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상황> JP&SS의 사랑과 책_3
JP
나는 결혼한 후 어느 시점부터 ‘자유’를 상실했다. 나는 편안히 잠잘 자유가 없어졌다. 나는 우아하게 식사(외식) 할 겨를도 없다. 나는 내 진로를 내 뜻대로 선택하는데 심한 제약을 받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식’ 때문이다. 나는 자녀 둘을 얻는 조건으로 내 개인의 자유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어느새 ‘책임’이 꿰 차고 앉아 버렸다. 밤에 우는 녀석 재워야 할 책임, 밥그릇 뒤엎는 녀석 붙들고 밥 먹여야 할 책임, 아이들을 잘 길러내야 할 책임 말이다.(이 점에 관해서는 홍승우가 그린 <비빔툰>의 만화 한 컷 한 컷은 내게는 그야말로 아멘 아멘 이다) 자유를 가져가는 대신 책임을 두고 간 녀석들을 보고 사람들은 ! ‘하나님의 선물’이라 부른다. 근데 무슨 선물이 이렇게 사람 힘들게 하냐?
결혼 서약을 한 지 4년하고도 반이 지나갔다. 그 새 보금자리를 다섯 번이나 바꿨고 그 와중에 두 자녀가 태어났다. 한번도 계약 기간을 지켜보지 못한 우리의 이사는 아이들과 관계가 있다. 첫 번째 이사 때 첫째 채윤이가 생겼다. 두 번째 이사는 채윤이의 양육 때문에 하게 되었고, 세 번째 이사는 둘째 현승이의 출생과 함께 이루어졌다. 역시 양육 때문에 결정한 일이고 부모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에 한 네 번째 이사는 아예 부모님과 합치는 이사였다. 아이들 양육 때문이다. 두 번째 이사 때는 육아 관계로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그 때 어떤 분이 “아이들 때문에 인생이 꼬이는 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던 게 생각난다. 그렇지. 내 인생극장에 자녀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내 드라마의 전개는 예상치 못한 각본 수정을 했어야만 했? ? 분명 내 인생은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나 혼자 연극을 하는 게 아니다. 거기엔 여러 인물이 등장하고 영향을 준다. 그 중 으뜸으로 영향을 주는 것은 바로 자녀들이다. 그렇다면 이 녀석들을 왜 ‘하나님의 선물’이라 부르는 것일까? 이 녀석들이 나중에 자라서 내가 자기들 때문에 인생 곡예를 해야만 했다는 사실에,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이해는 해 줄지 미지수인데, 자녀들을 ‘하나님의 선물’이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렇게 까지만 생각한다면 나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는 철부지 아빠가 되겠지. 우선 아이들은 내가 그런 허튼 생각에 빠질 기회를 전혀 주지 않는다. ‘안아줘, 졸려워, 배고파, 놀아줘, 쉬 마려...’. 쉴 새 없이 요구하는 아이들은 내가 두 다리 쭉 뻗고 누워있을 틈을 주지 않는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지. 비록 피곤한 몸으로 아이들에게 응대하다보면 단지 내가 아빠라는 이유로 달려와 안기고, 허다한 사람들 속에서 유독 내 음성을 알아듣는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아빠!’ 라고 부른다. 그러면 그제서야 나를 짓누르던 책임감은 행복한 선물 보따리로 바뀌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당당한 사람이 된다. 나는 더 이상 부족할 게 없는 사람이고, 더 이상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자녀를 두고 선물이라 함이 마땅한 것 아니겠는가?
채윤이가 두 돌 쯤 됐을 때였나? 어느 날 정다운 목소리로 내게 “아빠~”라고 부르던 날이 생각난다. 종종 듣던 말이긴 했지만 그날따라 그 소리는 내 영혼에 만족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정겨운 소리로 들렸다. 내가 ‘아빠’라구? 나 김종필이 아빠가 됐단 말이지? 지금껏 이다지도 그윽한 표현으로 나를 불렀던 호칭이 또 있었던가! 그 ‘부름’은 마치 하나님이 나를 부른 듯이 내 영혼을 꽉 채우는 말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아이를 안고 춤추듯이 뛰면서 “나는 아빠다! 나는 아빠다! 나는 채윤이 아빠다!”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나의 자존감을 세워주고 정체성을 훌륭하게 이해해준 아이로 인해 나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기 때문이었다. 잊을 수 없는 그 때의 경험은 자녀교육에 있어서 엄청난 인식의 변화를 가져다 준 것 같다. “이 아이는 내 자녀다”라는 인식과 “나? ?이 아이의 아빠다”라는 인식의 차이는 모든 관점을 전혀 새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전자의 말로 고백할 때 나는 불안하고 피곤하다. 그러나 후자의 말로 고백할 때는 자신감이 생기고 당당해진다. “나는 채윤이와 현승이의 아빠다! 나보다 훌륭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구 해!”
결혼하고 몇 개월 후, 아내가 불쑥 할 얘기가 있다고 하면서 사뭇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엔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나는, 아내의 임신 발언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일어난 현기증을 눈치 채지 못하게 다스려야만 했었다. (어? 지금 내 감정은 텔레비전에서 본 것과 다른데... 왜 그렇지?) 애써 반가운 표정을 지으려다가 이내 두려운 마음을 감추는 데 실패한 나는 곧장 아내에 추궁을 피할 궁리를 해야만 했었다. 왜 갑자기 애가 생긴다고 하니까 두려워졌던 걸까? 배우자를 만나 사랑하다보니 결혼까지 했고 행복하기 그지없는 나날을 보내기야 했지만 사실 자녀문제에 있어서 나는 진지하게 마음의 준비를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내 일로도 벅찬데, 아직 난 준비가 안됐는데...) 아빠가 된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 나는 어디서 들어보지도 못했고, 그저 멀게만 여겨지던 거였는? ?그게 내 삶에 현실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얄궂게도 그 일은 아내가 내 반응을 떠 볼 요량으로 해 본 거짓말에 (언제나 그렇듯) 내가 보기 좋게 걸려든 꼴이지만, 그 일로 인해 나는 아빠 되기 위한 공부길에 들어서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나는 자녀 교육에 대해 특별한 지식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특출나게 지혜롭거나 어린이다운 천진난만한 감각과 재능을 가지고 있는 건 더더욱 아니다. 나는 어린이와는 꽤 먼 사람이었고, 임신 소식에 기겁까지 한 사람이었으니 뻔한 대한민국의 남성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뿐이다. 게다가 내 나이 서른을 전후로 한 시점에서 재능, 진로, 비전 등의 문제로 적잖이 실패의식과 싸우기에 여념이 없던 때였으니, 자녀교육은 내게 너무너무 버거운 과제임에 분명했다. 그렇지만 탁월한 유아교육가인 아내의 요청과 도움은 아무래도 자녀교육에 대해 철저하게 공부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었다.
내가 처음 접한 자녀교육서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여성잡지였다. 아내가 매일 숙제검사하다시피 확인했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거니와, ‘다 실패해도 좋으니 좋은 가정 만드는 것만큼은 실패하지 말자’ 라는 선언도 했었기에 틈틈이 태아와 산모의 변화에 관한 정보를 훑어보았다. 그러다보니 태아의 변화에 주목하게 되었는데, 이왕이면 애칭을 지어주는 게 좋겠다 싶어 채윤이는 ‘푸름이’, 현승이는 ‘기쁨이’라고 불러 주게 되었다. 그리고 어린이용 성경인 ‘지혜성경’을 매일 조금씩 읽어주었는데, 그게 계기가 돼서 채윤이의 이름 뜻은 지혜와 관련하여 붙여지게 되었다.
아내의 출산 직전에 읽은 프레드릭 르봐이예라는 의사가 지은 『폭력없는 탄생』은 출산과 태아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주었다. 제목이 이미 시사해 주는 바와 같이 아기들은 폭력적으로 태어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증명해준 르봐이예는 아기의 출생 과정 하나하나가 얼마나 어른 중심으로 이루어지는지 그래서 아기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는지 생생하게 고발하였는데, 그 책을 읽고 나니 애 낳는 일이 참 두려운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해서 가급적 좋은 병원,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있는 의사를 찾아보려고 적잖이 노력한 듯하다. 그렇지만 우리 아기들은 인격적이고 우호적인 환경에서 결국 태어나지는 못했다. 참 미안하기 그지없다. 우리나라 산부인과에서의 분만은, 적어도 내가 목격한 바에 의하면, 더 이상 ‘자연분만’이 아니다. 인위적으로 무자비하게 끄집어내는 게 아닌가 싶? ?정돈데, 막상 아이한테도 아내한테도 도움을 줄 수 없이 맹하게 서 있어야 하는 남편의 처지가 막막하기 그지없을 뿐이었다. 우리 사회가 언제쯤에야 인격적으로 아이를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을까? 아~ 자녀 얘기는 정말 끝이 보이질 않는구나! 사실 이제 시작에 불과한데 이미 난 내 지면을 다 채운 것 같다. 이제 잡설은 접고 본격적인 자녀교육론을 아내로부터 들어보기로 하자.
SS
‘아하! 남편의 글을 읽다보니 내 작전은 120% 성공한 작전이 됐구만...’ 결혼 전 나는 여성학을 전공할 꿈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 세계관과 페미니즘 사이에 다리를 놓겠다는 야무진 꿈 말이다. 결국 정식으로 코스를 밟아 공부하는 길은 가지 못했지만 내 삶에서 ‘기독교 세계관적으로 살기’와 더불어 ‘페미니즘적으로 살기’에 대한 밑그림이 생겼다는 것이 어쩌면 더 중요한 일일지 모르겠다.
지금은 많이 알려진 ‘또 하나의 문화’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부정기 간행물의 시리즈 1권의 제목은 <평등한 부모, 자유로운 아이>이다. 이 책은 내게 여성학을 소개해준 책이기도 하지만 ‘부모됨’에 대한 준비를 일찌감치 시작하게 해 준 책이기도 하다. 자녀교육은 부모된 내가 내 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정정도 시대정신을 대물림 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결국 그 시대정신이란 부모로부터 보고 배우는 과정을 통해 전수받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특별히 ‘남녀관계’에 대한 관점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 아직 젊은 시절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꿈꾸던 부모는 다름 아닌 ‘평등한 부모’였으며 그 기대와 꿈은 계속해서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남편과 만나 결혼할 때까지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결혼해 보니 남편은 평등한 부모는커녕 ‘부모됨’에 대해서! 도 거의 ‘have no idea’ 였다. ‘이 남자를 의식화시켜야 할텐데...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독서에도 자기 스케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 섣불리 뭔 책을 들이댈 수도 없고. 그래! 만화부터 시작하자!’ 슬쩍 화장실에 <여성신문>에 게재됐던 만화를 책으로 묶어 낸 <반쪽이의 육아일기>를 가져다 놓았다. 아침마다 화장실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한다. ‘킥킥킥’ 혼자 웃는 소리도 들리고. 어느 새 책꽂이에 꽂힌 <반쪽이의 가족일기 1, 2>를 스스로 가져다가 화장실에 놓고 읽고 있다. ‘흐흐흐, 1단계 작전 성공!’ 여기서 반쪽이는 누구인가? 그렇다! 엄마가 아닌 아빠다! 화가인 아빠가 직업상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밖에서 일하는 아내 대신 딸의 주 양육자가 되어 키우면서 만화로 그린 육아일기이다. 아내는 영화평론가이자 여성운동가라 할 수 있고 만화를 쓴 반쪽이 역시 자칭 타칭 페미니스트이다. 만화의 내용에서 주는 메시지와 상관없이 우리 사회에서 아빠가 주양육자로 집에 들어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의식에 환기’를 주고 있지 않은가? 평소 ‘그리스도 안에서 건강한 가정 세! 우기’에 대한 꿈에 전적으로 합의하고 있는 남편이기 때문에 그 만화 하나 로 ‘평등한 부모’에 대한 청사진을 스스로 금방 그려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더 이상 의식화 교육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 번 싹이 나기 시작한 ‘평등한 부모 되기’ 에 대한 의식은 이미 그의 의식과 일상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었으니까.
아직 어린 현승이는 잘 모르겠지만 큰 아이 채윤이는 유난스럽게 아빠를 밝힌다. 특히, 쉬 마려울 때, 안아 달라고 할 때, 졸릴 때... 말하자면 어른 힘들게 할 일에는 꼭 아빠를 찾는다. 이런 걸 보는 주위 사람들은 ‘애가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하네’ 하면서 엄마인 나보다 더 민망해 한다. 그러면서 한편, ‘아무리 그렇다고 아빠가 똥 기저귀 갈고 있는데 엄마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태연하게 수다 떨고 있냐?’ 하는 지도 모른다. ‘기울기에 기울기’라 하였던가? 우리 사회에 가사와 육아가 이유 불문하고 여자의 일이라는 의식이 상식이라고 기울어져 있는 이상 상식에 익숙한 눈에 거슬리는 일이 없이 어찌 평등으로 가는 일이 가능하겠는가? 그러자면 저 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는 만큼 이 쪽으로 기울어지는 껄끄러움이 있어야 어느 정도 중심으로 가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난 언! 제나 당당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이에 동의해 주는 남편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전공이 유아교육이고 아이를 좋아하다 보니 이런 저런 양육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은 예전부터 습관처럼 된 일이다. 양육에 관한 지침서들이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 아이를 키우면서 부딪치는 문제들은 결국 내 인격의 성숙과 신앙의 성숙에 따라 해결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누가 진정한 양육은 부모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존재’에 의해서 되는 것이라 했던가? 어떤 양육서를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됨을 위해서 우리가 계속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라는 것을 어느 때부턴가 확신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양육에 관한 전문적인 책보다는 의외의 책을 읽으면서 양육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얻을 때가 있다.
채윤이의 돌을 얼마 남겨두고 있던 때였다. 일단 우리 부부는 전통적으로 하는 돌잔치는 하지 않기로 하고 보다 의미 있는 세리모니를 위해 아이디어를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돌잔치를 하지 않겠다는 말에 부모님은 벌써 말도 안 되는 얘기라 하시며 이미 적잖은 갈등이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정말 잔치다운 잔치가 없을까를 고민하던 중 퇴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빌 하이빌즈의 <살아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읽다가 번쩍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 책은 잠언을 구체적 삶에 적용하기 쉽게 쓴 강해서 형식의 글이었는데 어느 부분을 읽다가 ‘무릇 잔치를 하려거든... 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불러다 하라’는 말씀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무릎을 탁 치게 된 것이었다. 금반지 한 돈 씩 들고 올 수 있는 지인들을 부르는 것 말고, 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라는 잔치, 바로 그 잔치를 ! 해보리라 마음먹게 된 것이었다. 우리 부부는 청년부 때 정신지체인 공동체에서 매달 식탁봉사를 했던 경험이 있었다. 잠시 결혼으로 인해 잊고 있었던 그 분들을 오랜만에 다시 초대해서 채윤이의 첫 생일을 함께 나누기로 한 것이었다. 그건 채윤이에게도 나중에 소중한 경험으로 남게 될 것이었고, 우리 가정의 궁극적 지향점을 상징하는 일이란 생각도 들었기에 주저없이 진행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암튼, 그렇게 답을 얻어 치룬 채윤이의 돌잔치는 우리 부부 뿐만 아니라 채윤이게도 참으로 의미 있는 세리모니가 되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채윤이는 잠언과 인연이 많다. 채윤이를 가질 즈음 남편과 함께 읽던 성경이 잠언이었고, 채윤이 임신해서는 어린이용 잠언성경인 ‘지혜성경'을 밤마다 아빠가 읽어 주었고, 한참 입덧이 심할 때 침대에 누워 꼼짝 못하던 때 읽던 책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지혜>이고, 그 책을 다시 읽으면서 돌잔치에 대한 생각을 얻고 말이다.
유명인사 11인이 자신들의 자녀양육에 관한 생각을 자유롭게 쓰고 엮은 <사랑하는 법을 바꿔라>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저자는 대부분 중년 이후의 연배들로 그야말로 양육에 있어서 산전수전 다 겪은 분들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박완서, 손봉호, 이원영, 김용택 등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분들이 저자의 반을 넘으니 그것만으로도 참 좋은 책이다. 양육 초년병들로서 그분들의 경험담을 듣는 일은 언제든 큰 위로 아니겠는가! 그분들 각각의 글들은 하나도 버릴 것 없이 다 유익을 주었는데, 특히 다일 공동체 최일도 목사님의 글은 오랫동안 마음 한 켠에 남아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배고프고 외로운 이웃을 위해 젊음을 바치는 일로 바빴던 아빠 최일도 목사님은, 아이와 친밀한 관계를 맺을 시기를 놓쳐 버린 것에 대해 때 늦은 회한과 뼈아픈 고백을 담아 후배들에게 권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비전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부모’로서의 책임을 담보로 내주는 것에 대해서 신중히 생각하라고 조심스레 경고하고 있었는데, 교회 일로 바쁜 우리들이 걸려 넘어지기 쉬운 일임에 분명했고, 다시금 자녀양육에 대해 여러모로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게 만들었다.
우리가 다니는 교회는 올 해에 가정교회라고 부르는 방식을 도입했다. 교회를 수십개의 가정교회로 나누어 운영하는 방식인데, 그 모임을 다들 ‘목장모임’ 이라 부른다. 매주 금요일 밤마다 온 가족이 모이는 이 모임이 주는 유익은 참으로 많다. 특히나 아이들에게도 더 없이 좋은 공동체를 만난 셈이었는데, 많은 언니 오빠 형아 누나가 생겼고 호적에는 나와있지 않는 큰엄마 큰아빠도 생겼으니 아이들이 매주 목장모임을 기다리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대 사회에서 양육의 문제를 가정 내에서, 부부에 의해서만 해결하기는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우리 같은 맞벌이 부부에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는 하지만 단지 현실적인 요구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나는 보다 더 좋은 양육을 위해서 ‘공동육아’를 꿈꾼다. 그런 꿈은 먼저 ‘또 하나의 문화’에서 출판된 <함께 크는 우리 아이>, <코뿔소~ 나들이 가자>, <놀면서 자라고 살면서 배우는 아이들> 등의 공동육아 시리즈를 통해서 꾸게 되었고 나는 그 안에서 ‘더불어 양육하기와’ ‘그 안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자유로움’을 배웠다. 그렇지만 ‘자연과 친하게 지내는 아이로 양육하기’, ‘권위로 가르치지 않고 스스로 알게 하는 교육’, 등등 이런 것들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나는 그 부족분을 부르더호프의 리더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가 쓴 <부르! 더호프의 아이들>에서 찾는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동체교육과 공동육아는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비폭력과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국제적인 공동체 부르더호프에서 아이의 양육과 교육을 어떻게 하는지 보여주는 이 책은 서점에 가면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는 수 십 수 백의 온갖 양육관련 책들과 바꿀 수 없는 한 권의 책이라 생각된다. 이 책은 내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부모의 역할이 단지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며, 우리 자녀들이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인도할 수 있다’고. 그리고 나는 요즘 비록 7개월 된 아기로 인해서 잠 못 자고, 외식도 못하고, 제대로 예배 한 번 못 드리는 현실이지만 그 부모됨의 특권을 누리느라 후회 없이 행복하다. 이 또한 부모됨을 위해 부부가 함께 독서하기/공부하기가 가져다 준 유익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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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우, <비빔툰1, 2>, 한겨레 신문사
홍승우, <비빔툰3, 다운이에게 동생이 생겼어요>, 문학과 지성사
르봐이예, <폭력 없는 탄생>, 샘터
최정현, <반쪽이의 육아일기>, 여성신문사
최정현, <반쪽이의 가족일기 1, 2>, 김영사
또 하나의 문화 편집부, <평등한 부모 자유로운 아이>, 평민사
한국 청소년 상담원 엮음, <사랑하는 방법을 바꿔라>, 샘터
빌하이빌즈, <살아 있는 하나님의 지혜>, IVP
공동육아연구회, <함께 크는 우리 아이>, 또 하나의 문화
공동육아연구원, <코뿔소~ 나들이 가자>, 또 하나의 문화
이부미, <놀면서 자라고 살면서 배우는 아이들>, 또 하나의 문화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브루더호프의 아이들>, 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