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더, 더 무서운 놀이기구를 찾아 타다 '언젠가 꼭 번지점프를 해보겠다' 한다. 말만 들어도 심장이 얼어 쩍쩍 달라붙는 느낌이다. 내 딸이다. (주여, 진정 이 아이를 제가 낳았단 말입니까?) 논다면 놀 줄 아는 사람으로서 아무리 애를 써봐도 공감이 안 되는 즐거움이 있으니 그 중 제일은 무서운 놀이기구 타는 것이다. 자기 돈 내고 왜 그런 체험으로 자신을 학대하는지,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 그 두 번째는 잔인 액션 영화, 또는 스릴러 영화 보기이다. 어제 딸내미가 보고 온 영화가 <매드맥스>이고, 그걸 보고 와서는 '영화 대박 대박!'을 외쳤지만 아빠하고 얘기해라, 나랑은 상관없는 영화다,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른데 하룻밤을 자고 나서 바로 오늘. 그 영화를 보게 된 것이었던 것이었다.

 

이미 한 번 본 영화 <윈터슬립>을 남편과 함께 보기로 했다. '엄마 아빠 데이트 해. 우린 각자 알아서 연습하고 놀고 그럴게' 휴일에 아이들의 적극적 지지에 힘입어 영화 데이트를 하기로 하였다. 혼자 보고 너무 너무 좋았는데 마침 영화의 배경인 갑바도기아를 다녀온 남편과 다시 보게 된 것이다. 무려 3시간 20분의 영화가 어찌 잔잔하기만 한지 긴 수면, 동면을 부르는 영화이다. 상영관도 몇 개 되지 않아서 알아보다 어찌어찌 안암동 고대까지 넘어갔다. 그른데, 그른데! 흐엉, 내가 하는 일이 그렇지. 영화 시간표 잘못 본 거다. 오늘 상영일정이 없댄다. 미안한 마음에 몇 가지 대안 중 남편이 제일 좋아할 영화를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선택했다. 물론 겉으론 꽤 땡기는 척 연기도 했다. 지은 죄가 있으니까. 워메. <매드맥스> 보다가 매드 신실 될 뻔. 칠렐레팔렐레 영화 시간 하나 제대로 체크하지 못한 헐랭죄값은 충분히 받았다. 내 돈 내고 왜 이러고 있어야 하지? 꽉 잡은 남편 손의 손바닥에 내 손톱 심을 뻔. 영화 내내 숨 돌릴 틈도 안 주고 싸우는 걸 본다는 건, 두 시간 넘게 바이킹에 매달려 있는 느낌이다. 어쩔 수 없다. 난 그렇다.  <윈터슬립>을 기대했던 하루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영화가 안 좋단 얘긴 아니다. 아빠와 딸이 열광하는 이유를 대충 알 것은 같다. 공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앞으로 어떤 대역죄를 짓지 않는 한 다시는 이런 영화 보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마지막의 자막을 보면서는 벌렁이는 심장보다 더 깊은 곳을 울리는 감동이 있었다.  

 

희망이 없는 시절을 사는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위하여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그러고 보면 참 고질병이다. 싸움과 갈등, 고통이 지속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병 말이다. 그래서 이런 류의 영화가 그렇게나 부담스러운 것이다. 희망 없는 세상에서 더 나은 삶을 위해 가야할 곳은 희망 없는 바로 그곳이라고 말한다. 영화는 그렇게 말한다. 그 말에 아프도록 공감하기 때문에 쫄깃했던 심장 아래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던 것이다. 희망없는 세상에서 희망의 땅, '녹색의 땅'을 찾아가는 여인들에게 미친(미치지 않은) 맥스가 말한다. '희망을 품는 실수를 저지르지 말라'고. '허튼 희망'과 '진정한 희망'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롭고 용감한 여인들이 방향을 돌려 분노의 도로를 되짚어 간다. 아, 멋진 언니들! 

 

멋지지 않은 언니가 없다. 퓨리오사 언니는 말할 것도 없고 만삭의 스플랜드, 오토바이 할머니까지 등장하는 모든 여성이 주체적이고 멋지다. 흰드레스와 드러낸 몸매가 그렇게 상투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흔한 성적 대상으로의 여성이 아니라 여자사람만의 주체적 여성성을 (영화에서) 본 적이 없어서 차라이 낯설었다. 싸움과 싸움의 장면 사이 여성들의 활약을 복기해보면 아, 이 영화 너무 좋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싸움 장면은 휘발되고 여자들의 활약만 또렷해지네. 아흣) 흰드레스를 입고 총알을 세는 여인, 장총을 쏘는 할머니, 임모탄에 빠진 미친 워보이를 구원해내는 여인, 심지어 마지막에 저 하나 살겠다고 항복하는 여인조차도 낯설도록 멋졌다. 아, 그리고 퓨리오사. 이 언니의 멋지심에 관해선 '할 말 엄습'이다. 영활 두 눈 뜨고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나 따위가 뭐 드릴 말씀이 있겠는가. 포스터에 보니까 '희망없는 세상, 미친놈만 살아 남는다' 한다. 남자들은 확실히 미친 세상과 함께 (아니 미친 세상보다 더) 빨리 미쳐 돌아가는 것 같다. 영화 속 세상의 종말에도 그렇고 지금도 안 그렇다 할 수 없다. 역시 양육강식의 세상을 구원은 우리 여성들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도 좀 강해져야 할 텐데 말이다. 놀이기구는 무섭고, 액션영화는 못 보겠으니. 그것 참. (언니들, 쵝오였구요. 제가 언제 또 이런 영화 볼지 모르겠어요. 여하튼 살아 남은 인류와 신인류를 대지의 어머니로 잘 품어 다스려 주시구요. 그곳에 희망없는 그곳에 다시금 녹색 세상을 일궈 주세요. 엄지 척!)

 

 

 

 

 

 

 

 

종신서원을 앞 둔 안나는 유일한 혈육인 이모를 찾아간다. 본인이 원해서 가는 것은 아니다. 지도하는 수녀님의 명이었고 물론 소명을 향한 그분의 이끄심일 것이다. 이모 '완다'는 거침없이 욕망을 따라 사는 판시이다. 술과 섹스와 냉소의 여인이다. 순백의 눈밭에서 걸어나온 안나와 이모 완다의 만남은 흑과 백의 만남이며 반쪽과 반쪽의 만남이다. 이 만남을 통해 흑과 백은 각각 무엇을 보고 무엇을 얻고 잃게 될까?

 

가톨릭의 수도자로 종신서원을 앞둔 안나는 완다를 통해 자신이 폴란드인이 아니라 유대인임을 알게 된다. 폴란드인 안나가 아니라 유대인 이다(Ida)였던 것이다. 부모님은 갓난 아기 적에 폴란드인에 의해 학살되었단다. 그 엄청난 출생의 (어쩌다보니) 비밀(이 된)을 알게 된 백색 이다는 흑색 완다 이모와 함께 부모님의 시신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곡절 끝에 유골을 찾아 덤덤하게 품에 안는다. 며칠 간의 여행을 통해 백이다와 흑완다는  갈등하고 고뇌하다 일정 정도 긴장을 해결하게 된다. 전쟁터에 나가며 이다의 어머니에게 맡겨 두었던 완다의 어린 아들도 그때 함께 학살되었던 것. 같은 상처로 각각 다른 삶을 살아온 완다와 이다는 각자 부모의, 아들의 유골을 끌어안으면서 서로를 받아들이게 된다. 특히나 이다가 완다 이모를 받아들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종신서원을 앞두고 나름대로 자아를 찾아 떠난 여행을 통해 백색 이다가 자신 안의 욕망을 맞닥뜨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여행 중에 만난 섹소폰 연주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충격적 출생 비밀도, 부모를 죽인 살인자와의 만남도 흑백 사진 한 장처럼 덤덤하게 그려내는 영화는 이다의 로맨스 역시 같은 방식으로 그릴 뿐이다. 이 모든 자아찾기 여행을 뒤로 하고 이다는 다시 수도원의 흑백 일상으로 돌아간다.

 

안나가 이다가 되었고, 이다가 드디어 사람이 되었다. 수도원의 일상은 침묵과 흑백이다. 여행 후 안나, 아니 이다가 식사 중에 혼자 큭큭 웃음보가 터진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예기치 않은 감정이 불쑥 올라왔다는 것은. 이다를 수도원에 보낸 완다는 풍성하고 예쁜 머리칼을 꽁꽁 감추고 수녀복을 입은 조카 이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말한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잊었던 약속이 생각난 사람처럼 창밖으로 뛰어 내려 죽음으로 달려간다. 이모의 죽음이 다시 이다를 속세로 불러냈고, 장례식을 치뤘고, 죽은 이모 집에서 수녀복을 벗고 가슴이 패인 드레스을 입어 보고 하이힐을 신어본다. 그리고 섹소폰 연주가 남친과 춤을 추고 몸을 섞는다. 흑이 백에 물들었을 때는 밥 먹다 혼자 빵터지는 변화가 있었다면 백이 흑에 물들었을 때, 그것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죽음으로 내달렸다. 완다 이모의 삶이 너무 아프다. 뜨거운 밤을 보내고 남친이 말한다. 해변으로 연주여행을 가, 같이 가자.  가서 해변을 같이 걷자. / 그 다음엔? / 우리 둘이 살 집을 짓고 아이를 낳지 / 그 다음엔? / 그냥 그렇게 사는 거지.

 

벗었던 몸을 다시 수녀복으로 무장하고 이다는 수도원으로 돌아간다. 마지막 장면은 수도원을 향해 걷는 이다의 코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함께 걸으며 찍었나보다. 그렇게 이다는 다시 한 번 그 자리로 돌아간다. 두 번의 자아찾기 여행을 마친 후이다.

 

 

 

 

 

함께 영화 본 H 샘은 나랑 참 비슷하고 참 다른 사람이다. 이런 식의 표현 피하고 싶지만 굳이 해야겠다. H와 나는 에니어그램으로는 같은 유형인데 MBTI 기질로는  NF와 SP로 다르다. 때로 너무 잘 통하고 때로 너무 다르다고 느껴진다. 영화를 보고 이대 정문을 통과해 나오며 H쌤이 말했다. '마지막 장면 봐바. 돌아가는 발걸음에 힘이 넘치잖아. 자아를 찾고 깨달은 거지.' 그 말에 나는 헉! 했다. 그 장면을 나는 '흔들림'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의지적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선택했지만 그녀의 내면이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고 읽었기 때문이다. H의 해석은 경험했고, 경험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에 힘을 내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자아찾기 여행을 통해 전혀 새로운 곳에 다다랐지만 일상은 여전히 힘들 것이라는 것에 꽂혀 있었다. 또 다시 식당에서 웃음보가 터질 것이고, 게다가 남자의 몸이 그리울 것인데 더 많은 것을 알았기에 더 힘들 수도원 생활의 순간순간이 염려가 되었다. 각자 자신이 읽어낸 '자아를 찾는 여행 그 후'에 대해서 항변을 하다가.... '그러니까 우리가 둘이 지금 같은 얘길 하는 거야!' 하고 입을 다물었다.

 

같은 얘길 한 건 아니다. H는 깨달음을 얻은 이다가 자발적 선택으로 들어간 수도원을 이전과 차원이 다를 것이라데 꽂혀 있고, 난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살아낼 일상은 더 지난하다는 데 꽂혀 있었다. 분명 같은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순간 답답했다. 그러나 같은 얘기를 다른 각도로 보고 있다, 설령 다른 얘기라도 괜찮다는 태도가 그녀와 나 사이를 이어주고 있었기 때문에 괜찮았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지날 수록 영화가 준 감동보다 이 대화가 준 감동의 여운이 오래 가고 있다. 그녀를 만나면 마음이 상해서 오는 경우가 많았다. 늘 나의 아픈 곳을 건드린다. 마음이 상하더라도 마음을 닫아보지 않았던 이유는 그녀가 나와 달리 큰 틀에서의 믿음과 사랑이 굳건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지 못하는 것을 내가 보고 있다고 항변할 이유도 없다. 자신 안의 이다를 통합해내지 못한 완다의 아픈 결말을 다시 생각해 본다.

 

나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하나님 안에서 나는 누구인지를 깨달을수록 설명할 수 없는 자유로움이 나를 감싼다. 그러나 그 내적인 자유가 일상에서 져야 하는 크고 작은 짐들을 어떻게 해주진 않는다. 그 버거움은 여전하다. H 샘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내 일상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깨알 같은 사안을 가지고 징징거렸다 웃었다 하는 나와 달리 큰 틀에서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이들이 있어서,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고맙다. 그래, 자아를 찾은 이다에게도 선물 같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이 길을 혼자 걷는 것이 아니라 다행이지 않은가.

 

 

 

 

 

 

 

 

올해 음악수업에서 만난 아가들에게 으막션생님의 매력이 통 먹히지 않는다고 좌절하는 글을 썼었다. 아, 좌절 금지. 3주차 수업에서 낚시질 끝. 5세 형님반은 물론이고 난생 처음 엄마를 떨어져 어딘가에 온 4세 아가들까지 죄 걸려들었다. 엄마한테 가겠다고 그렇게 울어대던 아가들의 눈동자가 제대로 보인다. 눈물을 그친 것이다. 어제 3주차 수업에 들어갔는데 '으막션샘미다..... 영어션샘미다.....' (1년이 지나도록 나를 영어 선생님으로 부르는 아이들도 있다.) 뜨거운 환영이었다. 기타를 들었더니 반짝반짝, 아구떼(악어떼), 아빠곰아빠꼼.... 신청곡이 쇄도를 한다. 그러면 그렇지. 쫘식들.

 

초롱초롱 눈망울, 놀라서 커진 동공, 까르르까르르.... 음악 수업을 빙자한 으막션샘미 자가 치료시간이 끝났다. '즐거운 음악시간 끝났네요' 굿바이송을 부르자 한 녀석이 '우막션샘미 가지마. 지베 가지마' 울기 시작한다. 얘네들은 동네 강아지들 같아서 한 놈이 짖기, 아니 울기 시작하면 다들 따라서 운다. 다는 아니고 딱 한 녀석이 따라서 울면서 '우막션샘미 가지마... 으앙.....' 아, 쫌 뭉클했다. 끝나고 우는 아이들 하나씩 안아주는데 너무 조그만 아기들이다. 아무튼 3주 만에 자존감 상승이었다.

 

수업을 다 마치고 점심시간. 화장실 앞에서 아까 울던 아가를 만났다. 으막션샘미는 반가워서 급 엄마 미소 지었는데 이 녀석, 으앙....... 움막션샘미, 으앙....... 으.......앙.......으.....막.......션......으앙....... 아니 왜 또 울어? 야, 선생님이랑 재밌게 놀았던 기억을 떠올려야지 마지막에 울었던 기억을 소환하면 어떡해? 지금 우는 타이밍 아니라 반가운 타이밍이야. 설득불가. 으앙..... 울면서 나에게 안기지도 않고 자기 반 담임샘을 찾아간다. 아, 막막해 진짜. 쟤 저러다가 다음 주 음악 시간에 십중팔구 나 보고 운다. 쟤.

 

아이들의 기억이란 이런 것이다.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인지, 정서, 신체적인 능력 때문에 상황을 통합적으로 기억하지 못한다. 고통을 전존재로 느끼면서 몸으로 기억해버리는 것이다.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생각이 났다. 모든 치유는 기억의 치유이다. 어린 시절의 상처 치유라는 것은 어릴 적 기억을 어른의 눈으로 바라봄으로 시작한다. 아이라는 무력함 때문에 그렇게 기억할 수 밖에 없었던 지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삶을 살고 있는 폴이, 반주하는 기계처럼 살며 세상과 소통하지 않았던 폴의 기억을 더듬어 가는 과정이다. 물론 혼자가 아니라 마담 푸르스트와 함께. 장소는 그녀의 비밀 정원. 어릴 적 잃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의 공간으로 철퇴한 폴이 차 한 잔에 취해 기억의 창고 문을 연다. 문을 열면 또 다른 문이 있고, 열고 들어가면 또 다른 문이 등장하여 기억의 심연 속으로 한 발 한 발 들어간다.  

 

엄마 대신 폴을 키우는 이모 둘은 폴의 현재형 엄마이다. 그리고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담 프루스트,  말하자면 그녀는 새로 등장한 또 다른 엄마이다. 어린 시절의 엄마는 죽고 없다. 현재의 엄마들은 폴의 반주에 맞춰서 춤을 가르치며 살고 있다. 과거도 현재도 아닌 원형으로서의 엄마가 마담 프루스트일 것이다. 에니어그램을 통한 내적 여정을 하면서 어린 시절을 더듬어가다 보면 엄마에 대한 분노가 새롭게 올라오는 때가 있다. 마담 푸르스트의 차 한 잔을 마신 것처럼 거부할 수 없게 묻었던 기억이 피어 오른다. 몹시 힘들고 아픈 과정이다. 그럴 때 혼자 울고 불고 하다가  엄마를 찾아가기도 한다. '엄마 어릴 적에 나한테 왜 그랬어,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엄마들의 반응이 어떨까? 딸의 말에서 마음을 읽어내고 '미안하다, 너에게 그렇게 큰 상처가 될 줄 몰랐다. 그땐 엄마도 어렸어. 네 잘못이 아니야.' 라고 해주는 게 정답이겠지만 그런 엄마는 찾기 어렵다. 대부분 엄마들은  '그런 일이 있었냐? 별 걸 다 기억하네. 나는 기억이 안 나는데' 또는 '뭐 그런 걸 갖고 그러냐' 이다. '내가 너한테 잘못한 게 뭐냐. 니가 그런 소리 들을만 했다' 이러시면 딸을 두 번 죽이는 것이다.

 

마담 프루스트의 기괴한 거실 또는 정원은 기억의 정원이다. 마음의 수풀을 헤치고 묻어두었던 것을 더듬더듬 찾아가게 하는 신비의 묘약에 취한 곳. 차 한 잔과 마드렌 한 조각, 마담의 기괴한 목소리 한 두 마디에 폴은 마음의 수풀로 기어들어간다. 그리고 한 겹 한 겹 벗겨지는 기억들. 폴의 기억 여행을 따라가며 아빠에 대한 오해, 엄마에 대한 환상을 바로잡아가는 것이 (심지어) 즐거웠다. 단언컨데 우리는 모두 나름의 왜곡된 기억에 붙들려 산다. 그리하여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자신의 말과 행동 이면에 왜곡된 인식방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또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길을 인정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을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 비밀의 정원은 아무나 드나드는 곳이 아니다. 준비된(갈망하는) 자만이 이끌리는 곳이다. 마담은 미친 사람 같고, 그 정원은 말이 좋아 정원이지 야생의 숲, 아니 막 자란 식물들로 기괴하고 정신없는 이상한 곳이니 말이다.  

 

모든 영화에서, 소설에서, 널리고 널린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자기를 찾아갈 때 환영받는 일이 거의 없다. 특히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까운 이가 성장한다는 것은 부담되고 심지어 두려운 일이다. 이제껏 맺었던 관계에 균열이 생기는 탓이다. 그럭저럭 맞물려 돌아가던 톱니바퀴, 저쪽이 달라지면 나도 달라져야 하니까. 자기를 찾아 발버둥 치는 사춘기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불편할 수 밖에 없고,  상담을 통해 자기를 발견해 가는 아내의 성장이 못마땅하고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도 비슷한 맥락. 폴이 왜곡된 기억을 치유해 나가자 두려워진 현재형 엄마들은 결국 비밀의 정원을 찾아내 쑥대밭을 만들고 만다. 정원을 잃은 마담 푸루스트는 자기처럼 오래되고 신비로운 나무를 지키기 위해서 분신과 같은 우크렐레를 들고 그 나무 아래 앉는다. 그리고 마담은 폴의 엄마처럼 죽음의 강 너머로 떠난다. 물론 폴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끊임없는 내적 순례와 외부의 구체적인 삶의 여적을 계속해야 할 우리 크리스천들은 먼저 과거의 아픈 여러 상처들을 기억의 창고에서 쓸어 버림으로써 출애굽의 영성을 시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라며 서문을 시작하는 마태오 린, 데니스 린 형제 신부님의 <기억의 치유>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기억의 치유에 있어서 우리는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 과거의 상처들이 준 영향에 굴복하여 자기 중심적으로 생활할 것인가, 아니면 성령의 평화와 사랑이 우리 미래를 이꿀어 가도록 할 것인다. 기억을 따라 과거의 고통스런 사건들로 돌아가서 그것들을 성령께 되돌려 놓는다면, 과거의 상처들은 더 이상 우리를 묶어 놓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자유를 주시는 성령의 권능이 우리를 지도해 나갈 것이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에 발을 들여놓는 선택. 그런 선택 한 가지가 있다.  

 

 

 

 

 

 

 

 

 

 

* 좋은 선생, 나쁜 선생?

 

영화 끝나고 불이 들어오자 연주의 감흥을 추스를 새 없이 옆에 앉은 영 아티스트 채윤이의 표정을 살폈다. 뿌한 얼굴로 말이 없다. 영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피아노 전공의 예술중 3학년의 딸내미이다. 엄마한테 같이 보자, 아빠한테 같이 보자, 갈 사람 없으면 혼자 가서 보겠다 난리를 치다 가족 총동원 관람이 된 것이다. 이제 막 재즈와 사랑에 빠진 터이다.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와 골목에 들어설 때 쯤 영 아티스트가 말했다. 화가 단단히 난 말투다. '그러니까 영화가 뭐라는 거야? 그 선생님이 제자들을 위해서 일부러 나쁘게 한 거야? 결국 잘하게 만들었으니까 좋은 선생님인 거야? 아, 뭐야?' 복잡한 건 딱 질색인 채윤이다운 일침이다. 일단 복잡하게 생각하고 어렵게 말해야 멋진 건 줄 아는 엄마는 머릿속 회로를 이쪽 저쪽으로 꼬아대고 있는 참이었다. 마구 엉켜가는 생각의 회로를 싹둑 잘라내는 딸내미 표 가위손. 그러니까 좋은 선생이냐, 나쁜 선생이냐! 영화의 본질 하나를 꿰뚫는다. 학생의 자존심을 짓밟아 피나는(말 그대로 손에서 피가 줄줄 나도록) 연습을 하게 만드는 선생님은 좋은 선생님일까, 나쁜 선생님일까? 거두절미 채윤이의 관심은 그거 하나이고, 사실 있어 보이고 싶은 평론가나 관객들도 그 질문은 피해갈 수 없을 것 같다.

 

 

* 그러니까 연습을 열심해 해, 말어?

 

이제 중3밖에 되지 않는 음악 하는 딸을 보면서 경험적으로 확신하는 바가 있다. 음악가의 탁월성이란 타고난 음악성 플러스 피나는 연습이다. 채윤이 친구 중 실기 우수자가 되는 아이들 뒤에는 꼭 무시무시한 레슨 선생님이 있다고 한다. 시험이 끝난 날에도 놀지 못하고 연습실로 가야 하는 이유는 엄마도 무섭지만 레슨 선생님이 허락하질 않아서라고. (중간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은 놀다 죽는 날 아니던가) 어쨌든 그런 아이들이 실기 우수자라는 영예를 얻는다. 플레처 선생의 말처럼 '그만하면 잘했어(Good job!)'가 쓸데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 해야지. 시험 끝났다고 놀고, 연주회 마쳤다고 놀고, 날씨 좋다고 놀면 소는 누가 키워? 이런 마인드로 채찍질하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아니, 내가 채윤이 연습을 시켜봐도 그렇다. 당근 당근 당근.... 주고 연습을 시키는 것은 시간도 에너지도 많이 들고 눈에 보이는 효과도 훨 약하다. 채찍을 쓰면 단 한 번만으로도 폭풍연습을 끌어낼 수 있다. 채찍 끝에 자존심 뭉개는 갈코리까지 하나 장착한다면 그때부터 연습은 분노의 질주가 되어 웬만해서 멈추게 할 수 없다. 피아노가 뽀개지든지 제 손가락이 부러지든지 둘 중의 하나다. 이런 연습을 끌어내려면 칭찬과 격려 보다는 윽박지름과 자존심 깔아뭉개줌이 직방이다. 

 

 

* Education, 끌어낸 열정

 

앤드류는 원래가 연습을 열심히 하는 드러머였다. 플레처 선생을 만난 것도 혼자 연습에 매진하던 순간 아니었나. 열정의 활화산 플렛처 선생을 만나자 연습 좀 하던 앤드류의 열정에 불길이 당겨졌다. 단지 선생이 무서워서, 자존심이 상해서 그렇게 미치도록 연습할 수 있겠는가. Education(교육)의 어원이 '밖으로 끄집어낸다'라고 배웠던 것 같다. 그런 의미라면 열심히는 했지만 조금은 소심했던 앤드류의 열정을 꺼내주었단 의미로 교수 플레처는 (채윤이가 그렇게나 궁금해하는 방식으로 보자면) 좋은 선생이다. 예술가 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열정은 필요하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가 그런 말을 했다. '그렇소! 열정이란 그런 것이오. 다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거지. 그게 열정이란 말이요.' 내가 원하는 그것, 그것 외에는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것이 열정이라면 누구나 그런 시절이 있고, 한 번쯤은 있어야 한다. 

말로만 하고 듣던 '피나는 연습'을 우리는 보았다. 강렬한 이미지였다. 스틱을 잡은 앤드류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피가 흐르고 흐른다. 얼음물에 그 손을 집어 넣는다. 투명했던 얼음물이 핏빛으로 물들어간다. 순간 카메라 앵글이 90도 회전, 얼음 그릇이 세로가 아닌 가로로 잡힌다. 집어 넣은 손이 위가 아니라 왼쪽으로 가는 것이다. 투명한 얼음물을 핏빛으로 물들이는 것은 중력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당기는 힘의 법칙으로 인한 자연스런 이동이 아니라  피의 힘, 열정의 힘 자체로 침투해가고 있다는 것. 이것을 보라는 듯. 핏물은 옆으로 흘러 그야말로 맹탕 맹물을 잠식하고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긴장을 풀 수 없었던 것은 단지 음악, 연기, 구성이 아니었을 것. 이면에 흐르는 그 핏빛 열정이 상체를 스크린 쪽으로 끌어갔고 침을 꼴깍거리게 만든 것이다. 

 

 

 

 

* 열정, 뒷 마당의 말 다섯 마리

 

스캇펙은 열정을 일컬어 '뒷마당에서 날뛰는 말 다섯 마리'라 비유했다. 말 다섯 마리의 힘, 마력이라는 대단한 힘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섯 마리의 말은 길들여져야만 진정한 힘이 된다. 길들여지지 않은 말은 먼저 내 뒷마당의 텃밭을 망쳐놓을 것이다. 그리고 어디에 풀어놓든 일단 망치고 볼 놈들이다. 열정이 진정한 힘이 되기 위해서는 길들여져야 한다. '앞마당'이 아니라 '뒷마당'이라 함은 열정이 꼭 필요한 것이로되 그 이면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적절하게 잘 쓸 수 있는(나와 타인에게 진정으로 유용한) 힘이 되기 위해서 뒷마당을 망치는 시기를 지내야 할 수도 있다. 그런 시절 없이 단번에 성숙한 열정을 가질 수는 없다. 앤드류가 플레처 선생의 스튜디오 밴드에 발탁된 후 활활 타오르는 열정으로  연습에 매진할 때 마구 망치는 것들이 속출한다. 친척들과 함께 하는 식탁에서 오만한 막말 드립으로 분위기를 망치고, 예쁜 여자 친구와의 로맨스를 망친다. 조르바의 말이 맞다. 열정은 다른 것이 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 열정의 연습을 통해 우리는 신 들린 드럼연주를 본다. 아마도 우리가 감탄해 마지 않는 연주가 있기까지 연주자의 주변에는 무수한 망침(희생)이 있었을 것이다. 연주자 자신의 인간적인 삶일 수도 있고, 빚을 내서 레슨비를 감당한 부모일 수도 있고(눙물나는 공감), 내쳐지고 배신당하는 애인이나 친구, 동료 음악가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음악도 잘하고 인간성도 된 음악가, 가르치기도 잘 하고 따뜻하기도 한 선생을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 완벽하게 두 개를 다 가셨다면 인간의 조건을 비켜가는 것이다. 여차저차 열정의 선생과 열정의 제자는 둘 다 일단 추락하고 만다. 앤드류는 제적을 당하고 그의 증언이 결정적인 증거가 되어 플레처 선생 역시 학교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리고 클럽에서 우연한 재회. 그 장면의 대화에서 채윤이는 결정적으로 혼란스러워졌고 있어 보이는 리뷰를 쓰고 싶은 관객은 숙제를 받는다. 플레처 선생이 나긋나긋하게 진술한다. 최고의 음악을 끌어내기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단다. 잘했다고 우쭈쭈쭈하는 것은 선생으로서 쓸데없는 짓이란다. 자신은 오직 찰스 파커 같은 드러머를 길러내고 싶었단다. 말하자면 '다 너를 위해서 그렇게 가혹했던 것이다' 이거다. 채윤이처럼 혼란스러워진 앤드류가 고작 할 수 있는 말을 '그....그래도 너무 심하셨잖아요' 였고 선생이 자조적으로 뱉은 말은 '그러나 찰스 파커 같은 제자가 하나도 없다' 였다.

 

 

* 그건 당신 템포고

 

플레처의 그럴 듯한 연기에 (채윤이는 많이, 엄마는) 살짝 흔들렸으나 앤딩을 장식하는 연주회 첫 곡에서 진실이 드러나고 만다. 앤드류가 배신을 했기로서니 풋내기 제자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자기 연주를 망치는 어이없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완벽한 음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가혹할 수밖에 없었다던 플레처 선생이 완벽한 복수를 위해 자기 음악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고 고소해 한다. 싸이코! 이쯤되면 그의 열정이 단지 음악이 아니라는 것을 버터구이 오징어 씹으며 관람하던 초딩도 알아챈다. 플레처 선생의 열정은 완벽한 음악이 아니라 자가도취, 자기중독을 향하는 것이었다. 앤드류와 제자들, 스튜디오 밴드의 단원들로 하여금 완벽한 연주를 하게하는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 아니고, 완벽한 음악 그 자체도 그가 바라는 것이 아니다. 오직 '나'이다. 플레처의 어록 중 백미는 '그건 내 템포가 아니야. 이 개나리 십장생 신발끈 졸라매는 놈아!' 따귀 짝!짝!짝! 내 템포가 아니야. 따귀 짝! 앤드류는 물론 세 명의 드러머 모두 용을 써도 가닿을 수 없는 그 템포는 플레처라는 팽창된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 미친 존재의 템포를 누가 어떻게 찾아? 영화의 마지막은 전율이라는 말도 부족한 그 무엇이다. 지휘자 플레처를 제끼고  드러머 앤드류가 음악을 이끌기 시작한다. 열받아 날뛰던 지휘자까지 결국 드럼의 리듬에 끌려가는 것이 절정 오브 절정이다. 이 순간 플레처는 여태껏 찰스 파커 같은 제자를 길러내지 못한 이유를 깨달아야 한다. 앤드류도 테너도 그만의 템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찾도록 길을 내주어야 했다.미친 피나는 연습과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해도 그 자신의 템포를 찾지 못하면 늘 삼류일 뿐이다. 앤드류의 신들린 연기는 말한다. 됐고! 그건 당신 템포고!!!!

 

 

* 아 그러니까 좋은 선생이야, 나쁜 선생이야

 

영 아티스트 채윤이는 다시 물을 것이다. 그러면 나쁜 선생이야? 나쁘네. 그런데 사실 나는 플레쳐 같은 선생이 좋다. 강압이 늘 나쁜 것은 아니다. 특히 교육자라면 엄하고도 매정한 태도를 보여줘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떡을 썰테니 너는 글을 써라. 불을 켜도록 해라. 어미의 떡과 너의 글을 보아라. 알겠느냐? 이대로 다시 돌아가거라' 피교육자를 자신과 같은 하나의 인간, 고유한 예술가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없다는 것이 치명적일 뿐이다. 그렇다면 친절한 선생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차라리 오직 자기 템포 밖에 모르는 친절한 선생보다는 어차피 자아도취 선생이라면 강압하는 선생인 나은 건 아닐까 싶다.  나쁜 동기의 선한 행동이 나쁜 동기의 나쁜 행동보다 더 악마적이라고 생각한다. 친절한  이유가 아이의 템포를 인정하는 것과 무관하게 그저 자기 이미지 관리 차원이라면, 무정함에 무능하기까지 하여 더 골치 아픈 선생일 수도 있는 것. 플레처 같은 위악의 선생은 음악의 기술을 연마하게 만드는, 오기를 발동시키는 역할이라도 하니까 말이다. 자기 이미지나 지키려는 위선자의 미덕은 무얼까? 실력을 향상시키지도 못하는데다 '어 좋은 선생님인데 왜 뭔가가 싫지? 난 음악도 못하는데다 착하지도 않네' 죄책감까지 얹어줄 수도. 그러니까 좋은 선생 나쁜 선생은 난 모르겠고! 선생도 학생도 채윤이도 엄마도 자기 템포를 살아야 하고, 살기 위해선 찾아야 할 뿐.

 

 

 

 

 

 

 

 

 

 

 

 

작명의 배신

 

붕어빵엔 붕어가 없고 새우깡엔 새우가 없다. <웰컴 삼바>의 불법체류자, 세네갈 출신 '삼바'는 삼바춤을 추지 못한다. 일에 치여 번아웃 증후군을 앓는 여주인공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는 딴판의 앨리스이다. 동화적 모험과 환상과 생기라곤 찾을 수 없는, 밤에는 잠을 못자고 낮에는 덤덤하며 어리바리 하다 분노폭발하는 이상한 앨리스일 뿐이다. 프랑스 거주권이 삼바의 외적 관심이라면, 내적인 갈등은 구치소에서 만난 '친구의 여자 친구'를 찾으러 갔다 생긴 접촉사고 때문이다. 네일샵에서 일하는 '친구의 여자 친구' 그레이스가 조물락조물락 손맛사지를 해준다. 불법체류의 삶에 지친 외로운 삼바와 그레이스가 그냥 헤에질 수는 없었으리라. 하룻밤의 은혜였으며며 그밤 이후로 내내 죄책감의 고통이다. 구치소 친구의 이름은 요나.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니느웨에 전하라는 사명을 예언자의 이름이다. 이 요나는 '사명은 난 모르겠고!' 고집불통 아저씨 같이 생긴 얼굴로 단지 여자친구를 찾아 프랑스 건너왔다.  

 

 

로맨스의 배신

 

'사랑이 밥 먹여주냐' 그렇게 말하는 선배도 한때는 사랑에 목숨 걸었던 후배였단 말이지. 예고된 배신을 결코 믿지 않으면서 다들 한 번쯤은 로맨스를 섬기던 때가 있었다. 로맨스 앞에 한업이 약자가 되어 자존감 바닥을 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사랑이든 사랑을 빙자한 결혼이든 엔딩을 맞는다. 그 엔딩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환상에서 '이상한 앨리스'의 민낯을 보고 살아야하는 시작인 줄을 모르고. 그리고 아직 로맨스를 섬길 자격을 잃지 않은 후배들에게 말한다. '결혼해 봐. 따 똑같애.' 알고도 당하는 로맨스의 배신이다. 

 

삼바와 앨리스의 사랑과 우정 사이가 참 마음에 든다. 늦은 밤, 침 넘어가는 소리 크게 들리는 차 안의 삼바와 앨리스. 뜬금포 삼바가 고백 태세를 갖추자 고백하는 자를 배려한다고 먼저 김치국 마셔준 앨리스가 무색해진다. 앨리스 좋아한단 얘기 아님. 친구의 애인을 범했고 죄책감이 들고 친구에게 연락도 못하겠어서 힘들단 얘기. 맞다. 앨리스는 딱 봐도 고백받을 캐릭터가 아니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뜨겁게 좋아한 열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로맨틱한 열정이 살아있다면 번아웃신드롬 진단을 받았겠는가.

 

영화 내내 뚜렷한 애정라인이 만들어지지 않는 이유이다. 앨리스는 여성적 매력이 그저 그런 여자이고(개인적으론 앨리스의 무색무취 표정에 홀딱 반했다), 삼바는 상황이 노답이다. 우리나라 우리 교회 주변에서 흔히 보는 남녀이다. 부족한 건 없지만 딱히 매력은 없는 여자, 사랑이고 결혼으로 가자면 풀어야 할 생존 과제가 너무 많은 남자. 애정라인이 뚝뚝 끊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애정전선만 이상이 있는 게 아니라 영화의 흐름이 뭔가 유려하지 못하단 느낌이다. 디테일이 주는 깨알 감동과 재미가 있지만 보는 내내 뭔가 굵직하게 불편하다. 일이 안 풀리면 가슴 떨려 죽을 것같은 사랑이 있든지, 아니면 일이라도 잘 풀리든지. 결국 고향 가는 비행기를 타야하나? 삼바는?

 

 

긍정의 배신

 

첫눈에 반하는 사람을 만나는 만큼 어려운 일이겠지만 사랑을 하려거든 이런 사랑을 하라. 밋밋하고 가끔씩 이상할 뿐인 여자에게서 특별함을 발견해주는 눈을 가진 불법체류자 삼바 같은 사람 말이다. '당신은 참 특별해요' 관객 눈에도 보이지 않는 앨리스의 특별함을 발견해주는 삼바의 소처럼 크고 착한 눈. 영화를 홍보하는 문구 중에 '초긍정'이란 말이 있었다. 긍정도 불편한데 초긍정이라니. 앨리스에게서 특별함을 발견하는 눈이 긍정의 눈이라면 나는 그 특별함 반댈세. 긍정이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아 있는 그대로 발견하는 눈이다.  

 

영화를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든 장면을 말할 때가 됐다. 구치소 식당에서 삼바는 밥이 안 넘어가는 모양이다. 초면의 친구 요나가 통성명을 한 후에 '그거 안 먹을 거예요?' 하면서 죄 가져다 먹는다. 10년 경력의 요리사 배고프다고 맛대가리 없고 성의없는 밥을 먹을 일이 아니지. 암.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삼바가 화면에서 툭 튀어나와 내게 그러더라. '안 먹는 게 아니고 못 먹는 거거든요. 안 넘어가요.' 삼바의 진짜 매력은 착하고 맑은 눈이 아니다. 아닌 걸 끝까지 아닌 걸로 아는, 대충 설득당하지 않는 자존심이다.

 

푸쉬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고 했지만 결코 스킵하지 말아야 할 과정이 슬퍼하고 노여워하는 과정이다. 이민국에 거주권 신청을 하러 갔다가 덜컥 붙잡혀 불법이민자가 되어버린 삼바의 자존심이 좋다. 자존심을 세운다해도 지금 대단한 것을 할 수도 없고 부조리한 현실을 뒤집어 엎을 수도 없지만 말이다. 밥을 안 먹고, 삼촌이 보낸 마카롱을 전달하지 않은 앨리스에게 내내 쪼잔하게 구는 삼바가 참 좋다.  어구어구어구, 삼바의 밥까지 쓸어 먹은 요나는 구치소 탈출을 시도해보는, 저돌적인 것 같으나 정작 자존심 같은 건 없어 보인다. (오늘 명의 배신의 레전드 : 성경의 요나는 자기 민족을 괴롭힌 니느웨가 심판의 경고에 회개하는 것에 빡쳤다. 설마 회개할 줄 몰랐던 것이다. 저런 나쁜 놈들이 회개를 하다니, 회개한다고 용서를 하시다니!  그리하여 하나님께 대들었던 핵존심의 선지자였다.)   

 

 

결말의 배신

 

결말이 좀 황당했다. 10년 거주권을 손에 들고 찾아온 요나와의 주먹다짐과 여차저차한 에피소드로 인해 말하자면 내적 외적 문제가 일거에 해소되고 만다. 결말이 맘에 들지 않아서 리뷰를 써줄까 말까 고민했었는데 자꾸 생각해보니 이것도 나쁘지 않다. 이런 판타지 같은 문제해결을 유난히 싫어하는 이유는 '한 방의 기도응답' 같은 것에 대한 거부반응이다. 그러나 사실 말을 못해서 그렇지 내게도 이런 기도응답이 한 둘이 아니다. 유난히 싫어하는 이유는 너무 간절히 갈망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기도응답 떡받으로 사기치는 목회자들에 질릴대로 질린 탓이기도 하다. 정말이지 삼바에게 프랑스 영주권이 떡하니 생겼으면 좋겠다. 아니 아니, 삼바 말고 내게! 삶의 배신에 지칠만큼 지쳤다. 내일에 대한 불안에 오만 가지 계획을 세웠다 허물었다 하는 삶도 지겹다. 판타스틱한 기도응답 좀 매일 빵빵 터졌으면 좋겠다. 런닝타임 내내 감동을 주고 고생한 삼바가 마지막에 어이없는 상을 좀 받았다고 해서 화내지 말자. 사실 나도 많이 받아본 상 아닌가. 그리고 부조리한 인생, 의문을 내려놓지 않고 품위를 잃지 않는 사람들이 받을 복이 하늘에만 쌓이지는 않는다는 소망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궁극의 권선징악에 대한 믿음없이 오늘의 일상, 신앙의 여정을 걸어갈 수 없다. 슬퍼하는 자 더욱 슬퍼지고, 약한 자 더욱 짓밟히며, 속이는 자들이 속임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부조리한 세상을 말이다. 불법 이민자 같은 우리가 마지막에 들을 목소리,  웰컴 삼바! 

 

 

 

 

 

 

 

 

 

 

 


좋아하는 음식이 생기면 질릴때까지 그것만 먹고, 좋아하는 스타일의 옷이 있으면 비슷한 종류의 그런 옷만 입고, 좋아하는 저자가 생기면 그의 글만 파들어가 읽는다. 좋아하는 것 싫은 사람이 어딨어? 그러니 이상할 것도 없지만 집착한다는 면에서 보면 이상행동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좋아하는 것들은 덥석 가 집어들지 못하고 그것의 행성이 되어 빙빙 주변을 맴돌기만 한다. '새 것 흔 것이 없다'며 타박하던 엄마 목소리도 귀에 쟁쟁하지만 '아끼다 똥 된다'는 말도 내 속에선 익숙한 말이다.

 

좋아하는 것에 몰입하는 것이나 좋아하는 것을 두고 배회하는 마음이나 내 속에선 다르지 않다. 대상이 사람으로 가면 '몰입'보다는 '배회' 쪽의 행동을 더 많이 하는 것 같고. 중학교 때 정말 좋아하던 영어 선생님과 그냥 좋아하던 국어 선생님이 계셨는데 나중까지 연락을 주고받은 선생님은 그냥 좋아하던 국어 선생님이었다. 영어 선생님께는 이름도 밝히지 않은 선물을 교무실 선생님 책상에 갖다 놓고 '나'인 것을 알아내주시길 바라기도 했다.  예, 이승철이 부릅니다.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 '소리내지마 우리 사랑이 날아가버려. 움직이지마 우리 사랑이 약해지잖아. 얘기하지마 우리 사랑을 누가 듣잖아. 다가오지마 우리 사랑이 멀어지잖아....' 좋아하는 것을 잃고 빼앗기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비스무리한 것이다.

 

뭔말이 이렇게 장황하냐면. 최근 꽂혀서 '너무 좋다'고 여기저기 나발불고 다니는 김서영 교수에 관한 얘기다. 처음 만난 책을 단숨에 읽고 (읽으면서 이미 또 다른 저서를 검색해두는 것은 기본이다. ) 또 다른 책을 구입하기까지 약간 안절부절 망설이는 나를 본 것이다. 아껴 읽어야할 것만 같은, 좋아하는 만큼 시간을 많이 들여 읽어줘야 할 것 같은 강박에 냉큼 주문을 넣지 못했다. 더 웃긴 건 다른 핑계 삼아 광화문에 나가 교보에 가서 할인도 못받고 사오는 변태짓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에 밖에서 오래 있어야 할 일이 있어 책을 챙겨 나가는데 그 책 빼고 엉뚱한 두 권의 책을 가방에 넣어 나갔더라는..... 그리고 그 밤에 식구들 다 잠들었을 때 '이게 뭔 오글거리는 짓이냐'며 덥석 잡아 읽기 시작한 것이다. 

 

천진하게 팬심에 빠질 줄도 잘 모른다. 괜한 자의식의 검열에 걸려서 좋아하는 작가나 유명인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고 아는 척도 못하는 편이다. 오랜만에 천진한 팬심이 발동하여 책에 나온 김서영 교수 블로그에 찾아가 글을 몇 차례 남겼다. 출판사에서 진행하는 저자 강연회에 응모하여 다녀오기까지 했다. 웬만하면 좋아하는 저자의 열혈독자가 되곤 하지만 이렇게 행동에 옮겨본 것은 처음이 아닌가 싶다. 또 있었나? 강연도 강연이지만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역시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생전 안 하던 일을 시작한 거 강연회 마치고 사인까지 받으려고 기다렸다. (잠깐만~ 우우우우. 빨리 줄 서서 일빠로 받으려고 서둘러 강연장에서 나왔다. 일빠가 의미없는 서두름. 사인받으려는 사람이 나까지 모두 네 명. 엄청난 위로를 받았다. 가끔 강의 마치고 책을 판매할 때가 있는데 사인받는 사람이 늘 소수이다. 듣보잡 강사가 뭐 그렇지 뭐, 하고 마는데.  흠..... 김서영 교수도 네 명? 으흐흐흐흐) 결국 네 사람 중에 맨 마지막에 줄을 섰다. 한 사람 한 사람 정성스럽게 사인을 해주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녀의 블로그 이름처럼 '경계를 넘어'온 사람임이 분명하다. 책의 마지막에 모두 전문가가 되자고 격려하며 '전문가는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잘하는 일을 찾고 수련하여 어떤 경지에 이른 사람을 뜻합니다.' 라고 한다. '하나의 기준, 하나의 정답, 하나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정의한다면 우리는 결코 전문가가 될 수 없어요. 내게 맞는 기준, 내 정답, 내 시선을 찾고 내 장단 속에서 춤을 추어야 진정한 고수가 될 수 있습니다' 말한다. 그 자신 경계를 넘어서 대중에게로 온 전문가이다. 개인적 학문이라 치부되는 정신분석학을 사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로 연결시키려는, 무엇보다 그렇게 살아내려는 그녀가 각자 고유한 영역의 전문가로 살자고 대중을 선동하고 있다. 그 따뜻한 선동이 참 마음에 들어서 마구 동참하 싶어진다. 배우고 싶은 사람을 발견하는 기쁨, 그 사람과 연결되는 기쁨. 이게 또 하나의 사는 맛이지.

 

 

 

 

 

 

 

 

 
 
 

'고무신 거꾸로 신는다'는 말이 있다. 이런 인디언의 기도도 있다. '위대한 신이시여, 내가 내 이웃의 모카신을 신고 한걸음이라도 걸어보기 전에는 결코 그 사람을 비난하지 않도록 해주소서' 신발은 몸과 땅이 맞닿는, 발의 옷이다. 신발을 신는다는 것은 내가 내 발로 든든히 선다는 것이다. 스스로 걷고 뛰며 나아가는 방향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발은 존재의 근거 또는 삶의 방향성을 상징한다. 그래서인가. 주인공 셰릴이 높은 산 절벽 아래로 등산화 한 짝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시작하는 첫 장면의 막막함에 그저 사로잡히고 말았다. 피가 맺혀 양말에 딱 달라붙은 발가락, 덜렁덜렁하는 발톱. 그걸 뽑아내다 아아, 몸서리치며 뒤로 나자빠졌고, 세워둔 배낭이 쓰러졌졌고, 벗어놓은 등산화를 건드렸다. 등산화는 절벽 아래로 데굴데굴...... 아, 어떡해! 아직도 걸어야 할 길이 긴 것 같은데, 산 정상인 것 같은데 어쩌지?  정말 존재 그 자체가 빡침이라는 듯 한 마디 통쾌한 욕을 날리며 쉐릴은 남은 등산화 한 짝을 던져 버린다. 막막함으로 콱 막힌 가슴히 오히려 뚫리는 것 같다. 잘했어, 씨이. 어떻게 되겠지.
 
가난하고 상처 많은 가족이지만 삶을 사랑할 줄 아는 엄마가 유일한 한 줄기 빛이었다. 셰릴에게는 존재의 근거, 땅에 발을 딛고 서게 하는 신발이었을지도 모른다.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남을 사랑할 줄 안다. 이젠 흔한 현수막 문구같은 이 말이 셰릴 엄마의 한 줄 인생이다. 술주정뱅이 폭력 남편을 피해 도망쳐 나와 남매를 키우면서 더 이상 이타적일 수 없는 희생적인 엄마이다. 이타적 엄마가 늦게 자기를 돌보며 공부를 시작한다. 엄마에게는 늘 삶을 향한 잔잔한 긍정의 에너지 가득이다. (늑대아이의 엄마도 생각난다. 영화의 엄마들은 왜 다 이러냐? 현실의 채윤이 엄마… 그만 울자!) 그런 엄마가 암선고를 받고 그 충격이 가실 시간도 없이 떠나버렸다. 존재의 근거를 잃은 셰릴은 막 살기로 작정. 신발 한 쪽 잃어버렸고 나머지 한쪽까지 던져버리는 심정으로 세상에 대고 욕하는 삶, 자신을 욕보이는 삶을 산다. 엄마도 없는데 착하게 살아서 뭐해. 착한 엄마를 그렇게 죽게한 신(이든 누구든) 다 실망시켜버릴 거야.
 
가슴 깊은 곳에 새겨진 엄마의 사랑은 이 아이를 그대로 두지 않는다. 껌 딱딱 씹으면서 반항과 분노의 가죽쟈켓을 입고 상담가 앞에 앉은 셰릴이 말한다. '저 그림 싫어요' '왜요?' '인간을 하찮은 존재로 그리는 것 같어서요.' '당신은 당신 자신을 귀하게 생각하나요?' 반항과 분노의 셰릴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온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있나? 셰릴의 PCT 홀로 수련회 주제는 '당신은 당신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가? (사 43:3)' 이다. 끓이지 않은 딱딱한 등산용 식량을 씹어 먹으며, 시궁창 같은 물을 식수로 마시며, 또아리 튼 뱀을 피해 살금살금 달아나며, 짐승보다 더 짐승같은 남자들에 대한 두려움을 견디며, 한 발 한 발 내대딜 때마다 발톱이 빠져나가는 고통을 참으며, 온몸에 상처, 상처 위에는 땟국물. 이런 프로그램으로 과연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회심을 체험하는데 도움이 될까. 아, 프로그램 잘 짰다. 남편이 있지만 지금 당장 원하는 모든 남자와 섹스를 하고 헤로인을 하며 즐길대로 즐기는 삶. 이런 삶 대신 레모네이드 한 잔만 마시면 원이 없겠다는  결핍의 극한을 통과하며 셰릴의 몸과 마음에서 독기가 빠져나가는 것 같다. 인간이 몸을 가졌다는 것을 얼마나 자주 잊고 사는가.(누가? 인간이) 아픈 발가락을 어루만지고 냄새 나는 몸을 씻겨내며, 따뜻하고 부드럽게 끓여진 죽을 입에 넣는 것으로 '나를 귀하게 여김'은 시작되고 있다. 
 
<여기서 잠깐> 같이 영화를 본 남편이 두 가지 논평을 내놓았다. 1) 멋진 풍광이 많을텐데 굳이 그것들을 담지 않았다. 2) 영화에서 그려지는 남자들은 현실적이지가 않다. 우리 편 아니면 나쁜 나라. 1) 그러네. 카메라는 주로 셰릴의 코앞, 주변만 맴돈다. 고개를 들어 멀리 바라보며 풍광을 즐길 처지가 아니지 않나. 내면의 트래킹이다. 내면의 트래킹만이 나의 잃어버린 신발, 잃어버린 삶의 정체성을 다시 찾는 길이다. 2) 여자들은 그래. 여자들이 여자라는 이유로 얼마나 성적인 취약함에 노출되어 있는지. 어릴 적부터 여자들은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몸을 일상에 숨은 나쁜 놈들의 추행을 통해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라고 어느 모임에서 누가 말했다) 때문에 영화에서 남자들에 관한 비현실적인 이미지는 실제로 여자들의 삶에선 지극히 현실적인 이미지일 수도 있다. 
 
극한 상황에서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렸다. 나는 어떻게 느끼고 어떤 행동을 할까? 생각만 해도 찌질하다. 대책도 없다. 신지도 벗지도, 진정한 원망도 감사도 모르고 그저 어정쩡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적응이라 착각하면 살겠지(살아왔다). 영화를 본 이상, 나이를 이 만큼 (처)먹은 이상 나머지 한 짝까지 내던지는 뱃심을 좀 가져야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신발은 발이 아니다. 산 정상에서 등산화를 잃었다면 정말 막막한 일이지만 셰릴에게는 슬리퍼가 있었고 은박 테이프가 있었다. 무엇보다 발은 여전히 자기 것이다. 얼길설기 테이프로 두른 슬리퍼 등산화를 신고 다시 걸어나갈 수 있었다. 영화를 본 이상 잃어버린 신발에 연연해하지 않기로 하자. 고가의 신발 잃어버릴까봐 꺼먼 봉지에 담아 밥 먹는 테이블까지 들고 들어가는 비싸서 추접스러운 행동들을 삼가고 돌아보자.
 
어릴 적 아버지 죽음으로 신발 한짝을 잃어버린 나는 나머지 한 짝을 붙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40년 넘게 찔룩거리며 걸어왔다. 찔룩거리며 걸어온 탓에 영혼의 균형이 많이 깨졌고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일그러진 삶을 살고 있다. 셰릴이 혼자만의 길을 떠났던 것처럼 나 역시 혼자만의 내적 여정을 길을 떠나온 날이 있었다. 비로소 한 짝 남은 신발로 걷는 불편함도 느끼고, 굳은 살 박힌 한 쪽 발의 상처를 바라보고 조금씩 어루만질 수도 있게 되었다. 영혼의 레모네이드 한 잔을 그릴 줄 아는 감각도 민감해지고 있다.  나머지 한짝까지 벗어 던지고 맨발로 세상을 뒹굴던 셰릴도 잘했고, 찔룩거리며 세상에 적응하려 애쓰던 나도 잘했다. 셰릴의 여정의 종착지는 '신들의 다리'이다. 내 종착지의 표지판에도 비슷한 말이 적혀 있을 것이다. 말은 비슷해도 함의하는 건 전혀 다르겠지만. 영화 참 좋았다!
 
 

 
 
 
 
 

 

 

 

 

조소희, 제 14회 송은미술대상, 작가노트 중

 

"사물의 연약함과 흔들림은 언제나 나를 사로잡는다. 이것은 마치 육중한 무게를 지닌 존재가 그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연약하게 미동하는 모습이 기묘하게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런 아름다움은 단순한 개념으로 수렴되거나 시각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고 다층적인 감성과 의미를 드러낸다. 말하자면 굉장히 네러티브하기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상징적이기도, 과학적이면서 동시에 시적(詩的)이기도 하다.

(중략)

예술의 존재론적인 물음에 대해 나는 형이상학과 여타의 개념만으로 그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정말로 내 이미지를 내 곁에서 떠나 보내고 싶은 한편, 온갖 의미로 가득 찬 탱탱한 이미지의 탄력을 열망하기도 한다. 때론 이미지가 어느 순간 제 스스로 길을 찾아 날아가고 있는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나는 그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리고 그 진동으로 내 이미지의 끄트머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볼 때 나는 만족감을 느낀다.

 

 

전시회장에 도착하여 작품을 보기도 전, 작가노트를 읽고 울 뻔 했다. 작가의 이미지 끄트머리의 파르르 떨림이 이미 내 가슴 깊은 곳에 전해서 파르르 파르르 했다. 감상평을 빙자하여 작품의 이미지를 걸어두고 이렇게 저렇게 알은 척을 하고 싶지만 이번 만큼은 안 되겠다. 다시 도록을 베끼자.

 

 

"조소희의 작업은 예술의 진리 추구를 위한 자기반성에 기반하여 일상의 연약하고 작은 오브제들이 갖는 힘을 사유하고 그로 인해 교차되는 역설적인 미학을 고찰한다. 이를 통해 쉽게 규정지을 수 없는 예술이 갖는 무한한 잠재력에 주목하고 예술가로서 자신의 살밍 어떻게 예술과 합치되어가는지 몸소 실행하여 보여주고 있다."

 

 

예술가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이미지, 작품을 떠나보내고 싶다는 간절함은 무엇일까. 두루마리 휴지, 식당의 냅킨, 실, 초, 봉숭아 물 들인 손가락. 영원불멸의 작품이 아니라 일상의 풍화와 더불어 스러져버릴 것들을 작품화하여 작가는 무엇을 남기고 싶은 것일까? 작품이 아니 작가가 내게 너무 많은 말을 건네온다. 세 시간여에 걸쳐 이야기 나누는 동안 파닥파닥 춤추다 내 마음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154 마리는 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 중 한 마리도 묘사해 낼 수가 없다.  구상 시인의 <시와 기어>라는 시가 <예술과 기어>라는 제목으로 그대로 작가의 작품이 되었으니 시를 읽어봄이 마땅하다.

 

 

시와 기어(綺語) - 구상

 

시여! 이제 나에게서

너는 떠나다오.

나는 너무나 오래

너에게 붙잡혔었다.

 

너로 인해 나는 오히려 불순해지고

너로 인해 나는 오히려 허황해지고

거짓 정열과 허식에 빠져 있는 나,

그 불안과 가책에 빠져 있는 나,

너는 이제 나에게서 떠나다오.

 

그래서 나는 너를 만나기 이전

그 천진 속에 있게 해다오.

그 어떤 생각도 느낌도 신명도

나도 남도 속이지 않고 더럽히지 않는

그런 지어먹지 않는 상태 속에 있게 해다오.

 

나의 입술에 담는 말이

진심에서 우러나오게 되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에서

너의 색안경을 벗어버리고

세상 만물과 그 실상을 보게 해다오.

 

오오! 시여 나에게서 떠나다오.

나는 이제 너로 인해 거듭

기어의 죄를 짓고 짓다가

무간지옥에 들까 저어하노라.

 

 

* 기어(綺語)는불교에서 입, 마음, 몸으로 짓는 십언 중 입으로 짓는 업으로, 화려하고 유수하지만 실속 없는 말로 남을 현혹시키는 죄를 뜻한다.

 

 

작품이나 작가가 나를 가르친 것이 없으나 나는 무한 신비로운 배움을 안고 전시장을 나섰고 작가와 함께 한 카페를 나섰다. 그렇게 오후를 보내고 또 다른 배움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융 분석가와 함께 하는 모임에 참석했다. 오후 내내 영혼을 울린 작품이 준 여운을 깊이로 끌고 갈 마음 탐색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 무슨 공교로움이란 말이냐. 밤은 오후와 달랐다. 오후에 만난 예술가가 예상을 빗겨간 것처럼 밤에 만난 분석가도 내 기대를 보기좋게 저버렸다. 

 

'자기'라는 바다에 푹 빠져 수영을 하든 목욕을 하든 용서받을 수 있는 예술가는 '자기몰입'과 '자기부인' 사이에서 이율배반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 흔들림의 고백은 듣는 이의 영혼에 파장을 일으켰다. 에고(Ego)의 일방주행을 인식하고 무의식의 깊은 중심과 연결되어 '자기 자신이 되게 하는 길'을 안내하는 분석가는 '자기공부'에의 자긍심에 갇혀 일말의 흔들림 없이 확고하였다. 예술을 방패 삼아 얼마든지 자신만의 세계를 피력할 수 있는 예술가는 타인의 세계를 수용하는 법을 알고 있는 듯했는데, 성찰을 통해 의식의 작은 나를 버리고 더 큰 나로 나아가야 할 분석가는 타인을 부정함으로 자기를 우뚝 세우는 확고함으로 나를 당황하게 하였다.

 

길고 혼란스러운 오늘 하루를 토닥이며 마음에 담아두는 말은 이것.

 

"사물의 연약함과 흔들림은 언제나 나를 사로잡는다."

 

화려하고 유수하지만 영혼을 울리지 않는말로 남을 속이지 않는 길은,

내가 먼저 된통 속지 않는 길은 안팎의 연약한 것들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음.

 

 

 

 

 

 

 

 

'사는 게 행복해? 행복이 뭘까?' 질문을 받았다 치자. 답을 하는 대신 질문자의 행복 안부를 걱정하게 되지 않나? '어, 이 사람사는 게 힘든가 보다.' 묻는 사람 역시 마주앉은 이를 거울삼아 반사시켜 자기로 향하게 하는 질문임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잘 정돈된 삶을 사는 정신과 의사 헥터 씨의 일상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행복 여행은 이 질문으로 시작된다. '당신 행복해?' 애인 클라라에게 '행복하냐'고 묻는 순간 예쁜 애인은 '헤어지자'로 알아듣는다. 행복하지 않구나, 나 때문이구나, 생각이 이렇게 흘러가는 탓이다. 내가 남편에게 이 질문을 받았다 가정해도 비슷하게 넘겨 짚을 것 같다. 어쨌든 헥터 씨는 불행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행복하지도 않아 행복을 찾아(자아를 찾아)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클라라가 헥터의 여행가방 안에 노트 한 권을 넣어 두었다. 이 노트에 그림 한 장, 명언 하나씩 채워지며 여행은, 영화는 진행된다. (리뷰 쓰고 싶은 관객들에겐 딱 좋은 장치이다. 여행의 기록은 행복의 정의에 관한 다양한 기록이고 노트의 문장들을 하나씩 묵상해보면 자연스럽게 추보식 리뷰가 완성될 것이다. 그렇게 쉽게 갈까, 말까 고민 중) 아무튼 첫 목적지는 '돈'이다. 돈이 행복인지 알아보기 위해 캐스팅된 나라는 중국.

 

"많은 사람들은 돈과 지위를 가지는 게 행복이라고 느낀다."

 

돈이 행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돈이 없어서 불행감을 느끼는 경우는 많다. 가끔 마음에 먹구름이 낄 때가 있는데 표면적인 다양한 이유와 달리 알고 보면 돈 걱정인 것을 보면. 걱정하는 마음과 불행한 마음이 늘 같은 마음은 아니지만서도. 어쨌거나 마음에 끼는 먹구름의 끝에는 먹고 사는 걱정, 즉 돈 걱정일 때가 많은 것 같다. 그래도 10여 년 전을 떠올려보면 나아졌나 싶기도 하다. 어느 때부턴가 남편이 '정신실 옛날 친구들 만나고 와서도 우울해 하지 않네. 올, 많이 변했는데' 어떤 친구들을 만나고 더 불행하게 느낀 것은 헥터 씨가 메모한대로

 

"남과 비교하면 행복을 망치"기 때문이다.

 

결혼 전 배우자 기도 목록을 따로 작성하지는 않았지만 품고 있는 건 있었다. 하나님께 내놓을 결재서류용 목록은 고상하고 형이상학적이었지만 실제 바램은 단순했다. 당시 오래된 티코를 타고 다녔다. 대학원을 다니던 중에는 실습 때문에 악기를 많이 싣고 다녔어야 했는데 차가 작아서 불편하기도 했고, 똥차라서 부끄럽기도 했었다. 여하튼 나의 백마 탄 왕자님은 제일 먼저 차를 바꿔줄 것 같았다. 그때 나온 차, 라노스 쥴리엣 빨간색이 그렇게 예뻤다. 결혼과 동시에 차가 바뀌면서 <돈에서 해방된 교회>-박득훈 저,가 아니고 돈에서 해방된 정신실이 될 줄로 생각했다. 똬하! 이걸 보고서용 서류에 명시했어야 하는데 거기 안 썼다고 이것만 안 들어주셨다. 그래서 언제라도 비를 뿌릴 준비가 된, 손바닥만 한 돈 걱정 먹구름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 쓰다 보니 내 행복의 안위에 크게 위협적인 건 아니다. 잘 살아왔고 살아있는데 어쩔.  

 

춤춰라.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춤의 치유적 효과를 경험해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나는 몸치이다. 평생 몸치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몸치'가 곧 '영혼치'라는 것을 어떤 피정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생각하고 글로 말로 유려하게 표현할 줄 알지만 몸으로 하는 일로 가면 박수조차 자유롭게 못 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자유롭게 춤추지 못하는 이유는 누군가 보고 있다면!이다. 춤출 때의 삐거덕거리며 바보 같은 내 몸을 누군가 보고 있다면? 오, 죽을 것같은 부끄러움이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비행기에서 만난 아줌마(아가씨?)의 초대로 고구마 수프를 먹으러 간 집에서 춤추는 헥커 씨. 몸치이며, 영혼치, 행복치였던 헥커씨가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시어머니를 보내드렸던 내면아이 치료 세미나는 4박 5일 동안 춤만 추다 오시는 곳이었다. 춤을 출 수 있을 때 어설픈 어른행세에서 벗어나 거침없이 행복을 추구하던 말랑한 영혼이었던 때로 회귀할 수 있다. 그 말랑한 영혼을 자꾸 풀어놓아 다니게 해야 한다. 행복과 직결된 중요한 지점이다. 

 

"사랑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삶도 두려워한다."

 

결국 사랑이다. 인간 본질에 관한 질문을 하다 '사랑'을 만나지 않을 방법이 없다. 적어도 내겐 그러하다. 헥커씨가  마지막 비행기 여행에서 만난 뇌수술 환자를 돌보고 난 후 메모한다. 여행의 끝자락에서 행복에 관한 질문이 어디서 끝날지 예고하는 것이다. 헥커씨의 사랑은 오래된 사진 속 옛 애인이다. 당초 '나는 행복한가' 하는 질문에는 사진 속 연인 아그네스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남자이며 감정에 무딘 헥터는 느끼지 못했을까? 지금 애인 클라라의 촉이 먼저 감지한 것이다. 때문에 클라라는 꾸뻬씨의 행복 여행을 자신과의 이별여행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나이에 연애강의를 하는 게 늘 조금 부끄럽다고 생각했었는데 작년부터 생각이 바뀌었다. 연애 과잉의 시대를 곰곰이, 비판적으로 생각해보면서 연애(또는 연애감정)은 모든 세대의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이 역시 꿈을 통해서인데.... 꿈 드립은 그만하자) 연애를 하기 전에는 연애를 꿈꾸며 살고, 연애를 하면 연애를 살며 살고, 연애 후에는 연애를 추억하며 산다. 심지어 어떤 모임에서 60대 보통 아주머니들이 20대 연애사를 떠올리며 눈빛이 흐려지는 것을 현장범으로 체포할 수 있었다. 로맨틱 러브는 결국 더 큰 사랑, 아가페 사랑을 지향하지 않을 수 없다. 연애를 더욱 인문학적으로 확장시켜 공부하고 강의하자며 한껏 의욕이 높아졌다. 사랑에 비춰본 나, 다시 사랑하게 된 나. 행복은 사람 잇대어진다. 핵커씨가 여행의 끝에 찾아간 곳은 옛 애인 아그네스가 있는 LA이다. 자신의 아이들에게 핵커씨를 소개한다.'아 아저씨는 엄마의.... 음..... 엄마의...... (망설망설) 헥커야!' 이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지금 여기를 행복하게 사는 아그네스가 대화 중에 빡쳐서 소리 지른다.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어. 네 환상 속의 그녀를 사랑했지' (정확한 워딩 아님) 헥커씨는 이 말을 듣기 위해 '꾸뻬씨의 행복여행'을 떠나 지구 한 바퀴를 돈 것이다.

 

어디에 누구와 있을 때 행복한가? 둥근 지구를 한 바퀴 돌면 바로 자기가 서 있던 지점이라고 했던가? 결국 지구의 끝은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 클라라와 함께하던 일상,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곳이 거기 있고, 행복 역시 그 자리에 있음을 깨달을 꾸뻬씨.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게 사랑이다. 행복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애써 퍼내지 않는 사랑이 속에서 솟아날 때,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곁에 있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눈. 그 눈을 실은 나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이다. 아그네스를 향한 그리움이 자신이 만들어 낸 환타지였음을 깨달았을 때, 오래 전 아그네스와 사랑을 나누던 시절에도 이미 환타지였음을, 무엇보다 아그네스로 그로 인해서 힘겨웠음을 깨달았을 때 꾸뻬 씨는 적어도 자신의 행복을 찾게 되었다.

 

 

나의 행복은 안녕하신가. 내 사랑은. 나의 사랑들이 내가 제작한 환타지의 틀에 갇혀 고통스러워하진 않는가. 페북의 좋아요 갯수 확인하느라 내 일상의 사랑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진 않는가. 어느 블로거의 명문을 읽느라 '엄마 이거 봐, 엄마 이거 봐'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환청처럼 듣고 있진 않는지. 내 사랑의 안부를 묻는다.

 

 

 

 

 

 

 

 

 

1.

영화를 보고 나오며 '다음 회 바로 한 번 더 볼까' 잠시 망설였다. 한 번 본 영화를 또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지만 그 자리에서 다시보기 충동을 느낀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너무 감동적이어서가 아니라 곱씹어야 할 것만 같은 감정이 실스마리아의 구름처럼 서서히 나를 덮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영화가 마친 시점, 마음 속 의문의 구름 한 점이 저 멀리서 안개처럼 형성되기 시작했고, 적어도 비라도 한 방울 뿌리려면 무르익어야 했다. 한 번 더 보고 비든 눈이든 뿌려볼 것인가, 굳이 8000원을 더 쓸 필요가 있을까 하면서 며칠을 보내고 있던 참이었다.

 

2.

즐겨 듣는 영화평론 팟캐스트를 듣다가 화딱지가 났다. 영화 얘기는 하나도 안 하고 캐스팅 얘기, 연기 얘기만 하고 끝나지 않는가. 헐. 영화평을 검색해 봐도 죄 세대가 다른 여배우들의 열연, 또 캐스팅 얘기였다. 그러든지 말든지 나와 무슨 상관!  2014와 함께 흘려 보내자. 하고 있던 참에 꿈나무 문화평론가 G를 만났다.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하다가 내가 예를 들어 설명하기 위해서 이 영화 얘길 꺼냈다. (뭔 얘기에 뭔 설명을 위해서였더라?) 이 영화에 별 한 개를 줬단 얘기를 들으며 20대 인생 여배우인 G로서는 그럴 수 있겠구나 싶었다. 듣다가 빡쳤던 팟캐스트 역시 젊은 여배우와 남자 평론가 둘이었으니 비슷한 맥락이었을 것이고. 40대 여배우인 내가 느끼는 걸 느낄 수는 없겠구나 싶었다.

 

3.

결혼 전 내 방에도 영화 <세 가지 색 : 블루>의 포스터 판넬이 걸려 있었다. 영화보는 내내 젊은 날의 쥴리엣 비노쉬를 대변하는 그 이미지가 자꾸만 떠올랐다. 어떤 영화든 영화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 외에는 차단하고 관람하는 편이다. 20대에 주인공을 맡아 스타덤에 오르게 한 연극을 40대가 되어 다시 맡게 된 여배우의 이야기라고 했다. 당연히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의 대역, 주인공을 주인공 되게 하는 늙은 여자 역할이라니 견적 나오는 스토리 아닌가. 질투, 도발, 회한.... 이런 단어를 보고 나름 천박한 상상을 하며 극장을 찾았다. 나이브하게 상상했던 질투, 회한, 갈등은 전혀 없었다. 갈등이라면  마리아 앤더스(쥴리엣 비노쉬)의 내적갈등이 있고 그 내적갈등은 매니저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과의 대본연습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내가 감동받은 부분은 대본연습에서 오고가는 대사였다. 그리고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과하지 않은 표정에서 갈등의 기승전결을 읽어내는 재미였다.

 

4.

대본연습인지, 마리아 앤더스 본인의 말인지가 오락가락 하는 지점에서 매니저 발렌틴의 표정과 대사에 숨은 그림 찾기의 그림이 다 숨어 있는 듯. 영화 초반부 충실한 비서의 모습을 보여주다, 친구처럼 보이기도 하더니 결국 마리아를 떠나버렸다. 그리고 중요한 대사들은 다 그녀의 입을 통해 나왔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연기부문 1등 상은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것이다. 왜 그렇게 젊음의 특권에 집착하느냐, 당신의 현재 배역 헬레나가 훨씬더 인간적이다, 글은 물체와 같아서 보는 방향에 따라서 달라보인다. 주옥같은 대사를 쏟아냈는데 마리아는 다 흘려들었고, 덕분에 관객도 흘려들었고, 기억나는 대사가 저 정도이다. 인간은 가장 객관적인(것이 과연 있을까마는) 말, 내게 가장 필요한 말에 귀를 막게 되어있다. 비웃거나 화내거나 못 들은 척 하거나. 마리아가 발렌틴의 말에 반응했던 방식으로.

 

5. 

발렌틴이 계속해서 일깨우고 싶은 것은 쉽게 말하면 젊은 날의 당신 '시그리드'를 연기했던 당신으로부터 자유로와져라, 였던 것. 시그리드에 너무 동일화 되어 지금 맡은 헬레나 역을 거지같이 여기는 것을 안타까워 하면서 말이다. 그 역을 맡은 쥴리엣 비노쉬로 치자면 '블루'나 '퐁네프의 연인들'의 쥴리엣이 아닌 지금의 쥴리엣을 살으라는 것이다. 시그리드라는 이미지와의 동일시를 벗어버리지 못하는 한, 이번 연극의 헬레나 역을 제대로 연기하지 못할 뿐 아니라(말하자면 일도 제대로 못하고) 오늘을 행복하게 살 수도 없다는 것. 발렌틴이 여러 번 빡치고 또 빡친다. 마리아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저항하고 방어하는 지점이다. (마리아는 못 봤지만) 먹던 걸 집어 던지고 그랬다. 점점 더 비합리적이 되어가는 마리아를 견뎌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6.

엄밀하게 따지면 마리아는 마리아이다. 시그리드도 헬레나도 배역일 뿐이다. 배역과 자기를 분리해내지 못할 때, 다시 말해서 진정한 자기를 잃어갈 때 그 결과는 '자기함몰'에서 오는 비합리적 판단이다. 말로야 스네이크를 보러 가는 길. 마리아가 지금 이 길이 맞냐고 묻는다. 발렌틴은 아마 이 코너를 돌면 어떤 길이 나올 것이고 다 온 것 같다고 한다. 마리아가 '그걸 어떻게 알아?' 발렌틴이 '지도에서 보니 그렇다'면서 지도를 보여주며 설명한다. '지금 여기고 다음은 여기고.... 어쩌구 저쩌구'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아냐고?' 발렌틴 표정. '어이 엄습' 다음 장면에서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발렌틴은 떠나고 없다. 자기 이미지에 갇혀 귀가 막혀가는 마리아를 보며 빡치고 또 빡치던 발렌틴이 지도를 지도라 부르지 않는 비합리성 앞에서 터지고 말았던 것. 모르는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에게 지도란 무엇인가?  그 이전 장면에선 마리아가 (전에 와봐서)아는 길을 감으로 찾아가다 결국 길을 잃은 적도 있다. 이렇듯 명백한 대비 속에서도 마리아는 점점 더 이성을 잃어가는 자신을 보지 못한다. 왜? 자기 이미지에 갇혀서. 시그리드도, 헬레나도 마리이가 아니다. 영화의 중첩되는 구조는 심지어 마리아 역시 쥴리엣 비노쉬 자신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7.

마리아를 이해한다. 한때, 젊은 한때 누구나 자기 삶의 여주인공이었다. 나도 그랬다. 나이가 50을 바라보는데도 솔까말 마음은 아직 청년부 같다. 게다가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나는 아직 44사이즈를 입는다. 거울을 얼굴 가까이 대고 보지 않는다면, 웃으면서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뽀샵 처리되지 않는 직찍 사진만 보지 않으면 내 나이 나를 인식할 수 없다. 아니, 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마리아가 시그리드에 집착하는 것을 단순히 인기 여배우가 과거를 잊지 못하며 일으키는 분열 정도로 볼 수 없다. 비록 20대와 마찬가지로 44를 입는다 자랑하지만 의미없는 사이즈다.  볼에 있던 살이 다 흘러내려 복부에 모여 있는 이 우스꽝스러운 몸, 이 몸을 내 몸으로 수용하기란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지. 일시적인 현상이고 다시 돌아갈 거라고 믿고 싶지만 깊이 패인 눈가의 주름을 들여다보면 '절대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하물며 마리아 앤더스, 쥴리엣 비노쉬랴! 

 

8.

교훈적 결론.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필수 발달과업이다. 고집스런 꼰대 노인네가 되느냐, 속에서부터 포근하고 넉넉한 아줌마 (더 나아가 할머니)가 되느냐의 갈림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아의 늪에 빠져 나와 세상을 바라보는 객관적인 시각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불행하게 사느냐 마느냐의 기로이기도 하다. 다행히 마리아는 영화의 마지막에 한 번 더 몸부림을 쳐보다 어리디 어린 시그리드 역의 조앤에게 한 방 먹고는 더 좋은 길을 선택한 것 같다. 나도 역시 그러려고 한다. 영화 <은교>에서 늙은 소설가 이적요가 말했다. '너희 젊음이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내 잘못으로 얻은 벌이 아니다' 심금을 울렸었다.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책에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누구도 내게 상처줄 수 없다' 이런 비슷한 말이 나온다. 이 예문에 따라 각색해보자면, 내가 나를 늙었다고 조롱하지 않는 한 누구도 나의 늙음을 조롱할 수 없다. 내가 나의 늙음을 벌로 생각하고 부끄럽게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내 늙음은 부끄러움일 수밖에 없다.

 

9. 사족

영화를 본 이후에 영화 홍보 나레이션을 김희애가 했다는 걸 알았다. 쥴리엣 비노쉬에 버금가는 여배우라면서. 버금가는 건 모르겠지만 싱크로율은 매우 낮다. 주름 하나 없는 꿀광 피부, 20대 버금가는 몸매를 유지하며 스물 한 살 아인이와 정사를 나눠도 부끄럽지 않은 방부제 젊음의 김희애. 그 따위 김희애를 어디 감히 쥴리엣 비노쉬의 반열에! 영화에서 마리아와 발렌틴이 트레킹을 하다 호수를 만나 뜬금없이 옷을 홀딱 벗고 수영하는 장면이 나온다. 두 사람다 몸매가 현실적이지만 전라의 쥴리엣 비노쉬는 오메, 나 자신(나자연 아니고)이며, 내 친구!  반갑고 서글펐다. 그 몸매를 민망히 여기지 않고 심지어 아름답다 느낄 수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김희애는 땡 탈락! (물론 부러워서 이러는 거임)

 

 

 

 

 

 

 

 

 

 

내 비록 '해피앤딩이냐 아니냐'의 일천한 영화 선택 기준을 가지고 있지만, <비긴 어게인>의 해피앤딩은 참 싫었다. 이제 와 이런 얘기하는 게 좀 늦은감이 있다만.  많은 사람들이 좋다는데 나만 싫다하면 까칠한 인격으로 비쳐질까 망설이다 적시 포스팅을 놓쳐 묻어둔 뒷담화이다. 곽진언의 노래로 결국 이 영화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숨길 수 없는 내 인격의 까칠함이여!  <비긴 어게인>이 싫었던 것은 망가진 인생들의 비긴 어게인이 너무 동화같아서였다. 영화 초반에는 <인사이드 르윈> 생각이 났다. 되는 일이 하나 없는, 없어도 너무 없는 남자 주인공 댄의 수염이 르윈의 그것과 겹쳤져 보였다. 그러나 영화 중반에 못 미쳐 댄의 수염은 단정해졌고 영화는 초긍정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호박이 마차로 바뀌고 구멍난 물동이를 맞춤형으로 막아줄 두꺼비가 막 튀어나오는 느낌? 노답의 거지 같던 댄에게 그런 부자 친구가 있을 줄이야. 수준급 음악성을 가졌고 돈에는 관심이 없는 아티스트들이 클래식과 팝을 막론하고 그렇게 흔할 줄이야. 걔네들이 다들 우리 편이 되는 맥락없는 필연에다, 심지어 반항아 딸이 아무 예고도 없이 기타 애드립을 그렇게 잘 할 줄이야. 게다가 주인공 크레타는 천부적인 음악성에, 머리도 좋은데다, 남친에게 배신당하고 잠수 일주일도 안 타고 일어나는 높은 자존감에, 심지어 사춘기 여자애 상담도 잘 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이라니.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음원을 올리는 장면에서 '1달러'에 클릭하는 장면에선 어이없어 화딱지가 났다. 영화 탓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기대 문제였다. <비긴 어게인>이 좋은 영화일 줄 알았다. 내 기준에서 나쁜 영화(설교, 강의, 책)는 허튼 희망을 불어 넣는 영화(설교, 강의 책)이다. 마음 따뜻해지는 영화,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결말, 나쁜 사람이 후회하고 착한 사람이 잘 되는 영화를 좋아한다. 물론 좋아한다. 그러나 그것을 빙자해 현실과는 전혀 다른 긍정을 꿈꾸게 만든다면 그건 '나쁨'을 표방하는 영화보다 더 나쁜 영화다. 마침 이 영화를 홍대 근처에서 보지 않았겠나? 음악을 하는, 흔히 비주류라 불리는 음악하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 <비긴 어게인>은 어떻게 읽힐까? 그 생각을 하니 더 싫었다. 이 영화에서 받은 감동이란 키이라니이틀리가 참 예쁘구나. 이것 뿐이다.  

 

 

 

 

 

<인사이드 르윈>을 참 좋아한다. 추운 겨울 코트 하나 없이 지내던 르윈에게 결국 따뜻한 코트 하나, 편히 쉴 수 있는 침대 하나, 알아봐 주는 사람 하나 생기지 않고 끝나는 이 영화가 참 좋다.  나와 우리의 삶을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 같은 영화라 불편하면서 편안한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자리에서 다시 노래하게 되는 아주 작은 힘, 설마 그것이 '힘'이겠느냐 묻겠지만 '다시' 서게 하는데 '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힘'이 아니면 '희망'일 것이다. (르윈에게서 희망찾기나 암울한 현실에서 희망찾기나 거기서 거기) 르윈은 물론 <비긴 어게인>의 댄처럼 지저분하고 무능해보이는 남자는 비호감이다. 헌데 영화 중반 댄이 갑자기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감을 가지고 음악을 프로듀싱하며 크레타와 썸 타기 시작하는 지점인 듯하다. 다른 사람 같아 보였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 어간에 수염을 깎고 멀끔해져서 등장했다. 영화 <비긴 어게인>을 관람했던 때,  유민이 아빠 김영오 씨가 한창 단식 중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수염이 덥수룩해지고 있었다. 이후 문재인 의원이 지원 단식을 시작했고 그 역시 덥수룩해져 갔다.  문재인 의원의 수염이 많이 자랐을 때 온통 흰색인 것을 보고 마치 그의 마음의 기력을 확인한 것 같아 씁쓸하고 아팠다. 유민이 아빠가 세월호 유가족이 되는 날벼락 같은 운명을 뒤집어 쓰기 전, 말끔하고 통통했던 얼굴의 사진도 보았다. 결국 단식을 풀고 수염도 깎고 말끔해졌지만 내 눈에는 여전히 그 수염이 보였다. 결코 수염을 깎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코 비긴 어게인 할 수 없는 상태에 던져진 사람들이 있다. 말끔해진 <비긴 어게인> 댄의 얼굴에서 르윈의 수염과 유민이 아빠의 수염이 오버랩 되면서 마음이 더 복잡해졌던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영화니까!' 하면서 허구를 뒤집어 쓰고 잠시 위안을 주는 <비긴 어게인>이 싫은 만큼 답답할 정도로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인사이드 르윈>이 좋다.

 

 

 

 

우리 집도 곽진언 앓이 중이다. 칙칙한 건 딱 질색인 채윤이 빼고 세 식구는 매일 매일 곽진언을 듣는다. TV가 없어서 본방사수는 못(안) 하고 그저 음악만 듣는다. 곽진언이 슈스케에서 처음으로 부른 자작곡 <후회>를 듣고 '무슨 스물 네 살이 내 친구 같애' 라고 한 심사위원 윤종신의 말이 딱 내 말이다. 뭔 스물 네 살이 인생을 안다냐. 아무리 원하고 기도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벌써 알았지? 애쓰고 기도하면 떠난 님이 다시 돌아와 사실은 너 밖에 없어, 할 것 같은 희망으로 사는 때가 20대 아닌가?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무리 원해도 안 되는 게 있고, 아무리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을 공포체험으로 배웠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 있는 애들이 철이 든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아버지를 잃어보지 않은 아이들이 어떻게 철이 들고 인생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나 생각했다. 철이 든다는 건 다름아닌 '아무리 원해도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내게는 아버지의 죽음이었지만 다들 어떤 방식으로든 인생을 배우게 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렇다 해도 스물 네 살 곽진언의 가사는 철이 너무 든 거 아냐. 

 

<후회>

 

아무리 원한다 해도 안되는 게 몇 가지 있지

열심히 노력해봐도 이루어지지 않는 게 있지

 

죽도록 기도해봐도 들어지지 않는 게 있지

아무리 원한다 해도 안되는 게 몇 가지 있지

 

그중에 하나

떠난 내 님 다시 돌아오는 것

아쉬움뿐인 청춘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사랑하는 우리 엄마 다시 살아나는 것

그때처럼 행복하는 것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그 시절은 지나갔지만

아마도 후회라는 건 아름다운 미련이여라

 

 

언더그라운드 아티스트들에게 아무리 원한다 해도 안 되는 것 중 하나가 서바이벌 프로그램 나가서 1등 하고 뜨는 것일텐데 곽진언은 특유의 재능과 성품으로 어필하여 그걸 이뤄냈다. 우리 집에서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김필 1등, 곽진언은 아마도 2등?을 점치던데. 그것은 곽진언을 지켜주고 싶은 애정, 또는 자기만의 진언이기를 바라는 이기적 애정일 것이다. 진언 같은 스타일은 왠지 마너리티로 남아줘야 할 것 같지 않은가. 곽진언이 르윈의 예술가적 멜랑꼬리 글루미.... 이런 걸 다 가지고도 크레타 식의 성공을 이뤄낸 것 같아 내가 다 기쁘다.  1등도 좋고 5억 상금도 좋고, 슈스케 6년 만의 최고 점수도 좋은데.... 다 좋은데! 제발 곽진언 앞머리 좀 까지 말았음 좋겠다. 앞머리를 내리고 캐쥬얼을 입어야 통기타 한 대와 잔잔한 가사로 어필하는 진언스럽지 않은가. 아니, 진언답지 않은가.  머리 내리고 수수하게 입으면 잘 생긴 얼굴이 정장에 올백하며 왜 그리 울퉁불퉁해 보이는지. 내 눈에만 그런가? 기름기 없는 진언의 노래와 목소리를 봐서도 머리 까서 왁스 떡칠하고  태진아 같은 옷을 입히는 건 진짜 아니지 않나. 제발 좀.  

 

몇 년 전에 온 가족이 장재인에 푹 빠졌었다. 목소리와 노래는 물론이거니와 장재인의 표정엔 남다른 무엇이 있었다. 슈스케로 뜨고나서 얼마 후에 화보를 보고 깜놀했다. 브이라인의 얼굴, 걸그룹 방불케하는 늘씬한 몸매. 나도 예쁜 것 무지 좋아하는데 장재인의 얼굴에서 읽혀지던 재인만의 느낌이 싹 없어진 것이 너무 너무 아쉬웠다. 오늘 아침에 남편이 곽진언 노래를 듣다가 '배 부르면 음악이 안 되는데...' 했다. 고백적인 얘기다. 큭큭. '글치. 당신 삶의 고백이지? 사랑을 얻으면 예술이 안 돼. 당신도 날 만난 이후로 노래 한 곡도 못 만들었잖아. 켈켈.' 곽진언에게 '아무리 원한다 해도 안 되는 것'이 뭔가가 또 있겠지? 슈스케 1등은 그에게 작은 것이었길 바란다. 아니 작은 것으로 치부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여전한 깊은 목마름으로 음악을 하면 좋겠다. 물론 팬들을 위해서도 그렇고 곽진언 자신의 음악을 위해서.

 

 

 

 

 

 

 

 



미술치료 관련한 웍샵 같은 것을 할 때, 여러 장의 그림 중에서 마음에 드는 그림을 고르라고 할 때가 있다. 이럴 때마다 결국 골라놓고 보면 꼭 초록색. 그런 의식적 선택이 아니라도 스처 지나는 일상에서 초록의 풍경을 만났을 때 결코 눈길을 거둘 수 없다. 그래서 좁다란 거실에 조그만 화분들을 이고 지고 사는지 모르겠다. 그렇게라도 초록을 부여잡고 사는 내게 아름드리 나무와 잘 가꾸어진 잔디밭이 펼쳐진 휘튼의 캠퍼스는 힐링 그 자체이다. 저렇게 늘 싱그럽고 싶고, 그냥 자연스러움 그 자체이고 싶고, 생명이고 싶다. (췟, 기분 나쁘게 에니어그램 7번의 색이 초록이다. 결국  지 성향대로 끌리는 것) 어쨌든 폰의 사진 폴더에 보면 코스타 가서 찍어온 사진들은 온통 초록세상이다.


생각해보면, 코스타 가기 전 수년 동안 낚시질을 당했었다. 매년 코스타 강사로 가시는 iami 님이 다녀오시면 후기를 올리시는데 '휘튼에서 먹은 것들' 이라는 제목의 글이 빠지지 않는 것이다. 내가 그런 걸로 유혹당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유난히 휘튼 식당의 컬러플한 과일은 여러 번 들여다보게 되었었다. 그리고 작년에 처음 휘튼에 가게 되었을 때 드디어 iami님과 마주앉아 과일 한 접시 하게 생겼구나! 이것부터 좋아했었다. 헌데, 작년에 하필 가실 수 없는 형편이셨다. 대신 진짜 무한 책임 서비스로 일부러 만나서 별별 어이없는 질문에 답해주셨고, 비행기 탈 때  키를 잴 거라는 고급정보까지 챙겨주셨다. (대~애박) 결국 휘튼 식당 마주앉아 인증샷 찍을 거라는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거품이 사라지는데 1년이 걸렸다. 올해 드디어 거품 속에서 건진 인증샷! 컨퍼런스 이튿 날 오후부터 세미나가 시작되는데 첫 강의를 마친 후부터는 거의 식사시간은 없다고 봐야 한다. 식사시간은 조별상담 시간이 된다. 코스타는 자칭 타칭 디아스포라로 흩어져 있던 청년들이 한 곳에 모이고, (코스타가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사랑한다고 심증만 가진)  강사들이 한 곳에 모인다. 청년들은 1 년 동안안 모아뒀던 질문을 쏟아내고 강사들은 1년 동안 여기 저기 강의 다니며 듣는 질문을 합친 것보다 많은 질문을 듣고 답을 한다. (아니, 대화한다)  최대한 많은 강사를 (또는 인기있는 강사를  재빨리) 헌팅하는 것이 조장의 최대 임무가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그러니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약간 하품 나오는 세미나 주제들 사이에서 '벗었으나 부끄럽지 아니하니라' 이런 선정적인 문구로 청년들을 낚는 연애강사가 아닌가. 청년들, 싱글이란 어떤 자들인가. 저녁집회 시간에 설교하시던 목사님이 '고통'이라는 문제를 말하기 위해서 당신의 성욕으로 인한 어려움을 예로 드셨다. 헌데 코스탄들은 그 설교를 온통 데이트 설교로 '아멘' 해버려서 집회 마치고 소그룹마다 그날 은혜 받은 얘기가 아니라 데이트 얘기로 꽃을 피웠다는 후문이다.(믿거나 말거나) 그러니까 싱글이지. 그러니 뭐, 그런 곳에서 연애강사인 내가 든 낚싯대 만한 것이 어디 있으리오. 인기 좋았단 얘기다. 여차했으면 '거품 인기' 때문에 올해도 또 인증샷을 놓칠 뻔 했단 얘기다. 마지막 날 마지막 식사에는 꼭 iami 님과 조용히 식사하리라는 다짐 다짐을 하고 성사된 자리이다. 아, 어렵다.

 

 

iami 님이야말로 진정 낚는 자이셨다. 컬러플 메론으로 나를 휘튼으로 낚으시기 훨씬 이전부터 낚는 분이었다. <복음과 상황> 편집장님으로만 알던, 서부장님으로 불리던 iami 님이 우리 부부가 결혼하던 즈음에 다니던 교회에 등록을 하셨었다. 게다가 신혼집으로 둥지를 튼 하남에서 사셨고, 이런 저런 인연으로 신혼집 집들이에 오시면서 만남이 시작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서 우리 구역 구역장님이 되셨고, 우리는 새내기 구역원. 두어 해 후에 다니던 교회에서 가정교회를 하게 되면서 구역장님은 '목자'님이 되셨다. 그때 우리 부부는 이제  약한 헌 '목원'. 그때로부터 입에 붙은 '목자님'이 어떻게 떨어지질 않아서 아직도 목자님인데 사람 많은 곳에서 '목짠님'하고 부르는 게 살짝 사이비 집단 호칭 같아서 새로운 호칭을 찾는 것이 시급하다.


현승이 낳고 얼마 안 됐을 즈음에  엄청난 낚싯대를 들이미셨다. 부부가 다 책을 좋아하니 책과 신혼일기를 엮어서 <복음과 상황>에 기고를 해보라고 하신 것. 오메! 저희가요? 고민 끝에 달려들어 매달 남편과 한 판씩 싸우면서 글을 써냈다. 이로 인해  하남시 동부 주유소 옆 3층 건물 옥탑에 살던 평범한 신혼부부 김종필과 정신실이 'JP와 SS'라는 필명 비슷한 것을 얻게 되었다. 'JP와 SS'는 iami 님이 목장 카페 댓글에서 장난삼아 쓰셨는데 아예 글의 꼭지 이름에 넣으셔서 닉네임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JP와 SS'로 첫 번째 낚였고! (생각해보면 그 시절 복상을 통해서 iami 님께 낚인 분들이 지금 교계 안팎에서 글 좀 쓴다하시며 베스트셀러 되신 분들이 꽤 있다. 오메.....)  두 번째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라는 이름으로 낚인다. 당시 함께 하던 가정교회 모임이 분가하고 또 분가하면서 우리는 목자로 낚였다. 부모님 댁에 얹혀 살며 기저기도 안 뗀 아이를 키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원조 목짠님이었던 iami 님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이니셜 따서 'AP'목장으로 작명하여 하사하셨다. 그리고 세 번째의 낚임은 코스타!  사실 이런 저런 의미로 나와 우리 부부에게 iami 님과 그 부부님은 그야말로 정겹고도 정겨운 '선배'이시다.

 



대학시절 남편은 몇 군데 기독 동아리를 기웃거리기도 했다는데 나는 전혀 그쪽에 얼씬도 하지 않았었다. 남편 역시 기웃기렸을 뿐 발을 깊이 담근 곳이 없어서 결과적으로는 나와 비슷하다. 어쩌다 남편이 목회를 하고 나는 글을 쓰고, 주로 교계에서 북치고 장구치고 하다보니 '어느 선교단체 출신이냐'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우리끼리 '듣보잡 선교회' 출신이라는 농담을 하곤한다. 교계에서 어설픈 말장사 글장사를 하다보니 뭐라도 '출신'으로 갖다 붙일 게 있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을 1년에 1시간 정도 하게 된다. 남편이나 나나 가장 애정을 많이 가지는 대학생 선교단체가 있다. 우리 집 거실의 책꽂이를 유심히 살펴본 분들은 '*** 출신 아니냐'고 묻기고 한다. 사실 나는 오랜 기간 마음만은 그 단체 출신 이상이었고, 그 단체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을 부지런히 읽었고, 그래서 마인드는 누구보다 더 ***적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몇 년 전에 그 단체가 연루된 요란하지 않은 글싸움이 하나 있었는데, 그 일을 지켜보며 내 마음 속 '***'를 향한 애정과 선망을  싹 거둬들였다. 그 때까지 그 단체 출신들을 개별적으로 만나서 좋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에잇, 나도 대학 때 *** 할 걸' 하는 생각도 하곤 했었다. 헌데 그 사건에서 그 단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정말 하나로 똘똘 뭉쳐서 공동체의 명예실추에 분노하며 이성을 잃는 것을 보면서 무서울 정도였다. 그래서 무척 실망했는데 이상하게도 실망감이 싫지 않았다. '대학 때 ***할 걸' 했던 자조적인 말에 담긴 것은 '저렇게 끈끈한 선후배 의식이 참 부럽구나. 나도 저런 선배(후배는 됐고)들이 있으면 좋겠다' 이것이었다. 가장 부러운 점이 그것이었다. 헌데 그 끈끈한 선후배 의식의 뒷모습을 본 것 같아서 '듣보잡 선교회' 소속인 것이 다행이었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어릴 적 왕따 경험 때문인지 끈끈한 선후배 관계, 동기사랑 나라사랑 사랑 넘치는 동기동창 관계, 이런 집단적 애정행각 앞에서 많이 위축된다. 지나치게 선망하는 것 앞에서 지나치게 위축되는 것은 결핍의 심리학 메커니즘일 것이다. 이번 코스타에서도 공동체로 엮인 분들이 형, 동생하며 애정을 확인하는 것을 이래저래 너무 많이 보면서 여전히 위축되었다. 사람 사귀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아무에게나 덥석덥석 달라붙지 못하는(돌아가신 우리 고모가 그렇게 나를 비난하던 소리였다ㅜㅜ) 내 성격을 탓한다. 나를 글쓰는 사람으로 낚아주신 것, 그것보다 iami 님께 더 감사한 것은 듣보잡 같은 내게 유수의 선교단체 간사님 부럽지 않은 좋은 선배가 되시기 때문이다.


이번에 시카고 시내에서 혼자 하루를 지냈는데 것두 출국 막판에 정해진 일이다. 원래는 코스타를 마치고 휘튼에서 하루 혼자 남아 보낼 예정이었다. 출국에 임박하여 만난 mary 언니님께서 그렇게 보내기는 시간이 아깝다. 다운타운으로 나가서 혼자 시간을 보내지 그러냐. 조용히 용기를 막 불어 넣으셨다. 그리고 다음 날,  이번에는 그분들의 딸, 완전 바쁜 직딩 g가 시카고의 게스트룸을 하나 수배해서 보내왔다. 그 사이, iami님의 깨알같은 상황체크를 잊지 않으셨다. 결국 가족 총동원 주일, 아니고 총동원 도움으로 두 번째 미국 여행을 작년보다 한층 의연한 태도로 더 폭넓게 즐기고 왔다는 얘기다. 



 


휘튼 숙소의 창이다. 이것도 가서 보기 전에 낚는 자라 불리는 그분의 블로그에서 먼저 보았던 것이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사진이다. 오직 창문으로만 보이는 세상. 지금 내가 있는 곳의 창으로만 볼 수 있는 세상. 창 앞에서 서서 이런 세상 내다보길 좋아한다. 세상을 넓게 경험하고 큰 안목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내 좁은 마음의 시야 때문인지도 모른다. 좁아 터진 내 시야과 관계의 지평이지만 내 세상 아닌 것이 그리 부럽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아니 꼭 나이 때문에 사라진 선망은 아닐 것 같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삶의 여정에서 꼭 필요한 분은 반드시 만나서 그 만남에 낚여서 이리 저리 춤을 추다 여기까지 와 있다는 살아 있는 경험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12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처음 맞는 추도식이었습니다. 추도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조퇴를 해야 했습니다. 아버지 없이 지냈던 1년 중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이었습니. 누구도 처음부터 아버지가 없는 아이는 아닙니다. 그리고 갑자가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은 많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예고 없는 당하고 어~ 하며 놀라고 당황하다 미처 슬퍼하지도 못하고 어느새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적응해 살게 됩니다. 선생님께 가서 아버지 추도식을 이유로 조퇴를 받는 일은 내가 아버지 없는 아이라는 것을 내 입으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하러 혼자 선생님께 가기가 너무 싫었습니다. 게다가 어린 나이에 보통은 제사라고 부르는 것을 종교적인 이유로 추도식이라고 부르는 것도 창피했습니다. 선생님께 가서 어떻게 얘기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조퇴를 맞고 운동장으로 나왔습니다. 바람과 함께 눈이 내리고 있어서 눈발이 맨얼굴에 세차게 부딪혀왔습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 없었고, 다행히 눈바람이 모든 걸 흐릿하게 해주어 비로소 엉엉 울 수 있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너무 또렷하게 남아 있는 기억입니다. 텅 빈 운동장에 온몸으로 추위를 가르며 혼자 걷는 것은 바로 아버지 없는 아이가 살아가야 하는 세상과 같았습니다. 사춘기가 시작되던 즈음 저의 꿈과 사랑은 이 장면에 갇혀버리고 말았습니다.


*
코스타 둘째 날에 했던 간증문의 시작이다. 일단 '간증'을 좋아하지 않는다. 간증으로 은혜받은 기억보다 간증으로 열받은 기억이 훨씬 더 많다. 내가 들은 최악의 간증, 백미는 이것이다. 가정교회 목자를 했는데 연봉이 올랐다!!(이미 미국에서 고액의 연봉을 받는 분이었음) 몇 년 전에 라디오에 간증 프로그램에 나간 적이 있다(내가 미쳤지). 간증거리도 안 되는 걸 가지고 나가서 얘기하다 맥락없는 얘기를 하고 마친 것 같다. 진행자의 미끈한 화술에 그나마 진솔하게 내놓은 얘기도 간증스러워지는 바람에 저렴해진 것 같아 생각할수록 낯이 뜨거운 경험이다. 다시는 '간증'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 앞에 서지 않을 것 같았는데 또 하고 말았다. '간증'보다는 '삶의 현장'이라 부르는 이름 때문에 거부감이 덜했고(변명 어설프다. 걀걀걀), 작년에 한 번 고사를 했기 때문에 두 번 거절하기가 죄송했고, 무엇보다 올해 컨퍼런스 주제가 '약함'이었기 때문에 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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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를 통해서 나의 일상 즉, 엄마로 아내로 강사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나를 솔직하게 드러내려 한다. 좋은 일, 잘하는 일보다는 잘 못하고 있고 그것을 통해서 돌아보는 나의 약함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굳이 약점이 아니더라도 쌍방간의 소통의 장이 아니라는 점에서 나는 항상 약자이다. 누가 읽을지도 모르는 이 공개된 장에 내 내면의 얘기를 드러내고 있으니 누구에게든 나는 보여줄 패를 다 보여주는고 시작하는 셈이다. 나는 불리하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어쩌다보니 이러고 있고, 쓰는 것을 멈출 수도 없기 때문에 그저 '안전하려니,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려니'하면서 나는 오늘도 쓴다. 내 입으로 내 약점을 말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물론 고도로 고상한 자기 현시 방식이 될 수도 있다. (나는 나의 약점까지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어마 무시하게 성숙한 인간이거든!) 단지 어떤 인격적인 부족함 정도가 아니라 인생 가장 치명적인 상처, 오직 그걸 숨기기 위해 전생애를 바쳐 노력해왔던 바로 그 비밀이라면 어떤가.  내 입으로 그걸 까발리는 것은 나 자신을 죽이는 일이 아닌가.


***
바로 서두에 붙인 글로 시작하는 '아버지'이야기였다. 아버지 없는 아이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 이날 이때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살았던 것 같아. 아버지 없어서 본 데 없는 아이가 되지 않는 것은 물론, 아버지 없어서 그늘진 아이, 아버지 없어서 구질구질한 아이, 아버지 없어서 막 되먹은 아이, 아버지 없어서 매력없이 강한 아이.... 이런 아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 (과거형으로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간증을 하기로 하고 간증문을 쓰고, 담당 간사님과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그리고 간증을 마치고 한 문장으로 정리된 것은 이것이다. '아버지 없는 아이처럼 보이지 않을 거야!' 45년의 생을 이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이번 간증을 통해 얻은 최고의 선물이다. 그동안 내가 애쓰며 살아온 것의 큰 원동력에 이름 붙일 수 있게 된 것.
코스타 마치고 은혜네 가족과 만나서 여행을 하는 중 주일 예배를 윌로크릭 교회에 가서 드리게 되었다. 빌 하이블스 목사님은 아니었지만 참 감동적인 예배, 설교였다. 모세의 이야기였는데 무대에는 모세가 이집트 사람을 죽여서 모래로 덮어 만든 모래더미에 삽이 꽂혀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여러 신발들이 주렁주렁. 감추고 싶은 모래무덤으로부터 끝없이 도망가는 모세, 묻어둔 비밀로부터 도망가는 모세를 만나주신 하나님께서 신을 벗으라 하셨다. 모세가 아니라 내게 말씀하셨다. 1982년 12월 16일, 강동중학교 운동장에 비밀처럼 세워 둔 아이를 불러내어 만인 앞에 세운 것 잘 했다고. 신을 벗었으니 더 이상 혼자 애써서 나를 방어하는 옛 방식으로 도망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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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일방적으로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유희열의 스케치북'식의 간증이라서 부담이 훨씬 덜 했다. 유희열보다 잘 생기시고 따뜻한 DM 간사님은 이 순서를 위해서 많은 고민을 하셨을테고, 나름 생각이 있으셨을텐데 내 간증문 그대로를 살리는 방식으로 진행해주셨다. (정말 감사해요. 간사님!) 실은 간증을 마치고나서 집회가 계속되는 그 자리에 앉아 있고 싶지가 않았다. 빨리 숙소로 도망가서 혼자 있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간증하다 울게 될까봐 가장 많은 걱정을 했지만 정작 무대에서 나는 슬픈 이야기를 웃기게 하고 있었다. 마치고 내려오니 모멸감이 엄습했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희화시켰다는 것, 제대로 감동도 주지 못하고 어설프게 웃기다 끝났다는 것. 그러나 그 이후에 만난 코스탄이나 강사들 중에 일찍 아버지나 어머니를 잃은 분들의 공감의 말을 들었고, 위로받았다는 그들의 말에 적잖이 위로가 되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졌다는 것을 두려워하고 힘들어 할 필요가 없음을 오전 마르바 던 강의를 통해서 깊이 배우고 있던 참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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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퍼런스의 주제가 '우리의 약함, 주님의 강함'이었다. 우리의 약함이 주님의 강함이 된다는 얘긴가? 우리의 약함을 들어서 주님이 쓰시면 강함이 된다는 얘긴가? 정확하게 잘 모르겠다. 약함이 강함이 되었던 예가 있나? 약함은 그저 끝까지 약함이 아니었던가? 일찍이 신체에 많은 핸디캡을 가지게 된 마르바 던. 그 약함이 치유되어 강해졌나?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잃은 내게 다시 아버지가 생겼나?  아니면 그 상처를 치유받아 말끔해졌나? 우리의 약함은 항상 약함이다. 그 약함으로 인해서 강하게 될 것을 바라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사실 우상숭배다. 약함은 약함이고, 약함은 인간조건이다. 우리의 약함은 주님의 강함이 아니라 우리의 약함은 우리보다 더 약해빠진 모습으로 이땅을 살아가신 주님을 만나는 자리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러하다. 우리의 약함에 주님이 능력을 나타내시면 없던 애인이 생기고, 그렇게 나를 씹고 돌아다니는 그 사람이 내 장점을 발견하여 감동받고, 채윤이 같은 아이가 드디어 천재성을 발휘하여 수학문제를 척척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제기랄) 나보다 더 가난하고 연약하고 미천하게 사시다 극형으로 돌아가신 그분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이다. 나는 그 나이의 딸을 가진 엄마가 된 지금까지도 12월의 그 차거운 운동장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 꽤 자유로워졌고, 조금씩 더 자유로워지고 있는 중이다. 극형에 처해졌던 그분의 부황을 오늘 내 삶에 살아내는 만큼, 그 만큼씩 나는 차거운 운동장으로부터 자유롭다. 간증문의 맨 마지막은 이러하다.


눈보라 가득한 텅 빈 운동장에 얼어붙은 채로 그대로 얼어붙은 열네 살 아이가 있습니다
. 추위와 슬픔과 부끄러움으로 꼼작 못하는 아이입니다. 그래서 가장 떠올리기 싫은 제 인생 한 장면입니다. 그 조그만 몸 어디서 그런 열정이 나오냐는 질문을 가끔 받습니다. 대단한 삶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행복하고 꽤 자유롭고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 열정이 어디서 나오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그 장면입니다. 꽁꽁 얼어붙은 그 아이를 조금씩 녹여내면서 힘도 열정도 사랑도 흘러나옵니다. 그 해동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남편과 친구와 아이들의 사랑이, 제 강의를 듣고 글을 읽는 독자들의 사랑이 그 아이를 녹이는 온기가 됩니다. 여전히 저는 아버지 없는 아이처럼, 비빌 언덕 없이 방황하는 날이 많습니다. 공부를 잘 못하는 아이로 인한 걱정, 늦게 신학을 하고 목회자로 살며 고뇌하는 남편을 바라보면 밀려오는 안타까움, 연로하신 엄마가 한 번씩 입원하실 때마다 입원비 걱정을 해야 하는 경제적인 현실, 여전히 낮은 자존감으로 내 글과 강의가 비판받지 않을까 두려워 오그라드는 심장으로 여기저기 눈치 보며 살기.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을 믿는 날이 더 많아졌습니다. 아버지 없는 아이로 살았기에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 깊은 그리움이 하늘 아버지께 닿아 있음을 긴 여정을 통해 배웠습니다. 그리움의 깊이만큼 아버지 사랑의 깊이를 느껴보기도 했습니다. 오늘도 저는 그 그리움이 있어 슬프고 또 기쁘며 외롭고 또 충만합니다. 오늘을 사는 행복은 영원에 잇댄 오늘이고, 그 영원한 곳은 내 육신의 아버지, 하늘아버지가 계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2014 코스타에 가기로 결정하고 심장박동이 빨라졌던 가장 큰 이유는 '마르바 던'이었다. 오전 성경 강해의 강사가 마르바 던이었다. 아, 마르바 던의 강의를 직접 듣는다니! 나는 바로 그 코스타에 있었고, 어느새 그 시간을 추억하고 있다. '역시! 마르바 던, 결코 실망시키지 않았다' 거나 '기대 이상이었다'라는 표현으론 부족하다. 그런 식상한 표현을 하느니 침묵으로 표현하는 것이 나으리라. 도대체 그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이 지점에 걸려서 며칠째 쓰다 멈추고 쓰다 멈추기를 반복하고 있다. 아무리 골라도 적절한 언어가 없다.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
(아니, 비주얼 만으로는 '걸어 다니는 중환자실')이라 불리는 몸으로 굳이 서서 강의를 하셨다. 오래 전부터 기능을 하지 못하는 한 쪽 다리, 절단하여 의족을 끼워 넣은 나머지 다리. 그 두 다리로 서서 강대상에 의지한 채 세 번의 강의를 하셨다. 매우 무리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우리의 약함, 그분의 능력'이라는 이번 집회의 주제를 존재 자체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무대 한구석에 휠체어를 두고 굳이 걸어서 강단까지 걸어가시는 모습, 강의를 마치고 몸을 휠체에 맡기고, 휠체어는 무대의 자동 하강장치에 맡겨져 스르르 내려앉던 모습이 내겐 참 인상적이었다. 내게만 그러했을까? 절도 있어서 오히려 위태해 보이는 그녀의 걸음걸이가 시작을 알렸고, 스르르 내려앉는 무대에 맡긴 휠체어, 거기에 기댄 그녀의 무력한 몸이 말로 했던 그녀의 강의에 긴 여운을 남기는 마침표를 찍는 것 같았다. 그 순간 900여 명의 눈길과 숨결은 한마음으로 멈추는 것 같았다. 모두 자기만의 마음의 눈으로 그 장면을 새겼을 것이다. 

 



처음엔 몰랐는데 마르바 던은 자신이 맡은 오전 성경 강해 시간뿐 아니라 모든 전제집회 시간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연약한 몸을 보더라도 최대한 휴식을 취하는 것이 당연함인데 남편과 더불어 맨 뒤쪽에 앉아 계셨던 것이다. 간증이며 저녁집회의 설교 같은 것들을 통역을 통해 몸뿐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함께. 흔히 이런 집회에 참석하면, 특히 강사로 참석하면 특권의식이 발동할 수밖에 없다. 내가 하는 강의 외에 웬만한 강의나 설교는 '어디 잘 하나 보자'는 식으로 바라보기 일쑤이고, 오직 speaker로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지 가만히 잘 듣는 태도를 가지기가 어렵다. 그런데 일개 연애강사도 아니고 무려 마르바 던 아닌가! 

 

 

감동적이긴 하지만 사실 여기까지 이야기의 등급을 매기자면 '기대만큼'이다. '기대 이상'의 이야기는 이제부터이다. 마르바 던의 첫 강의를 들은 화요일 오후에는 나도 첫 강의가 있었다. 첫 강의를 마치고 준비했던 강의안과 PPT를 싹 뜯어고쳤다. 가져간 노트북을 직접 프로젝터에 연결해 쓰지 못해서 PPT에 쓴 폰트가 깨졌기 때문에 일단 손을 볼 수밖에 없었다. PPT 폰트를 수정하다 아예 PPT 자체를 고치고, 강의안까지 고쳐버렸다.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준비하는 느낌이었다. 얼마를 고민해서 준비해간 것인데 그렇게 휙 뒤집어 버렸단 말인가. 지금 생각해보면 이건 완전히 마르바 던 탓, 또는 덕분이다.

 



마르바 던의 메시지는 간결하고 명료했다. 불필요한 것이 덧붙여지지 않아 거슬리는 바가 없었다. 정말 하고자 하는 바로 그 말을 하기 위해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직 그녀의 관심은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로 그것을 청중이 알아듣는가였다. 그래서 가끔 잘 따라오고 있냐고 물었다. 진심으로 잘 따라오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이미 시력을 잃은 오른쪽 눈을 가리고 왼쪽 눈에 손을 모아대고는 청중을 살피곤 하였다.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장면은 이 장면이다) 청중의 반응이 그저 진정성 없이 예예 하는 것이라 느껴지면 마음을 담아 다시 대답해달라고 주문하기도 하였다. 청중과 깊이 소통하기를 바라면서도 청중의 반응에 중심이 휘둘리지는 않는 태도가 엿보였다. 병약한 할머니 신학자의 이 부드러운 단호함을 정말로 배우고 싶다.

 

 

<언어의 영성> 내가 읽었던 마르바 던의 책이다. 언어, 오염되지 않은 언어에 대해 관심이 많은 분이다. 비록 영어를 알아들을 수 없으나 설교하는 그분의 언어가 단순하며 화려하지 않다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강의 중에 어떤 성경 구절을 한국말로 다 같이 읽어달라는 주문을 하셨다. 다 듣고 난 후에 나이가 젊어서 다시 기회가 있다면 한국말을 꼭 배워보고 싶다고 하였다. 간간이 통역하시는 김종호 대표님이 영어와 우리 말 사이를 오가며 재치를 부릴 때 웃음이 터지곤 했는데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것이 역력했다.  


유학생 수련회이다 보니 영어로 하는 대화가 흔한 곳이 코스타 집회이다. 울렁증은커녕 영어 앞에서 입을 떼겠다는 의지도 없는 내게 그 자체로 외국과 같은 곳이다. 남들 하는 걸 못하니 열등하다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고, 그러다 보니 심지어 우리 말이 영어보다 열등한 것처럼 생각된다. 마르바 던이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태도는 이런  내 뒤틀린 의식을 바로잡아주었다. 그렇다! 영어를 못하는 나, 한국어를 못하는 마르바 던은 같은 한계를 가지고 마주 서 있는 것이다. 찬양 시간 중간에 주변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평화의 인사를 전하는 시간이 있었다. 근처에 마르바 던이 앉아 계셨는데 주저함 없이 다가가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우리 주님의 평화가 당신과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알아듣지 못하여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러나 언어 너머의 내 마음을 듣고자 진지한 태도를 짧은 순간이지만 느낄 수 있었다.


 


 

용기 내 다가가 그렇게 인사를 하고 났더니 그 이후로 깊은 곳에서 어떤 갈망이 꿈틀거렸다. 다가가서 대화를 나누고 싶은, 대화를 시작하면 금세 깊은 영혼의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분은 오랜 기간 사랑과 존경으로 관계 맺었던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는 것 같아 바라보기만 하였다. 무엇보다 그분과 나 사이엔 언어의 장벽이 높았다. 남편과 나란히 앉아계시는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면서 두 분을 위해서 깊은 언어로 기도했다. 그리고 마음으로 마르바 던에게 말했다.

"제 영혼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당신의 남을 날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두 분이 이 땅의 마지막 날까지 더욱 행복한 날들 보내시길요. 지금은 저의 깊은 이야기를 당신께 전할 방법이 없지만 우리 천국에서 꼭 만나요. 그 좋은 곳에서 만난다면 영어도 한국어도 아닌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전하고 듣는 대화를 나눌 거라고 믿어요. 고맙습니다. 마르바 할머니! 아름다운 여성으로, 신학자로, 강사로 거기 계셔 주셔서요. 당신이 보여주신 예수님은 정말 최고였어요. 어떻게 최고였는지, 천국에서 만나면 꼭 알려드릴게요. 다시 뵐 때까지 잘 지내세요"  

 

 

내가 하는 첫 번째 강의를 마치고 새벽 2시까지 강의안을 새로 손본 이유는 내가 거기 있는 이유에 대한 성찰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러했다. 마르바 던은 말씀과 태도로 내게 계속 물었다.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고 여기까지 와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코스타 강사라는 이력을 얻기 위함인가? 저명한 강사들과 안면을 트고 인맥을 넓히고자 함인가? 많은 똑똑한 청년들을 대상으로 내 강의와 상담의 신통함을 확인하고자 함인가? 강의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간간이 웃기고 약간의 감동까지 주면서 강사로서 그럴듯한 이미지를 남기고자 함인가? 인생의 선배로 신앙의 선배로 내가 얼마나 잘 살아왔는지를 자랑하고 확증받고자 함인가? 


나는 나를 위해서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통해 경험한 그분의 이야기를 위해서 거기 있는 것이다. 4박 5일 내내 걸고 다녔던 명찰에 'Speaker 정신실'이라고 씌여있지 않았던가. 전하고자 하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기 위해서 거기에 있는 것이다. 10을 알면서 20을 아는 것처럼 말할 이유가 없고, 내 이미지 까이더라도 하고자 하는 말을 분명히 해야한다. 어설픈 유머로 논리의 허술함을 무마하려 하지 말고 하고자 하는 말 이외에 무엇이든 과정하여 덧대지 말아야 한다. 내가 거기 있는 이유는 정말 전하고자 하는 그것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마르바, 마르바 할머니 같은 speaker로 늙어가면 참 좋겠다. 앞으로 강의할 때마다 마음의 사진첩에 담아둔 마르바 할머니의 부드럽고 단호한 모습을 꺼내보고 또 꺼내보려 한다.

 

 

* 사진은 kosta facebook에서 가져왔고요,
마지막 사진은 통역을 하셨던 김종호 대표께 부탁하여 급 촬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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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성, 남성성

이 즈음 내 지적 심장(말이 되나?)을 펄떡펄떡 뛰게하는 화두이다.
왜냐하면, 이라고 시작하면 할 말이 너무 많다.
이성교제 강의를 하면서 파고들지 않을 수 없는 주제였고,
융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페르조나, 그림자 찍고 아니마 아니무스에 꽂혀 있는 중이었다.
무엇보다 늘 성장하고픈 내게 융이 제안하는 아니무스(여성 안의 남성성)의 통합은
무릎을 딱 치게 만드는 안내가 되고 있다.

대학 다닐 때 '너 여성학과야?' 하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4년 내내 여성학 책을 끼고 다녔다.
대학원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돈을 모았던 것은 여성학을 하기 위해서였다.
두 번 시험을 치면서 '이 산이 아닌개벼' 하게 되었고,
그때 눈 앞에 떡 나타난 것이 '음악치료'였댜.

거실의 책꽂이 한 켠에는 20년 된 여성학 책들이 다수의 원서까지 줄을 서서 꽂혀 있다.
거의 들여다볼 일이 없었다.
최근에 이 책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중이었다.
책 한 권을 빼서 선 채로 몇 줄을 읽어본다.
'내가 그 시절 이걸 이해하고 읽었나?'  진심 되묻게 된다.


아버지의 딸

개인적으로 나의 여성성(억압해놓은 남성성)을 숙고하게 되는 것은,
아버지의 딸로서의 나. 를 맑은 눈으로 다시 바라보기로 결정한 이후이다.
이 결정에 관한 이유 역시 너무 많다.
결정에 관한 결정적인 것은 이번 코스타에서 맡은 '삶의 현장'이라는 간증 때문이다.
간증문(이라고 말하면 너무 나이브하게 느껴지는데 딱히 다른 말이 없네 그려)을 쓰면서,
자주 겪었던 희한한 경험을 했다.
그 얘기를 쓰려고 했던 것이 아닌데, 그 얘기를 먼저 꺼내놓고,
계속 그 얘기만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얘기는 다름 아닌 아버지,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 이야기였다.
정말 정말 내 입으로 하기 싫은 말, 싫었던 말.
"아버지 안 계세요"
이 말을 만인 앞에서 하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직도 "아버지 안 계세요"라고 말하려면  (지금 쓰면서도) 입술이 떨리거나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하는데 말이다. 
어쩌자고 이 얘기를 꺼내놓는 것인지.
이렇게 아버지 생각을 많이 하다 삶과 내면의 실타래들이 한 번 더 풀리려나 싶다.
그러면서 나의 '여성성'을 지극히 개인적이고 경험적인 의미로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래래 크랩, 우리 정말 천국에서 꼭 만나 커피 한 잔 해요.

이런 시국인데,
어제 그제 남편이 '래리크랩 신간 나왔네' 하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제목이 <에덴 남녀>.
30년 임상심리학자로 살아온 래리님께서 '평생토록 쓰고 싶었던 그 책'이라며 내놓은 책이
여성성과 남성성에 관한 이야기 이다. 왜 하필 지금?
너무 신기하고 놀라워서 신기하지도 놀랍지도 않다.
몇 년 전에, 교회에 대한 실망과 좌절로 벅벅기고 있을 때 내놓으신 책은 무려
<교회를 교회되게:Real Church_Does it exist? Can I find it>이었다.
공감포텐 터지는 내용이었고, 그때도 왜 하필 지금? 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가끔 현승이가 "엄마, 나는 하나님을 믿긴 믿는데에 하나님 말고 다른 신은 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거라며? 그런데 다른 신을 믿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거 아냐. 자기가 믿는 신이 진짜 신이라고. 어차피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냐? 다른 사람들이 생각할 때 하나님도 그럴 거 아냐? 정말 하나님이 살아있어?" 라고 물어오곤 한다.
그럴 때마다 당황하지 안코오~ 정답을 강요하지 않으며 대화를 나누곤 하는데~ 속으로 나도 살짝 '정말 그런 거 아냐?' 하며 흔들릴 때도 있다. 그런데 이런 신기하고 놀라운 만남을 창조해시는 손길을 느낄 때면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확신하고 또 확신하게 된다. 그렇게 밖에는 설명할 방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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