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윤이가 꽃친과 함께 누린 일 년의 방학은 벌써 작년 이야기입니다. 채윤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친구들이 일 년 늦게 고등학교로 진학했습니다. 올해 채윤이는 검정고시를 쳐서 고등학교 졸업장을 땄고, 이제 서서히 본격 대학 입시를 준비해야겠지요. 꽃다운 친구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상이 여러 편 제작 되었는데, 이번엔 진짜 다큐입니다. 3부작 다큐 중 3부에는 부끄럽고도 영광스럽게 제 얼굴과 목소리가 많이 등장합니다. 





1부의 제목은 "멈출 수 있는 용기로"입니다. 무엇을 멈춘다는 것인지, 용기는 어떻게 발휘되었는지 원조 꽃친 은율이 가족의 이야기가 담겼습니다. 





2부는 "저마다의 향기로"입니다.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아이들 각자의 이야기, 그리고 더불어 어우러지는 이야기입니다.





3부 "꽃다운 마을의 작은 시작"입니다. 꽃친이 여타 청소년 인생학교와 다른 점이 있다면 "가족동행프로그램"이라는 것입니다. 아이가 꽃친을 하는데 아빠가 달라지고 가족이 변하는 경험을 합니다. 그리고 꽃친의 끝은 가족과 가족이 연대하는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연애 강의를 오래 하면서, 사랑하는 사이에 왜 그리 서로 상처를 줄까 고민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난항에 빠지는 관계 문제에 대해 골몰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바가 있다. 사랑에 대한 실용적인 정의 하나를 발견했다. 사랑은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사람이 '사랑'이라고 해야 '사랑'이다. 내가 네게 해 준 것이 얼만데, 울부짖어도 소용 없다. 받은 사람의 기억 속에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인 경우가 허다하다.


멸치, 다시마, 양파, 무 등을 넣고 지극 정성으로 육수를 낸 국을 끓여 먹이고, 당근과 버섯과 양파를 우격다짐으로 먹이는 것이 엄마의 사랑인데. 아이들 편에서는 사랑은 커녕 그저 고역일 뿐임을 안다. (흐흑) 


한 놈은 며칠 전부터 "엄마, 유부초밥 먹고 싶어." 또 한 놈은 "엄마, 나 떡갈비에 계란 올린 거 먹고 싶어." 했다. 이 욕구들에 즉각적으로, 인스턴트 식품으로 응해주었다. 건강이고 뭐고 아이들은 어깨춤을 추며 행복해 한다. 엄마가 자신을 돌봐준다고, 자신에게 관심이 많다고 생각하며 사랑받는다고 느낀단다.


사랑 이렇게 쉬운 건데. '그래도 건강을 생각하면, 그래도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면, 그래도 사람 노릇하려면..... ' 하며 내 중심의 관점, 에고이스트적 사랑을 놓지 못한다. 인스턴트 유부초밥과 떡갈비로 열여덟, 열다섯 두 아이가 춤을 추는 저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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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를 손질하다.


손질이 어려워서 내 손으로 사지는 못하는데

아이들은 참 좋아하는 생선이다.

어릴 적 외할머니 밥상에 꼭 오르던 생선이라 일찌감치 맛을 들인 것.

조기가 한 무더기가 생겨서 비늘을 긁고 내장을 빼내어 소금 살살 뿌린다.


김창완의 어머니는 고등어를 손질하여 냉장고에 넣어 두셨고,

우리 엄마는 조기를 손질하여 냉장고에 넣으셨다.

소쿠리에 신문지를 깔고, 아무것으로 덮지 않은 채 냉장고에 두셨다.

꾸덕꾸덕 말리기 위해서다.


[꾸덕꾸덕]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채망에 널어 창가에 두고 꾸덕꾸덕 말린다.

현승이 저녁 반찬으로 몇 마리 구워주는데 다시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

[까노롬하게]

가스불을 까노롬하게 해서 타지 않게 굽는다.


꾸덕꾸~더억 말려라.

불 좀 까노롬하게 줄여라.

우리 엄마표 말들.


엄마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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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좋아하는 현승이는 금요일 밤엔 무조건 영화 한 편이다. ‘피아니스트(2002)’를 보고 나오더니 괜히 카펫을 발로 차고 심술이 난 것처럼 왔다 갔다 한다. 혼잣말인지 들으라는 말인지, “도대체 유대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겠어. 그렇게, 그런 걸..... 그런 홀로코스트 그걸 겪고 어떻게 하나님이나 신 같은 걸 믿을 수 있어! 김주혁이..... 연예인이 한 사람 죽어도 우리가 그렇게 충격받고 그러는데..... 세월호에서 삼백 몇 명이 죽고 우리가 다 그렇게 힘들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그것도 그렇게 잔인하게 죽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종교라는 걸 믿을 수 있어” 했다. 곧 울어버릴 것처럼 울분에 차서 말했다. 무고하게 고통 당한 모든 사람이 아니라 그들에게 마음을 포갠 현승이 자신이 믿을 수 없다는 얘기인 줄 안다. 그런 하나님을 가슴으로 믿기는 어렵다는, 오히려 화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 없다는 뜻임을.  


별 말을 할 수 없었다.


꼭 계셨어야 할 순간에, 당신이 꼭 필요한 곳에 왜 계시지 않냐고 물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믿음이 시작되더라는 것을 말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 부재로만 현존 하시는지, 당신을 찾는 타는 목마름 속에 희미하게 드러내시는지, 울분에 찬 물음 속에 신앙의 길이 있더라고 설명할 수 없었다.



현승아, 엄마가 읽은 책에 이런 말이 나오는데...

하느님께는 증오나 폭력이 없으시다. 역사에서 모든 사건들이 일어나도록 절대적으로 허용하신다는 사실은 하느님께서 폭력적일 수 없으며, 징벌을 내리시거나 심지어 통제하시지도 않으신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만일에 하느님께서 폭력적인 분이라면,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폭력으로 막으셨을 것이다.-역자 주). 하느님은 종교재판의 고문이나 홀로코스트의 가스실을 막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죽음, 우리들 자신의 실수, 심지어 악 자체를 이용하셔서 우리 모두를 온전한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재난으로 우리를 벌 주시지 않으며, 심지어 재난을 막지도 않으신다. 예수님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에 대해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요 9:3)라고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 완전히 사랑에 헌신하시는 것은 완전히 자유에 헌신하시는 것인데, 이것은 하느님께서 모든 강제와 통제를 포기하셔야만 했다는 뜻이다. 하느님은 분명히 경찰이 아니다. 이것은 하느님과 우리가 지불해야만 하는 큰 대가이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몸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달리 행동하실 방법이 없으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이다(요일 4:8, 16).

리처드 로어 <불멸의 다이아몬드> 중에서


어때? 알아 들어져? 실은 엄마인 나도 이 말을 알아들었다, 못 알아들었다 해. 알겠다가 모르겠고, 모르겠다 싶은데 조금 알겠고... 이렇게 비틀비틀 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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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목상은 학생, 중학생, 중2.

주업은 아이패드 들고 탁자 밑에 들어가 음악 검색, 영화 검색, 영화평 검색, 그리고 감상.

쟝르는 늘 예측 불가. 

오늘의 선곡은 이문세의 소녀.

아아아, 난 이 노래가 너무 좋아. 내 취향이야.


# 아빠 끼어들기

야아, 현승아. 아빠가 중학교 2학년 때 저 노래를 들으면서 시험공부를......


# 엄마 끼어들기

캬아, 현승아. 엄마는 대학교 1학년 때 저 노래를 들으면서 짝사랑 하던 어떤 남자를......


# 푸하하하, 이게 어떻게 되는 거야. 도대체?!


# 아빠의 소원

내가 다시 현승이 나이가 된다면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고, 기타를 치고, 

(현승 끼어들기) 자전거를 타고?

그렇지! 아, 너무 약올라. 김현승은 그걸 다 하고 있어.


# 엄마의 소원

현승아, 엄마가 바라는 건 딱 한 가지야.

방바닥에 널어 놓은 옷을 옷걸이에만 걸어줘.

그거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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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중앙공원의 단풍이 운전을 방해한다. 운전하며 틈틈이 곁눈질 하는데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다.  원두가게에 들러서 원두를 사고 서비스로 주는 커피 한 잔을 얻어서 중앙공원으로 향했다. 벙개로 만난 친구처럼 들뜨고 설레며, 동시에 호젓하며 쓸쓸했다. 분당의 가을은 예쁘다. 봄도 예쁘고 여름도 예쁘지만 가을은 유난하다. 눈을 돌려 마주치는 어디든 예쁘지 않은 곳이 없다.




봄은 가까이 가서 봐야 예쁘고, 가을은 멀리서 봐야 예쁘다.


지난 주 어느 날, 역시나 단풍으로 예쁜 동네 카페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얻어 들은 명언이다. 명언의 발화자 권사님의 부연설명은 '가을 단풍이란 실은 푸석푸석하고 물기 없는 것이 가까이 보면 고울 것이 없다는 말씀이었다. 그렇지! 흙모자를 쓰고(이거, 망원동 사는 어느 시인의 표현이다.) 올라온 새싹과 눈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들이밀던, 연한 새잎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이대던 봄날이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가을은 버석버석하고 스러져가는 아름다움이다. 바람 살짝 불면 후루룩 떨어져 버리는 힘 없는 잎들의 향연이다. 붙들고 싶으나 더는 붙들 힘이 없는, 고갈된 생명의 처연함이다. 가까이서 찍은 내 얼굴이 보기 싫은 느낌은 운전하고 지나치다 본 숲에 들어섰을 때의 쓸쓸함이다. 나좀 봐달라는 듯, 지는 해를 스포트라이트 삼아 존재감을 발하는 벤치가 눈길을 끈다.  




벤치를 주인공 삼아 사진 여러 장을 찍은 뒤에 화단의 낮은 담을 넘어 가서 앉기로 했다. 주름진 얼굴, 오십견이 와서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어깨, 물오르는 생명력 같은 건 많이 잃어버린 마음을 가지고 가 앉았다. 가서 앉자, 앉다, 앉아 있다, 이런 말을 되뇌이다 구상 시인의 시에 이르렀다 . 이 한 마디 알아듣기 위해 인생의 봄, 여름을 달려온 것일까. 푸석푸석한 생의 가을이어서, 알아들어지는 것이 있는 가을이어서 다행이다.

 


[꽃자리]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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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영화는 결국 보게 되어 있고, 놓친 영화는 내 것이 아니다. 이쪽으로 이사 온 후에 놓치는 영화가 많아졌는데 그러려니 하고 있다. 영화 뿐이겠는가 일도 사람도 결국 만나지는 것이 내 것이다. 성사시키려 애쓰기 보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가, 만나고 싶은가'를 묻고 시간과 상황의 흐름을 타는 것이 제일이다. <다시 태어나도 우리>를 보려고 검색하고 시간 맞추고, 심지어 어떤 날은 서울까지 나가기도 했는데 보질 못했다. 사당역 근처에서 모임이 있었다. SNS에 몸을 맡기고 놀다 얻어 걸린 책모임이었다. 오래된 책모임이 있는데 모임 시간 맞추는 것이 쉽지 않아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는 걸 생각하면, 한 방에 시간도 맞고 마음도 가는 책모임은 '내 것'인 셈이다. 당일 이수역 아트나인의 상영시간을 검색하니 <다시 태어나도 우리> 마치는 시간이 모임시간 15분 전이다. 죽어라 뛰면 시간에 맞출 수 있겠다! (일타쌍피 짜잔) 

 



영화 마치고 극장에서 모임장소까지 순간 이동한 느낌으로 달려갔다. 생각해보면 책모임 내내(거의 3시간) 인도와 티베트 눈덮인 고산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약간 달뜬 상태로 모임에 앉아 있었고 책 얘기를 했지만 정신은 훨씬 더 넓은 세계를 오가고 있었다. 세 시간여의 모임은 영화의 연장이었는지 모른다. 정작 관람 중에는 몰입이 잘 되지 않았었다. 잔잔한 다큐영화인데 옆좌석 여자분이 중간부터 계속 울어대는 것이다. 반작용으로 나는 더욱 차가운 이성의 불을 밝히고 관람하게 되었다. 담담히 보고 잔잔히 감동 받았기에 천천히 걷고 싶었지만 미친 여자처럼 15분을 뛰어 약속 장소로 가며 묘한 느낌이었다.   


벌써 자기 생에 이름을 붙이고 확고한 길을 가고 있는 맑은 눈동자의 아홉 살 인격 앙뚜, 어린 제자에게서 높은 스승의 영혼을 감지하고 그의 길을 열어주는 것에 삶을 건 주름 가득한 얼굴의 노승 우르갼. 극(drama)이 아니다. 말 그대로 다큐다. 두 주인공 각자의 생애 또는 둘이 하나 되어 사는 춥고 먼지 나는 일상에 합장하고 머리를 조아리게 된다. 숭고하고도 아름답다. 윤회나 환생의 종교적 믿음과 별개로 깊은 울림을 주는 영화이다. 노승 우르갼의 요란할 것 없는 자기증여와, 어린 앙뚜가 린포체로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순명의 태도에서 구도자의 모습을 본다. 구도의 길이 산과 눈보라에 막혀 있어 막막할수록 두 사람 사이 오가는 그 무엇이 더욱 절절하게 다가온다. '그 무엇'이다. 이것은 사랑, 헌신, 신뢰, 가르침과 배움, 정(情)...... 무엇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따스함이다.  




스승에 대해서 생각한다. 한때는 제 때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한 내 인생, 안타까웠던 적도 있다. 존경하고 신뢰하며 스승으로 여겼던 사람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고 경악하여 방황하던 날도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스승은 참 많았다. 스승은 만날 수 있지만 제자는 구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금방이라도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스승님이 많다. 물론 그분들 중에는 내가 당신의 제자인 줄 모르는 분이 허다하지만. 그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없다 여겨지는 분이 많다. 여기저기 영성심리 배우기 위해 들쑤시고 다닌 곳에서 만난 선생님들 그렇고, 에니어그램 세미나를 들으러 오셔서 자기를 나눠주며 오히려 가르침을 주고 간 분들이 그러하다. 책으로 만난 스승님이야말로 이루 다 셀 수가 없다. 실은 나를 가장 많이 성장시킨 스승은 지독히도 나를 괴롭히던 사람이다. 아무튼 오늘의 내 강의과 글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님을 인정한다. 나를 스쳐간 내가 통과해왔던 스승님들의 덕이다.


앙뚜와 우르갼은 묘한 사제지간이다. 앙뚜는 전생의 높은 스승이 환생하여 태어난 린포체라 하니 늙은 우르갼에게 지극히 높은 스승이다. 어린 앙뚜는 우르갼의 보살핌과 가르침이 없다면 아홉 살 무력한 아이일 뿐이니 진정 우르갼의 제자이다. 둘 사이 스승이며 제자이고 제자이며 스승인 묘한 관계이지만 피차에 스승연(然)하는 자의식은 없다. 라면을 끓여주고, 청소를 하고, 불경을 공부하고, 삐딱하게 굴고, 막막하게 먼산을 바라보는 스승과 스승, 스승과 제자의 일상이 숭고하게 다가오는 이유같다. 그저 보이는 것만 보면 늙은 의사와 어린 아이인데 서로에게서 스승을 본다. 서로가 가진 가장 높은 것을 본다. 이것은 '당신 안의 신을 경배한다'는 라마스떼, 지극한 존엄의 태도 아닌가.




항상 스승을 찾아 헤매는 나는 이번 학기에 강의 하나를 신청했었다. 두 번 가고는 다시 발길이 움직이질 않아서 못 가고 있다. 강의 신청을 해서 실패하는 적이 거의 없다. 강의로 벌어서 강의 듣는데 쓴다해도 본전 생각나는 일은 별로 없었다.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자의식이 강한 강사에게는 새로운 정보가 많이 흘러나온다. 그런 의미에서는 얻을 게 많다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러했다. 참고하는 모든 책의 저자의 주장을 끌어와 자기를 화려하게 치장하는 듯한 태도에 나는 나의 무엇을 투사하는지, 들어주기가 불편했다. 지난 학기까지 4학기 철학상담을 들으며 정말 어려웠다. 못 알아듣는 말이 반이었다. 강의가 어려운 이유는 교수님이 단정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만 어느 하나가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말 할 수는 없다, 는 식이었으니까. 철학은 그럴 수 밖에 없고, 단정지을 수 밖에 없는 학문이 있기는 하지만.


가르치려는 사람은 스승이 될 수 없다. 일반화 할 수는 없겠다. 적어도 나는 자기확신에 차서 가르치려는 자를 스승으로 삼지 않는다. 나의 오늘을 있게 한 스승이 많지만 그들 대부분은 자신에 내게 가르친 것을 모를 것이다. 나를 감동시킨 자신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서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스승이란 무엇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내 존재를 걸고 싶은 그런 사람일지 모른다. 우르갼에게 앙뚜처럼 말이다. 또 스승은 무력한 자에게 유일하게 기댈 언덕일지 모른다. 앙뚜에게 있어서 우르갼처럼. 그렇게 서로에게 스승이 되는 만남이란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가. 기꺼이 나를 내어줄 수 있는 스승을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 저 두 사람처럼. 춥고 가난한 삶과 앞이 보이지 않는 눈보라 길을 헤치고 가는 여행이라 해도 행복한 사람들이다. 나라고 그런 스승을 못 가질리 없다. 



 


삶이 엉망진창인 목사님이 설교’는’ 잘합니다. 그 목사님을 이렇게 대한다면 어떨까요? “목사님의 삶은 보지 말고 설교만 들어. 그렇게 알아서 은혜 받으면 되는 거야" 가능할까요? 신앙이 삶과 상관 없는 관념이거나 실체 없는 허상이라면 가능할 것입니다. 어떤 선생님, 목사님, 지도자들을 좋아하고 따르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 사람처럼 되고 싶은 마음의 투사(projection)입니다. 기술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야 그의 사생활이 어떠하든 상관 없습니다. 운전기술, 커피 내리는 기술만 배우면 되니까요. (엄밀하게 따지면 '기술'을 배우다 무의식적으로 배우는 '태도'가 있으니, 결국 '기술'조차도 누구에게 배우느냐는 중요합니다.) 신앙을 안내하는 종교지도자의 삶과 설교를 분리해서 배울 수 있다는 말에는 신앙에 대한 정의가 함의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존경하는지는 결국 내가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가진 하나님 상(image)는 어떻겠습니까. <침묵>의 저자 엔도 슈사쿠의 <나에게 있어서 하느님은>에 나오는 짧은 글입니다.

‘예수님은 각자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내게는 나의 예수님 상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그들 나름의 예수님 상이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에 대하여 혁명가의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그 사람에게는 정신적으로 유다교 해방자인 동시에 사회 혁명을 시도한 사람의 이미지가 박혀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은 마음 깊은 곳에 존재하면서 사랑의 작용을 하는 이미지입니다. 사람들 각자가 추구하는 바에 따라 예수님의 이미지가 탄생합니다. 나는 이런 이미지의 총체가 진정한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묘사한 것처럼 예수님은 확실히 상냥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면 그것만은 아니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요.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성전 경내에서 양과 비둘기를 팔고 있던 상인이나 환전상들을 새끼줄로 만든 채찍으로 쫓아낸다든지 그들의 돈을 흩뿌리거나 판매대를 둘러엎는다든지 하지 않는가, 그런 과격하거나 강한 면도 있지 않은가 하는 비판도 확실히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역시 상냥한 예수님이 가장 매력적입니다. 나는 그런 예수님이 좋습니다. 그러니까 줄곧 그렇게 쓰고 있습니다. 내게는 성전에서 분노하는 예수님은 그다지 감이 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의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예수님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다른 설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각기 다른 예수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고, 그 모든 것을 종합한 것이 진정한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나는 어떤 하나님 이미지를 붙들고 있을까요?
예, 기승전'영성과정 초대'입니다.
40, 50년 공들여 만든 하나님 이미지를 단번에 찾을 수는 없겠으나
자유와 투명한 기도를 위한 여정의 시작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에니어그램 세미나 1단계 이상 수강하신 분들을 영성과정에 초대합니다.

[일시] 2017년 12월 20일(수) 오전 10:00 ~ 오후 5:00
[장소] 100주년기념교회 사회봉사관 5층
[참가비] 12만 원
[문의] 010-4235-8020 (수진 쌤)
[신청] http://bit.ly/2vJI8Su






결혼 전부터 귀에 꽂히는 경구가 하나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결혼을 앞둔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언니들의 조언이다. 경험을 우려낸 진국,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영양가 듬뿍 담긴 가르침이다. "시부모에게 처음부터 잘하지 마라. 잘하는 며느리에게는 계속 더 기대한다. 아예 처음부터 잘할 생각을 하지 마라"


영양가 높은 말인 건 알겠으나 동의가 되지 않았다. 결혼한 언니들 백이면 백 '시'자 들어가는 건 시금치고 시켸(식혜 켸켸)고 일단 뱉어내는 걸 보니 장난이 아니다 싶었지만서도. 나는 착한 여자 콤플렉스도 있고, 남들 하는대로 하는 건 무조건 안 하고픈 반골 기질도 있는지라. 무엇보다 관계 시작하기도 선부터 그어 놓는 것이 불편했다.


잘하고 말고 생각하지 않고 시부모님과 관계를 맺었다. 미리 규정하지 않으려 했고, 할 수 있다면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다가가려 하다보니 웬만하면 거절하지 않(못하)는 관계가 되었다. 착한 며느리 소리 듣고, '너는 며느리가 아니라 나의 상담자이며 치유자다'라는 극찬도 들었지만 어느 시점 정신을 차렸다. 아, 잘하는 며느리를 향한 기대는 끝이 없구나! 언니들 말이 맞았네!


나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은 자만심의 결과였다. (불평등한 결혼 구조 안에서 며느리로 사는 문제 역시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어느 시점 뒤늦게 경계를 설정하고 그럭저럭 편안한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처음부터 잘하면 안 된다!


'처음부터 잘하는 게 아니었어, 대충 말 안 듣고 살살해야 했어' 시어머니가 아니라 하나님께 이런 마음이 들면 복잡해진다.  내가 고분고분하니까 나를 너무 막 다루시는 거 아닌가 싶은 것이다. 진짜 해도 해도 너무 하시네. 이만큼 했으면 저만큼은 해주셔야지 갈수록 더 팍팍하게 구시나. 가만히 있으니까 가마니인 줄, 보자보자 하니 보자기인 줄 아시나 본데. 확 절교를 할 수도 없고!


때때로 살아야 할 이유가 흐릿해질 때가 있다. 일상의 부조리를 담기에 내 마음이 작거나, 마음의 그릇 크기에 비해 부조리의 크기가 크거나. 오늘의 부조리를 견딜 힘은 '의미'이다.  '살아야 하는 이유'가 흐릿해진다는 것은 의미가 없어진다는 뜻이다. 


때때로 무의미의 숲에서 길을 잃어 헤매는데, 그때 내가 화살을 돌릴 유일하고 만만한 분이 하늘 아버지. '착한 사람들 뒤를 더 잘 봐주셔야지 갈수록 험지로 내모십니꽈? 이래도 되는 겁니꽈?; 삿대질 하고 원망해본다. 강상중이라는 뜬금없는 귀인을 만났다. <마음> <고민하는 힘> <어머니>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차례로 읽으면서 마음이 마음이 조금 풀렸다. "살아야지, 죽지 않고 살아야 할 이유가 충만하지"


삶에 대해, 사람에 대해, 사랑에 대해 Yes라고 말하지 않을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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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마지막 주일에 예배가 없다는 말을 한참 전에 들었다. 일명 ‘흩어지는 예배’. 식사 당번 팀이 네 팀이라 다섯 째 주 식사문제 때문인가, 이러저러 그러한가 보다 싶었다.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들어본 적이 있어서 그다지 신선한 느낌은 아니었다. 두어 주 전 설교 시작 전에 흩어지는 예배에 관한 안내를 들었다. 아하, 이러저러한 뜻이 아니라 요래요래한 뜻이 있었구나! 싶었다. 광고 내용이며, 교우들 카톡방에 정리되어 올라온 내용은 이러하다.

 

종교개혁기념주일에 우리 이우교회는 <흩어지는 예배>를 드립니다. ‘모여서’ 무언가를 듣거나 배우는 게 아니라, ‘흩어져서’ 따로 예배를 드립니다. 저는 이 예배가 성도님들 각 개인마다 남다른 의미와 은혜가 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개교회주의에 중독된 우리의 혼미한 정신을 흔들어 깨워 그리스도의 몸을 좀 더 광대하게 체험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혹시 주일 본교회에서 헌신하여 섬기다보니 부모님 또는 자녀들과 뿔뿔이 흩어져 예배드리고 있는 분이 계신가요? 이번 기회에 가족들과 함께 예배드리시길 바랍니다.


종교개혁기념주일이니, 이참에 타교단 예배를 드려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감리교, 루터교, 성공회, 성결교, 순복음, 장로교, 여러 교단 교회가 있지요. 좀더 다른 방식으로 예배드리는 교회를 가보는 것도 꽤 의미있을 것 같습니다.


작은교회에서 힘겹게 섬기는 친척이나 친구가 있나요? 그런 교회에 방문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청년 시절 함께 했던 선배가 사역하고 있는 제천의 작은 교회를 방문하려고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흩지 않고 불러 모으셨습니다. 지난한 여정 속에서 흩어지지 않고 여기 이삭의우물에 모였습니다. 이제 한 번 흩어져 보려 합니다. 더 잘 모이고, 우리의 소명에 더 충실코자 함입니다. 주님께서 동행해주시고 은혜 주시리라 믿습니다.


아! 그리고 말씀 드렸던 세 가지 기억하시죠?


1. 10분 일찍 가서 그 교회를 위해 기도하기

(우리 교회인양 기도합니다)

2. 교회 밥 주면 밥 먹고 오기

(식구는 같이 밥을 먹는 것입니다)

3. 헌금 꼭 하고 오기

(평소보다 더 많이 하십시오)


내겐 특별히 세 가지 숙제(지침)이 의미 있게 다가왔다. 그렇지! 내 교회 네 교회가 없다.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다. 어느 교회 가서 예배 드리더라도 가르고 경계 세우는 버릇 잠시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살짝 감동이 밀려왔다. 이후 교회 모임에서 간간이 들리는 대화. “집사님은 이번 주 어느 교회 가?” 허용된 일탈을 계획하는 대화가 신선한 설렘으로 들렸다. 한 집사님은 어머님 다니시는 교회에 가신다면서 어머니가 얼마나 좋아하시겠냐신다. 수십 년 교회 생활 하면서 주일 봉사 같은 것에 매여서 다른 교회 가서 예배 할 수 있다는 상상을 못했다며. 수십 년 만의 색다른 효도가 되는 것이다.





우린 제천 의림지 옆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예배 드렸다. 20년지기 친구 M의 남편 K 목사님이 섬기시는 교회이다. 작은 교회 앉아 예배 드리며 어릴 적 자랐던 충청도의 교회가 생각났다. 그때의 우리 아버지, 우리 엄마처럼 시골의 작은 교회를 오랜 시간 섬기며 살아가는 친구와 목사님. 친구에 대한 마음 떄문이 이미 남의 교회 같지 않다. 그것이 아니라도 이 땅의 모든 교회, 내 교회 네 교회일 수가 없다.


덤으로 얻은 것이 많다. 제천의 가을에 머물러 20년 전 청년 시절 함께 했던 추억을 걸었다. 내겐 친구, 남편에겐 누나인 M과 함께 긴 시간을 보내다보니 그 시절 번뇌 가득한 얼굴로 기타 치던 종필이가 다시 살아오더군. 목회자 커플 네 사람이 주일 아침 예배로 시작하여 밤늦도록 함께 했다. 함께 탁구 치고 밥 먹고 수다 떠는 모든 시간이 좋았다. “주일을 이렇게 함께 보내다니! 믿어지질 않네. 흩어지는 예배, 좋네!” 형편과 처지는 다르지만, 답이 없는 얘기지만 비슷하고도 다른 이야기를 주고 받는 시간 동안 마음이 펴지고 얼굴이 펴졌다. (주름은 안 펴진다 ㅠㅠ)


친구가 챙겨준 잘 익은, 밥을 부르는 맛있는 김치 한 통은 덤앤덤.




흩어지는 예배의 복을 밤 늦도록 누리고 청풍호를 내려다보며 일박. '자드락길'이라는 처음 만난 길을 걸었, 아니 기어 올랐다. 포기하지 않고 가장 높은 전망대까지 올라 만난 멋진 풍경은 덤앤덤덤. 걷는 길인 줄 알고 시작했으나 등산 길이었다. 꽃길만 걷고 싶은 인생길, 언제 한 번 상상한 그대로의 꽃길이었던 적 있었냐며, 되돌아 내려가지 않았다. 여러 번 뷰 포인트를 만났다. '이 정도면 됐네' 하고 돌아설 수도 있었는데 이왕 내딛은 길 힘들더라도 한 번 끝까지 가보자. 어머어머, 중간에 포기했으면 어떡할 뻔 했나! 멀리 뵈던 바로 그 전망대에 올라서 본 풍광은 웬만했던 아래 쪽 풍광과 비교할 수 없었다. 포기하지 않고 얻은 안구정화 풍경 안에 그림자로 안긴 저 사진 한 장은 덤앤덤덤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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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별로 놀라지 않으시겠으나 깜짝 놀랄 일이 내게 일어났다.

잘 우러난 사골국물을 맛있게 먹은 아침이었다.

사골 우러내는 고소함에 취해 잠든 식구들이 모처럼 다같이 일찍 일어났다.

넷이 둘러앉아 냠냠짭쨥 후루룩후루룩 맛있게 먹었는데.

내가 말이다, 국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반 백 년 인생 동안 국, 특히 파가 들어 국을 먹고 깔끔한 바닥을 본 일이 없다.

늘 최후까지 살아 남는 파. 

그렇다. 파를 못 먹는다. 어릴 적엔 아예 못 먹었다.

어른이 되어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씹지 않고 숨쉬지 않고 넘기는 것으로.

헌데 이날 아침 아무렇지 않게, 전혀 이물감 느끼지 않고 파와 밥을 함께 떠 먹었다.

다 먹고나서 깨달았다. 깜짝 놀랐다.

전자동으로 파와 파 사이를 비켜서 밥알만 뜨는 신공이 50여 년인데.

(태어나자마자 숟갈질 했다 치고)

흰밥과 초록파를 차별없이 뚝뚝 떠서 입에 넣고 냠냠짭짭 씹었다니!


엄마의 주제가 이런 데 차마 아이들에게 '편식하지 마라' 소리를 못한다.

아이들과 함께 밥 먹을 때 남은 파는 조용히 숟가락 아래 숨기는 신공을 발휘할 뿐이다.

내가 파를 아무렇지 않게 먹다니! 탄성을 지르고 싶었으나,

그러려면 그동안 파를 먹지 않았다는 고백을 먼저 해야 하니 꾹 참았다.

남편과 단둘이 있을 때 말했다.

"여보,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났어. 내가 아침에 파를 다 먹었어. 그것도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그냥!

당신 모르지? 내가 전에 부모님과 살 때부터 숟가락 밑에 파 감추고 그랬던 거"

"왜 몰라, 내가 먹어주기도 하고 그랬는데"

라고 말하지만 남편은 내게 일어난 이 어마어마한 일에 심드렁하다.


나 어쩌다 어른이 된 것 같다.

2017년 단풍이 곱게 물들어 가는 어느 가을 아침에,

나 사골국에 밥 말에 깨끗하게 배우고 어른이 되었다.

어쩌다 어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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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1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야라고 소개 받을 때가 있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에 얼른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무얼까. 친절한 사람, 합리적인 사람, 잘 돕는 사람, 이해심 많은 사람, 유연한 사람 등. 나는 어떤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 부를까 생각해보니 나를 있는 그대로 봐 주는 사람이다. 더 나아가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는 사람이다. 좋은 사람에 둘러싸인 삶은 행복하다. 위선적인 사람, 위협적인 사람, 비열한 사람, 자기중심적인 사람들과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산다면 불안이고 불행일 것이다. 좋은 사람들과 더 많이 만나고 싶고,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꿈속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좋다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그 사람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한 사람의 눈동자를 그렇게 오래 바라볼 수 있을까? 민망함도 두려움도 없이 오래오래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담긴 연민과 사랑을 잊을 수 없다. 말하지 않아도 내 생각을 다 알고, 이미 받아주는 듯한 그 눈빛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눈빛 교환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 또한 세상의 모든 따스함과 부드러움을 다 담은 소리이다. 그가 내게 말을 걸어온다. 내 대답을 기다린다. 재촉도 추궁도 없이 내가 준비되어 말할 때까지 기다린다. 내 말을 다 들은 후 말없이 자기 몸의 일부를 보여준다. 처참한 상처의 흔적이다. 놀란 내게 그 목소리가 말한다. ‘당신을 위한 사랑의 흔적입니다.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이렇듯 상처 입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를 옥죄던 사슬이 풀어졌다. 내 영혼을 꽁꽁 묶어 더 깊은 어둠으로 끌고 가던 그 사슬, 죄의 사슬이 말이다.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 어느 바닷가 거닐 때

그 갈릴리 오신 이 따르는 많은 무리를 보았네 (1)

 

그 사랑의 눈빛과 음성을 나는 잊을 수 없겠네

그 갈릴리 오신이 그때에 이 죄인을 향하여

못자국난 그 손과 옆구리 보이시면서 하는 말

네 지은 죄 사했다 하시니 나의 죄짐이 풀렸네 (2)

 

찬송가 134장은 나를 꿈꾸게 한다. 그리하여 2000년 전 갈릴리로 이끈다. 거기서 어떤 사람, 어떤 남자, 참 좋은 사람을 만난다. 그렇다. 예수님은 갈릴리 가난한 동네의 한 남자로 이 땅에 오셨다. 어떤 좋은 남자, 한 좋은 사람으로! 일상의 언어로 쓴 하나님 말씀이라 일컫는 유진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으로 그 사람예수를 읽어본다. ‘둘러앉은 사람들을 일일이 쳐다보며 말씀하셨다(3:34).’ ‘예수께서는 그들의 비정한 종교에 노하여, 그들의 눈을 하나씩 쳐다보셨다(3:5)’ 사람 예수님은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손으로 병자의 몸에 손을 대며 스킨십 하셨다. 그리하여 그분의 앞에 앉아 거짓 없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가르침 받은 사람들은 그 매력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메시지 속으로 들어간 나도,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찬송 가사에 잠긴 나도 그 매력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렇게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셨다. 역사 속으로, 역사를 통틀어 가장 좋은 사람으로 오셨다. 우리는 자주 사람의 몸을 입고오셨다고 말하면서 잠시 사람으로 둔갑하신 신화 속 예수님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사나운 바다를 향하여 잔잔하라고 명 했네

그 파도가 주 말씀 따라서 아주 잔잔케 되었네

 

그렇게 사람 좋은 예수님은 풍랑을 잠재우는 능력, 병을 고치는 치유력,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까지 보여주신다. 게다가 가난한 백성을 율법의 짐으로 옭아매는 종교 지도자들을 도통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눈 똑바로 뜨고 하실 말씀을 하셨다. 가난하고 천한 사람, 천하다 멸시받는 이방 여인까지 일일이 눈 맞추던 따스한 사람 예수님은 풍랑 앞에서, 종교 권력 앞에서 누구보다 강하고 물러섬 없는 사람이었다.

 

꿈이 아니다. 한 밤의 꿈일 수 없다. 그 만남은 꿈을 깨서 2017년 가을을 걷는 나의 일상에서 오히려 생생하다. ‘좋은 사람의 기준을 몸소 제시하셨기에 그에 따라 오늘을 살고자 한다. 갈릴리 사람처럼 살고자 하는 나의 오늘에 그분은 살아 계신다.


나 주께서 명하신 복음을 힘써 전하며 살 동안 그 갈릴리 오신 이 내 맘에 항상 계시기 원하네. 내가 영원히 사모할 주님 부드러운 그 모습을(통일 찬송가 번역) 곧 뵈옵고 그 후로부터 내 구주로 섬겼네(4)

 


< QTzine> 11월호





니어그램 내적여정의 마지막 과정인 영성과정 안내입니다.


나는 강한 사람이다.
나는 문제를 일이키지 않는 평화의 사람이다.
나는 올바른 사람이다.
나는 잘 돕는,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는 무엇이든 잘 해내는 유능한 사람이다.
나는 무엇인가 남과 다른, 고유한 사람이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 되고자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람이다.
나는 충직한 사람이다.
나는 유쾌하고 즐겁고 행복한 사람이다.


자아 이미지, 자아상이란 것을 우리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에니어그램 아홉 가지 유형도 각각 다른 자아상을 가지고 있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 자아상의 안경으로 타자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봅니다. 심지어 자아상은 우리가 그리는 하나님상을 만듭니다.


“하느님에 대한 일반적인 서구의 생각은 대개 산타클로스와 교통경찰이 합쳐진 것이다. 친절하고 관대한 늙은 괴짜노인, 하지만 교통위반자를 찾으려 눈을 크게 뜬 사람” - 윌리엄 그림 <엔도 슈사쿠의 실수, 우리의 잘못>

영성적 의미의 치유는 결국 왜곡된 하나님상의 치유입니다.

에니어그램 마지막 세미나 영성과정은 왜곡된 하나님상 치유와,

전에 해보지 않은 새로운 기도에 대한 안내입니다.

* 에니어그램 세미나 1단계 수강하신 분 신청할 수 있습니다.

[일시] 2017년 12월 20일(수) 오전 10:00 ~ 오후 5:00
[장소] 100주년기념교회 사회봉사관 5층
[참가비] 12만 원
[문의] 010-4235-8020 (수진 쌤)
[신청] 바로가기 클릭






여보, 당신은 앞으로 새로 산 이 통에 넣기만 해. 

음식 쓰레기 나오면 여기에 넣어. 쓰레기 봉지에 담고 치우는 건 내가 할게.

그냥 여기에 딱 버리고, 밑에 있는 음쓰 봉투에는 손대지 마. 알았지?


어머, 뭐야 뭐야. 아침부터 '꽃길만 걷게 해줄게' 영화 찍는 거? 나 사랑받는 여자야?



[나의 성소 싱크대 앞]의 저자가 이름 값 못하게 만드는 주방의 구조와 환경이었습니다. 

싱크대 앞에서 설거지를 할 때면

앞으로 자꾸 꼬꾸라지는 수전 때문에 쌓이는 스트레스로 지옥문이 열릴 지경이었지요.

좁은 주방, 보기 드문 오래된 낡은 싱크대이지만 옆으로 난 창문이 있기에,

그 창으로 멀리 불곡산이 보이고, 해질녘에는 노을빛이 쏟아지곤 하기에,

창틀에 작은 화분을 두고 키우는 맛으로 근근이 나의 성소 싱크대 앞을 유지하고 있는데

고정 안 되는 수전은 정말!


이렇게 손 대보고 저렇게 만져보던 남편이 '사람 불러야 돼' 하는 말도 집어 넣고 직접 해결했습니다.


'당신은 전문 연애강사도 아니고, 에니어그램 전문가도 아니고, 전업 작가도 아니고

일상 전문가야! 정신실은 일상 전문가!'

평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었으니 일상 전문가의 주요 연구실 환경의 열악함에 적잖이 신경이 쓰였을 테고.

손수 수전을 갈아 끼우더니 불편한 쓰레기통도 개비, 음식쓰레기 처리 방식도 바꿔놓았습니다.

그렇게 며칠 주방환경 정비에 혼신을 다하더니 급기야 오늘 아침의 감동 발언입니다.

[나의 성소 싱크대 앞] 저자의 자격 있는 남편 같으니라구!



여보, 당신은 앞으로 새로 산 이 통에 넣기만 해. 

음식 쓰레기 나오면 여기에 넣어. 쓰레기 봉지에 담고 치우는 건 내가 할게.

그냥 여기에 딱 버리고, 밑에 있는 음쓰 봉투에는 손대지 마. 알았지?


어머, 아침부터 '꽃길만 걷게 해줄게' 영화 찍어? 

나 당신의 애기! 나 사랑받는 당신의 애기! 아, 나는 사랑 받는 여자!

(감동감동, 황홀황홀)


뭔소리야. 당신이 음쓰 봉투에 손대면 여기저기 묻히고 더러워져서 안 되겠어. 

(손으론 부지런히 쓰레기 정리하는 중)

(버럭) 아놔, 진짜 이거 누가 재활용 분류 안 하고 여기다 넣었어. 당신이야? 진짜, 정신실.

앞으로 음쓰 봉투에 절대 손대지 마.


야! 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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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단계가 예정되었던 토요일이었습니다. 고심 끝에 취소했지요. 말끔한 마음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생긴 휴일이니 한결 더 여유로운 토요일이 되었습니다. 몇 가지 일과 더불어 꼭 산책을 해야겠다, 산책 하다 어느 벤치와 눈이 맞으면 거기 앉아 책이나 한 권 끝내야지 싶었지요. 고급인력 조교인 수진 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대형사고가 터졌다구요.


세미나 취소된 걸 모르시고 한 선생님이 포항에서 오신 것입니다. 착오와 착오가 교차하며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한 번 신청으로 영성과정 신청까지 다 된 걸로 아셨고, 취소 문자는 신청하신 분께만 보내드렸으니까요. 게다가 페이스북도 안 하시니 통 소식을 모르셨던 거지요.


마포도 아니고, 포천도 아니고, 포항에서 오셨어요. 이걸 어쩌나! 두 시간만 기다려 주십사 하고 일단 준비하고 튀어 나갔습니다. 명동에서 뵙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죄송하고, 점심식사라도 대접해야지 싶었습니다. 반갑게 만났습니다. 명동에 오셨으니 명동칼국수 어떠시냐고 제안했습니다. 16년 미국생활에 한국 들어오신지 3년 지나는 동안 명동에 처음이시라구요. 미국에 계실 때 비오는 날에 명동칼국수 생각이 났었다네요. 뭔가 시작부터 좋았습니다.


식사하고 한 사발 가득 라떼 마시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 나눴습니다. 제 책 <커피 한 잔과 함께 하는 에니어그램>을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하여 읽으셨다구요. 읽으신 후에 저자를 직접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드셨다네요. 책으로나 만나지 저자를 직접 만나고 싶은 생각은 처음 드셨다고 합니다. 5유형이십니다. 직접 만날 기회가 있어도 부러 피하실 분들이죠. 글로 만나는 게 제일 편하신 분들 ^^ 책을 읽고 쓴 사람이 궁금해졌다는 것, 그 누구도 아닌 5유형의 말이니 제가 많이 고무되었습니다.


여하튼 그러다 검색하여 세미나를 발견하셨고, 지난 번 1단계에 참석하셨었죠. 이번에는 세미나 시작 전에 도착하시고자 하루 전날 올라와서 주무셨다는군요. 여하튼 결론은, 5유형이 시도하기에는 정말 어려운 일(특별한 주제 없이 직.접. 만나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선생님께는 물론이고 제게도 꼭 필요한 시간이었습니다.


내적여정, 영성에 관해 공부하면서 (이전에도 있었던 일이겠지요) 틀어진 계획으로 인해 꼭 필요한 강의를 듣게 되고, 꼭 만나야 할 도반들을 만난 경험이 많습니다. 꼭 듣고 싶은 강의가 인원 미달로 취소되었다 하여 낙심하고 돌아선 적이 있었어요. 몇 년 후에 전혀 다른 곳에서 개설된 강의를 찾았지요. 정말 좋은 배움이었고, 만남이 깊어져 스승님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한참 뒤에 얘기 나누다 보니 몇 년 전에 취소되어 놓친 그 강의의 강사이셨어요.


오늘 꼭 이렇게 만났어야 했구나! 싶었습니다. 강의 취소로 10여 분들께 아쉬움을 드렸지만 단 한 분과 얼굴과 얼굴로 만나야 했던 모양입니다. 적잖은 위로와 기쁨이 있는 만남이었습니다. 값지고 신비롭습니다. "취소되고 착오가 일어난 데는 다 뜻이 있었네, 하나님 뜻이 있었네" 라고 말하면 쉬운데 저의 큰 아이의 시니컬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요. "아우 참, 정말. 아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왜 모든 걸 다 그렇게 말해? 뭐든지 다 하나님의 뜻이야? " (얘도 교회는 다닙니다.)


산책 따위! 산 책(alive book)인 사람,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마주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참으로 신비로운 대형사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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