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게 명쾌하게 자기소개하는 게 어려운 인생이다. 작가, 소장, 강사, 대학원생...으로서 하는 일이 상충한다. (사실 가장 가까운 일상은 엄마, 아내, 그리고 약간 사모라 불리는 목회자 아내이다.) 그만큼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산다는 뜻이다. 페르소나에 맞는 일정표와 달력을 여러 개 가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소장으로서 '지도자 과정'을 동반하는 일이 가장 소중한 일인가 보다. 이 달력이 제일 중요하니 말이다. 내일은(아니 정확히 오늘과 내일 일박이일) 지도자 과정 종강 피정이다. 일 년이 지도자과정 스케줄에 맞춰 돌아가고, 일 년의 기쁨과 슬픔, 즉 존재의 의미가 여기로부터 나온다. 그러니 종강 피정 일박이일은 달력에 별표 열 개를 치는 날이다.

화요일은 유난히 분열적이다. 작가, 대학원생...으로 사는 일에 급급하다 밤 11시 다 되어 귀가하니 바로 내일이 되었다. 별표 열 개짜리 일정이 있는 내일이 되었다. 김치와 피클부터 핸드드립 세트까지. 정신없이 짐을 싸고 보니 나란히 함께 하기 어려운 두 개의 정서, 위안(consolation)과 황폐(desolation)가 이중창을 부른다. 마음이 한없이 내려앉는다. 몸도 함께... 알 것도 모를 것도 같다. 낮에 '교회 성폭력 생존자 치유 글쓰기 모임'을 하며 교회고 뭐고, 인간이고 뭐고 모든 것에 절망했다. 마치고 학교 가서 수업을 듣는데,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 아, 개신교와 가톨릭은 얼마나 먼가... (어느 순간 그리 가깝게, 전혀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때도 있건만...)

짧은 시간 안에 소개하기 어려운 복잡한(그 많은) 페르소나가 하나도 먹히지 않는 공간에 앉아 있자니, 신앙 사춘기 때부터 그렇게나 위로와 길잡이가 되어주었던 이냐시오 영신수련도 멀게만 느껴졌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자꾸 눈물이 났다. 위안(consolation)과 황폐(desolation)의 이중창이 제대로 진실의 노래였다. 아, 이건 이냐시오 성인 작사 작곡의 노래인데. 영신수련은 지금 내게 먼 것인가, 가까운 것인가... 쓰고 보니, 쓰다 보니 좌표가 찍어진다. 나의 좌표, 나의 현재는 여기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계인의 갈팡질팡이다. (루저, 외톨이, 센 척 하는 겁쟁이...는 아니지만) 여기도 저기도 속하지 못하는 외톨이 같다. 연구소 페이스북에 글을 썼다. '나의 구원사'를 쓰고 낭독했던 지도자 과정 모임 이야기이다. 그 시간을 떠올리니 마음이 뜨거워진다. 아, 다른 건 모르겠고 내 사랑의 좌표는 여기이다.영성이란 언제나 사랑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내 삶의 목적은 사랑 안에서 성장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없다.


❝당신이 과거의 사건을 회상할 그때그때마다 당신의 과거는 ‘개정판’으로 다시 쓰이는 것입니다.❞ _우치다 타츠루


과거의 기억을 다시 새롭게 써보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답습이 아니라 개정판 작업입니다. 최근 심리학 이론 중에 ‘현재주의’라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에 발을 딛고 과거를 봅니다. 어디서, 어떤 사람들과, 어떤 마음으로 과거를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지도자과정 마지막을 달리는 시간에 나의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상처 입은 치유자’의 어느 여정에 서 있습니다. 우리의 현재입니다. 자랑과 성취가 아닌 부끄러움을 나누며 무르익어온 만남입니다. 이런 현재에 서서 다시 써보는 과거는 또 새롭습니다. 새로운 개정판입니다. 이 ‘현재’는 사랑입니다. 에니어그램 내적 여정은 ‘사랑의 여정’입니다.

❝나에게 있어 에니어그램은 사랑 안의 성장에 관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은 사랑 안에서 성장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영성이란 언제나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_리처드 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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