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토이 스토리>에 대한 애틋한 정은 일단은 우리 아이들의 성장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3편에서 대학생이 된 앤디가 우디 일행을 떠나는 장면, 어마어마한 상실감으로 보았다. <인사이드 아웃>에서 빙봉이 망각의 심연으로 떠밀려 내려갈 때의 안타까움과도 비슷한 감정이다. 그러니까 채윤이 현승이가 어렸을 적 그렇게 애지중지 하던 와우와우 수건, 곰돌이 이불에 대한 감정이다. 아이들은 잊지만 엄마는 잊을 수 없는, 아기 적 아이들의 애착에 대한 애착 같은 것. 쓰다보니 단지 아이들 유년만은 아니구나 싶다. 망각의 심연으로 가라앉은 내 유년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여하튼 현승이 어릴 적, 엄마 중독증상이 심하던 시절에 "너는 내 친구야. 영원한 친구야" <토이 스토리> 주제가를 어깨동무 하고 부르던 날이 있었다.


가령 이런 -> 무촌에 가까운 일촌끼리의 우정 


개봉 하자마자 <토이 스토리4>를 가족들과 함께 봤다. 보니에게 간 토이들이 어찌 되는가, 아련한 설렘으로 남몰래 두근두근. 사전 정보 없이 약간 넋을 놓고 보다 목에 가시가 하나 걸렸다. "쓰레기" 폐품으로 만든 토이 '포키'가 등장한다. 보니가 현재 시점 가장 사랑하는 토이 등극이다. 사랑받는 토이로서 자신을 인식하질 못하는 포키이다. '사랑받는'은 고사하고 '토이' 정체성을 받아들이질 못한다. 쓰레기, 쓰레기라며 틈만 나면 쓰레기통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이다. 생선가시처럼 목에 걸린 건 '쓰레기'인데, 영화 때문이 아니라 한참 전부터 식도 부근에 걸려 소화되지 못하는 단어이다. 어쩌다 귀에 꽂힌 '쓰레기'라는 말이 목에 걸려 다른 무엇도 섭취하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통 먹질 못하니 마음의 힘이 다 빠져나가 이것도 저것도 다 포기하고 싶은 심정에, 점점 쓰레기가 되어 가는 찰나. 영화가 무슨 작정이나 한듯 쓰레기, 쓰레기... 한다.


토이 정체성이 확실한 우디가 이걸 보아 넘길 리 없다. 그 자신 최애 장난감의 영예를 잃고 벽장에 처박히는 존재일지언정, 주인 보니의 사랑받는 토이 '포키'를 지켜내는 우디. '너는 쓰레기가 아니야, 사랑받는 장난감이야!' 토이의 존재 의미는 주인 아이의 기쁨이 되는 것. 주인의 사랑받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이의 행복한 유년을 지켜주는 것. 1,2,3 편은 그 정체성에 눈물겹게 충실한 우디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랑받는 자아' 어디서 많이 듣던 말 아닌가. 성육신한 예수님을 향해 하늘로부터 들린 명확한 메시지 너는 내 사랑받는 아들'이다. 인간 예수님은 내내 이 정체성에 부합하는 삶을 사셨다. 사랑받는 자로서 아버지로부터 들은 메시지를 전하고, 자의로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여하튼, 쓰레기가 아니라 사랑받는 토이로서의 정체성을 일깨우려는 우디의 노력은 눈물겹다.


 

1편인가, 2편인가. 버즈의 등장 스토리가 생각났다. 버즈는 '우주전사' 정체성으로 미친 애처럼 등장했다. 지구인지 우주인지를 제가 구할 수 있다며. 아, 이때도 우디는 '너는 우주전사가 아니야. 앤디의 사랑받는 최신식, 최애 장난감이야'를 일깨우려 애썼다. 물론 질투 같은 복잡한 감정라인도 있었고. 이 스토리가 떠올라 넷플릭스로 혼자 <토이 스토리> 1,2,3을 정주행 하고 말았다. 


도덕적, 종교적 교훈으로 감상평 마무리 하는 것 촌스러운 줄 아는데. 아픈 영혼의 두 증상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자기비하와 자아팽창. 빛도 있고 그림자도 있고, 칭찬 받지만 욕도 얻어 먹고, 성공하지만 실패하는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을 마주하기 싫은 아픈 영혼이 도피하는 곳이다. 쓰레기이거나 우주전사이거나. 한 번 실패로 쓰레기가 되고, 한 번 성공으로 세상을 구원할 전능의 전사가 된다. 대부분의 일, 대부분의 나날 동안 그 사이 어디를 오가는 존재임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더 큰 힘, 더 큰 존재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실존을 모르는 토이들처럼 말이다. 고질적인 내 지병과 병증이다. 모 아니면 도, 전부 아니면 제로. 하나 실패했다 싶으면 모든 걸 잃은 것처럼 나를 팽개치고 싶은. 강하거나 약하고, 착하거나 나쁘고, 현명하거나 어리석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렇게나 어렵다. 


한 열흘 우디와 포키와 버즈를 가슴에 품고 다녔더니 목에 가시처럼 걸렸던 것이 쑥 내려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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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처럼 다시 '책만 보는 바보'로 살고 있다. 정해진 일상을 돌리는 것은 일도 아니고, 아무렇지 않고 잘 돌리고 있지만 뭔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책만 집착하여 사는 느낌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휴대폰의 시간을 확인, '오늘은 무슨 요일, 더 자도 될까'라고 생각하자마자 벌떡 일어난다. 식구들 일어나기 전에 조용한 '혼독(혼자 독서)' 시간을 확보해야지 싶어서다. 늦은 시간 네 식구가 다 모여 야식을 먹고, 떠들떠들 할 때도 '빨리들 들어가 자라, 빨리 들어가 자라' 속으로 주문을 외운다. 역시 '조용한 혼독'의 시간에 그 중독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해야할 일을 다 하면서 책을 읽는데도 '책만 보는 바보'라고 나를 인식하는 것은 일종의 무기력감 때문이다. 그래, 내가 바보라는 느낌이 들고 뭘 잘하지 못한다는, 못할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책을 내고 책과 관련된 리워드 행사를 마치고 온 허탈감 때문일까. 꼭 그것만은 아니다. 생각보다 책이 인기를 얻지 못해서? 이유가 되기는 하지만 그것만도 아니다. 연구소 운영에 대한 부담감, 그것도 크지만 그것만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낮은 자존감' 상태라 할 수 있다. 


낮은 자존감의 주증상(어쩌면 주요 원인)은 글을 쓰지 못함이다. 블로그에 사진과 함께 두어 문장 끄적이다만 비공개 글이 수두록하다. 글을 엉덩이로 쓴다는 말이 있듯이 발행할 글이든 혼자 볼 글이든 고통을 감내하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당연히 그 고통보다 큰 보상을 기대할 때 엉덩이 붙이고 앉아 인내하게 된다. 나는 무슨 보상을 바라고 글을 쓰지? 40여년 혼자 보는 일기를 썼고 10년도 넘게 블로그를 했으니 독자의 인정과 칭찬이 주요 보상은 아닐 텐데. 글쓰기 강의할 때는 '나를 나로 세우고, 나를 지키고, 나다운 나로 살게 하는 것'이 궁극적 보상이 되었다고 호기롭게 떠벌였다.


책만 보는 바보로 산다는 무력감에 빠진 건 글이 써지지 않아서 인가보다. 블로그 글은 물론이고 마지막 일기를 쓴 날이 언제인지 모른다. "아예 쓰지 못하는 것보다 후지게 쓰는 것이 두렵다"느는 테오도르 칼리파티데스와 달리 무지랭이 얼치기 작가인 나는 "후지게 쓰는 것보다 아예 쓰지 못하는 것이 가장 두렵다."라고 저저저저번 포스팅에서 말했었다. 생각해 보면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도 멈추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었다. 일이 잘 풀릴 때도 썼다. 그러니까 글이 써지지 않는 것은 외적인 성공과 실패, 심지어 그에 대한 정서 상태에 영향받지 않는다. 뱃속 저 깊은 곳에서 힘이 쭉 빠져나간 상태로 살고 있다. 이것이 단서가 되지 않을까. 나 따위가! 나 따위가! 나 따위가 뭘 할 수 있겠어! 이런 말이 들리는 것 같다. 힘이 빠져나간 뱃속에서 이런 벌레들이 조용히 기어다니고 있나. 그래서 '낮은 자존감'이란 말이 툭 튀어나온 것인가.


어쨌든 속시원히 설명되지 않는 '바보' 상태로 살고 있다. 책만 보는 바보. 바보랑 놀아주는 책이 있어 얼마나 고마지 모른다. 바보에게 즐거움을 줬고, 주고 있는 요즘 책들을 모아 촬영을 했더니! 모두 여성 저자이다. 마리 루틴와 어슐러 르 귄 같은 분은 넘사벽 같다. 그런 글, 나도 참 쓰고 싶은데. 레이첼 에반스는 작고 후에 읽게 되었다. 저자에 대한 아무 정보 없이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본 일 년>이란 책 제목에 선입관이 생겨 더 알아보지 않았었다. 작고 후 남편 추천으로 <교회를 찾아서>를 읽었는데 와, <신앙 사춘기>는 정신실판 <교회를 찾아서>였네! 정말 멋진 크리스천 페미니스트 여성이다.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본 일 년>은 딸 채윤이가 빠져 읽고 있다. 여섯 권의 책, 모두 소중하다. 이대로 (책만 보는) 바보로 산다해도 좋을 만남이다. 





로즈 메리 도허티 수녀님의 <분별>의 마지막 장을 어젯밤에 덮었다. 단순하고 고요한 내용에다 작은 책이다. 하지만 분별의 삶을 어떻게 살아온 분의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저작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차차 사귀고 배울 좋은 선생님이시구나 싶었다. 같은 얘기도 남성이 하는 것과 여성의 목소리로 들려지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 잔잔하게 남는 여운을 안고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페이스북에서 뉴스를 본다. 바로 이 로스 메리 도허티 수녀님이 2월 28일돌아가셨단다. 잠시 눈을 의심했다. 맞다. 만나자마자 떠나셨다니.


지난 주일은 내 생일이었다. 채윤이가 끓여준 생일 미역국 사진을 꿈모임 단톡방에 올렸다. '죽음'에 관해 꿈을 꾸신 벗님 한 분이 삶과 죽음, 태어남과 죽음을 묵상했는데 카톡을 열자마자 미역국 사진을 보고 생일 이야기를 들었다고. 삶과 죽음의 근접성, 이 둘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 씩 덧붙여 가면서 풍성한 단톡 나눔을 가졌다. 동시성에 놀라고 놀란다. 


주중에 믿고 싶지 않은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그래서는 안 될, 세상 사람 다 아파도 절대 아프지 말았으면 싶은 두 분의 소식이다. 나이가 젊어도, 연세가 드셨어도 그렇다. 부질 없는 왜? 왜?가 먼저 튀어 나온다. 그리고 입맛을 잃고 무기력과 무기력이었다.


내일은 집에서 생신 식사를 하기로 했다. 몇 년 만에 집에서 대식구 식사 준비를 하는지 모른다. 부담이 많이 되지만, 그래도 하고 싶고 해드리고 싶었다. 계단 무서워 딸 집에 못오시는 엄마에게 주차장에서 현관까지 엘리베이터 연결되는 집을 보여 드려야지. 늙은 엄마의 딸인 죄로 벌써 오래 전부터 엄마 생신 때마다 '마지막 생신일지 몰라' 각오를 단단히 하며 보내곤 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엄마 생신은 늘 엄마의 죽음을 생각한다.


태어남과 죽음이, 

꿈과 현실이,

죽음과 부활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알고 믿고 사는 것이 '분별'인지 모른다. 이것을 믿는 것은 소망이지만 그 소망은 핑크빛이 아니다. 입맛을 잃음이고, 생기를 잃음이며, 무기력이고, 위장된 말과 거짓된 관계는 죄 뱉어내고 싶은 삐딱함기도 하다.


책 <분별>의 에필로그에 나오는 말이 무기력한 내게 주는 로즈 메리 수녀님의 유언 같다.


분별하면서 사는 삶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보다 명료하게, 더 많이 보기를 바란다. 과거를 돌아보며 "내가 지금 아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달리 선택했을 텐데"라고 말할 때가 종종 있을 것이다. 때로는 삶을 더 멀리 보는 비전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근시안이다. 멀리 볼 수 있음은 은총이다. 우리가 가진 것은 오직 이 순간이라는 사실을 결국에는 받아들여야 한다. "그 다음"은 그때가 되면, 그 다음이 여기에 있을 때 우리에게 보일 것이다. 우리는 그 다음을 기다리면서 지금 이 순간을 견디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이 순간에 온전하게 참여해야 한다. 지금이 우리가 가진 순간이며, 생명의 전부가 그 안에 담겨 있다. 그 다음 순간은 이 순간에 충실하게 집중하는 데서부터 펼쳐질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이 없다며 어떻게 될까? 이 순간이 전부라면 어떻게 될까? 이것으로 충분한가? 이 순간을 온전하게 산 것으로 삶을 잘 살았다 생각하고 평화롭게 휴식할 수 있을까? 분별하는 삶은 우리가 매 순간을 마지막 순간이라 생각하고,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선택을 하며 살 수 있을 때 시작될 것이다. 




월요일을 영화 <가버나움>으로 시작했더니 한 주간이 무겁다,

라는 말도 가볍다.


나는 왜 '자인'이 아니고 난민이 아닌가.

나는 어쩌다 (대체 뭘 잘한 게 있다고) 국적이 있고 주민등록번호가 있는 '보장 받은' 사람이다.


여기서 시작한 질문은 최근 몇 달, 아니 몇 년 내 존재를 뒤흔드는 질문을 자꾸 끌고 나온다.


나는 어쩌다 주민등록번호가 있고 뒷자리 '2'와 정체성이 충돌하지 않는 사람인가.

나는 왜 성소수자가 아닌가.


나는 왜 세월호에 아이를 태워보낸 엄마가 아닌가.

나는 어쩌다 아침 저녁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미친 행운을 누리는가.


금요일은 여성 인권 운동가, 위안부라 불리는 김복동 할머니 발인이었다.

며칠 그분의 인터뷰를 다시 읽고 영상을 돌려 보았다.

성폭력 전문 상담가 교육을 받는 금요일 수업엔 오전 내 영화와 영상 두 편을 보았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멀쩡히 승승장구 하는 가해자와 같은 세상을 사는 피해자들이,

한때 장래가 촉망 되었고 우등생이었고 매력이 넘치던 피해자들이 차마 끝맺지 못하는 물음을 던진다.

왜 하필 나죠? 왜?


그 질문 앞에 몸과 마음이 풀어 헤쳐져 바닥으로 흘렀다.

다시 나는 묻는다.

왜 하필 나는 아닌가?

나는 왜 멀쩡히 살아 있고, 존엄을 지키고 있는가.


<가버나움>의 자인은, 열두 살 자인은, 사람을 찌르고 교도소에 있던 자인은,

출생 기록도 없고 정확한 나이도 모르는 자인은 부모를 고발한다.

죄목은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죄이다'


나도 언젠가 그 비슷한 고발장을 쓰고 제출했던 적이 있다.

다만 부모가 아니라 부모의 부모, 부모의 부모의 부모의 부모. 

내 하나님이었다.

바닥에 뒹굴고 내 몸을 자해하고, 피를 토하며 고발하던 끝에, 

응답인 듯 응답이 아닌 듯, 수용인 듯 체념인 듯 실존을 그저 끌어 안았다.


열두 살 자인은 고발장을 쓰는데 내 심장이 다시 불끈거리지만,

나는 이제 고발장 쓰기도 민망한 나이가 되었다. 

아니 차라리 자인에게, 나의 아이들에게, 성폭력 생존자들에게 답을 하거나

할 수 없다면 변명이라도 둘러대야 할 것 같다. 


약자를 향해 배제와 혐오를 서슴치 않는 기독교인들을 보며 열두 살의 패기가 끓기도 하지만

끓는점에 가까이 가기도 전에 화학반응이 일어나 슬픔과 무기력이 되고 만다.


그저 묻고 또 묻는다. 

왜 하필 나는 아닌가.

물으면 생각한다. 그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정가 13,500원 짜리 책을 20,000원에 싸게 샀다.

정말이다. 싸게 산 거다.

절판된 책인데 알라딘 온라인 중고에는 없고,

회원 중고에 올라온 몇 권의 책이 29,000원에서 57,000원까지 나와있다.

누군가 꼭 갖고 싶어하는 책을 귀신 같이 알고 

이렇듯 어마어마한 웃돈 얹어 파는 사람들이 있더라. 

오프라인 중고매장에는 인천에 한 권, 대구에 한 권이 있다.

인천 정도는 마음 먹고 가볼 만 한데 시간이란 게 없다.


긴 방학을 맞아 빈둥빈둥 하는 현승이에게 기대 없이 던져봤다.

남는 게 시간인데, 시간 뒀다 뭐 할래?

엄마 책이나 한 권 사다주라.

콜!

책값에 맥도날드 햄버거 값, 차비 포한 2만 원에 퉁쳤다.

그래도 만 원은 앉아서 번 게 된다.


2008년에 나온 미리암 그린스팬의 <감정 공부>라는 책이다.

감정을 영혼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한다.

정혜신 박사의 최근 작 <당신이 옳다>는 당신의 '감정'은 언제나 옳다는 뜻이다.

이 책에서도 감정은 자신의 존재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한다. 

내적 여정, 치유 글쓰기, 꿈과 영성생활.

특별한 집단여정을 안내하면서 감정이 어떻게 '문'이 되는지를 온몸으로 체험한다.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진짜 감정을 알고 의식화 하는 사람이다.


감정에 대해 강의에 도움 받은 책과 저자가 많다.

훌륭한 분들이고, 놀라운 가르침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이 답답하고 벽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 모든 분들이 '남자'라는 것이다.

여자가 여자의 몸으로 살며 느끼는 감정이란 남자의 그것일 수 없다,

분노, 두려움, 슬픔 같은 것들이 남자와 같을 수 없다, 고 

나의 경험, 그녀들의 경험이 자꾸 말한다. 


20대 후반에 만난 '여성주의' 심리상담가 미리암 그린스팬의 

<우리 속에 숨어 있는 힘>을 다시 읽다 보니, 

20년 전 내가 도대체 뭘 읽었었나, 싶다. 

알아듣긴 하면서 밑줄을 쳤을까?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의 감정을 쓴 책이 미리암 그린스팬의 <감정 공부>이다.

그러니 여느 감정 공부와 같을 리 없다.


요즘 서점가에 흔한 것이 감정에 관한 책이지만,

여성의 몸에 담긴 여성의 감정을 말하는 책을 만나기는 어렵다.

여성의 몸이란 오랫동안 남성들의 욕구 대상으로서의 몸이었다.

롤로 메이가 말한 것처럼 '여성은 자기 몸에 갇힌 생물학적 죄수'이다. 

갇힌 몸에 담긴 감정이란, 겹겹이 포승줄로 묶인 감정이란.


여성이 말하는 여성의 감정을 배우려면 웃돈을 많이 얹어줘야 하는 것이 옳겠다.

그러니 13,500원 짜리 책이 6,800원 달고 중고매장에 꽂혀 있도록 두는 것은 옳지 않고,

20,000원 아니라 30,000원 쯤 들여서라도 구해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여자 딸이 아니라 남자 아들의 시간과 노동, 즉 '효도 페이'를 활용한 것,

그 아들이 기꺼이 활용 당해준 것도 어쩐지 아름다운 일이다.







아주 공적인 모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적인 것도 아닌 부모 모임에 갔다. 만남의 기대보다는 아이디어를 내놓고 회의 비슷한 것을 하게 되리라 기대했다. 회의 비슷한 방식으로 대화가 시작되었지만 결국 자기 이야기가 나왔다. 부모들, 특히 남들 한다고 다 하는 식으로 아이를 키우지 않겠다는 부모들의 모임이니 각자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런 부모들이니 한발 물러서서 보면 참 의식 있고 용감해 보이지만. 좋아 보이는 만큼의 불안함을 지니고 있다. 그런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뒤로 기댔던 몸의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고, 사람들의 말에 귀가 커지기 시작했다. 채윤이 대학입시를 통과하고, 어렵사리 현승이 고입 진로를 결정하고 한시름 놓았다 싶었지만, 실은 여전히 흔들리고 불안한 나 자신을 보게 된다. 나와 비슷하지만 다르게 키우는 부모들, 다르게 커가는 아이 얘기 들으며 어쩐지 마음이 새로운 자리로 간다. 대학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제 좋은 일을 한다는 어떤 아이. 모든 부모가 입을 모아 부럽다 했지만, 실은 나도 남편도 참 부럽다 했지만 우리 현승이가 그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마음에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분다. 일반고 가기로 했지만 언제든 돌이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이야기의 힘이다. 규정하고, 가르치는 태도, 편을 갈라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태도를 무장해제 시키는 것은 이야기의 힘이다. <스토리텔링 애니멀>은 내가 강의하거나 글을 쓰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이야기'에 목을 맨다고 일러주었다. 낮이나 밤이나, 어릴 적이나 나이 먹어서나, 함께 있을 때나 혼자 있을 때나. 이야기 속에 파묻혀 살았고, 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교인들이 설교 본문이고 주제고 다 잊어버리고 예화만 기억한다.'는 설교자들의 흔한 불만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교인들이 애니멀, 스토리텔링 애니멀이었던 탓이다. 그러니 기억에 남을 설교를 원한다면 살아 있는 이야기를 들려달라. 성경이 온통 이야기 아닌가. 


<재즈처럼 하나님은>도널드 밀러는 말 그대로 이야기꾼이다. <천년 동안 백만 마일>에선 모든 이야기의 구조, 그 구조를 밝히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모든 이야기는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한 인물이 무엇인가를 원하여 갈등을 극복하고 그것을 얻어 낸다.’ 나의 하찮은 일상이 맥락 있는 이야기 속 한 장면이라면 조금 낫지 않은가. 이야기의 힘을 알고, 백분 활용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더니 이제 '이야기 사업가'가 된 것 같다. 도널드 밀러의 최근작 <무기가 되는 스토리>는 사업, 영업하는 이야기이다. 이야기로 영업하는 이야기를 쓴 이야기이다. 기독교 아닌 일반 서적으로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를 했다니 그야말로 이야기로 출세한 사람이다. 마케팅도 이야기라는 것이다. 내가 뭘 줄 수 있는지 지루하게 늘어놓는 영업은 사람들 귀를 막기 딱 좋다고 한다. 이야기를 만들어 고객님을 이야기 주인공에 세우고, 고객님이 받아가실 것을 알려야 장사가 된다는 것이다. 암튼 이야기로 출세하신 도널드 밀러님, 부럽씸더.


읽은 지 한참 됐지만 소설가 정유정의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위기철 선생님의 <이야기가 노는 법>도 꺼내어 기념촬영 해봤다. 소설, 동화 작법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재미있고 유익했었다. <이야기가 노는 법>은 특히. 내적 여정, 꿈 집단, 치유 글쓰기 집단을 하면서 더욱 이야기의 힘을 믿게 된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건강한 사람이다. 설령 깨어지고 상처 난 이야기 외에 내놓을 말이 없다 하더라도, 이야기를 시작한 이상 이미 건강한 사람이다. 남은 생애 '이야기느님'만 믿고 따르겠노라 나를 봉헌하고 싶은 심정이다. 책을 읽더라도 읽은 책으로 인해 달라진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하고, 누구와 싸웠더라도 싸움의 기승전결을 아울러 자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야 하고, 기도하다 실망했더라도 나만의 기승전결을 찾아야 한다. 남은 생을 이야기에 봉헌한 자의 결심이다. (생래적 이야기 짐승이라 결심도 필요 없는 일이겠으나)


이야기에 삶을 봉헌할 때는 부작용도 있다. 잘난 척 하기 위해서 작위적으로 만든 기승전결들을 들어줄 수가 없다. 물론 듣는 척은 잘한다. '다시는 이 사람과 얘기하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친절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다. 부작용이 있지만 그리 아쉽지는 않다.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없듯, 모든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없으니. 모임에서 수줍게 자기 이야기를 꺼내놓고 울림을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경험을 보편화 하여 가르치려 들고 다른 사람을 틀렸다 규정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이 말을 길게 하면 부작용이 급성으로 나와서 막 집에 가고 싶고, 스마트폰 꺼내서 페북 보고 싶고 조급증이 생긴다. '워워~ 귀담아듣지 않아도 돼. 채윤 현승 싸울 때 하는 것처럼 안 들림, 안 들림, 하고 귀를 쳐! 너가 다 아는 부작용 증상이니 급하게 마음먹지 말고. 안 들어도 돼, 안 들어도 돼. 너보고 뭐라 하는 거 아냐.' 이런 말로 달래면 된다. 


여하튼 나는 스토리텔링 애니멀로서의 정체성을 찾았으니 더욱 이 정체성을 확립하여 살겠다. 









미리 정해진 약속을 깨지고 남는 시간 떼우려 돌아다니다 우연히 만난 친구가 있다고 치자.

어머, 너 여기서 만나다니! 뭐 해? 시간 되는 거야?

아니면 모임에 참석했다 돌아가는 길, 그 모임에서 본 사람과 지하철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우연히 만난 친구와, 우연히 옆 자리에 앉은 거의 초면인 사람과 대화를 시작했는데

한두 마디 오가는 중 삘이 빠악 통하면서 베프 될 예감이 드는 경험.

드물지만 있다.


출간 되었다 조용히 묻힌 [융 심리학] 책 찾기 놀이가 취미인데, 

그 놀이 하다 찾은 책이다. 

영웅의 딸 : 여성들의 영웅 심리와 그 불안을 파헤치는 새로운 페미니즘 에세이


은유와 상징에 꽂혀서 그 동네 책을 찾아 검색, 검색, 검색 하는 중 만난 책이다.

『여성, 타자의 은유 : 주체와 타자 사이


두 책, 아니 두 여성 저자를 오가며 새로운 나를 만났다.

줄을 서 있던 후보들을 제치고 여름 휴가 책으로 선정된 것이 『여성, 타자의 은유』이기도 하다.

두 책, 아니 두 저자와의 만남이 신선하고, 고요하고, 깊었다.

대학 1학년 때 읽었던 (그 어려운) 여성학 (고천) 책들이 나를 새로운 세계로 데려갔던 것처럼.

까지는 아니지만.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여성주의 시각으로 다시 바라보도록 눈을 닦아 주었다.

젊고 열정 넘지고 독이 오를대로 오른 페미니즘에 위축 되기도 하고,

피로감도 느껴져 그 분야 책이 장바구니에 담아지질 않았다.


융 심리학을 찾다 얻어 걸려서, '은유와 상징'이란 주제에 낚여서 

지금 꼭 먹어야 할 책을 먹게 된 것 같다.


<영웅의 딸>이란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성공을 추구하는 가운데 남성을 모방하는 여성을 일컫는다. 그녀는 어린 소녀였을 때 아버지의 딸로서 아버지를 이상화 하고 어머니는 거부한다. (중략)

아버지와의 지나친 동일시와 아버지처럼 되고하 하는 아버지의 딸들의 욕망은 그들이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에 편안하게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 (중략)

<아버지의 딸>이 아버지와 남자들의 세계를 모방하면서 일찍부터 그녀의 남성적인 성품을 발전시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지나친 자기 동일시는 딸에게 자신감과 세상에서의 경쟁력을 심어주지만, 어머니와의 분리 속에서 그녀는 여성성에 깊은 상처를 받게 된다.(중략)


기독교반성폭력센터 글쓰기 자조모임에서 '부정적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존재를 떠올리며 글을 쓴 적이 있다. 참가자 넷  중 세 사람의 주제가 아버지였다.  내적여정에서 어린시절 작업을 하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버지보다 엄마를 동일시하는 딸이 더 많고, 둘 다 고통의 근원이었을 테지만 아버가 준 고통을 더 강하게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와 생각하면 이 지점에서 감정이입 하지 못했다. 강의 할 때나 글에서 공공연히 밝히곤 했지만, 내가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버지와 동일시 되어 있고, 심지어 우상화 했고, 동시에 아버지의 착한 딸이 되고자 애를 쓰고 있었는지. (알았지만 실은 몰랐다) 엄마를 혐오하고 아버지를 이상화 하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여성인 나를 스스로 낮추며 이율배반적으로 외부의 남성 권위에는 분노하고 대항한다. 당연히 왜곡된 가부장적 하나님이 이미지를 가졌고, 그것이 영적 여정의 걸림돌이기도 하다.(역시나 알았지만 몰랐다) '아버지의 딸인 나'와의 갈등이 페미니스트로, 나다운 여자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부대꼈던 바로 그 지점 중 하나였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지식이 아니라 성찰의 거울로 새로 배울 여성주의이다. 이 나이에.  


메리온 우드맨(Marion Woodman)은 세상의 모든 딸들은 개인적인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아버지의 딸>들이 아닐지 모르지만, 지배적인 가부장적 문화의 측면에서는 대부분 여성들이 <아버지의 딸>이라고 했다. 현대 여성해방운동의 출발 이후로 여성들은 직업 세계에서나 가정, 학교, 그리고 정치적인 분야에서 동등한 권리를 얻기 위해 남성드을 상대로 투쟁해 았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여성들은 자신이 얼마나 깊게 그들 아버지의 가치를 반영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아버지의 딸>은 자신 속에 아버지의 시각을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와 자신을 강하게 동일시하면 할수록 그녀는 더욱더 개별적인 정체성 수리에 어려움으르 겪게 된다. 


'사이' 또는 '경계'라는 말에는 늘 끌린다. 몇 년 전 <철학상담>을 들을 이후로 '레비나스'는 늘 마음 한 켠에 살아 있는 이름이다. 니체, 레비나스, 데리다를 저자 자신의 말로 들려주니 들리지 않을 수가 없다. '타자 철학자들이 언어화의 한계 너머에 있는 타자의 타자성을 가시화 하기 위해 여성 은유를 사용하지만', 이때 여성은 현실의 여성이 아님을 잘 설명해준다. 타자의 철학에 있어서조차 여성은 타자가 되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의 딸>로서 아버지의 눈으로 나를 타자화 시켜 50년을 살아온 것처럼 말이다. 결론이 철학자답게 관념적이어서 차라리 실천적으로 다가온다. 책의 마지막 부분이 참 좋다. 내 주장을 잠깐씩 침묵에 가두고 들어야 한다.  주체와 타자 '사이', 그 비결정적인 것에서 '들어야'한다.


이 모든 비판적 읽기 이후에,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지점은 어디인가? 타자가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 주체가 타자로 하여금 말할 수 있게 하여야 하는가? 주체가 타자를 해할 수 있다고, 이해하고자 한다고, 그런 의미에서 타자의 자리에 들어설 수 있다고 믿어야 하는가? 주체 안의 타자들, 확실성과 동일성으로 말끔히 포착되지 않는 이질성의 요소들, 그것이 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아닐까?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타자의 분절화되지 않은 소리, 구조화를 거부하는 이야기, '비결정적인 것', 침묵으로 가라앉지도 언어로 떠오르지도 못하는 흔적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거싱 아니겠는가?

사람들 사이, 주체와 타자 사이, 그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아니다. 사이에 섬은 없다. 오직 경계 지워지지 않는는 이질성과 혼동이 있을 뿐이다. 그 사이를 들어야 한다. "우리가 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라면......"










그것 말고는 가르칠 게 없었습니다.


영화 [어느 가족]에서 튀어나와 심장에 꽂힌 한 문장이다.

'어느 가족'의 모양새는 엄마 아빠, 아이들과 할머니가 사는 가족이지만 알고 보면 가족이 아니다.

피 한 방울 섞인 것 없는 어른 아이 여섯의 집합이다.

본인들은 끝까지 아니라 우기지만 법적으론 유괴로 얻은 아이가 있고,

그 아이들에겐 도둑질을 가르쳐 생필품을 얻는다.

거주하는 집의 소유주이며 가족의 안정적인 수입원인 연금 수혜자인 할머니도 있다.

이 할머니의 행적도 그리 정상적이진 않다. 


교회에서 잘 쓰는 표현으로 '깨어진 세상의 깨어진 가족'이라고 하면 딱 어울리겠으나

알고 보면 사랑하는 아름다운 가족이다.

법의 잣대로 범죄자 집단으로 치부되어 그야말로 가족이 깨어지고 뿔뿔이 흩어지며 영화는 마친다.


제 집으로 돌아간 막내 유리가 그린 바닷가 파도 놀이 그림에 울었다.

깨어져 없어진 그 아름다운 가족이 그리워 내가 울었다.


모양새 그럴 듯한 역기능 가정과

일그러지고 보잘 것 없는 사랑의 가정 사이 

진정한 가정은 어디 쯤에 있냐고 '어느 가족'이 내게 묻는다.


부모교육 강의나 내적 여정 안내를 하면서 '나의 가족 이야기'는 피해갈 수 없는 주제이다.

수많은 가정을 만난다.

그럴 듯한 가족으로 보이고자 덮어 쓴 포장지 아래 질식하여 메말라가는 아이와 어른을 본다.

그럴 듯하게 보이는데 에너지를 소진한 부모가 자녀를 망친다.

아이의 바램이 어디 있는지에 쓸 관심과 에너지는 없다.

그런 엄마는 영화 속 유리의 엄마처럼 폭력의 화신이 되고 만다.

영화 속 유괴맘 노부요의 말처럼 사랑해서 때린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아이에게 도둑질을 시키고 양심의 가책은 없었냐는 형사의 질문에

좀도둑 아빠 오사무가 말한다.

그것 밖에는 가르칠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다. 내가 없는 것을 줄 수는 없다.

내게 없는 것을 돈으로 사서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모가 아이를 질식시킨다.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을 아는 부모는 얼마나 현명하고 지혜로운가.


그리하여 깨어진 가족의 좀도둑 엄마아빠의 자녀교육의 어떻게 되었나?

깨어진 가족을 깨트린 것은 아들 쇼타이다. 

도둑질 하다 일부러 잡히는 것으로 어느 가족을 끝낸다.

동생에게 도둑질 시키지 말라는 문방구 할아버지의 유언 같은 말 때문이다.

사춘기를 지내 어른이 되는 쇼타는 스스로 판단하게 된 것이다.

이상한 사랑의 가족을 잃을 수도 있지만 여기서 끝내야 한다고 용기를 냈을 것이다.

얼마나 잘 키운 아들인가.

얼마나 멋진 자녀교육인가.


폭력적인 정상 가정으로 돌아간 유리의 일상이 아프다.

그것이 현실이다.

유리가 그린 그림을 다시 보러, 

아니 그 행복한 바다 놀이 장면을 다시 보러,

깨어진 아름다운 어느 가족을 다시 보러 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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쟝르를 불문하고 모든 글은 글쓴이 자신의 이야기다.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 형식이 다를 뿐이다. 영화든 소설이든 논문이든 신문 기사까지. 모두 쓴 사람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자전적 소설'이라는 말은 동어 반복이다. 자기 현실과 재현 사이의 거리는 글마다 다르지만, 가장 어려운 글쓰기는 <헝거> 같은 형식의 이야기이다. '자서自敍'는 '자서전自敍傳'과 다르다.

성별과 인종, 계급 등 사회적 위치성과 무관하게 '자서'는 상처와 고통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이 이슈들은 '드러내기 어렵다'기보다 '잘' 드러내기 어렵다. 자기 연민과 나르시시즘은 최악의 인성이자 글쓰기 태도인데 그 덫에 걸리기 쉽다. 예술에서 권력자는 상처받은 사람,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하긴 상처가 아니라면, 왜 글을 쓰겠는가? 상처가 없으면 쓸 일도 없다. 작가는(학자도 마찬가지다) 죽을 때까지 '팔아먹을 수 있는' 덮어도 덮어도 솟아오르는 상처wound가 있어야 한다.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경험을 쓰는 것이 아니다. 경험에 대한 해석, 생각, 고통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 자체로 쉽지 않은 삶이고, 그것을 표현한다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산을 넘는 일이다.



록산 게이의 『헝거 : 몸과 허기에 대한 고백』 추천사 중 일부. 정희진의 글이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정말 잘 쓴다. 정희진!'라고 생각했다. 내가 모르던 사실을 일깨우는 글보다는 나도 생각했던 바로 그걸 글로 잘 풀어냈을 때 나는 감동이 되더라. 그럴 때 '앗따, 글 참 잘 쓴다.' 감탄하게 된다. 정말 내가 요즘 쓰는, 써야만 하는 고통에 뒹굴며 하는 생각들이었다. 글쓰기 모임에서 꼭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하다. 정희진 참 정말 잘 쓴다고, 라 생각하며 읽어 나가는데 추천사의 다음 부분은 이렇다.


록산 게이의 헝거』를 읽고, 나는 열패감과 좌절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나는 '감히' 그녀가 부러웠다. 그녀는 '해냈다'. 그것도 아주 잘 해냈다. 나도 내 이야기를 쓰고 싶다. '페미니스트', 나이 들어가는 여성, 건강 약자로서 그리고 반드시 세상에 알려야 할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너무나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실은, 많이 썼다. 매일 쓴다. 돌이키기도 묘사하기도 힘든 기억을 쓴다. 하지만 쓸수록 자존감은 자학의 동의어가 된다. '감성팔이' '사연팔이'... 그토록 질색했던 글들이 남의 일이 아니었다. 



헉, 정희진도 이렇다고?! 그런데 내가 정희진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감성팔이' '사연팔이'가 없어서인데. 온통 감성팔이, 사연팔이 투성이인 내 글과 너무도 비교되어 부러워하곤 했는데?! 아무튼 페이지 넘겨 본론으로 들어가 록산 게이를 읽으며 글을 잘 쓴다는 것에 대해 근본적인 생각을 했다. 이렇듯 가르치지도, 주장하지도, 누구를 비난하지도 않으며 페미니즘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니. 자기 상처를 쓴다는 것은 상처 입힌 그 사람을 가해자라는 이름으로 규정해야 하고, 그런 후에는 활활 타오르는 분노가 뒤따르는 것이 수순일 터인데. 어릴 적 성폭력으로 망가진 몸과 마음을 고백하며 이다지도 밋밋하고 덤덤하여 사실적일 수 있다니. 감동 그 이상이다. 그냥 숙연해졌다.


나도 내 상처를 쓴다. 그야말로 프로 사연팔이er. 사연팔이의 기본은 자기 경험을 과하게, 늘 조금씩 넘치게 드러내는 것이다. 경험, 너무나도 쓰고 싶은 경험, 글로 써버리고 싶은 상처를 쓰다보니 일인칭 '나'의 대척점엔 늘 상처 준 사람이 있다. 그 사람 나쁜 나라 만들기가 일쑤이다. 그렇게 쓰고나면 한편 후련하고, 한편 민망하여 견딜 수 없다. 정희진의 말대로 록산 게이는 상처를 해석하고 글로 써내는 것을 해냈고, 아주 잘 해냈다. 록산 게이의 글을 읽으면서 '글을 잘 써서' 부럽다는 생각이 1도 들지 않았다. 그저 매료되었다. 자기 상처를 바라보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객관적 태도가 놀라웠다. 초고도 비만인의 몸에 관한 고백이지만 삶에 대한 태도는 적당히 결핍도 넘침도 없다. 이렇듯 허위의식 느껴지지 않는 글이라니! (페미니스트적, 작가적, 심지어 피해자적 허위의식까지도)


또 하나의 글을 써서 떠나 보냈다. 어렵게 쓰는 동안 곁에서 록산 게이가 함께 해주었다. 많은 힘이 되었다. 한때 정희진 글을 배우고 싶어 필사를 하기도 했는데.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선망이었다. 어쩐지 그 선망이 조금 시들해진 것은 그의 글에 '감성팔이'가 없어서였나, 싶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감성팔이, 사연팔이 전공. 그리하여 부전공은 이불킥. 또 감성을 끼워 사연을 팔아 글을 또 하나 써냈는데. 어쩐지 마음이 자꾸 무겁다.







왜 이리 사는 게 따분하고, 우울하고, 무기력할까요?


<사랑의 기술>과 <소유냐 존재냐>의 에릭 프롬, 그의 미발간 원고를 묶은 책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입니다.

무기력을 되풀이하는 삶에 대한 진단은 명확합니다. 진짜 삶, 진짜 자기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랍니다. 생각도 느낌도 감정도 심지어 의지조차도 '남이 바라는 나'에 맞춰져 '진짜 나'로 살지 못합니다.


뉴스 하나에 기뻐하고 분노하는 것조차도 가장 적절하고, 인기 있는 감정을 선택하려는 나 자신을 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진짜 감정'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브레넌 매닝 생각도 나는군요. 거짓자아를 인식하고 진짜 자기로 사는 사람에겐 영혼의 근본 에너지인 열정이 깨어난다지요. 그것은 절정의 황홀감(뽕 맞은 것처럼)이나 도취된 감정이나 마냥 낙관적인 인생관이 아닙니다. 진짜 자기로, 있는 그대로 사랑받는 자기로 살아가려는 불굴의 의지랍니다. 그리고 그 의지는 ‘기꺼이 영향 입을 줄 아는 심장’이기도 합니다. 강인한 의지이며 동시에 말랑한 심장이라니!


다시 에릭 프롬의 말입니다. “태어날 준비는 용기와 믿음을 필요로 한다. 안전을 포기할 용기, 타인과 달라지겠다는 용기, 고립을 참고 견디겠다는 용기다.” 라고 했고요. 이 용기와 더불어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눈을 가지기 위한 능력으로 ‘감탄할 수 있는 능력’을 꼽습니다. 역시나 혼자일 수 있는 용기와 감탄할 준비가 된 말랑한 마음. 내적 여정으로 이루고자 하는 덕이란 이것 말고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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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런 사람인가 싶었는데 알수록 숨겨둔 매력이 솟아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첫 만남에서 자신이 가진 온갖 것을 다 드러내 찬사를 받아내곤 갈수록 바닥만 보여주는 사람도 있고요. 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 전 <행복한 페미니즘>으로 만난 벨 훅스를 <올 어바웃 러브>로 만나며 놀라는 중! 벨에 빠져 전작에 도전할 기세입니다. 언젠가부터 피로감으로 손에 잡지 않았던 페미니즘 도서 목록에서 익숙했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 <행복한 페미니즘> 개정판이라는 것도 이번에 알았습니다.  


스캇 펙, 에릭 프롬, 토마스 머튼까지 아우리는 벨 훅스의 <올 어바웃 러브>는 에릭 프롬 <사랑의 기술>을 잇는 21 세기 최고의 사랑의 고전이라는 평이 과장이 아닙니다. 이 책을 읽다 <행복한 페미니즘>을 다시 훑어보니 개인의 만족과 성장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는데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었더군요. 술술 읽혔던 내용들이 두려움이나 분노 아닌 사랑에 기반한 여성주의였다는 것을 뒤늦게 확인하게 됩니다. 사랑, 신성한 사랑, 결국 영성을 말하는 이 보석같은 책을 씹어 먹고 싶네요 :)    


오늘 읽은 챕터가 참으로 좋아 페북의 페이지, 개인 타임라인에도 올리고 내내 마음에 담고 있습니다.


내적여정 세미나를 안내하고 있지만 그 결국은 ‘일상’입니다. 영적인 삶은 한적한 곳을 거닐며 좋은 글귀를 읽고 묵상하는 유유자적 한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내적인 여정은 허구헌날 자기분석과 성찰에 빠져 수염 덥수룩한 나날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에니어그램 번호, 날개 화살로 자기를 규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영성은 지금 여기 일상을 영적 존재로 사는 것이고 그것은 다름 아닌 있는 바로 그곳에서 사랑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올 어바웃 러브>의 한 부분입니다.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행동과 실천을 통해, 즉 일상적인 모습 속에서 자신의 영성을 발현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본보기가 된다. 잭 콘필드는 다음과 같은 통찰력 있는 말을 했다. “우리가 사랑을 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영적인 스승이 많아도 무용지물이다. 아무리 고귀한 상태에 들고, 아무리 뛰어난 영적 업적을 이루더라도 가장 일상적이고 평범한 방식으로 행복할 수 없다면, 또한 진심으로 다른 사람과 교류하고 주변 사람과 교감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특히 이 부분, 내적여정에서 놓치기 쉬운 부부입니다. '가장 일상적이고 평범한 방식으로 행복할 수 없다면, 또한 진심으로 다른 사람과 교류하고 주변 사람과 교감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가장 로맨틱하고, 달콤하고, 섹시하고도 슬픈 판타지라는 평이 이어지는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이다. 제목과 여러 리뷰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랑 영화인가? 부인할 수 없다. 제목과 제목에 관해 밝힌 감독의 말이 이러하니.


“물은 담는 그릇에 따라 모양이 변한다. 부드럽지만 우주에서 가장 강하고 가변성 있는 힘이기도 하다. 사랑 또한 그렇지 않은가? 여성이나 남성, 기타 생명체 등 사랑을 어떤 모양에 집어넣건, 사랑은 바로 그것의 모양이 된다”


나는 어쩐지 괴물을 사랑하게 되고, 괴생물체의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괴물과 사랑에 빠진 동료와 친구 곁에 서는 사람들을 주목하게 된다. 몹쓸 병인 줄 알면서 나는 또 편을 갈라 바라보게 된다. 괴물을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리고 역시나 치명적인 병인데, 그들을 줄 세우고자 한다. 물론 일렬로 세운 왼쪽 끝에 엘라이저 역의 셀리 호킨스가 있고, 그 옆에는 청소부 친구 젤다, 자일스가 선다. 오른쪽 끝에는 말할 것도 없이 스트릭랜드 역의 마이클 세넌이다. 백인가부장시스템의 대리자이다. 무슨 근거에 의한 줄 세움인가? 인간다움의 등급이라 하겠다.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한다면 우리도 인간이 아니에요.


해부되기 전에, 죽임당하기 전에 괴물을 연구소에서 탈출시켜야 한다는 엘라이저의 절박한, 소리 없는 절규이다. 옆집 친구 자일스에게 도움을 구하며 하는 말(말보다 더 강렬한 몸의 소리)였다. 엘라이저의 계획이 무모하단 것은 관객인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인간이고 싶은 나는 동의한다. 격하게 동의한다. 그렇게 규합된 탈출단은 여자, 청소부, 흑인, 게이. 백인가부장 시스템에서 배제와 혐오의 대상이다. "당신들은 청소만 하면 되는 거야!" 소리를 듣는 인간 대접받지 못하는 이들이 가장 인간다운 인간들이었다.  


아침에 목욕하며 자위를 하는 엘라이저, 괴생물체와의 섹스는 사랑의 모양을 잘 드러내는 평범한 아름다움이다. 감독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아마도 보통의 영화였다면 그런 장면에서 모델처럼 아름다운 20대 배우의 몸을 수증기로 감싸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비추면서 페티시즘을 느끼게 하는 장면처럼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일상 그대로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엘라이자의 성적인 욕망은 페티시즘이거나, 다른 무엇도 아닌 그저 일상입니다." 인간다운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는 말이다. 과대포장 된 에로틱 씬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욕구를 사는 몸을 가진 인간을 보여준다. 누군가 유일한 사람과 온전히 하나 되고 싶은, 나를 잃을 정도로 깊은 친밀감에 휩싸이고 싶은 간절함이 성욕의 심리적, 영성적인 측면이 아니겠나. 아침마다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졌던, 바로 그 욕조에서 괴생물체와 하나 되는 장면은 아름답고 아름답다. 장면 장면 엘라이저의 몸이 뿜어내는 에로스 에너지가 내내 내 몸을 끌어 당긴다. 





셰이프 오브 워터를 '셰이프 오브 갓"으로 읽어본다. 스트릭랜드(스트릭 랜드, strict land!)가 엘라이저와 젤다를 불러다 놓고 알리바이를 묻는다.  이 장면 대사에서 '신의 형상'을 읽는다. "두 다리로 서니까 인간처럼 보이지? 하지만 우린 신의 형상으로 창조 되었어. 저게 신의 형상으로 보이진 않잖나. 그렇지 않아?" 인간성 상실의 스트릭랜드가 젤다에게 묻는다. 젤다가 답한다. "글쎄요, 신을 본 적이 없어서" 이 장면에서 옆좌석 앉았던 남편이 터졌다. 웬만하면 관람 중 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이 속삭였다. "영화 오두막에서 하나님으로 나와. 큭큭" 영화 <오두막>에서 파파 역을 맡았던 젤다 역의 옥타비아 스펜서가 "글쎄요, 신을 본 적이 없어서"란다. 


이 한 마디로 나는 읽는다. 참다운 인간성은 신의 형상이며 엘라이저와 젤다, 심지어 괴생물체라 불리는 그 역시 누구보다 신의 형상에 가까운 사람들이라고. 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다고 한다. 그 신의 다른 이름은 사랑이다. 신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는 것은 같은 재료, 사랑으로 지어졌다는 의미일 터. 결국 영화가 말하는 셰이프 오브 워터는 셰이프 오브 러브, 또는 셰이프 오브 갓. 한 가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모든 사랑은 신의 사랑이다. 에로스와 아가페의 구분이 있단 말인가. 엘라이저의 욕조는 에로스가 담긴 곳, 사랑이 담긴 곳, 신의 형상이 담긴 곳이다. 

 




폭력의 화신이며 혐오와 배제의 존재인 스트릭랜드는 신의 형상인 자신을 확신한다. 괴생물체는 말할 것도 없고, 여성이며 흑인이며 청소부와는 질적으로 다른 인간이라고 말이다. 힘이 있고, 군림할 자격이 있고, 제힘으로 국가를 지킨다는 확장된 자아가 신의 형상일 리 없다. 인간의 몸을 입은 예수님의 삶은 공생애 기간 3년은 물론이고 이전 30년도 가난하고 무력한, 을의 삶이었다. 신의 형상을 찾고자 한다면 내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거나, 하겠다거나, 지켜내겠다는 이들은 피하고 볼 일이다. 신의 형상으로 이 땅을 산다는 것은 말하지 못하고, 조금 야생적이고 미개한 형태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생명과 평화와 사랑에 대한 탁월한 감각을 가졌고, 치유의 능력을 기본으로 장착하고 있다. 


내가 불완전한 존재란 걸 모르는 눈빛이에요.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니까요.


사랑의 모양을 가장 잘 드러내는 대사로 꼽을 만 하다. 말을 못 하는 엘라이자는 평생 불완전한 존재로 살아왔겠으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눈빛을 만났다. 그것이 사랑이다. 신의 사랑 역시 그러하다. '너는 존재 자체로 사랑받는 자야.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이사야43:4, 공동번역)' 이것이 내가 믿는 신의 목소리이다. 더 깨끗하고, 더 정의롭고, 더 올바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괴물 같은 지금 그대로의 나일지라도. 어쩌면 엘라이자는 이미 그 목소리를 듣고 있었는지 모른다.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이 말 못 하는 장애인이며, 청소부일지라도 그 눈빛에 규정되지 않는다. 춤추고, 자위하고, 옆집 게이 친구를 챙기며 홀로 충분한 일상을 살아간다. 이미 사랑이 장착되어 있다는 뜻이다. 


나는 신의 모양을 보았다.






내려감 / 불행감


언젠가부터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 멜로디가 있었다. 노래가 있었다. 누군가 하모니가 잘 맞는 사람과 꼭 한 번 제대로 불러보리라. 불러보고 싶다. 오래된 노래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란 곡이다. 두 개의 멜로디가 나란히 어우러져 겹치는 듀엣곡이다. 예전 한영교회 샬롬찬양대 지휘할 때 함께 불렀던 기억이 아련하다.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절망과 공포에 잠겨 있을 때

주 예수 우리에게 나타나시사 참되신 소망을 보여주셨네

이 세상 사는 길 엠마오의 길 끝없는 슬픔이 앞길 막으나

주 예수 우리에게 나타나시사 참되신 소망을 보여주셨네


지난 1월 교회 사경회 특송으로 부르는 기회를 딱 얻었다. 내 영혼에 찬양의 샘이 마를까 보내주신 노래 짝이 하나 있다. 탱탱한 젊은 목소리에 기대어 노래했다. 연습하느라 부르고 부르다 보니 멜로디가 아니라 가사가 맴돌았던 것이었다. 따르던 스승을 잃고(영영 잃은 것으로 알고 있었겠지) 십자가 언덕 예루살렘을 뒤로 하고 내.려.가.는 길. 위에 선 두 사람. 그 막막한 걸음걸이를 떠올렸던 것 같다.


적나라한 2절 가사에서 깨닫게 된 것이다. '이 세상 사는 길 엠마오의 길' 그렇다. 나는 자주 이 세상 사는 길이 엠마오의 길이라고 느낀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소망 없는 하루를 사는 날이 많다. 엠마오 내려가는 길 위의 두 사람, 그 사람들 뒤를 비슷한 심정으로 터덜터덜 걷는다. 먼지 나는 길이다.


나타남 / 들이닥침


특송을 부르다 부끄럽게도 목에 메고 말았다. 먼지 나는 길 위에 선 우리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니! 나는 안다. 모두 실재라는 것. 절망과 공포 속의 홀로 걸음도 실재요, 그 곁에 홀연히 사랑이 나타난다는 것을. 그분은 나타나는 분이다. 그분의 부재로 내 영혼이 말라갈 때, 부재로 현존하는 분. 가장 부조리한 일상에 들어와 조용히 함께 걸어주시는 분. 그러다 어느 순간 눈이 번쩍 뜨이게 해놓고 다시 사라지시는 분. 


아닌 게 아니라 특송을 부른 그 사경회에서 박영돈 교수님의 세 번의 설교는 내게 '나타난 말씀'이었다. 사모님과 짧은 대화 역시 갑자기 들이닥친 위로와 격려였다. 그렇게 그분의 은총은 예고 없이 나타나거나 들이닥쳤다. 늘 그러했다. 그리하여 엠마오로 내려가던 발길을 돌려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하는 용기를 북돋운다.


나타난 스승들


래리 크랩의 <행복>과 리처드 로어의 <위쪽으로 떨어지다> 동시에 발간되어 내 눈앞에 나타났다. 나의 스승들. 래리 크랩이 한 번, 리처드 로어가 한 번 나를 회심 시켰다. 내 인생에 두 스승이 나타나(들이닥쳐) 영적 가면을 벗겨내라 촉구하였고, 내내 충실한 안내자로 함께 해주셨다. 두 스승과의 만남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나는 내가 아니었을 터.


게다가 들고나온 제목이 '행복'이다. 또 '떨어짐'이다. 서문만 읽어도 이 선생님들이 뭔 얘기를 늘어놓으실지 알겠는 사이가 됐다. 늘 하시던 그 얘긴데 또 새롭고, 읽는 자세를 다시 고치게 된다. 전에 알아들었던 그 얘기가 다시 새롭게 들리는 것은 그사이 살아낸 스승들의 지난한 삶을 담겨 있기 때문이다. 때로 엠마오로, 드물게 예루살렘을 향해 쉬지 않고 걸었던 거장들의 진솔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떨어짐 / 행복


올라가기 위해서 떨어지고,

진정 행복을 위해 쓰디쓴 일상의 잔을 마셔야 하리라.

스승이 나타나 단호히 가르치시니 어쩔 것인가.


 




1999년 4월 20일,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리볼드는 총과 폭탄으로 무장하고 콜럼바인고등학교에 갔다. 두 사람은 학생 열두 명과 교사 한 명을 살해하고 스물네 명에게 부상을 입힌 다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역사상 최악의 학교 총기 난사 사건이었다.

딜런 클리볼드는 내 아들이다.


저런 책이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서문 시작이 저러하다. 이 책 나오고 온라인 오프라인 서점에서 자꾸만 마주쳤는데, 굳이 클릭하지 사서 읽을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았다. 알라딘 중고서점 놀이에 빠진 탓에 꼭 읽을 책이 아니어도 관심이 있던 책이라면 구매하고 본다. 이런 방식으로 만난 보석같은 저자도 있었다. 기대보다는 조금 불편한 마음으로 펼쳐 읽기 시작했다. 앤드루 솔로몬의 해설이 먼저 나오는데 그걸 그저 빠져들어 읽기를 멈추지 못했다. 밤이 깊도록 읽고, 잠이 들면 악몽을 꾸었다. 예상대로 불편하고도 불편한 책이다. 앤드루 솔로몬의 해설 제목처럼 '평범한 일상에 숨은 공포'가 내 평범한 일상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금방 읽어버렸는데 책이, 아니 가해자의 엄마가 내게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1월을 다 보냈다.


이렇게나 파렴치한 제목이라니. 신간 안내로 이 책을 접한 이후 자꾸 신경이 쓰이면서도 굳이 읽지 않고 마음으로 밀어낸 것은 저 파렴치한 제목 탓이다. 가해자의 엄마라면 입 다물고 자숙해야 마땅한 일.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버젓이 드러내고 내가 가해자의 엄마요! 하며 책을 내다니. 무의식적으로 마음이 밀어냈다. 가해자답게 찌그러져 있어야지, 어디다 대고 공적인 글을 남기느냐! 하는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짙게 깔려 있었다는 것을 책을 읽는 내내 확인했다. (원제는 <A Mother's Reckoning>이다. '가해자의 엄마'는 번역과정에서 붙여진 제목인 듯하다.)  


읽으면서, 다 읽고나서도 쉽게 마음이 추슬러지지 않았다. 내용 자체가 던지는 질문의 무게도 엄청났지만, 제목을 향한 내 반감을 톺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아니 나는) 얼마나 흔하게 착한 편, 피해자, 좋은 나라에 동일시 하는가. 그렇게 쉽게 동일시하고는 나쁜 나라, 가해자와는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다. 뉴스로 접하는 사건, 역사 속에 일어난 일, 심지어 성경의 사건 속에서는 나는 거의 대부분 피해자 석에 앉는다.  오래된 어느 날이었다. 성전에서 기도 드리는 바리새인과 세리 중 세리에게를 읽다가 평생 나는 세리에게 감정이입 해왔다는 것을 알았다. 바리새인과 나 사이에는 바리케이트를 치고 손가락질이나 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러고 있는 나를 깨달았던 순간, 발 아래가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으나 그 이후에도 늘 습관처럼 피해자, 약자, 착한사람에 동일화 된다.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일에서 당연히 나를 피해자 자리에 둔다. 늘 내 중심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생활방식일지 모른다. 성장과 치유라는 주제로 사람들을 만나면서 착한 사람 고치기가 나쁜 사람 고치는 것보다 수십 배 어렵다는 것을 배우고 또 배우고 있다. 무의식적인 자기 규정, 자아상이 '나쁜 사람'일수록 더 빠른 정서적 영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다. 최소한의 뭔가 잘못되었다는 인식-이것이 병적인 자기 죄책으로 신경증의 문제가 되기는 하지만-을 가진 사람이 변화를 위한 문을 열 수 있다. 예수님 말씀,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다. 건강한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하기도 하셨다. Karl Jung이 그의 자서전에서 한 '선에 빠지면 반드시 악해진다'는 말의 뜻일 것이다. 자기 안의 선과 악이 공존함을 인정는 것이 이 온전성을 향해 가는 길이라고 한다. 내 안의 악, 가해자 습관을 인정하기 싫은 마음이 지나쳐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말조차 보기 싫었던 것이다.


책을 추천한 조한혜정 교수의 말처럼 피해자와 가해자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피해자는 가해자일 수 있고, 가해자도 피해자일 수 있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얼마나 불편한 일인가. 피해자의 논리, 상처 받은 자의 입장을 특권처럼 남용해 무례한 말과 행동을 정당화 하기는 또 얼마나 쉬운가.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일 수 있다는 역설적 자기규정으로는 편히 설 자리가 없다. 그런 처지로 한 달을 보낸 것 같다. 안절부절 끝에 마음 깊은 곳에서 겸허라는 싹이 나기도 했다. 안절부절만 하지 말고 의지를 다하여 겸허해야겠다. 피해자이며 동시에 잠재적 가해자인 나여.


사건이 나고 16년이 지나 이 책을 냈다고 한다. 엄마의 말처럼 이상한 가정이 아니었다. 역기능 가정 아니고, 부모가 중독자도 아니고, 부유하지만 검소하고, 아이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특히 아이 교육에 부부가 같은 마음으로 함께 하는 가정이었다. 흔한 '문제 아이 뒤의 문제 부모'라는 논리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 가정의 아이가 무고한 친구들을 총으로 쏴 죽였다면 어느 가정의 아이에게 가해자의 가능성이 없겠는가.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렇다. 그러니 누구보다 엄마 자신이 미칠 노릇이었을 것이다. 박찬욱 감동의 추천사처러 '악마가 되어버린 아들을 이해해보려고 하는 피눈물 나는 헛수고'가 바로 이 책이다.


앤드루 솔로몬이 해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떤 아이가 총격 살해범이 되는지, 이유를 찾고 규정해 놓아야 마음이 편해진다. 특히 부모의 탓이라고 했을 때, '그러면 그렇지. 우리 집에서는 아이에게 그런 나쁜 짓을 하지 않으니 이런 재앙을 겪을 일이 없다'고 안심할 수 있다. 우리가 그 많은 육아서를 읽고, 세바시 강의를 찾아 듣는 이유는 선한 것을 집어 넣으면 선한 결과가 나온다는 믿음 때문이다. 믿고 싶은 간절함 때문이다. 때때로 육아강의를 하곤 하는데, 이 지점에서 늘 조금씩 마음이 어렵다. 이러이런 방식으로 아이와 소통하고 키운다면 아이는 자기 재능을 꽃피우고 자유로운 아이가 되면 궁극적으로 당신은 좋은 부모에 등극할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해줘야 할 것 같은 부담감 때문이다. 그런 것을 말해줄 수 없다면 젊고 초롱초롱한 눈빛의 엄마들이 내 앞에 앉아 있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아이 말을 중간에 끊지 마세요 / 여러 사람 앞에서 아이를 나무라지 마세요 / 따뜻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봐 주세요 / 이런 육아 십계명이 있다. 육아 강의 시작하며 이걸 보여주곤 하는데, 찰칵찰칵 폰으로 ppt 화면을 찍는 소리가 요란해진다.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참 좋겠지요? 이걸 읽고 이런 엄마가 되어야지 결심하고 어린이집 간 아이를 기다려요. 아이 오기 5분 전, 시어머니에게 전화가 옵니다. 얘, 이번 주말에 집에 와서 김치 가져가라. 어머니 저희 일정이 있는데요, 말을 채 꺼내지도 못하고 네네 전화를 끊었어요. 어린이집 갔던 아이가 들어와 떠들기 시작해요. 엄마 오늘 친구가..... 시끄러! 들어가 씻어!" 이 쯤이면 모두 공감한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좋은 엄마됨의 방법을 배운다고 그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도를 닦아서 시어머니 전화에 결코 시험 들지 않고, 아이에게 화 한 번 내지 않고 키운다 해도 기대하는 결과를 보장받을 수는 없다. 이것이 팩트이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육아 책, 육아 강의로 배우지 말란 말인가? 아니다. 그럼에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아이는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 하는 말이지만 하나의 우주이며 미지의 세계이다. 그렇다. 나는 너를 알 수 없다. 가해자의 엄마 수 클리볼드가 피를 토하며 하는 말은 '나는 너를 알지 못했다' 이것이다. 낳았고, 너를 지키며 길렀고, 공들여 너의 인격을 만들어 왔고, 대화 했고, 기도 했는데...... 나는 너를 몰랐다!


가해자 엄마의 말이라 싫어 피하고 싶었던 책을 통해서 꼭 들어야 할 말을 들었다. 육아일기 십수 년을 써 온, 육아 책을 내고 강의를 하는, 신앙도 좋아 기도까지 열심히 하는 엄마인 내가 들어야 바로 그 말을 들었다. 




 









패터슨 시에 사는 패터슨 씨는 시를 쓴다.

시를 쓰니 시인이겠지만 시만 쓰는 것은 아니니 시인인 것만은 아니다.

패터슨 씨는 패터슨 시를 운행하는 버스 운전기사이다.

패터슨 씨는 월화수목금, 아침마다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일어난다.

포즈는 조금씩 다르지만 자그마한 아내를 품은 채로 아침을 맞는다.

잠든 아내에게 사랑스런 입맞춤을 하고,

아내의 단잠이 깰세라 각 잡아 개켜진 옷을 살짝 들고 침실을 나온다.

우유에 만 씨리얼을 덜렁 앞에 놓고 우그적우그적 씹으며 식탁에 놓이 상냥갑을 관찰한다.

도시락 통을 들고 출근을 하고, 

버스 운행이 시작되기 전, 운전석에 앉아 아침의 영감을 바탕으로 시를 쓴다.

시인 패터슨을 버스 드라이버의 운전석으로 불러내는 것은 동료의 노크이다.

그리고 아침 인사.

안녕, 어때? 어, 사실은 별로야. 

염려와 짜증을 일발장전 하여 살짝 건드려도 다다다다 불평 투하이다.

동료의 염려와 짜증을 뒤로 하고 버스는 출발한다.

코너를 돌고, 작은 폭포 옆을 달리는 패터슨 시의 버스는 뭔가 몽롱하다. 


패터슨 씨의 일상은 라임이 딱딱 맞는다.

아주 작은 변주가 있고, 아침 점심 저녁 일상의 흐름은 월화수목금 운율이 잘 맞는다.

시의 운율은 잘 모르겠다.


시를 위한 시인가, 사랑을 위한 시인가.

시인들을 보면서 나는 가끔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내게 사랑이란 로맨스가 아니다. 

일상이다. 일상의 사람, 가장 빈번하게 얼굴을 마주하고 에너지를 들여야 하는 사람,

에 대한 마음이다.


패터슨의 시는 식탁에 놓인 성냥갑으로 시작하여 아내에 대한 절절한 사랑으로 끝을 맺는다.

패터슨은 정말 아내를 사랑하는 것 같다.

뭔가 철없어 보이는, 아슬아슬한 아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지지한다.

물론 시가 끝나지는 않는다.

다만 시를 적은 비밀노트가 갈기갈기 찢기는 것으로 일단의 시가 끝나게 된다.

아내가 아들처럼 키우는 개에 의해서 패터슨의 비밀노트는 찢어발겨지고 만다. 상실감.

주말에 일어난 일이다.

그 주말은 어떤 주말인가 하면, 패터슨 시의 진가를 알아주는 아내가 복사본을 만들겠다던 주말이다.

혼자 보지 말고, 복사본을 만들어 남기자! 알리자! 이번 주말이다!

아내의 설득에 내키지 않는 오케이를 했던 바로 그 주말이다.


일상과 예술 사이의 성찰 또는 헛갈리을 위해 감독이 놓은 여러 개의 덫에 걸려 들었다.

주말에 열리는 마켓에서 머핀을 팔아 대박 내겠다는 철부지 아내의 바램은 실패가 될 줄 알았다.

패터슨의 시는 주말을 기점으로 어떤 전기를 맞이할 줄 알았다.

시는 잃고, 머핀은 대박이 난다.

어쩌면 패터슨에게 시는 잃어도 좋은 것이다. 

다만 관객에겐 조금 불편한, 손해 보는 듯한 패터슨의 월화수목금 사랑과 일상이 잘 흘러가고 있으니

그게 어디냐.

뜬금없이 나타난 일본 사람이 주고 간 새 노트에 시는 다시 씌여질 것이다.


패터슨을 닮은 한 남자를 알고 있다.

시를 쓰던 남자였다. 

이제는 시를 쓰지 못한다.

시 대신 말을 빚어 공기 중에 흩어 놓는 것이 그의 일이 되었다.

주말 밤 거실 바닥에 찢겨 흩어진 패터슨의 비밀노트가 차라리 명예로우리.


패터슨의 시가 사라져도 버스 운전사 패터슨의 

아무렇지 않은 일상은 아름다운 영화가 되듯

패터슨 닮은 남자의 떠벌이지 않는 사랑 역시 마지막까지 남을 아름다움이다.


그 남자의 비밀노트, 어렵게 고르는 말의 명예를 지켜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 없지만.

글과 말이 사라져도 고이 남겨지고 지속되는 일상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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