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전 세 시간 줌 강의, JP는 그 시간에 결혼식, 그리고 저녁에는 둘이 함께 장례예배. 이런 일정 사이에 끼인 토요일 오후였다. 빡빡한 일정 속에 오아시스 같은 짧은 만남이었는데... 두리와 영주를 오랜만에 보는 거였다. 얼마나 오랜만인가 하면, 전에 만났을 때는 없던 생명체들이 생겨 인격의 모양을 또렷하게 드러내게 된 세월이다. 두리와 영주는 학부모가 되었고. 현승이를 '내복 왕자'로 기억하는 누나들이 그때 현승이 만한 아이들을 키우고 있으니 흘러버린 이 세월이란. 명일동 빠바 이층에 앉아 소개팅과 결혼을 논하며 막막하던 그 시절을 떠올리자니, 거대한 세월의 몸집과 존재감이다.

 

우리 교회에서 보기로 했는데. 강의 마치고 이동하는 짧은 순간, 머리에서 불이 날 정도의 회전이었다. 간식으로 뭘 준비하면 아이들의 인기를 얻을 수 있을까? 그 짧은 시간에 말이다. 진심 거의 기도하면서 움직였...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무엇인가를 만나기를! 빵을 사러 갔는데 뽀로로 쿠기가 있는 것 아닌가. 진짜 쾌재를 불렀다. 됐어, 됐어! 뽀로로는 대통령이니까! 처음 보는 늙은 이모로서 인기는 이미 따놓은 거야. 뽀로로니까!.... ㅜㅜ 혼자 행복했던 그 순간으로 족한 걸로. 아이들에게는 심드렁~그.냥.쿠.키...였다. 유아실의 자동차와 장난감의 인기에 지고 말았다. 괜찮아. 상상 속에서 행복했잖아... 

 

그 짧은 시간 많은 주제를 건드려봤다. 학부모 고충, 아이들 성격 이야기, 일하며 육아하는 이야기, 신앙 생활화 공동체 이야기... 영주가 꼭 물어볼 것이 있다면서 요즘 꾸는 꿈 얘기를 했고. 그 끝에 "모님, 제가 결혼하기 전에 모님과 꿈으로 얘기할 때요. 제가 정말 불안해했었잖아요. 그때 모님이 안심하라고, 안심하고 결혼하고 문제가 생기면 모님이 평생 AS 해주시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런 확신을 어떻게 가지셨어요?"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그랬던 것도 같다. 아무리 그래도 평생 AS를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그랬던 것 같다. 그러게... 그 확신이 어디서 왔을까?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고 내내 그 질문이 맴돈다. 아마도 그것은 영주에 대한 확신이었다. 영주 안에 있는 힘, 행복하고자 하고 성장하고자 하는 힘에 대한 확신이었으며, 영주 안에서 영주를 돕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었을 것이다. (물론 예비 신랑을 이미 보았기에 근거가 충분한 확신이기도 하고!) 그 확신 틀리지 않아서 모님의 AS 필요 없이 잘 살고 있으니 할렐루야 아멘이다.  가정을 일구어 잘 살아내는 것이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두리도 영주도 잘하고 있었다. 잠시 만나봐도, 딱 봐도 알 수 있는 무엇이 있다. 
 
두리와 영주의 젊은 날에 함께 했던 시간이 영광이란 생각이 든다. 모님, 모님 하면서 나를 그냥 따르고 좋아해 줬던,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만나줬던 아이들(이 아니고 지금은 어른)이 참 고맙다. "평생 AS!"를 거침없이 남발할 만큼 내게 확신을 줬던 아이들(아니고 아이들의 엄마), 그만큼 나를 믿어 주었던 이들이 참 고맙다. 인생 그럭저럭 기쁘게 살아갈 원동력이 사랑과 신뢰라면, 그 원동력을 빼앗기고 소진되는 곳이 있다면, 빼앗긴 양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양의 사랑과 신뢰 덕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세월이 가고 늙어가는 내가 다시 이렇게 좋다. 내가 확신했던 '너'들이 단단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을 확인하는 기쁨. 참 고마운 '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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