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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안성 호밀밭,  photo by forest 님

저는 '무슨색 좋아해?' 그러면 '하늘색' 정도를 말합니다. 그래서 나의 색깔은 하늘색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결혼하고 신혼집을 꾸미면서 집안이 온통 하늘색이었으니까요.
에니어그램 7번의 색이 '초록'이라고 합니다. 이미 한참 전에 그런 얘기를 들었지만 '초록색? 나쁘지 않지? 자신의 이미지가 밝고 쾌활한 7번이니 오죽하겠어?' 하는 정도였지요.

어제 지도자과정 첫 시간에 자기소개를 하면서 그림과 함께 자신을 소개하도록 하였습니다.여러 장의 그림 중에 마음에 드는 그림을 하나 뽑으라 하더군요. '이런 거 디게 싫어하는데' 하면서 어쩔 수 없이 그림을 선택하는데요. 수십 장의 그림 중에서 눈에 들어오는 사진은 초록색의 사진들입니다. 초록색 잔디, 초록의 산, 초록나무가 화면에 꽉 차 있는 것. 이런 저런 이유로 그림을 세 장을 바꿔가면 선택해야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모두 초록이었습니다. 선택할 때는 전혀 의식하지 않았지요. 잠깐 '뭐야? 내가 7번색을 의식하고 있는거야?'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저 정말 눈에 들어오는 걸 선택한 게 그랬지요.

어제 강의 들으면서 생각하니 제가 정말 초록에 꽂혀요. 사진을 보다가 가장 감탄이 나오는 건 저런 초록의 물결이지요. 제가 집안에 키우는 화초들도 생각해보니 그 초록색의 싱그러움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사실 꽃을 피우는 화분보다 초록을 유지하는 화분이 더 좋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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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의식성찰' 이란 것을 하다가 갑자기 위의 두 개 사진이 떠올랐어요. 지금 사는 집도 그렇고 예전 집도 그렇고 창 앞을 푸른 나뭇잎이 가려주는 늦봄부터 초가을까지가 너무너무 좋습니다.
목련의 널따라 잎사귀들이 무성해져서 창을 가려주면 그냥, 아무런 이유없이 마음이 좋아집니다.

사람마다 장점 속에 약점이 숨어 있음을 압니다. 7번 유형을 설명할 때 일단 긍정적인 평가를 할 때는 '쾌활하고 낙천적이고 멋진'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잘 들어보면 7번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쾌활하고, 밝고 낙천적인, 그리고 멋진 사람' 이라는 페르조나(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면이라는 말이 얼마나 거슬리는지요. 그래서 에니어그램은 어렵습니다. '사실은 내가 가면을 쓰고 있었던 거야' 라고 고백을 해야하니까요.

저 두 장의 사진은 7번 유형인 제 자신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제가 겨울의 베란다 쪽 창은 저렇게 지저분하기 그지 없답니다. 상가 앞도 아니고 뒤쪽이기 때문에 지저분한 간판이며 상가 2층의 교회 십자가탑이며....그런데 여름이 오면 저 초록의 잎이 지저분한 모든 것들을 다 가려줍니다. 오늘 아침 의식성찰을 하고 조용히 기도하면서 초록의 유쾌함과 발랄함으로 가리고 싶은 저의 많은 것들 중에서 아주 밑바닥에 있던 것이 뭔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제야 안 것도 아닌데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지요.  이제 익숙하지만 새로운 하나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또 하나의 시작이지요.

최근 제 근황에 대해서 쓴 글에 대해서 두 분이 댓글로 '유쾌하다'는 평을 해주셨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가볍지 않은 주제임이 분명합니다. 사실 제게도 너무 무거운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가볍고 유쾌하게 씁니다. 어떤 일이든 제 안으로 들어와서 글이 되거나 말이 되면 희화되고 가벼워지는 경우가 많아요. 거의 오토매틱이죠. 그 유쾌함과 발랄함이 나쁘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럴 때마다 왜 그러는지에 대한 마음의 동기가 참 중요한데 동기를 성찰해보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나를 알아가는 것도 혼자하는 일이 아니라 블로그를 통해서 글을 쓰고 반응을 보여주시고, 다시 반응으로 글을 쓰면서, 귀한 분들의 블로그에서 사진과 글을 보면서...이런 많은 도움으로 저를 알아가고 세상을 알아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가장 귀한 보물들은 다 일상과 일상이 만들어내는 만남에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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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문턱에 들어서 에니어그램을 만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내적여정 2단계 연수를 마치고 된통 마음을 한 번 앓고나서 흐릿했던 것들이 많이 명료해졌습니다. 1단계 연수에서 얻은 새로운 통찰들이 마냥 좋았고 뭔가 멋진 도구를 손에 쥐게 될 것 같아 부풀기만 했었습니다. 2단계 연수 내내 나와 같다고 규정되는 7번 유형 사람에 대한 거부감에 힘들었습니다. 


예, 저 7유형입니다. ㅠㅠ


7번 유형의 자아이미지는 '나는 행복하고 멋지다' 입니다. 긍정적인 특성이라고 한다면 쾌활하고 명랑하며 낙천적이고, 아이처럼 호기심이 많고 천진난만. 기발한 농담으로 분위기를 띄우는 분위기 메이커에다가 이상주의자로 사심없고 자발적이고 활동적이라죠. 다양한 아이디어가 넘치는 다재다능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맞습니다. 맞고요.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특징은 결국 7번의 집착이 되기도 하죠.
모든 일을 결정하는 기준이 '쾌락'과 '재미'니까요. 지루한 것은 견디지를 못하죠. 한 가지 일이나 한 사람에게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이 어렵고요. 부풀린 긍정주의 낙천주의로 피상적인 삶을 산다는데 맞아요. 고통에 직면하는 것 너무 너무 힘들어서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서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게 오토메틱이예요. 그러면서 저는 한 때 이걸 믿음이라고 생각했다죠. 자신에 대한 과장된 견해를 가지고 자기도취적인 성향이 강하다. 이거 이거 '자아팽창' 이라는 거죠. 다 내가 한 일 같고, 다 나 때문에 좋아진 것 같고, 내가 빠지면 모임이고 찬양이고 뭐고 다 안될 것 같다는 이 자아도취 말예요.

고통, 인생의 슬픔 이런 것들은 악덕으로 여겨서 멀리하고, 회피하고 십자가를 피해서 곧장 부활로 달려가고 싶어한답니다. 고통, 아주 조금만 와도 직면하기기 어려워서 죽을 것 같다고 과장해 버립니다. 마구 극단적으로 과장해 버려서 고통의 실체를 보지 않는 거예요. 분위기는 다 띄워 놓고 결정적인 순간에 치고 빠지는 야비함이란....제가 이런 사람이라니까요.

7번의 어린시절은 유복하과 행복한 환경이 갑자기 깨졌거나 큰 정신적인 충격을 겼을 사람들이 많다네요. 아마도 사춘기가 막 시작하던 시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경험이 제게는 큰 치명적인 충격이었겠죠. 그 이전과 이후의 삶은 하늘과 땅처럼 다른 삶이었으니까요. 무엇보다 아버지 한 사람 돌아가셨는데 우리를 대하는 교인들, 친척들의 태도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변했다는 건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시기에 건강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험이었어요.

7번유형이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는 '건전한 기쁨'이라죠. 저같은 7번들은 '나는 참 기쁘다'라고 생각하는 날이 많고,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하는 찬양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정작 '진정한 기쁨'은 모른다는 거예요. 요즘은 '의식성찰 일기'라는 것을 쓰면서 '진정한 기쁨' 에 대해서 구하고 찾고 있으며 찾아가는 길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키(key)가 하나 더 있습니다. 

6번의 날개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7번의 설명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7번이라 하기에는 제게는 '완벽주의자 스러운' 구석이 있었거든요. 제 동생이 언젠가 하는 말이 '그래도 누나는 한 번 맘 먹은 거 끝까지 해내는 그런 게 있잖아' 하길래 코웃음을 쳤습니다. '내~애가 그런게 어딨어?' 자꾸 생각해보니 뒷심 없는 7번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6번 날개였습니다. 6번의 자아 이미지는 '나는 책임감이 강하고, 나에게 주어진 일은 최선을 다한다' 라는데요.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이후 저는 더 이상 7번의 페르조나(가면)만을 가지고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나이가 많은 엄마와 동생을 바라보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돌아보니 중고등 시절에 공부도 '책임감'으로 한 것 같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해. 우리 엄마가 젤로 치는 직업이 초등학교 교사니깐 서울교대를 가서 선생님이 되가지구 엄마를 기쁘게 해야하고, 무엇보다 가정에 안정적인 수입원이 되어야해' 이거 였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간 이후로 지금껏 돈을 벌지 않아본 적이 없다는 것도 최근 생각났습니다. 대학 다닐 때는 물론이고 대학 졸업하고 유치원 교사를 하면서도 밤에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으니깐요. '돈 벌지 않는 나'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상상도 안되고 허용도 되지 않았지요. 결혼 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어요. 상황이 그렇고, 내가 하는 일에 행복하다고 말했지만 마음 한 구석 '경제적 가장이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내내 내려놓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나친 책임감으로 어떤 분야에서는 융통성을 잃기도 한다는 그 6번. 6번의 날개를 펼쳤던 거예요. 항상 어떤 일이 일어나면 최악의 경우까지 상상하고 대비하는 안전제일주의자가 되어 있었지요.

2,3주 전 병원에서 말하지 말라는 진단을 받고는 최고로 심란한 상태에 있었던 어느 저녁이었습니다. 침대에 누워있었습니다. 두 아이가 엄마 아프다고 걱정을 심하게 하더니 애들은 애들이라고 금새 잊고는 침대 발치에서 까불고 놀고합니다. 두 아이를 지켜보며 '너무 무거워요. 몸이 아프고 이제 일도 어떻게 될 지 모르는데 하나님, 너무 무거워요. 저 아이들 어떻게 키워요.' 하고 마음의 소리를 내뱉었어요.' 그 때 또 다른 목소리가 마음에서 울렸죠. '책임감 내려놔. 내가 책임져줄께. 내려놓으란 말이다. 애들에 대한 책임감 일에 대한 책임감, 사람에 대한 책임감 다 내려놔.' 고분고분 이 말을 들을리 없는 자아의 목소리가 '어떻게 내려놔요. 내년이면 또 모르겠어요. 지금은 아니잖아요. 제가 내년에는 좀 내려놓으려고 했었죠' 하네요. 눈물이 났어요.

그리고 그 주 수요예배 가서 기도하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하는 말씀이 생각나서 뜨거운 눈물이 났어요.

최근에 읽던 몇 권의 책 <융, 중년을 말하다> <하나님을 갈망하다>들은 지성과 영성을 일깨워 스스로 정리가 되도록 도와주었어요. 어제까지 위에 적은 내용들이 하나 씩 정리가 되면서 턱과 목이 아프던 것들도 거의 통증을 못 느낄 정도로 좋아졌어요. 그 책임감의 짐을  내려놓고 '쉽고 가볍다'고 하는 그 분의 멍에로 바꿔서 메는 중에 있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사랑의 멍에'인듯 해요. 이제부터는 사랑에 항복하고 참 쉼을 얻을 일만 남았네요.

이렇게 6번 날개를 가진 7번은 그렇게도 무겁던 책임감을 십자가 밑에 내려놓기로 했답니다.
다 내려놓고 왔는데 다시 그걸 만지작거리러 돌아가는 일이 없어야 할텐데요.

흐린 날이 지나고 맞는 파란 하늘과 햇살은 유난히 밝고 유난히 따뜻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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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을 배운 지가 좀 됐습니다. 이제 웬만한 영법은 다 배웠고 영법 교정을 배우거나 체력 기르는 것을 배우는 상급반 입니다. 수영을 웬만큼 배웠다는 것은 제 생애 몇 안 되는 자랑스러운 업적으로 칠 수 있습니다.
100m 21초로 대변되는 제 운동신경으로는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운동이 없었으니까요. 어찌됐는 '쪽팔려도 포기는 하지 말자'를 되뇌이며 시간을 보내다보니 배워지는 날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자유수영을 가면 25m를 쉬지 않고 30번 정도는 왔다 갔다할 정도의 지구력도 기르게 되었습니다. 은근히 수영에 대한 자부심이 충천을 하고 있었지요. 뿐만이 아닙니다. 그렇게 안 되던 평영이 쭉욱~쭉 앞으로 나가기도 하니....어깨에 힘 좀 주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 쯤인가 제가 접영을 하고 돌아오니 같이 하시는 아주머니들이 '엄마는 손끝이 왜 항상 그렇게 물 밖으로 나와 있어?' 하면서 킬킬거리셨습니다. 그런가? 손끝이 물 밖으로 나와있나? 나름 이제는 좀 잘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지적 비슷한 걸 받으니 자존심이 쬐께 상했습니다. '그까이꺼 쫌만 의식하고 고치면 돼' 하고는 그 때부터 손끝에 신경을 썼습니다. 그리고 고쳐졌으려니 했습니다.
엊그제 월요일날 수영을 갔는데 코치가 그러는 겁니다. '아~놔, 회원님! 손끝이 그렇게 물 위에 살아 있으면 저항을 받아서 안 나가죠. 손끝에서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하세요. 회원님은 자유영 할 때도 그래요' 이럽니다. 살짝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제 힘이란 힘은 다 빼고 수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나쁜 습관이 이미 자리 잡고 있다니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손 끝에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그게 고쳐지지 않고 있다는 말이지요.
참 희한합니다. 한 번도 나쁜 습관을 가지겠다고 마음 먹은 적이 없는데 오히려 좋은 운동 습관을 몸에 붙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연습하는데 언제 그렇게 좋지 않은 습관이 몸에 붙어 있대요?

지휘를 하거나 음악치료를 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이 제게  '참으로 열정적이세요'하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가보다. 나는 좀 열정적인가보다. 하는 정도로 받아들입니다. MBTI나 에니어그램에서 제 유형을 설명하는데 빠지지 않는 형용사가 '열정적인, 유쾌한' 이런 것들이니까요. 남편이 얼마 전에 진지하게 그래요. '당신 정말 열정적이야' 남편이 그렇게 말할 때는 진심으로 200%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거든요. 순간 남편 입장에서 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매사에 에너지를 최대한 절약하는 남편, 말도 가장 효율적인 말 한 마디만을 하기 위해서 고르고 고르는 남편에게 있어서 나의 에너지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느껴질까가 새삼스럽게 생각되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에너지일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죠. 이 얘기를 왜 했는지 다시 물었을 때 '그래서 부럽다는 얘기' 라고 했지만 그래서 버겁다는 것으로 저는 들렸습니다.

'열정적이다' 라는 칭찬을 저는 별로 칭찬으로 여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를 잘 아는 누군가가 이런 제 마음을 읽어주었습니다. '언니 정말 열정적이야. 그런데 열정적이라는 말, 언니가 별로 듣기 좋아하는 말이 아니지?' 라고요. 맞아요. 저는 열정적이라는 말을 최소한 나에게 쓸 때는 칭찬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저는 열정적으로 살지 말라고 하면 그게 죽음이니까요. 열정적인 것은 제게는 자연스러움이니까요. 오히려 최근 남편과 이런 저런 일로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열정적인 내 자신'이 밉기도 했습니다.

좋은 계기였어요. 마음에 대한 공부를 끊임없이 하면서 이만하면 나는 나를 잘 안다. 내 약점도 잘 안다고 은근히 자부하던 부분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니 자부심이 충천했던 것 같은데 '열정적인' 이라는 형용사가 화두가 되어 한바탕 홍역을 치루고 났더니 어느 새 원하지 않는데 내 몸에 붙어 버린 나쁜 습관이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어요. 열정적인 것이 자연스러운 나는 열정적일 때 주어지는 스포트 라이트를 진정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도록 해야할 것 같아요. 나의 '열정'은 나에게는 자연스러움이지만 남편에게는 또 상대적으로 에너지를 안으로 쓰는 사람들에게는 '몹시 버거운' 덕목이 된다는 것도 잊어버리면 안되겠어요.

그러니, 몸으로 하는 운동이든, 마음공부든 끝이 없지요. 뭔가 배웠다 하면 그것으로 인한 교만으로 보지 못하는 것들이 생기고요. 잘 하게 되는 만큼 그로 인한 그림자도 길어지기 마련이니.... 그걸 또 넘어서야 하고, 또 넘어서야 하고....^^ 그러다 보면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가 될 수 있으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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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별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을 'insight' 또는 '통찰'이라고 합니다. 김종필씨는 이 불현듯 주어지는 통찰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선물' 즉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우리가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면 그것은 은혜요,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주신 선물이라는 것이지요.

이번 주 중, 기도하면서 사실은 기도하는 그 시간 이전 여러 만남을 통해서 이미 길어올려지고 있었던 귀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기쁨'에 관한 메세지입니다.
MBTI로 ESFP, 에니어그램으로 7번 유형인 저게 가장 꽂히는 형용사는 아마도 '기쁘다. 즐겁다. 행복하다. 웃기다' 이것일 겁니다. 예전에 찬양인도 하던 시절에 자주 선곡했던 곡이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이었죠. 남편은 그걸 가지고 '딱 정신실의 찬양이라고 놀리기도 했습니다.
나는 기뻐하는 것에 관한한 자신이 있다. 나는 긍정적이고 낙천적이고 기쁨이 충만하다. 늘 이런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에니어그램 연수를 받으면서 '7변 유형들은 고통을 직면하지 않으면서 붙들고 있는 반쪽짜리 기쁨에 대해서 회개해야 하고, 고난을 통과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는 말에도 약간 콧방귀를 뀌었습니다. 그런 건 옛날에 다 띠었찌이~ 하구요.

수요예배를 가서 기도하면서 갑자기 '내 속에는 기쁨이라곤 없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면 오토매틱으로 웃음을 웃고, 떠들어대고, 재밌는 얘기를 하곤 하지만....그건 뿌리가 없는 기쁨이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혼자 있을 때는 물론이고 제가 아이들과 셋이 있는 저녁시간에 얼마나 무뚝뚝하고 유머가 없고 경직돼 있는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러다 누구한테 전화가 오면 바로 표정이 밝아져서 떠들어대기도 하지만.....결국 진짜 제 모습은 완전히 무장해제된 상태, 즉 아이들 앞에서의 제 모습이지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기도하는데 '내가 에니어그램으로 '머리형이다' 하는 생각에 미쳤어요. 내가 가지고 있다고 하는 기쁨이라는 것이 너무 가벼워 머리 위로 둥둥 떠 있는 것 같아요. 진정으로 몸 깊이, 뱃 속에서부터 기쁨이 묵직하게 자리잡고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해집니다.

인아와 함께 아이들 유치원 문제를 놓고 기도를 했습니다. 인아는 영빈이를 저는 현승이를 병설유치원에 보내려고 접수해놓은 상태였고 모집정원을 넘게 되면 추첨을 해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 현승이 반은 미달이 되었고, 영빈이네 반은 다섯 명이 오버되어 추첨을 해야했었는데 다섯 명이 포기하는 바람에 다들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비슷한 사안을 놓고 함께 기도했던 엄마들의 반응이 다릅니다. 저는 '에이~ 미달될 걸 괜히 걱정(기도?)했네' 하는 생각을 먼저 하고는 '내가 이렇지. 기도해놓고 응답해주셨다는 생각은 못하고 말야. 감사할 줄을 몰라요' 했습니다. 인아는 대번에 '진짜 감사해. 기도 응답해주셨어. 영빈이 덕분에 다른 아이들도 추첨 안 하고 됐다고 생각했는데 나는....'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줄 아는 인아는 단지 긍정적이라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무장해제 하고 아이들을 대할 때 조차도 아이들을 바라보면 웃음이 가득한 경우가 많다고 보여지니까요. 그걸 봐도 저한테는 기~잎이 자리 잡은 기쁨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때문에 일이 지치고, 아이들에게 불친절하고, 남편을 진정성을 가지고 돕지 못하는 경우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머리 위에서 동동 뜬 웃음이 아니라 뱃 속 깊이 묵직하게 든든하게 자리잡은 기쁨의 큰 덩어리를 몸에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기쁨이 속에서부터 채워져서 철철 흘러넘쳤으면 좋겠습니다. 철철 흘러 넘쳐서 나의 사람들에게 흘려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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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이 떨어져가는 겨울나무가 유난히 싫다. 베란다 창 앞에서 지난 여름 나를 행복하게 해줬던 대추나무 잎이 하나 둘 지고 있다. 이 가을 지내며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내가 겨울나무를 싫어할 뿐 아니라 사실은 겨울의 헐벗은 나무를 두려워하는 구석이 있다는 것 말이다.

지는 잎을 바라보면서 기분이 그럴싸하게 좋았던 기억은 현승이를 임신하고 있던 그 가을 뿐이었다. 그 때 다니던 직장의 음악치료실 창으로 아주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것이 보였었는데 그 나무들의 하나 둘 앙상해지는 것을 보면 희망이 차올랐다.


'저 잎이 다 지고, 이 눔의 겨울이 후딱 가고 새 잎이 돋아나야 아기 만나는 날이다. 암튼 빨리 빨리 저 놈의 잎이 다 져버려야 한다' 이렇게 말이다.

그 외에는 오는 겨울을 자연의 섭리려니 하고 기쁘게 아니 최소한 자연스럽게 맞아보지도 못했던 것 같다. 아, 나는 겨울을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어했다.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인식조차 못하면서 말이다. 날씨가 추워지고 나무들이 앙상해지기 시작하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겨울이 피부로 느껴진다. 차거워지는 날씨와 함께 마음이 스산해지는 것은 81년도 겨울이 함께 떠오르기 때문이다.

단지 그 때문이 아닐지 모른다. 에니어그램 7번 유형인 내게 '고통이 없는 삶'은 지고의 목푝이다. MBTI 거울에 나를 비추어 ESFP의 얼굴을 보게 되었을 때 충분히 인식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재미' 가 없으면 열심이 나지 않는다. '지루'하다 싶으면 도망치는 것을 도모한다는 것도 알았다. 지루한 자리에 머무르는 훈련을 의식적으로 해왔다. 어떤 ESFP보다 참을성 있다는 자부심에 더 깊이 성찰하고자 하지 않았다.

에니어그램이 MBTI와 다르다면 방향이다. 바로 각 유형의 내면으로 돌격해 들어간다는 것이다. 동기를 꿰뚫고 죄에 대해서 직언한다. 7번 유형은 고통을 무조건 악덕으로 여겨서 멀리하고 회피한다는데 '나는 이미 그 정도는 알고 극복한 상태야'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겨울나무를 보는 내 눈을 인식하면서  고통에 직면하지 않는 쾌락주의자로서의 나를 새롭게 보게 된다. 아, 이 정도였구나! 블로그에 댓글 하나를 달아도 나를 추동하는 힘은 쾌락주의자의 그것이다.  

해피앤딩 아닌 영화는 보지 않는다. 고등학교때 영화 <애수>를 보고 거의 한 달 간은 정신을 못 차리고 살았던 경험이 있다. 슬픔에서 헤어나오질 못했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비극은 보지 않는다! 또 몸이 아파도 마음이 아파도 엄살이 심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바이다. 미리 엄살을 떨어 놓으면 그 고통이 엄살 떤 만큼은 아니기에 더 견디기가 쉽다는 정신적 메카니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내 엄살은 고통의 현실을 보지 않으려는 회피의 메카니즘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일주일인가 학교를 안 갔었는데 장례식을 마치고 처음 학교에 갔던 날에 대한 기억이 분명하다. 분명히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슬픈 맘 말로 다 할 수 없는데 내가 학교에 가서 친구들을 보고는 웃었다. 어쩔줄 모르는 친구들을 보고는 웃었을 뿐 아니라 그 날 학교에서 밝게 지내고 집에 돌아왔던 기억이다. 슬픈 때 슬퍼야 하는데 슬픈 얼굴을 하지 못하거나 안하거나.


고통에 대해서 좀 더 정직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파서 소중한, 아파서 진실인 에니어그램의 선물을 받아들 때가 되었다. 과장도 회피도 말고 고통에 머무르는 것. 

쓸쓸해져가는 겨울나무를 부러 오래 바라본다. 슬프다 슬프다 하면서 엄살 떨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도 들이고, 겨울이 휙 지나가서 새봄의 새순이 나는 때만 그리지 말고, 겨울의 추위를 있는 그대로 몸으로 맞는 날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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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를 공부하면서 유형의 '죄'를 따로 언급하는 설명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수 년간 나의 MBTI를 통한 여행의 끝에는 '죄'라는 단어가 있었다.
내 장점,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내 성격유형의 장점은 그대로 내 약점이고,
그것은 결국 내 영혼이 걸려 넘어지게 하는,
그래서 결국 하나님과의 단절을 반복하게 하는 '죄'였다.

그리고 에니어그램 공부를 시작했는데 에니어그램의 시작은 '죄'다. '근원적인 죄'다.
첫 시간 공부부터 각 유형들이 어떤 가면을 쓰고 자신과 세상을 속이고 있는지,
그래서 결국 각 사람들이 짓는 근원적인 죄의 유형이 무엇인지,
그 가면을 인식하고 내려놓을 때 맺을 수 있는 성령의 열매가 무엇인지.

우연이 아닐것이다.
자신의 내면을 여행하고 영성의 길로 나가고자 할 때 결국 마주해야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숨은 은밀한 죄 그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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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를 통해서 많은 청년들을 만났고,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 만남은 결국 나를 만나는 만남이었다.

그런데 사실 지난 주말 이후 나는 조금 흔들리고 있다.
조금 혼란스럽고, 조금 피하고 싶고, 조금 예민해져 있다.
어렴풋이 감은 있다.
여기서 더 나가면 보고 싶지 않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를 만나야 하니까..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고통을 수반한 그 걸음은 결국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가게 하는 것임을 믿는다.

<MBTI와 공동체 세우기 >라는 꼭지로 QTzine에 썼던 마지막 글이다.
오늘 다시 꺼내 읽어 보니 말 그대로 나의 그 고백이다.


 

 


요즘은 주일 아침예배 때 짧은 기도시간에 생각지 못했던 통찰들이 주어집니다.
그게 바로 은혜가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일주일의 삶을 돌아보면서 나와 내게 주신 사람들 공동체를 떠올리다 보면 이런 저런 좋은(?) 생각들이 마음에 차 오릅니다. 그 때 그 때 글로 잘 남기지 못해서 흘려버리는 것들도 많이 있지만요...

한동안 MBTI로 볼 때 완전히 반대유형인 남편을 보면서 혼자 뒤집어지고 엎어지고 난리 부르스였습니다. 글래서 박사의 <결혼의 기술>이라는 책을 공부할 일이 생겨서 읽고 있었는데 그 영향인듯 싶기도 하구요. 글래서 박사 역시 사람들이 가지 고유한 '욕구 프로파일'이라는 심리적인 특성들을 말하는데 대체적으로 이것이 맞는사람끼리 살아야 한다는 주의였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상대방의 욕구 프로파일을 잘 살펴보고 맞춰보라는 것이었죠.
그걸 공부하다보니 정서표현이 자주 안 하는 NT 김종필씨에게 서서히 화가 나기 시작하더니만 혼자 생각에 빠져가지고 가만히 있는 김종필씨 쪼아대고 난리가 났었습니다.

MBTI 끝에서 삶을 비추는 소망은 무엇일까요?
ESFP 조차도 마음이 마구 마구 메말라 있을 때 기쁨이고 뭐고 없습니다. MBTI 끝에서 만난 분은 성령님이셨습니다.
사랑, 기쁨, 오래 참아주는 것, 화평케 하는 것, 자비로움, 착함, 규모 있는 삶, 충성스러움.....로 마음을가득 채워주시는 분. 지난 주일 성가대 찬양이 '빈들에 마른 풀 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을 편곡한 곡이었는데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생명 주옵소서'가 메마를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MBTI로 아무리 내 마음을 알았다해고 결국 얻을 수 없는 천국의 마음. 그것은 성령님께로부터만 오는 선물이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
MBTI로 드러난 나의 장점과 약점 위에 단비를 촉촉히 내려 풍성하게 해 주시는 분.
성령의 열매들이 풍성하게 넘치는 삶을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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