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갯불에 잡채를 해봤다. 집에 오는 길에 재빠르게 장을 봤다. 당근 하나, 시금치 한 단,  파프리카 하나를 샀다. 당면을 삶고 야채를 따로 볶는 과정 없이 막막 만들었다. (간편 잡채 만들기 영상을 여러 번 본 터라 그냥 막 만들어졌다.) 딱히 밥 생각 없었던 채윤이는 금요 기도회 반주하러 금방 나간다더니 '잡채'에 낚여서 미적거렸다. "오, 잘했는데! 딱 잡채 맛이야!" 하면서 산더미 같은 잡채를 먹어 치우고 나갔다. 그렇지! 잡채가 잡채 맛이면 된 거지! 스터디 카페에서 돌아온 현승이는 잡채밥 산더미를 해치웠다. 셋이서 각 '일인일산더미잡채' 했더니 JP 몫이 없네. 금요기도회 마치고 와서 잡채를 먹어봐야 배만 나오니까. 

 

괜히 갑자기 잡채를 한 게 아니다. 전날 반찬가게에 갔는데 예의 그 반찬가게 식 호객 행위가 있었다. "잡채 한 번 잡숴봐. 금방 해서 맛있어요." 시식 한 입 했는데 과연 맛있었다. 그런데 너무 비싸. 코딱지 만큼 놓고 오천 원이라니. "잡채는 안 하셔?" 하는 압력을 뿌리치고 나왔더니 결핍감이 남아 있긴 했던 것. 하지만 이것만은 아니다.

 

오전 일정이 천안에 있는 대안학교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작가의 삶, 글쓰기를 주제로 초대를 받았는데  큰 기대가 없었다. 전업 작가도 아니고, 청소년들에게 읽힐 책을 쓴 것도 아니고. 막상 가서 얘길 나누다 보니 준비되지 않은, 그러나 내 안에 있던 얘기가 나와서 신이 났다. 대안학교 친구들의 가장 큰 특징은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훈련된 태도인 것 같은데, 질문을 잘한다. 좋은 질문은 좋은 답을 끌어내기 마련이다. 

 

글감은 어디서 찾으세요?

주로 언제 글을 쓰세요?

책을 쓰면 돈은 얼마나 벌어요?

책 한 권 쓰는데 걸리는 시간은요?

글쓰기가 힘들었던 적은 없어요?

 

글감은 어디서 얻느냐는 질문에 '지금'이라고 말했다. 일상, 지금 이 순간이 글쓰기의 재료가 된다고 말했다. 당장 천안까지 오는 동안 동생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곧 마감인 글에 쓸 좋은 소재를 얻었다고 했다. 매 순간이 글감이라고 했다. 마지막 질문을 하라고 했더니 "인생의 가치를 어디서 찾으세요?"란다. 오호, 이 친구들 내공 보게! 1초도 망설임 없이 "지금 이 순간!"이라고 했다. 인생의 가치는 지금 이 순간을 기쁘고 소중하게 누리는 것에 있다고 말했다. 지금 친구들과 글쓰기 얘기하는 이것이 내 인생의 가치라고 했다. 즉흥적으로 나온 말이고 또한 진실이다. 내 글쓰기는 순간순간, 즉 일상의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에서 나온다. 특히 실패! 그리고 존재에 달라붙은 결핍과 상실의 감각들. 친구들의 질문이 글 쓰고 사는 나를 돌아보는 자리에 세웠다. 

 

이 프로젝트의 이름이 '잡채:JOB을 갖고 세상의 필요를 우는'이었다. 프레드릭 뷰크너의 소명에 대한 정의에서 따왔지 싶다. 집에 오는 길에 재빠르게 장을 봐서 번갯불에 잡채를 만든 건 바로 이 'JOB채'에서 불러일으켜진 식욕 또는 창작욕이었다. 채윤이가 갑자기 잡채를 왜 하냐 묻는데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엄마가 오전에 갔던 강의 제목이 잡채였어. 그래서 잡채를 만들었어...."라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글감을 얻는 것도, 인생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도 지금 이 순간이라는 뜻이 담긴 지금 이 순간의 잡채이다. 먹고 없어지면 다음 사람은 먹을 수 없는 지금 이 순간의 잡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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