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입냄새, 이 사이에 낀 고추가루를 말해줘야 하는 일, 민망한 일이다. 괜히 혀를 더듬어 내 입속만 단속해보다 '나중에 거울 보면 알겠지' 포기하게 된다. 너 입냄새 구려, 너 음치인 것 알아, 우리 사무실 사람들 모두 너 때문에 힘들어.... 우린 다 아는데 너만 모르는 것 같아. 말하기 어려운 말들이다. 


마가렛트 여사는 음악을 사랑하고 노래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지만 음치이다. 이 사실을 본인만 모른다.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 마가렛트 여사는 돈이 무지 많다. 음악 클럽의 후원자이기도 하니 음악을 사랑하는 고고한 클럽 회원들은 박수치며 그녀의 노래에 열광해준다. 그녀의 노래가 시작되면 입냄새 나는 친구 앞에서 숨을 참듯 견디다 노래가 끝남과 동시에 참던 숨을 몰아쉬듯 '브라보!'를 외친다. 물론 조롱 섞인 브라보이다. 그러니까 '마가렛트 여사의 감출 수 없는 비밀'이란 마가렛트 여사만 아는 비밀이 아니라 그녀만 모르고 세상은 다 아는 비밀인 셈이다. 이 비밀을 이용해 대놓고 속이고 이용하는 사람도 있다. 젊은 기자와 삽화가는 신문에 찬사를 보내는 기사를 쓰고 마가렛트 여사를 이용해먹으며 뒤에서 낄낄거린다. '알면서 속아준다'라는 말이 있는데 사람들은 알면서 속아준다기 보다 모두 한통속 되어 마가렛트 여사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중 가장 적극적이고 창조적으로 속이는 사람은 마가렛트 여사의 비서이며 음악 보좌관 격인 마델보스이다.


채윤이와 함께 조조로, 극장을 전세내어 본 영화이다. 시놉시스와 몇 장면의 사진을 보고 '키키키, 재밌겠다. 볼래' 했던 채윤이는 중간에 몸을 베베 꼬았다. 코미디인 줄 알았는데, 코미디는 코미딘데 블랙코미디였던 것. 웃픈 영화여서 힘들었던 것. 그런데 실화 바탕의 영화란다. 그렇다. 실화. 실화 바탕이란 사실을 알고 나서 채윤이의 호기심에 다시 발동이 걸렸다. 블랙 코미디는 실화이고 우리들의 실제 이야기는 코미디이다.

사실 내 입냄새를 나만 모르지 내 친구들은 다 맡고 고통스러워 한다. 내 인격의 악취는 나만 모를 뿐 너는 안다. 이것이야말로 실화이다. 내가 누군가를 떠올리며 '걔는 참 이것만 고치면 참 좋을텐데....'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누군가도 나를 떠올리며 명쾌하게 분석할 것이다. 다만 서로들 암묵적으로 참아주는 것이다. '너 입냄새 나' 말을 굳이 말을 해서 내 이미지 구길 필요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영화 <윈터 슬립>이 생각났다. 주인공 캐릭터가 극단적으로 다른 것은 단지 영화의 쟝르가 다르기 때문일 터. 내게 오는 메시지는 동일하다. 스스로 일궈낸 자아 이미지에 어떻게 무지막지하게 전폭적으로 속고 있는지를 마가렛트 여사가 보여주고, 그 속임수의 속임술이 얼마나 정교한지를 <윈터 슬립>의 아이딘이 보여준다. 우습도록 화려한 마가렛트의 의상과 온화하며 지적이고 선하기까지 한 아이딘의 메마른 웃음과 긴장된 말투가 같은 메타포로 느껴진다. 마가렛트는 어린 아이처럼 있는 그대로 내보이니 블랙코미디가 되고, 아이딘은 온갖 착하고 세련되고 있어보이는 포장지를 많이 달고 있으니 내 실상과 똑같은 리얼리티가 되는 것이다.

'나는 옳고, 나는 착하고, 나는 겸손하고, 나는 답을 알고 있고, 나는 의식있는 합리적인 사람이고....' 이 향연에 숨이 막힌다. '사실 너 입냄새 쩔거든. 입 좀 다물고 있을래'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어떨까? 할 수 없다. 자기 잇사이에 낀 고추가루를 보거나 빼내려면 거울 앞에 서야한다. 자기 인격의 구린내는 '정직한 성찰'이라는 뼈아픈 작업을 통과해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닐까? 싶지만 아니다. 말씀을 거울 삼아 자기를 정직하게 비추어 인격의 악취를 인정하고 애통하며 회개하는 사람을 나는 근자에 보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너 입냄새 쩔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성찰'이라는 칼날의 방향은 항상 '나'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너 성찰 좀 해'는 성립하지 않는 명령어이다. 거기에 해 줄 말은 오직 하나, '너나 잘 하세요' 두 영화가 내게 불편한 이유는 이것이다.

영화의 마델보스는 '현자'같다. 마가렛트 곁에서 적극적으로 치밀하게 속이는 자이다. 다른 어떤 속이는 자와 다르다. 마델보스는 마가렛트가 노래에 집착하는 이유를 안다. 남편의 애정과 관심이다. 자신의 노랠 들어줄 남편. 마델보스는 또 안다. 남편의 마음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연주회 시간에 늘 늦는 이유가 자동차 고장 때문이 아니라 애인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마가렛트의 노래를 견딜 수 없어 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마가렛트가 가장 원하는 남편의 사랑을 얻는 일은 요원하니 대체물이 필요한 것이다. 엄마 찾아 우는 아이에게 막대사탕을 물려주는 격이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음은 텅 비었지만 단맛에 취해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는 아이처럼 마가렛트는 살아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마델보스는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때문에 영화 후반 여차저차 하여 남편의 마음이 마가렛트를 향해 돌아서고 있을 때 속이기 놀이를 포기한다. 결국 우리가 붙들고 있는 자아 이미지란 상처받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당분간 지켜내는 보호막이기도 하다. 자아 이미지에 오래, 강하게 붙들려 있을수록 악취가 나고 듣기 싫은 괴성을 낼 수 밖에 없겠지만. 악취와 괴성 넘어 상처입기 쉬운 약함을 봐주는 눈,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아, 물론 언제까지 속고 속일 수는 없다. 마델보스는 때가 됐다 여겼고, 남편도 마가렛트를 받아들이고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자신의 노래를 들은 마가렛트는 쇼크로 쓰러지고 만다. (어쩌면 죽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결국은 자기 몫이다. 마델보스의 혜안과 극진한 충성으로도 어쩔 수 없는 것. 에니어그램 공부를 사랑하는 이유는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악취를 가진 존재야.'라는 전제 하에 성격이 가진 미덕과 더불어 악취를 가감없이 알려주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격적 입냄새를 맡겠노라고 자발적으로 찾아오시는 분들이 대부분이라 한 번을 만나도 진실한 만남이 주는 정서적 포만감이 있다. 적어도 강사인 내겐 그렇다. 그러나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세미나 전후로 무게감에 많이 눌린다. 마델보스의 정도의 혜안과 애정을 가지고 세미나를 이끌 수 있으면, 싶다. 영화 얘기하더니 어쩌다 기승전에니어그램? 이해해 주시라. 내일이 올해 첫 세미나라 내 맘이 그렇다.  









  1. 2016.04.04 11:13

    비밀댓글입니다

 

 


영화 <더 랍스터> 관람후기입니다.

스포 그 자체입니다.

영화 보실 분은 읽지 마세요.

이 리뷰만 믿고 재미를 기대하고 영화 보시면 실망하실 수 있습니다.

영화는 정말 좋습니다.


 

 

결혼을 안 해? 결혼을 안 하고도 네가 사람이야? 자, 마지막 기회를 준다. 데드라인까지 결혼을 안하면 넌 더 이상 사람이 아니므니다. 짐승이므니다. 오케이? 이러면 어떨까? <더 랍스터> 영화 속 현실이다. 솔로들은 잡혀간다. 커플 메이킹 호텔로. 주어진 45일 동안 짝을 찾아야 한다. 그 사이 커플이 되지 못하면 동물이 되어야 한다. (영화니까 봐줬다. 가장 기묘한 상상 맞네!)


현실 속 영화 같은 이야기는 어떻고? (까치까치 설날) 국수 언제 먹여줄 거니? 눈이 높은 거 아니니? 너 올해 몇이야? 어이구, 벌써 그렇게 먹었냐? 여자 나이 그 정도면 이제 볼 장 다 본 거다. 백 프로 맞는 사람은 없는겨. 대충 맞으면 그냥 결혼해. (그리고 그다음 추석) 넌 왜 결혼을 안 하니? 눈을 낮춰야 한다. 너도 한참 피더니 이제 얼굴에서 나이가 나오는구나. 백 프로는 없다. 대충 아무하고나 결혼해. 별거 없어. (다음 설날) 너 올해 몇이니? 왜 결혼을 안 하니? $^$&%*^^&^$@$%&*..................

 

영화 속 설정이 기괴하지만, 현실도 만만치는 않다. 맹목적으로 결혼을 강요하는 것 말이다. 대놓고 구조적으로 압박하는 영화 속 현실이 현실 속 영화 같은 명절 대화보다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본인 결혼생활이 그다지 행복하지도 않으면서 싱글에게는 끊임없이 '국수 얻어먹을 날'을 물으며 결혼을 강요한다. 결혼한다고 끝은 아니다. 신혼부터 첫아이 가질 때까지는 '좋은 소식'을 강요당하고, 좋은 소식으로 첫 아이를 얻은 후에는 '둘째는?' 바로 둘째 낳을 것을 종용받는다. 누구에게? 그냥 모든 사람에게! 엄마 친구, 친척, 교회에서 마주친 권사님..... 사람들은 왜 그렇게 뻔한, 질문으로 처자들을, 신혼들을, 젊은 부부들을 고문할까? 고문이라니! 나쁜 뜻이라고는 없으시단다. 나름대로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고 생각해주는 마음이다. 죄라면 스스로 '왜?'를 묻지 않는 죄이다. '왜'를 묻지 않고 습관적으로 인사하는 탓이고, 아무 생각 없이 관례를 따라 사는 탓이다. 결혼과 관련한 맹목적인 시간표, 이유를 막론하고 따라야 하는 생의 주기표는 영화 속 커플 메이킹 호텔과 다르지 않다. 당위로 주어지는 것에는 생기나 창조성이 없다. 커플 메이킹 호텔의 하루하루는 당위로 주어진 결혼이 얼마나 우습도록 생기가 없는지를 보여준다.

 

45일 안에 커플이 되지 못하면 동물이 되어야 하는데 주인공은 억지 커플 되기를 시도했다. 100번 소개팅 나가도 맘에 드는 사람 하나 만나기 어려운데 45일 만에 무슨 수로 제짝을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주인공은 데이비드는 그럴듯한 연기로 어렵사리 짝을 만나 커플을 이룬다. 아니나 다를까. 연기임이 들통 나고 실패! 제 발로 도망쳐 숲으로 들어간다. 숲에는 커플이 되지 못했으나 동물로 변하기를 거부하여 도주한 솔로들이 게릴라처럼 모여있다. 호텔에선 '커플 천국/솔로 지옥'이라면 숲에서는 '솔로 천국/커플 지옥'이다. 공동체 생활을 하되 사귀면 안 됨. 매우 엄격하다. 혹시 사귀다 뽀뽀하는 게 들키면 입술을 갈아버리는 정도?(잔혹한데 웃긴다)

 

일방적, 묻지마식 결혼 강요는 부당하고 인간적이지 못하다. 그러면 절대 솔로가 답인가? 그렇지 않다. 변비의 치료가 설사가 아니듯. 자유가 없는 삶이란 호텔이나 숲이나 거기서 거기. 사랑과 자유는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고귀한 덕목이다. 사랑과 자유를 패키지로 묶어 박탈당하기로는 호텔이나 숲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 결혼만을 지고의 목표로 사는 사람이나, 결혼제도가 부당하다며 삐딱한 자세로 (감정을 억압하고) 센 척하는 겁쟁이나. 변비든 설사든 건강한 황금색 변과 거리가 먼 극단인 것이다. 오로지 결혼, 오로지 독신. 둘 중의 하나가 아니라 제2의 길이 있다고 영화가 말해준다.

 

블랙 코미디처럼 건조한 영화이지만 사랑에 대한 중요한 힌트가 하나 심어져 있다. 커플이 되기 위한 유일한 조건이 있는데 둘 사이 닮은 점이 있어야 한다. 노래를 좋아한다든가, 코피를 자주 흘린다든가, 냉혈한이라든가. 쟝르에 상관없이 닮은 점 하나가 있어야 한다. 흔히 부부는 닮는다고 하는데 심리적으로는 그 반대라고 한다. 부부가 되어 닮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나와 닮은 구석이 있는 사람을 찾아 헤맨다는 것. 성격이 전혀 달라서 꽂혔다고 하지만 그런데도 서로 통하는 것이 있더라고 할 때 그 통하는 것, 닮음이다. 어쩌면 우리는 깊은 외로움을 끌어안고 우는 사자와 같이 나와 닮은 영혼을 찾아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정치적 입장만 달라고 다시 상종 못 할 사람으로 치부하는 우리 아닌가. 결국, 사랑에 빠짐은 '닮음'에 대한 공감일 수도 있다.


숲으로 도망친 데이비드는 커플맺기가 허락되지 않는 그곳에서 사랑에 빠진다. 근시라는 이유로 아내에게 버림받아 호텔로 잡혀 왔던 그의 앞에 매력적인 근시녀가 나타난 것이다. 아, 비밀연애란 얼마나 짜릿한가! 같은 직장, 같은 교회 안에서 몰래 하는 연애 정도가 아니라 뽀뽀하다 걸리면 입술을 갈아버리는 공포 속에서의 비밀연애라니! 당연히 발각된다. 솔로부대 잔혹한 대장에게 관용이란 없다. (대장역의 레아 세이두, 완전 반했음. 내가 다시 태어나면 안젤리나 졸리로 태어나려고 했는데 레아 세이두로 바꿨음. <007 스펙터>에서 이미 반했었음.) 근시녀의 눈을 아주 멀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둘의 닮음이 사라져버린 것. 데이비드는 실망은 했으나 포기하진 않는다, 정신으로 애인의 손을 이끌고 도시로 탈출한다. 그리고 충격적인 마지막 장면. 눈먼 애인을 카페에 앉히고 나이프를 들고 화장실로 간다. 상상 그대로이다. 닮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닮기도 결심한 것이다. 감동이다. 사랑은 닮는 것이다. 멀어버린 눈이 다시 근시될 수 없기에 그 반대의 방법을 선택한 것. 이런 의미로 사랑은 하향 평준화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버리고 내려오는 것. 그리하여 어떤 의미로는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더 아픈 것이다. 


결혼 비혼이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사랑이야. 이 바보야!




 

 

 

 

 

# 1

(뮤지컬 참 좋아하는데요. 제가 한 번 봐보겠습니다. 할 수가 있어야지 말이다.)

뮤지컬로 말할 것 같으면,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렇다 해도 말이다.

나중에 천국 가면 거기선 꼭 뮤지컬 배우 한 번 해보려고 한다.

그런 장래희망이 있다.

남편 덕에, 남편이 가진 직함 덕에 좋은 자리에 앉아서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를 봤는데....

아직 심장박동이 공연장 비트에서 못 벗어나고 있어서 이 시간까지 잠을 안 자고 있다. 내가.

나로서는 쉽게 누릴 수 없는 이런 감동을 선사(선물-gift-은혜)받은 것이 참 감사해서 말이다. 

진짜 감사했는데 어떻게 감사하단 인사도 제대로 못해서 송구하여 몸이 꼬인다.

헌데 생각해보면 그렇다. 내 돈 내고 봤으면 은혜가 아닌가?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은 애초 내 것이었나?

일찍이 김광석은 노래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에게 시와 노래는 애달픈 양식'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가 가진 '시와 노래'는 애초 자기 것이었나?

시와 노래야말로 신이 주신 정말 멋진 선물 아닌가?

초대로 본 뮤지컬, 만남, 오늘, 지금 여기.... 모든 것이 선물이고 은혜이다. 

나도 시가 있고 노래가 있으니 뮤지컬 창법으로 찬양 한 곡조 뽑는다.

 

사람이 무엇이관데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데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주의 손가락으로 지은신 주의 하늘과 주가 베풀어 두신 달과 별 내가 보오니......

 

 

# 2

'됐다마, 고마해라마'

누군가 이렇게 뒤통수에 대고 말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갖고 산다.

그만 따지고, 그만 읽고, 그만 성찰하고 남들 사는대로 살아라마.

(누가 자꾸 이렇게 말하는 거지?)

늘 약간씩 기분이 안 좋다.

내가 너무 생각이 많은가? 너무 까칠한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너무 삐딱해?

이상주의자?

오늘 기사 돈키호테가 노래 한 자락으로 엄청난 지지를 해주었다.

 

쓰레기 더미에서 보물을 찾는 것이 미쳐 보입니까.

아니오.

너무도 똑바른 정신을 가진 것이 미친 것이 될 수 있다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미친 짓은

현실에 안주하고 꿈과 이상을 포기하는 것이라오

 

 

# 3

어젯밤에........ 나 꿍꼬또.  

그런데 어젯밤에 꾼 꿈과 오늘 본 뮤지컬이 묘하게 겹쳐서 말이다. 그것참 묘할쎄!

꿈이 내 속에서 나온 거라 그 누구도 아닌 나, 지금의 나를 보여주고 안내한다고 믿는데.

어제 꾼 꿈에 종일 생각하다 저녁에 공연을 보러 갔다. 

가는 차 안에서도 남편에게 꿈 얘기를 했다. 

어머 어머, 왠일이니! 기사 돈키호테님이 노래로 꿈해몽을 해주네.

라만차의 남자가 합정동의 여자에게 꿈에 대한 노래로 꿈해몽을 해줬다.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싸움, 이길 수 없어도

슬픔, 견딜 수 없다 해도

길은 험하고 험해도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힘껏 팔로 뻗으리라

 

이게 나의 가는 길이요

희망조차 없고 또 멀지라도

멈추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따르리라

 

내가 영광의 이 길을 진실로 따라가면

죽음이 나를 덮쳐와도 평화롭게 되리

 

세상은 밝게 빛나리라 이 한 몸 찢기고 상해도

마지막 힘이 다할 때까지

가네! 저 별을 향하여

 

 

 

 

 

 

 

 

 

 

 

 

 

 

 

 

 

 

 

 

 

 

 

 

  1. BlogIcon 새실 2015.10.10 21:48

    꺄 언니 너무 좋았겠어요. 오늘 저도 차안에서 무지컬 음악만 계속 틀다가 아ㅡ뮤지컬 보고싶다! 난 다시 태어나면 뮤지컬배우가 될거야 그랬는데!
    참 언니 요즘도 부천오세요?

    • BlogIcon larinari 2015.10.12 11:11 신고

      오, 진짜?
      나중에 우리 작품 하나 같이 하자.
      VIP 석에 바울, 다윗, 베드로, 요셉.... 여러 어르신 뫼시고.ㅋㅋㅋㅋ

      부천에는 계속 가는 스케쥴인데
      요즘 날씨가 좋아서 계속 소풍 수업으로 진행되고 있어서 당분간 못감. 주중에 예윤이 아빠한테 채윤이 아빠가 연락할겨. ㅎㅎㅎ

  2. BlogIcon 기뮨진 2015.10.10 22:41

    시험 합격하고 패닉의 '로시난테'를 들으며 돈키호테도 읽고 싶고 뮤지컬도 보고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보고싶네요!!

    • BlogIcon larinari 2015.10.12 11:11 신고

      꼭 봐. 강추!
      아직 뮤지컬에서 못 헤어나오고 있음.

  3. 엠마 2015.10.11 14:26

    어머 more 안눌렀으면 못볼 뻔 했네요 ㅎㅎㅎ 넘좋아요 more! ㅠ_ㅠ 자본주의와 전혀 관계없는 공부를 하는 입장에서 과연 이게 의미가 있나 많은 회의가 들지만 ㅎㅎ 그러게요 이게 주어진 길이라면 묵묵히 걸어야겠죠! 사모님의 여정도 조용히 응원합니다 >_<

    • BlogIcon larinari 2015.10.12 11:15 신고

      오, 감사합니다.
      조용한 응원이 크게 다가와요.
      성장한다는 것이 고통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역설과 회의를 끌어안는 힘이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고 있어요. 엠마님의 묵묵히 걸으시는 길, 저도 응원합니다. ^^

 

 

 

영화 <앙:단팥 인생 이야기> 관람 후기입니다. 

영화 참 좋구요. 아직 상영 중이에요.
좋은 영화라니 믿고 봐야겠다, 하시는 분은 이 글은 읽지 마세요.
일단 청순한 뇌를 가지고 영화관에 가셔서 영화를 먼저 즐기세요.

 

 

이런 성격에, 좋은 벗을 많이 가진 내가 너무 자주 외로워하는 건 아닐까. 자중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중한다고 자중이 되는 게 아니어서, 좋은 사람이 있다고 없어지는 외로움도 아닌 듯하여 '이거 어쩌나' 이름 붙이기를 미루고 있었다. 그랬던 어느 토요일 오전, 나의 일주일을 일주일 되게 하는 스케쥴 하나. 한겨레 토요판을 열어 <정희진의 어떤 메모>를 찾았다.  제목이 '외로움'. '내가 진짜 외롭구나. 이제 헛 게 다 보이네.' 헛 글자가 보인 게 아니라 정말 제목이 그러했다.

 

금요일 저녁. 비까지 내리니 라디오는 감상(感傷)으로 넘친다. 외로운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내가 외로움에 대해 무슨 견해가 있을까마는, 분명한 것은 나 같은 타입은 외로움을 견뎌야지,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다가는 우리 엄마 말대로 “인생 망조의 지름길”이다. 외로움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책이 있는데 그들은 너무 쌈박하다. 분석하고 이해하면 뭐하나. 그들이 가버린 후(읽고 난 후)에도 외롭긴 마찬가지인데.

 

라면서 김영갑의 <그 섬에 내가 있었네> 읽은 감회를 털어 놓는다. ('정희진의 어떤 메모'라는 꼭지로 말하자면 '리뷰'이지만 단지 책의 이야기로 읽히는 적이 없다. 그야말로 그 누구도 아닌 정희진으로서 다시(re) 읽어내기(view) 때문일 것이다. 부럽다 말하느니 존경한다 하겠다.)  이 글을 읽고 나 역시 외로움에 대해 무슨 견해를 가질 깜냥도 아니지만 그냥 조금 외로워하기로 했다.

 

모처럼 맘껏 늘어져도 되는 날이 생겨서 영화 일 편 하러 광화문에 나갔다. 내 기분이 가라앉으면 늘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남편 유죄, 쾅쾅쾅' 하는 형국이다. 전혀 그런 일이 아니다는 걸 알리기 위해 '나 이런 영화 보러가. 단지 희망을 얘기하는 영화라는 이유로 선택했어' 남편에게 보고를 했다. '내가 외로운 건 당신 탓이 아니야' 라는 뜻이었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싶었고, 어떻게 생겨 먹었든 희망이란 걸 보든지 듣든지 하고 싶었다. <앙:단팥 인생 이야기>는 그걸 보여줄 것 같았다.

 

한센병으로 평생 담 안에 갇혀 지낸 할머니, 한 번의 실수로 감옥에 갇혔다 나와 작은 도리야키 가게를 지키는 또 다른 감옥에 갇힌 젊은 남자, 가난이라는 새장에 갇혀 축쳐진 날개로 오락가락 하는, 제가 키우는 카나리아 같은 여학생. 세 주인공 모두 고립되어 외롭고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다. 뭐야, 희망이 어딨어? 어딨긴 어딨어? 희망이 없는 곳에서 피어나는 게 희망이지.

 

가장 긴 세월 외로웠을테고, 누구보다 절망적으로 절망적이었을 도쿠에 할머니가 삶는 팥으로부터 영화의 희망은 피어난다. 보기에도 민망한 일그러진 손으로 삶아서 만들어내는 도리야키 안에 들어갈 팥이 새로운 희망을 가져오고, 역시나 희망 뒤에는 더 깊은 좌절이 찾아온다. "단팥을 만들 때 나는 항상 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것은 팥이 보아왔을 비오는 날과 맑은 날들을 상상하는 일이지요" 도쿠에 할머니가 처음 팥을 삶으며 했던 말이다. 영화를 보는 나도, 도리야키를 만들던 젊은 남자도, 여학생도 할머니가 살면서 보아왔을 비오는 날과 맑은 날을 상상하며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된다. 물론 상상하자니 먹먹해지고 눈물이 난다. 정희진 선생님의 위의 글 마지막 부분이다.

 

김영갑은 젊었을 적 죽고 싶어 했지만, 난치병 선고를 받자 생명과 평화에 대해서 썼다. 그것은 기다림이다.(207쪽) 그는 병이 악화되자 “누군가에게 길을 묻는 일도 없으리라”고 다짐한다. 빠른 길은 없다. 외로움은 견디는 것이다. 외로움은 시간을 참는 것이다. 죽었다 깨어나는 일이다.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그가 말한 “나는 수없이 보아왔다. 다리 한쪽이 잘린 노루가 뛰어다니고, 날개에 총상을 입고도 살아남은 꿩”의 존재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외로움은 마음이 조금 간절한 상태다. 취약함은 외로움의 일부일 뿐이다. 그는 외로움‘은’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의 고독은 고스란히 화면으로 남았다. 작가의 일상이 이토록 작품 자체인 경우가 있을까. 사진이 그다.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놀라움은 그가 외로움을 극복해서가 아니라 그 외로움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외로움은 마음이 조금 간절한 상태이고, 취약한 상태임에 공감하지만 외로움이 '강하다'는 것은 잘 모르겠다. 진정한 강함은 외로움에서 나온다는 걸 머리로 공감할 수는 있다. 머리로 공감되지만 가슴으로는 모르겠는다는 것은 외로움의 시간을 묵묵히 참아본 경험이 없어서일까. 날개에 총상을 입고도 살아남는 꿩의 존재를 모르는 것처럼 기다리고 견뎌볼 줄을 몰라서.

도쿠에 할머니가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을 향해, 나뭇잎을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이 마음에 깊이 남아있다. 길을 가다 건너편 인도를 걷고 있는 반가운 친구를 발견한 표정으로 환히 손을 흔드는 모습. 평생 단절되어 살아온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지 짐작이 가는 장면들이다. 외로움은 그저 견디는 것임을, 다른 길이 없음을 도쿠에 할머니는 누구보다 빨리 깨달았을 터. 헨리 나우웬 신부님의 <영적 발돋움>의 한 챕터가 생각난다. 폐쇄된 외로움(loneliness)에서 열린 고독(solitude)으로의 발돋움. 외로움에 던져져 피할 길 없다며 뒹굴고 자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외로움의 굴 안으로 발을 내디딜 때 상상하지 못했던 카타콤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느낌으로 읽었었다. 글을 쓰다 말고 책을 찾아 뒤적였다.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면 밑줄 그어놓은 부분들을 읽었다.

 

자신의 안식 없는 외로움을 마음의 고독으로 바꾸면 바꿀수록 그는 자신의 내면의 중심에서 이 세상의 고통을 발견하고 거기에 반응할 수 있습니다.

 

영화 초반에 도쿠에 할머니가 벚꽃 흩날리는 거리를 걸어 이상한 긴장감을 고조시키며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도리야키 가게로 계획적인 접근을 한 것이다.

 

"평생 담장 밖엔 못 나갔다는 그런 눈빛이었지 .. "

 

평생 담장 밖에 못 나가본 할머니가 도리야키 만드는 젊은이를 우연히 본 처음 본 느낌이란다. 외로운 사람이 외로운 사람을 알아본 것이고, 갇혀본 사람이 고립된 사람을 알아본 것이다. 헨리 나우웬 식으로 말하자면 할머니 외로움의 끝은 고독이 되었고, 그 고독의 중심으로부터 세상의 고통을 발견하고 반응하는 눈이 생긴 탓이리라. 정희진, 김영갑, 도쿠에 할머니, 헨리 나우웬 님. 총동원 하여 내 외로움에 관심을 가져주니 나 역시 외로움을 피하지 않고 견디고 공감할 밖에....

 

 

 

* 관람 부작용 또는 후유증 :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면 어느 새 고개를 쳐들고 손을 흔드는 나를 발견.

 

 

  1. BlogIcon 두또 2015.10.04 21:58

    보고싶은데 압구정에서 밖에 안하네요ㅠㅠ
    그래서 일부로 글 안읽었는데ㅋㅋㅋ

    • BlogIcon larinari 2015.10.04 23:50 신고

      아니거든요. 광화문, 이대, 동작, 심지어 송파까지.
      상영관 많음.
      내 글 대충 읽듯 검색도 대충 하고 그러지 마.

    • BlogIcon 두또 2015.10.05 17:14

      왜이리 발끈하실까ㅠㅠ 무섭게~~ㅋㅋ
      꼭봐야할것같네요ㅋㅋ 근데 24시에하고 막 그래요~~시간도 많으니 혼자 함 도전!!ㅋㅋ

    • BlogIcon larinari 2015.10.05 17:47 신고

      발끈으로 보였어?
      애들한테 하도 뷁뷁 했더니 발끈이 일상이 되었나부다. ㅋㅋ
      니가 참 직장인이지!
      난 영화는 낮에 보는 걸로 알고 있어서 말이다.

  2. 2015.10.10 09:32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15.10.10 11:10 신고

      내가 있잖아.
      언니 같고, 이모 같고, 작은 엄마 같고, 외숙모 같고
      친구 같은 선생님. ㅋㅋㅋㅋㅋ
      간단 영화리뷰 좋다!

  3. mary 2015.10.14 17:00

    지가요 어제 광화문에 달려가서 이걸 봐버렸지요.
    음식을 주제로 한 일본영화는 따뜻하고 보는 내내 잔잔한 행복감을 주는 매력이 있던데
    이 영화는 아리더라고. 물론 따뜻한 감동이 있고. 일본영화 좋아.
    바람에 사정없이 흔들리는 스산한 나뭇잎 소리가 좋았고.
    읽지도 못하겠는 앤딩 크레딧을 첨부터 끝까지 보게 만드는 앤딩송도 좋았고.
    외로뭄 얘기는 한마디로 않고 딴얘기만 했습다 ㅋ

    • BlogIcon larinari 2015.10.14 17:56 신고

      보셨으면 된 거쥬~ㅎㅎㅎ
      아, 제가 음악이랑 바람 소리 얘기도 하고 싶었는데
      어디에 끼워 넣질 못했어요.
      가을이라 더 좋은 영화죠? ^^

  4. 2015.11.04 00:34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15.11.04 20:29 신고

      잘 지내요? ^^
      지난 번 그 일 이후로 전화 통화 한 번 해야지 하면서 시간만 갔네.^^
      하고 싶은 거 해야 하는 의미가 찾아져야 움직이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왜 중요한지 의미를 찾으면 저절로 발이 움직일 거예요. ^^

 

 

 

현승아,

영화 보고 나와서 네가 그랬지?

"좋은 영화라고 하지만 결국 다 똑같애. 주인공들은 여러 번 총을 맞아도 안 죽고, 잠깐 나오는 경찰이나 그런 사람은 딱 한 발만 맞으면 바로 죽어"

영화 어땠냐고 물었던 아빠가 의외의 대답에 놀랐나봐.

잠시 후 차 안에서 아빠가 그랬지.

"현승이가 영화 별로라고 해서 아빠 마음이 좀 아프다"

실은 엄마도 비슷한 심정이었는데 한 마디 거들 힘조차 없더라.

그렇게 지나갔지만 다시 생각하니 현승이가 아빠 말의 뜻을 이해했을까 싶어.

 

엄마 아빠의 고질병, 교훈병 증세였을 거야.

영화를 봤으면 뭔가 교훈을 얻어야지, 특히 이런 영화라면.

그리고 그 교훈의 내용은 엄마 아빠가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어야 한다는 망상, 그런 병이지 뭐.

엄마 아빠는 너희가 그 무엇보다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거든.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이런 영화에서 어떤 식으로든 감동 또는 자극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나봐.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

하여튼, 그렇고. 

엄마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고 싶네.

 

엄마는 대학시절 그렇게 열정적으로 보내질 못했어.

여기도 찔끔 저기도 찔금, 발을 담궈보려 했다가 에잇, 성에 안 차.

강의 땡땡이 치고 혼자 잔디밭에 앉아 책이나 읽으며 그렇지 지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의 지도가 엄청나게 달라진 시기인 건 분명하지.

엄마가 대학에 가서 알게 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반민특위'였단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 잠시 나왔었지?

대학 1학년 5월, 교정에 전시된 광주민주화항쟁 사진도 꽤 충격이었지만,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란 책에서 접한 반민특위에 관련된 내용은 처음에 소설인가 싶었어.

중고등학교 때 제대로 배워보지 못한 조국의 아픈 역사였지.

심장이 뛰고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았어. 

그후 엄마는 아픈 우리 나라를 생각할 때마다 '그때 만약 반민특위 활동이 계획대로 추진되었더라면, 친일파가 명확히 색출되고 정리되었더라면..... 그랬더라며'  하는 가정을 수없이 해봤어.

그러나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 를 백만 번 되뇌어도 소용없는 일이지.

그래 소용없는 일이야.

 

요즘 엄마는 '소용없음'에 꽂혀 있어. 

많은 것들이 소용없이 느껴지는 병에 걸렸다.

누나가 영화 보고나서 미쳐있는 하정우(하와이 피스톨)의 하정우의 대사를 읊조리고 싶어.

"매국노 몇 명 죽인다고 독립이 되나?"

내 마음 상해가며 사랑하고 기다려준다고 사람이 바뀌나?

피케팅 한 시간 한다고 세월호의 진실이 밝혀지나?

선거한다고 세상이 달라지나?

내 아이 하나 학원 안 보낸다고 교육 지옥이 천국 되나?

뭐 이런 버젼으로 얼마든지 베리에이션 연주가 가능한 것 같아.

영화든 현실이든 결국 승리는 매국노의 몫인데, 하나 둘 제거한다고 무슨 좋은 세상이 오겠어?

 

엄만 진짜 하정우만은 살기 바랬거든.

상해 미라보에 안옥윤과 마주앉기를 정말 정말 바랬어.

그런데 결국 죽더라.

너는 그 장면이 싫었지?

하정우가 총 몇 발을 맞고도 계속 일어나는 그 장면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짜증났을 거야.

엄마는 그 장면에서 눈물이 쏟아졌어.

결국 죽을 목숨이지만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나는 하와이 피스톨의 표정에서 뭔가 읽었거든.

매국노 몇 명 죽인다고 독립이 되는 건 아니지만 멋진 주인공은 끝내 포기하면 안되는 거야.

쓰러져 다시 일어나고 또 다시 일어나 염석진의 가슴에 꽂은 칼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지?

염석진은 살았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 경찰 고위직에 올라 떵떵거리고 살아.

심지어 그 칼자국을 독립운동의 흔적으로 둔갑시키지.

(아, 광복 70주년 오늘에도 얼마나 많은 염석진과 강우석과 그 후손들이 떵떵거리고 있는지...)

엄마도 주인공이 절대 안 죽는 미션 임파서블식 영화 싫어하지만 이 영화, 이 장면은 좀 달랐어.

결국 죽겠지만, 맞아도 맞아도 죽지 않아야 한다는 결연한 마음이 되었어.

그런 많은 이들의 총맞고 살아나고 칼맞고 살아난 많은 분들의 일어섬이 있어 그나마 우리가 이런 세상을 살고 있는 거야.

 

오히려 영화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장면은 마지막 장면이지 뭐야.

"16년 전이 임무, 염석진이 밀정이면 죽여라. 지금 실행합니다."

우리의 안옥윤과 명우가 염석진을 징벌하는 것 말이야.

역사 속에서 꼭 실행되어야 할 임무였지만 70년이 지났어도 그 임무는 미완이야.

그래서 현승아, 그 미완의 임무는 엄마 아빠의 몫이고 너희들의 몫이라고 생각해.

엄마가 역사의식이란 말을 썼지?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이땅에 오신 예수님이 다윗의 가족나무 안에 들어 있으신 거 알아?

현승이 한 사람의 역사는 가족의 역사와, 가족의 역사는 민족의 역사와, 그리고 인류의 역사와 별개의 것이 아니야.

결국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덜렁 '김현승과 하나님'만 떼내어 생각할 수 없다는 거야.

 

우리는 흐르고 흐르는 역사의 강 어느 언저리를 살고 있어.

이 강이 어디로부터 흘러 어디로 가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고, 공부해야 해.

그것은 현승이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사는 것과 무관하지 않단다.

현승이가 좋아하는 오달수 아저씨가 안옥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 기억나?

어이, 삼천 불. 우리 잊으면 안돼!

현승아,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와 그 역사의 뒤안길에서 생명과 정의를 위해서 죽어간 분들을 잊으면 안돼. 

또 권력을 무기삼아 거짓으로 정의를 위장하는 사람들을 '나와 상관없다' 지나쳐 버리면 안돼.

 

이 글을 쓰면서 엄마도 다시 힘을 내려고 해.

'소용없음 병'을 이기고 다시 일어나 보려고. 

결국 하정우 아저씨처럼 죽겠지만, 다시 일어나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려고.

잊으면 안돼.

아픈 역사를 잊으면 안되고,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잊으면 안돼.

그래, 잊으면 안돼.

 

 

 

 

 

 

 

  1. 2015.08.21 11:19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15.08.22 17:33 신고

      톡 몰아서 긴 댓글, 이거 좋다!
      차곡차곡 모았다가 목돈 받는 기분인데. ㅎㅎㅎㅎ

      뭐라고 부르든 한 번씩 영혼을 덮는 검은 구름은 통과의례인가 싶기도해. 열심히 사는 날의 일방성을 보상하는 시간인가?
      아무튼 스르르 빠져나간 마음의 힘이 채워질 날 없을 것 같은 느낌이지만 그 또한 지나간다는 것을 수없이 경험했으니까.

      생각해보니 우리 둘 다 지고 있는 짐이 참 많다.
      힘내자, 한다고 힘이 나진 않지만 그래도 힘내자. 히히.

      가을이 오고 있어!

 

 

 

폭풍 강의로 한 주간을 보냈다. 정신이 들어서 보니 현승이와 둘이 텅빈 거실에 앉은 금요일 밤이다. 기다란 아빠, 2등으로 기다란 채윤이가 각각 수련회와 캠프 일정으로 집을 비웠다. 기다란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탓인지 집안이 유난히 조용하고 휑하다. 피곤에 절어서 책에도 음악에도 폰게임에도 현승이와의 수다에도 집중할 수가 없다. 엄마, 내일 아침에 일찍 [인사이드 아웃] 볼까? 그냥 우리 둘이 먼저 보자. 궈래? 좋아. 조조로 예매하자. 토요일 아침 7시 50분, 6천 원 티켓을 예매했다. 밤 10시가 되기 한참 전인데 '우리 일찍 잘까? 내일 영화 제대로 보려면...' ZZZZZZZZZZZ

 

관객이 열 명 남짓한 극장에서 에어콘 추위에 덜덜 떨면서 관람했다. 잠을 깬지 얼마 안 된 탓인지 영화가 심지어 몽환적으로 다가왔다. 현승이 몰래 울었다. 조금 울다가 어떤 장면에서 많이 울었다. 기억의 구슬 저장고에서 구슬 하나가 튀어나왔고 슬픔이가 재빨리 영상 재생버튼을 눌렀나보다. 사실 현승이의 영화평이 몹시 궁금했지만 마지막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 전에 마음을 접었다. 현승이 감상평 물어보지도 말자. 이 영화를 이해하기엔 아직 기억의 저장고가 헐렁해. 채윤이? 채윤이는 조금 나을 수도. 우정의 섬이 무너지고 가족 섬이 무너지고 어릴 적 쌓았던 것들이 마구 무너지며 감정의 불들이 나갔던 기억이 최근일테니까. 그렇다 해도 쉽게 이해되진 않을 거야. 기억이란 한 30년 이상 묵혔다 꺼내야 제 맛이거든.

 

아이들이 보고 재밌어 하긴 어려울 듯하다. 기억의 구슬 저장고가 꽉 찬 어른들, 그 중에서도 가끔씩 기쁨이와 슬픔이가 합작해서 내보내는 구슬에 민감한 어른들은 보다 울다 말을 잃을 듯. [인사이드 아웃]을 보고 먹먹해지거나 덤덤하거나. 우리 나라 사람들은 둘 중에 하나일 거야. 

 

난 '음악심리치료'를 전공했는데 어쩌다 '음악'은 잊고 '심리치료'만 만지작거리고 있냐. 어쩌다 내적 여정을 안내하는 에니어그램에 꽂혀서 '내면을 바라봐, 내면을 바라봐' 허경영 코스프레를 하고 있냐. 내면을 바라봐, 내면을 바라봐, 인사이드 본부로 가 기쁨이 슬픔이 소심이 버럭이 까칠이를 만났더니 이 녀석들 결국 나를 기억 저장소로 데려가 던져 놓고 도망했다. 야, 야 이놈들아! 나 꺼내줘. 나 음악심리치료 전공인데, 왜 자꾸 나를 '기억심리치료사' 만들려고 해!!!

 

(얘들아, 고마워. 실은 나 이거 좋아해.) 

기억 저장소를 정리하고 청소하고,

기쁨이의 노란 구슬을 눈물로 닦아 슬픔이의 파란구슬 만드는 작업을 좋아한다.

그리햐여 기쁨과 슬픔이 어우러져 초록 구슬이 되게 하는... 아니

한 구슬이 한 가지 색인줄 알았으나 알고보니 노랑, 파랑, 초록, 빨강, 보라가 함께 어우러진 기억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사랑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이런 작업을 좋아한다.

 

 

 

 

[커피 한 잔과 함께하는 에니어그램]의 일부분이다.

노란 색인 줄 알았으나 파란 색이었던,

기쁨이기만 했던 어린 시절의 다른 면도 볼 수 있었던 내 기억의 구슬 하나.

이 구슬은 '진리'가 되어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었다.

그리고 거듭난 나날은 아침마다 새롭고 또 새롭고 있다.

 

 

 

어린 시절 작업이라면 나도 할 만큼 했잖아 하면서 교만한 마음도 있었어. 어린 시절이 다 그렇지 뭐. 너무 인위적으로 어린 시절의 경험을 끌어내고 짜 맞추는 거 아냐? 하면서 방어하기도 했던 것 같애. 그러면서 여러 내적 여정 훈련을 받았지. 내게 어린 시절 그러면 아직도 엄마가 해주시는 레퍼토리가 있어. ‘너처럼 사랑받고 큰 애는 없다. 너를 늦게 낳아 가지고, 느이 아버지가 자다가도 일어나서 불 켜고 앉아 너를 들여다보고 그랬단다. 내가 너를 안아볼 새가 없었다. 하도 너를 이뻐하는 사람이 많아서…….’ 이 말이 내 의식에 새겨져 있어. 그래서 '나는 엄청 사랑받고 자란 아이야' 라고 머리로 믿고 있었던 거야. 의심의 여지없이 말이다. 헌데, 내 마음과 몸은? 이런 질문과 함께 이제껏 눌러놨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봇물처럼 생각나는 시점이 있더라. 더 중요한 건 기억과 함께 떠오른 당시의 느낌이야.

 

동네 친구 집에 갔던 기억이 나. 남자 애였는데 친구가 무슨 말을 하면서 막 까불었어. 그랬더니 친구의 엄마가 ‘저런 미친놈. 내가 못살어.’ 하면서 고개를 젖히고 웃으시는 거야. 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그 장면이 먼저 선명하게 떠올라. 우리 부모님을 비롯해서 동네 사람 모두 업신여기는 집이었지만 어린 나는 그런 엄마와 아들 사이가 부러웠던 거야. 기억해보면 목사님이었던 아버지는 교인들 앞에서, 아니 교인들 없는 곳에서도 사사로운 감정으로 가족을 대하지 않으셨어. 엄마? 내 기억 속 엄마는 ‘사모님’일 뿐이었던 것 같애. 엄마는 언제나 곁에 없었다고 느껴져. 교인들 중에 아픈 사람, 힘든 사람을 찾아 심방을 가 계셨지. 그리고 집에 오시면 남편이기 이전에 ‘주의 사자’이신 목사님을 위해 열심히 밥을 하셨고. 밤이 되면 철야기도를 위해 교회당으로 가셨어. 나는 알아.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는 것을. 그렇지만 상황을 통합적으로 볼 수 없는 어린 나는 그저 ‘차가운 아버지’와 ‘부재중인 엄마’로 밖에는 인식할 수 없었다는 거야. 아주 가끔 나와 동생이 아버지가 쓰던 이북 사투리를 흉내 내고 온 몸을 던져 익살을 떨면 아버지가 아주 살짝 웃으셨어. 나는 아주 살짝 웃을락 말락 하는 그 웃음만 보아도 ‘나를 사랑한다는 뜻’인줄 알고 좋아했지.

 

 

  1. 데몬슬레이어 2015.07.26 21:33

    띤띨이모 ~~~~~
    나 인사이드 아웃 봤어요
    완죤 중독 됐어요.
    대박 꿀잼 이었어요.
    버럭이는 저랑 닮았어요 제일 귀여웠어요 ㅋㅋㅋ
    제가 누구일까요

    • BlogIcon larinari 2015.07.26 22:09 신고

      아, 모르겠네.
      인사이드 아웃을 봤고,
      버럭이를 닮은 데몬슬레이어가 누구지? 통 모르겠네.

      띤띠리 이모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그 파란색 양초를
      만들어 준 데몬슬레이어는 아닐테고.
      웃을 때 눈이 완전 매력적인데다 잘 생긴데다
      야구도 잘하는 그 훈남도 아닌 것 같고.
      음..... 누구지?
      이모가 어마무시하게 사랑하는 ㅂㅇㅈ도 아닌 것 같고.
      통 모르겠네. ㅎㅎㅎㅎㅎㅎ



  2. 2015.08.08 23:01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15.08.10 10:32 신고

      잘 가고 있네요!
      머리로 아는 게 마음으로 내려오기까지 시간이 걸리죠.
      그 시간은 양쪽에 끼어서 더욱 힘든 과정인 것 같아요.
      그러나 제가 해봐서 아는 한에서는 반드시 끝이 있고요.
      당신께 진지하게, 눈물로 묻는 사람에게 반드시 답을 주시는
      분이 사랑의 그분이니까요.
      언젠가 속에서부터 웃으며 회상할 수 있을 거예요. ^^

 

 

 

더, 더, 더 무서운 놀이기구를 찾아 타다 '언젠가 꼭 번지점프를 해보겠다' 한다. 말만 들어도 심장이 얼어 쩍쩍 달라붙는 느낌이다. 내 딸이다. (주여, 진정 이 아이를 제가 낳았단 말입니까?) 논다면 놀 줄 아는 사람으로서 아무리 애를 써봐도 공감이 안 되는 즐거움이 있으니 그 중 제일은 무서운 놀이기구 타는 것이다. 자기 돈 내고 왜 그런 체험으로 자신을 학대하는지,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 그 두 번째는 잔인 액션 영화, 또는 스릴러 영화 보기이다. 어제 딸내미가 보고 온 영화가 <매드맥스>이고, 그걸 보고 와서는 '영화 대박 대박!'을 외쳤지만 아빠하고 얘기해라, 나랑은 상관없는 영화다,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른데 하룻밤을 자고 나서 바로 오늘. 그 영화를 보게 된 것이었던 것이었다.

 

이미 한 번 본 영화 <윈터슬립>을 남편과 함께 보기로 했다. '엄마 아빠 데이트 해. 우린 각자 알아서 연습하고 놀고 그럴게' 휴일에 아이들의 적극적 지지에 힘입어 영화 데이트를 하기로 하였다. 혼자 보고 너무 너무 좋았는데 마침 영화의 배경인 갑바도기아를 다녀온 남편과 다시 보게 된 것이다. 무려 3시간 20분의 영화가 어찌 잔잔하기만 한지 긴 수면, 동면을 부르는 영화이다. 상영관도 몇 개 되지 않아서 알아보다 어찌어찌 안암동 고대까지 넘어갔다. 그른데, 그른데! 흐엉, 내가 하는 일이 그렇지. 영화 시간표 잘못 본 거다. 오늘 상영일정이 없댄다. 미안한 마음에 몇 가지 대안 중 남편이 제일 좋아할 영화를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선택했다. 물론 겉으론 꽤 땡기는 척 연기도 했다. 지은 죄가 있으니까. 워메. <매드맥스> 보다가 매드 신실 될 뻔. 칠렐레팔렐레 영화 시간 하나 제대로 체크하지 못한 헐랭죄값은 충분히 받았다. 내 돈 내고 왜 이러고 있어야 하지? 꽉 잡은 남편 손의 손바닥에 내 손톱 심을 뻔. 영화 내내 숨 돌릴 틈도 안 주고 싸우는 걸 본다는 건, 두 시간 넘게 바이킹에 매달려 있는 느낌이다. 어쩔 수 없다. 난 그렇다.  <윈터슬립>을 기대했던 하루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영화가 안 좋단 얘긴 아니다. 아빠와 딸이 열광하는 이유를 대충 알 것은 같다. 공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앞으로 어떤 대역죄를 짓지 않는 한 다시는 이런 영화 보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마지막의 자막을 보면서는 벌렁이는 심장보다 더 깊은 곳을 울리는 감동이 있었다.  

 

희망이 없는 시절을 사는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위하여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그러고 보면 참 고질병이다. 싸움과 갈등, 고통이 지속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병 말이다. 그래서 이런 류의 영화가 그렇게나 부담스러운 것이다. 희망 없는 세상에서 더 나은 삶을 위해 가야할 곳은 희망 없는 바로 그곳이라고 말한다. 영화는 그렇게 말한다. 그 말에 아프도록 공감하기 때문에 쫄깃했던 심장 아래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던 것이다. 희망없는 세상에서 희망의 땅, '녹색의 땅'을 찾아가는 여인들에게 미친(미치지 않은) 맥스가 말한다. '희망을 품는 실수를 저지르지 말라'고. '허튼 희망'과 '진정한 희망'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롭고 용감한 여인들이 방향을 돌려 분노의 도로를 되짚어 간다. 아, 멋진 언니들! 

 

멋지지 않은 언니가 없다. 퓨리오사 언니는 말할 것도 없고 만삭의 스플랜드, 오토바이 할머니까지 등장하는 모든 여성이 주체적이고 멋지다. 흰드레스와 드러낸 몸매가 그렇게 상투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흔한 성적 대상으로의 여성이 아니라 여자사람만의 주체적 여성성을 (영화에서) 본 적이 없어서 차라이 낯설었다. 싸움과 싸움의 장면 사이 여성들의 활약을 복기해보면 아, 이 영화 너무 좋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싸움 장면은 휘발되고 여자들의 활약만 또렷해지네. 아흣) 흰드레스를 입고 총알을 세는 여인, 장총을 쏘는 할머니, 임모탄에 빠진 미친 워보이를 구원해내는 여인, 심지어 마지막에 저 하나 살겠다고 항복하는 여인조차도 낯설도록 멋졌다. 아, 그리고 퓨리오사. 이 언니의 멋지심에 관해선 '할 말 엄습'이다. 영활 두 눈 뜨고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나 따위가 뭐 드릴 말씀이 있겠는가. 포스터에 보니까 '희망없는 세상, 미친놈만 살아 남는다' 한다. 남자들은 확실히 미친 세상과 함께 (아니 미친 세상보다 더) 빨리 미쳐 돌아가는 것 같다. 영화 속 세상의 종말에도 그렇고 지금도 안 그렇다 할 수 없다. 역시 양육강식의 세상을 구원은 우리 여성들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도 좀 강해져야 할 텐데 말이다. 놀이기구는 무섭고, 액션영화는 못 보겠으니. 그것 참. (언니들, 쵝오였구요. 제가 언제 또 이런 영화 볼지 모르겠어요. 여하튼 살아 남은 인류와 신인류를 대지의 어머니로 잘 품어 다스려 주시구요. 그곳에 희망없는 그곳에 다시금 녹색 세상을 일궈 주세요. 엄지 척!)

 

 

 

 

  1. 2015.05.26 09:59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15.05.27 11:48 신고

      성격이든 취향이든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은 가끔 돌아보며 경계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우연히 이 영화 본 게 난 좋았고, 그런 의미에서 추천!!!! 멋진 언니들 보러!

  2. 2015.05.27 10:15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15.05.27 11:49 신고

      기억 나지! 그리하여 말도 못하고 더욱 수치심을 느꼈지.
      아, 그때는 나 아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종신서원을 앞 둔 안나는 유일한 혈육인 이모를 찾아간다. 본인이 원해서 가는 것은 아니다. 지도하는 수녀님의 명이었고 물론 소명을 향한 그분의 이끄심일 것이다. 이모 '완다'는 거침없이 욕망을 따라 사는 판시이다. 술과 섹스와 냉소의 여인이다. 순백의 눈밭에서 걸어나온 안나와 이모 완다의 만남은 흑과 백의 만남이며 반쪽과 반쪽의 만남이다. 이 만남을 통해 흑과 백은 각각 무엇을 보고 무엇을 얻고 잃게 될까?

 

가톨릭의 수도자로 종신서원을 앞둔 안나는 완다를 통해 자신이 폴란드인이 아니라 유대인임을 알게 된다. 폴란드인 안나가 아니라 유대인 이다(Ida)였던 것이다. 부모님은 갓난 아기 적에 폴란드인에 의해 학살되었단다. 그 엄청난 출생의 (어쩌다보니) 비밀(이 된)을 알게 된 백색 이다는 흑색 완다 이모와 함께 부모님의 시신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곡절 끝에 유골을 찾아 덤덤하게 품에 안는다. 며칠 간의 여행을 통해 백이다와 흑완다는  갈등하고 고뇌하다 일정 정도 긴장을 해결하게 된다. 전쟁터에 나가며 이다의 어머니에게 맡겨 두었던 완다의 어린 아들도 그때 함께 학살되었던 것. 같은 상처로 각각 다른 삶을 살아온 완다와 이다는 각자 부모의, 아들의 유골을 끌어안으면서 서로를 받아들이게 된다. 특히나 이다가 완다 이모를 받아들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종신서원을 앞두고 나름대로 자아를 찾아 떠난 여행을 통해 백색 이다가 자신 안의 욕망을 맞닥뜨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여행 중에 만난 섹소폰 연주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충격적 출생 비밀도, 부모를 죽인 살인자와의 만남도 흑백 사진 한 장처럼 덤덤하게 그려내는 영화는 이다의 로맨스 역시 같은 방식으로 그릴 뿐이다. 이 모든 자아찾기 여행을 뒤로 하고 이다는 다시 수도원의 흑백 일상으로 돌아간다.

 

안나가 이다가 되었고, 이다가 드디어 사람이 되었다. 수도원의 일상은 침묵과 흑백이다. 여행 후 안나, 아니 이다가 식사 중에 혼자 큭큭 웃음보가 터진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예기치 않은 감정이 불쑥 올라왔다는 것은. 이다를 수도원에 보낸 완다는 풍성하고 예쁜 머리칼을 꽁꽁 감추고 수녀복을 입은 조카 이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말한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잊었던 약속이 생각난 사람처럼 창밖으로 뛰어 내려 죽음으로 달려간다. 이모의 죽음이 다시 이다를 속세로 불러냈고, 장례식을 치뤘고, 죽은 이모 집에서 수녀복을 벗고 가슴이 패인 드레스을 입어 보고 하이힐을 신어본다. 그리고 섹소폰 연주가 남친과 춤을 추고 몸을 섞는다. 흑이 백에 물들었을 때는 밥 먹다 혼자 빵터지는 변화가 있었다면 백이 흑에 물들었을 때, 그것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죽음으로 내달렸다. 완다 이모의 삶이 너무 아프다. 뜨거운 밤을 보내고 남친이 말한다. 해변으로 연주여행을 가, 같이 가자.  가서 해변을 같이 걷자. / 그 다음엔? / 우리 둘이 살 집을 짓고 아이를 낳지 / 그 다음엔? / 그냥 그렇게 사는 거지.

 

벗었던 몸을 다시 수녀복으로 무장하고 이다는 수도원으로 돌아간다. 마지막 장면은 수도원을 향해 걷는 이다의 코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함께 걸으며 찍었나보다. 그렇게 이다는 다시 한 번 그 자리로 돌아간다. 두 번의 자아찾기 여행을 마친 후이다.

 

 

 

 

 

함께 영화 본 H 샘은 나랑 참 비슷하고 참 다른 사람이다. 이런 식의 표현 피하고 싶지만 굳이 해야겠다. H와 나는 에니어그램으로는 같은 유형인데 MBTI 기질로는  NF와 SP로 다르다. 때로 너무 잘 통하고 때로 너무 다르다고 느껴진다. 영화를 보고 이대 정문을 통과해 나오며 H쌤이 말했다. '마지막 장면 봐바. 돌아가는 발걸음에 힘이 넘치잖아. 자아를 찾고 깨달은 거지.' 그 말에 나는 헉! 했다. 그 장면을 나는 '흔들림'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의지적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선택했지만 그녀의 내면이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고 읽었기 때문이다. H의 해석은 경험했고, 경험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에 힘을 내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자아찾기 여행을 통해 전혀 새로운 곳에 다다랐지만 일상은 여전히 힘들 것이라는 것에 꽂혀 있었다. 또 다시 식당에서 웃음보가 터질 것이고, 게다가 남자의 몸이 그리울 것인데 더 많은 것을 알았기에 더 힘들 수도원 생활의 순간순간이 염려가 되었다. 각자 자신이 읽어낸 '자아를 찾는 여행 그 후'에 대해서 항변을 하다가.... '그러니까 우리가 둘이 지금 같은 얘길 하는 거야!' 하고 입을 다물었다.

 

같은 얘길 한 건 아니다. H는 깨달음을 얻은 이다가 자발적 선택으로 들어간 수도원을 이전과 차원이 다를 것이라데 꽂혀 있고, 난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살아낼 일상은 더 지난하다는 데 꽂혀 있었다. 분명 같은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순간 답답했다. 그러나 같은 얘기를 다른 각도로 보고 있다, 설령 다른 얘기라도 괜찮다는 태도가 그녀와 나 사이를 이어주고 있었기 때문에 괜찮았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지날 수록 영화가 준 감동보다 이 대화가 준 감동의 여운이 오래 가고 있다. 그녀를 만나면 마음이 상해서 오는 경우가 많았다. 늘 나의 아픈 곳을 건드린다. 마음이 상하더라도 마음을 닫아보지 않았던 이유는 그녀가 나와 달리 큰 틀에서의 믿음과 사랑이 굳건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지 못하는 것을 내가 보고 있다고 항변할 이유도 없다. 자신 안의 이다를 통합해내지 못한 완다의 아픈 결말을 다시 생각해 본다.

 

나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하나님 안에서 나는 누구인지를 깨달을수록 설명할 수 없는 자유로움이 나를 감싼다. 그러나 그 내적인 자유가 일상에서 져야 하는 크고 작은 짐들을 어떻게 해주진 않는다. 그 버거움은 여전하다. H 샘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내 일상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깨알 같은 사안을 가지고 징징거렸다 웃었다 하는 나와 달리 큰 틀에서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이들이 있어서,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고맙다. 그래, 자아를 찾은 이다에게도 선물 같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이 길을 혼자 걷는 것이 아니라 다행이지 않은가.

 

 

 

 

 

 

 

 

올해 음악수업에서 만난 아가들에게 으막션생님의 매력이 통 먹히지 않는다고 좌절하는 글을 썼었다. 아, 좌절 금지. 3주차 수업에서 낚시질 끝. 5세 형님반은 물론이고 난생 처음 엄마를 떨어져 어딘가에 온 4세 아가들까지 죄 걸려들었다. 엄마한테 가겠다고 그렇게 울어대던 아가들의 눈동자가 제대로 보인다. 눈물을 그친 것이다. 어제 3주차 수업에 들어갔는데 '으막션샘미다..... 영어션샘미다.....' (1년이 지나도록 나를 영어 선생님으로 부르는 아이들도 있다.) 뜨거운 환영이었다. 기타를 들었더니 반짝반짝, 아구떼(악어떼), 아빠곰아빠꼼.... 신청곡이 쇄도를 한다. 그러면 그렇지. 쫘식들.

 

초롱초롱 눈망울, 놀라서 커진 동공, 까르르까르르.... 음악 수업을 빙자한 으막션샘미 자가 치료시간이 끝났다. '즐거운 음악시간 끝났네요' 굿바이송을 부르자 한 녀석이 '우막션샘미 가지마. 지베 가지마' 울기 시작한다. 얘네들은 동네 강아지들 같아서 한 놈이 짖기, 아니 울기 시작하면 다들 따라서 운다. 다는 아니고 딱 한 녀석이 따라서 울면서 '우막션샘미 가지마... 으앙.....' 아, 쫌 뭉클했다. 끝나고 우는 아이들 하나씩 안아주는데 너무 조그만 아기들이다. 아무튼 3주 만에 자존감 상승이었다.

 

수업을 다 마치고 점심시간. 화장실 앞에서 아까 울던 아가를 만났다. 으막션샘미는 반가워서 급 엄마 미소 지었는데 이 녀석, 으앙....... 움막션샘미, 으앙....... 으.......앙.......으.....막.......션......으앙....... 아니 왜 또 울어? 야, 선생님이랑 재밌게 놀았던 기억을 떠올려야지 마지막에 울었던 기억을 소환하면 어떡해? 지금 우는 타이밍 아니라 반가운 타이밍이야. 설득불가. 으앙..... 울면서 나에게 안기지도 않고 자기 반 담임샘을 찾아간다. 아, 막막해 진짜. 쟤 저러다가 다음 주 음악 시간에 십중팔구 나 보고 운다. 쟤.

 

아이들의 기억이란 이런 것이다.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인지, 정서, 신체적인 능력 때문에 상황을 통합적으로 기억하지 못한다. 고통을 전존재로 느끼면서 몸으로 기억해버리는 것이다.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생각이 났다. 모든 치유는 기억의 치유이다. 어린 시절의 상처 치유라는 것은 어릴 적 기억을 어른의 눈으로 바라봄으로 시작한다. 아이라는 무력함 때문에 그렇게 기억할 수 밖에 없었던 지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삶을 살고 있는 폴이, 반주하는 기계처럼 살며 세상과 소통하지 않았던 폴의 기억을 더듬어 가는 과정이다. 물론 혼자가 아니라 마담 푸르스트와 함께. 장소는 그녀의 비밀 정원. 어릴 적 잃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의 공간으로 철퇴한 폴이 차 한 잔에 취해 기억의 창고 문을 연다. 문을 열면 또 다른 문이 있고, 열고 들어가면 또 다른 문이 등장하여 기억의 심연 속으로 한 발 한 발 들어간다.  

 

엄마 대신 폴을 키우는 이모 둘은 폴의 현재형 엄마이다. 그리고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담 프루스트,  말하자면 그녀는 새로 등장한 또 다른 엄마이다. 어린 시절의 엄마는 죽고 없다. 현재의 엄마들은 폴의 반주에 맞춰서 춤을 가르치며 살고 있다. 과거도 현재도 아닌 원형으로서의 엄마가 마담 프루스트일 것이다. 에니어그램을 통한 내적 여정을 하면서 어린 시절을 더듬어가다 보면 엄마에 대한 분노가 새롭게 올라오는 때가 있다. 마담 푸르스트의 차 한 잔을 마신 것처럼 거부할 수 없게 묻었던 기억이 피어 오른다. 몹시 힘들고 아픈 과정이다. 그럴 때 혼자 울고 불고 하다가  엄마를 찾아가기도 한다. '엄마 어릴 적에 나한테 왜 그랬어,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엄마들의 반응이 어떨까? 딸의 말에서 마음을 읽어내고 '미안하다, 너에게 그렇게 큰 상처가 될 줄 몰랐다. 그땐 엄마도 어렸어. 네 잘못이 아니야.' 라고 해주는 게 정답이겠지만 그런 엄마는 찾기 어렵다. 대부분 엄마들은  '그런 일이 있었냐? 별 걸 다 기억하네. 나는 기억이 안 나는데' 또는 '뭐 그런 걸 갖고 그러냐' 이다. '내가 너한테 잘못한 게 뭐냐. 니가 그런 소리 들을만 했다' 이러시면 딸을 두 번 죽이는 것이다.

 

마담 프루스트의 기괴한 거실 또는 정원은 기억의 정원이다. 마음의 수풀을 헤치고 묻어두었던 것을 더듬더듬 찾아가게 하는 신비의 묘약에 취한 곳. 차 한 잔과 마드렌 한 조각, 마담의 기괴한 목소리 한 두 마디에 폴은 마음의 수풀로 기어들어간다. 그리고 한 겹 한 겹 벗겨지는 기억들. 폴의 기억 여행을 따라가며 아빠에 대한 오해, 엄마에 대한 환상을 바로잡아가는 것이 (심지어) 즐거웠다. 단언컨데 우리는 모두 나름의 왜곡된 기억에 붙들려 산다. 그리하여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자신의 말과 행동 이면에 왜곡된 인식방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또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길을 인정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을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 비밀의 정원은 아무나 드나드는 곳이 아니다. 준비된(갈망하는) 자만이 이끌리는 곳이다. 마담은 미친 사람 같고, 그 정원은 말이 좋아 정원이지 야생의 숲, 아니 막 자란 식물들로 기괴하고 정신없는 이상한 곳이니 말이다.  

 

모든 영화에서, 소설에서, 널리고 널린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자기를 찾아갈 때 환영받는 일이 거의 없다. 특히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까운 이가 성장한다는 것은 부담되고 심지어 두려운 일이다. 이제껏 맺었던 관계에 균열이 생기는 탓이다. 그럭저럭 맞물려 돌아가던 톱니바퀴, 저쪽이 달라지면 나도 달라져야 하니까. 자기를 찾아 발버둥 치는 사춘기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불편할 수 밖에 없고,  상담을 통해 자기를 발견해 가는 아내의 성장이 못마땅하고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도 비슷한 맥락. 폴이 왜곡된 기억을 치유해 나가자 두려워진 현재형 엄마들은 결국 비밀의 정원을 찾아내 쑥대밭을 만들고 만다. 정원을 잃은 마담 푸루스트는 자기처럼 오래되고 신비로운 나무를 지키기 위해서 분신과 같은 우크렐레를 들고 그 나무 아래 앉는다. 그리고 마담은 폴의 엄마처럼 죽음의 강 너머로 떠난다. 물론 폴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끊임없는 내적 순례와 외부의 구체적인 삶의 여적을 계속해야 할 우리 크리스천들은 먼저 과거의 아픈 여러 상처들을 기억의 창고에서 쓸어 버림으로써 출애굽의 영성을 시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라며 서문을 시작하는 마태오 린, 데니스 린 형제 신부님의 <기억의 치유>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기억의 치유에 있어서 우리는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 과거의 상처들이 준 영향에 굴복하여 자기 중심적으로 생활할 것인가, 아니면 성령의 평화와 사랑이 우리 미래를 이꿀어 가도록 할 것인다. 기억을 따라 과거의 고통스런 사건들로 돌아가서 그것들을 성령께 되돌려 놓는다면, 과거의 상처들은 더 이상 우리를 묶어 놓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자유를 주시는 성령의 권능이 우리를 지도해 나갈 것이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에 발을 들여놓는 선택. 그런 선택 한 가지가 있다.  

 

 

 

 

 

 

 

 

 

 

* 좋은 선생, 나쁜 선생?

 

영화 끝나고 불이 들어오자 연주의 감흥을 추스를 새 없이 옆에 앉은 영 아티스트 채윤이의 표정을 살폈다. 뿌한 얼굴로 말이 없다. 영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피아노 전공의 예술중 3학년의 딸내미이다. 엄마한테 같이 보자, 아빠한테 같이 보자, 갈 사람 없으면 혼자 가서 보겠다 난리를 치다 가족 총동원 관람이 된 것이다. 이제 막 재즈와 사랑에 빠진 터이다.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와 골목에 들어설 때 쯤 영 아티스트가 말했다. 화가 단단히 난 말투다. '그러니까 영화가 뭐라는 거야? 그 선생님이 제자들을 위해서 일부러 나쁘게 한 거야? 결국 잘하게 만들었으니까 좋은 선생님인 거야? 아, 뭐야?' 복잡한 건 딱 질색인 채윤이다운 일침이다. 일단 복잡하게 생각하고 어렵게 말해야 멋진 건 줄 아는 엄마는 머릿속 회로를 이쪽 저쪽으로 꼬아대고 있는 참이었다. 마구 엉켜가는 생각의 회로를 싹둑 잘라내는 딸내미 표 가위손. 그러니까 좋은 선생이냐, 나쁜 선생이냐! 영화의 본질 하나를 꿰뚫는다. 학생의 자존심을 짓밟아 피나는(말 그대로 손에서 피가 줄줄 나도록) 연습을 하게 만드는 선생님은 좋은 선생님일까, 나쁜 선생님일까? 거두절미 채윤이의 관심은 그거 하나이고, 사실 있어 보이고 싶은 평론가나 관객들도 그 질문은 피해갈 수 없을 것 같다.

 

 

* 그러니까 연습을 열심해 해, 말어?

 

이제 중3밖에 되지 않는 음악 하는 딸을 보면서 경험적으로 확신하는 바가 있다. 음악가의 탁월성이란 타고난 음악성 플러스 피나는 연습이다. 채윤이 친구 중 실기 우수자가 되는 아이들 뒤에는 꼭 무시무시한 레슨 선생님이 있다고 한다. 시험이 끝난 날에도 놀지 못하고 연습실로 가야 하는 이유는 엄마도 무섭지만 레슨 선생님이 허락하질 않아서라고. (중간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은 놀다 죽는 날 아니던가) 어쨌든 그런 아이들이 실기 우수자라는 영예를 얻는다. 플레처 선생의 말처럼 '그만하면 잘했어(Good job!)'가 쓸데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 해야지. 시험 끝났다고 놀고, 연주회 마쳤다고 놀고, 날씨 좋다고 놀면 소는 누가 키워? 이런 마인드로 채찍질하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아니, 내가 채윤이 연습을 시켜봐도 그렇다. 당근 당근 당근.... 주고 연습을 시키는 것은 시간도 에너지도 많이 들고 눈에 보이는 효과도 훨 약하다. 채찍을 쓰면 단 한 번만으로도 폭풍연습을 끌어낼 수 있다. 채찍 끝에 자존심 뭉개는 갈코리까지 하나 장착한다면 그때부터 연습은 분노의 질주가 되어 웬만해서 멈추게 할 수 없다. 피아노가 뽀개지든지 제 손가락이 부러지든지 둘 중의 하나다. 이런 연습을 끌어내려면 칭찬과 격려 보다는 윽박지름과 자존심 깔아뭉개줌이 직방이다. 

 

 

* Education, 끌어낸 열정

 

앤드류는 원래가 연습을 열심히 하는 드러머였다. 플레처 선생을 만난 것도 혼자 연습에 매진하던 순간 아니었나. 열정의 활화산 플렛처 선생을 만나자 연습 좀 하던 앤드류의 열정에 불길이 당겨졌다. 단지 선생이 무서워서, 자존심이 상해서 그렇게 미치도록 연습할 수 있겠는가. Education(교육)의 어원이 '밖으로 끄집어낸다'라고 배웠던 것 같다. 그런 의미라면 열심히는 했지만 조금은 소심했던 앤드류의 열정을 꺼내주었단 의미로 교수 플레처는 (채윤이가 그렇게나 궁금해하는 방식으로 보자면) 좋은 선생이다. 예술가 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열정은 필요하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가 그런 말을 했다. '그렇소! 열정이란 그런 것이오. 다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거지. 그게 열정이란 말이요.' 내가 원하는 그것, 그것 외에는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것이 열정이라면 누구나 그런 시절이 있고, 한 번쯤은 있어야 한다. 

말로만 하고 듣던 '피나는 연습'을 우리는 보았다. 강렬한 이미지였다. 스틱을 잡은 앤드류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피가 흐르고 흐른다. 얼음물에 그 손을 집어 넣는다. 투명했던 얼음물이 핏빛으로 물들어간다. 순간 카메라 앵글이 90도 회전, 얼음 그릇이 세로가 아닌 가로로 잡힌다. 집어 넣은 손이 위가 아니라 왼쪽으로 가는 것이다. 투명한 얼음물을 핏빛으로 물들이는 것은 중력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당기는 힘의 법칙으로 인한 자연스런 이동이 아니라  피의 힘, 열정의 힘 자체로 침투해가고 있다는 것. 이것을 보라는 듯. 핏물은 옆으로 흘러 그야말로 맹탕 맹물을 잠식하고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긴장을 풀 수 없었던 것은 단지 음악, 연기, 구성이 아니었을 것. 이면에 흐르는 그 핏빛 열정이 상체를 스크린 쪽으로 끌어갔고 침을 꼴깍거리게 만든 것이다. 

 

 

 

 

* 열정, 뒷 마당의 말 다섯 마리

 

스캇펙은 열정을 일컬어 '뒷마당에서 날뛰는 말 다섯 마리'라 비유했다. 말 다섯 마리의 힘, 마력이라는 대단한 힘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섯 마리의 말은 길들여져야만 진정한 힘이 된다. 길들여지지 않은 말은 먼저 내 뒷마당의 텃밭을 망쳐놓을 것이다. 그리고 어디에 풀어놓든 일단 망치고 볼 놈들이다. 열정이 진정한 힘이 되기 위해서는 길들여져야 한다. '앞마당'이 아니라 '뒷마당'이라 함은 열정이 꼭 필요한 것이로되 그 이면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적절하게 잘 쓸 수 있는(나와 타인에게 진정으로 유용한) 힘이 되기 위해서 뒷마당을 망치는 시기를 지내야 할 수도 있다. 그런 시절 없이 단번에 성숙한 열정을 가질 수는 없다. 앤드류가 플레처 선생의 스튜디오 밴드에 발탁된 후 활활 타오르는 열정으로  연습에 매진할 때 마구 망치는 것들이 속출한다. 친척들과 함께 하는 식탁에서 오만한 막말 드립으로 분위기를 망치고, 예쁜 여자 친구와의 로맨스를 망친다. 조르바의 말이 맞다. 열정은 다른 것이 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 열정의 연습을 통해 우리는 신 들린 드럼연주를 본다. 아마도 우리가 감탄해 마지 않는 연주가 있기까지 연주자의 주변에는 무수한 망침(희생)이 있었을 것이다. 연주자 자신의 인간적인 삶일 수도 있고, 빚을 내서 레슨비를 감당한 부모일 수도 있고(눙물나는 공감), 내쳐지고 배신당하는 애인이나 친구, 동료 음악가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음악도 잘하고 인간성도 된 음악가, 가르치기도 잘 하고 따뜻하기도 한 선생을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 완벽하게 두 개를 다 가셨다면 인간의 조건을 비켜가는 것이다. 여차저차 열정의 선생과 열정의 제자는 둘 다 일단 추락하고 만다. 앤드류는 제적을 당하고 그의 증언이 결정적인 증거가 되어 플레처 선생 역시 학교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리고 클럽에서 우연한 재회. 그 장면의 대화에서 채윤이는 결정적으로 혼란스러워졌고 있어 보이는 리뷰를 쓰고 싶은 관객은 숙제를 받는다. 플레처 선생이 나긋나긋하게 진술한다. 최고의 음악을 끌어내기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단다. 잘했다고 우쭈쭈쭈하는 것은 선생으로서 쓸데없는 짓이란다. 자신은 오직 찰스 파커 같은 드러머를 길러내고 싶었단다. 말하자면 '다 너를 위해서 그렇게 가혹했던 것이다' 이거다. 채윤이처럼 혼란스러워진 앤드류가 고작 할 수 있는 말을 '그....그래도 너무 심하셨잖아요' 였고 선생이 자조적으로 뱉은 말은 '그러나 찰스 파커 같은 제자가 하나도 없다' 였다.

 

 

* 그건 당신 템포고

 

플레처의 그럴 듯한 연기에 (채윤이는 많이, 엄마는) 살짝 흔들렸으나 앤딩을 장식하는 연주회 첫 곡에서 진실이 드러나고 만다. 앤드류가 배신을 했기로서니 풋내기 제자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자기 연주를 망치는 어이없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완벽한 음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가혹할 수밖에 없었다던 플레처 선생이 완벽한 복수를 위해 자기 음악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고 고소해 한다. 싸이코! 이쯤되면 그의 열정이 단지 음악이 아니라는 것을 버터구이 오징어 씹으며 관람하던 초딩도 알아챈다. 플레처 선생의 열정은 완벽한 음악이 아니라 자가도취, 자기중독을 향하는 것이었다. 앤드류와 제자들, 스튜디오 밴드의 단원들로 하여금 완벽한 연주를 하게하는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 아니고, 완벽한 음악 그 자체도 그가 바라는 것이 아니다. 오직 '나'이다. 플레처의 어록 중 백미는 '그건 내 템포가 아니야. 이 개나리 십장생 신발끈 졸라매는 놈아!' 따귀 짝!짝!짝! 내 템포가 아니야. 따귀 짝! 앤드류는 물론 세 명의 드러머 모두 용을 써도 가닿을 수 없는 그 템포는 플레처라는 팽창된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 미친 존재의 템포를 누가 어떻게 찾아? 영화의 마지막은 전율이라는 말도 부족한 그 무엇이다. 지휘자 플레처를 제끼고  드러머 앤드류가 음악을 이끌기 시작한다. 열받아 날뛰던 지휘자까지 결국 드럼의 리듬에 끌려가는 것이 절정 오브 절정이다. 이 순간 플레처는 여태껏 찰스 파커 같은 제자를 길러내지 못한 이유를 깨달아야 한다. 앤드류도 테너도 그만의 템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찾도록 길을 내주어야 했다.미친 피나는 연습과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해도 그 자신의 템포를 찾지 못하면 늘 삼류일 뿐이다. 앤드류의 신들린 연기는 말한다. 됐고! 그건 당신 템포고!!!!

 

 

* 아 그러니까 좋은 선생이야, 나쁜 선생이야

 

영 아티스트 채윤이는 다시 물을 것이다. 그러면 나쁜 선생이야? 나쁘네. 그런데 사실 나는 플레쳐 같은 선생이 좋다. 강압이 늘 나쁜 것은 아니다. 특히 교육자라면 엄하고도 매정한 태도를 보여줘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떡을 썰테니 너는 글을 써라. 불을 켜도록 해라. 어미의 떡과 너의 글을 보아라. 알겠느냐? 이대로 다시 돌아가거라' 피교육자를 자신과 같은 하나의 인간, 고유한 예술가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없다는 것이 치명적일 뿐이다. 그렇다면 친절한 선생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차라리 오직 자기 템포 밖에 모르는 친절한 선생보다는 어차피 자아도취 선생이라면 강압하는 선생인 나은 건 아닐까 싶다.  나쁜 동기의 선한 행동이 나쁜 동기의 나쁜 행동보다 더 악마적이라고 생각한다. 친절한  이유가 아이의 템포를 인정하는 것과 무관하게 그저 자기 이미지 관리 차원이라면, 무정함에 무능하기까지 하여 더 골치 아픈 선생일 수도 있는 것. 플레처 같은 위악의 선생은 음악의 기술을 연마하게 만드는, 오기를 발동시키는 역할이라도 하니까 말이다. 자기 이미지나 지키려는 위선자의 미덕은 무얼까? 실력을 향상시키지도 못하는데다 '어 좋은 선생님인데 왜 뭔가가 싫지? 난 음악도 못하는데다 착하지도 않네' 죄책감까지 얹어줄 수도. 그러니까 좋은 선생 나쁜 선생은 난 모르겠고! 선생도 학생도 채윤이도 엄마도 자기 템포를 살아야 하고, 살기 위해선 찾아야 할 뿐.

 

 

 

 

 

 

 

 

 

 

  1. BlogIcon 지난겨울 2015.03.21 21:44 신고

    연습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 좋은 영화였습니다. 연습은... 혼자 하는 거고 누가 자극한다고 해서 더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게 영화와 현실의 차이겠지요. 연습하는 동안의 고독을 영화로 표현할 수도 없을뿐더러 표현한다고 해도 그 영화 누가 보겠어요.

    • BlogIcon larinari 2015.03.23 10:21 신고

      저는 그 고독한 연습에 지치는 아이를 옆에서 지켜보고, 짜증을 받아내고 하는 터라.... 어우, 그걸 그대로 영화로 만든다면 절대 안 보죠. ㅎㅎㅎㅎ

  2. 2015.03.23 23:44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15.03.24 10:46 신고

      아까 폰으로 댓글 봤을 때 맨 마지막 문장을 못 보고,
      마음 먹고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서 댓글 썼구나, 알아챘어.
      굿잡!!!!!!!! 잘햇어!!!!!!ㅎㅎㅎㅎㅎㅎㅎㅎ

      넌 더 잘할 수 있어. 지금보다 더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어.
      그만하면 잘 한 거야.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거지.

      이 두 메시지가 모두 필요하지 않을까?
      이제껏 달려온 나를 진심 잘했다고 인정해주고,
      동시에 이제껏 열심히 내 방식대로 살아오느라 돌보지 못한 나의 어떤 부분을 돌봐가는 것도 필요하고.
      그게 어떤 사람에게는 열정의 단계를 높이는 것이 될테고,
      어떤 사람에게는 들고 뛰는 열정에 '워워' 하는 방식이 될테고.

      무엇이 됐든, 내가 내 방식대로 살아오느라 망친 부분도 있겠구나 인정하고 더 이상을 자기보호나 자기방어로 내 존재를 망치지 않겠다는 마음이면 될 것 같아.

  3. 효정 2015.04.14 19:58

    이 문제로 영화 개봉하기 전부터 성가대에서 불꽃튀는 토론이 있더랫죠.
    성악 전공자도 많은데다가 저희도 지휘자님이 계시기에^^ ㅎㅎ
    주일에 토론하기로 했었는데 다음주로 미루어 졌다는..ㅎㅎ 글 잘 읽었습니다.
    여러가지를 느끼게해주는 영화였던 것 같아요

    • BlogIcon larinari 2015.04.15 20:41 신고

      그 토론 재미 있겠네요.ㅎㅎㅎㅎ
      이 영화에 관한 다양한 리뷰를 보면서 관객 개개인의 입장에 따라서 다양한 담론이 가능하다는 것이 재밌어요.
      공감을 많이 한 리뷰인데 이것도 한 번 읽어보세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91731

    • BlogIcon larinari 2015.04.15 20:42 신고

      바로 링크는 안 되네요. 주소 복사해서 갖다 붙이고 한 번 보세요.^^

 

 

작명의 배신

 

붕어빵엔 붕어가 없고 새우깡엔 새우가 없다. <웰컴 삼바>의 불법체류자, 세네갈 출신 '삼바'는 삼바춤을 추지 못한다. 일에 치여 번아웃 증후군을 앓는 여주인공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는 딴판의 앨리스이다. 동화적 모험과 환상과 생기라곤 찾을 수 없는, 밤에는 잠을 못자고 낮에는 덤덤하며 어리바리 하다 분노폭발하는 이상한 앨리스일 뿐이다. 프랑스 거주권이 삼바의 외적 관심이라면, 내적인 갈등은 구치소에서 만난 '친구의 여자 친구'를 찾으러 갔다 생긴 접촉사고 때문이다. 네일샵에서 일하는 '친구의 여자 친구' 그레이스가 조물락조물락 손맛사지를 해준다. 불법체류의 삶에 지친 외로운 삼바와 그레이스가 그냥 헤에질 수는 없었으리라. 하룻밤의 은혜였으며며 그밤 이후로 내내 죄책감의 고통이다. 구치소 친구의 이름은 요나.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니느웨에 전하라는 사명을 예언자의 이름이다. 이 요나는 '사명은 난 모르겠고!' 고집불통 아저씨 같이 생긴 얼굴로 단지 여자친구를 찾아 프랑스 건너왔다.  

 

 

로맨스의 배신

 

'사랑이 밥 먹여주냐' 그렇게 말하는 선배도 한때는 사랑에 목숨 걸었던 후배였단 말이지. 예고된 배신을 결코 믿지 않으면서 다들 한 번쯤은 로맨스를 섬기던 때가 있었다. 로맨스 앞에 한업이 약자가 되어 자존감 바닥을 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사랑이든 사랑을 빙자한 결혼이든 엔딩을 맞는다. 그 엔딩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환상에서 '이상한 앨리스'의 민낯을 보고 살아야하는 시작인 줄을 모르고. 그리고 아직 로맨스를 섬길 자격을 잃지 않은 후배들에게 말한다. '결혼해 봐. 따 똑같애.' 알고도 당하는 로맨스의 배신이다. 

 

삼바와 앨리스의 사랑과 우정 사이가 참 마음에 든다. 늦은 밤, 침 넘어가는 소리 크게 들리는 차 안의 삼바와 앨리스. 뜬금포 삼바가 고백 태세를 갖추자 고백하는 자를 배려한다고 먼저 김치국 마셔준 앨리스가 무색해진다. 앨리스 좋아한단 얘기 아님. 친구의 애인을 범했고 죄책감이 들고 친구에게 연락도 못하겠어서 힘들단 얘기. 맞다. 앨리스는 딱 봐도 고백받을 캐릭터가 아니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뜨겁게 좋아한 열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로맨틱한 열정이 살아있다면 번아웃신드롬 진단을 받았겠는가.

 

영화 내내 뚜렷한 애정라인이 만들어지지 않는 이유이다. 앨리스는 여성적 매력이 그저 그런 여자이고(개인적으론 앨리스의 무색무취 표정에 홀딱 반했다), 삼바는 상황이 노답이다. 우리나라 우리 교회 주변에서 흔히 보는 남녀이다. 부족한 건 없지만 딱히 매력은 없는 여자, 사랑이고 결혼으로 가자면 풀어야 할 생존 과제가 너무 많은 남자. 애정라인이 뚝뚝 끊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애정전선만 이상이 있는 게 아니라 영화의 흐름이 뭔가 유려하지 못하단 느낌이다. 디테일이 주는 깨알 감동과 재미가 있지만 보는 내내 뭔가 굵직하게 불편하다. 일이 안 풀리면 가슴 떨려 죽을 것같은 사랑이 있든지, 아니면 일이라도 잘 풀리든지. 결국 고향 가는 비행기를 타야하나? 삼바는?

 

 

긍정의 배신

 

첫눈에 반하는 사람을 만나는 만큼 어려운 일이겠지만 사랑을 하려거든 이런 사랑을 하라. 밋밋하고 가끔씩 이상할 뿐인 여자에게서 특별함을 발견해주는 눈을 가진 불법체류자 삼바 같은 사람 말이다. '당신은 참 특별해요' 관객 눈에도 보이지 않는 앨리스의 특별함을 발견해주는 삼바의 소처럼 크고 착한 눈. 영화를 홍보하는 문구 중에 '초긍정'이란 말이 있었다. 긍정도 불편한데 초긍정이라니. 앨리스에게서 특별함을 발견하는 눈이 긍정의 눈이라면 나는 그 특별함 반댈세. 긍정이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아 있는 그대로 발견하는 눈이다.  

 

영화를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든 장면을 말할 때가 됐다. 구치소 식당에서 삼바는 밥이 안 넘어가는 모양이다. 초면의 친구 요나가 통성명을 한 후에 '그거 안 먹을 거예요?' 하면서 죄 가져다 먹는다. 10년 경력의 요리사 배고프다고 맛대가리 없고 성의없는 밥을 먹을 일이 아니지. 암.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삼바가 화면에서 툭 튀어나와 내게 그러더라. '안 먹는 게 아니고 못 먹는 거거든요. 안 넘어가요.' 삼바의 진짜 매력은 착하고 맑은 눈이 아니다. 아닌 걸 끝까지 아닌 걸로 아는, 대충 설득당하지 않는 자존심이다.

 

푸쉬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고 했지만 결코 스킵하지 말아야 할 과정이 슬퍼하고 노여워하는 과정이다. 이민국에 거주권 신청을 하러 갔다가 덜컥 붙잡혀 불법이민자가 되어버린 삼바의 자존심이 좋다. 자존심을 세운다해도 지금 대단한 것을 할 수도 없고 부조리한 현실을 뒤집어 엎을 수도 없지만 말이다. 밥을 안 먹고, 삼촌이 보낸 마카롱을 전달하지 않은 앨리스에게 내내 쪼잔하게 구는 삼바가 참 좋다.  어구어구어구, 삼바의 밥까지 쓸어 먹은 요나는 구치소 탈출을 시도해보는, 저돌적인 것 같으나 정작 자존심 같은 건 없어 보인다. (오늘 명의 배신의 레전드 : 성경의 요나는 자기 민족을 괴롭힌 니느웨가 심판의 경고에 회개하는 것에 빡쳤다. 설마 회개할 줄 몰랐던 것이다. 저런 나쁜 놈들이 회개를 하다니, 회개한다고 용서를 하시다니!  그리하여 하나님께 대들었던 핵존심의 선지자였다.)   

 

 

결말의 배신

 

결말이 좀 황당했다. 10년 거주권을 손에 들고 찾아온 요나와의 주먹다짐과 여차저차한 에피소드로 인해 말하자면 내적 외적 문제가 일거에 해소되고 만다. 결말이 맘에 들지 않아서 리뷰를 써줄까 말까 고민했었는데 자꾸 생각해보니 이것도 나쁘지 않다. 이런 판타지 같은 문제해결을 유난히 싫어하는 이유는 '한 방의 기도응답' 같은 것에 대한 거부반응이다. 그러나 사실 말을 못해서 그렇지 내게도 이런 기도응답이 한 둘이 아니다. 유난히 싫어하는 이유는 너무 간절히 갈망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기도응답 떡받으로 사기치는 목회자들에 질릴대로 질린 탓이기도 하다. 정말이지 삼바에게 프랑스 영주권이 떡하니 생겼으면 좋겠다. 아니 아니, 삼바 말고 내게! 삶의 배신에 지칠만큼 지쳤다. 내일에 대한 불안에 오만 가지 계획을 세웠다 허물었다 하는 삶도 지겹다. 판타스틱한 기도응답 좀 매일 빵빵 터졌으면 좋겠다. 런닝타임 내내 감동을 주고 고생한 삼바가 마지막에 어이없는 상을 좀 받았다고 해서 화내지 말자. 사실 나도 많이 받아본 상 아닌가. 그리고 부조리한 인생, 의문을 내려놓지 않고 품위를 잃지 않는 사람들이 받을 복이 하늘에만 쌓이지는 않는다는 소망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궁극의 권선징악에 대한 믿음없이 오늘의 일상, 신앙의 여정을 걸어갈 수 없다. 슬퍼하는 자 더욱 슬퍼지고, 약한 자 더욱 짓밟히며, 속이는 자들이 속임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부조리한 세상을 말이다. 불법 이민자 같은 우리가 마지막에 들을 목소리,  웰컴 삼바! 

 

 

 

 

 

 

 

 

  1. iami 2015.03.10 16:49

    이번 영화 리뷰도 좋은데요.
    리뷰의 배신을 감수하고라도 보고 싶어지게 만들어요.
    봄맞이 새 스킨 장착도 산뜻한데, 기본 글꼴 굴림체가 배신 때리네요.
    고딕체가 어울릴 것 같아요.^^

    • BlogIcon larinari 2015.03.10 17:05 신고

      바로 바꿨어요. 깔끔해졌네요. 헤헤.
      욕심이 과했나봐요.
      스킨만 바꿀 걸(로션까지....ㅋㅋㅋ)

 

 

 


좋아하는 음식이 생기면 질릴때까지 그것만 먹고, 좋아하는 스타일의 옷이 있으면 비슷한 종류의 그런 옷만 입고, 좋아하는 저자가 생기면 그의 글만 파들어가 읽는다. 좋아하는 것 싫은 사람이 어딨어? 그러니 이상할 것도 없지만 집착한다는 면에서 보면 이상행동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좋아하는 것들은 덥석 가 집어들지 못하고 그것의 행성이 되어 빙빙 주변을 맴돌기만 한다. '새 것 흔 것이 없다'며 타박하던 엄마 목소리도 귀에 쟁쟁하지만 '아끼다 똥 된다'는 말도 내 속에선 익숙한 말이다.

 

좋아하는 것에 몰입하는 것이나 좋아하는 것을 두고 배회하는 마음이나 내 속에선 다르지 않다. 대상이 사람으로 가면 '몰입'보다는 '배회' 쪽의 행동을 더 많이 하는 것 같고. 중학교 때 정말 좋아하던 영어 선생님과 그냥 좋아하던 국어 선생님이 계셨는데 나중까지 연락을 주고받은 선생님은 그냥 좋아하던 국어 선생님이었다. 영어 선생님께는 이름도 밝히지 않은 선물을 교무실 선생님 책상에 갖다 놓고 '나'인 것을 알아내주시길 바라기도 했다.  예, 이승철이 부릅니다.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 '소리내지마 우리 사랑이 날아가버려. 움직이지마 우리 사랑이 약해지잖아. 얘기하지마 우리 사랑을 누가 듣잖아. 다가오지마 우리 사랑이 멀어지잖아....' 좋아하는 것을 잃고 빼앗기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비스무리한 것이다.

 

뭔말이 이렇게 장황하냐면. 최근 꽂혀서 '너무 좋다'고 여기저기 나발불고 다니는 김서영 교수에 관한 얘기다. 처음 만난 책을 단숨에 읽고 (읽으면서 이미 또 다른 저서를 검색해두는 것은 기본이다. ) 또 다른 책을 구입하기까지 약간 안절부절 망설이는 나를 본 것이다. 아껴 읽어야할 것만 같은, 좋아하는 만큼 시간을 많이 들여 읽어줘야 할 것 같은 강박에 냉큼 주문을 넣지 못했다. 더 웃긴 건 다른 핑계 삼아 광화문에 나가 교보에 가서 할인도 못받고 사오는 변태짓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에 밖에서 오래 있어야 할 일이 있어 책을 챙겨 나가는데 그 책 빼고 엉뚱한 두 권의 책을 가방에 넣어 나갔더라는..... 그리고 그 밤에 식구들 다 잠들었을 때 '이게 뭔 오글거리는 짓이냐'며 덥석 잡아 읽기 시작한 것이다. 

 

천진하게 팬심에 빠질 줄도 잘 모른다. 괜한 자의식의 검열에 걸려서 좋아하는 작가나 유명인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고 아는 척도 못하는 편이다. 오랜만에 천진한 팬심이 발동하여 책에 나온 김서영 교수 블로그에 찾아가 글을 몇 차례 남겼다. 출판사에서 진행하는 저자 강연회에 응모하여 다녀오기까지 했다. 웬만하면 좋아하는 저자의 열혈독자가 되곤 하지만 이렇게 행동에 옮겨본 것은 처음이 아닌가 싶다. 또 있었나? 강연도 강연이지만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역시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생전 안 하던 일을 시작한 거 강연회 마치고 사인까지 받으려고 기다렸다. (잠깐만~ 우우우우. 빨리 줄 서서 일빠로 받으려고 서둘러 강연장에서 나왔다. 일빠가 의미없는 서두름. 사인받으려는 사람이 나까지 모두 네 명. 엄청난 위로를 받았다. 가끔 강의 마치고 책을 판매할 때가 있는데 사인받는 사람이 늘 소수이다. 듣보잡 강사가 뭐 그렇지 뭐, 하고 마는데.  흠..... 김서영 교수도 네 명? 으흐흐흐흐) 결국 네 사람 중에 맨 마지막에 줄을 섰다. 한 사람 한 사람 정성스럽게 사인을 해주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녀의 블로그 이름처럼 '경계를 넘어'온 사람임이 분명하다. 책의 마지막에 모두 전문가가 되자고 격려하며 '전문가는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잘하는 일을 찾고 수련하여 어떤 경지에 이른 사람을 뜻합니다.' 라고 한다. '하나의 기준, 하나의 정답, 하나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정의한다면 우리는 결코 전문가가 될 수 없어요. 내게 맞는 기준, 내 정답, 내 시선을 찾고 내 장단 속에서 춤을 추어야 진정한 고수가 될 수 있습니다' 말한다. 그 자신 경계를 넘어서 대중에게로 온 전문가이다. 개인적 학문이라 치부되는 정신분석학을 사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로 연결시키려는, 무엇보다 그렇게 살아내려는 그녀가 각자 고유한 영역의 전문가로 살자고 대중을 선동하고 있다. 그 따뜻한 선동이 참 마음에 들어서 마구 동참하 싶어진다. 배우고 싶은 사람을 발견하는 기쁨, 그 사람과 연결되는 기쁨. 이게 또 하나의 사는 맛이지.

 

 

 

 

 

 

 

  1. BlogIcon @amie 2015.02.13 03:29 신고

    언니 때문에 김서영교수 블로그 북마크했어요. 언니에 대한 제 팬심이 이 정돕니다. 허허허.

    • BlogIcon larinari 2015.02.13 09:04 신고

      다시 말하지만 팬 수준으로 보면 내가 김서영 선생보다 레벨이 높음.

 

 

 

 

'고무신 거꾸로 신는다'는 말이 있다. 이런 인디언의 기도도 있다. '위대한 신이시여, 내가 내 이웃의 모카신을 신고 한걸음이라도 걸어보기 전에는 결코 그 사람을 비난하지 않도록 해주소서' 신발은 몸과 땅이 맞닿는, 발의 옷이다. 신발을 신는다는 것은 내가 내 발로 든든히 선다는 것이다. 스스로 걷고 뛰며 나아가는 방향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발은 존재의 근거 또는 삶의 방향성을 상징한다. 그래서인가. 주인공 셰릴이 높은 산 절벽 아래로 등산화 한 짝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시작하는 첫 장면의 막막함에 그저 사로잡히고 말았다. 피가 맺혀 양말에 딱 달라붙은 발가락, 덜렁덜렁하는 발톱. 그걸 뽑아내다 아아, 몸서리치며 뒤로 나자빠졌고, 세워둔 배낭이 쓰러졌졌고, 벗어놓은 등산화를 건드렸다. 등산화는 절벽 아래로 데굴데굴...... 아, 어떡해! 아직도 걸어야 할 길이 긴 것 같은데, 산 정상인 것 같은데 어쩌지?  정말 존재 그 자체가 빡침이라는 듯 한 마디 통쾌한 욕을 날리며 쉐릴은 남은 등산화 한 짝을 던져 버린다. 막막함으로 콱 막힌 가슴히 오히려 뚫리는 것 같다. 잘했어, 씨이. 어떻게 되겠지.

 

가난하고 상처 많은 가족이지만 삶을 사랑할 줄 아는 엄마가 유일한 한 줄기 빛이었다. 셰릴에게는 존재의 근거, 땅에 발을 딛고 서게 하는 신발이었을지도 모른다.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남을 사랑할 줄 안다. 이젠 흔한 현수막 문구같은 이 말이 셰릴 엄마의 한 줄 인생이다. 술주정뱅이 폭력 남편을 피해 도망쳐 나와 남매를 키우면서 더 이상 이타적일 수 없는 희생적인 엄마이다. 이타적 엄마가 늦게 자기를 돌보며 공부를 시작한다. 엄마에게는 늘 삶을 향한 잔잔한 긍정의 에너지 가득이다. (늑대아이의 엄마도 생각난다. 영화의 엄마들은 왜 다 이러냐? 현실의 채윤이 엄마는 옴메 기죽어!) 그런 엄마가 암선고를 받고 그 충격이 가실 시간도 없이 떠나버렸다. 존재의 근거를 잃은 셰릴은 막 살기로 작정. 신발 한 쪽 잃어버렸고 나머지 한쪽까지 던져버리는 심정으로 세상에 대고 욕하는 삶, 자신을 욕보이는 삶을 산다. 엄마도 없는데 착하게 살아서 뭐해. 착한 엄마를 그렇게 죽게한 신(이든 누구든) 다 실망시켜버릴 거야.

 

가슴 깊은 곳에 새겨진 엄마의 사랑은 이 아이를 그대로 두지 않는다. 껌 딱딱 씹으면서 반항과 분노의 가죽쟈켓을 입고 상담가 앞에 앉은 셰릴이 말한다. '저 그림 싫어요' '왜요?' '인간을 하찮은 존재로 그리는 것 같어서요.' '당신은 당신 자신을 귀하게 생각하나요?' 반항과 분노의 셰릴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온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있나? 셰릴의 PCT 홀로 수련회 주제는 '당신은 당신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가? (사 43:3)' 이다. 끓이지 않은 딱딱한 등산용 식량을 씹어 먹으며, 시궁창 같은 물을 식수로 마시며, 또아리 튼 뱀을 피해 살금살금 달아나며, 짐승보다 더 짐승같은 남자들에 대한 두려움을 견디며, 한 발 한 발 내대딜 때마다 발톱이 빠져나가는 고통을 참으며, 온몸에 상처, 상처 위에는 땟국물. 이런 프로그램으로 과연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회심을 체험하는데 도움이 될까. 아, 프로그램 잘 짰다. 남편이 있지만 지금 당장 원하는 모든 남자와 섹스를 하고 헤로인을 하며 즐길대로 즐기는 삶. 이런 삶 대신 레모네이드 한 잔만 마시면 원이 없겠다는  결핍의 극한을 통과하며 셰릴의 몸과 마음에서 독기가 빠져나가는 것 같다. 인간이 몸을 가졌다는 것을 얼마나 자주 잊고 사는가.(누가? 인간이) 아픈 발가락을 어루만지고 냄새 나는 몸을 씻겨내며, 따뜻하고 부드럽게 끓여진 죽을 입에 넣는 것으로 '나를 귀하게 여김'은 시작되고 있다. 

 

<여기서 잠깐> 같이 영화를 본 남편이 두 가지 논평을 내놓았다. 1) 멋진 풍광이 많을텐데 굳이 그것들을 담지 않았다. 2) 영화에서 그려지는 남자들은 현실적이지가 않다. 우리 편 아니면 나쁜 나라. 1) 그러네. 카메라는 주로 셰릴의 코앞, 주변만 맴돈다. 고개를 들어 멀리 바라보며 풍광을 즐길 처지가 아니지 않나. 내면의 트래킹이다. 내면의 트래킹만이 나의 잃어버린 신발, 잃어버린 삶의 정체성을 다시 찾는 길이다. 2) 여자들은 그래. 여자들이 여자라는 이유로 얼마나 성적인 취약함에 노출되어 있는지. 어릴 적부터 여자들은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몸을 일상에 숨은 나쁜 놈들의 추행을 통해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라고 어느 모임에서 누가 말했다) 때문에 영화에서 남자들에 관한 비현실적인 이미지는 실제로 여자들의 삶에선 지극히 현실적인 이미지일 수도 있다. 

 

극한 상황에서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렸다. 나는 어떻게 느끼고 어떤 행동을 할까? 생각만 해도 찌질하다. 대책도 없다. 신지도 벗지도, 진정한 원망도 감사도 모르고 그저 어정쩡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적응이라 착각하면 살겠지(살아왔다). 영화를 본 이상, 나이를 이 만큼 (처)먹은 이상 나머지 한 짝까지 내던지는 뱃심을 좀 가져야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신발은 발이 아니다. 산 정상에서 등산화를 잃었다면 정말 막막한 일이지만 셰릴에게는 슬리퍼가 있었고 은박 테이프가 있었다. 무엇보다 발은 여전히 자기 것이다. 얼길설기 테이프로 두른 슬리퍼 등산화를 신고 다시 걸어나갈 수 있었다. 영화를 본 이상 잃어버린 신발에 연연해하지 않기로 하자. 고가의 신발 잃어버릴까봐 꺼먼 봉지에 담아 밥 먹는 테이블까지 들고 들어가는 비싸서 추접스러운 행동들을 삼가고 돌아보자.

 

어릴 적 아버지 죽음으로 신발 한짝을 잃어버린 나는 나머지 한 짝을 붙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40년 넘게 찔룩거리며 걸어왔다. 찔룩거리며 걸어온 탓에 영혼의 균형이 많이 깨졌고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일그러진 삶을 살고 있다. 셰릴이 혼자만의 길을 떠났던 것처럼 나 역시 혼자만의 내적 여정을 길을 떠나온 날이 있었다. 비로소 한 짝 남은 신발로 걷는 불편함도 느끼고, 굳은 살 박힌 한 쪽 발의 상처를 바라보고 조금씩 어루만질 수도 있게 되었다. 영혼의 레모네이드 한 잔을 그릴 줄 아는 감각도 민감해지고 있다.  나머지 한짝까지 벗어 던지고 맨발로 세상을 뒹굴던 셰릴도 잘했고, 찔룩거리며 세상에 적응하려 애쓰던 나도 잘했다. 셰릴의 여정의 종착지는 '신들의 다리'이다. 내 종착지의 표지판에도 비슷한 말이 적혀 있을 것이다. 말은 비슷해도 함의하는 건 전혀 다르겠지만. 영화 참 좋았다!

 

 

 

 

 

 

 

 

  1. 신의피리 2015.02.05 13:59

    참, 같이 영화를 봤는데, 이렇게 고급진 표현들로 길게 영화평을 쓰다니. 언어의 훌륭함. 사고의 더 훌륭함. 성숙을 향한 몸부림의 더더 훌륭함.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의 더더더 따뜻함.

    • BlogIcon larinari 2015.02.05 14:29 신고

      문자 씹으셔서 마이너스 10 점이었으나, 바쁜데 글 읽어주고 댓글 예쁘게 달아서 플러스 50 점! ktx 이제 출발해. 다녀올게.

  2. iami 2015.02.06 09:44

    좋은데요. Wild 책 읽고 영화 보고 간단 정보 흘린 보람 느낍니다.^^
    영화를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 이렇게 보는 분도 있구나 싶어요.
    저는 주인공 셰릴의 심리나 내면보다는 PCT의 풍광을 볼 수 있겠거니
    하는 나이브한 기대로 영화를 봤으니, 같은 걸 보고도 느낌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군요.

    그리고 언어 감각이 있으시단 건 알고 있었지만,
    영화 초반에 F와 S로 시작하는 욕들이 여러 번 나오는데,
    그걸 빡침과 씨이로 옮겨내는 신공은 놀랄 놀 자입니다.^^
    역시 이런 리뷰는 160 안 되는 꼬마 아가씨만이 쓸 수 있겠네요.ㅋㅋ

    • BlogIcon larinari 2015.02.06 11:55 신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떻게 아셨어요?
      등산화를 던지면서 F를 길게 발음하며 야호를 외치듯 한 그 목소리가
      제일 짜릿했어요. 그 느낌을 어떻게 좀 살려보고 싶었는데요.

      저는 사실 책 포스팅 하셨을 때는 '이건 그냥 iami님 책이네' 싶었고, 영화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거든요. 주인공이 리즈 위더스푼이란 걸 알고 월요일 아침 냅다 달려갔죠. 그리고 표 끊어놓고 기다리다 iami님 블로그 들어갔는데 뙇! 그날의 포스팅이 이 영화였어요. 게다가 리즈의 '키'드립으로 리뷰를 끝내셨죠. 진짜 막 웃었어요. 저는 리즈의 키 때문에 영화를 보게 된 건데요.ㅋㅋㅋㅋ

      영화를 보면서는 요세미티 백패킹 포스팅에서 본 게 있어서 흠.... 저런 거구만. 혼자 아는 척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어요.

      암튼, 160 이상의 공기로 숨쉬는 분들은 느끼지도 보지도 못하시는 것들을 저희 호빗들은 봅니다.

  3. mary 2015.02.06 11:41

    햐~ 혹 고새 책도 완독한거 아녀? 책까지 본 듯한 완벽(?)한 리뷰야.
    사실 많은 부분이 생략된 채로 과거를 넘나들어 다 이해가 될까 싶었거든.
    근데 어찌 대사를 조리 다 기억하실까? 신기..
    덕분에 영화 한 번 더 본 기분.
    난 주인공이 키가 꽤 큰 줄 알았어. 영화에서는 그리 보이쟎아. 촬영술.

    누구네 리뷰와 심히 대비되는 ㅋㅋ

    • BlogIcon larinari 2015.02.06 11:59 신고

      영화의 이미지로 추측하고 짜맞춰서내는 맛이 있었어요.ㅎㅎㅎ
      대사는 정확한 워딩은 아니겠지만, 리뷰를 염두에 두고 신경질을 쓰면서 봤죠. 헤헤.

      전에 한영교회 경화가 리즈 위더스푼 원피스 입었을 때와 저랑 스타일이 비슷하다고.... 게다가 키도 비슷하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은근히 애정이 가는 배우거든요.

      저는 이번 주 좀 꿀꿀한 며칠이었는데 목요일부터 새 직장에 출근하는 귀요미가 하나 있어서 그 소식 듣고 진짜 기분이 확 좋아졌어요. ㅎㅎㅎ

  4. BlogIcon 지난겨울 2015.02.06 17:16 신고

    원래 monosandalos는 왕이 될 운명인 거예요...

    길잃은 셰릴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았지만
    안하기로 했어요
    남들이 걷는 얘기를 읽는 게
    때론 도움이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다음 경유지에 새 신발이 와 있으면 좋겠어요

    Even a child with normal feet was in love with the world after he had got a new pair of shoes.

    Flannery O'Conner and Cheryl Strayed

    • BlogIcon larinari 2015.02.06 19:45 신고

      하하. 그러네요. 거기까지 생각 못 했어요.
      누구나 한 번쯤 신 한 짝을 잃는다고 치면,
      누구나 왕이 될 운명인 거예요.
      누구나 자기 삶의 왕이 되어야 해요.
      셰릴은 슬픔과 고통의 노예에서 왕이 되는 길을 걸은 건가 봐요.

      어제가 입춘이더라고요.
      지난 겨울은 그리 춥지가 않았어요.
      지난 겨울님은 참 따뜻한 분이세요.^^
      다음 경유지에 무료로 새 신발을 보내주는 회사에는 지난 겨울님 같은 분이 기획실장으로 앉아 계실 거예요.

  5. BlogIcon 지난겨울 2015.02.07 18:13 신고

    아.. 그리고

    http://www.ize.co.kr/articleView.html?no=2015012521127236750

    이 글도 형님 글만큼 감명깊게 읽었어요

    • BlogIcon larinari 2015.02.06 19:39 신고

      아, 좋네요.
      경험이 포개져 있는 글이라 한 자 한 자 살아 있어요.
      덕분에 좋은 글 읽었어요.^^

 

 

 

조소희, 제 14회 송은미술대상, 작가노트 중

 

"사물의 연약함과 흔들림은 언제나 나를 사로잡는다. 이것은 마치 육중한 무게를 지닌 존재가 그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연약하게 미동하는 모습이 기묘하게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런 아름다움은 단순한 개념으로 수렴되거나 시각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고 다층적인 감성과 의미를 드러낸다. 말하자면 굉장히 네러티브하기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상징적이기도, 과학적이면서 동시에 시적(詩的)이기도 하다.

(중략)

예술의 존재론적인 물음에 대해 나는 형이상학과 여타의 개념만으로 그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정말로 내 이미지를 내 곁에서 떠나 보내고 싶은 한편, 온갖 의미로 가득 찬 탱탱한 이미지의 탄력을 열망하기도 한다. 때론 이미지가 어느 순간 제 스스로 길을 찾아 날아가고 있는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나는 그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리고 그 진동으로 내 이미지의 끄트머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볼 때 나는 만족감을 느낀다.

 

 

전시회장에 도착하여 작품을 보기도 전, 작가노트를 읽고 울 뻔 했다. 작가의 이미지 끄트머리의 파르르 떨림이 이미 내 가슴 깊은 곳에 전해서 파르르 파르르 했다. 감상평을 빙자하여 작품의 이미지를 걸어두고 이렇게 저렇게 알은 척을 하고 싶지만 이번 만큼은 안 되겠다. 다시 도록을 베끼자.

 

 

"조소희의 작업은 예술의 진리 추구를 위한 자기반성에 기반하여 일상의 연약하고 작은 오브제들이 갖는 힘을 사유하고 그로 인해 교차되는 역설적인 미학을 고찰한다. 이를 통해 쉽게 규정지을 수 없는 예술이 갖는 무한한 잠재력에 주목하고 예술가로서 자신의 살밍 어떻게 예술과 합치되어가는지 몸소 실행하여 보여주고 있다."

 

 

예술가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이미지, 작품을 떠나보내고 싶다는 간절함은 무엇일까. 두루마리 휴지, 식당의 냅킨, 실, 초, 봉숭아 물 들인 손가락. 영원불멸의 작품이 아니라 일상의 풍화와 더불어 스러져버릴 것들을 작품화하여 작가는 무엇을 남기고 싶은 것일까? 작품이 아니 작가가 내게 너무 많은 말을 건네온다. 세 시간여에 걸쳐 이야기 나누는 동안 파닥파닥 춤추다 내 마음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154 마리는 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 중 한 마리도 묘사해 낼 수가 없다.  구상 시인의 <시와 기어>라는 시가 <예술과 기어>라는 제목으로 그대로 작가의 작품이 되었으니 시를 읽어봄이 마땅하다.

 

 

시와 기어(綺語) - 구상

 

시여! 이제 나에게서

너는 떠나다오.

나는 너무나 오래

너에게 붙잡혔었다.

 

너로 인해 나는 오히려 불순해지고

너로 인해 나는 오히려 허황해지고

거짓 정열과 허식에 빠져 있는 나,

그 불안과 가책에 빠져 있는 나,

너는 이제 나에게서 떠나다오.

 

그래서 나는 너를 만나기 이전

그 천진 속에 있게 해다오.

그 어떤 생각도 느낌도 신명도

나도 남도 속이지 않고 더럽히지 않는

그런 지어먹지 않는 상태 속에 있게 해다오.

 

나의 입술에 담는 말이

진심에서 우러나오게 되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에서

너의 색안경을 벗어버리고

세상 만물과 그 실상을 보게 해다오.

 

오오! 시여 나에게서 떠나다오.

나는 이제 너로 인해 거듭

기어의 죄를 짓고 짓다가

무간지옥에 들까 저어하노라.

 

 

* 기어(綺語)는불교에서 입, 마음, 몸으로 짓는 십언 중 입으로 짓는 업으로, 화려하고 유수하지만 실속 없는 말로 남을 현혹시키는 죄를 뜻한다.

 

 

작품이나 작가가 나를 가르친 것이 없으나 나는 무한 신비로운 배움을 안고 전시장을 나섰고 작가와 함께 한 카페를 나섰다. 그렇게 오후를 보내고 또 다른 배움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융 분석가와 함께 하는 모임에 참석했다. 오후 내내 영혼을 울린 작품이 준 여운을 깊이로 끌고 갈 마음 탐색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 무슨 공교로움이란 말이냐. 밤은 오후와 달랐다. 오후에 만난 예술가가 예상을 빗겨간 것처럼 밤에 만난 분석가도 내 기대를 보기좋게 저버렸다. 

 

'자기'라는 바다에 푹 빠져 수영을 하든 목욕을 하든 용서받을 수 있는 예술가는 '자기몰입'과 '자기부인' 사이에서 이율배반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 흔들림의 고백은 듣는 이의 영혼에 파장을 일으켰다. 에고(Ego)의 일방주행을 인식하고 무의식의 깊은 중심과 연결되어 '자기 자신이 되게 하는 길'을 안내하는 분석가는 '자기공부'에의 자긍심에 갇혀 일말의 흔들림 없이 확고하였다. 예술을 방패 삼아 얼마든지 자신만의 세계를 피력할 수 있는 예술가는 타인의 세계를 수용하는 법을 알고 있는 듯했는데, 성찰을 통해 의식의 작은 나를 버리고 더 큰 나로 나아가야 할 분석가는 타인을 부정함으로 자기를 우뚝 세우는 확고함으로 나를 당황하게 하였다.

 

길고 혼란스러운 오늘 하루를 토닥이며 마음에 담아두는 말은 이것.

 

"사물의 연약함과 흔들림은 언제나 나를 사로잡는다."

 

화려하고 유수하지만 영혼을 울리지 않는말로 남을 속이지 않는 길은,

내가 먼저 된통 속지 않는 길은 안팎의 연약한 것들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음.

 

 

 

 

 

  1. forest 2015.01.27 11:24

    참으로 이상하지.
    바위 같은 믿음 앞에서 더 큰 좌절과 절망을 경험하는 것.
    그리고 연약한 믿음이, 흔들리는 믿음이,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
    이제 다 되었다 싶을 때 다시 연약함을 주시는 분의 사랑...
    흔들리면서 가야지 싶어.^^

    • BlogIcon larinari 2015.02.01 10:47 신고

      무력함의 길을 앞서 가신 분,
      그분의 길이 생명과 사랑의 길임을 알기에
      이제 다시 힘을 내려고요.
      이날 이후로 잠을 제대로 못 잤어요.
      <비폭력 대화>와 함께 하는 여행, 잘 누리고 계시는 거죠? ^^
      마음에 담고 계속 기도하고 있어요. 언니.

  2. 2015.01.29 22:17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15.02.01 10:48 신고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뜻을 기다리며 지내고 있는 중.
      웃으며, 폭풍수다로 회상할 날이 있을 거야.^^

 

 

 

'사는 게 행복해? 행복이 뭘까?' 질문을 받았다 치자. 답을 하는 대신 질문자의 행복 안부를 걱정하게 되지 않나? '어, 이 사람사는 게 힘든가 보다.' 묻는 사람 역시 마주앉은 이를 거울삼아 반사시켜 자기로 향하게 하는 질문임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잘 정돈된 삶을 사는 정신과 의사 헥터 씨의 일상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행복 여행은 이 질문으로 시작된다. '당신 행복해?' 애인 클라라에게 '행복하냐'고 묻는 순간 예쁜 애인은 '헤어지자'로 알아듣는다. 행복하지 않구나, 나 때문이구나, 생각이 이렇게 흘러가는 탓이다. 내가 남편에게 이 질문을 받았다 가정해도 비슷하게 넘겨 짚을 것 같다. 어쨌든 헥터 씨는 불행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행복하지도 않아 행복을 찾아(자아를 찾아)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클라라가 헥터의 여행가방 안에 노트 한 권을 넣어 두었다. 이 노트에 그림 한 장, 명언 하나씩 채워지며 여행은, 영화는 진행된다. (리뷰 쓰고 싶은 관객들에겐 딱 좋은 장치이다. 여행의 기록은 행복의 정의에 관한 다양한 기록이고 노트의 문장들을 하나씩 묵상해보면 자연스럽게 추보식 리뷰가 완성될 것이다. 그렇게 쉽게 갈까, 말까 고민 중) 아무튼 첫 목적지는 '돈'이다. 돈이 행복인지 알아보기 위해 캐스팅된 나라는 중국.

 

"많은 사람들은 돈과 지위를 가지는 게 행복이라고 느낀다."

 

돈이 행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돈이 없어서 불행감을 느끼는 경우는 많다. 가끔 마음에 먹구름이 낄 때가 있는데 표면적인 다양한 이유와 달리 알고 보면 돈 걱정인 것을 보면. 걱정하는 마음과 불행한 마음이 늘 같은 마음은 아니지만서도. 어쨌거나 마음에 끼는 먹구름의 끝에는 먹고 사는 걱정, 즉 돈 걱정일 때가 많은 것 같다. 그래도 10여 년 전을 떠올려보면 나아졌나 싶기도 하다. 어느 때부턴가 남편이 '정신실 옛날 친구들 만나고 와서도 우울해 하지 않네. 올, 많이 변했는데' 어떤 친구들을 만나고 더 불행하게 느낀 것은 헥터 씨가 메모한대로

 

"남과 비교하면 행복을 망치"기 때문이다.

 

결혼 전 배우자 기도 목록을 따로 작성하지는 않았지만 품고 있는 건 있었다. 하나님께 내놓을 결재서류용 목록은 고상하고 형이상학적이었지만 실제 바램은 단순했다. 당시 오래된 티코를 타고 다녔다. 대학원을 다니던 중에는 실습 때문에 악기를 많이 싣고 다녔어야 했는데 차가 작아서 불편하기도 했고, 똥차라서 부끄럽기도 했었다. 여하튼 나의 백마 탄 왕자님은 제일 먼저 차를 바꿔줄 것 같았다. 그때 나온 차, 라노스 쥴리엣 빨간색이 그렇게 예뻤다. 결혼과 동시에 차가 바뀌면서 <돈에서 해방된 교회>-박득훈 저,가 아니고 돈에서 해방된 정신실이 될 줄로 생각했다. 똬하! 이걸 보고서용 서류에 명시했어야 하는데 거기 안 썼다고 이것만 안 들어주셨다. 그래서 언제라도 비를 뿌릴 준비가 된, 손바닥만 한 돈 걱정 먹구름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 쓰다 보니 내 행복의 안위에 크게 위협적인 건 아니다. 잘 살아왔고 살아있는데 어쩔.  

 

춤춰라.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춤의 치유적 효과를 경험해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나는 몸치이다. 평생 몸치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몸치'가 곧 '영혼치'라는 것을 어떤 피정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생각하고 글로 말로 유려하게 표현할 줄 알지만 몸으로 하는 일로 가면 박수조차 자유롭게 못 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자유롭게 춤추지 못하는 이유는 누군가 보고 있다면!이다. 춤출 때의 삐거덕거리며 바보 같은 내 몸을 누군가 보고 있다면? 오, 죽을 것같은 부끄러움이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비행기에서 만난 아줌마(아가씨?)의 초대로 고구마 수프를 먹으러 간 집에서 춤추는 헥커 씨. 몸치이며, 영혼치, 행복치였던 헥커씨가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시어머니를 보내드렸던 내면아이 치료 세미나는 4박 5일 동안 춤만 추다 오시는 곳이었다. 춤을 출 수 있을 때 어설픈 어른행세에서 벗어나 거침없이 행복을 추구하던 말랑한 영혼이었던 때로 회귀할 수 있다. 그 말랑한 영혼을 자꾸 풀어놓아 다니게 해야 한다. 행복과 직결된 중요한 지점이다. 

 

"사랑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삶도 두려워한다."

 

결국 사랑이다. 인간 본질에 관한 질문을 하다 '사랑'을 만나지 않을 방법이 없다. 적어도 내겐 그러하다. 헥커씨가  마지막 비행기 여행에서 만난 뇌수술 환자를 돌보고 난 후 메모한다. 여행의 끝자락에서 행복에 관한 질문이 어디서 끝날지 예고하는 것이다. 헥커씨의 사랑은 오래된 사진 속 옛 애인이다. 당초 '나는 행복한가' 하는 질문에는 사진 속 연인 아그네스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남자이며 감정에 무딘 헥터는 느끼지 못했을까? 지금 애인 클라라의 촉이 먼저 감지한 것이다. 때문에 클라라는 꾸뻬씨의 행복 여행을 자신과의 이별여행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나이에 연애강의를 하는 게 늘 조금 부끄럽다고 생각했었는데 작년부터 생각이 바뀌었다. 연애 과잉의 시대를 곰곰이, 비판적으로 생각해보면서 연애(또는 연애감정)은 모든 세대의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이 역시 꿈을 통해서인데.... 꿈 드립은 그만하자) 연애를 하기 전에는 연애를 꿈꾸며 살고, 연애를 하면 연애를 살며 살고, 연애 후에는 연애를 추억하며 산다. 심지어 어떤 모임에서 60대 보통 아주머니들이 20대 연애사를 떠올리며 눈빛이 흐려지는 것을 현장범으로 체포할 수 있었다. 로맨틱 러브는 결국 더 큰 사랑, 아가페 사랑을 지향하지 않을 수 없다. 연애를 더욱 인문학적으로 확장시켜 공부하고 강의하자며 한껏 의욕이 높아졌다. 사랑에 비춰본 나, 다시 사랑하게 된 나. 행복은 사람 잇대어진다. 핵커씨가 여행의 끝에 찾아간 곳은 옛 애인 아그네스가 있는 LA이다. 자신의 아이들에게 핵커씨를 소개한다.'아 아저씨는 엄마의.... 음..... 엄마의...... (망설망설) 헥커야!' 이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지금 여기를 행복하게 사는 아그네스가 대화 중에 빡쳐서 소리 지른다.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어. 네 환상 속의 그녀를 사랑했지' (정확한 워딩 아님) 헥커씨는 이 말을 듣기 위해 '꾸뻬씨의 행복여행'을 떠나 지구 한 바퀴를 돈 것이다.

 

어디에 누구와 있을 때 행복한가? 둥근 지구를 한 바퀴 돌면 바로 자기가 서 있던 지점이라고 했던가? 결국 지구의 끝은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 클라라와 함께하던 일상,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곳이 거기 있고, 행복 역시 그 자리에 있음을 깨달을 꾸뻬씨.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게 사랑이다. 행복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애써 퍼내지 않는 사랑이 속에서 솟아날 때,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곁에 있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눈. 그 눈을 실은 나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이다. 아그네스를 향한 그리움이 자신이 만들어 낸 환타지였음을 깨달았을 때, 오래 전 아그네스와 사랑을 나누던 시절에도 이미 환타지였음을, 무엇보다 아그네스로 그로 인해서 힘겨웠음을 깨달았을 때 꾸뻬 씨는 적어도 자신의 행복을 찾게 되었다.

 

 

나의 행복은 안녕하신가. 내 사랑은. 나의 사랑들이 내가 제작한 환타지의 틀에 갇혀 고통스러워하진 않는가. 페북의 좋아요 갯수 확인하느라 내 일상의 사랑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진 않는가. 어느 블로거의 명문을 읽느라 '엄마 이거 봐, 엄마 이거 봐'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환청처럼 듣고 있진 않는지. 내 사랑의 안부를 묻는다.

 

 

 

 

 

 

  1. 2015.01.15 02:50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15.01.16 00:20 신고

      댓글 읽다 제가 다 행복해져요!^^
      이 글을 쓰면서 행복의 느낌은 그다지 없었던 것 같아요.
      아니 글을 잘 정리해야지, 잘 써야지,
      여기에 꽂혀서 느낌 자체를 걸 느낄 여유가 없었어요.

      M님의 댓글 읽고나서 무덤덤하게 썼지만 나름대로 쓰면서 행복했구나! 행복하단 얘길 썼구나! 싶었어요.

      기복이 없는, 느린, 잔잔한, 점점 깊어지는, 더 단단해지는.
      그런 행복과 사랑을 하고 싶네요.
      전 그렇게 살고 싶은 것 같아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