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4월 20일,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리볼드는 총과 폭탄으로 무장하고 콜럼바인고등학교에 갔다. 두 사람은 학생 열두 명과 교사 한 명을 살해하고 스물네 명에게 부상을 입힌 다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역사상 최악의 학교 총기 난사 사건이었다.

딜런 클리볼드는 내 아들이다.


저런 책이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서문 시작이 저러하다. 이 책 나오고 온라인 오프라인 서점에서 자꾸만 마주쳤는데, 굳이 클릭하지 사서 읽을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았다. 알라딘 중고서점 놀이에 빠진 탓에 꼭 읽을 책이 아니어도 관심이 있던 책이라면 구매하고 본다. 이런 방식으로 만난 보석같은 저자도 있었다. 기대보다는 조금 불편한 마음으로 펼쳐 읽기 시작했다. 앤드루 솔로몬의 해설이 먼저 나오는데 그걸 그저 빠져들어 읽기를 멈추지 못했다. 밤이 깊도록 읽고, 잠이 들면 악몽을 꾸었다. 예상대로 불편하고도 불편한 책이다. 앤드루 솔로몬의 해설 제목처럼 '평범한 일상에 숨은 공포'가 내 평범한 일상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금방 읽어버렸는데 책이, 아니 가해자의 엄마가 내게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1월을 다 보냈다.


이렇게나 파렴치한 제목이라니. 신간 안내로 이 책을 접한 이후 자꾸 신경이 쓰이면서도 굳이 읽지 않고 마음으로 밀어낸 것은 저 파렴치한 제목 탓이다. 가해자의 엄마라면 입 다물고 자숙해야 마땅한 일.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버젓이 드러내고 내가 가해자의 엄마요! 하며 책을 내다니. 무의식적으로 마음이 밀어냈다. 가해자답게 찌그러져 있어야지, 어디다 대고 공적인 글을 남기느냐! 하는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짙게 깔려 있었다는 것을 책을 읽는 내내 확인했다. (원제는 <A Mother's Reckoning>이다. '가해자의 엄마'는 번역과정에서 붙여진 제목인 듯하다.)  


읽으면서, 다 읽고나서도 쉽게 마음이 추슬러지지 않았다. 내용 자체가 던지는 질문의 무게도 엄청났지만, 제목을 향한 내 반감을 톺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아니 나는) 얼마나 흔하게 착한 편, 피해자, 좋은 나라에 동일시 하는가. 그렇게 쉽게 동일시하고는 나쁜 나라, 가해자와는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다. 뉴스로 접하는 사건, 역사 속에 일어난 일, 심지어 성경의 사건 속에서는 나는 거의 대부분 피해자 석에 앉는다.  오래된 어느 날이었다. 성전에서 기도 드리는 바리새인과 세리 중 세리에게를 읽다가 평생 나는 세리에게 감정이입 해왔다는 것을 알았다. 바리새인과 나 사이에는 바리케이트를 치고 손가락질이나 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러고 있는 나를 깨달았던 순간, 발 아래가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으나 그 이후에도 늘 습관처럼 피해자, 약자, 착한사람에 동일화 된다.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일에서 당연히 나를 피해자 자리에 둔다. 늘 내 중심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생활방식일지 모른다. 성장과 치유라는 주제로 사람들을 만나면서 착한 사람 고치기가 나쁜 사람 고치는 것보다 수십 배 어렵다는 것을 배우고 또 배우고 있다. 무의식적인 자기 규정, 자아상이 '나쁜 사람'일수록 더 빠른 정서적 영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다. 최소한의 뭔가 잘못되었다는 인식-이것이 병적인 자기 죄책으로 신경증의 문제가 되기는 하지만-을 가진 사람이 변화를 위한 문을 열 수 있다. 예수님 말씀,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다. 건강한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하기도 하셨다. Karl Jung이 그의 자서전에서 한 '선에 빠지면 반드시 악해진다'는 말의 뜻일 것이다. 자기 안의 선과 악이 공존함을 인정는 것이 이 온전성을 향해 가는 길이라고 한다. 내 안의 악, 가해자 습관을 인정하기 싫은 마음이 지나쳐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말조차 보기 싫었던 것이다.


책을 추천한 조한혜정 교수의 말처럼 피해자와 가해자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피해자는 가해자일 수 있고, 가해자도 피해자일 수 있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얼마나 불편한 일인가. 피해자의 논리, 상처 받은 자의 입장을 특권처럼 남용해 무례한 말과 행동을 정당화 하기는 또 얼마나 쉬운가.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일 수 있다는 역설적 자기규정으로는 편히 설 자리가 없다. 그런 처지로 한 달을 보낸 것 같다. 안절부절 끝에 마음 깊은 곳에서 겸허라는 싹이 나기도 했다. 안절부절만 하지 말고 의지를 다하여 겸허해야겠다. 피해자이며 동시에 잠재적 가해자인 나여.


사건이 나고 16년이 지나 이 책을 냈다고 한다. 엄마의 말처럼 이상한 가정이 아니었다. 역기능 가정 아니고, 부모가 중독자도 아니고, 부유하지만 검소하고, 아이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특히 아이 교육에 부부가 같은 마음으로 함께 하는 가정이었다. 흔한 '문제 아이 뒤의 문제 부모'라는 논리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 가정의 아이가 무고한 친구들을 총으로 쏴 죽였다면 어느 가정의 아이에게 가해자의 가능성이 없겠는가.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렇다. 그러니 누구보다 엄마 자신이 미칠 노릇이었을 것이다. 박찬욱 감동의 추천사처러 '악마가 되어버린 아들을 이해해보려고 하는 피눈물 나는 헛수고'가 바로 이 책이다.


앤드루 솔로몬이 해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떤 아이가 총격 살해범이 되는지, 이유를 찾고 규정해 놓아야 마음이 편해진다. 특히 부모의 탓이라고 했을 때, '그러면 그렇지. 우리 집에서는 아이에게 그런 나쁜 짓을 하지 않으니 이런 재앙을 겪을 일이 없다'고 안심할 수 있다. 우리가 그 많은 육아서를 읽고, 세바시 강의를 찾아 듣는 이유는 선한 것을 집어 넣으면 선한 결과가 나온다는 믿음 때문이다. 믿고 싶은 간절함 때문이다. 때때로 육아강의를 하곤 하는데, 이 지점에서 늘 조금씩 마음이 어렵다. 이러이런 방식으로 아이와 소통하고 키운다면 아이는 자기 재능을 꽃피우고 자유로운 아이가 되면 궁극적으로 당신은 좋은 부모에 등극할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해줘야 할 것 같은 부담감 때문이다. 그런 것을 말해줄 수 없다면 젊고 초롱초롱한 눈빛의 엄마들이 내 앞에 앉아 있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아이 말을 중간에 끊지 마세요 / 여러 사람 앞에서 아이를 나무라지 마세요 / 따뜻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봐 주세요 / 이런 육아 십계명이 있다. 육아 강의 시작하며 이걸 보여주곤 하는데, 찰칵찰칵 폰으로 ppt 화면을 찍는 소리가 요란해진다.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참 좋겠지요? 이걸 읽고 이런 엄마가 되어야지 결심하고 어린이집 간 아이를 기다려요. 아이 오기 5분 전, 시어머니에게 전화가 옵니다. 얘, 이번 주말에 집에 와서 김치 가져가라. 어머니 저희 일정이 있는데요, 말을 채 꺼내지도 못하고 네네 전화를 끊었어요. 어린이집 갔던 아이가 들어와 떠들기 시작해요. 엄마 오늘 친구가..... 시끄러! 들어가 씻어!" 이 쯤이면 모두 공감한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좋은 엄마됨의 방법을 배운다고 그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도를 닦아서 시어머니 전화에 결코 시험 들지 않고, 아이에게 화 한 번 내지 않고 키운다 해도 기대하는 결과를 보장받을 수는 없다. 이것이 팩트이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육아 책, 육아 강의로 배우지 말란 말인가? 아니다. 그럼에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아이는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 하는 말이지만 하나의 우주이며 미지의 세계이다. 그렇다. 나는 너를 알 수 없다. 가해자의 엄마 수 클리볼드가 피를 토하며 하는 말은 '나는 너를 알지 못했다' 이것이다. 낳았고, 너를 지키며 길렀고, 공들여 너의 인격을 만들어 왔고, 대화 했고, 기도 했는데...... 나는 너를 몰랐다!


가해자 엄마의 말이라 싫어 피하고 싶었던 책을 통해서 꼭 들어야 할 말을 들었다. 육아일기 십수 년을 써 온, 육아 책을 내고 강의를 하는, 신앙도 좋아 기도까지 열심히 하는 엄마인 내가 들어야 바로 그 말을 들었다. 




 







  1. 2018.02.08 10:53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18.02.08 10:55 신고

      잘했어! 아주 잘했어! ㅎㅎ
      읽고나서 읽어.
      그리고 함께 얘기도 하자.

  2. 뮨진 2018.03.04 17:29

    오.. 읽어봐야겠어요!!

  3. BlogIcon 빠오징(寶敬) 2019.12.30 13:06 신고

    추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패터슨 시에 사는 패터슨 씨는 시를 쓴다.

시를 쓰니 시인이겠지만 시만 쓰는 것은 아니니 시인인 것만은 아니다.

패터슨 씨는 패터슨 시를 운행하는 버스 운전기사이다.

패터슨 씨는 월화수목금, 아침마다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일어난다.

포즈는 조금씩 다르지만 자그마한 아내를 품은 채로 아침을 맞는다.

잠든 아내에게 사랑스런 입맞춤을 하고,

아내의 단잠이 깰세라 각 잡아 개켜진 옷을 살짝 들고 침실을 나온다.

우유에 만 씨리얼을 덜렁 앞에 놓고 우그적우그적 씹으며 식탁에 놓이 상냥갑을 관찰한다.

도시락 통을 들고 출근을 하고, 

버스 운행이 시작되기 전, 운전석에 앉아 아침의 영감을 바탕으로 시를 쓴다.

시인 패터슨을 버스 드라이버의 운전석으로 불러내는 것은 동료의 노크이다.

그리고 아침 인사.

안녕, 어때? 어, 사실은 별로야. 

염려와 짜증을 일발장전 하여 살짝 건드려도 다다다다 불평 투하이다.

동료의 염려와 짜증을 뒤로 하고 버스는 출발한다.

코너를 돌고, 작은 폭포 옆을 달리는 패터슨 시의 버스는 뭔가 몽롱하다. 


패터슨 씨의 일상은 라임이 딱딱 맞는다.

아주 작은 변주가 있고, 아침 점심 저녁 일상의 흐름은 월화수목금 운율이 잘 맞는다.

시의 운율은 잘 모르겠다.


시를 위한 시인가, 사랑을 위한 시인가.

시인들을 보면서 나는 가끔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내게 사랑이란 로맨스가 아니다. 

일상이다. 일상의 사람, 가장 빈번하게 얼굴을 마주하고 에너지를 들여야 하는 사람,

에 대한 마음이다.


패터슨의 시는 식탁에 놓인 성냥갑으로 시작하여 아내에 대한 절절한 사랑으로 끝을 맺는다.

패터슨은 정말 아내를 사랑하는 것 같다.

뭔가 철없어 보이는, 아슬아슬한 아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지지한다.

물론 시가 끝나지는 않는다.

다만 시를 적은 비밀노트가 갈기갈기 찢기는 것으로 일단의 시가 끝나게 된다.

아내가 아들처럼 키우는 개에 의해서 패터슨의 비밀노트는 찢어발겨지고 만다. 상실감.

주말에 일어난 일이다.

그 주말은 어떤 주말인가 하면, 패터슨 시의 진가를 알아주는 아내가 복사본을 만들겠다던 주말이다.

혼자 보지 말고, 복사본을 만들어 남기자! 알리자! 이번 주말이다!

아내의 설득에 내키지 않는 오케이를 했던 바로 그 주말이다.


일상과 예술 사이의 성찰 또는 헛갈리을 위해 감독이 놓은 여러 개의 덫에 걸려 들었다.

주말에 열리는 마켓에서 머핀을 팔아 대박 내겠다는 철부지 아내의 바램은 실패가 될 줄 알았다.

패터슨의 시는 주말을 기점으로 어떤 전기를 맞이할 줄 알았다.

시는 잃고, 머핀은 대박이 난다.

어쩌면 패터슨에게 시는 잃어도 좋은 것이다. 

다만 관객에겐 조금 불편한, 손해 보는 듯한 패터슨의 월화수목금 사랑과 일상이 잘 흘러가고 있으니

그게 어디냐.

뜬금없이 나타난 일본 사람이 주고 간 새 노트에 시는 다시 씌여질 것이다.


패터슨을 닮은 한 남자를 알고 있다.

시를 쓰던 남자였다. 

이제는 시를 쓰지 못한다.

시 대신 말을 빚어 공기 중에 흩어 놓는 것이 그의 일이 되었다.

주말 밤 거실 바닥에 찢겨 흩어진 패터슨의 비밀노트가 차라리 명예로우리.


패터슨의 시가 사라져도 버스 운전사 패터슨의 

아무렇지 않은 일상은 아름다운 영화가 되듯

패터슨 닮은 남자의 떠벌이지 않는 사랑 역시 마지막까지 남을 아름다움이다.


그 남자의 비밀노트, 어렵게 고르는 말의 명예를 지켜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 없지만.

글과 말이 사라져도 고이 남겨지고 지속되는 일상이 있으니........








2017년 나의 '올해의 저자'는 '강상중'이다. 남편이 사들인 소설 몇 권 중 제목 때문에 집어든 <마음>이 첫 만남이었다. 정치사상사를 전공한 재일 학자의 첫 소설이라니! 이런 사람의 마음엔 어떤 소설이 들어 있을까? 첫 페이지 [한국의 독자들에게] 쓴 서문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로 시작하더니 세월호로 잃은 우리 아이들, 그리고 가족들을 위로하는 것을 맺으니 계속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이란 제목을 달고 어찌 죽음에만 붙들려 있는지, 썩 공감은 되지 않는 상태로 마지막 장을 덮었다. 그리고 알라딘에 들어가 '강상중을 검색하기'를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여섯 권의 책(가족 이야기를 쓴 <어머니>도 있는데 사진에 못 담았다)으로 강상중의 사유를 추적하며 늦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맞았다. 마음의 강 바닥에서 맞닥뜨리는 것은 죽음이고 또 죽음을 불러일으키는 악이라는 듯. 모든 책에서 죽음과 악을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악은 대부분 시대의 옷을 입고 개인 앞에 등장한다. 정직하게 마주한 마음 안에는 무의미와 불안이, 그것을 유발한 이유를 찾아 두리번거리자니 자아에 갇힌 개인의 욕망과 시대의 악이, 때로 국가 권력과 결탁한 노골적 거짓이 보인다. 강상중의 책에서 보이고 지금 내 현실에서도 보인다.

마지막으로 읽은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의 마지막 챕터는 필사를 했다. 내용이 좋은 곳은 많아서 책마다 붙여 놓은 포스트잇이 다닥다닥이다. 조금 깊이 마음에 담고 싶어서, 만남의 여운을 좀 가지고 싶어서 필사 했다. 문장이 좋은 글 위주로 가끔 필사를 하곤 하는데, 글쓰기 향상을 위한 실용적인 공부이다. 이번 필사는 일종의 목례였다. 그의 내밀한 사유와 성찰을 일방적으로 관람한 것이 되지 않으려고, 예의를 갖춘 무엇인가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좋은 책에 대한 최고의 답례란 정성스런 리뷰이겠으나 그러지는 못한다. 뭐랄까, 사실 서평을 유발하는 책도 아니다.

예를 들어, <살아야 하는 이유>를 읽고 딱 부러지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게 되는 것이 아니고,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을 읽는다고 힘이 불끈 솟는 것도 아니다. "계속 살아야지 어쩌겠어. 무의미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불안과 악을 회피하지 않고 견뎌야지, 뭐 어쩌겠냐고" 희망을 주되 포기하지 않을 만큼의 희망만, 힘을 주되 코앞의 부조리를 견딜 힘 정도만 주는 고약한 책이다. 그래서 좋은 책, 좋은 저자였다. 매일 흔들리고, 매일 좌절하고, 늘 포기하고 싶은 이대로 가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확신 만큼은 주기 때문에. 고민하는 힘은 살아갈 힘이다.

'세간(世間)'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을 강상중은 세간에서 찾는 것 같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들을 분석하며 말한다. '하지만 소세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세한 일상, 아무래도 좋은 세상 사람들의 심정이나 감정 그리고 인간관계 속의 밀고 당기는 모습 등을 섬세하게 그렸습니다. 실은 바로 거기에야말로 사회가 생생하게 투영되어 있습니다. 소세키는 틀림없이 사회와 국가를 생각하기 전에 '세간'을 생각했습니다. 라고 한다.

혁명적인 로맨티스트는 세간을 무시하고 모멸합니다. 세간 따위는 단순한 질곡에 지나지 않으니 언급한 필요도 없다며 멀리 내던지고 고매한 이상만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요. 자연주의 문학도 마찬가지로 세간을 원수처럼 취급하며 자신이 독을 품은 세간의 이빨에 얼마나 크게 상처 입었는지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는 일종의 로맨티시즘으로 결국에는 악으로 귀결되고 맙니다. 근본적으로 세계는 타락하고 만다는 저주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치즘에도 이러한 경향이 있습니다. 유대인이 세계를 타락시켰다고 악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지요.  


결국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은 세간을 마주하는 힘이다. 라고 쓰고 나니 어떤 글귀가 자꾸만 맴돈다. 

현재를 사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
현재를 사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이 없는 줄 알기에.
이 고통스럽고도 행복한 거룩한 현재를 겸허히 끌어안는다.

마포나루에는 언제 찾아가도 늘 현재로 흐르는 강물이 있다.
거룩한 현재가 있다.


민망하게도 <나의 성소 싱크대 앞> 에필로그로 내가 쓴 글이다. (아, 나도 알고 있다.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간을 응시하고 살아내야 한다. 다시 강상중이 말한다.


그가 응시하고 있는 '세간'이란 형명 투사나 가부장적인 폭군과는 거리가 먼 가족이나 친구 관계였으며, 달리 어찌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얽매임이나 애증의 인간관계였습니다.


샤이니 종현의 예기치 않은 죽음으로 채윤이가 며칠 째 밥도 잘 먹지 못하고 눈물 바람이다. 충분히 알 것 같은 슬픔이다. 제대로 귀 기울여 음악 들어보지 못한 나도 순간순간 마음이 아득한데 아이의 마음이 어떨까. 너무도 아까운 생명을 너무 속절 없이 잃고 있어서 무력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강상중 선생도 아들을 잃었다. "이런 비참함 속에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라는 질문을 계속하던 끝에 아들은 결국 돌아오지 못할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라고 했다. 어쩌면 종현도 비슷한 이유일 거라 생각해서인지 꿈에 강상중 선생과 종현이 함께 나왔다. 마음과 죽음과 악의 문제는 여전히 우리들 세간에 있는 실존이다. 어제 아침 막막함으로 펼친 메시지 성경 히브리서에서 나 보란 듯 이런 말씀이 적혀 있었다.


그분께서 이 모든 고난을 겪으신 것은, 천사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같은 사람들, 곧 아브라함의 자손을 위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모든 면에서 인간의 삶에 들어오셔야만 했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의 죄를 없애는 대제사장으로 하나님 앞에 서실 때, 이미 모든 고난과 시험을 몸소 겪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도움이 필요한 곳에 도움을 베푸실 수 있습니다. (히 2:16-18, 메시지)

 








볼 영화는 결국 보게 되어 있고, 놓친 영화는 내 것이 아니다. 이쪽으로 이사 온 후에 놓치는 영화가 많아졌는데 그러려니 하고 있다. 영화 뿐이겠는가 일도 사람도 결국 만나지는 것이 내 것이다. 성사시키려 애쓰기 보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가, 만나고 싶은가'를 묻고 시간과 상황의 흐름을 타는 것이 제일이다. <다시 태어나도 우리>를 보려고 검색하고 시간 맞추고, 심지어 어떤 날은 서울까지 나가기도 했는데 보질 못했다. 사당역 근처에서 모임이 있었다. SNS에 몸을 맡기고 놀다 얻어 걸린 책모임이었다. 오래된 책모임이 있는데 모임 시간 맞추는 것이 쉽지 않아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는 걸 생각하면, 한 방에 시간도 맞고 마음도 가는 책모임은 '내 것'인 셈이다. 당일 이수역 아트나인의 상영시간을 검색하니 <다시 태어나도 우리> 마치는 시간이 모임시간 15분 전이다. 죽어라 뛰면 시간에 맞출 수 있겠다! (일타쌍피 짜잔) 

 



영화 마치고 극장에서 모임장소까지 순간 이동한 느낌으로 달려갔다. 생각해보면 책모임 내내(거의 3시간) 인도와 티베트 눈덮인 고산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약간 달뜬 상태로 모임에 앉아 있었고 책 얘기를 했지만 정신은 훨씬 더 넓은 세계를 오가고 있었다. 세 시간여의 모임은 영화의 연장이었는지 모른다. 정작 관람 중에는 몰입이 잘 되지 않았었다. 잔잔한 다큐영화인데 옆좌석 여자분이 중간부터 계속 울어대는 것이다. 반작용으로 나는 더욱 차가운 이성의 불을 밝히고 관람하게 되었다. 담담히 보고 잔잔히 감동 받았기에 천천히 걷고 싶었지만 미친 여자처럼 15분을 뛰어 약속 장소로 가며 묘한 느낌이었다.   


벌써 자기 생에 이름을 붙이고 확고한 길을 가고 있는 맑은 눈동자의 아홉 살 인격 앙뚜, 어린 제자에게서 높은 스승의 영혼을 감지하고 그의 길을 열어주는 것에 삶을 건 주름 가득한 얼굴의 노승 우르갼. 극(drama)이 아니다. 말 그대로 다큐다. 두 주인공 각자의 생애 또는 둘이 하나 되어 사는 춥고 먼지 나는 일상에 합장하고 머리를 조아리게 된다. 숭고하고도 아름답다. 윤회나 환생의 종교적 믿음과 별개로 깊은 울림을 주는 영화이다. 노승 우르갼의 요란할 것 없는 자기증여와, 어린 앙뚜가 린포체로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순명의 태도에서 구도자의 모습을 본다. 구도의 길이 산과 눈보라에 막혀 있어 막막할수록 두 사람 사이 오가는 그 무엇이 더욱 절절하게 다가온다. '그 무엇'이다. 이것은 사랑, 헌신, 신뢰, 가르침과 배움, 정(情)...... 무엇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따스함이다.  




스승에 대해서 생각한다. 한때는 제 때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한 내 인생, 안타까웠던 적도 있다. 존경하고 신뢰하며 스승으로 여겼던 사람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고 경악하여 방황하던 날도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스승은 참 많았다. 스승은 만날 수 있지만 제자는 구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금방이라도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스승님이 많다. 물론 그분들 중에는 내가 당신의 제자인 줄 모르는 분이 허다하지만. 그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없다 여겨지는 분이 많다. 여기저기 영성심리 배우기 위해 들쑤시고 다닌 곳에서 만난 선생님들 그렇고, 에니어그램 세미나를 들으러 오셔서 자기를 나눠주며 오히려 가르침을 주고 간 분들이 그러하다. 책으로 만난 스승님이야말로 이루 다 셀 수가 없다. 실은 나를 가장 많이 성장시킨 스승은 지독히도 나를 괴롭히던 사람이다. 아무튼 오늘의 내 강의과 글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님을 인정한다. 나를 스쳐간 내가 통과해왔던 스승님들의 덕이다.


앙뚜와 우르갼은 묘한 사제지간이다. 앙뚜는 전생의 높은 스승이 환생하여 태어난 린포체라 하니 늙은 우르갼에게 지극히 높은 스승이다. 어린 앙뚜는 우르갼의 보살핌과 가르침이 없다면 아홉 살 무력한 아이일 뿐이니 진정 우르갼의 제자이다. 둘 사이 스승이며 제자이고 제자이며 스승인 묘한 관계이지만 피차에 스승연(然)하는 자의식은 없다. 라면을 끓여주고, 청소를 하고, 불경을 공부하고, 삐딱하게 굴고, 막막하게 먼산을 바라보는 스승과 스승, 스승과 제자의 일상이 숭고하게 다가오는 이유같다. 그저 보이는 것만 보면 늙은 의사와 어린 아이인데 서로에게서 스승을 본다. 서로가 가진 가장 높은 것을 본다. 이것은 '당신 안의 신을 경배한다'는 라마스떼, 지극한 존엄의 태도 아닌가.




항상 스승을 찾아 헤매는 나는 이번 학기에 강의 하나를 신청했었다. 두 번 가고는 다시 발길이 움직이질 않아서 못 가고 있다. 강의 신청을 해서 실패하는 적이 거의 없다. 강의로 벌어서 강의 듣는데 쓴다해도 본전 생각나는 일은 별로 없었다.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자의식이 강한 강사에게는 새로운 정보가 많이 흘러나온다. 그런 의미에서는 얻을 게 많다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러했다. 참고하는 모든 책의 저자의 주장을 끌어와 자기를 화려하게 치장하는 듯한 태도에 나는 나의 무엇을 투사하는지, 들어주기가 불편했다. 지난 학기까지 4학기 철학상담을 들으며 정말 어려웠다. 못 알아듣는 말이 반이었다. 강의가 어려운 이유는 교수님이 단정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만 어느 하나가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말 할 수는 없다, 는 식이었으니까. 철학은 그럴 수 밖에 없고, 단정지을 수 밖에 없는 학문이 있기는 하지만.


가르치려는 사람은 스승이 될 수 없다. 일반화 할 수는 없겠다. 적어도 나는 자기확신에 차서 가르치려는 자를 스승으로 삼지 않는다. 나의 오늘을 있게 한 스승이 많지만 그들 대부분은 자신에 내게 가르친 것을 모를 것이다. 나를 감동시킨 자신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서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스승이란 무엇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내 존재를 걸고 싶은 그런 사람일지 모른다. 우르갼에게 앙뚜처럼 말이다. 또 스승은 무력한 자에게 유일하게 기댈 언덕일지 모른다. 앙뚜에게 있어서 우르갼처럼. 그렇게 서로에게 스승이 되는 만남이란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가. 기꺼이 나를 내어줄 수 있는 스승을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 저 두 사람처럼. 춥고 가난한 삶과 앞이 보이지 않는 눈보라 길을 헤치고 가는 여행이라 해도 행복한 사람들이다. 나라고 그런 스승을 못 가질리 없다.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제목을 스토리에 맞게 바르게 고쳐 쓰시오. (정답 : 기억을 틀리다)


원제 <The Sense of an Ending>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우리말 제목이 되었다. '혹시 내게도 저런 치명적인 기억의 오류가 있진 않을까?' 막 더듬어보게 하는 영화이다. 극장을 나서는(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는) 관객(독자)의 머릿속에 '기억'이란 두 글자가 포인트 40으로 새겨질 것을 예상한 원저자가 더 멀리 던지는 화두일지도 모른다. 'The Sense of an Ending'은. "바보 관객들아, 기억 얘기가 아니야!" 기억의 왜곡으로 인한 충격적 반전으로 사람 놀래켜 놓고선 '기억'이 아니라 '예감'의 문제라고? 아무튼 나는 원제목(동명 소설)과 번역된 제목 둘 다 마음에 든다. 한참 전에 예고편과 함께 무엇보다 제목에 끌려 목록에 담아 둔 영화이다. 결국 영화 속에선 예감은 있었으나 기억은 틀렸다. 예감은 그러니까 결말에 대한 예고는 영화 곳곳에(원작인 소설에선 더더욱 정교하게) 흩뿌려져 있다. 다만 그것을 읽어낼 감각이 없어서 결말에 관해 잘못 짚은 것이다. '잘못 짚은'의 주어는 주인공이고 '나'이며 또한 우리이다. 말하자면 뿌린 대로 거두게 되는 인생에서 제가 무엇을 뿌렸는지 모르기에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짚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독(毒)을 뿌려놓고 선(善)을 뿌렸다고 착각할 수 있음이다. 착각점이 정확히 (기억의) 왜곡점이다.


친할 뿐 아니라 선망하던 친구 아드리안이 헤어진 여자 친구 베로니카와 사귄다는 소식을 듣는다. 친구 아드리안이 직접 편지로 알려온다. 주인공은 '그러든지 말든지'라는 식의 엽서를 보냈다고 기억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영화의 반전이다. 지질하게 비아냥거리고 저주를 퍼붓는 내용을 주절주절 써서 답장을 보낸 것이다. 노년이 된 토니. 베로니카 엄마의 유언장이 등장하며 자연스레 수십 년 전 애정사를 복기하게 된다. 물론 추억 속 그녀 베로니카를 만나게 된다. 추억(기억)을 더듬고, 사실(나 아닌 상대의 기억)을 확인한다. 알고 보니 편지에 담은 저주처럼 친구 아드리안은 여친의 엄마와 섹스를 하고, 그리하여 여친의 동생을 낳았고, 그 때문인지 어쩐지 친구는 자살하고 말았다. 그런데 주인공은 토니는 평생 쿨하게 보낸 엽서의 기억만 가지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틀린 기억을 가진 주인공은 그 일과 무관하게 무난하게 살아왔고, 그가 잊은 기억을 사실(현실)로 살아야 했던 여자 친구는 미스터리에 가까운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추측된다). 고교시절 전학생 아드리안이 수업 시간에 했던 인상 깊은 말들이 고스란히 영화의 명대사로 남고, 결말에 대한 예감이다.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패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죠." 


영화든 현실이든, 영화같은 현실이든 갈등은 뿌린 것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튀우는 싹이다. 잘 짜여진 화에서는 반전이 있고 다소 충격적인 볼 만한 이야기가 되지만, 현실의 왜곡된 기억과 파괴적인 결과는 흔하디 흔하며 고통이다. 불편한 관계 풀자고 만난 자리에서 이런 대화는 얼마나 흔한가. 난 정말 그런 뜻이 아니었어, 그걸 그렇게 이해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 아니야, 너가 정말 그렇게 말했어, 내가 정말 그랬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난 그렇게 말한 적이 없어. 무슨 소리야 내 귀로 똑똑히 들었는데. 어린 시절 상처받은 기억으로 오래 아파하다 '미안하다' 한 마디 듣고 싶어 용기를 내는 딸들을 안다. 엄마,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 어린 애한테 어떻게 그런 일을 시킬 수 있어? 어저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어? 과연 사과의 말을 들을 수 있을까? 미안하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었어. 그땐 엄마도 어렸단다. 정말 미안해. 엄마를 용서해주겠니? 라고 말해주는 엄마가 얼마나 될 것인가. 나는 그런 적이 없다.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이제 와서 트집이다. 나는 너를 사랑해서, 사랑 밖에 준 것이 없다. 더 큰 상처로 끝나지 않으면 다행이다. 차라리 내 기억을 수정하는 것이 그 사람과 화해하는 유일한 길인지 모른다. 


주인공 토니는 어쩌다 그런 (너무도 단순하여) 치명적인 왜곡된 기억을 가지게 되는가? 이 질문 끝에 영화 <윈터 슬립>이 생각났다. 착하고, 이웃에게 해 끼치지 않고, 도덕적으로 올바르다는 면에서 두 주인공이 크게 다르지 않다. 윈터슬립의 주인공 아이딘이 가진 것이 많아서인지 더 견고한 자기의(義)의 성을 쌓은 것 같기도. 토니는 그다지 나쁠 것 없는 사람, 충실한 사람이다. 임신한 (싱글맘) 딸의 출산교실에 함께 가주고,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불평 없이 하는 사람, 이혼했을 망정 전부인과도 그럭저럭 잘 지낸다. 그런데 딸과 부인의 입장에선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지금 내 앞에서 내게 일어나는 일이 가장 중요한 흔하디 흔한 자기 몰입의 사람이다. 고등학생, 대학생 때도 그랬을 것이다. 올바르고 친절하고 다소 소심하게 살지만 나무랄 것 없는 삶이기에 더욱 반성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자기 바운더리 안에서 착하고 충실하지만 아침마다 만나는 집배원에게 보통의 사무적인 친절 그 이상을 베풀 줄 모르는 사람이다. 영화 마지막에 집배원을 향해 말 한 마디 건네게 되는 변화는 전부인에게 사과하는 장면보다 더 큰 회심이라고 나는 느꼈다. 그의 독백처럼 그는 '승자도 패자도 아닌 상처를 기피하며 그것을 생존능력이라 부르는 사람'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승자도 패자도,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니라 오직 상처받지 않기 위해 기억 위에 색을 칠하고, 덧칠하며 생존을 유지할 뿐이다. 


내적 성장을 위한 에니어그램 여정을 이끌며 '기억의 치유' 없이 성장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기억이 사실이서가 아니다. 기억은 경험 그 자체가 아니다. 경험을 해석하는 방식이 문제이다. 해석의 틀에 갇힌 있는 그대로의 경험을 찾아보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 틀, 어떤 경험도 묽은 밀가루 반죽으로 해체시켜 부어버리는 자기만의 붕어빵 틀을 발견해야 하는 문제이다. '기억도 그렇습니다. 옛날 일이라는 것은 벌써 지나가버렸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바꾼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실은 당신이 과거의 사건을 회상할 그때그때마다 당신의 과거는 개정판으로 다시 쓰이는 것입니다' 라는 우치다 타츠루의 통찰에 동의한다. 성장한다는 것은 나의 이야기를 다른 관점으로, 그야말로 개정판으로 다시 써가는 일이다. 토니가 자신의 왜곡된 기억을 확인하고 베로니카에게, 전 부인에게 진심의 사과를 건넬 수 있었을 때, 그의 일상이 달라졌다. 저주의 편지를 썼던 행위 자체만이 아니라 자기중심성의 기억으로 살아온 존재 자체에 대한 회한일 것이다. 참된 자기성찰은 자기혐오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이해와 수용으로 향함을 안다. 내 붕어빵 틀이 이토록 터무니없이 확고하다면 당신이 찍어내는 기억의 붕어빵 역시 견고한 고유함이리라. 내가 모르는 아픔과 기쁨이 담긴 화석 같은 것이리라. 당신도 나처럼 상처를 피하기 위해 한 조각 기억을 붙들고 그 위에 색칠하고 덧칠하며 살고 있구나. 황혼을 사는 토니 일상의 작은 변화, 집배원에게 건네는 커피 한 잔이 내게는 참 좋았다. 그 변화가 참 좋았다.  






영화 <내 사랑> 리뷰이다. 정성들여 길게 쓸 생각은(자신이) 없다. 영화보다는 관람 후 뒷풀이(사실 앞풀이 뒷풀이 뒷뒷풀이)의 여운이 진했던 날이라 영화와의 만남은 실제 만남에 묻힐 수 밖에 없었다. '영화 좋은데 언니들 만나서 더 좋네'로 끝났다. 관람 후 일주일, <덩케르그>를 봤는데 관람 후 한두 시간은 스크린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바닷속에 잠긴 듯했고, 전투기를 조종하느라 창공을 헤집고 다니는 듯했다. 저녁 먹고 앉아서 (아들) 현승이가 '엄마, 덩케르그 영화 좋아?' 하는데 '그냥 그래' 하는 대답이 나왔다. '아까는 나도 보라며?' '어, 처음에는 뭔가 강렬했는데 지금은 엄마가 그 영화를 봤는지 조차 기억이 안 나. 오히려 지난 주에 본 영화 <내 사랑>이 자꾸 떠올라. 그 영화가 좋았나봐. 엄마한텐 이런 게 좋은 영화야'라 말하고 보니 그제야 <내 사랑>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래도 리뷰 쓸 에너지는 없었다. 교회 수련회며 강의 일정도 많았고, 읽어달라는 책이 유난히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 터라. 그런데 못내 이렇게 어설픈 끄적임을 시작한 것은 순전히 홍보문구 때문이다. [한 여름 밤의 사랑 이야기, 에단 호크*샐리 호킨스] '아닌데, 로맨스 영화 아닌데' 처음엔 그냥 지나쳤다. 극장과 뉴스 밖에 안 뜨는 페북 뉴스피드에서 '한 여름 밤의 사랑, 한 여름 밤의 사랑......' 자꾸 보니 신경질이 났다. '아니라고오! 로맨스 영화 아니라고오!' 하다 결국 블로그 글쓰기를 클릭했다. 고아 출신의 괴팍한 외톨이 남자와 류머티스 관절염으로 신체적 핸디캡을 가진 천재 예술가의 로맨틱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아니 뭐, 그저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한 발 양보하여 결과론적 로맨스 영화라고 하자. 


모드의 얇고 틀어진 다리, 그 다리를 삐칠삐칠 걷는 뒷모습이 잊히질 않는다. 가정부 일자리를 찾아 아슬아슬한 걸음걸이로 에버릿의 작은 집을 찾아가고, 거절 당하고 돌아서 삐걱삑걱 또 걷는다. 그 성치 않은 다리가 편히 쉴 곳이 있었으면 싶은데 내내 그러질 못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영화 마지막 에버릿이 했던 말처럼 나는 내내 모드를 '부족한 사람'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바라보았다. 감독의 낚시질에 보기 좋게 걸려든 셈이다. 영화의 스토리를 이끌고 가며 동시에 모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열어 나가고 궁극적으로 에버릿을 다른 세계로 끌고 가는 것은 그녀의 부족해 보이는 걸음이다. 그러니까 에버릿이(우리가, 내가) '부족함'이라고 보는 모드의 부족함이 그녀 자신에게는 치명적 핸디캡(부족함)이 아닌 것이다. 영화 초반부 고모집에서 눈칫밥 먹으며 사는 중에 클럽에 가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장면은 엄지 척이다. 손에 손을 잡은 커플들 사이에서 어눌한 몸 그대로, 흥에 겨워 흔들거리는 슬프도록 당당한 모습이라니. 파트너가 없거나 자유롭게 춤출 수 없는 몸 같은 것들이 아무 문제 되지 않는 클럽의 밤이다.


고모의 핍박, 친오빠와 고모의 파렴치한 계략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 발로 걸음을 멈추지 않는 모드. 시키는대로 하면 편안히 앉아 밥 얻어 먹을 수 있는 고모집을 떠나 가정부로 들어가는 모드. 그런 모드는 (아무리 딱해 보여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모드'이다. 그러니 이 영화는 '내 사랑'이 아니라 '나 사랑' 모드라고 말하고 싶다. 결국 이 영화는 로맨스 영화가 아니라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걸음을 멈추지 않는 처절한 이야기, 모든 인생이 그러하듯 해피앤딩인 듯 새드앤딩인 듯 해피앤딩 같은 먹먹한 결말의 이야기이다. 서서히 모드를 대하는 모드가 바뀌는 에버릿의 모드는 모드 자신의 자기 사랑 모드에서 비롯한 것이다. 신체적인 장애에 굴하지 않고 느릿느릿 가정부 일을 하며, 인간적인 모욕에 굴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며 자존심을 지켜내는 모드의 '나 사랑'이 결국 에버릿을 구원하는 것이다. 고아로 태어나 '사랑'이라는 기반을 가지지 않은 에버릿에게 사랑의 실재, 사랑의 가능성, 사랑의 희망 같은 것을 전염시키는 것. 





'자기사랑'이라는 기반 없이 타인을 사랑할 수 없다. 예수님도 말씀하시지 않았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정희진 선생은 '나를 경유하지 않은 타자의 시선은 없다'라고 한다. 같은 얘기이다. 나를 수용하는 만큼 타자 수용이 가능한 것이고, 자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타인을 품어 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누가 부족하고, 누가 온전한 사람인가. 영화에서 죽음에 임박한 고모가 말한다. '네가 우리 가족 중에 가장 잘 되었구나(잘 살고 있구나? 행복하구나? 온전하구나?)' 젊은 시절, 모드가 낳은 아이를 모드의 동의없이 입양시켜 버린, 모드의 존재 자체를 부족함으로 규정했던 고모의 말이라니! 


'나는 왜 당신을 부족한 사람이라 생각 했을까' 에버릿의 회한 가득한 고백에 나의 마음도 담는다. 모드는 예쁜 구두를 좋아한다. 예쁜 구두를 보고 눈을 떼지 못한다. 틀어진 다리, 볼품 없는 걸음 걸이에 '예쁜 구두'를 욕망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눈길로 바라봤던 것을 고백한다. 보이는 것의 '번듯함'에 매인 나로서는 시각적 부족함 너머를 보는 것이 어렵고 부끄러운 숙제이다.  나 자신이 되어 연애하기(사랑하기, 엄마하기, 신앙하기) 동어반복을 하며 강의하고 떠들고 다닌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나는 자주 실패한다. '보이는 번듯함'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모드의 걸음걸이가 자꾸 떠오르는 이유이다. 싫고 거북하여 자꾸 그리로 향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가장 인상 깊었다고며, 엄지 척이라며 추켜세웠지만 한편으론 거북하고 싫었던 장면. 삐뚜룸한 몸으로 흔들어대던 클럽에 간 모드를 자세히, 오래 바라볼까. 예쁘게 보일 때까지? 그러다보면 '너도 그렇다. 부족하지만 너도 예쁘다' 내게 말해줄 수 있을까.



 





  1. 2017.08.27 22:56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17.08.29 01:14 신고

      주일에 쭈 가족이 교회에 왔었어.
      짧은 시간 만나고 갔는데,
      만남의 여운이 길어서 이런저런 생각하다 쭘 생각에 이르렀네.
      문득문득 그립고 생각나고 보고싶은 것은 똑같아. 그리운 만큼 쭘 위해 기도 한단다. ^^

  2. 효정 2017.09.03 23:42

    저도 이 영화 인상깊게 보았습니다:)
    모님의 영화리뷰가 더 좋습니다

    • BlogIcon larinari 2017.09.04 22:55 신고

      일명 '꿈보다 해몽' 리뷰.
      또는
      일명 '영화 얘기 어디 가고 지 하고 싶은 얘기만' 리뷰. ㅎㅎ

  3. 네임 2018.11.16 14:38

    이 영화리뷰 보고 기대를 많이 품고 영화를 봤는데 전 생각보다 영화가 그저그랬는데 다시 리뷰를 읽어보니까 또 리뷰가 너무 좋은 거예요. 영화 보다 좋은 리뷰예요 ㅎㅎㅎ 이 리뷰는 한번씩 와서 읽어보고 싶은 그런 리뷰예요.

    • BlogIcon larinari 2018.11.25 08:53 신고

      감사합니다! 리뷰 보고 영화 봤는데 영화가 정말 좋았단 말씀보다 저는 더 좋네요!^^ 님의 말씀에 저도 다시 한 번 봐야겠어요.



작년 이맘 때 기대와 설렘 가득 안고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집>을 집어 들었었다. 미국 오가는 비행기 독서용으로 선택했는데 결국 1년째 미완의 독서로 남아 있다. 야금야금 하나 씩 어쨌든 눈팅은 다했다고 볼 수 있다. 750 페이지 30여 편을 차례차례 꼼꼼히 읽었다 해도 '미완'의 느낌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내내 '흠..... 긁적긁적.....' 하는 읽기였으니까. 그러면서도 딱 내려놓을 수 없는 매력으로로 일 년째 '읽고 있는 중'의 도서로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와중에 장편 <현명한 피>가 IVP에서 번역돼 나왔다. '다 읽고 사기'의 책구매 원칙을 지키고자 허벅지를 찌르고 있었으나 단편집에서 만난 인생소설 <좋은 사람은 드물다>의 감동을 복기하고는 홀린듯 장바구니에 담고 말았다. 


내가 이걸 읽으려고 작년에 그렇게 화장실 들어갔다 뒷처리 안 한 느낌으로 플래너리 오코너를 끼고 있었구나! 어쨌든 오코너와의 라포 형성이 충분히 된 덕에 시간적, 정서적 낭비 없이 <현명한 피> 속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일이 되려면 이렇다. 가방에 든 <현명한 피>의 마지막 챕터 쯤에 책갈피가 꽂혀 있는 시점,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이 이름을 발견! 플래너리 오코너? 장거리 운전으로 몸이 뒤틀릴대로 튀틀리는 순간 팟빵을 털다 얻어 걸린 꿀잼이었다. 이동진은 내게 가끔 새로운 '정보'를 주는 고마운 '님'이지 '페이보릿'은 아니다.  피상적 차원에서 척척 대화가 통하지만 깊은 공감의 대화는 어려울 듯한 친구. 아는 것이 많아 입을 헤 벌리고 듣게 되지만 돌아서면 조금 공허한 그런 친구 같다. 동질성보다 이질성에서 더 많이 배우는 것을 알기에 가끔은 애써서 참으며 듣곤하는데 이번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들었다. 우주가 도와서 플래너리 오코너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느낌이다.


옮긴이의 말처럼 이 책의 주제는 '죄와 구원'에 관한 문제이다. 죄와 구원의 문제는 종교인들의 고민이다. 아니다. 정작 종교인들은 죄와 구원이라는 본질을 고민하진 않는다. 그로 인해 파생된 두려움에 사로잡혀 엄한 곳에서 허튼 희망을 찾는 사람이고, 그 환상을 밑천 삼아 입에 풀칠 하는 사람이다. 죄와 구원의 문제를 고민하는 자는 구도자, (필연코) '외로운' 구도자일 터.소설의 헤이즐 모리츠는 (아무리 봐도 약간 돌아이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구도자이다. 순회 설교자인 할아버지(독침을 숨기고 다니는 말벌같이, 머릿속에 예수를 담고 세 개 군郡을 운전하며 다녔던 성마른 노인)을 따라다녔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두 살 이 될 때까지는 자신도 역시 설교자가 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의 모리츠는 '예수를 피하는 길은 죄를 피하는 것'이라는 깊고 검은 침묵의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의 설교자가 된다. 자칭 '현명한 피'를 가진 에녹은 또 얼마나 부적응적이고 멍청한 인간인가. 돈을 위해 가짜 맹인 설교자 행세를 하는 호크스가 설파하는 죄와 구원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종교이다. 등장인물 중 적응적 인간은 단 한 명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현명한 피> 안의 죄와 구원은 모두 뒤틀려있다. 각자 나름대로 죄와 구원을 독해하고 배역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현명한 인간이라곤 없다. 현실 속 죄와 구원, 그것을 아우르는 신앙은 어떤가.


대학 친구들 모임에서 목회자인 남편과 관련 우리 부부의 이야기가 수다의 주제가 된 적이 있다. 숨통을 트기 위해 현실도피용으로 가지고 있는 나의 장래희망 카드를 하나 내놓았다. 마침 장래 계획에 관련된 전문가 친구가 둘이 앉아 있었다. 둘 다 크리스천이었는데 한 친구는 자칭 기복신앙에 보수적 신앙관을 가졌다. 목회자에게 잘 하고, 교회 봉사는 일단 열심히 해야 복을 받을 것 같단다. 다른 친구는 개인적 경험으로 인해서 목회자(부부)에 과도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천하에 상종 못할 부류가 목회자인 것처럼. 재미있는 것은 우리 부부의 조금 파격적인 장래 목회 계획을 들은 두 친구의 반응이다. 자칭 기복주의에 보수적인 신앙을 자처하는 친구는 '너희 자신을 믿지 마라. 너의 남편도 결국 사람이다. 사람 어떻게 별할 지 모르고, 사람 욕심이란 끝고 없다. 쉽게 생각하지 마라.' (집에 있는 뭣도 모르고 단잠 자고 있었을 우리 남편은 의문의 1패)  반면 목회자 알러지 있는 친구는 '신실아, 너라면! 네 남편이라면 무조건 잘 할 거야. 무조건 잘 할 것 같아'였다. (남편 의문의 2패?)


목회자에게 무조건 복종하기로 결정한 친구는 제 친구 남편인 목사가 무조건 미덥지 않다. (근거는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존재이기에) 세상 모든 목사들을 일단 의심하고 보는 친구는 내 친구의 남편인 목사는 무조건 믿을만 하다. (근거는 내가 좋아하는 친구의 남편이니까)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엉뚱하게도 나는 소설을 읽으며 두 친구를 떠올렸다.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를 설파하고 예수를 부정하기 위해 부러 죄를 짓는 사람과, 그에게 죄의 냄새를 맡고 회심을 종용하는 거짓 맹인 설교자. 목사님은 주의 종이니 언터쳐블의 존재라 믿는 것과 모든 목사를 잠재적인 장사꾼으로 보는 것이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두 친구에게서 나는 본다. 맹신 이면의 냉소와 불신, 극단적 불신 이면의 불안과 두려움을. 어찌하여 볼 수 있는가, 내 안에 맹신과 불신 / 극단적 불신과 두려움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오코너의 소설이 불편한 이유는 이것이다. 인간 내면의 이 불편하고 불온한 공존의 감정을 확인시키고 또 확인시키기 때문이다. 결국 해결해주지도 않는다. 아니, 해결해준다. 충격적인 방식으로! 단편으로부터 이어지는 오코너 소설의 충격적 결말들은 다시 확인시킨다. 모순과 역설은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두 친구는 물론 소설 속 등장인물은 모두 내 안에 있다. 역자의 말대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내가 이렇게 살다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를 좇는 헤이즐 모리츠의 그로테스크한 삶과 죽음을 따를까 겁이 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오코너가 동시대 개신교의 빗나간 열정을 풍자한 소설이라는 평이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개신교 천주교가 아니라 '종교'라는 이름으로 눈 먼 사람, 종교라는 이름으로 오직 자아숭배에 몰두하는 사람을 직접, 가까이서 경험하지 않고는 이런 인물설정은 가능하지 않다. 아니 결국 자기 안에서 발견했을 테지. 충격적인 소설 <좋은 사람은 드물다>의 할머니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앎, 자신의 모든 것에 '성찰'이란 할 줄 모르는,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편견을 종교의 이름으로 스스로 세례주어 합리화 한 좋은 나쁜 사람이다. 모든 것을 안다는 무지, 그 어마어마한 자기중심적 무지를 한 시도 쉬지 않고 입으로 떠벌떠벌하는 자가 불러온 끔찍한 화를 보며 놀라면서도 나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심지어 마지막 세 방의 총은 내가 쏘아도 좋았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마치 평생 한 번쯤 해보고 싶은 바로 그 일을 부적응자를 통해 대리만족한 느낌. 그녀의 입에서 더는 착한 나쁜 말이 나올 수 없게 만들고 싶었다. "평생 누가 옆에서 1분에 한 번씩 총을 쏴 주었다면 좋은 여자가 됐을 거야"라는 부적응자(범죄자)의 말에 동생의 농담이 떠올랐다. "맞으면 돼. 몇 대 맞으면 돼." 치기 어린 비행청소년의 말을 세기의 소설가가 그로테스크하게 읊는다면 저 대사일 듯. 


헤이즐 모리츠이며, 호크스이고 동시에 착한 나쁜 할머니이며, 그를 쏜 부적응자인 나는 누구인가.

소설가 정이현의 추천사가 이렇게 답한다.


차갑고 가차 없는 시선으로 인간의 모순적 내면을 파헤치고, 읽는 이의 마음을 날카로운 손톱으로 후벼 판다. '어마어마'하다에는 매우 엄숙하고 두렵다는 뜻도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제목이 기가 막히다. 그렇다. 인생, 다가오는 것들을 맞으며 걷는 길이다. '나는 할 수 있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든다!' 주먹 흔들며 외치는 아자아자가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유.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 자기계발서의 선동에 오히려 덤덤해지는 이유. 생의 굵직한 행불행은 다가오는 것들이 끌고 나온다. 바라지도, 택하지도 않은 것이 예상 밖의 시점에 치고 들어와 나를 행복 또는 불행으로 던져 넣는다. 체감하기로는 내가 다가서서 이룬 것보다 내게 다가온 것들의 힘이 늘 더 세다. 나를 세차게 흔들어 다른 자리에 서게 한 결정적 변화는 '다가오는 것들'이었다. 한 남자가 다가와 남편이 되었고, 영혼의 친구가 되었고, 몇 년에 한 번 씩 생의 분기점으로 나를 끌고 간다. 내가 낳았지만 어설피 그려보았던 그 아이들이 아닌 아주 생소한 두 우주가 다가와 내 일상의 감정을 쥐락펴락한다. 사춘기 한참 민감한 시기에 아버지의 죽음이 다가와 삶에 대한 내 태도를 바꿔 놓았다. 온 국민 보는 앞에서 가라앉은 세월호가 다가와 엄마 아빠들의 삶을 길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최순실의 태블릿 PC가 다가와 길바닥에 뿌린 세월호 엄마 아빠의 눈물이 헛되지 않았다 하며, 상상도 해보지 못한 200만 촛불이 다가왔다. 좋다/나쁘다, 하나의 이름을 붙일 수 없지만 흔히 '불행'이라 불리는 것들이야말로 다.가.오.는. 것들이다.


함께 철학교사를 하며 보기 좋은 가정을 일궈가던 멀쩡한 남편이 '딴 여자가 생겼어. 그 여자랑 살고 싶어' 이런다면. 젖은 신문지처럼 찰싹 달라붙어 집착하던 나이든 엄마, 더는 돌볼 수 없어서 요양병원에 보낸 엄마가 갑작스레 죽는다면. '그래도 난 지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고 있잖아' 자위하고 있는 터에 출판된 책의 재계약이 취소되며 학문적 자존심 뭉개지는 일이 속속 일어난다면. 그 와중에 아끼는 제자와의 교감이 한 줄기 희망으로 다가온다. (그녀가 아니라 관객인 내게) 젊은 한때의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제자의 고뇌에 찬 열정이 갈수록 거리감으로 다가온다. (관객인 내가 아니라 그녀에게) 이 모든 다가오는 '상실'들을 나탈리는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장면 장면을 종종걸음으로(주로 높은 굽의 웨지힐을 신고)  느리지 않게 오간다. 강의실로, 엄마 집으로, 요양병원으로, 출판사로. 또 끙끙 여러 개의 짐보따리를 끌고 기차로, 버스로, 택시로 남편의 별장이나 제자의 전원공동체를 오간다. 가끔 침대에 누워 혼자 울지만 감정의 동요가 요란하지는 않(게 보인다)다. 다가오는 것들을 대하는 나탈리의 태도는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그녀의 생김새 같고, 옷차림 같다.


남편과 함께 씨네큐브에서 보고 집에 와 바로 거금 4000 원을 투자하여 구매하였다. 아주 조금 쓸쓸하고 많이 의연한, 그렇다고 그리 멋지지도 않은 나탈리를 연구할 필요가 있어서였다. 나도 좀 그러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머니 장례식에서 나탈리가 읽은 <팡세>와 영화 마지막의 행복론 강의를 음미하고 싶은 마음, 영화 구석구석 숨겨진 철학 찾기 놀이를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철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에게는 깊이가 다른 영화일 듯. 일천한 나는 루소, 레비나스, 부버에 순간 귀가 번쩍 뜨였을 뿐. 남편은 프랑크푸르트학파니 뭐니 하는데 내가 아는 건 그게 먹는 건 아니라는 정도. 여하튼 어머니 장례식에서 들고 나가 읽은 팡세는 영화 속 나탈리를 나탈리이게 하는 힘의 이론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내가 보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온통 암흑뿐이다.

자연은 내게 회의와 불안의 씨만 제공한다.
신을 나타내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부정으로 마음을 정할 것이다.
도처에 창조주의 표적을 볼 수 있다면
나는 믿음 속에서 안식할 것이다.
허나 부정하긴 너무 많이, 확신하긴 너무 적다 보니
나는 개탄할 상황에 있다.
만약 신이 있어 자연을 뒷받침 하고 있다면
자연이 신을 명확히 드러내 주거나

자연이 보여주는 표적이 거짓이라면
그것들을 깨끗이 지워버리기를
어느 편을 택할지 알 수 있도록
자연이 모든 걸 말하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내가 놓여있는 상태에서
내가 뭔지, 뭘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나는
나의 신분도 의무도 모른다.
내 마음은 진정한 선을
그것을 따르기를 온전히 바란다.

원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비싸지 않다.


철학교사 나탈리는 이렇듯 '철학 함'으로 다가오는 상실을 맞서고 있다. 차라리 얼마나 정직한 믿음이며 희망인가. 장례식 설교에서 신부가 말한다. "나탈리, 당신이 어머니께 표현한 최선의 감사는 철학교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의혹과 질문은 신앙과 굳게 엮여있음을요. 당신의 삶은 그리 이루어졌습니다" 버스 창 밖을 바라보며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파스칼의 저 글을 되뇌는 나탈리. 그렇게 철학함으로 자기를 위로하고 있는 나탈리의 눈에 들어온 창 밖의 장면. 애인과 함께 꿀 떨어지는 웃음을 웃으며 걷는 남편 하인츠. 엉엉 울던 울음이 헛헛헛헛 웃음으로 바뀐다. 어떤 현학적인 말을 가져다 자기연민을 포장해도 현실은 이것. 평생 나를 사랑할 줄 알았던 남편의 배신이다. 이것이 현실. 아무렇지 않게 종종거리며 스크린을 오가는 그녀였지만 관객들 모르게 이불 뒤집어 쓰고 울어야 할 울음이 많이 남아있음이다.


영화 보고 나서 남편이 "그 집 거실 부럽지? 자그맣고, 책으로 둘러싸여 있고. 정신실이 그런 거실에 있으며 좋겠다" 아닌 게 아니라 참으로 마음에 드는 거실 겸 서재이다. 천국 가기 전에 '하나안~님! 황금집 필요 없구요. 나탈리 집 아시죠? 그런 집, 그런 거실, 그런 서재로 할게요' 미리 주문을 넣어둬야 할까보다. 영화 좋았다며 늘 그렇듯 별 말 없던 남편이 거실에 대한 얘길 하나 더 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오래 오래 그 거실을 보여주잖아. 일상, 그 여자의 철학 함은 일상이야." 그렇다. 모든 다가오는 것들은 일상의 기쁨과 슬픔으로 녹아든다. 어설픈 리뷰에 담고 싶은 주제가 한 둘이 아니다. 이혼한 여선생님과 젊은 제자는 연인이 될 수 없는가? 이런 얘기는 흥미진진. 엄마의 딸이며 딸의 엄마, 딸이 낳은 아이의 할머니가 되어 가는 여자 이야기도 몇 바닥 쓸 수 있을 것 같고. 그러나 <나의 성소 싱크대 앞> 저자답게 '기승전-일상'으로 끝맺도록 하겠다.


포스터에 나란히 선 제자 파비앙이 영화 초반부에 말했다. "고3때 선생님의 수업과 책이 저를 붙들어줬어요. 철학을 발견하게 되었지요." 영화 중 상실의 정점은 머리가 큰 제자 파비앙의 비판이다. "생각과 행동의 일치는 중요해요. 선생님 교육엔 없던 거죠" (아, 현기증) "왜 그런 말을 해? 나는 생각과 행동을 완벽하게 조화시키고자 했어"라는 선생님의 반격에 "그건 맞아요. 사적 영역에 한해서요. 평소에는 원칙을 지키 테지만 삶의 근간을 흔들지 모르는 사상은 외면하시잖아요. 시위나 서명 정도로 스스로를 참여 지식인으로 여기죠. 떳떳한 양심과 변함없는 생활....." 제자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왠지 진 느낌의 선생님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말한다. "난 혁명을 바라지 않아. 훨씬 수수해.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도록 돕는 것. 최소한 네게 그것을 전달했다고 믿었다." 내게 가장 아프게 다가온 장면이다. 파비앙 친구들의 논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냔 말에 "급진성에 대해 말하기엔 난 늙어서요. 예전에 다 해봤거든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젊을 때 나탈리는 공산주의의 급진적 사상에 빠져 러시아까지 다녀왔다.) 주인공의 표정이 가장 쓸쓸해 보인 장면들이다. 한때 급진적이었으나 어느 새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중년의 여자가 되었을 것이다. 사적인 영역을 살아내기에 급급하고,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개인적 행복에 만족하며 살았을지 모르겠다. 파비앙과의 설전에서 밀려난 느낌으로 홀로 낭떠러지 느낌의 언덕에 선 나탈리의 뒷모습이 사진 한 장처럼 마음에 남는다. 그 곁에 나를 세우고 싶은 마음. 그래도 그녀가 잘 살아왔다는 걸 그녀의 거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고, 거실은 말하자면 일상이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어디 입이 떨어지겠는가. 차라리 <팡세>를 다시 읽어주리라.












  1. BlogIcon 采Young 2017.01.05 00:46 신고

    쌤 이 영화 넘 좋았어요. 가정이 깨진다고 해서 여자의 삶이 망가지는 것은 아니다를 보여주는 것도 좋았고 쿨하게 흔드릴 땐 흔들리고 울 땐 울고 그러다 다시 자리를 잡고 정리도 하며 삶을 잘 이어가는 것도 좋고... 제자랑 사귀나?? 랑 기대를 하게 하는 것도 좋고~ 그 기대를 단호히 뒤엎는 것도 좋고 ㅋㅋ (근데 제자는 과연 나탈리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사랑인가 아닌가?이거가지고 기다 아니다를 얘기했었어요 ㅋ) 간만에 리뷰를 썼던 영화인데 이 리뷰를 보고나니.. 더 다른 생각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 BlogIcon larinari 2017.01.05 01:58 신고

      난 포스터의 기차역 씬이 맘에 안 들더라. 포스터만 아니었어도 파비앙과의 로맨스에 크게 신경 안 썼을 것 같아. 관객을 낚은 것이지 싶고.

      확실히 연애세포 살아 있는 관객의 뷰 포인트는 다르구나. 나는 파비앙이 선생님을 사랑했든 안했든 관심이 안 가더라. 나탈리에게 '젊은 남자 만나세요.' 이런 장면 있었지? 그때 나탈리의 반응에 나는 백 개 공감했거든. 선생님의 관심은 보다 더 철학에 있었는데 파비앙이 더 끈적하지 않았나 싶어. 둘이 나름 날카롭게 신경전을 하고 파비앙은 애인과 함께 부비면서 어디론가 사라지잖아. 다음 장면에서 나탈리는 혼자 언덕에 서고. 그 나이가 되고, 그 나이에 자기 철학을 가지고 사는 여자에게 로맨스 따위는 얼마나 취약한 유혹일지..... 그게 참 좋던데.

      아, 이런 건 만나서 말로 하고 싶다. 그런데 너 어디에 리뷰를 썼다는 거야? 블로그도 안 하는 거 아냐?

  2. BlogIcon 采Young 2017.01.05 08:37 신고

    취약한 유혹~~아무래도 멋남이 등장해서 ㅋ 파비앙한테도 눈길이 가고 말았어요 ㅋㅋㅋ담배 피고 혼자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착잡한 표정은 무슨 의도에서 넣은 것일까 생각도 들고~ 이 영화 볼수록 매력적이었는데 주위에 재밌어 하는 사람이 많이 없어서 얘길 못했는데 ㅋㅋ 전 요즘 브런치에서 놀고 있어요 허접하지만 ㅎ http://brunch.co.kr/@cod 또 자주 놀러와서 댓글 달께요.~ 올만에 티스토리 블로그에 글 올리고 댓글 놀이하던 거 읽으니까 재밌더라구요~



<우리들> <우리들> 하는데, 왠지 포스터가 싫어서 생각에 없던 영화였는데 열카톡을 하다 얻은 정보가 이랬다. '소재: 초등학생의 왕따와 그 안의 감정, 그러나 결국은 그들의 언어로 담아낸 우리들의  감정' 이란다. '어머, 이건 (채윤이 손잡고) 꼭 봐야해!' 했다. 그리하여 채윤이와 함께 보았다. 영화를 강추한 여자사람 제자가 어느 남자사람과 봤다는데 그 남자사람이 울었단다. 그렇다면 나는 홍수, 쓰나미가 되겠군. 만반의 울 준비를 하고 갔다. 눈화장을 전혀 하지 않았고 휴지도 듬뿍 챙겼다.


채윤이에겐 영화에 대해 긴 설명 하지 않았다. 그냥 보자고 했다. 긴장이 되었다. 이것은 마치 입안 헌 곳에 알보칠을 바르기 전의 긴장이다. 팔짝팔짝 뛰도록 아프다는 걸 알지만 나으려면 어쩔 수 없다는. 어렸을 적에 동생이 여름마다 무슨 피부병을 앓았다. 밖에서 죽도록 놀고 들어오면 일단 목욕을 시킨 후에 과산화수소로 상처 하나하나 소독을 했다. 그리고 그 위에 연고를 발랐다. 여름 저녁마다 무슨 의식을 치루는 것 같았다. 엄마 아버지가 하시던 치료의식을 어느 때부턴가 내가 하게 되었다. 소독약 묻은 솜을 상처 부위에 대면 동생이 아파서 팔짝팔짝 뛰었다. 투명한 과산화수소는 상처에 닿으면 뽀골뽀골 거품이 되었다. 거품이 뽀골거리는 만큼 동생이 펄쩍펄쩍 뛰었고 마치 내가 아픈 것처럼 오금이 저렸는데, 그나마 거품이 뽀골거리면서 균이 없어지는 느낌이라 카타르시스 같은 것도 느꼈다. 영화 <우리들>을 보러 채윤이 손잡고 가는 일은 과산화수소 묻은 솜 앞에 상처를 내미는 일과 같다. 그래도 남은 균이 뽀골거리며 잡힐 거야.


팅팅 부은 눈으로 영화관을 나서겠구나, 유난히 각오를 하게 된다. 허무하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말짱한 얼굴로 필름포럼 2관을 나왔다. 옆에 앉았던 채윤이도 마찬가지. 대신 나는 영화보는 내내 양팔이 아팠다. 마비가 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순간적으로 근육의 긴장이 훅 풀렸다가. 내내 그런 식이었다. 나중에는 손을 펴고 팔을 축 늘어뜨리고 '내려놓음' 포즈가 되었다. 관람 후엔 채윤이랑 맛있는 것을 먹으며 치유의 수다수다를 할 계획이었는데 채윤이 얼굴이 말이 아니다.(울어서가 아니다) 그냥 딱 '기분이 떡입니다' 이런 표정이다. 영화 시작 전 분명 맑음, 쾌청이었건만. 영화 얘기는 꺼낼 수가 없었다. 집 앞에 다와서 '영화 어땠어?' 물었더니 '저런 영화 싫어. 영화가 너무 현실같애. 나는 영화같은 영화가 좋아' 짧은 평이었다. 왕따라는 말로 담을 수가 없다. 영화도 그렇고, 내가 초등학교 3학년, 6학년 때 같은 친구에게 당했던 그 일과, 채윤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당했던 그 일 모두는. 왕.따. 두 음절의 보편적인 언어로 담을 수 있는 사연이 아니다. '왕따'라는 말이 담을 수 없는 것들을 영화 <우리들>은 담아냈다. 그 복잡함과 두려움과 팔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과 얼어버리는 듯한 느낌을 다 보여주었다. 그래서 차마 울지도 못했다. 채윤이 말 '너무 현실 같애'에 담긴 뜻이 그러하다. 나도 그랬다.


이 영화를 보고 울 수 있는 그대, 행복하여라. 라고 말하겠다. 울 수 있는 것은 한 발 물러서서 볼 수 있다는, 관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울 수 없다. 영화 속 선과 지아가 결코 울지 않는(못하는) 것처럼. 왕따(우쒸, 이 말의 무게는 도대체가 너무 가볍다고!) 당하는 아이의 1인칭 시점을 너무 잘 그려냈다. 에니어그램 내적여정, 꿈작업, 내면아이 치료작업..... 그리고 치유하는 기도 등을 해오면서 나는 나의 왕따(우쒸) 사건을 재경험하였다. 많이 객관화되었고 치유도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전히 울 수는 없는 나를 발견하였다. 울지 못하여 몸이 아픈, 아직 녹지 않은 감정이 몸속에 남아 있다는 것을. 채윤이도 마찬가지. 아프도록 잘 만든 영화이다.


영화에는 어른이 없다. 불과 열한 살 밖에 안 된 아이들이 폭력에 짓밟히고(짓밟고) 있을 때 도움을 손길을 내미는 어른이 없다. 아니, 손이 아니라 눈이 먼저 없는 것이다. 아이들의 두려움 가득한 표정과 축 쳐진 어깨를 읽는 눈이 없다. 선이 엄마는 밝고 따뜻하여 치유인자를 가진 사람 같지만 자기 아이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러니 엄한 곳에 정과 따스함을 발휘한다. 남편이 돌보지 않는 시아버지 돌보기에만 극진하다. 남편과 시아버지 사이 문제로 두면 될 일에 내내 더 마음을 쓰는 듯하다. 선이 아버지는 임종 직전인 자기 아버지와 화해할 수 없음이 괴롭다. 괴로울 때마다 술로 회피한다. 심지어 권위적이지도 않은 젊은 담임 선생님조차도 이 가공할 폭력을 읽어내는 눈이 없다. 이 어른들을 탓할 수 없다. 이 어른들은 어른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계에의 미숙함은 선이 지아 수준이다. 엄마는 낫다고?(엄마가 늘 선이 동생 얼굴에 상처내는 연우엄마와 통화하는 것을 보라. 문제에 직면할 줄 모른다) 어른이 없다. 선이나 지아도 결국 이 아픈 일에 대해 돌봄받지 못한다면 똑같은 어른이 될 것이다. 물론 그 시절 내게도 마땅한 어른이 없었다. 엄마가 알고 학교에 쫓아와서 뭐라뭐라 했지만 결국 내게 한 말이 '니가 교만해서 그렇다'였다. 이 말에 내 가슴에 더 큰 비수로 꽂혔다는. 채윤이에겐 어땠을까? 엄마 아빠가 마땅히 비빌 언덕이 되어주었을까? 썩 자신이 없다. 내게 여전히 미해결 과제인데, 엄마로서 한다고 했지만 잘 했을까?


왕따 경험이 없다 해도 누구나 두려워한다. 외톨이가 될까 두려워한다. 장면장면이 그 두려움을 참 잘 그려낸다. 셋이서 대화하다 나머지 둘과 내가 의견이 다르다? 그것만으로도 마음 깊은 곳에서 미세한 긴장이 생기는 것이다. 둘도 마찬가지. 상대와 내가 의견이 다르다는 것만 확인되어도 몸 어딘가가 떨린다. 우리들, 우리들이다. 외톨이가 될까 두려운 우리들이다. 평균적인 두려움을 상회하는 두려움, 그리하여 울 수도 없는 또 다른 우리들도 있다. 아직 울지 못하는 우리들을 자각시켜주니 고마운 영화이다. 울지 못하고 몸이 아팠거나 하염없이 우울해진 우리들 있으면 여기여기 붙어라! 당신만 그런 거 아니다. 우리집에도 둘이나 있다.


집에 와서 한참 후에 채윤이가 한 마디 더 했다. '엄마, 그런데.... 영화 속 모든 사람이 다 이해가 돼. 공감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가 돼. 선이, 지아, 심지어 보라까지도 이해가 돼' 이해가 된다는 말이 이해가 됐다. 그러나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이해된다고, 이해해야 한다고 스스로 강제할 필요 없어. 모두를 다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그것보다 먼저 너의 아픔을 돌봐.' 참았다. 다시 얘기할 기회가 올 것이다..


영화 리뷰 쓸 마음이 생기면 다른 리뷰를 일부러 읽지 않는 편인데, 영화소개에 바로 링크가 되어 있어서 이동진의 글을 읽었다. 동의하지 않음! 특히 아래 인용된 부분 완전 동의하지 않음이다. 


‘우리들’은 미성숙한 아이들의 미성숙한 관계를 다루는 영화가 아니다. 아이들은 어려도 관계는 어리지 않다. 이 영화의 아이들이 꼬인 실타래를 풀기 위해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것은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스스로 풀어야 하는 자신만의 실타래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엔


'우리들'은 미성숙한 아이들의 미성숙한 관계를 다루는 영화이다. 아이들이 어리기에 관계는 어리다. 이 영화의 아이들에겐 꼬인 실타래를 풀기 위해 도움을 요청할 어른들이란 없었다.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어른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열한 살이 주고받기에는 너무 잔인한 폭력이어서 스스로 풀 수 없는 실타래였지만 그 누구도 풀어주지 못했다. 그렇게 풀지 못한 실타래를 가진 아이들이 그대로 어른이 되었기에 오늘 열한 살이 도움을 청할 어른은 여전히 없는 것이다. 여전히 어리고 미성숙한 관계를 맴돌다 술로 도망치는 몸만 어른인 어른들 뿐이다.


라고 고쳐야 맞다.


그리고 또 하나,

피구에서 가위바위보로 애들을 하나 씩 뽑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같은 장면으로 끝낸 양괄식 구성. 첫장면의 피해자 선이가 용감하게도 지아 편을 들어준다. 훈훈할망정 감동적이진 않았다. 급조한 환타지 엔딩 같았다. 내내 무섭도록 리얼리티이지 않았던가. 영화 속 선이 캐릭터는 그럴 수 있다. 어린 동생의 말에 은혜받아서 '아, 내가 먼저 무장해제 해야지' 결심했을 법하다. '내가 때리고, 연우가 또 때리고, 계속 때리고 때리고 그러면 언제 놀아?'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교훈은 유딩의 입에서 나온다. 현실 왕따 세계에서 선이 같은 선이가 있을까.................................. 그래, 있겠지. 다시 생각해보니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나마 세상이 수준을 유지하고 있을 게다. 




쓰다보니 과하게 시니컬해지는 것 같기도.

뒤로 올수록 심장박동도 빨라졌다.

왕따 트라우마 치료가 시급한가봉가.








"그날 이후, 사소한 삶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뭔가를 고치려면 전부 분해한 다음 중요한 게 뭔지 알아내야 돼."


영화에 끌린 건 홍보문구 안의 저 두 문장이다.


정말 소중한 것들은 있을 때는 잃고 나서 비로소 그 큰 존재감을 느끼는 것들이다.

현승이 일기에 자주 등장하는 문장에 '매일 매일 똑같은 하루다' 담긴 지루함이 묻어나는 자조적인 느낌 말이다. 잃어봐야 알게 된다. 그 똑같은 하루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가혹하게도 사소한 삶을 들여다보는 눈은 대체로 '그날' 이후이다.

벼락처럼 들이닥치는 '그날'에 일상을 빼앗긴다.


일상을 빼앗긴 후 부적응의 나날,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난 후에

'뭔가 잘못되었었구나!' 깨닫는 사람들은 고치기 위한 작업을 하게 된다.

밖이 아니라 안,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타인이 아니라 나에게로

시선을 옮기게 된다.

이제껏 살아왔던 방식을 낯선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며,

뼈아픈 후회, 회한, 성찰, 정신분석....

무엇이라 불리든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분석하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두 문장에 낚이면서 머릿속에 써 놓은 시나리오가 있었다.

'분해'라는 말은 일종의 정신분석이겠구나, 상상했다.

잔잔한 내면작업을 상상했다. 아니었다.

데몰리션(demolition)은 말 그대로 파괴이지 분해가 아니었다.


냉장고 좀 고쳐줘, 냉장고에 물이 샌다고..... 어어, 쾅! 교통사고, 그리고 아내가 죽었다.

일상에서 늘 하던 말, '냉장고 좀 고쳐줘'가 유언이 되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김종필 여보, 프린터기 좀 고쳐줘!ㅠㅠㅠㅠㅠㅠㅠㅠ) 

뭔가를 고치려면 전부 분해한 다음 중요한 게 뭔지 알아내야 돼.

평소 존경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어쩌면 혐오하는 장인의 말이 생각난다.

역시나, 분해했지만 고칠 수는 없다. 문제가 무엇인지는 더더욱 알 수 없고.

분해된 잔해뿐이다. 그러면 그렇지.

영화에서 우리 편 말을 들어야지, 악역의 말을 들어서 해결점이 찾아지겠는가 말이다.


냉장고를 분해해서 고치지는 못했으나 남자는 분해하고 부수는 맛을 알아버린 것이다.

말썽을 일으키는 사무실 컴퓨터를 분해하고,

분해하고, 분해하다......

때려 부수는 맛에 빠져든다.

결국 딱 봐도 간지나는 멋진 집을 때려 부수기에 이른다.

꿈을 분석할 때 꿈에 나온 집은 흔히 '집'은 가족과 관련된 '자아'를 상징한다고 한다.

집을 때려 부수기까지는 금융회사 사장의 사위로 사는 직업인으로서의 자아를 비롯한

모든 자아도 함께 망가뜨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세대로 따지자면 '사춘기'는 파괴의 세대이다. 

무엇이든 삐딱하게 보고, 무엇이든 일단 부정하고, 때려 부수고 보는 세대이다.  

어쩌다 사춘기 아이를 만나 쿵짝이 맞고, 파괴의 일탈 놀이의 친구가 되니 가관이다.

그리고 그렇게 부수고 부서진 후에,

영화의 후반부에서 처음으로 아내를 잃은 남편이 지을 법한 표정이 등장한다.

분노에 차서 할 말 있음 서서 얘기하고 가라던 장인을 주저앉힌 표정.

뭉클했다.

영화 초반 교통사고로 아내가 죽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남자의 얼굴엔 감정선이 없다.

슬픔도 분노도 그리움도 그 무엇도.


부수고 나서, 다 때려 부수고 나서 비로소 감정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감정을 싸고 또 싸고 있던 딱딱한 껍데기가 깨어지니 비로소 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제 오늘 일은 아니고,

영화 탓은 아닌데,.

온갖 번듯하고 미끈하고 번지르르한 것들이 거북하다. 유난히 거북하다. 

연애 강의를 하면서 연애의 기술은 '싸움의 기술'이라 말하곤 한다.

'싸움의 기술'이 아니라 '대화의 기술'이면 좋겠는데 갈등상황에서 대화는 거의 싸움이 되기 마련이니까 애초에 싸움이라 해두는 것.

긍정에 긍정을 쌓고 잘되는 나에 잘되는 나를 또 쌓는 긍정의 힘?

그런 힘 따위는 없다.

보기 좋게 번듯하게 쌓아 올리는 것은 남 보기에만 좋은 것.

삶 전제를 때려 부수어야 하는 날이 오기 전에

부서지고 깨어지며 뒤로 물러섰다 다시 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일이다.


분노를 모르는 자 사랑할 줄 모르는 자이다.

싸움을 모르는 자 성장을 모르는 자이다.

파괴를 모르는 자 참된 세움을 모르는 자이다.



  1. 신의피리 2016.07.22 20:12

    아 바빠 죽겠는데 그놈의 프린터기는 산 지 얼마 됐다고 고장인가.

    • BlogIcon larinari 2016.07.22 20:29 신고

      긴 말 하시 않겠싐.
      남자 주인공 눈물이 빵터졌던 장면.
      아내가 포스트잇에 써서 붙여 놓은 메모 한 줄이었지.

      '바쁜 척 하지 말고 나좀 고쳐줘'

    • 신의피리 2016.07.23 10:24

      당신 고치는 건 잘하는데.

    • BlogIcon larinari 2016.07.25 23:07 신고

      글치, 정신실 고치기 인간문화재급 장인이지! ㅎㅎ

  2. 2016.07.23 00:48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16.07.25 23:06 신고

      맞아요. 문제라 인식하면 최선을 다해 고쳐야 하지만 그게 또 다는 아닌 것 같아요. 결심한다고 고쳐지는 것도 아니고. 더 나은 삶을 살려고 애쓰는 것이야 꼭 필요한 것이지요.

      모든 것이 내게 달린 것처럼 노력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린 것처럼 기도하라.
      저는 자주 이 말을 생각해요. ^^




이  사 (김현승)

이사한 곳을 지나가면 뭔가 마음에 걸린다.
마치 무엇을 두고 온 것 같다.
수영장에 수영복을 두고 오듯
학교에 공책을 두고 오듯
이사한 곳에 마음을 두고 왔다. 



명일동을 떠나 이곳 합정동으로 이사와 1년이 지난 3학년 말에 쓴 현승의 시이다. 암사동 올림픽도로 근처를 지나며 전에 살던 아파트 쪽을 바라보면서 '엄마, 난 여기를 지나가려면 마음에 뭐가 걸리고 찌릿해' 하더니 이 시를 써냈다. 두고 온 곳을 그리는 마음, 그 마음이 지나쳐 병이 되는 것을 나도 안다. 현승이는 시를 썼지만 중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울며불면 엄마에게 쏟아부었다. '잘 자라고 있는 화초를 왜 옮겨 심었어! 옮겨 심은 곳이 영 맞질 않아서 잘 자라던 화초는 이제 시들어 죽어가고 있어. 옛날 친구들, 선생님들, 학교.... 다시 돌아가고 싶어.' 아버지 돌아가시고 서울로 전학와서 앓았던 향수병의 기억이다. 마음을 두고 와 내내 무엇이 걸려 있는 그 느낌을 현승이도 알고 현승이 엄마도 안다. 이곳에 이사온 지 벌써 5년 자. 합정 망원 죽돌이로 신나게 살면서도 현승인 여전히 그리워한다. 이젠 명일동이 아니라 '그 무엇'을 그리워하는, 그리움이 몸에 붙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그런 현승이를 느낄 때마다 내 마음이 심하게 울렁거리는 것을 보면 나 역시 '옮겨 심은 화초' 신드롬에서 크게 벗어나질 못한 것 아닌가.

영화 <브루클린> 홍보문구에서 '향수병'에 낚인 것도 이런 경험 때문일 것이다. 이 나이에 '운명적 사랑, 새로운 사랑'에 끌리랴. <브루클린>은 사랑 얘기가 아니다. 에일리스가 예쁘고 영화가 잔잔해서 그렇지 에일리스에게 아일랜드는 '헬'아일랜드이다. 사랑도 일도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 노력하면 잘 될 수 있을 거란 희망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가지고 있는 자원이 없는 '흙수저'라는 의미에서 '헬'아일랜드이다. 사무직 직장을 가지고 있으며 에일리스를 진심으로 아끼는 언니가 유일한 자원이다. 언니의 주선으로 새로운 땅 뉴욕 브루클린으로 떠난다. 꿈의 아메리카로. 난생 처음 타보는 미국행 배에서 멀미하며 고군분투하는 장면들은 흙수저로서, 하층민으로서, 노답 인생으로서 원초적 끝판이다. 누추한 긴장 속에 입국심사를 마치고 새로운 땅의 향해. 너무 환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문을 열고 나간다. 열리기 전까지는 벽일 뿐인 문, 어쩔 수 없이 그 문을 열어야 하는 운명들이 있다. 떠나온 곳에 수영복이든, 노트든, 마음이든 무엇을 두고 왔든지 문을 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자기를 찾는 모든 사람의 운명이다.  




다음 이야기는 당연히 어리버리 뿌빠빠, 흙수저 아일랜드 여자의 부적응과 그리움의 나날이다. 언니의 편지를 붙들고 우는 장면, 신부님에게 '제가 왜 아일랜드를 떠나 왔을까요?' 묻는 장면, 크리스마스에 모인 아일랜드 출신 노숙자들이 고향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시는 장면. 어쩌면 이렇게도 내 마음을 후벼파는지. 그런데 잠깐이다. 신부님의 도움으로 야간 대학에 다니고, 댄스파티에서 사랑을 만나고, 그 사랑이 그리움을 치유한다. 머리가 좋고 착한 에일리스는 실력과 성품까지 갖춘 뉴요커로 빠르게 변해간다. 그렇지. 그런 거지. 떠나오길 잘했지. 그때 고향에서 날아든 소식. 언니가 죽었고 엄마가 홀로 남았다.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고 두려워하는 남자친구 토니와 둘만의 결혼식을 하고 혼인신고를 한다. 그렇게 사랑의 서약을 남겨두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 많은 것이 달라졌다. 언니가 없어서가 아니다. 에일리스의 위상이 달라졌다. 언니가 일하던 빈자리에 스카웃 제의를 받을 만큼 실력을 갖췄고, 선글라스 낀 뉴요커로서 매력 철철 넘치는 여자가 되었다. 일도 사랑도 소망이 없었던 흙수저 에일리스가 진주 달린 수저가 되어 고향에 서게 된 것이다. 훈남에다 부자, 게다가 부모님은 시골로 이사할 예정이라 넓은 저택에 혼자 살아야 해서 결혼이 급한 짐과 사랑에 빠진다. 뉴욕에 있는 남친(아니고 남편, 에고 어쩌자고 혼인신고를 했나고)과는 다른 매력이다. 브루클린에서 온 편지가 쌓여가고 답장 한 줄을 못 쓰고 갈등하는 사이 이러다 짐과의 결혼이 진행될 것만 같다. 돌아가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곳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떠오른다.

갈등해결, 또는 성장을 위해서는 악역이 필요한 법. 떠나기 전 일했던 베이커리의 못된 여주인이 크게 기여해준다. '너 짐과 결혼할 거야? 너가 미국에서 혼인신고 하는 걸 봤다는 사람이 있는데.....' '기, 기억이 안 나는데요. 무슨 얘긴지' 악랄하고 비열한 베이커리 주인과 잠시 마주앉아 있더니 에일리스가 말한다 '아, 잊고 있었어요!' (그렇지? 너는 유부녀야. 흙수저 주제에 여기서 잘 될 수 없지. 넌 이제 끝장이야!) 잠시 여주인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 미소 짓긴 일러요. 나쁜 아줌마야. 에일리스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라구. '여기가 어떤 곳인지 잊고 있었어요!!!!!!!!!' 그리고 우리의 에일리스, 망설임 없이 다음 날 배를 예약하고 거침없이 떠난다. 손 흔들어주는 언니는 없고 처음 이 배를 탔을 때와는 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으나 갑판 위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는 에일리스 멋지다. 뭔지 모르게 든든하고 멋지다. 이 배에는 또 다른 에일리스들이 있다. '브루클린에 아일랜드 사람들이 많다면서요? 고향 같다면서요?'라고 묻는 흙수저 에일리스에게 진주를 단 에일리스가 대답한다. '그래요' 그리고는 멀미 대처 방법, 화장실 사용 노하우, 입국심사 시의 팁 등을 담담히 가르쳐준다.

죽음과 이별에 대한 유난한 두려움 때문에 새로운 것, 새로운 환경에 대한 미리 좌절하고 긴장하는 현승이와 자주 이야기 한다. 명일동에서 이곳으로 와서 현승이가 얼마나 자랐는지, 좋은 친구들을 얼마나 많이 만났는지, 한강에서 노는 일이 얼마나 재밌었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그리고 내 얘기도 들려준다. '왜 잘 자라고 있는 화초를 옮겨 심었냐며 울고불고했는데 그 화초 말라죽지 않았어, 그 때문에 큰 나무로 자라게 되어 여기 현승이 엄마가 되어 있단다.' 돌아오는 대답은 '그래도 나는 싫어.'이다. 그렇지. 그 누가 익숙하고 편안한 곳을 떠나 그리움과 긴장을 살고 싶겠나. 하지만 알게 될 것이다. 참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늘 떠나야 한다는 것을. 생의 의미를 찾으며 산다는 것은 장소적 떠남 이전에 마음의 떠남, 사변적 떠남을 통한 순례자의 삶이라는 것을. 소망 없고 불행할 뿐인 곳에 단지 익숙하다는 이유로 머물러서는 참다운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성경의 아브라함도, 고기 잡던 베드로도 떠남으로 의미있는 삶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그 전날 밤에 고기가 잘 잡혔다면, 떠날 수 있었을까? 오늘  일상의 빈 그물질이 우리를 떠남으로 이끈다. 빵집에서 일하는 에일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떠남은 끝나지 않는다.
늘 떠나야 한다.
회귀할 수 없다.
찬란한 빛을 마주하며 문을 열고 나왔으나
어느새 발걸음은 벽에 다다르고,
그 벽을 더듬어 또 다른 문을 열고 나가야 한다.
진정한 집, 그 집에 도착할 때까지 늘 떠나야 한다.
떠난 자가 다시 탄 배는 지난 번 그 배라도 같은 배가 아니다.







  1. mary 2016.05.19 11:20

    유넌히 낯설게 느껴졌던 출압국관리소 모습.
    문열고 나갈때 그 눈부신 빛이 그런의미였군, 너무 밝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
    난 그런 해석조차도 안된다는..ㅋ
    이 시대배경이 좋드라. 캐롤도 그랬는데. 패션 가구 템포 이런것들..

    • BlogIcon larinari 2016.05.22 07:32 신고

      영화 끝나고 화장실 갔는데요. 6,70대 초반의 형님들이 많이들 보셨더라구요. '영화 보셨어요? 재밌다고 해서 봤는데 뭐 영화가 쩜쩜쩜' 하며 대화를 트시더니 패션 얘기로 흥이 나시더군요. 아주 화장실에서 대동단결 하셨어요. ㅎㅎㅎㅎ

      이 영화로 리뷰 두어 편 더 쓸 마음이 있는데 과연 써질지 모르겠네요.

  2. iami 2016.05.19 11:32

    저는 lari님 글 가운데 이 꼭지가 가장 맘에 들어요.
    영화를 보고 풀어내는 이야기나 감수성이 조금 남다른 것 같아서에요.
    아내랑 같이 보려고 했는데, 혼자만 보고 와 전 아직 못 봤지만 보고 싶어지네요.

    • BlogIcon larinari 2016.05.22 07:36 신고

      역시 전문간의 눈이세요! ^^
      이 블로그에서 가장 공들여 쓰는 글들이 이 꼭지이거든요.
      저만이 쓸 수 있는 리뷰를 써보자는 생각인데... 우히힛, 기분이 좋아요. iami님도 좋아하실 듯해요. 채윤이 아빠랑 봤는데 무뚝뚝하게 좋아하더라구요. ㅎㅎ




[그리스도가 구속한 여성]

그리스도가 구속한 인간, 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구속한 여성이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제목에 이끌려, 아니 김세윤 박사님 자체에 이끌려 북토크에 갔다. 저자로서 북토크를 당해본 적은 있지만 내 발로 찾아가 본 능동태 북토크는 처음이다. 책의 내용이 궁금해서는 아니다. 사실 청년 때  다니던 교회에서 매주 김세윤 박사님의 성경 강해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청년부 모임을 빠지고 오후 성경공부 가 있곤 했다. 그때 이미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어떻게 보시는지는 충분히 들어 알고 있다. 책 역시 2004년에 나온 <하나님이 만드신 여성>의 개정판이다. 그러니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이끌려 간 것은 제목이 아름다워서, 그리고 김세윤 박사님의 사투리 억양이 듣고 싶어서라 할 밖에.


남편이 신대원 다니던 시절. 여성 목사 안수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지켜보던 나는 여러 번 뒷목을 잡았다. 2000년 대에 그런 주제로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있다는 것 자체에 이미 가슴이 답답했고, 싸이 클럽에 올라오는 글과 댓글을 읽다보면 정말 털썩!이었다. 남편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다니던 교회가 속한 교단이었고 결국 본인의 선택이긴 했지만 내 바램을 배려해 선택한 신대원이었기에. 10년을 훌쩍 뛰어 넘어 지금 남편이 섬기는 교회에서는 선임 목사님이 여자 분이시다. 물론 교단이 달라졌다. 똑같이 설교하시고 똑같이 교회업무를 보실 뿐 아니라 선임, 보통의 교회로 말하자면 수석 목사님이시다. 아무 문제가 없다. 아마도 남편과 논쟁했던, 지금은 목사님이 되신 그때 그 신대원 동기분들은 '심방 전도사님'이라 불리는 여성 동역자들과 함께 사역하고 계실 것이다. 여성 안수에 대한 입장은 여전하실까.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 


여성 안수가 논쟁 꺼리가 되는 신학교와 교회, 부끄러웠고 부끄럽다. 당시 늦게 신대원에 가 혼신의 힘을 다해 공부하며 진심 행복해 하던 남편이었다. 1대 17로 싸우는 느낌으로 그 즈음 많이 괴로워했고, 외로워했던 기억이 새롭다. 논쟁은 그렇다 치고 클럽에 올라온 글과 댓글 중엔 믿어지지 않는 내용도 있었다. 목사가 되겠다고 하시는 예비 목회자들의 여성관이 이럴 수가 있을까.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여자와 북어는 삼일에 한 번은 패야 한다'는 식의 말이 스스럼 없이 나왔다. 이런 분들은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다!' 성경의 이름으로 아내를 때릴 수도 있겠구나 싶었었다. 무엇보다 진보적인 사회의식을 가진 분들이 신학적 담론으로만 가면 급 근엄하게 제사장 제의를 꺼내 입고 전통과 보수를 지키려 하는 것에 더욱 답답했다.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다.


북토크도 이런 말로 시작되었다. '이 책이 나온지가 10년이 넘었는데 그로부터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여전히 이 논쟁이라니요'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다. 여성 안수에 관한 신학적 근거나 논리가 부족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깨알같이 필기해 온 주옥같은 내용을 다시 옮겨 적진 않겠다. (도 있고 기사로 정리된 것도 있으니 관심자들은 참고하시기 바람) 


가르침과 삶, 글과 삶이 일치하는가가 관건이다. 설교, 강의, 글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신학자, 또는 목사에게는 더욱 관관건건이 아니겠나. '그리스도가 구속한 여성'을 바울신학의 관점에서 논증해내는 것과 남성으로서 여성을 동등하게 대하는 것은 다른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북토크를 통해 저자가 그렇게 살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을 가늠하는 자리도 아니다. 하지만 텍스트보다 더 중요한 것, 느낄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가 구속한 여성'들에게는 있다. 질문에 대한 답 또는 강연 중에 내게 느낌적인 느낌으로 와닿는 말이 있었다. 구약과 신약을 오가며 논리로 풀어내시던 중, '여자들이 교회에서 잠잠하라' 이 한 문장이 아니라 복음의 정신에 비추어보라!시며 하신 툭 나온 말씀. "생각해보세요. 신학교에서 똑같이 공부하고 똑같이 학위받고 남성은 담임목사가 되어 교황(가톨릭에서는 교황을 두고 우상화 한다고 비판하는데 개신교 안에는 교회마다 교황이 있다는 농담이 있단 얘길 하시며)의 삶을 살아요. 똑같이 노력하고 공부했던 자매는 심방 전도사라는 이름으로 말도 안 되는 처우를 받으며 사역해요. 이게 그리스도의 정신입니까? 이게 복음의 정신이에요?" 순간적으로 신학, 논리를 제치고 저자 안의 뜨거운 가슴이 표출된 것으로 보였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진행자는 남성 목사님, 패널로 여성 편집장 한 분이 함께 했다. 진행하시는 남자 목사님은 유능하게 느껴졌다. 이슈를 끌어내기 좋은 질문에 적절한 유머는 물론 타임 키퍼로서의 역할도 잘했다. 그분이 던진 어떤 질문 자체에 남성우월적 가치가 전제되어 있다며 여성 참석자가 질의응답 시간에 지적했다.(여성들에게 리더를 시키면 일을 잘못하는게 현실이다, 이런 내용이었다.) 김세윤 박사님은 '그렇다! 맞다'고 인정하시며 '미국에서 흑인들이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400여 년 노예생활의 결과라는 말이 있다. 때문에 방법은 더 기회를 많이 주는 것 외에 없다. 하물며 여성들은 수천 년 불평등 구조 속에서 살아왔다. 교회 역시 여성을 격려하고 기회를 더 많이 줘야 한다. 현재 우리 상황은 100m 달리기에서 남성은 50m 앞에서 출발하기 시작한 불평등한 게임이다'라고 하셨다.


재미있는 것은 이 질문과 답변 이후로 진행자 남자분이 '질문은 한 분만 더 받겠다. 교수님이 다음 일정 때문에 바쁘시다. 질문하시는 분들은 짧게 간결하게 하라'며 신속한 진행에 박차를 가하셨다. 김세윤 박사님의 반응. "괜찮아요. 질문 더 받아요. 여기까지들 오셨는데 궁금한 거 질문해야지. 자매님들이 좀 더 질문해주세요." 꽤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 여성, 특히 여성 목회자분들이 많은 것 같았다. 그리스도가 구속한 여성들이다. 그리스도가 구속한 여성 목회자들이다. 이분들은 어떻게 느꼈을지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책이나 강연 때문이 아니라 말과 말 사이, 강연과 강연 사이 박사님이 '자매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감동을 받았다. 북토크 마치고 따사롭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봄볕을 맞으며 걸었다. 그리스도가 구속한 여성인 나, 여성인 내가 좋다며 약간 춤추듯 걸었다.  














  1. toskf 2016.09.06 17:53

    김세윤 교수님 저서를 검색하다 여기에 들어왔습니다. 북토크 후기를 정갈하게 써주셔서 읽기 좋네요. 님의 지적센스에 감탄하며 흐뭇하게 읽었습니다. ^^

    • BlogIcon larinari 2016.09.06 23:40 신고

      감사합니다. ^^ 한 자, 한 자 마음 담아 쓴 글인데 오랜 기다림 끝에 온 메아리 소리 같이 반가운 댓글이네요.

  2. 핑크레이디 2017.11.01 13:23

    마침 관심이 생겨서 도서관에서 여성주의 관련 책 빌려서 읽고 있었는데, 꼭 읽어봐야겠어요. 추천 감사합니다^^





[쥴리엣 비노쉬 분의 안나는 장성한 아들을 잃었고 막 장례식을 마쳤다. 집안dml 창문이란 창문에는 검은 천이 드리워진다. 빛이라고 없다. 캄캄하다. 안나에겐 표정이라곤 없다. 깜깜한 공간에 전화벨이 쩌렁쩌렁 울린다. 죽은 아들의 여자 친구 잔이다. 천진난만하게도 안나의 죽은 아들을 만나러 오겠다는 것이다. 안나는 그러라고 한다. 마치 아들이 집에 같이 있는 것처럼. 잔이 온다. 공항씬에서 엄청난 미쟝센을 흩뿌리며 온다. 남친 집에 도착했는데 그리운 남친은 없고 뭔가 음울하고 기괴한 분위기의 남친의 엄마, 어두운 기운만 만연하다. 남친과 헤어지나 마나 하는 기로에 서서, 이 남친을 놓치고 싶지 않아 모든 걸 내려놓고 찾아온 잔은 이래저래 불안하다. 그리운 남친은 부활절이면 돌아온단다. 아, 안심이다. 일부러 피한 것은 아니야. 부활절이면 돌아온다니까. '부활절에 돌아온단다.' 잔의 남자친구가 부활절이 온다면 안나의 아들은 언제? 


영화 첫장면은 피에타 이미지이다. 부활로 가는 길의 시작은 성금요일이다. 주님의 보혈, 주님의 보혈, 보혈의 잔, 구원의 잔.... 그런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주검으로 내려온 아들을 안은 마리아. 단지 마리아가 아니라 당신의 아들을 제물 삼으신 하나님 아버지(하나님 어머니)의 마음이다. 제 몸으로 품어 살을 찢는 고통으로 내놓은 생명을 받아들었던 그날, 그 경이의 순간을 잊을 수 있을까. 끝도 없을 것 같은 출산의 고통 끝에 '응애응애' 존재를 드러내는 생명, 그 생명을 처음 가슴에 품었던 기억. 바로 그 품으로 싸늘하게 식은 몸을 끌어안아야 하다니. 믿을 수 있는 일인가?


2년 전, 고난주간에 세월호와 함께 꽃다운 아들 딸들이 침몰했다. 그 주간 끝 부활주일, 그리고 일 년이 지난 부활주일, 심지어 2년이 지난 올봄에도 세월호는 여전히 차디찬 바닷속에, 아이들의 죽음 역시 진실의 빛을 보지 못하고 갇혀있다. 피에타. 아들의 주검을 안아보는, 그 고통을 가슴에 안아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엄마들이 있다. '응? 너의 남자친구? 부활절에 돌아와'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상실감 앞에서 작동하는 심리적 방어기제 '부정'일뿐.....]



여기까지 썼다. 영화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을 보고 리뷰 쓰기를 시작한지 두어 달. 저녁마다 블로그를 열어 완성해보려 했지만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두 달 동안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고 한 게 저거다. 미완으로 마무리 하려고 한다. 쓰고 싶은 말이 참 많다. 영화 보고 남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남편은 사무실 책상에 포스터를 붙여놓고 있다. 죽었다 부활절에 살아난 아들은 단 하나. 마리아의 아들 예수님 밖에 없다. 그러나 영화의 엄마 안나처럼 아들을 잃은, 자기 생명의 한 기둥이 무너져버린 엄마들은 모두 부활절을 기다린다. 아들 딸이 살아 돌아오리라 믿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분만의 죽음과 부활이 아닌 것을 알기에 부여잡는 것이다. 그것은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고, 거짓이 참을 이길 수 없고, 진실이 영원히 가라앉는다는 소망 아닐까.


세월호 2주기를 맞는, 하늘이 어두운 토요일이다. 아직 세월호는 성금요일이다. 사흘 동안 지옥으로 내려가신 아들을 고통스럽게 끌어안고 있는 그 시간일 뿐이다. 영화가 건넨 많은 질문에 대해 생각의 길은 열어놓되 글은 뚝 잘라 여기서 멈추겠다. 대신 '예은이가 불러주고 진은영 시인이 받아 썼다'는 시를 읽는다.  



<그날 이후> 

아빠 미안
2킬로그램 조금 넘게, 너무 조그맣게 태어나서 미안
스무 살도 못 되게, 너무 조금 곁에 머물러서 미안


엄마 미안
밤에 학원갈 때 핸드폰 충전 안 해놓고 걱정시켜 미안
이번에 배에서 돌아올 때도 일주일이나 연락 못해서 미안

할머니, 지나간 세월의 눈물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해서 미안
할머니랑 함께 부침개를 부치며
나의 삶이 노릇노릇 따듯하고 부드럽게 익어가는 걸 보여주지 못해서 미안

아빠 엄마 미안
아빠의 지친 머리 위로 비가 눈물처럼 내리게 해서 미안
아빠, 자꾸만 바람이 서글픈 속삭임으로 불게 해서 미안

엄마, 가을의 모든 빛깔이 다 어울리는 우리 엄마에게 검은 셔츠를 계속 입게 해서 미안
엄마, 여기에도 아빠의 넓은 등처럼 나를 업어주는 포근한 구름이 있어

여기에도 친구들이 달아준 리본처럼 구름 사이에서 햇빛이 따듯하게 펄럭이고
여기에도 똑같이 주홍 해가 저물어

엄마 아빠가 기억의 두 기둥 사이에 매달아놓은 해먹이 있어
그 해먹에 누워 또 한숨을 자고 나면
여전히 나는 볼이 통통하고 얌전한 귀 뒤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아이
제일 큰 슬픔의 대가족들 사이에서도 힘을 내는 씩씩한 엄마 아빠의 아이

아빠, 여기에는 친구들도 있어
이렇게 말해주는 친구들도 있어
"쌍꺼풀 없이 고요하게 둥그레지는 눈매가 넌 참 예뻐"
"너는 어쩌면 그리 목소리가 곱니,
어쩌면 생머리가 물 위의 별빛처럼 그리 빛나니"

아빠! 엄마! 벚꽃 지는 벤치에 앉아 내가 친구들과 부르던 
노래 기억나?
나는 기타를 잘 치는 소년과 노래를 잘 부르는 소녀들과 있어
음악을 만지는 것처럼 부드러운 털을 가진 고양이들과 있어
내가 좋아하는 엄마의 밤길 마중과 내 분홍색 손거울과 함께 있어
거울에 담긴 열일곱 살, 맑은 내 얼굴과 함께, 여기 사이좋게 있어

아빠, 내가 애들과 노느라 꿈속에 자주 못가도 슬퍼하지마
아빠, 새벽 세 시에 안 자고 일어나 내 사진 자꾸 보지마
아빠, 내가 여기 친구들이 더 좋아져도 삐치지마

엄마, 아빠 삐치면 나 대신 꼭 안아줘
하은언니, 엄마 슬퍼하면 나 대신 꼭 안아줘
성은아, 언니 슬퍼하면 네가 좋아하는 레모네이드를 타줘
지은아, 성은이가 슬퍼하면 나 대신 노래 불러줘

아빠, 지은이가 슬퍼하면 나 대신 두둥실 업어줘
이모, 엄마 아빠의 지친 어깨를 꼭 감싸줘
친구들아, 우리 가족의 눈물을 닦아줘

나의 쌍둥이 하은언니 고마워
나와 함께 손잡고 세상에 와줘서 정말 고마워

나는 여기서, 언니는 거기서 엄마 아빠 동생들을 지키자
나는 언니가 행복한 시간만큼 똑같이 행복하고
나는 언니가 사랑받는 시간만큼 똑같이 사랑받게 될 거야,
 그니까 언니 알지?

아빠 아빠
나는 슬픔의 큰 홍수 뒤에 뜨는 무지개같은 아이
하늘에서 제일 멋진 이름을 가진 아이로 만들어줘 고마워
엄마 엄마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들 중 가장 맑은 노래
진실을 밝히는 노래를 함께 불러줘 고마워

엄마 아빠, 그날 이후에도 더 많이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아프게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나를 위해 걷고, 나를 위해 굶고, 나를 위해 외치고 싸우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정직한 엄마 아빠로 살려는 두 사람의 아이 예은이야
나는 그날 이후에도 영원히 사랑받는 아이, 우리 모두의 예은이
오늘은 나의 생일이야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중에서






선거를 앞두고 혼자만의 특별기도 기간이었다. 설거지하며, 운전하며, 운동하며, 침대 누우면 잠들 때까지 '이 땅을 긍휼히 여기소서' 시시각각 기도가 올라왔다. 이 부조리한 나라, 이토록 추악한 조국 교회에 그분의 시선이 머물까? 과연 그러할까? 자주 생각한다. 실은 그분을 믿는 만큼 더 자주 상심하게 된다. 선이 이기고 약한 자가 우뚝 서고, 우는 자가 눈물을 그치게 되는 일이 있었던가? 동화 속 이야기도 아닌데 왜 강하고 착한 사람은 없고, 착한데 잘 되는 사람 찾기 어려운 걸까? 상심하지 않기 위해 기도했나 보다. 어떤 결과를 보더라도 그 12월의 멘붕을 다시 겪을 수는 없다, 마음 단단히 먹자, 하는 기도. 아니, 그것만은 아니다. 부조리하고 추악한 나라와 교회의 궁극적 통치자가 그분인 것을 믿기 때문이다. 남들이 뭐라 할지라도 사실 나는 믿는다. 그래서 더욱 절절한 기도였다.


남편 퇴근하고 돌아오면 잠시 앉아 차를 마시는 시간. 남편이 그날그날 판세를 읽어 분석해주고 나는 주로 한숨 내쉬거나 분통 터뜨리며 감정을 쏟아 놓는다. 실은 그 시간마저도 기도이다. 냉정과 열정, 두 개의 마음이 바라는 건 결국 하나이다. '정의가 강물처럼, 공의가 하수처럼' 흐르는 세상. 그것을 꿈꾸는 기도이다. 


우리 동네 국회의원 정청래가 컷오프되었을 때는 사실 눈물이 났다. 나는 정치적인 사람이 제일 싫다. 정치인도 마찬가지. 정치적인 정치인이 싫다. 언어에 이중 메시지를 담은 사람과 대화하는 건 짜증 나는 일이다. 뒤에 뭔가가 잔뜩 있는 것 같지만 당장 하는 말과 처신이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한다. 정치도 마찬가지. 이런저런 팟캐스트를 들어봐도 정청래 컷오프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차라리 정치 무관심자가 되자, 결심했다. 작심삼일. 무관심은 무슨! 정치는 일상과 가장 가짜이 닿은 세계인데 어찌 무관심이 가능하리. 마음을 추슬렀다. 다시 기도했다. '하나님, 정청래 컷오프라니요. 저한테 왜 이러세요. 손혜원이 안 되면 저 정말 또 며칠 못 일어나요. 손혜원 부탁드립니다. 하나님, 밀어주세요'


컷오프된 분들이 정청래를 중심으로 탈당하지 않고 유세단을 짰단다. '더컷유세단'이라 지은 이름을 손혜원 님이 '더컸유세단'으로 다시 작명했다고. 임영수 목사님 계신 양평의 '모새골_모든 것을 새롭게' 역시 카피라이터 손혜원 (이제는 의원님이다!!!!)의 작품인 걸 아시는지. 더컸유세단을 보며 희망의 불씨를 마음에 담았다. 반장 선거에 나가 떨어져도 그 상실감이 한참 가더라. 많은 국민(당원?)의 사심없는 지지를 받는 좋은 사람들이 컷오프를 당하고 얼마나 상심이 컸을까. 그리하여 다들 당을 뛰쳐나가지 않던가. 헌데 유세단을 구성하여 내 자리를 꿰찬 사람의 손을 들어주고 춤을 추며 응원을 할 수 있다니. 감동, 감동, 감동이다.


이기심 vs 이기심, 움켜쥠 vs 움켜쥠, 나만 옳다 vs 나만 옳다. 끝없는 갈등이 양산되고 양산될수밖에 없는 정치판의 기저이다. 어디 정치판뿐인가. 갈등하는 교회도, 갈등하는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리고, 두 대를 맞다니! 재빠르게 네 대 때리고. 컷오프라니! 욕하고 탈당하기. 다들 (해봐서 잘) 아는 갈등대응 방식이다. 헌데 예측이 빗나간 것이다. 한 대 맞았는데 '아야, 에잇..... 공평하게 양쪽 다 때려줘. 왼쪽도 한 대 더 때려' 한다면. 컷오프 됐는데 '어디 나 퇴출시키고 그 자리 지키나 보자'하지 않고 그 자리 지키도록 돕는 것 말이다. 이것은 정말 감동 아닌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설령 멀리 내다보는 고레벨의 정치 안목이라 해도 당장 이러기는 쉽지 않다. 높이 산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자신들이 상처 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상처가 많은 사람들은 가시 옷을 입고 있는 것과 같다. 자기도 모르게 모든 사람을 의심하고 언제든 찌를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희생자, 피해자로 규정할수록 더욱 그러하다. '더컷'은 상처받은 사람들이다. '더컸'은 상처받은 사람들의 권리 당위를 깨고 나온 사람들. 짤렸지만, 짤려서 상처받고 아프지만 그 자리에서 뒹굴지 않고 한 뼘 더 크기로 선택한 것이다. 크기로(자라기로) 선택하다니? 키 크는 것이 내가 크기로 결정한다고 해서 되는 일인가? 성경에도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라 하지 않는가. 아니다. 마음의 문제에선 가능하다. 상처라는 악의 순환고리를 끊고 궁극의 긍정을 지향하기로 한 사람들, '상처 입은 치유자'라 불러도 좋으리. 자신의 상처를 다 치유한 후 작위처럼 수여받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나는 아프지만 거기 뭉개고 앉아 있지는 않겠다는 의지. 거창하지도 않은 그 자.발.적. 의지 하나면 족하다. '더컷'과 '더컸'은 결국 '시옷' 하나 차이이다. 


이렇게 쉬운 것을 하지 못하고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상처 입은 자신을 방어하고, 방어하기 위해 잔인하게 공격하는 일을 얼마나 자주 보게 되는가. 아니, 얼마나 자주 그러고 사는가. 선거를 위해 기도했다. 아니, 선거 이후의 나를 위해 기도했다. 믿음과 소망, 사랑이 뿌리째 흔들리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설령 선거에 이기더라도 여전히 세상은 부조리할 테니) 개표 결과로 일단 기쁘지만 생각이 자꾸져 먹구름이 몽글몽글 피어나는 느낌. 웃음 끝이 자꾸 쳐지고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 그래도 좋을 걸 생각하자! 정말 되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안 된 것을 보면 다시 입꼬리 승천. '거봐, 하나님 살아 계시쥐?! 음하하하.' 무엇보다 손혜원을 우리 동네 국회의원으로 가질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잖아. 박주민 변호사 당선은.... 정말 이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눈물이 난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20대 국회의원 선거의 꽃은 '더컸유세단!'. 내겐 그렇다.  


총선을 위한 나만의 특별기도회, 기도 응답이 풍성하다.












친구의 입냄새, 이 사이에 낀 고추가루를 말해줘야 하는 일, 민망한 일이다. 괜히 혀를 더듬어 내 입속만 단속해보다 '나중에 거울 보면 알겠지' 포기하게 된다. 너 입냄새 구려, 너 음치인 것 알아, 우리 사무실 사람들 모두 너 때문에 힘들어.... 우린 다 아는데 너만 모르는 것 같아. 말하기 어려운 말들이다. 


마가렛트 여사는 음악을 사랑하고 노래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지만 음치이다. 이 사실을 본인만 모른다.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 마가렛트 여사는 돈이 무지 많다. 음악 클럽의 후원자이기도 하니 음악을 사랑하는 고고한 클럽 회원들은 박수치며 그녀의 노래에 열광해준다. 그녀의 노래가 시작되면 입냄새 나는 친구 앞에서 숨을 참듯 견디다 노래가 끝남과 동시에 참던 숨을 몰아쉬듯 '브라보!'를 외친다. 물론 조롱 섞인 브라보이다. 그러니까 '마가렛트 여사의 감출 수 없는 비밀'이란 마가렛트 여사만 아는 비밀이 아니라 그녀만 모르고 세상은 다 아는 비밀인 셈이다. 이 비밀을 이용해 대놓고 속이고 이용하는 사람도 있다. 젊은 기자와 삽화가는 신문에 찬사를 보내는 기사를 쓰고 마가렛트 여사를 이용해먹으며 뒤에서 낄낄거린다. '알면서 속아준다'라는 말이 있는데 사람들은 알면서 속아준다기 보다 모두 한통속 되어 마가렛트 여사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중 가장 적극적이고 창조적으로 속이는 사람은 마가렛트 여사의 비서이며 음악 보좌관 격인 마델보스이다.


채윤이와 함께 조조로, 극장을 전세내어 본 영화이다. 시놉시스와 몇 장면의 사진을 보고 '키키키, 재밌겠다. 볼래' 했던 채윤이는 중간에 몸을 베베 꼬았다. 코미디인 줄 알았는데, 코미디는 코미딘데 블랙코미디였던 것. 웃픈 영화여서 힘들었던 것. 그런데 실화 바탕의 영화란다. 그렇다. 실화. 실화 바탕이란 사실을 알고 나서 채윤이의 호기심에 다시 발동이 걸렸다. 블랙 코미디는 실화이고 우리들의 실제 이야기는 코미디이다.

사실 내 입냄새를 나만 모르지 내 친구들은 다 맡고 고통스러워 한다. 내 인격의 악취는 나만 모를 뿐 너는 안다. 이것이야말로 실화이다. 내가 누군가를 떠올리며 '걔는 참 이것만 고치면 참 좋을텐데....'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누군가도 나를 떠올리며 명쾌하게 분석할 것이다. 다만 서로들 암묵적으로 참아주는 것이다. '너 입냄새 나' 말을 굳이 말을 해서 내 이미지 구길 필요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영화 <윈터 슬립>이 생각났다. 주인공 캐릭터가 극단적으로 다른 것은 단지 영화의 쟝르가 다르기 때문일 터. 내게 오는 메시지는 동일하다. 스스로 일궈낸 자아 이미지에 어떻게 무지막지하게 전폭적으로 속고 있는지를 마가렛트 여사가 보여주고, 그 속임수의 속임술이 얼마나 정교한지를 <윈터 슬립>의 아이딘이 보여준다. 우습도록 화려한 마가렛트의 의상과 온화하며 지적이고 선하기까지 한 아이딘의 메마른 웃음과 긴장된 말투가 같은 메타포로 느껴진다. 마가렛트는 어린 아이처럼 있는 그대로 내보이니 블랙코미디가 되고, 아이딘은 온갖 착하고 세련되고 있어보이는 포장지를 많이 달고 있으니 내 실상과 똑같은 리얼리티가 되는 것이다.

'나는 옳고, 나는 착하고, 나는 겸손하고, 나는 답을 알고 있고, 나는 의식있는 합리적인 사람이고....' 이 향연에 숨이 막힌다. '사실 너 입냄새 쩔거든. 입 좀 다물고 있을래'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어떨까? 할 수 없다. 자기 잇사이에 낀 고추가루를 보거나 빼내려면 거울 앞에 서야한다. 자기 인격의 구린내는 '정직한 성찰'이라는 뼈아픈 작업을 통과해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닐까? 싶지만 아니다. 말씀을 거울 삼아 자기를 정직하게 비추어 인격의 악취를 인정하고 애통하며 회개하는 사람을 나는 근자에 보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너 입냄새 쩔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성찰'이라는 칼날의 방향은 항상 '나'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너 성찰 좀 해'는 성립하지 않는 명령어이다. 거기에 해 줄 말은 오직 하나, '너나 잘 하세요' 두 영화가 내게 불편한 이유는 이것이다.

영화의 마델보스는 '현자'같다. 마가렛트 곁에서 적극적으로 치밀하게 속이는 자이다. 다른 어떤 속이는 자와 다르다. 마델보스는 마가렛트가 노래에 집착하는 이유를 안다. 남편의 애정과 관심이다. 자신의 노랠 들어줄 남편. 마델보스는 또 안다. 남편의 마음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연주회 시간에 늘 늦는 이유가 자동차 고장 때문이 아니라 애인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마가렛트의 노래를 견딜 수 없어 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마가렛트가 가장 원하는 남편의 사랑을 얻는 일은 요원하니 대체물이 필요한 것이다. 엄마 찾아 우는 아이에게 막대사탕을 물려주는 격이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음은 텅 비었지만 단맛에 취해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는 아이처럼 마가렛트는 살아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마델보스는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때문에 영화 후반 여차저차 하여 남편의 마음이 마가렛트를 향해 돌아서고 있을 때 속이기 놀이를 포기한다. 결국 우리가 붙들고 있는 자아 이미지란 상처받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당분간 지켜내는 보호막이기도 하다. 자아 이미지에 오래, 강하게 붙들려 있을수록 악취가 나고 듣기 싫은 괴성을 낼 수 밖에 없겠지만. 악취와 괴성 넘어 상처입기 쉬운 약함을 봐주는 눈,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아, 물론 언제까지 속고 속일 수는 없다. 마델보스는 때가 됐다 여겼고, 남편도 마가렛트를 받아들이고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자신의 노래를 들은 마가렛트는 쇼크로 쓰러지고 만다. (어쩌면 죽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결국은 자기 몫이다. 마델보스의 혜안과 극진한 충성으로도 어쩔 수 없는 것. 에니어그램 공부를 사랑하는 이유는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악취를 가진 존재야.'라는 전제 하에 성격이 가진 미덕과 더불어 악취를 가감없이 알려주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격적 입냄새를 맡겠노라고 자발적으로 찾아오시는 분들이 대부분이라 한 번을 만나도 진실한 만남이 주는 정서적 포만감이 있다. 적어도 강사인 내겐 그렇다. 그러나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세미나 전후로 무게감에 많이 눌린다. 마델보스의 정도의 혜안과 애정을 가지고 세미나를 이끌 수 있으면, 싶다. 영화 얘기하더니 어쩌다 기승전에니어그램? 이해해 주시라. 내일이 올해 첫 세미나라 내 맘이 그렇다.  









  1. 2016.04.04 11:13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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