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려 있던 일정을 끝내고 휴우~ 하면 거실 내 자리에 앉았다. 

어쩌다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창가의 다육이 화분.

어머, 저게 뭐야?

떨어진 잎에서 싹과 뿌리나 나고,

흙지 붕 뚫고 새싹이 하나 돋아난 것이다.

두 생명체가 서로를 향하고 있다.

가 닿으려는 듯.


바삐 돌아가는 일상 속에 정성 들여 돌보지도 못했는데.

시들시들 고개를 떨굴 때야 깜짝 놀라 물을 주기도 했는데.

나 모르는 사이 생명이 잉태되고 자라고 있었다니.

뭉클한 감동이다.


전에 [큐티진]에 썼던 글의 일부이다.

보이지 않지만 아주 조금씩이라도 성장한다는 것,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미국의 낭만파 시인 롱펠로우(Henry Wadsworth Longfellow)는 시를 쓰고 가르치는 일을 노년이 되기까지 열정적으로 했다고 한다. 그 비결을 묻는 말에 정원 한 구석의 고목을 가리키며 이렇게 답했다고. “죽은 듯 보이는 저 나무가 봄이 되면 다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네. 그 이유는 저 나무가 매일 조금씩이라도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야. 나도 그렇다네.” 살아 있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매일 조금씩 자라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사랑이 살아 있다는 증거는 아주 조금씩이라도 성장해야 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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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이 되어 신앙하기'

내적여정의 마침표를 찍는 ‘영성 단계’ 세미나가 있습니다.

내적여정은 잃어버린 길, 마음의 길을 따라 하나님께로 가는 여정입니다. 

기도의 여정이고 사랑의 여정입니다. 

영성과정에서는 우리 안에 있는 왜곡된 하나님 상을 확인하고, 

전에 해보지 않은 기도인 ‘향심기도(centering prayer)를 안내해 드립니다. 


영성과정은 1단계 이상 들으신 분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차근차근 2단계와 심화과정을 밟아서 오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만. 

중간에 시간이 안 되어 함께 하지 못하신 분들, 

여정의 마지막이 궁금하신 분들 함께 하실 수 있도록 열어두겠습니다. 

재수강도 가능합니다.

 

[일시]2018년 7월 18일(수) 오전 10:00 ~ 오후 5:00
[장소] 마포구 신수로 56 순총빌딩 B1층 (광흥창역 4번 출구)
[인원] 9명 (선착순) [참가비] 12만 원(재수강 3만 원)
[문의] 010-6209-0635
[신청] 신청하러 가기, 클릭





집단상담이나 치유 그룹에서는 흔히 별칭을 쓴다. 처음 접하는 사람에겐 생소하고 오글거리지만 의미 있는 일이다. 내 이름 정신실을 두고 '나리'로 불리는 건 나와 거리를 두는 일이다. 2인칭 또는 3인칭으로 불러 나를 타자화 시키는 방법이다. 새롭게 만난 그룹에서 직업도, 성별도, 나이도 구분 없이 부르는 별칭은 페르소나를 지양하는 뜻이 담기기도 한다. 언젠가 나도 오글거리던 적 있었지만 이젠 별칭 짓기 권하는 자리에 자주 앉는다. 드물게 바뀌지만 나의 별칭은 주로 '나리'이다. 나리꽃의 그 나리. larinari의 nari 역시 바로 '나리'이다. 굵직한 별칭 만남들의 마침표를 찍었다.


5,6월 8회기의 글쓰기 자조모임을 동반했다. 목회자 성폭력 생존자, 라고 쓰기도 싫은, 그러나 분명 그 끔찍한 일을 겪고 잘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아니, 잘 살아가지 못하는 '나'들이다. 8주간 함께 쓰고 읽으며 나도 쓰고픈 말이 많이 일렁였다. 아니, 쓰고 싶은 말이 없었다. 모임이 있는 금요일엔 늘 새벽까지 깨어 있게 되었다. 매주 생각보다 많이 웃었고, 조용히 울었다. 제가 오히려 배우고 치유 받았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 8주였는데. 마지막 8주차에는 '네, 저도 치유고 배움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싶네요' 하고 뛰쳐나와 가해자 목사를 찾아내 단죄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여기서 나는 '나리'였다.


작년 가을부터 준비한 여정 캠프, 그러니까 싱글들을 위한 2박3일 캠프가 있었다. '나를 찾는 길 위에서 너를 만나다'라는 부제를 붙여봤는데 '에로스를 찾다 아가페를 만나다' 이런 사심을 품기도 했다. 하긴 부제로 붙일만 한 사심이 한 둘이 아니다. 소개팅과 결혼 압박에 지친 싱글들의 힐링 캠프. 전에 해보지 않은 재미있는 연속 소개팅. 나는 왜 사랑이 두려울까, 두려움 극복 프로젝트. 매칭 부담 없는 매칭 프로그램. 등등.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지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고 해야겠다. 생면부지 15명의 청년들 캐릭터부터 날씨, 장소, 나눔, 상담, 케미, 피날레. 여기서도 나는 나리였다.

 

캠프 떠나기 하루 전인 수요일엔 에니어그램 심화 세미나가 있었다. 아침 일찍 운전을 하고 가는데 음악을 듣다 툭,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전 주 금요일 글쓰기 자조모임 이후 차분히 감정 돌볼 시간이 없어서였을까. 연이은 묵직한 강의 압박 때문이었을까. 마침 이날 심화과정의 주제는 '감정'이었다. 예언 같은 울음이었을까. 미처 울지 못한 뒤늦은 울음이었을까. 그렇게 '나리'로 살았던 6월은 끝났다. 오늘 주일 예배에선 여정캠프에서 만난 15명, 에니어그램 세미나의 6명, 글쓰기 자조모임의 4명.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흩어져 이어지는 그들의 일상을 떠올리며 다시 또 울었다. 울음이 아니라 기도라고 하자.  



'나리'라고 불리는 또 하나의 그룹이 있다. 매주 만나는 꿈과 영성생활이다. 2박3일 여정캠프를 지원하고자 모인 사람들처럼 카톡으로 무한 에너지를 보내왔다. 캠프가 있었던 연천으로 가는 길을 전화 통화로 함께 하며 얘기를 들어주고 깨달음을 주는 벗이 있었다. 연천의 한옥호텔에 도착하여 긴장 속에 자기소개를 마쳤다. 물론 나를 '나리'로 소개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호텔 주변을 산책하는데 어머나, 정원에 지천으로 핀 꽃이 나리꽃이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주님! 신경 많이 써주셨군요! 나리는 마태복음 6장 28절의 '들의 백합화'이다. 꾸미지 않아도 아름다운, 있는 그대로 족한 들꽃이다. 




캠프에서 상담하는 중 세 사람에게 비슷한 질문을 받았다. 강의하고 상담하는데 에너지가 많이 들 것 같은데 어떻게 충전하는가, 조금 걱정된다, 는 뜻도 담긴 것 같다. 나리는 나리가 되고 참나무는 참나무 되는 것으로 족한 만남에서 끝없이 재충전 한다고 대답할 걸 그랬다. 돌아가 그런 벗들이 있고, 벗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살아있는 숨결을 따라가다 보면 때로 그 숨결의 근원이신 분을 만나기도 한다고 고백할 걸 그랬다. 나는 나임이 부끄럽지 않다. 나를 나리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온몸으로 하고픈 말이기도 하다. 각자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그분의 큰 뜻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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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9

 


세상에 똑같이 생긴 얼굴이 없듯 사람마다 생각도 제각각이라는 것을 안다. 내 생각 있듯이 네 생각 또한 분명하고, 그 차이는 하나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의 신비라는 것도 안다.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 내 주업이고, 고유한 자기다움 찾는 여정 안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더라. 머리로는 그렇게 다 아는데 차이는 늘 힘겹고 두렵더라. 내 생각과 다른 친구의 입장을 확인하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을 때가 있다. 그에 대해 논쟁을 하는데 거리가 좁혀지지 않을 때는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마음 한 구석 휘~잉 찬바람이 일기도 한다. 셋이 친한데 나를 뺀 두 사람이 나만 모르는 것을 공유하는 것을 알았을 때도 그렇다. 숨기는 기술이 좋아서 당황한 마음 잘 들키진 않지만 역시나 휘~잉 마음을 쓸고 지나가는 찬바람 한 줄기는 어쩔 수 없다. 스치는 그 바람, 순간포착 하여 일시정지 버튼 누르고 확대해 들여다보면 이렇다. 단절에 대한 두려움이다. 관계가 끊어지고 외톨이가 될까 지레 겁먹음이다. 어렸을 적 왕따 경험 때문일 수도 있고, 관계 지향적 성향 때문일 수도 있겠다.

 

세상 친구들 나를 버려도 예수 늘 함께 동행함으로

주의 은혜가 충만하리니 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

 

이러하기에 찬송가 406장의 2절 가사에 자주 마음이 머문다. 거절당함 또는 버려짐,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단절에의 두려움 때문이다. 필자의 관계 집착이 과하다 느껴지시는가? 인간의 스트레스 지수를 측정한 홈즈-라헤 척도라는 것이 있다. 가장 높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생의 위기는 100점으로 환산되는 사별이라고 한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랭킹 5위까지의 공통점이다. 이혼, 별거, 수감, 가까운 사람의 죽음 등 관계의 끊어짐이다. 그렇다. 아무리 독립적인 듯 보이고 강하게 보여도 알고 보면 따스한 연길이 필요하다. 그것을 상실할 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함께 춤추시는 하나님을 본떠 창조된 존재이다. 어우러지고 연결되어 있을 때 인간답고, 본성에 부합하는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그 행복의 극단에 있는 불행감은 단절이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감정 중 하나가 끊어져 고립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교만과 불순종으로 에덴동산을 잃고, 존재의 근거인 하나님과 단절된 그때로부터 시작된 감정일 것이다. 그러니 이 두려움을 인정하고 나는 찬양한다. 조금 지질해보여도 살짝 과한 자위의 노래 같지만 당당하게 부르련다. ‘세상 친구들 나를 버려도 예수 늘 함께 동행함으로 주의 은혜가 충만하리니 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 그러고 보니 369죄짐 맡은 우리 구주도 있다. 3절이 이러하다. ‘세상 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에서 참된 위로 받겠네비슷한 내용이지만 이 곡의 예수님은 대놓고 좋은 친구라니 한결 더 편안하다.

 

관계에 연연하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또는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 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같은 말씀이 주는 부담이다.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할 것 같고, 누구와도 화평을 이루어야 예수님의 제자 인증 받을 것만 같다. 이러며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설정하고 초인적 자아상을 만들어낸다. 사랑스러운 그 사람에게도 한결같은 순도 100%의 사랑을 줄 수 없음을 안다. 하물며 밉상 그 친구까지, 원수까지 사랑해야 하니! 결코 다다를 수 없는 목표를 앞에서 나는 늘 죄책감에 허덕인다. 사랑이라곤 없는 죄인이다. 허튼 애를 써본다. 그러나 죄책감으론 온전한 사랑을 이룰 수 없다.

 

나의 믿음이 연약해져도 미리 예비한 힘을 주시며

위태할 때도 안보하시는 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

 

연약한 믿음,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마음자리, 늘 부족한 사랑이어도 괜찮겠다. 대체로 연약하고 흔들리며 아주 가끔 큰 믿음 보이는 나를 위해 이미 예비 된 힘이 있단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펄럭펄럭 하다 꺼져가는 위태위태한 믿음이라도 그분이 붙드는 손은 차원이 다르다. 유한한 우리를 붙드는 영원한 팔이다. 이 대목에선 405장의 또 다른 주의 팔이 떠오른다.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친절한 팔이다! 영원하며 동시에 친절하고 따스한 팔이다. ‘으이그, 도대체 언제 철이 들래? 언제 나를 닮아 완전한 사랑 장착하고 모든 이들과 더불어 화평할 거냐고, 네가 그렇듯 사랑이 없으니 친구들이 너를 멀리하지. 제발 좀 완벽한 사랑의 사람이 되거라!’ 다그치고 타박하며 팔 빠지도록 끌어당기는 우리 엄마의 손과 다르다. 근본적으로 다르다. 친절한 팔이다. 그 팔이 영원하다. , 주님 당신 그 팔, 팔 배게 삼아 쉬고 싶어요.

 

능치 못한 것 주께 없으니 나의 일생을 주께 맡기면

나의 모든 짐 대신 지시는 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


[QTzine] 7월호




각종 주제로 각종 단체와 교회에 강의하러 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하지만 새벽 6시 강의는 처음입니다. 5시10분 분당 출발, 5시 55분 쌍문동 도착. 새벽하늘을 배경으로 한 영장산과 도봉산을 한 시간 차로 마주했습니다. 


'피택 장로님을 위한 교육'에 초대 받아 간 것입니다. 새벽 강의라니, 엄두가 나지 않았을 텐데 초대하신 목사님을 알기에 기꺼이 가게 되었습니다. 예비 장로님 교육의 주 내용이 다름 아니라 '렉시오 디비나' 등의 기도 훈련과 영적 식별 등이라니요! 새로 부임하신 교회에서 조용히 준비된 만큼의 목회철학을 펼치시는 모습이 좋아 보였습니다.


영적 우월감에 빠져 삶과 신앙의 정답을 다 아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는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자아팽창에 허덕이며 과도한 확신 속에 교인들의 영적 삶을 통제하지요. 통제하고 억압하는 방식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폭력적입니다. 


하지만 그 반대의 목사님들도 많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할 수 없는 것의 한계를 인정하며 교인들 각자의 영적 여정을 겸허히 인정하는 분들이죠. 


몇 주 전, 어느 교회 수련회에 가서 뵌 목사님 모습도 인상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강의안 올려놓고 강단으로 쓸 탁자(수련회 장소니까 식사 때는 밥상으로 쓰인)를 살피시다 ‘어이쿠, 상이 끈적하네.’ 하며 닦으시더군요. 그냥 본인이 닦으셨습니다. 


근거 없는 영적 우월감 대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고 내어주는 목사님들이 좋습니다. 새벽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는 저 산처럼, 그런 목사님들 건강하게 든든히 서계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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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시간 : 저녁 6시 - 8시]


93.1에서는 전기현의 '세상의 모든 음악'이 나오는 시간.

한낮에도 컴컴한 거실이 잠시 밝아지는 시간.

넘어가는 해가 주방 쪽 길쭉한 창으로 잠시 고개 내밀고 지나가는 시간.


[내가 좋아하는 사람 : 까칠하고도 부드러운 사람]


자아가 다소 강한 듯하여 매운 맛이 있는 까칠한 사람.

감추지 못하고 끝끝내 드러낸 까칠함 있어 부끄러울 것 있는 사람.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은 잃을 수 없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나 : 열심히 공부하고 마냥 널부러지는 나]


강의와 글쓰기를 위해서 중독자처럼 강박적으로 읽는 나.

뭐 하나 끝나면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혼자 잘 노는 나.

어떤 경우에도 나의 나다움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나.


[드물게 찾아온 찰나의 기쁨]


해 넘어가는 저녁 7시 어간에 여유로이 집을 누리는 게 얼마만이냐.

까칠한 중 3이 어디 안 가고 옆에서 알짱거리는 것은 또 얼마만인가.

"엇, 시간이 이렇게 됐네. 현승아, 라디오 좀 틀어줘"

"왜 엄마? 전기현의 세상의 모든 음악 들으려고? 오늘은 김현승의 세상의 모든 음악 어때?"

하고 제 돈으로 새로 산 블루투스 스피커 연결하여 음악 들려주는 시간.

그리하여 비틀즈와 김광석과 마마무가 돌아가며 열창하는 '김현승 세상의 모든 음악'을 듣는 시간.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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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방식이 있다.

요리하는, 파스타 만드는 방식을 말하는 게 아니다.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는 말이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은 한 번 꽂히면 헤어 나오지 않(못)기로 하는 방식이다.

질릴 때까지 먹는 방식이고, 재미없을 때까지는 올인하는 방식이다.


이웃의 저이 담긴 마늘쫑을 얻어서는 가장 아름답게 활용하고자 고심하였다.

마늘쫑 장아찌나 볶음도 해야 하지만 색다른 요리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마늘쫑 명란 파스타를 잉태했고, 맛있었고, 성공적!


노 권사님의 정성 가득 담긴 고사리를 얻었다.

정말 맛있는 고사리인데 잘 삶는 게 관건이라 하시며 손수 삶아 건네주시니

노구의 병약한 손으로 다듬고 삶은 고사리는 차라리 어떤 간절함이다.


이 특별한 고사리 또한 나물로만 먹고 싶지가 않다. 

상상력이 필요한 시간! 

상상력, 경험의 한계 내에서의 상상력.

최근 가장 만족스러운 요리 활동으로 꼽히는 마늘쫑 명란 파스타를 변주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명란 고사리 파스타가 만들어졌다.


질릴 때까지 먹을 예정이다.

다양한 명란 **** 파스타가 탄생할 것이다.

순간에 충실할 예정이다. 충실하게 만들고 먹을 예정이다.

전에 먹어본 적이 없다는 듯, 앞으로 어디서 이런 걸 먹어보겠냐는 듯

다양한 명란 **** 파스타에 순간순간 몰입할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 관계 맺는 습관을 많이 생각한다.

지금 여기 꽂힌 사람에게 거침없이 올인한다.

간절히 만나고 싶었던 친구라는 듯, 여기서 헤어지면 다시는 못 볼 친구인 듯.

마음의 에너지를 흘려보낸다.

바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 투명함으로 만나 함께 자라가는 역동이다. 


화요일 두 시, 금요일 두 시.

지난 몇 개월 나의 사이클은 두 개의 오후 두 시를 중심으로 돈다.

화요일에는 꿈 집단, 금요일에는 글 집단.

꿈이라는 매개로, 글이라는 도구로 집단을 만들어 치유와 성장을 도모하는 모임이다.

명란 마늘쫑 파스타, 명랑 고사리 파스타처럼 맛있고 아름다운 식탁이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

나 자신이 되는 일, 나라는 존재로 가장 아름답게 꽃피우는 일을 살아가는 방식 삼고 싶다.

혼자 그리되고 싶지는 않다. 아니, 혼자 그리될 방법이 없다.

또 다른 '나'들과 연결되어 함께 자라가는 방식이 내가 살고 싶은 방식이다. 

마음과 영성에 관해 쌓인 읽고 배운 것들이, 글 쓰고 대화하는 감각이 내 냉장고 안에 들어 있다. 

누군가 건넨 선물처럼 나의 것이 되어 있다.


자르고 다지고, 지지고 볶고, 한데 무쳐서 마음의 양식을 요리한다.

이런저런 재료 손질로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는 날이 있다.

운전하며, 걸으며 온통 이 요리 레시피 생각이다.

만들어 놓고 보면 그저 그런 한 줌 스파게티일 뿐이건만.

누군가를 위해서만 만든 것이 아니라, 자아도취 해서 나 혼자 먹자고 만든 것도 아니라,

하하호호 나눠 먹는 방식이라 좋다.   


사람마다 방식이 있다.

내가 사는 방식이 번듯하지 않다고 느껴져 움츠러들기도 하지만

이만큼 믿을만 하고 적절한 방식도 없다.

나처럼 요리 하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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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특히 부정적인 감정은 보물입니다.

직면하고, 이름 붙이고, 충분히 느끼면 떠나보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유로워지고, 치유 되고, 성장합니다.

자신의 진짜 감정을 느끼고 건전하게 표현할 수 있다면, 가장 건강한 사람입니다.

감정은 영혼의 외침입니다.


라고 말하고, 독려하여 사람들의 감정을 끌어내곤 한다.

낮에는 이렇게 강의를 하고, 이런 취지의 별별 상담을 한다.


어느 밤에는 공허감, 슬픔, 두려움, 수치심, 죄책감, 외로움이 패키지로 몰려온다.

직면하고, 이름 붙이고, 충분히 느끼라고 나를 토닥여보지만, 

정답을 익히 알고 있는 이 삐딱한 자아가 순순히 말 들을 리 없다.


이런 밤에 읽을 책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글을 읽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게다가 몇 줄 끄적일 수 있으니.


어제의 낮은 지워지고, 내일의 낮은 오지 않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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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6일, 할아버지 7주기 추도예배 가는 길.

거리거리 펼쳐진 선거 현수막에 대화 주제는 6.13 지방 선거.

엄마 아빠는 선거일 전에 사전 선거 하겠다는 말에 '그러면 선거날에는 완전 노는 거냐'는 현승이 질문.

결국 휴일에 어떻게 노느냐, 어떻게 놀았느냐, 로 대화 주제가 흘러간다.


엄마 : 우리 이번 선거일에 예봉산 갈까? 털보 아저씨네 하고. 

아빠 : 맞아, 8년 전이네. 지방선거 날이었지?

엄마 : 등산 갔다가 명일동에서 같이 투표했는데. 얘들아 털보 아저씨한테 말씀 드려볼까? 

        예봉산 갈래? 아이스 께~~~~에끼, 기억 나?

채윤 : 나는 좋아. 

현승 : 아니, 난 그럴 수 없어. 휴일이 두 번인데 두 번 다 가족한테 쓰는 건......

엄마 : 가족, 의문의 일패!

아빠 : 그래, 현승아. 선거날은 친구들이랑 농구 하고, 게임 하고 놀아. 바이바이(사춘기 나라로 잘 가)~

현승 : 나 떠나온지 오래 됐는데.........

아빠 : 알아. 알고 있어. 이제 곧 돌아올 때가 됐지.

채윤 : 내가 있잖아. 내가 이렇게 돌아와 있잖아.

현승 : 아냐, 끝이야. 돌아가는 거 없어.

엄마 : 누나는 돌아왔잖아. 돌아온 거 아냐?

현승 : 아냐, 누나도 그런 건 아냐. 

아빠 : 알았어. 이제 엄마 아빠만 남은 거 다 알아. 아빠는 엄마만 있으면 돼.



그리하여 다시 허전한 마음에 8년 전 예봉산 갔던 날 털보 아저께서 찍어주신 사진을 찾아본다. 

한 장 한 장 다 예뻐서 막 올려본다. 

우리 모두 '그 나라'의 존재를 몰랐던 시절.

아니 존재는 알았으나 실체는 몰랐던 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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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계절, 詩험기간  (2) 2017.12.08


한 달에 한 번, 하루 피정으로 진행되는 내적여정 세 번째 하루를 지냈습니다. 심화과정으로 성격 또는 거짓자아가 형성되는시기, 어린시절을 돌아보았습니다. 3월 1단계를 시작으로 연이어 수강하시는 분들을 세 번째 만남입니다. 아침에 서로 얼굴 보자마자 "보고싶더라고요. 언제 봤다고 보고싶더라고요" 하며 반갑게 손을 맞잡았습니다.


준비한 간식보다 들고 오신, 간식이 더 많고요. 손수 만든 맛있는 쿠키가 종류 별로 풍성합니다. 나가사키에서 온 쿠키도 있네요. 네, 나가사키에서 심화과정 듣기 위해 날아오신 선생님(선교사님)이 들고 오셨습니다. 작년에 한국 나오셨을 때 1단계를 수강하신 선생님께서 심화과정 듣기 위해 나오신 것입니다. 간절함과 열정에 뭉클합니다.


재수강 오신 선생님과는 1단계 동기라서 더 반갑고, 모인 분들 즉석으로 나가사키 성지순례(라고 쓰고 룰루랄라 여행이라 읽지요)단이 구성될 기세였습니다. 강의가 아니라 열어 보이시는 마음이, 마음 한 구석 얼어붙은 감정과 기억이 살아 있는 가르침입니다. 이렇듯 배우는 마음과 살아있는 영성은 강사인 제가 최고의 수강자이고 수혜자입니다.


일부러 맞춘 듯, 개성있는 스타일이지만 컬러만 같은 상의의 세 분이 나란히 앉으셨습니다. 애써 연출해도 어려울 장면, 모시기 어려울 모델들이시라 바로 촬영했습니다. 아름답습니다. 함께 한 우리가 참 아름답습니다.






집에서 식사 한 번 하시자고 조르고 졸랐다.

몇 달 졸라 허락하시더니 결국 저녁식사 후 잠깐 들러 차 한 잔이다.

시 또는 기도문 한 편을 써오셔서 낭독하셨다.

딱 한 시간 앉아 계시다 일어서시며 폐를 많이 끼쳤다 하셨다.




현승이 왔구나,

이름을 불러주시고 흰 편지봉투를 쥐어 주셨다.




사랑하는 채윤아,

교회에선 늘 무섭게만 보이는 장로님께서 

제 이름을 기억하고 다정하게 부르며 쓰신 편지에 감동 크게 먹은 채윤이다.



생은 어쩌면 이렇듯 기대와 다른, 예상을 빗나가는 만남과 위로투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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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오전, 느릿느릿 하루 스케쥴 짜는 중 띵똥띵똥 전화가 왔다. 

갑자기 생긴 점심 약속으로, 일사천리 스케쥴이 정해졌다.

정겨운 식사와 커피타임까지 마치고 자동차 바퀴 굴러가는대로 드라이브를 한다.

중미산, 채윤이 가졌을 때 휴양림 놀러갔다 야호 대신, "푸으르으마아!!!" 고래고래 외쳤던 곳.

양수리, 문 닫기 직전 클라라 커피에 들러 커피를 샀다.





퇴촌을 거쳐 광주로 돌아 집으로 가자, 가자, 가자 하다 습지 공원을 하나 만나 들어갔다.

우연히 찾아들어간 공원에서 예기치 못한 기쁨을 만나고 찰칵찰칵 사진도 많이 찍었다.

생태습지 걷자니 매일 걷는 율동공원이 인위적이라고 느껴진다.

지는 해와 푸른 숲, 새소리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 종합선물인데!!!!





그가 배경이 되고 내가 찍는 셀카에서도 그는 나를 봐야 한다. 나만 봐야 한다.

여보, 이거 좀 한 번 읽어봐바. 여보, 이거 같이 하자.

그리고 스포트라이트는 나만 받기. 




그가 찍는 셀카에서 나는 길가의 꽃과 나무처럼 있으면 된다.

자기를 보라 하지도, 자신에게 맞추라 하지도 않는다.

금계국 한 송이에 내려앉은 열일하는 벌과 노는 것으로,

내 하고픈 일을 하고 나 자신이 되는 것으로 족하다 하니. 그의 인생 배경되는 것, 쉽고 가볍지 아니한가.




점심에 만난 선배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솔직히 보수적이야. 나는 연상연하 커플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남자가 나이가 많아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데 너희 커플을 유일하게 괜찮아. 내가 봤을 때 너희는 괜찮아.

사실 너희 결혼할 때는 마음에 들지 않았어. 딱 하나 나이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았어.

그런데 지켜보니까 너희는 괜찮아.

내가 보수적인 사람이라 생각이 바뀐 건 아냐.

우리 딸들 연하를 데려온다면 반대는 할 수 없지만 환영은 안 해. 그래도 너희 커플 만큼은 괜찮아"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자꾸 들으면 괜찮다는 바로 그것도 괜찮아지고

존재까지 괜찮아지는 느낌이 든다. 

천상병 시인의 산문집 제목처럼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괜찮다는 말의 치유성은 지금으로 족하다는 의미 때문일 것이다.

지금과 다른 어떤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는 압력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충분하고, 당신으로 충분하다는.




이십 여년 전 추억을 떠올리며 마음이 몽글몽글,

아팠던 과거를 떠올리며 목에 핏대가 섰다가,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 싶어 뭉클하다.





여보, 내가 시 하나 읽어줄게.

싫어.

나도 싫어. 읽어줄 거야.

석양 옆에 끼고 돌아오는 길에 읽었다.




못 들어선 길은 없다_ 박노해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슬퍼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삶에서 잘못 들어선 길이란 없으니

온 하늘이 새의 길이 듯
삶이 온통 사람의 길이니

모든 새로운 길이란
잘못 들어선 발길에서 찾아졌으니

때로 잘못 들어선 어둠 속에서
끝내 자신의 빛나는 길 하나
캄캄한 어둠만큼 밝아오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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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색이 분명해,

이런 말을 가만히 보면 '자아'와 '색'을 잇는 보편적인 상징이 있다.

어떤 색이 됐든 제 색을 가지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여기에도 끼고 저기에도 속하며 애매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을 '회색분자'라 한다.

때로 철저하게 회색분자가 되어야 하지만, (의식적으로 선택하여 되는 것이 중요하다)

단지 좋은 사람 이미지 심어주기 위해 여기에도 맞추고 저기에도 흥흥 하는 회색 옷은 좀 아닌 것 같다.


사춘기의 옷은 검정이다.

다섯 살 때쯤 채윤이와 "채윤아, 핑크 말고 얼마나 예쁜 색이 많은 줄 알아?"하며 싸웠던 적이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핑크만 고집하여 속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그랬던 아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정만 고집하는 시절이 왔으니 사춘기였다.

그 또한 미칠 지경이었으나 마음을 다잡아 먹은 탓인지 핑크만큼 열이 받진 않았다.


현승이 역시 암흑의 사춘기에 진입했다.

대부분 옷이 흰색 면티를 바탕으로 한 검정 또는 회색 같은 것들.

두 번째 암흑기를 접한 엄마는 놀랍지도 않고, 열받지도 않고, 자포자기와 무기력으로 응대.

나긋나긋한 감성으로 엄마 마음의 빈 공간을 채워주던 녀석이라

가끔 오는 쎄~한 상실감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럭저럭 흑암의 기운을 잘 버텨내고 있다.


벌써 중 3이고, 졸업 앨범 사진을 찍는단다.

변변한 옷이 없어서 채윤이까지 대동하고 옷을 사러 갔다.

여기서나 하는 말이지만, 옷 하나 모자 하나 사는데도 아주 그냥 지랄맞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암튼, 엄마 감각보단 누나 감각이 나을 듯하여 채윤이까지 데리고 가서 산 옷이

민트색 후드티이다.

엄마도 누나도 아닌, 제가 딱 고른 것이다.


집에 와선 너무 튀면 어쩌지, 그냥 검정을 살 걸 그랬지,

하더니 사진 잘 찍고 왔다.  친구들이 예쁘다 했다며.

"엄마, 그런데 사춘기에는 왜 그리 복잡한 거야? 나는 내향형인데 사람들이 나를 특별하게 봐줬으면 좋겠고,

그렇다고 나를 주목하면 싫고. 튀고 싶지는 않지만 또 뭔가 멋지고 싶고...... 왜 이리 복잡하지?"

(얌마, 사춘기 아니라도 다 그래. 인간이 원래 복잡해!)


색깔 있는 옷을 입는다는 것은 분명 변화인데, 사춘기 복잡한 다크 포스로부터 빠져 나오고 있단 뜻인가?

아이에서 성인으로 가는 통과의례를 끝내고 조금 차분하게 자기 색을 찾아가겠지.

토요일, 혼자 등산을 하고 집에 가는 길 장을 봤는데 집에 다 와 힘이 빠졌다.

집에 있는 현승에게 전화 하여 '진짜 진짜 미안한데........'하며 초저자세로 굽신굽신.

나와서 짐을 좀 들어달라 했더니 투덜투덜 꾸역꾸역 기어 나왔다.

어째 짐 들어주는 폼새가 좀 나긋나긋해진 것도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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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8

 



기도제목이란 이름으로 일상의 아픔을 나누는 일이 흔하다. 직장 상사에게 받는 스트레스, 해도 안 해도 어려운 연애, 어려운 처지의 친구 어디까지 도와야 하는지, 하다못해 계속 실패하는 다이어트 얘기까지. 누군가 내밀한 어려움을 내놓았을 때 하지 말아야할 것이 충고, 조언, 평가이다. 소그룹 모임에서 내 얘기 꺼냈다 다시는 여기서 나누나봐라!’ 결심한 적이 있다. 여러 번 있다.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그러려니 해, 친구를 돕다 네가 우울해지면 그건 돕는 게 아니야, 경계를 지켜야지, 하나님이 다 좋은 사람 예비하셨을 거야, 일단 살을 빼, 저녁 6시 이후에는 아무것도 먹지 마. 이래라 저래라, 일해라 절해라......” 교회만큼 사랑과 배려라는 이름으로 간섭과 판단이 흔한 곳도 드물 것이다. 답을 몰라서 힘든 것도 아닌데 말이다. 연애나 친밀한 관계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갈등이다. 여친(또는 남친)이 침을 튀기며 쏟아놓은 말끝에 그러면 처음부터 하기 싫다고 말을 했어야지. 뒤에 와서 이러지 말고 처음부터 거절해야 하는 거야.” “, 내가 앞에서 딱 거절할 수 있으면 뒤에 와서 이러겠니?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야. 그저 공감해달라고!”

 

우리는 그저 받아들여지고 싶다. 어떤 말과 행동에도 판단 받지 않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 관계적 존재인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바이다. 그런 안전한 곳이 우리가 바라는 공동체이다. 그러나 현실이 그러한가 말이다. 문제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심리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하는 말은 어설픈 충고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 안타까워서 그래. 이런 방법도 있다고 알려주려는 거야.” 단지 도우려는 뜻, 사랑의 발로라는 것이다. “너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딱 이런 마음을 주시더라.” 사랑의 발로에다 기도의 권위까지 더해진 충고와 조언은 가히 폭력이라 할 수 있다. 정작 입장이 바뀌어 자기가 나눈 고통에 충고 어택이 들어오면 어떨까? ‘내가 몰라서 그러나? 그게 그렇게 쉬우면 기도제목으로 내놓겠어? 제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안다고 함부로 이래라 저래야야. 차라리 입을 다물자.’ 결국 이해받지 못했다는 느낌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저 받아들여지고 싶다.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그 구원 허락 하시사 날 받아주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주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아주소서

 

어렵게 꺼내놓은 기도제목에 그저 손잡아 주고 조용히 같이 기도해주면 안 돼?’ 그저 들어주고, 생색내지 않고 기도해주는 사람 찾기 어렵다. 충고와 판단이 난무하는 위험한 인간관계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다. 찬송 214장의 1절이다. 참된 도움이신 예수님께 간다. 내 모습 이대로 다 받아주실 것 같은 예수님께...... 라 하기엔 어쩐지 자신이 없다. 생각해보니 예수님도 뭐라 하실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내가 이기적이고 쎈 면도 있고 신앙도 예전보다 못하다. 꼭 직장상사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예수님 믿는 내가 더 큰 마음으로 이해하고 사랑했어야 하는데 좁은 내 마음이 문제인 것 같다. 안 되겠네, 내 모습 이대로 예수님께 가져가면 안 되겠다. 일단 주일성수를 다시 확실하게 회복하고, 부장을 사랑하는 마음 장착한 후에, 술 담배 끊고 예수님께 가야겠다. 아직은 일러, 아직은 아니다. 내 모습 이대로 예수님께 가져가지 않기로 한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 말이 다 맞다. 스트레스 받는 것도 내 성격 탓이고, 친구를 도우려면 끝까지 도와야 하는데 힘들다고 그만 내려놓으려는 건 내 이기심이지. 여기서 몇 킬로는 더 빼야 소개팅도 나가고 연애도 할 수 있지, 늘 다이어트 실패하면서 연애는 무슨! 이런 나를 누가 좋아하겠어.

 

실은 내 모습 이대로 받아주는 못하는 것은 소그룹 멤버도, 친구도, 예수님도 아닌 나 자신이다. 사람들의 충고와 비판이 내 안에 크게 울리는 것은 마주쳐야 소리 나는 손뼉과도 같다. 내 마음 안에 항시 대기 중인 자기비판의 손바닥이여. 스스로를 때리는 비난의 손바닥이 밖에서 들어온 충고의 손바닥과 만나 짝! 하고 큰 소리를 낸다. 사랑의 주님께 이미 받아들여졌다고 선언된 내가 여전히 거절감의 늪을 헤매는 이유이다.

 

큰 죄에 빠져 영 죽을 날 위해 피 흘렸으니 주 형상대로 빚으사 날 받아주소서

 

죄로 만신창이 되어 돌아오는 탕자가 이 찬송을 부른다면 어떨까. 제가 아버지라도 자기 같은 인간 받아주지 않을 것이란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굶어죽지 않고 사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전히 받아들여진 탕자는 깨달았을 것이다. 받아들여짐의 기준은 아버지께 있구나! 내 모습 이대로 받아들여지기 원하는 우리에게도 탕자 체험이 필요하다. 언젠가 형편이 나아지면 아버지께 가겠노라, 가 아니다. 바로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라도 돌아가기만 하면 받아주시는 분께 가야겠다고 벌떡 일어날 일이다. 그럴 때 나 스스로 괜찮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며, 나 먼저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보는 눈을 얻게 될 것이다. 문제는 돌아섬이었다!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1937



'미친년' 꿈을 꾸었다. 꿈일기를 '미친년의 신발'이라 제목을 붙였다. 무슨 꿈일까? 숙고하던 중에 '글쓰기 자조모임'을 준비하며 읽은 책에서 에서 본 '미친년 글쓰기'라는 말이 생각났다. 그리고 416일 주간 주일 설교 내용도 함께 떠올랐다. 거라사 광인을 치유하며 2천 마리 돼지떼를 몰살시킨 불가해한 이야기이다. 자주 읽어도 뜻은 모르겠었던 본문이 선명하게이해되었다. 잔혹한 제국주의의 군화발에 희생된 군대귀신 들린 사람을 치유해다 제국주의에 기생해서 부를 늘려간 사람들에 의해 거부당하신 예수님 이야기이다. 마을 공동체적 치유와 회복사건이며, 동시에 불행하고 암울한 시대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미래를 선언한 정치적인 메시지가 담긴 이야기이기에 스페인의 게르니카, 제주의 4.3, 0416 세월호와 맞닿는 이야기이다. 원통함과 억울함 안고 살아가는 이 시대 모든 광인을 위한 이야기이다.

 

어렵사리 허락 받아 설교 원고 전문을 나눈다.

 

 

'거라사 광인' (5:1-15) _ 2015415일 이우교회 주일 설교

 

1937, 파블로 피카소는 <게르니카>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렸습니다.(스크린으로 게르니카를 띄움) 이 그림은 1937426, 나치 독일의 공군 콘돌 군단이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를 무차별 공격한 사건의 참상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게르니카 주민들은 스페인 내전 당시 나치 독일이 지지하는 프랑코 군에 반대했고, 나치는 보복 폭격을 가했습니다. 그 결과 마을의 70%가 초토화되었고, 주민 1,600여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건 당시 파리에 머물고 있었던 스페인 태생의 화가 피카소는 이 비보를 듣고 한 달 반 만에 그림을 완성합니다. 게르니카의 배경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림을 보면 전쟁의 참상이 잘 와닿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건의 배경과 결과를 자료를 통해 본 후 그림을 보면 <게르니카>가 얼마나 끔찍한 사건이었는지 알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5장은 어떤 면에서 게르니카와 비슷합니다. 언 듯 보면 조금 기괴한 사건처럼 읽히지만, 그 배경을 알고 보면 이 사건이 얼마나 끔찍한 참상을 담은 이야기인지 알게 됩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귀신 들린 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 고쳐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았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전부일까요? 그렇게만 읽고 넘어가기에는 의문스러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신 이야기가 여럿 등장합니다. 그런데 유독 이 이야기에서만 예수님께서 이름을 묻습니다. 그리고 귀신은 자신의 이름이 군대라고 말합니다. 이름을 묻는 것도 특이하고, 귀신의 이름이 군대라는 것도 심상치 않습니다. 혹시 이 사람은 전직 군인이었을까요?

또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이 군대 귀신은 예수님께 청을 한 후 무려 2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에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곧장 갈릴리 바다로 돌격하여 수장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원래 돼는 떼를 지어 사는 동물이 아니데, 어떻게 2천 마리를 사육했을까요? , 그리고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 취급을 했는데, 그것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이야기는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우리가 다 착한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걸까요? 우리는 돼지 주인의 엄청난 경제적 손실이 안타깝습니다. 돼지 치는 자들이 마을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사람들이 찾아와 예수님에게 그곳을 떠나달라고 요청합니다. 왠지 우리는 그 주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저간의 사정은 모른 체 하시는 것일까요? 스스로에게 좀 불리한 이야기를 왜 기록해 두셨을까요?

이 이야기에 관한 질문은 잠시 두고, 또 다른 자료를 살펴보겠습니다. 유대인 출신 역사가 요세푸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유대전쟁사>라는 역사책을 남겼습니다. 그의 책에는 오늘의 본문을 해석하는 데에 도움을 줄 기록 하나가 남겨 있습니다. 이 책은 예수님 사후 약 36년이 지난 AD. 66년부터 있었던 로마와 유대인 간의 전쟁에 관한 기록입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예루살렘을 비롯한 유대의 모든 도시가 파괴됩니다. 이 책에서 여러 유대 전쟁에 관한 일화 중, ‘거라사 지방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로마 장군) 베스파시안은 기병대와 많은 보병과 함께 루키우스 안니우스를 거라사 지방에 보냈다. 안니우스는 마을을 공습한 후에 미처 피하지 못한 천여 명의 청년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가족들을 포로로 잡고 또한 군사들로 하여금 재물을 약탈케 했다. 마침내 그는 주거지를 불사르고 주변 마을로 행군해 나갔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도망갔지만, 노약자들은 비명에 갔으며 모든 것이 불길에 휩싸여 사라졌다. 이렇게 전쟁은 산과 들로 퍼져나갔다.

현대 사회 뿐 아니라 고대 사회에서도 전쟁은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라사는 전쟁의 참극을 경험한 지역이었습니다. 로마 군사들은 칼과 창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집을 불태웠으며 사람들을 노예로 끌고 갔습니다. 바로 그 거라사는 그때뿐만이 아니라 그 이전에도 수차례 로마 군사들에 의해, 또 다른 군병들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힌 비극의 지역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갈릴리 북쪽에 위치한 시리아는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전쟁의 소용돌이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엊그제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는 시리아를 폭격했고, 그 이전 시리아에서는 IS세력과 정부군 간에, 여타 수많은 세력들 간에, 죽고 죽이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아무 죄 없는 민간인들이, 여인과 노인과 아이들이 지금도 끔찍하게 살해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 북부 시리아에는 1세기 전 세계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로마제국 제10군단입니다. 하나의 군단은 6천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들은 종종 남쪽 갈릴리아 거라사 지역으로 군사를 보내 원주민들을 위협하고 수시로 폭력을 행사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로마 제10군단이 가지고 다니는 군단기에는 10군단을 상징하는 동물이 그려져 있었으니, 그 동물이 바로 돼지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다시 보십시오.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예수님께서 그 귀신에게 이름을 묻자 군대라고 대답합니다. 우리말 군대로 번역된 헬라어는 레기온’(Legion,λεγεών)입니다. 레기온은 바로 로마 군단을 지칭하는 군사용어입니다. 당시 거라사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에 로마제국의 군사들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지역 정치인이나 세관, 또는 창녀나 로마를 숭상하며 재산을 지킨 지역 토호세력들이었을 것입니다. 보통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로마군사는 적이었습니다. 아니 그들에게 있어서 로마는 인간의 탈을 쓴 사탄이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재산을 강탈하고, 자신들의 자유를 빼앗고, 자신들의 삶의 향유권을 짓밟고, 자신들의 영혼을 노예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군대즉 레기온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불쌍한 귀신 들린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로마 군인에 의해 가족을 빼앗긴 사람입니다. 재산을 빼앗겼고, 고향을 빼앗겼고, 친구와 추억과 삶의 모든 것, 심지어 영혼까지 빼앗긴 사람 아니었을까요? 그는 어쩌면 로마 군인에 의해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아들을 잃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남자가 제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차라리 제정신을 잃고 온 동네방네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이 사는 길이었지 않았을까요? 차라리 자기가 죽었어야 했는데 하면서 돌로 제 몸을 치지 않고서는 잠 못 들지 않았을까요? 무덤에 묻힌 가족들 옆을 배회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일이 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를 키우는 사람들은 또한 누구겠습니까? 그들은 필경 돼지를 키워 얻은 소득으로 로마 군단의 군수물자를 조공하면서 재산을 불린 사람들 아닐까요? 혹시 로마에 반역하는 사람들을 색출하면서 삶을 부지한 사람들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군대 귀신이 이천이나 되는 돼지 떼로 들어가 갈릴리 바다로 돌격하여 수장당하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단지 한 이방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준 개인적 사건일 뿐 아니라, 마을 공동체적 치유와 회복사건이며, 동시에 불행하고 암울한 시대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미래를 선언한 정치적인 메시지로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겠습니까? 사람을 억압하고 자유를 빼앗고, 인간적 삶을 말살하는 제국은 필경 예수님께서 선포하고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와 맞설 수 없음을 선포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 로마에 편들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내쫓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지난 43일은 일명 <제주 4.3사건>70주기였습니다. <제주 4.3사건>은 사회주의 토벌이라는 명목으로 미군정과 당시 이승만정권이 벌인 제주도민에 대한 만행이었습니다. 1948, 당시 제주도 도민이 30만 명이었는데, 좌익 세력을 척결하겠다는 명목으로 경찰과 군대가 동원되어 무려 3 만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당했습니다. 노인, 여성, 어린이들조차 무차별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는 6.25 전쟁 다음으로 많은 사람이 죽은 사건이고, 국가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자, 동족상잔의 비극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66개월 간 진행된 이 토벌 작전 중에 육체적 고통을 당한 자, 정신적 후유증을 앓는 자, 전기고문과 물고문 등으로 평생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가진 자,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자살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더욱 고통스러웠던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제주도민들은 이 사건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제주 4.3 사건이 본격적인 학살 사건으로 번지게 된 결정적 사건이 오라리방화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오라리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고은 시인이 썼습니다.

제주도 토벌대원 셋이 한동안 심심했다

담배꽁초를 던졌다

침 뱉었다

오라리 마을

잡힌 노인 임차순 옹을 불러냈다 영감 나와

손자 임경표를 불러냈다 너 나와

할아버지 따귀 갈겨봐

손자는 불응했다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경표야 날 때려라 어서 때려라

손자가 할아버지 따귀를 때렸다

세게 때려 이새끼야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세게 때렸다

영감 손자 때려봐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손자를 때렸다

영감이 주먹질 발길질을 당했다

이놈의 빨갱이 노인아

쎄게 쳐

세게 쳤다

이렇게 해서 할아버지와 손자

울면서

서로 따귀를 쳤다

빨갱이 할아버지가

빨갱이 손자를 치고

빨갱이 손자가

빨갱이 할아버지를 쳤다

이게 바로 빨갱이의 놀이다 봐라

그 뒤 총소리가 났다

할아버지 임차순과

손자 임경표

더 이상

서로 따귀를 때릴 수 없었다.

총소리 뒤

제주도 가마귀들 어디로 갔는지 통 모르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제주 4.3사건>을 기억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제주 도민 3만 명이 죽을 때 기독교인이 앞장섰기 때문입니다. 영락교회 청년들 일부가 가입한 서북청년회는 제주도로 건너와 좌익은 사탄의 세력이라는 명목으로 주민들을 끌어다가 발로 밟아 죽이고, 칼로 찔러 죽이고, 불 질러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산에서 내려와 항복한 제주도민들과 사회주의자를 변별하는 일에 제주도 목사들이 동원되었습니다. 사람들 죽어가는 일에 기독교인들이 참여했고, 그 결과 제주도에는 전국 다른 지역에 비해 기독교인 수가 현저히 적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잔혹한 제국주의의 군화발에 희생된 군대귀신 들린 사람을 치유해주셨습니다. 제국주의에 기생해서 부를 늘려간 사람들에 의해 거부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가 예수의 편에 서지 않고 제국의 편에 선 것이 과연 옳은 일이겠습니까?

비단 <제주 4.3 사건>뿐이겠습니까? 지금도 불의하고 부당한 권력 구조 하에서, 불공평한 사회 질서 하에서 억울하게 몸을 빼앗기고, 가족을 빼앗기고, 자유를 빼앗기고, 영혼을 빼앗긴 채, 억울하고 원통해서 돌을 들어 제 몸을 치는 일 밖에 할 수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역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보금자리를 잃고 쫓겨나는 영세민들이 있습니다. 군사시설 때문에 정신적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구조조정 때문에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어 동료와 가족들이 자살하고 엄청난 트라우마 속에 살아가는 해직 가족들이 있습니다. 내일은 416일입니다. 아직도 사고의 원인이 무엇인지 불분명하고, 왜 구조를 한 명도 못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세월호 304명의 희생자 가족들이 그간 여러 사람들에 의해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며 삶을 부지해 나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바다 건너 또 다른 거라사인의 지역으로 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시려고 합니다. 누가, 그들의 영혼을 옭죄고 있는 쇠고랑을 풀어줄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들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폭압의 기억을 씻어줘야 합니까? 누가, 가난하고 버려진 그들의 손을 잡아 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에 의해 신천지 취급당하고, 교회를 선동하는 사람 취급당하고, 그래서 자녀들을 신앙적으로 여러모로 돌보아야 할 시기에 책임을 다 하지 못하여, 황금 같은 시기에 정신적으로 소모된 아픈 경험을 가진 우리 이삭의우물공동체가 이 일에 동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애지중지 키우는 돼지 몇 마리 잃을까 두려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쫓아내는 거라사인이 되어선 안 될 일입니다. 그러니 성도 여러분, 우리 시간을 내어 동참하십시다. 때론 물질로 동참하고, 마음으로 응원하십시다. 이 시대의 아픔을 가진 이들 곁에 서주어, 주님의 거라사 사역에 동참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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