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은이가 논문을 보내왔다. '우수 논문상'을 받은 논문이다. 우수 논문상을 받았다는데 놀랍지가 않다. 당연히, 예은이가 논문을 썼는데 그 정도 상은 졸업장 받는 일과 다르지 않지! 논문 표지를 보니 아득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잊고 싶은 부끄러움, 내 논문 생각이 난다. 예은이가 내 후배로 졸업을 한 것이다. 벌써 후배가 되었지만, 예은이의 입학이 썩 기쁘지가 않았었다. 엄마 돌아가시고 바로 팬데믹으로 멈춘 음악치료를 영영 멈추기로 마음먹었다. 치료를 접으니 20년 넘게 밥줄이었던 악기들이 처분 대상이 되었다. 당근이든 어디든 팔고자 하면 팔 수 있겠으나, 마음과 몸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생각나는 후배가 있었고, 어쩌면 예은이에게 그대로 다 물려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예은이 입학이 기쁘지 않았던 이유로 덥석 주지 못하고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예은이를 만난 게 내 나이 스물여섯, 예은이는 아마 다서 여섯 살이었을 것이다. 어찌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또 나를 어찌나 잘 따르는지. 다이어리에 예은이 사진을 끼워 넣고 다녔다. 전교인 수련회에 가면 엄마 대신 내 옆에서 잠을 자려했고, 청년부 모임에 따라오고, 내 옆에 앉아 어른 예배를 드리기도 했었다. 유초등부에 들어왔는데, 예은이를 성가대 시키고 싶어서 성가대원 학년 기준을 낮춰 버렸다. 3학년(4학년?)이 되어야 성가대를 세웠는데 이런저런 이유를 달아 1학년으로 낮췄던 기억이다. 내 결혼식 축가에서는 귀엽고 깜찍하게 솔로를 했다.
 
중등부가 된 어느 날 학교 숙제라면서 나를 인터뷰하겠다고 찾아왔다. 직업에 관한 숙제였는지, (당시에는 흔하지 않았던) 음악치료사에 대해 조사하겠노라고. 교회 본당 구석에서 인터뷰당했던 기억이 있다. 예은이는 음악도 공부도 다 잘했다. 음악을 하고 싶어 했는데, 진로 문제로 만나서 얘기를 나눈 기억도 있다. 공부를 잘했기에 좋은 대학에 좋은 학과에 진학했고... 학부를 마치고 뚝딱뚝딱하더니 덜컥 음악으로 대학원에 합격해 버렸다. 쉬운 일이 아닌 게 예은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논문을 썼는데 우수 논문상 받았다는 것이 당연지사처럼, 그 어려운 일이 예은이니까 가능하구나 싶었다. 그렇게 석사를 마치더니 어느 날 갑자기 음악치료대학원에 입학했다는 것이다. 
 
공부도 잘하고 음악도 잘하는 예은이가 왜 하필 음악치료? 하는 마음이었다. 공부 못하고 음악 못하는 사람이 음악치료를 한다는 뜻은 아닌데... 나도 공부 잘하고 음악도 잘하는데 음악치료를 한 걸! 내 자신에겐 억누른 어떤 욕망이 투사된 건지 모르겠다. 왜 하필 돈도 안 되는 치료 일을 하려고 해? 공부도 잘하고 음악도 잘하는데 돈이 되는 번듯한 일을 해야지. 아니면, 내 콤플렉스가 투사되었는지 모른다. 노마드 전공 콤플렉스랄까? 예은이는 그러지 말았으면. 뭘 해도 잘할 건데, 한 우물을 파며 보란 듯 번듯한 무엇인가가 되었으면 싶었는지 모르겠다. 음악치료대학원에 가도 안 봐도 잘할 거였고, 당연히 잘했다. 공부와 병행하며 하는 일도 무엇이든 잘했다. 진로나 생의 중요한 일들로 찾아와 얘기 나눌 때마다 진심의 지지와 격려를 주곤 했는데, 음악치료를 시작했을 때는 하라고, 한 우물을 파서 '성공' 하라고 나무라고 그랬던 것 같다.
 
올 초 어느 날, 치료 악기를 모두 예은이에게 넘겼다. 예은이가 음악치료를 해도 좋고, 다른 무엇을 해도 좋겠는 마음이 되었달까. 인생의 갈림길에서 곁길로 가고 또 새로 난 길로 가면서 예은이 고유의 시간을 살 거라는 믿음의 발로일까 싶기도 하고. 그래도 괜찮다는 마음. 크고 작은 삶의 위기를 겪어내는 모습을 오래 지켜보면서 단단해지고 자기다워지는 예은이를 오래 보아왔기에 물 흐르듯 흘러가다 생긴 마음이다. 어쨌든 아주 가볍게 악기를 넘겼다. 악기로 꾸민 방 사진을 보니 기분 좋은 확신으로 마음이 더욱 편했다. 
 
SNS에서 본 음악치료대학원 졸업식 사진에 뭉클했다. 한 존재를 오래 보고 자세히 보고 깊이 알아온, 먼저 난 사람만이 아는 은밀한 환희 같은 것이다. 논문이 담긴 택배 상자에 이것저것 선물이 함께 담겨왔다. 축하를 받아야 할 사람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해 받으니 이 또한 뭉클하다. 예은이가 처음엔 나를 '정신실 先生님'이라 불렀는데, 어느 때부턴가 '사모님'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청년부가 되었을 때는, 남편이 처음 전임사역으로 청년부 강도사님이었었지. 그러니까 예은이는 남편의 제자이기도, 남편이 아꼈던 찬양팀 리더이기도 하다.

 

먼저 나고, 먼저 살면서 뒤에 오는 존재들이 자기로 무르익어 가는 것을 보는 것이 큰 기쁨이다. 세월이 가는 것이 참 좋다. 세월과 함께 무르익는 오랜 만남들로 삶의 의미가 새로워진다. 고맙고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예은이에게 한 마디 했다.

 

예은아, 박사과정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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