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토요일, 모 소개팅녀와 주고받은 톡입니다.

시국이 이렇고, 엄중한 주말이라 하지만 모처럼 잡힌 소개팅을 엎을 수는 없지요.

그래서 말렸습니다.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으니, 다음 주에도 기회가 있다.

소개팅에 집중하라, 광장은 내가 지킬게, 어르고 달래서 나오지 못하게 했습니다.(캬캬)   


모처럼 잡힌 소개팅 약속이 아니라면, 그 정도 중헌 뭣이 아니라면 광장으로!

뉴스 중독자 되어 경악하고, 분노하고, 좌절하는 나날입니다. 막장 뉴스 폐인입니다.

그런데 광장에 서면 다른 것이 보입니다. 희망의 불씨가 번져 들불이 되고 있습니다.

차거운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함성에 파묻히고,

와아아 촛불 파도타기에 있는 몸을 싣는 것만으로도,

인파에 밀려 발길 닿는대로 행진하는 것만으로도 뜨거운 기도가 됩니다. 

내일 광장에서 만나요!









레슨 다녀온 채윤이가 코가 빨개가지고 '엄마, 디게 추워. 살을 에이는 추위야!' 하기에 차를 타고 나갈까 싶었지만 유혹에 걸려들지 않았다. 대신 옷을 든든히 입고 모자와 장갑까지 챙겼다. 약속 장소를 화력발전소 앞 B카페로 잡았다. 강변 길을 통해 절두산 성지로 가 기도의 길을 걸은 다음 대림절 초를 사야지. 내처 걸어서 상수동 M 커피 로스팅 가게에 들러 원두를 사야겠다. 그러고나면 걷는 거리, 시간을 계산하여 B카페가 딱이다. 강변을 걷다보니 이곳에 이사 와 처음 강변에 나갔던 그날이 생각난다. 오늘과 똑같은 복장이었지. 몹시 추운 날이었다. 이삿짐이 대충 정리되었고, 동네는 낯설고, 날씨는 추웠다. 심심해 심심달, 하면서 빈둥거리는 현승이를 꼬여서 나갔었다. 이 을씨년스러운 동네가 아주 조금 예뻐 보인 첫날이기도 했다. 한강과 강변 길이 있어서 지난 5년의 삶이 얼마나 윤택했던가! 최고의 코스, 나만의 걷기 코스는 강변을 통해 절두산 성지 찍고, 상수동까지 걸어가 M 로스팅 가게에 들르는 것이다.



마음이 뻥 뚫려서 오갈 곳을 알지 못하는 날에 절두산 성지를 향한다. 가끔은 언어를 잃은 기도를, 소리없는 분노의 외침을 담고 걷는다. 가라앉거나 폭풍 치는 마음이 제자리를 찾곤 하는 곳은 기도초가 있는 곳이다. 값싼 양초가 활활 타오르고, 그 앞 긴 나무 의자에 앉거나 서서 묵주를 돌리며 기도 드리는 여인들을 보면 속에서부터 싸한 아픔이 올라온다. 기도제목도 알 수 없는 그들의 기도에 내 마음을 합하고, 흔들리는 수많은 기도초 앞에 나를 세운다. 바람에 흔들리며 타오르는 저 기도들이 결코 쉽게 응답되지는 않을 것을 알기에 오히려 겸허해진다. 나오는 길엔 성지 입구에 있는 서점에 들러 책이나 액자 같은 것을 만지작거린다. 오늘은 오랜만에 어머니께 드릴 책을 샀다. 그리고 대림초를 샀다. 그 다음 코스가 상수동 M 가게. 최고로 맛있는 로스팅은 아니지만 넉넉하게 주는 마음, 얼굴을 기억해주는 것이 좋아서 아끼는 집이다. 커피 공장 같은 곳이다. 정신 없이 돌아가는 로스팅 기계, 초콜릿 만드는 기계로 사람을 부르려면 유리창을 두드리고, 저기요! 여기요!를 여러 번 외쳐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사하면 제일 아쉬울 곳이 절두산과 M 가게이지 싶다.



B카페를 처음 알았을 때는 인생 카페가 될 줄 알았다. 하도 많아 책꽂이에 다 꽂히지도 못하고 쌓인 시집이며 소설을 보면 주인의 독서 내공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출입문에 붙은 노란리본이며, 카페 트위터에 올라오는 사색적인 글은 정말이지 있어 보인다. 합정 시절 초기에는 주로 여기서 원두를 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무리 다녀도 정이 붙질 않았다. 주인 아저씨가 문학을 애정하시느라 사람에 별 관심이 없나 싶었다(이런 건 사실 좀 매력적인 것). 언젠가 블로그에서 뒷담화 한 기억이 있는데. 원두 사러 갔는데 저울에 원두 달면서 조금 넘쳤는지 몇 알을 다시 꺼내는 걸 보고는 정이 뚝 떨어져버렸다. 낯가림이 심한 건 오히려 매력이라 여겨서 먼저 인사하는 법도 없고, 자주 커피를 사러 가도 아는 척 해주는 법 없는 것도 괜찮았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괜찮지가 않았었다. (커피 몇 알에 빈정 상해서 ㅋㅋ) 부침개 부쳐 지인과 막걸리 마시다 커피 내려주던 것도 생각났다. 그러고보니 커피 로스팅은 늘 조금씩 과했던 것도 같고. 그냥 아웃시키는 걸로! 아무튼 문학이든 신앙이든 개혁이든 무엇이든 맹목이 되고, 충천한 자의식이 되는 건 치명적이다. 그런 B카페인데 오늘 약속 장소를 여기로 했다. 순전히 동선 때문이다.


양화진이 아니라 절두산 성지를 성스럽게 여기든, B카페가 아니라 M가게를 애정하든 내 취향이다. 아무도 모르는 내 취향이다. 누군가 안다고 해서 별로 달라질 것도 없는 내 취향이다. '존중입니다. 취향 부탁이요' 이런 강렬한 부탁의 말이 있지만 세상 그 누구가 타인의 (것이기에 사소한) 취향 따위를 존중할 것인가. 모두 자신의 존중을 취향할 뿐이다. 시집을 모으고, 멋진 인용문을 날리며, 블로그에 글을 쓰고 카톡 프사에 촛불집회 사진을 올리며 남모르게 어깨를 으쓱인다. 자신의 취향에 충실한 B카페 아저씨는 내 취향에 맞지 않아 아웃당한 걸 알면 꽤나 억울할 것이다. 각오는 되어 있다. 내가 주어가 되어 아웃시켰지만 어딘가에선 나도 목적어가 되었었고, 되고 있을 것이다. 어쩌겠나. 각자 자기 취향의 세계에서 자뻑하며 허덕이며 사는 것이 사람일진대. 그래도 가끔 B카페에 간다. 오늘같은 동선에선 B카페가 딱이니까. 취향은 취향일 뿐이니까. 문득 이사 후에 M 가게보다 B 카페가 더 그리워지는 건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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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이 되어 연애하기(...) 36

 



어느 대학 앞 카페였습니다. 건너편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커플. 노트북 들여다보며 미소 짓고 있는 것이 영락없이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세련된 남친이 귀엽고 수줍은 여친의 이마에 한 번씩 뽀뽀를 하고, 동시에 웃음을 터뜨립니다. (부러움 유발 커플, 무조건 유죄!) 남친이 화장실을 가는지 자리를 비웁니다. , 그때 혼자 남은 우리 여친님의 표정. 아까 그 귀요미가 아닙니다. 무뚝뚝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의 무표정으로 손가락만 까딱거리며 폰을 들여다봅니다. 거울을 꺼내 화장을 매만집니다. 남친 등장하자 귀요미도 귀환. 눈웃음을 지으며 속닥속닥, 그리고 다시 뽀뽀, 이중창으로 하하호호.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연인인가 봅니다. 그렇게나 다른 두 표정을 보자니 여친은 긴장을 많이 하는 듯 하구요. 애쓰지 않아도 충분히 예쁜데..... 저도 모르게 탄성처럼 내뱉었습니다. 예쁜 아가씨, 너 자신이 되어 연애해.

 

어디서 많이 본 장면 아닌가요? , 이 꼭지 [나자연] 첫 글의 일부입니다. 여러 말로, 긴 시간 동안 나 자신이 되어 연애해야 한다고 떠들어댔습니다. 문득 외로움이 밀려올 때, 씁쓸한 소개팅의 뒷맛에 서글퍼질 때, 이러다 영영 혼자 사는 건 아닐까 두려움에 휩싸일 때 나 자신으로 충분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그 사람인가요, 배우자 확신을 기다리는 순간도 있지요. 헤어짐과 거절당함의 두려움에 아슬아슬한 연애를 이어가는 경우도 있고,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 헤어져야 하나 고민할 때도 있습니다. 결국 나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얘기도 했었지요.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책임에 따르는 고통과 어려움을 감수하는 것 말이지요. 그럴 수 있는 힘은 결국 자기 자신과 얼마나 좋은 관계를 맺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나 자신이 되어 연애해야 할 이유이겠지요. 우리가 타인과 맺는 관계의 질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과 관계 맺는 수준에 비례한다고 합니다. 부부상담치유의 전문가인 존 브래드쇼 (John Bradshaw) 목사님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주변 사람에게 심리적인 짐을 지우게 된다고 합니다. 특히 이런 사람이 사랑에 빠지게 되면 (심지어) 재앙이 된다고도 하지요. 재앙까지나? , 저는 백 번 공감합니다. 그런 의미로 나 자신이 되는 것은 단지 연애를 잘하기 위한 팁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 청년을 압니다. 처음 만났던 날의 긴장된 표정이 잊히지 않습니다. 저와 마주 앉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를 냈을지 단박에 알 수 있었습니다. 흔한 연애상담인 듯 했지만 그 이상을 여는 만남이 되었습니다. ‘결혼은 물론이고 연애도 할 수 없다, 하지 않겠다.’ 생각하며 살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훅 그 마음에 들어온 것이지요. 의지와 상관없이 들이닥치는 감정의 쓰나미가 사랑에 빠짐입니다. ‘사랑하지 않겠다,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며 살아온 사람에게 들이닥친 이 감정이 얼마나 당혹스러웠겠습니까. 혼란의 와중에 용기 내어 제게 찾아온 것입니다. 좋아하게 된 친구에게 진실하고 싶은 마음,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 그러나 그 비밀 같은 이야기에 놀라 도망치면 어떡할까 두려워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우 오직 바라는 바는 쌍방 간 그린라이트가 켜지고 두둥~ SNS의 상태메시지를 연애 중으로 바꾸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오직 그것에만 목을 매지는 않아서 다행이었습니다. 일단 사랑하지 않겠노라며 꽁꽁 숨겨두었던 자신을 개방하기로 했습니다. 결과가 어찌 됐든 고백하고, 어떤 결과든 받아들이기로요.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연애가 술술 잘 풀리거나 없던 용기와 지혜가 하루아침에 충전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연애와 삶은 더 어려워지고 복잡해졌지요. 꽁꽁 싸매고 있었을 때가 안전했지 말입니다. 그녀와 사귀고 말고를 떠나서 자신을 개방하기로 하고 갑옷을 벗자 상처입기 쉬운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쁜 소식이 아닙니다. 기꺼이 상처받을 수 있음은 바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오랜 연애 상담 경험에 근거하여 저는 이 친구의 미래, 특히 연애사업의 전망을 낙관합니다. 잡다한 연애 기술을 연마한다면 연애계의 선수가 되겠지만, ‘나 자신이 되는 노력으로 연애의 산을 하나 씩 넘어간다면 갈수록 더 좋은 사람되기 마련이니까요. 좋은 사람이란 사랑의 능력을 갖춘 사람입니다. 순간적으로 마음을 얻는 반짝하는 기술이 아니라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진심이지요. 내 여친(남친), 내 배우자, 내 아이 한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을 품는 넓은 품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다를 게 무엇입니까. 결국 나 자신이 되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진실한 사랑, 성숙한 사랑을 배우는 여정입니다. 짝사랑하고, 고백하고, 거절당하고, 소개팅도 하고, 연애하고, 결혼하십시오. 하되 여러분 자신이 되어서요! 건강한 연애와 결혼 뿐 아니라 사랑이신 그분을 더 알고 닮아가는, 인생의 가장 소중한 선물을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엄마, 이번 연도는 빨리 간 것 같애. 금방 지나간 것 같애.

올해만 그런 게 아니라 앞으로는 더 그럴걸. 내년은 올해보다 더 빠르고..... 갈수록 시간이 빨라져.

알아. 나도 알아. 엄마는 왜 그런지 이유를 알아? 엄마, 왜 그런지 아냐고?

몰라.

갈수록 새로운 게 없어져서 그래. 어른이 될수록 새로운 게 없으니까 시간이 빠르게 가는 거야.

그리고 어른 되면 뭘 기다리고 그러는 것도 없잖아. 기다려야 시간이 느리게 가는데.....

애들은 기다리는 게 많아서 시간아, 빨리 가라, 빨리 가라, 그러니까 더 안 가는 거지.

그래서 그런 거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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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개의 촛불이 밝혀진 날, 나는 조금 일찍 움직여야했다. 꼭 가보고 싶은 mary 언니님의 합창단 공연이 4시에 있었기 때문이다. 공연장소는 성균관대였고, 여러 곳에서 사전 집회가 낮부터 시작되었다. 마침 대학로에서는 그리스도교 연합 시국 기도회가 있어서 여기 참석하고, 연주회 갔다가, 광화문으로!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채윤이는 3시에 탑골공원에서 있는 청소년 시국 집회에 가고 싶다고 한다. 현승이는 이랬다저랬다 하더니 외삼촌 식구들과 함께 광화문으로 가는 것으로. 종필 아빠는 멀리 이스라엘에 있는데 갈릴리 호숫가의 야경이 모도 촛불로 보일 지경이라나.   





지난 번 집회에서 이재명 아저씨에게 반해버린 채윤이는 2시, 대학로 집회에 이재명 시장 뜬다는 소식을 접하고 엄마와 같이 일단 대학로로 가겠단다. 채윤이와 나란히 앉아서 시국 기도회에 참석했다. 늘 그렇듯 기도회 진행은 아쉽다. 시국 기도회는 약간 흥분하고 선동하는 방식의 발언과 기도 일색일 필요는 없는데. 자연스럽게 마음을 담은 기도를 해도 좋을텐데. 그저 몸으로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기도이긴 하다만. '뜻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맡겨 사는 그 생활 아니라, 해 아래 고통 있는 곳 주 거기 계셔서 두 팔로 막아 주시어 정의가 사나니.....' 찬송을 부른다. 87년, 대학 1학년 때 절절한 마음으로 불렀던 찬송. 시위하면서 '해 아래 압박 있는 곳..... 군화 발로 밟아 주시어....' 개사해서 부르기도 했던. 성인이 다 되는 채윤이와 길바닥에 앉아 이 찬송을 부르노라니 감정이 밀려와 말이 나올 길을 틀어막아 버렸다.

 




촛불집회까지 버티려면 밥심을 충전해야지. 점심 먹고 채윤이는 청소년 집회로, 나는 조금 배회하다 성균관대로 갔다가 저녁에 광화문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채윤이 총총 사라지고 '하야 물결' 가득한 길에서 서성이는데 노란 물결, 세월호 가족들이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연설이 들리기에 까치발 들고 봤더니 함세웅 신부님이다. 곧 광화문을 향해 행진이란다. 카페에 가 앉아 책 보면 좀 쉬다 4시 음악회에 가려는 계획이었는데 어느새 몸이 행진행렬에 파묻혀있다. 아, 이거 거부할 수 없는 걸음이구나. 노란 스카프, 노란 현수막, 노란 엄마들이 가득하니 이탈이 불가하다. 걷기 시작했다. 형형색색의 깃발이 나부낀다. 크고 작은 이름 모를 단체들, 삼삼오오 뭉쳐 걷는 사람들, 홀로 터벅터벅 걷는 사람들. 어디에서들 이렇게 몰려든 것이오! 잠깐 행진하다 돌아올 생각도 있었으나 대학로를 빠져나가기도 전, 돌아갈 생각은 잊고 말았다.





'걷기'는 얼마나 좋은 운동, 아니고 기도인지. 더불어, 홀로 걷는 이런 걸음은 온몸으로 드리는 기도이다. 대학로에서 광화문까지 걷는 동안 내 마음에서 심령대부흥성회. 가끔 외친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아니고 박.근.혜.는/하.야.하.라. 세.월.호.를/인.양.하.라. 일.곱.시.간/근.혜.퇴.진. 외치고 다시 기도한다. 기도하고 다시 노래한다.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어느새 종로길, 탑골공원 앞이다. 한가득 파릇한 우리 애기들이 모여있다. 우리 채윤이 저 인파 어딘가에 앉아 있다. 채윤이 좀 찾아보려고 눈알을 굴렸는데 저깄다! 싶어 자세히 보면 다른 딸내미. 또 저놈인가, 싶어서 보면 다른 딸내미. 그래, 너희들 다 내 딸이고, 아들이다! 대견하고 고맙고 미안하다. 꼬치너 몇과 함께 집회에 참석한 채윤이는 교회 찬양팀 연습에 갔다가 늦게 다시 광화문으로 달려가 촛불을 밝혔다.




광화문 사거리는 이미 자리 잡고 앉은 사람들도 꽉 차 있었다. 교보빌딩 앞 인도에 걸터앉았다. 사람구경 시작. 여기 모인 사람들이란, 진짜 남녀노소의 자유분방한 조합이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모르겠다. 헐렁했던 인도의 인구밀도가 몇 분이 다르게 높아지더니 내 얼굴 바로 앞에 사람들 엉덩이가 왔다갔다 한다. 한 시간은 지났나보다. 외삼촌 식구들과 함께 현승이가 충정로역에 내렸단 소식이다. 또 건너편 정동교회 쪽에는 꽃친 가족들이 모여들고 있다. 이제 진짜 촛불잔치, 아니고 촛불시위를 시작할 시간. 지금껏 많은 사람과 함께 홀로였다면 이젠 나의 사람들과 함께 함께이다. 교차로를 사이에 두고 건너가 만날 길이 묘연하다. 이미 길은 촛불로 뒤덮였으니. 어쩌지, 하고 일어서는데 눈앞이 뿌예진다. 혈압이 또 떨어진 게냐. 몸의 기운이 쏙 빠져나간다. 빨리 집으로 가서 눕는 수가 대수지, 싶다. 인파를 거슬러 종각으로 가기로. 무슨 정신으로 걸었는지, 어떻게 지하철을 탔는지 어쩌다 침대까지 왔는지. 필름이 뚝 끊어진 것 같다. 채윤이 현승이 목소리에 눈을 떠보니 밤 10시가 다 됐다. 광화문의 바람을 가득 품은 두 녀석이 집회 상황 브리핑하느라 시끌시끌.


그렇게 우리 셋은 백만 개의 촛불 중 하나가 되었다. 아니 갈릴리 호숫가에서 마음만은 광화문으로 향하는 아빠도 있으니 네 개의 촛불. 백만 분의 일 픽셀을 감당하겠노라는 이름 모를 마음들이 모였다. 백만 개의 촛불이 만들어내는 그림, 파도타기 영상은 정말 짜릿한 감동이다. 그런데 일 픽셀, 저 점 하나의 빛은 각각 하나의 우주라는 것을 아는가? 하나의 빛에 담긴 사연과 분노와 좌절과 기대와 기도는 우와아아아 파도타기 영상을 보며 터지는 탄성과 비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함이라는 것을. 백만 개의 초가 아니라 백만 개의 우주가 모여 박근혜의 인간 도리, 인간의 도리를 위한 마지막 기회를 촉구하고 돕는다는 것을. 이렇게 우주가 나서서 돕고 있다. 박근혜 씨, 제발 좀 알아들으라. 이 기회에 무엇을 얻을까 눈알 굴리고 있는 정치인들, 저 빛이 진실의 빛임을 좀 알아먹으라. 백만 개의 우주가 '길가에 버려져' 있다. 



   










변화


                                                                                       김현승


그 한 마디로 사이가 틀어질 수 있어요.

그 한마디로 분위기를 어질러놓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당신은 그 한마디를 해야돼요.

그래야

그 사람에게 그 현실에게 이 세상에게 변화를

줄 수 있으니까요.





'질풍' 김현승 선생님께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본 감동을 시로 남기신 것입니다.

예, 오늘 꼭 해야할 그 한 마디는 하야하라 박근혜!

그 사람에게, 그 현실에게, 이 세상에게 변화를 촉구하는 한 마디를 외치기 위해서 나갑니다.

저는 대학로에서 1시에 <그리스도교 공동 시국 기도회>로,

채윤이 (같이 갈 친구가 생기면 현승이도) 오후 3시, 탑골공원의 청소년 시국 집회로 갑니다.

이스라엘 순례길에 오른 아빠는 그곳에서 더 뜨거운 기도로 함께 외치겠지요.

오늘 광장 어딘가에서 만나요.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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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무엇이 본업인지 본인도 헛갈리는 나날을 살고 있군요.

미간에 힘 잔뜩 주고 글을 쓰거나 책을 보는 날이 대부분이고,

아니면 강의나 이런저런 만남이 있지요. 

일주일 중 하루는 음악 선생님으로 삽니다.음악치료 하나, 음악수업 하나.

언제까지 으막션샘미 할 수 있으려나요.

으막션샘미라서 햄볶는 하루를 보내고.


# 1 경기도 모 공립유치원


2층에 있는 특수학급 교실을 향해 총총 걷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1층 복도에 주저앉아 뭔가 낑낑거리던 아이가 부릅니다.

선생님, 나 좀 도와줘요.

뭐어? 뭘 도와줄까?

이게요, 안 들어가요.

그래, 선생님이 도와줄게. 아, 노트가 커서 가방에 꽉 끼는구나.  됐지?

(용무가 끝났다고 관계를 뚝 끊어버리는 존재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그런데 선생님은 누구예요?

나? 나는 예쁜별반에 온 선생님이야.

(음악치료, 이런 설명 할 수 없음. 잘못 걸려들면 시간 맞춰 치료 못 들어감)

선생님이라구요? 선생님이 아닌 것 같은데.

너가 아까 선생님이라고 했잖아.

아니에요. 선생님이 아닌 것 같아요. 선생님이 아니고......

선생님이 아니고 누구 같아?

선생님이 아닌 것 같고 할머니 같아요.

(야!!!!!!!!!!!!! 너 가방에 넣어준 거 다시 꺼내!!!!!!!)

선생님이야. 예쁜별반 선생님이야.

아니에요. 선생님이 아니고 할머니 같아요.

(야, 나한테 왜 그래? 많이 늙은 건 인정하는데. 할머니까진 아니라고. ㅠㅠ

눈가 주름은 20대 때부터 있었다고)



# 경기도 모 어린이집


연이어 세 반의 수업을 하는데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아직 다 모이질 않았고, 목은 아프고, 교실에 귤이 있기에 하나 얻어서 먹고 있었지요.

한 녀석이, 아 나도 귤 먹고 싶다. 귤 먹고 싶은데. (얘네들은 이미 다 먹었음)

요 덩달이 녀석들, 나도 먹고 시푸다, 나도 귤 먹고 시푸다, 단체 행동을 합니다.

"선생님이 사실은 귤이 맛있어서 먹는 게 아니고 목이 아파서 먹는 거야. 노래 많이 했잖아."

(라고 시작하는 게 아니었지)

아, 나도 목 아픈데. (갑자기 목을 감싸 쥐고) 콜록콜록 콜록콜록, 나도 목 아파요.

(여기저기서 기침 하고, 목 아파요, 목 아파요, 난리가 났음)

"선생님은 아뜰반, 해뜰반에서 노래 많이 하고 왔잖아. 그래서 목이 아픈 거야."

지난번에 나도 캔디 키즈카페에서 노래 많이 해서 목 아팠는데. 나도 귤 먹고 싶은데.

(또 여기저기서 노래 많이 해서 목 아픈 간증하느라 난리 났음)

백성들의 원성이 그치질 않아 수업을 시작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잘못 했지! 암만, 너네들님 앞에서 귤을 처먹은 내가 잘못이지)





수업 마치며 굿바이송을 부르고 나면 앞으로 튀어나와 다리를 붙들고

선생님, 가지 마요. 가지 마요. 가지 마요.

이러고 다 마치고 어린이집을 나설 때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세상에 이렇게 많다니! 내가 이렇게 좋은 사람이라니! 싶어집니다. 진짭니다.

다섯 살들의 세리머니에....... 그것참, 자존감이 향상된단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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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성소 싱크대 앞>과 이번에 나온 <토닥토닥 성장 일기> 두 권 함께 북 콘서트 엽니다. 출판사 블로그에 올라온 정성 가득한 홍보글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자세하게 안내받으실 수 있고요. 홍보글 만큼이나 정성을 다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주어는 고마우신 저의 출판사 식구들이시구요) 한 분이 오시더라도 가장 극진하게 대접하고 맞이하자는 것이 북 콘서트 컨셉입니다. <성장 일기>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덕을 크게 보고 있습니다. 출간되자마자 딱 먹혀 버렸네요. 그래서 조금 우울하고, 늘 그렇듯 정성스럽게 책을 만드시는 출판사에 죄송한 마음이네요. 어찌 됐든 아이러브 죠이북스입니다. 


결코 실망하게 해드리지 않을...... 예정입니다. 영유아 돌봄 서비스까지 해드리는 북 콘서트 보셨남요? 2부 진행을 맡은 사회자는 제가 만나자마자 반해버린 분입니다. 웃기는 걸로는 남부럽지 않다고 자부하는 제가 바로 그 앞에 꿇어버렸습니다. 웃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생각의 깊이 또한 장착한, 교계에서는 보기 드문 이.빨.(히히) 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3부에서는 '일상을 쓰다'라는 제목으로 제가 감히 글쓰기 강의 한 번 하려고요. 


여하튼 와주셔야 합니다. 도와주십쇼! 들킬세라 발끝 들고 조용조용 블로그 드나드셨던 분들, 댓글 한 번 안 달고 무임승차 하는 것 같아 혼자 캥기셨던 분들도 이번에 오시면 면죄부 드립니다. 이 블로그를 통해 1이라도 자극받으셨던 분들은 꼭 오셔야 합니다. 블로그의 채윤이 글 보면서 한 번이라도 터졌던 분/뉴스, 페북, 인스타 다 훑고 정말 볼 게 없을 때 심심풀이 오징어 땅콩으로 활용하셨던 분/좋아서가 아니라 제 글이 싫어서 '어디 잘 하나 보자' 하며 오시는 분/속으로 악플 달면서도 자꾸 오게 되는 분들도 해당됩니다. 초대합니다. 여러분, 도와주십쇼!


** 사실, 이런 기사도 있어요. ---> <영성 작가에게 듣는 육아와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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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마지막 주말에 경북 청도에 있는 작은 공동체에서 1박 2일 강의가 있었다. 청년 시절 한 번쯤은 꿈꿔봤던, 좋은 친구들과 함께 집 짓고 살면 좋겠다, 했었던 바로 그런 공동체였다. 감이 유명한 곳이라 한창때는 주렁주렁 감나무가 예쁘다는 소식도 들었다. 강의를 빙자하여 공동체 탐방 겸 가을 기차 여행이 되겠다, 은근 설레고 기대가 되었다. 그런데 당일, #내려와라 박근혜 첫 번째 촛불집회가 있는 날이었다. 강의 섭외를 받았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연일 받은 충격으로 얼얼한 정신이었는데 그나마 광장에 나가 여러 사람과 마음을 포개면 좋을 텐데.  ktx를 타기 위해 서울역 가는 길은 내내 청계천 광장 가는 길이라 더욱 마음이 무거웠다. 내 한 몸 없다고 집회가 어떻게 되는 것 아니지만, 이 엄중한 날에 서울을 떠나다니.....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는 말이 딱이다. 모처럼 몸과 마음이 자유로운 남편이 두 아이 데리고 다녀오겠노라 했다. 내 정신인지 네 정신인지 약간은 정신 실종 상태로 기차에 올랐다.


달리는 KTX 안에서는 강의안도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릴없이 기사 서핑을 하다 유기성 목사님의 영성 일기 논란을 보게 되다. 박근혜-최순실 사태에 대해서 하셨다는 말씀. 이럴 때일수록 주님을 바라보고 '영성 일기'를 쓰라고 했단다. 덜컹하고 가슴이 무너져 와르르 돌덩이가 쏟아지더니 터널 안에 갇혀버린 갑갑함이었다. 올봄에 강의하러 가서 잠깐 뵌 적이 있는데 좋은 느낌을 받았었다. 최근에 출간된 <영성 일기>도 읽어보진 않았지만 반가운 책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주님을 바라보고 영성 일기를 쓰라' 어떤 뜻으로 말씀하신 것인지 알 것도 같다. 그렇더라도 이건 아니지 싶었고, 꾸적꾸적 분노가 일어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글을 향해 쏟아지는 비난의 화살들이 모두 정당한 것 같진 않다. 하지만 애써 선의의 해석을 해보려도 '기도만 해라'로 들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이 통탄할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주님만 바라보고 24시간 주님만 생각하는 일은 어떤 행동으로 드러나야 할까, 생각할수록 마음이 갑갑하다.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논밭의 풍경, 도시 풍경이 슬프기만 했다. 감나무들이 휙휙 여러 번 지나치기에 목적지에 다다른 줄 알았다. 이런 마음으로 처음 뵙는 목사님과 공동체 식구들을 어떻게 대하지, 싶을 정도였다. 막상 마중 나오신 목사님과 곧 출산을 앞둔 사모님을 만나 얼굴을 마주하니 힘이 솟아난다. 첫 시간 강의 시작이다. 작은 공간에 공동체 식구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인도자가 앞에 서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찬양을 인도하였다. 마음의 무릎을 꿇고 찬양 앞에 섰다. '이곳을 지나소서, 이곳을 비추소서, 이곳을 덮으소서, 이곳을 만지소서' 이 가사를 반복하는데 목이 멘다. 눈을 감고 찬양하는데 마음의 화면에서 영상이 펼쳐진다. '이곳'이라는 공간에서 벽이 해체되더니 감나무가 자라는 언덕으로, 낮에 지나쳐온 대구로, 그러다 서울의 청계광장까지 달려 넓어진다. '이곳을 지나소서'의 '이곳'은 이 작은 방이 아니라 희망이 사라져가는 모든 공간이며 시간이다. 아이 잃은 엄마들을 끝도 없이 사지로 내모는, 쓰러진 자를 다시 짓밟고, 국가폭력에 아버지를 빼앗긴 딸들을 능멸하는 이곳이다. 돈 무당과 함께 거짓과 기만에 춤추고 놀아나는 자를 섬기는 우상숭배의 땅이다. '이곳을 지나소서, 이곳을 비추소서, 이곳을 만지소서, 이곳을 덮으소서, 내 안에 무너졌던 모든 소망 다 회복하리니' 찬양 후에는 이땅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였다. 찬양으로 공간을 뛰어넘고 기도로 시간을 초월하여 경북 청도 더함 공동체의 기도는 청계천 광장의 촛불과 하나 되고 말았다.  


영성 일기 논란을 보면서 마음이 더 어려웠던 것은 1박 2일 해야할 강의를 '의식성찰'이라는 내면일기, 다른 말로 영성 일기 쓰기 제안으로  마쳐야했기 때문이다. 이럴 때일수록, 아니 어느 때든지 '자기 중심성이라는 죄'를 알아차리고 회개하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24시간 주님을 바라본다는 말은 24시간 그분의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는 뜻이기에 '신 앞에서 선 나'로 사는 일, 자기 성찰적 삶을 의미할 것이다. 에니어그램 세미나를 통해서 하고 싶은 얘기는 결국 이러한 삶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삶, 영적인 삶에 눈을 떠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촛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둘 때가 아니다. 골방으로 들어갈 때가 아니라 높이 촛불을 들어야할 때이다. 헌데 나는 집회대신 강의에 가고 있고, 가서 고작 자기성찰 얘기나 하려는 것이다. 내가 이러려고 강사가 되었나. 자괴감이 드는 찰나에 본 '영성 일기' 논란은 다름 아닌 지금 나의 딜레마였다


강의를 시작하며 청계천 집회 얘기를 안할 수 없었다. 준비하지 않은 말들이 튀어 나왔다. '저는 지금 강의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청계천 광장을 서성이는 마음입니다.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이런 기사와 논란을 보았습니다. 영성 일기 쓰기나 기도하는 것이 마치 사회참여의 대척점에 있는 행동처럼 느껴집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분법적 사고의 감옥이 갇혀있습니다. 하나가 옳으면 나머지는 틀린 것으로 말이지요. 골방에서의 은밀한 기도와 광장에서 촛불을 드는 기도가 다르지 않습니다. 돌이켜보면 광화문의 집회 인파에 밀려다닐 때,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구호를 외칠 때, 홀로 서서 피케팅 하는 순간, 제게는 가장 절절한 기도시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도 여전한 기도의 시간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힘이 납니다.' 그리고는 정말 힘을 내서 강의에 집중할 수 있었다.


에니어그램 세미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에니어그램이 중해서가 아니다. 신학과 설교는 넘쳐나지만 정작 그것이 영혼에 담기지 못하는 이유를 찾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자기'라는 그릇에 대한 통찰과 그에 대한 가르침의 부재가 내가 느끼는 개신교 영성의 치명적 약점이다. 잃어버린 영성을 찾기 위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까. 내게는 에니어그램이 첫 번째 이정표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에 힘에 닿는 대로 연구하고 나누고 싶은 마음이다. 정말 내면의 여정을 떠나야한다. 마음에서 울리는 사랑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하여 에니어그램을 안내하기 위해서 경북 청도 아니라 중국의 청도라도 기쁘게 달려가는 것이다. 영성 일기와 24시간 주님을 사모하는 일이 그래서 중요하다. 테이야르 드 샤르뎅 신부는 말했다. "우리는 영적 경험을 가진 인간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적 경험을 가진 영적 존재이다" 영성 일기가 영성 일기 되는 것은 인간적 경험을 하나님 앞에 가져갈 때이다. 인간적 경험 안에는 오늘의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져야 한다. 오늘이라는 현실은 오늘 일출과 함께 툭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역사 속 마지막 날로서의 오늘이다. 이런 의미의 인간적 경험이 담기지 않은 영성 일기, 나는 반댈세!


주님의 사랑은 물과 같아서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른다. 24시간 그분을 생각하는 사람이 주목할 곳은 자명하다. 자기 안의 가장 어둡고 은밀한 곳일 터. 자기 안의 가장 낮은 곳에서 주님을 만나는 사람의 시선은 거기 머무르지 않으리라. 영혼에 가득 찬 것이 어찌 흘러넘치지 않겠는가. 그 배에서 생수가 흘러나올 것이다. 그 생수는 역시나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가리. '또 다른 나'인 이웃,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슬프고 아픈 또 다른 나에게로 흐르지 않을 방법이 없다. 영성 일기와 은밀한 기도로 내면이 깊어진 만큼 사랑의 외연은 확장된다. 오직 '내면을 바라봐, 내면을 바라봐'에 머물러 있는 내적 작업은 심리적, 영적 마스터베이션일 뿐. 이토록 나쁜 시절에, 황망한 시절에 기도는 집회의 촛불이 되고 영성일기는 시국선언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믿는 예수님이라면 2016년 대한민국에 사는 당신의 꼬붕들에게 이리 말씀하실 것 같다. '시국선언문으로 영성 일기를 쓰고, 광장에서 드는 촛불에 기도의 마음을 담으렴'


강의를 잘 마치고 숙소에 돌아왔는데 가족 카톡방에 청계천 발 사진이 도착해 있었다. 세 식구가 이재명 성남시장님과 찍은 사진이었다. 인격의 아우라는 숨길 수 없는 모양이다. 스치듯 짧은 만남이었을 텐데 채윤이 현승이가 마음에 담아온 이재명 시장님 이야기가 풍성하다. 고마웠다. 아이들도, 남편도, 시장님도, 그곳의 사람들도, 오늘 함께 한 공동체의 식구들도. 긴 하루의 끝,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다. 내내 얼얼했던 정신이 그제야 맑아지는 것 같았고 콱 막혔던 터널이 뚫린 것 같았다. 평화를 머금고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강의와 집회 참석이, 영성 일기와 외면일기가, 기도와 사회참여가 사랑의 강물 안에서 처음부터 하나였으니까.  







꽃보다 엄마가 먼저 시들어간다.


동생네 가족여행으로 엄마는 딸네 여행을 와 있다.

주일 예배 마치고 착헌 김서방이 모시고 왔는데 나는 강의가 있어 밤이 늦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엄마의 일주일 중 가장 피곤한 주일 저녁,

채윤이 침대에서 쌕쌕 씩씩 숨을 몰아쉬며 주무시다 내 얼굴을 확인하자 큰 눈을 더 크게 뜬다.

"얼라, 우리 딸, 사랑허는 우리 딸이 왔네. 내가 우리 딸이 너머 보고 싶었어.

얘기 허까? 밖이 식탁이 나가 앉으까? 여기 좀 앉을래?" 격하게 나를 맞아주셨다.


엄마가 오신 첫날,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부시럭부시럭 엄마 화장실 가는 소리가 나면 정신보다 몸이 먼저 깨서 튀어 나가게 된다.

화장실서 넘어질까, 스위치를 못 찾아 불을 못 켤까..... 걱정이 한둘이 아니다.

양쪽 고관절이 모두 인공이라서인지 밤마다 다리가 아파서 그냥은 못 주무신다고.

한 번씩 따뜻한 물로 다리를 맛사지 해야 한단다.

샤워기로 맛사지를 해드리고, 허브 오일을 발라 드리는데 또 늘 하는 그 소리다.

"내가 이르케 오래 사는 게 죄여. 큰 죄여. 자식들한티 이게 무슨 죄랴......"  


새벽에 오는 메시지나 간혹 잘못 걸려오는 전화에 잠이 깰 때가 있다.

남편은 취침 모드로 해놓고 자라고, 무음으로 해놓고 자라고 하지만 늙은 엄마 둔 심정을 몰라서 하는 얘기다.

밤에 자다 엄마가 어떻게 됐다는 전화가 올까봐 벨소리를 줄이지도 못한다.

엄마가 곁에 와서 주무시면 안심해야 할텐데 더 신경이 곤두 서있다.

이틀을 계획하고 오셔서 모셔다 드리려 했더니 "하루 더 자고 가믄 안 되남?" 하셨다.

내가 잘못 들었나?

"김서방 미안혀서.... 내가 아들 집 두고 왜 딸 집이 가서 살어." 입에 달고 있는 말이다.

동생 네가 어디 가고 어쩔 수 없어야 우리 집에 한 번 와주시는 격인데, 하루 더 주무시겠다니.


"내가 이번이 오믄서 이게 마지막이지 생각혔서. 내가 온제 또 오겄어. 곧 죽을 사람인디."

늙은 엄마 둔 딸은 밤에 휴대폰 무음 전환만 못 하는 게 아니다.

엄마 생신 때도, 명절 때도, 함께 외식을 하면서도 '이번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며 스스로 고문한다.

고문이다. 하루 이틀 된 고문이 아니다. '늙은 엄마 언제 돌아가실지 몰라 고문'

엄마 없는 세상을 상상하며 하릴없이 흘린 눈물이 얼마던가.


국물은 사골, 반찬은 게장, 후식은 포도를 질리지도 않고 좋아하시기 때문에 식사수발이 쉽다.

이제는 거의 씹지도 못하시기 때문에 게장은 간장만 떠서 드신다.

간장게장의 살을 바르고 짜내서 간장에 섞어서 아기 이유식 만들 듯 했다.

어릴 적부터 우리 식구 모두 좋아하던 박대로 조림을 했는데 가시 하나 없이 살을 발랐다.

그렇게 엄마 반찬은 따로 준비해야 한다. 

할머니까지 다섯 식구 앉아 식사를 하는데 채윤이가 파김치를 맛있게 먹으며 '이 김치 정말 맛있어.' 한다.

나를 닮아 파김치를 좋아한다. 나도 어릴 적부터 파김치를 좋아했다.

대가리 하얀 부분은 먹지 못했다. 엄마가 늘 그 부분을 잘라서 먹고 초록색 부분을 내게 주곤했다.

그 얘길 하다보니 애써 참고 있던 감정이 복받쳤다. 한 달, 두 달이 다르게 시들어가는 엄마.

한때 엄마는 내가 못 먹는 걸 대신 먹어주고, 내가 못 드는 짐을 들어주고, 아픈 내 다리를 밤새 주물러주곤 했는데.


예전의 엄마를 그리며 감상에 젖는 것은 사치이다.

느리게 느리게 혼자 화장실에 들어가고, 꾸물꾸물 일을 보고 나오시는 엄마를 보면 절로 감사의 기도가 나온다. 

귀가 어두워져 '나 니가 뭐라고 하는지 잘 모르겄어' 해도, 이 정도도 다행이지 싶다.

이 정도만으로도 감사하지, 싶다가도 사치스럽게 감정이 복받쳐 속울음을 운다.

속울음을 울다, 이 정도면 감사하지.

시들어가는 엄마를 바라보는 마음의 호들갑을 숨기려니 자꾸만 무뚝뚝해진다.

딸이 고파서 자꾸만 따라다니는 엄마가 식탁 앞에 앉아 말 걸 틈만 노리다 스르르 방에 들어가곤 한다.


꽃보다 엄마가 먼저 시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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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이 준비하고 있으면 스승이 온다]

중국 속담이 있답니다. 그렇습니다.

배움이 간절하면 숨어 계시던 스승님이 스르르 나타나십디다.


거꾸로 읽어도 의미의 빛은 여전합니다.

[스승이 준비하고 있으면 학생이 온다]  

[강사가 준비하고 있으면 수강자가 온다]

학생이나 수강자가 없다면 스승이나 강사는 아직 준비해야할 때입니다.


또 간절한 때 꼭 필요한 책이 손에 들어오는 것은 이제 놀랍지도 않은 간증입니다.

[독자가 준비하고 있으면 저자가 온다]


역시 거꾸로 읽어도 되겠습니다.

[저자가 준비하고 있으면 독자가 온다]


첫 책 <오우연애>가 나왔던 그 5월이 생각 납니다.

첫 아이를 키우는 초보엄마 마음과 똑같았지요.

힘이 빡 들어간 채로 뭔가를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SNS를 서성이고 다녔지요.

저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글을 써서 내놓는 일 뿐임을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책이 잘 되는 것도, 사람을 돕는 것도 내가 애쓴다고 되지 않습니다.

읽고 마음으로 공감해주시는 분이 독자가 되어 다가오는 것입니다.

마음 열고 다가와 들어주시는 분께 강의든 상담이든 제게 있는 것을 나눌 수 있습니다.

오시는, 다가오시는 분들이 참으로 소중합니다.


책이 온라인 서점에 나왔단 얘길 쓰려고 했는데 어쩌다 여기까지......


동화책 느낌으로 책도 크고 글씨도 큼직큼직한 편집입니다.

10년 육아일기를 막 달리는데 켜켜이 육아 칼럼 비슷한 것이 22편 끼워져 있고요.

육아전쟁 중이라 도통 글이라곤 눈에 들어오지 않는 분들,

일명 '육아성 난독증'으로 헤매시는 분들께 딱 좋습니다.

엄마 아빠로 불리는 모든 분들에게 드립니다.

서문에 쓴 것처럼 누구나 쓸 수 있는 육아일기를 당신도 써보라고 권하는 뜻이 있습니다.

 

캄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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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도 염색을 했다.

30대 초반부터 새치(면 어떻고 흰머리면 어떠냐)가 나기 시작했다.

나보다 어린 주제에 동안이기까지! 이런 남편이 신경 쓰여서 부지런히 염색한다.

일 년에 한두 번 퍼머를 위해 미용실 가는 돈과 (특히) 시간이 아까워서 어쩔 줄 모르겠는 나.

염색을 위해 한 달에 한 번 미용실에 갈 수 없다. 집에서 한다.

그리하여 자세히 보면 헤어 컬러의 불규칙적 그러데이션이 장난 없음이다.

괜찮다. 마주 앉은 사람에게 흰머리로 충격 주지 않는 정도만 유지하고 싶다.


언젠간 염색을 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 엄마가 어느 때부턴가 염색을 하지 않아 백발인데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건 순진 무궁 천진 난폭에

아는 건 하나님과 기도 밲이는 없는 엄마라서 백발의 청순함이 더욱 사랑스럽다.


물론 내가 선망하는 백발의 아름다움은 우리 엄마 같은 순백의 천진미는 아니다.

그렇다고 숏컷의 백발, 오직 자기확신의 확고함으로 다가오는 어떤 후배의 유아독존식 백발도 아니다.

아주 그냥 자연스러운데 살짝 지적으로 보이는, 조금 배운 할머니 같은 백발이다.

마주하는 누군가에게 부담이 될 것 같으면

'그렇다고 노인네는 아니야, 안심해' 이런 뜻을 담아 한 두 가닥만 잡아 화려한 색으로 브릿지를 넣어도 좋으리.


오늘은 '은발'의 여자 사람 인생 선배님 한 분을 뵈었다.

평생 가르침의 방법을 연구하고 가르치신 분인데

'아, 방법이나 기술이 아닌 것 같아요. 물론 제가 평생 연구하고 가르친 것이긴 한데

중요한 건 성품에요. 내가 그동안 가르쳤던 것이 뭔가 싶어요'

라고 말씀하셔서 뭉클했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은발의 여자 사람 인생 선배님 뒤로 날씨가 배경화면을 만들어댔다.

흐림으로 시작한 하늘에 갑자기 청명함이 들이닥쳤고, 시시각각 구름 그림자를 바꾸어댔다.

조명이 바뀌면서 은발의 명도는 형언 불가의 그러데이션을 만들었다.


마침 그런 생각이 나를 이끌어가는 중이었다.

(생각이 나를 이끌어갔다고 말했다. 내가 생각했다고 하지 않았다. 분명히!)

연애도, 결혼도, 부모 됨도, 관계도, 신앙도,

내가 맺는 모든 관계의 질은 나 자신과 맺는 관계를 비춰주는 것뿐이다!

이런 생각에 더욱 확고히 이끌리는 중이었다.

은발 선생님은 '의사소통은 기술이 아니라 결국 성품이에요'라고 표현하셨을 뿐이고.


그런 맥락에서 나는 불필요한 염려 같은 것들의 씨를 말리는 중이었다.

방법이나 기술로 되는 게 아니니 애쓴다고 될 일이 아니다, 다독다독.

타자 안의 나, 타인의 눈에 비친 내가 아니라 내 안의 낯선 타자에게나 신경 쓰자.  

게다가 이 은발 선생님께서 쓰신 책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뜻은 말이 아니다. 많이 떠들어봐야 소용없다. 인간은 듣고 싶은 것, 들을 수 있는 것만 듣기 때문이다.

뜻은 좋지만 말이 틀리면 전달되지 않는다. 무엇이 틀린 말인가? 듣지 않고 들리지 않는 말이 틀린 말이다."


이 부분을 인용하여 내게 책을 소개해주신 또 다른 지혜자는 이런 설명을 덧붙이셨었다.


진정성은 타자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나로 향하는 진정성이어야 한다.

나에게 진정성이 있어야 그것이 타자를 향해 발현되는 것이다.

우리는 나의 진정성은 의심할 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타자에게 나의 진정성을 호소한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먼저 나의 진정성을 물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것은 현상적으로 타인에게 드러난다.

나에 대해 사색하고 나를 물어야 진정한 태도가 된다. 내가 피력하는 내 진정성이 과연 진정성인가?


언젠가 은발을 할 수 있다면 그 흰 머리칼들이 부는 바람에 마구 흩날렸으면 좋겠다.  

가볍게 흩날리고 흐트러지는 백발에서 샴푸향과 함께 티 나지 않는 진정성이 폴폴 날렸으면.

햇볕 아래 고요히 앉아 있어도 충분히 쾌활하고 다채로운 노년의 성품이었으면.  

무엇보다 아주 다루기 쉬운 할머니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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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이 되어 연애하기(..) 35

  


연애와 결혼에 대해 글 쓰고 강의하는 일을 하다 보니 결국 인간의 마음에 골똘하게 됩니다. ‘나 자신이 되어 연애하기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는 마..의 힘을 전제로 합니다. 잘 사랑하기 위한 건강한 마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타고나는 성품도 있겠고,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생애 초기 부모와의 관계에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이 지면을 통해 저도 여러 번 얘기했습니다. 나다운 삶, 나다운 사랑의 시작은 부모님의 아이로부터 어른인 나로 떠나오는 일이라고요. 힘들고 아픈 가족사를 지녔다 해도 그 상처를 디딤돌 삼을 것인가, 걸림돌이라 탓하며 주저앉아 버릴 것인가 하는 것은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닌 나의 선택일 것입니다.

 

방향을 전환해보기로 해요. 이제 여러분이 부모가 되는 이야기를 좀 해봅시다. 연애(애인은 있니)-결혼(국수는 언제 먹여줄래)-부모 되기(좋은 소식 없니). 모든 싱글이 똑같이 밟아야만 하는 코스라는 뜻은 아닙니다. 꿈꾼다고 꼭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구요. 그래도 어찌됐든 여러분 중 대부분은 어느 새 부모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연애가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길고 지루한데, 막상 사람이 생기고 결혼을 마음먹으면 그때부터는 달리는 인생 기차에 가속도가 붙어요. ‘, 진짜 이 답답한 오빠랑 결혼을 해야 해요, 말아야 하요?’ ‘개팅남이 분명히 주말에 영화보자고 했는데 연락이 안 와요. 너무 자존심 상하고 속상해요이런 고민이 영원할 것 같죠? 불과 1년 몇 개월 전 이런 상담 메시지를 보내왔던 친구들이 산후조리원에서 아기 사진을 보내옵니다. ‘사모님, 드디어 기쁨이(태명)가 나왔어요!’ 그리고 스르르 육아 전쟁터로 떠나가지요. 1,2 년 전 주고받은 메시지가 10년은 된 일 같아요. 이렇듯 닥칠 나의 부모 됨을 그려보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싶어요. 어떤 부모가 되고 싶은지 스스로 물어봐야겠지요. 기록을 남겨두면 더 좋겠네요. 내가 엄마(아빠)가 된다면 우리 부모님의 어떤 모습을 그대로 배우고 싶은지 적어보고요. 이런 모습만큼은 유산으로 받지 않겠다, 내게서 끝이다, 결심도 세워봅니다. 가끔 한 번씩 이 질문 앞에 다시 서서 새로이 업데이트시켜보는 것도 의미 있겠습니다. 꿈꾼다고 그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질문을 던져보는 자체로 좋은 준비가 됩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무엇을 꿈꾸든, 어떻게 상상하든 상상 그 이상지만 말이에요. 꿈과 현실의 어마어마한 괴리를 체감하게 될 테지만 닥치는 현실은 그때 가서 당해 보기로!

 

제가 정말 하고 싶은 얘기는 지금부터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연애와 인간관계에 관한 고민은 마음의 문제로 귀착되고 내 마음이라는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 중 하나는 부모입니다. 저 자신이 내적인 문제와 마주하면서, 또 많은 청년들과 상담하면서, 무엇보다 제 아이들을 키우면서 결심했습니다. 정말 좋은 부모가 되어야겠다! 그리고 남다른 노력을 했다 자부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열심히 노력해도 완벽한 부모는커녕 보통 엄마가 되기도 쉽지 않습니다. 애를 쓴다고 쓰는데 더욱 이상한 엄마가 되어가는 나를 발견할 때도 있습니다. 사랑이라고 애써서 건네는데 아이의 닫힌 마음에 부딪혀 튕겨 되돌아올 때는 정말이지 인생의 길을 잃은 느낌이 들어요. 저뿐 아니라 많은 부모들이 그러할 것이고 여러분의 부모님도 크게 다르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렇듯 실패와 좌절 끝에 제가 발견한 좋은 부모 되는 확실한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확실한 방법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사이좋은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 사이가 좋은 가정, 마음을 열고 나누는 대화가 가능한 부부는 아이들에게 정서적으로 비빌 언덕과 같습니다. 반대로 늘 갈등을 품고 있거나, 심지어 아이들 앞에서 자주 싸우거나,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마음 깊이 분노를 쌓아두고 외형만 유지하는 부부 사이의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갈 곳 없는 나날을 사는 것입니다. 남편(아내)와 단절된 채 아이에게만 친절한 것은 사랑보다는 혼란으로 다가가기 쉽습니다. 그러니 다소 부족한 엄마 아빠라도 둘 사이의 평안이 있다면 안전한 가정입니다.

 

혹여 좋은 엄마(아빠) 될 자신이 없어서 결혼이 두렵다면 배우자 한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겠다는 결단이면 충분합니다. 아니 저는 감히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세상 그 무엇에서 실패하더라도 단 한 사람을 사랑하는데 성공한다면 다 이룬 것이라고요. 여기서 성공이란 사랑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포기하고 싶은 날이 한 두 번이 아닐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지요. 사랑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 다시 한 번 손을 내미는 결단은 자기희생입니다. 이런 순간을 통해 사람은 성장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바라는 성숙한 인간, 멋진 사람에 한 걸음 가까이 가게 됩니다. 저는 아내 한 사람을 오롯이 사랑하는 남자가 지질하게 사회생활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한 남자를 오롯이 사랑하는 여자가 편협하거나 이기적인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자기 선택에 대한 헌신이고 책임입니다. 결국 한 사람을 위한 마음입니다. 단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자식도, 이웃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단 한 사람을 있는 사랑하는 능력은 좋은 부모, 좋은 지도자, 좋은 직장인, 좋은 신앙인 되는 힘입니다.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가는 타이밍에, '잠쉬만요오~ 어뉘 옵퐈한 템포 쉬고 가실게요!'하는 작당입니다. '꽃다운 친구들_방학이 일 년이라면' 말이에요. 채윤이가 하고 있는 에프터 스콜레 '꽃다운 친구들'을 아직도 홈스쿨링 정도의 대안교육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딱 일 년, 잠시 쉬고 가는 것입니다. 고등학교를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인생을 포기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랍니다. 이대로 계속 아웃사이더로 살겠다는 뜻도 아니고요. 진로를 고민하며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하지만 본질적인 취지는 일 년 길게 놀아보자는 것입니다. 벌써 마지막 여행을 준비하고 있고 마지막 가족모임 공지를 들어버렸네요. 역시 방학의 시간은 참 빨리 흘러가요. 5교시 수업 마치는 종을 기다리는 시간은 그렇게나 긴데 말이에요.


꽃다운 친구들 최고의 수혜자는 김채윤이다, 나팔을 불고 있습니다. 말이 방학이지 꽃친에서 하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진도 따라 기록하기도 어렵습니다. 만남이 다양하고 경험이 다채로운데다 꽃친에 제대로 꽂힌 채윤이의 변화 또한 풍성합니다. '방학이 일 년이라서' 카테고리에 제목 달아놓고 날린 것이 한 둘이 아니네요. 어찌 채윤이만의 꽃친일까요. 아이들, 부모들, 선생님들의 꽃친이고 나름의 의미와 이야기가 있을 것입니다. 꽃친에 연루된 사람 수만큼의 의미가 있겠지요. 그럼에도 의미는 오직 발견하는 자의 몫이니 끝없이 의미를 발견하고 있는 채윤이가 최고 수혜자인 걸로. 셀프 영예를 수여하고 지켜보겠습니다.


꽃친 의영이네서 가족들을 초대해주셔서 오산의 자그마한 교회에서 모였습니다. 마당에서, 거실에서, 목사관 옆 교회에서, 아이들끼리, 엄마들끼리, 아빠들끼리, 또 일부 엄마들끼리 깔깔깔 호호호 참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엔 뻥뻥, 번쩍번쩍 불꽃놀이까지! 그리고도 아쉬워서 몇 가정은 에프터 스콜레 아니고 에프터 수다를 떨다 12시가 되어 집에 돌아왔습니다. 맛있는 음식, 편안한 대화, 빼놓을 수 없는 꽃치너들의 까불까불 놀이들. 이것이 더불어 살아가는 맛입니다. 그런데 최고 수혜자 채윤이에겐 그 이상의 좋음이었으니! 방학이 일 년이라서 발견한 또 하나의 의미. 두둥~


다섯 살에 채윤이가 처음으로 유치원에 갔습니다. 유치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제가 프리랜서로 전환했기 때문에 금세 같은 반 엄마들과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럭저럭 잘 지내고 채윤이 친구들 데리고 제가 음악수업도 하고 그랬지요. 그 해를 보내고 애써 마음먹은 것은 아닌데 '엄마들과 어울리면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흔히 아는 것처럼 엄마들의 대화는 아이들 영어, 수학, 특기 교육 얘기니 끼어들 수가 없었고요. 가만히 듣다 오는 것만으로도 기빨림과 동시에 불안과 걱정지수 상승이었습니다. 성격도 까칠한데다 교육관은 더 까칠하니 버텨나질 못한 것이지요. 일을 핑계로 학부모 그룹과는 자연스럽게 거리를 유지하고 지냈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덕분에 아이들에게 공부 스트레스 주지 않고 사교육 걱정 내려놓을 수 있었지만 잃는 것도 있었지요. 현승이는 물론이거니와 특히 채윤이에게 결핍감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일곱 살 때 다닌 유치원은 남양주의 작은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이었는데 산 중턱이 있었지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엄마와 카풀을 했고 일하는 채윤이 엄마는 등교 담당이었습니다. 유치원 마치면 학교 운동장에서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하염없이 놀고, 엄마들도 등나무 아래서 노는 거죠. 그러고도 집에 바로 오는 게 아니라 근처 친구집으로 몰려가 부침개를 해먹고..... 다 좋은데 우리 엄마만 없는 채윤이는 그 시간이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놀이의 신 채윤이의 놀이 본능보다 엄마 보고싶은 마음이 더 컸던. 


의영이네 가족모임 다녀와서 채윤이는 행복 만땅이었습니다. 갈수록 죽이 맞는 친구들과 죽도록 노는 것도 좋지만, 그것을 모두 새로 산 아이폰으로 찍어서 인생샷으로 간직하는 것도 좋지만, 옆에서 수다 떠는 엄마들 사이에 우리 엄마가 있다는 것이 그렇게 좋은 일인 겁니다. 가족동행 프로그램인 꽃친에 꽃친 최고 수혜자의 가족으로서 마음으로 함께 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이것 자체가 채윤이 마음의 구멍 하나를 채워주는 고운 작업이 되고 있습니다. '엄마, 엄마랑 함께 해서 너무 좋아. 친구들이 엄마를 좋아하고 엄마가 계속 함께 있고....... 너무 좋아' 일곱 살 채윤이로 돌아가 그 시절 널따란 운동장의 허전함을 이제라도 조금 채울 수 있다 생각하니 역시, 이 바닥 최고 수혜자는 우리!


이렇듯 꽃다운 친구들과의 만남은 채윤이 내면으로 가서 치유의 반창고 하나를 붙입니다. 상상 밖의 나.비.효.과.입니다.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개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의미의 나비효과 말입니다. 꽃친을 선택한 효과가 마음 깊은 곳까지 다다랐습니다. 내면 깊은 곳으로 가는 것이 얼마나 먼길인지 알기에 하는 말입니다. 게다가 또 하나의 나비 효과가 있답니다. 일 년 쉬는 채윤이를 모두가 부러워했지만 단연코 아빠의 부러움이 1등이었습니다. 태생적으로 사유와 성찰을 위한 다락방이 필요한 사람인데 본성을 거스르며 5년, 길게는 11년을 달려온 것입니다. 꽃치너 채윤이를 보면서 '부럽다, 부럽다' 하며 부모모임 가서는 '아빠들 꽃친은 안 해요? 아빠들도 꽃친 하게 해주세요' 했지요.


12월에 새로운 교회로 가게 되었습니다. 사임과 부임 사이 쉼표 찍는 시간을 간절히 원했지만 사정상 단 한 주도 어렵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임이 당겨지는 믿기 어려운 일이 발생, 남편이 꼭 가지고 싶었던 시간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당장 이번 한 주 침묵기도 피정에 갔습니다. 4박5일간 대침묵 속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순간순간 그를 위해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다 뭉클해지기도 합니다. 남편의 이 모든 여정 역시 꽃친 나비효과라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길을 떠나는 용기, 영혼의 안식에 대한 간절한 바램, 이런 것들은 채윤이와 함께 꽃치너의 부모로 지낸 시간의 나비효과입니다. 


남편이 피정에 들어간 다음 날이며 의영이네서 가족모임을 한 다음 날이었던 어제 아침 묵상시간이었습니다. 메시지로 읽는 역대하의 마지막 장입니다. 유대 왕들의 비틀거리는 걸음을 긴 시간 묵상했왔지요. 결국 바벨론에 패망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것으로 그 걸음이 끝납니다. (그분의 역사는 물론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겠지요) 역대하의 마지막이 이렇더군요. 놀랐습니다. 70년의 포로생활은 그간 지켜지지 않았던 안식일을 채우는 기간이었다니요. 질주를 멈추고 쉬는 일은 하찮은 것 같지만 작은 일이 아닙니다. 나비의 연약한 날개짓 그 이상입니다. 아이도 엄마도 아빠도 목사도 멈추어 돌아보지 않는 것은 포로생활로 가는 어두운 길을 헤매는 것과 같습니다. 대학입시, 돈, 성공, 명예, 자기 숭배의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서 늘 멈추고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꽃다운 친구들의 나비 효과, 엄청납니다.


"생존자는 너 나 할 것 없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느부갓네살과 그 집안의 종이 되었다. 포로와 종의 생활은 페르시아 왕국이 세워질 때가지 계속 되었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메시지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황폐한 땅은 긴 시간 안식에 들어갔다. 그동안 지켜지지 않았던 모든 안식일을 채우는 칠십 년 동안의 안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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