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리 사는 게 따분하고, 우울하고, 무기력할까요?


<사랑의 기술>과 <소유냐 존재냐>의 에릭 프롬, 그의 미발간 원고를 묶은 책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입니다.

무기력을 되풀이하는 삶에 대한 진단은 명확합니다. 진짜 삶, 진짜 자기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랍니다. 생각도 느낌도 감정도 심지어 의지조차도 '남이 바라는 나'에 맞춰져 '진짜 나'로 살지 못합니다.


뉴스 하나에 기뻐하고 분노하는 것조차도 가장 적절하고, 인기 있는 감정을 선택하려는 나 자신을 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진짜 감정'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브레넌 매닝 생각도 나는군요. 거짓자아를 인식하고 진짜 자기로 사는 사람에겐 영혼의 근본 에너지인 열정이 깨어난다지요. 그것은 절정의 황홀감(뽕 맞은 것처럼)이나 도취된 감정이나 마냥 낙관적인 인생관이 아닙니다. 진짜 자기로, 있는 그대로 사랑받는 자기로 살아가려는 불굴의 의지랍니다. 그리고 그 의지는 ‘기꺼이 영향 입을 줄 아는 심장’이기도 합니다. 강인한 의지이며 동시에 말랑한 심장이라니!


다시 에릭 프롬의 말입니다. “태어날 준비는 용기와 믿음을 필요로 한다. 안전을 포기할 용기, 타인과 달라지겠다는 용기, 고립을 참고 견디겠다는 용기다.” 라고 했고요. 이 용기와 더불어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눈을 가지기 위한 능력으로 ‘감탄할 수 있는 능력’을 꼽습니다. 역시나 혼자일 수 있는 용기와 감탄할 준비가 된 말랑한 마음. 내적 여정으로 이루고자 하는 덕이란 이것 말고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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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 않을 수 없었고, 읽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일들이 나를 새로운 자리로 데려가곤 한다.


음악치료사라는 직함, 호칭 또는 정체성이 점점 흐려지고

작가와 강사의 옷이 평상복 같아지는 나날이다.


쓰고 읽은 것들이 자꾸 내가 새옷을 입히는 것이다.

글쓰기 자조모임을 이끌게 되었다.


이 쓰기 모임을 설명하는 언어로 '피해자(보다 생존자)', '치유(보다 성장)'를 쓰기가 불편하다.

아닌 게 아니라 첫모임에서 한 분이 말했다. 그 말은 불편하다고.


대상화 되기를 불편해 하는 감각을 가졌다는 것은 더는 그 언어가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 수도 있다.

'자조모임'이 딱이지 싶다.


건강(health), 치유(Healing)라는 말의 어원이 ‘hal, hale’이라고 한다. 

이것은 whole, 즉 전체성과 온전함의 뜻한다.


치유는 비정상을 정상 만들거나, 아픈 사람 낫게 한다는 뜻보다는

온전성의 회복이라 이해하는 것이 좋다.


칼 융이나 카레 호나이는 자기 치유, 즉 온전성을 향한 의지와 힘이

모든 인간 안에 있다고 한다.


돌아보면 읽고 쓰는 것을 멈출 수 없었던 이유는 나다움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었다.

기울어진 사유의 틀과 신앙을 가지고 불편한 일상에서 균형을 찾고자함이었다.


커리큘럼을 짜기 위해 참고할 책을 한 권씩 빼서 노트북 옆에 쌓다보니 끝이 없다.

마치 '치유하는 글쓰기'를 위해서 읽고 써 온 인생이라는 듯.


자기치유, 또는 가장 나다운 나를 꽃피우기 위한 읽기 쓰기의 50평생이니,

글쓰기 자조모임을 이끄는 일은 또 하나의 필연인가.


새로운 만남, 새로운 일로 긴장과 설렘의 봄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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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인연이 있다.

명동성당을 언저리를 맴돌다  만난 성당 언니들이 있고,

성당 언니들을 가르치는 불자(佛子)이신 선생님도 계시다.

가장 소중한 것을 배우는 여정에 만난 분들이다.


신심 깊은 성당 언니가 암은 문턱에 섰다 깨달은 간증이 뜨거웠다.

지적인 욕구가 높은 이 언니는 개신교의 은퇴한 철학교수의 가르침에 빠져있다.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 깊은 철학적 성찰, 그리고 명상이 그를 변화시켰다고 했다.

명상의 유익에 대해 또 열변을 토하셨다.


어, 그런데 명상이라고 하셨나?

내가 아는 어떤 가톨릭 신자보다 믿음이 뜨거운 분이고,

마음공부와 영성에 관해 모르는 것, 안 해본 것이 없는 분이다.

선생님, 명상이라고 하셨어요? 향심기도가 아니구요? 라고 했더니.

향심기도 열심히 했는데 모르던 것을 명상으로 배우니 알겠더란다.


담을 넘어 가 배우는 기쁨과 두려움, 신선함과 막막함을 안다.

평생 들어 귀에 딱지 앉은 얘기를 새로운 언어로 들을 때 무릎 치며 알아듣고

귀에 딱지로 남은 평생 배움의 진가를 그제야 발견하게 되는 것이 신비롭다.


80, 60대 선생님(이라 쓰고 언니라 읽는다)들 사이에서 막내 역할을 맡는 것도 신나는 일이다.

밥 생각 없으시지만 막내 배고프다니 헤어지던 발걸음 돌려 저녁 먹어(라고 쓰고 '멕여'라고 읽음)주심,

야야, 나는 이해가 안된다, 는 아주 일상적인 말로 내 종교가 가진 편협함을 가차없이 찔러주심.

재능과 꿈 덮어두지 말라고 사업계획 짜주며 먹고 살 걱정까지 해주심.

담을 넘어 만난 분들과의 수다가 사랑 노래가 되어 가슴에 남았다. 


불금의 명동에서 연가를 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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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물과 자장면


동생네 휴가, [동생네 엄마 어린이집]이 불가피한 휴원이다. 자동으로 [누나네 엄마 어린이집] 잠시 문을 연다. 아기가 된 엄마가 집에 오셨다. 공교롭게도 우리 집 네 식구 모두 돌아가며 1박2일, 2박3일 집을 비우게 되었다. 따라서 엄마의 삼시세끼를 돌아가며 챙기게 되었다. 계속 드시던 반찬도 물릴 무렵 채윤이가 당번이 되었다. 밖에서 일을 보다 통화로 근무 지시를 한다. "잡채 드셔도 되고, 죽을 사다 드려도 되고, 사실 요즘 할머니 치킨이랑 자장면도 드셔. 여쭤봐, 뭐 드실지." "엄마, 할머니가 자장면 좋다고 하셨어." 라며 엄마가 자장면을 드셨다. 일 마치고 돌아오니 현관 앞에 깨끗하게 비운 자장면 그릇이 나와 있다. 엄마는 평생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는데, 이제 자장면을 드신다. 평생 나물 좋다고 하셨는데 공들여 삶아 무친 드룹나물에 입도 안 대신다. 어머니는 자장면과 치킨과 스파게티가 좋다고 하신다.


꽃게찜과 간장게장


한때 엄마는 내가 만든 꽃게찜에 꽂혔었다. 정확히 엄마 몸이 무너져서 병원 신세를 져야하는 시점부터 꽃게찜을 수시로 해다 날랐다. 엄마 인생에 꽃게찜이 등장한 것은 내가 결혼하고도 한참 후였다. 엄마 생신, 아버지 추도식의 특별 메뉴로 꽃게찜을 했었는데 당시 엄마는 그리 잘 드시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엄마가 나랑 같이 음식 준비를 분담 할 수 있었다. 손님 치를 용도의 요리였지 엄마는 꾳게찜이 싫다고 하셨다. 당신 손으로 더 이상 요리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요리는 커녕 스스로 밥도 차리기 어려워졌을 때 엄마는 꽃게찜이 좋다고 하셨다. "엄마, 뭐 드시고 싶어?" 하면 조금 미안해 하면서 꽃게찜을 주문하셨다. 비싼 꽃게, 그리고 만드느라 고생하는 딸 걱정은 갈수록 줄었다. 미안함보다 욕구가 먼저인 듯 대놓고 "나는 꽃게찜 해올 줄 알었댕 빈손이네."라고도 하셨다. 꽃게찜 지나가고 다음 메뉴는 간장게장. 지난 몇 년 내 손을 거쳐 엄마 뱃속으로 들어간 게가 몇 마리더냐!


김치국물과 잡채와 사골국물


요즘 엄마는 잡채에 꽂혀 있다. 엄마가 오신 다음 날 엄청난 양의 잡채를 했다. 큰 지퍼백에 한 가득 담아 냉동실에 넣었다. [동생네 엄마 어린이집]으로 돌아가실 때 챙겨 보낼 요량으로. 명절이며 잔치가 있을 때마다 엄마가 메인 메뉴에 손대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엄마 반찬은 늘 깍뚜기 국물, 시어빠진 김치를 넣고 끓인 동태찌개 같은 것들이었다. 엄마는 모든 메인 요리가 싫다고 하셨다. 그랬던 엄마는 이제 김치도 물김치도 드시지 않는다.  잡채를 드신다. 소고기나 조금 드셨고 평생 돼지고기 닭고기 입에 대지 않으셨는데 세상에 치킨을 드신다. 청소년 시절 동생과 내가 후라이드 치킨을 좋아해 일인일닭 할 때도 엄마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 냄새도 싫어했다. 요즘 밥은 꼭 사골국물에 말아 드신다. 그리고 떡갈비를 찾으신다. 아, 채식주의자 엄마가 육식주의자 되는 과정 지켜보기!  


자기애적 욕구 총량의 법칙


채식주의자 엄마가 육식주의자 되는 것, 이해할 수 있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오직 자녀교육에 몰빵했던 엄마는 우리가 잘 먹는 모든 것을 싫어했다. 먹고 싶은데 애써 참은 것이 아니라 진정 싫어했다. 욕구가 엄마의 고상한 뜻에 복종하여 있어도 없는 듯 찌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일말의 미안함도 없이 간장게장, 잡채, 사골국물, 청포도를 주문하는 엄마가 낯설고 싫기도 하지만 좋기도 하다. 뒤늦게 발현되는 자기애적 욕구이기 때문이다. 청각, 시각 등 엄마의 모든 감각이 하루가 다르게 둔화되고 있다. 이번엔 대화를 하려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야 알아들으시는 정도였다. 입에 달고 사셨던 '고맙다, 복 받어라' 대신에 '내가 시(세) 살 먹은 애여'를 백 번 말씀하신다. 더욱 의존적인 삶, 무력감의 표현이다. 시 살 먹은 애기 엄마의 자기애적 욕구가 마지막까지 지금 정도의 유순함으로 표출되면 좋겠다. 그렇지 않다해도 어쩔 수 없지만 간절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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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여 년 동안 에니어그램이 비전으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 1:1로만 전수 되었다는 것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갈수록 더 그렇습니다. 미세한 표정 변화와 눈빛까지 느낄 수 있는 거리로 둘러앉아 주고받으며 나눌 때 에니어그램의 진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의 소중함을 존재로 느끼게 됩니다. 에니어그램 강의 때문이 아니라 앞에 앉은 우주 하나 같은 존재의 무게감으로 깨달음을 얻습니다.


행동유형별 분류(공격형, 의존형, 움츠리는형), 날개, 화살 통해 좀 더 다면적으로 유형을 이해하는 2단계 여정을 마쳤습니다.


난 아무 것도 한 게 없다고 생각해서 갈등이 생길 때마다 억울할 뿐이었는데 ‘수동적인 공격’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움츠리는 유형 9번의 울먹이는 고백이 마음에 남습니다.


상태가 안 좋아질 때 그 많은 긍정성 어디 가고 집게 손가락 들어 비판하고 있는 모습을 떠올린 7유형 선생님은 화살을 통해 자기이해의 폭이 넓어졌답니다.


혼자 뭐든 잘해서 누구와 함께 할 필요을 못느낀다는 공격형 8유형 선생님. 함께 한다는 것에 필요하고 좋다는 것을 경험하셨다는 말에 감동이 두 배네요.


더 많은 기쁨과 아픔의 영롱한 말들이 남아 있는데 가슴 속에 소중히 간직하며 한 분 한 분의 여정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하게 하소서. 어릴 적 명절 아침 예배에선 늘 이 찬송을 불렀다. 앞집 친구네서는 제사가 한창인 시간이었을 테고. 목사인 아버지가 이 곡을 선택한 것은 참된 복의 근원을 천명하고자함이었을까. 조상님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다! 하지만 어린 내게 이 찬송은 그저 떡국이나 세뱃돈, 명절에 모인 가족들의 분위기 같은 것을 연상시킬 뿐이다. 음악은 흔히 경험과 함께 기억창고에 저장된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후에는 바로 그 기억을 소환해내는 촉발제가 되기도 한다. 아직도 나는 찬송가 28장을 부르면 어렴풋이 설날 아침을 떠올린다. 내게는 가족의 노래, 명절의 노래이다. 결혼 하고 명절 노래 한 곡을 더 얻었다. 시댁의 명절 아침 찬송은 559사철의 봄바람 불어 잇고였다.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 집 즐거운 동산이라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목회자 가정에서 자란 내게는 생소한 가정예배였다. 그야말로 예배를 보는분이 대부분인 예배였다. 거의 어머니 한 분이 대표로 드리는 것 같았고, 다른 친척들은 구경 내지 그저 비참여의 태도로 자리만 지키셨다. 어머니께 힘을 실어드리기 위해 힘을 내어 찬송을 불러보지만 어쩐지 민망하고 어색하다. 알고 보니 사연이 있었다. 장손 며느리인 어머님이 일찍이 홀로 신앙을 갖게 되셨다. 제사 문제로 내적 갈등을 겪으신 것은 당연한 일. 어떤 계기로 제사를 추도식으로 바꾸겠노라 선언 하시고, 이 일로 친척들과 풀리지 않는 갈등에 휩싸이게 되었다. 내가 처음 그 자리에 합류한 시점은 오랜 갈등이 일상이 된 어느 명절이었다. 형식상 예배를 드리지만 대부분의 가족들은 앉아 있어주는 형식, 그것도 감지덕지인 분위기였다. 무언의 저항 속에서 고마워라 임마누엘힘주어 부르는 어머니의 찬송은 안타까움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불렀던 찬송의 가사를 보라. 부조화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이율배반이다.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즐거운 하루하루, 차라리 다른 찬송이면 어땠을까? 어쩌다 이 찬송이 명절 18번이 되었을까. ‘동기들 사랑에 뭉쳐 있고라는데 갈등에 휩싸인 동기들이 민망한 노래 속에 어정쩡하게 마주하고 있다. 조상의 복이냐, 하나님의 축복이냐 근본적 합의에 이르지 못한 가족들이 하나님 아버지 모셔서 믿음의 반석이 든든하다노래하고 있다. 어서 이 예배가 끝나 식사시간이 오길, 아니 이 불편한 명절 하루가 어서 지나가길. 한 발 물러 서 지켜보는 나의 심정조차 그러했다.

 

극단적인 예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찬송의 가사를 일말의 아픔 없이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다. ‘복의 근원 강림하사부르던 나의 원가정 역시 말 못할 갈등과 사연을 배경처럼 깔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늘 예배를 인도하던 목사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이후, 명절 아침 복의 근원은 슬픔과 그리움의 노래가 되었다. ‘산에서 10마일쯤 떨어져 있을 때만 그 산이 푸르게 보이는 것처럼, 가정도 그 사정을 모를 때만 평..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 C.S 루이스가 어느 편지에 썼다는 말이다. 친구가 정말 믿을 만 할 때, 충분히 친해졌다 싶을 때 보통 가족의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게 된다. 실은 우리 부모님 이혼하셨어, 아픈 형제자매가 있어, 부모님이 힘드셔서 경제적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어, 부모님과 소통 자체를 포기한지 오래야. 백 사람이면 백 개의 크고 작은 아픈 가족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예쁜 접시에 담긴 과일 먹는 가족은, 그런 거실은 없다.

 

가정의 달이 되어 이 찬송을 부르게 될 때 뭔가 조금 불편한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스캇펙의 그 유명한 책 <아직도 가야 할 길>은 이렇게 시작한다. ‘삶은 고해(苦海). 이것은 삶의 진리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진리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받아들일 때 삶은 더 이상 고해가 아니다가정은 따스하고 그리운 곳이지만 동시에 아픔과 갈등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조금 다른 지점으로 옮겨갈 수 있다. 우리 가족의 문제가 특별하고, 우리 집만이 갈등과 어려움에 휩싸여 있다고 위축되거나 불평에 휩싸일 필요가 없다. 문제 많고 아픔 있는 우리 가정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이 현실감 없는 찬송은 소망의 노래가 된다. 비록 지금 믿지 않는 가족으로 가슴 아프고, 갈라진 마음으로 얼굴 마주하기 힘든 시절이라 할지라도. 예수만 섬기는, 예수만 닮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분은 사랑이며 소망이다. 우리 인생, 우리 가정의 현실은 사철 찬바람 부는 날이지만 사철 봄바람의 나날을 그린다. 이것은 고해와 같은 일상을 사는 우리의 소망이며 또한 소명이다.








그저 그런 사람인가 싶었는데 알수록 숨겨둔 매력이 솟아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첫 만남에서 자신이 가진 온갖 것을 다 드러내 찬사를 받아내곤 갈수록 바닥만 보여주는 사람도 있고요. 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 전 <행복한 페미니즘>으로 만난 벨 훅스를 <올 어바웃 러브>로 만나며 놀라는 중! 벨에 빠져 전작에 도전할 기세입니다. 언젠가부터 피로감으로 손에 잡지 않았던 페미니즘 도서 목록에서 익숙했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 <행복한 페미니즘> 개정판이라는 것도 이번에 알았습니다.  


스캇 펙, 에릭 프롬, 토마스 머튼까지 아우리는 벨 훅스의 <올 어바웃 러브>는 에릭 프롬 <사랑의 기술>을 잇는 21 세기 최고의 사랑의 고전이라는 평이 과장이 아닙니다. 이 책을 읽다 <행복한 페미니즘>을 다시 훑어보니 개인의 만족과 성장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는데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었더군요. 술술 읽혔던 내용들이 두려움이나 분노 아닌 사랑에 기반한 여성주의였다는 것을 뒤늦게 확인하게 됩니다. 사랑, 신성한 사랑, 결국 영성을 말하는 이 보석같은 책을 씹어 먹고 싶네요 :)    


오늘 읽은 챕터가 참으로 좋아 페북의 페이지, 개인 타임라인에도 올리고 내내 마음에 담고 있습니다.


내적여정 세미나를 안내하고 있지만 그 결국은 ‘일상’입니다. 영적인 삶은 한적한 곳을 거닐며 좋은 글귀를 읽고 묵상하는 유유자적 한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내적인 여정은 허구헌날 자기분석과 성찰에 빠져 수염 덥수룩한 나날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에니어그램 번호, 날개 화살로 자기를 규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영성은 지금 여기 일상을 영적 존재로 사는 것이고 그것은 다름 아닌 있는 바로 그곳에서 사랑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올 어바웃 러브>의 한 부분입니다.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행동과 실천을 통해, 즉 일상적인 모습 속에서 자신의 영성을 발현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본보기가 된다. 잭 콘필드는 다음과 같은 통찰력 있는 말을 했다. “우리가 사랑을 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영적인 스승이 많아도 무용지물이다. 아무리 고귀한 상태에 들고, 아무리 뛰어난 영적 업적을 이루더라도 가장 일상적이고 평범한 방식으로 행복할 수 없다면, 또한 진심으로 다른 사람과 교류하고 주변 사람과 교감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특히 이 부분, 내적여정에서 놓치기 쉬운 부부입니다. '가장 일상적이고 평범한 방식으로 행복할 수 없다면, 또한 진심으로 다른 사람과 교류하고 주변 사람과 교감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연애강의가 다 뭔 필요냐, 소개팅 한 번이라도 성사시키는 게 더 영양가 있지. 솔직한 심정입니다. 강의가 아니라 실제 도움이 되는 뭐든 하고 싶다는 바램과, 하게 되더라도 정장 입고 원탁 테이블 둘러앉아 ‘나를 찍어주시오’하는 매칭 프로그램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요. 많지 않은 인원이 2박3일 정도 캠핑 가서 바비큐도 하고, 마피야도 하고, 시대의 연애담론도 나누고. 마음이 편해지면 개인의 연애사도 나누는 오글거리지 않는 매칭프로그램을 꿈꿨지요.


청년들을 위해 뭐라도 해야지, 고민하는 교회와 목사님을 만나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꼭 매칭이 성사되지 않아도 좋을 캠핑이 될 것이고요. 마치고 나면 ‘연애人’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이 커지고, 자기 자신이 되어 연애할 힘을 얻어갈 수 있도록 도우려합니다. 


나를 찾는 길 위에서 너를 만나다!


장소, 식사, (특히) 강사가 특급입니다 :) 장소 답사 따라갔다 홀딱 반하고 말았습니다. 그곳에 2박3일 머무르는 것만으로 힐링이 되겠다 싶은 호텔입니다. 예, 특급 강사가 상주하며 밀착 상담도 합니다. 교회에서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의는 리플렛 안에 있는 안내로 하시고요.








"아이구, 오지마. 냉이 한 줌에 얼마 한다고 그거 사 먹으면 되지. 내가 그냥 먹을게 오지마라"


시어머님의 말씀입니다. 지나가다 읽는 여러분께는 '아무 말' 아니지만 제게는 엄청난 말입니다. 아니, 어머님 당신께는 어마어마한 말씀입니다. 소확행, 작고 확실한 행복을 살자는 게 유행이던데요. 저는 작고 확실한 변화가 확실한 행복을 보장한다 생각합니다. 아무튼 어머님 입에서 아무렇지 않은 저 말씀은 작고 확실한 변화입니다. 


어머님은 누구보다 상처가 많은 분입니다. 그런 분들이 흔히 그렇듯 '다시는 상처 받지 않겠다' 주먹 꽉 쥐고 살아가십니다. 자기방어를 위한 진이 견고하지요. 본인에겐 자기방어이지만 주변 사람에겐 '가시 옷'과 같습니다. 당신이 누구를 찌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십니다. 아니 조금 까칠하고 때로 무례한 것도 당신 안의 상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에 당당하기조차 하시지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함께 있고 싶다, 보고 싶다'는 표현도 서투릅니다. "목요일 날 여기 오냐?" (목요일은 어머니 계신 하남 쪽으로 일하러 가는 날입니다) 목요일에 맞춰 홍삼을 달여 놨다, 김치를 해놨다, 누가 뭘 줬는데 양이 많으니 나눠가라, 하시지요.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주먹 꽉 쥔 어머니는 동시에 늘 계산하고 반성하고, 또 다시 헤아리며 당신 자신을 괴롭히십니다. "그래? 바쁘면 오지 마라" 해놓으시곤 며칠 후에 전화로 이러시죠. "내가 잠이 안 와서 막걸리 한 잔을 마셨는데 취했나봐. 취한 김에 그랬다. 아니, 이 며느리 년이 김치를 해놨는데 가져가지를 않어. 하하하"


어머님이 뭘 나눠주시는 마음엔 자식 사랑도 있지만 '나 좀 봐줘라'도 있고 통제하려는 힘도 작용합니다. 그걸 세밀하게 느끼는 저는 늘 깍뚜기 한 보시기, 감자 몇 알 가져오면서 쌀 한 가마니 가져오는 부담입니다. 돌려치기로 욕을 먹으면 두고두고 기분이 나쁘기도 하고요. 언젠가부터 받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집에 있어요, 아직 많아요, 들를 시간이 없어요, 라고 하거나 피할 수 없을 때는 남편이 가서 받아오곤 했습니다.


단지 무엇을 주고 받는데 그치치 않고 어머님과는 작정하고 거리두기를 한 지 몇 년입니다. 아마 어머님 자서전 써드린 이후로 마음 정리가 된 것 같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생각했고, 아픈 어머니의 치유자가 되겠다는 구세주 콤플렉스도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무엇보다 내 한계를 인정한 후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이후 어머님의 방황을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믿었던 막내 며느리, 상담자, 신앙의 동역자, 말이 통하는 유일한 사람에게 거절 당한 느낌이셨을 테니까요.


어머니가 느끼실 상실감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오기도 했지만 나를 지키는 것이 나를 내어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일 때가 있음을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사람 참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어머님 가까이서 찔리고 피나는 지점을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는데 뭔가를 느끼고 깨달으시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의 힘을 빼고, 무장해제 하고 지내니 어머니 또한 무기를 내려놓으시는 것입니다. 물론 편치 않은 몇 년의 시간이 걸렸지요. (여전히 그런 시간이기도 하고요)


시골에 계신 친구 분이 냉이를 보내셨다며 목요일에 가져가란 연락을 받았습니다. 냉이는 아주 사랑하는 거니까 알겠다고 답을 했지만, 목요일 당일 어머님과 연락이 되지 않아 그냥 집에 왔고 며칠 후 통화였습니다. 주일 저녁 안 막히는 시간에 잠시 갈까 한다고 했더니 하신 말씀이  "아이구, 오지마. 냉이 한 줌에 얼마 한다고 그거 사 먹으면 되지. 내가 그냥 먹을게 오지마라" 입니다. 냉이 한 줌으로 '나를 알아달라, 내 호의에 고마워 해라' 통제하던 어머님이 '냉이 한 줌에 얼마 한다고!' 라니요. 


내적여정, 마음공부, 영성수업의 끝은 작고 확실한 일상의 변화입니다. 끝없이 자기를 파고 성찰하고, 더 깊은 자아를 발견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장착하고 휘두르던 가시를 인식했을 때 찌르던 당장 그것을 내려놓는 작고 확실한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에니어그램 유형에 자기를 비추고, 성찰 일기를 쓰고, 꿈을 분석하고, 향심기도 훈련을 하는 것은 작고 확실한 일상의 변화로 드러나야 합니다. 


생각해보면 어머님은 내적여정, 마음과 영성을 공부하는 제게 치열한 실습지였습니다. 한때 꿈을 통한 마음 여정 안내를를 해주시던 선생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정 선생은 가시옷 입은 어머니를 왜 그렇게 포기하지 못하고 끌어 안고 찔리고 있어?" 질책이기도, 진정한 의미의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착한 크리스천 콤플렉스도 있겠고, 치유자 연(然) 하는 교만도 작용하겠지만 어머님에게서 제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머님의 작고 확실한 변화가 그러므로 저의 것이기도 합니다. 아니, 오늘도 조금씩 성장하고자 애쓰는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사람 징글징글하게 안 변하지만 사람, 신비롭게도 어느 순간 믿을 수 없게 자기를 초월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깊은 곳에 상주하시는 치유자, 보혜사 그분의 이끄심일 테지요.





나는 나가고 그는 들어오는 길에 마주쳤다.

저기 느릿느릿 걸어오는 기다란 그의 몸땡이가 보인다.

손에 든  늘 제 몸처럼 붙어 있는 한 두 권의 책, 그리고 검은 비닐봉지가 멋 없이 흔들린다.

검은 비닐봉지든, 반짝반짝 쇼핑백이든 손에 든 그것들은 약간 설레게 하는 것들이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작은 비닐봉지에 꽃 화분 세 개가 미어 터지게 들어 앉았다.

참말로 담긴 품새가 멋이라곤 없다.

나도 지나치면 봤는데 교회 앞에 꽃 파는 트럭이 서 있었다.

나도 좀 살까 했는데, 차를 세우기가 뭐해서 그냥 들어왔다.


밤늦게 들어와 친구가 만들어준 도자기 화분에 꽃 포트 세 개를 꽂으려 각이 나오질 않는다.

색이 조화롭거나, 크기가 알맞거나 해야 하는데 도통 어우러지질 않는다.

이렇게 막 고를 수도 있나, 부조화를 컨셉으로 선택한 것인가?

주일 아침 일어나 다시 한 번 이리 만지고 저리 만져보지만 안 되겠다.


글을 읽고 쓰고, 논리를 만들어 내고, 지식을 정돈하는 일에는 진화된 사람.

멋을 부리고, 폼을 잡고, 자기를 드러내는 일로 가면 다섯 살 아이 같다

공평함의 덕, 객관적 판단의 덕이 차고 넘치는 사람.

그것을 나는 얼마나 버거워 하고 차겁게 느꼈던가.

빈말로라도 편 한 번 들어주면 될 텐데, 그걸 못해서 내게 받은 구박과 설움은 말할 수 없다.


반면, 간섭하거나 강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그의 태도는 내게 너무 좋은 약이 되기도 했다. 

엄마의 폭풍 잔소리와 간섭으로 형성된 나의 아픈 그림자를 치유하는 힘이 되었으니.

그저 그의 마음 생김새가 내게는 선물이 되었다.


피차에 타고 난 모양으로 서로에게 선물이 된 지점이 있다.

MBTI든 에니어그램이든 어떤 성격유형을 갖다 대도 정반대 성향을 가진 한 쌍의 바퀴벌레.


애초 생겨먹은 모습과 태도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시도로 서로에게 다가갈 때가 되었다.

그것을 중년이라 부르고, 

인생 제 2막이라 부른다.

싸구려 꽃 화분을 구겨 넣은 검은 비닐봉지 든 손에 뭉클하다.

잘 다루는 글이 아니라, 평생 '객관성'에 사로잡혀 거리 두고 싶었던 것들에 다가가는 모습.


꽃을 든 이 남자, 이 남자의 서툰 몸짓,

자기를 넘어서는 미미하지만 큰 변화를 기리는 부활절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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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인트 모아 현금처럼 쓰고,

흩어진 포인트 모아서 한 방에 제대로 쓰고,

이벤트 응모하여 공짜 여행, 선물 받아 누리고,

시간 맞춰 앉아 클릭클릭 하여 저가 항공권 잡는 거.


이런 거 아주 못 하는 거.

주유를 하며, 장을 보며, 뭔가 계속 적립하고 있긴 하지만 이걸 언제 써먹는 지도 모르는 거.

이런 거 알뜰쌀뜰 챙기고 누리는 사람들 부럽지만 나는 틀렸으니, 여러분 많이 누리세요.


헌데 내게도 이런 일이 생겼답니다. 

응모한 기억조차 없는데, 누구에게 왜 주는지도 모르겠는데 티스토리에서 선물을 받았습니다.

뭐가 당첨이 되었다며 예쁜 노트, TISTORY 새겨진 볼펜(이 볼펜은 심지어 원래 좋아하는 펜), 스티커가 왔습니다.


티스토리 블로거 생활 11년.

브런치니 뭐니 새 아파트들이 떴다 사라지고 떴다 사라지는 세월 동안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콕 박혀 죽순이로 살았습니다.

좋아서 쓰고, 괴로워서 쓰고, 자랑하고자 쓰고, 위로 받고자 쓴 세월이 11년.

싸이 클럽 시절까지 합하면 더 긴 세월이겠군요.


그 사이 블로그에서 잉태되어 나온 책인 여섯 권.

글을 쓰기 참 잘했습니다.

나를 위해 한 가장 잘한 일이 글쓰기입니다.

손일기 37년, 인터넷 글쓰기 15년, 블로그 활동 11년.


애써 계산하며 쌓은 포인트는 아니지만 그 포인트로 얻은 선물이라 해두겠습니다.

티스토리,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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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6

 


내 마음에 있는 이 노래로 고백록을 써본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경계 지으며 살아온 세월이 길다. 뚜렷한 경계를 세워놓고 나는 불가침의 선 안쪽, 안전한 이쪽에 서 있다고 자신했다. 그것은 흡사 홍수로 떠밀려 내려가는 세상을 방주 안 창문으로 내다보는 안도감이며 다른 말로 하면 선민의식이었다.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던 이런 속내가 오늘의 찬송 물 위에 생명줄 던지어라를 부를 때 유독 또렷하게 느껴지곤 했다. (예전 찬송 가사는 물 건.. 생명줄이었다) 후렴의 반복되는 가사는 은근히 선동적이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방주의 안팎을 그렇게 확실하게 구분 지을 수 있었던 그 시절의 무모한 확신이 부끄럽다.

 

물 위에 생명줄 던지어라 누가 저 형제를 구원하랴

우리의 가까운 형제이니 이 생명줄 그 누가 던지려나

생명줄 던져 생명줄 던져 물속에 빠져간다

생명줄 던져 생명줄 던져 지금 곧 건지어라

 

누가 저 형제 구원하랴이런 가사에 몰입할 때는 나 아니면 안 된다며 앞장서다 정작 함께 힘을 모아 줄을 당겨야 할 배 안의 친구를 외면한 적도 있었다. 뜨거운 구령의 열정, 떠내려가는 영혼을 향한 안타까운 심정으로 주먹 꽉 쥐고 부르던 찬송. 그때 흘린 눈물, 떠밀려 가는 영혼을 품고 미어지는 가슴으로 드렸던 기도, 나름대로 진심이었다. 그 기도와 눈물들이 부끄럽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심히 차고 넘쳤던 그 시절은 오히려 그립기도 하니 말이다. 한동안은 이 찬송을 부르지도 못했고, 입을 열어 내 안의 예수님 이야기 전하는 일에도 움츠러들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기질 상 전도지 들고 노방전도를 하거나 대놓고 예수 믿으라, 교회 가자는 말은 잘 못한다. 대신 믿지 않는 가족과 친구는 물론 냉담한 시절을 보내는 교회 후배를 위한 기도만큼은 꾸준히 했다. 특히 냉담으로 교회에 나오지 않는 친구들에게 손으로 쓴 엽서를 보내며 관심을 끈을 놓지 않았고 힘든 일상을 지나는 친구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려 했다. 나름 보이지 않는 정성을 많이 들였다. 그러는 사이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이러고 있는 나는 참 좋은 선배지, 예수님의 제자의 면모란 이런 것일 거야.’ 죄가 틈입한 것이다. 생명줄 던지는 나의 마음, 위쪽으로 갈수록 높아진 것이다. 자아도취 병은 으레 치명적이 죄로 나를 이끈다.

 

너 어서 생명줄 던지어라 저 형제 지쳐서 허덕인다

시험과 근심의 거센 풍파 저 형제를 휩쓸어 몰아간다

 

시험과 근심의 풍파로 떠밀려 가는 형제자매에 대한 진심어린 연민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예수그리스도만이 인생의 답이라는 고귀한 진실을 알리고픈 열망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선한 일을 통해 오직 나를 높이는 수단 삼고자 하는 죄의 본성에 민감하지 못한 탓이었다. ‘민감은커녕 오랜 시간 알아채지도 못하고 신앙생활 한 것은 아닌가 싶다. 내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 같은 찬송이다. ,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자기성찰만 하며 입 다물고 있겠다는 것은 아니다. 요 며칠 운전 하며, 걸으며, 설거지 하며 흥얼흥얼 많이 불렀다. 다시 이 찬송을 부른다.

 

너 빨리 생명줄 던지어라 형제여 너 어찌 지체하랴

보아라 저 형제 빠져간다 이 구조선 타고서 속히 가라

 

내 노력으로 얻은 보상으로 생명줄 잡았다고 자신한다면 그 줄은 생명줄 아닌 썩은 동아줄임에 틀림없다. 물에 빠져 허덕이는 것은 예수님 모르는 그 어떤 사람들이 아니라 왜곡된 특권의식에 허덕이는 나의 현주소일 것이다. 나도 저 형제, 빠져가는 형제와 똑같은 처지였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또한 모태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구원 방주 자동 탑승이 아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이 소중한 생명줄을 붙들어야 함을(2:12). 방주의 안과 밖을 구분 짓는 하나님 놀이는 그만두고 속히 손 내밀어 형제의 손을 잡을 일이다. 나를 스치는 공허한 눈빛, 근심어린 표정의 내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생명으로 연결되고 연대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다. 위험한 풍파는 빨리 지나고 곧 건너편 언덕에 이를 것이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내게 주어진, 그들에게 주어진 골든타임은 지금 여기이다!

 

위험한 풍파가 곧 지나고 건너편 언덕에 이르리니

형제여 너 어찌 지체하나 곧 생명줄 던져서 구원하라

 

 

 





가장 로맨틱하고, 달콤하고, 섹시하고도 슬픈 판타지라는 평이 이어지는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이다. 제목과 여러 리뷰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랑 영화인가? 부인할 수 없다. 제목과 제목에 관해 밝힌 감독의 말이 이러하니.


“물은 담는 그릇에 따라 모양이 변한다. 부드럽지만 우주에서 가장 강하고 가변성 있는 힘이기도 하다. 사랑 또한 그렇지 않은가? 여성이나 남성, 기타 생명체 등 사랑을 어떤 모양에 집어넣건, 사랑은 바로 그것의 모양이 된다”


나는 어쩐지 괴물을 사랑하게 되고, 괴생물체의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괴물과 사랑에 빠진 동료와 친구 곁에 서는 사람들을 주목하게 된다. 몹쓸 병인 줄 알면서 나는 또 편을 갈라 바라보게 된다. 괴물을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리고 역시나 치명적인 병인데, 그들을 줄 세우고자 한다. 물론 일렬로 세운 왼쪽 끝에 엘라이저 역의 셀리 호킨스가 있고, 그 옆에는 청소부 친구 젤다, 자일스가 선다. 오른쪽 끝에는 말할 것도 없이 스트릭랜드 역의 마이클 세넌이다. 백인가부장시스템의 대리자이다. 무슨 근거에 의한 줄 세움인가? 인간다움의 등급이라 하겠다.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한다면 우리도 인간이 아니에요.


해부되기 전에, 죽임당하기 전에 괴물을 연구소에서 탈출시켜야 한다는 엘라이저의 절박한, 소리 없는 절규이다. 옆집 친구 자일스에게 도움을 구하며 하는 말(말보다 더 강렬한 몸의 소리)였다. 엘라이저의 계획이 무모하단 것은 관객인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인간이고 싶은 나는 동의한다. 격하게 동의한다. 그렇게 규합된 탈출단은 여자, 청소부, 흑인, 게이. 백인가부장 시스템에서 배제와 혐오의 대상이다. "당신들은 청소만 하면 되는 거야!" 소리를 듣는 인간 대접받지 못하는 이들이 가장 인간다운 인간들이었다.  


아침에 목욕하며 자위를 하는 엘라이저, 괴생물체와의 섹스는 사랑의 모양을 잘 드러내는 평범한 아름다움이다. 감독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아마도 보통의 영화였다면 그런 장면에서 모델처럼 아름다운 20대 배우의 몸을 수증기로 감싸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비추면서 페티시즘을 느끼게 하는 장면처럼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일상 그대로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엘라이자의 성적인 욕망은 페티시즘이거나, 다른 무엇도 아닌 그저 일상입니다." 인간다운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는 말이다. 과대포장 된 에로틱 씬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욕구를 사는 몸을 가진 인간을 보여준다. 누군가 유일한 사람과 온전히 하나 되고 싶은, 나를 잃을 정도로 깊은 친밀감에 휩싸이고 싶은 간절함이 성욕의 심리적, 영성적인 측면이 아니겠나. 아침마다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졌던, 바로 그 욕조에서 괴생물체와 하나 되는 장면은 아름답고 아름답다. 장면 장면 엘라이저의 몸이 뿜어내는 에로스 에너지가 내내 내 몸을 끌어 당긴다. 





셰이프 오브 워터를 '셰이프 오브 갓"으로 읽어본다. 스트릭랜드(스트릭 랜드, strict land!)가 엘라이저와 젤다를 불러다 놓고 알리바이를 묻는다.  이 장면 대사에서 '신의 형상'을 읽는다. "두 다리로 서니까 인간처럼 보이지? 하지만 우린 신의 형상으로 창조 되었어. 저게 신의 형상으로 보이진 않잖나. 그렇지 않아?" 인간성 상실의 스트릭랜드가 젤다에게 묻는다. 젤다가 답한다. "글쎄요, 신을 본 적이 없어서" 이 장면에서 옆좌석 앉았던 남편이 터졌다. 웬만하면 관람 중 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이 속삭였다. "영화 오두막에서 하나님으로 나와. 큭큭" 영화 <오두막>에서 파파 역을 맡았던 젤다 역의 옥타비아 스펜서가 "글쎄요, 신을 본 적이 없어서"란다. 


이 한 마디로 나는 읽는다. 참다운 인간성은 신의 형상이며 엘라이저와 젤다, 심지어 괴생물체라 불리는 그 역시 누구보다 신의 형상에 가까운 사람들이라고. 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다고 한다. 그 신의 다른 이름은 사랑이다. 신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는 것은 같은 재료, 사랑으로 지어졌다는 의미일 터. 결국 영화가 말하는 셰이프 오브 워터는 셰이프 오브 러브, 또는 셰이프 오브 갓. 한 가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모든 사랑은 신의 사랑이다. 에로스와 아가페의 구분이 있단 말인가. 엘라이저의 욕조는 에로스가 담긴 곳, 사랑이 담긴 곳, 신의 형상이 담긴 곳이다. 

 




폭력의 화신이며 혐오와 배제의 존재인 스트릭랜드는 신의 형상인 자신을 확신한다. 괴생물체는 말할 것도 없고, 여성이며 흑인이며 청소부와는 질적으로 다른 인간이라고 말이다. 힘이 있고, 군림할 자격이 있고, 제힘으로 국가를 지킨다는 확장된 자아가 신의 형상일 리 없다. 인간의 몸을 입은 예수님의 삶은 공생애 기간 3년은 물론이고 이전 30년도 가난하고 무력한, 을의 삶이었다. 신의 형상을 찾고자 한다면 내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거나, 하겠다거나, 지켜내겠다는 이들은 피하고 볼 일이다. 신의 형상으로 이 땅을 산다는 것은 말하지 못하고, 조금 야생적이고 미개한 형태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생명과 평화와 사랑에 대한 탁월한 감각을 가졌고, 치유의 능력을 기본으로 장착하고 있다. 


내가 불완전한 존재란 걸 모르는 눈빛이에요.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니까요.


사랑의 모양을 가장 잘 드러내는 대사로 꼽을 만 하다. 말을 못 하는 엘라이자는 평생 불완전한 존재로 살아왔겠으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눈빛을 만났다. 그것이 사랑이다. 신의 사랑 역시 그러하다. '너는 존재 자체로 사랑받는 자야.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이사야43:4, 공동번역)' 이것이 내가 믿는 신의 목소리이다. 더 깨끗하고, 더 정의롭고, 더 올바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괴물 같은 지금 그대로의 나일지라도. 어쩌면 엘라이자는 이미 그 목소리를 듣고 있었는지 모른다.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이 말 못 하는 장애인이며, 청소부일지라도 그 눈빛에 규정되지 않는다. 춤추고, 자위하고, 옆집 게이 친구를 챙기며 홀로 충분한 일상을 살아간다. 이미 사랑이 장착되어 있다는 뜻이다. 


나는 신의 모양을 보았다.






이 노래를 좋아하던 아이, 

우크렐레 들고 기타 들고 딩가딩가 '네모의 꿈'을 부르며 베짱이 놀음 하던 아이,

난생 처음으로 학원생이 되다.


이제 공부 좀 해봐야겠다며, 공부 하는 방법을 지난 기말시험 칠 때 처음 알알았다며

수학학원에 가야겠다고 하여 미루고 미루다 등록했다.

"이제 나도 진정한 분당 아이가 된 것 같아. 드디어 나도 평범한 분당 중학생이 되는군"


진정한 분당 중학생이 되어 하교 후 바로 학원 가서 8시가 다 되어 돌아왔다.

기특하고 짠하여 같은 반찬이지만 정성스레 담다보니 네모 반찬들이 줄을 섰네.

네모난 떡갈비, 네모난 깍두기, 네모난 두부.

그래도 리필해서 먹은 건 동그란 오이고추.


이랬던 현승이

이랬던던던던 현승이

네모난 학원 세상으로 떠나다!


네모난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떠보면

네모난 창문으로 보이는 똑같은 풍경

네모난 문을 열고 네모난 테이블에 앉아

네모난 조간신문 본 뒤 네모난 책가방에

네모난 책들을 넣고 네모난 버스를 타고

네모난 건물 지나 네모난 학교에 들어서면

또 네모난 교실 네모난 칠판과 책상들

네모난 오디오 네모난 컴퓨터 TV

네모난 달력에 그려진 똑같은 하루를

의식도 못한 채로 그냥 숨만 쉬고 있는 걸

주윌 둘러보면 모두 네모난 것들뿐인데

우린 언제나 듣지 잘난 어른의 멋진 이 말

세상은 둥글게 살아야 해 지구본을 보면

우리 사는 지군 둥근데 부속품들은 왜 다

온통 네모난 건지 몰라 어쩌면 그건 네모의 꿈일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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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한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부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부인해야 할 자기를 모릅니다. ‘신앙의 여정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여정이고, 하나님을 알수록 그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캘빈이 말했습니다. 관계 문제에서도 너를 몰라서가 아니라 나를 몰라서갈등의 골이 깊어집니다.

한 달에 한 번, 일상에서 물러나 마음 깊은 곳으로 떠나는 피정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을 가지고요. [나는 누구인가?] 에니어그램 영성 세미나는 나는 누가 아닌가?’라는 질문으로 하나님 형상 담은 진짜 나를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이번 시즌에는 작은 선물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1단계부터 심화2과정까지 연속 수강 하시는 분께는 영성과정을 1만 원에 들으실 수 있는 특전을 드립니다.)

 

[일시]


. 기본1단계 : 2018 328() 오전 10:00 ~ 오후 5:00

. 기본2단계 : 2018425() 오전 10:00 ~ 오후 5:00

. 심화1단계 : 2018530() 오전 10:00 ~ 오후 5:00

. 심화2단계 : 2018627() 오전 10:00 ~ 오후 5:00

. 영성단계 : 2018718() 오전 10:00 ~ 오후 5:00

 

[장소] 마포구 신수로 56 순총빌딩 B1(광흥창역 4번 출구 도보 6)

[인원] 9(선착순)    [참가비각 강좌 12만 원

[문의] 010-6209-0635 (문자)

[신청 1단계  신청 클릭(마감)

          2단계 신청 클릭(마감)

           심화1 단계 신청 클릭    

         심화2 단계 신청 클릭 

         영성단계 신청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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