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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마음의 환대

어쩌다 어른

larinari 2017. 10. 27. 11:37




여러분은 별로 놀라지 않으시겠으나 깜짝 놀랄 일이 내게 일어났다.

잘 우러난 사골국물을 맛있게 먹은 아침이었다.

사골 우러내는 고소함에 취해 잠든 식구들이 모처럼 다같이 일찍 일어났다.

넷이 둘러앉아 냠냠짭쨥 후루룩후루룩 맛있게 먹었는데.

내가 말이다, 국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반 백 년 인생 동안 국, 특히 파가 들어 국을 먹고 깔끔한 바닥을 본 일이 없다.

늘 최후까지 살아 남는 파. 

그렇다. 파를 못 먹는다. 어릴 적엔 아예 못 먹었다.

어른이 되어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씹지 않고 숨쉬지 않고 넘기는 것으로.

헌데 이날 아침 아무렇지 않게, 전혀 이물감 느끼지 않고 파와 밥을 함께 떠 먹었다.

다 먹고나서 깨달았다. 깜짝 놀랐다.

전자동으로 파와 파 사이를 비켜서 밥알만 뜨는 신공이 50여 년인데.

(태어나자마자 숟갈질 했다 치고)

흰밥과 초록파를 차별없이 뚝뚝 떠서 입에 넣고 냠냠짭짭 씹었다니!


엄마의 주제가 이런 데 차마 아이들에게 '편식하지 마라' 소리를 못한다.

아이들과 함께 밥 먹을 때 남은 파는 조용히 숟가락 아래 숨기는 신공을 발휘할 뿐이다.

내가 파를 아무렇지 않게 먹다니! 탄성을 지르고 싶었으나,

그러려면 그동안 파를 먹지 않았다는 고백을 먼저 해야 하니 꾹 참았다.

남편과 단둘이 있을 때 말했다.

"여보,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났어. 내가 아침에 파를 다 먹었어. 그것도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그냥!

당신 모르지? 내가 전에 부모님과 살 때부터 숟가락 밑에 파 감추고 그랬던 거"

"왜 몰라, 내가 먹어주기도 하고 그랬는데"

라고 말하지만 남편은 내게 일어난 이 어마어마한 일에 심드렁하다.


나 어쩌다 어른이 된 것 같다.

2017년 단풍이 곱게 물들어 가는 어느 가을 아침에,

나 사골국에 밥 말에 깨끗하게 배우고 어른이 되었다.

어쩌다 어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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