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같은 성령 임하소서. 지금 임하소서. 태우소서. 역사하소서’ 이런 가사의 찬양을 애타게 부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수련회나 기도회에서 이런 류의 찬양을 부를 때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에 엄청난 방점을 찍는다. 갈급한 마음으로 그야말로 목마른 심정으로 ‘지금, 바로 지금이요!’를 목 놓아 외쳤었다. 첫 기억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중학교 1학년 여름 수련회 때였다. 여전히 나는 멍석만 깔린다면 ‘성령이여. 임하소서. 지금, 바로 지금 임하소서’라고 부르짖을 태세가 되어있다.
유난히 성령 하나님을 구할 때의 목소리는 애가 타고 시급한 것 같다. 이렇게 급하게 임하시는 성령의 임재를 구하다가 오늘날 우리가 이 모양 이 꼴이 됐는지도 모른다. 눈앞에서 턱턱 사람을 쓰러뜨리고, 방언이 터지게 하고, 불치병을 치유하시되 이 모든 일을 순간적으로 처리하시는 분, 심지어 한 사람의 인격조차도 순간적으로 전혀 다르게 바꿔놓으시는 분으로 성령님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믿음이 이렇듯 ‘바로 지금, 눈에 보이는 복’을 따라 부유하는 가벼움인 것은 그 오해에서 비롯한 것은 아닐까.

그리스도인 즉, 예수쟁이 된 우리는 ‘예수의 음성’을 사모한다. 고든 스미스는 그의 책 <예수의 음성>에서 말한다. 예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라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성령께 응답하고, 인도함 받고, 그분을 따라 행하는 것이라 한다. 성령께 응답한다고? 매년 수련회 때마다 그렇게 애타게 불러도 또렷한 답이 없으셨던 성령님에게 내가 도리어 응답을 한다고? 그렇다. 오순절 사건의 매우 큰 의미는 모든 신자가 각.자. 자.신.의. 삶. 속.에.서. 성령의 직접적인 임재를 알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우리의 ‘속사람’에 대한 성령님의 직접적인 감화에 대한 균형 잡힌 분별에 대해 안내한다. 그 안내에 마음의 귀를 열어 젖어들다가 어느새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경험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책을 읽다가 성령 충만을 받는다? 내게는 가물어 메마른 땅에 폴폴 먼지만 날리던 날이 있었다. 영혼의 메마른 나날이 오래 지속되었다. 방언을 주시던가, 하다못해 능력 있는 사역자의 ‘터치’를 통해 기름부음을 주시던가 어떻게든 좀 해달라는 마음만 간절했다. 그 때 손에 들려진 이 책을 통해 인격이신 성령님이 나의 감정과 지성이 교차하는 속사람 안에 아주 가까이 계심을 알게 되고 느.끼.게 되었다. 독서라는 지적인 활동을 통해 내게 아주 가까이 계시는 성령님을 느끼게 되었다니 기적이라면 이런 것이 기적이 아니겠나? 성령을 통한 예수의 음성은 ‘양철 지붕에 소낙비 떨어지듯’이 아니라 ‘스펀지가 물에 젖듯’ 임하는 것임을 마음으로 깨닫고 느끼게 된 것이다. 중학교 1학년 그 여름의 수련회 때 시작된 긴 목마름이 그렇게 해갈된 것 같았다. 능력을 행하는 성령사역자가 아니라 영성 깊은 신학자의 차분한 가르침으로 말이다.

<성령충만, 실패한 이들을 위한 은혜>의 저자 박영돈 교수는 존 오웬을 인용하여 말한다. ‘신약시대에 하나님을 섬기던 유대인들이 성자 하나님을 배척했다면, 교회시대의 신자들은 성령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다.’고. 수천 년을 기다리던 메시아가 갈릴리 빈민촌의 무력한 목수의 아들일리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능력주의 시대에 세미한 음성으로 일하는 성령님이라니 가당키나? 질병과 인생의 문제들을 꾸짖어 떨쳐내는 ‘왕의 권세’가 필요할 뿐이다. 사랑을 확증하고 죄를 깨닫게 하는 성령님? ‘하나님 아냐, 눈앞에서 능력을 보여주지 않는 하나님은 좀 그래’ 이렇게 우리는 성령하나님을 거부한다. 이러한 세대를 향해서 ‘불을 뿜어내는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 ‘시들게 하고 쇠하게 하는 성령의 후폭풍’을 설파하는 신학자의 뜨거움 외침을 들을 필요가 있다. 성령 충만에 관한 깊은 신학적 통찰이 담긴 글의 행간에서는 한국교회를 향한 저자의 아프도록 절절한 애정이 읽혀진다. 성령의 은사를 도구삼아 스스로 영광을 취하는 자칭 성령사역자들과 목회자들이 들어야 하고, 영적 조급증에 허덕이며 그런 지도자들의 설 자리를 만들어주는 우리들이 들어야 한다. 성령님에 대해서 새롭게 배워야 할 때이다. 배우고 깨닫다가 느껴지고 들리는 참된 기적이 있기를.
* <QTzine> 7월호, 주제가 있는 책 소개 - 성령충만

브레넌 매닝의 <아바의 자녀>를 만난 것은 에니어그램에 빠져서 꿀을 빨던 시기였다. 에니어그램 지도자 과정을 마치고 뜻밖에 연구소 강사 제안을 받았다. 고민 끝에 수락을 하고 가톨릭 단체인 연구소에 몸 담고 있던 기간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수련을 받으면서 인생의 제2막을 시작하게 된 것 같다. 남편이 목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교회에 대한 희망이 메말라가던 시기이기도 하다. 신앙의 성숙과 인격의 성숙, 그리고 영적인 성숙에 대해서 풀지 못한 의문으로 살아온 내게 매일 매일 무릎을 치는 답이 주어지는 나날이기도 했다. 개신교 모태신앙으로 자란 내가 가톨릭 단체에 가서 지내면서 느끼는 문화적 이질감은 또 다른 과제였다. '같은 예수님이었는데, 사랑의 하나님이었는데 왜 이걸 교회에서 배우지 못하고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일까?' 하면서 동냥젖을 얻어 먹는 아이처럼 주눅들고 긴장되었었다. 그때 브레넌 매닝을 만난 것이다. 사제서품을 받았던 그가 프란체스코회를 탈퇴하고 결혼을 했다는 것, 개신교의 (특히 나의 래래크랩!) 영성작가들에게 영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저자소개만 보고 <신뢰>라는 그의 저서를 집어 들었다.
가톨릭과 개신교를 넘너드는 저자라는 것만으로 꽂혔다. 그리고 <신뢰>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저서 <모든 것이 은혜다>까지, 어린이를 위한 책 <아바를 사랑한 아이>까지 읽고 또 읽었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오가며 혼란스러운 내게, 한편 죄책감에 시달리는 내게 <아바의 자녀>는 꼼꼼하게 답해주었다. 놀랍도록 필요한 말을 내 마음에 넣어주었다.
사람의 내적동기를 살핀다는 에니어그램을 좀 배우고 나서 '남의 동기가 다 보인다'며 자만하고 판단하고 정신 못차리던 내게 브레넌은 말했다. '이 자리에 앉은 우리 중 누구도 한번이라도 남의 동기를 본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타인의 행동 이면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 말이 아니었으면 나는 에니어그램이라는 그 좋은 도구를 가지고 사람을 난도질 하는 일을 멈출 수 있었을까? 나를 구원시킨 말이었다.
진정성이란 느껴지지 않는 설교, 공허한 기도 소리, 은혜를 가장한 영적 게으름과 완고함 등으로 환멸이 깊어질 즈음이었다. 종교적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종교의 권위로 사람들을 통제하는 교회 지도자들을 향해서 견딜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쳤다. 우리 내면의 바리새인은 거짓자아의 종교적 얼굴이라고 그가 가르쳐 주었다. 내 안에 타오르던 분노와 환멸이 다른 사람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하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 충격적 깨달음으로 나는 다시 태어나야 했다. 내 거짓자아는 싸워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끌어 안아야 하는 진리를 알았을 때 나는 비로소 자유를 느꼈다. '거짓자아의 이런 저런 면을 끌어안지 않을 때 그것은 적이 되어 우리를 방어적 자세로 몰아간다. (중략) 자신의 죄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자신의 참 자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베드로는 내면의 거짓 자아와 친구가 됐으나 유다는 자신의 거짓자아에 격분했다.
마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면서 나는 그런 잠정적 결론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아무리 사람들을 향해서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웬만한 요청들을 거절하지 못한다해도 내 마음이 외부에 영향받지 않을 딱딱한 상태이면 드러나는 것은 가짜요, 자기방어일 뿐이다. 브레넌은 이렇게 정리해 줬다. '영향을 입을 줄 모르는 심장은 인간 실존의 어두운 신비 중 하나다. 그 심장은 게으른 마음과 나른한 태도와 묵혀 둔 재능과 묻혀진 희망으로 인간 내부에서 차겁게 뛰고 있다.' 내 마음이 타인을 향하여 말랑말랑해지는 것, 무엇보다 아바의 사랑을 향해 말랑말랑해지는 것이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이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마지막 저서 <모든 것이 은혜다>에서 보여준 그의 적나라한 고백은 한 글자도 빼놓을 수 없이 '모든 것이 내게 은혜다' 죽음을 눈 앞에 둔 (사제였고, 영적 지도자였고, 유능한 강사였고, 저자였던) 브레넌을 그 이름 외에 달리 부를 호칭이 없다. 별다른 호칭을 가지지 않은 그가 마지막 저서에서 보여준 것은 '언해피 앤딩의 인생'이었다. 사랑을 위해서 사제 서품을 버리고 결혼을 했으나 이혼의 아픔을 안고 외롭게 노년을 보내는 그 쓸쓸함, 유능한 강사로 사람들을 감동시켜 주께 돌아오게 한 후 잠수를 타서는 알콜에 빠져들었음을 자기 입으로 고백하는 그 처절한 굴욕. 그런 적나라한 고백들은 '나는 인생 잘못 살았다.'라고 인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그의 삶에 어찌 자랑거리가 없으며, 성공한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사례가 없겠는가. 말년의 그에겐 '부랑아'의 여정 외에는 내세울 게 없었고 그럴 때 비로소 가슴으로 고백할 수 있는 말이 '모든 것이 은혜다'인 것이다. 온 몸으로, 전 인생으로 브레넌이 고백하는 것은 '은혜, 그렇게 값 싼 종교적 유희가 아니다' 라고 들린다.
지난 주일 아침, 그가 이 세상을 떠났단 뉴스를 들었다. 아주 가까운 사람을 잃은 것처럼 마음이 무너져내렸다. 주일 예배에 가서는 그를 마음에 품었고, 때문에 그 예배는 '브레넌 매닝 천국 환송예배'가 되었다. 다시 한 번 천국을 향한 소망으로 나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고맙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한 없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한 없이 고마운 분이다.
브레넌,
아바의 안전한 품에서 편안하시죠?
2년 전에 먼저 그 곳에 도착하신 그리운 저희 시아버님, 청년 한솔이,
오래 전, 어린 제게 크나큰 이별의 상처를 남기고 떠나
그 곳에 터줏대감이 되셨을 우리 아버지. 모두 만나셨나요?
헨리 나우웬 신부님과도 기쁘게 얼굴 마주하셨겠죠?
그 분들께 안부 전해 주세요.
특히 최근에 그 곳에 가신 저희 작은 고모 좀 챙겨 주세요.
이 곳에 사실 때 저희 남매와 엄마에게 굴욕감과 상처를 많이 주신 분이에요.
입관식에서 고모한테 말했거든요. 우리 아버지 만나면 싹싹 빌고 사과하라고요.
사과한 것이 확인되시면 이 말씀 전해 주세요.
고모도 누굴 사랑하거나 다독여 줄 처지는 아니었음을 이제는 안다고요.
그렇지만 고모를 용서하는 것은 제가 나중에 가서 직접 할게요.
저 역시 그 곳에서 그립던 모든 얼굴들 만날 수 있음을 알아요.
'나는 삶이 가장 두려울 때 죽음도 가장 두렵다' 라고 한 당신의 말을 기억해요.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가 있는 그 곳,
그 곳을 향해 한 걸음 씩 더 가까워지는 삶을 기쁘게 살아가며
죽음에 용감히 마주설 수 있도록 현존하는 부활을 살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책 <아바의 자녀>에서 전해 준 그 고백들을 제게 선물처럼 주어진
에니어그램을 가르치면서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그 일을 제 남은 인생의 소명이라 생각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고마워요. 브레넌.
거칠 것 없는 그 곳, 아바의 품에서 잘 지내세요.
안녕.
‘당신과 내가 좋은 나라에서 그 푸른 강가에서 만난다면 슬프던 지난 서로의 모습들은 까맣게 잊고 다시 인사할 지도 몰라요.’(시인과 촌장의 ‘좋은 나라’)
어려워진 관계를 풀어보려고 애를 써보는데 풀리기는커녕 더 골이 깊어지는 것 같아 포기하고 싶을 때 생각나는 노래다. 이 세상에서 온전한 회복이 있겠는가. 온갖 오해와 미움 벗어버리고 맑은 얼굴로 만날 날이 있으리라. 지금 여기 말고 그 나라, 그 좋은 나라 말이다. 이 노래가 주는 위로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천국은 너무 멀고, 당장 이번 주일에 ‘당신’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계문제’는 나남이 다르다는 것에서 비롯한다. 소그룹 모임에서 반드시 피해야할 토론 주제가 있는데 ‘정치’ 라고 한다. 분명하게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맞붙어 얘기해 봐야 서로의 말에 베이고 찔려 피차 상처받는 것 외에는 남는 게 없다는 것이다. 제랄드 싯처가 <사랑의 짐>을 통해 내놓는 해법은 ‘서로’에 방점을 찍고 ‘사랑하라’는 단순한 명령이다. 이 책이 처음 출간 되었을 때 달고 나왔던 제목, <차이를 넘어선 사랑:Loving Across Our Difference>은 ‘서로의 차이 vs 서로 사랑’의 공식을 그대로 드러내준다. 첫 장을 ‘서로 반가이 맞아들이라’, 즉 ‘인사하라’는 제안으로 시작한다. 나와 달라 힘겨운 그 사람이 멀리서 걸어오는 것만 봐도 심장이 쿵 내려앉지만 ‘인사’하는 정도의 ‘사랑’은 다시 해 볼 수 있겠다 싶어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마지막 장을 덮으니 관계 문제로 인한 분노와 죄책감의 ‘수고롭고 무거운 짐’ 을 내려놓고 대신 쉽고도 가볍다고 하는 그 분의 멍에, ‘사랑의 짐’을 지겠노라는 결심 같은 것이 선다.

살짝 틀어진 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는 것은 '그 사람은 나쁘다.'는 빼도 박도 못하는 꼬리표를 붙여버릴 때다. 그 사람이 나쁜데 그 사람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선할 수 없다. 결국 나도 같이 나빠지기로 하면 끝도 시작도 없는 미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심리상담가이지만 성경적 인간관에 대한 고민의 끈을 놓지 않는 저자는 끊어진 관계가 다시 결속되는 것은 내 안의 선한 충동이 이끌어져 나올 때라고 한다. 내게 선한 충동이 있다고? 설령 있다 해도 그 선한 충동이 나에 대해 험담하는 친구, 고집대로만 사는 대화가 안 통하는 남편,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 성경의 권위를 내세우며 통제하는 목사님에게 풀려나가야 한다니? 래리크랩은 독자보다 먼저 이 의문을 제기하고 답한다. 그렇단다. 그런 사람에게조차 흘러갈 선한 것이 내 안에 있단다. ‘선한 충동’은 제랄드 싯처가 말하는 ‘서로 사랑’의 다른 버전이다. 그것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이미 주어진 선물이라 하니 그렇다면, 정말 그렇다면 끊어버린 페이스북 친구를 다시 구제하여 연결되는 그런 소망을 가져도 되는 것일까? 좋은 나라에 가기 전에 바로 여기서 말이다.

인면수심의 범죄자 이야기에 치를 떨지언정 솔직히 말하면 그를 용서하는 것이 더 쉬울 것 같다. 내 자존감에 치명적인 상처를 낸 그(그녀)에 대한 분노를 내려놓는 것보다는 말이다. 아니 말 자체의 모순이다. 그 범죄자는 아무리 지은 지가 중해도 내가 용서하고 말고 할 대상은 아니니까. 힘겨워진 관계를 풀고, 끊어진 관계를 다시 잇기 위해서 크든 작든 ‘용서’는 필수 과정이다. ‘내게도 잘못이 있다.’며 쌍방과실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틀어진 관계는 용서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필립 얀시가 ‘용서 전문가’라고 부르는 루이스 스미디스의 <용서의 미학>은 다짜고짜 용서하라 설교하지 않는다. 용서의 ‘용’자도 떠올리기 싫은 해를 당한 우리 마음을 깊이 알아준다.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이 잘 나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도 쓰라린 마음과, 그가 나의 또 다른 지인과 아무렇지 않게 히히덕대는 걸 보면서 분노로 빨라지는 심장박동도 말이다. 그리고 천천히 안내한다. 결국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용서하게 되는 것임을. 용서전문가의 안내를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 날엔가 그(그녀)가 ‘정말 잘되기를’ 바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렇게 용서를 시작할 수만 있다면 이 노래를 다시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잠깐의 위로나 받자고 부르는 자위의 노래가 아니라 온전히 회복되는 그 날을 기대하는 참된 소망의 노래로 말이다.
‘당신과 내가 좋은 나라에서 그 곳에서 만난다면 서로 하고프던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그냥 마주보고 좋아서 웃기만 할 거예요.’
<큐티진> 4월호, 주제가 있는 책 소개 - 관계

연애는 썩 추진되지 않고,
싱글의 나날이 오래간다 싶을 때
무엇을 할 수 있나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겠지만
책을 읽는 방법이 있습니다.
<오우연애>를 읽고 또 읽고, 읽다가 낡으면 새 책으로 하나 더 사서 읽다보면
어느 순간 일용할 연애가 찾아온답니다.
그러나, 연애서적을 읽는데 눈을 크게 떠보자구요.
종교코너 밖으로 한 번 나가보니 이게 웬 걸!!!
<오우연애>만 좋은 연애서가 아니라는 거죠. ㅎㅎㅎ
소 책을 잘 안 읽는다.
그리고 연애 한 지가 오래다. 이러다 연애세포 다 죽겠다.
하는 사람들은 일단 소설을 읽읍시다.
박민규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를 읽고 외모지상주의 세상에서 이런 가슴 저린 사랑....꿈꿔보라구요.
알랭 드 보통의 연애소설 <우리는 사랑일까> 도 읽어보시고.
('평소 책을 잘 안 읽는다. 게다가 난 MBTI로 S가 강하다.'
잘 안 읽힐 수도 있습니다.)
책을 읽고 좋은 사람은 G라고도 불리는 '서해인'과 수다 한 판 떨기를 추천합니다.
연애의 인문학 버젼, 고미숙의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읽고 연애의 혁명을 이뤄보시고.
그리하여, 교회오빠 교회언니의 사고 틀을 한 번 쯤 훌쩍 뛰어넘어 연애 생각을 해봅세다.
마리 루티 교수의 <하버드 사랑학 수업> 이 최상급 강추 서적입니다.
'뭐야, 사귀자마자 섹스를 하는 것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여긴단 말씀?' 하면서
사단의 책이라 여기지 말고 분별하며 읽어보면 그 어떤 책보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기 때문에 남성의 심리를 파악하는데(여성의 심리를 파악하는데) 에너지를 투여하는 잉여짓을 멈추고, '나'로 눈을 돌리게 하는 책입니다. 나로 눈을 돌려서 정직하게 내 욕구를 알게되면 사랑의 실패 따위에 진심으로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들을수록 사고의 폭을 좁아지게 하고, 편협한 시각을 가지게 하는 어설픈 크리스쳔 목사님이나 강사들의 강의보다(아, 나도 살짝 여기에 일조하고 있다.ㅠㅠ) 더 심오한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래리크랩, 제랄드 메이, 데이비드 베너와 함께 브레넌 매닝은 신간목록을 뒤적이며 기다리게 되는 저자다. 노년의 브레넌 매닝의 회고록 <모든 것이 은혜다>를 오늘 하루 칩거하며 다 읽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눠서 그에 대해서 알 만큼 아는 사이가 된 듯 하였다. 이전의 저서들을 통해서 읽었던 이야기가 많아서 그럴 것이다. 그러나 노년의 할아버지가 되어 회고하는 그! 이야기들은 내가 알던 그! 이야기가 아니기도 했다.
왜 사람들이 유명해지면 초심을 잃고 거만해지다 망하는 뻔한 길을 자꾸만 갈까? 그러지 않을 수 없을까? 이미 반면교사는 충분하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유명해지고도 유명세로 인해서 자아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얼마나 처절하게 정직해져야 하는 지를 노년의 브레넌 매닝이 보여준다. 구구절절 자신의 높아지고 성공했던 이야기가 아니라 결핍되고, 학대받고, 실패한 어두움의 드러내는 일을 누구라서 쉽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것이 은혜다.'라는 결론에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희망의 빛이 비취는 게 아니라, 아바의 자녀로 사는 것이 이렇게 철저하게 정직해지는 길이라니……. 부랑아 복음을 전하며 떠돌던 한 전도자의 인생에 숙연해질 뿐이다.
전부터 브레넌의 책을 읽으면서 냄새가 났었다. <내 안의 접힌 날개> 리처드 로어 신부님과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에니어그램을 통해서 영적여정에 도움을 받으셨단다. 반가워라. (가슴이 떨릴 정도로 반가웠다.)
* 내게 에니어그램을 배운 TNTer에게 일독을 권함. 진심 권함.
영화란 모름지기 슬픈 여운을 너무 강하게 남기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내가 선택하는 영화의 미덕이다. 부끄럽게도 이것은 슬픔이나 고통을 온 몸으로 거부하는 내 고질병이라는 걸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부끄러움이지만 어쩔 수 없다. 일천하게도 나는 짜릿함고 경쾌함, 무겁지 않은 정도의 철학적 질문 등으로 런닝타임 동안 그저 온전히 몰입하게 해주면 그만이다. 다행히 가장 영화를 같이 많이 보는 남편의 취향이 그와 반대라 원하는 만큼 편식은 못하지만 말이다.
암튼, 그런 이유로 다큐멘타리류의 영화를 나 스스로는 선택해서 보는 경우가 거의 없다. 지금 지절거리려고 하는 이 영화 <신과 인간>은 일단 영화는 누구와 봤는 지가 중요하다. 40이 넘어서 만난 친구 또는 여정의 동반자라 할 수 있는 K다. K는 MBTI로는 (내게 그렇게도 어려운) NF이고, 겉으로는 나랑 참으로 다른 사람같다. 그러나 깊은 속을 꺼내놓고 맞춰보면 이렇게도 나랑 비슷할 수가 있을까 싶은 사람이다. 2년 전 K를 만난 이후로 K랑 나누거나, 그녀가 찔러주는 말에 아프면서 나는 이제껏 넘지 못할거라 생각했던 큰 산을 넘은 느낌이다. 내게 선물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난 감히 아주 신선한 의미를 부여해서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의 초대로 영화를 보았다.

(내 말이 아님)
영화 <신과 인간>은 1996년 실제 있었던 알제리의 ‘프랑스인 수도사 살해사건’을 바탕에 둔 작품이다, 당시 알제리 정부군과 무장이슬람단체(GIA)와의 내전은 최정점에 치닫고 있었다. 무장이슬람단체(GIA)가 자국 내의 모든 외국인들에게 떠날 것을 최후 통첩하자 알제리 정부는 이슬람교 지역의 티브히린에서 수도원생활을 보내고 있던 7명의 프랑스인 수도사들에게 당장 떠날 것을 통보하지만 수도사들은 이를 거부한다. 죽음이 예견되는 극한의 위기 속에서 일곱 명의 수도사들이 왜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는지, 영화는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인물들의 내면에 주목하며 신의 종으로 살아온 이들이 죽음 앞에 섰을 때 종교인이자 인간으로서의 갈림길에서 겪게 되는 갈등과 고뇌를 드라마틱하고 깊이 있게 담고 있다.
(Daum 영화에서 줄거리 펌했음)

(다시 내 말)
포스터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읽은 말의 비장함 만큼 영화는 내게 비장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영화 자체가 잔잔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이 서 있던 지점이 생이냐 사냐? 하는 식으로 절체절명의 순간은 아니라고 느껴졌다. 영화에서 테러리스트들(결국 이들에 의해서 납치되고 살해되는 것이지만)은 오히려 수도원과 수도사들에게 우호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수도사들의 거룩한 삶터와 일터에 대한 경외심은 오히려 약을 뺏으러 온 테러리스트 대장에게서 느껴졌다. 반면, 수도원을 보호하겠다는 군의 독기어린 눈빛이 내겐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순찰을 하는 군의 헬리콥터가 낮게 비행하며 수도원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장면, 영화를 통틀어 내게 가장 섬뜩한 장면이었다. 수도사들의 얼굴에서 두려움과 공포의 그림자가 가장 짙게 드리웠던 시점도 여기였던 것 같다. 죽음의 위협은 적으로부터만이 아니라 나를 지켜주겠다는 사람들에게서 더 피부에 와닿게 전해졌다. 그렇다면 누가 적이고, 누가 정말 위협적인 존재일까?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도대체 어디로부터란 말인가?
일곱 명의 수도자들이 선택한 것은 '사(死)'가 아니라 그저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기로 함일 아닐까? 그런 의미로 돌려치자면 그저 어제처럼 사는 '생(生)'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이제껏 살아왔던 삶의 터전과 이제껏 감당해 왔던 소명이라고 했던 걸 유지하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들이 선택한 이제껏의 그 소명의 자리는 '신의 부재만이 충만한 두려운' 곳이라는 것.
굳이 영화평을 장황하게 남기기로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신의 부재가 충만한 곳은 어디 알제리의 그 긴장감 감도는 수도원 뿐이겠는가? 조금만 정신을 차려서 둘러보아도 내 삶과 이웃의 삶은 신의 부재로 충만하다. 신을 찾는 갈망이 클수록 신의 부재는 두려움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고백하건데 늘 도망다녔고, 지금도 도망다니고 싶다. 고통받는 사람들이 여전히 고통받고 있고, 나쁜 사람이 여전히 자신의 배를 채우며 약한 사람을 짓밟고 있고, 정직하게 살려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고지를 점령하겠다는 사람들은 온 몸에 오물이 묻든 말든 결국 고지를 꿰차고 마는..... 이런 신의 부재 충만한 곳으로부터 도망다니고 싶었다. 가장 두려운 곳은 현실이다.
내 안에서 수 년 동안 울렸고 영화가 확인해준 목소리는 이것이다. '지금 여기는 고통이고 두렵고 지겹다. 어디든 도망가라. 도망갈 수 없으면 도망갈 계획이라도 세워라. 상상해라. 여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상상해라' 아주 희미한 부드러운 목소리는 그 반대의 메세지를 내게 들려주곤 했다.
어찌됐든 잔잔하지만 분명한 기승전결의 (주로 내면의)갈등과 해결을 통해서 7인의 신부는 수도원에 남기로 만장일치로 결정을 한다. 이 과정에서 나는 내가 흠모하는 사람도, 나랑 닮았다고 느껴지는 사람도, 이래야 한다는 사람도 만난다. 이 영화에서 난 이것을 보았다.

(내가 흠모하는 사람)
주인공처럼 보이는 수도원의 대표신부인 크리스티앙은 처음부터 떠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고, 나이가 드신 두 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런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일상의 크고 작은 어려움과 두려움들에 일희일비 하지 않는 사람들 말이다. 주인공을 보면서 사실 나는 남편을 떠올렸다. 깊은 곳에 보이지 않는 힘이나 신념같은 것을 타고난 듯 보이는 사람들 말이다. 실제 이들의 내면이 어떻든 이런 분들을 보면서 나는 도망가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걸 배우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작아지는 느낌이 들고, 중요한 판단을 할 때 이들을 의지하여 묻어가고픈 어린이로 남고 싶어진다.
(나랑 닮은 사람)
영화 중 한 신부는 떠나는 게 맞다고 하면서 '나는.... 몸이 아픈 사람이니까... 어찌됐든 떠나야 할 것 같애' 라는 이유를 댄다. 약한 모습이다. 내가 자주 그러듯 진짜 이유를 직면하지 않은 채 둘러대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나와 많이 닮았다. 나는 대체로 이런다. 지금 여기의 고통스런 나와 현실을 직면하지 않기 위한 합리화로 말이 많아지고, 무분별한 글을 쓰게 되고, 더 많은 의견을 피력하려들기도 한다.

(이게 맞다 싶은 사람)
여운을 가장 많이 남기는 인물은 이 사람이다. 나는 '떠나야 한다. 나는 이렇게 죽으려고 수도자가 되지 않았다'며 반항하는 허우대 멀쩡한 (이름은 모르겠는) 젊은 신부에 주목한다. 신의 부재에 대해서 가장 인간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이다. 모양은 빠지지만 정직하다. 내가 이 사람에 꽂히는 것은 아마도 최근의 경험들 때문일 것이다.
신에 대한 막연한 경외심만을 부추겨 두려움도 의심도 은폐시켜 겉으로는 믿음, 속으로는 참된 불신앙을 가르치는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상처와 분노 때문일 것이다. 중간중간 내 생각에 빠져 놓친 장면과 대사들 때문에 이 신부 내면의 변화에 대한 걸 디테일하게 따라가질 못했다. 그러나, 결국 그 자리에 남기로 한 선택에서 선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의 부재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정직한 반응이라 생각한다. 신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는 인간 편에서는 두려움, 의심이 극에 달하는 지점이고 그 지점은 고뇌하는 인간에게는 반드시 '신의 부재'로 경험되는 것 아닐까?

가장 두려운 곳은 어디인가? 지금 여기의 현실이다. 영화에서 각각의 신부가 자신의 소임대로 밭을 갈고, 장작을 나르고, 음식을 준비하고, 환자들을 치료하는...그림처럼 조용한 일상이 내겐 두려움이 극치가 되는 순간이었다. 지금 여기가 두려워서 나는 과거로, 미래로 끝없이 보따리를 싸서 옮겨다니는 존재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을 만날 수 있는 곳은 바로 지금, 여기 현재이다. 너무 두려운데 가장 필요한 신의 위안이 없다고 도망가면 영영 신과 만날 순간은 잃게 된다는 것이다.
신의 부재가 충만한 곳이, 신이 보이지 않아 가장 어둡고 두려운 곳이 그를 독대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 아닐까? 수사들의 고뇌가 깊어질 때마다 깊게 울려퍼졌던 그레고리안 챤트에 내 마음 깊은 곳이 함께 울린다. 보이지 않지만 공간을 가득 채우며 내 마음의 깊은 곳까지 공명시키던 그 성스럽고 단조로운 소리가 말이다. 가득 채운다.

'육손이는 제 부모가 낳은 자식일세. 그걸 잊지 말게'
김훈의 소설 <흑산>을 읽다가 한 문장이 목에 걸려 다음 장으로 넘어가질 못하고 있다.
정약현이 딸 내외를 서울로 이사시키면서 '육손이'라는 종을 딸려 보낸다.
떠나는 날에 마지막 절을 하며 우는 육손이를 보고 정약현이 사위 황사영에게 이르는 말이다.
'육손이는 제 부모가 낳은 자식일세. 그걸 잊지 말게'
황사영은 이 말의 단순성에 놀랐고,
시간이 지난 후에 이 말의 깊이에 놀라며 육손이를 종의 몸에서 풀어주고 면천해준다.
밖으로 보여지는 것처럼 인간관계가 그닥 원만하지 못한 나는 이 나이 되도록 여전히 쿨하지 못한 관계맺음으로 상처받기가 일쑤다. (상처받기는 그대로 '상처주기'로 읽어도 틀리지 않다는 걸 안다)
아직까지도 내 발목을 잡고 있는 치명적인 관계들이 있다. 수 년 전에 그 엉킨 관계를 풀어보자 나름대로 어설픈 노력을 할 때 있었던 일이다. 그에게 나는 이중인격자에 돈으로 관계를 따지는 사람이었고 그 오해를 풀어보고자 되도 않는 애를 많이 썼었다. 해명하고 애를 쓸수록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 과정에서 나는 말할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다.
그 때 내가 그 사람에게 표현을 했는지 안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렇게 되뇌었었다.
'나는 우리 엄마 딸이고, 우리 엄마한테는 내가 진짜 귀하고 소중한 사람이다. 그것 만은 알아달라'라고. 그 사람에 의도했든지 아니든지 내가 받은 느낌은 아무리 해도 내가 이 사람에게 인간으로의 존엄성을 회복할 수 없겠구나 싶었었던 것 같다.
육손이는 제 부모가 낳은 자식일세. 그걸 잊지 말게.
그 얘기일 것이다.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있지만 결국 정약현도 황사영도 육손이도 천주귀신이 들린 자로 같은 운명에 처해질 것이다. 이 모두는 제 부모가 낳은 자식들이었다. 또한 당신도 제 부모가 낳은 자식이다. 제 부모가 낳은 자식임을 인정해 주는 것은 나와 아무리 맞지 않아도, 때로 내게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다 할찌라도 마지막 존엄성은 인정해주는 것이다.
부모가 되어 핏덩이 아이를 안아보고, 그 아이가 눈을 맞추고 미소를 지어줄 때, '엄마'라고 불러줄 때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사랑보다 더 뜨거운 경이로움을 알기에 '제 부모가 낳은 자식'이 어떤 존재인 지를 느낄 수 있다.
그렇다.
나도, 당신도 제 부모가 낳은 자식이다.
그걸 잊지 말자.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늘 일의 의미에 대한 생각을 해왔다. 엄밀하게 말하면 '일의 의미'란 내게 '일의 기쁨'이었다. 대학 후 첫 직장인 유치원 교사를 그만 둔 즈음,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자체는 좋지만(그래서 일 자체는 의미가 있었다) 일하는 여건이 그렇게 비인간적인 직장생활은 하기가 싫다는(그래서 환경이 일의 의미를 앗아가고 있었다) 생각이 간절했었다.
그 이후로 새로운 공부를 하고, 그 당시로 하늘에 별 따기인 풀타임 음악치료사가 되어서의(것두 채윤일 낳고 5주 만에 첫 출근) 감동이란... 점심 때 회사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고 앉아 식기도를 하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 생애 식사기도 때 감사의 눈물을 그렇게 흘려본 적이 있었던고...
그 감동이 사라진 4년여 후에 퇴직을 하고, 일명 프리랜서 음악치료사로 약간의 강의와 함께 전전해 오고 있다. 작년 성대수술 이후로 음악치료사라는 명함을 내밀기에도 무색할 정도로 일을 손에서 놓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과 종종 '10년 음악치료 했으니 이제 수명은 다 했어. 이젠 카페를 해야해' 라고 농담을 했었다.
최근 집 가까운 괜찮은 곳에서 풀타임 음악치료사를 구하는 광고를 보고 잠시 맘이 흔들렸다. 내 인생 마지막으로 음악치료 한 번 더 해볼까? 이제 나이나 경력 때문에 파트타임으로 일할 곳도 없고.... 그렇게 맘이 흔들리면서 다시 한 번 소명에 대한 성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즐겁게 일할 수 있을까? 이렇게 여유있는 시간으로 인해서 영적으로 깊이있는 그 분과의 교제가 즐거운데 다시 빡빡한 현대인의 시계 속으로 들어가서도 이 알량한 영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주께 하듯, 성가대 지휘를 하듯, 그렇게 정성을 다해서 직장동료들을 대하며 직장생활 할 수 있을까? 매일 아침 출근하는 일이 너무 힘겹지 않을까?
하는 의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음은 조금 불안해졌다. 그 때 눈에 들어온 책이 알랭 드 보통의 <일의 기쁨과 슬픔> 이다. 그가 하는 말들과 때로 상관이 있고, 때론 상관이 없는 내 마음과 생각의 길이 그와 더불어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일을 하고 싶은 가장 밑바닥의 욕구가 드러났다. 가장 깊은 욕구는 한 달에 한 번,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에 대한 기대. 그리고 전문직 여성에 대한 불특정 다수의 존경 정도였다.
보통씨가 대놓고 얘기하진 않지만(이 사람은 절대 내놓고 얘기하는 스타일이 아니더군.^^) 일의 기쁨을 앗아가는 많은 이유들 중 하나는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에 목숨 걸고 일하는 것, 그리고 '전문화'라는 것이었다.('전문화'에 관한 부분은 따로 포스팅해 볼 생각) 아차! 싶었다. 이런 저런 명목 좋은 이유를 대서 남편을 설득하고 있었지만 내가 이 풀타임 자리에 마음이 심하게 흔들린 건 99.9% 따박따박 월급이었다는 것. 이러고 입사를 했으면 세 달이 가지 않아서 사직서를 못내서 안달을 할 것이었다.
그럼, 뭐 대부분 돈 때문에 일하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어디 그리 흔하단 말인가? 그래서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다' 라고 하지 않는가? 맞다. 현대인들이 대부분 그렇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기에 다들 월요일만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고, 주말이 가는 소리에 불안증이 고조되고, 출근을 하면 주변 눈치 보면서 싸이하기에 바쁘고... 일 자체에서 기쁨을 찾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그러면 어째야 할까? 다시 소명을 생각했다. 소명은 부르심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이 머~얼리서 '일루와. 아니 아니.... 거기 아니다. 그 옆으루 가. 거기가 니 자리야. 이게 니 소명이다' 이러시는 분이 아님을 안다. 나와 아주 가까이, 아니 내 안에서 계시면서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 행복한 일을 아시는 분이다. 나와 함께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가 주시는 분이다. 그걸 발견해 가는 것이 소명을 발견하는 여정이다. 그래서 <소명과 용기>의 저자 '고든 스미스'는 소명을 20대 진로 선택하면서 한 번 고민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평생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암튼, 결론적으로 이력서를 낼까 말까 하던 고민은 해프닝으로 끝나고 언제나 그렇듯 나는 다시 소명을 생각한다. 확성기를 대로 부르시는 그 어떤 거창한 부르심이 아닐 것이다. 늘 그랬듯이. 이제 중년에 들어선 나는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떤 행복을 누리고 나누며 여기서 천국의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 말이다. 일의 기쁨과 슬픔은 일상의 기쁨과 슬픔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내 일상은 '그럼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과 다른 것이 아니다. 오늘, 여기서 다시 소명을 생각한다.
소명을 생각하는 나는 오늘 학교 다녀온 채윤이와 현승이를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게 맞아줄 것이고 블로거들의 댓글을 마음으로 받도 대화할 것이고, 회복되어가는 몸으로 인해서 그 어느 때보다 감사할 것이고, 식구들을 위해 정성과 아이디어 가득한 저녁식사를 준비할 것이고,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고, 몇 권의 책을 조바심 내지 않고 마음으로 읽을 것이고, 간간이 커피를 내릴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하고 있는 그 모든 일이 다 소명의 자리임을 순간순간 각성할 것이다.
숙대 음악치료 대학원 홈페이지에 가면 '최고로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하는 제목의 칼럼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 음악치료라는 학문을 들여오고 음악치료 대학원을 만들고, 음악치료사를 양성해낸 교수님이 쓰신 것입니다. 대단한 내용은 아닙니다. 그저 음악치료로 뭔가 대단한 것이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는 얘깁니다.
저는 음악치료대학원 2기이기 때문에 공부하던 시절에 직업에 어떻게 창출될 지에 대해서 안개 속 같았습니다
그 때 마다 교수님의 약간은 선동적이 구호 한 마디로 희망에 부풀곤 했었지요.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숙대 음치대학원 홈피에 가면 저런 문구가 있습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았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가서 봤습니다. 스포츠에 워낙 관심이 없는 저로서는 그 대단했다던 아테네 올림픽 여자 핸드볼 경기에 대한 기억이 전무합니다. 남편이 어렸을 적에 핸드볼 선수였다는 것 정도의 관심으로 영화를 보러 간 것입니다.
연장전에 연장전을 거듭하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남편에게 속삭였습니다. '이기겠지? 해피앤딩을 해주겠지?' 남편이 그랬습니다. '글쎄 실화를 바탕으로 한 건데 그렇게 할라구. 실제에서는 졌잖아' 이러는데 처음으로 이게 실화를 근거한거구나 알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무식하다니깐요.
그래도 저는 영화가 슬프게 끝나면 도무지 거기서 며칠을 헤어나오질 못하는지라 이기기를 바랬습니다. 마지막 연장전 직전에 가 까칠하던 감독이 선수들에게 그랬습니다. '여러분, 약속 하나 합시다. 혹시 이 경기에서 지더라도 울지맙시다. 여러분은 이미 여러분 생애 최고의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라고요.
그리고 결국 문소리가 넣은 마지막 패널티킥(이거 이름 맞나?^^;)이 실패해서 지게 되었습니다. 하필 영화 속에서 그렇게도 지지리 일이 안 풀리던 문소리가 실패의 골을 던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한 마지막 골이 들어가던 장면이 인상깊게 그려져 있습니다. 골이 어떻게 들어가서 상대편 골키퍼가 어떻게 막아냈는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홍명보가 승부차기를 할 때처럼 카메라가 공을 따라가지 않고 카메라는 계속 문소리를 비치고 있었습니다. 골이 안 들어간 것은 문소리 뒤에 있던 상대편 선수들이 좋아라 부둥켜 안는 것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에는 사운드도 다 죽였습니다. 그저 흐릿하게 보이는 상대 선수들과 문소리의 표정이 골의 운명을 보여주었습니다.
참 인상이 깊었습니다. 빚에 찌들고 남편은 자살을 기도한 상황에서 마지막 던지 자신의 골로 경기에 지고 말았는데 '생애 최고의 순간'은 이미 경험했다고요. 이제 영화는 끝났고 문소리는 금메달의 포상금도 못 받을테고 이미 끌어다 쓴 돈을 갚을 수도 없는데 '생애 최고의 순간'을 경험했다고요?
남편의 지난 학기 성적이 나왔습니다. 참으로 인간적이지 않은 성적입니다. 인간으로서 어떻게 그렇게 한 문자만 줄을 서 있는 성적을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지난 학기는 여러가지 일로 공부에 전념할 수 없어서 거의 '학점 포기' 선언을 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참으로 은혜다' 하는 말에 남편이나 저나 백 배 공감했습니다. 물론 열심히 공부하는 것 알지만 남편보다 탁월한 분들이 참 많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내는 것 같아. 원 없이 공부하고, 이렇게 좋은 학점으로 보상을 받고....' 남편이 그럽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남편이 목회자의 길을 가겠다며 신학공부를 시작하고 지난 2년 동안 경험한 은혜는 사실 말로다 할 수 없습니다. 남편 생애 최고의 순간은 이미 경험했는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인정하며 감사하고 앞으로 펼쳐질 날들에 대해서는 '받은 복을 세어보아'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할 일인 지모르겠습니다.
이미 최고의 순간을 경험했다고 믿으며 모든 성공에 대한 욕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는 참 목회자의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최고로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 말도 좋고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이미 경험했다' 이것도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앞만 보고 달려가며 '최고의 좋은 것'을 얻기 위해 사는 삶은 별로 땡기지가 않습니다. 아이 둘을 키우지만 두 아이로 인해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은 과분할 만큼 누렸다고 믿으며, 그것만으로 두 아이에게 고마워하며 살고 싶습니다. 결혼 8년 동안 내 부족함을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면서도 기다려준 남편으로 인해서 최고의 사랑을 이미 받았다고 믿으며 감사하며 살고 싶습니다. 입도 뻥끗하지 않던 녀석이 내 기타 소리만 나면 활짝 웃으면서 뭔가 소리를 내보려고 입을 오물거리는 그 모습으로 감격하여 가슴이 뭉클하던 그 순간에 저는 이미 음악치료사로서 최고의 순간을 경험한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이 나이에 뭔가를 차려야 하지 않을까, 공부를 더 해서 이제는 더 영향력이 있는 위치로 올라서야 하지 않을까? 하는 욕심도 내려놓고 싶습니다.
영화 한 편을 보고 웬만한 설교를 들을 것보다 더 많은 도전과 묵상을 건져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