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어느 시험 기간에 (딴에는) 감정 폭발과 함께 내놓은 절규였다. 10시 안 되어 자려는 아이에게 '그래도 시험 기간인데 조금 더 공부를 하는 게 어떠냐? 성적이 문제가 아니라 뭔가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 아니냐. 하다못해 엄마도 늘 하는 강의를 다시 고치고 하면서 최선을 다한다'는 말에 분노 폭발하며 한 말이다. 그리고 시험공부가 다 끝났다고 했다. "어느 과목은 싫어하는 것이라 아예 안 하기로 했기 때문에 두 과목만 공부하면 된다고..."
과연 현승이는 그렇게 살아왔고, 살고 있다. 맹목적으로 최선을 다한다거나, 자기를 갈아 넣는 그런 삶을 살지 않는다. 고3이다. 수능을 한 달 정도 앞둔 어느 토요일 아침 <5분 뚝딱 철학>을 읽는 여유있는 모습이란...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삶'이라는 자기 철학에 진정으로 부합하는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엄마가 어릴 적에 나를 잘 파악해준 것 같아."라고 말한 것은 수시 원서를 쓰고나서 였다. 국문과와 철학과를 지원했는데, 블로그 카테고리 중 '어린 시인, 꼬마 철학자'가 딱이라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 살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겠다는 뜻이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지내며 심리학과, 행정학과... 같은 전공도 찔러봤지만, 고3 되어 선생님과의 멘토링을 통해 확신하고 선택한 학과는 국문과와 철학과이다.
수능 최저를 위한 집중 공략 과목도 딱 '국어'와 '윤리와 사상'이다. 역시 좋아하는 과목을 선택하여, 최선을 다하지 않고 즐기는 것이다. 얼마나 살아 있는 공부를 하는지, 아빠와 마주 앉으면 철학 이야기이다. 인문학 수업에서 배우고, '윤리와 사상' 수능 준비하며 외우는 철학 이야기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철학자들을 꿰면서 요즘은 철학자들의 에니어그램 유형을 추정하고 있다.
아빠가 주중에 <5분 뚝딱 철학>이라는 책을 사주었고, 주말 아침 머리에 까치집을 이고 5분 반짝 독서 중인 것이다. 학교 들어가기 전 어느 휴일, 혼자 일어나 늦잠 자는 엄마빠 깨우지 않고 <마법 천자문> 읽던 그날과 다르지 않은 느낌이다. 아, 주로 서양철학을 더 많이 공부하긴 하지만 동양철학이 자신에게 더 맞다고 끌린다고 했다. 노자나 장자에 끌린다고. 무위자연... 최선을 다해 살지 않...
"엄마가 한 요리 먹어본 지 오래됐다." 연이은 강의에, 학교 발표에, 급히 마감해야 하는 원고에... "나도 내가 한 음식 먹어본 지 오래됐다." 수능을 한 달 앞둔 현승에게 통 크게 백지 메뉴판을 주었다. "먹고 싶은 거 뭐야? 다 해줄게." "김치찜? 삼겹살이 통으로 들어가 있는 김치찜!" 주문 그대로 제작해서 내놨다. 그나저나 나는 내가 한 음식이 왜 이리 맛있어? 사장님 기분 좋아서 계란찜 서비스도 내보냈다.
몰려 있던 일이 지나가고, 즉 정크푸드의 시간이 지나가고 밥을 좀 해먹을 수 있는 때가 왔다. 늦은 아침을 먹고 나가면 저녁까지 밥 먹을 틈 없는 채윤이를 위해서 아침부터 닭볶음탕을 해야지 싶었다. 마침 또 레슨 시간에 맞추려면 바로 나가야 한다네. 그러면 또 살짝 땡큐지! 나도 여유 있게 준비하고 나갈 수 있으니. "그러면 주말에 해야겠다." 했더니 "레슨 마치고 집에 와서 먹고 갈 수 있어." "끝났어. 안 하는 걸로 마음먹었어. 뭐 사 먹어." 하고 보냈는데...
사장님 마음이 또 좀 그러네. 정말 가스레인지 불 말고, 번갯불에 닭볶음탕을 했다. 11시나 되어 집에 돌아왔다. 늦은 밤에 만난 채윤이가 "엄마, 레슨 마치고 오면서 집앞에서 버스를 내리는데. 닭볶음탕 때문에 너무 마음이 설레는 거야. 버스 정류장 살짝 내리막길이잖아? 나도 모르게 거기서 폴짝폴짝 뛰면서 내려오는 거야. 쪽팔렸어." 했다. 내 마음이 갑자기 폴짝폴짝 뛰었다.
엄마 돌아가시고 한동안 매일 그런 결심을 했다. '아이들과 행복한 추억은 만들지 말자. 나만이 할 수 있는 맛있는 음식도 해주지 말자. 내가 떠나고 없는 자리에서 그 모든 기억이 슬픔이 되고 고통이 되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자....' 이런 비합리적 생각을 현명함이라며 붙들고 있었다. 엄마 떠난 자리에서 그리움이 사랑이란 것을 이제는 안다.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하는 우리가,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움은 또 다른 사랑이다. 부재하는 대상은 그리움으로만 사랑할 수 있다.
다윗과 요나단, 두 사람의 우정에 관한 설교를 들었다. 그 여운이 길다. 설교는 이런 내용이었다. 우정은 마음결이 같은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면서 싹튼다. 일단 알아본다. "같은 꽈구나!" 그리고 두 사람 사이 약속이 생기고(언어적일 수도 비언어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 약속을 지키겠다는 뜻이 생긴다. 아마 여기서 신뢰가 싹 틀 것이다. 세 번째가 신선한 통찰이었는데,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극복할 것은 '시기심'이다.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태도와 마음을 드러내는 성경 구절을 찾아볼 수 있다. 번호 붙여 정리하면,
1. 마음 결이 비슷한 사람이 서로를 알아본다.
2. 서로에 대한 믿음이 생기고 그것을 지킨다.
3. 어쩔 수 없이 올라오는 시기심을 알아차리고 극복한다.
나는 애정하는 여성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이 『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것』에서 키케로를 인용하여 정리한 것을 '우정'의 즐거움 또는 정의로 생각하고 있다. 우정의 즐거움은 농담과 뒷담화라고 했다. 누군가를 마음 편히 뒷담화 할 수 있고, 농담할 수 있는 사이. 그 정도면 찐 친구라고 생각한다. 위의 세 가지에 내 기준 두 개를 덧붙여 우정을 정의하고 더욱 일궈가야겠다.
학교 가는 즐거움 중 하나는 학식 먹는 즐거움이다. 내 공부를 기뻐해 주는 한참 젊은 '친구'(라고 하자)를 학교에서 만나 학식을 먹었다. 학교 카페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이 얘기 저 얘기 흘러가는 대로 이야기를 나누고. 갑자기 일어나 학교 앞 산에 가보자는 제안을 했다. 바로 앞에 공원 같은 산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언젠가 걸어봐야지, 하고만 있었다. 생각보다 좋은, 너무나 걷기 좋은, 내가 딱 좋아하는 그런 길이 펼쳐져 있었다. 좋은 공기 때문인지, 편안한 대화 때문인지, 영혼에 뭔가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친구 같다."는 말이 나왔는지, 속으로 했는지 모르겠다. 실은 '일로 만난 사이'이다. 이 날도 일을 도모하고 싶어서 만남을 청한 것이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일은 거들뿐, 살아가는 얘기, 살아갈 얘기 같을 것들로 대화의 주제가 종횡무진이다. 오솔길을 내려오니 뻥 뚫린 강남대로이다. 지하철 가는 길로 조금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 친구같다, 가 아니라 친구다, 라고 혼자 말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 기준이라고 치면 1번 항목 완전 체크로 시작했을 것이다. 일로 만나든 무엇으로 만나든 만나면 일단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은 MBC 문화방송이 아니라 마음 결의 동질성이지 싶다. 오늘 자 카페의 영적 독서 내용은 여성과 영성에 관한 내용이었다. 묵상글 본문을 올리고 덧붙이는 말에 "여자인 것이 참 좋다"라고 썼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여자라서 여자들과 맺을 수 있는 우정이 참 좋다. 몇 달에 한 번 만나도, 인생에 단 한 번을 만나도, 몸은 멀리 떨어져 있고 메시지 한 줄로 만나도 몸으로 확인되는 우정, 여자들의 우정이 참 좋다. Womance다!
『우아육아』 개정판을 내고, 뭔가 세상에 돌려줘야 할 것 같아 교회에서 육아 세미나를 열었다. 나 살자고 쓴 글들이었다. 나 살자고 마음 가는 대로 쓴 수백 편의 글이 『토닥토닥 성장일기』라는 책이 되기까지, 장인정신의 편집자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잊지 못한다. 그 책이 새 옷을 입고 나왔는데, 새 옷을 입혀준 출판사에도 다시 고맙다. 내가 입은 은혜를 어떻게든 세상에 돌려야겠다는 마음이다. 우리 교회 젊은 부부들, 그들의 아이들은 또 다른 은총의 선물 같은 사람들이다. 사랑 없는 거리를, 메마른 땅을 종일 걷는 심정이던 시절, 나를 웃게 했던 사람들이다. 감사를 감사로 갚는 게 좋은데, 책을 만들고 개정판까지 내준 분들은 멀리 있으니 가까운 곳에 뭐라도 하자! 교회에 육아 세미나를 열고, 다른 교회 강의가 없는 주일을 골라 근근이 이어가고 있다. 아이 키우는 젊은 부부들을 새롭게 마음에 품자니, 채윤이 현승이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살아난다.
일도 해야 하고 아이도 키워야 하는데, 돈 주는 베이비 시터에게 맡기긴 싫었다. 엄마가 우리집 근처로 이사를 와 아침저녁 출퇴근하며 채윤이를 키워주셨다. 팔십을 바라보는 엄마였다. 내 이기심을 채우다 채윤이 돌보던 늙은 엄마의 허리가 무너졌던 때가 기억난다. 엄마 걱정 채윤이 걱정에 직장에서 일하다가도 줄줄 눈물이 났다. 일도 해야 하고 아이도 키워야 하는데 '단지 돈 때문에 아이 키워주는 분'을 찾기는 싫은 이기심을 버리지 못하고 하남으로 이사를 했다. 도망쳐 나왔던 '시댁 구역'으로 다시 들어갔다. 젊고 건강한 시부모님이 아이들을 키워주셨고, 급기야 한 집에 살게 되었었지. 내 딴에는 아이들을 위해 '며느리'라는 이름으로 볼모 잡힌 세월이었다. 그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싸이 클럽에 쓰던 육아일기였고.
이젠 둘 다 성인인데, 이렇게 마음에 드는 성인일 수가 없다. 또 이렇게 불안한 성인일 수가 없다. 현승인 안식년 이후 고등학교 진학하여 한 해 늦은 고3이고, 채윤이는 유학 준비생이다. 내가 고3일 때 늙은 우리 엄마는 생전 해보지 않은 삼색 샌드위치까지 만들었었다. 완두콩, 삶은 계란 흰자 노른자로 만든 삼색 샌드위치였다. 야자 하고 집에 오면 간식이 아주 끝내줬었다. 내가 강의로 집을 비운 날 우리 집 고3 현승이는 삼색 샌드위치는커녕 편의점 3종 세트로 끼니를 때운다. 이런 날도 있지만, 먹고 싶은 걸 뚝딱 만들어 줄 수 있는 날도 있으니 크게 괘념치는 않는다. 영어 공부와 입시 레슨비를 위해서 야마하 피아노를 팔아버린 채윤이도 있다. 한 푼 두 푼 모아서 그 피아노를 사고 처음으로 치면서 울었던 영상이 있다. 단 한 번도 네 인생 네가 책임지라 말한 적이 없는데, 채윤이는 이렇듯 독립적이다. 새벽에 일어나 영어공부를 하고, 밤 11시가 되도록 피아노 연습을 한다. 열심히 하지 않는 방법을 모르는 아이이다. 음, 현승이는 열심히 하는 게 싫은 아이이고... 고3 현승이는 늘 할 만큼 한 후에 기타 몇 곡을 치고 일찍 잠에 든다.
열심히 해서 걱정인 아이, 열심히 하지 않아서 걱정인 아이. 입시가 코 앞인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 키우진 않는다. 그냥 같이 살고 있다. 열심히 하지 않는 방법을 모르는 채윤이가 자랑스럽고 안쓰럽다. 열심히 하는 게 싫어서 낼 수 있는 열심도 내지 않는 현승이가 사랑스럽고 안쓰럽다. 두 아이 다 너무나 마음에 들고, 한편 불안하고 미안하다.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다.내가 할 일이나 열심히 하는 수밖에, 그리고 아픈 마음으로 기도하는 수밖에...
열심히 할 아이는 열심히 하고, 열심히는 안 하지만 할 것은 하는 아이들이다. 채윤 현승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미안하고 고마워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크게 없으니 그냥 교회 육아 세미나나 잘해보려고 한다. 내 아이 네 아이가 다른 아이가 아니니까. 큰 이모, 또는 할머니 마음으로 교회 아가들 품는 게 우리 채윤이 현승이에게 하는 거지! 그러고 있는데, 채윤이 현승이의 또 다른 엄마가 되어주시는, 어떤 엄마의 마음이 소고기에 담겨 왔다. 요 며칠 소고기 처묵처묵하는 나날이다. 많이 먹고 힘내라! 이 가을의 끝, 겨울이 시작된 어느 날에 우리 채윤이 현승이 둘이 함께 웃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기도한다.
무시로 떡볶이를 하는데, 사진을 찍어 놓으면 늘 같은 떡볶이 같아서 걱정했더니, 그러면 치즈 하나 올려, 무심하게 한 마디 해줘서, 약간 다른 떡볶이 그림을 얻었다. 무시로 만드는 떡볶이가 있고, 무심한 듯 속 깊은 딸이 있고, 끝나지 않는 수다가 있는 여유로운 토요일 점심이었다. 무지 좋은 가을 하루였다.
연구소 카페 '읽는 기도'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전의 어떤 책 보다 공감을 얻어내기 어려웠다. 조회수도 나오지 않고, 혼잣말처럼 필사하고, 묵상 내용은 셀프 메아리 댓글로 달아 올렸다. 독백의 유익을 알았다. 독백이 아니었다. 500여 년 세월을 뛰어넘어 예수님과 사랑이 빠진 한 여인과 만나는 만남이었다. 이 내밀한 만남을 '논문'이라는 형식에 담는 작업 중이다. 좋은 우연들에 힘입어 20여 년 만에 논문을 다시 써보려 한다. 너덜너덜해진 <영혼의 성>을 매만지며 '논물 쓸 결심'을 새롭게. 아래는 오늘 아침 연구소 카페에 올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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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음터 벗들과 같은 기도로 시작하고 싶은 바램으로 '읽는 기도'로 하루를 열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일종의 '필사'이고, 쓰는 기도가 됩니다. 여러 권의 책으로 기도했습니다. 엊그제 <영혼의 성>을 끝냈는데, 이것은 다른 어떤 책 보다 의미가 있습니다. 16세기 가톨릭 수녀님의 언어를, 우리와 차원이 다른 기도를 경험하신 이야기를 읽고 오늘의 묵상 주제로 가져오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결국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머리의 이해가 아니라 마음 기도의 연결이었습니다. 아침마다 글을 올리는 저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눈 뜨면 먼저 카페로 들어와 읽는 기도 게시판을 열며 시작하는 몇 분도 같은 은혜를 누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희한하게 꼭 오늘 내가 들어야 할 말씀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좋은 일에는 좋은 우연이 따릅니다.
<영혼의 성>을 마친 날이 아빌라의 데레사 수녀가 선종하신 날이라는 것을 알고 저는 심장이 쿵쿵거렸습니다. 누군가는 "우연히 그럴 수 있지!" 라고 말하겠지만 제게는 우연 그 이상이니까요. 존경하는 스승님께 이 말씀을 드렸더니 "좋은 일에는 좋은 우연이 따르더라구요."라고 하셔서 지지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여러 좋은 우연과 우연으로 나음터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새로운 '읽는 기도'를 시작해야 하는데, 어느 책으로 해야 하나... 여러 후보 중 고민 끝에 <영혼의 성>을 제대로 한 번 더 할까 마음 먹었었습니다. 가장 열심히 참여하고 있는 연구원 선생님들이 이제야 맛을 알아가기 시작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요. 더 많은 벗들과 데레사 성녀의 기도 영성을 공유하고 싶기도 하고요. 그리 마음먹고 있는데... 또 다른 좋은 인인이 난입하였습니다.
<리처드 로어 묵상 선집> 분도출판사
영성적 에니어그램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내 안의 접힌 날개>를 쓰신 리처드 로어 신부님의 묵상집이 막 발간이 된 것입니다. 저는 이 분의 책을 출간 즉시 구입하여 그 자리에서 읽기 시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음터 영성의 한 축은 리처드 신부님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책은 무려 daily meditation입니다. 그간의 저작과 강의에서 하루 분량 묵상 글로 발췌하여 편집한 것입니다. 이런 좋은 우연이라니요!
내일부터 시작합니다. 부디 '읽는 기도'로 같은 아침을 여는 벗이 한 분이라도 더 생기면 좋겠습니다. 이제 읽고 지나가지만 마시고, 한 줄이라도 묵상은 나눠주시면 좋고요. 기도와 묵상의 루틴을 가지는 일은 참으로 좋은 훈련이 됩니다. 아침마다 필사와 묵상으로 시작하는 저의 아침 루틴은 저를 지켜내는 참 좋은 습관이 되고 있습니다. 함께 해요! 이 묵상집의 원제는 <Yes, And...>입니다. 저라면 번역하며 이 책을 제목에 넣었을 것 같아요. 하루를 시작하기 얼마나 좋은 말인가요?
팬데믹, 팬데믹으로 인한 비대면 영상 예배 최고의 수혜자는 남편 JP이다. 정확히 말하면 JP 목사. 인기가 말할 수 없이 치솟았다. 가장 어렵고 까칠하고 무서운 교인인 아가들에게! 도대체 아가들이 왜 이리 목싼님, 목싼님 하는 거지? 처음엔 영문을 잘 몰랐는데 영상 예배 효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양복 쫙 빼입고 일주일에 한 번씩 티브이에 나오는 남자다. 알 수 없는 무슨 말을 떠들어 대는데 엄마빠가 그 시간만 되면 순해지고 착해져서 고분고분해진다. 주일 예배 시간이다. 그 분위기에서 아가들은 목싼님에게 꽂힌다. 엄마빠 시선이 가 있는 거기에 머무르다 괜히 그 남자를 좋아하게 되는 거다. 목싼님보다 젊고 훨씬 잘 생긴 제 아빠가 결혼식에 가려고 양복을 입고 나서니 "하아, 아빠 너무 멋지다! 꼭 목사님 같애...."라고 했다는 간증도 있다. 목싼님 인기에 거품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비싼 아가(기본적으로 아가들은 다 비싸지만)가 집에 왔다. "목싼님 집에 갈까?" 이 말에 기대에 부풀어서 온 거다! 평상복 목싼님을 보고 동공지진이다. 양복도 안 입고... 니가 왜 여기서 나와... 혼란스러운 눈빛. 어디서 봤는데, 익숙하고, 좋은 사람인데, 낯설어... "목사님 집에 가자"는 말에 아가는 영상 속으로 들어가는 줄 알았겠지. 게다가 이 목사님 평소와 다르게 살갑고, 막 웃고, 막 기타 들고 반짝반짝 작은 별을 쳐주고... 아가는 정말 당황했다.
양복도 안 입고, 설교도 안 하는 목싼님은 잠시 그러다 조용히 사라졌다. 어디서 본 듯한 호들갑 아줌마가 나타나 호들갑에 호들갑을 떤다. 그게 나다. 정말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놀아줬다. 프라이팬 덕후 아가인지라, 온갖 프라이팬과 냄비 다 꺼내 주고. 얼음도 좋아하니까 미리 얼려놓은 얼음까지. 얼음이 녹아 국물이 되었을 때 소면도 대주고, 바질도 꺼내 주고... 냉 바질 국수라는 신메뉴도 같이 만들었다. 피아노도 쳐주고... 혼신의 힘을 다했는데.
마지막엔 목싼님이었다. 인사하자고, 뽀뽀하자고 들이대는 나에게 저리 가라, 얼굴 치워라 소리를 지르고. 목싼님을 바라보는 눈빛은 나긋나긋했다. 분하다. 분하고 억울하다. 충분히 이해된다. 막 들이대는 거 나도 싫다. 싫겠다, 정말. 어쩔 수가 없다. 밀당이 안 된다. 좋으면 막 들어가게 된다. 참아지질 않는다. JP가 얄밉다. 양복 빼 입고, 영상 빨로 얻은 인기, 거품 낀 인기가 증말증말 질투가 난다. 밀당을 못하는 나여, 좋은 걸 참지 못하는 나여. 화로다 나여...
시들거나 썩어가는 고구마, 당근, 양파 같은 것을 싹 틔워 키우는 재미가 있다. 주방 창틀 한 자리를 차지하는 친구들이다. 여름을 나며 고구마 여러 개가 비쩍 마르고 싹이 나고 있었다. "싹트네에에~ 싹터요오~" 그릇에 담아 키웠더니 한동안 정말 예쁘게 자랐다. "키가 자라고 지혜가 자라니" 엄청 지저분해지고 감당이 안 될 즈음이다. 강제 처분해야 하는 때가 온 것이고. 내일 내일, 미루고 있는데 내일이 되기 전 어느 '오늘'에 현승이가 말했다.
와, 이게 이렇게 있으니까 꼭 마녀의 부엌같다.
와하... 마녀의 부엌이라니! 얘는 왜 이리 시적이지? 마녀의 부엌이고 싶다. 마법의 연기가 부글거리는, 마담 푸르스트의 마들렌을 굽는 마녀의 부엌이고 싶다. 며칠 더 두기로 했다.
비비언 고닉의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를 읽자니 뉴욕의 거리가 살아온다. 체험이 이런 것이다. 뉴욕의 38번 가, 33번 가... 이것이 더는 숫자가 아닌 것이다. 그 길에 서봤기 때문에 더는 머릿속 이미지, 관념일 수 없다. 지난여름에 걸었던 뉴욕의 길들을 떠올린다.
뉴욕의 마지막 밤이다. 재즈바 Village Vanguard에서 나와서 그냥 걸어보는 길이었다. 마지막 밤이라고 큰 아쉬움도 없었다. 나는 그저 어서 내 집 내 침대에 돌아가 편안한 잠을 자고픈 소원 외에는 없었고. 그래도 돌아보면, 참으로 좋았던 순간이었다. 한적한 길을 느리고 가볍게 걸으며 사진 여러 장을 찍던 순간이 뉴욕 여행 "최고의 순간"까지는 아니어도 참 좋았다.
채윤이에겐 두 개의 얼굴이 있다. 미국 얼굴과 한국 얼굴. 무슨 일이 있어도 유학을 보내야겠다 싶은 건, 그 어떤 이유도 아니다. 미국 얼굴로 살게 하고 싶어서이다. 미국 얼굴은, '자기'가 된 얼굴이다. 최상급의 한국 얼굴은 예중 다닐 때 얼굴이고, 아빠가 목회하는 교회의 청년부에 가 앉아 있을 때의 얼굴이다. 미국 얼굴에는 생기가 있고, 사랑이 있다. 자발성이 있고 기쁨이 있다.
이런 사람이 어쩌다 내 인생에 들어왔는가. 타고난 영적 지능이 있어야 영성을 알아들을 수 있다고 어느 신부님이 말씀하셨는데.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나이와 경험 너머의 어떤 귀를 가진 것 같다. 정말 잘 알아듣는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올 여름 미국행에 다슬 샘이 함께 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그분이 둔 한 수였다.
극적인 체험이 담긴 사진이다. 여행 내내 제대로 잠을 못 잤지만, 그야말로 한잠도 못 잔 날이었다. 시차 적응 실패로 몸의 균형이 완전히 깨진 탓이기도, 거기에 마음까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일어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가는 길은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그렇게 바닥이던 몸과 마음과 영혼에 생기가 주입되어 살아난 것이다. 미술관 들어갈 때 얼굴 다르고 나올 때 얼굴 달랐는데, 달라도 너무 달랐는데 저렇게 행복하고 평온한 표정이라니!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세 여인 모두 그러했다. 참으로 행복하고, 뉴욕에 오길 잘했다! 정말 잘했다! 싶은 순간이었다.
루이즈 부르주아 특별전을 만난 것이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 미술 전공 다슬샘은 "저는 아무 계획 필요 없어요. 미술관만 가면 돼요." 했었다. 나 역시 시카고 미술관은 다시 가고 싶었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도 기대가 되었었다. 하지만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은 아니었다. "루이즈 부르주아 기획 전시회 한다! 눈물 날 것 같아요!" 먼저 도착해 있던 다슬 샘의 톡으로 극적 반전은 시작되었다.
다슬 샘이 하는 미술치료 그룹에 참석해서 큰 도움받았던 채윤이는 루이즈 부르주와를 닮았다. 어떤 조각품들은 채윤이를 형상화한 것 같다며 같이 웃었다. 마치 제가 그린 그림이라는 듯, 턱턱 그림을 읽어냈다. 뭉클하게 심장 깊은 곳을 찌르는 감상평을 쉽게 쉽게 내놓았다.
루이즈 부르주와는 페미니스트 작가라고 하는데, '마망(maman)'이라 이름하는 거대한 거미 작품으로 유명하다. 거미가 '엄마(마망)'라니. 엄마가 거미라니! 거미는 전통적으로 모성의 상징이다. 아, 모성은 얼마나 복잡한 것인가. 엄마로 딸로, 인습으로, 죄책감으로, 그리움으로 혐오로 얽히고 얽힌... 딸 채윤이와 루이즈 그림 앞에 사람대 사람으로 서서 그림에 비춘 마음을 나누었다.
다슬샘과 나란히 서서 치료자의 눈으로 루이즈 부르주와의 무의식을 들여다보았다. 말 한마디가 건너오면 내 안에서 다른 것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다시 건네면 또 따른 것이 되어 돌아온다. 이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티키타카이다. 영적 지능으로 이해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 소장님과 연구원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으로, 여자와 여자로 말한다.
루이즈 부르주와 그림 앞에서 나는 그냥 한 여자였다. 애증의 모성 거미줄에 얽힌 엄마이거나 딸로 분열적 자리에서 고군분투 하는 여자였고, 앤 윌슨 섀프가 말하는 '백인 남성 시스템'에 맨몸으로 던져졌던 여자였다. 그리고 내 앞에 강한 두 여자가 있었다. 딸도 아니고 연구원도 아닌 힘과 영적 지능을 가진 여자 사람 친구들이 있었다. 미국 오가는데 비행시간만 60여 시간. 노숙자 행색의 공항 셀카가 몇 장인지 모른다. 경유 비행기를 기다리는 기나긴 시간에, 꿈작업도 할 수 있는 우리 셋이었다. 꿈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담겼다. 친구라는 뜻, 영혼의 친구라는 뜻이다.
저러고 뉴욕 거리를 활보하는 다슬샘은 여행 중 만난 사고 때마다 가장 위험한 곳에 배치되곤 하였다. 내적인 사고든 외적인 사고든. 돌아오기 전날, 저녁 재즈클럽 일정 전 공원에서는 말 그대로 대형사고를 만났다. 제대로 깔렸으면 이후가 상상이 되지 않는 커다란 나무통이 떨어졌던 것. 제대로 아니고 살짝 각도가 비켜가 찰과상을 입는 것으로 끝났으니 다행이었고. 나 대신 그 나무를 맞아주었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세 사람 모두에게 두고두고 잊지 못한 대형 사고의 기억을 남긴 지난여름 시카고와 뉴욕이다. '미쿡 원정대' 공식 해단식을 하자, 하자 하면서 몇 번 셋이 만났는데 해단식은 계속하기로 했다. 해단식으로 모일 때마다 새로운 마음의 후기가 나오니 어쩔 수 없다. 뉴욕의 거리를 함께 걸었고, 길 위의 시간을 함께 겪어냈다. '체험'이란 그런 것이다. 함께 체험했으니, 끝나지 않는 해단식이다.
곳간에서 인심 난나고. 김치통이 가득 차니 넉넉한 마음으로 요리를 하게 된다. 김치통이 가득 찼다는 건,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제천에 다녀왔다는 뜻이다. 이 즈음 제천 민이네 갔다 오면 김치통이 가득 차고, 냉장고 야채 박스는 내가 좋아하는 3종 세트(호박잎과 고추와 호박)로 넘친다. 바쁘기도 했지만 뭔가 마음도 뭣도 빈곤하고 여유가 없어서 제대로 뭘 해 먹이질 못했다. 집에 입시생 둘이 있는데, 이 둘을 잘 먹이질 못했다. 늦은 밤 돌아오는 길 통화하며 "현승아, 집에 먹을 게 없었는데 저녁 어떻게 했어?" 했더니 편의점에서 메뉴로 잘 먹었다고. 아, 죄책감이 밀려오…진 않지만 미안함과 고마움에 가슴이 저릿하다. 채윤에게도 같은 마음.레슨 갔다 또 연습하고 밤늦게 들어올 채윤이 점심 든든하게 먹으라고 김치찜을 한다. 오전 10시, 식사 준비하긴 애매한 시간에 김치찜을 안쳤다. 친구가 준 김치, 어느 집사님께서 손수 말리고 갈아서 만들어주신 생강가루가 고맙다. 한소끔 끓었을 때 전에 횡성 어느 두부전골 집에서 산 고춧가루 한 스푼 듬뿍 넣으면 그렇게 칼칼할 수가 없다. 빈곤했던 마음에 무엇이 주입되었는지, 많은 것이 감사한 아침이다.
수도원의 담을 넘고, 신분의 담을 넘고, 공간과 시대의 담을 넘은 중세 여성 평신도 공동체 “베긴(Beguine)” 영성 특강에 초대합니다.
작년 12월, 연구소 3주년 기념 특강으로 “여성, 영성, 공동체”란 이름으로 베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혼한 여성도 있고, 비혼 여성도 있고, 자기 집에서 사는 사람, 공동체로 사는 사람, 은수자로 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사랑하여 그분처럼 살고자 했던 여성들, 수도원이 아니라 일상의 한복판에서 그리스도를 따라 살았던 수백 년 전 여성들의 이야기가 우리 마음에 많은 것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을 마음에 품게 되었고요.
작년 특강 후에 마음에 남은 시가 하나 있습니다. 급진적으로 아름다운 이 공동체가 기존의 신학과 잣대로 규명되지 않자, 사제들과 남성 신학자들은 탄압하기 시작했고 마녀로 지목되어 화형당한 지도자도 있습니다. 그들의 탄압에 반응한 어느 무명 베긴의 시라고 합니다.
당신은 말을 하고, 우리는 행동한다. 당신은 분석하고, 우리는 응시한다. 당신은 검열하고, 우리는 선택한다. 당신은 씹고, 우리는 삼킨다. 당신은 노래하고, 우리는 춤을 춘다. 당신은 꽃을 피우고, 우리는 열매를 맺는다. 당신은 맛을 보고, 우리는 향기를 맡는다.
좋은 선생님을 모시고 다시 한 번 배움의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가톨릭 대학교의 정태영 신부님을 모시고 베긴 영성의 배경과 함께 베긴의 산파로 태어난 여성 신비가 제르트루다(Gertrude of Helfta, 1256-1302)의 영성에 대해 배워보려 합니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접하기 어려운 고난도의 철학과 신학을 연구하며 인문학적 소양을 갖췄던 그는 베긴 등 새로운 영성을 전통 안에서 받아들여 자신의 고유한 방법으로 결합시켰다고 합니다. 제르트루다의 저서 『수련(Excercitium)』으로 ‘말씀’을 통한 마음의 수련에 대해 배우겠습니다.
같은 사람들과 같은 음식을 하고, 똑같은 갈등을 반복하는 명절 수십 년이다. 명절만 없었다면, 저 사람만 없었다면 하던 시간들이었는데 주변에서 사람들이 사라지고 명절도 힘을 잃었다. 어머니의 명절 이야기이다. 몸의 한 부분으로 기울어 수십 년 살아와 틀어져 고착된 관절 같은 명절이다. 같은 사람과 같은 음식을 하며 같을 갈등을 겪느라 마음 어디가 기울어 틀어져 버렸지만 명절이 사라졌다. 명절과 함께 사람들도...
명절 전날 여자들이 모이는 시간, 만드는 음식, 일이 끝나는 시간, 명절 당일 아침에 모이는 풍경, 어정쩡한 예배, 식사, 그리도 점심, 또 저녁 손님... 어쩌면 그렇게 어느 해 명절을 따로 특정할 수 없을 만큼 똑같이 찾아왔었다. 명절 전후의 걱정 근심, 그리고 분노와 피해의식도. 매 명절마다 같았다. 그런데 이제 매 명절마다 "어떻게 모이지? 뭘 먹지?"를 아주 새롭게 고민하고 창의적으로 계획해야 하는 때가 되었다. 채윤이 현승이가 각각 공부로 시간을 낼 수 없다는 특별한 상황을 백분 활용하여 또 다른 모양의 추석이다. 어머니 모시고 셋이 비싼 식사하고, 걷고, 차 마시는 추석 전야를 보냈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북적대는 식구가 싫었고, 그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이 고통스러웠던 어머니, 조용히 단출한 음식을 하고 싶었던 어머니에게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고 단출해도 너무 단출한 노년의 시간이 왔다. 혼자 지내시는 것이 외롭고도 외로우시다. 최선을 다해 도와도 어머니 일생의 서사가 담긴 그 외로움과 서러움을 해결할 수 없으니 근심이 쌓여가고. 그래도 힘을 내어 할 줄 모르는 너스레를 떨고, 농담을 하여 웃겨 드리고, 토닥여드리는 모습이 아름답다.
야야, 나는 먹기 싫으면 안 먹고, 그냥 바나나랑 견과류 넣어서 휘리릭 갈아서 먹으면 아침 땡이야. 혼자 밥 먹기가 너무 싫어. 어머니, 저는 아침 세 번을 차려요. 각각 시간대 별로 일어나서 먹는 것도 다 달라요. 현승이는 꼭 국에 밥 말아먹어야 하고요....(셋 다 각자 알아서 먹는 편이지만 과장해 봄) 그렇지, 세 식구 따로따로 먹으면 힘들지... 그렇지...
젊은 부부들이 육아전쟁으로 부부전쟁도 치르고 내면의 전쟁을 치르는 것을 들으면 "그래도 다시 안 올 아름다운 시간인데. 힘들어도 지금이 제일 예뻐..."라고 가닿지 않을 말을 하(거나 삼키)곤 한다. 돌아보면 육아로 힘들 때 "언제 우아하게 외식 한 번 해보지?" 막막했던 어떤 날이 있었는데. 그 힘겨웠던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그리운 시간이 될 줄이야. 우리 어머니는 수십 명 모여 북적이던 그 명절의 시간이 그리우실까? 여전히 지긋지긋하셔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으실까? 그런 회한이 좀 있으시면 좋겠다. 약간의 회한 끝에 단출하여 외로운 오늘에서 조금이라도 좋은 것을 발견하셨으면... 이렇게 단 한 번의 새로운 추석이 가고 있다.
❝겸손은, 우리가 실제의 우리보다 더 나은 어떤 존재인 척하는(자만으로 인해 우리는 그렇게 상상한다) 대신에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진실로 자기 자신을 안다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질서 안에서 적합한 위치를 조용히 차지할 것이다. 이렇게 초자연적 겸손은, 사회에 우리를 통합시키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느님과 올바를 관계를 맺게 한다. 이로써 우리의 인간적 존엄성은 그 가치를 더한다. 자만은 우리를 거짓 존재로 만들지만 겸손은 우리를 진실한 존재로 만든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교적 겸손과 금욕 생활은, 언젠가는 소멸할 세상에서 매일의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며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도록 협력해야 한다고 가가르친다(살후 3장). 사도 바오로는 평범한 생활을 초자연적인 일과 활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거짓된 신비주의에 의한 들뜬 동요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준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가치를 거부하며 현세적 안전과 행복을 탐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시간 속에서 삶을 지속하지 못한다거나 행복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 더 기뻐하며 더 안전하게, 소박하게 일하며 살아간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삶에서 어떤 특별한 성취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세속적 목적을 추구할 때 따라오는 무익한 동요를 피할 수 있다. 덧없고 헛된 가운데서 평화롭게 살지만 그것을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 뒤의 실체를 본다. 즉 피조물이 창조주에 대한 기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완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인 평범한 생활은 장엄한 금욕적 생애보다도 더 거룩하고 더 초자연적일 수 있음을 깨닫는 일이 바로 최상의 겸손이다. 그러한 겸손이야말로 평범할 수 있으며 영적 자만의 한계를 넘어선다. 자만은 항상 평범하지 않기를 갈망하지만 겸손은 그렇지 않다. 겸손은 평범한 것을 들어 높여 변모시키고, 하느님의 영광으로 채우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희망 속에서 모든 평화를 찾는다.❞
토머스 머튼의 사랑에 이르는 길, 중
어렸을 적부터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 들을 때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 재산을 팔아 바쳤는데, 조금 챙겨 숨겼다고 죽이기까지? 초대교회 시작의 엄중한 시절이라 하나님께서 시범 케이스로 본때를 보여주셨다는 해석도 들은 것 같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고? 팔 토시 끼고 다니며 시범 케이스로 아무 학생이나 패는 ‘학주’ 같은 그런 분이라고? 내적 여정의 어느 길목에서 알아들어졌다. "실재보다 더 나은 존재로 보이려는 척"이 무서운 죄로구나! 추석을 휴일로 지내는 아침 영적 독서 내용이 참 좋아서 옮겨 적어보았다. 겸손은 진실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아니 진실로 자기 자신을 알 때 맺는 열매가 겸손이다. 자만은 항상 평범하지 않기를 바라고, 지금 여기의 평범을 회피한다. 그러다 빠지는 것이 거짓 신비주의이다. 누추하고 무력한 지금 여기의 시간을 초자연적인 일로 받아들이는 것이 겸손의 시작이다. 실재의 나보다 더 나은 나로 포장하지 않는 것이 가장 가까이 있는 겸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