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zine 4월호 원고랍니다.
책에 관한 얘기를 쓰는 것이긴 하지만 책얘기 보단 제 삶의 얘기가 더 많죠.
이번 글은 너무 힘들고 아프고 부끄러운 일이라서 클럽에도 쓰지 못했던 얘기를 썼네요.
글의 제목은 달지를 못해서 아직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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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기술> - 루이즈 스미디스, 배응준 옮김, 규장
<용서의 미학> - 루이스 스미디스, 이여진 옮김, 이레서원
누가 누굴 용서한다는 거예요?
여덟 살 다섯 살 두 아이가 토닥토닥 싸우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 눈여겨 볼 때가 있다. 엄마의 절대 권력을 행사하며 개입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꾹 참고 지켜보면 두 사람(아이)간의 갈등의 생성과 진행과 해결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공부가 된다. 여러 번 관찰하면서 얻는 결론은 ‘누가 누구보다 더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싸움의 빌미를 어느 한 편이 제공한 것은 분명하지만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리고 두 대 맞으면 최소한 그것 보다는 더 때리려 하면서 갈등을 심화시키는 걸 보면 결국 사소한 싸움을 갈등으로 갈등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것은 책임인 것 같다. 맨 처음 싸우게 된 원인은 온 데 간 데 없고 자신의 정당성을 위해 상대의 약점을 드러내고 비난하다가 피차에 약이 오를 대로 올라 극에 달하면 결국 ‘누나랑 안 놀아’ ‘나두 너랑 다시는 안 놀아’하고 파국을 맞는다. 비단 애들 싸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양상이 더 복잡하고 좀 더 고상하고 세련된 언어로 표현될지 모르나 성인이 된 이 엄마도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갈등을 겪고 심화시키며 괴로워하고 있는 것 같다.
‘순수하게 일방적인 과실에 의한 갈등은 없다’라는 생각의 전제 때문인지 나는 관계 문제 에 있어서 ‘용서’를 해결로 들고 나올 때 머리로 수긍이 되는 것처럼 마음으로 동의가 되지는 않았다. ‘내가 무슨 용서할 자격이 있는가?’하는 일종의 결벽증 같은 것이라고 할까? ‘용서’는 손양원 목사님처럼 무고하게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그 아들을 죽인 사람을 향해서 할 수 있는 것이지 쌍방과실인데 누가 누구를 용서한단 말인가? 쌍방과실이면 그 과실의 정도를 드러내고 보험처리를 해야지 말이지.
제가요? 제가 용서하라구요?
몇 년을 두고 화해를 시도했지만 좀처럼 화해는커녕 더 꼬여만 가는 가족 중 한 사람과의 관계문제가 있었다. 마음먹고 그 관계를 해결해 보자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오래 된 갈등이 한 번의 대화로 미끈하게 해결되지 않는 것은 충분히 상상된 일이었다.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고 하는 사건부터 시작해서 상대방과 내가 기억하고 있는 기억은 같지 않았다. 상처를 주고받았다는 그 무게 또한 동일한 저울로 측정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대화나 해명이 의미가 없다고 느껴졌고 무엇보다 상대방이 원하는 건 무조건적인 사과라는 것을 알았다. 모든 나의 논리를 포기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였다. 나에 대한 비난을 ‘맞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유야무야 그 대화의 장은 파장이 되었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나를 정당화하며 항변할 많은 말이 있지만 화해를 위해서 그것을 포기했다. 같이 화를 내고 비난의 화살을 퍼부어대는 것보다 잘한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생각지 못한 마음의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무릎까지 꿇으며 화해를 청하는 내게 끝까지 고자세를 버리지 않았던 상대방에 대한 새로운 분노가 마음속에서 끓기 시작하는 것이다. 지난 몇 년 간 받은 상처의 기억이 새롭게 각인되면서 분노의 끈은 나를 꽁꽁 묶는 것 같았다. 내팽개쳐진 자존심이 차거운 아스팔트 바닥에 밟히고 또 밟히며 뒹구는 듯하였고 그 날 그 순간을 생각만 해도 눈물이 쏟아졌다.
용서의 미.학.이라구요?
루이스 스미디스가 <용서의 미학>이라는 처방전을 주었다. 처방전의 제목을 보고는 ‘용서? 또 용서야? 여태 용서했는데 또 용서? 나 자신만 괴롭히는 용서?’ 하고는 심드렁하게 처방전을 펼쳐보았다. 루이스 스미디스는 내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용서한 적이 없는 것 같소’ 그랬다. 용서가 무엇인지 새로 배워야 했다. 내가 했던 것들은 용서라는 이름으로 묵인하고 그저 좀 이해하려고 애쓰고 때로는 용서의 모양만 빌려서 예수님 닮은 척 하려는 것이었다. 이 용서라는 처방전은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픈 기억에 사로잡혀 그 날보다 더 아픈 오늘을 살고 있는 나를 위한 것이었다. 용서를 통해서 그 고통의 순간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와 나를 꽁꽁 묶어서 결코 멈추지 않는 고통의 엘리베이터 안에 갇아 두게 되는 것이었다. 나를 위한 맞춤 처방전이었기에 책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꼭꼭 씹어서 먹고 조금씩 원기가 회복되어 갔다. 용서가 시작되었고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용서가 조금씩 되어가고 있으며 결국에 가능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관계의 회복이 지고지순한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사로잡혀 있던 내 자신도 보게 되었다. 과연 필립 얀시가 평한 대로 루이스 스미디스는 ‘용서 전문가’였다.
용서의 종착역은요?
그렇게 용서의 바다에 헤엄치며 은혜를 경험하고 있던 어느 날, 그 사람이 오래 준비하던 시험에 1차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상하게도 평온을 되찾았던 마음에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다. 단적으로 말하면 비록 내가 용서했을지언정 그 사람이 잘돼서는 안 된다는 유치한 시기심이 고개를 드는 것이었다. ‘나는 용서했으니까 내 대신 하나님께서 보복을 하셔야죠. 그러니까 제 앞에서 잘 되게 하지 마세요’ 요나처럼 울부짖었다. 그러자 또 다시 그 날의 기억이 아로새겨지면서 고통이 되살아났다. 용서의 마지막 단계는, 정말 용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지표는 ‘내게 상처 준 사람이 잘 되도 괜찮다는, 더 나아가 그 사람이 잘 되길 바라는 것’이라고 책에 씌여 있었다. 웬만큼 용서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나는 다다르지 못할 목표를 두고 애쓰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에 좌절이 되었다. 현명한 용서 전문가는 이런 염려까지도 놓치지 않고 위로하며 안심을 시켜주었다. 용서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분명하게 정했다면 용서의 긴 여정을 시작한 것이라고. 또 상처가 깊을수록 용서는 더디게 천천히 시간을 두고 될 것이니 서두르지 말라고 말이다.
그리고 어느 주일 예배에서 나는 찬양을 하고 있었다.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한 걸음씩 나가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시네.’ 그렇다.용서라면 도가 튼 분이 있지 않은가? ‘용서를 위해서 여기 태어났다!’ 라며 머나 먼 여행을 떠나오신 분이 있지 않은가? ‘내가 했던 방식 그대로를 다 가르쳐줄테니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갔던 그 길을 지나 한 걸음 한 걸음 용서의 여정을 걸어보자. 내가 있잖니’하며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손잡아 주시는 그 분이 느껴졌다. 그래. 진짜 용서 전문가와 함께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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