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게 텀블러를 선물했다. 카페에 갔는데 “텀블러 예쁘다.” 하며 만지작거리는 걸 봤다. 그런가 보다 하고 나왔는데, 아까 그 텀블러가 예쁘지 않았냐 묻는다. 어머, 이건 사줘야 해! 다음 날 그 카페에 가서 바로 그 텀블러를 샀다. 물욕이라곤 없는 사람(이 세상에 있겠냐만)이라 자신을 위해 뭘 살 줄을 모른다. 소유하려 하질 않아서 그렇지 미적 감각은 있다. 예뻐라, 하는 걸 가지도록 하고 싶었다.

이 얘기를 들은 채윤이는 "촴나, 뭐 운전해 줘서 대가로 주는 거야? 자기 휴가에 무슨 운전을 해주고 그래." 했다. 남해 여행 후 이틀이 남았었고, 그 이틀 저녁 모두 나는 강의 약속이 있었다. 금요일 밤에 비가 오고 운전할 길은 멀어서 부담이 컸는데 남편이 운전해서 같이 가주겠단다. 몸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음 편하게 다녀올 수 있었다. 다음 날 저녁에도 "또 같이 가면 안 돼?" 했더니 선뜻 그러겠단다. 휴가엔 늘 하루 이틀을 남겨 자기만의 시간을 갖곤 하는 JP이다. 은사님을 찾아뵙든지, 다니던 신학교 도서관에 가 앉아 있다 오든지, 혼자 드라이브를 가든지. 하반기 목회를 위해 나름의 골방 시간을 갖는 것이다. 코로나 후유증으로 생긴 피부 발진으로 여의치가 않았다. 약기운 때문인지 밥 먹고 책 좀 보다 자고... 이렇게 보내다 저녁 시간은 김기사를 자처한 것이다. 고마웠다. 큰 힘이 되었다. 정말 고마웠는데, 단지 그 때문에 텀블러 선물을 한 것은 아니다.

내가 강의하는 동안 근처 카페에서 책을 보며 기다리곤 하는데, 둘째 날 강의 마치고 만났는데 양손에 검은 봉지가 한 가득이다. 뭣인가 했더니... 작은 시장이 있어서 장을 봤단다. 와, 김종필이 스스로 장을 봤다고? "당신한테 혼날 수도 있어. 수박이고 뭐고 다 너무 싸서 안 좋은 것일 수도 있어." 안 좋아도 좋아할 거다!!! 내가 좋아하는 수박, 체질 식단 하느라 본인이 먹을 단호박... 등을 알.아.서. 사다니. 어떤 남편들에겐 흔한 일일 수 있으나, 김종필에겐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였다. 몇 년 전 집안을 휩쓸었던 페미니즘 논쟁, 집안일 논쟁 때가 생각난다. 아침 식사, 장 봐서 식재료 준비하는 일 같은 걸로 시작하여 속초 1박 여행을 갔다 싸우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여성과 남성의 일이 구별 없다는 원칙에 100% 동의하는 페미니스트를 자처하지만(나도 그건 100% 인정), 몸에 밴 것은 원칙과 상충하니 본인도 답답하고 나는 화가 났었다. 이제야 이렇게 몇 문장으로 할 수 있지만 보통 복잡한 감정이 아니었었다. 눈앞의 시장을 놓치지 않고, 싼 가격에 장 볼 기회를 놓치지 않는 정신! 이것은 정말 엄청난 변화이며 성장이다.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일이다.

얼마 전에는 그런 일도 있었다. 묵은지를 주문했는데, 내가 1박으로 어디 다녀오는 날에 택배 도착 문자를 받았다. 스티로폼 박스에 담겨 왔을 텐데, 내가 집에 가야 냉장고에 넣을 수 있을 텐데... 조금 조바심이 났다. 집에 돌아와 자기 전에 생각해 보니 김치 택배가 안 온 것이다. 뭐야? "낮에 택배 온 것 없어? 스티로폼 박스!" "김치 택배 와서 내가 통에 담아 김치 냉장고에 넣었는데..." 와, 거기서도 한 번 감동! 어려운 철학 책 읽는 지적 감각은 뛰어나지만 그에 미치지 못하는 생활의 감각으로 내 얼마나 속을 끓였던가. 끓이다 끓이다 남편를 볶아대고… 아, 끓이고 볶던 시간들이여. 이 역시 사소하지만 사소한 일이 아니다.

함께 쓴 책 『와우결혼:와서 보라 우리의 결혼을』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라는 말을 함께 했었다. 결혼 5, 6년 차 때였던 것 같다. 다시 생각해보면,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도 사랑이다. 사랑의 시작이다. 변하지 않으면 사랑이 사람 죽이는 사달이 난다. "내가 줄 수 있고, 주고 싶은 것"에서 "네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으로 관점이 변하지 않으면. 결국 성장의 문제이다. 사랑은 행복의 문제가 아니라 성장의 문제이다. 사랑 안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은 객관적이기 어렵다. 사랑하는 두 사람의 관계 안에서 감지되고 측정되는 양과 질이 있는 것이다. 남편의 성장에 감사한다. 쓰다 보니 텀블러 하나에 이런 마음,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한 여자에게 괴롭힘 당한 한 남자의 성장 이야기가 담겨 있다. 무려 23년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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