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자아,
설명하기 어렵고 불편한 말입니다. 아홉 개의 성격유형을 '거짓자아'라 이름붙이며 내적여정을 떠나는 에니어그램이 혼란스럽게 느껴지는 이유일 것입니다.


'거짓'이라 말하니 누군가를 속이는 것 같지만 무엇보다 스스로 속는다는 의미에서 그 파괴력이 있습니다. 거짓자아의 반대 자아는 무엇일까요? 참자아? 이 역시 뭔가 (상당히 오염되어) 불편한 말입니다. 브레넌 매닝는 '아바의 자녀:사랑받는 자'라는 말로 '거짓자아' 아닌 자아를 대치합니다. 정말 적실합니다.


에니어그램 공부에 입문하여 혼란에 빠진 시기(그러니까 내 성격유형을 다 갖다 버리라는 거야 뭐야, 나는 이제껏 잘못 살아았고 잘못 믿어 왔는데 이걸 다 교회에서 배웠으니 더 이상 소망이 없군, 콱 죽어 버릴까?)에 저를 구원한 두 권의 책이 브레넌 매닝의 <아바의 자녀>와 안셀름 그륀의 <아래로부터의 영성>입니다. <아바의 자녀>를 읽고 노트에 이렇게 적어 놓았더군요.


타인의 불만이나 분노 무관심에 놓일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내 거짓자아는 벌벌 떨고 있구나!


거짓자아는 회피하거나 미워하고 혐오할수록 힘이 세어지고, 그것을 인정하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때에만 작아집니다. '아바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끌어안을 때만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고요. 내적여정은 그 지난한 길, 고통스럽기에 자유로운 길, 알 수 없는 신비를 따라 가는 평생의 여정입니다.


토마스 머튼, 헨리 나우웬, 칼 융, 플래너리 오코너, 죤 브레드 쇼, 마이클 야코넬리, 앤서니 드멜로, 리처드 로어 등 영성의 대가들과의 만남을 자신의 솔직한 경험에 농축시켜 풀어낸 절절한 글입니다. 일독, 십독, 필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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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수련회의 계절입니다. 수련회의 계절에 만만한 프로그램 MBTI 얘기입니다. 어찌나 만만해졌는지 수련회 스태프들이 검색으로 공부하고, 셀프 강의까지 하는 간편 MBTI가 만연합니다만. 그래도 꿋꿋하게 MBTI 전문가 자격으로 몇몇 교회 전교인 수련회에 초대받아 강의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검색해서 아무나 검사하고 강의하는 MBTI도 있지만, 10년 넘게 그걸 붙들고 물고 빨고 공부하고 살고 좌절하고 깨닫는 집착 강사의 MBTI도 있지요. '그깟 MBTI, 그깟 성격유형' 하찮게 여김당함을 무릅쓰고 검색으로도 할 수 있는 MBTI 강의를 장인 정신으로 하고 있습니다.

좋은 것에는 왜곡된 말과 생각이 들러붙기 마련입니다. 신기하게도 왜곡된 경구는 귀에 쏙쏙 들어와 꽂히지요. ("목사를 대적하면 어떻게든 댓가를 치룬다. 자녀가 잘 안 되든지 누가 병에 걸리든지" 귀에, 마음에 콕 박히지 않느요?) MBTI는 어마어마한 자기중심성에 빠져 사는 사람들에게 자기이해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참 좋은 도구인데, 그럴듯 하지만 왜곡된 설명으로 본질이 흐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검색으로도 전문가가 되는데요.

요즘은 MBTI에 대해 잘못된 루머를 바로잡는 것만으로도 강의가 재밌고 풍성합니다. 그중 하나는 오직 둘 중에 하나라는 강박을 깨는 것입니다. 외향과 내향, 감각과 직관, 사고와 감정, 판단과 인식형 대극으로 설명하는 지표 중 '오직 외향! 오직 직관!' 하나만 내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MBTI가 근거하고 있는 Jung의 심리유형론에서는 외향형의 무의식에는 내향이, 감각형의 무의식에는 직관이 의식으로 떠오를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Carl Jung 심리학의 중요한 핵심은 '통합'입니다. 외향 안에 내향이 있고, 직관형 안에는 감각형이 있으며, 여성의 내면에는 남성의 내적인격이 남성 안에는 여성의 내적 인격이 살아 있다고 합니다. 그 둘이 통합되는 것이 개성화 과정이고 인격의 발달이라고 합니다. 페르소나와 그림자의 통합은 물론이고요. MBTI 유형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의 true type이 외향이라면 나는 죽으나 사나 외향형이 아니라 내 안에는 내향의 모습이 숨어 있고, 중년을 지나며 자연스럽게 떠으르며 통합된 인격으로 가는 것이 건강한 성격의 발달입니다. 

요즘은 청년보다는 장년 대상으로 MBTI 강의하는 일이 많은데, 이런 관점을 전하면 찰떡 같이 알아듣는 분들이 있습니다. 내면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씨름한 경험과 세월로 얻은 깨달음일 것입니다.  강의 마지막에 질문합니다. "인간의 몸으로 오셨던 예수님은 MBTI로 무슨 유형이실까요?"

온전한 인간이셨던 그분의 유형은 EISNTFJP 아닐까요?

회중 앞에서 거침없이 마이크 잡고 가르치시지만(E) 홀로 고독의 시간을 위해 물러나시고(I), 민중들의 배고픔의 현실, 실재하는 고통을 감지하여 먹이시고 구체적인 필요를 채우시며(SF) 그 어려운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비유로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 해주시고(NF), 바리새인과의 논쟁에서 빈틈 없는 논리로 한 치도 밀리지 않으시는(NT) 예수님. 구약의 예언(전통)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완벽하게 성취하시며(ST), 임기응변에 능하시고 어떤 것도 품으시는 융통성의 예수님(P).

이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입니다. 내 유형을 제대로 파악하고 좋아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온전히 좋아하면 자연스럽게 그 이면이 보입니다. 내게 익숙하지 않은 열등기능이 새롭게 보이고, 겸손한 태도가 됩니다. 아무리 애써도 내 유형이 넘어서지지 않을 때, 더욱 겸손해질 것입니다. 반대유형을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서로우 부족을 채우며 더불어 사는 것의 아름다움을 깨닫는다며, 이보다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제각각 다른 모양의 인격이 어우러져 이뤄가는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 


어렵사리 손에 넣은 중2의 시를 공개한다. 특히 두 번째 시에는 깊은 빡침과 함께 한 사람에 대한 분노와 실망감이 절절하게 담겨 있는데, 그 대상은 시인의 엄마이자 첫 번째 독자이며, 시인의 시를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자처하는 바로 '나'이다. 일기 쓰 듯 감정을 토해낸 시가 엄마 눈에 띄었다는 것을 알고 시인은 아노미 상태가 되었다. 없는 데서는 누구 욕도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 마음으로 썼는데 당사자에게 들켰으니, 그것도 (가끔은) 가장 사랑하고 의지하는 엄마와의 필화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왜 마음대로 봤냐!'며 [웃고 있는 가면]을 시노트에서 부~욱 찢어내고 말았다. 엄마로서 동시에 시적 타깃으로서 적잖이 충격을 받았지만 정신줄을 가다듬었다. 혼미해진 정신을 가다듬고 허벅지를 찌르며 참고 사과하고 대화하여 화해에 이르렀다. 그리고 어느덧 여름방학(두 편의 시는 각각 1학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시즌에 쓰여진 것이다). 느슨해진 틈을 공략하여 작품의 블로그 게재 허락을 받아냈다. (어떻게든 아들 시라도 팔아서 인기를 얻어보려는 현시욕의 승리!)  쉽게 볼 수 없는 질풍노도의 중심에서 쓰인 시 두 편을 공개한다.      





[그렇게 된다는 건]


철이 든다는 건 가방을 진다는 것이다.


아래는 소박하지만 꿋꿋한 드넓은

초원이 있지만 인간은 탁한 하늘의 끝을

보기 위해 더 무거운 짐을 메고 산을 오른다.


나는 산을 오르고 있다.

나는 나를 깎으며 한 발 한 발 내딛던 그것을

시간이 갈수록 더 무거운 가방을 드려 올라갔던

그 불안함의 안대를 벗고 초원을 향해


뛰어 내려갈 것이다.

그 산을 내려가며 난 내 사람들에게

속삭여 줄 것이다.



어린 시인, 꼬마 철학자에서 본격 청소년 시인 돌입을 알리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마포 한강변을 추억하고 그린다. 자전거를 달리고, 비밀 기지를 만들고, 거기 숨어 들어 오가는 사람들의 발자국을 염탐하던 어린 시절을 그린다. 아무 걱정 없이 놀기만 했던 시절, '엄마, 나 정말 학원 안 보낼거야? 중학교 가기 전에 수학 같은 걸 배우고 가는 거래? 나 학원 좀 보내고 그래' 했던 천진난만 했던 시절. 

천당 밑 분당의 교육열 속에 내던져진 시인은 난생 처음 보는 중간고사, 기말고사 앞에서 철이 들어버린다. 소박하지만 꿋꿋했던 어린 시절의 초원을 떠나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거부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 덮치고 있음을 받아들이려 한다. 한 시간 정도 엄마를 앉혀 놓고 자신이 살고 싶은, 살고 싶지 않은 세상에 대해 토로한 후에 써내려간 시이다. 시를 내밀며 시인은 눈물을 글썽였다.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며.......



[웃고 있는 가면]


결국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떠들어대는 것이다.


결국 아닌 척하고 싶어서

베베 꼬아서 말하는 것이다.


다르지 않다는 걸, 결국 다를게 없다는 걸

알게  될 때 난 더 비참해지고

그는 더 뻔뻔스러워진다.



[철이 든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시인은 1학기 중간고사를 쳤다. 나름대로 어떤 과목에선 좋은 성적을 냈고 어떤 과목은 많이 부진했다. 어, 하니까 되네! 하는 기쁨과 역시 안 되는구나! 두 가지 감정을 다 맛 본 듯한 시인은 기말고사에는 더 열심히 해보겠다고 말했다. 기말고사가 다가오자 시인은 태도를 바꿨다.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로 '왜, 도대체 공부를 해야 하냐?' 새롭고도 뜬금 없는 분노를 터뜨렸다. 시험기간이 다가와도, 막상 시험기간에도 그다지 공부하지 않았다. 공부를 종용하면 '내가 지방이 1그램에 몇 칼로리인지, 이런 걸 왜 외워야 하냐?며 의미를 따져 묻는다. 10시만 지나면 내일 시험공부 다 끝났다며 잠자리에 들었다. 마지막 날 시험을 앞두고 엄마는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우려는 반발을 낳았고 반발을 설화(舌禍)를 낳았으니. '그래도 시험 기간만이라도 최선을 좀 다해야 하지 않을까? 솔직히 말하면 네가 대충 살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싫어.' 그러자 시인은 '대충 사는 게 왜 나쁜데? 나는 최선을 다해 살고 싶지 않다고! 대충 살고 싶다고!' 선언했다. 대화 또는 우려표명의 협상은 결렬 되었다. '그럼 대충 살아! 니 인생이니까 니 맘대로 살라고!' 그리고 시인은 제 방으로 들어가 시험공부 대신 시를 썼다. [웃고 있는 가면]  고상한 척 하면서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기를 바라는 보통 엄마와 다를 것 없는, 나는 그런 엄마이다.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다르지 않다는 걸 알았을 때, 사실 나는 더 뻔뻔해진 것이 아니라 너보다 더 비참해졌다. 임뫄! 짜식아!





시험 시즌이 지나고 널널해진 여름 방학. 아침 일찍 일어난 시인은 갑자기 '엄마, 나 도시락 싸 줘' 읭? 도, 도시락이요? '나 자전거 타고 나가서 탄천 어디에 앉아서 엄마가 싸 준 샌드위치 같은 걸 먹고 싶어' 여유부림 끝장판을 보여준다. 싸주기는 어렵고 사줄 수는 있다. 가는 길에 빠바에 가서 샌드위치 사라, 했더니 기분 좋아 하신다. 극도로 좋아진 기분에 '현승아, 그런데 그 시들 말이야. 블로그에 올려도 돼? 네가 결국 시는 누군가 읽어주길 바라면서 쓰는 거라며' 했더니 '엄마, 내 시가 옛날하고 달라져서 블로그 오는 사람들이 좀 그럴 걸' (무슨 독자 걱정?) '그래서 엄마가 올리고 싶은 거야. 사춘기의 복잡한 마음을 시로 쓸 수 있는 애는 거의 없어. 정말 보기 드문 시지' (비굴비굴, 취향저격 설득) '그래? 뭐 그러면 올리든지!' (의외로 쉽게 허락)


이렇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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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 때 기대와 설렘 가득 안고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집>을 집어 들었었다. 미국 오가는 비행기 독서용으로 선택했는데 결국 1년째 미완의 독서로 남아 있다. 야금야금 하나 씩 어쨌든 눈팅은 다했다고 볼 수 있다. 750 페이지 30여 편을 차례차례 꼼꼼히 읽었다 해도 '미완'의 느낌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내내 '흠..... 긁적긁적.....' 하는 읽기였으니까. 그러면서도 딱 내려놓을 수 없는 매력으로로 일 년째 '읽고 있는 중'의 도서로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와중에 장편 <현명한 피>가 IVP에서 번역돼 나왔다. '다 읽고 사기'의 책구매 원칙을 지키고자 허벅지를 찌르고 있었으나 단편집에서 만난 인생소설 <좋은 사람은 드물다>의 감동을 복기하고는 홀린듯 장바구니에 담고 말았다. 


내가 이걸 읽으려고 작년에 그렇게 화장실 들어갔다 뒷처리 안 한 느낌으로 플래너리 오코너를 끼고 있었구나! 어쨌든 오코너와의 라포 형성이 충분히 된 덕에 시간적, 정서적 낭비 없이 <현명한 피> 속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일이 되려면 이렇다. 가방에 든 <현명한 피>의 마지막 챕터 쯤에 책갈피가 꽂혀 있는 시점,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이 이름을 발견! 플래너리 오코너? 장거리 운전으로 몸이 뒤틀릴대로 튀틀리는 순간 팟빵을 털다 얻어 걸린 꿀잼이었다. 이동진은 내게 가끔 새로운 '정보'를 주는 고마운 '님'이지 '페이보릿'은 아니다.  피상적 차원에서 척척 대화가 통하지만 깊은 공감의 대화는 어려울 듯한 친구. 아는 것이 많아 입을 헤 벌리고 듣게 되지만 돌아서면 조금 공허한 그런 친구 같다. 동질성보다 이질성에서 더 많이 배우는 것을 알기에 가끔은 애써서 참으며 듣곤하는데 이번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들었다. 우주가 도와서 플래너리 오코너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느낌이다.


옮긴이의 말처럼 이 책의 주제는 '죄와 구원'에 관한 문제이다. 죄와 구원의 문제는 종교인들의 고민이다. 아니다. 정작 종교인들은 죄와 구원이라는 본질을 고민하진 않는다. 그로 인해 파생된 두려움에 사로잡혀 엄한 곳에서 허튼 희망을 찾는 사람이고, 그 환상을 밑천 삼아 입에 풀칠 하는 사람이다. 죄와 구원의 문제를 고민하는 자는 구도자, (필연코) '외로운' 구도자일 터.소설의 헤이즐 모리츠는 (아무리 봐도 약간 돌아이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구도자이다. 순회 설교자인 할아버지(독침을 숨기고 다니는 말벌같이, 머릿속에 예수를 담고 세 개 군郡을 운전하며 다녔던 성마른 노인)을 따라다녔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두 살 이 될 때까지는 자신도 역시 설교자가 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의 모리츠는 '예수를 피하는 길은 죄를 피하는 것'이라는 깊고 검은 침묵의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의 설교자가 된다. 자칭 '현명한 피'를 가진 에녹은 또 얼마나 부적응적이고 멍청한 인간인가. 돈을 위해 가짜 맹인 설교자 행세를 하는 호크스가 설파하는 죄와 구원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종교이다. 등장인물 중 적응적 인간은 단 한 명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현명한 피> 안의 죄와 구원은 모두 뒤틀려있다. 각자 나름대로 죄와 구원을 독해하고 배역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현명한 인간이라곤 없다. 현실 속 죄와 구원, 그것을 아우르는 신앙은 어떤가.


대학 친구들 모임에서 목회자인 남편과 관련 우리 부부의 이야기가 수다의 주제가 된 적이 있다. 숨통을 트기 위해 현실도피용으로 가지고 있는 나의 장래희망 카드를 하나 내놓았다. 마침 장래 계획에 관련된 전문가 친구가 둘이 앉아 있었다. 둘 다 크리스천이었는데 한 친구는 자칭 기복신앙에 보수적 신앙관을 가졌다. 목회자에게 잘 하고, 교회 봉사는 일단 열심히 해야 복을 받을 것 같단다. 다른 친구는 개인적 경험으로 인해서 목회자(부부)에 과도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천하에 상종 못할 부류가 목회자인 것처럼. 재미있는 것은 우리 부부의 조금 파격적인 장래 목회 계획을 들은 두 친구의 반응이다. 자칭 기복주의에 보수적인 신앙을 자처하는 친구는 '너희 자신을 믿지 마라. 너의 남편도 결국 사람이다. 사람 어떻게 별할 지 모르고, 사람 욕심이란 끝고 없다. 쉽게 생각하지 마라.' (집에 있는 뭣도 모르고 단잠 자고 있었을 우리 남편은 의문의 1패)  반면 목회자 알러지 있는 친구는 '신실아, 너라면! 네 남편이라면 무조건 잘 할 거야. 무조건 잘 할 것 같아'였다. (남편 의문의 2패?)


목회자에게 무조건 복종하기로 결정한 친구는 제 친구 남편인 목사가 무조건 미덥지 않다. (근거는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존재이기에) 세상 모든 목사들을 일단 의심하고 보는 친구는 내 친구의 남편인 목사는 무조건 믿을만 하다. (근거는 내가 좋아하는 친구의 남편이니까)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엉뚱하게도 나는 소설을 읽으며 두 친구를 떠올렸다.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를 설파하고 예수를 부정하기 위해 부러 죄를 짓는 사람과, 그에게 죄의 냄새를 맡고 회심을 종용하는 거짓 맹인 설교자. 목사님은 주의 종이니 언터쳐블의 존재라 믿는 것과 모든 목사를 잠재적인 장사꾼으로 보는 것이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두 친구에게서 나는 본다. 맹신 이면의 냉소와 불신, 극단적 불신 이면의 불안과 두려움을. 어찌하여 볼 수 있는가, 내 안에 맹신과 불신 / 극단적 불신과 두려움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오코너의 소설이 불편한 이유는 이것이다. 인간 내면의 이 불편하고 불온한 공존의 감정을 확인시키고 또 확인시키기 때문이다. 결국 해결해주지도 않는다. 아니, 해결해준다. 충격적인 방식으로! 단편으로부터 이어지는 오코너 소설의 충격적 결말들은 다시 확인시킨다. 모순과 역설은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두 친구는 물론 소설 속 등장인물은 모두 내 안에 있다. 역자의 말대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내가 이렇게 살다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를 좇는 헤이즐 모리츠의 그로테스크한 삶과 죽음을 따를까 겁이 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오코너가 동시대 개신교의 빗나간 열정을 풍자한 소설이라는 평이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개신교 천주교가 아니라 '종교'라는 이름으로 눈 먼 사람, 종교라는 이름으로 오직 자아숭배에 몰두하는 사람을 직접, 가까이서 경험하지 않고는 이런 인물설정은 가능하지 않다. 아니 결국 자기 안에서 발견했을 테지. 충격적인 소설 <좋은 사람은 드물다>의 할머니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앎, 자신의 모든 것에 '성찰'이란 할 줄 모르는,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편견을 종교의 이름으로 스스로 세례주어 합리화 한 좋은 나쁜 사람이다. 모든 것을 안다는 무지, 그 어마어마한 자기중심적 무지를 한 시도 쉬지 않고 입으로 떠벌떠벌하는 자가 불러온 끔찍한 화를 보며 놀라면서도 나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심지어 마지막 세 방의 총은 내가 쏘아도 좋았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마치 평생 한 번쯤 해보고 싶은 바로 그 일을 부적응자를 통해 대리만족한 느낌. 그녀의 입에서 더는 착한 나쁜 말이 나올 수 없게 만들고 싶었다. "평생 누가 옆에서 1분에 한 번씩 총을 쏴 주었다면 좋은 여자가 됐을 거야"라는 부적응자(범죄자)의 말에 동생의 농담이 떠올랐다. "맞으면 돼. 몇 대 맞으면 돼." 치기 어린 비행청소년의 말을 세기의 소설가가 그로테스크하게 읊는다면 저 대사일 듯. 


헤이즐 모리츠이며, 호크스이고 동시에 착한 나쁜 할머니이며, 그를 쏜 부적응자인 나는 누구인가.

소설가 정이현의 추천사가 이렇게 답한다.


차갑고 가차 없는 시선으로 인간의 모순적 내면을 파헤치고, 읽는 이의 마음을 날카로운 손톱으로 후벼 판다. '어마어마'하다에는 매우 엄숙하고 두렵다는 뜻도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살짝 열린 방문 틈사이로 보았다.

엄마 화장대에 앉아 거울을 들여다 보는 채윤이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낯설진 않은데, 언제 봤더라, 언제 본 표정이더라?

김채윤, 뭐 해?

그러자 특유의 입주면 근육만 활짝 벌어지는 부끄러운 웃음. 그리고 의외의 대답.

어...... 엄마 놀이.

그러고 보니 낯익은 그 표정은 어렸을 적 그분이 오실 때마다,

그분과의 대화에 빠졌을 때 힐끗 보았던 표정이다.

나이 열 여덟에 엄마 화장대 앉아서 엄마 놀이 하는 우쭈쭈쭈 우리 큰 애기.


클릭, 하면 그분 오시던 그 옛날의 한 순간




맹꽁이 열 마리 잡아 먹은 걜걜걜걜 하는 목소리에, 여드름 듬성듬성,

그리고 가끔 맥락 없는 버럭!

'나 키 또 컸어' 하면서 (벌써 따라 잡은) 엄마가 아닌 장식장과 책꽂이에 키 재는 중딩.

딴에는 클 만큼 컸고 세상을 알 만큼 아는 청소년,

웬만하면 '난 그냥 집에 있으면 안 돼?' 하는 중2 현승이다.

집에서 혼자 라면 끓여 먹겠다는 청소년을 삼고초려로 설득하여 냉면 먹으로 갔다.

친절하신 아주머니, 젓가락은 탁자 서랍에 있다며 아가용 포크 하나를 챙겨서 현승 앞에 놓아주셨다.

(뽀로로 플라스틱 젓가락 챙겨 가지고 다닐 걸. 킥킥)


나름 혼자 다 컸다고 세상 우습게 보는 사춘기 아들. 가만 앉아서 스타일 무너지고 속수무책 1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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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국 사랑을 찾는 구도자입니다.


최근 작 <연애의 태도>에 저자사인에 쓰는 문구입니다. '찾는'보다는 '찾아 헤매는'이라는 형용사가 더 끌리지만 순화하기로 합니다. 어쩌다 술술 만년필이 움직여 끄적이게 되었지만 생각할수록 하나의 마침표 같은 문장이라 의미가 있습니다. 여섯 권의 책을 한 마디로 정리한 것이며, 내적여정을 공부하고 훈련한 10 년의 결론이며, 음악심리치료라는 생소한 공부를 선택한 20여 년 전 깊은 내적 동기이며, 50여 평생의 마침표입니다. 우리는, 아니 저는 결국 사랑을 찾는 구도자였습니다.


<연애의 태도>의 저자소개는 편집자 님이 쓰셨는데 '아,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타자의 시선으로 저를 정리하는 의미 있는 소개였습니다. 저에 대한 소개를 제가 읽으면서 저라는 사람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고 할까요.


정신실 작가는 인생에서 꼭 한 가지 성공하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그는 '연애계'를 떠나지 못한다고 곧잘 말하며 여전히 청년들의 교회 누나로 사서 고생을 하고 있다. 연애에는 정답이 없기에 연애 강사 백 명이면 백 가지 답이 나온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가 고민깨나 한다는 청년들에게 연애 강사로 사랑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나답게 연애하자'라고 즐겨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이 연애의 기술을 알려 주기 전에, 연애 당사자가 원하는 연애가 뭔지, 사랑이 뭔지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상담을 시작한다.

자기를 잃어버리고 사회의 가치관에 따라, 자기를 잊은 채 타인의 사랑법으로 누군가의 이모티콘이 되어 움직이는 애정 결핍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나답게 연애하는 태도를 가질 수 있기를 저자는 우리 시대 크리스천 청년들에게 말해 주고 싶어한다. 동시대 신앙 선배로서, 사랑을 배워가는 사랑의 탐구자로서, 카페에서 수다처럼 쏟아내는 속깊은 고민들도 진심으로 들어주는 MBTI 전문 강사이지 에니어그램 전문가로 청년들의 연애사에 동참한다.


책과 강의 어딘가에서 한 번쯤 했던 말이 정리되어 담겨 있습니다. 대화의 기술에서 '미러링 기법'처럼 제가 했던 말을 되돌려 주는 저자 소개를 통해 '아, 맞아. 내가 이런 이유로 연애 강의를 하지' 하고 정리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제가 쓴 서문 일부입니다.


나만의 고유한 사랑을 찾아가는 데 연애만한 출발지가 없습니다. 그것도 썩 잘 풀리지 않는 연애 말입니다. 여친 생기는 기술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마음이 낙심으로 차분해지는 순간, 헤어져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시원하게 정해 줄 연애 상담가 찾다 검색질 손가락을 멈추는 순간은 전향의 순간입니다. 사랑꾼 기술자와 사랑의 구도자 사이 갈림길입니다. '단지 남친이 아니라 깊은 친밀감을 나눌 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었구나!' '인형 같은 여친과 하는 애인 놀이는 애초부터 없었어. 더불어 성장하며 영혼의 친구가 되어 가는 것이구나!' 이보다 소중한 사랑의 깨달음이 없습니다. 사랑꾼 기술자 지망생이 사랑의 구도자로 태도를 전향한다면 이것은 가장 좋은 소식입니다. 기술로 안 되는 연애, 답이 없는 연애의 길을 빛은 결국 그 사랑이니까요. 기술이 아니고 태도입니다. 


"너는 애가 사랑이 없어" 어렸을 적부터 엄마에가 가장 많은 들은 말 top5 안에 드는 말입니다. (1위는 '하나님 두려운 줄 알고 살어') 어쩌다 나는 이토록 사랑에 천착하게 되었을까? 아마 엄마의 저 말이었을 것입니다. 가장 듣기 싫었고, 외적으로는 인정도 하지 않았지만 내면에서 가장 큰 부끄러움으로 간직한 말. 누군가 조금 관계가 불편해지 수도 있는데, 못마땅하고 싫은 사람이 알짱거릴 수도 있는데 그걸 해결하지 못하면 지옥가는 줄 알고 부단히 애를 써댔지요.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남는 것은 더 깊은 수치심 뿐이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지만요. 내 사랑 아버지를 갑자기 빼앗긴 것도 '사랑'에 목숨 거는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신앙, 연애, 결혼, 육아, 관계를 통해 본질적인 무엇을 발견하고 싶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사랑을 찾는 구도자의 길이었다는 것을 내적 여정을 통해 이제 알았습니다.


위험부담을 안고 도전을 하나 합니다. 연애도 육아도 관계도 심지어 신앙간증도 아닌 '사랑'이라는 주제만으로 짧은 강의를 합니다. 사랑이란 얼마나 식상한 주제입니까. 한 번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편집되어 영상으로 돌아다닐 강의이니 더욱 무모한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50년 사랑의 여정 동안 좌충우돌 하면 깨달은 것을 정직하게 나누자며 정리하고 있지만 심적인 부담이 큽니다. 이런 얘기 하렵니다. 사랑받지 못할 곳에 괜히 얼씬거리지 마라, 어차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상처주는 사람을 끌어안으려 하지마라, 가급적 만나지 마라, 사랑은 변한다, 안 변하면 사랑이 아니다, 결혼과 사랑은 행복의 문제가 아니라 성장의 문제이다, 이 사람을 만나도 저 사람을 만나도 상대가 애인이든 남편이든 자녀이든 결국 사랑을 위해 늘 끌고 다니는 건 '나'다, 그러니 '나 자신이 되어, 나를 탐구하고, 나를 좋아하는 일'이 관건이다. (그러니까 에니어그램 세미나에 와라?!) 


암튼 저는 어릴 적부터 사랑 없는 사람으로서, 사랑을 찾는 사람입니다.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8

 


책으로 둘러싸인 거실의 창가, 낮은 책꽂이 위에 공들여 키운 화초들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남들 눈에는, 심지어 식구들에게도 그렇고 그런 들쑥날쑥 흔한 식물이겠으나 공들여 키우는 제게는 다릅니다.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고 물을 주고 매만집니다. 사랑을 듬뿍 받는 녀석들이지요. 돌보는 이가 한결같지 못하여 간혹 방치될 때도 있습니다. 일이 많아 바쁘거나 마음이 메말라 화초는 물론 그 무엇도 돌볼 여유가 없는 날이 있지요. 그런 순간엔 돌보지 못한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바쁜 일이 지나고 아팠던 마음이 나아지면 비로소 잎을 축 늘어뜨린 화초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때야 정신이 번쩍 들어 싱크대로 가져가 하염없이 샤워를 시켜보지만 끝내 살아나지 못하는 녀석도 있습니다. 회생불가 판정을 내리고 싱크대 안에 둔 채 하룻밤을 자고 났는데 어느 새 살아나 빳빳해진 잎을 보기도 합니다. 이것이 부활이구나, 싶어 조용히 쿵쿵 심장이 뜁니다.

 

한결같지 못하고 부지런하지도 않은 주인인 제게 스파트필름이라는 화초는 딱 마음에 드는 놈입니다. 물 줄 시기가 지나면 바로 어깨, 아니 잎들을 축 늘어뜨립니다. 온몸으로 목마름을 표현하지요. 주인의 일상과 마음의 몰골이 말이 아니라도 물 달라, 제발 물을 달라온몸으로 시위하는 녀석을 외면하기는 어렵습니다. 얼른 물을 떠다 바치며 흐릿해진 마음의 줄을 다잡게 되기도 합니다. 참으로 고마운 녀석이지요. 그래, 목마르다고 말을 해야지! 표현을 해야 알지! 꾹꾹 참고 아무 내색 안 하다 갑자기 시들어져 회생하지 못하고 떠나간 초록이들이 야속합니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생명 주옵소서

 

화초가 목소리를 가졌다면 스파트필름 같은 녀석들은 주인님, 목마릅니다.’ 소리를 낼 것입니다. 그 소리에 손을 움직여 물 한 바가지를 먼저 부어줍니다. 예수님, 목마릅니다. 가뭄에 쩍쩍 갈라진 제 마음에 단비를, 성령의 단비를 부어주소서. 구하고 두드리고 찾아야 합니다. 정말 그래야 하겠습니다. 문제는 먼저 갈증을 느낄 수 있어야 말이든 기도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목이 마른지, 배가 고픈지 느끼지 못하는데 어떻게 요구하고 표현할 수 있단 말입니까. 목마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능력은 목마름을 느끼는 살아 있는 감각입니다. ‘내가 목이 마르다자기 영혼의 메마름을 감지할 수 있다면요.

 

빈들의 마른 풀 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찬송을 시작하는 첫 구절, 이 한 구절에 저는 마음을 빼앗깁니다. 오랜 가뭄에 쩍쩍 갈라진 빈들의 땅, 말라 시들어가는 위태한 풀 한 포기 같은 영혼의 상태를 간파해내는 작사자의 감각 말입니다. 우울해, 사는 게 재미가 없어, 꿀꿀해, 사람이 다 싫어, 공동체가 무슨 필요야, 시도 때도 없이 화가 나..... 툭 내뱉어진 나의 말에서 시들은 나의 영혼을 느낄 수 있다면요. 우울하고 외롭고 화가 나는 지금의 상태가 눈에 띄게 호전되지는 않겠지만 ,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그 무엇도 아닌 성령의 단비로구나!’ 깨달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메마른 땅에 오래 방치된 탓에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있지만, 회생 불가의 메마름이 아님을 알고 소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퍼뜩 일어서진 않겠으나 하룻밤 이틀 밤 지나며 다시 살아나 생명과 맞닿을 것입니다. 참된 사랑의 언약은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참되신 사랑의 언약 어길 수 있사오랴

오늘에 흡족한 은혜 주실 줄 믿습니다

 

기실 실낙원 이후의 인간은 늘 목마른 존재입니다. 연결되어 있어야할 그 무엇, 생명의 샘 근원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무의식적인 결핍감은 아무 것이나 들이키게 하고 빠져들게 합니다. 애정이든, 알코올이든, 하다못해 스마트폰의 화면이든 무엇에든 사로잡혀 있고 싶게 만듭니다. 그렇게 갖고 싶던 것을 손에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식상해지고, 일이 잘 풀리고 있는데도 불안하고 금세 공허해지는 이유. 무언가 더 좋은 것을 향한 끝없는 목마름입니다. 결국 애초 단절되었던 그 관계, 사랑이신 분으로 충만해지기까지 우리의 목마름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를 보며 내 영혼이 노래합니다.

 

반가운 빗소리 들려 산천이 춤을 추네 봄비로 내리는 성령 내게도 주옵소서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생명 주옵소서





# 옛날에


동생의 존재는 내게 '전쟁터 세상'을 가르쳐주었다. 맛있는 것, 좋은 것을 독차지 할 수 없는 세상. 둘 중 하나가 혼나야 한다면 나는 어떻게든 나는 살고 봐야 하는 세상. 동생을 마주하면 알 수 없는 전투력이 뱃속에서부터 꿈틀거린다. 친정에 가서 동생과 식탁에 마주 앉으면 가장 맛있는 걸 빨리 먹어치워야 할 것 같은 조급증이 생긴다. 옛날 옛날에 몸에 밴 습관이다. 내가 덜 가지고 덜 먹는 건 상관 없지만 동생이 더 먹는 것, 더 가지는 것은 견딜 수 없다. 이왕 혼난다면, 어떻게든 동생이 한 개 더 혼나게 만드는 것이 어린 시절 중요한 이슈였다.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공격이 가정예배 시간에 웃음보 터트리기인데. 돌아가며 성경 읽는 시간에 내가 읽는 부분이 끝나고 동생이 받아 읽어야 할 순간. 말실수 같은 걸 던져서 동생 웃음보가 터지면 압승이다. 수습되지 않는 웃음보는 결국 예배 끝나고 혼나는 걸로 마무리 되기 때문이다. 기도 시간에 엄마 아버지 눈 감고 있을 때 둘이 눈 뜨고 소리 안 내고 웃기는 건 리스크가 큰 모험이지만 자주 감행했다. 설령 걸려서 혼나더라도 나보다 동생이 1만 더 혼나면 만족이었다. 그때 계발한 기술이 콧구멍 벌렁거리기 같은 것이다. 소리 안내고 눈만 마주치면 웃길 수 있는 테크닉이다.


아웅다웅 티격태격 엄청 싸워댔다. 가끔 육박전도 했는데, 국민학교 5, 6학년 때 쯤 어느 날, 늘 하던 개싸움 육박전이 시작되자마자 동생이 먼저 나를 깔고 뭉개는 전에 없던 일이 벌어졌다. 그날 이후로 육박전은 조용히 그만 두었다. 늙은 엄마 아버지를 놀리기 위해서는 가끔 의기투합을 하기도 했다. 엄마가 하는 방언 기도나 찬송 가지고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것 등. 어찌됐든 동생의 존재는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독차지' 하고픈 내게는 치명적인 걸림돌이었다. 동생 앞에만 서면 전투력이 상승했다. 현명한 부모님이 최소한의 싸움을 위해서 몇 가지 원칙을 주셨는데 그 중 하나가 '반띵의 원칙'이다. 손님이 오셔서 용돈을 주시는 행운의 불로소득이 있을 때, 얼마나 행복했던가. 문제는 둘 중에 하나만 집에 있는데 손님이 오신 때이다. 동생이랑 나눠가져, 라는 말일 붙이는 경우와 그냥 주시는 경우. 내게는 엄청난 차이인데 밖에 있다 돌아온 동생에겐 내게 없는 돈 100원이 누나 손에 있다는 것 외에는 보이지 않으니 내놔라, 누나가 안 주면 엄마가 주라, 난리 난리를 쳤을 것이다. 그래서 만드신 법이 '반띵의 법' 일명, 남내 불로소득 공산주의 시스템이다. 손님이 나눠 가져라, 하지 않아도. 예기치 않은 모든 불로소득은 무조건 반띵이었다. 100원이 생기면 50원 씩, 50원이 생기면 집 앞 가게에 가서 '10원 네 개랑 5원 두 개로 바꿔주세유' 해서 나눠 가졌다.


# 간만에


김포에서 흑석동으로 주일 예배 가는 날이 엄마에겐 최고의 날이다. 아침에 예배 전에 태워 드리고, 오후 예배 마치면 모시러 가는 것이 동생의 주일 일상이기도 하다. 주일 집에 가는 길에 꼭 동생이 전화를 한다. '누나, 엄마가 나 돈 줬다.' 우리 자랄 적에 그렇게 돈돈 하던 엄마가 돈에 대해서 완전 '내려놓음'이 되어가지고. 돈이 좀 모여지면 주는 게 일이다. 주일에 교회 가면 최고령 권사님인 엄마에 대한 애정으로 몇 만원 씩 용돈을 드리는 분이 계신가보다. 그걸 집에 가는 차 안에서 동생에게 기름값이라며 주고, 동생은 여지 없이 내게 전화하여 염장질을 한다. '엄마 바꿔, 엄마 바꿔! 엄마, 운형이 돈 주지마. 나도 줘.' 폰에 대고 떼를 쓰면 엄마가 무척 좋아하신다. 그러면서 또 '야야, 나 데리고 사느라고 운형이 선영이가 심(힘)들어. 나 먹을 거 사다 대고 심(힘)들어. 노인에 하나 데리고 있는 게 얼매나 심든줄 아냐?' 하신다. 주중에 전화를 했더니 '얼라, 우리 딸 보고 싶었는디 전화를 혔네.' 하기에 '엄마, 운형이 돈 주지 말고 모았다가 나 줘. 20만원 모아 놓으면 내가 엄마 보러 갈게. 나 보고 싶지? 운형이 주지 말고 20만원 모아 놔.' 생떼를 썼더니 또 좋아한다. '얼라, 너 사모가 그르케 돈 좋아허믄 못 써. '하면서도 '20만원...... 은 그거 나라에서 주는 거 그게 나와야 되는디..... 궁시렁궁시렁' 하다 끊었다.


# 메소드 연기


며칠 뒤어 엄마를 보러 갔는데 신실아, 신실아 조용히 부르더니 꼭 쥔 주먹을 내 손바닥 위에 놓는다. 눈 찡긋, 찡긋. 빨리 집어 넣어. 우힛, 꼬깃꼬깃 만 원 열 장이내 손으로 들어왔다. 잠시 후 동생과 마주 앉았다. '엄마, 누나 돈 줬어?' 이 순간 와, 우리 엄마 메소드 연기. '참나, 내가 돈이 어딨다고 돈을 줘워?' 천하에 촉 좋은 동생이 속았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시침 뚝 연기였다. 며칠 후 동생하고 통화하며 '야, 엄마가 나 돈 줬다. 몰랐지?' 제보하고 '엄마 취조하고 재밌는 거 있으면 말해줘' 했다. 좋은 것 두고 무조건 경쟁하는 것이 습관이 된 남매, 평생 남매 사이에서 알아도 모르는 척(엄마, 아까 낮에 오셨던 아버지 친구 목사님이 누나 돈 줬지? 나 없을 때 줬지? '아니~이!'), 몰라도 아는 척(엄마, 낮에 오신 목사님이 누나 100원 주셨어? 200원 주신 거 아니지? 누나가 나 50원 줬어. '50원 줬으면 100원 받았겄지~!) 했던 엄마. 93세 메소드 연기 엄마는 아들의 취조에 어떻게 응할 것인가, 두둥!


#  93년 내공의 리액션


이제부터 동생 보고이다. 운동하러 나가면서 엄마 방문 앞에서 달달하게 인사했단다. 엄마, 운동 갔다 올게~/(엄마는 침대에 누운 채로 아이컨텍을 위해 고개를 한쪽으로 든 귀여운 모습으로)이이~ 그려, 갔다 와/엄마, 선영이도 탁구 치러 갔으니까 2시 쯤 올 거야. 늦는다고 뭐라 하지마/(천진난만 밝고 순한 표정으로)그려~어, 알었어/그런데 엄마, 엄마 누나 돈 줬어? 두둥~/(귀엽게 들었던 고개를 체념하듯 베개에 떨궈 누우며, 단호하고 무표정하나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려.서?! /줬다더니! 얼마 줬어? 누나 얼마 줬어?/(더욱 단호하고 시크하게) 니가 경찰이야? 니가 경찰이냐고?


이런 예측불허의 93세 시트콤 주인공 같은 노할머니라니!


* 벌써 10여 년 전의 사진이다. 엄마는 지금 성경을 읽지 못한다. 돋보기의 도수를 최고로 올려도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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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 마법학교 강의실은 아니다. 빨간 물은 그냥 허브티, 파란 물은 블루 레모네이드, 검정 물은 독극물 아니고 커피일 뿐이다. 저녁 먹고 야근 출근하는 남편이 '수요 성경공부 종강' 날이라며 커피 배달 안 되냐고 했다. 일 잔당 천 원씩 쳐주겠다니 남는 장사이긴 한데..... 어르신들이 밤에 무슨 커피를 드셔? (딱히 커피로 밤잠 못 주무실 어르신들은 아니지만서도 일단 연배가 높으시니)  그리고 나 피곤해..... 일단 튕겨는 보았다. 


말에 신중한 사람이라, '커피 해줄 수 있어?' 말로 나왔을 때는 백 번 생각한 것일 테니 응해주고 볼 일이다. 야밤에 커피는 좀 그렇다 싶고. 다른 음료가 없을까 생각해 보니, 현승이랑 장보면서 산 저칼리 블루 레모네이드가 있다. 시원~한 푸른 색이 일단 좋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강의 하고 선사 받은 허브티의 붉은 색도 있다. 청홍의 조합이 딱이네! 여기에 생각이 마치자 소파에 달라붙어 있던 몸에 힘 빡 들어간다. 끌어안고 있던 쿠션 집어 던지고 급히 빨간 약과 파란 약을 조제하였다.


그리고 우리 특급 도우미 채윤이. 힘이 세서 무거운 것 잘 들어, 엄마 닮아 이벤트 좋아해, 이런 채윤이와 함께 배달에 나섰다. 콩알 만 한 쿠키도 가져갔는데 옥수수 쪄오신 집사님 계셔서 짧고 가볍게 풍성한 시간을 보내고 왔다. 


커피 내리며 채윤아, 사진 찍어! 했더니. 엄마 또 블로그에 '커피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올릴 거지?' 한다. 눈에 힘 딱 주고 '아니, 커피 어쩌구 저쩌구 하지 않을 거야. 이 사진 제목은 영부인 따라잡기야.'라고 했다. 그렇다. 이 포스팅의 주제는 대외적으로 '김정숙 여사 코스프레'로 하겠다. 실은 두어 주 전 금요일에 친구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대학 친구들과 일박 여행을 작당한 날이었다. 한참 전부터 정해진 약속 날인데 남편이 '사랑방(구역)모임 종강파티'를 한다며 커피 안 되겠냐고 했다. 당연히 안 되지!


친구들 일박 숙소가 여차저차 하여 에버랜드 근처가 되었고, 이러쿵 저러쿵 끝에 다섯 명 완전체로 모이는 시간이 밤이나 되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요리조리 머리 굴려보니 에버랜드에서 교회까지 달리면 20분인데다 아침부터 가장 성실하게 풀타임으로 놀며 운전수로 몸도 바쳤기에 저녁시간 잠시 나왔다 들어가도 되겠다. '그래, 여보. 커피, 콜!' 하고 받았더니, 같이 노래도 하자, 잠시 게임도 인도해라 요구 사항이 많아졌다. 한 학기 수고하신 사랑방장(구역장)님들 위로하는 의미로 모든 프로그램을 혼자 준비하려고 한다니. 목사의 마음이 갸륵하여 허락했다. 핸드드립 하고, 율동도 하고, '사랑하는 이에게'  듀엣도 했습니다. (네네, 목사 부부가 특송으로 '사랑하는 이에게' 불렀습니다. '그대 고운 목소리에' 시작하자마자 아멘, 아~아멘! 은혜 충만이었습니다.)


미션 클리어 하고 그제야 다 모인 친구들에게 달려갔다. 칭찬쟁이 친구 하나가 '신실아, 너 김정숙 여사 같애.' 뭐라고? 김정숙 여사라고라? 다짜고짜 기분 좋은 이 말, 가슴에 품어두었던 것이 확실하다. 게다가 그날 낮부터 만나 놀던 친구가 내가 신을 쪼리 예쁘다 예쁘다 해서 줄까? 하고 벗어준 터였다. 세상에! 다음 날 친구들과 헤어져 집에 와 뉴스 보는데 우리 김정숙 여사님, 미쿡 가셔서 예쁘다 예쁘다 하는 말에 옷을 벗어주고 오셨더라. 아, 나는 진정 분당의 김정숙 여사로구나! 그렇구나! 셀프 감동, 셀프 추앙이었다. 혼자 김정숙 여사처럼 웃어보았다. 오호호호호호홍....... 라면이라도 먹고 가야지. 종피리 너 나랑 결혼 할 거야, 말 거야. 빨리 말해!


영부인이라서, 오직 남편에게 맞춘 역할로서의 행동만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한다. 역할에 맞춘 연기로서의 삶에는 '기쁨'이란 없는 법이다. 기쁨 없이는 '자발성'도 없다. 기대역할에 부응하려는 동기가 없지 않겠지만 내 나라, 내 민족, 민주주의에 대한 개인적 열망과 사명감이 없을까. 나는 김정숙 여사의 예측불허 미담행보를 그렇게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분의 남편, 우리 이니님이 평생 보여준 삶에 대한 신뢰도 자발성과 기쁨의 원천일 것이다.


내조니 외조니 하는 말이 와닿지 않을 뿐더러 가끔 거부감까지 느껴진다. 무엇이 안쪽의 도움이고 누구의 도움은 바깥의 도움인가? 내가 밖에서 하는 강의와 쓰는 글을 시니컬하게 비평하고 검증해주는 그의 도움은 내조인가? 외조인가? 그가 안방에서 설교준비 하는 동안 집안을 고요하게 만들고, 간식을 챙기고, 거실에 앉아 기도하는 마음으로 돕는 것은 내조인가? 외조인가? 믿음이 가는 사람이 하는 일에 도울 일이 있다는 것이 기쁠 뿐이다. 엄밀히 따지면 그의 일도 아니다. '내 공동체, 내 교회'의 일이다. 해리포터, 아니 파파스머프의 발명실에 있을 법한 빨간약과 파란약을 발명한 여름 밤, 보람과 기쁨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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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의 더위는 언제 끝나나? 여름 내 여름의 끝을 기다리지만 막상 보내려면 아쉬운 이유가 있었다.

더 이상 수박을 먹을 수 없다는 아쉬움은 더위와 싸우지 않아도 되는 안도감의 크기와 막상막하였다.

('이다' 아니고 '였다'임)

수박을 향한 열정이 서서히, 인식도 못할 만큼 식어가고 있었다.

오늘에야 식어버린 수박 열정에 대하여, 그 이유에 대하여 깨달음이 온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도 수박 한 통을 사서 나르는 일이 버겁다고 느꼈지만,

이젠 수박 들고 집 계단을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아 살 생각을 못한다.

돌쇠 1,2,3이 함께 장을 봐줄 때 한 통씩 또는 반 통씩 사기도 하지만

계단 등반에 성공하여 싱크대 앞까지 운반했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이 무겁고 딱딱한 놈에 칼을 집어 넣어 반으로 가르고, 먹기 좋게 썰어서 통에 담아 놓기.

계단 오르는 일이 다리의 수난이라면 썰기는 팔목의 노역이다.


팔 다리의 힘이 노역에 부응하지 못한 탓으로 수박 먹는 즐거움을 알아서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한 5년, 삼시세끼를 밖에서 해결하는 베스트 허즈밴드로서 아내에게 최상의 가사 복지를 제공했던 그가,

그랬던 그가! 삼시세끼를 집에서 먹는 三食이 세끼 님이 되신 것이다.

심지어 지병을 하나 얻으셔서 빵이나 씨리얼도 아닌 섬유소 많은 반찬에 국에 밥을 챙겨 드셔야 하는......

그러니 '나의 성소 싱크대 앞'은 땀뻘뻘 '체험 삶의 현장'이 되었다.

수박의 단물이나 빨던 시절은 다 지나간 것.


착한데다 아프고, 아픈데다 내게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삼식이 남편을 미워 할 수도 없네 그려.

돌덩이 같은 수박 한 통이 싱크대 위에 오른 어느 날, 삼식이 남편에게 칼자루를 쥐어 주었다.

도저히 내 힘으로 칼을 꽂을 수 없으니 힘 좋은 삼식이 돌쇠께서 어떻게 좀 해보라고.

그날 이후로 삼식이는 수박 썰기에 취미를 붙였다.

크기와 두께 딱딱 맞춰서 썰어 내는 것이 나름 적성에 맞고 신나는 모양.

애들은 적응이 참으로 빠르다. '아빠, 우리 수박 먹으면 안돼?' 칼자루고 아빠 쪽으로 간 것에 금방 익숙해졌다.


저녁식사 마지막 숟가락들을 놓는데 삼식이 아빠가 뭔가 앞북 치는 느낌으로

'과일 뭐 먹을까? 살구 먹자. 살구! 수박은 내일 먹자' 스스로 묻고 대답하는데, 발연기 일인극 쩐다.

(어리숙한 꼼수쟁이 가트니라구!)

얕은 꼼수에 대한 응징으로 관객은 엊나간다. 나는 수박, 나도 수박, 아빠 수박 썰어줘.

발연기 꼼수 실패로 칼 잡은 김에 수박 예쁘게 썰더니 아티스트로 변신하여 작품을 내놓았다.

작품의 모티브는 현승이 얼굴,

제목은 [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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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토요일 저녁 어쩌다 신메뉴 탄생.

 

엄마 마트 가는데 같이 갈래?

(시험이 코앞이라 공부 빼고 뭐든 재밌는 중2) 그래 그래, 나도 엄마랑 장보러 가고 싶었어.

엄마, 뭐 할 거야? 난 솔직히 지금 먹고 싶은 게 있는데..... 닭고기 같은 거야. 찜닭이나 그런 거.

아빠가 김치찜 먹고 싶다고 해서 김치찜 할 건데.

김치찜? 그래. 뭐, 나쁘지 않아.

(비 오는 골목을 터덜터덜 걸어 마트 앞에 다다랐을 때, 오랜만에 요리의 신이 오셨다.)

좋은 생각이 났어. 김치찜을 닭으로 하는 거야. 찜은 아니고 아무튼 어떻게 하면 될 거 같애.

진짜? 그렇게 할 수도 있어?

그럼! 일단 김치는 고기랑 푹 끓이면 무조건 맛있고. 김치가 맛있는 김치니까 성공예감!

닭치찜이야? (어쩌다 작명)

오, 닭치찜! 좋네. 닭치찜!

이름 좋다. 뭔가 욕 같기도 하고.... 참 좋다.

맛도 있을 거야. 이거 완전 신메뉴 탄생!

엄마, 왠지 닭치찜은 밥도둑이 될 것 같애.

 

닭치찜은 완성되었고,

아닌 게 아니라 닭치찜 이 녀석은 밥을 엄청나게 훔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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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기 내적여정 세미나를 심화2과정으로 마무리 했습니다. 기보 1,2 과정과 심화 1,2과정. 총 4일, 28시간의 만남이었습니다. 어떤 고통 가운데 있더라도 '의미'를 발견한 사람은 살아 남고 견뎌낸다는 것을 빅터 프랭클은 깨달았습니다. 다른 곳 아닌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결국 살아 온 사람들을 주의 깊게 관찰한 결과라고 하지요. '아이고, 의미 없다' 이 얼마나 쓸쓸한 말입니까. 


 심화2과정을 마치고 남겨주신 후기를 한 자 한 자 읽자니 '의미로다, 의미로다, 한량 없는 의미로다' 노래가 나오겠습니다. 좋았단 말, 고맙단 말이 백 천 천 번 듣는다고 싫겠습니까만.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 살아온 것, 삶을 나누는 것이 '의미'가 있구나 싶어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저 자신도, 함께 하신 선생님들도 '여기까지 잘 왔다!' 칭찬과 격려 받기에 마땅합니다.   


'정직성’과 ‘자발성’은 진실한 만남의 토양입니다. 에니어그램은 우리 자신에 대해 가차 없이 정직해지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리처드 로어) 이런 만남까지 기대했던 것은 아닌데, 얼굴을 맞대고 나누는 에니어그램 세미나는 ‘만남’의 신비와 기쁨을 일깨우네요. 한 분 한 분, 마주 앉은 분들의 의미가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손수 세 종류의 샌드위치를 만들고, 푸딩을 만들어오신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저 유명한 동막골 이장 님의 말씀 '뭐를 좀 마이 멕이야지'을 확인시켜 주셨지요. 정성 담기 수제 샌드위치가 입맛을 무장해제 시키며 마음의 긴장까지 풀어주고, 서로를 향한 따뜻한 환대의 태도를 갖게 했으니까요.에니어그램이 사람의 마음을 비추는 신박한 도구임이 확실하지만 환대로 마주하는 '사람의 얼굴'만 할까요. 참 감사한 만남입니다.


남겨주신 후기들입니다.


* 멘토 님 추천으로 에니어그램 평일반을 듣게 되었는데 휴가를 4일 쓰고 일정을 끝까지 마칠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한 마음이 먼저 듭니다. 누군가에게 말하기 쉽지 않은 저의 이야기와 다른 분들의 귀한 나눔으로 나와 타인을 더 열린 마음으로 이해하게 된 것 같고, 앞으로 저의 일상 속에서의 성장이 더 기대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본다는 것, 웃을 일보다 울 일이 많은 것 같네요. 힘들고 슬픈 순간에 그 누구도 탓할 수도, 변명이나 해명을 들을 수도 없지만..... 다만, 그때의 나에게 몇 마디의 말이라고 건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장 오늘 밤에라도요.


* 심화단계는 정상에 올라 탁 트인 하늘을 보는 느낌이었다. 아직도 불완전한 내 성격과 삶과 내면의 부조리를 담담하고 용기 있게 직면하고 견딜 수 있는 힘(그 힘이 무엇인지는 형용하기 어렵지만)이 느껴진다. 내적 여정의 영적 여정임을 상기하고 공감하는 과정이었다. 참 감사하다.


* 깨달은 것을 확인받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반응 감정 재해석하기 / 수퍼에고와 성령님의 목소리 /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생명 없음과 소망 없음을 느끼고 경험하며 현재 나의 기도제목인 나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 축복수련이자 불리는 축복기도의 패턴들.
잘못 가고 있는 길이 아님을 확인받는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뭔가 한 발짝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는 답답함이 공존합니다. 성급한 마음 탓일까요? 귀한 만남들 감사하며 또 만나길 소망합니다.


* 제가 지금 어디 쯤, 어떻게 서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마음 깊은 곳에서 괜찮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그전의 모임 때와는 다른 하나님에 대한 깊은 갈망과 다시 하나님과 깊이 동행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요즘입니다. 돌무더기 같은 마음을 깨닫고, 오늘 살짝 말랑할 정도의 마음이 되었어요.


* 이 여정이 가도 가도 깊고, 멀고, 보고 싶지 않으나 먼저 가신 분들이 끌어주시고 함께 가는 분들이 계시고, 다음 세대에게 멋진 어른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또 한 발 내딛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 들으면서 좋았지만 여전히 내 속에서 지배하는 수퍼에고의 목소리가 괴롭기도 했습니다. 조금씩 유리천장을 뚫어가고 있는 중에 힘을 얻었습니다. 기도로 이 여정을 더 깊이 가봐야겠어요.


* 여정을 지내면서 하나님이 만드신 참 ‘나’가 되는 것,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마음껏 살고 싶은 열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유형인지, 또 타인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지 생각하기 이전에 그저 하나님 창조하신 그대로, 자유의 삶을 살고 싶고 그 자유로 관계를 누리고 싶네요.


* 에니어그램은 나를 아는 것과 동시에 타인의 다름을 이해하고 수용ㅎ가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심화2과정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이번 강의는 특히 ‘아하’ 체험이 풍부했습니다. 홀로 기도하면서 혼돈스럽고 모호했던 부분이 선생님의 강의로 이론적으로 확실해져서 굉장히 기뻤습니다. 함께 수업 들으며 솔직하고 진솔하게 내면을 열어 보여주시는 강의 같이 들으신 분들을 통해서도 유익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재미있고 흥분되게 심화단계를 마칠 수 있어서 정신실 선생님께 감사드리고 여기까지 인도해주신 주님 참말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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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놀이터가 하나 생겼는데 서현역에 있는 알라딘 중고매장이다. 걸어서 왕복 5km라서 운동 삼아 다녀오기 딱 좋은 거리이다. 가족들의 주문을 접수하여 백팩 따악 메고 비오는 길을 걸어 알라딘중고매장을 다녀온다. 돌아오는 길,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어깨에 맨 가방에 누가 작은 돌멩이 하나 씩 티 안나게 집어 넣는 듯. 걸을수록 무거워진다. 무거울수록 뿌듯함은 더 크다. 식구들 각자에게 꼭 필요한 책을 구했고, 도합 이만 몇천 원이라니~ 이것 참, 무겁지만 가볍다. 



수년 전 아주 무기력한 날('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도 하지)을 보내던 시절이 있었다. 책이 유일한 도피처였다. 그때 우연히 손에 잡은 책이 <책만 보는 바보>였는데, 영락없이 내가 책만 보는 바보였다. 요즘은 전에 없이 소설에 빠져 보낸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소설 <잠>이 '꿈'에 관한 내용이라는데 낚여 두 번도 생각하지 않고 예약주문을 했다. 이 책을 손에 잡으면서 뭔지 모르게 마음을 못잡고 있는 터에 '소설만 보는 바보'의 삶이 시작되었다. 밀렸던 소설읽기 숙제 아니고, 놀이나 몰아서 하자.


옆에서 힐끗거리던 현승이가 <잠1>을 집더니 휘리릭 읽고, 2권 어서 읽어내라고 성화였다. 그러더니 '베르나르 베르베르, 완전 내 스타일' 하고 빠져들었다. <웃음> 1,2권을 금세 읽고 <뇌>를 비롯한 다른 작품 사내라고 자꾸 주문을 넣는데. 일단 사와서는 기말고사 마치고 읽기로 하고, 몰래 책을 감춰 버렸다. 거실에 분 소설 열풍에는 아빠의 부채질도 있었다. <82년생 김지영>을 사들고 오는 바람에 이래저래 뽐뿌질이 된 것이다.


지난 금요일 저녁에 글쓰기 강의를 하였다.  글쓰기 강의, 그것도 비신자를 대상으로 하는 강의라서 내심 혼자 짜릿했다. 쓰는 얘기를 하자니 읽는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엄마가 글을 쓰고 책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아이들은 어떤가? 하는 질문을 받았다. 아이들이요?! 

TV 없는 거실 18년 째이다. 아이들이 태어나서 천장 보고 누워 있던 시절부터, 보행기를 타고 기동력을 가진 때도, 네 발로 기어다니던 때도, 그 이후에도 배경은 늘 책으로 둘러싸인 거실이었다. 그런 거실에서, 잠들기 전 침대에서 엄마 아빠는 '세트로 책만 보는 바보'였다. 아이들 독서교육이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이 어디 있는가? 아이들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 아닌가. 헌데 현실은 그 반대. 책에 멀미가 난 것이다. 게다가 엄마 아빠의 사랑을 뺏어간 책은 나쁜 놈! 한동안 두 아이 모두 그 어느 집 아이들보다 책에 관심이 없었다. 아, 환경의 역습이구나! 큰 기대를 하지도 않았지만 진즉에 '책 읽는 아이'로 키우는 것은 포기했다.


인생이 그리 짧지 않으니 뭐든 속단 내릴 필요는 없지 싶다. 어젠가부터 아이들이 책을 읽는다. 책에 관한 한 덕후 기질이 있는 현승이는 꽂히는 책에 깊이 꽂히고. 작년에 꽃친을 했던 채윤이는 그때 그때 꽂히는 대로 짧은 흥미를 가지고 읽는다. 요즘 거실이 조용해서 둘러 보면, 넷 중 셋은 책을 들고 있는 그림이 많다. 이게 웬일이니! 아빠, 엄마, 현승이는 비슷한 소설을 돌려 보는 동안 채윤이는 의외로 <언어의 온도>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반지성적인 이미지로 각인된 채윤이의 요즘 취향이 살짝 적응이 안 되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제가 좋다니까! 큰 기대는 없이 '글이 그렇게 좋으면 하루 한 편씩 필사를 해봐' 했는데. 대박, 얘가 그 말 듣고 꾸준히 필사를 하고 있다.


아침 먹고 설거지 가득 쌓아 놓은 채 소설 한 권 붙들고 앉아 하루를 보내는 요즘, 소설만 보는 바보'다. 꼭 써야 할 글에는 손도 머리도 움직이지 않고, 사는 게 자꾸 씨리라라라(아, 이거 오랜만! 재방송 링크 한 번 더! ㅎㅎㅎ ), 될 대로 돼라, 약간 핀이 나간 상태이다. 그러니까 바보라는 건데. 이런 날도 있지, 이 또한 지나가리, 힘이 나지 않을 때는 힘 내지 말자, 하며 살고 있다. 거실에 나말고도 바보 셋이 더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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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아~아, 다 싸써~어. 어어엄마아, 다 싸따고오오.

똥 싸고 뒤처리 하는 것, 옷 입고 단추 잠그는 것, 요플레 뚜껑 따는 것.

제 손 두고 엄마 손 가져다 처리하던, 그럴 수 밖에 없던 시절이 있었다.

까마득하여 흐릿한 기억이지만, 분명 그랬던 때가 있었지.

이제 두 아이 모두 엄마보다 키가 크고, 힘도 더 세고, 음 또..... 더 세련되고.... 에...... 그렇게 되었다.


# 딸


채윤아아, 이리 와. 저기 싱크대 2층에 접시 꺼내줘.

채윤아아, 이 병 좀 따봐. 와, 너 손 힘 쎄다!


그리고 가끔 코스트코 같은 대규모 장을 본 후에는 집 근처에서 전화를 한다. 

채윤아, 다 왔어. 내려와.

어마어마한 머리숱의 긴 머리 휘날리며, 백수 향기 또한 휘날리며 1층 현관에 대기해준다.

짐을 드는데 이건 뭐, 수박 한 통 번쩍번쩍 들고,

엄마 손의 짐까지 뺏어서 양손 가득 어마무시한 무게를 들고 3층까지 한달음이다.

우와, 우리 채윤이! 아들이야? 우와아아아아.

주님, 이렇게 힘쎈 딸. 과연 제가 낳았단 말입니까?



# 아들

토요일 아침. 설거지 담당 누나가 레슨 가고 없다.
세 식구 식사를 하고 났는데 책 들고 소파에 터억 앉으면서
설거지 내가 할게. 이거 조금만 읽고 내가 할게.
오아아아아. 고마워!
그리고 점심. 아빠도 나가고 엄마랑 둘이다.
떡볶이 맛있게 해서 먹고 그대로 앉아 스마트폰 보고 있는데
벌떡 일어나더니 제 그릇 가져다 싱크대에 놓고, 또 내 그릇까지 거둬가며 식탁을 정리한다.
엄마, 설거지 내가 할게.
야, 아침에도 니가 했잖아. 연달아서 설거지를 하다고? 진짜?
현승이 며느리야? 왜 혼자 일을 다 할려고?
아니, 앞으로 주말에는 내가 아예 설거지를 맡을게.
<82년생 김지영> 독후 뒤늦은 효과?



딸은 자라서 아들이 되었고, 아들은 커서 며느리가 되었다.
자랑입니다만......
참 좋군요. 똥 닦아주며 키운 보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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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에 한 노래 있어 7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생각하는 것이 미덕이긴 하지만 그러다 생의 골든타임을 놓친다면 안타까운 일이지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고백 할까, 말까, 할까 말까, 할까 말까 생각만하다 상대에게 청첩장 받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상상만 해도 아쉬움의 산사태가 밀려오는 사태네요. 좋은 생각은 생각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하나님, 이럴까요, 저럴까요? 묻고 기도합니다. 꿈에라도 주님께서 나타나서 이래라, 저래라응답 주시면 좋겠지만 그런 경우가 흔하지 않습니다. 충분히 기도하고 난 어느 시점에서 내가 선택해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숙고하고 기도하되 반드시 어느 시점, 생각의 언덕을 떠나 체험의 바다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보다 깊다

너 곧 닻줄을 끌러 깊은 데로 저 한 가운데 가보라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나는 젖지 않겠다, 작심을 하고 바다에 첨벙 뛰어들어 노는 친구들을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바다 정경, 서로를 빠트리고 도망가고 파도를 타며 노는 친구들. 바라보기만 해도 좋습니다. 뚝뚝 물이 떨어지는 몸을 하고 친구 여러 명이 내게 몰려옵니다. ‘갈아입을 옷 없어, 나는 빠트리지 마물에 빠지지 않으려 도망 다니다 결국은 잡혀 빠지고 맙니다. 에라, 이미 버린 몸! 하고 깊은 곳으로 헤엄쳐 나가고, 친구 목을 껴안고 물을 먹이고, 그러다 나도 짠물을 들이키고. 이것이 살아있는 체험입니다. 물가에서 앉아 바라보는 것과 차원이 다른 체험이지요.

 

왜 너 인생을 언제나 거기서 저 큰 바다 물결 보고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을 한 번 헤아려 안보나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마음 약하여 못 가네

 

상념에 젖어 앉아만 있을 것이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바닷물에 젖는 것이 참다운 체험입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해(苦海), 고통의 바다라고 합니다. 부인할 수 없는 실존입니다. 헌데 오늘 찬송은 은혜의 바다를 노래합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그 바다가 바로 그 바다라고 할 때. 고통의 바다인 인생은 동시에 은혜의 바다이기도 합니다. 은혜의 체험은 다름 아닌 고통과 두려움의 한 가운데라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체험,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녀에게 청첩장 받는 그 순간까지 대시할까, 말까 물가에 앉아 모래성만 쌓았다 부수고 쌓았다 부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거절당하고, 실패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발목을 잡고 있지요. 연애든 진로든 하다못해 오늘은 뭐하지? 일상의 작은 선택이든 풍덩 뛰어들어봐야겠습니다. 고통의 바다임을 알기에 두렵지만, 바로 그 고통 속에 뛰어들어봐야 비로소 은혜의 바다를 경험할 수 있을 테니까요.

 

자 곧 가거라 이제 곧 가거라 저 큰 은혜바다 향해

자 곧 네 노를 저어 깊은 데로 가라 망망한 바다로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의 모래를 털고 출항합시다. 지금, 바로 지금 갑시다.

 

거절당할 수도 있지, 반반의 확률이니 고백하자. 그리고 결과는 감수하는 거야!

100% 흡족한 조건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 일단 시작해보자!

내가 공부했던 부분이니 맡아보자, 몰랐던 부분이 드러난다고 내가 바보가 되는 건 아니니까! 내 의견을 분명하게 말하자. 반대의견이 있지만 어쩌겠나피할 수 없는 갈등이라면 감수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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