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zine 4월호 원고랍니다.

책에 관한 얘기를 쓰는 것이긴 하지만 책얘기 보단 제 삶의 얘기가 더 많죠.

이번 글은 너무 힘들고 아프고 부끄러운 일이라서 클럽에도 쓰지 못했던 얘기를 썼네요.


글의 제목은 달지를 못해서 아직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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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기술> - 루이즈 스미디스, 배응준 옮김, 규장

<용서의 미학> - 루이스 스미디스, 이여진 옮김, 이레서원



누가 누굴 용서한다는 거예요?

여덟 살 다섯 살 두 아이가 토닥토닥 싸우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 눈여겨 볼 때가 있다. 엄마의 절대 권력을 행사하며 개입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꾹 참고 지켜보면 두 사람(아이)간의 갈등의 생성과 진행과 해결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공부가 된다. 여러 번 관찰하면서 얻는 결론은 ‘누가 누구보다 더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싸움의 빌미를 어느 한 편이 제공한 것은 분명하지만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리고 두 대 맞으면 최소한 그것 보다는 더 때리려 하면서 갈등을 심화시키는 걸 보면 결국 사소한 싸움을 갈등으로 갈등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것은 책임인 것 같다. 맨 처음 싸우게 된 원인은 온 데 간 데 없고 자신의 정당성을 위해 상대의 약점을 드러내고 비난하다가 피차에 약이 오를 대로 올라 극에 달하면 결국 ‘누나랑 안 놀아’ ‘나두 너랑 다시는 안 놀아’하고 파국을 맞는다. 비단 애들 싸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양상이 더 복잡하고 좀 더 고상하고 세련된 언어로 표현될지 모르나 성인이 된 이 엄마도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갈등을 겪고 심화시키며 괴로워하고 있는 것 같다.

‘순수하게 일방적인 과실에 의한 갈등은 없다’라는 생각의 전제 때문인지 나는 관계 문제 에 있어서 ‘용서’를 해결로 들고 나올 때 머리로 수긍이 되는 것처럼 마음으로 동의가 되지는 않았다. ‘내가 무슨 용서할 자격이 있는가?’하는 일종의 결벽증 같은 것이라고 할까?  ‘용서’는 손양원 목사님처럼 무고하게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그 아들을 죽인 사람을 향해서 할 수 있는 것이지 쌍방과실인데 누가 누구를 용서한단 말인가? 쌍방과실이면 그 과실의 정도를 드러내고 보험처리를 해야지 말이지.


제가요? 제가 용서하라구요?

몇 년을 두고 화해를 시도했지만 좀처럼 화해는커녕 더 꼬여만 가는 가족 중 한 사람과의 관계문제가 있었다. 마음먹고 그 관계를 해결해 보자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오래 된 갈등이 한 번의 대화로 미끈하게 해결되지 않는 것은 충분히 상상된 일이었다.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고 하는 사건부터 시작해서 상대방과 내가 기억하고 있는 기억은 같지 않았다. 상처를 주고받았다는 그 무게 또한 동일한 저울로 측정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대화나 해명이 의미가 없다고 느껴졌고 무엇보다 상대방이 원하는 건 무조건적인 사과라는 것을 알았다. 모든 나의 논리를 포기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였다. 나에 대한 비난을 ‘맞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유야무야 그 대화의 장은 파장이 되었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나를 정당화하며 항변할 많은 말이 있지만 화해를 위해서 그것을 포기했다. 같이 화를 내고 비난의 화살을 퍼부어대는 것보다 잘한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생각지 못한 마음의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무릎까지 꿇으며 화해를 청하는 내게 끝까지 고자세를 버리지 않았던 상대방에 대한 새로운 분노가 마음속에서 끓기 시작하는 것이다. 지난 몇 년 간 받은 상처의 기억이 새롭게 각인되면서 분노의 끈은 나를 꽁꽁 묶는 것 같았다. 내팽개쳐진 자존심이 차거운 아스팔트 바닥에 밟히고 또 밟히며 뒹구는 듯하였고 그 날 그 순간을 생각만 해도 눈물이 쏟아졌다.


용서의 미.학.이라구요?

루이스 스미디스가 <용서의 미학>이라는 처방전을 주었다. 처방전의 제목을 보고는 ‘용서? 또 용서야? 여태 용서했는데 또 용서? 나 자신만 괴롭히는 용서?’ 하고는 심드렁하게 처방전을 펼쳐보았다. 루이스 스미디스는 내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용서한 적이 없는 것 같소’ 그랬다. 용서가 무엇인지 새로 배워야 했다. 내가 했던 것들은 용서라는 이름으로 묵인하고 그저 좀 이해하려고 애쓰고 때로는 용서의 모양만 빌려서 예수님 닮은 척 하려는 것이었다. 이 용서라는 처방전은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픈 기억에 사로잡혀 그 날보다 더 아픈 오늘을 살고 있는 나를 위한 것이었다. 용서를 통해서 그 고통의 순간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와 나를 꽁꽁 묶어서 결코 멈추지 않는 고통의 엘리베이터 안에 갇아 두게 되는 것이었다. 나를 위한 맞춤 처방전이었기에 책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꼭꼭 씹어서 먹고 조금씩 원기가 회복되어 갔다. 용서가 시작되었고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용서가 조금씩 되어가고 있으며 결국에 가능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관계의 회복이 지고지순한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사로잡혀 있던 내 자신도 보게 되었다. 과연 필립 얀시가 평한 대로 루이스 스미디스는 ‘용서 전문가’였다.


용서의 종착역은요?

그렇게 용서의 바다에 헤엄치며 은혜를 경험하고 있던 어느 날, 그 사람이 오래 준비하던 시험에 1차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상하게도 평온을 되찾았던 마음에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다. 단적으로 말하면 비록 내가 용서했을지언정 그 사람이 잘돼서는 안 된다는 유치한 시기심이 고개를 드는 것이었다. ‘나는 용서했으니까 내 대신 하나님께서 보복을 하셔야죠. 그러니까 제 앞에서 잘 되게 하지 마세요’ 요나처럼 울부짖었다. 그러자 또 다시 그 날의 기억이 아로새겨지면서 고통이 되살아났다. 용서의 마지막 단계는, 정말 용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지표는 ‘내게 상처 준 사람이 잘 되도 괜찮다는, 더 나아가 그 사람이 잘 되길 바라는 것’이라고 책에 씌여 있었다. 웬만큼 용서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나는 다다르지 못할 목표를 두고 애쓰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에 좌절이 되었다. 현명한 용서 전문가는 이런 염려까지도 놓치지 않고 위로하며 안심을 시켜주었다. 용서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분명하게 정했다면 용서의 긴 여정을 시작한 것이라고. 또 상처가 깊을수록 용서는 더디게 천천히 시간을 두고 될 것이니 서두르지 말라고 말이다.


그리고 어느 주일 예배에서 나는 찬양을 하고 있었다.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한 걸음씩 나가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시네.’ 그렇다.용서라면 도가 튼 분이 있지 않은가? ‘용서를 위해서 여기 태어났다!’ 라며 머나 먼 여행을 떠나오신 분이 있지 않은가? ‘내가 했던 방식 그대로를 다 가르쳐줄테니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갔던 그 길을 지나 한 걸음 한 걸음 용서의 여정을 걸어보자. 내가 있잖니’하며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손잡아 주시는 그 분이 느껴졌다. 그래. 진짜 용서 전문가와 함께 가는 거야!

        
조기옥 글 참 잘 읽었어요. 굉장히 힘들게 쓰여진 것 같아요...
제가 용서라는 단어를 받아들인 건 성경을 통해서 였어요.
그때 깨달은 것 중의 하나는 '더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용서하는 것이다'
'더많은 사랑을 가진 사람이 용서하는 것이다' 였어요.

누군가를 용서해야 할 대상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도 내가 더 나이많은 사람이 되는 것이며,
나이가 어린 상대에게 내가 용서를 받았다면 그가 나보다 나이많은 사람이라는 것...
그러니 나이와 성별을 떠나 용서를 하는 사람은 상대보다 더 많은 사랑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일 거예요.
아마도 용서해줄 상대가 도저히 납득, 이해 불가, 불가, 불가한 상대일지라도 용서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들었다는 건 내 마음 안에 더많은 사랑이 들어와 자리잡고 있다는 뜻이지요.
상대가 나의 용서를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그건 내 몫이 아니라는 것.
사랑이 이미 상대에게 넘어간 것이니까요.

다만 사랑이란 언젠가 봄눈 녹듯 강팍한 마음을 녹여낸다는 진실만은 버리지 않은채
서서히 놓아버리는 것, 그것이 용서인 것 같아요.
용서를 한다는 건 어찌보면 신의 영역이었던 것인데 우리가 하나님 흉내라고 낼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용서가 아닐까 생각해요. 에구 열심히 흉내라도 내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거이 참 힘들지요...

저도 한동안 무지무지 힘들때 성경에서 그걸 깨닫고 펑펑~ 펑펑펑펑~ 울었답니다...^^ (07.03.03 00:03) 댓글삭제

정신실을 보면서 성격검사일 뿐인 MBTI에 심하게 목숨건다고 느끼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이것이 좋은 도구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내게 준 의미가 너무 크기 때문일 것이다.

MBTI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믿음의 큰 산 하나를 아직도 넘지 못하고 산기슭에서 넘어지고 피흘리고 있을 것이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사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또 내가 잘 짓는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날이 갈수록 음악치료보다 MBTI 강의하는 일이 더 재밌고 보람이 있다.


남편이 만들어준 MBTI ppt 첫 페이지.

MBTI강의를 할 때마다 충실한 메니저가 되어주는 남편에게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고맙다.




여행의 마지막 날은 오전 오후 다섯 시간 정도의 강의로 마무리 되었다.

지리산의 한 수양관에서 정말 때묻지 않은, 예전 우리의 중고등부 시절이 생각나게 하는 청년들과 함께 했다.


요즘 교회에서 예전 주일학교에서 가르쳤던 애들이 청년이 된 모습을 보면서 감회가 새롭다.

그 녀석들 중 지나다니면 만나도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인사도 안 하는 녀석들이 있다.

가만 보면 청년부에 엄청 열심이고 목장모임도 열심인 것 같은데, '아~ 녀석들 인사좀 먼저 배우지'하는 생각에

노인네처럼 섭할 때가 많다.


마산의 한 교회 청년부였는데 어찌나 인사들을 잘 하고,

강의하는데 반응을 많이 보이고,

어찌나 순수하게 열정적으로 찬양들을 잘 하는지...

이런 청년들 데리고 사역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MBTI웍샵을 하다보면 반드시 이런 면학분위기가 한 장면 연출된다.

MBTI 강의를 거듭하면서 남편의 모니터링에 의해서 강의 형식이 보완되고 또 보완되곤 하는데...

처음으로 강의를 마친 후 자신을 돌아보는 기도회 시간을 가졌다.

나를 돌아보면 나를 독특하게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정죄하고 내 마음에서 밀어냈던 형제 자매를 생각하며 회개, 결단을 하고,

공동체가 아름답게 세워지도록 기도하였다.


이것은 결국 나의 기도가 되었다.

오전 내내 기도회진 집횐지 공동체 훈련인지 모르겠는 웍샵을 마치고 오후에는 남편과 함께 '연애와 결혼'강의를 하였다.



각각 우릭 들고 하는 강의안.
몇 개의 주제를 놓고 그야말로 만담 식으로 주거니 받거니 얘기를 한다.
 
 

<복상>에 글을 쓴 이후로 '연애와 결혼'에 대한 강의를 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두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서 결혼한 얘기를 솔직하게 하는 것에 제일 도움이 될 것이다.

라는 생각으로 둘이 나란히 서서 '만담' 식으로 가끔 서로 티격태격하기도 하면서 강의를 한다.

이 강의를 마치고 '여보! 당신하고 헤어졌을 때 정말 죽을 것 같이 힘들었었는데....이런 때 이렇게 후배들 도우라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건가봐' 하는 얘기를 했다.

싱글일 때의 외로움, 만남, 스킨쉽, 헤어짐, 결혼준비, 신혼.

연애와 결혼에 관한 책에서 나오는 어떤 주제도 우리의 경험을 비켜가지 않았으니 강의를 준비하기 위한 삶의 경험 같았다.


우리의 만남과 지금까지의 10여 년의 삶을 찬찬히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어느 순간에는 가슴이 떨리고 목이 메였다.

그리고 내 곁에 섰는 이 사람, 가장 큰 선물로 주신 이 사람과 함께 주의 길을 가겠노라고 조용히 다짐이 되었다.


한창 강의가 무르익을 무렵 창 밖에는 오전부터 흩날리던 눈이 함박눈이 되어 쏟아지고 있었다.

강의의 마무리를 남편의 기타 반주에 맞춰서 내가 노래 한 곡,

둘이서 축가로 불렀던 노랠로 듀엣 한 곡을 불렀다.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따스한 따스한 가정 희망 주신 것 감사

아픔과 기쁨도 감사 절망 중 위로 감사

내일의 희망을 감사 영원토록 감사해

 

아~ 나의 고백이다. 아픔과 기쁨도 감사...


나에게 당신은 주님께서 배푸신 사랑의 노래

아침을 비추는 밝아오는 해처럼 빛나는 기쁨

우리는 서로 마음으로 하나된 위로의 손길

당신은 언제나 아름다운 꽃처럼 향기를 주네

절망과 아픔 근심 우릴 흔들어도 기도는 위로와 힘이 되리니

때때로 넘어짐은 우리 주님께서 사랑을 완성케 함이라

내 맘 속에 한 가지 간절한 소망은 당신과 영원히 주님 노래 하는 것

언제나 항상 우리의 맘 속에 주님 사랑 늘 거하시리


아~ 이 얼마나 멋진 여정인가?

일주일의 여행 끝에 생각지도 못했던 이 노래로 우리의 여행를 끝맺게 하시다니...

청년들의 부러운 눈길을 받으며 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그야말로 함박눈은 펑펑펑펑 쏟아 부었다.

마치 내 마음에 쏟아지는 주님의 위로처럼,

우리 가정에 주시는 소망처럼....


너무나 완벽한 그 분의 여행계획이었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완벽한 계획이었다.


 
안타깝게도 마지막 날 사진은 없다.
나오는 길에 채윤이가 한 장 찍어줘서 건진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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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도 한 번 못 가보고....'

'우리는 신혼여행도 제주도로 가고....이게 뭐야'

가끔 이렇게 남편 들으라고 일부러 신세 한탄을 한다.


그런데 해외여행을 정말 가고 싶다고 생각하진 않는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여행은 여행의 목적지가 아니라 '가는 길' 그것 때문이 아닐까?


여행이 좋고 들뜨는 이유는 고속도록 휴게소에서 마시는 커피가 좋아서이고,

무엇보다 길을 따라가며 끝없이 나누는 대화 때문이다.




 

남편 역시 여행 중에 그런 얘기를 했다.

'나는 어디를 가서 좋은 것보다 이렇게 모르는 길을 찾아가는 게 제일 신나'


그렇다. 여행이 좋은 이유는 '길'을 따라 함께하는 대화가 있기 때문이다.

'이거 섬진강변인가? 어딘가를 지나면서 했던 얘기 같은데...'이러면서 나중에 말하게 되는 것도 참 좋다.




 


 

5.18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서 알고나서,

그리고 임철우의 <봄날>을 읽고나서,

보성, 화순, 벌교, 구례, 주남....이런 곳의 지명만 들어도 마음이 찌릿찌릿한 것이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좋았던 많은 것들 중 하나가 나 역시 그 말로만 듣던 곳들을 눈으로 보고 발로 밟아 봤다는 것이다.




길을 따라가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화개장터'에 까지 가보게 되었다.

여기서 산 단밤과 은행 구운 것이 어찌나 맛있었는지....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하루 하루 이 길을 걷다가...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에

하늘로 돌아가서,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이번 여행을 몇 개의 여행이 짬뽕된 느낌이다.

민들레 공동체과 소석원, 그리고 진주북부 교회에서의 2박3일은 '배우는 여행'이었다면.

중간의 1박2일은 '즐기는 여행'이었다.

결국 즐김, 배움, 가르침이 다 어우러진 것이 여행이긴 하지만 말이다.

암튼, 우리 네 식구가 어디 가서 처음으로 우리 끼리만의 밤을 보내게 된 역사적인 날이다.

(여기 저기 많이 다닌 것 같은데 그 때마다 부모님을 위한 여행이었기에 여행보다는 효도 쪽이 무게중심이 있었다)


어떻게 가든 '보성만 가면 된다'는 생각으로 출발한 수요일 오전이었다.

남해에 들러 충렬사와 이순신장군의 흔적을 돌아보는 (남편 표현에 의하면)성지순례를 하고,

광양 제철소를 경유(이 때는 세 식구는 모두 자고 운전자만 살아 있었다),

순천 시내 파리바게뜨에 들러 점심으로 먹을 빵과 우유를 샀다.


 
 

그리도 가보고팠던 보성차밭을 들러서 율포의 녹차해수탕도 들러줘야지~

현승이와 아빠는 남탕, 채윤이는 엄마와 여탕이 좋겠지만,

'니네 둘이 함께 있어야 놀 수 있잖아. 같이 엄마랑 가야겠네' 하고 두 아이를 내가 데리고 들어갔다.

계속 운전하는 남편에게 좀 쉴 시간을 줘야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결국 남편은 빨리 씻고 나와서 숙소를 알아보러 다녔다.


보성 차밭이 쫘~악 내려다 뵈는 언덕 위의 팬션으로 숙소를 정했다.

저녁을 먹고 들어갔는데 1층 찻집에서 녹차를 얻어 마실 수 있었다.

좋은 녹차를 마셔보니 처음으로 '녹차 향기'가 뭔지 알 수 있었다.

동서현미 녹차에서는 결코 느껴볼 수 없었던 맑고 은은한 녹차향 말이다.



 

아이들을 재우고 별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서 나누는 이런 저런 얘기들.

내게 가장 쉼이 되고 위로가 되는 시간은 어쩌면 이런 시간이다.

음악이 있고, 사방은 조용하고, 아무 방해없이 남편과 이런 저런 삶의 얘기, 아이들 얘기, 하나님 얘기를 나누는 시간.



다음날 아침 느지막하게 일어나서 녹차밭을 한 바퀴 산책을 하고 어젯밤에 사 둔 우유와 시리얼로 아침을 했다.



 


저렇게 녹차밭이 훤히 내다뵈는 곳에서 잠을 자고, 아침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급히 짐싸서 나오기는 아까운일 아닌가?

햇빛 드는 창가에 앉아서 다이어리에 여행에 관한 기록들를 끄적이고,

책을 보고,

내일 있을 강의 준비를 하고...

아이들은 또 놀이에 빠져있고.

이것이 과연 안.식.이 아니겠나.



 

가족.

학교 다닐 때 학기 초만 되면 그런 조사를 한다.

"편부 편모 가정 손 들어봐!"

그나마 좀 나은 선생님을 그럴 때 눈을 감으라고 한다.사실 눈을 감아도 소용이 없다.

눈을 떴을 때 이미 붉어진 내 얼굴과 귓볼 같은 것을 본 친구들이면 바로 알 수 있었을 테니까.

엄마랑 동생 나. 이렇게 세 식구 사는 게 막상 그다지 불행하지도 않았는데도 '편모가정' 이런 말들은 당연히 불행하고

당연히 불쌍해야 할 것 같이 여겨졌다.


결혼을 해서 또 다른 가족이 만들어졌다.

엄마, 아빠, 딸, 아들. 구색이 딱 맞는 가정이다.

외형적으로 구색이 딱 맞아서 좋기도 하지만 어디서든 자신있게 말하듯 우리 부부에게 결혼은 '치유'였다.

많은 상처와 열등감, 외로움에 대한 치유였다.


다음 날 있었던 결혼 강의에서 이 얘기를 결론적으로 했다.

찬양 중에 '따스한 따스한 가정 희망 주신 것 감사'하는 가사가 있다.

청년들이 지금의 가정에서 외형적으로 내적으로 받은 상처가 있다면 내가 만들 가정에 주실 복을 기대하면 기도하라고.

'따스한 따스한 가정'을 꿈꾸고 기도하면 이루어 주신다고.


내 인생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가장 귀한 선물. 가족.

민들레 공동체에서 나와 어딘가를 간다는데...

도대체 거기가 어딘지 사전 지식이라곤 없었다.

 

어떤 사람이 '거기는 겨울보다 가을 단풍 때가 더 이뻐'하는 얘기를 들었을 뿐이다.

까펜가? 아니면 무슨 전시관?

 


 

입구에 들어서면서 확신을 했다. 아~ 카페구나.

바닥이며 담을 돌로 쌓아 만든 멋진 카페같은 곳인데 카페라 하기에는 건물이 너무 후지고,

무엇보다 써빙을 보시는 분이 웬 할아버지라는 게 영 부적절했다.

커피들 한 잔 씩 들으라고 하시면서 물을 끓여 나오시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싶었다.

날씨가 그리 춥지 않아서 돌로 만든 의자에 죽 둘러 앉았다.

인솔해 가신 전도사님이 '할아버지 얘기 좀 들려 주세요'하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당신 얘기를 쏟아 놓으셨다.

 


 

얘긴즉슨, 여기 있는 모든 돌이 30여년 동안 할아버지 혼자서 옮겨다 놓으신 것이다.

저 많은 돌들을 옮겨다가 이렇게 멋진 정원을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20대의 젊은 시절에 가족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병든 몸으로 이 산골에 들어 오셔서

움막을 하나 짓고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노래를 가르치셨단다.

비가 오는 날에는 땅이 젖어 웅덩이가 생기고 흙탕물이 되는데 돌을 몇 개 놓고 밟고 다녔더니 '거 좋네' 하시고는

시작하신 일이 여기에 돌을 옮겨다 놓는 것이었다.

 

그렇게 살아오신 세월이 50년이 된다는 것 아닌가?

혼자 그렇게 고독을 벗삼아, 고난을 친구 삼아, 돌을 가족 삼아 살아오신 것이다.

고독과 고난의 길이 천국 가는 가장 빠른 길인 것을 삶으로 배우며 살아오신 것이다.



 

그렇게 사시다 결혼하신 지 8년이 되신단다. 결혼으로 따지면 우리랑 동기가 되시는 것이다.^^

결혼 8년차 답게 할머니랑 어젯밤에 티격태격 하셨단단. 할머님은 지금 방에서 성경을 읽으면 근신 중이라면 농담도

잘 하셨다.

 

저 많은 돌들을, 아니면 저렇게 큰 돌들을 어떻게 혼자서 다 옮겼단 말인가?

모두들 저걸 어떻게 옮겼느냐고 하는게 하루에 한 두 개씩만 옮겨도 30년이면 어떻게 되느냐 반문하신다.

그러면서 '저 놈은 15년, 저 놈은 7년'이 걸렸다면서 엄청나게 큰 돌들을 가리키셨다.



 


 

마당 한 가운데 연못과 연못 옆에 세워둔 경고문(!)이다.^^

 

오랜 고독의 시간 동안 고난도 개구리도 돌도 바람도 친구가 되지 않겠는가?

자작곡의 노래도 많이 있으시단다. 디카를 동영상 모드로 돌려 놓고 '노래 좀 들려 주세요' 했다.

그랬더니 작품해설과 더불어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가르쳐 주셨다.

 

'돌이 돌이 돌돌,

 돌이 돌이 사네

꽃도 꽃돌

꽃돌 사네'


어찌나 멜로디와 가사가 귀에 쏙쏙 들어오는지 여행 내내 애들과 함께 불러댔다.

 

당신의 얘기를 다 풀어 놓으신 후에 '이렇게 힘든 삶은 누가 살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살라고 부르셨으니까 살지'

결국에 '소명'이다.

소석원으로 가던 차 안에서 남편과 했던 얘기다. 지난 밤 만난 김인수박사님을 생각면서

'이 분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에 살고 계신 것 아닌가?' 즉 '소명' 얘기였다.

이 할아버지도 '소명'의 삶을 사셨다는 것이다. 외로움과 고독 속에 묵묵히 돌을 나르면서 삶을 가꾸라는...

그렇게 살다보니 결혼도 하고 지금처럼 행복한 날도 살아본다고 하신다.

 

'소석원(笑石園)'

돌들이 웃는 정원?

이 분이 사시는 동네 이름이 '鳴石마을'이란다. '우는 돌'들이 '웃는 돌'들이 된 것이다.

어디 이 할아버지의 인생이 '웃음'이 웃어지는 삶이겠는가?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당신 스스로 웃고 계셨고,

돌들이 주인을 따라 웃고 있고, 소석원 곳곳에 유머와 웃음이 베어 있다.

 

부끄럽다.

울 일도 아닌 일에 가슴을 치며 울어대고, 분통을 터뜨리고, 억울에서 펄쩍펄쩍 뛰는 내 삶이 부끄럽다.

소석원 할아버지의 웃음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야 겠다.

그 소명이 무엇이든지, 고난이든지, 외로움이든지, 짓밟힘이든지...

소명에 충실한 하루하루를 살다보면 결국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웃음을 웃게 된다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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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은 오래되던 우울의 터널을 빠져나오기 프로젝트였다.

예전에 복지관에 다닐 때였다.

채윤이를 보시던 엄마가 골다공증과 고혈압으로 쓰러지다시피 하시고 7개월 채윤이를 하남에 맡기고 사당동에서 살던 때다.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쳐 있어서 헤어날 길이 없었다. 엄마를 봐도 채윤이를 봐도 눈물만 흘렀다.

'쉼'이 필요했다. 몸과 영혼이 쉬면서 찾아야할 것들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장염에 걸려서 밥도 못 먹고 열은 오르락 내리락...링거를 맞고 버티는 상황이었다.

또 설상가상. 8개월된 채윤이가 장이 꼬여서 한 밤을 지새우면 고양이 울음을 내며 고통스러워하다 입원을 했다.

 

바로 그 때!

서울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고 내가 다니던 복지관이 완전 물에 잠기는 바람에 곡절 끝에 한 달 휴관을 하였다.

한 달이 아니라 한 40여일 되었던 것 같다. 즉, 40여일 휴가를 받게 된 것이다.

사람 사람마다 여러 다른 상황이었겠지만 그 때 그 40일은 분명 내게는 하나님이 주신 특별휴가였다.

 

이번 여행도 그와 비슷한 셈이다.

원래는 금요일에 지리산에서 MBTI 강의와 결혼강의를 하는 계획이 있었고 목요일에 아이들 두고 남편과 함께 내려가기로 했었다.

갑자기 월,화 이틀간 민들레 공동체 탐방이 있으니 함께 가자는 연락이 왔다.

같이 가고 싶은 마음 있었으나 일주일에 장거리 여행을 두 개를 잡는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때 남편이 제안을 했다. 어차피 둘 다 지리산 근처니까 애들 데리고 일주일 동안 여행을 하자.

잠은 민들레 공동체에서 이틀, 지리산 수련회장소에서 하루, 그리고 찜질방에서 하루 자면 된다!

 

돌파구가 필요하다고 느껴졌기에 그러겠노라 했다.

 


출발하면서 함께 기도했다.

"하나님 이번 여행에 함께해주세요.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교제하고,

우리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사랑을 확인하고,

회복되는 여행이 되게해주세요"




외향형이긴 하지만 감정형인 나는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다.

쌩판 모르는 사람을 적극적으로 사귀는 자리로 가는 것도,

처음보는 사람들에게 찾아가 더플더플 말을 건네고 하는 것도 내게는 꽤 불편하다

남편의 학교 동기들을 만나서 하룻밤을 보내는 일이 그래서 부담이 되었다.

그래도 민들레 공동체의 대표이신 김인수박사님이 정말 괜찮은 분이라니

(남편이 지난 학기에 한 번의 특강을 듣고는 그 분의 인격과 삶에 뿅 가버렸다)

나머지 것들은 훈련이라 여기며 공동체를 찾았다.

 

산책을 하고, 장작을 패 보고, 불을 피워 고구마를 구워 먹고,

그리고 한 30여 년 만에 '자치기'를 하며 오후를 보냈다.

가끔씩 '자치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정말로 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놀이의 정확한 순서가 생각나질 않았었다.

공동체에 사는 준규라는 아이가 자치기를 갖고 놀길래 같이 하다보니 그 순서가 새록새록 생각이 난다.

그저 각자 또는 같이 마음 가는대로 시골의 정취를 마음껏 느꼈다.






저녁을 먹고 김인수박사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도대체 시대정신이 무엇인지도 모를 요즘의 시대, 세계화, 도시...이것에 대한 대안을 '공동체'에서 찾았고 성공하신 분이다.

다 옮겨 적을 수 없는 주옥같은 말씀들이다.

이 말씀이 주옥같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다. 삶과 말이 다르지 않다는 것.

20년 동안 삶으로 살아낸 얘기를 하는데 어찌 감동과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공.동.체.

이 분이 하고 있는 공동체란 무엇인가? 같이 먹고 자고 서로의 삶을 평생 경제적으로 책임져주는 공동체이다.

이것을 위해 먹을 것을 비롯해서 전기까지도 자급자족을 하신다.




그냥 자전거가 아니라 저걸 타고 패달을 밟으면 전기가 만들어지는 발전기 자전거다.

이것과 풍력발전 등등으로 전기까지 자급자족할 뿐 아니라 조만간 남는 전기를 한전에 팔 수도 있다한다.


그러나.

먹고 입고 사는 것이 해결된다고 어디 공동체가 굴러가는 것이더냐?

공동체로 모인 사람들의 문제, 즉 '관계문제'에서 발이 꼬이지 않는 것이 공동체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의문을 품고 어설픈 질문을 해봤으나 그리 힘겨워 하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잠깐 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느낄 수 있는 인격의 아우라가 분명 있었다.

사람들 때문에 힘든 것이 왜 없을까만은

'부름심'에 충실한 삶을 살려할 때,

'자기'가 비워지고 또 비워졌을 때는 다른 눈과 귀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가르치다니요? 우리가 뭘 가르칠 수 있습니까? 그저 살라고 하신 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절대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은 둘이 아닙니다"

목사가 되어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야겠다고 하는 신대원생에게 그렇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여러분보다 성경을 모른다고 생각하세요? 인터넷으로 좋은 설교 얼마든지 들을 수 있고요...

여러분의 설교로 사람들이 정말 뭘 배우게 될까요?"

그렇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남편이 목사가 되고 설교를 할건데 설교를 통해서 정말 뭔가를 가르칠 수 있을까?

가끔씩은 평신도로 앉아 있는 나도 여러 설교들을 무시하고 귀를 막을 때가 있다.

 

문제는 삶이다.

이 분의 말씀이 하나 하나 귀에 쏙쏙 들어오는 것을 진한 삶의 향기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뭘 가르치겠다'는 의식이라곤 없이 그저 열심히 하나님 앞에서 살아낸 고백이 있기 때문이다.

남편의 설교가 교역자로서의 특권의식에서 나오지 않기를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감시하리라.

도시 교회에서의 대안을 무엇을까 하는 질문에 교회 속 교회, 즉 소그룹 공동체를 언급하셨다.

삶은 결코 사람들과 유리되어서는 안된다.

교역자는 성도들과 일정정도의 거리를 두어야 한다든지,

목사나 사모는 자신의 삶의 얘기를 성도들과 할 것이 아니라 교역자들 끼리만 나누는 것이 미덕이라든지,

이런 의식이 남편과 내게 둥지를 틀지 않았으면 좋겠다.

삶이 있는 설교는 위해서는 늘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개방하고 함께 기도할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

 

피곤한 시간이었지만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마음의 귀까지 쫑긋 세우고 말씀에 집중했던 것은

이번 여행을 통해서 들려주시고자 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거기 베여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때로 박사님의 말씀과 전혀 상관없는 통찰이 마음에서 울렸고 그것 역시 성령님의 울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기도방이다.

여기 들어가 기도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선뜻 행동에 옮기질 못했다.

언젠가 여기에 다시 가서 오랜 시간 머물고 또 저기 앉아 기도하는 시간이 다시 오지 않을까?




 

나는 이상하게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는 사진 찍는 걸 잊는다.

아니면 이런 순간에 카메라를 드는 건 너무 수선을 떠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박사님 얼굴은 담아오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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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부터 어저께지 짧지 않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금요일에 지리산에서 MBTI 강의와 결혼 강의가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남편과 둘이 목요일에 내려가기로 했었는데 갑지가 월,화에도 지리산 근처에서 일정이 생겼습니다.

남편 신대원의 '농촌을 생각하는 모임'에서 공동체 탐방을 간다고 하였습니다.

'민들레 공동체'라는 곳인데 학기 중에 남편이 거기 대표되시는 분께 특강을 듣고는 완전 뿅가서 왔더랬습니다.

생각과 삶이 너무 멋진 분이라고...

대안학교도 시작한다니 채윤이 초등학교 가는 마당에 여간 끌리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공동체 탐방도 따라 가겠노라 했습니다.


남편이 아예 애들 데리고 내려가서 일주일 그 쪽 여행을 하면 어떻겠냐 했습니다.

방학이라 일이 많이 줄기는 했지만 일을 하고 있는터라 어떨까 했는데 다행이 스케쥴 조정이 되고

정말 좋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남편이 여행을 제안하는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 달이 넘게 정서적 터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저를 위한 배려였지요.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주일을 보내리라 마음 먹고 아이들과 함께 떠났던 여행.


한 두 편의 글로 다 말할 수 없는 좋은 것들로 가득찬 시간이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귀한 만남,

나를 돌아보게 하는 만남들,

환대와 섬김,

우리들만의 노래와 이야기,


넘치는 위로가 된 여행이었습니다.


마지막에 먹은 밥이 체해서 어젯밤 집에 돌아오자마자 약 먹고 일찍 자야했지만 그것까지도 감사한 여행의 일정인 것

처럼 느껴집니다.


여행 마지막 날에 남편과 함께 결혼 강의하면서 남편이 그런 결론을 내리더군요.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증거로 주신 선물이 바로 아내'라고요.

남편, 아이들, 사람들, 소명, 은사...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좋은 선물들을 다시 리필 받아서 돌아온 느낌입니다.^^


그 선물 얘기를 하나 하나 정리해두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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