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복음과 상황> 4월호에 실린 인터뷰이다. 글도 말도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다른 느낌의 드러냄과 마주함이 된다. 긴 숙고로 정리되어 나오는 것이 글이라면, 일단 내보낸 후에 곱씹게 되는 것은 말이다. 인터뷰이로서 질문을 받고 답을 하는 것은 늘 좋은 경험이 된다. 내 입에서 나온 답을 복기하면서 몰랐던 내 마음을 알게 되기도, 따로 굴러다니던 생각의 구슬을 꿰어 (나만의) 보배로 간직하게 되기도 한다. 좋은 질문과 함께 잘 정리된 인터뷰 기사로 흩어진 구슬을 꿰어주신 <복음과 상황> 정민호 기자에게 감사하며 공유한다.


‘신앙 사춘기’를 지나며 마주한 하나님, 교회 그리고 목사들 : 《신앙 사춘기》 개정판 펴낸 정신실 작가


신앙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때가 있다. 교회와 목사, 여태까지 해온 신앙생활들이 다르게 보이는 시기다. 신앙 전반에 냉소와 반항을 품은 채 교회 생활을 견디거나 교회를 떠나는 이 시기는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정신실 작가(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소장)는 이 시기를 ‘신앙 사춘기’라 이름 붙였다. 2019년 그가 펴낸 《신앙 사춘기 – 신앙의 숲에서 길 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뉴스앤조이)는 목회자 아내가 된 후 ‘신앙 사춘기’로 보내며 겪은 일들과 진솔한 마음을 정리한 결과물이었다. 그의 글에는 목사를 향한 복잡한 마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앙 사춘기에 들어선 후 “무엇보다 누구보다 위선적인 목사가 싫었다”라는 그의 고백은 교회에서 목회자가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신앙 사춘기》 개정판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정신실 작가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신앙 사춘기 이후 이야기가 궁금했고,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자 셋(아버지, 동생, 남편)을 모두 목사로 둔 그에게 ‘목사의 역할’ ‘목사의 쓰임’은 긍정이기만 할 수도 없고, 부정이기만 할 수도 없을 것이었다. 정 작가는 또다시 신앙의 새로운 국면을 시작하고 있었다. 3월 3일 인터뷰 당일은 그가 입학한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학기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인터뷰는 캠퍼스 근처 스터디룸 카페에서 진행되었다.

《신앙 사춘기》 개정판이 출간되고, 지난주엔 출간 기념 저자 특강도 하셨습니다.
사실 말이 개정판이지, 누락된 글 하나(동생이 목사를 그만두면서 쓴 글)가 들어간 거예요. 내용이 많이 달라졌는지 따지면 큰 의미가 없고, 책 출간 이후로 여러 독자분과 만나면서 정리된 제 생각들을 다시 독자들 앞에서 나누는 것이 바람이었죠. 신앙 사춘기 이후의 이야기를 이어서 해달라는 요구가 있었고요. 강연을 이어가면서 책에 쓴 고민과 생각이 더 명료해졌어요. 이것을 시작으로 다시 신앙 사춘기 이후를 글로 쓰는 작업도 차차 해보려고요.

더 확장된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다는 뜻인가요?
네. 아주 구체적으로 그려지지는 않지만요. 어쨌든 ‘신앙 사춘기’라는 이름은 대상이 명료하잖아요. 사춘기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죠. 저는 사실 목사님들조차도 ‘신앙 사춘기’를 겪으신다고 생각해요. 신앙 여정, 신앙 발달 과정에 있는 모든 사람이 겪는 일이죠. 그래서 그 이후에도 여전히 신앙생활이 있고, 일상이 계속되니까 여러 질문에 대해 포괄적으로 써보고 싶었어요. 사춘기가 지나면 어른이 되잖아요. 어른이 된다고 행복해지지는 않지만 어른 나름의 삶과 의미가 있는 것처럼 신앙 사춘기 이후도 분명 의미 있는 삶과 신앙이 있어요. 그 이후 제가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무엇을 견뎌가는지와 같은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신앙 사춘기 너머’라고 할 수 있겠네요. 혹시 지금 대학원 공부를 또 시작하신 것이 연관이 있을까요.
아주 큰 연관이 있죠. 스캇 펙의 영적 발달 4단계를 보면, 1단계는 혼란스럽고 반사회적인 단계, 2단계는 형식적이고 제도적인 단계, 3단계는 회의적이고 개인적인 단계, 마지막 4단계는 신비적이고 공동체적인 단계라고 하거든요. 신앙 사춘기 이후 어떤 여정을 가야 하냐 묻는다면 신비적이고 공동체적인 것이라고 안내하는 거죠. 신비적인 건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없는 부분을 모르는 대로 두고 여정을 걷는 것이겠지요. 신앙 사춘기 때는 몰라서 너무 속상하고 고립되어있는 것 같았지만, 원래 하나님은 알 수 없는 분, 신비인 분이라는 걸 인정하고 사는 것이겠죠.
안셀름 그륀은 《아래로부터의 영성》(분도출판사)에서 ‘위로부터의 영성’과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소개해요. 신앙에는 저 높은 곳에 초월해서 계신 하나님을 향한 이상을 가지고 신학과 교리를 배우고 더 높이 상승하고자 하는 방향의 영성도 있고요. 내가 있는 아래, 지금, 여기, 하찮고 보잘것없고 누추한 여기에서부터 시작하는 영성이 있죠. 두 가지 축이 말이에요. 이걸 신앙 사춘기 이후에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고, 체험적으로도 깨달았죠.
그러면서 결국 중세 신비주의 영성을 공부하고 싶어졌어요. 많은 중세 영성가들의 가르침에서 소중한 답을 많이 찾았기 때문인데요. 위-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라는 분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갈 때 그 방법으로 두 개의 신지식(神知識)이 있다고 해요. 긍정신학과 부정신학. ‘부정신학’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묘사하는 모든 표현이 인간의 감각적 표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정의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내가 이때까지 가졌던 하나님 이미지, 즉 ‘하나님은 어떠어떠한 분이다’ 같은 정의를 하나씩 제거해가며 하나님을 만나가는 것이 부정신학이에요. 물론 이전에 긍정신학이 먼저 있어야죠. ‘하나님 안 계셔. 내가 여태까지 알던 하나님은 어디 계시지?’라고 생각하던 시기가 신앙 사춘기였고, 제가 겪은 영혼의 어두운 밤이었어요. 그 이후 제가 하나님이라고 알던 것들이 무너뜨리면서 새롭게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여정이 신앙 사춘기 너머 같아요. 그러니 신앙 사춘기는 더 깊은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이었던 거죠.
중세 신비주의 영성은 신앙 사춘기 이후 제 눈을 뜨게 해주었어요. 개신교 신학교에선 이런 영성을 공부하기가 쉽지 않겠다 싶었어요. 중세 영성을 잘 배워보려고 가톨릭 신학교로 갔는데 마음은 자유롭고 편안한 것 같아요. 경계를 확 넘어왔음에도 이 하나님이 저 하나님이고, 저 하나님이 이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들고요.(웃음)

 


‘신앙 사춘기’ 이전 작가님의 신앙 여정은 어떻게 구분이 될까요?
남편이 신학교를 가기 전까지를 첫 번째 단계라고 한다면, 남편이 신학교를 가고 파트타임 사역할 때가 두 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겠네요. 지금 남편이 담임 목회를 하는데요, 우리 교회는 ‘담임목사’ 대신 ‘섬김목사’로 불러요. 담임 목회라는 말이 엄밀히 따지면 정확한 표현은 아닌데, 지금이 세 번째 단계라고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남편이 신학교 가기 전까지는 정말 ‘교회의 딸’로 살았어요. 어릴 때 주일학교 초등부를 졸업하고 중등부 무렵부터 교사를 맡았거든요. 아버지가 목회하시던 교회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유아실 개념이 없던 시절 아이들을 맡아서 아이를 봐주는 일이었어요. 즐거웠죠. 청년 시절에는 주일학교 교사, 성가대, 주보 편집장도 하면서 열심을 냈죠. 주일성수는 정말 목숨처럼 지켰으니까요. 회사가 주일날 출근하라고 해서 사표도 내고 그랬어요.(웃음) 결혼하고도 남편과 가정교회 리더를 했어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였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식사하면서 가정교회 셀모임을 한 거죠. 정말 자발적으로 즐겁게 했던 것 같아요. 그땐 성가대 지휘도 했고요.

그러다 자발적으로 신앙생활할 수 없게 된 시기가 왔군요.
남편이 신학을 하면서 제 위치가 바뀌어 버렸어요. 자발적으로 하던 사람이었는데, 당위로 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지니까 제가 달라진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저는 정말 기도하고 싶었던 사람인데, 새벽기도 안 나온다고 체크당한다든지…. 저는 가만두면 알아서 교회 일꾼으로 살 텐데, 목회자 사모라는 이유로 자율성이 박탈당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어요. 이때가 ‘신앙 사춘기’의 시작 같아요. 이명박 정권 때였는데, 교회와 사회의 거리를 느끼며 분열적 마음들이 갑자기 올라오기도 했고요. 중년을 맞아, 제 안에는 영성적 허무감 같은 것들이 작용했어요. 한 길게는 10년 정도 마음이 방황하는 시기를 겪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방황하고 있을 때도 제 교회 생활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어요. 목회자 아내로서 역할은 했고요. 그러다 보니 몸이 많이 망가졌죠. 그런 시간을 길게 통과했어요. 제가 《신앙 사춘기》를 쓸 만큼 생각이 정리되고 힘이 생겼을 때 남편은 교회 분쟁으로 두 차례나 진통을 겪은 분들이 세운 현재 교회로 청빙을 받았어요.

구분하셨던 단계 중 ‘세 번째 단계’죠?
맞아요. 저로서는 《신앙 사춘기》를 쓰면서 의지적으로 마침표를 찍고, 다른 신앙의 단계로 가겠다고 생각한 시기였어요. 교회 문제로 아픔을 겪은 이들이 다 같이 모여 교회 생활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아요. 스스로 인식하든 하지 않든 상처로 인한 날카로움 같은 것들이 있죠. 《신앙 사춘기》 저자의 남편으로서 남편은 그런 분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긴 하죠. 하지만 목회자에게 상처받은 분들 앞에서 설교하고 목회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쩔 수 없는 불신을 인내해야 하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어쩌면 이 시대의 ‘어떤’ 목사들에게 주어진 소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고요. 기꺼이 욕먹어주는 목사가 필요한 시대 같기도 해요. 어떻게 보면 제 신앙 여정은 목사님들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고 그들을 추앙하던 시기, 반대로 목사님들을 향해 분노하며 저 자신의 신앙을 혐오하던 시기, 그 너머 또 다른 목사님들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서 기꺼이 견디고 감당하는 시기로 나뉜 것 같네요.

교회에 대한 신뢰를 잃은 이들 중에는 목회자에게 실망했다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걸 보면 교회와 신앙생활의 중심에 목회자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현실에서 목회자의 필요와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교회에 목회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교회와 목사에 대해 냉소만 남은 시절이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존경할 영적 지도자가 필요해요. 그런데 신을 매개하는 역할이라서 어려운 것 같아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투사하는 자리가 목회자니까요. ‘신앙 사춘기’를 겪는 분들이 어떤 목회자를 기대할까요? 저마다 다를 겁니다. 교회 분쟁이 생겨도 싸우는 이유가 저마다 다른 것처럼요. 그래서 어려운 게 교회 문제 같아요.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여러 욕망을 투사하지만, 사실 가슴 깊은 곳에 있는 마음은 목사 스스로 자기 자신이 되어 살고 신앙하기를 바란다고 생각해요. 진실한 목회자요. 진실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 되어 사는 사람이잖아요. 목사님이 따뜻했으면 좋겠어요, 소통을 잘했으면 좋겠어요, 설교를 잘해야죠 등 여러 바람이 있겠죠. 하지만 궁극적으로 영적 지도자에게 바라는 건 ‘영혼의 투명함’이지 않을까요. 말처럼 쉬운 덕이 아니죠.

목회자가 교인들의 다양한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기보다 진실한 모습을 비추는 게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예를 들면 1년, 52주 설교가 모두 성공하면 그건 위험한 거죠. 매주 하는 설교마다 교인들이 은혜받았다고 열광한다면 말이에요. 자기 판단 없이 목사에게 본인을 투사하거나, 목사가 교인들 기대에 맞는 설교만 준비한 거겠죠. 아니면 교인들이 자기 존재로 설교를 듣는 게 아니라 ‘좋은 교인’ 페르소나로 교회 생활을 하고 있을 수도 있고요. 사람이라면 52주 설교 중 절반은 별로인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목회자도 교인도 자기 자신이 되어 설교하고 듣는다면, 어떤 때는 은혜가 되고 어떤 때는 피차 상태에 따라 무덤덤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그래야 사람이죠.(웃음)

혹시 목회자의 설교가 성공할 때가 따로 있나요?
제가 목사인 남편을 질투할 때가 있는데, 바로 장례식이에요. 질투라 했지만, 장례식 때 저는 목회자 권위가 어떻게 아름답게 쓰이는지를 봐요. 가족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분들과 정말 마음으로 함께하고 싶고, 그들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전하고 싶지만 어떤 말이 위로가 되겠어요. 그런데 목사인 남편이 장례 예배에서 진심을 담아 전하는 설교는 유족들에게 위로도 되고 희망도 되더라고요. 인간의 실존적 슬픔 앞에서 목회자가 권위를 사용할 때 얼마나 큰 힘이 될 수 있는지를 느꼈어요. 결혼식도 마찬가지예요. 결혼식은 두 사람, 두 영혼이 맺는 깊은 약속인데, 잘 준비된 결혼식에서 목사가 진심을 담아 설교하고 약속의 증인이 되어줄 때 성혼 선언이 절대 가볍지 않은 것임을 경험하죠. 사람들이 실존의 문제나 사건 앞에서 홀로 감당할 수 없을 때, 목사 이름, 사제 이름으로 손잡아주는 일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코로나 이후, 제가 아는 많은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했어요. 팬데믹이 상실의 시대를 사는 것이잖아요. 상실이 만들어내는 ‘허무의 강’ 같은 게 있어요. 이럴 때 가벼운 것들이 물 위로 떠올라요. 쓸데없는 것들, 내 안에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먼저 걸러지는 거죠. 어렵게 꾹꾹 참아가며 기성교회에서 목회하던 분들이 허무의 강을 통과하며 어떤 결단들을 하시게 되었나 봐요. 이 시기에 교회를 개척하신 분들은 어려움이 많을 거예요. 교회가 잘될 때 해도 될까 말까인데, 개척하고 온라인 예배밖에 드릴 수 없다니요. 자신이 가진 결핍, 어려움을 마주하고 살아가는 시간을 통과하여 자기 자신으로 목회하게 되시길 기도하는 마음이에요. 저는 그런 목사님들에게서 희망을 봐요.

공교롭게도 작가님 주변의 가장 가까운 남성들이 ‘목사’였습니다. 아버지, 남편, 남동생이 목사였기에 적어도 3명의 목사를 가까이서 보셨는데요. 바깥에 보이는 모습 외에도 ‘이면’을 많이 목격했을 것 같아요.
어쩌다 보니 다양한 목사의 다양한 얼굴을 보며 성장하고, 겪고, 신앙생활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신앙 사춘기》에서는 정말 존경하는 목사에게 크게 실망한 채로 작심하고 글을 썼지만, 어느 목사님에게나 여러 면이 있다고 봐요.
어릴 때 목사인 아버지에 대해 기억나는 것들이 있어요. 말하자면, 전도사님을 부당하게 해고하셨던 장면이에요. 전도사 사모님이 죄송하다고 하면서 울고 가셨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어요. 당시 교회에서나 어린 제 안에 부당해고 같은 개념이 있지도 않았는데, 막연하게 아버지가 부당한 힘을 행사한다는 느낌을 받았죠. 아버지는 이북이 고향이라 이북 사투리를 쓰셨는데요. 엄마와 아버지가 힘들어하셨던 건, 부흥회 끝나고 교인들이 한 얘기들이었어요. “며칠 쌀밥을 먹었는데, 이제 어떻게 보리밥을 또 먹냐”라고 하면서 ‘정거장’을 ‘덩거당’이라고 발음하던 아버지의 이북 사투리를 흉내 내던 일도 기억에 남네요. 아버지를 참 좋아하고 존경했는데요, 목사였던 아버지를 떠올리면 뭔가 석연치 않고 슬픈 감정들이 떠올라요.
《신앙 사춘기》 개정판에 들어가는 건 동생 글인데, 동생은 목사를 그만두었어요. 이유는 그런 거였죠. 교인들에게 보이는 모습 때문에 기도하는 척, 소망이 있는 척, 하는 것을 더는 할 수 없겠다고 했어요. 저는 그것 역시 목사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역할을 하는 게 나쁜 것도 아니고, 역할과 자기 자신을 구분할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마다 가진 민감성과 한계가 다르기에 동생의 선택을 충분히 공감해요. 목사의 위선에 상처받았던 저로서는 그런 용기가 고맙기도 하고요.
남편은 뒤늦게 목사가 되었어요. 결혼하고 한참 뒤에 많은 고민을 거쳐 목사가 되었죠. 누구나 그렇듯 목회 시작할 때 품은 비전과는 전혀 다른 길 위에 있는 것 같아요. 아까 말했듯 현재의 부르심에 충실하기 위해 애쓰며 지금 앉은 자리를 꽃자리로 여기고 있어요. 제가 모든 목사님의 내면을 볼 수 있지는 않지만, 때로 가까운 곳에서, 때로 거리를 두고 여러 모습을 보며 신앙생활했네요. 목사님들의 여러 얼굴을 담은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소설로만 말할 수 있는 진실이 있잖아요. 그걸 써볼 수 있을까 모르겠네요.(웃음)

 


목회자 아내로서도 고충이 많았을 듯합니다. 아까도 혼자서도 신앙생활 잘할 사람인데, 사모 되고 나서 힘드셨다고 하셨는데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구조적으로 목회자 아내는 가장 소외된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어요.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이 층위별로 전부 존재하는 것 같아요. 목회자 남편의 권력과 자신을 동일시해서 흔히 명예 남성 정체성으로 교회 내 가부장적 구조를 더 강화하고 다른 여성들을 더 억압하는 분들도 있고요. 어떤 분들은 사모로 부르신 소명이 있다 여기며 교회와 교인들이 요구에 충실하죠. 드물게, 자기 자신으로 살면서 신앙생활하고자 목소리를 내는 분도 있고요. 입장은 다르겠지만, 근본적·구조적으로는 근거 없는 통념의 피해자인 것은 같다고 봐요. 제 교회 같은 경우, 공식적으로 ‘사모’ 호칭을 쓰지 않아요. 그렇다고 제가 보통의 비목회자 가족의 한 사람처럼 신앙생활하냐고 물으면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유능한 간호사로 소명감과 자긍심을 가지고 일하던 아끼는 후배가 있어요. 남편이 부임한 교회에 “사모들은 일하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죠. 굳이 하겠다면 남편 사례비에서 일정 정도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는 거예요. 말도 안 되잖아요. 교회가 목회자 아내를 목사와 함께 묶어서 동일한 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거예요. 목회자 아내라 불리는 한 사람, 한 존재를 지우고 희생시키는 구조에서 교회가 세워지고 굴러가는 셈입니다. 목회자 아내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개인적으로 어떻게 인식하든 구조 자체가 폭력적이죠. 어쨌든 자기로 살지 못하게 하는 구조에서 목회자 아내는 피눈물 흘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 너무 가슴 아파요.

목회자 아내가 이런 구조를 인식하는지가 ‘다른 문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많은 경우, 선택권이 목회자 아내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죠. 원론적으로 목회자로 부름 받은 사람은 남편이잖아요. 남편이 목회자로 부름 받았고, 나는 주체적으로 신앙생활할 권리가 있다면 직장생활하는 것이, 심지어 어느 예배에 나가고 안 나가고 하는 것이 나 개인의 선택이죠. 이 당연한 말을 하는 거예요. 세상 어느 여성이 남편 직업에 따라 자기 일과 삶을 이 정도로 지배받을까요? 저는 주일에 타 교회 강의가 있으면 다른 곳에 가서 예배드리게 되기도 하고, 수요예배 등은 안 나가기도 하거든요. 제가 이런 식의 교회 생활을 계속하려면, 아마 저희 남편은 한국의 많은 교회에서 요구하는 목회를 포기해야 할 거예요. 남편에게 고맙고 미안한데요. 큰 교회를 목회하기는 틀렸다고 농담하곤 하죠.(웃음) 목회자 아내의 기본적인 인권을 지키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가 있다는 뜻이기도 해요.

목회자 아내가 이런 구조에서 오롯이 본인답게 신앙생활하기 위해서는 목회자의 역할도 필요하다는 말씀이네요.
현실적으로 ‘결단’이라고 할 만한 수준이 필요한 것 같아요. 아내를 위한 교회의 부당한 요구를 일차적으로 막아줘야 하니까요. 당연히 핍박받을 수도 있고요. 제 경험에서도 사모가 왜 새벽기도 안 나오냐, 이런 얘길 먼저 목회자인 남편이 들어야 했고요. 남편이 당하는 일을 아니까 새벽에 일어나 억지로 교회에 가려 하면 남편이 그렇게 말해줬어요. “당신이 기도하고 싶으면 가, 그 이유가 아니라면 가지 마”라고요. 정말 고마웠죠. 그런데 이건 궁극적으로 목회자인 남편 자신을 위한 결단이기도 하단 생각이 들어요. 자신이 자기답게 목회하기 위해 누구도 수단 삼지 않겠다, 가장 가까운 아내와 가족부터 목회의 수단으로 삼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거든요. 그게 자기 발로 서는 목회일 텐데 쉽지 않죠. 제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목회자 아내가 된 후 신앙 사춘기를 겪고, 그 와중에도 교회에서 할 일은 다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웃음) 지금까지 교회를 떠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붙잡아준 건 무엇일까요.
저는 교회를 떠날 수 없어요. 저는 교회를 사랑해요. 신앙 사춘기로 앞이 안 보이는 캄캄한 시절이라고 느꼈던 때, 아빌라의 테레사라는 중세 여성 신비가를 만났어요. 자서전을 보니 저랑 비슷한 면이 많으셨어요. 에니어그램 유형도 같은 것 같고요.(웃음) 《영혼의 성》(바오로딸)이라는 그분의 유명한 저서를 통해 깊은 영성 안내를 받기도 했지만요. 성녀가 사시던 시대 상황과 선택을 보며 감동받은 바가 있어요. 종교개혁 즈음에 태어나셨어요. 타락할 대로 타락한 가톨릭교회와 수도원 안에서 자라신 거죠.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통해 바깥으로 나왔다면, 테레사 성녀는 루터와 다르지 않은 문제의식을 갖고 부패한 수도원을 개혁했어요. 기존에 있던 가르멜 수도회를 개혁하여 ‘맨발의 가르멜 수녀회’를 창설했어요. 개혁의 유일한 길을 예수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여겼기에, 가난과 청빈의 삶을 위해 실제로 맨발로 평생 살아가기로 했죠. 종교개혁 당시 제가 가톨릭교회 안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한번 생각해봤어요. 본질과 멀어져 부패한 교회를 끌어안고 내부 개혁자로 사신 테레사 수녀의 마음이 가까이 느껴져요. 저는 지금도 교회를 사랑하고, 무너진 교회라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걸 알아요.

에니어그램을 통해 자기 내면과 영성을 돌아보는 강좌도 진행하셨습니다.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에서 에니어그램으로 영적 여정의 문을 연다고 할 수 있어요. 영성이 다름 아닌 ‘하나님 성품을 살아내는 것’ ‘하나님 형상을 담은 고유한 나를 꽃피우고 사는 것’이라고 할 때, 자기 인식이 선행되어야 해요. 에니어그램이 그 시작을 도와주고요. 연구소에서 ‘영성’을 대놓고 표방하지는 않아요. 영성을 살고자 하는 비목회자 여성 다섯이 일군 공동체예요. 상담 공부한 사람들이 모여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발견하고, 서로 공부하고 자라가면서 상담과 강의를 통해 오시는 분들을 도우려고 해요. 신앙 사춘기를 겪고 자기 발로 서는 신앙을 더듬는 분들이 찾아와 연결되기도 하고요.
13세기 베긴(Beguine)이라는 여성 공동체가 있었어요. 특이한 점이 있어요. 창시자도, 예규도 없는 느슨한 공동체였어요. 당시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수도원으로 가서 수녀가 되거나 결혼하는 일이었는데, 수도원에 가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어요. 그런 시절에 수녀가 되지 않았더라도 정말 예수님께 자기 삶을 봉헌하고 싶은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구성한 거죠. 결혼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출가해도 되고 자기 집에 살아도 됐어요. 오직 예수님을 향한 사랑으로, 그분처럼 살고 싶어서 사회 가장 낮은 곳으로 모여들었던 거죠. 한센병 환자를 예수님처럼 돌보며 삶과 영성을 살아냈어요. 남성들이 이런 공동체를 만들 수 있었을까요. 여성들이 모였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고, 지금 여기에서도 그런 여성 공동체를 작게 만들면서 살고 싶어요.

진행 정민호 기자 pushingho@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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