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 13,500원 짜리 책을 20,000원에 싸게 샀다.

정말이다. 싸게 산 거다.

절판된 책인데 알라딘 온라인 중고에는 없고,

회원 중고에 올라온 몇 권의 책이 29,000원에서 57,000원까지 나와있다.

누군가 꼭 갖고 싶어하는 책을 귀신 같이 알고 

이렇듯 어마어마한 웃돈 얹어 파는 사람들이 있더라. 

오프라인 중고매장에는 인천에 한 권, 대구에 한 권이 있다.

인천 정도는 마음 먹고 가볼 만 한데 시간이란 게 없다.


긴 방학을 맞아 빈둥빈둥 하는 현승이에게 기대 없이 던져봤다.

남는 게 시간인데, 시간 뒀다 뭐 할래?

엄마 책이나 한 권 사다주라.

콜!

책값에 맥도날드 햄버거 값, 차비 포한 2만 원에 퉁쳤다.

그래도 만 원은 앉아서 번 게 된다.


2008년에 나온 미리암 그린스팬의 <감정 공부>라는 책이다.

감정을 영혼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한다.

정혜신 박사의 최근 작 <당신이 옳다>는 당신의 '감정'은 언제나 옳다는 뜻이다.

이 책에서도 감정은 자신의 존재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한다. 

내적 여정, 치유 글쓰기, 꿈과 영성생활.

특별한 집단여정을 안내하면서 감정이 어떻게 '문'이 되는지를 온몸으로 체험한다.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진짜 감정을 알고 의식화 하는 사람이다.


감정에 대해 강의에 도움 받은 책과 저자가 많다.

훌륭한 분들이고, 놀라운 가르침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이 답답하고 벽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 모든 분들이 '남자'라는 것이다.

여자가 여자의 몸으로 살며 느끼는 감정이란 남자의 그것일 수 없다,

분노, 두려움, 슬픔 같은 것들이 남자와 같을 수 없다, 고 

나의 경험, 그녀들의 경험이 자꾸 말한다. 


20대 후반에 만난 '여성주의' 심리상담가 미리암 그린스팬의 

<우리 속에 숨어 있는 힘>을 다시 읽다 보니, 

20년 전 내가 도대체 뭘 읽었었나, 싶다. 

알아듣긴 하면서 밑줄을 쳤을까?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의 감정을 쓴 책이 미리암 그린스팬의 <감정 공부>이다.

그러니 여느 감정 공부와 같을 리 없다.


요즘 서점가에 흔한 것이 감정에 관한 책이지만,

여성의 몸에 담긴 여성의 감정을 말하는 책을 만나기는 어렵다.

여성의 몸이란 오랫동안 남성들의 욕구 대상으로서의 몸이었다.

롤로 메이가 말한 것처럼 '여성은 자기 몸에 갇힌 생물학적 죄수'이다. 

갇힌 몸에 담긴 감정이란, 겹겹이 포승줄로 묶인 감정이란.


여성이 말하는 여성의 감정을 배우려면 웃돈을 많이 얹어줘야 하는 것이 옳겠다.

그러니 13,500원 짜리 책이 6,800원 달고 중고매장에 꽂혀 있도록 두는 것은 옳지 않고,

20,000원 아니라 30,000원 쯤 들여서라도 구해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여자 딸이 아니라 남자 아들의 시간과 노동, 즉 '효도 페이'를 활용한 것,

그 아들이 기꺼이 활용 당해준 것도 어쩐지 아름다운 일이다.






"여보, 우리 저녁에 뭐 먹어?"

이런 불온한 말은 하지 않는다. 대신

"여보, 저녁은 치킨 시켜 먹을까?" 라고 한다. 

이 어정쩡한 주체적 태도를 어여삐 여겨 내가 말한다.

"아냐, 저번에 맛있다던 통삼겹살 구이 할 건데."

"힘들잖아. 그냥 뭐 시켜먹자." 

훈훈도 하여라.


이사 와서 한 달 내내 오가며 기웃거렸던 

집 들어오는 길목의 '누룽지 백숙'을 먹기로 한다.

끌차를 끌고 내려가 장을 보고 주문한 백숙을 찾아온다.

귀때기가 떨어질 것 같은 차가운 바람이다.

엑스레이 같은 나뭇가지에 걸린 달이 예뻐서 사진 찍으려 했더니

달은 안 잡히고 그의 형광색 잠바에 촛점이 꽂힌다.  


채윤이가 좋아하는 게맛살, 채윤이가 좋아하는 팽이버섯을 섞어 전을 부쳤다.

그리하여 이 전의 이름은 '채윤전'이니!

전을 부치는데 채윤이 동생 현승이가 블루투스 스피커를 들고 주방으로 온다.

새로 알게 된 김광석 노래라며, 들어보라며.

김광석 노래에 맞춰 전을 굽자니 

고소한 기름냄새와 함께 달달한 희열 같은 것이 코 끝을 간지른다.

일주일의 시작인지 끝인지 알 수 없는 주일 저녁,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일상의 무게로 어깨는 쳐지고 고개는 떨궈지지만

알 수 없는 좋은 느낌이 텅 빈 마음을 채운다.


포장해 온 백숙과 채윤전을 배부르게 먹고 치우느라 분주한데

이번엔 흥얼흥얼 부르는 현승이의 노래가 귀를 간지른다.


내게로 와 줘

내 생활 속으로

너와 같이 함께라면

모든 게 새로울 거야

매일 똑같은 일상이지만

너와 같이 함께라면

모든 게 달라질 거야


신해철의 '일상으로의 초대'이다.

이런 저런 일상의 짐이 무겁지만 

살아야 할 이유 역시 이 일상이다.


양손에 무거운 짐 다 들고 저만치 걸어가는 형광색 잠바가 있는 세상.

덕분에 내 손은 비어 있어 달을 찍고, 하늘을 찍고,

달을 빙자하여 형광 잠바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찍었다.  

e편한세상! 이 편한 세상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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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차


"엄마 요즘도 커피 열심히 하시니?"

"어, 차로 갈아타신 것 같은데요. 차를 많이 드세요."

라고 채윤이가 어느 바리스타 님을 만나 얘기 나누었다는데.

사실이다.

낮 하루 지내며 몸과 마음에 쌓인 미세먼지를 저녁마다 차로 씻어내고 있다.

남편은 설교 준비로, 아이들은 주일학교 캠프로(아, 하나는 학생, 하나는 선생님으로 갔다!)

가족을 모두 교회에 바친 토요일엔 심지어 혼차다.


# 혼공


"그만큼 배웠으면 많이 배웠지, 여자가 뭘 더 배운다고!"

엄마의 목소리가 마음의 귀에 늘 쟁쟁함에도, 쟁쟁하기 때문에 참으로 열심히 배우러 다녔다.

더는 배우러 다닐 일이 없겠지 싶었는데,

가장 시간이 없는 때, 100시간 짜리로 뭔가 또 배우러 다닌다.

성폭력전문상담원 교육인데, 가 앉아 있지면 조금 한심하다.

연구소 열어놓고 아직 개소식 계속식도 해야 하고,

써야 할, 쓰고 싶은 글도 쌓여 있고,

만나자 하시는 분도 많은데 일주일 이틀을 오롯이 바쳐야 한다니.

대학 1학년 때 고민했던 페미니즘 담론을 듣고 있을 때는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군가' 싶다.

하도 한심해서 가방 싸들고 나오기도 했다. 

누가 시키지도 요구하지도 않는 일을 하고 있는 내가 제일 한심하고,

혼공의 나날이 외롭기만 하다.


# 혼감(동)


세 번에 한 번은 좋은 강사가 온다.

열 번에 한 번은 어마어마한게 좋은 강사가 온다.

어제 강의는 근래 몇 년 사이 들었던 설교와 강의 통틀어 최고의 배움이었다.

내가 미쳤지, 이걸 왜 한다고, 이러고 앉아 시간을 버리고!

했던 속말들이 쏙 들어갔다.

오직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이것으로 100시간 낭비가 아깝지 않군!

책으로 만났던 '비온뒤무지개재단'의 한채윤 선생의 강의였다.

집에 와 그의 글을 다시 읽었는데, 전에 봤던 그 글이 아니다. 

삶을 듣고 얼굴을 마주하고 다시 글을 읽으니 한 글자 한 글자 살아 움직이는 글이었다.


# 혼독


강의 들으며 언급되는 사람에 꽂히면 바로 알라딘에 검색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덕분에 매일매일 택배지만.

덕분에 매일 저녁이 설렌다.

오늘처럼 오롯이 혼자인 밤이라면 더욱.

소설로 만났던 캐릴 길리건을 성폭 강의 교재에서 만나고,

바로 검색했더니 표지부터 끌리는 신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초록이 얼마나 예쁘고 마음에 드는지.


이 밤아 끝나지 마라.

혼독의 밤아, 끝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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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아직 2018년이 끝나지 않았다.

2018 이름으로 쓰고 싶은 것, 써야 할 것이 '비공개' 상태로 남아 있는 한

끝난 것이 아니다.

송구영신 예배 전후로 날아든 똑같은 문자와 카카카오 톡들에 답신을 하지 못했다.

그중 연배가 높으신 분이 계셔서 죄송한 마음이 있고, 싸가지 없는 인간이라 하시면 인정! 

그러나 단체로 쏜 메시지에는 답하지 안해도 된다는 고정관념이 있다.

또 시간의 인위적 경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기도 하다.


2018년을 마무리 하는 글 세 개를 쓰고 싶었으니 이걸 써야 끝이다.

실은 사진만 걸어둔 채 '비공개'로 오래 묵혀서 조금 질려 버린 건 사실이지만.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간판을 내걸고 시간과 비용을 거룩하게 낭비하고 있는 중이다.

개소식이란 이름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시간과 비용 낭비를 연거푸 9회를 하고,

마지막 개소식인 10회는 남편들을 초대했다.

와서 밥만 먹는 줄 알았던 벌쭘한 남자들(세상에 벌쭘하지 않은 남자는 몇이나 될 것인가) 넷이 모였다.

앉혀 놓고 개소식 프로그램을 그대로 진행했다.

개소식 프로그램이라 하면, 소장의 세바시(세상을 못 바꾸는 시간 40분) 강의가 주메뉴이다.

밥만 먹겠다는 남편들에게 굳이 이 강의를 들려주어야 할 이유는......

흠, 우리는 순수했다. 도대체 왜 이 시점에서 마음성장연구소인지,

도대체 뭘 하려는 것인지 알려야 할 의미도 권리도 있으니까.


정말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강의를 마치고 남편들이 이심전심으로 알아들었다. 

"여보, 미안! 돈 버는 연구소 아니야"

공부 시키느라 돈 많이 든 여자가 이제나 저제나 좀 벌어 오려나 했는데,

드디어 연구소를 내고 상담을 하고 제대로 강의를 한다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다만 크게 기뻐하진 않았지만 누구도 불편해 하지는 않았다.

부부는 닮아간다는데,

우리가 왜 이런 걸 하겠다고 뭉쳤겠어.

당신이 사는 방식이고, 당신이 살고 싶은 방식이지!

말하자면 이런 거다.


연구원 은경 쌤의 짝꿍인 백 이사님(남편들을 강제로 연구소 이사로 추대함)도 이러고 살고 계시니.

직원 '예배'말고 '복지' 챙기는 사장님

시의 적절게 기사가 나왔을 뿐, 

남편 네 사람 모두 '의미 있게' 사는 것에의 고민을 놓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 고민 놓아버리면 마음 편할 것을,

그걸 하지 못해 때로 죄책감과 자기 비판으로 괴로워 하기도 한다.


연구소가 무엇이 될지 모르겠다.

의미 있는 상담도 하고 만남도 하는 게 분명한데 

지속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곳, 낫고 나아지는 '나음터'가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하다는 생각은 분명하다.

함께 하는 네 사람이 안전한 사람들이고,

넷의 삶과 인격을 가장 가까이서 가장 오래 지켜본 사람들의 불편한 지지로 인해

더욱 확증을 얻는 안전함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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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체력이 달려서 아이들 치료교육을 그만두어야 하는데, 

이런 에피소드 하나로 일주일은 버틸 힘을 얻기에 멈출 수가 없다.

새해 첫 수업 헬로송을 부를 땐 늘 계획된 도발을 한다. 

“안녕, 다섯 살 해뜰반” 하자마자 아이들이 피를 토하며 달려든다. 

“아니에요오오오, 여서 딸이에요오오오, 여서 딸 돼써요오오오오오오(핏대)”

가장 태연하게 “무슨 소리야. 너희 다섯 살 반이잖아” 하면 

이제 핏대 세우고 앞으로 나와서 절규를 한다. “여!서!딸! 여섯 살이에요” 

“지난 번에 다섯 살이었잖아. 어쩌다 여섯 살이 됐어?” 여섯 살 된 비법이 난무한다. 

엄마가 여섯 살이래요, 떡국 먹었어요, 키가 커졌어요, 우유 먹었어요. 

그러다 한 녀석이 "나이를 먹었어요오~"

뭐라고? 나이를 먹었다고? 나이는 어떤 맛인데?

하자마자 이제 뻥이 난무를 한다. 

동그랗게 생겼는데 초콜릿 맛이에요. 

하트 모양이에요. 

야야, 그런데 선생님은 나이가 몇 살 같애? 

열다섯 살이요, 열세 살이요! ㅎㅎㅎㅎ (계속해, 계속) 이십 삼살이요, 

(자꾸 듣다보니 씁쓸)

 “얘들아, 실은 선생님은 나이 먹는 게 싫어”라고 고백해 버렸다. 

그러자 한 녀석이. 

“아이 참, 션샘미. 골고루 먹어야 해요!”


파, 당근, 나이..... 편식하지 말고 골고루 먹기!




십여 년 영성공부의 마침표를 찍은 것은 철학상담 4학기였다.

수많은 철학자를, 영성가를 소개받고 읽고 만났지만 돌아보면 가슴에 남은 것은 한 마디다.


"사랑이 메마른 곳을 일부러 찾아 상처받지 말고, 사랑 받는 곳으로 가야한다"

인간 본성이 그러하다.

칭찬과 존경의 말에 목마르면서도 그 반대의 소리에 귀가 커진다.

곱씹고 묵상하는 것은 나를 믿어주지 않는 사람의 표정과 말이며

부러 찾아가 맴도는 곳은 나를 홀대하는 곳이다. 


모양새를 위한 송년회가 아니라

당신들과 함께 한 일 년이 정말 소중했다, 는 송년회였다.

갚을 것 없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셔도 되는 걸까, 싶게 대접 받는다.

일일이 손으로 한 예쁘고 맛있는 음식이며, 데코레이션이다.


그분의 손은 내게 사도행전 '루디아'의 손이었다.

나도 요리하는 것 참 좋아하는데,

음식 만드는 것에 정이 떨어질 정도로 슬프고 비루한 식사 준비의 나날을 보냈다.

그분이 건넨 밑반찬과 레시피가 도착한 날은 '삶은 요리'였던 내 인생이

'죽음의 요리'가 되던 시절이었다.


마음 성장을 위한 모임이라고 해서 내적인 것만 판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정신과 몸이, 마음의 길과 일상의 여정이 다른 것이며

둘 중 하나만 중요한 것처럼 치우쳐버린다면 그것이 가장 위험한 일이다.

마음 공부를 위한 모임일수록 일상의 이야기가 살아 있고,

먹을 것이 풍성해야 한다고 믿는다.


에니어그램 내적 여정에서 늘 좋은 원두로 커피를 내리는 이유이다.

마음 공부를 위해서 급조(맞다, 급조가 맞다. 순간 떠오른 분들께 급 메시지를 보내어 구성되었으니)

모임인 꿈모임이 밤에 꾸는 꿈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먹을 것을 나누고, 

무엇보다 존경과 신뢰를 나눴다.


어쩌다 이렇게 좋은 모임이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내가 만들었고 이끄미로 있었으니 내가 잘한 것 같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나는 늘 '나'라는 무거운 존재 하나를 끌고 다닌다.

어디선들 내가 다르게 했을까.

함께 모인 '나'들의 역동이라 설명할 수 밖에 없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를 내어 놓는 아이처럼 자기 내면을, 가진 것을 그냥 내놓았기 때문일 터.

송년 모임의 키워드는 누구도 계획하지 않았지만 내내 '천사'였다.

누가 천사인지는 시시각각 바뀌었지만,

선물교환으로 받은 앞치마를 한 내가 마지막으로 

천사를 찾아 싸바, 싸바, 싸바, 춤을 추었으니 마지막 천사는 '나'인 걸로.

모든 '나'인 걸로.


"사랑이 메마른 곳을 일부러 찾아 상처받지 말고, 사랑 받는 곳으로 가야한다"






2018년 쉰의 마지막 전날에 돋보기를 했다.

드디어 돋보기를 끼게 되었다.

이제야 어른이 된 느낌이다.


돋보기를 맞추는데 안경사께서는 '노안이 벌써 왔을 텐데 꽤 오래 버티셨네요'했다.

그리고 '가까이 있는 게 안 보이는 건 보지 말라는 뜻이지요.' 라고 했다.

몸이 보내는 신호가 진실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구나, 가까이 있는 것은 그만 보라는 뜻으로 노안이 왔구나.

멀리 보라는 뜻이구나.

고개 들어 눈을 가늘게 뜨고 생의 종점을 보고,

생의 종점 너머 또 다른 세계를 응시하라는 뜻이구나. 

인정!


하지만 가슴이 턱 막히기도 한다.

마음 먹고 돋보기 하러 간 이유는 책을 보기 위함인데,

책 없는 삶, 책 읽을 수 없는 노년은 상상할 수 없는데.


아무튼 깨끗하게 커진 글자들로 독서의 기쁨이 두 배가 되는 날이다.

2018년 마지막 날은 종일 집에 박혀 책을 보다 차를 마시다,

눈이 피로하면 잠시 누워 졸며 보냈다.


2019년 가방 안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은 

지갑, 휴대폰, 차키와 함께 돋보기도!

쉰 하나.

돋보기를 끼고, 백발을 허용해도 좋을 나이가 되어간다.

책을 가까이 두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지만 

멀리 보라는 뜻으로 온 노안, 원시임을 잊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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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8. 24. 신실누나가 줌


97. 9. 10 다 읽음

불안한 세상. 하나님의 허위와 견고한 평화


책 정리하다 표지 안쪽의 메모 들춰보는 재미가 좋다.

97년 8월에 신실 누나가 준 책을 다 읽은 종필이 저런 메모를 남겼다.

신실 누나는 종로서적에 간다는 종필에게 마침 사야할 책이 있다며 같은 책 두 권을 사다 달라 부탁했다.

두 권을 사다주니 한 권을 종필에게 줬단다.

이건 딱 봐도 작업이구만.


성공한 작업이라 더는 심장 쿵쿵거릴 일 없지만,

20년 전 20대의 신실과 종필에게 불안했던 그 세상이 새롭게 다가온다.

그 시절에도 하나님의 허위를 감지했다니 맹랑한 20대였구나 싶고,

견고한 평화라니 믿어지질 않는다.


괜히 작업을 건 것이 아닐 것이다.

불안한 세대에 불안 해소의 수단으로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고

차라리 불안의 바람에 흔들리고 방황하는 정직함에 마음을 빼앗겼을 것이다.


흔들리는 세대의 연인이 되어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되었으니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무엇 하나 번듯하게 세운 것이 없지만

그때 책 두 권을 부탁한 것은 잘한 일인 것 같다.

작업 걸기를 잘했다.

죽을 때까지 흔들리겠으나 

흔드는 바람이 거셀수록 조금씩 조금씩 평화의 뿌리는 견고해지지 싶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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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50이 되는 해였다. 100 살을 살지 못할 텐데 '반'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생의 의미'를 붙들고 싶은 탓일 터이다. 쉰이라는 나이를 거의 한 번도 인식하고 살지 않았다. 연말이 되어 송년회란 이름으로 모여 돌아보니 이제야 나이가 보인다. 그 어느 해보다 좋은 시간을 보냈다, 말하기에는 외적인 조건은 좋지 않았지만, 좋았던 것이 사실이다. 요란하지 않거나 의례적이지 않은 송년모임들이 인증해준다. 사람이 있었다. 사람을 만나는 곳이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상처 받고 찔려 피흘리는 곳도 사람이 있는 곳이라 한다면, 그것도 인정!이다. 


아, 올해 내게 의미 있던 곳은, 다른 말로 하면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다. 목회자에게, 그렇다 그 누구도 아닌 목회자에 의한 성폭행 피해자들과 글쓰기로 만난 곳이다. 피해자, 또는 생존자라는 말로 당신에게 어떤 사람의 이미지가 떠오른다면 무엇이 됐든 틀렸다! 당신이 틀리기 전에 내가 먼저 틀렸었다. 첫 모임에 가면서 누구보다 긴장했다. 상상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상상한 모든 것이 다 틀렸고, 빛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누구보다 빛나는 사람들이 자신의 빛을 부끄러워 하고 있었다. 자신의 빛을 감추려 하고 있었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다 쓸 수는 없다. 8주 씩 두 번의 글쓰기 자조모임을 하면서 많이 울었고, 분노에 치를 떨기도 했다. 


1,2기 함께 모여 송년회를 했다. 낭독회로 모였다. 낭독회 다녀와 페이스북에 남긴 소회를 다시 올린다.


글쓰기로 만난 사이였는데 이상하게 목소리와 말투가 생생하게 남아 있다. 매 시간 써 온 글을 소리 내어 읽었고, 사려 깊은 수다(소리)가 끝없이 이어졌기 때문이리라. 글쓰기 자조모임 송년파티 낭독회가 있었다. 두어 시간 앉아서 눈물 찔끔거리고 웃었다. 그녀들의 목소리가 참 좋다. 어쩌면 사람의 목소리가 저렇게 다른 빛과 결을 가지고 있을까. 눈을 감고 들으면 더 신비롭다.


며칠 약한 두통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사라졌다. 어느 순간인지 모르겠다. 반가운 얼굴이 들어올 때 살짝 심장이 들썩거린 순간인지, 마주앉은 이의 눈물에 공명하던 순간인지, 와하하하 웃던 순간인지. 이 모임에 앉아 있으면 모두가 나 같다. 피해와 상처도 내 것 같고, 그것을 돕는 일에 치인 활동가의 피곤함도 내 것인 듯하고, 나는 당연히 나다. 오늘 낭독회에서 들은 글의 일부이다.


자조 모임. 막연하게 거부감이 들었고, 마음 깊은 곳에선 겁이 났다. 나는 자조 모임 초기에 자주 세상에서 공포를 느낀다고 썼다. 나는 내가 내밀하게 감각하고 오래도록 사유한 것들을 모래 속 자갈 골라내듯 투박하게 다루는 세상이, 실로 무서웠다. 그래서 그냥 슬펐다’, ‘분노했다처럼 내 언어들도 단순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러면 설명하지 않아도 됐고, 그러면, 판단 당하지 않아도 되니까.

 

자조 모임을 통한 글쓰기는, 내가 방치한 기억들에 세세한언어를 부여하도록 만들었다. 나는 뭉개놓았던 기억들을 끌어올려서 가만히 펼쳐놓고 조금씩 다시 쓰기 시작했다. 나를 온전히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내 감정에 집중한 채로 내 기억을 쓰다듬고 매만지면서, 나는 무엇이 고통이었고 왜 고통스러웠는지를 직시할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가해자의 그루밍에 길들여진 자아가 영혼에 가하는 자해. 그것이 내 부끄러움의 발로라는 것을 자조 모임을 통해 배웠다. 그 배움 덕에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나도 모르는 최초의 기억따윈 없었다. 그 기억이야말로 가장 견고한 환상이었다. 내 고통은 모두 그냥 그 자체로 진실이었다. 나는 자조 모임이 끝나고 고통을 느끼기를 주저한 내 자신을 꼭 껴안고 어를 수 있었다.

 

타자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다. 타인에 대한 완전한 이해의 불가능성은 유한한 인간의 영원한 콤플렉스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나는 연결을 믿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일이 나를 들여다보듯 투명하게 타인을 들여다보는 일이 아님을 알게 됐다. 타인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 공간이 안전한 장소가 될 수 있음을 믿는다. 고통이 언어가 되어 쏟아져 나올 때 최대한의 경청으로, 제 몸의 변화까지 겪어가며 있어 준 사람들 때문에. 나는 사실 지구의 밑동을 파고 들어가면, 이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사실 이 분이 써오는 모든 글이 좋았다. 이미 자기 소설을 출간한 분이다.  헌데 이 글이 유난히 큰 소리로 들리는 이유가 있다. 글쓰기 모임 초반에 신형철의 글을 인용하여 ‘타자의 이해불가능성’에 대한 글을 써오신 적이 있다. 그때의 이해불가능성은 건널 수 없는 강, 건널 필요도 없는 강 같았다. 냉소적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지구 밑동을 파고 들어가면, 모두 연결되어 있다’니! 연결을 믿는다니! 아, 확실히 이 말에서 내 두통이 사라졌다. 이 문장을 듣는 순간 뇌가 확 열리면서 뉴런이 마구 밖으로 뻗어나가 둘러앉은 모든 이들의 뉴런에 접속되는 느낌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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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온 다음 날 아침, 현승이 뺀 세 식구가 식탁에 앉아 노닥거리고 있었다. 

거실 창 한 쪽으로 노란색 무엇이 부딪쳐 머문다.

하아,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햇빛이다!


"햇빛이 너무 맑아 눈물이 납니다."

도종환 님의 싯구와 함께 정말로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저렇듯 책꽂이에 머무는 햇빛과 놀아본 적이 언제던가.

블로그 뒤져보니 마지막 날의 기록이 남아 있다.


어제가 된 현재(2017. 02. 28) 

 

합정동 집에서 이사 오던 날 아침에 찍은 사진이 마지막이다.

분당동 거실엔 책꽂이와 햇살이 입맞추는 장면이 없었다.

많은 것을 상상하고 각오했지만 생각보다 더 추웠고 더 어두웠다.

쏟아지는 빛이 없어서였다.

빛은 그저 있는 것이고 기도하거나 애쓰지 않아도 주어지는 것이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공평하게 비추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적 현실은, 갑과 을이 있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


햇빛이 멀기만 한 2년 여를 보냈다.

작년 겨울은 동면하는 짐승처럼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지냈었다.

그러다 어깨가 굳어버려 오십견이 왔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잘 버틴 2년이다.

춥고 어두워 슬프긴 했지만 언젠가처럼 절망하진 않았다.


빛이 없어도 환하게 다가오시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음성이 없어도 똑똑히 들려주시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젊은 날 불렀던 노래, 남편과 내가 함께 좋아하는 이 노래가 혀끝에 맴돈다.

이사 온 다음 날 만난 햇빛에 눈물이 난 것은

내 피부에 닿지는 않았어도 여전히 어딘가를 한결같이 비추고 있었음을,

여전히 있었음을 확인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현관 앞에 내 집의 이름표를 대놓고 붙였다.

내 집은 빛이 있으나 없으나, 온기가 있으나 없으나

누구보다 내게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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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째 이사인지 헤아리다 포기했다. 아무튼 오늘, 지금도 이사 중. 내 짐이 마구 풀어 헤쳐지는데 정작 내가 할 일은 없다. 조금 민망하고 마음만 분주할 뿐. 분주한데 심심한 순간이다.


그 어느 때보다 과감하게 책을 정리했다. 30년 보물처럼 끌어안고 있던 여성학 책을 정리했다. 역시나 30여 년 된 ‘기독교세계관’에도 단호하려 했는데. 나란히 꽂힌 같은 책 두 권들에 눈길이 머물어 결국 처분하지 못했다. 남편과 내가 서로를 모르고 살던 시절에도 이미 연결되어 있었다는 증표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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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궁합 참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내가 돈까스 시켰는데 남편이 '나도 돈까스' 이런 건 없다.

내가 돈까스 시키면 남편은 쫄면, 답은 정해져 있다.


이번 주 연구소 개소식에 가장 효율적이며 유능한 요리사이신 벗님께서 음식을 해오셨다.

그분의 식재료와 요리법은 따를 수 없는데, 

감동적인 것은 고급스런 유뷰초밥과 잡채에 가장 맛있는 김치를 챙겨오신 것이다.

'이게 아무리 맛있어도 기름지기 때문에 김치 없으면 소용 없다!'면서.


내가 소중히 여기는 음식궁합이란 이런 것.

금요일 저녁 채윤이는 치킨 주사 맞을 때가 지나서 금단현상 오는 중,

엄마, 치킨. 치킨. 치로 시작해서 킨으로 끝나는 거 먹으면 안돼?

실은 나도 살짝 치킨 주사가 잘 맞는 체질이라 둘이서 한 마리를 뚝딱했다.


현승이가 학원 마치고 하원한다는 알림 문자가 왔다. 

아, 얘는 뭘 먹이지? 이사 한다고 장도 안 보고 있는 중이라 급조할 것도 없는데.    

"현승아, 저녁 뭐 먹고 싶어?" 먹고 싶다고 답해 봐야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지만 

최악의 경우 맥도날드 햄버거를 허락하겠다는 각오로 물었다.


"간장국수? 엄마, 나 오랜만에 간장국수 먹고 싶은데. 집에 국수 없지?"

국수가 왜 없어?!!!!!!!!!

이 결핍된 식재료 환경 속에서 어쩌면 가능한 것을 콕 찝어낼 수가.

간장국수 위에 스팸과 새싹 채소를 토핑으로 얹었다.

언제 어디서 먹어도 좋은 스팸, 싫어하지만 먹을 의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야채.


저 세 조합은 맞지 않는 음식궁합으로 보일 수 있겠으나

먹는 사람이 감동하며 맛있게 먹는다면 그건 궁합이 맞는 것이다.

현승님의 저격을 제대로 취향한 간장국수라고 생각한다.

존중입니다, 취향하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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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공적인 모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적인 것도 아닌 부모 모임에 갔다. 만남의 기대보다는 아이디어를 내놓고 회의 비슷한 것을 하게 되리라 기대했다. 회의 비슷한 방식으로 대화가 시작되었지만 결국 자기 이야기가 나왔다. 부모들, 특히 남들 한다고 다 하는 식으로 아이를 키우지 않겠다는 부모들의 모임이니 각자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런 부모들이니 한발 물러서서 보면 참 의식 있고 용감해 보이지만. 좋아 보이는 만큼의 불안함을 지니고 있다. 그런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뒤로 기댔던 몸의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고, 사람들의 말에 귀가 커지기 시작했다. 채윤이 대학입시를 통과하고, 어렵사리 현승이 고입 진로를 결정하고 한시름 놓았다 싶었지만, 실은 여전히 흔들리고 불안한 나 자신을 보게 된다. 나와 비슷하지만 다르게 키우는 부모들, 다르게 커가는 아이 얘기 들으며 어쩐지 마음이 새로운 자리로 간다. 대학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제 좋은 일을 한다는 어떤 아이. 모든 부모가 입을 모아 부럽다 했지만, 실은 나도 남편도 참 부럽다 했지만 우리 현승이가 그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마음에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분다. 일반고 가기로 했지만 언제든 돌이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이야기의 힘이다. 규정하고, 가르치는 태도, 편을 갈라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태도를 무장해제 시키는 것은 이야기의 힘이다. <스토리텔링 애니멀>은 내가 강의하거나 글을 쓰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이야기'에 목을 맨다고 일러주었다. 낮이나 밤이나, 어릴 적이나 나이 먹어서나, 함께 있을 때나 혼자 있을 때나. 이야기 속에 파묻혀 살았고, 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교인들이 설교 본문이고 주제고 다 잊어버리고 예화만 기억한다.'는 설교자들의 흔한 불만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교인들이 애니멀, 스토리텔링 애니멀이었던 탓이다. 그러니 기억에 남을 설교를 원한다면 살아 있는 이야기를 들려달라. 성경이 온통 이야기 아닌가. 


<재즈처럼 하나님은>도널드 밀러는 말 그대로 이야기꾼이다. <천년 동안 백만 마일>에선 모든 이야기의 구조, 그 구조를 밝히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모든 이야기는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한 인물이 무엇인가를 원하여 갈등을 극복하고 그것을 얻어 낸다.’ 나의 하찮은 일상이 맥락 있는 이야기 속 한 장면이라면 조금 낫지 않은가. 이야기의 힘을 알고, 백분 활용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더니 이제 '이야기 사업가'가 된 것 같다. 도널드 밀러의 최근작 <무기가 되는 스토리>는 사업, 영업하는 이야기이다. 이야기로 영업하는 이야기를 쓴 이야기이다. 기독교 아닌 일반 서적으로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를 했다니 그야말로 이야기로 출세한 사람이다. 마케팅도 이야기라는 것이다. 내가 뭘 줄 수 있는지 지루하게 늘어놓는 영업은 사람들 귀를 막기 딱 좋다고 한다. 이야기를 만들어 고객님을 이야기 주인공에 세우고, 고객님이 받아가실 것을 알려야 장사가 된다는 것이다. 암튼 이야기로 출세하신 도널드 밀러님, 부럽씸더.


읽은 지 한참 됐지만 소설가 정유정의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위기철 선생님의 <이야기가 노는 법>도 꺼내어 기념촬영 해봤다. 소설, 동화 작법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재미있고 유익했었다. <이야기가 노는 법>은 특히. 내적 여정, 꿈 집단, 치유 글쓰기 집단을 하면서 더욱 이야기의 힘을 믿게 된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건강한 사람이다. 설령 깨어지고 상처 난 이야기 외에 내놓을 말이 없다 하더라도, 이야기를 시작한 이상 이미 건강한 사람이다. 남은 생애 '이야기느님'만 믿고 따르겠노라 나를 봉헌하고 싶은 심정이다. 책을 읽더라도 읽은 책으로 인해 달라진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하고, 누구와 싸웠더라도 싸움의 기승전결을 아울러 자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야 하고, 기도하다 실망했더라도 나만의 기승전결을 찾아야 한다. 남은 생을 이야기에 봉헌한 자의 결심이다. (생래적 이야기 짐승이라 결심도 필요 없는 일이겠으나)


이야기에 삶을 봉헌할 때는 부작용도 있다. 잘난 척 하기 위해서 작위적으로 만든 기승전결들을 들어줄 수가 없다. 물론 듣는 척은 잘한다. '다시는 이 사람과 얘기하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친절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다. 부작용이 있지만 그리 아쉽지는 않다.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없듯, 모든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없으니. 모임에서 수줍게 자기 이야기를 꺼내놓고 울림을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경험을 보편화 하여 가르치려 들고 다른 사람을 틀렸다 규정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이 말을 길게 하면 부작용이 급성으로 나와서 막 집에 가고 싶고, 스마트폰 꺼내서 페북 보고 싶고 조급증이 생긴다. '워워~ 귀담아듣지 않아도 돼. 채윤 현승 싸울 때 하는 것처럼 안 들림, 안 들림, 하고 귀를 쳐! 너가 다 아는 부작용 증상이니 급하게 마음먹지 말고. 안 들어도 돼, 안 들어도 돼. 너보고 뭐라 하는 거 아냐.' 이런 말로 달래면 된다. 


여하튼 나는 스토리텔링 애니멀로서의 정체성을 찾았으니 더욱 이 정체성을 확립하여 살겠다. 










한 주에 한 번 어린이집에서 아가들 음악수업을 빙자하여 발달체크도 하고 부모 상담, 교사 교육도 한다.

가끔 보는 장면인데 볼 때마다 마음이 한참 머문다. 생선 반찬이 나오는 날엔 선생님들 너나 없이 위생 장갑을 끼도 생선 가시를 발라낸다. 그러고 나면 냄새에 물리고 질려 정작 자신은 먹지 못한다고 한다. 20대 초중반 나이 선생님도 있다. 집에서 자기 먹을 생선을 저렇게 살뜰하게 정교하게 바를까? 집에서라면 가시 발라내는 게 귀찮아 아예 안 먹을 지도 모른다. 생선 가시 발라내는 저 모습은 보기 좋다고 말하기 뭣한 야릇한 뭉클함이다.

뉴스 하나가 제대로 터지면 포털 검색어가 우르르 한 곳으로 몰리고. 한 집단을 싸잡아 비난하고 증오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세상에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처럼. 애초 선한 집단 악한 집단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거침 없이 갈라치고 혐오한다. 무서운 세상이다. 뉴스 한 번 터질 때마다 어린이집 선생이란 이유로 두려워 하고 위축되는 모습을 본다.

어느 집단에든 사람이 있고, 개인이 있다. 평생 발라 본 생선 가시보다 더 많은 양의 생선 가시를 하루에 마지고 있는 젊은 선생님. 유난히 행동이 많은 아이들이 몰려 일년 내내 기 빨리며 씨름하다 결국 탈진하여 상담소를 찾는 선생님. 자기 몫을 감당하는 사람들, 가끔은 자신을 해하며 자기 자리를 지켜내는 많은 사람들이 공동체를 떠받치고 있다. 생선 가시 발라내는 저 손들, 이 얼마나 고귀한 하찮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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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치료에서 헬로송과 굿바이송이 참 중요합니다. 치료의 시작과 마침의 의식을 담는 노래이지요. 어떤 일이든, 적절한 의식(ritual)으로 마치는 것은 의미의 마침표를 찍는 일과도 같습니다. '신앙 사춘기' 연재를 마치고 수고한 나를 격려하는 의미로 남편에게 옷을 한 번 사달랠까, 어쩔까. 가장 자본주의적인 머리를 굴리고 있었는데요. 자연스레 다가온 리츄얼은 기도 피정이었습니다. 더 아름다운 마침표는 인터뷰 글과 영상이네요. 글, 영상에 더하여 노래도 한 곡 있습니다.


+ Ritual 1 : 글


[정신실의 신앙 사춘기] 연재 마치고 인터뷰를 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질문받고 싶어 하는 존재인가요. 부끄럽다, 민망하다 하면서도 누군가 내 이야기를 궁금해 하기를, 물어주기를, 잘 들어주기를 바라지요. 나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답을 하는 것은 나를 내 앞에 세우는 과정이기에 큰 배움이 됩니다. 


저는 인용문 많은 글을 좋아하지 않고, 잘 읽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 글을 쓸 때도 가급적 뭐든 제 말로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번 연재에선 의식적으로 인용을 많이 했습니다. 눈 밝은 편집 기자님께서 이 부분을 간파하셨습니다. 연재 마치고 ‘독서 여정’이란 주제로 인터뷰 하자고 하셨지요. 귀신 같이 캐치하신 내용으로 파고들어 질문해주셨습니다. 덕분에 신앙 사춘기를 건너온 저만의 방법이 무엇이었는지 저도 다시 확인하게 되었네요. 쓰기와 읽기. 제 한 몸 추스르고 지켜내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뉴스앤조이 인터뷰] '하나님 부재' 느낀 방황의 시간, 독서로 뚫고 왔다



+ Ritual 2 : 영상


녹음한 자기 목소리 민망해서 못 듣는 것, 저만 그렇지 않죠? 음성 직면(voice confrontation)이라는 말이 있어요. 상담을 통해 자기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을 ‘직면’이라고 하죠. 매우 힘든 순간이거든요. 자존감이 높네 낮네 해도, ‘남이 보는 나’보다 스스로 더 낫다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음성 직면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자기 목소리는 공기 전파 뿐 아니라 뼈로 전달되는 음파까지 듣게 된대요. 아마도 더 풍부한 소리로 듣게 되겠지요. 녹음된 소리는 대체로 더 고음으로 들리고 가볍게 들리기에 기대에 못 미친대요.


하물며 영상은! 저는 방송 등에 나온 제 영상을 제대로 끝까지 본 적이 없어요. 그래도 궁금하니 음소거 하고 보고나, 짧게 짧게 보죠. 저만 그런가요? 영상 속 저보단 주름이 없고 통통하고 예쁠 거라는,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 때문에 직면이 어려운 것 같아요. (네, 내용은 모르겠고 예쁘게 나오는 게 제일 중요해요. 저는 그래요.)


이번 영상은 다 봤습니다.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 이미지 관리 따위는 잊고 봤습니다. 제가 쓴 많은 분량의 글과 했던 말이 그야말로 ‘편집 되어’ 나온 것이지요. ‘편집’은 얼마나 위력을 가진 말입니까. 진실을 살짝 고쳐 ‘가짜 뉴스’ 만드는 것도 편집의 힘입니다.이 영상에서도 편집의 힘을, 아니 편집의 아름다움을 봅니다. 제겐 그저 일상, 심지어 하찮다고 느껴지는 개인적인 이야기에 의미의 옷을 곱게 입혀주셨습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실감하게 만들어주셨어요. 역시나 제 목소리와 얼굴과 표정은 맘에 들지 않고 민망하지만 편집자(또는 창작자)가 담은 메시지와 의미는 참 좋습니다. 민망함 따위는 잊고 저 자신 독자가 되어 영상이 전하는 메시지에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 Ritual 3 : 노래


연재 내내 엄마가 단골로 등장했습니다. 엄마에 대한 얘기를 들으시는 분들이 '부럽다'고 하십니다. 엄마와 잘 지낼 수 있는 딸(아들도)이 많이 않지요. 엄마를 지금처럼 투명하게 대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시간을 보냈는지 말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세요. 마음 속으로 수십 번 엄마를 죽였다 살렸다 했습니다. 제게 신앙 사춘기는 교회를 넘어서고, 종교적 신앙을 넘어서는 일인데 그 모든 상징은 '엄마의 신앙'으로 대변될 수 있습니다. 연재 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가사가 하나 떠올라 노랫말을 지었습니다. 거의 모든 찬송가를 다 외우던 엄마가, 눈도 흐려져 읽을 수 없는 엄마가, 이제 외워 부를 수 있는 찬송도 거의 없습니다. 가장 자신 있게 부르는 곡이 '예수 사랑하심은'인데. 그 노래 녹음하고, 엄마의 노래 뒤에 노래를 하나 만들어 붙였습니다. 가사를 쓰고, 남편을 졸라 곡을 붙여 달라 했고요. 젊은 날 한 때 곡좀 쓰던 남편이 20년 손을 놓았던 작곡펜을 잡았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곡, 마음 먹고 들려드리려 했더니 티스토리가 음성 파일은 못 올리게 하네요. 제가 만들고 제가 부르며 우는 노래, '떠나서 다다른 사랑'입니다.



[떠나서 다다른 사랑] 

                                     

                           작사 정신실 / 작곡 김종필


(엄마 노래)

예수 사랑하심은 성경이서 배웠네

우리덜은 약허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승경이 쓰셨네 아멘


(딸의 노래)

예수 사랑 그 사랑 나는 엄마에게 배웠네
엄마의 눈물 엄마의 걱정 그건 엄마의 기도
예수 사랑 그 사랑 나는 엄마에게 배웠네
엄마의 노래 엄마의 한숨 그건 엄마의 사랑
그 슬픔이 나에게 더욱더 큰 슬픔이 되었고
그 걱정은 내게 와 더욱더 옥죄는 두려움 됐네
눈물 어린 찬송 걱정 담긴 기도
나 떠났네 나 버렸네 부끄런 그 사랑

(간주)

날 사랑하심 음음 날 사랑하심 음음
예수 사랑 그 사랑에 나 닿고 말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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