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 사춘기 · 저자 · 분노 · 슬픔 · 시간 · 정신실


강의 제목을 오래 들여다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제목에 담긴 단어를 곱씹다 풀어 헤쳐본다. 내가 하고 싶은,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정리가 된다. 요즘은 좀 이런 식으로 하고 있다. 분노를 위한 시간, 슬픔을 위한 시간』 썩 마음에 드는 제목을 뽑았다. 통, 하고 튀어 나와 의식 안으로 떨어진 순간, 됐다! 강의 준비 끝났다! 싶었다. 내가 하고픈, 할 수 있는 얘기는 바로 이것이다. 게다가 포스터가 마음에 든다. 


 <신앙 사춘기>의 주요 독자가 이러이러한 이들일 줄 알았다. 예상이 빗나가 저러저러한 분들이 더 크게 호응을 하셨다. 한 편 한 편 구체적 얼굴을 떠올리며 글을 썼고, 상상했던 독자층이 있는데 어쩐지 빗나가고 있다. 생각지 못한 분들께 뜨거운 공감을 받기도 한다. "아니, 이 글을 언제 쓰셨어요? 우리 교회 얘기를 그대로 다 쓴 거 아녜요?" 노 장로님이 하신 말씀인데, 심지어 이 교회는 이단으로 알려진 교회이다.(최근에 배임 횡령 혐으로 징역 3년 형을 받은 목사) 물론 바로 그 교회 개혁을 위해 싸우고 있는 분들이다. 


교회 개혁에 관한 한 직간접적으로 무수한 경험을 했다. 그 경험으로 '신앙 사춘기'를 쓸 수 밖에 없었다. 경험적으로 상상되는 그림이 있다. 내겐 가장 아프고 안타까운 부분이며, '신앙 사춘기'를 눈물로 쓸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교회 개혁의 기치를 내건 건강한 작은 교회에 관심도 애정도 많다. 교회로 인해 고난을 겪고 광야로 내몰린 교인들이 마지막으로 남은 힘을 모아 일군 교회가 아닌가 싶어서 그렇다. 흔한 교회 사태를 겪은 후에 어떤 이들은 기독교 신앙을 떠난다. 또 신앙은 더 절절하되 밝아진 귀와 눈 때문에 어느 교회도 나갈 수 없는 이들도 있다. 자포자기식으로 아무데나 가까운 교회로 가 선데이 크리스천을 자처하기도 한다. 그중 가장 적극적인 선택 중 하나일 것이다. 바라고 꿈꾸는 그 좋은 교회를 우리 손으로 만들자! 이런 교회들에 마음이 간다. 당연히 끌린다. 정말 잘 됐으면 싶다. 교회가 무너진 시대 마지막 희망의 보루로 여겨진다. 그 교회들에서 일어나는 일에 귀가 커진다.

 

그러나 어쩐지 갈수록 우려가 깊어진다. 보란 듯이 잘 되어야(?) 건강한교회가 잘 되고 있다는 얘기를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언론이나 SNS에 비치는 것처럼 건강하지도, 공동체적이지도 않은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된다. ‘건강함을 표방하는 교회들의 아픈 사람을 많이 만나는 탓이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목회자는 물론 어떤 권위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사유하며 교회의 주인 되기로 한 이들이 만든 공동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은혜로, 기도로덮다 악까지 덮어버리는 획일화 된 집단보다는 갈등이 있는 공동체가 더 은혜로울 수도 있다. 갈등이 있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헌데, 그럼에도 나는 건강한 교회의 건강을 묻고, 안녕을 묻게 된다. 자꾸 묻게 된다. 갈등하고 논쟁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다고 교회의 온전함이 거기에만 달린 것은 아니다


 <신앙 사춘기> '건강한 교회 아픈 사람들' 중

이런 분들의 건강, 진정한 의미의 건강을 기도하게 된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공감 독자들을 만나 강의를 하고 조금 놀랐다. '우리 성도들 너무 많이 아픕니다. 정말 치유가 필요합니다' 강의 요청하신 리더들이 수도 없이 하신 말씀이다. 어떻게 아프실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익히 보아온 사춘기 교인들의 흔한 태도가 있지 않은가. 게다가 싸움이 진행 중이며 싸움의 대상은 독재자에 가까운 목회자이니, 이러이러한 긴장, 냉소가 흐르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예상이 빗나갔는데 완전히 빗나갔다. 긴장과 냉소 대신 여유라니, 이런 여유라니!


강의 앞뒤로 나눈 대화에서 일정 정도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여유의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아니, 몇 가지 이유를 찾았다 해도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내가 상상하는 것이 무엇이든 얼굴을 마주한 만남은 항상 상상 그 이상이라고 말하는 편이 좋겠다.  


예상은 빗나갔지만 꼭 하고 싶었던 말을 잘 전하고 왔다. 능력의 종이 안수기도 한 번 한다고 치유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일어날 수도 있다.) 치유를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다른 말로 하면 '성장'을 위해서도 시간이 필요하다. 사춘기 아이가 눈 한 번 감았단 뜬다고 어른 되는 것이 아니다. 엄마로선 속이 터져 미쳐 죽어버리겠지만 할 만큼 해야, 충분히 해야 끝이 난다. 충분히 분노하되 분노의 대상을 명확히 하여 이름 붙이고,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이름 붙여 애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분노를 위한 시간, 슬픔을 위한 시간.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시간, 내게 필요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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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1월에 시작한 개소식이 ‘계속식’으로 변신했습니다. 어렵사리 시간 잡아 찾아주시는 분들과 드문드문 계속식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찾으시는 분, 연구소 형편 때문에 약속 한 번 잡기는 정말로 어렵지만요. 개소식이라고 와서 시루떡 먹는 대신 잠시라도 일상에서 물러나 나로 머무는 시간을 기획했었지요. 반복하다보니 개소식의 편하지만 가볍지 않은 수다 주제는 '나에게도 마음이 있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로 모아지는 것 같습니다. 다녀가서 전해주시는 말씀이 짧지만 ‘힐링’의 시간이었다고들 하시니 보람이 있습니다. 실은, 맞이하는 저희에게 힐링의 시간입니다. 더욱 특별한 힐링타임 계속식이 있었습니다.

연구소의 시작은 길게 잡으면 25,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나리쌤이라 불리는 정신실 소장, 별쌤이라 불리는 김하정 연구원이 스물 몇이던 시절에 씨앗이 심겨졌던 것 같습니다. 한 교회 청년부에서 만났습니다. 둘 다 학부 전공 버리고 사람 돕는 일을 직접적으로 하고 싶어 대학원 준비하던 시절에 만났거든요. 가난하고 지질하고, 가진 꿈이란 것이 막연하고 허황되게만 보이던 시절이었지요.

나이 오십 즈음에 문득 돌아보니 그 시절 꾸던 막연하던 꿈이 외형적으론 이루어져 있군요. 꿈은★이루어진다. 심리치료와 상담으로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 수 있었던 두 사람이 마음성장연구소까지 차리게 된 사연에는 ‘신앙 사춘기’가 있습니다. 청년 시절부터 몸을 불사르던 교회, 그 교회가 채워주지 못하는 목마름에 힘겨워진 것입니다. 별쌤의 고백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에 가는데 설교를 듣다보면 그저 ‘혼나는 느낌’인 그런 느낌. 나리쌤의 고백처럼 일상에선 하나님이 보이는데 예배에만 가면 그 하나님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막막함. 둘 다 교회를 떠나왔습니다. 처한 상황이 다르니 한 사람은 몸으로, 한 사람은 마음으로. 

마음의 고향 같은 교회는 떠났지만 하나님을 떠날 순 없어서 둘은 영성 공부에 매진했지요. 자기 하나님을 찾는 지난한 시간이었습니다. 공부한 것에, 경험을 더하고, 거기에 하나님을 찾는 갈망을 더하여 함께 하는 시간 속에 ‘심리’와 ‘영성’에 다리 놓는 연구소를 꿈꾸게 된 것이지요. 꿈은★이루어진다.

이러는 중에도 떠나온 교회에 대한 그리움은 어쩔 수 없습니다. 아픈 마음으로 떠나와 상실감으로 남았지만 우리의 젊은 날 신앙과 열정의 기억이 머무르는 곳이지요. 한때 마음을 나누며 함께 울고 웃었던 이들이 남아 있고요. 바로! 그분들이 연구소에 찾아주셨습니다. 교회 가는 기쁨이 있었고, 공동체의 소망을 맛보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분들이죠. 10년을 훌쩍 뛰어 넘는 시간이 무색하게 즐겁고 따뜻한 시간이었습니다. 연결됨! 못과 못 사이를 가로지르는 저 빨간 실처럼 우리는 정말 연결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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