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더위도 잊을 정도로 심취해서 읽고 있는 책이 있다.

정혜신 이라는 정신과 의사가 쓴 '사람 vs사람' 이라는 책이다.

이 책의 첫 장에는 이명박과 박찬욱 얘기가 '백미러 없는 불도저의 자신감  vs 상향등 없는 크레인의 자존감'이라는 부제로 붙어서 나온다.


이 첫 장을 읽으면서 나는 나의 남편 김종필이 박찬욱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박찬욱이 <올드 보이>로 칸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자리에서 했다는 말이 저자는 '소박하다 못해 의아한 수준'이라고 했다. '로만 폴란스키 같은 거장을 직접 만나 악수를 하고 사진을 찍은 것만 해도 충분히 영광이었다' 며 '위대한 감독들이 경쟁 부문 후보에 많이 올라이렇게 큰 상을 받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기쁨을 나타냈단다.


그러면서 저자는 박찬욱의 이 발언에 대해서 'low self-esteem'에 가깝다고 평을 했다.  'low self-esteem' 즉 '낮은 자존감' 대학원 공부할 때 얼마나 많이 들어본 말인가? 정신과든 특수아동 분야든 '낮은 자존감'은 음악치료의 목적영역 중 빼놓을 수 없는 치료 목적이다.


남편에게 '당신하고 박찬욱이 닮은 데가 있어' 했더니 허허허 웃으면서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며 중학교 때 경험을 하나 얘기해 주었다. 중학교 때 전교 회장을 뽑는 자리에 후보로 올랐단다. 말하자면 정견발표 같은 걸 하는 자리에서,

'나는 이 자리에 선 것 만으로도 영광입니다' 라고 했단다.

박찬욱이 서 있던 자리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두 사람의 반응이 어쩜 이리도 비슷한가? 그렇다. 나도 가끔 남편을  'low self-esteem' 쪽으로 추측해 본 적이 있다.


김종필씨는 도대체 자신에 대해서 떠벌일 줄을 모른다. 나는 내가 운동신경이 지독하게 무디기도 하거니와 때문에 신나게 운동하는 사람들이 너무 너무 부러워서 남자들의 운동에 관심이 많다. 운동을 잘 하는 남자인가? 아닌가?는 내가 남자들을 볼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그런 남자들이 있다. '농구하면 나지. 족구? 내가 잘 하지. 내가 축구 좀 해'하면서 무슨 운동이든 다 잘 한다고 떠벌이는 사람들 말이다. 막상 경기하는 걸 보면 그저 뭐 중간 정도랄까? 잘 봐줘서 중상 정도? 그런 사람이 그렇게 심하게 떠벌이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내 보기에 김종필씨는 못하는 운동이 없다.(최근에 하고 있는 축구는 확실히 썩 잘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렇다 해도 심심치 않게 골을 터뜨리니 아주 못한다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족구, 탁구, 농구, 배드민턴....

내가 눈으로 확인한 건 그 정도다. 사람들이 김종필씨를 보면서 '운동을 디~게 못하는 줄 안다' 몸도 기다랗기만 한데다가 잘 내색도 안 하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 평을 들으면 내가 오히려 흥분이 된다. 남편보다 운동을 못하는 사람들이 그 앞에서 한 수 가르치고 잘난 척을 해도 김종필 자신은 별다른 내색이 없다.


운동 뿐이 아니다. 기타도 한 기타 치고, 찬양 인도도 한 인도 하고, 예전에는 노래 자작곡도 잘 했고, 그만하면 글도 좀 쓰고.....


객관적으로 얼마나 잘 하는지는 나도 알 수 없다. 그저 내가 답답하게 느끼는 것은 김종필씨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 낫다는것이다. 김종필씨에게 있어서 자신은 언제나 '부족한 나'다. 그래서 자랑을 못하는 것 같다. 늘 자기 자신의 기준에 못 미치니까 말이다.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보다 연배가 높은 분들과 함께하는 자리가 가끔 있다. 이런 자리에서 남편을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뭐 또래 모임에서도 말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암튼 더 현저하게 말 수가 주는 것이 사실이다. 논의 되는 주제에 대한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그저 듣기만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유는 그것이다. 나이도 어린 자신이 섣불리 말하는데 끼어들 수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나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좋은 점이 드러나는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는 것 같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저자가 박찬욱에 대해서 하는 말을 보면,

박찬욱은 휘몰아치거나 내세우지 않는다. 스스로가 쑥스러워서 그렇게 못한다. '외면의 자기'가 인정받는 것에 비해 '내면의 자기'를 낮게 평가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겸손과는 조금 다른 얘기다. 일반적인 사람의 평균치보가 더 'low self-esteem' 쪽이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제3자에게 '안전하다'는 느낌을 준다. 스스로 잘 통제하고 있는 사람을 볼 때의 안정감, 자신이 서 있을 지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신뢰감이다.


병리적인 수준의 'low self-esteem'이 아니라면 미덕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주 적절한 자신감을 가지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넘치거나 모자른 수준의 자신감을 가진 사람이 대부분이라면 모자른 자신감이 어쩌면 더 나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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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젊은 나이에 그것도 결혼과 더불어 선교에 헌신한 두 젊은이가 있습니다. 두 사람을 개인적으로 접해보지 않고 이런 얘기만 들으면 대충 상상을 하게 됩니다.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뜨거운, 그래서 입만 열면 선교, 하나님, 비젼...이런 얘기들이 마구 튀어 나올 것만 같은...'그런 젊은이를 상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런 우려을 하게 되기도 하겠죠. '선교가 열정만으로 하는 게 아닌데 말야...' 그렇습니다. 선교는 열정이나 비젼만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저희 목장의 두 선교사님을 통해서 배운 것이지요.^^

2.
진태훈, 오윤선 두 사람은 비슷한 구석이 많습니다. 가장 비슷한 점은 둘 다 '듣기'를 잘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두 사람이 AP목장에 온다고 했을 때 저는 청년부에서 리더를 했고, 선교에 헌신한 두 사람이 목장에 와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까? 하는 생각을 막연히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조용했습니다. 조용히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귀를 쫑끗 세우고 있는 듯한 자세로 앉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얘기할 때 누구보다 열심히 말하는 사람을 쳐다보고 때로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으로'들어주는 자세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말 잘 하는 사람, 말 잘 하는 젊은이는 정말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잘 들어 주는 사람' 특히 '잘 들어 주는 젊은이'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저는 거의 못 만나본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어쩜 그렇게 똑같이 '잘 듣는 사람' 입니다. 누구라도 자신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과 얘기 나누고 싶어할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도 잘 듣는 당신의 자녀에게 당신의 비밀을 더 많이 보여주실 것 같습니다. 저보다 어리지만 정말 배우고 싶고 존경스러운 모습들 입니다.

그러다 자신들의 차례가 되어 나누게 되면 뭐 거창한 선교 얘기를 쏟아 놓지 않습니다. 주중에 남편을 아내를 이해하고 섬기려고 애썼던 얘기들, 선교 훈련을 받으면서 있었던 사소한 얘기들을 합니다. 그러나 희한한 것은 사소한 듯 보이는 그 얘기들 속에 성령님의 일하심이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3.
제가 두 사람을 통해서 배운 너무 소중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말레이시아 선교 훈련을 다녀와서 나눔 시간에 들은 얘기 입니다. 타 문화! 선교사는 결국 타 문화를 향해서 가는 것인데....그 타 문화가 선교지에만 있는 것일까? 두 사람의 깨달음은 No! 였습니다. 실은 가장 가까이 사는 남편과 아내 끼리도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지고 갈등하게 되고, 부대끼는 모든 사람들은 결국 '타문화권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타문화'를 이해하고, 수용하고 끌어 안는 것이 '선교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알았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서 그렇게도 귀히 여기고, 존중하는 모습이 이들에게 있어서는 이미 '선교'라는 것을요.
어쩌면 두 사람의 '잘 듣는 태도'는 이런 마음의 밭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두 사람의 '타문화' 얘기를 듣고 저는 개인적으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부모님의 '타문화'에 대해서 잘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타문화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니, 그 이후로 부모님을 섬기는 일이 한결 쉬워진 것 같습니다.^^

4.
저는 사실 결혼하고 나서 어느 부부를 보면서 '부럽다'는 생각을 잘 해 보지 않았습니다. 이만하면 우리 부부는 서로 많이 이해하고, 수용하고, 사랑하며 산다고 자부하는, 일종의 교만 같은 것이 있었나보죠?^^ 그런데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태도와 마음을 보고 있노라면 부럽다 못해 질투가 느껴집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 그려집니다. 이들이 선교지에 나가서 만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지, 함께 동역하는 선교사님을 어떻게 대할지, 아주 잘 그려집니다.
두 사람은 '인격 선교'로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게 되고 기도합니다.

5.
저는 두 사람의 몽녀여서 행복했습니다. 다른 목원들 역시 목자 목녀를 귀하게 대접해 주시지만 두 사람은 저희의 '권위'를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주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주변에 좋은 멘토들이 많이 있는 것을 알고 있는데 직접 저희에게 물어봐 줍니다. 이럴 때 얼마나 감사하고 몸 둘 바를 모르겠는지...쥐뿔도 모르는 삐리삐리한 목자 목녀의 '권위'를 인정해 주고 언제든 기꺼이 순종하겠다고 하는 태도니까요.
아~ 그래서 같이 훈련 받은 선교사님께서 최종 파송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랬다죠. '제발 이번에는 예예 하고 따르지 말고 너희들에게 편하고 필요한 것을 따져라' 이런 식으로요.(정확한 말은 생각이 잘 안 나는군요^^)

6.
저는 훨씬 더 많은 두 사람의 장점을 알고 있습니다. '아직 젊은 사람들이 성숙하면 얼마나 성숙하겠냐고'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위에 적은 것들은 정말 작은 부분이죠. 더 많이, 더 구체적으로 열거하게 되면 두 사람에게 오히려 부담이 될 것 같아 줄여야겠네요. (이미 이런 공개적인 얘기가 조금이라도 부담이 된다면 그 부분 두 사람에게 미안합니다^^;;)
저는 요즘 마음 한 켠에 늘 조그마한 슬픔이 있습니다. 좋은 사람들과 헤어지기 싫은 아주 자연스러운 그러나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죠. 할 수만 있다면 늘 함께 있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평생을 두고 함께 하고픈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마음 들게 하는 두 사람이 어디 가선들 사람의 마음을 사지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두 사람의 사역은 이미 반 쯤 성공하고 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두 사람의 앞 날에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기도와 마음을 쏟아 축복합니다. 선교지에서 어떤 일을 만나도 좋으신 하나님이 두 사람을 안아서 지켜주시길 기도하고 또한 확신합니다.
두 사람이 네팔을 품은 것처럼 저희 가정과 목장도 함께 네팔을 품겠습니다.

윤선자매! 태훈형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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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 정목사님.
이제 또 다른 정목사님. 정운형 목사님의 시대가 도래하였도다!

생기지도 않은 아들을 놓고 '하나님의 종으로 바치겠습니다.'하고 서원기도 하신 부모님.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이 정해 놓으신 꿈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으로 살아온 동생이다.
마치 자신이 원하는 다른 길을 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조차 '죄'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고자 할 때마다 '어차피 하나님이 쓰실 사람은 결국 쓰시게 되어있다. 어차피 돌아서 돌아서 그 길을 가게 되어있다'하는 말에 올무가 되어 날개조차 펴 보지 못한 꿈들이 허다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이 쓰실 사람은 이렇게 목사 안수를 받고 말았다.

목사님은 무얼하는 사람일까? 목사의 자질은 무엇일까? 나는 평신도로서 어떤 목사를 원하나?
설교? 중요하다. 요즘 나는 설교에 목말라 있다. 들을수록 갈증나는 설교 말고, 한 방 들으면 말씀에 대해서 순종하고픈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는 그런 설교,,,,, 정말이지 듣고 싶다.

꼭 그렇다고 설교만은 아닌 것 같다.

목사가 목자라면, 예수님처럼 양을 먹이는 목자라면 '한 마리의 양'이라도 하찮게 여기지 않는 마음 아닐까?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놔두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마음 말이다. 그리고 양의 필요를 가장 잘 알고, 그 필요를 채우주기로 언제든 준비되어 있는 목자. 그런 면에서 내 동생을 딱 목자이고, 목사이다.

나는 내 동생이 목사인 것이 자랑스럽다. 많은 목사들이 목사란 이름에 부끄럽게 스스로를 '직업'의 하나로 전락시키고 있다고 생각이 될 때 더더욱 그러하다. 설교 한 편을 준비할 때마다 밤을 새우며 산고를 치르듯 하는 모습이 자랑스럽고, '목사'라는 이름으로 성도들을 조금이라도 이용하지 않으려, 정직하려 애쓰는 모습이 자랑스럽고, 무엇보다 탈북자 한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가진 것 무엇이라도 다 주려고 준비된 모습이 자랑스럽다.

그러나 한편, 이렇게 스스로 너무 높은 기준을 가지고 '정직, 사랑, 헌신 결벽증'을 앓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도 된다. 결혼을 앞둔 동생이 '목사로서의 정체성'과 '남편 또는 아버지로서의 정체성'을 어떻게 잘 조화시켜 갈 지가 기대가 되고 또 염려가 된다.

이 모든 과제를 안고 동생은 안수를 받자 마자 홀로 기도하러 떠났다. 마치 예수님이, 사도바울이, 다윗이 광야로 갔던 것 처럼 외롭게 기도하러 떠났다. 그렇게 기도하러 떠난 동생을 바라보면서 왜 이리 마음이 시린지 모르겠다.

아들을 서원하여 드린 것이 또 다른 무슨 죄처럼 매일 밤 눈물의 기도로 아들의 방황과 성숙을 지켜봤던 우리 엄마. 목사 안수를 받는 예배에서 쏟으신 눈물의 의미는 어쩌면 엄마와 하나님 사이의 말할 수 없는 사연일런지도 모르겠다.
그런 엄마의 기도가 있는 한, 동생의 사역이 때로 힘들고 어려울지언정 실패하지는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시간이 많이 자나도 동생의 처음 마음에서 변질되지 않고, 작은 한 영혼을 향한 사랑의 순수함을 지켜 나가고, 무엇보다 그로 인해서 기쁨의 열매를 많이 거두는 그런 앞으로의 나날이 되리라 믿는다.

목사의 길을 가는 내 동생을 온 맘으로 축복하며.....
친구는 친군데.....명선이를 만나면 마냥 의지하고 싶어진다.
예전부터 그랬다. 결혼 전부터 명선이는 마냥 의지하고 싶은 친구였다.

20대 후반에 교회 청년회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 명선이. 명선이를 처음 만난 지 얼마나 지난 다음인지는 모르겠다. 청년회에서 춘천에 놀러가는 일이 있었다. 여러 대의 자가용으로 나눠 타고 갔었고 오는 길에 같은 차에 탔다. 그 때 내가 명선이에게 말하자면 사랑고백을 했는데.....
이렇게 했다.
'너는 사람이 참 담백한 것 같다. 니가 말하면 다 진실인 것 같고 신뢰가 가~' 이렇게.
그랬다. 명선이의 장점은 그런 것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고 걸러지지 않는 말이나 표현을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객관적인 말을 한다. 당장 듣기 좋으라고 하는 허접한 위로가 없어서 명선이가 해주는 상담이 좋았다.

그래서 내가 어떤 일로 혼란스러울 때는 명선이를 찾았다. 그럴 때 명선이의 객관적이고 담백한 말들은 내게 그 어떤 말보다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었다. 그러고보니, JP를 처음 만나 교제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과정에서 늘 명선이가 함께 있었다. 헤어져서 죽을 것 같이 힘들던 그 순간에도 명선이가 곁에 있었다.

'맞아! 음악치료는 너한테 맞겠다.니가 한 번 해 봐' 이렇게 하는 말도 명선이가 하는 말이라서 무게가 있었다. 해서, 명선이의 이 말은 음악치료의 길을 가는데 주저함 없도록 하는 힘이 되어 주었다.
수요예배에 찬양 인도 하면서 어떤 어른으로부터 참기 어려운 모욕을 당했을 때도 명선이가 함께 있었다. 찬양인도 하는 나와 아주 가까운 곳에 마주 보고 앉아서 OHP 가사를 넘겨주면서 순간순간 내게 힘을 주었었다.

30의 고개를 함께 넘으면서 우리는 함께 결혼을 준비했다. 우리에게 적절한 사람이 어떨지에 대한 고민을 내 일 처럼 하고, 소개팅 한 것이 있으면 미주알 고주알 보고하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기도했다.
난 늘 명선이를 생각하면서 이 찬양을 되뇌었다. '따스한 따스한 가정 희망 주신 것 감사' 이 찬양으로 명선이를 축복했다.

어느 새 다섯 살 짜리 딸을 둔 아이 엄마들이 된 우리. 명선이는 볼 때 마다 조금씩 달라져 있다. 가끔씩 만나는 명선이는 '사모님' 이라는 호칭이 썩 잘 어울리고.... 날이 갈수록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단지 새벽기도를 빠짐 없이 하고, 불편한 시골 생활을 기꺼이 하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가까이서 명선이를 지켜본 나는 명선이가 얼마나 독립적인 사람인 지 안다. 명선이의 자취하던 방이 얼마나 깔끔했는지, 인간관계가 얼마나 깔끔하고 담백했는지, 자기관리가 얼마나 칼 같이 되었는지...... 그러면서 웬만한 사람들이 쉽게 그녀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의 명선이는.............
교회와 맞붙은 목사님 사택에 사는 사모님이다. 매주일 명선이 집에서 전교인이 식사를 한다. 주방에는 명선이 살림이 있고 또 교회 살림이 따로 있다. 집안의 가구 배치도 주일 점심식사가 용이하도록 하는 것을 최대한 고려해 놓은 듯 하다. 단지 물리적인 공간만 그러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명선이네 세 식구가 사는 집'이라는 울타리 자체가 없는 듯 하다. 맞다! 울타리! 바로 그거다!
예전의 명선이는 울타리를 분명하게 치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게 없어졌다. 이 부분에 생각이 닿으면 뭔가 뜨거운 것이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차올라와 눈을 통해 나오고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하나님께 헌신하여 삶을 드리겠다고 결단할 수 있다. 삶을 드리겠다는 것은 뭔가? 탁 까놓고 말해서, 삶을 다 드릴 수 있다고 고백하고 찬양하는 것보다 내게 익숙한 작은 습관을 고쳐 헌신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 아닌가? 그래서 진정한 헌신은 후자가 아닌가 말이다. 어쩌면 명선이 자신도 대단치 않게 여길 헌.신. 내 눈에는 달라진 명선이 모습 속에서 바로 그 '헌신'의 모습이 보인다. 그 헌신에 감동 되어 가슴이 뜨거워진다.
며칠 전 명선이를 만나고 온 이후로 감동의 실체가 무엇인지 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답을 얻었다.

명선아!
사랑해!
목사님과 너, 하민이를 위해서 매일 매일 축복하며 기도할께.
너랑 친구인 것이 너무 좋고, 감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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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복상 글을 쓰면서 많이 생각 났던 선배님이다.
'박선생님' 이라고 불러왔다. 박선생님과 박선생님의 부인 되시는 '정신언니'는 내 20대에 너무도 선명하게 흔적을 남긴 분들이다. 난 아직도 이 분들과 보낸 시간들이 그립고, 그립다 못해 마음 한 켠에서 통증을 느낄 때가 있다.

예전에 삼일교회에 다닐 때 선배님들이다. 함께 초등부를 섬겼었다. 정말 신나게 섬겼다.
내 마음에는 '이 분이 말씀하시면 정~말 따를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따르겠다'라고 마음을 정한 분들이 계시다. 몇 안 되는 그런 분 중 한 분이다.

'돈'에 대한 주제로 복상 글을 쓰면서 박선생님이 많이 생각난 것은 이제야 비로소 그 시절 박선생님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박선생님은 가끔 만나서 맛있는 것을 사주셨다. 나 뿐만 아니라 여러 후배들에게 그러셨다. 필요하다고 느껴지면 어떤 후배에게는 용돈을 주기도 하셨던 것 같다.아낌 없이 사 주셨다. 학교를 졸업하고 유치원에 근무하면서 '저도 이제 돈 버니까 제가 사드릴께요'하면 언제나 같은 대답 '니가 나보다 돈 더 많이 벌면 사!' 어렴풋이 박선생님이 늘 넉넉하시진 않으실 거라는 느낌은 있었어도 마음으론 항상 넉넉하게 느껴졌다.

어느 핸가 대학청년부 수련회에서 박선생님이 '돈'에 대한 강의를 하셨다. 기억에 남는 한 두 마디가 있다. '여러분들이 지금 얼마를 벌든 지금 버는 것에서 십일조 하고 구제하지 않으면 더 많이 벌 때는 더 하기 어렵습니다. 아주 적은 것이라고 지금해야 합니다' 그 날 강의에서 나는 그 말씀을 가슴에 새겼던 것 같다. 해서 언제든 '바로 지금' 이라는 부담을 늘 안고 살았던 것 같다.

딴 얘기 같지만....
최근에 목장 분가를 하고 목장을 섬기면서 매주 식사 준비를 한다. 물가가 많이 올라서 식사 준비하는데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다. 식사 준비까지는 어떻게 해 보겠는데 과일부분에서 갈등이었다. 이만원을 육박하는 수박을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렇게 갈등하는 순간 만감이 교차한다. 서글퍼지기도 하고, 약간의 불평도 있는 것 같고....몇 번 이런 생각이 들고 나서 마음을 깨끗하게 정리했다. '내가 못 먹는 한이 있더라도.....당장 채윤이 피아노 렛슨 시키려고 했던 것 좀 유보하는 한이 있더라도! 넉넉한 마음으로 나누자'
그 이후에 목장에 가서 목원들이 식사비 염려를 할 때 '우리가 목자로 헌신할 때는 식사준비며 비용까지 다 헌신한 것이니 맘 편히 가지라'고 말했다. 진정 그러했다. 그리고 목원들이 그런 걱정 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박선생님 생각이 났다. '그 때 박선생님이 넉넉하심이 단순히 물리적인 넉넉함이셨을까?' 자신을 위해서는 검소하셨다는 것을 안다. 자신에 대해서는 검소하지만 후배들을 위해서 언제 어디서나 넉넉하게 베풀어주셨던 그 마음이 이제야 알아진 것이다. 아마도 말 없이 그렇게 베풀어주셨던 그 사랑이 오늘에 와서 깨달아지고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하는 마음 가짐을 가지게 했는 지 모르겠다.

오늘 밤,
삼일교회 마석 기도원과 박선생님, 정신언니 그리고 그 신났던 초등부 성경캠프. 그 시절 박선생님이 사 주시던 맛있는 것들. 그리움이 차올라 눈물이 되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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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부터 하루 한 번씩은 꼭 들었던 기도...
'우리 신실이 에스더 같은 믿음 주시고 우리 운형이 다니엘과 요석(셉)과 같은 믿음 주시옵소서......
새벽별 같이 빛나게 하여 주~씨 옵소서'

그러니까 함 계산해보자.
우리 엄마가 저 기도를 매일 가정예배 드릴 때 마다 했고, 새벽기도 드릴 때마다 했을테고, 금요일 철야기도때마다 했을테니...
36(년) * 365(일) * 2(번) = 26,280 (가정예배, 새벽예배)
36(년) * 52 (주) = 1,872(철야예배)
그 외에 1년에 두 달씩 철야하는 건 빼고라도.....토탈 28,152 번.

우리 엄마가 나를 향해서 '에스더 같은 믿음....새벽별 같이 빛나게....' 이렇게 기도하신 거이 30,000번에 가깝다는 얘기다.

나이 마흔 다섯에 나를 낳고 마흔 일곱에 내 동생을 낳고...내가 중학교 1학년 되는 해에 어버지가 돌아가셨으니 그 때 우리 엄마 심정이 어땠을꼬? 그 때는 아버지 잃은 내 슬픔만 생각했었는데 남편을 잃은, 것두 아직 어린 두 남매를 키워낼 뾰족한 방법도 없이 남겨진 우리 엄마의 심정을 어땠을꼬?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엄마는 우리 남매를 참 잘 키웠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나 자신 엄마가 되고 우리 아이들을 보면서 '니들이 엄마 만큼만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았음 좋겠다. 엄마 만큼만 좋은 사람들 만나고, 엄마 만큼만 소명을 발견하고, 엄마 만큼 좋은 배우자 만나서 기쁘게 살면 좋겠다' 싶으니 말이다.

우리 엄마가 우리를 양육하면서 가진 게 무엇이 있었나? 생각해 보면 정말 그 아무것도 없다. 돈은 물론이거니와 우리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젊은 감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엄마 자신이 많이 배워서 우리를 가르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우리 엄마는 죽으나 사나 예수님 한 분.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성전을 향해 기도하러 올라가는 그 발길. 그것 뿐이었다.

심지어 요즘도 '엄마 나 이번 토요일에 강의해' 하면 다시 전화가 온다. '몇 시에 강의 한다구?' 하고 물으시는데 그건 여지 없이 그 시간에 무릎 꿇고 기도하시겠다는 얘기다. 그렇다. 동생이 학생들 데리고 수련회 가면 그 기간 동안은 금식기도다.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시간 동안 꼼짝 않고 앉아서 기도하시는 게 우리 엄마의 요즘 하시는 일이다.
어렸을 때는 그런 엄마의 신앙을 보면서 '기복적이라느니....'하면서 주제 넘은 판단도 하고 까불어댔지만 대체 내가 그런 우리 엄마의 믿음을10분의 1이라고 따라갈 수 있을까?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아이들에게 어떤 환경을 어떻게 제공해 주어야 할까? 내가 주는 것이 부족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쓸데 없다는 생각이 든다. 대체 우리 엄마보다 내가 가진 것은 얼마나 많은가? 내 머리 속에 양육에 관한 얼마나 많은 데이터들이 입력되어 있는데....나는 우리 아이들과 의사소통하면서 코드를 맞추는 일에 얼마나 전문적인 사람인데....우리 엄마가 날 위해 했듯이 그렇게 기도할 수만 있다면 우리 아이들이 그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행복한 멋찐 사람으로 자랄텐데....

정말....나 정신차려 기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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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딩 때부터 매 년 여름에는 수련회의 추억이 있습니다. 그 수련회의 기억은 나의 성장과 맞물려서 그 해마다 또렷한 빛깔로 분명한 이미지로 남아 있죠. 어느 해랄 것이 없습니다. 중1때부터 결혼하여 청년부를 떠날 때가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세월 동안 유독 수련회를 가지 않은 해가 있었습니다. 1991년 이었던가? 그 전 해 대학청년부 수련회를 다녀와서는 '내년에는 결코 가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었죠. 새로 바뀐 대학청년부 지도 목사님 때문이었고 그 목사님을 추종하는 청년부 임원들이 만드는 분위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그 목사님의 생각은 이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시사저널 같은 잡지를 보는 것은 영을 더럽히는 일이다' 그 때 나는 늘 시사저널을 끼고 다녔었는데 예배 설교 시간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암튼, 그 해 여름에 나는 수련회를 가지 않기로 결심했었습니다. 해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수련회 데려 갈려고 새벽기도를 하고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했던 정신실이 수련회를 가지 않는다고 하자.... 교회 안에서 여러 어른들이 '가당치도 않다'고 말씀하시면서 저를 설득하셨드랬습니다. 그렇게 말씀 하시는 분들은 평소 내가 존경해마지 않았고 나를 너무도 아끼는 분들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더욱 어려웠습니다.

그 때, 유일하게 제 손을 들어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전까지 대학청년부 지도를 하셨던 전도사님. 아마도 지금 돌이켜보면 청년부에게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친다는 괘씸죄에 걸려서 고등부로 좌천되어 가셨던 것 같습니다. 유일하게 내가 왜 그리도 수련회에 가기 싫은 지 그 이유에 대해서 귀 기울여 들어주는 분이었습니다. 그 수련회에 가지 않았고 수련회 기간 동안에 집에서 수련회 하는 마음으로 두꺼운 책 한 권을 독파했습니다(물론 전도사님의 추천으로 말이죠)

이 일을 경험하고부터 나는 전도사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 아무도 내 고통스런 외침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을 때 그 소리를 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귀를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분을 언제나 스.승.님. 이라고 소개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늦은 나이에 대학원 공부를 하게 된 것도 어쩌면 전도사님의 세뇌 때문이었는 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보고 싶은 책도 다 보지 못하시는 넉넉치 않은 살림에 항상 읽어야 할 책들을 선물해 주시고 '공부' 에 대한 끈을 놓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매주 주보에 쓰는 글을 보시면 '글이 살아있다. 물고기가 파다파닥 뛰어 노는 듯 하다' 라고 격려를 하시면 한 주 한 주 글 쓰는 일이 수월해지고 재미가 있어졌습니다. '어쩌면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일지도 몰라'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셨죠.

내가 인생의 시간을 돌려서 다시 한 번 과거로 날아갈 수 있다면 전도사님이 지휘하시는 성가대에서 다시 한 번 바흐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를 불러보는 것입니다. 나는 전도사님께 찬양도 배웠습니다. 찬양하는 사람이 어때야 한다는 것과, 찬양의 대상이 누군인 것도 분명해 배웠습니다. 그리고 지휘도 배웠습니다. 찬양대 지휘자가 음악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배웠을 뿐 아니라 찬양 대원으로 하여금 음악 이상의 것을 드리도록 연습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도 배웠습니다.

'기독교 세계관' 이라는 낯선 단어를 전도사님이 소개하시는 책에서 처음 배우고 그 이후로 나는 그 '기독교 세계관'에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 부부에게 모토가 되고 있는 '오늘 여기서 그 분을 위해'는 바로 그 때 배운 기독교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도사님과 함께 다니던 교회에서 보내 마지막 해에는(전도사님과 몇몇 친구들은 그 정들었던, 사랑하던 교회에서 우리 발로 걸어 나왔지만 사실은 쫓겨난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빡신 제자훈련을 받았습니다. 금요일 밤에 철야를 하면서 리더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밤을 거의 새면서 죤스토트를 비롯해서 많은 책들을 읽고 발제하고 나누고....또 큐티훈련을 받고, 한 사람을 어떻게 끝까지 붙들고 제자 삼는 지에 대해서 공부하고 배웠습니다. 결국 그 리더훈련은 끝도 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어디가 써 먹지도 못하고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다니고 있는 한영교회에 왔습니다.
요즘 목자부부가 되어 사람들을 섬기면서 새삼 그 때 받은 리더훈련은 오늘을 위한 준비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많은 것들을 한 분께 배웠습니다. 지유철 전도사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오늘의 정신실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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