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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첨으로 그런 적나라한 욕을 면전에서 바가지로 먹어봤다.
어제 치료하러 월곡동에 가는 길이었다. 유턴을 하기 위해 짧은 거리에서 차선을 바꿔야 했다.
오토바이 하나가 천천히 오고 있었고 무리가 되지 않게 차선을 바꿨고 신호를 기다리느라 섰는데...
그 오토바이가 옆에 와서 붙더니만 다짜고짜 기가막힌 욕을 퍼부어댔다.
내 생전 그렇게 막하는 욕을 내 면전에 대고 그렇게 길게 하는 걸 첨 들어봤다.
하도 기가 막혀서 입을 벌리고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눈물이 줄줄 흘렀다.
하도 기가 막히고 멍해서 어떻게 신호를 받았는지도 모르게 신호 받아 유턴을 하고 오토바이는 갔나부다.
눈물이 막 흘러내리는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서러움이 복받쳐 왔다.
그 서러움은 오늘만의 일이 아니라 최근에 이런 일을 한 번 더 당했던 기억이 있는 것 같았다.
쉽게 생각나지 않아서 '언제였던가?'하고 되짚어 보았다.
생각해보니 이런 일이 아니었다.
그 서러움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라고 정리되는 그런 정황들이었다.
그 오토바이가 운전 중 그리 잘못한 것도 아닌 다른 운전자에게 다짜고짜 쌍욕을 퍼부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여자이기 때문이다.
남자였으면 욕을 했어도 그렇게 심하게 하지 못했을 것이고, 게다가 덩치가 있고 인상이 더러운 남자였으면 욕은 커녕 꼬리를
내렸을지 모를 일이다.
그 순간에 마음으로 '주님! 주님 다시 오실 그 날에 이 불평등과 부조리를 회복케 하실거죠?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남자들로부터
무시당하는 이 부조리한 세상을 처음 창조하셨을 때의 아름다움으로 회복시키실거죠?' 이런 기도도 아니고 독백도 아니고 대화도 아닌
말이 마음으로 차올라왔다. 너무 황당한 독백이며 기도일까?
2.
여자들의 더 힘이 없고 약한 몸은 하나님이 이 땅에 생명을 주시는, 출산과 양육을 위한 축복의 통로로서의 몸이 아닌가?
예전에 채윤이를 갖고 입덧을 심하게 할 때 어느 분이 '입덧은 부모한테 보내는 아기의 싸인'이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이제 막 아기가 생겨서 자리잡아가고 있는데 몸에 배가 부른 것도 아니고 몸에 별다른 자각증상이 없으면 엄마가 조심하지
않을 수 있을테니 싸인을 보낸다는 것이다.
말이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에게 양분을 주기 위해 더 먹어도 모자랄 판에 그 무엇도 먹을 수 없는 미식거림과 구토가 있다는 건
내 몸에서 얼마나 위대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를 인식하라는 아이러니다.
그러고보면 여자들이 신체적으로 남자보다 연약한 것은 '생명'에 대한 하나님께서 숨기신 깊은 뜻이 있는 지도 모른다.
남자처럼 근육이 많고 뼈가 굵고 과격한 운동을 좋아하도록 했다면 생명을 잉태하고 열 달을 품는데 얼마나 더 많은 주의가 필요할
것인가? 막 굴릴리야 굴릴 수 없는 연약함은 '생명'을 위한 축복이 아닐까?
3.
생명을 잉태하고 품고 양육하기 위해서 매여 있어야하는 여자들의 이 연약함은 고스란히 '핸디캡'이 되어버렸다.
거리에서 운전 중에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욕을 얻어 먹어도 싸고,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소명을 받아 간 신학교에서 '여성 목사 불가'라는 논란을 몸으로 받아내며 상처만 받고 있어야 하고....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산천초목도 타락으로 인해 훼손된 것으로부터 회복된다 하는데....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상처받는 이 땅의 절반의 사람들에게 온전한 회복의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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