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다 키워 시집 장가 보낸 중 늙은 부부처럼 등산을 간다.

며칠씩 아이들 데리고 자동차 여행 다니기도 이제 쉽지 않다.

전문 운전꾼이며 짐꾼인 아빠 일정에 맞춰 체험학습 내고(말하자면 학교 째고) 다닐 적이 좋았지.

청소년 백수인 채윤이는 모르겠지만, 중학생 현승이가 있는 한 어려운 일이다.

시험도 마치고 단기방학으로 일주일을 내리 쉬지만 '성수기에는 꼼짝하지 않기'가 가훈 수준이니까.


날씨 좋(지만 미세먼지 가득)은 5월, 결혼기념일 이틀 지난 날에 18년 차 중 늙은 부부는 등산을 한다.

산이 가까이 있으니 우리는 오른다.

집 가까이에 있는, 조금 긴 코스의 영장산 도전.

휴일에도 호젓한 등산길이라 더욱 좋았다.


송충이가 자꾸 머리 위로 떨어져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산길이기도 했다.

제비꽃(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아닌 것 같다) 딱 한 송이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피어 있다.

어쩌면 햇살이 딱 이 작은 꽃을 비춘단 말인가.

제비꽃은 나다.


고3 때 담임 선생님이 영어 선생님에 총각 선생님에 낭만적인 선생님이었다.

영어를 좋아하고 낭만을 동경하고 기타 잘 치는 남자를 무조건 좋아했던 내가,

고3 팍팍한 삶에 생기가 필요했던 내가 선생님을 안 좋아할 방법이 없었다.

가끔 기타를 들고 나타나 노래를 불러주셨다.

'바람이 불어 눈을 뜨면 텅 빈 내 가슴에 사랑이 솟네

누구라도 곁에 있으면 사랑해줄 텐데 내 사랑이여'


나는 늘 선생님 곁에 있었는데 왜, 왜 사랑해주지 않으시냐고요?

선생님의 이상형은 코스모스 같은 여자였다.

우리 반에 정말로 하늘하늘한 코스모스 같은 친구가 있었다.

얼굴이 하얗고, 목이 길고, 키가 크고, 하늘하늘했다.

담임 선생님이 그 애를 제일 예뻐하시는 것이 기정사실이었다. 


친한 친구가 내게 그렇게 말해줬다.

너는 안 돼. 너는 코스모스가 될 수 없어.

앉은뱅이 꽃이야. 알지?

'보랏빛 고운 빛 우리 집 문패 꽃, 꽃 중에 작은 꽃 앉은뱅이랍니다.'

유치원 다닐 때 불렀던 노래. 왠지 그때부터 이 이 노래가 내 노래 같았었다. 우쒸.


작고 귀엽고 웃긴 애를 좋아하시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코스모스는 어렵다! 포기!

선생님 흉내 내고, 놀리고, 골탕 먹이기 작당하는 캐릭터로 잡았다.

꽃 중의 작은 꽃 앉은뱅이 꽃이니까.


오늘 만난 제비꽃은 아니지만 제비꽃 같은 보라 꽃은 작지만 고상해 보였다.

결코 코스모스에 밀리지 않을 자태이다.

조명발인가?

홀로 피어나 스포트라이트 받는 자태가 고고하며 심지어 의연해 보이기도.

제 모습대로 피어나 자기답게 서 있으니 말이다.


세 시간 힘겹게 산에 오른 의미가 충분하다.

저 작은 꽃 한 송이를 만난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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