해라, 일을 해라! 생산적인 선택을 종용 받는 세상을 산다는 것이 함정.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계수되조차 되지 않는 것에 목숨 걸 때도 있다. 드문 일이지만 상대는 알아차리지 못하며, 헤아릴 수도 없는 바를 위해 내 살을 도려내고 혼자 피를 흘리기도 한다. 무엇을 위한! 어리석은 낭비! 어리석고 바보스럽지만 어떤 땐 멈출 수 없다.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다.  고귀한 무엇인가 있겠지. 있으니까 이러겠지. 설마.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남모르는 낭비, 아무도 모르는 낭비가 가장 고귀한 투자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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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세 엄마의 생신이다. 5년 모자란 100년의 인생이라니! 명절 후 딱 한 달 후라 밖에서 하거나 출장 요리로 하곤 했는데. 어쩐지 이번엔 집에서 해드리고 싶었다. 한 2년 요리에 손을 놓고 살았더니 뭘 어떻게 했었던가, 생각도 안 나지만 하자, 하고 싶다. 엄마를 사랑하는, 할머니를 사랑하는 식구들 모여 맛있는 식사를 하자!  하길 잘했다. 남편은 물론 채윤이 현승이까지 팔을 걷어 부치고 도와줘 준비가 수월했다. 정 많은 친정 식구들 모여 짧고 굵게 즐거운 시간 보냈다. 


#1


전날 장보기와 청소, 재료 손질 등을 마치고 현승이가 말했다.


“엄마는 좀 힘들겠지만, 나는 내일 외숙모가 와서 엄마를 돕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일 만큼은 외숙모는 그냥 가만히 앉아 있다 밥 먹으며 좋겠어”

채윤이도 적극 동의.


“맞아, 맞아! 외숙모는 명절 때마다 고생하니까 내일은 우리가 다 해. 엄마 우리가 밀착해서 도울게. 외숙모는 일하지 않게 하자.”


#2 


미역국 끓이기에 재미 붙인 채윤이가 외할머니 생신 미역국도 제가 끓이겠다며 나섰다. 전날 밤에 공들여 대량의 끓였다. 엄마랑 통화하며 기분 좋으시라고(미리 감동 먹으시라고!)알려드렸다.

“엄마, 채윤이가 할머니 생신 미역국을 끓였어. 내일 와서 채윤이 미역국 맛 봐.”

단호박 엄마의 팩트 폭행.


“뭐? 미역국? 나 미역국 안 좋아하는디. 사골국이 좋지!”





#3

이런 저런 메뉴를 짜서 장을 잔뜩 봐놓고 엄마를 떠봤다.

“엄마, 뭐 드시고 싶은 거 없어? 뭐 해줄까?”


“니가 허구 싶은 거 혀. 맞는 놈이 여기 쳐라, 저기 쳐라 허남? 혀주는 대로 먹는 거지”


“그래도 엄마 생신이니까 엄마 드시고 싶은 거 해야지. 뭐 먹고 싶어?”


“뭐 먹고 싶냐고? (침 꼴까닥) 치킨!”

진심이시다. 평생 입에도 대지 않던 치킨 피자를 요즘 드신다. 어이가 없어서 여러 번 여쭤봐도 비슷한 대답. 우리집으로 오는 길에 동생이 마지막으로 물었단다.

“엄마, 치킨! 불고기! 뭐 먹고 싶어? 누나한테 뭐 하라고 해?”

(엄마, 침 꼴깍) “나? 뭐 먹고 싶냐고? 짜장면!”


이것도 엄마 진심! 결국 저 음식을 다 차리고 엄마를 위해 치킨 한 마리을 시켰다. 저 화려한 요리를 두고 말이다. 치킨을 시키고 자장면도 시켜야 하나 고민했다. 물론 치킨은 손주들이 다 먹고. 엄마는 잡채랑, 싫다던 미역국 건데기 없이 국물만 해서 맛있게 드셨다. ‘우리 채윤이가 끓인 미역국이 제일 맛있다' 하셨다.


엄마, 갈수록 빈말을 더 못하시니 팩트 폭행이 일상인데. 큰 웃음 주는 폭행이다.








로즈 메리 도허티 수녀님의 <분별>의 마지막 장을 어젯밤에 덮었다. 단순하고 고요한 내용에다 작은 책이다. 하지만 분별의 삶을 어떻게 살아온 분의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저작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차차 사귀고 배울 좋은 선생님이시구나 싶었다. 같은 얘기도 남성이 하는 것과 여성의 목소리로 들려지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 잔잔하게 남는 여운을 안고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페이스북에서 뉴스를 본다. 바로 이 로스 메리 도허티 수녀님이 2월 28일돌아가셨단다. 잠시 눈을 의심했다. 맞다. 만나자마자 떠나셨다니.


지난 주일은 내 생일이었다. 채윤이가 끓여준 생일 미역국 사진을 꿈모임 단톡방에 올렸다. '죽음'에 관해 꿈을 꾸신 벗님 한 분이 삶과 죽음, 태어남과 죽음을 묵상했는데 카톡을 열자마자 미역국 사진을 보고 생일 이야기를 들었다고. 삶과 죽음의 근접성, 이 둘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 씩 덧붙여 가면서 풍성한 단톡 나눔을 가졌다. 동시성에 놀라고 놀란다. 


주중에 믿고 싶지 않은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그래서는 안 될, 세상 사람 다 아파도 절대 아프지 말았으면 싶은 두 분의 소식이다. 나이가 젊어도, 연세가 드셨어도 그렇다. 부질 없는 왜? 왜?가 먼저 튀어 나온다. 그리고 입맛을 잃고 무기력과 무기력이었다.


내일은 집에서 생신 식사를 하기로 했다. 몇 년 만에 집에서 대식구 식사 준비를 하는지 모른다. 부담이 많이 되지만, 그래도 하고 싶고 해드리고 싶었다. 계단 무서워 딸 집에 못오시는 엄마에게 주차장에서 현관까지 엘리베이터 연결되는 집을 보여 드려야지. 늙은 엄마의 딸인 죄로 벌써 오래 전부터 엄마 생신 때마다 '마지막 생신일지 몰라' 각오를 단단히 하며 보내곤 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엄마 생신은 늘 엄마의 죽음을 생각한다.


태어남과 죽음이, 

꿈과 현실이,

죽음과 부활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알고 믿고 사는 것이 '분별'인지 모른다. 이것을 믿는 것은 소망이지만 그 소망은 핑크빛이 아니다. 입맛을 잃음이고, 생기를 잃음이며, 무기력이고, 위장된 말과 거짓된 관계는 죄 뱉어내고 싶은 삐딱함기도 하다.


책 <분별>의 에필로그에 나오는 말이 무기력한 내게 주는 로즈 메리 수녀님의 유언 같다.


분별하면서 사는 삶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보다 명료하게, 더 많이 보기를 바란다. 과거를 돌아보며 "내가 지금 아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달리 선택했을 텐데"라고 말할 때가 종종 있을 것이다. 때로는 삶을 더 멀리 보는 비전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근시안이다. 멀리 볼 수 있음은 은총이다. 우리가 가진 것은 오직 이 순간이라는 사실을 결국에는 받아들여야 한다. "그 다음"은 그때가 되면, 그 다음이 여기에 있을 때 우리에게 보일 것이다. 우리는 그 다음을 기다리면서 지금 이 순간을 견디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이 순간에 온전하게 참여해야 한다. 지금이 우리가 가진 순간이며, 생명의 전부가 그 안에 담겨 있다. 그 다음 순간은 이 순간에 충실하게 집중하는 데서부터 펼쳐질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이 없다며 어떻게 될까? 이 순간이 전부라면 어떻게 될까? 이것으로 충분한가? 이 순간을 온전하게 산 것으로 삶을 잘 살았다 생각하고 평화롭게 휴식할 수 있을까? 분별하는 삶은 우리가 매 순간을 마지막 순간이라 생각하고,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선택을 하며 살 수 있을 때 시작될 것이다. 




"바쁘시죠?"

라는 인사 참 듣기 거북한데

안녕하세요?

라는 말 대신 듣는 인사가 되었다.

"바쁘다기보다는....... 미주알고주알 메추리알 타조알......."

설명하고 싶은데 다들 바빠서 길게 설명할 시간은 없으니

늘 조금 억울한 느낌으로

"아, 네...... 그렇죠. 뭐"

라고 얼버무릴 뿐.


바쁘냐고 묻는 말에는 여러 뜻이 있지만, 

우리 한 번 놀아야지, 

로 들리는 경우가 많다.

직장 다니는 사람이, 월화수목금 출근하는 사람이 아무 시간이나 약속 잡을 수 없는 정도.

그 정도로만 바쁘다.

그 정도가 바쁜 거라면, 내가 바쁜 게 맞다.


여유가 없다, 빡빡하다,

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강의, 음악치료, 상담,

이 없는 시간엔 읽어야 할 것, 써야 할 것들이 번호표 뽑고 기다리고 있다.

 

바쁘진 않지만 여유는 없는 시간에서 100시간을 뺐다.

1, 2월 내내 일주일에 이틀, 10시부터 5시까지 앉아 강의를 들었다.

성폭력 전문상담원 교육이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고등학교 이후에는 없었던 스케쥴이었고.

강의에서 듣는 사례를 마주하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강사나 같이 듣는 사람들의 태도가 견딜 수 없는 순간도 있었다.

30년 전 고민했던 여성주의 담론을 새로운 얘기처럼 들어야 하는 것도 고역.


성폭력 전문상담원 자격증이 꼭 필요하냐고들 묻는다.

꼭 필요하진 않다.

그래도 왠지 해야 할 것 같았다.

첫날부터 후회했다.

내가 왜? 미쳤지! 이걸 2월 말까지? 죽었다!

결국 100시간 잘 버텨냈다. 

누가 등떠밀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이다.

하고 싶어서 한 것이기에 버틸 수 있었다.


목회자·성폭력·생존자·글쓰기·자조모임이 곧 다시 시작이다.

100시간의 인내는 이 모임을 위한 씨 뿌림이다.

100시간 공들인 나만의 목욕재계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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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물이란 무엇인가?

주는 사람의 취향, 받는 사람의 취향. 뭣이 중한가?


#2


생일선물로 현승에게 운동화를 받았다.

선물을 주는 사람 현승이의 취향은 확고했다.


엄마 선물로 엄마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운동화를 사 줄 것이다.

운동화라는 아이템도, 어떤 운동화를 선사 할 지도 결정은 내가 한다!

(주는 이의 모든 것이 확고했다.)

자꾸 그런 식으로 너무 비싸다거나 다른 선물을 제안 한다면 생일 선물은 없다!

당장 필요한 생필품을 사주느니 나는 엄마 생일 선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무엇을 선물할 지는 내가 결정한다!


고심 끝에 운동화를 주문을 했고(커플 느낌의 제 운동화까지 사면서 세뱃돈 탕진)

기분이 날아갈 듯한 현승이가 지껄여댔다.


"엄마, 자부심을 갖고 신어야 해. 브랜드 자체는 흔하지만 그 중에도 희귀템이야.

색깔도 다른고, 딱 엄마가 좋아할 스타일이야.  

이 운동화를 신을 때는 꼭 그......  자부심을가져야 해. "

 


#3


엄마, 앞으로 나는 신발만은 마음대로 살 거야. 뭐라 하지 마. 나는 정말 신발을 좋아해. 저번 꽃친 캠프에서 아이과 친해진 것도 다 운동화 때문이었어. "너 운동화 예쁘다' 이런 말로 처음 친해지기 시작했어. 엄마가 꿈에 나온 신발은 '정체성'을 상징한다고 했지? 신발은 내가 나를 드러내는 싶은 방법 중 하나야. 나는 정말 다른 사람과 다른 나만의 독특한 점을 갖고 싶어. 동시에 남과 달라서 튀는 건 또 싫어. 뭔가 남다르게 하고 싶지만 옷으로 표현하면 너무 눈에 띄게 돼. 주목받는 건 정말 싫어. 하지만 누군가 남다른 나의 모습을 알아줬으면 좋겠는 마음도 있어. 신발이 딱 적절해. 신발이 튈 때 주목받는 정도는 내가 딱 견딜 수 있는 정도야. 그리고 신발 예쁘다고 주목 받으면 정말 기분이 좋아. 엄마, 내가 신발 덕질을 하는 이유야. 신발은 정체성이라며! 나한텐 신발이 중요하고, 엄마 생일 선물로 엄마에게 딱 잘 어울리는 운동화 사주는 게 내가 너무 행복해."


#4


중2 어느 날, 해외 직구로 나이키 운동화를 사겠다는 가격이 가당치 않았다. 제 용돈으로 사겠다는데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름대로 가진 원칙이 있다. 중2 쯤 되면 통제 한다고 통제 되는 것이 아니기에. 실패가 뻔한 선택이라도 이를 악물고 허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강의 하곤 한다)  운동화 덕질이 심해진다 싶었다. 생각 없는 쇼핑 덕질에 빠진 놈이 내 아들이라니! 한심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알고 있었다. 더는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5


"엄마, 마음에 들어?

사이즈는 어때?

정말 마음에 들어?

색깔 좋지? 흔한 색이 아니지? 엄마가 좋아하는 색이잖아. 그치?"


돈과 에너지를 많이 쓰는 현승이 마음을 뒤늦게 알았다.

이 아이에게 운동화는 그냥 신발에 지나지 않음이다.


오래도록 간직할 생일 선물 운동화가 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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