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팝니다]


수년 동안 한 어린이집의 음악수업을 해오고 있다. 음악치료사로서 영유아 음악수업은 같은 요리를 다른 장소에서 하는 것과 같다.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요리를 어느 상에 올리느냐의 문제이다. 음악교육이라고 하지만 치료사의 정체성을 벗어날 수 없다. 뭔가 조금 다른 아이, 어떤 이유든 한 걸음 물러서 있는 아이에게 절로 눈길이 간다. 조금 더 마음 써서 기회를 주고 격려하게 된다. 아이의 문제가 순수하게 아이만의 문제인 경우는 없다. 부모에게 관심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오지랖이라면 남부럽지 않은 여자이기에 때로 부모상담도 했다. 게다가 교사교육도 했다. 교사를 다독여 편안한 정서를 가지게 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환경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일에 몰입할 때 나는 행복하다.


초, 고정수입의 필요를 절감하며 짧고 깊은 고민을 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지만 당당하게 나를 팔아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일주일에 하루 어린이집에 상주하면서 부모상담, 교사교육, 아이들의 발달체크를 전담할 테니 강사료 말고 월급을 좀 달라. '나를 사달라' 꺼내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당당하게 내놓았다. 협상이 타결, 아니 제안이 수용되어 '토닥토닥 상담실'이라는 이름으로 비공식적으로 하던 일을 정식으로 하게 되었다. 어린이집에 전문 상담교사가 비치되는 건 대한민국 최초일 것이다. 어린이집 교사의 학대가 한 번씩 검색창을 휩쓰는데 아이, 교사, 부모를 함께 돌보는 일을 전담하여 적극적 방어를 한다는 의미. 기꺼이 나를 비치시키고, 심지어 고상 이미지 지키느라 쉽게 입에 올리지 않는 '돈'을 요구하였다.


이렇듯 적극적으로, 주도적으로 나를 팔아본 경험이 있던가.

셀프 토닥토닥을 무한으로 해주고 싶은 일이다.



[나를 팔지 않습니다]


선교단체 수련회 같은 곳에서는 강의를 녹화하고 녹음하는 경우가 많다. 녹화하되 내부 공유만을 허락하곤 한다. 온라인에 올리는 것에 대해서는 대체로 불허이다. 큰 의미를 부여하며 정한 원칙은 아니다. 강의라고 하지만 대체로 적어도 나는 만남, 소통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그 공간과 시간 안에서만 의미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 소중한 현재성이 사라진 채로 온라인에 떠돌아다니는 내 모습이, 나와 수강자들의 모습이 상상만 해도 싫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가지게 된 원칙인데 이 부분에 대해 말로 설명 하다보면 '결벽증 삐꾸아냐?' 하는 느낌을 스스로 받는다. 사실 나는 묻지 않아도 속에 있는 말을 하는 편. 노출에 대한 부담이 없다. 헌데 그런 방식으로 강의를 소비하고 싶지 않은 걸 어쩌랴. 


이번 출간된 <연애의 태도> 홍보를 위해 출판사에서 여러 작업을 하신다. 작업을 위해서 온라인을 탈탈 털어도 강의 영상을 찾을 수 없다 하셨다. 당연하다. 없으니까. 또 앞으로 홍보작업을 위해서 온라인 강의 프로그램에 나가면 안 되겠나 하시는데 딱 잘라 거절할 수는 없어서 너저분한 말을 늘어놓다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딱 자르니 못한 것은 단지 미안해서가 아니라 내가 고수하는 원칙이 맞나? 싶어서였다. '방송 출연은 하시겠어요? 인터뷰는요?' 출판사 부장님의 디테일한 질문에 답하면서 '나 판매 원칙'이 명확해졌다. 방송 출연, 여타 인터뷰 등은 다 하겠지만 강의 녹화는 안 하게씀미다! 시대적 요구, 독자들의 필요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에 공감하면서도 이 결벽을 내려놓지 못함에 스스로 답답해졌다.   


집단상담 같은 강의를 추구한다고 하지만 결국 강의를 하고 있고, 강사로서 더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굳이 지켜야할 순결일까? 그러고 보면 결코 가지 않겠다고 하는 강의 자리들도 있다. 어떤 (부류의 유명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는 얼씬거리지 않겠다, 이런 은밀한 똥고집도 있다. 이름을 알릴 기회라도! 아니, 이름을 쉽게 알릴 기회일수록! 그렇다고 유명한 사람 되고 싶은 욕망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아니 그 욕망이 너무 커 주체할 수 없어서 이렇게 비틀거리는 것이다. 이게 나다. 나의 현주소이다. (그 욕망에 압도되어 유혹에 빠진 적도 있다. 서지 말아야 할 자리에 서서 떠들어댄 날, 돌아와 잠 못 이룬 부끄러운 밤이여!)


강사로 나를 소비하고 싶지는 않다. 한 번도 내 직업을 '강사'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강사, 스타 강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하는 청년을 만났다. '사모님처럼'이라는 수식어가 앞에 붙었다. (야, 나는 그런 사람 아니거등!) 그 친구의 꿈을 기꺼이 응원하는 바이지만 내 장래희망 목록에 '강사'는 없었다. 그러나 강의하는 일이 즐겁다. 몹시 즐겁다. 즐거움에 비례하는 부담과 노오오력이 어려울 뿐이지. 즐거운 이유는 그 부담과 노오오력의 고통 때문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공부하고 체험한 끝에 나만의 답을 찾았고, 그것들을 버무려 누군가와 나누는 기쁨이기에 그렇다. 아,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 소중해서 상품화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 더욱 수동적인 강사가 되겠다.

팔리지 않기 위해서 더욱 몸을 낮추고, 하던 공부와 기도에나 열심을 내야겠다.

팔리지 않겠다. 소비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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