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복음과 상황> 4월호에 실린 인터뷰이다. 글도 말도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다른 느낌의 드러냄과 마주함이 된다. 긴 숙고로 정리되어 나오는 것이 글이라면, 일단 내보낸 후에 곱씹게 되는 것은 말이다. 인터뷰이로서 질문을 받고 답을 하는 것은 늘 좋은 경험이 된다. 내 입에서 나온 답을 복기하면서 몰랐던 내 마음을 알게 되기도, 따로 굴러다니던 생각의 구슬을 꿰어 (나만의) 보배로 간직하게 되기도 한다. 좋은 질문과 함께 잘 정리된 인터뷰 기사로 흩어진 구슬을 꿰어주신 <복음과 상황> 정민호 기자에게 감사하며 공유한다.


‘신앙 사춘기’를 지나며 마주한 하나님, 교회 그리고 목사들 : 《신앙 사춘기》 개정판 펴낸 정신실 작가


신앙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때가 있다. 교회와 목사, 여태까지 해온 신앙생활들이 다르게 보이는 시기다. 신앙 전반에 냉소와 반항을 품은 채 교회 생활을 견디거나 교회를 떠나는 이 시기는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정신실 작가(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소장)는 이 시기를 ‘신앙 사춘기’라 이름 붙였다. 2019년 그가 펴낸 《신앙 사춘기 – 신앙의 숲에서 길 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뉴스앤조이)는 목회자 아내가 된 후 ‘신앙 사춘기’로 보내며 겪은 일들과 진솔한 마음을 정리한 결과물이었다. 그의 글에는 목사를 향한 복잡한 마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앙 사춘기에 들어선 후 “무엇보다 누구보다 위선적인 목사가 싫었다”라는 그의 고백은 교회에서 목회자가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신앙 사춘기》 개정판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정신실 작가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신앙 사춘기 이후 이야기가 궁금했고,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자 셋(아버지, 동생, 남편)을 모두 목사로 둔 그에게 ‘목사의 역할’ ‘목사의 쓰임’은 긍정이기만 할 수도 없고, 부정이기만 할 수도 없을 것이었다. 정 작가는 또다시 신앙의 새로운 국면을 시작하고 있었다. 3월 3일 인터뷰 당일은 그가 입학한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학기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인터뷰는 캠퍼스 근처 스터디룸 카페에서 진행되었다.

《신앙 사춘기》 개정판이 출간되고, 지난주엔 출간 기념 저자 특강도 하셨습니다.
사실 말이 개정판이지, 누락된 글 하나(동생이 목사를 그만두면서 쓴 글)가 들어간 거예요. 내용이 많이 달라졌는지 따지면 큰 의미가 없고, 책 출간 이후로 여러 독자분과 만나면서 정리된 제 생각들을 다시 독자들 앞에서 나누는 것이 바람이었죠. 신앙 사춘기 이후의 이야기를 이어서 해달라는 요구가 있었고요. 강연을 이어가면서 책에 쓴 고민과 생각이 더 명료해졌어요. 이것을 시작으로 다시 신앙 사춘기 이후를 글로 쓰는 작업도 차차 해보려고요.

더 확장된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다는 뜻인가요?
네. 아주 구체적으로 그려지지는 않지만요. 어쨌든 ‘신앙 사춘기’라는 이름은 대상이 명료하잖아요. 사춘기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죠. 저는 사실 목사님들조차도 ‘신앙 사춘기’를 겪으신다고 생각해요. 신앙 여정, 신앙 발달 과정에 있는 모든 사람이 겪는 일이죠. 그래서 그 이후에도 여전히 신앙생활이 있고, 일상이 계속되니까 여러 질문에 대해 포괄적으로 써보고 싶었어요. 사춘기가 지나면 어른이 되잖아요. 어른이 된다고 행복해지지는 않지만 어른 나름의 삶과 의미가 있는 것처럼 신앙 사춘기 이후도 분명 의미 있는 삶과 신앙이 있어요. 그 이후 제가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무엇을 견뎌가는지와 같은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신앙 사춘기 너머’라고 할 수 있겠네요. 혹시 지금 대학원 공부를 또 시작하신 것이 연관이 있을까요.
아주 큰 연관이 있죠. 스캇 펙의 영적 발달 4단계를 보면, 1단계는 혼란스럽고 반사회적인 단계, 2단계는 형식적이고 제도적인 단계, 3단계는 회의적이고 개인적인 단계, 마지막 4단계는 신비적이고 공동체적인 단계라고 하거든요. 신앙 사춘기 이후 어떤 여정을 가야 하냐 묻는다면 신비적이고 공동체적인 것이라고 안내하는 거죠. 신비적인 건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없는 부분을 모르는 대로 두고 여정을 걷는 것이겠지요. 신앙 사춘기 때는 몰라서 너무 속상하고 고립되어있는 것 같았지만, 원래 하나님은 알 수 없는 분, 신비인 분이라는 걸 인정하고 사는 것이겠죠.
안셀름 그륀은 《아래로부터의 영성》(분도출판사)에서 ‘위로부터의 영성’과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소개해요. 신앙에는 저 높은 곳에 초월해서 계신 하나님을 향한 이상을 가지고 신학과 교리를 배우고 더 높이 상승하고자 하는 방향의 영성도 있고요. 내가 있는 아래, 지금, 여기, 하찮고 보잘것없고 누추한 여기에서부터 시작하는 영성이 있죠. 두 가지 축이 말이에요. 이걸 신앙 사춘기 이후에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고, 체험적으로도 깨달았죠.
그러면서 결국 중세 신비주의 영성을 공부하고 싶어졌어요. 많은 중세 영성가들의 가르침에서 소중한 답을 많이 찾았기 때문인데요. 위-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라는 분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갈 때 그 방법으로 두 개의 신지식(神知識)이 있다고 해요. 긍정신학과 부정신학. ‘부정신학’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묘사하는 모든 표현이 인간의 감각적 표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정의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내가 이때까지 가졌던 하나님 이미지, 즉 ‘하나님은 어떠어떠한 분이다’ 같은 정의를 하나씩 제거해가며 하나님을 만나가는 것이 부정신학이에요. 물론 이전에 긍정신학이 먼저 있어야죠. ‘하나님 안 계셔. 내가 여태까지 알던 하나님은 어디 계시지?’라고 생각하던 시기가 신앙 사춘기였고, 제가 겪은 영혼의 어두운 밤이었어요. 그 이후 제가 하나님이라고 알던 것들이 무너뜨리면서 새롭게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여정이 신앙 사춘기 너머 같아요. 그러니 신앙 사춘기는 더 깊은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이었던 거죠.
중세 신비주의 영성은 신앙 사춘기 이후 제 눈을 뜨게 해주었어요. 개신교 신학교에선 이런 영성을 공부하기가 쉽지 않겠다 싶었어요. 중세 영성을 잘 배워보려고 가톨릭 신학교로 갔는데 마음은 자유롭고 편안한 것 같아요. 경계를 확 넘어왔음에도 이 하나님이 저 하나님이고, 저 하나님이 이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들고요.(웃음)

 


‘신앙 사춘기’ 이전 작가님의 신앙 여정은 어떻게 구분이 될까요?
남편이 신학교를 가기 전까지를 첫 번째 단계라고 한다면, 남편이 신학교를 가고 파트타임 사역할 때가 두 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겠네요. 지금 남편이 담임 목회를 하는데요, 우리 교회는 ‘담임목사’ 대신 ‘섬김목사’로 불러요. 담임 목회라는 말이 엄밀히 따지면 정확한 표현은 아닌데, 지금이 세 번째 단계라고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남편이 신학교 가기 전까지는 정말 ‘교회의 딸’로 살았어요. 어릴 때 주일학교 초등부를 졸업하고 중등부 무렵부터 교사를 맡았거든요. 아버지가 목회하시던 교회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유아실 개념이 없던 시절 아이들을 맡아서 아이를 봐주는 일이었어요. 즐거웠죠. 청년 시절에는 주일학교 교사, 성가대, 주보 편집장도 하면서 열심을 냈죠. 주일성수는 정말 목숨처럼 지켰으니까요. 회사가 주일날 출근하라고 해서 사표도 내고 그랬어요.(웃음) 결혼하고도 남편과 가정교회 리더를 했어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였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식사하면서 가정교회 셀모임을 한 거죠. 정말 자발적으로 즐겁게 했던 것 같아요. 그땐 성가대 지휘도 했고요.

그러다 자발적으로 신앙생활할 수 없게 된 시기가 왔군요.
남편이 신학을 하면서 제 위치가 바뀌어 버렸어요. 자발적으로 하던 사람이었는데, 당위로 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지니까 제가 달라진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저는 정말 기도하고 싶었던 사람인데, 새벽기도 안 나온다고 체크당한다든지…. 저는 가만두면 알아서 교회 일꾼으로 살 텐데, 목회자 사모라는 이유로 자율성이 박탈당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어요. 이때가 ‘신앙 사춘기’의 시작 같아요. 이명박 정권 때였는데, 교회와 사회의 거리를 느끼며 분열적 마음들이 갑자기 올라오기도 했고요. 중년을 맞아, 제 안에는 영성적 허무감 같은 것들이 작용했어요. 한 길게는 10년 정도 마음이 방황하는 시기를 겪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방황하고 있을 때도 제 교회 생활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어요. 목회자 아내로서 역할은 했고요. 그러다 보니 몸이 많이 망가졌죠. 그런 시간을 길게 통과했어요. 제가 《신앙 사춘기》를 쓸 만큼 생각이 정리되고 힘이 생겼을 때 남편은 교회 분쟁으로 두 차례나 진통을 겪은 분들이 세운 현재 교회로 청빙을 받았어요.

구분하셨던 단계 중 ‘세 번째 단계’죠?
맞아요. 저로서는 《신앙 사춘기》를 쓰면서 의지적으로 마침표를 찍고, 다른 신앙의 단계로 가겠다고 생각한 시기였어요. 교회 문제로 아픔을 겪은 이들이 다 같이 모여 교회 생활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아요. 스스로 인식하든 하지 않든 상처로 인한 날카로움 같은 것들이 있죠. 《신앙 사춘기》 저자의 남편으로서 남편은 그런 분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긴 하죠. 하지만 목회자에게 상처받은 분들 앞에서 설교하고 목회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쩔 수 없는 불신을 인내해야 하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어쩌면 이 시대의 ‘어떤’ 목사들에게 주어진 소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고요. 기꺼이 욕먹어주는 목사가 필요한 시대 같기도 해요. 어떻게 보면 제 신앙 여정은 목사님들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고 그들을 추앙하던 시기, 반대로 목사님들을 향해 분노하며 저 자신의 신앙을 혐오하던 시기, 그 너머 또 다른 목사님들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서 기꺼이 견디고 감당하는 시기로 나뉜 것 같네요.

교회에 대한 신뢰를 잃은 이들 중에는 목회자에게 실망했다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걸 보면 교회와 신앙생활의 중심에 목회자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현실에서 목회자의 필요와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교회에 목회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교회와 목사에 대해 냉소만 남은 시절이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존경할 영적 지도자가 필요해요. 그런데 신을 매개하는 역할이라서 어려운 것 같아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투사하는 자리가 목회자니까요. ‘신앙 사춘기’를 겪는 분들이 어떤 목회자를 기대할까요? 저마다 다를 겁니다. 교회 분쟁이 생겨도 싸우는 이유가 저마다 다른 것처럼요. 그래서 어려운 게 교회 문제 같아요.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여러 욕망을 투사하지만, 사실 가슴 깊은 곳에 있는 마음은 목사 스스로 자기 자신이 되어 살고 신앙하기를 바란다고 생각해요. 진실한 목회자요. 진실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 되어 사는 사람이잖아요. 목사님이 따뜻했으면 좋겠어요, 소통을 잘했으면 좋겠어요, 설교를 잘해야죠 등 여러 바람이 있겠죠. 하지만 궁극적으로 영적 지도자에게 바라는 건 ‘영혼의 투명함’이지 않을까요. 말처럼 쉬운 덕이 아니죠.

목회자가 교인들의 다양한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기보다 진실한 모습을 비추는 게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예를 들면 1년, 52주 설교가 모두 성공하면 그건 위험한 거죠. 매주 하는 설교마다 교인들이 은혜받았다고 열광한다면 말이에요. 자기 판단 없이 목사에게 본인을 투사하거나, 목사가 교인들 기대에 맞는 설교만 준비한 거겠죠. 아니면 교인들이 자기 존재로 설교를 듣는 게 아니라 ‘좋은 교인’ 페르소나로 교회 생활을 하고 있을 수도 있고요. 사람이라면 52주 설교 중 절반은 별로인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목회자도 교인도 자기 자신이 되어 설교하고 듣는다면, 어떤 때는 은혜가 되고 어떤 때는 피차 상태에 따라 무덤덤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그래야 사람이죠.(웃음)

혹시 목회자의 설교가 성공할 때가 따로 있나요?
제가 목사인 남편을 질투할 때가 있는데, 바로 장례식이에요. 질투라 했지만, 장례식 때 저는 목회자 권위가 어떻게 아름답게 쓰이는지를 봐요. 가족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분들과 정말 마음으로 함께하고 싶고, 그들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전하고 싶지만 어떤 말이 위로가 되겠어요. 그런데 목사인 남편이 장례 예배에서 진심을 담아 전하는 설교는 유족들에게 위로도 되고 희망도 되더라고요. 인간의 실존적 슬픔 앞에서 목회자가 권위를 사용할 때 얼마나 큰 힘이 될 수 있는지를 느꼈어요. 결혼식도 마찬가지예요. 결혼식은 두 사람, 두 영혼이 맺는 깊은 약속인데, 잘 준비된 결혼식에서 목사가 진심을 담아 설교하고 약속의 증인이 되어줄 때 성혼 선언이 절대 가볍지 않은 것임을 경험하죠. 사람들이 실존의 문제나 사건 앞에서 홀로 감당할 수 없을 때, 목사 이름, 사제 이름으로 손잡아주는 일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코로나 이후, 제가 아는 많은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했어요. 팬데믹이 상실의 시대를 사는 것이잖아요. 상실이 만들어내는 ‘허무의 강’ 같은 게 있어요. 이럴 때 가벼운 것들이 물 위로 떠올라요. 쓸데없는 것들, 내 안에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먼저 걸러지는 거죠. 어렵게 꾹꾹 참아가며 기성교회에서 목회하던 분들이 허무의 강을 통과하며 어떤 결단들을 하시게 되었나 봐요. 이 시기에 교회를 개척하신 분들은 어려움이 많을 거예요. 교회가 잘될 때 해도 될까 말까인데, 개척하고 온라인 예배밖에 드릴 수 없다니요. 자신이 가진 결핍, 어려움을 마주하고 살아가는 시간을 통과하여 자기 자신으로 목회하게 되시길 기도하는 마음이에요. 저는 그런 목사님들에게서 희망을 봐요.

공교롭게도 작가님 주변의 가장 가까운 남성들이 ‘목사’였습니다. 아버지, 남편, 남동생이 목사였기에 적어도 3명의 목사를 가까이서 보셨는데요. 바깥에 보이는 모습 외에도 ‘이면’을 많이 목격했을 것 같아요.
어쩌다 보니 다양한 목사의 다양한 얼굴을 보며 성장하고, 겪고, 신앙생활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신앙 사춘기》에서는 정말 존경하는 목사에게 크게 실망한 채로 작심하고 글을 썼지만, 어느 목사님에게나 여러 면이 있다고 봐요.
어릴 때 목사인 아버지에 대해 기억나는 것들이 있어요. 말하자면, 전도사님을 부당하게 해고하셨던 장면이에요. 전도사 사모님이 죄송하다고 하면서 울고 가셨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어요. 당시 교회에서나 어린 제 안에 부당해고 같은 개념이 있지도 않았는데, 막연하게 아버지가 부당한 힘을 행사한다는 느낌을 받았죠. 아버지는 이북이 고향이라 이북 사투리를 쓰셨는데요. 엄마와 아버지가 힘들어하셨던 건, 부흥회 끝나고 교인들이 한 얘기들이었어요. “며칠 쌀밥을 먹었는데, 이제 어떻게 보리밥을 또 먹냐”라고 하면서 ‘정거장’을 ‘덩거당’이라고 발음하던 아버지의 이북 사투리를 흉내 내던 일도 기억에 남네요. 아버지를 참 좋아하고 존경했는데요, 목사였던 아버지를 떠올리면 뭔가 석연치 않고 슬픈 감정들이 떠올라요.
《신앙 사춘기》 개정판에 들어가는 건 동생 글인데, 동생은 목사를 그만두었어요. 이유는 그런 거였죠. 교인들에게 보이는 모습 때문에 기도하는 척, 소망이 있는 척, 하는 것을 더는 할 수 없겠다고 했어요. 저는 그것 역시 목사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역할을 하는 게 나쁜 것도 아니고, 역할과 자기 자신을 구분할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마다 가진 민감성과 한계가 다르기에 동생의 선택을 충분히 공감해요. 목사의 위선에 상처받았던 저로서는 그런 용기가 고맙기도 하고요.
남편은 뒤늦게 목사가 되었어요. 결혼하고 한참 뒤에 많은 고민을 거쳐 목사가 되었죠. 누구나 그렇듯 목회 시작할 때 품은 비전과는 전혀 다른 길 위에 있는 것 같아요. 아까 말했듯 현재의 부르심에 충실하기 위해 애쓰며 지금 앉은 자리를 꽃자리로 여기고 있어요. 제가 모든 목사님의 내면을 볼 수 있지는 않지만, 때로 가까운 곳에서, 때로 거리를 두고 여러 모습을 보며 신앙생활했네요. 목사님들의 여러 얼굴을 담은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소설로만 말할 수 있는 진실이 있잖아요. 그걸 써볼 수 있을까 모르겠네요.(웃음)

 


목회자 아내로서도 고충이 많았을 듯합니다. 아까도 혼자서도 신앙생활 잘할 사람인데, 사모 되고 나서 힘드셨다고 하셨는데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구조적으로 목회자 아내는 가장 소외된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어요.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이 층위별로 전부 존재하는 것 같아요. 목회자 남편의 권력과 자신을 동일시해서 흔히 명예 남성 정체성으로 교회 내 가부장적 구조를 더 강화하고 다른 여성들을 더 억압하는 분들도 있고요. 어떤 분들은 사모로 부르신 소명이 있다 여기며 교회와 교인들이 요구에 충실하죠. 드물게, 자기 자신으로 살면서 신앙생활하고자 목소리를 내는 분도 있고요. 입장은 다르겠지만, 근본적·구조적으로는 근거 없는 통념의 피해자인 것은 같다고 봐요. 제 교회 같은 경우, 공식적으로 ‘사모’ 호칭을 쓰지 않아요. 그렇다고 제가 보통의 비목회자 가족의 한 사람처럼 신앙생활하냐고 물으면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유능한 간호사로 소명감과 자긍심을 가지고 일하던 아끼는 후배가 있어요. 남편이 부임한 교회에 “사모들은 일하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죠. 굳이 하겠다면 남편 사례비에서 일정 정도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는 거예요. 말도 안 되잖아요. 교회가 목회자 아내를 목사와 함께 묶어서 동일한 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거예요. 목회자 아내라 불리는 한 사람, 한 존재를 지우고 희생시키는 구조에서 교회가 세워지고 굴러가는 셈입니다. 목회자 아내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개인적으로 어떻게 인식하든 구조 자체가 폭력적이죠. 어쨌든 자기로 살지 못하게 하는 구조에서 목회자 아내는 피눈물 흘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 너무 가슴 아파요.

목회자 아내가 이런 구조를 인식하는지가 ‘다른 문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많은 경우, 선택권이 목회자 아내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죠. 원론적으로 목회자로 부름 받은 사람은 남편이잖아요. 남편이 목회자로 부름 받았고, 나는 주체적으로 신앙생활할 권리가 있다면 직장생활하는 것이, 심지어 어느 예배에 나가고 안 나가고 하는 것이 나 개인의 선택이죠. 이 당연한 말을 하는 거예요. 세상 어느 여성이 남편 직업에 따라 자기 일과 삶을 이 정도로 지배받을까요? 저는 주일에 타 교회 강의가 있으면 다른 곳에 가서 예배드리게 되기도 하고, 수요예배 등은 안 나가기도 하거든요. 제가 이런 식의 교회 생활을 계속하려면, 아마 저희 남편은 한국의 많은 교회에서 요구하는 목회를 포기해야 할 거예요. 남편에게 고맙고 미안한데요. 큰 교회를 목회하기는 틀렸다고 농담하곤 하죠.(웃음) 목회자 아내의 기본적인 인권을 지키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가 있다는 뜻이기도 해요.

목회자 아내가 이런 구조에서 오롯이 본인답게 신앙생활하기 위해서는 목회자의 역할도 필요하다는 말씀이네요.
현실적으로 ‘결단’이라고 할 만한 수준이 필요한 것 같아요. 아내를 위한 교회의 부당한 요구를 일차적으로 막아줘야 하니까요. 당연히 핍박받을 수도 있고요. 제 경험에서도 사모가 왜 새벽기도 안 나오냐, 이런 얘길 먼저 목회자인 남편이 들어야 했고요. 남편이 당하는 일을 아니까 새벽에 일어나 억지로 교회에 가려 하면 남편이 그렇게 말해줬어요. “당신이 기도하고 싶으면 가, 그 이유가 아니라면 가지 마”라고요. 정말 고마웠죠. 그런데 이건 궁극적으로 목회자인 남편 자신을 위한 결단이기도 하단 생각이 들어요. 자신이 자기답게 목회하기 위해 누구도 수단 삼지 않겠다, 가장 가까운 아내와 가족부터 목회의 수단으로 삼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거든요. 그게 자기 발로 서는 목회일 텐데 쉽지 않죠. 제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목회자 아내가 된 후 신앙 사춘기를 겪고, 그 와중에도 교회에서 할 일은 다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웃음) 지금까지 교회를 떠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붙잡아준 건 무엇일까요.
저는 교회를 떠날 수 없어요. 저는 교회를 사랑해요. 신앙 사춘기로 앞이 안 보이는 캄캄한 시절이라고 느꼈던 때, 아빌라의 테레사라는 중세 여성 신비가를 만났어요. 자서전을 보니 저랑 비슷한 면이 많으셨어요. 에니어그램 유형도 같은 것 같고요.(웃음) 《영혼의 성》(바오로딸)이라는 그분의 유명한 저서를 통해 깊은 영성 안내를 받기도 했지만요. 성녀가 사시던 시대 상황과 선택을 보며 감동받은 바가 있어요. 종교개혁 즈음에 태어나셨어요. 타락할 대로 타락한 가톨릭교회와 수도원 안에서 자라신 거죠.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통해 바깥으로 나왔다면, 테레사 성녀는 루터와 다르지 않은 문제의식을 갖고 부패한 수도원을 개혁했어요. 기존에 있던 가르멜 수도회를 개혁하여 ‘맨발의 가르멜 수녀회’를 창설했어요. 개혁의 유일한 길을 예수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여겼기에, 가난과 청빈의 삶을 위해 실제로 맨발로 평생 살아가기로 했죠. 종교개혁 당시 제가 가톨릭교회 안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한번 생각해봤어요. 본질과 멀어져 부패한 교회를 끌어안고 내부 개혁자로 사신 테레사 수녀의 마음이 가까이 느껴져요. 저는 지금도 교회를 사랑하고, 무너진 교회라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걸 알아요.

에니어그램을 통해 자기 내면과 영성을 돌아보는 강좌도 진행하셨습니다.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에서 에니어그램으로 영적 여정의 문을 연다고 할 수 있어요. 영성이 다름 아닌 ‘하나님 성품을 살아내는 것’ ‘하나님 형상을 담은 고유한 나를 꽃피우고 사는 것’이라고 할 때, 자기 인식이 선행되어야 해요. 에니어그램이 그 시작을 도와주고요. 연구소에서 ‘영성’을 대놓고 표방하지는 않아요. 영성을 살고자 하는 비목회자 여성 다섯이 일군 공동체예요. 상담 공부한 사람들이 모여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발견하고, 서로 공부하고 자라가면서 상담과 강의를 통해 오시는 분들을 도우려고 해요. 신앙 사춘기를 겪고 자기 발로 서는 신앙을 더듬는 분들이 찾아와 연결되기도 하고요.
13세기 베긴(Beguine)이라는 여성 공동체가 있었어요. 특이한 점이 있어요. 창시자도, 예규도 없는 느슨한 공동체였어요. 당시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수도원으로 가서 수녀가 되거나 결혼하는 일이었는데, 수도원에 가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어요. 그런 시절에 수녀가 되지 않았더라도 정말 예수님께 자기 삶을 봉헌하고 싶은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구성한 거죠. 결혼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출가해도 되고 자기 집에 살아도 됐어요. 오직 예수님을 향한 사랑으로, 그분처럼 살고 싶어서 사회 가장 낮은 곳으로 모여들었던 거죠. 한센병 환자를 예수님처럼 돌보며 삶과 영성을 살아냈어요. 남성들이 이런 공동체를 만들 수 있었을까요. 여성들이 모였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고, 지금 여기에서도 그런 여성 공동체를 작게 만들면서 살고 싶어요.

진행 정민호 기자 pushingho@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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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자님께  (1) 2021.12.24

쓸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아버지를 잃은 한 아이가 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는 목사였다. 장례식에서 울고 있는 아이에게 아버지의 친구 목사님이 다가와 말했다. “울지 마라, 너의 아버지 천국에 가셨는데 왜 우냐? 좋은 곳에 가셨다. 울지마라.” 아이는 그 말에 눈물을 그쳤다. “아버지 좋은 곳에 가셨지.” 울지 않기로 작정했다. 천국에 가신 아버지를 두고 슬퍼하는 것이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죄를 지으면 천국에 갈 수 없고, 천국에 가지 못하면 아버지를 만날 길이 없으니 슬퍼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이는 하늘 아버지를 믿기로 했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그리워 슬퍼지면, 그리운 아버지를 다시 만나기 위해 참아야 했다. 울지 않을 수는 있었지만, 생각과 상상력까지 어쩔 수는 없었다. ‘하나님이 내게도 좋은 분일 텐데, 우리 아버지를 좋은 곳으로 데려가시려고 나는 이렇듯 아비 없는 아이로 만드신 것은 정당한 것인가?’ 물을 곳 없는 아이는 밤마다 일기를 썼다. 쓰기를 잘한 것이, 답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계속 물을 힘을 길렀다.

 

   이는 어쩌다 글을 쓰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 들려주는 나의 이야기이다. 단 한 번도 작가의 꿈을 꾸어본 적이 없다. 글을 쓰게 된 것은 순전히 일찍 마주한 아버지의 죽음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면 작가가 될 수 있냐는 어린 학생들의 질문을 받을 적이 있다. 경험의 한계 안에 갇힌 나는, 나처럼 치명적인 상처를 입으면 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차마 그리 말할 수는 없으니 글쓰기를 타고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곤 한다. 마땅한 답이 없어서 둘러댄 말인데, 나와 비슷한 글쓰기 운명론자가 또 있었다. 다섯 살 때부터 글을 썼다는 미국의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 조앤 디디온(Joan Didion)이다. 그녀는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에서 글 쓰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조앤 디디온 자신)에 대해 말한다. 다섯 살 적에 왜 혼자만의 노트에 글을 쓰기 시작했을까, 스스로 묻는다. 그리고 설명이 불가함을 말한다. 글을 쓰고자 하는 충동을 가진 사람이 그런 충동을 가지지 않을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외롭게 만사에 저항하며 재배치하는 사람, 불안한 투덜이, 분명 태어날 때부터 어떤 상실의 예감에 감염된 아이들이 있는데, 그런 아이들이 글을 쓰게 된다고. 물론 그녀 자신이다. 그렇게 쓰도록 타고난 것이다.

 

   사춘기에 갑자기 아버지를 잃고, 삐뚤어진 마음이 된 아이 앞에는 여러 선택지가 있었을 텐데 왜 하필 글을 썼을까. ‘불안한 투덜이, 어떤 상실의 예감에 감염된, 써야 할 운명을 타고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순신 장군은 전쟁 중에 일기를 써서 난중일기를 남겼고, 유대인 소녀 안네(Anne Frank)2차 대전 중 은신처에 숨어서 쓴 안네의 일기가 세상에 알려져 반전 문학의 백미로 꼽히며 읽히고 있다. 박완서 선생님은 아들을 잃은 참척의 고통을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책으로 썼고, 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 역시 아들을 잃고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를 썼다. 후대를 위해 기록으로 남기겠노라 주먹 불끈 쥐고 쓴 글이 아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체포의 위협을 느끼며, 상실의 고통 속에서 외롭게 저항한흔적일 것이다. 마주한 현실에 비하면 미력한 몸부림 일지라도, 이들은 썼다. 인생의 고통을 글로 방어하는 사람들, 이분들도 쓸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다. 또 없을까? 같은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

 

   ‘치유 글쓰기라는 이름으로 여러 모임을 이끌고 있다. 첫 모임에서 인사를 나누다 보면 누가 묻지도 않는 글쓰기 실력을 고백해오곤 한다. “글은 잘 못 써요.” 처음 보는 이에게 낯을 가리듯, 글쓰기 자체에도 낯을 가리며 부끄러운 태도이다. 처음엔 곧이곧대로 믿었다. ‘글쓰기와는 거리가 있는 분들이구나, 치유에 꽂혀서 여기까지 오셨구나.’ 모임이 거듭되면 이 운명론자들의 실체가 드러난다. 진솔하게 써내는 이야기의 다채로움과 체험의 깊이가 늘 상상 그 이상이다. 그 어떤 베스트셀러 문학보다 미학적이며 감동적인 글을 만나곤 하다. 알고 보면, 대부분 이미 혼자서 쓰던 분들이다. ‘치유의 글쓰기로 손색없는 글을 이미 일기장에, 비밀 블로그에, 스마트폰 메모장에 적는 사람들이었다. 목회자 성폭력 생존자들을 위한 치유 글쓰기 모임에서 만나는 자매들도 다르지 않다. 모임에 오기 전부터, 사건을 공론화하기 전부터 그들은 쓰고 있었다. 누가 쓰라고 한 것이 아니다. 법정 다툼을 염두에 두고 한 기록도 아니다. 왜 쓰는지, 이유도 목적도 모른 채 그저 썼다는 것이다. 나의 운명적 친구들, 태어날 때부터 어떤 상실의 예감에 감염된 글쓰기를 타고난 친구들이다.

 

글쓰기, 의미를 찾는 일

 

   이쯤 되면 글 쓰는 특정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을 찾아 모을 것이 아니라 왜 사람들이 고통 앞에서 글을 쓰는가, 물어야 할 것 같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죽음의 수용소로부터를 쓴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역시 쓰는 사람이었다. 수용소 안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무엇보다 거기서 건져 올린 인간 내면에 대한 통찰을 잊지 않기 위해서 처절하게 썼다. 정신의학자인 그는 죽음이 일상인 그 수용소에서 오래 살아남는 사람을 관찰했다. 그리고 발견했다. 의미, 삶의 의미, 살아남아야 할 이유를 가진 사람이 생존한다! 프랭클 자신, 다른 수용소로 간 사랑하는 아내를 다시 만나겠다는 간절함으로 죽음의 수용소를 버텨냈다. 어떤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은 의미를 발견하는 존재이며, 의미가 생존을 지탱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깨달은 그는 의미치료(Logotherapy)’를 창시한다. 생의 크고 작은 고통 앞에서 저항도 무엇도 아닌 일기를 쓰는 사람은 의미를 찾는 사람이다. 자기 존재의 이유를 찾는 사람이다. 글 쓰는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의미를 찾고자 하는 갈망인지 모르겠다.

 

   인간에게 글 쓰는 능력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아버지를 잃고 부조리한 세상에 내던져진 아이에게, 전쟁의 포화 속 외로운 장군 이순신에게, 남편과 아들을 연이어 잃은 박완서 선생에게, 은신처에 숨은 꿈많은 소녀 안네에게, 믿었던 목회자에게 성폭력 당한 청년에게, 오랜 기다림에 지친 취업준비생에게, 신앙 사춘기를 겪으며 기쁨과 열정을 잃은 그리스도인에게, 펜데믹 세상 속 고립되고 격리된 인생에게 글 쓰는 능력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미 벌어진 일을 자꾸 곱씹고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 말하는 이들이 있다. 모든 치유는 기억의 치유이다. 기억은 사실이 아니다. 경험에 대한 해석이다. 이미 일어난 일(경험)은 바꿀 수 없지만, 해석이 달라지면 삶에 대한 태도가 새로워진다. 일본의 철학자 우치다 타츠루의 말처럼 기억은 다른 장소에서 새롭게 발화될 때마다 개정판으로 다시 쓰인다. 나와 기억이 한 덩어리가 되어 뒹굴 때는 의미도 맥락도 발견되지 않는다. 글쓰기는 내 앞에 나를 세우고 관조하는 행위이다. “죽고 싶다.” 일기장 첫 줄을 쓰는 순간, 죽고 싶은 나를 바라보는 다른 내가 생긴다. 쓰는 내가 있고, 관찰당하고 쓰이는 내가 있다. 그 두 나 사이의 거리가 새로운 관점을 만든다. 기억에 대한, 나 자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등장한다. 쓰는 일은 의미를 찾는 일이다. 부조리한 세상에서 조리를 찾는 일이고, 부서진 고통의 조각을 이어붙여 맥락을 더듬는 일이다. 그렇다. ‘맥락화될 때 의미가 드러난다. 실패, 좌절, 상실이 마지막 귀결이 아님을 믿고 내 인생이라는 긴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찾아 쓰는 일이 글쓰기, 치유하는 글쓰기이다.

 

   그렇다면 모든 글쓰기는 치유의 글쓰기이다. 치유의 어원을 따져보면 더욱 그러하다. 치유(healing), 건강(health)은 같은 어원인 ‘hal, hale’에서 왔고 이것은 whole , 전체, 온전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Hello! 역시 같은 어원인데, 그 흔한 인사에 담긴 뜻은 온전하길 바래, 전체가 되길 바래(T0 be wholeness)”라고. 고통의 증상이 사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한 존재가 온전케 되는 것이 치유이다. 존재의 온전함을 향한 갈망으로 현재의 결핍과 고통을 쓰는 일은 그대로 치유의 작업이다. 소설가들의 소설가라 불리는 이승우 작가는 모든 소설은 자전적 소설이며, 소설조차도 소설가 자신을 위한 치유작업이라고 했다. 소설은 그것을 쓴 작가 자신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이 견딜 수 없는 세상을 견디는 방편이며 나름의 치유책이다. 소설은 가장 먼저 그 글을 쓴 작가 자신에게 결정적으로 유익하다. 소설가는 소설을 통해 세상을 견딜힘을 얻는다. 세상의 불합리와 파렴치와 몰인정을 이길 힘을 얻는다.”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승우

 

   돌아보면 아버지 돌아가신 후 시작한 일기 쓰기는 아버지 상실로 들이닥친 생의 부조리에서 조리를 찾는 일이었다. 세계가 쩍 하고 갈라졌다. 갈라진 세계에서 고아의 세상으로 넘어가 살게 되었다. 아버지 없는 아이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밝고 당당한 을 하며 살았다. ‘을 하느라 애쓰다 진짜 나를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으로 밤을 맞으면 텅 빈 자아의 공간을 채우기 위해 다시 썼고. 뒤늦게 여기에 치유의 글쓰기라 이름 붙일 수 있었다. 치유의 글쓰기는 부서진 세계를 이어붙이려는 노력이었다. 낮의 나와 밤의 나를, 사랑받는 딸과 고아를, 나의 하나님과 아버지의 하나님을 화해시키려는 노력이었다. 쓰기를 잘했다. 쓴 덕분에 내 인생 이야기의 맥락을 찾아가고 있다. 쓴 덕분에 나처럼 부서진 인생들과 연결되어 더 큰 세계로 이어붙이게 되었다. 상실의 경험은 해석되지 않은 채로 나를 가두고 절망 가운데 둘 수 있었지만, 쓸 운명으로 부르신 부르심에 순종하여 인생에 감추신 신비를 만져가고 있다. 쓰기를 잘했다.

 

월간 <기독교세계> 4월호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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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우리'학교라고 써보니 참으로 낯선 표현이다. 장난스럽게 굴 때 말고는 '우리'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 같다. 생각해보니 며칠 전 카톡에서 무심코 '우리 00 샘'이라 써놓고 살짝 오글거렸었다. 낯설고 오글거리지만 진심이 담긴 것 같다. 장난스러움만은 아니다. 우리 학교. 대학원 들어가서 두 번째 학기가 시작되었는데, 처음으로 캠퍼스를 밟게 되었다. 첫 학기 전면 비대면 수업. 이번 학기에는 그대로 첫 수업은 모두 대면이었는데 마침 그 주에 코로나 확진으로 격리 수감 생활이었다.

카카오톡과 줌이 학교와 연결되는 유일한 라인인데. 그것만 가지고도 끌리는 사람 끌리고, 이어질 사람 이어지는 것이 희한하다. 내게도 호감이었던 선배 한 분이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약속을 잡았는데 다른 선배 한 분까지 합류하여 셋이서 캠퍼스에서 만나 학식으로 점심을 했다. 학교에 처음이라고 하니 식당, 도서관, 학과 사무실, 자신만의 비밀 공간으로 투어를 시켜주시니 나이 오십 넘어 신입생 실감이 제대로 났다. 신나고 즐겁고 설레서 왼쪽 가슴에 손수건 매달고 싶은 심정.

장례식 조문으로 다니던 곳이었는데. 학식을 먹고, 학생증 찍고 도서관에 들어가니 여기가 늘 다니던 거기였던가 싶다. '같은 장소 다른 느낌'이란 정녕 이런 것이구나! 장례식 육개장 아니고 그 옆 건물에 학식이라니. 공부 시작했다고 하니 여러 사람이 박사과정이냐고 묻는데, 아니라고 대답하는 것이 짜릿하다. 박사 석사 아니고 초등과정이라고 해도 좋을 일이다. 건물 이쪽저쪽으로 뷰가 다 좋은데, 야경을 더 끝내준다는데, 내가 꼽은 최고는 화장실이다. 정사각형 유리창에 가득 담긴 숲 풍경이 최고였다. 비대면 수업이라지만, 괜히 학교 가야지. 학식 먹고 어슬렁거리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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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 쉬며 걷는 날 월요일. '박두진 둘레길'을 걸었다. 박두진 시가 구석구석 '이발소 그림' 버전으로 걸려 있다. 박두진 시를 읽으며 걷다 윤동주 시가 입에서 나왔다. 시 낭송 놀이를 하며 걸어봤다. 한 시간을 걸어도 요즘은 거의 말없이 각자 자기 길을 걷게 되는데, 새로운 놀이 재미있다.

새로운 길_윤동주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저녁에 대학원 수업이 있어서 여유 있게 먼 곳으로 가지는 못한다. 월요일 아침이면 JP가 검색 기술 발휘해서 적절한 곳을 찾는다. 어디든 좋다. 요즘은 계속 숲과 물이 함께 있는 곳을 찾게 된다.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물이 있고, 조금씩 오르고 내리는 길이 있다. 어디든 그렇게 비슷한 것들이 있지만 똑같은 길은 없다. 계속 걷는 그날의 길조차도 순간순간 새롭다. 윤동주의 <새로운 길>이 마음에서 튀어 오른 이유일 것이다. 나무 사이 한 그루 나무처럼 섰는 사진도 참 좋네.

밤 10시까지 수업을 듣고, 발표를 위한 스터디 모임까지 마치니 11시가 다 되었다. 기나김 월요일 하루다. 20대 끝자락에 음악치료 공부할 때도 참 좋았는데, "대학원은 이렇게 절실할 때, 꼭 하고 싶은 걸로 해야 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20년 훌쩍 뛰어넘어 공부하면서 "대학원은 살만큼 살고, 혼자 공부할 만큼 하고, 이럴 때 해야 해." 생각하며 혼자 웃었다. 월요일 수업이 참 좋았고, 그 기분을 안고 잠에 들었다. 화요일 아침, 오랜만에 꿈을 기억하며 잠에서 깼다. 어서 적어야지! 꿈일기장을 펼치니 와핫! 맞아, 노트 다 썼지. 새 노트다!!!! 꿈일기장으로 쓰려고 간직한 '나리 노트' 드디어 개시다.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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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복 셰프가 알려준 그대로 고추잡채를 해봤다. 이제껏 고추잡채 중 제일 맛있다는 평이 압도적인가 하면. "맛있긴 한데 뭔가 평범하다. 나는 엄마 식 고추잡채가 좋다. 급식에서 먹었던 것과 맛이 똑같다.(두 아이 모두 중국집 고추잡채를 먹어본 적이 없음. 집 아닌 다른 곳에서 먹었다면 오직 급식.) 엄마 고유의 맛이 있다."라는 평도 있었다. 채윤이 평가이다. 이런 피드백 좋아한다.

현승이는 나중에 "이연복 셰프가 중식 전문이잖아. 무슨 명언을 남긴 게 있어. 엄마 알아?” 한 마디에 '이연복 명언, 이연복 띵언...' 엄청 검색해봤다. 저도 '뭐였더라, 뭐였더라' 한참 검색하더니 못 찾겠다 포기하고 말았다. 그 와중에 건진 띵언이다. "가르쳐줘도 따라 할 사람만 하지 게으른 사람은 안 해요." 사실 나도 고유한 레시피 거침없이 유포하는 편이다. 요리는 특별한 걸 하는 게 없지만, 영성심리와 마음의 여정에 관한 한 나름의 팔살기 레시피가 있다는 자의식이다. 묻는 이에게, 필요한 이에게 아낌없이 공개한다. 나만의 레시피, 도서 목록, 통찰들.

가르쳐줘도 안 할 사람은 안 한다. 내가 몰랐던 것은 그것이다. 아니, 모르고 싶었던. 가르쳐주면 그대로 할 것이라는 '환상'이 있었다. 그대로 하기만 하면 비밀병기 다 내주어도 아깝지 않다는 태도였다. 가르쳐줘도 하는 사람만 한다! 그렇지! 이런 태도라면 피 땀 눈물이 담긴 레시피 공개해놓고 속 끓일 일 없겠고만. 10년 넘게 그때그때 한 권의 책, 한 사람의 저자를 만나면서 그 저자가 소개하는 또 다른 저자와 소개팅하고 사귀면서 살아왔다. 누가 알려주는 길이 아니었다. 더듬더듬 홀로 만들어온 길이라, 누군가 나와 비슷한 심정으로 길 없는 길을 걷고 있다면 과도하게 정보 투하하곤 했었다. 물론 나처럼 처절하게 읽을 것이라는 기대로.

이 즈음엔 연구소 SNS든 블로그든 책 리뷰를 하지 못하고 있다. 나처럼 읽지 않는구나, 깨닫게 되었다. 나처럼 읽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 좋은 책들을 눈팅하거나 사놓고는 다 안다고 생각할 수 있겠구나, 까지 닿았다. 여기 닿기까지 나는 얼마나 헤맸던가. 사람 사람 마음의 여정이 고유하다는 뜻이기도 한데. 그 고유함이 끝이 어딘지를 모르며 안다고 착각한 것이다. 기꺼이 공개해 온 레시피에 담긴 내 고독의 몸부림이 민망해 하며 배워가는 중이다. 사람 사람의 고유함을.

요리 고수가 되긴 멀었다. 이연복 쉐프처럼 "어차피 안 할 사람은 안 해요." 아직 그리 쿨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쯤 되면 뭣이 중헌지 헛갈리는 상황이지만. 적어도 나는 어떤 레시피들을 목록으로 저장해 두지 않기로 결심했다. 적절한 레시피를 만나면 가능한 바로 해서 먹고 먹이기로 했다. 많은 레시피를 저장해 두고 마치 요리를 한 것처럼, 심지어 먹은 것처럼 착각하며 살진 않기로. 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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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좋아한다. 사람의 손을 사람 인격 보듯 한다. 손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사람의 손을 자세히 보지 않는다. 덥석덥석 손을 잡지도 못한다. 남편의 손을 좋아하고, 약간 집착도 하는 편이다. 세상에서 몸을 통해 얻는 위로 중 최상급일 것이다. 남편이 손을 잡아주는 것. 특이한 손을 가져서 손이 늘 부끄러웠다. 늘 손을 감췄다. 언제 어디서든 손을 감추던 젊을 날에 성가대 지휘는 어떻게 했나 몰라. 그때 성가대 했던 아이들이 특이하게 생긴 내 손을 기억하고, 달랑거리던 반지를 기억한단 얘길 해오면 낯이 뜨거워진다. 엄마 손을 따뜻하게 잡아본 기억이 없다. 엄마 손이 싫었다. 엄마와의 스킨십은 어쩐지 조금 소름 끼쳤었다. 손을 잡는 것보다 사진으로 담아 들여다보는 것이 더 좋았다. 이제야 뒤늦게 잡을 수 없는 엄마 손이 그리워 허공을 잡아보곤 한다. 유튜브에서 나문희 선생이 노래하는 무대를 봤는데, 손 때문에 울었다. 얇은 피부, 튀어나온 혈관... 우리 엄마 손과 비슷한 정도로 나이 들어 있었다. 한 인생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손이었다. 손에서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세월을 담고, 인생을 새긴 손이 노래를 하고 있었다. 손만 봤다. 손의 소리만 들렸다.

* 손에 대해 글을 쓰려했더니, 작년 생일에 이미 구구절절 충분히 징징거려 놓은 게 있네.

껍데기 없는 생일

생일 아침에 미역국을 먹었다. 딸 채윤이가 전날 밤 11시가 넘어 끓이기 시작했다. 11시 넘어 줌 강의를 마치고 "그럼 엄마 먼저 잘게" 하고 누웠다. 딸이 끓이는 미역국, 참기름 냄새에 취해 잠이

larinari.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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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에 도시락 세 개를 쌌다. 모의고사 보러 가는 현승이 도시락을 싸서 보내고. 출근하는 JP의 도시락을 싸는데 연습실 가는 채윤이도 "나도 싸갈까?" 했다. 셋이 각각 다른 곳에서 같은 밥을 먹는 것이다. 이게 뭐라고, 마음이 찡하지? 사진의 도시락은 요즘 꼭 남매같이 지내는 아빠와 딸의 것이다. 채윤이가 교회 근처에서 알바 중이라 출퇴근 길에 자주 함께 하고 있다. 띡띡띡띡, 투닥투닥... 현관 번호키 누르는 소리와 투닥거리는 소리가 둘의 퇴근을 알린다.

종끼~이, 종끼 싫어. 핵 싫어.
윤채, 윤채, 나도 너 싫어.
으으으으, 종끼 아빠!
으으으으, 윤채 김!

그러다 어떨 땐 육탄전까지. 먼저 시작하고 나중까지 폭력을 행사하는 쪽은 윤채 쪽이다. 고3 현승이가 야자 하느라 밤이 늦어야 집에 오니 싸울 시간이 없고. 갈고닦은 전투력을 아빠에게 쏟아붓고 있는지. 메롱메롱 유치 찬란한 남매 아니 부녀간 싸움이 볼만 하다. 불쌍한 JP. 이기는 적이 없다. 나름 유치 찬란 말싸움에서 밀리지 않고 선전하는 중이었다. 심지어 승기가 아빠 쪽으로 기우는 중, "아빠, 엄마한테 다 이를 거야." 한 마디에 순간 JP 움찔. "아빠, 움찔하는 거 다 봤어! 내가 이겼어. 무섭지?" "뭐, 뭐, 뭐? 뭘 일러?" "소용없어, 내가 이겼어."

토요일 아침, 똑같은 도시락 두 개를 준비하는 동안 둘은 계속 투닥투닥. 종끼 아빠는 거실에서 빨래를 정리하면서, 윤채김은 제 방에서 머리를 말리면서, 각자 볼 일 보면서도 투닥투닥. 그리고 같은 도시락을 들고 나란히 출근했다. 물론 현관에서 신발 신으면서도 빨리 해라, 하고 있다, 비켜라, 말아라, 투닥투닥.

진지하게 보는 첫 모의고사 중 현승이가 먹을 점심, 조용한 교회당 사무실에서 설교 준비 하다 먹을 점심, 좁다란 연습실에서 이어폰 꽂고 드라마 짤 보면서 먹을 점심. 이 시간쯤 따로 똑같이 먹을 점심 풍경을 그려본다. 소중한 님들 지금 이 순간 행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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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이 되어 야자의 삶을 사는 현승이와 주말 데이트를 했다. 2001아울렛 지하에서 가성비 좋은 회전초밥을 맛있게 먹고 집에 오늘 길. 고3 맞이 몸만들기 운동 차 겨울 동안 다녔던 구미도서관 옆을 지나는 중이었다.

 

"내가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그 애를 데리고 구미도서관에 한 번 오며 재밌겠다. 공부하던 곳도 보여주고, 매일 가던 미정국수에 같이 가서 밥도 먹고... 재밌겠지?"

 

"아빠가 너 도서관 갔다 온 날 늘 하는 얘기 있지? 엄마빠 헤어졌다가 우연히 다시 만났다는 고덕도서관. 거기서 자판기 커피에 초코칩 쿠기 먹고, 매점에서 우동 먹은 얘기 알지? 하고 또 하고 하고 또 하는 얘기. 거기 아빠가 대학생 때 다니던 도서관이거든. 아빠가 지금 너한테 고덕도서관에 같이 가자고 하면 어떨 것 같아? 아빠랑 같이 가서 자판기 커피 뽑아 먹고, 우동 먹고 그러자고 하면."

 

"아, 안 되겠구나! 말도 안 되게 싫으네. 이런 거구나... 와, 나중에 아빠 같이 될 것 같은데... 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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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이후 지인들은 무기력과 분노를 토로해왔다. 교회 교우들을 비롯해서 대선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분들이 꽤 많을 텐데 그분들과 마주할 일은 없었다. 가족 중 한 분이 승리에 도취되어 (목적어는 분명치 않지만) 조롱하고 비하하는 내용을 동생에게 보냈단다. 그 내용을 전달받고 정말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었다. 하필 엄마 추도식 다음 날이었다. 하긴 그분은, 임대차 삼법의 여파로 전셋값을 부르는 대로 올려준대도 나가라는 주인 때문에 잠시 거리에 나앉는 상황에 몰린 내게 그랬다. "좋겄다, 니가 좋아하는 문재인이가 부동산 잘해서..." 그때는 다리가 아니라 가슴이 무너졌다. 정치가 무엇이기에, 정치적 입장이 무엇이기에 이렇듯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단 말인가. 가족 간의 인지상정조차 말소해버린단 말인가. 그 조롱의 톡을 받은 동생은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대선 이후 나는 무덤덤하게 지내고 있다. 화도 내지 않았고, 그리 절망적이 되지도 않았다. 뉴스만 보지 않으면 살 수 있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도 견뎠고, 전두환 시절도 살았는데.

현승이가 첫 투표권을 행사했다. 집에서는 물론 다니는 학교도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에 대해 제 생각을 말하고 피력하는 것에 익숙한 환경이다. 거기다 타고난 기질까지 작용하여 뉴스로 보고 나름대로 의문을 품고, 식탁에 앉아 아빠와 끝없는 대화를 하곤했다. 박근혜 정권 하에서 첫 촛불 집회가 열렸던 날, 나는 지방에서 1박 2일 강의가 있었다. 세 식구가 촛불집회 나간 사진을 보내왔는데, 가슴이 떨렸다. 내가 여기서 한가롭게 강의하고 있을 때인가 싶었었다. 그 집회에서 이재명을 만났고, 같이 찍은 사진을 또한 보내왔었다. 두 아이는 그때 받은 좋은 인상을 기억하고 있다. 셀카를 찍자고 하니 보좌관에게 찍어달래자 하고, 보좌관을 대하는 태도 역시 참 좋았다고 했다. 그때 찍은 사진과 이번 선거날에 채윤 현승 둘이 가서 투표하고 찍은 인증샷이다.

사진에서 시간이 보인다. 성인이 된 남매는 그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대입을 치르고, 성인식 같은 고통의 시간을 겪어냈고, 또 사춘기를 통과했고, 엄마 아빠 인격의 이면으로 실망했고, 반항도 했고.... 그리고 둘 다 성인이 되었다. 정치적 입장이든 개인의 삶이든 더는 엄마빠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존재로 커졌다. 이러기까지 보낸 시간은 성장통을 앓는 시간이었다. 그렇다. 성장통이다. 아빠가 목회하는 교회를 떠나겠다 선언하는 일도, 엄마빠가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줄 알았는데 매일매일 실망하는 것도. 아이들의 시간이 그러할 때, 엄마 아빠는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상실감과 함께 아이 눈에 비친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또 다른 아픔의 시간이었다. 좋다 나쁘다 하나의 이름을 붙일 수 없지만만, 결과적으론 좋다. 성인 넷이 사는 오늘, 양육자와 피 양육자가 아니라 자기 빛깔로 사는 네 사람으로 만나는 오늘이 참 좋다.

아포리아(a-poria), 길이 없음. 어디서 풀어야 할지 모르는 난제를 일컫는 말이다. 살면서 흔히 맞닥뜨리는 길을 잃었다거나, 절망적이다, 이런 상태까지 아우르는 것 아닐까 싶다. 피하고 싶고 당혹스러운 지점이지만, 철학에서는 여기를 '낙담'이 아니라 진리를 향해 가는 중요한 지점으로 본다. 대충 알면서 자기확신에 빠진 이가 아포리아에 들어서 혼란을 통과하며 더 큰 진리를 향해 나아간다. 좌절과 혼란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아니 차라리 피상적이고 쉬운 성공보다 더 소중한 것일지 모른다. 시간은 흐르고, 사람은 물론 삼라만상은 변하기 때문이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기 때문이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사진과 두 번째 사진 사이 남매의 질풍노도며 가족의 성장통으로 변화무쌍의 시간이었다면, 이재명과의 관계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다. 트위터에서 만난 시원시원한 정치인으로 시작하여 19대 대선을 향한 경선, 그리고 그 이후...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기대하고 실망하는 관계는 여느 개인적 관계 맺음과 다르지 않았다. 끝없이 변하되 어디로 향하느냐, 가 관건이 아닐까. 한 인생이 어디로 향해가는지, 그 흐름과 맥락 속에서 삶의 의미는 찾아지는 것이다. 지난 목포 여행 마지막 시간에 선물처럼 만난 카페가 있다. 김대중 공부방을 탐방하고 발길 닿는 대로 가다 만난 카페다. 주인 취향이 너무나 뚜렷하여 정겨운, 바다가 보이는 카페였다. 밖에는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사진이, 실내 어느 벽에 시편 23편이 걸려 있었다. 목포 여행 첫날에 들렀던 '손소영 갤러리 카페' 벽에는 이재명 사진이 걸려 있었고. 사진의 순간은 모두 지나간 어느 날의 순간. 거기로부터 시간은 여기까지 흘러왔고.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에 다 때가 있다. 사람도 다 때가 있다. 그래서 한 번씩 대중 목욕탕에 가서 잔뜩 불린 다음 빡빡 밀어줘야 한다. 응?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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옅은 무기력과 우울감이 오래 가고 있다. 아침 준비하려고 앉았다 무심코 클릭해서 본 영상으로 반짝, 무엇이 들어왔다. 오, 오늘 아침은 이거야. 꾹꾹 눌러 모양을 만들어 토스터에 구운 식빵이다. 눌러 만든 모양에 잼을 채운다. 우울감이 천 리 만 리 달아났다.

 

하트는 제일 먼저 일어난 JP 용이다. 낄낄거리면서 하트를 제작하고 있는데 "손은 씻었어? 코딱지 판 손 아니지?"란다. 완성된 작품에도 감동 한 마디 없이 "어떻게 먹는 거야? 이대로 먹어? 더 발라?"한다.  

스마일은 김현승 몫이다. 신이 나서 굽고 만들고 하는데 뚱한 표정으로 "언제 먹어?"란다. "전체에 다 발라야 하는데 이렇게 주면 어떻게 먹으라는 거야?" 하더니 스마일 무시하고 처발처발 해서 덤덤하게 처묵처묵 한다. 

 

다음 타자 부스스한 김채윤 등장. "뭐야? 뭔데?" "보지마, 보지마, 저리 가 있어. 엄마가 다 하면 부를게. 아직 오지마. 일단 너 웃는 얼굴이야, 화난 얼굴이야, 어떤 얼굴 원해?" "화난 얼굴" "오케이! 좀 이따 와." 또 신나게 세 번째 작품을 만들었다. 다 먹고 일어나던 김현승이 식탁 근처 못오는 누나 한 번 쳐다보고 그런다. "엄마, 그렇게까지 할 일이야?"  

아, 진짜 재밌어! 화난 얼굴은 딱 김채윤이다. 그러나 관심 없기는 얘도 마찬가지. 

그래도 셋 중 가장 큰 성의를 보여주었다. 제 취향대로 작품 활동 한 번 해주는 것으로. 조커 느낌도 나고 좋네!

냉담한 가족들, 너희들! 그래도 괜찮아. 사실 나는 내가 재밌으면 돼. 무기력하고 우울한 시간에 재미 하나 꽂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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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하루다. 채윤이 확진, 나 확진, 현승이 확진. 잠재적 확진자 JP 항시 대기. 한 보름을 네 식구가 집에 머물며 지냈다. 채윤이는 슬슬 알바 출근을 하고, 아무리 기다리도 안 걸리는 JP는 슈퍼 항체 인정하고 출근하고, 하나 씩 나가다 드디어 오늘 격리 해제 현승이가 등교를 했다. 이런 오전 얼마만인가. 혼자만의 점심식사라니. 

 

기도하다 분심이 김치전으로 흘러갔다. 점심은 김치전이닷. 통김치전으로 배추 두 잎만 부쳐서 먹어야지 했는데 밀가루가 없네. 하루 이틀 장을 보지 말아야지 결심한데다, 밀가루 한 봉지 사러 바로 앞 편의점에 나갈 최소한의 열정도 없다. 그러나 김치전은 먹고 싶고... 뒤적뒤적 뒤적뒤적, 어떡하지?........................... 월남쌈을 발견했다! 밀가루를 대신할 탄수화물이 되겠다. 김치를 쫑쫑 썰어 설탕, 깨소금, 참기름으로 조물조물 무쳤다. 월남쌈으로 싸서 기름에 구웠다. 또 성공! 웬만한 도토리 전병보다 더 맛있네! 비주얼로는 김치전을 압도하고. 혼자 정말 맛있게 먹었다.  

 

김치 참 좋아한다. 나이 들수록 김치가 더 좋다. 김치가 먹고 싶어서 밥을 먹는다. 김치에는 탄수화물이지! 그래서 가끔 김치전이 땡기는 것도 같고. 맛있는 김치가 있으면 다른 반찬 필요 없다. 막 한 밥이나 누룽지가 있으면 최고의 밥상! 나 정말 김치 좋아하는구나. 여기까지 갔는데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혼자 찬밥에 물 말아서 김칫국물, 깍두기 국물, 아니면 김칫국물 넣고 끓인 동태찌개를 먹었다. 다른 아무 반찬 없이. 그게 그렇게 궁상맞아 보이고 싫었었다. 돈 아끼려고 저러지. 엄마를 위한 모든 것에 인색한 것이, 자신을 홀대하는 것이 참으로 보기 싫었다.

 

엄마도 밥이랑 김치 콜라보의 그 맛을 좋아했구나! 깨달음이 꽈광, 하고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가난해서만 그런 게 아니구나. 나처럼 먹을 것에 대단한 관심이 없고, 있는 걸로 최소한으로 먹고 싶은 그런 사람이었겠구나. 그 중에 밥과 김치가 좋았구나! 그렇지. 김치에는 밥이고 밥엔 김치지. 엄마와 달리 늘 새로운 게 좋고, 없던 걸 만들어내는 게 기쁨인 나는 밥을 대체할 다른 탄수화물을 찾아냈을 뿐이네.

 

코로나 빠져나온 낯선 어느 날 김치 월남쌈을 만들어 구웠고. 엄마 생각을 했다. 맛있게 먹다 눈물이 뚝 떨어졌다. 생각하고 생각해도 만날 수 없는 엄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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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1일, 엄마 2주기이다. 엄마 2주기, 코로나 2년. 2년 만에 코로나에 걸려버렸다. 몸도 마음도 죽음에 가까워지는 날에 엄마 2주기를 맞았다. 엄마의 마지막 나날, 요양병원의 '격리'로 함께 하지 못했는데. 2년이 지나고 내가 '격리'되어 추도 예배도 무엇도 하지 못하고 보냈다.

위로와 이끄심은 의외의 길을 따라 온다. 대학원에서 <음악을 통한 영성>이란 과목을 듣고 있다. 강의와 선곡으로 엄마 2주기를 기리고, 죽음을 묵상하며, 큰 위로를 받았다. Bach의 칸타타 ‘악투스 트라지쿠스(actus tragicus)'다. ‘장송 음악’으로 불리는 이 음악의 원제 ‘악투스 트라지쿠스(actus tragicus)'는 '죽음과 이별이라는 인생의 비극 앞에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질문해온다'고 신부님(교수님)은 강의안에 쓰셨다. 이 곡을 듣고 또 들으며 3월 11일 하루를 보냈다.

곡의 시작은 아름다운 소나티나이다. 그리고 합창곡이 등장한다. 제목은 하느님의 때가 가장 좋은 때이니라 Gottes Zeit ist die allerbeste Zeit”.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다다르는 인생의 종착지, 그 진실을 받아들이는 내적 평화가 담긴 한 문장이다. 합창은 이어서 사도행전 17장 28절과 시편 90편 12절의 내용을 언급하며 이어진다. 신부님의 강의안을 그대로 옮겨본다.

 

이어 나오는 합창은 죽음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차원을 교차로 들려줍니다. 바흐는 이를 구약과 신약의 차이로 이해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구약, 곧 옛 계약의 준엄한 진실을 일깨우면서도, 예수님이 오기를 청하며 조건 없이 “예”라고 응답하며 희망합니다. 그리고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루카 23,46) 라고 마지막 말을 남기는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인 바흐에게 죽음이 구원이자 위로이며 희망이 되는 근거입니다.


바흐는 십대 초반에 부모님을 잃었고, 사랑하는 첫 부인을 일찍 잃었고, 열두 명의 아이를 서너 살이 되기 전에 죽음으로 또한 잃어버렸다. 부모를, 아내를, 어린 자녀들을 죽음으로 잃고 잃었던 고통이 바흐 음악 곳곳에 흐르고 있다. 죽음의 여러 얼굴이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흐른다. 반드시 죽을 운명을 타고난 인간이지만, 슬픔과 분노에 매몰되지 않는 바흐가 아주 가깝게 느껴진다. "바흐는 깊은 슬픔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거기에서 천천히 빛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라고 교수님이 또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때가 가장 좋은 때이니라.

 

 

이제는 알겠다. 2년 쯤 시간의 거리를 두고 엄마가 떠났던 시간을 바라보니, 가장 좋은 하나님의 때였다. 엄마에게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때이고, 가장 좋은 때이다. 만나고, 사랑하고, 행복하고, 기쁨이 오는 때도 하나님의 때이고, 헤어지고 절망하고 실패하는 때도 하나님의 때이다. 하나님의 때가 가장 좋은 때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자 하니 눈물이 난다. 바흐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곡을 만들었을까.

평화롭고 기쁘게 나는 떠나네
하느님이 뜻하신 대로
내 마음과 정신은 위로를 받았네
부드럽고 고요히 하느님이 약속하신 대로
죽음은 나의 잠이 되었네.

 

 

마지막 알토가 부르는 아리아는 루터의 찬송가 가사이고, 이것은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만난 시므온의 노래(눅 2:29)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시므온과 안나.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난 두 늙은 예언자를 읽을 때마다 늙은 엄마를 떠올렸었다. 과부가 되어 팔십사 세가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다 아기 예수님을 만난 안나는 꼭 엄마 같았다. "평화롭고 기쁘게 나는 떠나네... 죽음은 나의 잠이 되었네" 시므온의 노래, 안나의 노래, 엄마의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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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발길 닿는 대로 걷다 '소년 김대중의 공부방'을 만났다.
여행의 마지막 꿀같은 몇 시간은 소년 김대중을 만나는 시간여행이었다.
하의도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가족이 목포로 나왔다고 한다.
매일 저 바다 풍경을 바라보며 무르익었을
섬소년의 생각과 감수성이 조국 민주주의의 지성과 행동이 되었다.
그로 인해 겪을 고초들...
저 방 주인 소년 김대중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 <킹메이커>를 본 여운이 남아 있어서
벽에 걸린 포스터가 복잡하게 다가왔다.
지적이며 맑고 촉촉한 눈빛을 한참 바라보았다.

디지털 방명록이 있어서 흔적을 남겼다.
마침 대선 일주일 전이다.
간절한 기도를 적었다.

지난 토요일,
줄이 아무리 길어도 기쁘게 기다려 사전투표해야지,
하며 오전 강의를 마쳤는데.
사전투표하러 갈 시간에 PCR 검사 대기 줄에 서는 사태가 발생했다.
며칠 가슴에 품어 더욱 뜨거운 한 표가 되었다.
확진자는 6시 이후에 투표할 수 있다니,
간절한 마음 담아 미리 내놓으려 했던 한 표를
오늘 투표의 마침표로 찍겠다.
마침기도로 쓰겠다.

두렵고 떨리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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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마음에 먹구름이 끼어 무겁고 축축해질 때가 있다. 그 느낌에 오래 머물다 보면 영락없이 '하나님 부재'의 느낌으로 간다. "하나님, 어디 계세요?" 어디 계시냐 물을 때 즉각 "나 여깄다." 답하시는 경우가 없다. 차라리 "어디 계세요?" 묻고 나면 부재감만 더욱 커질 뿐이다. "나 여깄다!" 이 응답은 늘 의외의 순간에 온다. 응답을 듣는 순간, 그 순간 먹구름이 걷히고 찬란한 햇살이 비쳐 들면서 마음은 간지러워진다.

"이리 와 봐, 여기 작은 꽃이 피었어." 하는 소리에 달려가 쪼그리고 앉아 보니 새끼손톱보다 작은 꽃들이 피어있다. "어머, 너 이름이 뭐니?" [Daum 꽃이름 검색]이 대신 답해주었다. "아, 내 이름 조금 민망한데 괜찮겠어? 내 이름은 '큰 개불알꽃'이야." 민망하기보다 생김새, 인상과 어울리지 않아 웃음이 팍 터졌다. 팍 터지는 웃음에 기쁨이 난입했다. "나 여깄다!" 하시는 그분의 응답은 이런 순간에 온다.

내 걷는 습관을 스스로 알아차릴 수가 없는데, '흉내내기 장인' 채윤이의 미러링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땅을 보고 걷는다. 땅 보고 걷는 내 시선을 높은 곳으로 끌고가는 친구들이 새 친구 들이다. 그네들의 웃고 우는 소리와 날갯짓이 고개를 들게 한다. 목포 고하도에서 고개 숙이고 걷는 내 시선 안에 강림하신 새 친구를 만났다. 이름도 전화번호도 알려주지 않는다. 대답 대신 팔딱팔딱 개구리 놀이로 웃음 주고 날아갔다. 그분의 응답은 이런 순간에 온다.

내 눈 앞에 갑자기 난입하는 작은 존재들. 들꽃보다 새보다 더 찬란한 그분의 현존은 아이들이다. 길에서 우연히 만나는 아이들, 줌 강의하는데 화면에 난입하는 아이들, 영상통화로 만나는 아이들, 주일 예배 마치고 만나는 아이들, 아이들의 말, 뚱한 표정, 놀라는 표정, 긴장한 표정, 부끄러운 표정... 난입하고 침투하는 그분의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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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엄마 아빠 없는 사나흘을 은근히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 막는 늦잠도 아니건만, 엄마빠 없으면 마음 편히 더 늦게 일어나게 된다고. 게다가 한두 번 맥도날드나 마라탕 같은 외식을 즐길 수도 있을 테고. 늦게까지 기타 치고 놀며 수다를 떨어도 조용히 좀 하라고 잔소리할 사람이 없는 거고. 기분 좋은 기대는 자주 배신당하는 것이기도 하고.

목포 여행 이틀 째 채윤이가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 바로 제 방으로 격리 되었고.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지만, 여행 포기하고 돌아온다고 뾰족한 수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증상이 심하면 어떡하나, 세 끼 밥은 또 어떡하나... 걱정거리를 꼽자면 끝이 없지만, 잘 지내겠다는 말을 믿기로 했다.

돼지고기 찌개를 먹고 싶다고 하여 여행 전에 육수와 야채 재료를 준비해 두었다. 만드는 방법을 전수받은 채윤이는 방에 갇혔고, 현승이가 해보겠단다. 전화로 설명을 듣더니 어떻게 어떻게 끓여서 누나 방에 들여보내고 저도 맛있게 먹었다고. 어설픈 듯 이닌 듯 야채를 썰어 놓은 모양새가 사랑스럽다. 감자칼로 사과 깎아서 후식 넣어주고 설거지 마친 후에는 방문 앞에 앉아서 수다도 떨었다며 뿌듯함을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로 시시각각 보고를 해왔다. 다음 날은 개학날인데, 아침으로 파니니를 만들어서 먹고, 누나도 챙겼단다. 김으로 주먹밥 만들어 미리 점심까지 챙겨 넣고 등교를 했다.

뭔가 창의적인 방법으로 누나를 돕고 가족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있다는 자부심으로 현승이는 텐션 업이었다. 그래도 멀리서 보고만 받는 내 마음은 짠했는데, 챙기는 현승이보다 챙김 받는 채윤이 생각에 더 짠했다. 호랑이 같은 아이가 힘이 쑥 빠져서 주는 대로 먹고, 안 주면 못 먹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게 그렇게 마음이 쓰였다. 집에 와서는 내가 채윤이를 챙기는데, 무력하게 방에 혼자 갇혀 있는 것이 그렇게 안쓰러운 건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일 거고.

채윤이 격리해제 하루 전날 내가 확진을 받았다. 오늘은 채윤이 나오고 내가 안방에 격리. 뭐 필요한 거 없어? 예배드리고 밥 줄까? 다시 방문을 사이에 두고 지내게 되었다. 돌봄의 주객은 바뀌었고. 어제 pcr 검사받느라 추운데 한 시간 서서 떨었더니 없던 병도 생길 지경이었다. 그래서인지, 코로나 증상인지 밤새 오한, 근육통, 두통이 있었는데 아쉬운 대로 판콜에이와 타이레놀 복용하고 효과를 보고 있다. 두통 때문에 책도 눈에 안 들어오고, 영상을 보기도 힘든데... 희한하게 글은 써진다. 약기운 돌아 몸이 조금 가벼워지면 블로그 포스팅만 하게 된다. 이번 주에 써야 할 원고 두 개가 맞물려 있는데, 희한하게 써야 할 원고와 상관없는 글만 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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