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세미나 중인 교회 젊은 부부들과 J 집사님 댁에 초대를 받았다. 아이들은 잔디밭에서 뛰놀고, 긴 시간 훈제로 구운 삼겹살은 입에서 살살 녹고, 탁 트인 시야로 마음까지 트인 사람들은 여유롭다. 내 마음도 마찬가지여서 이보다 좋을 수 없는 주일 오후 시간을 보냈다. 헤어지기 전에 기념촬영을 했는데, 집에 오니 단톡방에 몇 년 전 그 장소의 사진이 올라와 있다. 와, 이렇게 작았었다고? 씬스틸러는 아기들이다. 보자마자 신이 나서 사진 오려 붙이고 화살표 그려서 단톡에 올리며 낄낄거리는데... 채윤이가 그랬다.
엄마, 제발... 체통을 지켜. 이러는 거 주접...
아! 그래? 어쩌지? 이미 올렸는데.... 괜찮아. 재밌으면 땡이야!
희망을 잃은지 오래다. 교회에 대해 낙관적 기대는 없고, 남편이 목회자가 아니었다면 벌써 교회를 떠났을 것 같다. 한창 교회가 싫을 나이, 신앙 사춘기 한가운데의 허세는 아니다. '허튼' 희망을 잃었다고 하자. '신앙 사춘기'의 독기가 완전히 빠지진 않았지만, 나름 치열하게 교회의 빛과 그림자를 마주하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마음도 있다. 하지만 지금도 '목회자 성폭력 생존자' 자매들과 치유 글쓰기를 하는 중이고, 목회자로 인해 신앙은 물론 삶까지 망가진 분들을 흔하게 만나고, 반면 얼치기 신앙 사춘기 교인들로 인해 정신과 영혼이 말라비틀어져가는 목회자들을 본다. 자주 생각한다. 교회엔 희망이 없어...
주일 오후에 <육아 세미나>로 만나는 시간에 교회를 느낀다. 육아노동 가사노동으로 인한 갈등, 어린이집 선택부터 사교육의 문제까지 크고 작은 선택의 기로에서의 긴장, 내 부모로 인한 상처가 아이에게 투사되어 또 다른 상처를 유발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아니 그냥 아이들 등원시키고 출근하는 고된 아침을 '죽을 것 같다'는 느낌으로 사는 이야기, 종일 아이 재울 생각만 하다 막상 잠든 아이를 보면 밀려오는 죄책감 같은 것....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교회를 느낀다. 엉뚱하게도 내게 교회가 있어서 다행이다, 이 사람들 곁에 내가, 내 곁에 이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교회를 느낀다.
나는 교회의 딸이다. 이건 추상적 표현이 아니다. 태어나보니, 교회의 딸이었다. 어릴 적에 누군가를 따라 동네 우체국에 간 적이 있었다. 우체국에는 전화국도 함께 있어서 교환수 언니 한 명이 전화를 연결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한 명, 한 명으로 동네 전화를 다 연결했다. 나를 보자마자 "79번!(우리집 전화번호) 교회집 딸이네!' 처음 듣는 표현이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날 보고 "목사님 딸"이라고 하니까. 교회집 딸이라... 그러면 절집 딸도 있겠고... 여하튼 태어나보니 목사 딸이었고, 목사 딸로 불렸던 나를 부르는 다른 말은 '교회집 딸'이었다. 이렇게 정말 나는 교회의 딸이다. 자랑과 자부심이기도 했다. 지금은 조금, 때로 많이 부끄럽다. 좋은 교회 좀 소개해 달라는 사람들에게 소개할 교회가 없다. (아는 좋은 교회가 없어요...)
모임을 모두 마치고 엄마빠와 아기를 태운 차가 하나 씩 골목을 내려간다. 안녕, 안녀~엉! 감사합니다! 가보겠습니다! 안녀~엉! 한 대씩 떠나보내는 중 남편이 "꼭 명절에 큰 형님 집에 온 동생들 보내는 분위기예요."라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집사님 가족과 우리 부부, 또 다른 형제님 한 분이 골목 양편에서 서서 인사를 하는데 따뜻한 것이 꼭 가족모임 이후 같았다. 카시트에 폭 싸인 아기들 때문인지, 고기로 꽉 채운 위장이라서인지, 영혼이 따뜻한 무엇으로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교회에 희망을 걸지 않는다. 영성을 배우고 있으니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제도로서의 교회에는 무엇도 희망하지 않는다. 체험으로서의 교회를 배워가고 있다. 정해진 어느 장소, 어느 시간에 존재하는 교회가 아닌 거부할 수 없는 친밀감과 연민과 기쁨이 생겨나는 곳(또는 때)이다. 연구소 모임에서는 자주 체험으로서의 교회가 선다. 거부할 수 없는 친밀감이, 사랑이 사람들을 묶는다. 기쁨보다 슬픔, 간증 나눔보다 실패의 고백인 경우가 훨씬 더 많지만 체험으로 예배는 그래서 더 성공이다. 체험으로서의 교회는 이제 내 일상에 흔하다. 그렇다면 그 누구보다 그 어느 때보다 교회를 살고 있는 것이다.
사진을 들여다보다 깨달았다. 이 교회에 처음 왔을 때 젊은 부부란 없었다. 몇 년 전 <신혼부부 세미나>를 진행할 정도가 되었고, 이번에 모여 사진을 찍고 보니 '이렇게 많았어?' 싶은 것이다. 조용히 이렇게 무엇이 자라고 있었구나. 게다가 최근 등록한 두 두 커플이 함께 초대되어 왔는데. 이들은 JP와 나의 젊을 날을 함께 했던, 교회에의 열정이 순수했던 그 어느 날에 함께 했던 이들이다. 사랑하고 실망하고 배신당했던 교회생활의 역사를 함께 했던 이들이 저 사진에 다 있다. 저 사진 속에 교회가 있다.
J집사님 부부가 참 귀하다.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낯선 사람을, 초대하고 베풀면 다시 초대해서 되갚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 키우며 살아내기에 바빠 내놓을 것이 없는 여유 없는 사람을, 한참 어린 사람을 초대해준 집사님이 교회를 열어주었다. 성령님께서 이날 이 순간 잠시 내 마음에 교회를 열어주셨다. 메마른 땅에서 잘 견뎠다고 토닥토닥해주시며, 교회는 여기 있으니 사랑을 포기하지 말고 자꾸 발견해가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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