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니어그램 세미나에 관한 내용은 페이스북 페이지 [상처 입은 치유자들]을 통해 소통하고 있으나

한 개 더 애정하는 블로그 고객님들께도 페이지에 올린 글 그대로 복사하여 알려드립니다. 



신청하신 분들께만 말씀 드리고 스리슬쩍 넘어가려 했는데, 공지로 알려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하반기 예정되었던 2단계, 심화1, 심화2과정 세미나를 취소하게 되었습니다. 미리 신청하시고 마음과 함께 시간을 비워두고 기다리셨던 분들, 죄송합니다. 특히 코앞의 2단계를 기다리시던 분들께는 더욱이요. 개별 문자에는 인원이 적어서 취소했다고 했는데 실은 단지 인원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다섯 분 신청해주셨는데 개설하고도 남을 인원이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두 분, 세 분을 앉혀 놓고도 (심지어 한 분도 해봤어요) 하루가 걸리는 에니어그램 1단계 설명을 수도 없이 해봤습니다.


인원은 핑계일 뿐, 저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 에너지가 고갈된 탓입니다. 가끔들 그러시잖아요. 감기같이 찾아오는 무기력과 ‘아이고 의미 없다’, 무의미 병에 걸리시곤 하시죠? 저도 그러네요. 돌이켜보니 에니어그램 지도자과정 공부한지 만 10년입니다. 불혹의 40을 앞두고 일...찍 찾아온 중년 병에 한참 늦은 영적 사춘기가 겹쳐 2년 정도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난 끝이었습니다. 나도 싫고, (멀쩡히 살다 뒤늦게 목사가 된)남편도 싫고, 아이들도 거추장스럽고, 무엇보다 교회가 제일 싫었습니다. 그때 소가 뒷걸음질 치다 개구리 잡는 격으로 우연히 만난 에니어그램이었고, 그로부터 몇 년(아니 지금까지 10년) 정말 에니그램과 내적여정, 영성공부에 미쳐 살았습니다.


요즘 슬슬 드러나는 증상이 12년 전 무기력 병과 비슷하네요. 50 지천명의 고개 앞에 서서, 하늘의 뜻을 깨닫는 숙제를 받아든 탓인가 봅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말씀을 빌면 ‘황폐한 마음’의 계절이 온 것 같기도 하고요. 마음의 움직임을 황폐함(desolation)/위안(consolation)으로 구별하여 자신의 마음 상태를 깨어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다. 황폐함의 상태는 그 자체로 좋고 나쁨이 아닙니다. 위안이 넘치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듯 황폐함이라고 늘 부정적인 것은 아니지요. 황폐한 마음상태로 에너지를 많이 쏟아야 하는 에니어그램 집단여정을 이끄는 것은 좋지 않겠다는 생각에 고심 끝에 결정했습니다.


2단계 신청하신 다섯 분의 성함을 들여다보고 오래 고민 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1단계를 들으신 분도 계시고, 수강료를 우해 알바비 열심 모으는 대학생도 있고, 각각 사연과 목마름은 우주과 같을 것임을 알기에 너무도 죄송합니다. 취소를 결정하고 메시지를 드리고 나니 혹시 취소자 없냐며, 티오를 묻는 문의가 이어집니다. 결국 수강인원은 다 채워질 상황이었으니, 제 마음이 더욱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실은 힘을 얻는 것은 심화과정에서 언급하는 앤소니 드 맬로 신부님 책의 이 한마디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내가 도우려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절대, 절대로, 내가 여러분 누구에게라도 도움이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마십시오. 만일 도움을 받는다면 여러분이 그러는 겁니다. 진실로 여러분이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실은 저도 수없이 다양한 강의를 하고, 에니어그램 세미나를 이끌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아, 준비된 학생에게만 선생이 존재하는구나. 내가 1이라도 가르쳐 전할 수 있는 것은 들을 준비된 분, 오직 듣고 스스로 도울 힘이 있는 분이 있기 때문이구나.


무엇보다 여러분 안의 목마름이 더딘 시간을 지나며 구원으로 이끌 것을 믿습니다. 하루 띡 듣고 마는 내적여젓 세미나가 아니라 의식성찰 일기를 쓰고, 쓰다 답답해 포기하고, 다시 질문을 던지고, 영적 독서를 하고, 도통 모르겠는 채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여정 속에서 참된 배움이 있을 것임을 저는 압니다. (해봐서 압니다) 2단계와 심화 1.2 과정은 내년 상반기에 다시 열도록 하겠습니다. 2017 12월 20일(수) 예정된 영성과정(장소는 합정동 100주년기념교회 사회봉사관)은 그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신청링크 : http://bit.ly/2vJI8Su)


내적여정 강의의 마침표를 찍을 영성과정에서는 거짓자아가 궁극적으로 가로막고 있는 관계를 다루게 됩니다. 하나님께조차 유형의 포장지를 나갈 수밖에 없는 우리, 우리 안에 있는 왜곡된 하나님 상을 찾아보는 시간이 될 것이고요. 1단계부터 수도 없이 질문하셨던 ‘그래서 어쩌라구!(내 성격이 거짓자아라면? 어릴 적에 이미 형성되어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가듯 죽는 날까지 벗을 수가 없다면? 그것이 하나님 사랑이라는 과녁을 벗어난 죄라면? 쓸 수도 벗을 수도 없는 성격의 가면을 도대체 어쩌라구?’)에 대한 답을 기도, 향심기도(Centering Prayer)로 드립니다. 향심기도에 대한 안내와 실습으로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특히 이번 영성과정은 1단계만 들으신 분께도 열어두고 함께 하겠습니다. 2단계와 심화과정 듣지 않으신 분들도 신청해주세요.  긴 글이 되었네요.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씀 드리며, 늘 기도 속에서 여정의 동반자이신 여러분을 품도록 하겠습니다.



"언니, 서울역이서 만나"


86세 이모가 93세 엄마에게 말했다. 사랑 깊은 자매가 그리움 가득 안고 서울역에서 만난다? 특별할 것 없는 설렘이겠으나 실현 불가, 환상 같은 일이다. 그래서 눈물 겹도록 황당하다. 93세 엄마는 타인의 도움 없이 현관 출입도 못하신다. 86세 이모는 그 연세에 건강하고 씩씩하여 엄마 생신 때마다 버스 타고, 기차 타고, 지하철 타고 충청도 공주에서 김포까지 찾아 오셨었다. 등에는 콩, 고추 같은 선물 가득 짊어지고 말이다. 이제 그 이모의 기동력조차 쇠했다. 혼자 김포까지 언감생심 꿈도 못 꾸신다. 엄마는 침대에 누워, 이모는 공주의 쓸쓸한 집 안방에서 전화로 안부를 묻고, 기도제목을 나누며 눈물짓는 일상이다.


엄마를 모시고 있는 동생이 '언니, 서울역이서 만나' 자매의 눈물겨운 통화 내용을 듣고 명절 끝에 93세 엄마를 모시고 공주에 다녀왔다. 허리 아파서 긴 시간 차 탈 수 없다는 엄마를 설득하고 설득하여 모시고 내려갔다. 마지막 만남이 아니겠냐며.


"느이 엄마는 나한티 언니가 아니라 엄마여. 언니라고 헐 수가 옶어" 이모는 늘 그렇게 말씀하신다. 엄마는 평생 신산한 삶을 사는 이모를 떠올릴 때마다 "너머 불쌍허다. 너머 불쌍혀' 하며 눈물짓는다. 93세 이모와 86세 이모의 눈물 없는 만남은 이땅이 아닌 천국, 그곳이 더 가까운 실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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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 잡지 청탁으로 급하게 쓴 글인데 편집 과정에 불편한 일이 있어서 '싣지 않겠다' 강짜를 부렸습니다.

(보기보다 성질 있어요) 여기,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싣는 걸로!



아흔을 넘긴 친정엄마는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신다. 돋보기 끼고도 글을 읽지 못하고, 작은 소리는 잘 듣지 못하며, 간간이 용변 문제로 어려움을 겪으신다. 그나마 느리게 쇠락해가는 것이 이 아닌가 싶어 엄마의 말을 붙들고 싶다. 물론 말수는 많이 줄었고 말투는 많이 어눌하다. 흔히 노인들을 묘사할 때 총기는 여전하시다, 라고 할 때의 그 총기, 반짝임이 묻어나는 엄마의 말이 있다. ‘고맙다, 복 받어라.’ 언제부턴가 엄마와의 대화에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이다. 전화 할 때는 끊어대신 고맙다, 복 받아라인사 하신다. 마주 앉아 하는 대화가 끊어질 때마다 그 침묵의 여백을 채우는 엄마의 말은 역시 고맙다, 복 받아라이다. 이제 이것은 아들 딸 손주들에게 엄마(할머니)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아이들은 그려, 고마워, 복 받어라.’ 외할머니의 사투리를 흉내 내며 자주 못 뵙는 할머니를 기억하곤 한다.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기는 엄마소리 하나로 모든 감정, 모든 요구를 다 표현한다. 배고플 때 부르는 엄마다르고, 두려울 때 다르고, 기쁨을 표현할 때 다르다. 마찬가지로 노모에게 남은 몇 마디 또한 상황에 따라 뉘앙스가 다르다. ‘고마워, 복 받어역시 자세히 들어보면 단 하나의 뜻이 아니다. 식사 잘 하시고 기운이 좋을 때, 당신 좋아하는 간식을 사들고 가면 주름 가득에 생기까지 가득한 얼굴로 고맙다, 복 받아라하신다. 구루모(영양크림) 떨어진 것 사오라는 심부름을 해드리고 바빠 죽겠는데.....’라며 생색이라도 낼라치면 살짝 삐쳐서 영혼 없이 던지는 고맙다, 복 받아라.’ 어떤 뉘앙스가 됐든 기본설정은 무력함인 것을 안다. 조금씩 무너지는 육신으로 자녀들에게 짐이 될 뿐 해줄 것은 말로 복을 빌어주는 것 외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고맙다는 말은 때로 미안하다로 들린다. 아주 가끔은 너무 오래 살어서 자식들 고생이다. 미안하다.’ 하시기도 하는데 고맙다, 복 받어라와 다르게 들리질 않는다.

 

한 계절을 보내고 오는 계절을 맞는, 계절의 고개를 넘는 것이 노구의 엄마에겐 힘겨운 일인가보다. 여름 끝 가을을 부르는 찬바람과 함께 엄마의 몸도 서늘해져 푹 꺾어졌다. 장에 탈이 나서 배변 조절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엄마의 늘어진 살과 긴장감 없이 흔들리는 근육은 볼 때마다 안쓰럽다. 긴장이 풀린 살과 근육은 엄마를 괴롭히고, 모시는 자녀들에게 짐을 안긴다. 수 년 전 고관절 수술 후 처음 간병하던 밤을 잊을 수 없다. ‘미안하다, 내가 얼른 회복혀야지, 미안혀서 어쩌냐하시며 당신의 무력한 몸을 그렇게나 부끄러워 하셨었다. 그 후로 적어도 기본적인 신변처리만큼은 스스로 하시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자녀들에게 짐이 되는 미안한 몸이 되지 않게 위해서였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시간이 온다. 생명력 빠져나간 근육에 의식의 온기를 쏟아 부어도 더는 조절이 불가능하여 아기처럼 기저귀(, 이 얼마나 불경스러운 단어란 말인가)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천 갈래 만 갈래 갈라지는 마음이지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엄마를 찾았다. 드실 수 있는 간식도, 필요한 것도 없으시니 엄마를 위해 들고 갈 것이 없다. 엄마의 미안한 몸을 지고 망가진 일상을 사는 동생 부부를 위해 장을 본 것으로 허전한 손을 채운다. 오랜만에 보는 딸과 사위를 맞는 엄마의 시선이 텅 비어있다. 반가운 웃음도, 사위를 볼 때마다 짓는 수줍은 미소도 없다. 엄마의 텅 빈 시선이 따라잡을 수가 없다. 마치 몸만 여기 두고 의식과 함께 어딘가로 유랑을 떠나 있는 듯. 용변을 처리를 해야 하는 순간, ‘어머니, 이쪽이요. , 됐어요. 이제 똑바로요. , 다리 드세요며느리 손에 내어맡긴 몸이 기계처럼 착착 반응한다. 수 년 전, 처음으로 당신 몸의 통제력을 잃으셨던 그때 끊임없이 미안하다, 고맙다, 아이구 미안하다.’ 어쩔 줄 모르던 태도는 찾아볼 수 없다. 체념, 그렇다 체념이다. 미안한 몸조차 체념하고 비워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텅 빈 시선은 비워서 텅 빈 마음인가보다.

 

엄마를 뵙고 돌아오는 길 생각해보니 고맙다, 복 받어라주문 같은 이 소리를 듣지 못했다. 어떤 뉘앙스를 풍기든 엄마의 이 말이 참 좋았다. 여기 담긴 무력한 사랑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한때 직장 다니는 딸을 대신하여 손주를 키우고, 수십 포기 김장을 척척하여 나누고, 오징어 껍질 새하얗게 벗겨 맛있는 초무침을 만들어 나를 감동시킨 엄마. 내게 흘러들던 엄마의 사랑. 복을 빌어주는 기도 뿐 아니라 이렇듯 실제로 도움이 되었기에 더욱 고마웠던 엄마의 희생과 사랑이다. 더는 엄마의 김치를 먹을 수 없고, 더는 엄마가 만든 환상적인 맛의 오징어 초무침을 맛볼 수 없지만, 그래서 마음 한 구석이 시리지만 서서히 힘을 내려놓는 엄마의 노년이 아름답게 다가왔다. 이제 더욱 무너진 육체로 인해서, 더불어 내려앉은 마지막 자존심으로 인해 고맙다, 복 받어라는 말조차 내놓지 못하시지만 내겐 아프도록 아름다운 사랑이다. 더는 줄 것이 없고, 짐만 될 뿐이며, 받기만 하는 당신의 삶이 곤혹스럽겠으나 엄마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하는 CF의 대사가 있지만 사랑은, 적어도 사랑의 모양은 한없이 변한다. 씻기고 먹이고 입히며 돌보는 것이 사랑인 시절이 있는가 하면(내가 세상에 처음 왔을 때 엄마는 나를 그렇게 사랑해주었다.) 씻김을 당하고 입힘을 당하고 돌봄을 당하는 사랑이 있다. 처음 기저귀를 하신 엄마는 아들 며느리를 돕겠다는 뜻으로 혼자 해보겠다 이런 저런 시도를 하셨나보다. 그러다 일이 더 커져 며느리의 수고가 더해지곤 했다. ‘어머니, 가만히만 계시면 힘들지 않아요.’ 이 말을 수차례 들으신 후에야 비로소 스스로 뭐라도 해보겠다는 힘을 내려놓으셨다. 그리고는 착착 움직이는 기계가 되신 것이다. ‘어머니, 다리 드세요. 똑바로 누우세요.’ 사소한 말에도 전적으로 따라주는 것이 노년의 엄마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다. 인생의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은 몸으로서 무너지는 자존심이야 끝이 없을지라도 받아들이는 것. 텅 빈 시선으로 조금 도망치더라도 이 무력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내어맡기는 것이 자녀에게 주는 마지막 사랑일지 모른다.

 

엄마의 오늘은 나의 내일이기에 나 역시 새로운 사랑을 예습해야지 싶다. 책의 작은 글씨들이 뭉개져 보이기에 눈에 뭐가 끼었나, 자꾸 비볐는데 다름 아닌 노안이다. 중년에 접어들어 전에 없는 몸의 변화를 겪는 친구들은 운동 열심히 해서 건강을 지켜야 한다고 한다. 늙어서 자식들에게 폐 끼치지 않기 위해선 이런 전런 준비를 해둬야 한다며 주먹을 불끈 쥔다. 운동도 해야 하고 좋은 것도 먹어야 하지만 불끈 쥔 주먹을 풀고 타인에게 기대는 법을 배워야 할 때는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아무리 힘을 줘도 더는 힘이 들어가지 않을 근육으로 어쩔 수 없는 몸을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날이 있을 것이다. 엄마의 미안하고 무력한 육체가 내게 가르쳐준 것이다. 이런 노년의 어느 날? 더 상상하기 싫을 만큼 끔찍하지만 인간의 길이라면 받아들여야겠지. 육체는 포기하되 사랑만큼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엄마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엄마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인간에게 사랑이 끝나는 날은 자궁이라는 무덤, 무덤이라는 자궁으로 가는 그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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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갈이 시점은 어떤 변곡점이다.

무성한 잎을 보아하니 보이지 않는 뿌리가 숨 쉴 공간이 부족하겠네,

생각하며 화분을 갈아줘야지 싶어도 쉽게 되질 않는다.

분갈이 할 시간이 없거나, 갈아줄 더 큰 화분이 없거나.


2000원 짜리 두 개(어쩌면 세 개)를 사서 주먹만 한 화분에 심어 키운 스파트필름이다.

몇 차례 분갈이 하며 몇 년을 지났다.

뭔가 꽉 찬 느낌이라 갑갑해 보여 신경 쓰이고 미안했지만 마땅한 화분도 없고, 시간도 없고.

개국 이래 최장 휴일이라는 2017년 추석이라 시간이 많아졌다.

어머니 모시고 율동공원 나들이 다녀 오는데 집앞 나무 사이에 멀쩡한 키다리 화분이 서 있다.

'제 아이를 부탁합니다. 사랑으로 돌봐주세요' 누군가 놓고간 아기 같이 말이다.

냉큼 주워 와 분갈이 작업을 했다.

언니가 더는 못 입는 옷을 동생이 물려받고, 도미노처럼 그 다음 동생도 득템하는 형국이다.

빈 화분을 그 다음 큰 아이가 차지하고, 그래서 생긴 자리에는 또 다른 녀석이 심겨진다. 

아침에 걸레질까지 해놓은 거실은 흙대밭(?)이 되고....... 

그리하여 작은 옷을 입고 숨도 못 쉬던 스파트필름은 화분 서열 2위로 등극하였다.

1위인 벤자민이 사춘기 지나 키 다 큰 성인으로 입양된 놈이니,

실질적으로 1위라 해도 무색하지 않다.


비좁은 거실에 어디 둘 데도 없지만 없는 공간 만들어내는 재능을 타고난 엄마 덕에 좋은 자리까지 잡았다.

해질녘이면 붉은 저녁 햇살이 깊숙하게 들어오는 길, 

노트북 앞에 앉은 엄마의 눈길이 가장 많이 닿는 명당자리이다.

한 잎 한 잎 물로 닦아주고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눈을 뗄 수가 없다.

에고 이뻐라, 에고 이뻐라. 주먹만 한 화분에서 어찌 이렇게 자랐는가, 기특하기도 하여라.

혼자 간직할 수 없는 감동에 이 녀석 자랄 동안 물 한 번 주지 않았던 김종필 아빠에게 강요한다.

"여보, 얘 좀 봐줘. 큰 박수가 필요합니다! 박수 쳐! 세게 쳐!" 


성.장.

가끔 사람들이 궁금해서 물어오는 질문, 나도 내가 왜 그럴까 생각해 보는 나에 대해 이 단어를 찾았다.

성장하고 싶은 욕구, 욕구가 지나쳐 집착이 되고 이것은 결국 중독이 아닐까 싶은 열정이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꾸준히 쓰는 열정, 나답게 강의하기 위해 배우고 공부하는 열정.

내 마음 그대로 투사가 되어 꾸준히 자라는 식물이 예뻐도 너무 예쁘다.

사람에게도 투사가 되어 성장하는 사람은 다 예쁘다.

이미 훌륭하여 더 자랄 것도, 배워야 할 것도 없다는 사람과는 친해지고 싶지 않다.


감.사.

말 없는 식물에게서 감사의 태도를 느낀다.

이것도 역시 내 마음을 비춘 감정이지만 말이다.

아이들 어릴 적에 많이 불러줬던 노래, 정말 귀여운 노래인데 부르다 자주 울컥했던 노래가 있다.


포도밭에 포도가 땡글땡글 땡글땡글땡글땡글 잘도 열렸네

자기 혼자 컸을까 아니 아니죠 정말 혼자 컸을까 아니 아니죠

위에 계신 하나님이 키워주셨죠


우리 아이들 어릴 적에는 물론이고 주일학교 찬양 선생님 할 때도 많이 불렀다.

'가사 바꿔 부르기'로 사과, 배추, 호박, 고추, 딸기.......에 의태어까지 바꿔서 참 재밌게도 불렀다.

어떻게 가사를 바꾸든 '자기 혼자 컸을까 아니아니죠'에선 늘 은혜를 받았다.

누워서 빽빽 울던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사람 되기까지,

오늘의 내가 이나마 사람 구실 하면서 살기까지,

나 혼자 크질 않았다. 얼마나 많은 선생님들이 계셨는가.

위에 계신 하나님이 연결해주신 수많은 사람들이 내 말을 들어주고, 자기의 것을 나눠주며

지금 여기의 내가 있다.


공들여 키우는 창가 책꽂이 위의 화분 중에는 그런 놈이 없다.

자라지 않는 놈, 제 혼자 큰 줄 아는 녀석은 없다.

사람은 너나 없이 제 혼자 이룬 줄 알기에 감사치 않는다.

쑥 자라 어른이 된 화초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아침 저녁으로 보듬은 나의 공을 생각하고,

나 몰래 내게 사랑과 인내를 베푼 수많은 손길과 공로를 상상해본다.

감사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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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제목을 스토리에 맞게 바르게 고쳐 쓰시오. (정답 : 기억을 틀리다)


원제 <The Sense of an Ending>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우리말 제목이 되었다. '혹시 내게도 저런 치명적인 기억의 오류가 있진 않을까?' 막 더듬어보게 하는 영화이다. 극장을 나서는(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는) 관객(독자)의 머릿속에 '기억'이란 두 글자가 포인트 40으로 새겨질 것을 예상한 원저자가 더 멀리 던지는 화두일지도 모른다. 'The Sense of an Ending'은. "바보 관객들아, 기억 얘기가 아니야!" 기억의 왜곡으로 인한 충격적 반전으로 사람 놀래켜 놓고선 '기억'이 아니라 '예감'의 문제라고? 아무튼 나는 원제목(동명 소설)과 번역된 제목 둘 다 마음에 든다. 한참 전에 예고편과 함께 무엇보다 제목에 끌려 목록에 담아 둔 영화이다. 결국 영화 속에선 예감은 있었으나 기억은 틀렸다. 예감은 그러니까 결말에 대한 예고는 영화 곳곳에(원작인 소설에선 더더욱 정교하게) 흩뿌려져 있다. 다만 그것을 읽어낼 감각이 없어서 결말에 관해 잘못 짚은 것이다. '잘못 짚은'의 주어는 주인공이고 '나'이며 또한 우리이다. 말하자면 뿌린 대로 거두게 되는 인생에서 제가 무엇을 뿌렸는지 모르기에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짚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독(毒)을 뿌려놓고 선(善)을 뿌렸다고 착각할 수 있음이다. 착각점이 정확히 (기억의) 왜곡점이다.


친할 뿐 아니라 선망하던 친구 아드리안이 헤어진 여자 친구 베로니카와 사귄다는 소식을 듣는다. 친구 아드리안이 직접 편지로 알려온다. 주인공은 '그러든지 말든지'라는 식의 엽서를 보냈다고 기억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영화의 반전이다. 지질하게 비아냥거리고 저주를 퍼붓는 내용을 주절주절 써서 답장을 보낸 것이다. 노년이 된 토니. 베로니카 엄마의 유언장이 등장하며 자연스레 수십 년 전 애정사를 복기하게 된다. 물론 추억 속 그녀 베로니카를 만나게 된다. 추억(기억)을 더듬고, 사실(나 아닌 상대의 기억)을 확인한다. 알고 보니 편지에 담은 저주처럼 친구 아드리안은 여친의 엄마와 섹스를 하고, 그리하여 여친의 동생을 낳았고, 그 때문인지 어쩐지 친구는 자살하고 말았다. 그런데 주인공은 토니는 평생 쿨하게 보낸 엽서의 기억만 가지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틀린 기억을 가진 주인공은 그 일과 무관하게 무난하게 살아왔고, 그가 잊은 기억을 사실(현실)로 살아야 했던 여자 친구는 미스터리에 가까운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추측된다). 고교시절 전학생 아드리안이 수업 시간에 했던 인상 깊은 말들이 고스란히 영화의 명대사로 남고, 결말에 대한 예감이다.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패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죠." 


영화든 현실이든, 영화같은 현실이든 갈등은 뿌린 것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튀우는 싹이다. 잘 짜여진 화에서는 반전이 있고 다소 충격적인 볼 만한 이야기가 되지만, 현실의 왜곡된 기억과 파괴적인 결과는 흔하디 흔하며 고통이다. 불편한 관계 풀자고 만난 자리에서 이런 대화는 얼마나 흔한가. 난 정말 그런 뜻이 아니었어, 그걸 그렇게 이해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 아니야, 너가 정말 그렇게 말했어, 내가 정말 그랬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난 그렇게 말한 적이 없어. 무슨 소리야 내 귀로 똑똑히 들었는데. 어린 시절 상처받은 기억으로 오래 아파하다 '미안하다' 한 마디 듣고 싶어 용기를 내는 딸들을 안다. 엄마,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 어린 애한테 어떻게 그런 일을 시킬 수 있어? 어저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어? 과연 사과의 말을 들을 수 있을까? 미안하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었어. 그땐 엄마도 어렸단다. 정말 미안해. 엄마를 용서해주겠니? 라고 말해주는 엄마가 얼마나 될 것인가. 나는 그런 적이 없다.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이제 와서 트집이다. 나는 너를 사랑해서, 사랑 밖에 준 것이 없다. 더 큰 상처로 끝나지 않으면 다행이다. 차라리 내 기억을 수정하는 것이 그 사람과 화해하는 유일한 길인지 모른다. 


주인공 토니는 어쩌다 그런 (너무도 단순하여) 치명적인 왜곡된 기억을 가지게 되는가? 이 질문 끝에 영화 <윈터 슬립>이 생각났다. 착하고, 이웃에게 해 끼치지 않고, 도덕적으로 올바르다는 면에서 두 주인공이 크게 다르지 않다. 윈터슬립의 주인공 아이딘이 가진 것이 많아서인지 더 견고한 자기의(義)의 성을 쌓은 것 같기도. 토니는 그다지 나쁠 것 없는 사람, 충실한 사람이다. 임신한 (싱글맘) 딸의 출산교실에 함께 가주고,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불평 없이 하는 사람, 이혼했을 망정 전부인과도 그럭저럭 잘 지낸다. 그런데 딸과 부인의 입장에선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지금 내 앞에서 내게 일어나는 일이 가장 중요한 흔하디 흔한 자기 몰입의 사람이다. 고등학생, 대학생 때도 그랬을 것이다. 올바르고 친절하고 다소 소심하게 살지만 나무랄 것 없는 삶이기에 더욱 반성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자기 바운더리 안에서 착하고 충실하지만 아침마다 만나는 집배원에게 보통의 사무적인 친절 그 이상을 베풀 줄 모르는 사람이다. 영화 마지막에 집배원을 향해 말 한 마디 건네게 되는 변화는 전부인에게 사과하는 장면보다 더 큰 회심이라고 나는 느꼈다. 그의 독백처럼 그는 '승자도 패자도 아닌 상처를 기피하며 그것을 생존능력이라 부르는 사람'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승자도 패자도,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니라 오직 상처받지 않기 위해 기억 위에 색을 칠하고, 덧칠하며 생존을 유지할 뿐이다. 


내적 성장을 위한 에니어그램 여정을 이끌며 '기억의 치유' 없이 성장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기억이 사실이서가 아니다. 기억은 경험 그 자체가 아니다. 경험을 해석하는 방식이 문제이다. 해석의 틀에 갇힌 있는 그대로의 경험을 찾아보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 틀, 어떤 경험도 묽은 밀가루 반죽으로 해체시켜 부어버리는 자기만의 붕어빵 틀을 발견해야 하는 문제이다. '기억도 그렇습니다. 옛날 일이라는 것은 벌써 지나가버렸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바꾼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실은 당신이 과거의 사건을 회상할 그때그때마다 당신의 과거는 개정판으로 다시 쓰이는 것입니다' 라는 우치다 타츠루의 통찰에 동의한다. 성장한다는 것은 나의 이야기를 다른 관점으로, 그야말로 개정판으로 다시 써가는 일이다. 토니가 자신의 왜곡된 기억을 확인하고 베로니카에게, 전 부인에게 진심의 사과를 건넬 수 있었을 때, 그의 일상이 달라졌다. 저주의 편지를 썼던 행위 자체만이 아니라 자기중심성의 기억으로 살아온 존재 자체에 대한 회한일 것이다. 참된 자기성찰은 자기혐오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이해와 수용으로 향함을 안다. 내 붕어빵 틀이 이토록 터무니없이 확고하다면 당신이 찍어내는 기억의 붕어빵 역시 견고한 고유함이리라. 내가 모르는 아픔과 기쁨이 담긴 화석 같은 것이리라. 당신도 나처럼 상처를 피하기 위해 한 조각 기억을 붙들고 그 위에 색칠하고 덧칠하며 살고 있구나. 황혼을 사는 토니 일상의 작은 변화, 집배원에게 건네는 커피 한 잔이 내게는 참 좋았다. 그 변화가 참 좋았다.  





토요일 오전 10시 30분.

주중 피로를 풀기 위해 늦잠을 자거나, 아니라면 그에 준하는 여유를 누려야 할 공식 ‘잉여의 시간’.

이 시간 교회 청년들과 ‘커피&메시지’란 이름으로 핸드드립 커피와 함께 메시지 성경 읽기 시간을 갖는다.

맛있는 커피가 있고, 이야기처럼 읽히는 메시지 성경이 있다.

무엇보다 '자발'적 모임이다. 공식적인 인도는 내가 한다.

‘목사님, 저희 성경공부 해주세요. 토요일에 목사님 설교준비로 바쁘시면 사모님이 해주셔도....’라는 청년들의 요청이었다. 아하하, 사모님을 원하는구나! 직관적으로 느꼈고. 목사님은 주일 설교 덕분에 ‘가오’는 챙겼으니 됐고.

커피, 이야기 책 같은 성경, 자발성이 있고, 없는 것은 강압.

매주 진도가 있지만 다 읽어오지 않아도 된다.

일이 있거나 늦잠을 잤을 시에 빠질 자유가 있다.

일주일 내내 이런저런 강의와 소그룹 상담을 이끄는 내게도 가장 편한 모임이다.

애써 준비할 것도 없이 가서 커피나 내리고 듣는다.

마음껏 문제제기 하고 의문을 품으며 함께 답을 찾아간다.

별다른 준비는 없어도 은혜가 없는 시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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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0

 


 

아무렇지 않았던 여자(남자)의 신상이 갑자기 궁금해졌다면 내 쪽에서 막 켜지기 시작한 그린라이트인 경우가 많다. 알고 싶어 하는 것, 더욱 자세한 내용이 듣고 싶다고 몸을 바짝 기울이는 것은 호감의 표현이다. “너에 대해 알고 싶어.” 이것은 사랑의 그린라이트이다. 알고 싶고, 더 잘 듣고 싶어 다가가게 되는 것, 혼자 있을 때도 어느 새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린라이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반면 알았어. 알겠다고!”하는 말은 그에 반하는 뉘앙스이다. 대화나 관계의 단절을 알리는 사인에 가깝다. 누군가에게,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는 궁금하지 않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말엔 가능성이 느껴지나 네가 말하는 거 다 알겠어.’라며 쌩 돌아선 사람은 다시 와 내 말에 귀 기울일 것 같지가 않다. 오래 사랑을 지키고 싶다면 여전히 너를 모르겠어. 네 얘기를 들려줘.’ 신비로 남겨두는 법을 배워야 한다. ‘확실히 알겠어!’ 이 얼마나 교만에 찬 위험인가.

 

아 하나님의 은혜로시작하는 찬송가 310장은 강렬한 메타포를 가진 찬송 중 하나이다. 누구나 한 번 쯤은 뜨겁게 불러 본 기억 있을 법한 찬송이다. ‘은혜한 단어로 설명되지 않을 인간의 경험이란 없으니 말이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한 소절 신파조로 부르고 이어지는 후렴의 음악적 반전이 유발하는 감정의 폭발과 감동도 있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의 멜로디는 점핑판을 딛고 솟아오르듯 높이, 멀리, 확신 있게 튀어 오른다. 주먹을 꽉 쥐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부를 수밖에. 그리고 마지막은 한 옥타브 높은 종결음이다. ‘나는 화~악 씰히~ 아 네에에에에!’ 이것은 아멘을 남발하지 않을 수 없는 피날레이다. 그런데 말이다. 어느 주일 예배에서 이 찬송을 부르던 중, 나는 (박차고 나오는) 후렴이 아니라 그 바로 앞의 가사, 그 가사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왜 내게 굳센 믿음과 또 복음 주셔서

내 맘이 항상 편한지 난 알 수 없도다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마음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주 언제 강림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곳도 난 알 수 없도다

 

이 찬송의 제목을 다시 붙인다면 난 알 수 없도다.’가 좋겠다. 단지 멜로디 진행의 기술로 감정이 불러일으켜진 것이 아니다. 나를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시시때때 성령의 감동으로 나를 만지시지만, 느낄 수는 있지만 알 수는 없음. 조금은 알 것 같지도 하지만 온전히 알 수는 없음. 더 명확하게 알고 싶지만 그럴수록 더욱 알 수 없음. 알 수 없음의 고백이 확실히 아는믿음의 진정한 시작이다. [난 알 수 없도다 - 나는 확실히 아네] 이 급진적인 도약의 점핑판은 알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겸손함이다. 기실 우리가 믿음에 대해, 사랑에 대해, 소망에 대해 안다고 하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인가. 하나님을 갈망할수록, 간절히 찾을수록 그분의 부재가 더욱 크게 다가올 뿐이어서 당혹스러운 것은 나만의 경험일까. 예수님 당신 스스로 숨어서 보시는 하나님’(6:6, 새번역)이라 칭하셨으니 그분은 인간 앞에 부재로 현존하시는 분이다. (그러니 주님, 나는 당신에 대해 오직 모를 뿐입니다!) 불가지(不可知)의 실존을 겸허히 인정하고 얻는 신적인 확신, 이것이 은혜이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우리 국토 구석구석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일깨운 책이 있다. 그 책 서문에 나온 문화재,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책을 읽고 가 본 변산의 내소사에서는 보이는 것이 많아 감동이었다. 반면 우리는 아는 만큼 무시한다. 문화재를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감동받을 수도 있지만, 아는 만큼만 보고 보이는 만큼만 가지고 경멸을 할 수도 있다. 역시 안다는 것, 아니 안다고 자부하는 것은 사랑과 성장으로 가는 문을 닫는 일이다. 문화재도, 사랑하는 너도, 심지어 나 자신도, 신앙에 관해서도 나는 잘 알 수가 없다. 때문에 여전히 다가가고 귀를 기울이며 숙고하는 것이다. 청년들의 멘토를 자처하며 무엇을 확실하게 안다고 하는 이들을 경계할 일이다. 내가 기도해보니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다, 확언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인간은 모를 뿐이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시다. 숨어 계신 하나님을 찾을 수 없어 방황하는 날이 많지만 술래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숨은 곳을 다 알고 계신다. 우리가 그것만은 화악~씰히 안다!




* 월간 [빛과 소금]  7월호, '하지 못한 말, 미안해'라는 꼭지에 쓴 글입니다.



대학입학 학력고사를 마치고 맞은 겨울방학이었다. 겨울에 태어난 친구가 집에서 축하모임을 한다고 초대를 해왔다. 교회 동기들이었고 예닐곱 명의 남자아이들과 함께 나는 유일한 여자였다. 시험 결과야 어떻든 자유로움으로 붕붕 뜬 시간을 보내는 중에 한바탕 놀 기회라니. 신나게 달려갔을 것이다. 친구 어머니께서 떡 벌어지게 차려 내놓으셨다. 기분 좋게 떠들며 식사를 하려던 찰나, 상 밑에서였는지 아니면 밖에서였는지 맥주병과 잔이 함께 들어왔다. 나를 제외한 친구들은 이미 주()를 영접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것 같았다. 그 순간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깽판을 치고 나온 것이다. 센 여자 하나에 착한 남자 친구들이 모인 집단이라 당시 내 별명은 꼬맹이였으나 영향력이 작지는 않았다. 모르긴 해도 밥맛, 술맛, 놀맛이 싹 다 떨어졌을 것이다. 다시 떠올리기도 부끄러운 바리새인 같은 짓이었다. 술도 술이지만 다른 친구도 아니고 교회 친구들과 모여 앉아 맥주를 마신다는 것은 더 큰 죄를 짓는 느낌이었다. 고백컨대, 나는 당시 회심이 필요한 모태 바리새인이었다.

 

입장 바꿔 누군가 내가 한 그 짓을 했으며, 나는 그 엉망이 된 자리에 남겨졌었다면 그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남겨진 친구들이 분위기를 어떻게 수습하고 시간을 보냈는지 알 수 없으나 다행히도 이후 다시 문제 삼지 않았다. 여전히 만나면 찧고 까불며 오랜 시간 좋은 친구로 지냈다. 실은 이런 진상 바리새인 짓이 처음은 아니었다. 여름 수련회 가면 숙소 뒤편 으슥한 곳에 숨어 담배 피우는 친구들을 잡아 전도사님께 고발했다. 바리새인에 어용 경찰(‘짭새라 부르는 게 제격)이었다. 한 번은 수련회 기간 중 식사시간이었는데 친구 녀석들이 보이질 않았다. 악랄한 경찰관으로서 느껴지는 촉이 있어서 수련회 장소였던 교회를 빠져나와 가게들이 있는 곳으로 나갔다. 어느 식당에 모여 닭볶음탕을 시켜놓고는 희희낙락하고 있는 친구들을 현장범으로 체포했다. ‘지금 뭐하는 거야?’ 한 마디에 착한 친구들은 보글보글 끓는 닭볶음탕을 입에 넣어보지도 못하고 줄줄이 수련회장으로 연행되었다. 이런 짓을 했다. 친구들아 미안했어, 라고 말하고 싶어 글을 시작했는데 여기까지 쓰고 보니 그것이 아니다. 당시 믿음은 내가 일등이지.’ 하는 우월감으로 살았지만 인간적으로 더 성숙한 쪽은 오히려 친구들이었다. 친구들아, 그때의 나를 받아줘서 고마워, 못 이기는 척 당해줘서 고마워.

 

바리새인의 만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대학을 졸업하고 새로운 교회의 청년부에서 교회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느 주일, 청년부 모임 후 장애인 시설 봉사를 마친 후였다. 선배 한 사람이 주도하고 몇 사람이 어쩌구저쩌구 하더니 우르르 치킨 집으로 몰려가게 되었다. 자연스레 치맥타임이 되었다. 걸걸한 여대에 다녔고 직장생활도 하면서 술과 술자리는 일상처럼 자연스러운 때였다. 그럼에도 고3 겨울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불편함으로 마음이 일렁거림은 부인할 수 없었다. ‘친구들과 편하게 마실 일이지 굳이 교회 사람들과 술을 마셔야 하나?’부터 시작해서 믿음이 연약한 후배들이 시험 들면 어쩌려고까지 여러 생각이 오갔다. 그러나 결코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관리도 아주 잘했다. 문제는 돌아와서, 그 이후 마음에 쌓았다 부수고 쌓았다 부순 정죄의 모래성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하나하나를 향해 보이지 않는 집게손가락을 흔들어댔다. 차라리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했던 폭력적 태도가 솔직하여 순수한 듯. 얼굴을 마주하고 한 마디 비난의 말을 한 적 없지만 마음이 한 짓은 어마어마하다. 겉으로는 큰 갈등 없이 그 시절을 지냈다.

 

나이를 먹었고 나도 이제 중년이다. 인생의 정오를 지나 오후로 접어든 어느 시점, 신앙에 대한 깊은 회의와 함께 영혼의 어두운 밤이 찾아왔다. 신앙하며 살아온 모든 나날이 잘못이었다는 생각에 길을 잃은 것만 같았다. 긴 터널의 끝에서 내가 다시 보였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율법의 우산 속을 더 안전하게 느끼며 살아온 바리새인, 내가 보였다. 아픈 깨달음과 함께 두 번째 회심의 순간이었다. 그즈음 문득 청년 시절 치킨 집에 함께 둘러앉았던 사람들 생각이 났다. 주도했던 선배, ‘가끔 이렇게 알코올로 내장 소독을 한 번씩 해 줘야죠.’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려고 애썼던 후배, 그리고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조목조목 따졌던 내 마음의 소리가 부끄럽고 아프게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내 마음속에서 벌어진 전쟁이라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자신들이 어떤 배역으로 등장했는지 상상도 못하겠지만 이렇듯 기회가 주어졌으니 미안했어요.’ 속으로 말해본다.

 

자신을 일컬어 부랑아라 했던, 그리하여 부랑아 복음을 설파했던 브레넌 매닝은 바리새인을 이렇게 진단한다. ‘자신에게 아무 결함도 없다는 믿음이 그의 결함이다. 그는 남을 경멸한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한다. 자기가 그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그는 자기 의에 빠져 불의하게 남을 정죄하는 사람이다.’ 과연 그 시절 나는 내가 옳다, 나만 옳다는 자부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일주일에 며칠 씩 교회 가서 청년부, 주일학교, 성가대 등에 남다른 봉사하며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꼬박꼬박 내는 등 근거 충만한 자부심이었다. 말 그대로 나의 의에 빠져 죄책감 없이 누구든 정죄할 수 있었다.

 

어쩌면 정말 미안해해야 할 대상은 어린 날의 나, 젊은 날의 나 자신인지 모르겠다. 종교적 우월감으로 자아에 도취해 있는 동안 가장 외롭고 불행한 것은 나였으니까 말이다. 대입 시험 마치고 가장 홀가분한 시절, 신나게 먹고 놀며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박차고 나와 씩씩대며 걷는 어린 나를 상상해본다. 마음의 법정을 열어 이 사람 저 사람 돌려세우며 기소하고, 선고를 내리던 젊은 날의 나를 떠올려도 그렇다. 정작 감옥에 갇혀 자유를 잃은 것은 나 자신이었다. 율법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고 내적인 자유라고는 맛보지 못했으니 정작 못할 짓은 나 자신에게 한 것이다. 어쩌다 어린 시절부터 바리새인이 습성이 몸에 딱 붙어 그 누구보다 나를 괴롭게 했다. 친구들과 이웃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켰고 그것은 다시 왜곡된 우월감이 되었다. 게다가 나이가 들수록 우월감은 내면 깊은 곳으로 감추고 겸손한 말투와 태도로 위장하는 방식은 세련되어 간다. 어린 나, 젊은 날의 나, 아니 어제의 나에게 미안하다 말해본다. 아픈 직면과 회심을 통해 다시 그러지 말자 다짐했건만 여전히 입은 줄도 모르게 이미 입고 있는 바리새인의 갑옷이다. 미안할 줄 알면 다시 하지 말아야지! 나 자신에게, 나의 이웃에게 미안할 짓 하지 않는 오늘을 사는 것, 나의 기도는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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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김현승翁의 어릴 적 일기를 빌자면 '매일 매일 똑같은 하루'이다. 똑같은 일과 비슷비슷한 염려, 여전히 감내해야 할 것들이 반복되는 하루이다. 이런 일상 속에 심장 뛰는 일이 생기는 건 참 좋은 일이다. 심장 뛰는 놀이가 생겼다. 발품팔이 온라인 중고매장 찾아가 득템하기. 열정 솟아나는 새로운 놀이이다. 절판 도서 한 권을 노리고 있었다. 사람들 취향이 다른 듯 비슷해서 내가 찜한 절판 도서들을 나만큼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사람들이 있다.  습관적으로 오프라인 중고매장을 검색하던 어느 날, 기다리던 책 <남성성과 젠더>가 합정점에 떴다. 채윤이 레슨 가는 날 잡아오라 하기엔 늦을까? 무리해서 돌아돌아 다녀올까? 고민하는 와중에 이미 판매되고 사라짐. 허망. 딱 한 권이 알라딘 중고매장 전주점에 살아 있다. 주일에 전주에서 강의가 계획 되어 있었다. 터미날 투 강대상까지의 픽업 의전을 마다하고 버스나 택시를 이용해야지. 중간에 알라딘 매장에 들러야지,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또 그런 와중, 잠실 신천점에 한 권이 또 떴다. 지하철 타~아고, 버스 아고 달려가서 체포했다. 몇 번 책꽂이 몇 번째 칸 찾아가 눈알 굴리며 더듬다 동공 고정. 떨리는 손으로 책을 뽑는 느낌. 말로 표현 못함. 으아아아.


운동 삼아 서현역의 온라인 중고서점에 다니며 쏠쏠한 재미를 보기 시작. 쏠쏠쏠쏠한 재미를 위해 중고매장 활동 범위를 넓히게 된 것이다. 새로 생긴 동탄점에, 분당 야탑점에도 가 착한 가격으로 위시리스트에 있는 책들을 낚아왔다. 아주 급한 책이 아니라면 중고가 나올 때까지 검색질을 하며 기다리기로 한다. 하루 한 번 정도 검색창에 제목을 치고 엔터를 누를 때마다 (얼마 만의) 뛰는 가슴 한껏 즐기면서 말이다. 남편과 서로 책 사는 문제로 은근 갈구고 눈치 주고, 갈굼 당하고 눈치 보는 일상이다. 당신 책 또 샀어? 어, 이번 설교에 꼭 필요한 책이야. 정신실, 책 또 주문했어? 아아, 준비하고 있는 강의가 있는데 주제에 딱 맞는 책이 있더라고. 피차에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으며 책을 사들이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중고서점에서 엄청 싸게 샀어' 이것은 기분 좋은 면죄부가 된다. 


책 읽는 즐거움이 없다면, 책을 통해 배우지 못한다면 이 깊은 공허감과 결핍감을 무엇으로 채웠을까. '누군가 내 어릴 적에 진로 코칭을 잘 해줬다면' if로 시작하는 상상의 나래를 자주 펼치곤 한다. 중고등 때는 영어가 정말 좋았다. 모두 평등하게 과외를 할 수 없었던 중학교 시절에, 시험 때마다 영어과목은 더 공부하할 것이 없을 정도로 달달 외우고 또 보고 또 보곤 했다. 틀릴래야 틀릴 수 없는 상태로 시험을 치곤 했으니. 영어가 재밌고 좋았다. 영어를 전공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대학 2학년 때는 사회학을 세미나 수업으로 듣고 '아, 내가 사회학이 딱 내 체질에 맞는구나!' 싶었었다.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다 여성학을 공부하겠다고 대학원 준비를 한 적도 있다. 화해 불가능으로 보이는 기독교와 페미니즘 사이에서 길을 찾고 싶었었다. 포부는 컸으나 사소한 일로 포기하고 말았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아쉽지만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다. 아쉬움이 꼭 나쁜 것은 아닌 것이, (영어, 사회학, 여성학, 심지어 철학까지) 미답의 전공지에 대한 결핍감이 땔감이 되어 오래도록 독서열을 불태우고 있는 지 모르니까. 덕분에 이 나이에 이런 설렘도 누리고 있으니까.


도서 구입비 지출에 대한 부부 상호 갈굼도 독서열을 활활 태우는데 한 부채질 하고 있다. 훔친 사과과 맛있다? 몰래 하는 일이 짜릿하고 더더더 갈증 속에 몰입하게 되는 법. 몇 달에 한 번씩 '우리 이제 당분간 책 사지 말고 있는 책 다 읽고 사자. 읽은 책 또 읽어도 돼. 사실 다 까먹잖아. 맞아, 맞아' 남편과 다짐하곤 한다. 연기하는 듯한 말투며 필요 이상으로 꽉 쥔 손을 보면 '저거 저거 오래 못 가지' 피차에 이미 알고 있다. 그 과장된 약속이 그어놓은 선을 넘는 맛에 몰래 또 책을 주문하곤 하지. 보고 싶은 책 마음대로 살 수 있는 환경이면 이렇듯 맛있는 책읽기를 누릴 수 없을 테다. 절판 도서를 찾아 헤매면서 '책을 쓰려면 이런 책을 써야지. 내가 낸 책들은 한 번 읽히고 책꽂이 자리나 차지하는 책. 나무야, 미안해. 지구야, 미안해' 자조의 심정이 되기도 한다. 그것도 어쩌랴. 내 수준과 한계가 여기까지인 걸.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이, 젊은 날의 결핍이, 일상 속 결핍이, 결핍감이 독서의 즐거움에 이르게 했으니 부족함과 한계는 나쁜 것만도 아니다. 


남편 쉬는 날에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함께 보았다. 후기 수다를 떨다 '안 되겠다. 소설을 읽어봐야겠다' 싶어 중고매장 검색을 하고, 가장 싼 책이 동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달려갔다.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 남편이 붙들더니 이틀 새 읽어 버렸다. 이제 내가 읽을 차례. 책만 보는 바보 부부, 스튜삣! 이렇듯 경제적으로 독서라니, 그뤠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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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커피를 마시다 충동적으로 화분 정리를 했다.

'충동적'이란 말이 좋다.

갈수록 주먹 불끈 쥔 '의지와 치밀한 계획'으로 뭔가를 하는 것이,

특히 멋진 결기로 대단한 것을 이루는 것이 좋게 느껴지질 않는다.

나이 탓일 수 있다. 아니 단지 나이 때문이 아니다.

마음과 마음의 병, 그리고 신앙에 관해 질문하며 물고 늘어지다 깨달은 바가 있어서 그렇다.

'내가 했다고, 내가 했다니까'

이루어 놓은 것, 성취감, 드러냄, 돌아오는 찬사, 가 참 좋은데.

그러느라 잃어버린 것을 알아채지 못함으로 우리는 단절과 외로움의 바다에 허우적댄다.

나는 갈수록 주먹 꽉 쥔 의.지.가 쓸모 없다 느껴진다. 


**

화분 정리 했다, 하면 될 일.

의지니 충동이니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이 뭐 캥기는 것이 있는 모양.

(예, 자수합니다)

충동적이라고 했지만 계절이 바뀌면 으례 하는 일이다. 

해야 할 일 목록에 있던 걸 갑자기 하게 된 것 뿐.

충동적 화분 정리가 아니라 충동적으로 저지른 살인, 아니 살초(殺草)의 찜찜함 때문이다.


***

여름 내 말라버린 화초의 시신을 하나를 수습해서 화분을 비웠다.

그러면서 동시에 멀쩡한 난초 하나를 쑥 뽑아서 쓰레기 봉투에 (처)넣었다.

멀쩡한 난초 화분이었다.

잎은 다 바닥에 붙어 있고 지지대로 꽂아둔 굵은 철사에 의지하여 삐죽하니 서 있지만,

그래서 살아 있는 느낌(생기)이라곤 느껴지지 않지만  때가 되면 꽃을 어김 없이 피우곤 하였다.

꽃이 피면 반가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꽃이 '이게 웬 조화냐!' (생화냐!)

꽃이 피어도 생기가 느껴지진 않았다.


****

뭐 했다고 저 분위기도 안 맞는 난을 집에 들였을까? 

몇 년 전 망원시장 입구 트럭에서 산 것이다.

화분 여러 개를 사면서 꽃이 핀 난을 5천 원만 더 내고 가져가라 기에 생각 없이 들고 온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난 화분에 대한 좋지 않은 선입견이 있다.

으리으리한 교장실 창가에 핑크 색 리본을 매달고 즐비하게 서 있는 난 화분.

그 방의 주인인 교장은 전교조를 탄압하고 참교육을 가로막는 적폐, 이런 각이다.

또 모시 옷 한 벌 빼입고 난초의 잎을 닦으며 "마, 니만 믿는다. 알아서 하기라'

차분하고 고상한 어투로 살인교사하는 조직의 큰 형님, 이런 그림도 있고.


*****

설거지 하다 문득 '도통 애가 자란다는 느낌이 없어. 그러니 살아 있는 것 같질 않지'

라고 혼잣말을 했다. 생매장한 난초 말이다. 

신혼 때부터 우리 집에서 죽어 나간 화분이 셀 수도 없지만 살아 멀쩡한 화분을 버린 적은 없으니.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꽤나 신경질이 쓰이는 것이었다. 

자란다는 느낌, 성장하고 있다는 표식이 없는 것이 참 싫구나. 그랬구나.

'성장'은 내게 참 중요한 말이고 의미이지. 

죽을 때까지 성장해야 한다고 믿고, 자라고 싶잖아. 난.

성장 가능성을 보이는, 자아의 숲이 헐렁한 사람을 무조건 좋아하지. 난.

빽빽한 의지와 완고한 자아로 숨이 막힌다면 화분 하나 희생양 삼아 숨통을 트는 것도 나쁘지 않지.

멀쩡한 화분 생매장 한 죄를 스스로 사하기로 한다.


******

다육이 화분 여러 개가 겸손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다육이를 사랑하는 집사님께서 주신 것, 

지난 학기 교회 에니어그램 여정 마치고 선사받은 것들이다. 

지난 봄 민맘이 가져온 잘 자란 다육이가 든든하게 서 있다.

조르르 섰는 아기 다육이들의 엄마같다.

새벽마다 드리는 한결같은 기도의 효능이 친구가 두고 간 화분에까지 미치는 것일까.

의연하여 믿음직하고, 바라볼 때마다 힘을 준다.

에어컨 바람 바로 옆에서 추운 여름을 이겨낸 초록이들과 가을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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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휴가를 다녀왔다.

몇 년은 '휴가' 아니라 '피정'을 다녔었다.

일주일 쉬는 것은 같은데 어디서는 '휴가'라 부르고 드물게 '피정'이라 부르기도 한다.

어차피 쉬는 것은 같으니까 그게 그것이기도, 말은 단지 말이 아니니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다.

딱 일 년 전, 둘이 다녀왔던 '인생 피정'을 복기하고

아이들 어릴 적 함께 했던 여행들을 추억하며

여러 번 계획을 바꾸다 결정 또는 지른 것이 제주 가족여행이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여행을 가면 더욱 너그러워지는 아빠, 또는 남편.

견주어서,

평소에도 그렇지만 어딜 나가면 더욱 잔소리가 많고, 쪼잔해지고는 엄마, 또는 아내.

넉넉한 아빠를 누리는 아이들을 은근히 질투까지 하는 엄마 또는 아내는

의문의 일패, 이패, 삼패를 당하다 왕따를 자처하여 '스따'가 되기도 한다.

가진 어둠이 많은 엄마는 늘 그렇다.

통과의례처럼 지나는 감정에 이름 붙이고, 흘려 보내야 비로소 칠렐레팔렐레 에헤랴디야 제대로 놀기가 시작된다.



제주도는 숲이지.

여행은 걷는 거지.

는 엄마 아빠 생각이고, 중2는 그러려면 나를 왜 데려왔냐!이다.


좋아, 비자림, 사려니숲, 곶자왈...... 나도 걷고 싶어.

 흔쾌히 따라나서는 딸은 다 컸네, 다 컸어.

하긴 검정고시 합격하여 당당한 고졸이 되었고, 곧 민쯩도 나오니 다 컸지.




결국 중2는 숲을 걷는 대신 비자림 입구 카페에서 혼자 영화를 보기로 했다.

차에서 보겠다는 걸 '영화 보다 더워서 죽는다' 설득하여 아이스티 한 잔 사주고 카페에 집어 넣었다.

아니나 다를까, 헤어지고 10분 띠리링 문자 메시지가 왔다.

'엄마, 나 그냥 차에서 있을래. 안 더워'

도대체 왜? 그 시원하고 편한 카페를 두고 땡볕 아래 찌는 자동차 안?

이유는 하나다.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서 쪽팔려서'

카페에 들어온 사람, 길을 걷는 사람, 세상의 모든 사람이 '너님'에게 1도 관심이 없단다.

이걸 납득시키려다 속에서 천불이 나는 블랙홀에 빠지고 말테니 입을 닫자. 




하긴 중학교 입학식에서 '단지 사진 찍었다'는 이유로

그래서 쪽팔린다는 이유로입이 댓발 나왔던 딸이 폰카를 붙들고 살고 있지 않은가. 

사춘기 블랙홀, 걱정할 일은 아니지.

이~이리 오너라 앞태를 찍자,

저~어러리 가거라 뒷태를 찍자,

들이대거라 셀카를 찍자.

우리 딸은 사진 100장 찍어 한 장 건지는 것으로 행복한 여행이다.

  


아, 사진 얘기가 나왔으니 고발하고 지나갈 일이 있다.  

중딩은 벌써 개학을 했고 학기 중이다. 해서 '체험학습'을 내고 합류한 여행이다.

(이걸 결재하며 또 얼마나 뻣뻣하게 굴던지!

이유는 친구들 다 등교하는데 학교 한 가는 것이 튀니까,

튀는 건 쪽팔리니까!)

체험학습 보고서를 써야 하고, 거기엔 꼼꼼하게 사진을 붙여야 한다.

이 중2가 삐딱하게 굴다가도 간판만 보면 '나 사진 안 찍어?' 하고 차렷자세로 선다.

이 국회의원 같은 놈을 보게! 




비행기 시간 기다리며 공항 근처를 맴도는 마지막 날 오후에는 해변의 카페다.

꺼내 놓은 책들을 보니 책 제목으로는 임자 찾기기 쉽지 않다.

음료 종류를 살피는 것이 더 빠르겠다.

그러고 보니 마법천자문, 메이플스토리, 슈가슈가 어쩌구저쩌구...... 하는 책들이 눈앞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책만 보면 성인 넷이구나.

우리가 이렇게 되었구나.

이렇게 커버린 아이들을 두고 자꾸 어릴 적 추억만 떠올리며 그리워 한다.

어린 아이 취급하며 잔소리 하는 엄마, 아직 '어제'를 살고 있는 엄마를 좋아할 리가.

유유유.



꿈같은 시간 보내고 돌아왔다.
삼 시 세끼 밥 할 걱정
없는 시간이었다.
거실 탁자에 소국 화분 하나가 우리를 기다린다.
지난 주일 쭈네 가족이 우리 교회 예배 드리러 오며 들고 온 것이다.
화분이 너무 예뻐서 이걸 두고 휴가를 가기가 아쉽다며 물 듬뿍 주고 아쉬운 발걸음을 했었다.
쭈가 미리 들고 온 가을이, 가을바람이 기다리고 있는 일상이다.

여름의 끝을 잡고 충분히 놀았으니
떠나야 할 여름 떠나게 두고
코앞에 다다른 가을을 온전히 받아들여 살아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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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에 한 노래 있어 9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짧고 굵은 사랑에의 항변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 주인공 상우(유지태)의 대사지만 누구나 언젠가 한 번쯤 되뇌어본 말이기에 명대사의 목록에 남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휴대폰 광고 속 대사도 떠오른다.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는 지고지순한 태도, 사랑은 움직이고 변하는 거야, 솔직 당당하게 인정하는 태도. 어쩐 일인지 둘 다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가. 변하지 않는 것이라 간절하게 믿고 싶은 것은 결국 변하고 말 것임을 알기에 두려움으로 붙드는 썩은 동아줄인 지도 모른다. 바람기, 변심, 고무신 거꾸로 신기. 같은 연애 사담을 나누고자함은 아니다. 영원한 사랑은 없다, 온전한 사랑은 하나님 사랑뿐이다, 설교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 찬송의 이 가사가 자꾸 입에 맴도는 탓이다.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미국의 낭만파 시인 롱펠로우(Henry Wadsworth Longfellow)는 시를 쓰고 가르치는 일을 노년이 되기까지 열정적으로 했다고 한다. 그 비결을 묻는 말에 정원 한 구석의 고목을 가리키며 이렇게 답했다고. “죽은 듯 보이는 저 나무가 봄이 되면 다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네. 그 이유는 저 나무가 매일 조금씩이라도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야. 나도 그렇다네.” 살아 있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매일 조금씩 자라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사랑이 살아 있다는 증거는 아주 조금씩이라도 성장해야 할 것 아닌가.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곧 그에게 죄를 다 고하리라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뜨겁게 고백해본 적이 언제였던가 싶다. 어느 뜨거운 수련회 마지막 밤이었던가? 오랜 기도가 응답되어 기쁨의 눈물과 함께 흘린 말이던가. 언젠가 신앙생활이 뜨거웠던 적이 있었는데, 공동체를 향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시간을 내는 것도, 주머니 털어 밥을 사고 선물을 챙겨주며 내 배가 부르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쩌다 모든 것이 맹숭맹숭해진 것 같기도 하다. 사랑을 하긴 하는 건가? ‘주님 사랑해요, 아버지 사랑합니다.’ 영혼 없는 고백은 찬양시간의 립싱크로만 남은 것인가? 기도, 선교, 봉사, 예배에 뜨거운 주변 친구들이 생소하기만 하다. 사랑이 식었어. 사랑이 어떻게 변하지?

 

성장하는 사랑은 변한다. 성장이라고 하니까 마냥 커지는 느낌이지만 마음의 성장, 사랑의 성장은 위가 아니라 깊이이고 넓이이다. 통장의 잔고가 눈에 띄게 많아지는 것처럼 온갖 긍정이 보란 듯 확장되는 것이 아니다. 처음 연애할 때 설렘의 무한충전으로 부풀어 오르던 행복함, 영화관에서 팝콘 봉투에서 손끝만 닿아도 온몸을 압도하는 찌릿하던 전율이 무한대로 커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조금 아쉽고, 시간이 지날수록 아련하긴 하겠으나 그것은 사랑의 시작이었을 뿐임을 안다. ‘, 내가 생각하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네,’ 실망하고, 차이로 인해 아픈 시간을 함께 보내며 서로를 더 섬세하게 이해하게 되면서 사랑은 깊어진다.

 

그러니까 시인 롱펠로우의 나무처럼 죽은 듯 보이는 관계 속에서도 매일 조금씩 자라고 있다면 다시 꽃이 피고, 작년보다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이다. 그러니까 눈물 콧물 흘리며 기도하던 뜨거움이 사라지고, 예배를 향한 열정은 잃은 지 오래, ‘교회 안 나가를 고민하다 가나안 교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사랑 자체가 소멸하여 없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단단한 사랑을 위해 메마른 겨울바람을 맞고 서있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무성한 잎을 내고 열매를 맺던 이전보다 더욱 사랑하게 되는 시간일지 모른다.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어요. 이런 기도 하나 빨리 안 들어주시고. 제가 큰 걸 바란 것도 아닌데......’ 하는 순간에도 이전보다 더욱 사랑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 아니, 살아 있는 한 멈추어지지 않을 것이다.

 

수 년 전에 서른 셋 젊은 싱그러운 나무 같은 몸에서 암이 발견되어 긴 시간 투병하고, 나아지고, 희망하고, 절망하다 하나님 곁으로 간 청년이 있었다. 호스피스에서 보낸 마지막 며칠 동안 내내 가족들과 함께 불렀던 찬송이 이곡이었다. 건장한 청년으로 암 선고를 받는 충격의 순간, 고쳐주실 줄 알고 희망하던 순간, 희망이 절망이 되는 순간에도 그의 영혼은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노래했었나보다. 어제와 다른 사랑, 어제보다 더 깊어진 사랑의 성장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 친구였다.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 광화문


주중에 미팅이 있어서 광화문에 나갔다. 종로 2가에서 광화문까지 걸으며 뭉클했다. 지난 겨울, 저 넓은 차도를 운동장 삼아 걸었었지. 촛불 하나 들고 수많은 촛불에 떠밀려 걸었었지. 그때 외친 구호를 떠올리니, 오늘이 꿈인가 생신가 싶다. 꿈을 꾸듯 걸어 교보빌딩 앞에 도착. 익숙한 어떤 자리에 다시 앉았다. 대학로에서 시작해 광화문까지 걸었던 날이다.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쉬는데 시시각각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 들었었다. 잠시 앉아 어둑어둑해지던 그날의 거리를 떠올려본다. 빼곡히 촛불이 된 사람들이 앉았던 차도에 느릿느릿 자동차가 지나가고 아무렇지 않은 오후이다. 


약속 장소인 교보빌딩 1츠의 파리크라상에 도착하여 창가에 앉았다. 세월호 피켓팅을 하며 서 있던 바로 그 자리가 딱 보인다. 촛불의 파도를 타고 밀려다니던 겨울, 그 한참 전부터 세월호와 함께 광화문에 들락거렸다. '세월호에 있던 형과 누나들이 불쌍해요. 그 엄마 아빠들이 불쌍해요. 진실을 알려주세요' 앳된 현승이가 앳된 글씨체로 쓴 손피켓을 들고 엄마 옆에 서기도 했었다. 세월호 가족과 함께 홍대 앞에서 출발해 광화문까지 걸었던 봄날도 있었지.


광화문, 이 동네가 새삼스럽게 뭉클하고 애틋했다. 

미팅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 되짚어 종로를 다시 걸으며 '광화문 연가'를 불렀다.



# 양화대교


주일 오후, 고양시에 있는 교회에서 강의가 있었다. 티맵이 안내하는 외곽순환도로를 타고 가는데 조금 돌아가는 길이고, 톨비도 꽤 나오지만 뻥뻥 뚫린 길 가는 맛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 시내 도로 사정이 나아졌는지 티맵이 올림픽대로를 경유하여 경부고속도로를 타란다. 알겠다, 하고 출발하려는데 상세경로에 '양화대교 북단'이 보인다. 양화대교 북단, 양화대교 북단. 거길 지나기 싫어서 다시 톨비 많이 내고 돌아가는 길 외곽순환을 선택했다.


굳이 피할 곳도 아닌데 피하게 되었다. 이유는 그리워서. 그리운 곳을 지나치다 너무 그리워 슬퍼질까봐. 합정동 살 때 강동 하남 쪽에서 일을 하고 집으로 가는 길, 올림픽대로를 달리다 양화대교를 타러 올라가는 길을 좋아했다. 집이 가까워 오고, 다리로 올라가는 짧은 길에 키가 큰 나무들이 서 있는데 그 지점을 지날 때마다 마음이 그리 푸근할 수가 없었다. 티맵에서 '양화대교 북단'이란 글자를 보는 순간 그 길이 떠올랐고, 그리움이 사무쳤다. 망원시장, 절두산 성지, 성산대교 아래 벤치..... 짧은 순간 불쑥불쑥 소환되는 나오는 장소들. 강북강변을 거쳐 전에 살던 집 옆을 지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돌아돌아 집에 왔다.


뜬금 없는 감정이다. 새삼스런 그리움이다. 며칠 전, 갑자기 부른 '광화문 연가' 때문일까. 광화문 가까운 합정동이었기에 마음 먹을 때마다 달려갈 수 있었다. 울고 있는 이땅의 '을'들과 연대하기 쉬웠던 동네, 참으로 '을'스러웠던 동네, 그리하여 나도 을이지만 혼자는 아니라고 느꼈던 시절. 참 좋았구나. 광화문이 가까운 합정동, 참 좋았었구나.


현승이가 초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에 쓴 시가 떠오른다. 명일동 살다 합정동으로 이사하고 쓴 시이다. 할머니 댁에 가느라 명일동 근처를 지나노라면 마음이 이상하다며 쓴 시이다. 생각해보면 여기저기에 두고 온 마음이 많다. 과거는 '두고 온' 것들, 두고 와서 잊을 수 없는 것들이 엉킨 어떤 덩어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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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커피 내리는 사이.

그 짧은 시간, 김씨 셋은 각자 취향 놀이에 빠져든다.


아빠 김씨는 새로 온 책에 빠져 의지인지 테이블인지 구분도 못하고 앉아 있고,

딸 김씨는 워너원인지 아이돌인지 돌아이인지에 빠져 스마트폰에서 헤어나올 줄 모른다.

아들 김씨는 수련회 휴유증으로 기타 들고 교회 노래 아무거나 치기, 딩가딩가 딩가딩가.


혼자 찬양 집회 하던 변성기 아들 김씨는, 

잠시 고래고래 꽥꽥 개굴개굴 하다 제가 듣기에도 거북했는지 노래를 멈추고 잠시 생각에 빠진다.

음정 유연성이 녹록치 않은 제 목소리에 맞춰 즉석으로 노래의 키(key)를 낯춘다.

다시 딩가딩가딩가딩가 꽥꽥꽥....... 뚝!

덜컥 낮춰 놓은 key로 코드진행이 막혀 노래는 다시 멈춰서다.


스마트폰에 빠진 누나가 미동도 하지 않고 

"씨샾마이너!" 던져준다.

와, 이것은 음성지원 악보다.


씨샾마이너 잡고 다시 딩딩가가가딩가딩딩가딩........

노래는 계속 가는데 뭔가 재미가 없다.


테이블 위에 올라 앉은 아빠가 책에 꽂은 눈동자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스윙이지, 스윙으로 쳐!"

와아, 살아 있는 기타 교본이다.


너는 하나님의 사람, 아름다운 하나님의 열매....... 딩가딩가 딩가딩가


'주를 향한 나의 사랑 멈출 수 없네, 멈출 수 없네........'

변성기 꽥꽥이 노래는 이제 멈추지 않는다. 앗싸앗싸 뽕짝뽕짝.


"어머, 이건 찍어야 해!"

드립포트 던져놓고 카메라 들고 설치느라 커피는 과추출 되었지만.

이것은 득템. 가족 악보, 득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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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 사랑> 리뷰이다. 정성들여 길게 쓸 생각은(자신이) 없다. 영화보다는 관람 후 뒷풀이(사실 앞풀이 뒷풀이 뒷뒷풀이)의 여운이 진했던 날이라 영화와의 만남은 실제 만남에 묻힐 수 밖에 없었다. '영화 좋은데 언니들 만나서 더 좋네'로 끝났다. 관람 후 일주일, <덩케르그>를 봤는데 관람 후 한두 시간은 스크린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바닷속에 잠긴 듯했고, 전투기를 조종하느라 창공을 헤집고 다니는 듯했다. 저녁 먹고 앉아서 (아들) 현승이가 '엄마, 덩케르그 영화 좋아?' 하는데 '그냥 그래' 하는 대답이 나왔다. '아까는 나도 보라며?' '어, 처음에는 뭔가 강렬했는데 지금은 엄마가 그 영화를 봤는지 조차 기억이 안 나. 오히려 지난 주에 본 영화 <내 사랑>이 자꾸 떠올라. 그 영화가 좋았나봐. 엄마한텐 이런 게 좋은 영화야'라 말하고 보니 그제야 <내 사랑>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래도 리뷰 쓸 에너지는 없었다. 교회 수련회며 강의 일정도 많았고, 읽어달라는 책이 유난히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 터라. 그런데 못내 이렇게 어설픈 끄적임을 시작한 것은 순전히 홍보문구 때문이다. [한 여름 밤의 사랑 이야기, 에단 호크*샐리 호킨스] '아닌데, 로맨스 영화 아닌데' 처음엔 그냥 지나쳤다. 극장과 뉴스 밖에 안 뜨는 페북 뉴스피드에서 '한 여름 밤의 사랑, 한 여름 밤의 사랑......' 자꾸 보니 신경질이 났다. '아니라고오! 로맨스 영화 아니라고오!' 하다 결국 블로그 글쓰기를 클릭했다. 고아 출신의 괴팍한 외톨이 남자와 류머티스 관절염으로 신체적 핸디캡을 가진 천재 예술가의 로맨틱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아니 뭐, 그저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한 발 양보하여 결과론적 로맨스 영화라고 하자. 


모드의 얇고 틀어진 다리, 그 다리를 삐칠삐칠 걷는 뒷모습이 잊히질 않는다. 가정부 일자리를 찾아 아슬아슬한 걸음걸이로 에버릿의 작은 집을 찾아가고, 거절 당하고 돌아서 삐걱삑걱 또 걷는다. 그 성치 않은 다리가 편히 쉴 곳이 있었으면 싶은데 내내 그러질 못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영화 마지막 에버릿이 했던 말처럼 나는 내내 모드를 '부족한 사람'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바라보았다. 감독의 낚시질에 보기 좋게 걸려든 셈이다. 영화의 스토리를 이끌고 가며 동시에 모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열어 나가고 궁극적으로 에버릿을 다른 세계로 끌고 가는 것은 그녀의 부족해 보이는 걸음이다. 그러니까 에버릿이(우리가, 내가) '부족함'이라고 보는 모드의 부족함이 그녀 자신에게는 치명적 핸디캡(부족함)이 아닌 것이다. 영화 초반부 고모집에서 눈칫밥 먹으며 사는 중에 클럽에 가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장면은 엄지 척이다. 손에 손을 잡은 커플들 사이에서 어눌한 몸 그대로, 흥에 겨워 흔들거리는 슬프도록 당당한 모습이라니. 파트너가 없거나 자유롭게 춤출 수 없는 몸 같은 것들이 아무 문제 되지 않는 클럽의 밤이다.


고모의 핍박, 친오빠와 고모의 파렴치한 계략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 발로 걸음을 멈추지 않는 모드. 시키는대로 하면 편안히 앉아 밥 얻어 먹을 수 있는 고모집을 떠나 가정부로 들어가는 모드. 그런 모드는 (아무리 딱해 보여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모드'이다. 그러니 이 영화는 '내 사랑'이 아니라 '나 사랑' 모드라고 말하고 싶다. 결국 이 영화는 로맨스 영화가 아니라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걸음을 멈추지 않는 처절한 이야기, 모든 인생이 그러하듯 해피앤딩인 듯 새드앤딩인 듯 해피앤딩 같은 먹먹한 결말의 이야기이다. 서서히 모드를 대하는 모드가 바뀌는 에버릿의 모드는 모드 자신의 자기 사랑 모드에서 비롯한 것이다. 신체적인 장애에 굴하지 않고 느릿느릿 가정부 일을 하며, 인간적인 모욕에 굴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며 자존심을 지켜내는 모드의 '나 사랑'이 결국 에버릿을 구원하는 것이다. 고아로 태어나 '사랑'이라는 기반을 가지지 않은 에버릿에게 사랑의 실재, 사랑의 가능성, 사랑의 희망 같은 것을 전염시키는 것. 





'자기사랑'이라는 기반 없이 타인을 사랑할 수 없다. 예수님도 말씀하시지 않았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정희진 선생은 '나를 경유하지 않은 타자의 시선은 없다'라고 한다. 같은 얘기이다. 나를 수용하는 만큼 타자 수용이 가능한 것이고, 자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타인을 품어 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누가 부족하고, 누가 온전한 사람인가. 영화에서 죽음에 임박한 고모가 말한다. '네가 우리 가족 중에 가장 잘 되었구나(잘 살고 있구나? 행복하구나? 온전하구나?)' 젊은 시절, 모드가 낳은 아이를 모드의 동의없이 입양시켜 버린, 모드의 존재 자체를 부족함으로 규정했던 고모의 말이라니! 


'나는 왜 당신을 부족한 사람이라 생각 했을까' 에버릿의 회한 가득한 고백에 나의 마음도 담는다. 모드는 예쁜 구두를 좋아한다. 예쁜 구두를 보고 눈을 떼지 못한다. 틀어진 다리, 볼품 없는 걸음 걸이에 '예쁜 구두'를 욕망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눈길로 바라봤던 것을 고백한다. 보이는 것의 '번듯함'에 매인 나로서는 시각적 부족함 너머를 보는 것이 어렵고 부끄러운 숙제이다.  나 자신이 되어 연애하기(사랑하기, 엄마하기, 신앙하기) 동어반복을 하며 강의하고 떠들고 다닌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나는 자주 실패한다. '보이는 번듯함'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모드의 걸음걸이가 자꾸 떠오르는 이유이다. 싫고 거북하여 자꾸 그리로 향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가장 인상 깊었다고며, 엄지 척이라며 추켜세웠지만 한편으론 거북하고 싫었던 장면. 삐뚜룸한 몸으로 흔들어대던 클럽에 간 모드를 자세히, 오래 바라볼까. 예쁘게 보일 때까지? 그러다보면 '너도 그렇다. 부족하지만 너도 예쁘다' 내게 말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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