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중에 에니어그램 세미나 2단계를 마쳤고, 출간될 책의 서문을 쓰고 표지가 확정되었으니 만세! 시험 끝난 현승이와 비슷한 무게의 '날아갈 듯'한 발걸음으로 산책을 나섰다. 율동공원 가는 길에 참새 방앗간이 하나 있어서 말이다. 요한성당의 서점에 쑥 들어갔다. 칼 라너(Karl Rahner)의 소책자가 쉽게 숨겨진 보물처럼 들어가자마자 눈에 들어왔다. 제목은 일상, 아니고 日常. 신학단상 아니고 神學斷想. 책 표지작업에 짧고 굵게 끙끙 골몰하고 난 터이다. 책표지 이렇게 쉬운 걸! 아무튼 보물은 보물이다. 오래 들여다 볼 틈도 없이 문 닫을 시간이라 나가라고 하니 사는 수 밖에. (여보, 충동구매 맞는데 소책자라서 싸. 진짜야 ) 표지만 봐도 얼마나 지루할지 가늠이 되는 저 소책자를 들고 걷는데 어울리지 않게 발걸음이 쾌활해졌다. 딱 마음에 드는 벤치를 찾아 자리를 잡고 천천히 끝까지 다 읽고 일어났다. 이렇게 누리고 떠나보내기에 아까운 좋은 날씨, 좋은 시간이다. 요한성당을 지나 율동공원까지의 산책길,  자꾸 다니다보면 합정동의 마포 강변과 절두산 성지에 버금가는 우정이 쌓일 기세이다.

       



분당에는 키 큰 나무들이 정말 많은데 고개를 젖히고 올려다보게 된다.  하늘과 나무를 동시에 올려다보는 일이 잦아졌다. 그럴 때마다 혀끝으로 이 가사가 맴돈다. '나는 기도할 때 나무가 된다. 그늘 되어 쉬게 하는 나무가 된다.' 요한 성당에서 나와 큰길을 건너 버스정류장쯤에서 되돌아 바라보니 나무와 하늘과 십자가. 심쿵 아니, 심찢하는 묘한 조화이다. 전에는 키 큰 나무를 보면 시인과 촌장의 노래가 떠올랐었다. '저 언덕을 넘어 푸른 강가에 젊은 나무 한 그루 있어. 메마른 날이 오래여도 뿌리가 깊어 아무런 걱정 없는 나무. 해마다 봄이 되면 어여쁜 꽃피워 좋은 나라의 소식처럼 향기를 날려 그 그늘 아래 노는 아이들에게 그 눈물없는 나라 비밀을 말해주는 나무' 이 노래 속 나무는 내게 천상 '김종필 나무'이다. 문득 생각해보니 이제 그는 더는 젊은 나무가 아니다. '마음만은 젊다고!' 우겨도 소용없다. 결혼하기 한참 전 연애를 걸 때부터 이 노래는 김종필 노래였건만. 그때 꽂혔던 가사는 '저 언덕 넘어 젊은 나무'였건만. 지금은 어쩌자고 '그 눈물 없는 나라 비밀을 말(해야만)하는' 중 늙은 목사가 되어 있다. 그러니까, 어쩌자고! 




앉은 자리에서 소책자 한 권 뚝딱 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멀리 보이는 요한성당 뾰족지붕이 보여 카메라를 들었다. 그 순간 쏜살같이 새 한 마리가 지나가며 촬영권 안에 들어왔다. 새는 존스토트 목사님께는 선생님일지 모르나-'새 우리들의 선생님'이란 책이 있다.- 내게는 천상의 메시지이다. 언젠가 영혼의 어두운 터널을 헤매고 있을 때 침묵피정에 참석했을 때였다. 며칠 소리 없는 울음을 많이 울었고 집에 오는 날 아침 산책길이었다. 새 한 마리가 아주 가까이서, 자리를 옮겨 앉으며 짹짹 무슨 말을 전하는 것 같았다. 못 알아들었지만 알아들었다. '나와 동행하시고 모든 염려 아시니 나는 숲의 새와 같이 기쁘다.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이 정도로 알아들었고 내 마음은 그 새와 같이 기뻤다. 그때 이후로 새는 내게 천상의 멜로디이다. 정색하고 섰는 칼 라너의 '日常'처럼 많은 경우 일상 속 그분의 태도는 무뚝뚝하고 불친절하다.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막다른 길로 몰아대셔서 미추어버리겠는 때도 있다. 다행히 가끔 새를 날리신다. 엘리야에게 새를 통해 먹이를 보내신 것처럼 내게도 가끔 뭘 보내신다. 

   



아이들로 인해 고마운 날들이다. 4월 검정고시를 마친 채윤이는 요즘 알바 중이다. 김밥집 하시는 집사님 가게에 낙하산으로 취직이 되었다. 어릴 적에 그~러어케 메뉴판 만들고, 허공에다 대고 주문받고, 서빙을 하고, 영수증을 찍어대곤 하더니. 채윤이를 보내놓고 세 식구가 자꾸 킬킬거리게 된다. 꿈에서 그리던 그 일을 하면서 떠나셨던 그분이 다시 오실지 모른다. 겉으론 어리바리 무덤덤한 알바생이지만 혼잣말로 어떤 상상놀이에 빠져 있을지 모른다. 낄낄. 퇴근하면서 집사님이 만들어주신 삼각김밥과 김밥을 가져오곤 하는데. 현승이랑 둘이 좋아라 하며 먹다 또 킬킬거린다. '채윤 엄마, 열심히 일하고 맛있는 김밥 가져와서 고마워. 혹시 오다가 호랑이가 김밥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 해도 절대 뺏기지 말고 지켜와야 해' 어제는 알바 마치고 바로 교회로 가 금요기도회 반주까지 하고 온 장한 채윤이였다. 하루는 알바하고 와서 이런다. '엄마, 나는 진짜 감동했어. H 집사님은 집사님이 하시는 일을 정말 좋아하셔. 그리고 집사님이 **언니(집사님 딸) 다섯 살 때 처음 도시락 싸시던 그 마음으로 김밥 만드신대. 내가 보니까 정말 그런 것 같애' 재즈 피아니스트, 디즈니 영화 음악감독, 뮤지컬 배우의 꿈을 또 흘러가고 '김밥집 사장님'이 장래희망 될 기세이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시험을 봐 본 현승이. 물론 제대로 된 시험공부도 난생 처음이다. 영어 수학 열심히 공부해서 첫시험부터 100점 맞을까 걱정을 많이 하더니만. 불행히도 걱정대로 되지는 않았다. 열심히 공부한 후에 만족할 결과를 얻는 맛, 잠을 이겨가며 공부한 후에 날아갈 듯한 마음으로 자전가 타는 맛을 알게 되어 세상 사는 다른 맛을 알게 되었다. '나 공부해야 해서 못 놀아'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된 중딩. 너무 늦지 않게 공부라는 걸 한 번 해주시니 대견하고 고마울 뿐이다. 산책을 마치고 오는 길에 라일락 꽃 잔치를 만났다. 고3 봄에 야자를 마치고 집에 오던 길, 캄캄한 길에서 어디선가 날리는 라일락 향기에 마음이 간질거렸던 기억이 있다. 라일락 꽃향기는 언제 어디서든 나를 고3, 성내동 골목길로 데려간다. 분당에 살지만 마음은 천당에도 갔다가, 지옥에도 내려갔다 오곤 한다. 고3이 신실이가 되기도 했다, 다섯 살 채윤이의 엄마가 되기도 한다. 이사 첫날의 각인이 무섭다. 실내 온도 23인데 나는 자꾸 춥다고 느낀다. 아침마다 한 번씩 손가락 들었다 내렸다 보일러를 켜고픈 유혹에 빠진다. 외출할 때마다 무겁다 싶게 옷을 입게 된다. 건물 현관만 나가도 꽃이 흐드러지고 초록 나무들이 따뜻한 바람에 흔들리는데 말이다.


분당의 일상, 또는 日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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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끔하게 잘 차려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후줄근한 차림으로 서 있을 때의 느낌이 있다. 백화점 의류 매장의 마네킹 사이를 걸어 아이쇼핑할 때의 기분도 비슷하다. 날아갈 듯 가벼운 봄 신상 사이에선 그럭저럭 괜찮았던 내 겨울 코트가 한 물 간 듯싶고 둔하게만 느껴진다. 여기저기 일어난 보푸라기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비교를 하자면 나와 나를 비교할 수도 있다. 제일 좋은 정장을 차려 입고 결혼식 가는 나와 무릎 나온 운동복 차림으로 라면 사러 가는 나는 내 눈에도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 <왕자와 거지>는 잠시 옷을 바꿔 입어 신분까지 뒤바뀌어버린 왕자와 거지의 이야기이다. 어떤 옷을 입었느냐에 따라 몸의 자세는 물론 마음의 당당함도 달라진다. ‘왕자와 거지처럼 신분이 달라지기도 하고 한 인간으로서 가치가 다르게 매겨지기도 한다. 이것이 우리의 사회적 삶이다.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참 아름다워라

그 향기 내 맘에 사무쳐 내 기쁨 되도다 (1)

 

시온성보다 더 찬란한 저 천성 떠나서

이 세상 오신 예수님 참 내 구세주 (후렴)

 

이 찬양을 부를 때마다 역설적인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긴다.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이 성화에서 보는 번듯하고 빛나는 옷이 아님을 안다. ‘내 주님 쓰라린 고통을 다 견디셨도다. 주 지신 십자가 대할 때 나 눈물 흘리네.’ 2절 가사에 힌트가 있다. 십자가 지신 그날의 옷을 상상해본다.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에 흠뻑 젖었고, 다시 마르고 또 젖고 했을 것이다. 땀에 피가 배어 나오도록 고통스럽게 기도하셨다니, 핏자국이 있을 지도 모른다. 빌라도 판결 후에 군인들은 예수님의 사역과 삶의 체취로 얼룩진 옷을 벗긴다. 그리고 왕의 옷이랍시고 자색 옷을 입힌 후에 네가 왕이냐조롱을 해댄다. 예수님의 사람 냄새로 얼룩진 옷은 결국 찢겨져 모멸의 천 조각이 되어 흩어진다. 그런 예수님의 그 옷이 아름답다고? 내 기쁨이 된다고?

 

내 주님 영광의 옷 입고 문 열어주실 때나는 이 부분에서 눈물이 터지곤 한다. 그 영광은 몸소 당하신 고난과 수모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이 수고로운 생의 끝에서 그분이 열어주시는 문을 통과할 때, 나 역시 영광의 새 옷을 입을까. 부끄러움과 외로움, 끝없는 실패로 누덕누덕 죄 된 옷을 벗어 던지고 천상의 옷을 입을까. 그 소망이 멀고도 가깝고, 아스라하며 또렷하다. 그 영광의 옷 입을 날을 그리며 이 땅을 사는 내 영혼의 누더기 옷을 직시하자니 눈물이 난다. 내가 오늘을 살 듯 역사 속에 들어와 33년을 사신 예수님, 리얼(real) 인간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셨을까. 평생 집 한 칸 없이 번듯한 옷 한 번 입지 못하셨을 것이다. 팔레스타인 메마른 땅을 걷고 또 걸으시며 다니시던 그분의 행색은 영락없는 노숙자이었을 터. 하지만 권세 있는 말씀으로 어디서든 군중을 몰고 다니셨다. 예수님에 열광하던 군중은 금세 예수님을 미워하고 조롱하고 침 뱉는 자들이 되었다. 그들이 뱉은 침으로 내 주님 입으신 옷은 마지막까지 오욕으로 얼룩진다.

 

결국 옷의 문제가 아니다.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는 옷을 바꿔 입는 것으로 신분이 바뀌고 운명이 달라지지만 예수님은 무엇을 입어도 예수님이셨다. 땀에 절어 냄새 나는 옷을 입고도 왕이셨고, 모조품 왕의 옷을 입고 조롱당할지라도 하나님 아들이셨다. 명품 옷 입은 사람과 앞에서 추레한 옷 모양새를 셀프 스캔하며 어깨를 움츠리는 나와 달리 그분은 당신의 존재로 그 입으신 옷을 영광되게 하시는 분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도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헨리 나우웬 신부님은 사랑받는 자’, 이 한 마디로 이 땅을 사신 예수님을 정체성을 규정한다. 요단강 세례식에 울려 퍼진 하늘 아버지의 목소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시온성보다 더 찬란한 저 천성 떠나 이 천한 세상(후렴)’ 오셔서 짓밟히고 버림받아도 결코 손상되지 않는 아름다움이다. 모멸과 수치의 옷을 입고도 사랑을 잃지 않는 당당함은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랑받는 자, 이미 사랑 받는 자! 반대로 입은 옷에 스스로 규정당하고 사람들의 시선에 존재의 가치가 오르락내리락 하여 흔들리는 나는 사랑받는 자임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불신앙이다. ‘내 주님 입으신 귀한 옷 나 만져보았(3)’으니 나도 그리 살자. 몸에 걸친 옷, 사람들의 시선,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 중심, 사랑받는 자의 중심, 아름다운 중심으로 살자.




토요일 오전, 강의가 있어 일찍 일어났다. 식구들 아침으로 꽁꽁 언 베이글을 꺼내다 밥과 미역국을 앉혔다. 고난주간 저녁 기도회로 긴장 풀 새 없는 일주일을 보낸 남편도 그렇고. 눈 떠 보면 엄마도 없을텐데 마른 베이글 조각 씹고 있을 아이들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짠해졌다. 시간 여유도 있고 불려놓은 미역도 있어서 화장하는 사이사이 아침 준비를 했다.




그 많던 아침 잠이 주말만 되면 다 어디로 달아나는, 노인병 걸린 중2가 기침을 하셨다. 미역국 간을 보고 있는데 와서 백허그를 한다. '졸립긴 졸린데 엄마가 혼자 일어나서 혼자 밥 먹고 강의 가면 얼마나 쓸쓸할까 싶어서 나와봤어. 엄마, 강의 잘 하고 와.' 원조 티슈남 본능이 가끔 이렇게 중2의 삐딱한 열정을 뚫고 살아온다. '고마워, 우리 아들!' 동그란 엉덩이 토다토닥.




방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에 배꼽을 잡고 낄낄거리며 튀어 나온다. '엄마, 엄마. 오늘이 누구 생일인 줄 알아? ***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오늘이 김일성 생일이래. 큭큭큭. 그 생각이 딱 났는데 엄마가 미역국 끓이는 냄새가 나는 거야. 큭큭큭' 소파에 누웠다 다시 혼자 킬킬킬. 혼잣말을 하다 다시 킬킬. 아침 잠 없는 노인네 하나가 누워 계시는 것 같다. '김 노인, 오늘 김일성 생일이라 들떠서 다시 잠을 못 주무시는 거야?'




일정 다 마치고 들어왔는데 날씨가 아깝다. 늦은 오후지만 집 앞의 불곡산이라고 갔다 와야지 싶어 준비하다 '같이 갈래?' 했더니 김 노인 선뜻 따라나선다. 등산 시작하고 5분 만에 후회가 되었다. 김 노인, 입을 잠시도 놔두지 않고 투덜투덜 쫑알쫑알. 정상이 어디냐, 음료수를 사올 걸 그랬지 않냐, 조금만 쉬었다 가자, 난 도저히 못 간다, 지팡이 하나 구해서 짚으니 좀 낫다...... 이렇게 말 많은 할아버지는 처음이다.




실은 이 아들, 분당으로 이사 와 전에 없던 학구열을 붙태우고 계시는 중이다. 여차저차 하여 영어를 제대로 배우게 되었다.  '세상에 공부가 이렇게 재밌는 거 였냐'고 하더니 수학 학원까지 보내달라고. 다시 여차저차 고마운 만남과 만남으로 수학 공부도 하고 있다. 지난 화요일 세월호 3주기 연주회에 아빠는 못 가고 엄마만 가네 어쩌네 하고 있는데 '아, 나는 못 가는 거 알지? 학원 가야해서. 나는 못 가.' 라고 하더니 '와와와! 드디어 나도 이 말을 해봤다!!!!' (초등 저학년 때문에 가장 해보고 싶은 말이 '나 지금 학원 가야해서 못 놀아'였으니)




그렇게 딱 한 달 공부 좀 해보더니 김 노인, 벌써부터 걱정이다. 중간고사에서 100점 맞을까 걱정이다. 처음부터 100점 맞으면 엄마가 기대가 너무 높아질 텐데, 걱정이다. (100점 그렇게 쉽게 나오지 않는단다. 큐큐큐) 별 걸 다 걱정하는 김 노인이다. 하여튼 이 노인네 정상까지 가는 동안 하도 옆에서 투덜거려 산의 고도와 함께 혈압도 같이 상승했으나 잘 참았다. 손잡고 내려오는 길 '오늘처럼 우리 함께 있음이 내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너는 아니 이런 나의 마음을' 노래가 생각났다. 마음 먹고 시작했으니 공부를 좀 잘 했으면 좋겠으나, 뭐 그저 이렇게 좋은 봄날 함께 걸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과분한 행복이다.


3년 전 오늘, 단원고 2학년 아들 딸들은 수학여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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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3주기와 함께 다시 돌아온 고난주간이다. 지난 4월 11일, 채윤이는 [세 번째 봄, 열일곱의 노래]라는 이름의 음악회 무대에 섰다. '꽃다운 친구들에게'라는 노래를 부르고 '내 영혼 바람되어'와 '친구'를 콜라보 하여 연주하였다. 뭐가 뭔지 모르고 덥석 하겠다 했는데 쉬운 무대가 아니었다. 채윤이 같은 고딩 아마추어에게는 너무도 큰 무대였고, 공연 며칠 전에는 검정고시가 있어서 연습시간도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리허설 다녀와서 울고, 음악회 시작 한 시간 전에는 손가락이 떨려 피아노를 못 치겠다고 울고..... 채윤이 음악사에 길이 남을 또 하나의 트라우마가 되겠구나, 각오를 하고 있었다. 막상 무대는 음악이 아니라 열일곱, 열여덟 꽃다운 나이의 존재 자체로 감동을 주었다. 또 다른 꽃친 지인이, 그리고 경이 언니. 세 청소년에게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낸다.


3년이면 탈상인데. 3년 정도면 충분히 슬퍼하고 충분히 울고 난 후에 기꺼이 떠나 보낼 수 있는 시간이기에 탈상이다. 헌데 아직 슬퍼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부모들이 피멍 든 가슴을 안고 마지막 무대에 섰다. 여기까지 쓰고는 공허한 말을 나열했다 지웠다, 나열했다 지웠다...... 말을 찾지 못하겠다. 채윤이 같은 아이를 잃고 타버린 가슴을 국가권력에 의해 교회라 이름하는 종교집단에 짓밟히고 또 짓밟히는 부모들이 노래한다. 노래가 아니라 피 울음이다. 그 무대에 내 아이를 세워놓고 연주를 잘할까 틀리지 않을까 걱정하는 나에게 쌍욕을 해주고 싶은 마음. 가 닿을 수 없는 저들의 고통 앞에서 내가 밉고, 이 나라가 싫고 교회가 역겹다.  

주님, 언제입니까. 탈상은 언제입니까. 언제쯤 진실을 드러내 저들을 신원하시렵니까. 이미 돌아오지 못할 내 사랑, 뼛조각이라도 품에 안아보자는 엄마의 절규를 외면하지 않으시겠지요

"지금 저의 나이였던 언니 오빠들을 떠나보낸 부모님들이 저의 부모님이기도 합니다." 연주 중 했던 채윤이 짧은 나레이션이다. 물론이다. 나도 같은 말로 받는다. '지금 내 아이 나이였던 자식을 떠나보낸 부모님들은 나 자신이기도 하다.' 평생 이것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끝까지 이분들과 함께 하겠다는 뜻이며 동시에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내 것이라 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비록 오늘 이 비극적인 음악회에서 내 아이가 노래하다 삑사리 낼까, 피아노 치다 손가락이 미끄덩할까, 온 신경을 집중하는 비루한 엄마이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그렇게 '작은' 엄마로만 살지 않을 것이다. 나는 '큰' 엄마이다. 이땅 모든 아이들의 엄마이다. 내 새끼 귀한 줄 알면 남의 자식도 똑같이 소중하단 것을 잊지 않고 살겠다. 

음악회 마치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음악회에 오신 100주년기념교회 S구역장님이다. 반가움에 얼굴 뵙기로 했다. 채윤이를 격려하시려는 마음이 느껴졌다. 음악회 마치고 지인들 인사하니 꽤 늦은 밤이었다. 채윤이에게 케이크 하나를 주고 싶은데 기다려줄 수 있겠는지 물으셨다. 평소 같으면 아니라고, 마음만 받겠다고 손사래를 했을 터. 그러시라고 했다. 그 밤에 문 연 케이크 가게를 찾아 뛰어다니실 것이 몹시 죄송하고 불편하면서도 그러시라고 했다. 구역장님이 건네시고 싶은 케이크가 채윤이는 물론이거니와 열일곱 꽃다운 그 친구들을 향한 더 큰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채윤이는 채윤이가 아니다. 채윤이는 꽃다운 친구들이다. 채윤이가 연주하고 부른 노래 '꽃다운 친구들에게'는 작년에 1기 꽃친들과 만든 노래이다. 함께 무대에 선 지인이와 함께 꽃친 1기 모두의 마음을 담았을 것이다. 1기 친구 중 희연이는 태평양 건너 미국에 가 있으니 이것은 태평양을 가로질러 품는 노래이다. 연습하며 자주 이런 얘길 했다. '아, 이 가사는 유진이 감성에서 나온 건데. 마지막 멜로디는 지우가 만든 건데. 지우가 꼭 와서 들어야 하는데......' 채윤이 안의 1기 꽃친이 함께 부른 노래이다. 채윤이는 채윤이가 아니다. 내 딸 채윤이는 세월호에서 수장된 그 딸들이다.

나도 내가 아니다. 나는 그 구역장님과 함께 심야의 청파동 길을 뛰어다닌 나이다. 열일곱 꽃다운 친구들에게 케이크 하나 주고 싶어서 말이다. 나는 416 합창단의 어머니 단원이다. 채윤이 현승이 아닌 이 땅의 아들과 딸을 품고 낳았던, 그리고 억울하게 그 아이를 잃은 엄마이다. 국가권력과 종교의 폭력에 연거푸 두들겨 맞고 거리에 패대기쳐지는 삭발한 엄마이다. 비록 오늘 이 널따란 무대에서 내 새끼 얼굴 외에 보이지 않는 이기적 엄마라 할지라도. 그렇더라도 나는 세월호의 엄마이다. 객석에 앉아 내 딸만 바라보는 엄마이며 동시에 무대에 노란티 입고 서서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 가기를 힘겨워한 날에 너를 지킬 수 없었던 아름다운 시절 속에 머문 그대여' 노래하는 엄마이다. 이것을 잊는 것은 내 앞에 고통받는 자의 얼굴로 다가오신 고난의 예수님을 잊는 일이다. 그것은 나를 잊는 일이니 나는 세월호 엄마이다.

2017년 고난주간은 음악회 중간에 드린 창현이 엄마 최순화 님의 기도로 족하다.
이 기도에 가슴 치며 절망하다 희망 한 줄기 붙들게 되니
이 기도야말로 십자가의 신비, 고난과 부활의 신비이다.


창조주이시며 전능자라고 불리우는 당신께 기도드리는 건 쉽지 않습니다. 3년 전 우리 아이들의 살려달라는 마지막 기도를 외면했었으니까요. 당신께 등돌리고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디를 가든 당신이 계시더군요. 더 이상 울 힘조차 없어 그저 멍하니 앉아 바다만 바라보던 팽목항에도,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하늘을 보며 잠을 청해야 했던 국회에도, 내리쬐는 땡볕을 피할 그늘 하나 찾기 어려웠던 광화문에도, 하수구 냄새에 시달려야 했던 청운동 사무소에도, 침몰지점이 바로 눈 앞에 보이는 동거차도에도, 그리고 병든 몸을 이끌고 세월호가 누워있는 목포신항에도 당신은 계셨습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몰랐던 분들이 눈물 가득 고인 눈으로 다가와서 안아주시며 같이 울어주시는 따뜻함에서 당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우리 아이들이 살려달라고 당신께 기도할 때 그 기도 좀 들어주시지 왜 우리 아이들이 없어진 지금 모르는 사람들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시나요?

고난주간이면 우리 죄를 대신해서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신 그 사랑에 감격하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를 묵상하고 죄짓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그 고통에 가 닿으려고 노력했었지만, 우리 아이들이 없어진 이후엔 그런 노력 하지 않습니다.

매일매일이 고난주간이고 십자가와 세월호는 동일시되고 있으니까요.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짊어지신 십자가와, 수학여행 가던 단원고 아이들을 태우고 가다가 침몰당한 세월호를 동일하게 여기는 것이 불경스러우신가요?

2천년 전 그날,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세시간 동안 어둠이 덮치고, 성소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졌다는 기록은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아픔을 느끼게 해줍니다.

같은 아픔을 나눌 수 있는 분이 하나님 당신이셔서 다시 당신께로 향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으면서도 자신을 못박은 사람들이 몰라서 저지른 일이라며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시는 예수님 모습을 닮기란 불가능해 보이지만 그렇게 기도하신 예수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가장 잘 섬긴다는 큰 교회들은 자식을 잃고 울부짖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로하기보다는 애써 외면하거나 오히려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처럼 모르고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자신들을 위해 쌓아 올린 바벨탑이 너무 높고 견고해서 밖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는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저들을 어찌해야 할까요? 저들을 불쌍히 여기실 분은 하나님 당신 밖에 없습니다. 저들을 불쌍히 여겨주세요. 한국교회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예수님이 짊어지셔야 했던 십자가의 고난이, 십자가의 용서가 저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해주세요.

낮은 곳으로,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당신의 임재와 사랑을 기다립니다. 팽목항에서, 국회에서, 광화문에서, 청운동 사무소에서, 동거차도에서, 목포신항에서 만났던 당신을 닮은 사람들이 오늘 이 곳에 가득합니다. 부디 이들에게 청결한 마음을 주셔서 당신을 보게하시고 세미한 당신의 음성이 들려지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2017년 4월 11일
단원고 2-5 이창현 군 어머니 (최순화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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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전, 혼수로 마련한 그릇 세트가 있다. 신혼집 그릇으로는 조금 올드했으나 딴에는 멀리 내다본 선택이었다. 결혼 1, 2년 살 것도 아니고. 시간이 가도 질리지 않는 스타일이 좋겠다 생각했다. 아직도 질리지 않고 잘 쓰고 있으니 좋은 선택이었다. 신혼 때 반복되던 '끼임 사건'이 있었다. 무심코 설거지를 하다 보면 국그릇에 반찬그릇 하나가 끼는 사태가 발생하는데 웬만하면 빠지지 않는 것이었다. 세 번 정도 같은 사건이 발생했다. 처음 두 번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으나 결국 분리를 포기해야 했다. 국그릇을 깨고 반찬 그릇을 살렸던 것 같다. 세번 째는 경험으로 학습된 바가 있어서 둘 다 살렸다. 어설피 빼내려 애쓰다 결국 더 꼭 끼어버린다는 것을 알았기에 포개어 놓인 상태에서 바로 알아차렸고, 초동대처를 성공적으로 했다. 신혼 1년 안에 있었던 일이다. 그 이후로 18년 살림을 하면서 '끼임 사건'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남편이나 나나 설거지 때마다 저 둘을 따로 놓아두는 것을 거의 기계처럼 해냈다.


어느새 채윤, 현승이가 가사를 도울 정도로 자랐다. 필요에 따라 밥을 짓거나 설거지 하는 일을 맡아 해주곤 한다. 그러다 보니 18년 동안 잊었던 '끼임 사건'이 다시 발생했다. 채윤이가 설거지하며 벌어진 일인데 오랜만에 국그릇을 만난 반찬 그릇 녀석이 국그릇 안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나오질 않는 것이다. 강의 마치고 늦게 집에 왔더니 '엄마, 미안. 요즘 일일 일사건이야. 그릇 두 개가 끼었는데 빠지질 않아. 아빠가 그러는데 둘 중 하나를 깨야 한대." 으아, 진즉 설거지를 가르칠 때 알려둘걸! 신혼 때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채윤이도 여러 방법으로 분리를 시도한 것 같았다. 뜨거운 물 붓기, 깨끗하게 말려서 마른 천으로 감싸안아 빼 보기. 사실 그 사이 다른 애정하는 그릇들도 생겼고, 내게는 큰 미련이 없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한 놈을 포기해야지, 뭐! 이래저래 바빠서 망치로 한 놈 깨는 일을 미루고 있었다. 싱크대 앞을 얼쩡거리던 현승이에게 '끼인 애들'이 발견되었다. '엄마, 기름칠을 하면 안돼?' '어?! 기름칠생각 못 해봤는데.....  '굿 아이디어! 기름 줄 테니 니가 한 번 해 봐'


전에 안 해본 일을 참으로 좋아하는 현승이, 신나는 놀이 발견. 왠지 될 것도 같다 싶은 마음에 현승이 손에 넘기고 남편과 커피 마시며 수다수다 하고 있었다. 쏴아~ 물소리가 나서 보니 기름 떡칠을 해놓은 채로 물에 씻고 있는 것 아닌가. '야, 기름칠을 하랬더니 왜 물을 틀고 그래? 이게 모야?' 조금만 예민하게 반응해도 10배의 '짜증 나'로 반응하는 '중2 국가안보요원'이 그릇을 내팽개쳤고, 엄마는 품위를 내팽개쳤다. '잔소리잔소리 고래고래..... 니 방이나 정리해!' 엄마의 분노폭발은 턱도 없는 곳으로 튀어야 제맛이니까. '끼임 사건'은 그렇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 20여 분 후. 기적이 발생. 그릇 정리를 하며 쓱 밀었는데 끼어 있던 그릇이 쑥 빠지는 것이다.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글을 읽는 당신에겐 '웬일'이 글자일 뿐이겠지만 내겐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결혼 18년 만의 기적이다.


불현듯 가슴 콩닥거리던 1999년 봄의 노랑이 살아온다. 거실 겸 주방의 벽지가 파격적인 노란색이었던 하남시 낡은 상가 건물의 꼭대기의 신혼집. IMF 위기에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신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고자 들어간 집이었다. 신혼의 꿈을 담기에는 너무 낡고 지저분한 집이었지만 기꺼이 자발적으로 선택했다. 다만 벽지를 원하는 대로 해주시길 부탁드렸다. 예비신랑과 심사숙고 끝에 벽지를 골랐다. 띠 벽지를 두르고 위아래 다른 벽지를 하되 거실과 방 전체 아래쪽은 파랑이었다. 거실은 파랑에 노랑, 방은 파랑에 아이보리. 집이야 어쩔 수 없지만 아주 마음에 드는 벽지를 골랐으니 그 벽을 그려만 보아도 좋았다. 행복한 꿈은 며칠이었다. 어머님께서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전격, 이중벽지의 파랑 부분을 편집하신 것이다. 거실은 샛노랑, 방은 갈색에 가까운 아이보리. 꽝꽝꽝. 아니 척척척. 내 의견 따윈 묻지 않으시고 도배를 끝내 놓으셨다.


이 일로 남편은 난생처음 어머니와 언성을 높였다. 드라마에서 보던 그대로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점잖던, 착하고, 속 깊던 아들' 태도 변화에 분노하셨다. 샛노란 거실과 칙칙한 안방 벽보다 더 절망스러운 것은 어머니의 태도였다. 당신의 판단엔 1도 오류가 없으시다며. 꽃이 흐드러졌던 캠퍼스 벤치에 앉아 했던 어머니와의 전화 통화가 새롭게 살아온다. 눈 앞에 펼쳐진 봄 풍경, 마음에 그렸던 결혼 풍경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소리가 귀에 쟁쟁 울렸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샛노란 거실 겸 주방은 마치 의도된 파격처럼 신혼집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그 신혼의 주방에서 국그릇과 반찬 그릇이 끼는 사고가 일어났고, 빼려고 애쓸수록 더 꽉 끼어버려 결국 둘 중 하나는 죽어 나가야 끝이 나곤 했었지. 가끔 그 일을 복기하며 우리의 관계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결혼 초, 어떤 지점이 서로의 취약한 지점인지도 몰랐다. 갈등이 생기면 풀겠다고 애쓰다 더 꼬이기도 했다. 결국 하나가 깨져야 끝이 나는 건데, 늘 남편이었다. 먼저 미안하다고 손을 내밀었고, 나를 살리고자 자기를 깨뜨리곤 했다.

 

그때 그 벽지 사건에서 남편의 태도가 내편에선 공평이었지만 어머니 입장에서는 배신이었고, 그 사이에서 남편이 감당해야 했던 아픔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내게 일종의 회심이 일어났다. 사랑의 회심이었고 마음의 치유이기도 했다. 일하며 아이들을 키우는 것, 어머님 또는 동서와의 갈등, 남편의 중대한 진로변경. 결혼생활에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시시각각 들이닥쳤다. 마음에 꼭 드는 이중 벽지 골라놓고 기다리는 부푼 마음에 마음대로 끼어든 어머님의 독선같은 틀어짐. 이런 일들은 어머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선같았다. 남편의 한결같은 태도와 성품이 있어 일상의 평화가 지켜졌다. 그 처음 벽지 사건에서 그랬던 것처럼,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판단하고 따뜻하게 편이 되어주는 남편이 있어 오늘의 내가 있다. 이 경험을 울궈먹으며 강의도 하고 글도 쓰지만 우리의 결혼은 동화가 아니니까. 그후로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는 당연히 아니다. 때로 콱 막히는 답답한 지점에 서게 되고, 서로 취약한 지점을 건드려 상처를 내고, 얼음처럼 냉랭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여전히.


언제부턴가 '남편을 다 안다'고 하는 전제를 의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 마음 다 알아'가 아니라 '갈수록 당신을 모르겠어'로 바라보는 것이 이 시점의 사랑이 아닐까. 낯선 눈으로 바라보기. 주일 예배에 가 앉으면 남편의 뒷모습을 보게 된다. 설교단 위에 오르기 전 남편의 고독한 뒷모습을 낯설게 바라본다. '당신 자신이 되어요. 당신 자신이 되어 설교하세요' 둘 중 하나를 깨버려야만 했던 그릇 끼임 사건의 놀라운 해결. 이런 것들을 예사롭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가 애쓰고 노력하며 안 되는 지점에서 알 수 없는 기름칠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인생의 숲엔 언제나 새로운 길이 있다는 것. 어제 남편의 설교처럼 '모든 절망 속엔 이미 희망이 배태되어 있다는 것'.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온갖 역설과 신비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두 그릇을 다 살린 기적이 그 믿음을 확인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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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오셔서 이틀 밤을 주무시고 가셨다. 며칠 정신없이 보내고 문득 엄마 생각이 나 전화를 했다.


"얼라, 우리 딸이네. 잘 갔어? 나 태(워다)주고 늦게 가서 걱정을 혔지. 그게 벌써 며칠 지났어? 그렇지. 내가 가만히 누워서 우리 딸 생각혔어. 크~은 새우 까서 내 밥이다 놔주고. 게장 살 발러서 밥이 얹어주고. 내가 복이 많은 사람이여. 우리 딸이 보배여. 우리 딸 복 받어라. 복 받어. 울 애기들 잘 있지? 우리 착헌 김 서방은 교회 갔남? 내가 복이 많은 사람여. 우리 채윤이가 얼매나 착헌지, 우리 현성이가 얼매나 착헌지. 전화 혀줘서 고맙다. 나는 인자 전화도 잘 못혀. 지금 커피 사탕 먹느라고 그려. 밥 먹은 게 또 넘어올라고 혀서 커피 사탕 먹는 거여. 니가 사줬잖여. 그려, 느이 집도 인자 마지막으로 갔다 왔지. 너머 멀어서 다시는 못 가겄어. 내가 인자 시(세) 살 먹은 어른내(어린애)여. 그려 그려. 우리 딸, 복 받어라. 끊어."


꽂게찜을 해드려도, 좋아하는 새우를 구워드려도 사실 거의 드시지 못한다. 일단 씹지 못하시고, 씹지 못하는 걸 넘기다 보니 속으로 구역질을 하신다. 식사하다 말고 커피를 타오라 하신다. 엄마 방식으로 구역질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오직 드시는 건 사골국물에 밥 말아서 상치를 찢어 쌈장 찍어 드시는 것. 엄마가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것 같다. '엄마, 죽 사다 드릴까? 죽 어때? 무슨 죽 좋아?' '나 죽은 다 좋아하지. 아무 죽도 다 좋아하지.' 그러나 알고 보면 아무 죽도 다 제대로 드시지 못한다. 현승이가 이유식 할 즈음 뱉거나 토하는 것을 보면 아이의 속에서부터 밀어내는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요즘 엄마가 그렇다. 그래서 몇 끼 지나고는 애써 뭘 해드리지도 않고 그저 사골국에 밥 말아 상치에 드렸다.


그놈의 '이번이 마지막이여~ 고문'. 집에 모셔다드릴 시간이 가까워져 오면 애써 외면하던 감정이 불쑥 올라온다.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그 오래된 고문이다. 게장은 살을 짜서 간장에 섞고, 첫날 했던 꽃게찜의 국물만 내놓고, 왕새우를 굽고, 푹 익힌 당근 나물에 상치.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 총집합이다. 일단은 아이처럼 좋아서 입이 벌어지지만 역시나 거의 드시지 못한다. 옆에 앉은 현승이가 땡 잡았다. 몇 개월에 한 번 집에 오실 때마다 식사량이 꾸준히 줄고 있다. 귀는 더 어두워지시고, 단기 기억력의 현저한 감퇴. 같은 설명을 여러 번 해야 해서 개그콘서트 찍는 것 같다. 온 식구가 엄마의 움직임에 신경이 곤두선다. 불면 날아갈까, 가만두면 넘어질까! 엄마 가시고 채윤 현승 입을 모아서 하는 얘기가 '밤에 자다 할머니 화장실 가시는 소리가 들리는데. 탁탁탁 지팡이 소리로 알 수 있잖아. 그런데 지팡이 소리가 갑자기 한참 안 들리면 걱정이 되는 거야.' 실은 나도 그랬다. 채윤이는 지팡이 소리가 너무 오래 멈춰 있어서 화장실로 뛰어갔는데 손을 씻고 계셨다고.


할머니 모셔다 드리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채윤이가 "엄마, 할머니가 정말 많이 달라지셨어. 슬퍼. 그런데 엄마는 엄마의 엄마가 그렇게 달라지는 게 어때? 엄마 마음이 어떨까 궁금해." 그 말에 현승이는 "누...... 누나는 어떻게 그런 걸 물어봐? 어떻게 그걸 말로 물어볼 수가 있어? "라고 한다. 채윤이 마음 현승이 마음을 다 알겠고. 실은 내게 그 두 마음이 다 있다. 엄마가 좋아하는 것들이 그야말로 점점 그림의 떡이 되는 것이 슬프고 속상하다. 그 이면엔 말로 꺼내지도 못할 것 같은 두려운 무엇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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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을 보내며 고난주간에 있을 특별한 음악회를 소개합니다.

아래 초대의 글과 안내는 황병구 본부장님의 페이스북에서 가져왔습니다.

'열일곱 꽃다운 친구들' 이름으로 채윤이가 무대에 섭니다.

작년 꽃친을 하면서 친구들과 공동작업으로 만든 노래 '꽃다운 친구들에게'를 연주합니다.

음악회에는 못 오시더라도 위의 영상은 한 번씩 봐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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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우리 아이들을 고통 속에서 구하지 않으셨나요? 우리 죄악을 우리에게 묻지 않고 왜 열일곱 꽃다운 생명들을 거두어 가셨나요? 여러 날이 지나도 눈물 그치지 않았던 그 창백한 봄날을 기억합니다.

눈물과 아픔으로 맞은 첫번째 봄, 눈물은 이 땅의 이웃을 만나 큰 강물이 되었습니다. 또 한 해가 지나 두번째 봄, 무책임한 권력을 향한 분노는 들에 부는 높은 바람이 되었습니다. 또 한 해가 흘러 세번째 봄, 진실을 기다리는 간절한 그리움은 이제 노래가 되고자 합니다.

이웃의 아픔을 보듬고 의롭게 싸웠던 믿음의 벗들을 기다립니다. 더불어 손잡고 진실의 부활을 노래하는 자리로 초대합니다.

고난주간 세월호를 기억하는 그리스도인 음악회 [세번째 봄, 열일곱의 노래]! 고난주간 화요일 4월 11일 저녁 7시 30분 청파동 삼일교회예배당에서 함께 노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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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니어그램 세미나를 마치고 수제 쿠키 몇 개를 신경 써서 챙겨왔습니다. 다음 날, 여유 있는 아침 시간이 아니었지만 굳이 명품 접시에 담아 커피와 함께 먹었습니다. 1월에 에니어그램 1단계 강의 들으신 선생님께서 재수강으로 오셨는데 손수 구워오신 쿠키입니다. 지난 번 강의가 너무 좋아서, 라고 말끝을 흐리셨습니다. 강의 후기에는 '지난 강의 후에 기도 시간이 더 늘었고, 영적으로 업그레이드 되는 것을 경함하고 있으며, 기도 시간이 괴롭고 힘든 만큼 소중하고 귀하다'고 써주셨습니다. 참 감사하고 마음에 힘이 되었습니다.


에니어그램이 뭐라고 제가 이렇게 목숨을 걸겠습니까. 잠시 그것을 도구 삼아 자기 마음을 비춰보고, 정직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며, 차차 기도가 깊어진다면, 그리하여 조금씩 진리에 다가서는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면..... 단 한 분이라도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제게 오늘을 사는 가장 큰 의미 하나가 됩니다. 한 사람의 존재에 의미를 확인시켜준다는 것, 그것은 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일 것입니다. 이 고마운 쿠키에 저의 그 의미를 담아 경건하게 먹어본 것입니다. 다른 한 분도 계십니다. 에니어그램을 처음 접하시는 호기심과 겸손한 눈빛으로 제가 하는 모든 강의를 다 수강하셨지요. 1단계 강의 재수강을 한달음에 달려 오셨습니다. 헌데 이미 10년 넘게 에니어그램을 공부하고 심지어 강의도 하고 계신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습니다. 제게 허락된 이런 만남들이 참으로 과분합니다.


그리고 이런 걸 글로 쓰는 것은 오글거리는 일입니다. 자랑이며 동시에 선물로 오는 마음을 순수하게 지키지 못하는 탓입니다. 오글거림을 무릅쓰고 씁니다. 자랑임을 인정하며 공개합니다. 강의에서 떠들떠들 했던 것과 반하는 행동인 것도 압니다. 유형 설명을 하며 이렇게 교만하게 떠들떠들 하곤 하지요. '남들이 아무리 인정해주고, 사랑해준다 해도 우리 영혼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내가 나를 알아주고 사랑해주어야 할 뿐 아니라 우리 영혼을 궁극적으로 채우는 사랑은 하나님 사랑 외에는 없습니다'  진리인 줄 알고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단번에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지는 못합니다. 진리를 알지만 나는 여전히 사람입니다.


'오, 주님 우리가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우리 영혼엔 진정한 안식이 없나이다' 어거스틴의 고백 또한 진리입니다. 이 상황에 바꿔 고백해본다면 '오, 주님 우리가 당신의 사랑에 머무를 때까지 우리의 영혼엔 진정한 사랑받음이란 없습니다' 이 역시 내 영혼의 고백입니다. 문제는 누구라도 지금 당장 그것을 이루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당장 이루어낼 수는 있지만 지속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까이 존재하는 작은 사랑으로부터 시작하여 끝없이 그 사랑을 찾아가야하는 실존에 놓여있습니다. 아주 고갈되지 않도록 사랑을 채움받는 관계가 꼭 필요합니다. 그것 없이 하나님 사랑으로 비약하는 것은 보통 사람에겐 어려운 일입니다.


비 온 후 물웅덩이를 일부러 밟는 어린아이처럼, 엄마에게 혼날 것을 알면서도, 혼날 것을 알기에 더욱 그 웅덩이를 밟아 신발과 바지를 더럽히는 아이처럼 우리 마음은 부정적인 것에 더 빨리 달려갑니다. 상처받을 곳을 더욱 지향하고, 해도 안 될 일에 집착하고,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당장 품어내겠다고 주먹을 꽉 쥐곤 합니다. 사랑을 주는 것보다 먼저 오는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게 사랑을 채워주는 벗을 둬야 하고, 그런 장소를 마련해야 할 일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에니어그램 세미나를 준비할 때는 늘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하면서 신파조 넋두리를 하기도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과분한 신뢰가 제 존재에 사랑을 채우고, 의미를 채우는 시간입니다. 진심으로 감사하게 됩니다. 


내게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시작임을 배웠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착각과 교만이 내 소중한 사람들을, 무엇보다 나 자신을 얼마나 괴롭게 했는지 잘 압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받음이 필요한 나를 그대로 두고 채찍질 하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실은 매일 모진 채찍질을 가하려는 제 팔목을 붙들어 두는 일이 어렵습니다. 그러니 마음의 수련입니다. 사랑의 훈련입니다. 잘 해보겠습니다.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4

 



교회 울타리 안에서 공식 비공식적인 상담한지 오래다. 그 사이 내 귀에 깔때기하나가 생겼다. ‘사모님, 공동체가 뭐죠? / 저 올해 리더 그만 둘래요. / 교회와 세상이 다른 점이 뭐죠? / 사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 우리 교회는 성경공부가 너무 약한 것 같아요. 성경공부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교회로 가야겠어요.’ 여러 정황 속에 나온 말이지만 대부분 사랑받고 싶어요의 다른 표현임을 알게 되었다. 시쳇말로 관종이라고 한다. 관심이 필요한 종자들이라는데 실은 우리 모두 관종 아닌가. SNS에 사진 올리고, 일기인 듯 일기 아닌 일기를 올리는 이유도, 심지어 갑자기 프로필 사진을 제거하는 이유조차도 나 좀 봐 주세요일 터. 단지 봐달라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보여 달라는 것이다. 선한 관심 즉, 사랑을 보여 달라는 뜻이니 SNS 타임라인에 울려대는 알림은 그저 이 노래의 가사 자체일 듯하다.

  

곳곳마다 번민함은 사랑 없는 연고요

측은하게 손을 펴고 사랑받기 원하네

 

어떤 사람 우상 앞에 복을 빌고 있으며

어떤 사람 자연 앞에 사랑 요구 하도다

 

기갈 중에 있는 영혼 사랑 받기 원하며

아이들도 소리 질러 사랑 받기 원하네

 

찬송가 503세상 모두 사랑 없어’. 교회에서 흔히 불리는 찬송이 아니다. 곡의 길이나 특유의 늘어지는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지 싶다. 이렇게 적나라한 가사는 불편하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사랑이 필요하다고 노래하는 것 같지만 결국 이것은 나도 사랑이 필요한 존재라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냐로 시작하는 가사는 내 깔때기 귀에는 이렇게 들린다. 세상이 너무 추워. 나는 사랑이 필요해!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불편하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적에게 약점을 드러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고 무력함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온갖 에두르는 방식으로 표현하는지도 모른다. 괜히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거나, 토라지거나, 일의 성공에 목숨을 걸거나, 방어막을 치고 동굴 속으로 들어가거나. 이 대목에서 다른 찬양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내게 무얼 원하나

공허한 그 눈빛은 무엇으로 채우나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 마음 주가 여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모두 알게 되리 사랑의 주님


나는 이 찬양을 부를 때마다 그들를 대입했다가 다시 한 발 물러나 그들을 그들로 부르기를 반복한다. 주님, 아니 사랑이 필요한 그들을 온전히 타자로 세울 수는 없는 탓이다. 나 역시 그러하다. 사랑이 필요한 존재이며 동시에 그들의 사랑을 채워줘야 하는 딜레마에 놓이는 것이다. 내 코가 석자인 주제에, 누구 못지않은 관종인 주제에 사랑을 주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오늘의 찬송이 등을 떠민다.

 

먼저 믿는 사람들 예수 사랑 가지고 나타내지 않으면 저들 실망 하겠네

저들 소리 들을 때 가서 도와줍시다 만민 중에 나가서 예수 사랑 전하세

 

쥐어 짜내서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내리는 비에 장독대 뚜껑을 열어두면 빗물이 가득차고, 가득 찬 후에는 흘러넘친다. 흘러넘치는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이랍시고 쥐어짜 내주고 난 후에는 내가 너에게 해준 게 얼만데본전 생각나기 십상이다. 우리 영혼은 장독대 같은 빈 그릇일지 모른다. 장독대가 스스로 자신을 채울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사랑을 생성해낼 수 없는 존재이다. 오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아가페라 불리는 오는 사랑이 가득 채워질 때 흘려보내는 유통자,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이미 우리에게 부어져 있다. 우리 존재에 이미 부어져 있는 사랑을 믿는 것은 사랑이신 분을 믿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C 님께서 제작한 짤들입니다.

엔돌핀 폭발 선물이 되었습니다.

(사랑한다. 췡!)

설명이 필요 없는 정신실적 짤입니다.

'너 자신이 되어라'





작년 북토크에서 우연히 출시한 대사 '여보, 나 당신 버릴 거야'를 그렇게들 좋아하실 줄 몰랐습니다.

북토크 반응 보고 <새롭게 하소서>에 나가서도 해봤거든요.

눈물 찍어내는 장면도 있었는데,

역시나 가장 은혜를 많이 받으시고 반응 보여주신 부분입니다. 




뭔가 좋은 일이 있을 때 강렬하게 표현하고 싶으나

선천적으로 잘 되지 않으시는 분들은

가져다 쓰셔도 되겠습니다.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다양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안면 근육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짐 캐리도 비슷한 선물을 받았다고요.

저의 안면 근육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정말 입니다.

정말 정말 하나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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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햇살 받으며 책을 앞에 두고 앉았는데 글이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허공을 헤매고 다니던 시선이 커피장의 빨간색 원두 봉투에 꽂혀 머문다. 폰을 꺼내어 커피봉투를 찍었다. 그 옆엔 빨간색 카플라노가 있다. 그래, 너도 찰칵! 소파 옆 빨간 스탠드, 마주보는 책꽂이의 어스시 전집, 그릇장의 빨간 나비 커피잔. 빨강에 홀려 왔다갔다 찰칵찰칵했다. <자기 결정>, <아니마와 아니무스>, 알랭드보통의 <불안>, 오은 시집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빨간 책들만 골라 뽑아 읽어본다. <신이 된 심리학>의 빨간색이 어쩐지 마음에 든다. 그리고 벽에 걸린 액자 <탕자의 귀향> 속 아버지의 겉옷으로 빨간 색 마침표를 찍는다.


어느 토요일 오후에 있었던 일이다. 찬양연습을 위해 교회에 있는데 누군가 나를 찾아왔단다. 아는 얼굴조차도 아직 낯선 이곳에서 나를 찾.아.올 사람이 있던가? 이 애매한 시간에, 이 낯선 곳으로? 멍한 표정으로 '찾아온 이'를 맞았다. 하도 멍한 상태라 빨리 알아보지도 못했다. 코스타 K간사님이시다! 아, 맞다. 이 근처에 사신다고 했었다. 그렇다 해도 이 얼마나 상상 밖의 시간과 공간인가. 교회 건물의 약국에 오셨다 혹시나 하고 들르셨단다. 나로서는 주일 아닌 날 낮에 처음으로 교회 있어본 것이었다. 어쩌면 이 시간에 찾아오셨나요! 찰나 같은 만남, 반가움에 감탄사만 연발하다 짧은 몇 마디 나누고 끝났다. [사모님, 올해는 못 오신다고요./네. 간사님은 올해도요?/네, 저는 물론...... 아, 그렇군요.] 이 짧은 만남이 추억의 빨간색을 소환해냈다.


사실과 전혀 다르게, 나는 K간사님 입고 오신 옷이 빨간색 조끼라고 저장했다. 그리고 집에 와 거실 탁자에 앉아 책을 읽지 못하고 집안의 빨강들을 찾아 헤맨 것이다. 작년 코스타 준비를 위해 K간사님께 연락이 왔을 때, 당연히 미국에서 온 메일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에 계시다기에 잠시 다니러 나오셨구나,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한참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 미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컨퍼런스 기간마다 휴가를 내어 섬기는 것은 물론이고. 모든 간사님들이 그러하듯 일 년 내내 코스타에 연루되어 보이지 않는 일들을 하신다는 것. 코스타 다녀올 때마다 한 번 제대로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 제대로 소회를 남기지 못한 이야기가 빨간 조끼 간사님들에 관한 것이다. 갈때마다 강렬한 질문으로 안고 돌아오는 지점이기도 하다. 기간 내내 느껴지는 저들의 헌신인데, '헌신' 앞에 붙일 형용사가 마땅치 않다. 열정적인? 수준 높은? 보이지 않는? 전문적인? 어떤 말도 20% 부족하다. 


강사가 자비로 항공료를 부담하고 날아왔다고 하면 학생들이 눈이 휘둥그래진다. 코스타가 비난을 받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사실 강사의 자비량보다 더 놀라운 것은, 비할 수도 없는 것은 간사의 자비량이다. 솔직히 강사들이야 '코스타 강사'라는 타이틀 하나 얻는 것만으로도 크게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교계에서 청년 상대로 강의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경험이기도 하다. 기관이나 교회에 속해 있지도 않는 나같은 강사는 무리데쓰네 하면서, 남편 상에게 아리가또 스미마생 스미마생 하면서 다녀오게 된다. 남모르는 엄청난 희생이라 여기며 참석하곤 했었다. 그러나 실은 얻는 것이 훨씬 많다. 내가 굳이 강사 이력에 쓰지 않아도 검색하면 다 나오는 세상인지라, 알아서 알아주기도 하며, 일주일 진하게 유학생들과 부대끼고 오면 일 년 울궈먹을 강의 컨텐츠를 득템하는 것이 사실. (영업비밀 다 밝힘) 그런데, 간사님들은 무엇을 얻을까? 도대체 무엇을 얻기에 저렇게 앞뒤 안 가리고 가진 것을 내어놓는 것일까?


K 간사님은 단지 코스타를 섬기기 위해서 여름마다 휴가를 내어 날아간다니! 엄청난 희생을 감수한다는 내 명분이 부끄러웠다. 코스타의 빨간 조끼는 나의 이런 자기기만을 일깨우는 레드카드이다.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연탄재의 입을 빌어 안도현 시인이 묻는 것처럼 빨간 조끼는 내게 묻는다. '너는 한 번이라도 사심 없이 너를 내어준 적이 있었느냐' 희생이라는 포장지 뒤에 감춘 내 사심을 묻는다. 여기까지가 빨간 조끼에 대해 풀어 놓지 못한 그간의 이야기이다.


헌데 K 간사님이 잠시 교회에 다녀가신 오후, 빨간색과 더불어 '열정'이란 말이 마음에서 떠나질 않는다. 열정이란 말에 애증의 감정이 있다. 강의를 하거나 특히 지휘를 하고나서 '열정적인'이라는 평을 들을 때가 많았다. 왜 그렇게들 말하는지 알지만 나도 모르게 그 단어를 자기비난으로 가져오곤 했다. 사람들을 몰아부친다, 에너지가 과하다..... 이런 평으로 듣기 때문이었다. 내가 열정적인 것을 스스로 잘 안다. 좋아하는 것에 몰입하지 않고 빠져들지 않는 방법을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열정이 클수록 그림자가 짙고 크다는 것을 알기에 갈수록 머뭇거리게 된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그러하다. K 간사님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빨간 조끼 간사님들을 향해 부럽다는 마음이 들었다. 아무 것도 돌아오는 것 없지만 그저 나를 내어줄 (사람이든 일이든) 무엇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열정의 강사, 열정의 지휘자가 타인의 열정을 부러워하다니! 이것은 무슨 아이러니인가. 


새로운 열정에 대한 목마름일 것이다. 앞뒤 안 가리던 젋은 날의 열정이 아니라 불을 향해 날개짓 하는 열정이 아니라 말이다.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을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가 가졌을 열정, 메마른 땅에서도 소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열정. 어제 엄마에게 다녀왔다. 총기는 여전하지만 많은 것이 가물가물해지는 엄마가 '신실이가 나이 몇이여. 니가 마흔 둘이여?' 해서 한참 웃었다. '엄마, 이제 신실이가 오십이여' 하니까 '얼라, 오십이여?' 하신다. 우리 엄마 입으로 듣는 내 나이가 새삼스럽다. 추억의 열정에 머물러 있지 말고 나이에 맞는 오늘의 열정을 매일 새롭게 배우고 일깨워야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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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윤이의 긴 방학 이야기, '방학이 일 년이라서'는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채윤이는 더 이상 꽃치너가 아니라 검정고시 준비하는 외로운 청소년 백수입니다만.


그녀의 꽃다운 나날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고,

내일의 포스팅이 남은 까닭이고,

아직 나의 글빨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포스팅 하나에 자랑과, 

포스팅 하나에 뽐뿌질과,

포스팅 하나에 어머나, 어머나....

일 년 방학이 이렇게 좋은 것이었어?! 


꽃친에서는 지속적으로 시리즈 영상물을 제작 중입니다.

3편부터 차례로 공개되고 있는데,

2편의 1부가 따끈하게 나왔습니다.

[여행]편인 이편은 '꽃친의 재미'란 부제로 만들어진 예능다큐입니다.

베트남/홍콩 해외여행 밀착취재 영상이기도 합니다.


인생, 한 번 멈추어 다짜고짜 쉬고 놀아볼 만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열 일곱 청소년이든, 중년의 아빠든, 엄마든.











아끼고 존경하는 목사님 부부가 있습니다. 목사님과 사모님보다는 '두 시인'이라 부르면 좋을 사람들입니다. 배움을 얻지 못하는 만남이란 없지만, 만나 대화할 때마다 내 마음에 특별한 깨달음의 씨앗을 뿌리는 분들입니다. 나이는 우리 부부보다 한참 어리지만 존경이란 말이 아깝지 않습니다. 합정동의 화력발전소 앞 오래된 주택에서 백만 볼트 배터리 장착한 두 아들을 키우고 살았습니다. 내외가 둘 다 천생 시인이었고, 집사님(이라 쓰고 사모님이라 읽어야)은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남달라서 흙과 햇볕과 바람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그런 공간에 갇혀 에너지 폭발하는 아드님들을 키운다는 것은 우울감을 부르는 일이다 싶어 늘 조금씩 걱정이었습니다. 이사 하라고, 이사 하라고, 남편이 시인 목사님을 찔러대곤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살던 집을 허물고 다시 집을 짓는다는 주인의 통보를 받은 것입니다. 남편과 나는 쾌재를 불렀습니다. 교회사임하고 쉬던 어느 날,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질 시인의 집에 초대받아 갔습니다.


밖에서 보던 집이 아니었습니다. 현승이가 살짝 옆으로 오더니 '엄마,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이나 아니면 일본 영화에 나오는 집 같아.' 소곤소곤합니다. 에너지 백만 볼트의 아드님들 덕에 멀쩡한 가구가 남아 있을 리 없고, 번듯한 인테리어 소품 따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멋스러운 집이었습니다. 꿈이 꿈틀대고 있다고 할까요. 광목천으로 가려진 선반, 책꽂이도 없이 멋대로 쌓여 있는 시집을 비롯한 책들. 바로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집입니다. 집은 집이 아니라 사는 사람이라는 진리를 새롭게 실감합니다. 그리고 시인의 가족은 한 달 만에 합정동의 좀 더 넓고 쾌적한 빌라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좋은 가격에 한 달 만에 집을 구하고 이사.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걸 보면서 옆에서 얼마나 부러웠는지요. 석 달이 넘도록 집이 나가지 않아 마음 졸이던 우리 상황과 비교되었지요. 아버지 하나님의 차별대우에 섭섭하고 화가 났습니다. 내 일처럼 기쁘면서도 진정 내 현실을 떠올리면 괜스레 마음에 찬바람이 불었습니다.


'이 녀석아, 내가 누구냐! 네 하나님이다.' 다 시기가 있다는 듯 우리집 이사 역시 해결되었습니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손놓고 좌절한 시점에 적절한 만남, 적절한 다리놓음, 고마운 배려로 된 일입니다. 남편이 무척이나 원했던 교회 앞 동네, 걸어서 5분 거리입니다. 3개월 체증이 내려가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안도감과 기쁨도 잠시. 이사할 집의 치수를 재러 가서 자세히 보니 처음 슬쩍 봤던 것보다 더 낡았고, 각이 안 나오는 공간이며, 뭔가 상당히 견적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거실 가득한 책꽂이가 제대로 자리를 잡을지, 주방과 거실이 하나인 휑한 공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근심이 많아진 찰나, 새로 이사한 시인의 집에 잠시 들렀습니다. 역시나 평범한 구조의 빌라는 이야기거리 꿈틀꿈틀 하는 공간이 되어 있습니다. 부럽다, 부럽다 하면서 우리 집 공간 배치가 걱정이라는 얘기며 이사 이야기로 수다를 이어가는 중이었지요. 내 귀를 뚫어 마음과 영혼까지 헤치고 들어오는 시인의 목소리입니다.


"그 집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본 시점이었어요. 그 공간 안에서 펼칠 수 있는 상상력이 바닥 났을 때 이사를 하게 된 거예요."


아, 상상력! 볕도 들지 않은 좁은 집을 영화 속 한 장면으로 만들었던 것은 끝없는 상상력이었구나!  한 대 얻어 맞은 듯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이 한 마디로 온갖 선입견의 성들이 무너져내립니다. 반듯한 사각형의 아파트 거실, 자본주의적으로 획일화 된 집의 형태에만 고착된 그림이 사라지고 온갖 상상력의 풍선이 날아 오릅니다. 일단 이사 하고 짐을 넣어봐야 할 일이지만, 상상력이 뭔가 크게 일을 낼 것 같은 예감입니다. 이사 전날에 집사님 두 분의 도움으로 아이들 방에 페인트 칠을 하게 되었습니다. 벼르고 벼르던 일인데, 마음에 쏙 드는 거실 탁자를 마음에 드는 가격에 구입해 놓은 터였고요. 이사 당일, 짐을 들이며 순간순간 막막함을 견뎌야 했습니다. 포기하고 않고 상상력의 풍선을 날려대다 보니 아주 마음에 드는 거실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한 통속이던 거실과 주방이 분리되기까지. 벽에 붙어 있던 그릇장이 등판때기를 드러내며 주방을 가려주었고, 쓰던 컴퓨터 책상은 안성맞춤 아일랜드 식탁으로 거듭납니다.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 이런 거실이 나오다니! 나의 상상력이 대견하여 누구라도 붙잡고 자랑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직 거실만 살려놓은 상태입니다. 채윤이는 나무틀 창문이 한 벽을 차지하고 있는 제 방에 도통 들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오래 된 싱크대에 좁고 꽉 막힌 주방이며, 세탁기 들어 앉은 화장실 등은 정을 붙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상상하라, 끝까지 상상하라! 채윤이를 데리고 2001 아울렛에 가 마음에 드는 커텐을 고르게 하고 달아주었습니다. 칙칙한 창이 가려지니 비주얼이 달라집니다. 토요일 오후에 비데 설치하러 오신 기사님. '토요일인데 오후까지 일하시네요.' 한 마디 건넸는데. 쌓인 게 많으신 모양인지 토요일 근무에 대한 고충을 쏟으십니다. 급 친해진 형국. 화장실을 보시더니 '와, 한 벽이 창문이네요' 하십니다. '그러게요. 이런 화장실 처음 보시죠?' 했더니 '좋죠. 습하지도 않고.....' 그 말에 다시 귀가 뻥 뚫립니다. '아, 맞다! 창문 열고 건조시키기 좋고, 욕실이 늘 뽀송뽀송하겠네. 다음 날 아침에 창문 가득 들어오는 햇살을 마주하고 (우리 집에서 해가 제일 잘 드는 곳이 화장실) 일을 보는데, 해.....행복하대요. 자, 이렇게 화장실도 애정으로 접수.


문제는 주방입니다. 거실과 분리되기는 했지만 가 서고 싶지 않은 싱크대 앞입니다. '나의 성소 싱크대'는 다 틀렸다, 싶지요.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부엌 한 벽의 장식용(으로 추정되는) 기다란 창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1도 기대하지 않고 밀어봤습니다. 어, 혹시 열리는 거 아냐? 아, 아니구아. 열리지 않습니다. 혹시? 하고 옆으로 밀어봤더니...... 대애박! 옆으로 밀리며 창이 열리는 것입니다. 소리 지를 뻔했습니다. 주님, 밖이 보이는 주방입니다. 감사합니다. 다육이 두 개를 가져다 창틀에 세우고 포스트잇에 몇 글자 적어 싱크대 문에 붙이니. 오, 나의 성소 싱크대 앞!입니다. 주방까지 애정으로 접수. 이로써, 집의 구석구석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심심하면 남편과 마주앉아 작명놀이 하곤 하는데요. 몇 년 전에 지은 이름입니다. 내 집 그리스도의 마음. 물론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의 패러디이고. 내 마음에 그리스도를 모셔야겠지만 내 집 구석구석이 그리스도의 마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영적이라는 것이 물적인 것과 반대개념이 아니기에, 영적인 삶은 고통과 혼란을 포함한 일상의 모든 곳에서 시작하는 것이기에 말입니다. 내 집구석이 그리스도의 마음이 된다면! 제가 입버릇처럼 말하듯 '누추하여 거룩한 현재'를 삶이 아니겠습니까. 결혼 후 열한 번 이사하는 동안 단 한 차례도 수월하게 된 적이 없다며, 좌절도 낙심도 했지만. 그 어떤 집보다 더 애정하는 내 집이 될 예정입니다. 내 집 그리스도의 마음, 내 집구석 그리스도의 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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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모르는 것처럼 어려운 병이 있을까요. 영혼을 팔아서라도 자기 안에 갇혀 있겠노라 결심한 사람에겐 약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자기를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없습니다. 브레넌 매닝의 말처럼 '죄의 본질은 어마어마한 자기중심성'이니 말입니다. 정신적 건강과 영적 성장을 위해 진짜 자기를 알아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에니어그램은 진짜 자기를 발견하기 위해, 진짜가 아닌 나를 알려주는 지혜의 거울입니다.


2017년 상반기 에니어그램 세미나 일정이 다음과 같습니다.

1단계 수강자가 2단계를, 1,2단계 수강하신 후에 심화과정 수강하실 수 있습니다.



[일시]

. 기본 1단계 : 2017년 3월 29일(수) 오전 10시~오후 5시
. 기본 2단계 : 2017년 4월 26일(수) 오전 10시~ 오후 5시
. 심화과정 1 : 2017년 5월 31일(수) 오전 10시~오후 5시

[
장소] 100주년기념교회 사회봉사관 5층 세미나실(합정역 7번 출구에서 3분)

[인원] 각 강좌 선착순 15명  

[수강료] 각 강좌 12만 원

[문의] 010-4235-8020   larinari.tistory.com

[신청]

에니어그램 내적여정 1단계 : 마감 되었습니다.

에니어그램 내적여정 2 신청하러 가기

에니어그램 심화과정 신청하러 가기



아울러 페이스북에 페이지 개설했다는 소식을 알려드립니다.

누구랄 것 없이 우리는 모두 상처 입은 사람입니다.

상처와 고통은 인간의 조건의 조건입니다. 

그런 의미로 온전히 건강한 사람도, 온전히 아프기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내 상처를 보듬을 힘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

더 아픈 이를 향해 손을 내미는 것이 치유의 시작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들'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페북 사용하시는 분들은 페이지 '좋아요'를 눌러주시면

세미나를 비롯하여 함께 하는 여정 안내를 바로 받아보실 수 있고, 

여정의 동반자가 될 것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들 페북 페이지 바로 가기



정신실의 에니어그램 내적여정의 과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강의 내용

1단계

  선물 또는 덫으로서의 성격 :

  에니어그램의 9 유형

 2단계

  적응 또는 방어로서의 성격 :

  에니어그램의 날개와 화살 / 공격, 의존, 움츠리는 유형들 

 심화단계

  습관이 된 정서, 패턴이 된 생각 :

  에니어그램 유형의 어린 시절

 영성단계

  성격 너머, 하나님 형상인 나 :

  에니어그램 유형의 왜곡된 하나님 상




대안학교도, 홈스쿨도 아닌

그저 푹 쉬기로 작정하고 일 년을 보내는 청소년 인생학교 '꽃다운 친구들'입니다.

채윤이는 일명 꽃친 1기로 일 년 푹 쉬는 행운을 얻었었죠.


꽃친에서는 작년 1년의 긴 방학생활을 꼼꼼하게 사진과 영상으로 담아왔습니다.

그것들을 모아모아, 3부작의 영상물이 나온다고 합니다.

3부작의 영상물을 차례로 공개하게 되는데

3부 [방학이 일 년이라서_꽃친의 마음]편이 먼저 나왔습니다.

청소년과 관계 없는 생의 주기를 사는 분이라도 눈여겨 볼만 합니다.

왜냐하면

저도 나오고, 남편도 나오고, 채윤이도 나오니까요. ^^


아울러 저는 1기 최대 수혜자 채윤이 엄마로서 꽃친과의 연을 끊지 못했습니다.

올해 꽃다운 친구들의 '공동대표'로 함께 하는 영광을 누립니다.

영상, 즐감하시고 카톡이든 어디든 널리 공유하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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