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주문 안 해?

아, 그러게. 날도 덥고 자꾸 까먹네.


월요일, 나는 우리 교회 고등부 수련회 강의로 아침 일찍부터 집을 비웠다.

이런 저런 일처리를 하고, 수련회 준비를 하며 남편 혼자 낮시간을 보냈다.

'놀월'을 각자 보내고 늦은 오후에 집에서 합류.

저녁을 먹고 정리하며 커피를 묻기에 아, 커피가 떨어졌구나 했다.


아침에 나서며 차에서 마실 커피를 내렸다.

원두가 얼마 남지 않았었으니 혼자 집에 있으며

남은 커피를 다 마셨겠구나, 어쩌면 모자랐겠구나 싶었다.


오늘도 안팎으로 보일러 빵빵하게 돌린 날씨로 시작한다.

아침 먹고 설거지 하고 청소기 한 번 돌리니 아이스커피 생각만 간절하다.

세수하고 커피 한 잔 타서 앉으면 딱인데....

커피가 없지. 흠. 커피가 없어. 쩝쩝. 허전하다. 허전하다. 허전하다.


아련한 마음으로 커피장을 바라보는데 밀폐용기에 커피알이 보인다.

헛것이 다 보이네! 아니다. 헛것이 아니다.

아이스 한 잔 내릴 원두가 남아있다!!!!!!!


그러니까 어제 남편이 '커피 주문 안 해?' 라 했을 때 다 떨어졌단 얘기가 아니었다.

그렇게 물을 때는 분명 커피 한 잔 마시고 싶단 얘기였을 텐데.

낮에 다 털어 마시고 없어서 아쉽단 말인 줄 알았는데. 커피가 있다!


그 어느 시점보다 아침 커피의 결핍감이 가장 크다.

내가 혼자 마신다면 저녁 커피를 굶고 다음 날 아침 커피를 살린다.

어제 집에 혼자 있으면서, 아니 함께 있던 저녁에도 간절했을 커피.

앞뒤 재지 않고 다 털어 마시는 사람이 아니다.

내일 나는 출근하여 사무실에서 마실 수 있지만 정신실이 집에 있는 날이네.

라는 자각도 없이 그저 그 커피를 남겨두었을 것이다.

뭔가에 이끌려 커피 본능을 참았을 JP.


아침 커피를 지켜준 남편의 마음은 찜통 더위 따위 초월하는 따스함이다.

생색 낼 줄도 모르는 이 사람은 새벽 KTX를 타고 장례예배 인도하러 가버리고 없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지켜낸 커피를 경건하게 갈아 내린다.

얼음 꽉꽉 채워서 내린 아이스 핸드드립 커피가 시원한데 따스하다.

남편을 위해 착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되는, 푹푹 찌는 따스한 아침이다.









낳기만 했지 당신이 해준 게 뭐 있냐!며

<나의 성소 싱크대 앞>이 알아서 잘 커주고 있습니다.

아니, 고맙게도 서평으로 키워주시는 분들이 있고,

블로그에 죽치고 있느라 SNS 돌아가는 상황에 어두은 제게 제보들도 해주십니다.

서점에서 사진을 찍어 보내주시기도 하구요.

덕분에 잘 자라가고 있습니다.

남일로 여기지 않고 기쁘게 제보해주시는 분들께 얼마나 감사한지요!

함께 보세요. 


***


청어람아카데미 박현철 연구원께서 써주신 평은 제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

책에 대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입니다.


출판사는 ‘밥은 매일 차려야 한다는 새댁, 바깥일 하랴 집안일 하랴 몸이 열 개여도 모자란 워킹맘, 편한 듯 편치 않은 시부모님과 정을 나누는 며느리, 일상을 영원에 잇대어 사는 이 땅의 모든 아줌마’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고 했다. 천만의 말씀이다. 자취한다는 핑계로 편의점 도시락만 사 먹는 청년들, 나는 바깥일 하니까 집안일은 당신이 하라는 무심한 남편들, 영적 양식만 챙기느라 종일 설교만 해대는 목사들, 밥 한 끼 차리고 빨래 한 번 한 것으로 SNS에 자랑스럽게 자랑하는 모든 아재들이야말로 이 책을 읽어야 한다(그런 아재들의 말을 들어주고 견뎌주고 맞장구쳐주고 ‘좋아요’눌러주는 모든 이들도 읽어야 한다). 우리가 외면해온 살림의 공간, 일상의 공간을 거룩한 성소로 재발견할 때 온 세상에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이다.




***

뉴스앤조이 이용필 기자께서는 본문 중 제가 특별히 꾹꾹 눌러 쓴 부분을 잘 찾아 인용하여 서평을 써주셨네요.

<나의 성소 싱크대 앞>은 가을, 겨울, 봄, 여름 네 챕터로 이뤄져 있다. 각 에피소드 제목은 눈길을 사로잡는다. 가령 △아버님의 소주잔 △사모이기 전, 인간 △'아직도 가야 할' 엄마의 길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하나님께는 손주가 없다 △밥하는 아내, 신문 보는 아내.

이 책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일상 기록이 아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묵상하고, 바람 앞 촛불 같은 신앙을 고민하며 애쓰는 모습이 담겨 있다.

(중략)

꼭 주부, 딸, 며느리, 사모, 아줌마가 아니더라도 이 책을 읽는 데 무리는 없어 보인다. 아직 결혼도 안 한 총각 기자도 재미있게 봤으니까


뉴스앤조이 [당신의 성소는 어디?] 클릭







열대야 탓에 자도 자는 것 같지 않아서인지, 기다려야 할 때라서인지 한동안 꿈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꿈을 기다리며 잠드는 날이 많습니다. 꿈을 기다리며 잠들었는데 아침에 깨서 기억나는 꿈이 없으면 에잇, 헛 잤네! 하고 맙니다. 잠을 자다 꿈을 건지는 건지, 꾸기 위해 잠을 자는 건지..... 헛 자는 날은 헛 자는대로 의미가 있다는 것도 압니다. 하룻밤에 서너 개의 꿈이 기억나는 날도 있는데 그런 날은 그런 날대로 의미가 있구요. 며칠 전에 뜬금포 날린 '꿈 강의'에 대해서 조금 긴 사족을 달아볼까 합니다.


꿈일기를 쓴지 8년쯤 되었습니다. 에니어그램 연구소에서 주변 선생님들과의 알맹이 있는 수다에서 시작했지요. 늘 그렇듯 꿈에 관한 세상의 모든 책은 다 읽으리라! 달려들어 열혼공('열나게 혼자 공부'라고 굳이 설명)했습니다. 지금의 선생님을 만나고 꿈 그룹을 경험한 지는 3년, 그러면서 여정을 함께 하는 벗들과 자연스러운 꿈 나눔을 해왔고, 작년 9월에는 파일럿 꿈집단을 만들어 1년 가까이 지속해오고 있습니다.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자신의 꿈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것이 몇 달 상담치료를 받는 효과가 있다구요.  이것은 온전히 제 말은 아닙니다. "당신은 불필요한 심리치료비 1만 달러를 벌었다" <불멸의 다이아몬드>에서 리처드 로어 신부님이 하신 말씀이 있지요. 스스로도 속고 있는 '가짜 자기'를 인식하여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자기를 인식할 때 우리는 최선의 상담 서비스를 받게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에 치유는 저절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꿈은 제게 '가짜 자기'의 목소리를 일깨우는 최선의 안내입니다.


사춘기 이후 제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하나로 귀결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 중에 왜 예수님 같은 사람이 없지?' 어릴 적에는 그런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이 일이었다면, 차차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하는 제 자신이 고민이더군요. 이렇게 열심히 성경공부하고 큐티하고 수련회 다니는데 왜 내 인격은 변하지 않는단 말인가? 원래 그런 것인가? 나이에 따라 다른 옷을 입고 등장할망정 고민은 한 가지였습니다. 이 고민을 고민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읽었고, 열심히 찾아다녔고. 그래서 얻은 결론이라면 '단단한 자아의 껍데기'입니다. (이 표현도 제 말이 아니라 박영돈 교수님께서 즐겨 쓰시는 개념입니다. 정확한 워딩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브레넌 매닝의 말을 빌자면 죄의 본질은 어마어마한 자기중심성이고요. 종교생활이 오래될수록 이 단단함이 더욱 견고해지기에 유명한 목사님이, 새벽기도 빠지지 않는 장로님이 예수님의 온유한 성품에서부터 가장 멀어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관심은 바로 그 에고의 장벽을 뚫어서 진리가 들어갈 자리를 내는 것, 깊이 감춰진 하나님 형상이 드러날 길을 내는 것에 있습니다.


제가 하는 에니어그램은 물론 MBTI, 심지어 연애강의까지도 강의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입니다. 그 딱딱한 껍데기 안의 자신을 인식하게 하는 것, 그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자기중심성으로부터 한 발이라도 빠져나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닦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MBTI 강의하하호호, 맞아맞아, 웃으면서 나의 성격을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게 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다름'에 대해 공감 터지는 강의에 끄덕이는 동안 '성격'이라는 겉껍질에 스르르 실 같은 균열을 내는 것입니다. 에니어그램은 좀 더 적나라하게 그 균열을 조장합니다. 에두르지 않고 자아의 포장지, 자아의 방어에 대해서 피력하는 것이 제가 하는 에니어그램 강의입니다. 영성 강의를 할 때는 '종교'라는 가장 거룩한 에고의 포장지를 벗겨내자고 촉구합니다. 이 모든 강의는 결국 견고한 자아의 껍데기 안에 있는 창조주를 닮은 형상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하여 제가 하는 일은 내적치유가 아니라 내적여정입니다. 라깡의 말처럼 '진리'에 신경 쓰면 치유는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궁극적으로 혼자 갈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고, 혼자 갈 수 있는 힘을 일깨워주기 위해 제가 도움받았던 도구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MBTI도 에니어그램도 꿈도 그 수단 중 하나입니다.(네, 하나일 뿐입니다!) 그중 뚜벅뚜벅 제 걸음으로 내적여정을 가는 사람에게 가장 힘이 되는 벗이 '꿈'입니다. 꿈은 오롯이 자신만의 것입니다. 최근에 나온 슈테판 클라인의 <어젯밤 꿈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들>에서 '꿈은 가장 내밀한 체험'이라고 말하면서 그나마 성생활은 파트너와 관련이 있지만, 꿈속에서는 완벽하게 혼자라고 합니다. 자신이 보는 것을 아무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로 어젯밤 꿈을 아무나 보는 SNS에 공개하는 것을 보면 민망합니다)  이 은밀한 이미지들...  어딘가에서 오는 메시지이구요. 프로이트라면 무의식, 칼융이라면 자기 안의 신적인 자아 Self로부터 오는 것이라 하겠구요. 저는 제 안에서 저를 붙드는 사랑의 목소리, 그분이 발신자라고 믿습니다. 발신자가 그분일찐대, 모든 꿈은 결국 하나의 메시지로 귀결된다고 봅니다. '너는 내 사랑받는 자이다'


혼자 가는 것이라고 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혼자 가는 길은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진실하게 자신을 드러냄으로 자기를 보는 더 맑은 눈이 생기는 것처럼 꿈 역시 진실한 그룹과 나눔을 통해서 그 의미가 자명해집니다. 동반자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서 꿈을 보내시는 그분과 함께 가는 길이지요. 에니어그램이 그렇듯 꿈은 반드시 기도, 즉 사랑이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지향해야 하고 다시 거기서부터 나와야 합니다. 저는 헛잠을 자는 날이 길어지면 그 때문에 기도하고, 뜻을 알 수 없는 묘한 꿈을 꾼 날에는 그 꿈의 의미를 묻고자 기도합니다. 그럴수록 밖을 향하던 눈이 안으로 향하고, 제 안에 있는 것들을 투명하게 발견할수록 더 맑은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나의 성소 싱크대 앞>과 같은 일상글입니다. 이런 좋은 것을 조금씩 나눠야겠다는 마음, 그 마음으로 시작한 한여름 밤의 꿈수다랍니다.



[한여름 밤의 '꿈'수다]



일시 : 2016년 8월 23일(화), 오후 8시

장소 : 카페바인 (서대문구 신촌로 25)

강사 : 정신실            인원 : 선착순 30명

참가비 : 만오천 원(음료 포함)

문의 : 010-4235-8020 이수진 (문자로 주세요)

신청 : 여기를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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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는 꿈을 꾸었는데 드디어 그 남자(그 여자)를 만나게 되는 건가?

소식이 뜸한 친구가 꿈에 나왔는데 얘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말도 안 되는 스토리, 영락없는 개꿈인데 자꾸 생각나는 건 뭐지?

밤마다 악몽을 꾸며 일어나는데 몸이 허한가? 보약을 먹어야 하나?

민망하도록 야한 이 꿈은 뭐지? 싱글 생활이 너무 길었나?

불길한 꿈을 꾸었는데 운전대 잡기가 겁나네. 오늘은 운전하지 말까?

교회 다니는데, 꿈에 뱀을 봤어. 사탄의 시험에 빠지는 건가?


열대야로 잠들기 어려운 밤, 어젯밤 꿈이 궁금한 분들 모여 '꿈 수다' 한판 벌입시다.

'꿈은 당신에게 배달된, 봉투 안에 든 편지' 라고 탈무드에서 말합니다.

혹여 어떤 메시지가 든 편지라면 발신자는 누구이며,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지,

특히 크리스천이 꾸는 꿈과 영성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새롭게 단장하고 온갖 좋은 사람들의 아지트가 되고 있는 카페바인과

정신실의 내적여정 모임이 함께 준비한 '수다수다' 1탄입니다.

오세요, 오세요, 어젯밤 꿈이 궁금한 꿈쟁이들 오세요.

잠 안 오는 여름밤에, 심심한 분들 오세요.



[한여름 밤의 '꿈'수다]



일시 : 2016년 8월 23일(화), 오후 8시

장소 : 카페바인 (서대문구 신촌로 25)

강사 : 정신실            인원 : 선착순 30명

참가비 : 만오천 원(음료 포함)

문의 : 010-4235-8020 이수진 (문자로 주세요)

신청 : 여기를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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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등부 수련회에 간증하러 따라간 채윤이. 지금 쯤이면 벌써 간증이 끝나고 저녁 집회까지 마쳤을 시간입니다. 간증문을 쓴다고 거실에 노트북 뻗쳐 놓고 며칠 글쟁이 엄마 코스프레를 했습니다. 머리 쥐어 뜯고 예민하게 굴고,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냐며 후회하고. 엄마 싱크로율 90%. 며칠 끙끙거리더니 A4 반 장 짜리 간증문을 써내고 봐다랍니다. 분명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생각보다 정리를 잘 해놓아서 놀랐습니다.


그 다음엔 논쟁,


뼈대를 잘 잡아놓은 글에 살을 붙이는 과정에서 채윤이가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 얘기'가 많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등부 쌤들이 기대하시는 것은 그것이라고. 간증이 그런 거 아니냐고요. 단호박 엄마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아니라고, 그렇지 않덕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뜻이었습니다.' 이런 말은 제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너의 이야기를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들려줬는데 듣는 사람이 거기서 하나님을 발견한다면, 그것이 좋은 간증이야.' 말발에 밀렸는지, 힘에 굴복했는지 알았다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촘촘하게 채워 넣은 간증문을 완성했습니다.


문장 몇 군데 봐주고, 최종적으로 분량이 많아서 줄이는 것을 도와줬는데 그럴 듯한 간증문이 되었습니다. 채윤이가 쓴 글을 처음 읽으면서는 엄마로서 울컥하는 부분도 있더군요. 허락받고 공개합니다.


************

 
안녕하세요. 저는 17살 김채윤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그렇게 긴 인생을 살아온 건 아니지만 중학교 시절에 가장 힘들었고 그런 힘든 시간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의지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또래 친구들에 비해 일찍 진로를 선택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만난 피아노 선생님을 통해서 예술중학교를 알게 되었고 그 학교에 가면 공부보다 피아노를 많이 할 수 있다는 그 한마디에 반드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엄마 아빠께선 아직 너무 이른 것 같기도 하고 쉽지 않은 길이기에 반대하셨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엄마 아빠를 설득시키려고 조르고 졸랐습니다. 결국 엄마 아빠도 제 선택을 믿고 지원해주기로 하셔서 5학년 막바지부터 입시준비를 했습니다. 같은 전공 친구들에 비해 많이 늦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기적적으로 합격해서 예술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저는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했고 중학교에 가서도 피아노를 더 많이 칠 수 있을 거라는 마음에 기대가 컸는데 막상 학교생활은 제 생각과 많이 달랐습니다. 매번 실기시험마다 등수를 세우는 시스템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구들이 서로 경쟁상대가 될 수밖에 없었고, 저는 이런 분위기에 적응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친구들 대부분은 유명한 교수님들에게 레슨도 받고 연습 환경도 좋았는데 그러지 못했던 저는 친구들 사이에 있으면 자꾸만 작아지고 자신감도 떨어졌습니다. 저는 특히 연습환경이 열악했기 때문에 학교가 끝나면 교회에 와서 연습을 하고 시험 막바지가 되면 밤늦게 까지 남아 연습을 했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지만 시험결과는 늘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결과보다는 과정에서 얻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하며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매 시험 때마다 그런 일이 반복 되다보니 좌절하게 되고 포기 하고 싶은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고 그랬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부담도 컸습니다.

그런 힘든 시간들이 계속 반복 되면서 결국 3학년 새 학기에 위기로 찾아왔습니다. 고등학교 입시준비로 학교에서 1주일에 한 번씩 친구들 앞에서 연주하는 향상음악회라는 것을 해야 했습니다. 그 음악회를 할 때마다 저는 너무 부족했고 그래서 매번 친구들 앞에서 창피하고 부끄러웠습니다. 내가 아직 연습이 너무 부족하고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모든 시간을 다 연습하는데 올인 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습니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다보니 제 탓을 하게 되고 여기가 진짜 제 한계라고 느껴져 모든 상황 속에서 도망치고 싶었고 앞으로 계속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막막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중학교 졸업 후 1년 동안 안식년을 가지는 프로그램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엄마 아빠께서 이런 것이 있다고 제안해주셨고 저는 예고입시를 포기하고 이 프로그램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엄마가 ‘네가 예중을 선택했을 땐 3년을 선택 한 거야. 그러니까 지금 포기하면 안 돼’ 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안식년을 갖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입시준비를 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고, 입시를 마친 후에 선택하자고 하셨습니다. 저는 너무너무 포기하고 싶었지만 예중을 선택한 것은 저 자신이었기 때문에 끝까지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힘듦과 고민 속에서 저한테 유일하게 힘이 될 수 있었던 것이 교회 찬양팀 반주였습니다. 바쁜 학교생활과 부족한 연습시간으로 반주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반주를 하는 시간이 다시 일주일을 버틸 힘을 얻는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3학년 여름수련회 때는 처음으로 찬양 가사를 생각하며 반주를 한 것 같습니다. 가사 하나하나가 하나님께서 저한테 말씀해주시는 거 같았습니다.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라는 찬양을 하는데 수십 번 불렀던 그 찬양의 가사가 제 마음에 새롭게 들어왔습니다.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는 걸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날 향하고 있었다는 걸’

힘든 시간을 견디고 나니 2학기 막바지에 졸업을 압두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시험에서는 제가 상상할 수 없었던 결과를 받아 행복했고, 준비했던 고등학교에도 합격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고등학교 입학을 포기하고 올해 안식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열심히 해서 얻은 합격이기 때문에 입학을 포기하는 선택은 어려웠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고를 가든 안식년을 하든, 어느 순간에는 아쉽고 후회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일단 선택하면 포기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고, 선택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1년 안식년을 하며 매일 늦잠도 자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제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학교생활을 하면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많았습니다. 지금 내가 잘 하고 있는 걸까? 그때 내가 잘 한 걸까? 하면서 제 탓을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중학교 3년의 생활을 돌아보고 지금 현재의 제 삶을 보면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하신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또 앞으로의 모든 것은 알 수 없고 막막하지만 하나님께서 저의 길을 인도하실 것을 믿으면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들> <우리들> 하는데, 왠지 포스터가 싫어서 생각에 없던 영화였는데 열카톡을 하다 얻은 정보가 이랬다. '소재: 초등학생의 왕따와 그 안의 감정, 그러나 결국은 그들의 언어로 담아낸 우리들의  감정' 이란다. '어머, 이건 (채윤이 손잡고) 꼭 봐야해!' 했다. 그리하여 채윤이와 함께 보았다. 영화를 강추한 여자사람 제자가 어느 남자사람과 봤다는데 그 남자사람이 울었단다. 그렇다면 나는 홍수, 쓰나미가 되겠군. 만반의 울 준비를 하고 갔다. 눈화장을 전혀 하지 않았고 휴지도 듬뿍 챙겼다.


채윤이에겐 영화에 대해 긴 설명 하지 않았다. 그냥 보자고 했다. 긴장이 되었다. 이것은 마치 입안 헌 곳에 알보칠을 바르기 전의 긴장이다. 팔짝팔짝 뛰도록 아프다는 걸 알지만 나으려면 어쩔 수 없다는. 어렸을 적에 동생이 여름마다 무슨 피부병을 앓았다. 밖에서 죽도록 놀고 들어오면 일단 목욕을 시킨 후에 과산화수소로 상처 하나하나 소독을 했다. 그리고 그 위에 연고를 발랐다. 여름 저녁마다 무슨 의식을 치루는 것 같았다. 엄마 아버지가 하시던 치료의식을 어느 때부턴가 내가 하게 되었다. 소독약 묻은 솜을 상처 부위에 대면 동생이 아파서 팔짝팔짝 뛰었다. 투명한 과산화수소는 상처에 닿으면 뽀골뽀골 거품이 되었다. 거품이 뽀골거리는 만큼 동생이 펄쩍펄쩍 뛰었고 마치 내가 아픈 것처럼 오금이 저렸는데, 그나마 거품이 뽀골거리면서 균이 없어지는 느낌이라 카타르시스 같은 것도 느꼈다. 영화 <우리들>을 보러 채윤이 손잡고 가는 일은 과산화수소 묻은 솜 앞에 상처를 내미는 일과 같다. 그래도 남은 균이 뽀골거리며 잡힐 거야.


팅팅 부은 눈으로 영화관을 나서겠구나, 유난히 각오를 하게 된다. 허무하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말짱한 얼굴로 필름포럼 2관을 나왔다. 옆에 앉았던 채윤이도 마찬가지. 대신 나는 영화보는 내내 양팔이 아팠다. 마비가 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순간적으로 근육의 긴장이 훅 풀렸다가. 내내 그런 식이었다. 나중에는 손을 펴고 팔을 축 늘어뜨리고 '내려놓음' 포즈가 되었다. 관람 후엔 채윤이랑 맛있는 것을 먹으며 치유의 수다수다를 할 계획이었는데 채윤이 얼굴이 말이 아니다.(울어서가 아니다) 그냥 딱 '기분이 떡입니다' 이런 표정이다. 영화 시작 전 분명 맑음, 쾌청이었건만. 영화 얘기는 꺼낼 수가 없었다. 집 앞에 다와서 '영화 어땠어?' 물었더니 '저런 영화 싫어. 영화가 너무 현실같애. 나는 영화같은 영화가 좋아' 짧은 평이었다. 왕따라는 말로 담을 수가 없다. 영화도 그렇고, 내가 초등학교 3학년, 6학년 때 같은 친구에게 당했던 그 일과, 채윤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당했던 그 일 모두는. 왕.따. 두 음절의 보편적인 언어로 담을 수 있는 사연이 아니다. '왕따'라는 말이 담을 수 없는 것들을 영화 <우리들>은 담아냈다. 그 복잡함과 두려움과 팔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과 얼어버리는 듯한 느낌을 다 보여주었다. 그래서 차마 울지도 못했다. 채윤이 말 '너무 현실 같애'에 담긴 뜻이 그러하다. 나도 그랬다.


이 영화를 보고 울 수 있는 그대, 행복하여라. 라고 말하겠다. 울 수 있는 것은 한 발 물러서서 볼 수 있다는, 관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울 수 없다. 영화 속 선과 지아가 결코 울지 않는(못하는) 것처럼. 왕따(우쒸, 이 말의 무게는 도대체가 너무 가볍다고!) 당하는 아이의 1인칭 시점을 너무 잘 그려냈다. 에니어그램 내적여정, 꿈작업, 내면아이 치료작업..... 그리고 치유하는 기도 등을 해오면서 나는 나의 왕따(우쒸) 사건을 재경험하였다. 많이 객관화되었고 치유도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전히 울 수는 없는 나를 발견하였다. 울지 못하여 몸이 아픈, 아직 녹지 않은 감정이 몸속에 남아 있다는 것을. 채윤이도 마찬가지. 아프도록 잘 만든 영화이다.


영화에는 어른이 없다. 불과 열한 살 밖에 안 된 아이들이 폭력에 짓밟히고(짓밟고) 있을 때 도움을 손길을 내미는 어른이 없다. 아니, 손이 아니라 눈이 먼저 없는 것이다. 아이들의 두려움 가득한 표정과 축 쳐진 어깨를 읽는 눈이 없다. 선이 엄마는 밝고 따뜻하여 치유인자를 가진 사람 같지만 자기 아이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러니 엄한 곳에 정과 따스함을 발휘한다. 남편이 돌보지 않는 시아버지 돌보기에만 극진하다. 남편과 시아버지 사이 문제로 두면 될 일에 내내 더 마음을 쓰는 듯하다. 선이 아버지는 임종 직전인 자기 아버지와 화해할 수 없음이 괴롭다. 괴로울 때마다 술로 회피한다. 심지어 권위적이지도 않은 젊은 담임 선생님조차도 이 가공할 폭력을 읽어내는 눈이 없다. 이 어른들을 탓할 수 없다. 이 어른들은 어른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계에의 미숙함은 선이 지아 수준이다. 엄마는 낫다고?(엄마가 늘 선이 동생 얼굴에 상처내는 연우엄마와 통화하는 것을 보라. 문제에 직면할 줄 모른다) 어른이 없다. 선이나 지아도 결국 이 아픈 일에 대해 돌봄받지 못한다면 똑같은 어른이 될 것이다. 물론 그 시절 내게도 마땅한 어른이 없었다. 엄마가 알고 학교에 쫓아와서 뭐라뭐라 했지만 결국 내게 한 말이 '니가 교만해서 그렇다'였다. 이 말에 내 가슴에 더 큰 비수로 꽂혔다는. 채윤이에겐 어땠을까? 엄마 아빠가 마땅히 비빌 언덕이 되어주었을까? 썩 자신이 없다. 내게 여전히 미해결 과제인데, 엄마로서 한다고 했지만 잘 했을까?


왕따 경험이 없다 해도 누구나 두려워한다. 외톨이가 될까 두려워한다. 장면장면이 그 두려움을 참 잘 그려낸다. 셋이서 대화하다 나머지 둘과 내가 의견이 다르다? 그것만으로도 마음 깊은 곳에서 미세한 긴장이 생기는 것이다. 둘도 마찬가지. 상대와 내가 의견이 다르다는 것만 확인되어도 몸 어딘가가 떨린다. 우리들, 우리들이다. 외톨이가 될까 두려운 우리들이다. 평균적인 두려움을 상회하는 두려움, 그리하여 울 수도 없는 또 다른 우리들도 있다. 아직 울지 못하는 우리들을 자각시켜주니 고마운 영화이다. 울지 못하고 몸이 아팠거나 하염없이 우울해진 우리들 있으면 여기여기 붙어라! 당신만 그런 거 아니다. 우리집에도 둘이나 있다.


집에 와서 한참 후에 채윤이가 한 마디 더 했다. '엄마, 그런데.... 영화 속 모든 사람이 다 이해가 돼. 공감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가 돼. 선이, 지아, 심지어 보라까지도 이해가 돼' 이해가 된다는 말이 이해가 됐다. 그러나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이해된다고, 이해해야 한다고 스스로 강제할 필요 없어. 모두를 다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그것보다 먼저 너의 아픔을 돌봐.' 참았다. 다시 얘기할 기회가 올 것이다..


영화 리뷰 쓸 마음이 생기면 다른 리뷰를 일부러 읽지 않는 편인데, 영화소개에 바로 링크가 되어 있어서 이동진의 글을 읽었다. 동의하지 않음! 특히 아래 인용된 부분 완전 동의하지 않음이다. 


‘우리들’은 미성숙한 아이들의 미성숙한 관계를 다루는 영화가 아니다. 아이들은 어려도 관계는 어리지 않다. 이 영화의 아이들이 꼬인 실타래를 풀기 위해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것은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스스로 풀어야 하는 자신만의 실타래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엔


'우리들'은 미성숙한 아이들의 미성숙한 관계를 다루는 영화이다. 아이들이 어리기에 관계는 어리다. 이 영화의 아이들에겐 꼬인 실타래를 풀기 위해 도움을 요청할 어른들이란 없었다.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어른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열한 살이 주고받기에는 너무 잔인한 폭력이어서 스스로 풀 수 없는 실타래였지만 그 누구도 풀어주지 못했다. 그렇게 풀지 못한 실타래를 가진 아이들이 그대로 어른이 되었기에 오늘 열한 살이 도움을 청할 어른은 여전히 없는 것이다. 여전히 어리고 미성숙한 관계를 맴돌다 술로 도망치는 몸만 어른인 어른들 뿐이다.


라고 고쳐야 맞다.


그리고 또 하나,

피구에서 가위바위보로 애들을 하나 씩 뽑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같은 장면으로 끝낸 양괄식 구성. 첫장면의 피해자 선이가 용감하게도 지아 편을 들어준다. 훈훈할망정 감동적이진 않았다. 급조한 환타지 엔딩 같았다. 내내 무섭도록 리얼리티이지 않았던가. 영화 속 선이 캐릭터는 그럴 수 있다. 어린 동생의 말에 은혜받아서 '아, 내가 먼저 무장해제 해야지' 결심했을 법하다. '내가 때리고, 연우가 또 때리고, 계속 때리고 때리고 그러면 언제 놀아?'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교훈은 유딩의 입에서 나온다. 현실 왕따 세계에서 선이 같은 선이가 있을까.................................. 그래, 있겠지. 다시 생각해보니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나마 세상이 수준을 유지하고 있을 게다. 




쓰다보니 과하게 시니컬해지는 것 같기도.

뒤로 올수록 심장박동도 빨라졌다.

왕따 트라우마 치료가 시급한가봉가.









거실에서 채윤, 현승과 함께 뒹굴고 있던 어느 날.

채윤이 폰이 울렸습니다.

'여보세요' 하더니 '네? 아, 네에~~~에' 길쭉한 몸을 베베 꼬면서 방으로 들어갑니다.

통화를 마치고는 꼬인 몸이 상당히 덜 풀린 상태로 나와서 수줍게 말합니다.

중등부 쌤인데.... 중등부 수련회 때 나 간증하래.

뭣? 간증? 니가 무슨 간증?

그러니까. 내가 못한다고 하니까. 간증이 아니라 중등부 애들이 원하는 거래. 목사님, 선생님들 말씀 이런 거 말고 선배들의 얘기를 듣고 싶다고.

그럼 니가 가서 무슨 얘기 하려고? 할 거 있어? 하고 싶어?

어..... 음...... 하고 싶어. 그래서 한다고 했어.

그래. 뭐, 안식년 얘기를 해도 되고 네 얘기 하면 되겠네.


바로 이 순간!

망부석 같은 어떤 존재. 눈빛만은 뜨거운 어떤 존재가 등 뒤에서 느껴졌습니다.

뒤에서 그대로 몸은 얼어버렸지만 눈빛만은 포스작렬인 현승이가 서 있습니다.

나 수련회 안 가. (아, 현승이는 중등부입니다)

뭘 수련회를 안 가? 무슨 말이야?

생각해 봐. 누나가 중등부 수련회 오는 것만으로도 쪽팔린데, 간증까지 해봐!

친구들이 니네 누나야? 이러고 나한테 집중하면?! 나 수련회 안 가.


채윤이는 후배들 앞에서 간증한 생각에 들떴는데

현승이는 나대는 누나 때문에 수련회도 못 갈 지경이 되었습니다.

수련회가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늘 최종적으로 말했습니다.

나는 누나 간증할 때 화장실에 가 있을 거야. 들을 수 없어. 못 듣겠어.



채윤이와 현승이 누가 틀린 게 아니고 다른 겁니다. 그렇구 말구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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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1학년 때. 한창 인생에 대해 신앙에 대해 고민이 많은 때였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수수께끼같은 주제에 빠져들었다. 한 학년 위인 교회 언니와 늦은 밤 셔터 내린 가게 앞에 앉아서 나름 열띤 토론했던 기억이 새롭다. '모든 게 하나님의 뜻이면 나는 어디 있다는 거야. 내가 결정한 것도 하나님의 뜻이야? 결국 내가 아무리 고민해봐야 하나님 뜻 안에서 움직이는 로봇이네' 뭐 이런 얘기들. 그러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란 표현이 나왔다. 바로 실행에 옮기는 고딩이라 '그럼 내가 3초 후에 손가락 까닥한다. 1, 2, 3. 까딱! 하나님의 뜻이었어?' 귀여운지고. ^^ 그때는 꽤나 진지하고 심각했다.

 

그때로부터 30년은 지났지만 하나님의 뜻에 대해 선명하게 알게 된 것이 별로 없다. 개인적으로 리트머스지 몇 개는 챙기고 있다. '.. 기도해보니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는 사람이나 그의 주장은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멀 것임. 그 주장에 대한 집착이 과할수록 본인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함임을 드러낸다는 것. 하나님의 뜻은 불쑥 던져지는 것보다는 스르르 드러난다는 것 등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할 때는 오히려 기다리고, 침묵하고, 나의 한계에 대해서 성찰하고 인정하고, 내 욕망에 대해서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내 몫이라 생각한다. (욕망이라고 해서 기도제목에서 제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욕망인 줄 알고 기도하는 것, 내 욕망이기에 그분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거절당할 수도 있겠다 각오하고 간절히 구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렇게 하여 스르르 내 삶에 들어온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채윤이가 꽃친을 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얘기, 아니 조금 더 세게 말하자. 2016년에 우리나라 최초, 에프터스콜레의 한 형태로 자생적 안식년 프로그램인 '꽃다운 친구들'이 생긴 건 채윤이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다. 꽃친 모임에서나 여기저기서 이렇게 떠들고 다니는데 진정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할 뿐 아니라 그것이 유익하다. 앞으로 생겨날 일일랑 앞으로에 맡기고 이미 주어진 것이 주께로부터 왔다고 믿을 때 오늘 어떻게 살아갈지가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채윤이는 '방학이 일 년이라면' 어떻게 되는지, 꽃친의 가치를 200% 누리는 꼬치너이다. 작년 이맘 때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채윤이 일상에 주어지고 있다. 압권은 열일곱 채윤이가 시카고 미시건 호수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원조 꽃친이라 불리는, 4년 전에 나홀로 안식년을 경험했던 은율이 언니와 함께 말이다.

 

시간, , 게다가 엄마의 콩알만 한 엄마의 간을 고려할 때 가능성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저 사진은 실제상황이 되었다. 채윤이 예고 합격 후에 꽃친이냐 예고냐, 이 합격을 포기하냐 마냐를 놓고 저울질하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고민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뭐 그렇게 고민을 해야 했을까 싶다. 자명한 결론을 두고.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이다. 두어 주 동안 채윤이가 온몸으로 경험하는 것을 보면서 비용을 계산하며 고민했던 일이 무색해졌다. 채윤과 은율, 은율이 아버님(꽃친의 고급인력 자봉이신) 황 본부장님과 식사하며 지난 12월의 송년회로 모인 꽃친 첫모임을 떠올렸다. 당시 분위기를 돋우고자 샘들이 준비한 공연이 있었다. 일명 복면가무왕. 복면을 하고 무조건노래를 개사하여 부르며 춤을 췄드랬는데. 아래 사진 스크린의 가사를 보시라.

 

미래를 향한 나의 선택은 꽃다운 친구들이야

일 년을 모두 쉴 수 있다는 특급방학이야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은 모르겠지만

마음만 먹으면 놀러갈 거야 어디든 놀러갈 거야

 

태평양을 건너 어느 식당에 마주 앉아서 저 예언 같은 노래를 떠올렸다. 소오름! 저분들 영험한 분들일세. 복면가무단을 가장하여 예언을 하다니. 채윤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현재형이다. 오늘 자유롭고, 오늘 행복하고, 오늘의 사랑을 풍성히 누리고 동시에 흘려보내는 것. 채윤만이 아닌 우리 모두를 향한 그분의 뜻일 것이다.


 

 










나 자신이 되어 연애하기(..) 32

 


또래의 교회 집사님들과 요즘 애들시리즈로 끝없는 수다 중이었습니다. 모두의 격한 공감을 끌어낸 요즘 애들_예배시간 편입니다. ‘요즘 청년들 왜 그래요? 한 번은 앞에 여자 청년이 하나 앉았는데 왜 그렇게 머리를 묶었다 풀었다, 5분도 안 되어 멀쩡한 머리를 또 풀고 묶고. 바로 앞에서 그러니 예배에 집중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도 커플만 피해 앉으면 돼요. 손잡는 건 건전하죠. 허벅지고 어디고 주무르고 만지고...’ 예배시간 스킨십 하는 커플 얘기에는 너도 나도는 할 말이 많았습니다. ‘내가 예배를 보러 간 건지 로맨스 영화를 보러 간 건지 내가 너무 고리타분한 건가? 아무튼, 너무 신경이 쓰여요.’ 예배드리다 스킨십 어텍에 시험에 들었던 간증인지 고발인지가 쏟아져 나옵니다. 명색이 연애강사로 전문가적으로 무슨 말이라도 한마디 해야 할 것 같았는데 격공의 끄덕끄덕만 하며 앉아 있었습니다.

 

사람에게 감출 수 없는 것이 세 가지 있는데 그것은 기침과 가난과 사랑이라지요. 영화 <시월애> 중의 명대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옆에 앉혀두고 다른 대상을 예배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사실 사랑에 빠져있다는 것은 이미 전 존재로 그를 예배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설교하시는 목사님 한 번, 옆에 앉은 그(그녀) 한 번, 목사님 한 번 그녀 한 번.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마음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삐죽이 모양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교회나 회사에서 비밀연애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요. 그런데도 저는 교회 같은 친밀한 집단 안에서의 연애는 당분간 비밀로 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보다는 당사자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감출 수 없는 것이 사랑이라니 그 비밀이 오래 가지도 못할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 볼 이유가 있습니다. 페이스북의 상태 알림을 연애 중으로 당당하게 바꾸는 것, 얼마나 해보고 싶었던 일입니까. 청년 예배에 나란히 앉아 손잡고 예배드리는 것도요. 이렇게 좋은 내 사랑을 자랑하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

 

연금술에서 바스 헤르메티스’(vas hermetis : 헤르메스의 그릇)라 불리는 금을 만들 때 사용하는 그릇이 있답니다. 그 안에 납을 담고 그릇을 밀봉한 뒤 열을 가하게 되는데요. 행여 그릇이 깨지거나 금이 가서 열기가 새어나가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그릇을 테메노스’(Temenos) 즉 심리적 그릇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심리적 성장, 성숙에서 꼭 필요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새어나가지 않는 나만의 비밀이 있는 마음의 어느 곳이지요. 새어나가는 비밀이 없이 고요히 침잠한 심리적 에너지가 쌓일 때 납이 금이 되듯 심리적으로 성숙하고 통합된 인간이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금으로 단련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마음의 에너지를 단속할 일입니다. 개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바로 그 심리적 바탕에서 자라는 것이니 정제되어 진실한 사랑으로 무르익기 원한다면 둘만의 테메노스를 만들어 가꿀 일입니다. 사실 이것은 마음의 힘으로 만드는 것이니 비밀연애든 공개연애든 형식이 어떻든 가능한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그럴듯하게 남에게 보여주고 자랑할 것이 없어도 서로 존재로 충분하면 된다는 겁니다. 저는 송명희 시인의 시로 만든 그 이름이란 찬양을 좋아하는데요.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사랑을 말할 수 없어서, 그 풍부함 표현 못 해서, 비밀이 되었네, 그 이름, 비밀이 되었네더욱 드러내고 뽐내고 과장하 부추기는, 노출증 권하는 투명사회를 살면서 비밀이 되는 사랑의 이름을 가지는 것, 멋지지 않습니까? 이건 좀 고급 스킬인데, 여러분에게만 공개하기로 하죠. 로맨틱 러브는 약간의 저항이 있을수록 커진단 말이죠. 함께 있어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안타까움 한 스푼, 그리움 한 스푼....,, 이런 것들이 잘 타는 연료가 되어 주지요. 어디서나 마음이 가는 만큼 스킨십하고, 보란 듯이 내 여자 내 남자만 챙겨주는 맛도 있어요. 연애가 그런 맛도 있어야죠. 하지만 살짝만 참아주며 생기는 안타까움. 안타까움이 애틋함이 되고 애틋함이 둘만의 비밀을 만들어 낼 수도 있지요. 조금씩 쌓아놓은 애틋함 포인트는 오래 두고 쓸 데가 있을 겁니다.

 

둘만의 은밀한 심리적 공간, 즉 테메노스를 구축하되 그 안에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있으란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여닫을 수 있는 창문도 있어야 합니다. 필요할 때 활짝 열고 외부와 통해야 해요. 사랑은 반드시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비인 것 같아요. 더 큰 사랑을 지향해야만 지금의 사랑이 건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둘만 알콩달콩, 행복하게! 사랑의 특성상 이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자라고 성숙해진다는 뚜렷한 증거 하나는 타자를 받아들일 공간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충만해진 사랑이 테메노스에 가득 차면 흘러넘치는 것이 순리 아니겠어요. 친구, 후배, 약한 자들에게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되어 있지요. 그렇게 사랑은 더 커지는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을 품는 연애로 자연스럽게 성숙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예배 시간 스킨십, 지나치지 않게, 조금만 삼가세요. 지나친 흡연은 건강에 해롭다는군요.








"그날 이후, 사소한 삶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뭔가를 고치려면 전부 분해한 다음 중요한 게 뭔지 알아내야 돼."


영화에 끌린 건 홍보문구 안의 저 두 문장이다.


정말 소중한 것들은 있을 때는 잃고 나서 비로소 그 큰 존재감을 느끼는 것들이다.

현승이 일기에 자주 등장하는 문장에 '매일 매일 똑같은 하루다' 담긴 지루함이 묻어나는 자조적인 느낌 말이다. 잃어봐야 알게 된다. 그 똑같은 하루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가혹하게도 사소한 삶을 들여다보는 눈은 대체로 '그날' 이후이다.

벼락처럼 들이닥치는 '그날'에 일상을 빼앗긴다.


일상을 빼앗긴 후 부적응의 나날,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난 후에

'뭔가 잘못되었었구나!' 깨닫는 사람들은 고치기 위한 작업을 하게 된다.

밖이 아니라 안,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타인이 아니라 나에게로

시선을 옮기게 된다.

이제껏 살아왔던 방식을 낯선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며,

뼈아픈 후회, 회한, 성찰, 정신분석....

무엇이라 불리든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분석하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두 문장에 낚이면서 머릿속에 써 놓은 시나리오가 있었다.

'분해'라는 말은 일종의 정신분석이겠구나, 상상했다.

잔잔한 내면작업을 상상했다. 아니었다.

데몰리션(demolition)은 말 그대로 파괴이지 분해가 아니었다.


냉장고 좀 고쳐줘, 냉장고에 물이 샌다고..... 어어, 쾅! 교통사고, 그리고 아내가 죽었다.

일상에서 늘 하던 말, '냉장고 좀 고쳐줘'가 유언이 되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김종필 여보, 프린터기 좀 고쳐줘!ㅠㅠㅠㅠㅠㅠㅠㅠ) 

뭔가를 고치려면 전부 분해한 다음 중요한 게 뭔지 알아내야 돼.

평소 존경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어쩌면 혐오하는 장인의 말이 생각난다.

역시나, 분해했지만 고칠 수는 없다. 문제가 무엇인지는 더더욱 알 수 없고.

분해된 잔해뿐이다. 그러면 그렇지.

영화에서 우리 편 말을 들어야지, 악역의 말을 들어서 해결점이 찾아지겠는가 말이다.


냉장고를 분해해서 고치지는 못했으나 남자는 분해하고 부수는 맛을 알아버린 것이다.

말썽을 일으키는 사무실 컴퓨터를 분해하고,

분해하고, 분해하다......

때려 부수는 맛에 빠져든다.

결국 딱 봐도 간지나는 멋진 집을 때려 부수기에 이른다.

꿈을 분석할 때 꿈에 나온 집은 흔히 '집'은 가족과 관련된 '자아'를 상징한다고 한다.

집을 때려 부수기까지는 금융회사 사장의 사위로 사는 직업인으로서의 자아를 비롯한

모든 자아도 함께 망가뜨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세대로 따지자면 '사춘기'는 파괴의 세대이다. 

무엇이든 삐딱하게 보고, 무엇이든 일단 부정하고, 때려 부수고 보는 세대이다.  

어쩌다 사춘기 아이를 만나 쿵짝이 맞고, 파괴의 일탈 놀이의 친구가 되니 가관이다.

그리고 그렇게 부수고 부서진 후에,

영화의 후반부에서 처음으로 아내를 잃은 남편이 지을 법한 표정이 등장한다.

분노에 차서 할 말 있음 서서 얘기하고 가라던 장인을 주저앉힌 표정.

뭉클했다.

영화 초반 교통사고로 아내가 죽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남자의 얼굴엔 감정선이 없다.

슬픔도 분노도 그리움도 그 무엇도.


부수고 나서, 다 때려 부수고 나서 비로소 감정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감정을 싸고 또 싸고 있던 딱딱한 껍데기가 깨어지니 비로소 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제 오늘 일은 아니고,

영화 탓은 아닌데,.

온갖 번듯하고 미끈하고 번지르르한 것들이 거북하다. 유난히 거북하다. 

연애 강의를 하면서 연애의 기술은 '싸움의 기술'이라 말하곤 한다.

'싸움의 기술'이 아니라 '대화의 기술'이면 좋겠는데 갈등상황에서 대화는 거의 싸움이 되기 마련이니까 애초에 싸움이라 해두는 것.

긍정에 긍정을 쌓고 잘되는 나에 잘되는 나를 또 쌓는 긍정의 힘?

그런 힘 따위는 없다.

보기 좋게 번듯하게 쌓아 올리는 것은 남 보기에만 좋은 것.

삶 전제를 때려 부수어야 하는 날이 오기 전에

부서지고 깨어지며 뒤로 물러섰다 다시 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일이다.


분노를 모르는 자 사랑할 줄 모르는 자이다.

싸움을 모르는 자 성장을 모르는 자이다.

파괴를 모르는 자 참된 세움을 모르는 자이다.









1. 생명


어제, 그러니까 금요일 새벽에 돌아왔습니다. 헤롱헤롱 어질어질한 상태로 이틀 보내고 이제야 몸과 마음이 조금 맑아졌습니다. 흐릿한 몸과 정신으로 바로 전 포스팅(서점에 나왔습니다:나의 성소 싱크대 앞←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굽신굽신)도 썼고, 중간중간 정신을 잃고 잤다가, 메일함의 밀린 답신도 했고, 장을 보고 반찬도 만들고, 청소도 빨래도 했습니다. 그 순간은 정신을 똑띠했다 여겼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지난 이틀 반수면 상태였군요. 결혼하고 가장 긴 시간 집을 비운 게 되었네요. 돌아와 가장 놀란 것은 싱크대 앞의 고구마순이었습니다. 출발하기 전날에 애매하게 남은 고구마 두 개를 물에 담궜는데 어머머, 한 녀석이 저렇게 쑥 자라버린 것입니다. 나머지 한 놈은 밑둥부터 썪고 있네요. 나란히 섰는 둘을 비교하니 쑥 자란 생명력이 유난히 돋보입니다. 한편 쑥쑥 자라는 친구 옆에서 여전히 그대로인 왼쪽 고구마군은 애잔하게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2. 만남


남편이 놀립니다. 츤데레 기질있는 걸 고려하면 놀림을 가장한 걱정인 것도 같습니다. '초딩 4학년 몸'이 되어 돌아왔으니 무슨 일이냐고, 그 며칠 사이에 이렇게 될 수도 있냐고 합니다. 코스타 기간 동안 월요일 채윤이와 함께 느긋하게 식사한 것은 일장춘몽이었습니다. 이후로는 밥이 대체로 코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코스타의 꽃은 조별모임이라고 하는데 코스타 세미나 강사 사역의 꽃은 '식사시간의 조별 상담'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체 집회나 여타 프로그램을 피해서 남은 식사시간은 끊임없는 만남의 시간입니다. 확실히 코스타는(아니 인생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만남입니다. 말씀에의 목마름보다는 만남에의 갈급함이 미주 각지의 청년들을 휘튼 캠퍼스로 불러 모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은 이 멀리서 고비용을 지불하고 시카고까지 날아가는 저를 이끄는 힘도 '만남'입니다. 때문에 만남이 시작되기 전 월요일, 화요일 오전까지는 마음이 무척 힘듭니다. 시차도 시차지만 '내가 뭐하러 여기까지 왔을까' 어리석은 질문을 되뇌게 됩니다. 막상 강의를 시작하고, 강의 후 줄을 서는 질문과 상담을 맞닥뜨리면 어리석은 질문은 흩어지고 맙니다.


3. 사람


만남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아, 다시 다시. 만남이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만남의 차원이 있습니다. 기간 중에 '브릿지'라는 호를 가진 황병구 본부장님이 동갑내기 자매 하나를 소개해주었습니다. 잠시 커피타임을 가지며 소설같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탄성이 절로 나는 간증적 삶이었습니다. 충분히 감동이었고, 참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상담하기로한 청년 하나와 시간이 어긋나는 바람에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동갑내기 자매를 다시 만났습니다. 한 20분 짧은 시간 동안 간증적 삶 이면을 들었습니다. struggle. 20여 분 동안 그녀가 반복해서 발화한 말입니다. 그렇게나 번듯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삶에도 남모르는 분투가 있습니다. 겉보기에 번듯할수록 분투는 더 치열할 것이며 갈등은 극심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진짜 모습입니다. 나도 모르게 손을 잡게 만들고, 나도 모르게 기도하게 만드는 것은 이같은 나눔이 있을 때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이렇듯 가슴에 숨은 이야기가 흘러 나오고, 내 안에서 나온 것이 흘러 들어갈 때 아니겠습니까.


4. 은혜


3년 전 처음 코스타에 갔을 때 생각이 납니다. 다녀와서 쓴 몇 편의 후기 중에 '은혜 to 더 은혜'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때 만났던 은혜 자매를 우연히 다시 만났습니다. 코스타 마친 그 주일에 시카고 다운타운에 있는 교회에서 강의가 있었습니다. 3년 전 그 은혜 자매를 바로 그 교회에서 만난 것입니다. 그녀는 저를 잊었을지라도 저는 가끔 떠올리며 기도하곤 했습니다. 내가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당사자가 몰라도 좋은 기도, 얼마나 행복한 기도입니까. 같이 저녁을 먹고 역시 짧은 시간 어떻게 지내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텍사스에 살고 있는 은슬이 엄마 송은혜와도 기간 내내 자주 톡을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카톡의 대화창에는 두 명의 'grace'가 나란히 줄을 서있는 형국이었습니다. 결국 이것은 그분으로부터 다시 오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은혜로다, 은혜로다, 한량없는 은혜로다. 모든 오늘, 모든 만남은 은혜이고 선물이라고요.


5. 생명


살아 있는 것이라면 적어도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자발성과 예측불가능성입니다. 입력된대로 같은 답이 나오는 것, 충분히 예상되는 건조한 정답이 출력되는 것은 기계입니다. 살아 있는 것은 자발적이고 예측불가능이기에 자유입니다. 정답은 없지만, 예측불허 struggle의 연속이지만, 미끈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 하나 없지만 생명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코스타에 강사로 가서 번지르르한 강의만 하고 왔다면 누릴 수 없는 은혜입니다. 첫 강의 망치고, 가져간 책은 잘 안 팔리고, 화장실 갈 틈도 없는 일정이 돌아가고, 몸은 바닥으로 꺼지고, 집회 시간에는 끊임없이 졸고.... 그 와중에도 살아 있는 만남이 있었기에 소생케 되는 것입니다. 돌아와보니 창가의 화분 몇 개는 주인 엄마가 자리를 비우고 물을 챙겨주지 못한 탓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습니다. 흠뻑 물을 주고 아침에 보니 힘이 들어가 꼿꼿해졌습니다. 생명은 잠시 시드는 것 같으나 살아납니다. 오나가나 생명있는 사람이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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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이름하여 <나의 성소 싱크대 앞>이 산후조리 마치고 서점에 배포되었습니다.

책은 서점으로 갔지만, 이놈이 잉태된 곳, 싱크대 앞에서 기념사진 한 장 찍었습니다.


이런 아이(책)로 자라면 좋겠습니다. 


늘 싱크대 앞에 서는 주부가 읽습니다.

(어머, 이건 함께 읽어야 해)
평생 술로 사신 아버님을 천국에 보내 드린 후 힘들어하는 남편에게 건넵니다.

(나만 읽을 책이 아닌걸)
목사의 특권의식, 복음은커녕 상식과도 멀어진 교회에 대한 환멸로

가나안 성도가 될까 고민이 깊은 친구에게 선물합니다.

(아내가 좋아하겠는걸)
깊은 기도와 말씀에 대한 갈망으로 목말라 하는 아내에게 권합니다.

(세상에, 내 친구가 읽어야 할 책이야)
목사의 아내로 남모르는 눈물 흘리며 사는 대학 동창에게 보냅니다,

(이걸 읽히면 되겠네)
어제 상담했던, 아이 교육 문제로 고민하는 젊은 교우에게 선물합니다.

(우와, 나 책 잘 안 읽는데 줄줄 읽힌다)
동네 커피 친구 엄마들과 돌려 읽습니다.

(저자가 일기쓰기로 필력을 키웠다고?)

문화센터 글쓰기 교실에 등록할까 고민하는 동생에게 보냅니다.

(어머, 그 애가 까칠함이 잘못된 게 아니구나)

말이 닿지 않는 목사님의 설교, 청년부 수련회 강사 특강에 도통 동의할 수 없고 까칠한 질문만 올라온다며, 넙죽넙죽 순종하지 못하는 자신이 잘못된 것 같다고 자책하는 친구에게 권합니다.

(엇, 그 친구도 나름대로 고민이 깊었겠는걸)

주일성수에 목을 매는 청년부 친구, 바리새인 같아 보여서 자주 비난했던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선사합니다.

.

.

.

.


이런 가능성을 가진 아이입니다.

지켜봐 주시

지만 마시고 함께 키워 주십시오. 케케.


그러면 꼼꼼하게 이런 안내까지 드리고 마칩니다.


알라딘에 있는 <나의 성소 싱크대 앞>

YES24에 있는 <나의 성소 싱크대 앞>

인터파크에 있는 <나의 성소 싱크대 앞>

갓피플몰에 있는 <나의 성소 싱크대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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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간 코스타 일정을 잘 마쳤습니다.

네네, 잘 마쳤지요.

컨퍼런스 마친 오후 느긋하게 찍은 사진 두 장입니다.

기럭지로는 여느 아메리컨 부럽지 않은 채윤이는 이 학교 학생이라 해도 믿겠지요?

파랑과 하양, 하늘과 깔맞춤한 제 패션도 괜찮죠?


실상을 알려드리자면.

휘튼 칼리지 재학생 느낌의 채윤이는 코스타 기간 내내 영어사람 친구들 속에서

에헤헤헤, 어리바리 하고 있다가 숙소에만 들어오면 침대 엎드려 우는 나날.

하늘과 구름과 나무와 하나 된 듯한 채윤이 엄마는 강의하고 상담하고,

다시 강의 준비하고 또 상담하고, 화장실도 제때 못가는 며칠을 보냈답니다.

그러니 저 멋스러운 여유는 사진발. 헤헤.


지금은 시카고 다운타운에서 채윤이와 둘만의 시간입니다.

오늘(여기는 주일) 한인교회에서 강의 하나를 마치니 이제야 온전히 홀가분입니다.

다운타운 나와서도 근사한 사진은 꽤 건졌습니다만.

사진 밖에서는 채윤이와 신경전, 대놓고 말싸움, 대놓고 짜증.....

이렇게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야 조금 마음의 틈이 생겨 사진발로 소식 전합니다.

잘 지내고 있어요.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는군요.

이처럼.

당신의 아들, 아니 당신 자신을 내어주실 만큼이요.

우리의 관심은 그래서 그렇게 사랑하신다는데!

그 사랑으로 내게 떡이 생겨, 밥이 생겨, 애인이 생겨!

그런 나날을 살고 있는 제가 사랑을 논하러 갑니다.

코스타 참석차 시카고에 갑니다.

올해의 주제는 보시다시피 저러한데,

저는 또 보란듯이 패러디를 하여 강의에 쓸 PPT 첫화면을 만들었습니다.

연애 강의, 에니어그램 강의로 듣겠다고 모여든 청년들에게 은근 슬쩍 저는

다른 사랑 얘기(결국 그 사랑이 그 사랑인 바로 그 사랑 얘기)할 요량인데.

계획대로 될런지 모르겠네요.


브래넌 매닝, 리처드 로어.

두분의 글에서 눈에 익은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집을 

비행기 안에서 독파하겠습니다.  

무려 747 페이지입니다. 어, 보잉 747? ㅎㅎ

두근두근입니다.


백팩에 노란리본을 주렁주렁 달았습니다.

코스탄들에게 나눠주려고 노란리본을 많이 가져가는데요.

컨퍼런스 마치고 시카고 여행하는 동안에도 나눌 방법이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손에 들고 다닐 수도 없고....

손피켓 만들어서 사람 바글거리는 밀레니엄파크 커피콩 앞에서 잠깐 서 있을까?

라고 말했다가 같이 가는 채윤이 '엄마, 제발! 엄마 마음 알겠지만 여행하고 싶어. 맘 편히'

같이 가지도 않는 현승이 '엄마, 진짜 왜 그래? 누나, 같이 가기 싫겠다' 

욕만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가방에 주렁주렁 달고 다니기로 했습니다.

뭐예요? 왜 그렇게 많이 달고 다녀요? 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 드리려고요. 하려구요.


노란리본은 기억하겠다는 뜻이고,

사랑하겠다는 뜻이며,

물처럼 오신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가장 낮고, 가장 아픈 곳을 사랑하겠다는 뜻이니까요.

'이처럼' 사랑하심은 그렇게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사랑이니까요.


두 남자 두고 떠나는 마음, 갓 나온 넷째(what?)를 두고 떠나는 마음,

가서 해야할 강의에 대한 부담.

어리바리 영어 울렁증 모녀 둘이 며칠 여행을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뭔가 찜찜한 마음 다잡아 캐리어의 지퍼를 주욱 닫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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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와서 첫 시험으로 기말고사 중인 현승이.

첫날 시험을 마치고 내일 수학과 체육 시험을 앞둔 밤.


나아~를 고를 때면 내 눈을 바라봐 줘요

나는 눈을 감는 법도 몰라요

가난한 그대~애 날 골라줘서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오늘 이 하루도


딩가딩가 루시드폴 딩가딩가 고등어 딩가딩가 버스커버스커 딩가딩가 여수밤바다

딩가딩가 김창완 딩가딩가 안녕내작은사랑아 딩가딩가 신해철 세월이흘러가서


기타를 치다, 음악을 듣다.... 저러고 있다.

어떡하지?

뭐라고 한두 마디 하면.

'공부했다고, 다 했다고.'


'아니, 현승아. 다 했다는 느낌 알겠는데. 직관형(N)식으로 맥락을 이해했다고 끝내지 말고. 감각형(S)식으로 깨알같이 달달달 외워야 시험을 잘 본다니까. 의미가 없어도 일단 외워. 그렇게 외우지는 않았잖아.'

'알았어. 그럼 조금만 더 하고 나올게' 라며 들어갔는데......

어느 새 보니까 또 기어 나와서,

딩가딩가 딩가딩가 딩가딩가 딩가딩가.


'엄마, 내가 나중에 커서 유명한 사람이 되면 자서전에 그렇게 쓸게. 김현승은 어렸을 적부터 뭔가 달랐다. 남들 다 공부하는 시험기간에 기타를 치며 놀았다.'


하긴, 뭐든지 시험 기간에 하는 게 제일 재밌지.

원고 마감 코 앞일 때 블로그 포스팅 하는 맛이 쫄깃쫄깃 하지.

그래, 시험 기간인 넌 기타 치고 놀고.

할 일 많아 죽겠는 기간인 엄마는 PPT 화면이고 한글 화면이고 일단 다 내리련다.

블로그질이나 또 한 번 해보자.

인생 뭐 있어!


(어쨌든 너 내일 시험 점수만 나와봐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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