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정동에서의 마지막 아침, 그러니까 이사하던 날 아침에도 여전한 햇살 거실이었다. 그래도 마지막인데 서운할 정도로 여전한, 무심한 아침이었다. 맑은 날 아침마다 책꽂이 중간까지 다가와 어떤 책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던 아침햇살이다. 그걸 마주할 때마다 찰크닥찰크닥 사진을 찍었고, 그렇게 시작한 하루가 많다. 스포트라이트가 순식간에 옆 책으로 옮겨지거나 모양이 바뀌기 때문에 서둘러 찍워둬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저자들 위에 얹힌 그림자 그림을 가만히 바라보는 시간은 지금 여기에 머무르는 시간이다. 아침에 잠깐, 그리고 해질녘 한 순간 지금 여기에 머무르는 영성수련의 시간이다. 이 집을 향한 애정이 폭발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삿짐을 먼저 보내고 레슨 갔던 채윤이를 태우고 새로운 곳 분당으로 향했다. 점심으로 어디서 무얼 먹을까? 여기서 먹을까, 가서 먹을까. 이런 의논을 하던 중이었다. '엄마, 나 밥이 안 먹혀. 어제부터 이상해. 놀이기구 탈 때 온몸의 장기가 다 붕 떠있는 느낌, 그런 느낌이야.' 이사 전날에 채윤이는 혼자서 강에 나갔다 왔다. 그 마음 나도 안다. 며칠 전 나도 절두산 성지와 마포 한강변을 찾아 작별인사를 하고 왔었다. '장기가 붕 뜬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단다. '그건 슬픔이야' 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다. 우리 모두 조금씩 슬프단 얘길 했다. '그래도 엄마, 5년 동안 내가 가장 많은 일을 겪었어. 예중 입시 준비부터 예중 3년, 예고 입시, 그리고 꽃친. 어제는 일기를 썼어. 쓰면서 정리해보니 이사올 때와 이사 갈 때가 너무 다르다는 얘기로 끝나는 거야.' 그래, 채윤이의 동인리버빌 5년은 도전과 모험의 시간이었다! 다시 한 번 장하다, 우리 채윤이.


밥맛을 먼저 잃은 아이는 현승이다. 겨울방학 내내 봄방학 얘길 자주 했었다. 겨울방학 개학하던 날, 아침에 빵 한 조각을 먹었고 학교에 급식도 없었는데 저녁까지 뭘 먹질 않았다. 배가 고팠을텐데 저녁조차도 무성의하게 먹는다. 하루 이틀 후에 고백을 해왔다. '엄마, 입맛이 떨어진 이유를 알았어. 이제 며칠 있으면 봄방학인데. 봄방학 하는 날이 친구들과 마지막이야. 벌써부터 친구들이 인사를 해. 가서 잘 지내, 이렇게 말을 하니까 밥을 잘 못 먹겠어. 입맛이 없어져.' 눈 뜨면 연락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같이 자곤 하는 옆동에 사는 베프와는 만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일부러 그러는구나 싶어서 현승이 없는 자리에서 세 식구가 모여 대신 슬퍼하기도 했다. 아이들 어렸을 적에 읽었던 슬픈 그림책 <안녕 또 만나> 같다고.


벌써 몇 달 전, 분당행이 결정되고 현승이에게 알리던 날, 영화 한 편을 찍었었다. 차안에서 얘기했는데 바로 통곡을 했다. '한 번도 전학하지 않는 친구가 태반인데 나는 왜 자꾸 이래야 하느냐.' 생떼로 시작해서 넋두리를 하더니 시를 읊는다. '내가 이 골목에 서 있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엄마는 몰라. 이 골목에 서 있지 않은 나를 상상할 수 없어' 그리고 몇 달 동안 간간이 통곡하고 간간이 생떼 쓰며 시를 읊었다. '친구들과 놀면, 행복한 그 순간이 이미 그리움이야' 사춘기 문학 소년의 감성 터지는 원망과 불평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몇 달을 지냈다. 이사가 지연되고 지연되면서 주일만 가는 새로운 동네 새 교회에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급기야 '이사 가고 싶다'란 말이 나왔다. 아, 얼마나 다행인가. 말도 안 되게 이사 진행이 안 되어 마음을 졸이다 아빠는 병까지 얻어 앓아 눕기까지! '이사 가고 싶다'는 말이 현승이 입에서 튀어 나온 것만으로 졸였던 마음, 바닥에 눌러 붙은 근심의 찌꺼기 따위 오케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5년 전 명일동에서 이사 와서 앓았던 이별 증후군은 치명적이었다. 이사 한 달 후에 쓴, 초딩 3학년이던 현승 님의 시는 언제 떠올려도 쓸쓸하다.



이사

 

                                        김현승


이사한 곳을 지나가면 뭔가 마음에 걸린다

마치 무엇을 두고 온 것 같다

수영장에 수영복을 두고 오 듯

학교에 공책을 두고 오 듯

이사한 곳에 마음을 두고 왔다


현승인 늘 이별을 두려워한다. 변하지 않는 관계가 세상에 있는지 자꾸 묻는다. 분당 이사를 받아들이고 난 후에도 '엄마,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어. 친구는 아무리 좋아도 또 헤어지게 돼. 그렇게 생각하니까 김포 수우세(외가의 사촌동생 셋, 수현 우현 세현)이 참 좋아. 외갓집은 우리가 이사를 해도 다시 만날 수 있잖아. 그리고 언제 가더라도 그대로일 것 같아. 수우세 셋이 놀았다 싸웠다 하고, 삼촌한테 혼나고. 외할머니가 현성아, 그러면서 돈을 주시고..... 김포가 참 좋아. 엄마, 나 오늘 혼자 버스 타고 가서 김포에 가서 잘게.' 현승이의 슬픈 시같은 말들을 그저 듣는다.


남편의 마음은...... 심심상인이다. 말이 필요 없다. 목회자와 가장의 정체성, 둘 사이에 끼어 있는 그의 번뇌는...... 나의 것이기도 하다.  '이번에 이사 가면 <당신을 기다리는 것들> 같은 거실, 소파, 책상 만들어 줄게. 정신실 작가 글쓰는 자리 꼭 만들어 줄게' 이 말만 반복한다. 심심상인이다.


이삿짐이 다 나가고 텅 빈 집에 홀로 남았다. 청소를 좀 더 하고 나올 요량이었다. 먼지를 털고 바닥을 닦으며 고마웠던 집에 안녕을 고했다. 이 집에 와서 첫 책이 나왔고, 줄줄이 다섯 권의 책이 따라 나왔으며 '작가'라는 호칭이 민망하지 않아졌다. 떠나고만 싶었던 한국교회에 대해 절대 절망의 소망을 희미하게 품게 된 시간이기도 하다.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웠고 평안했다. 집이 그렇게 만들어 준 것도 아닌데 그냥 집에 고마웠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툭툭 털고 나오려는데..... 이삿짐 센터에서 놓치고 간 것이 있다. 주방 벽에 붙어 있던 'Present is Present'이다. 5년 세월 동안 얻은 소중한 만남이 어느 날 들고 온 문구이다. 한참 들여다 보았다. 이 집에서 주시는 그분의 마지막 메시지 같다. 늘, 언제나 '현재'가 가장 좋은 선물이다. 지나간 날은 지나간 선물이다. 오늘이 최고의 선물이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종이를 떼내었다. 5년의 선물이 지나갔고, 오늘이라는, 다시 새로운 선물이 왔다. 두려움 없이, 기대감으로 발을 떼도 된다고 하는 것 같다. 이제 맞이하는 오늘이 선물이고, 선물은 늘 '오늘'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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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해 들어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된다고 한다. 삶의 희망을 다 잃고 극단적인 선택 앞에 서있는 사람에게 말이다. 진심어린 경청은 말하는 이를 절망에서 일으키고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게 한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어차피 답은 없지만 이렇게 털어놓으니 그나마 살 것 같다.’ 언젠가 속으로 이랬던 적이 있는 것 같고.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런대? 어쩔 수 없는 것 아는데 속상하다고. 그러니까 그냥 좀 들어달라고.” 열폭했던 기억도 있다. 좋은 벗이란, 좋은 선생님이란, 좋은 상담자란 잘 들어주는 사람이다. 우리는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동시에 우리에겐 잘 들어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소위 걸어 다니는 고민상담소라 불리는, 상담의 은사가 있다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모든 짐 내려놓고

주 십자가 사랑을 믿어 죄사함을 너 받으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노라

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 큰 은혜를 베푸시리

 

내 말을 가장 잘 들어주는 친구는 누구인가. 부끄럼 없이 나를 다 드러낼 수 있고, 어떤 경우에도 나를 판단하지 않을 것 같은 친구를 그대는 가졌는가. 그런 친구 한 분을 소개하며 만남을 주선하는 찬송이다. 기도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있지만 이 찬송에서 기도는 진실한 친구와 의 만남이다. 모든 것을 쏟아놓아도 좋을 진실한 친구, 예수님 말이다. ‘~어룩 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만유의 주, 전지하시고 전능하시며 무소부재하시는하나님. 주일 대예배 장로님의 대표기도 속 하나님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저 높은 곳에 멀리 계신 하나님, 어쩐지 내겐 어려운 하나님. 내 지질한 얘기는 다 넣어두고 오타 하나 없이 정리된 보고서 들고 찾아뵈어야할 것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친구로 오신 하나님, 예수님이신 하나님 말이다.

 

청년 시절 교회에서 24시간 릴레이 기도회를 한 적이 있다. 중대 사안을 놓고 온 교인이 함께 기도하자는 취지였다. 퇴근 후, 내 담당 시간이 되어 교회 기도실 마룻바닥에 가 앉았다. 릴레이에서 내가 달릴 분량이 한 시간. 준비된 공식 요구사항(기도제목)을 다 읊었는데 시간이 몇 분 지나지 않았다. 개인적인 현안과 기타 등등의 기도를 해봐도 남은 시간이 길다. 앞뒤, 옆으로 슬슬 몸을 흔들며 기도 리듬은 타고 있지만 마음은 천지사방을 헤매는 분심에 오락가락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삐그덕 기도실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삐걱삐걱 천천히 마룻바닥을 걷는 소리. 풀썩 방석이 놓이는 소리가 난다. 그 위로 퍽 하고 짐짝 하나가 패대기쳐지는 둔중한 소리와 느낌이 내 자리까지 전달되어 온다. 그리고 바로 한숨 가득한 한 마디 주님, 너무 힘들어요.’ 그 한 마디의 무게로 기도실 마룻바닥이 푹 꺼지는 느낌이었다. 청년부 후배였다. ‘주님, 너무 힘들어요이 한 마디에 그의 하루, 그의 고민, 마음의 짐이 멀뚱거리던 내게까지 온몸으로 전달되었으니. 주님의 마음은 저 한 마디에 얼마나 무너지셨을까.

 

작심하고 앉은 기도의 자리에서 냉랭한 기운 떨쳐버릴 수 없을 때, 그럴듯한 말로 또박또박 기도할 수 있지만 가슴은 도통 뜨거워지지 않을 때 떠올린다. 기도실 마룻바닥에 쿵하고 떨어지던 그 수고롭던 몸과 영혼의 무게감을. 기도의 자리에서 그분을 마주하는 것은 이렇듯 잔뜩 지고 있던 짐을 일단 내려놓는 일. 그리고는 짐 보따리 안에서 좋은 것, 고운 것 먼저 꺼내 보이며 이미지 관리할 것이 아니라 자루 째로 쏟아놓으라 한다. ‘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노라감사와 함께 근심 걱정을, 기쁨과 함께 슬픔을, 사랑과 순종의 열매와 함께 단 한 사람 용서할 수 없어 메말라 갈라진 마음을 쏟아 놓으라고 말이다. 기실 정말 좋은 친구 앞에서는 그리 하지 않는가.

 

주 예수를 친구로 삼아 늘 네 곁에 모시어라.

그 영원한 생명샘물에 네 마른 목 축이어라

 

주님, 너무 힘들어요. 당신께 실망했어요. 내 기도 듣고 계신 것 맞아요? 당신이 안 계신 것만 같아요.’ 정직하게 풀어놓고 꺼내놓아 텅 빈 마음의 방은 예수님 외에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없다. 공감의 여왕을 친구로 뒀다 해도 사람 친구가 주는 위로는 금세 다시 목마를 물이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명의 물을 가진 유일한 친구가 예수님임을 깨달을 때 기도는 다른 차원이 될 것이다. 이 좋은 만남으로 어느 새 사라진 슬픔은 이웃의 슬픔에 가닿을 것이다. 가만히 내 기도 들어주시는 예수님처럼 이웃의 아픔을 영혼으로 들을 수 있는 귀가 생길지 모르겠다. 이 찬송의 시작과 끝이 다르다. 기도의 공간으로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대신 그분이 주시는 쉽고 가벼운 멍에, 사랑의 짐을 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기도의 결국이 아니겠는가.

 

주 예수의 은혜를 입어 네 슬픔이 없어지리

네 이웃을 늘 사랑하여 너 받은 것 거저 주라

너 주님과 사귀어 살면 새 생명이 넘치리라

주 예수를 찾는 이 앞에 참 밝은 빛 비추어라

 


 

 

서른이 되어도 시집을 못 가고 있는 딸 걱정에 밤잠을 설치시는 우리 엄마에게 ''은 괜한 미움의 대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라는 시집은 안 가고 나날이 책꽂이의 책만 늘려가고 있었다. 딸보다는 책을 구박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셨는지 시집 못 가는 이유를 책에다 덮어씌우신다. '여자가 책을 많이 읽어서 똑똑해지면 못 쓴다' 하시며.... 하긴 나도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다. 박사과정 공부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놈의 혼수에 수백 권의 책을 동반할 여자 좋아할 남자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있겠나? 무엇보다 함께 책을 읽으며 삶을 나눌 동등한 상대로 여자를 대할 그런 남자를 만날 수나 있는 걸까?"

 

남편과 함께 쓴 책 와우결혼》 중 일부이다. 저런 염려를 했었지만 다행히 나보다 책 중독 증상이 더 심한 남자를 만나서 '서재 결혼 시키기'에 성공했다. (《 서재 결혼 시키기》라는 제목의 책이 실제로 있다.) 책이 인연이 되어 만나고 같은 책을 읽다 헤어지고 다시 만난 커플답게, 우리집의 트레이드마크는 책으로 둘러싸인 거실이다. 결혼 당시보다 책꽂이는 두 배가 되었지만 어느새 포화상태가 되었다. '이제 정말 책값 줄이자. 책 사지 말고 있는 책 다시 보고, 안 읽은 책 다 읽도록 하자' 다짐하고 결심하기를 반복. 잘 지켜지질 않는다. 눈치 보기 싫어서 아예 알라딘 계정을 따로 만들었는데 주문 넣을 때마다 몰래 죄짓는 느낌이다. 남편도 사정은 마찬가지. '당신 그 책 나온 거 알아? 그 책은 읽어봐야지/애들도 같이 읽어봐야 할 책이 있어/마가복음 성경공부 준비해야 하니까 꼭 필요해서 산 거야' 묻지 않은 설명이 길어지면 이미 몇 권을 지르고 난 후이다.  자신을 포기 서로를 포기. 아무튼 서재를 결혼 시키고 가꾸어 왔다.

 

요 며칠 책꽂이가 한 칸씩 비어간다. 남편이 출근 때마다 한 보따리씩 싸 들고 나가기 때문이다. 혼자 사용하는 사무실이 생겼으니 최대한 가지고 나가겠다는 선언을 했다. 서재 독립선언이다. 결혼 18년 되는 서재는 딴 살림을 차리게 된다. 자연스럽고도 기분 좋은 헤어짐이다. 헐렁해진 책꽂이에는 작은 소품이나 액자 같은 것을 둘 수도 있을 것이다. 이사할 집의 거실 구조와 이전의 집들과 전혀 달라서 모처럼 함께 창의력 발동 중인데 '마주 보는 책꽂이 거실'을 탈피하여 어떤 모양새가 될지 기대 반, 염려 반이다. 아무튼 이 변화가 여러 모로 시의적절하다.  

 

이우교회 청년들과 함께 한 연애 세미나 마쳤다. 마지막 강의는 남편과 함께했는데 오랜만의 더블 강의이다. 애써 맞춰보지 않았고, 강의 구조도 느슨했다. 디스전과 은근 띄워주기를 오가면서 주거니 받거니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부부가 함께 우리의 결혼을 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의 유익이 있다. 한 발 물러서서 우리의 결혼을 바라보고, 낯선 눈으로 서로를 관찰하게 되는 경험이다. 강의 때마다 하는 말인데도 나란히 서서 듣다 보면 새롭게 들리는 것들도 있다. 남편이 20대 때 전도서를 읽으며 얻은 통찰이라고 했던 얘기가 오늘 처음 듣는 얘기처럼 맑게 들렸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전 9:9).

 

온통 부정문으로 가득 찬 전도서에서 유일한 긍정적 권면이 저 말씀이었다 한다. 해 아래 모든 일이 헛되고 허망하니 오직 사랑하는 아내와 즐겁게 살라! 그래, 삶의 모든 것은 실패해도 행복한 가정, 아내와 즐겁게 사는 것만은 꼭 이뤄야겠구나. 결심했다고. 실제로 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이 원칙을 지키려 애썼다. 당연히 포기해야 할 것이 많았고, 그런 선택에 대해 세상이 지지를 보내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어리석거나 유별나다는 식의 눈길을 받아왔다. 그러나 오늘 문득 돌이켜보니 잘한 일인 것 같다. 요즘 결혼 강의할 때마다 강조하는 바가 있는데 '결혼은 행복의 문제가 아니라 성장의 문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 그러하다. 사랑은 대상을 위해서 내 마음자리를 넓히는 일이다. 사랑을 위한 성장을 지향하면 사랑의 신비가 가져다주는 것이 행복이다. 행복하고자 하지만 사랑의 성장에 관심이 없다면 거기서 행복은 영영 도달할 수 없는 목표가 된다.

 

이번 이사는 장롱 침대를 새로 바꾸는 엄청난 일도 있다. 신혼 가구로 들였던 장롱이 더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 가구를 고르며 생각해보니 이제 들이면 또 20년을 써야 한다. 20년 후면 70이다. 둘이 이생에서 함께 쓰는 마지막 장롱과 침대가 될 것이다. 아마도. 아, 이렇게 우리는 결혼생활 전반을 끝내고 후반으로 가는 것이다. 이 시점에 한 가족이 된 이우 청년들과 결혼을 이야기하며 우리를 돌아본 시간이 더욱 의미 있구나!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는 오늘 나눈 강의 내용을 힘을 다해 살아온 결혼 초반부이다. 이제 남은 날동안 하나됨의 신비로 얻은 유익을 흘려보내는 삶으로 살아야지 싶다. 서재만 독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자 더욱 자기 자신이 되어 홀로도 의연하게 잘 사는 삶으로. 유약한 의존이 아니라 나란히 제 발로 걷는 동반으로. 어른 부부가 되기 위해서 오늘도 새로운 떠.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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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것 좋아하지만 맛집을 찾아 줄을 서는 열정은 없고, 뭘 맛있게 먹더라도 또 먹고 싶어 애써 찾아가거나 하지 않는다. 벌써 일주일 전에 먹었던 것들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입맛을 쩍쩍 다시게 되니 내게는 드문 경험이다. 지난 주에 광주로 1박 2일의 에니어그램 강의를 다녀왔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수련회 풍경, 청년부 수련회에 식사팀 권사님들이 함께 하신 것이다. 기대 이상의 맛, 기대 이상의 정성에 더한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1박 2일의 먹강(먹으러 강의 간 것)이었다.  첫 식사, 첫술을 뜨고 바로 무릎을 꿇었다. 끼니 때마다 기본 일식 오찬, 내지는 육찬. 가짓수의 많음보다 감동은 반찬의 다양함이요, 그보다 더한 감동은 모든 반찬이 다 맛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풍성한 밥상인데, 식사 중에 탱탱한 생굴에 갖은 양념으로 만든 초고추장까지 곁들여 내오신다. 강사 특별대접. 옆에 앉은 청년들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보셨는지, 권사님께서 "내일 아침 메뉴여. 내일 다 줄 건디 강사님 먼저 드리는 거여." 하신다. (그 굴은 다음 날 아침 굴 떡국으로 변신. 세상에나, 수련회 아침 식사가 반찬 다섯 가지에 굴 떡국이라니!) 마지막 식사에는 "이따 저녁 반찬인디 못 드시고 가싱께" 하시며 피꼬막 한 접시가 추가. (키보드 두드리며 침 고인긴 처음이다)


권사님들께 일부러 찾아가 배꼽 인사를 여러 번 드렸다. "강사 인생 십몇 년 만의 최고의 식사였습니다." 두 번째 식사시간이던가, 식사팀 대장 권사님 옆에 앉게 되었다. 역시나 '권사님, 정말 맛있습니다. 맛있습니다'를 연발했더니 특유의 사투리로 '내 반찬이 맛있는 줄 아시면 강사님 입맛이 보통 수준이 아닌디'하신다. 그리고 짧은 간증을 하셨다.


"내가 중등부 교사를 한 지 30년이 되얐어요. 어떻게 처음 교회에서 밥을 하게 되었냐면. 지금이야 안 그렇지만 그때는 수련회 강사 전도사님, 목사님들에게 강사비가 없었어요. 여름에 땀 흘려 가며 고생하시는데 너무나도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내가 밥을 해야겄다, 식비를 남겨서 강사비를 드려야겄다 했어요. 사 먹는 밥 대신에 직접 장을 봐서 했는디, 좋은 재료 싸게 사서 맛있게 먹고도 돈이 남은 겨. 그렇게 강사비를 드리고, 교회에 뭔일 있으면 또 장 봐서 밥하고...... 그렇게 시작해서 지금 30년이 된 거여. 나는 음식하는 게 즐겁고, 잘하는디 아무나 다 좋아하는 건 아니거든. 한때 내가 은혜받아서 마음이 뜨거울 때는 집안 살림, 밥하는 거, 이런 거는 다 하찮은 줄 알었어. 그저 교회마~안, 열심히 댕기고 이러는 게 잘하는 것인 줄 알었더니. 나중에 믿음이 조금 자라고 봉게, 그게 아니더라고. 내가 솜씨가 있고 음식하는 거 좋아하는디 그거 열심히 혀서 먹이는 것이 중요하더라고."


<나의 성소 싱크대 앞>에 수백 페이지 주절거린 일상영성을 3분 토크로 요약해주시는 것 아닌가. 음식만 맛있던 것은 아니다. 청년부 목사님의 극진한 환대, 강의에 집중하는 청년들 태도의 배려와 어우러져 더욱 잊지 못할 1박 2일이었다. 청년부, 특히 대학부나 어린 청년부에서 오는 에니어그램 강의요청은 거절하곤 했었다. MBTI로도 충분하다 설득하여 주제를 바꾸기도 했었고. 헌데 이번엔 어쩐지 거절하질 못했다. 할 수 없지, 어려워해도 할 수 없다. 하며 갔는데 예상 밖이었다. 게다가 광주였고, 게다가 수련회 장소는 무등산 자락이었다. 광주, 내 마음 속 광주 말이다.


같은 주제로 여러 곳에 강의 다니면 보지 않으려 해도 보이는 것들로 큰 배움을 얻게 된다. 이방인으로 공동체 체험하기. 맞이하는 교회들이야 늘 하던 방식이겠지만 내게는 새로움이니 말이다. 맞으시는 무심코, 평소대로 손님을 맞는 태도를 경험하는 나로서는 '비교체험 극과 극' 수준일 때도 있다. 때로 내가 이러려고 강의하러 이 먼 곳까지 왔나, 자괴감으로 하며 자존심이 상할 때가 있는가 그 정반대의 날도 있다. 낯선 자의 눈으로 바라보기, 체험하기의 유익은 얼마나 큰지! 아무튼 이 예기치 않았던 광주 먹강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강사랍시고 특별대접을 받고 싶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특권의식으로 못된 태도와 마음의 습관이 들까 경계하고 경계한다. 그러나 진심 어린 환대란 누구라도 특별하게 대하는 것 아닌가. 창의적인 배려로 드러나는 환대로서의 특별대우는 강사도, 직장 마치고 파트타음 참석자로 수련회장에 들어온 청년이라도, 누구라도 춤추게 하는 일이다. 추가로 나온 생굴 한 접시의 특별대우는 따뜻한 환대로 다가왔다. 


마음이 추운 날이 오래 간다. 자꾸 어깨를 움츠리게 된다. 움츠리고, 껴입고 그럭저럭 잘 지내다 한 번씩 한기에 휘말릴 때가 있다. 봄의 훈풍은 언제쯤 불어오려나. 1박 2일 광주 일정 마치고 올라와서는 바로 다른 일정이 있었다. 밤까지 대중교통으로 다녀야 해서 여러 겹 옷으로 무장하고 내려갔다. 광주 날씨가 너무 따뜻해서 겹쳐 입은 카디건이 거추장스럽고 무거웠다. 예상치 못한 따뜻한 날이었다. 일기예보를 빗나가는 따뜻한 날이 언제 불쑥 끼어들지 모르는 일이다. 무등산의 아침을 맞으며 후루룩후루룩 먹었던 굴떡국. 아직 마음에 남은 떡국 국물의 온기를 꺼내보며 하늘의 메시지 하나를 읽어낸다. 


봄이 오고 있다.

아직 겨울이라도 어느 날 훅 들어오는 따뜻한 날도 있을 테다.

오늘 추위 걱정은 오늘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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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만큼은 본업으로 돌아가 으막션샘미가 됩니다.

어린이집에선 '유리드믹스 션샘미'라고 불리며 음악 수업을 합니다.

일 년 동안 음악의 기본요소를 다 다루는 커리큘럼이 있고,

들리는 음악을 보이는 음악으로! 자부심 충만한 유리드믹스 수업 목적에 충실하지요.

짧은 시간이지만 아이들 한 명 한 명과 최대한 인격적인 스킨십을 나누려고 합니다.

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몸과 영혼이 아이들 속에 뒹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시간은 말 그대로 음악치료 시간인데,

치료사가 치료받는 시간이란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일 년 동안 음정, 박자, 템포, 악기, 아티큘레이션 등의 내용을 차례로 섭렵합니다.

노래하기, 춤추기, 악기 연주하기, 창작하기, 감상하기를 총동원해서 말이지요.

눈을 감고 친구 목소리 알아 맞히기 게임은 일 년 음악수업의 종합판입니다.

부끄럼쟁이들이 혼자 앞에 나와 앉아 있어야 하는 것,

무엇보다 혼자 노래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특히 내향적인 아이들에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섯 살 짜리 아이들이 친구의 목소리를 변별해내는 것도요.

게임의 규칙을 이해하고 기다리며 참여하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지요.

마지막에 다같이 손뼉 치며 칭찬해주는 짧은 순간에는 살짝 소름이 돋는 감동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나다움'이란 특별한 무엇을 하는 '나'가 아니라

그저 나의 존재 자체를 찾는 일이란 생각을 합니다만.

아이들과 함께 무엇인가를 하는 '나'는 '나다움'에 무척 가까운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라, 는 경구가 이미 현존으로 다가와있는 순간!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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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서 가져온 팔뚝만 한 고구마가 있었다.

벌써 한참 전이다.

'보기는 이래도 맛있어. 잘라서 삶아 먹어 봐'

잘라서 삶으라는데....

칼을 집어 넣어야 빼도 박도 못할 것 같아 손도 못 대고 있었다.

그 사이 속이 노란 해남 고구마 한 박스를 선사 받았다.

속이 노란 고구마가 어찌나 맛있는지 아침 식사 단골메뉴가 되었다.

팔뚝만 한 고구마는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삶은 고구마 되는 건 진즉에 포기, 삶을 포기한 고구마가 진정한 생명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싹을 틔운 것이다!

스케일 있는 이 녀석, 흡사 무슨 분재 같도다.

이제야 칼을 집어 실랑이 한 끝에 싹이 난 부분을 뚝 잘라냈다.

그리고 나의 성소 싱크대 앞, 영예의 전당에 모시었다.


가을 겨울 지내며 거실 창 앞의 작은 화분들이 초토화 되었다.

한 놈 두 놈 시들해져 가더니 강한 놈 몇이 살아 남았다.

가을, 겨울이 아니라 여름의 에어컨 바람에 든 냉방병을 끝내 이기지 못한 것 같다.

사그라든 생명의 빈 자리를 대림절 초와 성탄 트리로 메꿨는데......

이제 그마저도 을씨년스럽다.

연휴 동안에 박스에 넣어 정리하고 올 대림절을 기약해야 할 것이고,

햇살 드는 거실 창 앞이 텅 비게 될 것이다.

전 같으면 벌써 분갈이를 하고 작은 화분들로 다시 줄을 세웠을 터. 

어쩐지 의욕을 상실하고 손을 놓고 있다.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사 58:11)


이번 달 주일 예배로 초대하는 말씀으로 매주일 듣고 있다.  

전 같으면 '물 댄 동산'만 빼고 다 귓등으로 들어 흘려 보냈을 것이다.

어쩐지 '메마른 곳'에서 턱 막혀서 한 걸음 나가질 못한다. 

먼지 폴폴 날리는 메마른 땅을 걷고 또 걷는 느낌이다.  

갑자기 시니컬해져서가 아니라 이제야 철 든 마음의 눈을 가진 것 아닐까 싶다.


주인 엄마 마음이 이런데, 이런 시국에 분재 코스프레를 하며 싹이 난 고구마순이라니!

어린 생명을 향한 과도한 감수성 탓에 당근이나 무를 자르다가도 손톱만 한 싹을 지나치지 못한다.

자주색의 고구마순은 왠지 더 사랑스러운 것!

이런 매의 눈을 피하여 이토록 무성히 자랐다니. 너 뭐냐?

채윤이의 놀림을 받으며 아침마다 저 녀석을 모델 삼아 사진을 찍어댄다.

무심한 주인 아줌마에 아랑곳 하지 않고 틔워낸 생명.

기특하고 짠하지 아니한가.


풍성한 명절, 행복한 설 보내세요~

(도대체) 어떤 이들에게는 행복하고 풍성한 명절인지 모르겠으나.

외롭던 사람 더 외롭고,

슬프던 사람 더욱 슬프고,

가난한 이들이 더욱 추운 명절의 시작이다.

명절이라 이름한 특별한 날들, 그 며칠 잘 견뎌내자.

특별할 것 없어 비교할 것도 없는 진짜 나의 삶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명절 끝이 되면 저 고구마순이 한층 자라고 억세어져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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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에 한 노래 있어2 [QTzine 2017년 2월호]


 

거절하지 못하는 병이 있다. 안 되는 상황에, 내키지 않으면서도 하고 보는 사람들이다. ‘예예해놓은 일 뒷감당 하면서 내가 미쳤지하면서도 말이다. ‘나는 거절을 잘 못해요라고 하는 말 뒤에 그래서 착한 사람이다라는 자의식이 깔려있는 건 아닌지. 요청받는 일이 교회 일일 때는 어떨까? 주님의 일이라면 더더욱 거절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배웠고, 조금 버거워도 십자가 지는 것이 순종의 길이라고 배웠다. 성가대 반주부터 시작해서 구역 특송 연습까지 불려 다니는 반주자가, 청년부 수련회에 단기선교며 성경학교까지 따라다니느라 여름 한 철 다 보낸 성실한 청년이 차마 불평도 못 하게 하는 찬송이 있다.

 

너의 마음에 슬픔이 가득차도 주가 즐겁게 하시리라

아침 해같이 빛나는 마음으로 너 십자가 지고가라

참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 지고가라

네가 기쁘게 십자가 지고가면 슬픈 마음이 위로 받네 (458)

 

예수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 그 길을 따르느라 힘들고 지쳐도 결코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들 등의 짐은 점점 더 무거워진다.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 지고 가라찬송 부르다보면 심지어 힘들어 하지도 말아야 할 것 같다. 아침 해같이 빛나는 뽀송뽀송한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라니! 불평이나 원망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우연히 지나가다 잠깐,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던 구레네 사람 시몬의 이야기도 떠오른다.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진 덕에 집안이 복을 받았다는 얘기이다. 타인의 요구, 특히 교회에서 받는 봉사의 요청을 억지 십자가로 져야 할까? ‘억지로 기쁜 것은 과연 기쁜 것인가?

 

인간의 심리학적, 영적 발달에서 가장 성숙한 경지에 이를 때 드러나는 덕이 자발적 자기희생이라고 한다.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셨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이다. 십자가는 바로 자발적 자기희생의 표상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 지는역설을 푸는 열쇠는 자발성에 있겠다. 착한 이미지가 손상될까봐, 상대가 섭섭해 할까봐, 순종하지 않으면 벌 받을까봐 두려움에 이끌리는 선택이 아니라 기꺼이 나를 내어주는 사랑의 선택 말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진 십자가는 참 기쁜 십자가일 수 있는 것이다.

 

착한 청년들의 노동력과 재능과 시간을 무한정 요구하는 교회, ‘헌신 페이권하는 교회에 대한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있다. 시키는 교회(어른)나 시킨다고 다 하는 사람이나 분명 돌아봐야할 지점이다. 그렇다고 날 선 감정으로 내가 왜 해야 하는데요?” 교회에서 시키는 일은 일단 거부하고 보는 것이 주체적인 신앙인의 길도 아닐 것이다. 분명 사랑의 길은 희생의 길이니 말이다. 타의가 아니라 자의의 희생과 순종이 되기까지, 묻고 버티는 힘이 필요하다. 겟세마네의 예수님처럼 말이다.

 

아버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실 수는 없나요?’ 땀에서 피가 배어 나오도록 하나님과 독대하여 지낸 밤. 그 지난한 밤을 지난 후 비로소 그러나 아버지여,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향해 자발적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셨다. 선택의 상황에서 불확실한 지점에 머무르는 것, 갈등을 오롯이 견디는 것이 가장 어려운 선택이다. 맹목적으로 순종하거나 맹목적으로 거절하는 것이 쉽지 말이다. 나의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타자의 요구를 명확히 하며 그 긴장을 견뎌내는 것은 겟세마네 예수님처럼 고독한 대면이다. 이 시간을 홀로 견뎌내는 사람만이 맹목의 희생이 아니라 자발적 희생의 덕에 한 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을 자랑삼거나 방패삼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부담되는 요구를 받을 때 멈추어 보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내가 이것을 하려는 동기는 두려움인가 사랑인가?’ 다시 자문하는 것이다. 이 질문을 하나님 앞에서 던질 때 그것은 정직한 기도가 된다. 그 정직한 대면 끝에 지는 짐은 억지로 지는구레네 사람 시몬의 십자가가 아니라 예수님의 방식을 따름이다. 그 길에서 참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지는 신비를 알게 될 것이고, 그 신비는 슬픈 이웃에게 절로 흐르는 사랑과 위로의 강물이 될 것이다.

 

참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 지고가라

내가 기쁘게 십자가 지고가면 슬픈 마음이 위로 받네










누군가(과연 누군가! ) 이런 메시지를 붙여 공유한 영상이랍니다.

40분 동안 오글오글 주절주절거린 이야기를 짧게 정리해준 내용이 마음에 드네요. ^^

용기를 얻어 블로그에 공개해봅니다.

네, 제가 출연한 <새롭게 하소서> 영상입니다.


며칠 갑자기 블로그 방문자수가 많아져 제가 이 근처에 얼씬거리질 못했습니다.

방문자수도 다시 안정을 찾아가고,

겨우내 기다리던 눈도 내려 마음도 풍성해졌으니 링크 걸어 볼게요.











13일의 금요일 밤, 10시 30분.

라면을 끓이며.


"엄마, 그 있잖아. 학교에서 그런 거 많이 하잖아. 뭐 쓰는 거.

스트레스받을 때 어떻게 합니까, 이런 거.

책을 본다, 잔다..... 여기에 먹는다가 꼭 있거든.

나는 그걸 보면서 정말 이해가 안 됐어.

웃기려고 쓴 건가? 스트레스받을 때 먹으면 풀린다는 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요즘 조금 알겠어."


저녁 일찍 먹고,

우유 한 잔에 도넛도 하나 먹었는데.

10시 넘어 라면을 끓이며.


내적 공허감을 먹을 것으로 채우는 인생의 맛을 알게 된 아들.

그놈 키 클 놈일세!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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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또 하나의 제자도.

CBS의 오랜 간증 프로그램 <새롭게 하소서>를 아시죠?

그 프로그램의 케치프레이즈입니다.

지난 12월에 녹화했고, 다음 주에 본방 재방해서 여러 번 방송된다고 합니다.

다녀와서는 민망하고 부끄러워 혼자 이불킥 여러 번 했습니다.

메이컵 받다 정신차려보니 머리에 후까시(외에 달리 표현한 말이...ㅜㅜ)가 과하게 들어갔습니다.

카메라에선 괜찮을 거라고 하시니 한껏 커진 머리를 하고 녹화장에 들어섰습니다.


'간증'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 앞에 설 때 진솔해질 수 있을까요?

오염될대로 오염되어 본연의 의미를 찾기 어려운 교회의 용어들이 많은데 그중 대표적인 말이 '간증'입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의 성공을 부각시켜야하는 것이 흔한 간증이지요.

같은 이름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간 적이 있었고,

몇 년 전에 코스타에서도 '삶의 현장'이라는 간증의 자리에 섰던 적이 있었습니다.

두 번의 간증을 통해 배운 바가 있습니다.

한 번은 '다시는 이런 거 하지 말아야지' 결심을 했고,

다른 한 번은 안전한 자리에서 나의 부끄러움과 약함을 고백함으로 치유를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된 것이지요.

언어를 오염시킨 것도, 그 언어를 다시 정화하는 것도 사람입니다.


전에 다녔던 교회에서 '수단'이 된 간증의 경험들로 혐오증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목자(소그룹 리더)를 했더니 연봉이 오르고, 명퇴하는 줄 알았으나 더 좋은 자리로 영전되었고,

아이가 좋은 대학에 가고, 가정이 화목해지고......

교회를 섬겨 일이 잘 되고 성공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제가 들었던 그 무수한 간증이 꾸며낸 얘기도 아니었고, 당사자들에겐 분명 축복이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수단화 되는 것, 사람을 통제하기 위한 목회적 수단이 된다면 치명적인 죄이지요.

간증을 수단화 하고자 하는 유혹은 그때 그 시절 그 교회의 리더나 목회자만이 걸려든 덫이 아님을 압니다.

바로 내 앞에, 우리집 문지방 앞에 놓인 덫입니다.


블로그를 하면서 늘 갈등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가족의 세세한 일이며, 부부 사이의 대화, 갈등은 물론 스쳐지나는 지질한 감정까지 드러내는 글.

어쩌다 작가된 얼치기로서 그나마 소명이라 붙드는 말이 '일생愛 천상에'입니다.

일상에 들여놓은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살고 써내는 것이라고 멋지게 표현해 볼게요.  

일상의 기쁨과 슬픔, 잘 되고 안 되는 일,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이 필터링 없이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헌데 아주 못나고 지질한 나를 드러낼 때조차도 결국은 주체하지 못하는 현시욕에 맞닿아 있다는 것을 압니다.

때문에 글을 써서 '발행' 버튼을 누를 때마다 심장이 조여들곤합니다.

결국 나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라면 '간증'이라 포장된 자기현시와 무엇이 다른가 싶지요.


드러냄과 숨김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저는 늘 이렇습니다.

이왕 강사라는 이름을 얻은 이상 '드러냄'을 선택한 것 아닌가. 

이왕 이렇게 되었다면 더 적극적으로 나를 드러내고 자기홍보에 매진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 순간 발목을 잡는 '숨김' 본능.

'써야 사는 여자'라서 쓰는 일 외에는 할 수 없어서 블로그에 끄적거려 발행합니다만.

나름의 여러 장치를 끼워 넣습니다.

스크롤 압박감을 위해 짧은 글도 길게 늘어놓습니다. 

빙빙 얘기를 돌리는 사이 인내심 없는 사람들 나가 떨어진 후에 정작 하고 싶었던 얘기를 하지요.

나로서는 쓰지 않을 도리가 없지만 제발 아무도 읽지 마라, 읽지 마라.....

그러나 다시 블로그 조회수에 신경을 쓰고, 댓글 알리미 소리에 일단 기분이 좋아지고, 

어느 댓글 하나로 날아갈 듯 한 하루를 보내기도 합니다. (댓글 압박 아닙니다. 편하게 하세요. ㅎㅎ)

사석에서 만난 분이 '글 잘 보고 있어요'하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지만 돌아서면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새롭게 하소서> 녹화 이후의 이불킥은 이런 내적 갈등의 표현입니다.

'아무에게도 안 알려줄 거야. 헤어스타일 때문에 일단 머리 크기 장난 아니고, 

주제가 왔다 갔다, 말도 되게 못했고, 맡투도 엄청 가식적이었어. 오글거림 장난 아닐 거임'

묻지도 않는 말을 혼자 자꾸 떠들어댔지요.

역시 드러내고 싶으나 숨기고 싶고, 숨고 싶지만 드러나고 싶은 [나의 투쟁] ^^ 

아무튼 저는 이 방송 못 봅니다. 


간증, 또 하나의 자기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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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은 결혼식에 가면 그렇게 눈물이 나더니. 관계의 친밀도와 상관없이 입장하는 신부의 뒷모습에 그렇게 눈물이 났었다. 뜻밖에 장례식에 가서는 잘 울지 않았다.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젊은 엄마 아빠가 어린 아이를 두고 떠났거나 사연 있는 장례식이라면 몰라도. 헌데 요즘은 흔히 '호상'이라 불리는 연세 드신 분들의 장례식에 가면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난다. 상주도 울지 않는데 문상객이 우는 건 오버 아닌가. 강풀 원작의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호상이 어딨어!' 이 대사 때문일까? 언제 돌아가실지 모를 우리 엄마 때문일까. 아니, 그 정도의 단순한 감정이입은 아니다. 


80, 90이 넘어 돌아가실 때보다 10년은 젊은 영정 사진을 뵈면, 살아계실 때 단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분임에도 눈물이 난다. 고인의 일생을 파노라마처럼 그려보게 된다. 아니, 영정 사진의 어르신의 눈을 오래 바라보면 눈을 맞추고 있으면 생의 파노라마가 절로 펼쳐진다. 아기로 태어났고, 한때 아이였고, 소녀(소년)이었고, 힘 좋은 젊은이로 펄펄 뛰던 때를 지내셨을 것, 아기를 돌보는 엄마였다가 어느새 중년. 그리고 어느 날 손주 손녀를 본 할머니, 손주를 번쩍번쩍 들어 올리며 안아주고 며칠이고 봐주시며 김장도 해주시던 쨍쨍한 할머니, 갑자기 찾아온 질병, 자타의 당황, 요양병원.......


지난 주 급성 장꼬임 증세로 고생하다 링거까지 맞은 사단의 시작은 친구 아버님의 소천 소식이었다. 처음 뵈었던 20여 년 전부터 이미 은퇴한 목사님이셨고, 친구 가족과의 만남으로 일 년에 한두 번은 꾸준히 뵐 수 있었다. 친구에게 어릴 적 어떤 아버지였는지, 친구가 하나님 아버지를 제대로 만나기 위해서 그 아버지를 어떻게 극복해야 했으며, 그 과정이 얼마나 지난했는지 안다. 친정 부모님과 함께 살던 친구 자신은 물론 친구의 어머님께서 깊은 기도로 일궈낸 치유의 과정을 지켜보았다.


긴 말씀을 나눈 적은 없지만 직장생활 하시다 늦게 소명을 확인하여 목사가 되시고, 길지 않은 목회생활 후에 긴 은퇴생활을 하신 아버님의 삶이 너무도 무겁게 다가왔다. 하늘 아버지 품에서 지나온 생에 관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 상상할 수 없는 위로, 사랑을 경험하고 계실까? 어젯밤에는 교회 집사님 어머님의 장례예배로 대구에 다녀왔다. 목사의 아내로 살아오신 사모님이셨단다. 한 번도 뵌 적이 없다. 며느리이신 집사님께서 남편에게 전해주신 짧은 이야기 정도를 들었다. 어머님의 영정사진을 마주하는 순간, 삶의 무게가 가슴 깊은 곳으로 '쿵'하고 다가온다.


목사로 살았든, 사모로 살았든, 회사원이나 농부, 또는 오래도로 특별한 일을 하지 않고 살았든, 오직 엄마로만 살았든, 가족 없이 홀로 살았든 정신과 육체 쇠락의 끝에서 스러져간 죽음은 거역할 수 없는 고귀함이다. 그 고귀함은 진저리가 쳐지도록 비루함이다. 한때의 날카롭던 지성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배려심이, 쌀 한 가마니를 척척 들던 근육의 힘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 비루함 말이다.


엄마에게 다녀왔다. 이불을 목까지 올려 덮고 누워 계시다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눈을 번쩍! '얼라, 우리 딸 왔네. 보고 싶은 우리 딸이 왔어' 그리고는 당장 눈길이 쏠리는 곳은 내 손에 든 쇼핑백이다. 안에 든 품목을 확인하고 '게장은 또 안 혀 왔어?' 하시는데 훅 뭐가 치밀어 오른다. 게장, 게장, 게장...... 그놈의 게장. (엄마가 처음 고관절 수술한 이후로 만들어 나른 꽃게찜과 간장게장은 몇 마리가 되려냐? 100마리? 500마리?) 엄마를 옆에 두고 분노의 간장게장 주문을 했다. 주문하는 소리를 듣고 '얼라, 그르케 바싸댜?' 뷁에엑! '그럼 간장게장이 돈 만 원 하는 줄 알았어? 간장게장은 최고급 반찬이야. 비싸서 내가 담가도 애들도 못 주고 엄마한테 가져와. 간장게장 할 때마다 현승이가 엄마, 나도 이 다음에 간장게장 마음껏 먹게 해줘. 그게 소원이라고!' 며느리도 아들도 못하는, 딸만이 특권. 못된 소리 막 퍼붓기를 했다.


그러곤 눈물이 쏟아져 화장실로 가 수습. 다시 엄마 옆에 앉으니 아니나 다를까 기가 팍 죽은 엄마다. '어제 느이 막내 이모가 전화가 왔는디 언니 나이가 인자(이제) 93이여, 하더라. 내가 너머 오래 살었지. 이렇게 오래 살어서 자식들 가슴 피고(속 썩이고).... 아이고, 언제 불러 가실라나..... 인자 멀지 않었어. 내가 너머 오래 살어서 미안허다.' 이런 엄마 다루는 건 쉬운 일이다. 애들 얘기 하나만 재밌게 해드려도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 의기소침은 십 리 밖으로 달아남. '이모가 이번이는 쌀이 즉어서 너한티는 못 보냈다고 운형이한티 보낸 걸로 나눠 먹으랴. 괜찮다고 혔어. 인자 김서방이 부자 동네 담임으로 갔응게. 야야, 뭐가 어뗘. 그게 뭐 자랑이여. 외숙모는 전화만 허믄 이 목사 자랑이라 듣기 싫어 죽겄는디 나는 자랑 벼랑(별로) 안 혀.'


결혼하고 한때 어버이날에 양가에 용돈을 드리면 '나는 괜찮여. 시댁이만 잘혀' 봉투를 돌려주던 엄마. 현승이 낳고 산후조리원 경유 친정에서 2주간 지내다 오던 날. 내가 설거지 몇 번 하고 우유병 닦았다는 이유로 '엄마가 늙어서 찬물에 손대게 하고, 몸조리 제대로 못해줬다고 울던 엄마.  우리 신실이는 몸이 약혀서..... 어디 조금만 아프다 하면 몇 시간에 한 번씩 전화하고 집에서 기도를 멈추지 못하고 걱정하던 엄마. 그런 엄마가 우리 신실이 몸 걱정, 신실이 주머니 걱정은 잊은지 오래다. 그저 엄마 먹고픈 것들이 잘 조달되면 된다는 식. 그 연세에 누구보다 총기 넘치는 엄마이지만 갈수록 관심사는 '나 먹을 것!' 뿐. 본능의 욕구에만 충실하고 진실코자할 뿐.


'엄마, 기도해줘'로 시작해서 일상의 깨알 같은 걱정과 근심, 말할 수 없는 것이 없었다. 이젠 엄마에게 설명가능한 삶의 정황이 별로 없다. 그 좋아하는 간장게장만해도 그렇다. 끊이지 않고 드실 수는 없다는 걸 설명할 방법이 없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여. 아, 이건 옳지 않은 언표. 본능적 욕구를 숨길 수 없을 뿐이고 그런 자신이 부끄럽고 부끄러워 엄마의 존재 무게는 한없이 무거운 것이다. '오래 살어서 미안허다.' 90년이 넘는 생의 무게를 나는 사실 가늠조차 할 수 없다.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막막함에 때로 엄마 얼굴 보는 걸 피하고 싶고, 때로 도망치고 싶다. '내가 너머 오래 살어서 자식들 고생이다. 미안허다.' 이 못된 딸년은 엄마에게 이런 소리를 듣는다. 이 죄를 어찌 받을 것인가. 나중에 얼마나 또 후회의 눈물을 흘리려고.


엄마에게 푸악(푸악하다 : '성질부리다'는 뜻의 사투리. 엄마가 쓰는 사투린데 출처는 확인할 수 없음) 할 수 있는 오늘이라서 다행이고 감사함을 안다. 아니 감사하고 있다. 혼자 화장실 갈 수 있는 엄마, 요양병원이 아니라 당신 방에 누울 수 있는 엄마로 인해 늘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감사기도 드리곤 한다. 동생 부부를 향한 고마움과 미안함 또한 사무친다. 이만한 엄마로 인해 감사 감사 감사하다. 하루가 다르게 인격의 포장지를 벗는 엄마, 착한 사람, 배려 많은 사람의 포장지를 벗고 자신의 욕구에만 충실한 엄마의 오늘을 이나마 견딜 수 있어 감사하다. 엄마의 욕구가 내가 견딜만큼의 투명함이라 감사하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말이다. 


'여덟 시만 되믄 내가 느이 교회 위해서 기도혀. 성경책이 써놓고 이름 불러가며 기도혀. 이.웃.교회.(우리 교회 이름은 '이우교회') 이름도 참말로 잘 지었잖여. 우리 김서방이 지었지? 이.웃.교회! 내가 천 명 만 명, 구름떼같이 사람들 몰려들라고 기도혀' 매일 빠지지 않는다는 기도 내용에 제대로 된 정보와 기도 지향이라곤 없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하여 오류를 수정 할 수 있을까. 방법은 없다. 처음 입력이 그렇게 되었다면 쭉 가는 거다. 93년 된 뇌라 수정기능은 안 됨. '이웃교회'는 이우교회가 될 수 없다. 엄마의 사랑스런 외손주 현승이를 '현성이'라고 부르는데 한 번 입력된 현성이는 영원한 현성이! 무엇을 기대하랴. 그저 웃지요. '햐, 이웃교회는 어디 있는 교횐지 모르겠지만 땡 잡았네. 엄마 기도로 천 명 만 명 구름떼 같이 사람들 모여 들게 생겼으니. 깔깔깔' 기도해줘서 좋다는 얘긴줄 알고 귀요미 엄마도 나를 따라 웃지요. '허허허허. 그럼, 내가 하루도 안 빠지고 기도 허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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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류장


부웅~ 2016번 버스가 떠나갑니다

버스 전광판에는 이렇게 써 있네요


곧 도착 : 2017번


버스가 기다린다고 생각하지마요

버스 운전수는 나 자신이에요

당신이 느리게 갈수록 버스는 빨리 떠나요


그래도 당신이 조금 서두른다면

앉아서 쉴 시간은 있을 거에요


한 번 버스를 놓쳤을 때는

그 버스를 잡으려 하지 말고

다음 버스를 기다리세요



열다섯이 된 시인 김현승이 어릴 적부터 천착하는 주제는 '시간'입니다. 

결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 시간, 그렇더라도 내 인생은 내가 운용하겠다는 의지가 보이네요.

'당신이 느리게 갈수록 버스는 빨리 떠나요'

시간이 빠르거나 느리게 흐르는 것이 아님을 피력합니다.

버스가 빨리 떠난다기보다는 그렇게 느끼게 될 거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조금 부지런히 사는 게 좋겠다는 새해를 맞는 각오를 담은 것 같군요.

그렇다고 지난 세월에 대해서 연연해 할 일도 아닙니다. 

다시 잡아탈 수도 없는 지난 버슬랑 잊고 다음 버스를 기다려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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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가족회의..... 무엇이라 불러도 좋을 가족의 quality time을 family day라 부릅니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는 일주일에 한 번 같이 게임하고, 노래하고, 기도하다 한 방에 몰려서 잠자기.

이렇게 보내기도 했습니다.

해마다 송구영신 예배를 마치고 맞는 1월1일에는 Big Family Day입니다.

일단 늦잠을 자고, 사우나에 가거나, 맛있는 걸 먹으로 가거나, 예쁜 카페에 가기도 합니다.

페데를 위해서 강화도까지 가서 맛있는 케잌을 먹고온 날, 엄마의 장이 꼬여버려 일이 꼬여버렸습니다.

며칠을 보내고 조금 늦은 2017년 빅 패밀리 데이 세러모니를 가졌습니다.





해의 이슈를 마인드맵으로 그리며 가볍게 1년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작년 페데에 썼던 각자의 기도제목을 꺼내보지요.

방금 그린 마인드맵과 겹치는 단어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감회에 젖어 잠시 말을 잊습니다.

그리고는 2017년의 기도제목을 각자 적고 돌아가며 나눕니다.

마지막은 서로를 위해, 우리의 일 년을 위해 기도하고 마치지요.





평소 생각이 깊고 마음 헤아리는 감각이 남다른 현승이는 이상하게 멍석을 깔면 돌변합니다.

가족끼리 이러는 거 아냐!

오글거려인지 분위기를 깨는 말과 행동으로 눈총을 받곤합니다.

헌데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스스로 진행자를 자처하더니 마인드맵을 그려라, 기도제목을 써라, 이 순서로 나눠라,

그리고 대각선 방향에 앉은 사람과 기도제목을 맞바꿔서 돌아가며 기도해라.

군더더기 없는 진행으로 엄마의 버럭 없는 평화로운 마무리를 했습니다.


한 해가 다르게 자라는 아이들 마음이 모아놓은 기도제목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제 엄마 아빠의 입장과 마음까지 헤아리는 아이들의 기도제목입니다.

"엄마 아빠의 아들 딸로 태어나게 해서 미안하다."

신파조 대사 같은 말이 자꾸 마음에 사무치는데..... 엄마의 기분 탓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보내고 맞이하여 이 거룩한 현재를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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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교회에서 [연애와 사랑 세미나]를 엽니다.


여성과 남성의 치명적인 차이,

소개팅 첫 만남에서 나의 매력 순간 폭발시키기,

예민한 여친의 말 뒤의 말 읽어내기,

여친과 대화할 때는 이 다섯 단어만 있으면 된다,

무뚝뚝한 남친의 침묵 속 메시지 읽어내기,

동굴로 들어간 남친 꺼내오기,

성경에서 허용하는 스킨십의 마지노선,

하나님이 예비하신 배우자인지 확인하는 방법,

밀당의 기술,

남친 한 방에 녹이는 애교의 기술,

연애, 이것만 알면 성공한다,

행복한 결혼을 만드는 십계명.


이런 건 안 가르쳐줍니다.


과연 내게 사랑의 능력이 있는지, 그것이 있다면 어떻게 발휘할 것인지,

이 끝도 없을 듯한 외로움의 끝을 만질 수 있을 것인지,

정말 연애하고 싶은데, 안 되는데, 난 이렇게 불행하게 살다 죽을 것인지,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의 노력을 했을 뿐인데 그때 그(그녀)는 왜 그렇게 나를 힘겨워했는지,

내 사랑의 강점과 약점은 무엇인지, 

꼭 결혼을 해야만 하는 것인지,

<와서 보라 우리의 결혼을>이라고 말하는 김종필 정신실 부부는 과연 행복한지,


이런 얘기 관심 있는 사람은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우교회 청년들을 위한 세미나이지만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결혼예비학교 하고 싶은데 주중 시간이 되지 않거나 비용부담에 차일피일 하는 커플,

소개팅도 안 들어오고 주변에 남(녀)도 없지만 연애는 하고 싶고, 딱히 노력할 것도 모르겠는 싱글,

주일, 본교회 청년부 예배 땡땡이 치고 싶은, 잠시 삐뚤어지고 싶은 사람,   

그냥 정신실 작가가 좋아서 이번 기회에 얼굴 보고 싶은 사람,

모두 환영합니다.


이우교회는 분당구 분당동 90-6 SNH 빌딩 2층에 있습니다.

이 좋은 강의에 참가비는 없지만 신청은 필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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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첫 에니어그램 세미나를 준비했습니다. 


새해가 되어 새로워지고 싶고, 성장하고 싶은 갈망은 있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습니다. 환경 탓, 사람 탓 해보지만 가장 큰 걸림돌은 나 자신인 것 같구요. 늘 지고마는 오랜 습관 같은 '나'라는 틀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에니어그램은 성격 그 이상의 나를 보게 하는, 그것도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게 하는 좋은 도구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협소한 나로부터 시작하여 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여정, '에니어그램과 함께하는 내적 여정'에 초대합니다. (주말 세미나 준비하겠노라 말만 앞세워 놓았었습니다. 막상 준비했는데 임박한 알림이 되어 시간 내기가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


- 에니어그램에 접근하는 방식이 여럿 있습니다. 뉴에이지적인 접근, 심리유형론적인 접근, 그리고 영성적 접근입니다. 앞의 두 접근의 주체가 라면 영성적 접근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치명적 차이입니다. 에니어그램을 통해서 나를 들여다보고 조각조각 분석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에니어그램을 거울삼아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연습, '눈을 닦는 수련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자기분석은 출구 없는 미로에서 맴도는 일과 같습니다.

심리유형론적 접근은 자기 유형 장점을 극대화하는 자기계발의 도구로 사용하도록 안내합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습니만 단지 거기까지라면 에니어그램 최고의 가치를 놓치는 것입니다. 치명적인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에 진통제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단지 진통제로만 그 약을 다 소비해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영성적 에니어그램이 가진 최대의 강점은 에 대한 에두르지 않는 진단입니다. 단지 위로나 받고 싶은, 말랑말랑한 심리적 마사지 정도 바라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이유이며 심리학과 영성의 다리를 놓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치유와 영적 성장은 그분 안의 내가 누구인지 알 때 저절로 일어납니다. 어거스틴의 기도처럼 말이지요. '주를 알게 하소서, 나를 알게 하소서(Novem te Novem me)' -

<커피 한 잔과 함께 하는 에니어그램> 에필로그 중에서


 * 긴급히 알려드립니다!


장소 대관에 착오가 생겨서 강의 장소가 변경되었습니다.

서촌에 있는 한빛누리 재단입니다.

아울러 인원도 당초 12명에서 8명만 모시게 되었습니다.

신청은 마감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조금 더 적은 인원으로, 안락한 공간에서 강의 나눔 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시] 2017121() 오전 10:00 ~ 오후 5:00

[장소] 한빛누리 재단  3층(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 8길 17)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 도보 6분

[인원] 8(선착순)    [참가비] 12만 원

[문의] 010-4235-8020 (문자로 남겨 주세요)

         larinari.tistory.com (댓글로 남겨 주세요)

[신청] 여기를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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