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 사랑> 리뷰이다. 정성들여 길게 쓸 생각은(자신이) 없다. 영화보다는 관람 후 뒷풀이(사실 앞풀이 뒷풀이 뒷뒷풀이)의 여운이 진했던 날이라 영화와의 만남은 실제 만남에 묻힐 수 밖에 없었다. '영화 좋은데 언니들 만나서 더 좋네'로 끝났다. 관람 후 일주일, <덩케르그>를 봤는데 관람 후 한두 시간은 스크린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바닷속에 잠긴 듯했고, 전투기를 조종하느라 창공을 헤집고 다니는 듯했다. 저녁 먹고 앉아서 (아들) 현승이가 '엄마, 덩케르그 영화 좋아?' 하는데 '그냥 그래' 하는 대답이 나왔다. '아까는 나도 보라며?' '어, 처음에는 뭔가 강렬했는데 지금은 엄마가 그 영화를 봤는지 조차 기억이 안 나. 오히려 지난 주에 본 영화 <내 사랑>이 자꾸 떠올라. 그 영화가 좋았나봐. 엄마한텐 이런 게 좋은 영화야'라 말하고 보니 그제야 <내 사랑>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래도 리뷰 쓸 에너지는 없었다. 교회 수련회며 강의 일정도 많았고, 읽어달라는 책이 유난히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 터라. 그런데 못내 이렇게 어설픈 끄적임을 시작한 것은 순전히 홍보문구 때문이다. [한 여름 밤의 사랑 이야기, 에단 호크*샐리 호킨스] '아닌데, 로맨스 영화 아닌데' 처음엔 그냥 지나쳤다. 극장과 뉴스 밖에 안 뜨는 페북 뉴스피드에서 '한 여름 밤의 사랑, 한 여름 밤의 사랑......' 자꾸 보니 신경질이 났다. '아니라고오! 로맨스 영화 아니라고오!' 하다 결국 블로그 글쓰기를 클릭했다. 고아 출신의 괴팍한 외톨이 남자와 류머티스 관절염으로 신체적 핸디캡을 가진 천재 예술가의 로맨틱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아니 뭐, 그저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한 발 양보하여 결과론적 로맨스 영화라고 하자. 


모드의 얇고 틀어진 다리, 그 다리를 삐칠삐칠 걷는 뒷모습이 잊히질 않는다. 가정부 일자리를 찾아 아슬아슬한 걸음걸이로 에버릿의 작은 집을 찾아가고, 거절 당하고 돌아서 삐걱삑걱 또 걷는다. 그 성치 않은 다리가 편히 쉴 곳이 있었으면 싶은데 내내 그러질 못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영화 마지막 에버릿이 했던 말처럼 나는 내내 모드를 '부족한 사람'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바라보았다. 감독의 낚시질에 보기 좋게 걸려든 셈이다. 영화의 스토리를 이끌고 가며 동시에 모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열어 나가고 궁극적으로 에버릿을 다른 세계로 끌고 가는 것은 그녀의 부족해 보이는 걸음이다. 그러니까 에버릿이(우리가, 내가) '부족함'이라고 보는 모드의 부족함이 그녀 자신에게는 치명적 핸디캡(부족함)이 아닌 것이다. 영화 초반부 고모집에서 눈칫밥 먹으며 사는 중에 클럽에 가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장면은 엄지 척이다. 손에 손을 잡은 커플들 사이에서 어눌한 몸 그대로, 흥에 겨워 흔들거리는 슬프도록 당당한 모습이라니. 파트너가 없거나 자유롭게 춤출 수 없는 몸 같은 것들이 아무 문제 되지 않는 클럽의 밤이다.


고모의 핍박, 친오빠와 고모의 파렴치한 계략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 발로 걸음을 멈추지 않는 모드. 시키는대로 하면 편안히 앉아 밥 얻어 먹을 수 있는 고모집을 떠나 가정부로 들어가는 모드. 그런 모드는 (아무리 딱해 보여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모드'이다. 그러니 이 영화는 '내 사랑'이 아니라 '나 사랑' 모드라고 말하고 싶다. 결국 이 영화는 로맨스 영화가 아니라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걸음을 멈추지 않는 처절한 이야기, 모든 인생이 그러하듯 해피앤딩인 듯 새드앤딩인 듯 해피앤딩 같은 먹먹한 결말의 이야기이다. 서서히 모드를 대하는 모드가 바뀌는 에버릿의 모드는 모드 자신의 자기 사랑 모드에서 비롯한 것이다. 신체적인 장애에 굴하지 않고 느릿느릿 가정부 일을 하며, 인간적인 모욕에 굴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며 자존심을 지켜내는 모드의 '나 사랑'이 결국 에버릿을 구원하는 것이다. 고아로 태어나 '사랑'이라는 기반을 가지지 않은 에버릿에게 사랑의 실재, 사랑의 가능성, 사랑의 희망 같은 것을 전염시키는 것. 





'자기사랑'이라는 기반 없이 타인을 사랑할 수 없다. 예수님도 말씀하시지 않았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정희진 선생은 '나를 경유하지 않은 타자의 시선은 없다'라고 한다. 같은 얘기이다. 나를 수용하는 만큼 타자 수용이 가능한 것이고, 자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타인을 품어 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누가 부족하고, 누가 온전한 사람인가. 영화에서 죽음에 임박한 고모가 말한다. '네가 우리 가족 중에 가장 잘 되었구나(잘 살고 있구나? 행복하구나? 온전하구나?)' 젊은 시절, 모드가 낳은 아이를 모드의 동의없이 입양시켜 버린, 모드의 존재 자체를 부족함으로 규정했던 고모의 말이라니! 


'나는 왜 당신을 부족한 사람이라 생각 했을까' 에버릿의 회한 가득한 고백에 나의 마음도 담는다. 모드는 예쁜 구두를 좋아한다. 예쁜 구두를 보고 눈을 떼지 못한다. 틀어진 다리, 볼품 없는 걸음 걸이에 '예쁜 구두'를 욕망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눈길로 바라봤던 것을 고백한다. 보이는 것의 '번듯함'에 매인 나로서는 시각적 부족함 너머를 보는 것이 어렵고 부끄러운 숙제이다.  나 자신이 되어 연애하기(사랑하기, 엄마하기, 신앙하기) 동어반복을 하며 강의하고 떠들고 다닌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나는 자주 실패한다. '보이는 번듯함'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모드의 걸음걸이가 자꾸 떠오르는 이유이다. 싫고 거북하여 자꾸 그리로 향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가장 인상 깊었다고며, 엄지 척이라며 추켜세웠지만 한편으론 거북하고 싫었던 장면. 삐뚜룸한 몸으로 흔들어대던 클럽에 간 모드를 자세히, 오래 바라볼까. 예쁘게 보일 때까지? 그러다보면 '너도 그렇다. 부족하지만 너도 예쁘다' 내게 말해줄 수 있을까.



 







작년 이맘 때 기대와 설렘 가득 안고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집>을 집어 들었었다. 미국 오가는 비행기 독서용으로 선택했는데 결국 1년째 미완의 독서로 남아 있다. 야금야금 하나 씩 어쨌든 눈팅은 다했다고 볼 수 있다. 750 페이지 30여 편을 차례차례 꼼꼼히 읽었다 해도 '미완'의 느낌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내내 '흠..... 긁적긁적.....' 하는 읽기였으니까. 그러면서도 딱 내려놓을 수 없는 매력으로로 일 년째 '읽고 있는 중'의 도서로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와중에 장편 <현명한 피>가 IVP에서 번역돼 나왔다. '다 읽고 사기'의 책구매 원칙을 지키고자 허벅지를 찌르고 있었으나 단편집에서 만난 인생소설 <좋은 사람은 드물다>의 감동을 복기하고는 홀린듯 장바구니에 담고 말았다. 


내가 이걸 읽으려고 작년에 그렇게 화장실 들어갔다 뒷처리 안 한 느낌으로 플래너리 오코너를 끼고 있었구나! 어쨌든 오코너와의 라포 형성이 충분히 된 덕에 시간적, 정서적 낭비 없이 <현명한 피> 속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일이 되려면 이렇다. 가방에 든 <현명한 피>의 마지막 챕터 쯤에 책갈피가 꽂혀 있는 시점,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이 이름을 발견! 플래너리 오코너? 장거리 운전으로 몸이 뒤틀릴대로 튀틀리는 순간 팟빵을 털다 얻어 걸린 꿀잼이었다. 이동진은 내게 가끔 새로운 '정보'를 주는 고마운 '님'이지 '페이보릿'은 아니다.  피상적 차원에서 척척 대화가 통하지만 깊은 공감의 대화는 어려울 듯한 친구. 아는 것이 많아 입을 헤 벌리고 듣게 되지만 돌아서면 조금 공허한 그런 친구 같다. 동질성보다 이질성에서 더 많이 배우는 것을 알기에 가끔은 애써서 참으며 듣곤하는데 이번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들었다. 우주가 도와서 플래너리 오코너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느낌이다.


옮긴이의 말처럼 이 책의 주제는 '죄와 구원'에 관한 문제이다. 죄와 구원의 문제는 종교인들의 고민이다. 아니다. 정작 종교인들은 죄와 구원이라는 본질을 고민하진 않는다. 그로 인해 파생된 두려움에 사로잡혀 엄한 곳에서 허튼 희망을 찾는 사람이고, 그 환상을 밑천 삼아 입에 풀칠 하는 사람이다. 죄와 구원의 문제를 고민하는 자는 구도자, (필연코) '외로운' 구도자일 터.소설의 헤이즐 모리츠는 (아무리 봐도 약간 돌아이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구도자이다. 순회 설교자인 할아버지(독침을 숨기고 다니는 말벌같이, 머릿속에 예수를 담고 세 개 군郡을 운전하며 다녔던 성마른 노인)을 따라다녔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두 살 이 될 때까지는 자신도 역시 설교자가 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의 모리츠는 '예수를 피하는 길은 죄를 피하는 것'이라는 깊고 검은 침묵의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의 설교자가 된다. 자칭 '현명한 피'를 가진 에녹은 또 얼마나 부적응적이고 멍청한 인간인가. 돈을 위해 가짜 맹인 설교자 행세를 하는 호크스가 설파하는 죄와 구원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종교이다. 등장인물 중 적응적 인간은 단 한 명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현명한 피> 안의 죄와 구원은 모두 뒤틀려있다. 각자 나름대로 죄와 구원을 독해하고 배역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현명한 인간이라곤 없다. 현실 속 죄와 구원, 그것을 아우르는 신앙은 어떤가.


대학 친구들 모임에서 목회자인 남편과 관련 우리 부부의 이야기가 수다의 주제가 된 적이 있다. 숨통을 트기 위해 현실도피용으로 가지고 있는 나의 장래희망 카드를 하나 내놓았다. 마침 장래 계획에 관련된 전문가 친구가 둘이 앉아 있었다. 둘 다 크리스천이었는데 한 친구는 자칭 기복신앙에 보수적 신앙관을 가졌다. 목회자에게 잘 하고, 교회 봉사는 일단 열심히 해야 복을 받을 것 같단다. 다른 친구는 개인적 경험으로 인해서 목회자(부부)에 과도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천하에 상종 못할 부류가 목회자인 것처럼. 재미있는 것은 우리 부부의 조금 파격적인 장래 목회 계획을 들은 두 친구의 반응이다. 자칭 기복주의에 보수적인 신앙을 자처하는 친구는 '너희 자신을 믿지 마라. 너의 남편도 결국 사람이다. 사람 어떻게 별할 지 모르고, 사람 욕심이란 끝고 없다. 쉽게 생각하지 마라.' (집에 있는 뭣도 모르고 단잠 자고 있었을 우리 남편은 의문의 1패)  반면 목회자 알러지 있는 친구는 '신실아, 너라면! 네 남편이라면 무조건 잘 할 거야. 무조건 잘 할 것 같아'였다. (남편 의문의 2패?)


목회자에게 무조건 복종하기로 결정한 친구는 제 친구 남편인 목사가 무조건 미덥지 않다. (근거는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존재이기에) 세상 모든 목사들을 일단 의심하고 보는 친구는 내 친구의 남편인 목사는 무조건 믿을만 하다. (근거는 내가 좋아하는 친구의 남편이니까)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엉뚱하게도 나는 소설을 읽으며 두 친구를 떠올렸다.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를 설파하고 예수를 부정하기 위해 부러 죄를 짓는 사람과, 그에게 죄의 냄새를 맡고 회심을 종용하는 거짓 맹인 설교자. 목사님은 주의 종이니 언터쳐블의 존재라 믿는 것과 모든 목사를 잠재적인 장사꾼으로 보는 것이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두 친구에게서 나는 본다. 맹신 이면의 냉소와 불신, 극단적 불신 이면의 불안과 두려움을. 어찌하여 볼 수 있는가, 내 안에 맹신과 불신 / 극단적 불신과 두려움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오코너의 소설이 불편한 이유는 이것이다. 인간 내면의 이 불편하고 불온한 공존의 감정을 확인시키고 또 확인시키기 때문이다. 결국 해결해주지도 않는다. 아니, 해결해준다. 충격적인 방식으로! 단편으로부터 이어지는 오코너 소설의 충격적 결말들은 다시 확인시킨다. 모순과 역설은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두 친구는 물론 소설 속 등장인물은 모두 내 안에 있다. 역자의 말대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내가 이렇게 살다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를 좇는 헤이즐 모리츠의 그로테스크한 삶과 죽음을 따를까 겁이 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오코너가 동시대 개신교의 빗나간 열정을 풍자한 소설이라는 평이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개신교 천주교가 아니라 '종교'라는 이름으로 눈 먼 사람, 종교라는 이름으로 오직 자아숭배에 몰두하는 사람을 직접, 가까이서 경험하지 않고는 이런 인물설정은 가능하지 않다. 아니 결국 자기 안에서 발견했을 테지. 충격적인 소설 <좋은 사람은 드물다>의 할머니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앎, 자신의 모든 것에 '성찰'이란 할 줄 모르는,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편견을 종교의 이름으로 스스로 세례주어 합리화 한 좋은 나쁜 사람이다. 모든 것을 안다는 무지, 그 어마어마한 자기중심적 무지를 한 시도 쉬지 않고 입으로 떠벌떠벌하는 자가 불러온 끔찍한 화를 보며 놀라면서도 나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심지어 마지막 세 방의 총은 내가 쏘아도 좋았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마치 평생 한 번쯤 해보고 싶은 바로 그 일을 부적응자를 통해 대리만족한 느낌. 그녀의 입에서 더는 착한 나쁜 말이 나올 수 없게 만들고 싶었다. "평생 누가 옆에서 1분에 한 번씩 총을 쏴 주었다면 좋은 여자가 됐을 거야"라는 부적응자(범죄자)의 말에 동생의 농담이 떠올랐다. "맞으면 돼. 몇 대 맞으면 돼." 치기 어린 비행청소년의 말을 세기의 소설가가 그로테스크하게 읊는다면 저 대사일 듯. 


헤이즐 모리츠이며, 호크스이고 동시에 착한 나쁜 할머니이며, 그를 쏜 부적응자인 나는 누구인가.

소설가 정이현의 추천사가 이렇게 답한다.


차갑고 가차 없는 시선으로 인간의 모순적 내면을 파헤치고, 읽는 이의 마음을 날카로운 손톱으로 후벼 판다. '어마어마'하다에는 매우 엄숙하고 두렵다는 뜻도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제목이 기가 막히다. 그렇다. 인생, 다가오는 것들을 맞으며 걷는 길이다. '나는 할 수 있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든다!' 주먹 흔들며 외치는 아자아자가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유.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 자기계발서의 선동에 오히려 덤덤해지는 이유. 생의 굵직한 행불행은 다가오는 것들이 끌고 나온다. 바라지도, 택하지도 않은 것이 예상 밖의 시점에 치고 들어와 나를 행복 또는 불행으로 던져 넣는다. 체감하기로는 내가 다가서서 이룬 것보다 내게 다가온 것들의 힘이 늘 더 세다. 나를 세차게 흔들어 다른 자리에 서게 한 결정적 변화는 '다가오는 것들'이었다. 한 남자가 다가와 남편이 되었고, 영혼의 친구가 되었고, 몇 년에 한 번 씩 생의 분기점으로 나를 끌고 간다. 내가 낳았지만 어설피 그려보았던 그 아이들이 아닌 아주 생소한 두 우주가 다가와 내 일상의 감정을 쥐락펴락한다. 사춘기 한참 민감한 시기에 아버지의 죽음이 다가와 삶에 대한 내 태도를 바꿔 놓았다. 온 국민 보는 앞에서 가라앉은 세월호가 다가와 엄마 아빠들의 삶을 길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최순실의 태블릿 PC가 다가와 길바닥에 뿌린 세월호 엄마 아빠의 눈물이 헛되지 않았다 하며, 상상도 해보지 못한 200만 촛불이 다가왔다. 좋다/나쁘다, 하나의 이름을 붙일 수 없지만 흔히 '불행'이라 불리는 것들이야말로 다.가.오.는. 것들이다.


함께 철학교사를 하며 보기 좋은 가정을 일궈가던 멀쩡한 남편이 '딴 여자가 생겼어. 그 여자랑 살고 싶어' 이런다면. 젖은 신문지처럼 찰싹 달라붙어 집착하던 나이든 엄마, 더는 돌볼 수 없어서 요양병원에 보낸 엄마가 갑작스레 죽는다면. '그래도 난 지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고 있잖아' 자위하고 있는 터에 출판된 책의 재계약이 취소되며 학문적 자존심 뭉개지는 일이 속속 일어난다면. 그 와중에 아끼는 제자와의 교감이 한 줄기 희망으로 다가온다. (그녀가 아니라 관객인 내게) 젊은 한때의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제자의 고뇌에 찬 열정이 갈수록 거리감으로 다가온다. (관객인 내가 아니라 그녀에게) 이 모든 다가오는 '상실'들을 나탈리는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장면 장면을 종종걸음으로(주로 높은 굽의 웨지힐을 신고)  느리지 않게 오간다. 강의실로, 엄마 집으로, 요양병원으로, 출판사로. 또 끙끙 여러 개의 짐보따리를 끌고 기차로, 버스로, 택시로 남편의 별장이나 제자의 전원공동체를 오간다. 가끔 침대에 누워 혼자 울지만 감정의 동요가 요란하지는 않(게 보인다)다. 다가오는 것들을 대하는 나탈리의 태도는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그녀의 생김새 같고, 옷차림 같다.


남편과 함께 씨네큐브에서 보고 집에 와 바로 거금 4000 원을 투자하여 구매하였다. 아주 조금 쓸쓸하고 많이 의연한, 그렇다고 그리 멋지지도 않은 나탈리를 연구할 필요가 있어서였다. 나도 좀 그러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머니 장례식에서 나탈리가 읽은 <팡세>와 영화 마지막의 행복론 강의를 음미하고 싶은 마음, 영화 구석구석 숨겨진 철학 찾기 놀이를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철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에게는 깊이가 다른 영화일 듯. 일천한 나는 루소, 레비나스, 부버에 순간 귀가 번쩍 뜨였을 뿐. 남편은 프랑크푸르트학파니 뭐니 하는데 내가 아는 건 그게 먹는 건 아니라는 정도. 여하튼 어머니 장례식에서 들고 나가 읽은 팡세는 영화 속 나탈리를 나탈리이게 하는 힘의 이론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내가 보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온통 암흑뿐이다.

자연은 내게 회의와 불안의 씨만 제공한다.
신을 나타내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부정으로 마음을 정할 것이다.
도처에 창조주의 표적을 볼 수 있다면
나는 믿음 속에서 안식할 것이다.
허나 부정하긴 너무 많이, 확신하긴 너무 적다 보니
나는 개탄할 상황에 있다.
만약 신이 있어 자연을 뒷받침 하고 있다면
자연이 신을 명확히 드러내 주거나

자연이 보여주는 표적이 거짓이라면
그것들을 깨끗이 지워버리기를
어느 편을 택할지 알 수 있도록
자연이 모든 걸 말하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내가 놓여있는 상태에서
내가 뭔지, 뭘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나는
나의 신분도 의무도 모른다.
내 마음은 진정한 선을
그것을 따르기를 온전히 바란다.

원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비싸지 않다.


철학교사 나탈리는 이렇듯 '철학 함'으로 다가오는 상실을 맞서고 있다. 차라리 얼마나 정직한 믿음이며 희망인가. 장례식 설교에서 신부가 말한다. "나탈리, 당신이 어머니께 표현한 최선의 감사는 철학교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의혹과 질문은 신앙과 굳게 엮여있음을요. 당신의 삶은 그리 이루어졌습니다" 버스 창 밖을 바라보며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파스칼의 저 글을 되뇌는 나탈리. 그렇게 철학함으로 자기를 위로하고 있는 나탈리의 눈에 들어온 창 밖의 장면. 애인과 함께 꿀 떨어지는 웃음을 웃으며 걷는 남편 하인츠. 엉엉 울던 울음이 헛헛헛헛 웃음으로 바뀐다. 어떤 현학적인 말을 가져다 자기연민을 포장해도 현실은 이것. 평생 나를 사랑할 줄 알았던 남편의 배신이다. 이것이 현실. 아무렇지 않게 종종거리며 스크린을 오가는 그녀였지만 관객들 모르게 이불 뒤집어 쓰고 울어야 할 울음이 많이 남아있음이다.


영화 보고 나서 남편이 "그 집 거실 부럽지? 자그맣고, 책으로 둘러싸여 있고. 정신실이 그런 거실에 있으며 좋겠다" 아닌 게 아니라 참으로 마음에 드는 거실 겸 서재이다. 천국 가기 전에 '하나안~님! 황금집 필요 없구요. 나탈리 집 아시죠? 그런 집, 그런 거실, 그런 서재로 할게요' 미리 주문을 넣어둬야 할까보다. 영화 좋았다며 늘 그렇듯 별 말 없던 남편이 거실에 대한 얘길 하나 더 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오래 오래 그 거실을 보여주잖아. 일상, 그 여자의 철학 함은 일상이야." 그렇다. 모든 다가오는 것들은 일상의 기쁨과 슬픔으로 녹아든다. 어설픈 리뷰에 담고 싶은 주제가 한 둘이 아니다. 이혼한 여선생님과 젊은 제자는 연인이 될 수 없는가? 이런 얘기는 흥미진진. 엄마의 딸이며 딸의 엄마, 딸이 낳은 아이의 할머니가 되어 가는 여자 이야기도 몇 바닥 쓸 수 있을 것 같고. 그러나 <나의 성소 싱크대 앞> 저자답게 '기승전-일상'으로 끝맺도록 하겠다.


포스터에 나란히 선 제자 파비앙이 영화 초반부에 말했다. "고3때 선생님의 수업과 책이 저를 붙들어줬어요. 철학을 발견하게 되었지요." 영화 중 상실의 정점은 머리가 큰 제자 파비앙의 비판이다. "생각과 행동의 일치는 중요해요. 선생님 교육엔 없던 거죠" (아, 현기증) "왜 그런 말을 해? 나는 생각과 행동을 완벽하게 조화시키고자 했어"라는 선생님의 반격에 "그건 맞아요. 사적 영역에 한해서요. 평소에는 원칙을 지키 테지만 삶의 근간을 흔들지 모르는 사상은 외면하시잖아요. 시위나 서명 정도로 스스로를 참여 지식인으로 여기죠. 떳떳한 양심과 변함없는 생활....." 제자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왠지 진 느낌의 선생님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말한다. "난 혁명을 바라지 않아. 훨씬 수수해.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도록 돕는 것. 최소한 네게 그것을 전달했다고 믿었다." 내게 가장 아프게 다가온 장면이다. 파비앙 친구들의 논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냔 말에 "급진성에 대해 말하기엔 난 늙어서요. 예전에 다 해봤거든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젊을 때 나탈리는 공산주의의 급진적 사상에 빠져 러시아까지 다녀왔다.) 주인공의 표정이 가장 쓸쓸해 보인 장면들이다. 한때 급진적이었으나 어느 새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중년의 여자가 되었을 것이다. 사적인 영역을 살아내기에 급급하고,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개인적 행복에 만족하며 살았을지 모르겠다. 파비앙과의 설전에서 밀려난 느낌으로 홀로 낭떠러지 느낌의 언덕에 선 나탈리의 뒷모습이 사진 한 장처럼 마음에 남는다. 그 곁에 나를 세우고 싶은 마음. 그래도 그녀가 잘 살아왔다는 걸 그녀의 거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고, 거실은 말하자면 일상이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어디 입이 떨어지겠는가. 차라리 <팡세>를 다시 읽어주리라.














<우리들> <우리들> 하는데, 왠지 포스터가 싫어서 생각에 없던 영화였는데 열카톡을 하다 얻은 정보가 이랬다. '소재: 초등학생의 왕따와 그 안의 감정, 그러나 결국은 그들의 언어로 담아낸 우리들의  감정' 이란다. '어머, 이건 (채윤이 손잡고) 꼭 봐야해!' 했다. 그리하여 채윤이와 함께 보았다. 영화를 강추한 여자사람 제자가 어느 남자사람과 봤다는데 그 남자사람이 울었단다. 그렇다면 나는 홍수, 쓰나미가 되겠군. 만반의 울 준비를 하고 갔다. 눈화장을 전혀 하지 않았고 휴지도 듬뿍 챙겼다.


채윤이에겐 영화에 대해 긴 설명 하지 않았다. 그냥 보자고 했다. 긴장이 되었다. 이것은 마치 입안 헌 곳에 알보칠을 바르기 전의 긴장이다. 팔짝팔짝 뛰도록 아프다는 걸 알지만 나으려면 어쩔 수 없다는. 어렸을 적에 동생이 여름마다 무슨 피부병을 앓았다. 밖에서 죽도록 놀고 들어오면 일단 목욕을 시킨 후에 과산화수소로 상처 하나하나 소독을 했다. 그리고 그 위에 연고를 발랐다. 여름 저녁마다 무슨 의식을 치루는 것 같았다. 엄마 아버지가 하시던 치료의식을 어느 때부턴가 내가 하게 되었다. 소독약 묻은 솜을 상처 부위에 대면 동생이 아파서 팔짝팔짝 뛰었다. 투명한 과산화수소는 상처에 닿으면 뽀골뽀골 거품이 되었다. 거품이 뽀골거리는 만큼 동생이 펄쩍펄쩍 뛰었고 마치 내가 아픈 것처럼 오금이 저렸는데, 그나마 거품이 뽀골거리면서 균이 없어지는 느낌이라 카타르시스 같은 것도 느꼈다. 영화 <우리들>을 보러 채윤이 손잡고 가는 일은 과산화수소 묻은 솜 앞에 상처를 내미는 일과 같다. 그래도 남은 균이 뽀골거리며 잡힐 거야.


팅팅 부은 눈으로 영화관을 나서겠구나, 유난히 각오를 하게 된다. 허무하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말짱한 얼굴로 필름포럼 2관을 나왔다. 옆에 앉았던 채윤이도 마찬가지. 대신 나는 영화보는 내내 양팔이 아팠다. 마비가 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순간적으로 근육의 긴장이 훅 풀렸다가. 내내 그런 식이었다. 나중에는 손을 펴고 팔을 축 늘어뜨리고 '내려놓음' 포즈가 되었다. 관람 후엔 채윤이랑 맛있는 것을 먹으며 치유의 수다수다를 할 계획이었는데 채윤이 얼굴이 말이 아니다.(울어서가 아니다) 그냥 딱 '기분이 떡입니다' 이런 표정이다. 영화 시작 전 분명 맑음, 쾌청이었건만. 영화 얘기는 꺼낼 수가 없었다. 집 앞에 다와서 '영화 어땠어?' 물었더니 '저런 영화 싫어. 영화가 너무 현실같애. 나는 영화같은 영화가 좋아' 짧은 평이었다. 왕따라는 말로 담을 수가 없다. 영화도 그렇고, 내가 초등학교 3학년, 6학년 때 같은 친구에게 당했던 그 일과, 채윤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당했던 그 일 모두는. 왕.따. 두 음절의 보편적인 언어로 담을 수 있는 사연이 아니다. '왕따'라는 말이 담을 수 없는 것들을 영화 <우리들>은 담아냈다. 그 복잡함과 두려움과 팔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과 얼어버리는 듯한 느낌을 다 보여주었다. 그래서 차마 울지도 못했다. 채윤이 말 '너무 현실 같애'에 담긴 뜻이 그러하다. 나도 그랬다.


이 영화를 보고 울 수 있는 그대, 행복하여라. 라고 말하겠다. 울 수 있는 것은 한 발 물러서서 볼 수 있다는, 관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울 수 없다. 영화 속 선과 지아가 결코 울지 않는(못하는) 것처럼. 왕따(우쒸, 이 말의 무게는 도대체가 너무 가볍다고!) 당하는 아이의 1인칭 시점을 너무 잘 그려냈다. 에니어그램 내적여정, 꿈작업, 내면아이 치료작업..... 그리고 치유하는 기도 등을 해오면서 나는 나의 왕따(우쒸) 사건을 재경험하였다. 많이 객관화되었고 치유도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전히 울 수는 없는 나를 발견하였다. 울지 못하여 몸이 아픈, 아직 녹지 않은 감정이 몸속에 남아 있다는 것을. 채윤이도 마찬가지. 아프도록 잘 만든 영화이다.


영화에는 어른이 없다. 불과 열한 살 밖에 안 된 아이들이 폭력에 짓밟히고(짓밟고) 있을 때 도움을 손길을 내미는 어른이 없다. 아니, 손이 아니라 눈이 먼저 없는 것이다. 아이들의 두려움 가득한 표정과 축 쳐진 어깨를 읽는 눈이 없다. 선이 엄마는 밝고 따뜻하여 치유인자를 가진 사람 같지만 자기 아이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러니 엄한 곳에 정과 따스함을 발휘한다. 남편이 돌보지 않는 시아버지 돌보기에만 극진하다. 남편과 시아버지 사이 문제로 두면 될 일에 내내 더 마음을 쓰는 듯하다. 선이 아버지는 임종 직전인 자기 아버지와 화해할 수 없음이 괴롭다. 괴로울 때마다 술로 회피한다. 심지어 권위적이지도 않은 젊은 담임 선생님조차도 이 가공할 폭력을 읽어내는 눈이 없다. 이 어른들을 탓할 수 없다. 이 어른들은 어른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계에의 미숙함은 선이 지아 수준이다. 엄마는 낫다고?(엄마가 늘 선이 동생 얼굴에 상처내는 연우엄마와 통화하는 것을 보라. 문제에 직면할 줄 모른다) 어른이 없다. 선이나 지아도 결국 이 아픈 일에 대해 돌봄받지 못한다면 똑같은 어른이 될 것이다. 물론 그 시절 내게도 마땅한 어른이 없었다. 엄마가 알고 학교에 쫓아와서 뭐라뭐라 했지만 결국 내게 한 말이 '니가 교만해서 그렇다'였다. 이 말에 내 가슴에 더 큰 비수로 꽂혔다는. 채윤이에겐 어땠을까? 엄마 아빠가 마땅히 비빌 언덕이 되어주었을까? 썩 자신이 없다. 내게 여전히 미해결 과제인데, 엄마로서 한다고 했지만 잘 했을까?


왕따 경험이 없다 해도 누구나 두려워한다. 외톨이가 될까 두려워한다. 장면장면이 그 두려움을 참 잘 그려낸다. 셋이서 대화하다 나머지 둘과 내가 의견이 다르다? 그것만으로도 마음 깊은 곳에서 미세한 긴장이 생기는 것이다. 둘도 마찬가지. 상대와 내가 의견이 다르다는 것만 확인되어도 몸 어딘가가 떨린다. 우리들, 우리들이다. 외톨이가 될까 두려운 우리들이다. 평균적인 두려움을 상회하는 두려움, 그리하여 울 수도 없는 또 다른 우리들도 있다. 아직 울지 못하는 우리들을 자각시켜주니 고마운 영화이다. 울지 못하고 몸이 아팠거나 하염없이 우울해진 우리들 있으면 여기여기 붙어라! 당신만 그런 거 아니다. 우리집에도 둘이나 있다.


집에 와서 한참 후에 채윤이가 한 마디 더 했다. '엄마, 그런데.... 영화 속 모든 사람이 다 이해가 돼. 공감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가 돼. 선이, 지아, 심지어 보라까지도 이해가 돼' 이해가 된다는 말이 이해가 됐다. 그러나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이해된다고, 이해해야 한다고 스스로 강제할 필요 없어. 모두를 다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그것보다 먼저 너의 아픔을 돌봐.' 참았다. 다시 얘기할 기회가 올 것이다..


영화 리뷰 쓸 마음이 생기면 다른 리뷰를 일부러 읽지 않는 편인데, 영화소개에 바로 링크가 되어 있어서 이동진의 글을 읽었다. 동의하지 않음! 특히 아래 인용된 부분 완전 동의하지 않음이다. 


‘우리들’은 미성숙한 아이들의 미성숙한 관계를 다루는 영화가 아니다. 아이들은 어려도 관계는 어리지 않다. 이 영화의 아이들이 꼬인 실타래를 풀기 위해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것은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스스로 풀어야 하는 자신만의 실타래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엔


'우리들'은 미성숙한 아이들의 미성숙한 관계를 다루는 영화이다. 아이들이 어리기에 관계는 어리다. 이 영화의 아이들에겐 꼬인 실타래를 풀기 위해 도움을 요청할 어른들이란 없었다.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어른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열한 살이 주고받기에는 너무 잔인한 폭력이어서 스스로 풀 수 없는 실타래였지만 그 누구도 풀어주지 못했다. 그렇게 풀지 못한 실타래를 가진 아이들이 그대로 어른이 되었기에 오늘 열한 살이 도움을 청할 어른은 여전히 없는 것이다. 여전히 어리고 미성숙한 관계를 맴돌다 술로 도망치는 몸만 어른인 어른들 뿐이다.


라고 고쳐야 맞다.


그리고 또 하나,

피구에서 가위바위보로 애들을 하나 씩 뽑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같은 장면으로 끝낸 양괄식 구성. 첫장면의 피해자 선이가 용감하게도 지아 편을 들어준다. 훈훈할망정 감동적이진 않았다. 급조한 환타지 엔딩 같았다. 내내 무섭도록 리얼리티이지 않았던가. 영화 속 선이 캐릭터는 그럴 수 있다. 어린 동생의 말에 은혜받아서 '아, 내가 먼저 무장해제 해야지' 결심했을 법하다. '내가 때리고, 연우가 또 때리고, 계속 때리고 때리고 그러면 언제 놀아?'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교훈은 유딩의 입에서 나온다. 현실 왕따 세계에서 선이 같은 선이가 있을까.................................. 그래, 있겠지. 다시 생각해보니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나마 세상이 수준을 유지하고 있을 게다. 




쓰다보니 과하게 시니컬해지는 것 같기도.

뒤로 올수록 심장박동도 빨라졌다.

왕따 트라우마 치료가 시급한가봉가.








"그날 이후, 사소한 삶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뭔가를 고치려면 전부 분해한 다음 중요한 게 뭔지 알아내야 돼."


영화에 끌린 건 홍보문구 안의 저 두 문장이다.


정말 소중한 것들은 있을 때는 잃고 나서 비로소 그 큰 존재감을 느끼는 것들이다.

현승이 일기에 자주 등장하는 문장에 '매일 매일 똑같은 하루다' 담긴 지루함이 묻어나는 자조적인 느낌 말이다. 잃어봐야 알게 된다. 그 똑같은 하루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가혹하게도 사소한 삶을 들여다보는 눈은 대체로 '그날' 이후이다.

벼락처럼 들이닥치는 '그날'에 일상을 빼앗긴다.


일상을 빼앗긴 후 부적응의 나날,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난 후에

'뭔가 잘못되었었구나!' 깨닫는 사람들은 고치기 위한 작업을 하게 된다.

밖이 아니라 안,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타인이 아니라 나에게로

시선을 옮기게 된다.

이제껏 살아왔던 방식을 낯선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며,

뼈아픈 후회, 회한, 성찰, 정신분석....

무엇이라 불리든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분석하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두 문장에 낚이면서 머릿속에 써 놓은 시나리오가 있었다.

'분해'라는 말은 일종의 정신분석이겠구나, 상상했다.

잔잔한 내면작업을 상상했다. 아니었다.

데몰리션(demolition)은 말 그대로 파괴이지 분해가 아니었다.


냉장고 좀 고쳐줘, 냉장고에 물이 샌다고..... 어어, 쾅! 교통사고, 그리고 아내가 죽었다.

일상에서 늘 하던 말, '냉장고 좀 고쳐줘'가 유언이 되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김종필 여보, 프린터기 좀 고쳐줘!ㅠㅠㅠㅠㅠㅠㅠㅠ) 

뭔가를 고치려면 전부 분해한 다음 중요한 게 뭔지 알아내야 돼.

평소 존경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어쩌면 혐오하는 장인의 말이 생각난다.

역시나, 분해했지만 고칠 수는 없다. 문제가 무엇인지는 더더욱 알 수 없고.

분해된 잔해뿐이다. 그러면 그렇지.

영화에서 우리 편 말을 들어야지, 악역의 말을 들어서 해결점이 찾아지겠는가 말이다.


냉장고를 분해해서 고치지는 못했으나 남자는 분해하고 부수는 맛을 알아버린 것이다.

말썽을 일으키는 사무실 컴퓨터를 분해하고,

분해하고, 분해하다......

때려 부수는 맛에 빠져든다.

결국 딱 봐도 간지나는 멋진 집을 때려 부수기에 이른다.

꿈을 분석할 때 꿈에 나온 집은 흔히 '집'은 가족과 관련된 '자아'를 상징한다고 한다.

집을 때려 부수기까지는 금융회사 사장의 사위로 사는 직업인으로서의 자아를 비롯한

모든 자아도 함께 망가뜨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세대로 따지자면 '사춘기'는 파괴의 세대이다. 

무엇이든 삐딱하게 보고, 무엇이든 일단 부정하고, 때려 부수고 보는 세대이다.  

어쩌다 사춘기 아이를 만나 쿵짝이 맞고, 파괴의 일탈 놀이의 친구가 되니 가관이다.

그리고 그렇게 부수고 부서진 후에,

영화의 후반부에서 처음으로 아내를 잃은 남편이 지을 법한 표정이 등장한다.

분노에 차서 할 말 있음 서서 얘기하고 가라던 장인을 주저앉힌 표정.

뭉클했다.

영화 초반 교통사고로 아내가 죽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남자의 얼굴엔 감정선이 없다.

슬픔도 분노도 그리움도 그 무엇도.


부수고 나서, 다 때려 부수고 나서 비로소 감정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감정을 싸고 또 싸고 있던 딱딱한 껍데기가 깨어지니 비로소 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제 오늘 일은 아니고,

영화 탓은 아닌데,.

온갖 번듯하고 미끈하고 번지르르한 것들이 거북하다. 유난히 거북하다. 

연애 강의를 하면서 연애의 기술은 '싸움의 기술'이라 말하곤 한다.

'싸움의 기술'이 아니라 '대화의 기술'이면 좋겠는데 갈등상황에서 대화는 거의 싸움이 되기 마련이니까 애초에 싸움이라 해두는 것.

긍정에 긍정을 쌓고 잘되는 나에 잘되는 나를 또 쌓는 긍정의 힘?

그런 힘 따위는 없다.

보기 좋게 번듯하게 쌓아 올리는 것은 남 보기에만 좋은 것.

삶 전제를 때려 부수어야 하는 날이 오기 전에

부서지고 깨어지며 뒤로 물러섰다 다시 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일이다.


분노를 모르는 자 사랑할 줄 모르는 자이다.

싸움을 모르는 자 성장을 모르는 자이다.

파괴를 모르는 자 참된 세움을 모르는 자이다.






이  사 (김현승)

이사한 곳을 지나가면 뭔가 마음에 걸린다.
마치 무엇을 두고 온 것 같다.
수영장에 수영복을 두고 오듯
학교에 공책을 두고 오듯
이사한 곳에 마음을 두고 왔다. 



명일동을 떠나 이곳 합정동으로 이사와 1년이 지난 3학년 말에 쓴 현승의 시이다. 암사동 올림픽도로 근처를 지나며 전에 살던 아파트 쪽을 바라보면서 '엄마, 난 여기를 지나가려면 마음에 뭐가 걸리고 찌릿해' 하더니 이 시를 써냈다. 두고 온 곳을 그리는 마음, 그 마음이 지나쳐 병이 되는 것을 나도 안다. 현승이는 시를 썼지만 중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울며불면 엄마에게 쏟아부었다. '잘 자라고 있는 화초를 왜 옮겨 심었어! 옮겨 심은 곳이 영 맞질 않아서 잘 자라던 화초는 이제 시들어 죽어가고 있어. 옛날 친구들, 선생님들, 학교.... 다시 돌아가고 싶어.' 아버지 돌아가시고 서울로 전학와서 앓았던 향수병의 기억이다. 마음을 두고 와 내내 무엇이 걸려 있는 그 느낌을 현승이도 알고 현승이 엄마도 안다. 이곳에 이사온 지 벌써 5년 자. 합정 망원 죽돌이로 신나게 살면서도 현승인 여전히 그리워한다. 이젠 명일동이 아니라 '그 무엇'을 그리워하는, 그리움이 몸에 붙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그런 현승이를 느낄 때마다 내 마음이 심하게 울렁거리는 것을 보면 나 역시 '옮겨 심은 화초' 신드롬에서 크게 벗어나질 못한 것 아닌가.

영화 <브루클린> 홍보문구에서 '향수병'에 낚인 것도 이런 경험 때문일 것이다. 이 나이에 '운명적 사랑, 새로운 사랑'에 끌리랴. <브루클린>은 사랑 얘기가 아니다. 에일리스가 예쁘고 영화가 잔잔해서 그렇지 에일리스에게 아일랜드는 '헬'아일랜드이다. 사랑도 일도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 노력하면 잘 될 수 있을 거란 희망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가지고 있는 자원이 없는 '흙수저'라는 의미에서 '헬'아일랜드이다. 사무직 직장을 가지고 있으며 에일리스를 진심으로 아끼는 언니가 유일한 자원이다. 언니의 주선으로 새로운 땅 뉴욕 브루클린으로 떠난다. 꿈의 아메리카로. 난생 처음 타보는 미국행 배에서 멀미하며 고군분투하는 장면들은 흙수저로서, 하층민으로서, 노답 인생으로서 원초적 끝판이다. 누추한 긴장 속에 입국심사를 마치고 새로운 땅의 향해. 너무 환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문을 열고 나간다. 열리기 전까지는 벽일 뿐인 문, 어쩔 수 없이 그 문을 열어야 하는 운명들이 있다. 떠나온 곳에 수영복이든, 노트든, 마음이든 무엇을 두고 왔든지 문을 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자기를 찾는 모든 사람의 운명이다.  




다음 이야기는 당연히 어리버리 뿌빠빠, 흙수저 아일랜드 여자의 부적응과 그리움의 나날이다. 언니의 편지를 붙들고 우는 장면, 신부님에게 '제가 왜 아일랜드를 떠나 왔을까요?' 묻는 장면, 크리스마스에 모인 아일랜드 출신 노숙자들이 고향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시는 장면. 어쩌면 이렇게도 내 마음을 후벼파는지. 그런데 잠깐이다. 신부님의 도움으로 야간 대학에 다니고, 댄스파티에서 사랑을 만나고, 그 사랑이 그리움을 치유한다. 머리가 좋고 착한 에일리스는 실력과 성품까지 갖춘 뉴요커로 빠르게 변해간다. 그렇지. 그런 거지. 떠나오길 잘했지. 그때 고향에서 날아든 소식. 언니가 죽었고 엄마가 홀로 남았다.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고 두려워하는 남자친구 토니와 둘만의 결혼식을 하고 혼인신고를 한다. 그렇게 사랑의 서약을 남겨두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 많은 것이 달라졌다. 언니가 없어서가 아니다. 에일리스의 위상이 달라졌다. 언니가 일하던 빈자리에 스카웃 제의를 받을 만큼 실력을 갖췄고, 선글라스 낀 뉴요커로서 매력 철철 넘치는 여자가 되었다. 일도 사랑도 소망이 없었던 흙수저 에일리스가 진주 달린 수저가 되어 고향에 서게 된 것이다. 훈남에다 부자, 게다가 부모님은 시골로 이사할 예정이라 넓은 저택에 혼자 살아야 해서 결혼이 급한 짐과 사랑에 빠진다. 뉴욕에 있는 남친(아니고 남편, 에고 어쩌자고 혼인신고를 했나고)과는 다른 매력이다. 브루클린에서 온 편지가 쌓여가고 답장 한 줄을 못 쓰고 갈등하는 사이 이러다 짐과의 결혼이 진행될 것만 같다. 돌아가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곳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떠오른다.

갈등해결, 또는 성장을 위해서는 악역이 필요한 법. 떠나기 전 일했던 베이커리의 못된 여주인이 크게 기여해준다. '너 짐과 결혼할 거야? 너가 미국에서 혼인신고 하는 걸 봤다는 사람이 있는데.....' '기, 기억이 안 나는데요. 무슨 얘긴지' 악랄하고 비열한 베이커리 주인과 잠시 마주앉아 있더니 에일리스가 말한다 '아, 잊고 있었어요!' (그렇지? 너는 유부녀야. 흙수저 주제에 여기서 잘 될 수 없지. 넌 이제 끝장이야!) 잠시 여주인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 미소 짓긴 일러요. 나쁜 아줌마야. 에일리스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라구. '여기가 어떤 곳인지 잊고 있었어요!!!!!!!!!' 그리고 우리의 에일리스, 망설임 없이 다음 날 배를 예약하고 거침없이 떠난다. 손 흔들어주는 언니는 없고 처음 이 배를 탔을 때와는 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으나 갑판 위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는 에일리스 멋지다. 뭔지 모르게 든든하고 멋지다. 이 배에는 또 다른 에일리스들이 있다. '브루클린에 아일랜드 사람들이 많다면서요? 고향 같다면서요?'라고 묻는 흙수저 에일리스에게 진주를 단 에일리스가 대답한다. '그래요' 그리고는 멀미 대처 방법, 화장실 사용 노하우, 입국심사 시의 팁 등을 담담히 가르쳐준다.

죽음과 이별에 대한 유난한 두려움 때문에 새로운 것, 새로운 환경에 대한 미리 좌절하고 긴장하는 현승이와 자주 이야기 한다. 명일동에서 이곳으로 와서 현승이가 얼마나 자랐는지, 좋은 친구들을 얼마나 많이 만났는지, 한강에서 노는 일이 얼마나 재밌었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그리고 내 얘기도 들려준다. '왜 잘 자라고 있는 화초를 옮겨 심었냐며 울고불고했는데 그 화초 말라죽지 않았어, 그 때문에 큰 나무로 자라게 되어 여기 현승이 엄마가 되어 있단다.' 돌아오는 대답은 '그래도 나는 싫어.'이다. 그렇지. 그 누가 익숙하고 편안한 곳을 떠나 그리움과 긴장을 살고 싶겠나. 하지만 알게 될 것이다. 참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늘 떠나야 한다는 것을. 생의 의미를 찾으며 산다는 것은 장소적 떠남 이전에 마음의 떠남, 사변적 떠남을 통한 순례자의 삶이라는 것을. 소망 없고 불행할 뿐인 곳에 단지 익숙하다는 이유로 머물러서는 참다운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성경의 아브라함도, 고기 잡던 베드로도 떠남으로 의미있는 삶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그 전날 밤에 고기가 잘 잡혔다면, 떠날 수 있었을까? 오늘  일상의 빈 그물질이 우리를 떠남으로 이끈다. 빵집에서 일하는 에일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떠남은 끝나지 않는다.
늘 떠나야 한다.
회귀할 수 없다.
찬란한 빛을 마주하며 문을 열고 나왔으나
어느새 발걸음은 벽에 다다르고,
그 벽을 더듬어 또 다른 문을 열고 나가야 한다.
진정한 집, 그 집에 도착할 때까지 늘 떠나야 한다.
떠난 자가 다시 탄 배는 지난 번 그 배라도 같은 배가 아니다.










[그리스도가 구속한 여성]

그리스도가 구속한 인간, 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구속한 여성이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제목에 이끌려, 아니 김세윤 박사님 자체에 이끌려 북토크에 갔다. 저자로서 북토크를 당해본 적은 있지만 내 발로 찾아가 본 능동태 북토크는 처음이다. 책의 내용이 궁금해서는 아니다. 사실 청년 때  다니던 교회에서 매주 김세윤 박사님의 성경 강해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청년부 모임을 빠지고 오후 성경공부 가 있곤 했다. 그때 이미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어떻게 보시는지는 충분히 들어 알고 있다. 책 역시 2004년에 나온 <하나님이 만드신 여성>의 개정판이다. 그러니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이끌려 간 것은 제목이 아름다워서, 그리고 김세윤 박사님의 사투리 억양이 듣고 싶어서라 할 밖에.


남편이 신대원 다니던 시절. 여성 목사 안수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지켜보던 나는 여러 번 뒷목을 잡았다. 2000년 대에 그런 주제로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있다는 것 자체에 이미 가슴이 답답했고, 싸이 클럽에 올라오는 글과 댓글을 읽다보면 정말 털썩!이었다. 남편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다니던 교회가 속한 교단이었고 결국 본인의 선택이긴 했지만 내 바램을 배려해 선택한 신대원이었기에. 10년을 훌쩍 뛰어 넘어 지금 남편이 섬기는 교회에서는 선임 목사님이 여자 분이시다. 물론 교단이 달라졌다. 똑같이 설교하시고 똑같이 교회업무를 보실 뿐 아니라 선임, 보통의 교회로 말하자면 수석 목사님이시다. 아무 문제가 없다. 아마도 남편과 논쟁했던, 지금은 목사님이 되신 그때 그 신대원 동기분들은 '심방 전도사님'이라 불리는 여성 동역자들과 함께 사역하고 계실 것이다. 여성 안수에 대한 입장은 여전하실까.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 


여성 안수가 논쟁 꺼리가 되는 신학교와 교회, 부끄러웠고 부끄럽다. 당시 늦게 신대원에 가 혼신의 힘을 다해 공부하며 진심 행복해 하던 남편이었다. 1대 17로 싸우는 느낌으로 그 즈음 많이 괴로워했고, 외로워했던 기억이 새롭다. 논쟁은 그렇다 치고 클럽에 올라온 글과 댓글 중엔 믿어지지 않는 내용도 있었다. 목사가 되겠다고 하시는 예비 목회자들의 여성관이 이럴 수가 있을까.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여자와 북어는 삼일에 한 번은 패야 한다'는 식의 말이 스스럼 없이 나왔다. 이런 분들은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다!' 성경의 이름으로 아내를 때릴 수도 있겠구나 싶었었다. 무엇보다 진보적인 사회의식을 가진 분들이 신학적 담론으로만 가면 급 근엄하게 제사장 제의를 꺼내 입고 전통과 보수를 지키려 하는 것에 더욱 답답했다.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다.


북토크도 이런 말로 시작되었다. '이 책이 나온지가 10년이 넘었는데 그로부터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여전히 이 논쟁이라니요'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다. 여성 안수에 관한 신학적 근거나 논리가 부족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깨알같이 필기해 온 주옥같은 내용을 다시 옮겨 적진 않겠다. (도 있고 기사로 정리된 것도 있으니 관심자들은 참고하시기 바람) 


가르침과 삶, 글과 삶이 일치하는가가 관건이다. 설교, 강의, 글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신학자, 또는 목사에게는 더욱 관관건건이 아니겠나. '그리스도가 구속한 여성'을 바울신학의 관점에서 논증해내는 것과 남성으로서 여성을 동등하게 대하는 것은 다른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북토크를 통해 저자가 그렇게 살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을 가늠하는 자리도 아니다. 하지만 텍스트보다 더 중요한 것, 느낄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가 구속한 여성'들에게는 있다. 질문에 대한 답 또는 강연 중에 내게 느낌적인 느낌으로 와닿는 말이 있었다. 구약과 신약을 오가며 논리로 풀어내시던 중, '여자들이 교회에서 잠잠하라' 이 한 문장이 아니라 복음의 정신에 비추어보라!시며 하신 툭 나온 말씀. "생각해보세요. 신학교에서 똑같이 공부하고 똑같이 학위받고 남성은 담임목사가 되어 교황(가톨릭에서는 교황을 두고 우상화 한다고 비판하는데 개신교 안에는 교회마다 교황이 있다는 농담이 있단 얘길 하시며)의 삶을 살아요. 똑같이 노력하고 공부했던 자매는 심방 전도사라는 이름으로 말도 안 되는 처우를 받으며 사역해요. 이게 그리스도의 정신입니까? 이게 복음의 정신이에요?" 순간적으로 신학, 논리를 제치고 저자 안의 뜨거운 가슴이 표출된 것으로 보였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진행자는 남성 목사님, 패널로 여성 편집장 한 분이 함께 했다. 진행하시는 남자 목사님은 유능하게 느껴졌다. 이슈를 끌어내기 좋은 질문에 적절한 유머는 물론 타임 키퍼로서의 역할도 잘했다. 그분이 던진 어떤 질문 자체에 남성우월적 가치가 전제되어 있다며 여성 참석자가 질의응답 시간에 지적했다.(여성들에게 리더를 시키면 일을 잘못하는게 현실이다, 이런 내용이었다.) 김세윤 박사님은 '그렇다! 맞다'고 인정하시며 '미국에서 흑인들이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400여 년 노예생활의 결과라는 말이 있다. 때문에 방법은 더 기회를 많이 주는 것 외에 없다. 하물며 여성들은 수천 년 불평등 구조 속에서 살아왔다. 교회 역시 여성을 격려하고 기회를 더 많이 줘야 한다. 현재 우리 상황은 100m 달리기에서 남성은 50m 앞에서 출발하기 시작한 불평등한 게임이다'라고 하셨다.


재미있는 것은 이 질문과 답변 이후로 진행자 남자분이 '질문은 한 분만 더 받겠다. 교수님이 다음 일정 때문에 바쁘시다. 질문하시는 분들은 짧게 간결하게 하라'며 신속한 진행에 박차를 가하셨다. 김세윤 박사님의 반응. "괜찮아요. 질문 더 받아요. 여기까지들 오셨는데 궁금한 거 질문해야지. 자매님들이 좀 더 질문해주세요." 꽤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 여성, 특히 여성 목회자분들이 많은 것 같았다. 그리스도가 구속한 여성들이다. 그리스도가 구속한 여성 목회자들이다. 이분들은 어떻게 느꼈을지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책이나 강연 때문이 아니라 말과 말 사이, 강연과 강연 사이 박사님이 '자매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감동을 받았다. 북토크 마치고 따사롭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봄볕을 맞으며 걸었다. 그리스도가 구속한 여성인 나, 여성인 내가 좋다며 약간 춤추듯 걸었다.  


















[쥴리엣 비노쉬 분의 안나는 장성한 아들을 잃었고 막 장례식을 마쳤다. 집안dml 창문이란 창문에는 검은 천이 드리워진다. 빛이라고 없다. 캄캄하다. 안나에겐 표정이라곤 없다. 깜깜한 공간에 전화벨이 쩌렁쩌렁 울린다. 죽은 아들의 여자 친구 잔이다. 천진난만하게도 안나의 죽은 아들을 만나러 오겠다는 것이다. 안나는 그러라고 한다. 마치 아들이 집에 같이 있는 것처럼. 잔이 온다. 공항씬에서 엄청난 미쟝센을 흩뿌리며 온다. 남친 집에 도착했는데 그리운 남친은 없고 뭔가 음울하고 기괴한 분위기의 남친의 엄마, 어두운 기운만 만연하다. 남친과 헤어지나 마나 하는 기로에 서서, 이 남친을 놓치고 싶지 않아 모든 걸 내려놓고 찾아온 잔은 이래저래 불안하다. 그리운 남친은 부활절이면 돌아온단다. 아, 안심이다. 일부러 피한 것은 아니야. 부활절이면 돌아온다니까. '부활절에 돌아온단다.' 잔의 남자친구가 부활절이 온다면 안나의 아들은 언제? 


영화 첫장면은 피에타 이미지이다. 부활로 가는 길의 시작은 성금요일이다. 주님의 보혈, 주님의 보혈, 보혈의 잔, 구원의 잔.... 그런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주검으로 내려온 아들을 안은 마리아. 단지 마리아가 아니라 당신의 아들을 제물 삼으신 하나님 아버지(하나님 어머니)의 마음이다. 제 몸으로 품어 살을 찢는 고통으로 내놓은 생명을 받아들었던 그날, 그 경이의 순간을 잊을 수 있을까. 끝도 없을 것 같은 출산의 고통 끝에 '응애응애' 존재를 드러내는 생명, 그 생명을 처음 가슴에 품었던 기억. 바로 그 품으로 싸늘하게 식은 몸을 끌어안아야 하다니. 믿을 수 있는 일인가?


2년 전, 고난주간에 세월호와 함께 꽃다운 아들 딸들이 침몰했다. 그 주간 끝 부활주일, 그리고 일 년이 지난 부활주일, 심지어 2년이 지난 올봄에도 세월호는 여전히 차디찬 바닷속에, 아이들의 죽음 역시 진실의 빛을 보지 못하고 갇혀있다. 피에타. 아들의 주검을 안아보는, 그 고통을 가슴에 안아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엄마들이 있다. '응? 너의 남자친구? 부활절에 돌아와'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상실감 앞에서 작동하는 심리적 방어기제 '부정'일뿐.....]



여기까지 썼다. 영화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을 보고 리뷰 쓰기를 시작한지 두어 달. 저녁마다 블로그를 열어 완성해보려 했지만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두 달 동안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고 한 게 저거다. 미완으로 마무리 하려고 한다. 쓰고 싶은 말이 참 많다. 영화 보고 남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남편은 사무실 책상에 포스터를 붙여놓고 있다. 죽었다 부활절에 살아난 아들은 단 하나. 마리아의 아들 예수님 밖에 없다. 그러나 영화의 엄마 안나처럼 아들을 잃은, 자기 생명의 한 기둥이 무너져버린 엄마들은 모두 부활절을 기다린다. 아들 딸이 살아 돌아오리라 믿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분만의 죽음과 부활이 아닌 것을 알기에 부여잡는 것이다. 그것은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고, 거짓이 참을 이길 수 없고, 진실이 영원히 가라앉는다는 소망 아닐까.


세월호 2주기를 맞는, 하늘이 어두운 토요일이다. 아직 세월호는 성금요일이다. 사흘 동안 지옥으로 내려가신 아들을 고통스럽게 끌어안고 있는 그 시간일 뿐이다. 영화가 건넨 많은 질문에 대해 생각의 길은 열어놓되 글은 뚝 잘라 여기서 멈추겠다. 대신 '예은이가 불러주고 진은영 시인이 받아 썼다'는 시를 읽는다.  



<그날 이후> 

아빠 미안
2킬로그램 조금 넘게, 너무 조그맣게 태어나서 미안
스무 살도 못 되게, 너무 조금 곁에 머물러서 미안


엄마 미안
밤에 학원갈 때 핸드폰 충전 안 해놓고 걱정시켜 미안
이번에 배에서 돌아올 때도 일주일이나 연락 못해서 미안

할머니, 지나간 세월의 눈물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해서 미안
할머니랑 함께 부침개를 부치며
나의 삶이 노릇노릇 따듯하고 부드럽게 익어가는 걸 보여주지 못해서 미안

아빠 엄마 미안
아빠의 지친 머리 위로 비가 눈물처럼 내리게 해서 미안
아빠, 자꾸만 바람이 서글픈 속삭임으로 불게 해서 미안

엄마, 가을의 모든 빛깔이 다 어울리는 우리 엄마에게 검은 셔츠를 계속 입게 해서 미안
엄마, 여기에도 아빠의 넓은 등처럼 나를 업어주는 포근한 구름이 있어

여기에도 친구들이 달아준 리본처럼 구름 사이에서 햇빛이 따듯하게 펄럭이고
여기에도 똑같이 주홍 해가 저물어

엄마 아빠가 기억의 두 기둥 사이에 매달아놓은 해먹이 있어
그 해먹에 누워 또 한숨을 자고 나면
여전히 나는 볼이 통통하고 얌전한 귀 뒤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아이
제일 큰 슬픔의 대가족들 사이에서도 힘을 내는 씩씩한 엄마 아빠의 아이

아빠, 여기에는 친구들도 있어
이렇게 말해주는 친구들도 있어
"쌍꺼풀 없이 고요하게 둥그레지는 눈매가 넌 참 예뻐"
"너는 어쩌면 그리 목소리가 곱니,
어쩌면 생머리가 물 위의 별빛처럼 그리 빛나니"

아빠! 엄마! 벚꽃 지는 벤치에 앉아 내가 친구들과 부르던 
노래 기억나?
나는 기타를 잘 치는 소년과 노래를 잘 부르는 소녀들과 있어
음악을 만지는 것처럼 부드러운 털을 가진 고양이들과 있어
내가 좋아하는 엄마의 밤길 마중과 내 분홍색 손거울과 함께 있어
거울에 담긴 열일곱 살, 맑은 내 얼굴과 함께, 여기 사이좋게 있어

아빠, 내가 애들과 노느라 꿈속에 자주 못가도 슬퍼하지마
아빠, 새벽 세 시에 안 자고 일어나 내 사진 자꾸 보지마
아빠, 내가 여기 친구들이 더 좋아져도 삐치지마

엄마, 아빠 삐치면 나 대신 꼭 안아줘
하은언니, 엄마 슬퍼하면 나 대신 꼭 안아줘
성은아, 언니 슬퍼하면 네가 좋아하는 레모네이드를 타줘
지은아, 성은이가 슬퍼하면 나 대신 노래 불러줘

아빠, 지은이가 슬퍼하면 나 대신 두둥실 업어줘
이모, 엄마 아빠의 지친 어깨를 꼭 감싸줘
친구들아, 우리 가족의 눈물을 닦아줘

나의 쌍둥이 하은언니 고마워
나와 함께 손잡고 세상에 와줘서 정말 고마워

나는 여기서, 언니는 거기서 엄마 아빠 동생들을 지키자
나는 언니가 행복한 시간만큼 똑같이 행복하고
나는 언니가 사랑받는 시간만큼 똑같이 사랑받게 될 거야,
 그니까 언니 알지?

아빠 아빠
나는 슬픔의 큰 홍수 뒤에 뜨는 무지개같은 아이
하늘에서 제일 멋진 이름을 가진 아이로 만들어줘 고마워
엄마 엄마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들 중 가장 맑은 노래
진실을 밝히는 노래를 함께 불러줘 고마워

엄마 아빠, 그날 이후에도 더 많이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아프게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나를 위해 걷고, 나를 위해 굶고, 나를 위해 외치고 싸우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정직한 엄마 아빠로 살려는 두 사람의 아이 예은이야
나는 그날 이후에도 영원히 사랑받는 아이, 우리 모두의 예은이
오늘은 나의 생일이야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중에서






선거를 앞두고 혼자만의 특별기도 기간이었다. 설거지하며, 운전하며, 운동하며, 침대 누우면 잠들 때까지 '이 땅을 긍휼히 여기소서' 시시각각 기도가 올라왔다. 이 부조리한 나라, 이토록 추악한 조국 교회에 그분의 시선이 머물까? 과연 그러할까? 자주 생각한다. 실은 그분을 믿는 만큼 더 자주 상심하게 된다. 선이 이기고 약한 자가 우뚝 서고, 우는 자가 눈물을 그치게 되는 일이 있었던가? 동화 속 이야기도 아닌데 왜 강하고 착한 사람은 없고, 착한데 잘 되는 사람 찾기 어려운 걸까? 상심하지 않기 위해 기도했나 보다. 어떤 결과를 보더라도 그 12월의 멘붕을 다시 겪을 수는 없다, 마음 단단히 먹자, 하는 기도. 아니, 그것만은 아니다. 부조리하고 추악한 나라와 교회의 궁극적 통치자가 그분인 것을 믿기 때문이다. 남들이 뭐라 할지라도 사실 나는 믿는다. 그래서 더욱 절절한 기도였다.


남편 퇴근하고 돌아오면 잠시 앉아 차를 마시는 시간. 남편이 그날그날 판세를 읽어 분석해주고 나는 주로 한숨 내쉬거나 분통 터뜨리며 감정을 쏟아 놓는다. 실은 그 시간마저도 기도이다. 냉정과 열정, 두 개의 마음이 바라는 건 결국 하나이다. '정의가 강물처럼, 공의가 하수처럼' 흐르는 세상. 그것을 꿈꾸는 기도이다. 


우리 동네 국회의원 정청래가 컷오프되었을 때는 사실 눈물이 났다. 나는 정치적인 사람이 제일 싫다. 정치인도 마찬가지. 정치적인 정치인이 싫다. 언어에 이중 메시지를 담은 사람과 대화하는 건 짜증 나는 일이다. 뒤에 뭔가가 잔뜩 있는 것 같지만 당장 하는 말과 처신이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한다. 정치도 마찬가지. 이런저런 팟캐스트를 들어봐도 정청래 컷오프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차라리 정치 무관심자가 되자, 결심했다. 작심삼일. 무관심은 무슨! 정치는 일상과 가장 가짜이 닿은 세계인데 어찌 무관심이 가능하리. 마음을 추슬렀다. 다시 기도했다. '하나님, 정청래 컷오프라니요. 저한테 왜 이러세요. 손혜원이 안 되면 저 정말 또 며칠 못 일어나요. 손혜원 부탁드립니다. 하나님, 밀어주세요'


컷오프된 분들이 정청래를 중심으로 탈당하지 않고 유세단을 짰단다. '더컷유세단'이라 지은 이름을 손혜원 님이 '더컸유세단'으로 다시 작명했다고. 임영수 목사님 계신 양평의 '모새골_모든 것을 새롭게' 역시 카피라이터 손혜원 (이제는 의원님이다!!!!)의 작품인 걸 아시는지. 더컸유세단을 보며 희망의 불씨를 마음에 담았다. 반장 선거에 나가 떨어져도 그 상실감이 한참 가더라. 많은 국민(당원?)의 사심없는 지지를 받는 좋은 사람들이 컷오프를 당하고 얼마나 상심이 컸을까. 그리하여 다들 당을 뛰쳐나가지 않던가. 헌데 유세단을 구성하여 내 자리를 꿰찬 사람의 손을 들어주고 춤을 추며 응원을 할 수 있다니. 감동, 감동, 감동이다.


이기심 vs 이기심, 움켜쥠 vs 움켜쥠, 나만 옳다 vs 나만 옳다. 끝없는 갈등이 양산되고 양산될수밖에 없는 정치판의 기저이다. 어디 정치판뿐인가. 갈등하는 교회도, 갈등하는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리고, 두 대를 맞다니! 재빠르게 네 대 때리고. 컷오프라니! 욕하고 탈당하기. 다들 (해봐서 잘) 아는 갈등대응 방식이다. 헌데 예측이 빗나간 것이다. 한 대 맞았는데 '아야, 에잇..... 공평하게 양쪽 다 때려줘. 왼쪽도 한 대 더 때려' 한다면. 컷오프 됐는데 '어디 나 퇴출시키고 그 자리 지키나 보자'하지 않고 그 자리 지키도록 돕는 것 말이다. 이것은 정말 감동 아닌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설령 멀리 내다보는 고레벨의 정치 안목이라 해도 당장 이러기는 쉽지 않다. 높이 산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자신들이 상처 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상처가 많은 사람들은 가시 옷을 입고 있는 것과 같다. 자기도 모르게 모든 사람을 의심하고 언제든 찌를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희생자, 피해자로 규정할수록 더욱 그러하다. '더컷'은 상처받은 사람들이다. '더컸'은 상처받은 사람들의 권리 당위를 깨고 나온 사람들. 짤렸지만, 짤려서 상처받고 아프지만 그 자리에서 뒹굴지 않고 한 뼘 더 크기로 선택한 것이다. 크기로(자라기로) 선택하다니? 키 크는 것이 내가 크기로 결정한다고 해서 되는 일인가? 성경에도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라 하지 않는가. 아니다. 마음의 문제에선 가능하다. 상처라는 악의 순환고리를 끊고 궁극의 긍정을 지향하기로 한 사람들, '상처 입은 치유자'라 불러도 좋으리. 자신의 상처를 다 치유한 후 작위처럼 수여받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나는 아프지만 거기 뭉개고 앉아 있지는 않겠다는 의지. 거창하지도 않은 그 자.발.적. 의지 하나면 족하다. '더컷'과 '더컸'은 결국 '시옷' 하나 차이이다. 


이렇게 쉬운 것을 하지 못하고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상처 입은 자신을 방어하고, 방어하기 위해 잔인하게 공격하는 일을 얼마나 자주 보게 되는가. 아니, 얼마나 자주 그러고 사는가. 선거를 위해 기도했다. 아니, 선거 이후의 나를 위해 기도했다. 믿음과 소망, 사랑이 뿌리째 흔들리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설령 선거에 이기더라도 여전히 세상은 부조리할 테니) 개표 결과로 일단 기쁘지만 생각이 자꾸져 먹구름이 몽글몽글 피어나는 느낌. 웃음 끝이 자꾸 쳐지고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 그래도 좋을 걸 생각하자! 정말 되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안 된 것을 보면 다시 입꼬리 승천. '거봐, 하나님 살아 계시쥐?! 음하하하.' 무엇보다 손혜원을 우리 동네 국회의원으로 가질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잖아. 박주민 변호사 당선은.... 정말 이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눈물이 난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20대 국회의원 선거의 꽃은 '더컸유세단!'. 내겐 그렇다.  


총선을 위한 나만의 특별기도회, 기도 응답이 풍성하다.












친구의 입냄새, 이 사이에 낀 고추가루를 말해줘야 하는 일, 민망한 일이다. 괜히 혀를 더듬어 내 입속만 단속해보다 '나중에 거울 보면 알겠지' 포기하게 된다. 너 입냄새 구려, 너 음치인 것 알아, 우리 사무실 사람들 모두 너 때문에 힘들어.... 우린 다 아는데 너만 모르는 것 같아. 말하기 어려운 말들이다. 


마가렛트 여사는 음악을 사랑하고 노래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지만 음치이다. 이 사실을 본인만 모른다.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 마가렛트 여사는 돈이 무지 많다. 음악 클럽의 후원자이기도 하니 음악을 사랑하는 고고한 클럽 회원들은 박수치며 그녀의 노래에 열광해준다. 그녀의 노래가 시작되면 입냄새 나는 친구 앞에서 숨을 참듯 견디다 노래가 끝남과 동시에 참던 숨을 몰아쉬듯 '브라보!'를 외친다. 물론 조롱 섞인 브라보이다. 그러니까 '마가렛트 여사의 감출 수 없는 비밀'이란 마가렛트 여사만 아는 비밀이 아니라 그녀만 모르고 세상은 다 아는 비밀인 셈이다. 이 비밀을 이용해 대놓고 속이고 이용하는 사람도 있다. 젊은 기자와 삽화가는 신문에 찬사를 보내는 기사를 쓰고 마가렛트 여사를 이용해먹으며 뒤에서 낄낄거린다. '알면서 속아준다'라는 말이 있는데 사람들은 알면서 속아준다기 보다 모두 한통속 되어 마가렛트 여사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중 가장 적극적이고 창조적으로 속이는 사람은 마가렛트 여사의 비서이며 음악 보좌관 격인 마델보스이다.


채윤이와 함께 조조로, 극장을 전세내어 본 영화이다. 시놉시스와 몇 장면의 사진을 보고 '키키키, 재밌겠다. 볼래' 했던 채윤이는 중간에 몸을 베베 꼬았다. 코미디인 줄 알았는데, 코미디는 코미딘데 블랙코미디였던 것. 웃픈 영화여서 힘들었던 것. 그런데 실화 바탕의 영화란다. 그렇다. 실화. 실화 바탕이란 사실을 알고 나서 채윤이의 호기심에 다시 발동이 걸렸다. 블랙 코미디는 실화이고 우리들의 실제 이야기는 코미디이다.

사실 내 입냄새를 나만 모르지 내 친구들은 다 맡고 고통스러워 한다. 내 인격의 악취는 나만 모를 뿐 너는 안다. 이것이야말로 실화이다. 내가 누군가를 떠올리며 '걔는 참 이것만 고치면 참 좋을텐데....'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누군가도 나를 떠올리며 명쾌하게 분석할 것이다. 다만 서로들 암묵적으로 참아주는 것이다. '너 입냄새 나' 말을 굳이 말을 해서 내 이미지 구길 필요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영화 <윈터 슬립>이 생각났다. 주인공 캐릭터가 극단적으로 다른 것은 단지 영화의 쟝르가 다르기 때문일 터. 내게 오는 메시지는 동일하다. 스스로 일궈낸 자아 이미지에 어떻게 무지막지하게 전폭적으로 속고 있는지를 마가렛트 여사가 보여주고, 그 속임수의 속임술이 얼마나 정교한지를 <윈터 슬립>의 아이딘이 보여준다. 우습도록 화려한 마가렛트의 의상과 온화하며 지적이고 선하기까지 한 아이딘의 메마른 웃음과 긴장된 말투가 같은 메타포로 느껴진다. 마가렛트는 어린 아이처럼 있는 그대로 내보이니 블랙코미디가 되고, 아이딘은 온갖 착하고 세련되고 있어보이는 포장지를 많이 달고 있으니 내 실상과 똑같은 리얼리티가 되는 것이다.

'나는 옳고, 나는 착하고, 나는 겸손하고, 나는 답을 알고 있고, 나는 의식있는 합리적인 사람이고....' 이 향연에 숨이 막힌다. '사실 너 입냄새 쩔거든. 입 좀 다물고 있을래'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어떨까? 할 수 없다. 자기 잇사이에 낀 고추가루를 보거나 빼내려면 거울 앞에 서야한다. 자기 인격의 구린내는 '정직한 성찰'이라는 뼈아픈 작업을 통과해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닐까? 싶지만 아니다. 말씀을 거울 삼아 자기를 정직하게 비추어 인격의 악취를 인정하고 애통하며 회개하는 사람을 나는 근자에 보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너 입냄새 쩔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성찰'이라는 칼날의 방향은 항상 '나'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너 성찰 좀 해'는 성립하지 않는 명령어이다. 거기에 해 줄 말은 오직 하나, '너나 잘 하세요' 두 영화가 내게 불편한 이유는 이것이다.

영화의 마델보스는 '현자'같다. 마가렛트 곁에서 적극적으로 치밀하게 속이는 자이다. 다른 어떤 속이는 자와 다르다. 마델보스는 마가렛트가 노래에 집착하는 이유를 안다. 남편의 애정과 관심이다. 자신의 노랠 들어줄 남편. 마델보스는 또 안다. 남편의 마음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연주회 시간에 늘 늦는 이유가 자동차 고장 때문이 아니라 애인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마가렛트의 노래를 견딜 수 없어 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마가렛트가 가장 원하는 남편의 사랑을 얻는 일은 요원하니 대체물이 필요한 것이다. 엄마 찾아 우는 아이에게 막대사탕을 물려주는 격이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음은 텅 비었지만 단맛에 취해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는 아이처럼 마가렛트는 살아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마델보스는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때문에 영화 후반 여차저차 하여 남편의 마음이 마가렛트를 향해 돌아서고 있을 때 속이기 놀이를 포기한다. 결국 우리가 붙들고 있는 자아 이미지란 상처받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당분간 지켜내는 보호막이기도 하다. 자아 이미지에 오래, 강하게 붙들려 있을수록 악취가 나고 듣기 싫은 괴성을 낼 수 밖에 없겠지만. 악취와 괴성 넘어 상처입기 쉬운 약함을 봐주는 눈,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아, 물론 언제까지 속고 속일 수는 없다. 마델보스는 때가 됐다 여겼고, 남편도 마가렛트를 받아들이고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자신의 노래를 들은 마가렛트는 쇼크로 쓰러지고 만다. (어쩌면 죽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결국은 자기 몫이다. 마델보스의 혜안과 극진한 충성으로도 어쩔 수 없는 것. 에니어그램 공부를 사랑하는 이유는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악취를 가진 존재야.'라는 전제 하에 성격이 가진 미덕과 더불어 악취를 가감없이 알려주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격적 입냄새를 맡겠노라고 자발적으로 찾아오시는 분들이 대부분이라 한 번을 만나도 진실한 만남이 주는 정서적 포만감이 있다. 적어도 강사인 내겐 그렇다. 그러나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세미나 전후로 무게감에 많이 눌린다. 마델보스의 정도의 혜안과 애정을 가지고 세미나를 이끌 수 있으면, 싶다. 영화 얘기하더니 어쩌다 기승전에니어그램? 이해해 주시라. 내일이 올해 첫 세미나라 내 맘이 그렇다.  









 

 


영화 <더 랍스터> 관람후기입니다.

스포 그 자체입니다.

영화 보실 분은 읽지 마세요.

이 리뷰만 믿고 재미를 기대하고 영화 보시면 실망하실 수 있습니다.

영화는 정말 좋습니다.


 

 

결혼을 안 해? 결혼을 안 하고도 네가 사람이야? 자, 마지막 기회를 준다. 데드라인까지 결혼을 안하면 넌 더 이상 사람이 아니므니다. 짐승이므니다. 오케이? 이러면 어떨까? <더 랍스터> 영화 속 현실이다. 솔로들은 잡혀간다. 커플 메이킹 호텔로. 주어진 45일 동안 짝을 찾아야 한다. 그 사이 커플이 되지 못하면 동물이 되어야 한다. (영화니까 봐줬다. 가장 기묘한 상상 맞네!)


현실 속 영화 같은 이야기는 어떻고? (까치까치 설날) 국수 언제 먹여줄 거니? 눈이 높은 거 아니니? 너 올해 몇이야? 어이구, 벌써 그렇게 먹었냐? 여자 나이 그 정도면 이제 볼 장 다 본 거다. 백 프로 맞는 사람은 없는겨. 대충 맞으면 그냥 결혼해. (그리고 그다음 추석) 넌 왜 결혼을 안 하니? 눈을 낮춰야 한다. 너도 한참 피더니 이제 얼굴에서 나이가 나오는구나. 백 프로는 없다. 대충 아무하고나 결혼해. 별거 없어. (다음 설날) 너 올해 몇이니? 왜 결혼을 안 하니? $^$&%*^^&^$@$%&*..................

 

영화 속 설정이 기괴하지만, 현실도 만만치는 않다. 맹목적으로 결혼을 강요하는 것 말이다. 대놓고 구조적으로 압박하는 영화 속 현실이 현실 속 영화 같은 명절 대화보다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본인 결혼생활이 그다지 행복하지도 않으면서 싱글에게는 끊임없이 '국수 얻어먹을 날'을 물으며 결혼을 강요한다. 결혼한다고 끝은 아니다. 신혼부터 첫아이 가질 때까지는 '좋은 소식'을 강요당하고, 좋은 소식으로 첫 아이를 얻은 후에는 '둘째는?' 바로 둘째 낳을 것을 종용받는다. 누구에게? 그냥 모든 사람에게! 엄마 친구, 친척, 교회에서 마주친 권사님..... 사람들은 왜 그렇게 뻔한, 질문으로 처자들을, 신혼들을, 젊은 부부들을 고문할까? 고문이라니! 나쁜 뜻이라고는 없으시단다. 나름대로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고 생각해주는 마음이다. 죄라면 스스로 '왜?'를 묻지 않는 죄이다. '왜'를 묻지 않고 습관적으로 인사하는 탓이고, 아무 생각 없이 관례를 따라 사는 탓이다. 결혼과 관련한 맹목적인 시간표, 이유를 막론하고 따라야 하는 생의 주기표는 영화 속 커플 메이킹 호텔과 다르지 않다. 당위로 주어지는 것에는 생기나 창조성이 없다. 커플 메이킹 호텔의 하루하루는 당위로 주어진 결혼이 얼마나 우습도록 생기가 없는지를 보여준다.

 

45일 안에 커플이 되지 못하면 동물이 되어야 하는데 주인공은 억지 커플 되기를 시도했다. 100번 소개팅 나가도 맘에 드는 사람 하나 만나기 어려운데 45일 만에 무슨 수로 제짝을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주인공은 데이비드는 그럴듯한 연기로 어렵사리 짝을 만나 커플을 이룬다. 아니나 다를까. 연기임이 들통 나고 실패! 제 발로 도망쳐 숲으로 들어간다. 숲에는 커플이 되지 못했으나 동물로 변하기를 거부하여 도주한 솔로들이 게릴라처럼 모여있다. 호텔에선 '커플 천국/솔로 지옥'이라면 숲에서는 '솔로 천국/커플 지옥'이다. 공동체 생활을 하되 사귀면 안 됨. 매우 엄격하다. 혹시 사귀다 뽀뽀하는 게 들키면 입술을 갈아버리는 정도?(잔혹한데 웃긴다)

 

일방적, 묻지마식 결혼 강요는 부당하고 인간적이지 못하다. 그러면 절대 솔로가 답인가? 그렇지 않다. 변비의 치료가 설사가 아니듯. 자유가 없는 삶이란 호텔이나 숲이나 거기서 거기. 사랑과 자유는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고귀한 덕목이다. 사랑과 자유를 패키지로 묶어 박탈당하기로는 호텔이나 숲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 결혼만을 지고의 목표로 사는 사람이나, 결혼제도가 부당하다며 삐딱한 자세로 (감정을 억압하고) 센 척하는 겁쟁이나. 변비든 설사든 건강한 황금색 변과 거리가 먼 극단인 것이다. 오로지 결혼, 오로지 독신. 둘 중의 하나가 아니라 제2의 길이 있다고 영화가 말해준다.

 

블랙 코미디처럼 건조한 영화이지만 사랑에 대한 중요한 힌트가 하나 심어져 있다. 커플이 되기 위한 유일한 조건이 있는데 둘 사이 닮은 점이 있어야 한다. 노래를 좋아한다든가, 코피를 자주 흘린다든가, 냉혈한이라든가. 쟝르에 상관없이 닮은 점 하나가 있어야 한다. 흔히 부부는 닮는다고 하는데 심리적으로는 그 반대라고 한다. 부부가 되어 닮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나와 닮은 구석이 있는 사람을 찾아 헤맨다는 것. 성격이 전혀 달라서 꽂혔다고 하지만 그런데도 서로 통하는 것이 있더라고 할 때 그 통하는 것, 닮음이다. 어쩌면 우리는 깊은 외로움을 끌어안고 우는 사자와 같이 나와 닮은 영혼을 찾아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정치적 입장만 달라고 다시 상종 못 할 사람으로 치부하는 우리 아닌가. 결국, 사랑에 빠짐은 '닮음'에 대한 공감일 수도 있다.


숲으로 도망친 데이비드는 커플맺기가 허락되지 않는 그곳에서 사랑에 빠진다. 근시라는 이유로 아내에게 버림받아 호텔로 잡혀 왔던 그의 앞에 매력적인 근시녀가 나타난 것이다. 아, 비밀연애란 얼마나 짜릿한가! 같은 직장, 같은 교회 안에서 몰래 하는 연애 정도가 아니라 뽀뽀하다 걸리면 입술을 갈아버리는 공포 속에서의 비밀연애라니! 당연히 발각된다. 솔로부대 잔혹한 대장에게 관용이란 없다. (대장역의 레아 세이두, 완전 반했음. 내가 다시 태어나면 안젤리나 졸리로 태어나려고 했는데 레아 세이두로 바꿨음. <007 스펙터>에서 이미 반했었음.) 근시녀의 눈을 아주 멀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둘의 닮음이 사라져버린 것. 데이비드는 실망은 했으나 포기하진 않는다, 정신으로 애인의 손을 이끌고 도시로 탈출한다. 그리고 충격적인 마지막 장면. 눈먼 애인을 카페에 앉히고 나이프를 들고 화장실로 간다. 상상 그대로이다. 닮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닮기도 결심한 것이다. 감동이다. 사랑은 닮는 것이다. 멀어버린 눈이 다시 근시될 수 없기에 그 반대의 방법을 선택한 것. 이런 의미로 사랑은 하향 평준화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버리고 내려오는 것. 그리하여 어떤 의미로는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더 아픈 것이다. 


결혼 비혼이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사랑이야. 이 바보야!




 

 

 

 

 

# 1

(뮤지컬 참 좋아하는데요. 제가 한 번 봐보겠습니다. 할 수가 있어야지 말이다.)

뮤지컬로 말할 것 같으면,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렇다 해도 말이다.

나중에 천국 가면 거기선 꼭 뮤지컬 배우 한 번 해보려고 한다.

그런 장래희망이 있다.

남편 덕에, 남편이 가진 직함 덕에 좋은 자리에 앉아서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를 봤는데....

아직 심장박동이 공연장 비트에서 못 벗어나고 있어서 이 시간까지 잠을 안 자고 있다. 내가.

나로서는 쉽게 누릴 수 없는 이런 감동을 선사(선물-gift-은혜)받은 것이 참 감사해서 말이다. 

진짜 감사했는데 어떻게 감사하단 인사도 제대로 못해서 송구하여 몸이 꼬인다.

헌데 생각해보면 그렇다. 내 돈 내고 봤으면 은혜가 아닌가?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은 애초 내 것이었나?

일찍이 김광석은 노래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에게 시와 노래는 애달픈 양식'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가 가진 '시와 노래'는 애초 자기 것이었나?

시와 노래야말로 신이 주신 정말 멋진 선물 아닌가?

초대로 본 뮤지컬, 만남, 오늘, 지금 여기.... 모든 것이 선물이고 은혜이다. 

나도 시가 있고 노래가 있으니 뮤지컬 창법으로 찬양 한 곡조 뽑는다.

 

사람이 무엇이관데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데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주의 손가락으로 지은신 주의 하늘과 주가 베풀어 두신 달과 별 내가 보오니......

 

 

# 2

'됐다마, 고마해라마'

누군가 이렇게 뒤통수에 대고 말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갖고 산다.

그만 따지고, 그만 읽고, 그만 성찰하고 남들 사는대로 살아라마.

(누가 자꾸 이렇게 말하는 거지?)

늘 약간씩 기분이 안 좋다.

내가 너무 생각이 많은가? 너무 까칠한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너무 삐딱해?

이상주의자?

오늘 기사 돈키호테가 노래 한 자락으로 엄청난 지지를 해주었다.

 

쓰레기 더미에서 보물을 찾는 것이 미쳐 보입니까.

아니오.

너무도 똑바른 정신을 가진 것이 미친 것이 될 수 있다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미친 짓은

현실에 안주하고 꿈과 이상을 포기하는 것이라오

 

 

# 3

어젯밤에........ 나 꿍꼬또.  

그런데 어젯밤에 꾼 꿈과 오늘 본 뮤지컬이 묘하게 겹쳐서 말이다. 그것참 묘할쎄!

꿈이 내 속에서 나온 거라 그 누구도 아닌 나, 지금의 나를 보여주고 안내한다고 믿는데.

어제 꾼 꿈에 종일 생각하다 저녁에 공연을 보러 갔다. 

가는 차 안에서도 남편에게 꿈 얘기를 했다. 

어머 어머, 왠일이니! 기사 돈키호테님이 노래로 꿈해몽을 해주네.

라만차의 남자가 합정동의 여자에게 꿈에 대한 노래로 꿈해몽을 해줬다.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싸움, 이길 수 없어도

슬픔, 견딜 수 없다 해도

길은 험하고 험해도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힘껏 팔로 뻗으리라

 

이게 나의 가는 길이요

희망조차 없고 또 멀지라도

멈추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따르리라

 

내가 영광의 이 길을 진실로 따라가면

죽음이 나를 덮쳐와도 평화롭게 되리

 

세상은 밝게 빛나리라 이 한 몸 찢기고 상해도

마지막 힘이 다할 때까지

가네! 저 별을 향하여

 

 

 

 

 

 

 

 

 

 

 

 

 

 

 

 

 

 

 

 

 

 

 

 

 

 

 

영화 <앙:단팥 인생 이야기> 관람 후기입니다. 

영화 참 좋구요. 아직 상영 중이에요.
좋은 영화라니 믿고 봐야겠다, 하시는 분은 이 글은 읽지 마세요.
일단 청순한 뇌를 가지고 영화관에 가셔서 영화를 먼저 즐기세요.

 

 

이런 성격에, 좋은 벗을 많이 가진 내가 너무 자주 외로워하는 건 아닐까. 자중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중한다고 자중이 되는 게 아니어서, 좋은 사람이 있다고 없어지는 외로움도 아닌 듯하여 '이거 어쩌나' 이름 붙이기를 미루고 있었다. 그랬던 어느 토요일 오전, 나의 일주일을 일주일 되게 하는 스케쥴 하나. 한겨레 토요판을 열어 <정희진의 어떤 메모>를 찾았다.  제목이 '외로움'. '내가 진짜 외롭구나. 이제 헛 게 다 보이네.' 헛 글자가 보인 게 아니라 정말 제목이 그러했다.

 

금요일 저녁. 비까지 내리니 라디오는 감상(感傷)으로 넘친다. 외로운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내가 외로움에 대해 무슨 견해가 있을까마는, 분명한 것은 나 같은 타입은 외로움을 견뎌야지,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다가는 우리 엄마 말대로 “인생 망조의 지름길”이다. 외로움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책이 있는데 그들은 너무 쌈박하다. 분석하고 이해하면 뭐하나. 그들이 가버린 후(읽고 난 후)에도 외롭긴 마찬가지인데.

 

라면서 김영갑의 <그 섬에 내가 있었네> 읽은 감회를 털어 놓는다. ('정희진의 어떤 메모'라는 꼭지로 말하자면 '리뷰'이지만 단지 책의 이야기로 읽히는 적이 없다. 그야말로 그 누구도 아닌 정희진으로서 다시(re) 읽어내기(view) 때문일 것이다. 부럽다 말하느니 존경한다 하겠다.)  이 글을 읽고 나 역시 외로움에 대해 무슨 견해를 가질 깜냥도 아니지만 그냥 조금 외로워하기로 했다.

 

모처럼 맘껏 늘어져도 되는 날이 생겨서 영화 일 편 하러 광화문에 나갔다. 내 기분이 가라앉으면 늘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남편 유죄, 쾅쾅쾅' 하는 형국이다. 전혀 그런 일이 아니다는 걸 알리기 위해 '나 이런 영화 보러가. 단지 희망을 얘기하는 영화라는 이유로 선택했어' 남편에게 보고를 했다. '내가 외로운 건 당신 탓이 아니야' 라는 뜻이었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싶었고, 어떻게 생겨 먹었든 희망이란 걸 보든지 듣든지 하고 싶었다. <앙:단팥 인생 이야기>는 그걸 보여줄 것 같았다.

 

한센병으로 평생 담 안에 갇혀 지낸 할머니, 한 번의 실수로 감옥에 갇혔다 나와 작은 도리야키 가게를 지키는 또 다른 감옥에 갇힌 젊은 남자, 가난이라는 새장에 갇혀 축쳐진 날개로 오락가락 하는, 제가 키우는 카나리아 같은 여학생. 세 주인공 모두 고립되어 외롭고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다. 뭐야, 희망이 어딨어? 어딨긴 어딨어? 희망이 없는 곳에서 피어나는 게 희망이지.

 

가장 긴 세월 외로웠을테고, 누구보다 절망적으로 절망적이었을 도쿠에 할머니가 삶는 팥으로부터 영화의 희망은 피어난다. 보기에도 민망한 일그러진 손으로 삶아서 만들어내는 도리야키 안에 들어갈 팥이 새로운 희망을 가져오고, 역시나 희망 뒤에는 더 깊은 좌절이 찾아온다. "단팥을 만들 때 나는 항상 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것은 팥이 보아왔을 비오는 날과 맑은 날들을 상상하는 일이지요" 도쿠에 할머니가 처음 팥을 삶으며 했던 말이다. 영화를 보는 나도, 도리야키를 만들던 젊은 남자도, 여학생도 할머니가 살면서 보아왔을 비오는 날과 맑은 날을 상상하며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된다. 물론 상상하자니 먹먹해지고 눈물이 난다. 정희진 선생님의 위의 글 마지막 부분이다.

 

김영갑은 젊었을 적 죽고 싶어 했지만, 난치병 선고를 받자 생명과 평화에 대해서 썼다. 그것은 기다림이다.(207쪽) 그는 병이 악화되자 “누군가에게 길을 묻는 일도 없으리라”고 다짐한다. 빠른 길은 없다. 외로움은 견디는 것이다. 외로움은 시간을 참는 것이다. 죽었다 깨어나는 일이다.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그가 말한 “나는 수없이 보아왔다. 다리 한쪽이 잘린 노루가 뛰어다니고, 날개에 총상을 입고도 살아남은 꿩”의 존재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외로움은 마음이 조금 간절한 상태다. 취약함은 외로움의 일부일 뿐이다. 그는 외로움‘은’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의 고독은 고스란히 화면으로 남았다. 작가의 일상이 이토록 작품 자체인 경우가 있을까. 사진이 그다.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놀라움은 그가 외로움을 극복해서가 아니라 그 외로움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외로움은 마음이 조금 간절한 상태이고, 취약한 상태임에 공감하지만 외로움이 '강하다'는 것은 잘 모르겠다. 진정한 강함은 외로움에서 나온다는 걸 머리로 공감할 수는 있다. 머리로 공감되지만 가슴으로는 모르겠는다는 것은 외로움의 시간을 묵묵히 참아본 경험이 없어서일까. 날개에 총상을 입고도 살아남는 꿩의 존재를 모르는 것처럼 기다리고 견뎌볼 줄을 몰라서.

도쿠에 할머니가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을 향해, 나뭇잎을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이 마음에 깊이 남아있다. 길을 가다 건너편 인도를 걷고 있는 반가운 친구를 발견한 표정으로 환히 손을 흔드는 모습. 평생 단절되어 살아온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지 짐작이 가는 장면들이다. 외로움은 그저 견디는 것임을, 다른 길이 없음을 도쿠에 할머니는 누구보다 빨리 깨달았을 터. 헨리 나우웬 신부님의 <영적 발돋움>의 한 챕터가 생각난다. 폐쇄된 외로움(loneliness)에서 열린 고독(solitude)으로의 발돋움. 외로움에 던져져 피할 길 없다며 뒹굴고 자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외로움의 굴 안으로 발을 내디딜 때 상상하지 못했던 카타콤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느낌으로 읽었었다. 글을 쓰다 말고 책을 찾아 뒤적였다.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면 밑줄 그어놓은 부분들을 읽었다.

 

자신의 안식 없는 외로움을 마음의 고독으로 바꾸면 바꿀수록 그는 자신의 내면의 중심에서 이 세상의 고통을 발견하고 거기에 반응할 수 있습니다.

 

영화 초반에 도쿠에 할머니가 벚꽃 흩날리는 거리를 걸어 이상한 긴장감을 고조시키며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도리야키 가게로 계획적인 접근을 한 것이다.

 

"평생 담장 밖엔 못 나갔다는 그런 눈빛이었지 .. "

 

평생 담장 밖에 못 나가본 할머니가 도리야키 만드는 젊은이를 우연히 본 처음 본 느낌이란다. 외로운 사람이 외로운 사람을 알아본 것이고, 갇혀본 사람이 고립된 사람을 알아본 것이다. 헨리 나우웬 식으로 말하자면 할머니 외로움의 끝은 고독이 되었고, 그 고독의 중심으로부터 세상의 고통을 발견하고 반응하는 눈이 생긴 탓이리라. 정희진, 김영갑, 도쿠에 할머니, 헨리 나우웬 님. 총동원 하여 내 외로움에 관심을 가져주니 나 역시 외로움을 피하지 않고 견디고 공감할 밖에....

 

 

 

* 관람 부작용 또는 후유증 :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면 어느 새 고개를 쳐들고 손을 흔드는 나를 발견.

 

 

 

 

 

현승아,

영화 보고 나와서 네가 그랬지?

"좋은 영화라고 하지만 결국 다 똑같애. 주인공들은 여러 번 총을 맞아도 안 죽고, 잠깐 나오는 경찰이나 그런 사람은 딱 한 발만 맞으면 바로 죽어"

영화 어땠냐고 물었던 아빠가 의외의 대답에 놀랐나봐.

잠시 후 차 안에서 아빠가 그랬지.

"현승이가 영화 별로라고 해서 아빠 마음이 좀 아프다"

실은 엄마도 비슷한 심정이었는데 한 마디 거들 힘조차 없더라.

그렇게 지나갔지만 다시 생각하니 현승이가 아빠 말의 뜻을 이해했을까 싶어.

 

엄마 아빠의 고질병, 교훈병 증세였을 거야.

영화를 봤으면 뭔가 교훈을 얻어야지, 특히 이런 영화라면.

그리고 그 교훈의 내용은 엄마 아빠가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어야 한다는 망상, 그런 병이지 뭐.

엄마 아빠는 너희가 그 무엇보다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거든.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이런 영화에서 어떤 식으로든 감동 또는 자극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나봐.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

하여튼, 그렇고. 

엄마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고 싶네.

 

엄마는 대학시절 그렇게 열정적으로 보내질 못했어.

여기도 찔끔 저기도 찔금, 발을 담궈보려 했다가 에잇, 성에 안 차.

강의 땡땡이 치고 혼자 잔디밭에 앉아 책이나 읽으며 그렇지 지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의 지도가 엄청나게 달라진 시기인 건 분명하지.

엄마가 대학에 가서 알게 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반민특위'였단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 잠시 나왔었지?

대학 1학년 5월, 교정에 전시된 광주민주화항쟁 사진도 꽤 충격이었지만,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란 책에서 접한 반민특위에 관련된 내용은 처음에 소설인가 싶었어.

중고등학교 때 제대로 배워보지 못한 조국의 아픈 역사였지.

심장이 뛰고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았어. 

그후 엄마는 아픈 우리 나라를 생각할 때마다 '그때 만약 반민특위 활동이 계획대로 추진되었더라면, 친일파가 명확히 색출되고 정리되었더라면..... 그랬더라며'  하는 가정을 수없이 해봤어.

그러나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 를 백만 번 되뇌어도 소용없는 일이지.

그래 소용없는 일이야.

 

요즘 엄마는 '소용없음'에 꽂혀 있어. 

많은 것들이 소용없이 느껴지는 병에 걸렸다.

누나가 영화 보고나서 미쳐있는 하정우(하와이 피스톨)의 하정우의 대사를 읊조리고 싶어.

"매국노 몇 명 죽인다고 독립이 되나?"

내 마음 상해가며 사랑하고 기다려준다고 사람이 바뀌나?

피케팅 한 시간 한다고 세월호의 진실이 밝혀지나?

선거한다고 세상이 달라지나?

내 아이 하나 학원 안 보낸다고 교육 지옥이 천국 되나?

뭐 이런 버젼으로 얼마든지 베리에이션 연주가 가능한 것 같아.

영화든 현실이든 결국 승리는 매국노의 몫인데, 하나 둘 제거한다고 무슨 좋은 세상이 오겠어?

 

엄만 진짜 하정우만은 살기 바랬거든.

상해 미라보에 안옥윤과 마주앉기를 정말 정말 바랬어.

그런데 결국 죽더라.

너는 그 장면이 싫었지?

하정우가 총 몇 발을 맞고도 계속 일어나는 그 장면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짜증났을 거야.

엄마는 그 장면에서 눈물이 쏟아졌어.

결국 죽을 목숨이지만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나는 하와이 피스톨의 표정에서 뭔가 읽었거든.

매국노 몇 명 죽인다고 독립이 되는 건 아니지만 멋진 주인공은 끝내 포기하면 안되는 거야.

쓰러져 다시 일어나고 또 다시 일어나 염석진의 가슴에 꽂은 칼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지?

염석진은 살았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 경찰 고위직에 올라 떵떵거리고 살아.

심지어 그 칼자국을 독립운동의 흔적으로 둔갑시키지.

(아, 광복 70주년 오늘에도 얼마나 많은 염석진과 강우석과 그 후손들이 떵떵거리고 있는지...)

엄마도 주인공이 절대 안 죽는 미션 임파서블식 영화 싫어하지만 이 영화, 이 장면은 좀 달랐어.

결국 죽겠지만, 맞아도 맞아도 죽지 않아야 한다는 결연한 마음이 되었어.

그런 많은 이들의 총맞고 살아나고 칼맞고 살아난 많은 분들의 일어섬이 있어 그나마 우리가 이런 세상을 살고 있는 거야.

 

오히려 영화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장면은 마지막 장면이지 뭐야.

"16년 전이 임무, 염석진이 밀정이면 죽여라. 지금 실행합니다."

우리의 안옥윤과 명우가 염석진을 징벌하는 것 말이야.

역사 속에서 꼭 실행되어야 할 임무였지만 70년이 지났어도 그 임무는 미완이야.

그래서 현승아, 그 미완의 임무는 엄마 아빠의 몫이고 너희들의 몫이라고 생각해.

엄마가 역사의식이란 말을 썼지?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이땅에 오신 예수님이 다윗의 가족나무 안에 들어 있으신 거 알아?

현승이 한 사람의 역사는 가족의 역사와, 가족의 역사는 민족의 역사와, 그리고 인류의 역사와 별개의 것이 아니야.

결국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덜렁 '김현승과 하나님'만 떼내어 생각할 수 없다는 거야.

 

우리는 흐르고 흐르는 역사의 강 어느 언저리를 살고 있어.

이 강이 어디로부터 흘러 어디로 가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고, 공부해야 해.

그것은 현승이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사는 것과 무관하지 않단다.

현승이가 좋아하는 오달수 아저씨가 안옥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 기억나?

어이, 삼천 불. 우리 잊으면 안돼!

현승아,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와 그 역사의 뒤안길에서 생명과 정의를 위해서 죽어간 분들을 잊으면 안돼. 

또 권력을 무기삼아 거짓으로 정의를 위장하는 사람들을 '나와 상관없다' 지나쳐 버리면 안돼.

 

이 글을 쓰면서 엄마도 다시 힘을 내려고 해.

'소용없음 병'을 이기고 다시 일어나 보려고. 

결국 하정우 아저씨처럼 죽겠지만, 다시 일어나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려고.

잊으면 안돼.

아픈 역사를 잊으면 안되고,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잊으면 안돼.

그래, 잊으면 안돼.

 

 

 

 

 

 

 

 

 

 

폭풍 강의로 한 주간을 보냈다. 정신이 들어서 보니 현승이와 둘이 텅빈 거실에 앉은 금요일 밤이다. 기다란 아빠, 2등으로 기다란 채윤이가 각각 수련회와 캠프 일정으로 집을 비웠다. 기다란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탓인지 집안이 유난히 조용하고 휑하다. 피곤에 절어서 책에도 음악에도 폰게임에도 현승이와의 수다에도 집중할 수가 없다. 엄마, 내일 아침에 일찍 [인사이드 아웃] 볼까? 그냥 우리 둘이 먼저 보자. 궈래? 좋아. 조조로 예매하자. 토요일 아침 7시 50분, 6천 원 티켓을 예매했다. 밤 10시가 되기 한참 전인데 '우리 일찍 잘까? 내일 영화 제대로 보려면...' ZZZZZZZZZZZ

 

관객이 열 명 남짓한 극장에서 에어콘 추위에 덜덜 떨면서 관람했다. 잠을 깬지 얼마 안 된 탓인지 영화가 심지어 몽환적으로 다가왔다. 현승이 몰래 울었다. 조금 울다가 어떤 장면에서 많이 울었다. 기억의 구슬 저장고에서 구슬 하나가 튀어나왔고 슬픔이가 재빨리 영상 재생버튼을 눌렀나보다. 사실 현승이의 영화평이 몹시 궁금했지만 마지막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 전에 마음을 접었다. 현승이 감상평 물어보지도 말자. 이 영화를 이해하기엔 아직 기억의 저장고가 헐렁해. 채윤이? 채윤이는 조금 나을 수도. 우정의 섬이 무너지고 가족 섬이 무너지고 어릴 적 쌓았던 것들이 마구 무너지며 감정의 불들이 나갔던 기억이 최근일테니까. 그렇다 해도 쉽게 이해되진 않을 거야. 기억이란 한 30년 이상 묵혔다 꺼내야 제 맛이거든.

 

아이들이 보고 재밌어 하긴 어려울 듯하다. 기억의 구슬 저장고가 꽉 찬 어른들, 그 중에서도 가끔씩 기쁨이와 슬픔이가 합작해서 내보내는 구슬에 민감한 어른들은 보다 울다 말을 잃을 듯. [인사이드 아웃]을 보고 먹먹해지거나 덤덤하거나. 우리 나라 사람들은 둘 중에 하나일 거야. 

 

난 '음악심리치료'를 전공했는데 어쩌다 '음악'은 잊고 '심리치료'만 만지작거리고 있냐. 어쩌다 내적 여정을 안내하는 에니어그램에 꽂혀서 '내면을 바라봐, 내면을 바라봐' 허경영 코스프레를 하고 있냐. 내면을 바라봐, 내면을 바라봐, 인사이드 본부로 가 기쁨이 슬픔이 소심이 버럭이 까칠이를 만났더니 이 녀석들 결국 나를 기억 저장소로 데려가 던져 놓고 도망했다. 야, 야 이놈들아! 나 꺼내줘. 나 음악심리치료 전공인데, 왜 자꾸 나를 '기억심리치료사' 만들려고 해!!!

 

(얘들아, 고마워. 실은 나 이거 좋아해.) 

기억 저장소를 정리하고 청소하고,

기쁨이의 노란 구슬을 눈물로 닦아 슬픔이의 파란구슬 만드는 작업을 좋아한다.

그리햐여 기쁨과 슬픔이 어우러져 초록 구슬이 되게 하는... 아니

한 구슬이 한 가지 색인줄 알았으나 알고보니 노랑, 파랑, 초록, 빨강, 보라가 함께 어우러진 기억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사랑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이런 작업을 좋아한다.

 

 

 

 

[커피 한 잔과 함께하는 에니어그램]의 일부분이다.

노란 색인 줄 알았으나 파란 색이었던,

기쁨이기만 했던 어린 시절의 다른 면도 볼 수 있었던 내 기억의 구슬 하나.

이 구슬은 '진리'가 되어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었다.

그리고 거듭난 나날은 아침마다 새롭고 또 새롭고 있다.

 

 

 

어린 시절 작업이라면 나도 할 만큼 했잖아 하면서 교만한 마음도 있었어. 어린 시절이 다 그렇지 뭐. 너무 인위적으로 어린 시절의 경험을 끌어내고 짜 맞추는 거 아냐? 하면서 방어하기도 했던 것 같애. 그러면서 여러 내적 여정 훈련을 받았지. 내게 어린 시절 그러면 아직도 엄마가 해주시는 레퍼토리가 있어. ‘너처럼 사랑받고 큰 애는 없다. 너를 늦게 낳아 가지고, 느이 아버지가 자다가도 일어나서 불 켜고 앉아 너를 들여다보고 그랬단다. 내가 너를 안아볼 새가 없었다. 하도 너를 이뻐하는 사람이 많아서…….’ 이 말이 내 의식에 새겨져 있어. 그래서 '나는 엄청 사랑받고 자란 아이야' 라고 머리로 믿고 있었던 거야. 의심의 여지없이 말이다. 헌데, 내 마음과 몸은? 이런 질문과 함께 이제껏 눌러놨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봇물처럼 생각나는 시점이 있더라. 더 중요한 건 기억과 함께 떠오른 당시의 느낌이야.

 

동네 친구 집에 갔던 기억이 나. 남자 애였는데 친구가 무슨 말을 하면서 막 까불었어. 그랬더니 친구의 엄마가 ‘저런 미친놈. 내가 못살어.’ 하면서 고개를 젖히고 웃으시는 거야. 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그 장면이 먼저 선명하게 떠올라. 우리 부모님을 비롯해서 동네 사람 모두 업신여기는 집이었지만 어린 나는 그런 엄마와 아들 사이가 부러웠던 거야. 기억해보면 목사님이었던 아버지는 교인들 앞에서, 아니 교인들 없는 곳에서도 사사로운 감정으로 가족을 대하지 않으셨어. 엄마? 내 기억 속 엄마는 ‘사모님’일 뿐이었던 것 같애. 엄마는 언제나 곁에 없었다고 느껴져. 교인들 중에 아픈 사람, 힘든 사람을 찾아 심방을 가 계셨지. 그리고 집에 오시면 남편이기 이전에 ‘주의 사자’이신 목사님을 위해 열심히 밥을 하셨고. 밤이 되면 철야기도를 위해 교회당으로 가셨어. 나는 알아.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는 것을. 그렇지만 상황을 통합적으로 볼 수 없는 어린 나는 그저 ‘차가운 아버지’와 ‘부재중인 엄마’로 밖에는 인식할 수 없었다는 거야. 아주 가끔 나와 동생이 아버지가 쓰던 이북 사투리를 흉내 내고 온 몸을 던져 익살을 떨면 아버지가 아주 살짝 웃으셨어. 나는 아주 살짝 웃을락 말락 하는 그 웃음만 보아도 ‘나를 사랑한다는 뜻’인줄 알고 좋아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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