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를 비우는 일은 일상을 비우는 일이네요.
생각해보니 블로그는 저의 일상이예요.
적어도 블로그에 임하는 저의 자세는 할 수 있는 한 일상을 그대로 녹여내려고 하고 있지요.


그래서 때론 다중인격자의 면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요.
하루는 개그맨,
하루는 믿음 좋은 사모님,
하루는 요리를 좋아하는 주부,
하루는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양육하며 고민하는 엄마,
하루는 애써 본색을 숨기려 하지만 그래도 숨기지 못하는 좌파 아줌마,
하루는 고뇌에 찬 영적 순례자.


그러나 그  다중인격적인 일상을 떼놓고는 나라는 존재를 설명한 방법이 없고,
다중인격적인 내가 담긴 일상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길이 없기에
저는 일상에 목숨을 겁니다.
아주 깜찍한 꿈이 하나 있다면,
그리고 제 평생 그것을 이룰 수 있다면,
저의 일상이 매 순간 영원에 가 닿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목숨거는 일상을 며칠 간 에미 없는 자식처럼 풀어놓고 저는 잠시 떠납니다.
목숨같은 일상이기에 가끔은 한 발 물러서야 두 눈 똑바로 뜨고 제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년 한 해 동안 마음으로 여러 번 계획했던 기도여행인데 참으로 기가막힌 찰나에 이루어지는군요.
남편은 멀리 네팔에 비젼트립으로 떠나있습니다.
이렇게 멀리, 오래 아빠를 떨어져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라 매순간 그리워하는데,
엄마까지 며칠 비우려니 마음이 놓이질 않아 자꾸만 신경이 날카로와집니다.
아이들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며 준비해왔는데도 정작 마음이 많이 쓰이네요.
좀 더 따뜻하게 안아주며 재울걸.... 할아버지 댁에서 어떻게 지낼 지 계획을 세우다 아이들은 잠이
들었어요.


암튼, 일상에서 한 발 물러서 그 분과 깊은 데이트를 위해 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하는 한 젊은이가 암이라는 파도에 휘말려 위태로운
지경에 있는 걸 바라보며, 그 한 젊은이를 마음에 품고 기도하러 갑니다.
정직하게 기도하며 며칠을 보내겠습니다.
어찌하여 선한 이들이 고통을 받으며,
어찌하여 교만하고 악한 자들이 끝도 없이 하늘로 치솟으며 약한 자들의 눈에 피눈물을 내는 세상인지,
그 분께 물으며 답을 구하겠습니다.


그러다....
그러다....
저의 삶을 고치라고,
저의 악함을 지금 당장 돌이키라고 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일상의 분주함에 숨어 자라고 있던 저의 악함을 보여주시면 눈물로 회개하며 돌이키겠습니다.


제가 돌아오면 네팔에 간 남편이 돌아오고,
그리고 어쩌면 그렇게 길던 겨울이 가고 봄이 오겠지요.
저는 압니다.
그 분은 저의 삶에, 남편의 삶에, 새벽이슬 같은 한 청년의 삶에도 결국 가장 빛나는 봄의 햇살을 주실
분임을요. '사랑'이라는 성품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것을요.


블로그에 들어와 이 글을 보시는 분마다 잠시 기도해 주세요.
새벽이슬 같은 그 청년의 몸이 이슬처럼 맑은 몸으로 회복되어 그의 나라와 교회와 조국을 섬기도록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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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자리



                                                - 구상 -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 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 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다.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다.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묶여 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 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올해 초 일기장에 적어넣은 올해의 목표 같은 것은,

1. 상황에 순종하기

2. 충만한 기쁨 회복하기

'순종'하는 것은 말씀에의 순종과 더불어 상황에의 순종도 함께 의미한다는 것을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서 배우고 얻은 통찰이었다. 상황에 순종한다는 것은 '지금, 여기'의 모든 것을 남탓 내지는 상황 탓 하지 않고, 미래의 계획과 환상으로 도망가지 않고, 과거의 후회에 붙들리지 않고, 오롯이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그 분과의 관계로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언제 어느 때  '여기가 꽃자리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있을까만은 가시방석 자리에서 상황에 오롯이 순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순종하는 척 할 수는 있지만 상황에 순종하되 마음 깊은 곳까지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 번 순종하고 넘어가는 일인줄 알았다. 그러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상황에 대한 순종은 늘 바뀌는 것이 상황이기에 늘 다시 결단해야 하는 일이었다. 정말 상황에 순종하기 원한다면 아주 아주 정직해져야함을 알았다. 그 분 앞에서, 나 자신에 대해서 아주 정직해야 내가 진짜 순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테니 말이다. 

'나와 동행하시고 모든 염려 아시니 나는 숲에 새와 같이 기쁘다'
이 찬송은 오랫동안 내 것이었다. 그야말로 내 것이었다. 기쁨은 내 것이었다. 행복도 내 것이었다. 그런데 그 기쁨의 뿌리가 돌밭에 뿌려진 것임을 알았다. 잠시 기뻐하나 뿌리가 깊이 내리지 않아 메마른 날이 조금만 길어져도 사라지는 기쁨이었다.
가짜가 아닌 진짜 기쁨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고통스러운 것들은 맞닥뜨리는 게 두려워서 얼른 즐겁고 행복한 일들로 덮어버리는 그런 '긍정의 힘'은 더 힘을 발휘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도 정직해져야 했다. 그 분 앞에서 그리고 나 자신의 대해서.

아버지 돌아가시고 서울로 올라왔을 때 궁색한 삶을 살았다. 친구들이 집에 놀러왔을 때 제일 부끄러운 곳이 있었다. 아버지가 보시던 책이 누런 박스에 담겨셔서 주방 한 켠에 쌓여 있었는데 그걸 큰 이불보 같은 걸로 덮어 놓았었다. 이불보도 부끄럽고 그 안에 박스도 왜 그렇게 부끄러웠다. 덮어 놓은 것들, 덮어서 가리워 놓은 것들이 다 치워지고 그 안에 지져분한 것들이 드러나도 부끄럽지 않을 때 진짜 기쁨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았다.

상황에 순종하는 것도,
충만한 기쁨을 회복하는 일도
내가 내심 기대했던 확 뽕 맞은 것처럼 되는 일이 아님을 새삼 깨닫는다.

당장, 빨리, 지금, 단번에... 이것이 유혹이고 굴레임을 깨닫는다.
정직하게 그 분의 손잡고 한 걸음 한 걸음 가는 것이며 가끔 넘어지기도 하는 것인데,
돌이켜보니, 올 해 초 일기장에 써넣으며 다짐했던 때보다는 몇 발자국 나왔구나.
그리고 많은 순간 꽃자리에 앉아서 기뻐했던 순간이 있었구나.

20102년 12월 14일 꽃자리에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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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노도와 같은 2010년이 지고 있다.
적어도 내게는 질풍노도였다.
질풍노도의 손바닥만한 일렁임의 시작은 2009년의 크고 작은 개인적, 국가적 일들로 거슬로 올라가지만 본격적인 본격적으로 바람이 거세지고 파도가 소용돌이치게 된 건 1월 첫 주였다.
기도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기도의 자리는 앞뒤좌우가 꽉꽉 막혀 있었다. 기도하러 갔다온 1월 첫 주의 어느 새벽 거실에 누워 통곡을 했다. 세상과 교회와 무엇보다 나의 하나님을 향해 모질게 등을 돌리며 통곡을 했다.


기도하고 싶고, 나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그 분의 존재를 확인하고 사랑을 회복하고 싶어서 1월 세째 주던가... 용기를 내서 일상을 떠나 큰 걸음을 내딛었다. 3박4일 모든 소음에서 떠나 침묵 속 기도의 자리로 떠났다. 말 한 마디 입 밖으로 내지 않고 밥 먹고 하는 일이라곤 기도 밖에 없었는데 마음의 소음은 커져만 갔다.
난 태어나보니 목사의 딸이었고, 자라면서는 그냥 목사의 딸이 아니라 착하고 영특한 목사의 딸이었다. 게다가 까불고 귀여운 목사의 딸이었다. 하나님께도 그런 딸이었다.
내면에서 올라오는 소리가 커지고 또 커져서 하나님을 향한 40년 억눌렀던 섭섭함을 다 토로했다. 감히. 감히. 막 대들었다. 하나님께 대들지 말라는 설교를 들은 지 몇 주 안돼서였다.ㅜ


기진맥진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기도하던 시간 끝에,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셨던 그 분 앞에서 이제 하나님께 대든 대역죄까지 범한 내가 자포자기로 앉아 있을 때 였다. 바로 그 때 였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째 부인하던 그 순간, 그 순간으로 내 마음이 옮겨져갔다. 얼마나 절망스럽고 얼마나 두렵고 얼마나 막막했을까?
그 때 닭이 울었고, '주께서 돌아서서 베드로를 보셨다!' 그 때 베드로를 바라보던 그 예수님의 눈빛이 베드로 같이 두려움과 외로움과 막막함에 떨고 있는 나를 바라보셨다. 그 눈빛에 제대로 마음이 무너지고 녹았다. 너무도 안쓰러워 하는, 너무도 가엾어 하는, 당장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손이 저절로 올라오는, 너무 사랑하는.... 그런 눈빛이었다.


베드로는 나가서 몹시 울었다.





그리고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난 갈리리 바닷가.
밤새 고기잡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손수 물고기를 굽고 계셨고, 먹으라고 하셨다.(아, 따뜻하신 분ㅜㅜ)
거기서 세 번이나 물으셨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째 물으셨을 때는 베드로가 거의 울상이 되어서 대답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왜 그리 민망하게 물으셨을까? 베드로가 그렇게 의기충천해서 예수님 따라다니던 베드로가 이제 사도로 헌신의 삶을 살아야하는데 '네 안에 사랑없다'는 걸 확인시키시고자?
내가 아는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3년 간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베드로의 마음을 다 아시는 예수님. 그 분은 베드로 안에 있는 '두려움'과 '사랑'을 모두 꿰뚫으셨다.
 





예수님을 잡으러 로마군인들이 왔을 때 칼로 대제사장의 종이 귀를 내리친 베드로의 동기는 무엇일까?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이 정도의 용기는 내야한다는 자의식,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생각에 의한 두려움의 발로, 또 예수님에 대한 사랑.... 여러 가지 동기의 혼재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면 내 맘을 들여다 볼 때 내가 유일한 하나의 동기로만 움직이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 예수님은 내 마음의 동기 중에서 무엇을 봐 주실까? 다 아시는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예수님과 아이컨텍을 했던 베드로. 그리고 나가서 통곡을 했던 베드로는 이미 자기 안에 무엇을 보셨는지 알거라 믿는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니? 사랑하지?
라고 반복해서 물으시는 것은 베드로 안에 있는 사랑을 확인시키시는 과정이고,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그 사랑을 확인해주시는 것으로서 베드로는 열등감과 죄의식에서 치유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너 왜 대들어! 나를 사랑하란말야. 사랑할래 뒤지게 맞으래?' 이런 식의 사랑을 강요하시는 분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흘려보내서 그 사랑에 나를 젖게 하는 분임을 나는 안다. 베드로에게도 내게도.....






내 안에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도 있고, 예수님을 이용해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편하게 살아보자는 이기심도 있고, 두려움도 있지만 예수님은 내 맘에 코딱지 만한 사랑을 봐주시는 분. 그걸 인정해주시는 분이시다. 두려움에 떨던 베드로가 감히 예수님이 맡기시는 양을 먹이는 일은 이제 의무감도 아니다. 그저 예수님으로부터 받았고, 인정받은 그 사랑을 흘려보내는 일일 뿐일 것이다.
베드로는 이제 자신이 들었던 자의식의 칼을 내려놓고 자시 힘으로 옷입고 원하는 곳으로 다니던 삶에서 '팔을 벌려 다른 사람들이 입히는 옷을 입고 원치 않는 곳으도 데려가는 삶'에 기꺼이 자신을 던질 수 있게 되었다. 그건 사랑의 바다에 아무 걱정없이 힘을 다 빼고 누워 자신을 맡기는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길일터.


질풍노도와 같은 2010년을 지내면서 내가 받은 선물은 사랑의 하나님의 재발견이다.
정직하게, 아주 정직하게 그 분 앞에 나가기만 하면 결국에는 내 마음의 풍랑을 잠재우시고 그 분의 하염없는 사랑에 눈 맞추게 하시는 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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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도가 아주 조금 알아들어지기 시작할 때.
눈 앞의 문제가 확 해결되길 바라는 기도에 안달복달 하지 않을 수 있을 때.
그리고 눈 앞에 있는 작은 일들을 피하지 않으며 한 발짝이라도 내어 디딜 때.
그 길을 함께 걸어주시는 분을 있음을 믿을 때.


자유로움의 날개가 펼쳐져 내 힘을 빼고 허공을 향해 몸을 날릴 수 있을  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위에서 온 평화가 마음 한 구석을 간지럽힐 때.


이제껏 걸어온 여정이 헛되지 않다고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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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
정말 알려지면 안되기에 비밀로 간직해야는 것도 있고,
때로 너무 알리고 싶어서 비밀이 되어버리는 아이러니도...
송명희 시인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 풍부함 표현 못해서 비밀이 되었네. 그 이름....'
내겐 그런 비밀이 너댓 가지가 있다.


1. 한 남자

새로 알게 된 사람들이 '남편은 어떤 사람이예요?' 라고 물으면 대략난감이다.
보통 '좋은 사람이예요' 라고 한다.  '어떻게 좋아요?' 인격이 훌륭해요.
(새 한 마리 퍼덕퍼덕~~)

구체적으로 물어오는 남편이 내게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를 설명하다보면 대개는 '재수없다'거나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다. 그러다가....
'그런데... 다 좋은데요. 저희 남편은 딱 돈만 못 벌어요' 하면 그 때야 표정이 달라진다.
그러면 그렇지! 내지는 그렇다면 무슨 좋은 남편?
이런식....

그래서 차라리 이 비밀 1호로 남겨두는 것이 안전한 일이다.




2. MBTI

매우 주관적이고, 매우 자기도취적 성향이 강하고, 그래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던 나. 그런 내가 내 밖으로 나가서 나를 바라보게 해준 것이 MBTI이다. 그리고 나와 다르게 생긴 사람들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게 되었다면 것두 MBTI라는 선생님의 지도편달이다.
그래서 MBTI가 내겐 단지 성경유형론 나부랭이가 아니다.
MBTI 강의를 하러 가거나, 아니면 어디서 MBTI 좀 해봤다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저는 모 ESFP예요'라는 식의 일상적인 대화에도 마음이 살짝 '철렁' 해짐을 느끼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내겐 너무 소중한 MBTI라 '저 ESFP예요' 정도로 거두절미하고 말하기가 싫은 것이다.
부부간에, 친구와, 상사와 갈등을 일으키는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 붙들어 앉혀놓고
'그거요. 그거 T와 F의 차이기 때문이거든요'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 적도 있었지만...

차라리 비밀 2호로 남겨두는 일이 편안한 일이다
.



3. 에니어그램

왜 하나님을 믿는데 내 인격은 변하지 않을까?
왜 예수님은 사랑이라는데 나는 미운 사람이 이렇게 많을까?
성령충만이라는게 무얼까?
나를 이토록 불안하게 하고, 이토록 분노에 차게 하는 것은 정말 그 일. 그 사람일까?
이런 질문.
아이러니하게도 다름 아닌 에니어그램은 이런 나의 오래된 질문에 답을 보여주었다.
단지 사람의 성격을 아홉 개로 설명하는 수많은 성격이론 중 하나가 아니라 내게는 일종에 그 분의 자유로운 품으로 가는 하나의 길을 터주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참지 못하는 분노로, 한없는 무기력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오늘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거요. 에니어그램에서요 @#$%*%^%$$^$%#$.... '하고 싶지만 입을 열지 못한다.

차라리 비밀 3호로 남겨두는 일이 더 가치롭게 두는 일이다.



4. 한 분

내 삶의 가장 큰 비밀은 여기에 있다.
말하자면 2000년 전에 이스라엘에서 십자가의 교수형을 당하신, 33년이라는 짧은 이 땅의 삶을 사셨던 그 분이다.
내가 사는 이유, 내가 사랑하는 이유, 내가 자유로운 이유, 내가 가끔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이유, 내가 행복한 이유이다.

하나님이지만 기꺼이 사람이 되셨던, 그러니까 창조주의 자리에서 피조물, 그것도 사형당하는 범법자의 자리를 마다하지 않으신 분. 가장 높은 분이지만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분. 가장 많은 배신을 당하셨지만 끝까지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
그런 분이시다.

내가 사는 세상에서 그 분의 이름은.....
낮은 곳에 도통 마음을 둘 줄 모르는 사람들이 그 분의 이름을 높이라 하며.
도통 자기의 뜻을 기꺼이 거두고 희생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그 분의 길을 가노라하며,
자신의 거짓을 무마하기 위한 이름으로 그 분의 순결하신 이름을 외치고 부르기에....
그 분의 사랑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목소리 높여 '그 분이 사랑이라고, 그러니까 그 분의 이름을 만방에 알려야 한다'고 하기에 말이다.

아니, 정신줄을 놓고 사는 내가 그러며 살고 있기에 말이다.

감히 그 분을 드러내 자랑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그 분은 나에게 영순위 씨크릿이 되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면서,
나를 바라보면서,
나의 비밀들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져준다면....
나의 비밀들에 대해서 들을 준비를 하고 물어봐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요란하지 않게, 조용히,
내가 사는 삶의 자리에서 아주 작은 향기로 내 비밀들에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삶을 살고 싶다. 
그 정도의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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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에게는 마이크 주고 말하라는 게 고문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말을 못하게 하는 게 고문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갑자기 일을 맡기는 게 고문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시간을 많이 주고 일을 하라는 게 고민인 것.


내가 잘 아는 어떤 사람은 백만년의 시간을 주고 준비하여 움직이라면 좋아하지만,
것두 그 백만 년 동안  한 가지에 집중하여 연구하고나서 움직이라면 좋아하는 사람입니다만.
 

그런 그가 여름 내 책을 덮고(아니다. 책은 옆구리에 항상 끼고 ㅋㅋㅋㅋ) 몸으로 살아냈음으로 그것을 칭찬합니다. 준비모드를 해제하고, 생각없이 달려들라고 하는 것이 고문인 그가 말이지요. 수련회를 준비하던 초여름부터 마음을 앓는 중에도 평소 그답지 않게 마치 다시 오지 않을 여름처럼 땀을 흘려 뛴 것에 무한 존경과 칭찬을 보냅니다.


신앙은 머리로 믿고 아멘 오케이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야 하며, 현장에 있어야 하며, 동참해야 하는 것임은 믿는 그의 여름이 뜨거웠습니다.
해비타트로, 쪽방으로, 샘물호스피스로, 밥퍼로....
'자, 여기 여기 가서 봉사하고 와! 됐지?' 하지 않고 함께 땀흘리며 무엇보다 그 하나하나에 마음을 쏟아부은 것을 칭찬합니다.


그렇게 지.금. 여.기. 를 산 당신의 여름을 향해 쏟아지는 폭우와 같은 박수를 보냅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하고, 요란해야 하고, 재밌어야 하고, 통제하며, 효율적이어야 하는 그녀에게 조용히 계획하고 주어지는 대로 추진하고, 통제하지 않으며 모두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하는 여행의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신앙은 저~기 멀리 계신 하나님을 위해 항상 뭔가를 하고, 무조건 순종하는 것만이 아니라 내 인격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님의 손을 잡는 것이고, 공조하는 것이고, 그러면서 내면의 사람이 달라지는 것임을 믿는 그녀의 여름은 폭염조차도 따사로움이었습니다.


퍼펙트하게 준비된 사랑스런 여섯 사람과 함께 경기도 깊은 산골짜기에서의 하룻밤이었습니다.  에니어그램이라는 기차를 타고 속사람으로 떠난 1박2일의 여행. 짧지만 길고, 빈약하지만 풍성한 이 여행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가르치기 전에 배우는 시간이었고,
나눠주기 전에 채워지는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딩동댕 지난 여름.
생각해보면 덥고, 지루했고, 더딘 기도응답 가운데 의기소침했지만 행복했네요.


가을이 옵니다.
오는 가을이 어떠하든지 지.금.여.기.를.그.분.과.함.께.사.는.이.들에게는 행복의 나날들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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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원래 스킨십 별로 안 좋아하고,
더운 여름 날에는 진짜루 애들이 안아달라고 따라붙거나 걸으면서 손잡자고 하면 완전 더워서 돌아버리겠고,
게다가 기다란 어른이 그러면 진짜 완전  튀어 나가버리고고 싶은 요즘.
(기다란 어른, 미야~안! 헤헤)


이럴 때는 스킨십 대신 페이퍼십이 딱이다.
더운 여름 날 마음의 양식이 되어준 좋은 만남이 있었다.





얼마 전 동생이 좋은 책 발견했는데  50% 세일 중이라며 얼른 주문하고 해서 손에 넣은 책이다.
동생도 조금 그런 시기였고 나 역시 이 부조리한 세상, 부조리한 교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냐는 식의 20대 초반 같은 고민 끝에 우울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었다.
그럴 때 '책만 보는 바보'는 나 자신이라 해도 좋겠다 싶었다.
조선후기 실학파라 불렸던 여러 사람들 중에 이덕무가 지은 <간서치전>에 저자가 상상력의 옷을 입힌 것이다. 상상이든 역사든 분명한 건 당시 서자로 양반사회에서 살아가야 했던 아웃사이더들의 삶, 그들의 우정의 이야기이다.

이 책은 아침의 책이다. 아침마다 홀로 앉아 학문(정직하게 읽으시오!ㅋㅋ)에 힘주는 그 곳에서....ㅎㅎㅎ







이 책은 밤의 책이다.
잠들기 20분 전에 무슨 생각을 하는 지가 다음 날의 내 영혼의 상태를 결정한단다.
잠들기 전에는 헨리 나우웬을 읽는다. 잠들기 20분 전의 자투리 시간을 모아서 읽은 나우웬의 벌써 책이 여러 권이다.

나라는 인간 본능적으로 슬픔, 아픔, 고통, 죽음이라는 단어는 피하고 싶은 일천하고 피상적인 인간이라서 '나우웬의 마지막 일기'는 쉽게 손에 들어지지가 않았었다. 헌데 어떻게 어떻게 손에 들게 이 책으로 나우웬이 본향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 1년을 함께 하였다. 그리고 아픔과 아쉬움으로 그를 떠나보냈다.

자신의 외로움, 사랑받고 싶은 욕구, 연약한 내면을 보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 아니, 두려워하지 않음이 아니라 그 두려움까지도 투명하게 보여주는 글들이 하루를 닫는 20분 동안 내 시끄러운 내면에 진정제가 되어주었다.






내겐 대화를 잘 한다는 자부심과 함께 조금만 깊게 들어가면 대화를 처음부터 갈아 엎어버리는 폭탄이라는 자괴감이 공존한다.
 아, 쉽게 말하면 대체로 난 대화를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 결정적인 순간에 비합리적인 판단으로 대화를 그르친 아픈 경험이 있어서 사실 중요한 대화는 늘 잘 못한다는 못할거라는 생각을 한다.

가끔씩 남편과 대화하면서 남편이 정말 황당해 할 때가 있는데 한동안 이게 더 심해진다고 느꼈었다. 요즘 생각해보니 내가 에니어그램을 하고 난 이후로 '대화하다 남편 어이없게 만들고 열받게 만들기' 기술이 날로 발전한 것 같다.ㅠㅠ

최근들어 내가 왜 이러나 깊이 성찰하면 반성하고 회개 중이다.  에니어그램을 알고나서 '나는 안다. 나는 당신의 속마음과 동기를 안다'는 자의식이 내게 충만해진 것 같다. 그 자의식은 나를 끝도 없이 교만하게 만들었고, 그 교만한 태도는 결국 나와 사람들을 단절시켜가고 있었다. (이건 진짜 에녀그램을 만났을 때의 초심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냔 말이다)

암튼, 이러던 찰나에 한참 전부터 백현웅님이 강추하던 <비폭력 대화>를 읽게 되었다. 대화의 기술을 가르치는 책일 것 같아 처음에 썩 땡기지 않았었다. 어느 날 교보에 가서 첫 부분 몇 페이지를 보다가 바로 사가지고 왔다.
아, 기술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다. 언뜻 보면 기술이지만 그 기술은 기술로 배워서 되는 게 아니기에 이 책이 담고 있는 보물이 빛나는 것이다. 끌리시는 분들께 일독을 권하면서 책 내용에 관해서는 여기서 접으련다.


가을이 오기는 하려나?
더운 여름날 끈적이지 않는 좋은 만남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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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정규 레슨시간 외에 자유수영을 간다. 혼자 내 템포에 맞춰서 편하고 자유롭게 수영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자.유.수.영.
그 분의 넉넉한 품에서 내 영혼의 집착을 다 내려놓고 안식하듯 물 위에서 내 힘이란 힘은 다 빼고 그저 떠 있기. 내 영혼을 뻗을 수 있을 만큼 뻗어서 그 분에게 까지 닿겠다는 듯  팔을 쭉 뻗어 물을 잡기. 한 바퀴에 한 사람씩 마음에 품고 기도하며 돌기.
수영은 그대로 영성훈련이다. (물론 가끔 내가 온전히 깨어있을 때의 얘기다. ㅡ.,ㅡ)


열심히 음파음파 자유형, 올라갔다 내려갔다 평영.... 하다가 보면 잠시 숨고르기를 하시던 아주머님들의 뜨거운 눈길이 느껴질 때가 있다. 처음엔, '아, 내 수영하는 모습에 저 아줌마 뻑 가셨군. 자, 자유형을 이렇게 팔을 꺾어주는 것이 제 맛이라고요...' 하는게 내 속에서 돌아가는 전자동 모드, 일명 자뻑모드였다.


헌데, 그런 아주머니들 턴을 해서 나가는 내 발목을 잡으신다. '흠! 칭찬을 하시려면 내가 쉴 때 하시지 굳이 뭐 이렇게 까지 적극적으로 칭찬을 하시나?' 싶어서 멈춰서면 '젊은 엄마! 자유형 할 때 몸이 너무 많이 흔들려. 팔을 자, 안쪽으로 넣지 말고 쭉쭉 앞으로 뻗으면 봐바. 몸이 어쩌구 저쩌구.... #%&$$!(#%.... 알았지?
'아, 네 그래요? 어떻게요? 네....'하고 겸손하게 꼬리 내리고 듣다보면 옆에서 안 보는 척 하다 보시던 아주머니도 한 말씀 '그리고 접영할 때 힘을 좀 빼....쏼라 쏼라....랄....설교...설교....'
이렇게 되기가 일쑤였다.


'아이씨, 아줌마들이나 잘 하지. 나만 갖고 그래. 자기는 자유형 할 때 팔이 가관이더만... 저 아줌마는 접영할 때 완전 고개 빳빳하게 들고 웃기게 하면서 나한테만 지적질이야...'라고 첨에는 생각한 적도 있었다. 헌데, 이 지적질이 반복되면서 내 마음에 큰 울림있는 통찰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1. 모두들 자기는 대체로 수영폼이 제대로 쫌 간지난다고 생각한다.

보니깐 나부터도 내가 수영하는 모습은 못 보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결점을 보면서 '난 저 정도는 아닌데'를 확인하고 되새기면서 '난 쫌 돼'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일단 자기가 수영하는 건 동영상을 찍어서 보지 않는 한 모른다는 것.



2. 그래서 모두의 마음 속에는 지적질의 충동이 내재해 있다.

수영 쫌 했다는 아줌마들은 다른 사람들의 영법에서 지적한 꺼리가 산더미 같을 것이고 그렇다고 아무나 붙잡고 가르치고 고쳐줄 수는 없다. 수영하는 여자들 중에 나이가 젊은 축인데다가 키나 몸집은 초등학생 수준이라 포스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내가 딱 맞춤인 것이다. '젊은 사람이 열심이네. 근데 손이 왜 저래. 저것만 고치면 훨 낫겠네' 이런 마음으로 내 발목을 잡아 지적질해 주시는 것이다.
나 역시 겉으로 지적을 안해서 그렇지 조금 쉬는 동안 여기 저기 수영하는 분들 보면서 '저 분은 저것만 고치면 되겠네. 미치겠네. 저러면서 자기가 잘하는 줄 알고 쑈하는 것 봐' 이러고 있으니까.



3. 내 결점은 나만 모르고 다 안다.

한 동안 지적질 전문 아줌마들 때문에 자유수영은 피할까도 했었으나 이건 내게 너무나 좋은 약이 되었다. 사실 상급반으로 갈수록 코치들이 거의 방임수준으로 가르치는데 아줌마들의 지적은 기분은 나쁘지만 날카로우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해서, '네 알겠습니다. 한 번 신경 써서 해볼께요. 봐 주세요' 하고 노력하면 잘못된 습관들이 빨리 빨리 고쳐지는 것이다. 오호! 기분 나빠할 일이 아니다. 이거 아줌마들한테 레슨비 드려야는 거 아냐? 와, 내 결점은 나만 모르는 거구나.



4. 선수끼리는 서로 안 봐줘!


그러다 아주 재밌는 에피소드를 한 개 주웠다. 지적 잘 하는 아주머니 한 분이 지적 잘 하는 다른 아주머니의 평영 발차기를 지적하셨다. 그랬더니 늘 '지적은 나의 것'이라고 여겼던 지적 당하신 아주머니 발.끈! 하시면서 자유수영 끝나는 시간까지 화를 풀지 않으시는 거다. ㅋㅋㅋ 지적하신 아주머니가 레인을 돌고 계시면 쉬면서 옆에 분에게 '아참, 잘 나셨어. 저기 자유형을 저렇게 하면 안돼. 쟤는 몇 년을 수영을 해도 자유형이 저렇더라구' 하시면서 기냥 막 씹고 도 씹으시는 거다.  아, 욱껴!!


아바의 자녀를 쓴 브레넌 매닝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완전한 사랑을 받는 '아바의 자녀',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박동을 들어본 사람은 '기꺼이 영향입을 줄 아는 심장'을 가진 자라고 하였다.
스캇 펙은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자신만의 낡은 지도를 기꺼이 바꾸는 용기가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했다. 극단적으로 자신의 오래된 지도를 바꾸지 않겠다고 몸에 힘 주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망칠 뿐 아니라 자신의 자녀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길 수 밖에 없다.

나는 세계의 중심에 있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나를 중심으로 주변인으로만 존재할 것 같은 착각은 내 심장을 결코 누구에게도 영향받지 않는 심장으로 만든다. 그럴 때 내게 충만한 것은  다른 사람의 결점을 백 개를 나열하라고 하면 천 개라도 나열할 수 있는 지적꺼리 충만한 가슴은 아닐까? 내 모습니다. ㅜㅜ
기꺼이 영향을 입을 줄 아는 심장!  기꺼이 영향을 입을 줄 아는 심장으로 이 일상의 바다에서 힘 빼고, 자유롭게 헤엄치며 사는 나의 삶이었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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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학기 새로 시작하는 공부에 대해서 친정엄마한테는 말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걱정 근심 주식회사인 엄마한테 걱정을 하나 얹는 게 될까봐도 그렇지만 간단히 말하면 잔소리 듣기가 싫어서였다. 그렇다. 엄마는 잔소리와 간섭의 달인이다.


다른 얘길 하닥 슬쩍 공부 얘기를 꺼냈다. '뭐여? 대학원? 무신 공부를 또 헌댜. 야야~ 너 애들 잘 키우고 김서방 보필 잘 허는게....3%%$*$%$%^$#2$@@*...'
물론 엄마 입에서 나올 정답이다. '엄마, 그럴 줄 알었어.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뭘 하면 그래 잘했다. 해 준 적이 있어야지. 뭐든 나는 틀렸고 엄마가 맞는거지'


엄마는 그랬다. 가장 좋은 것은 엄마가 알고 있기에 내가 선택한 건 무조건 '아녀~어' 하고 태크를 걸고 보는 일이었으니까. 최근에 내 마음이 많이 자란 최근 몇 년에 인식한 것이지만 그 때문에 무엇을 선택하든 죄책감이 깊은 곳에 깔려있었다. 내가 원하는 뭔가를 하는 잘못된 것이다.특히 뭔가를 즐기는 건 잘못된 거다. 뭐 이런거?


커피 한 잔을 마셔도 혼자 마실 때는 상관이 없는데 아무라도 옆에 있다면, 특히 그 사람이 나보다 어른이라면 맘 놓고 마시질 못하는 거다. 뭘 하든 엄마의 간섭이 귀에 쟁쟁 울리기 때문이었다. 엄마 딴에는 사랑어린 지도편달이 어린 내게는 잔소리를 넘어 마음 깊은 곳에 금지령으로 자리잡은 것이었다. '너의 욕구를 채우는 건 옳지 않아!' 심지어 '욕구를 가지는 것은 옳지 않아'


그래서 결혼 초 시댁에 가서 식사 후에 아무도 커피를 안 마시는데 어머니가 '신실이 커피 마셔라' 이러시면 깜놀이었다. 나 혼자, 나만을 위해서 커피를 마셔도 되는건가? 내가 당당하게 내 욕구를 채워도 되는 거? 오홋!


엄마와 달리 어머니는 일단 수용하시고 보는 편이다. 엄마 안에는 정답이 있고, 그 정답은 말로 빨리 알려주는 것이 사랑이다. 어머니께는 일단 너가 하는대로 해봐라. '그렇게 해봐라'가 어머니의 답이다. 엄마한테는 나는 영원히 다섯 살 아이이고, 어머니께 남편은 다섯 살 때부터 어른른이었는지 모르겠다.


대학원 공부에 대한 엄마와 어머니의 극명한 반응이 내게 또 하나의 감사를 일깨웠다. 모든 걸 희생하며 내게 온갖 걸 주려고 했던 엄마는 끈끈한 애정만큼 끈덕진 간섭과 잔소리로 나를 묶곤 했었다. 서른이 넘어서 생긴 또 다른 엄마는 처음에 차겁고 칭찬할 줄 모르고, 인색함에 상처받는다고 투덜거렸지만 무한수용의 미덕으로 (본의 아니게) 내 어린시절 상처를 만지고 계셨다.


내게 엄마가 둘이라 감사하다. 것두 아주 성향의 엄마가 둘이라 더 감사하다. 무엇보다 이렇데 다른 두 엄마의 유일한 공통점은 가난한 기도라니... 매일 새벽마다, 가끔은 금식을 하면하시며 우리 가정을 위해 기도하신다. 두 엄마가 다 처음부터 가진 것 없이 예배당 찬바닥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으로 나와 남편을 키우셨으니 새삼스레 가슴이 뭉클하고 감동이다.
아, 나한테 엄마도 있고 어머니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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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끝날 것 같다고 여겨지는 순간, 이제 남은 길 조차 더 걸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왔다.
바로 앞이 막다른 길임을 알면서 계속 걸어나가는 것은, 특히나 무엇인가를 감수하면 걷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 아닌가?


아, 물론 그 길이 산의 정상을 향한다면 문제는 다르다. 몇 발짝만 더 떼면 정상이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그 발걸은음 내디딜만 하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말이다.


고통의 자리에 서면 고통을 벗어나 도망칠 궁리만 하며 뒷문 붙들고 사는 내게 십자가의 도를 일깨워 주신다.

끝.까.지.

고통의 끝자락까지 정신줄 놓지 않고 고통에 직면하신 그 분을 나 역시 눈 똑바로 뜨고 끝까지 바라보라고.


두물머리 강가에 마른 막대기로 서 있던 십자가에, 죽은 나무인 줄 알았던 십자가에 싹이 났다는 소식과 사진을 함께 전해들었다. 오늘 새벽 싹이 난 십자가가 내 마음에도 싹을 틔웠다. 그 싹은 고통의 끝까지 두 눈 똑바로 뜨고 감내하며 길의 끝까지 꾀부리지 않고 걸을 때만 감히 넘볼 수 있는 기적임을 일깨우며며....


길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다고,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며,
그런 길을 열고 그런 사람이 되겠노라 하던 시인이 길을 잃고 시같지 않은 소리를 해대며 실망을 한껏 안겨주는 요즘이다.
소망의 길을 내야할 사람들이 길을 막고 서서는 자신의 그 버팅김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기고 있음을 외면한다.


길이 끝난 곳이 십자가 아래이고,
다시 길을 찾을 곳도 십자가 아래이다.
마지막 몇 걸음 까지도 처음같은 자세로 흔들리지 않고 걸으라고 하시는 그 분의 음성에 나를 내어드린다.








오늘의 사진도 누구보다 맑은 눈을 가지신 숲과 나무 부부님의 작품.
위는 숲님, 아래는 나무님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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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한 여행을 다녀오신 어머님이 입술이 부어 올랐다.

몸이 항상 극도록 허약한 상태이신 분이라, 몸에 무리가 오면 입맛부터 없어지시는 모양.
입이 까끌하여 아무것도 못 드시고 식사대용으로 막걸리 한 잔을 드시면 배도 부르시고 잠도 오신단다.


뭘 드셔도 식탁에 서서 대충 배만 부르면 된다시는 어머님이 늘 안타까웠다.
'어머니, 어머니를 귀하게 대접하셔야 두통도 나아요. 그렇게 드시지 마시고 제대로 드세요' 라고 말씀을 드려도 저녁마다 전화하셔서 '나아~ 니 시아버지도 안 계셔서 막걸리 한 잔으로 저녁 때웠다' 를 반복하시는 터였다.
어쩌면 어머닌 그 다음 나의 대사 '어머니! 그러시지 말라니깐요. 진짜 속상하게 하시네' 를 듣고 싶으신 건지도.....


몸과 마음에 심히 무리가 되는 여행으로 앉아계실 여력도 없으신 분이 열무김치를 했다며 갖다 먹으라신다.
'아니, 어머니! 지금 이 몸에 무슨 김치를 하셨어요?' 했더니....
'입안이 들떠서 아무것도 씹을 수가 없고 뭘 넘기긴 넘겨야겠어서 국물있는 김치를 하려다보니 쉽게 열무김치를 했다. 내 정신으로 안했더니 국물도 많이 안 붓고, 맛도 이상야릇하다' 하시며싸주시는 걸 받아왔다.






얼마 전 어머니 전화에 마음이 상해서 뒤집어졌다 엎어졌다 했던 생각에 마음이 더 짠하다.
막걸리로 저녁을 때우시고 알딸딸하신 상태에서 '야, 내가 말이다. 니 동서한테 전화해서 뭐라고 했는지 아냐? 내가 며느리가 두 년이나 있는데 나 좋아하는 음식 해가지고 와서 어머니~이 좀 드셔보세요. 하는 년이 없다. 어떻게 생각하냐?' 이렇게 했다.

이 말씀을 듣고 '도대체 어떤 며느리년한테 하시는 말씀이야? 결국 두 며느리년 다 들으란 말씀이구나. 아니, 나처럼 어머니 걱정하면서 챙겨드리는 며느리가 어딨다고 그러시나. 것두 큰며느리한테 전화하신 걸 왜 다시 나한테 하시는데? 나도 들으라는 말씀? 직접 말씀하시든가! .... 내 원참! 말 돌리기에 달인, 우리 어머니 $%^(^$$^$%&^$'
시댁에 가면 반찬을 바리바리 싸주신다. 두 한 번에 다 들지도 못할 정도다. 그렇게 김치며 밑반찬을 해주시면서 갑자기 이건 무슨 심통이시냐 싶었었다.


경우 바르고 싶고, 늘 옳은 사람이 되고 싶고, 신세지고 싶지 않은 어머니. 몸이 약하시니 음식 하나 하시는 것도 너무 고되시지만, 그래서 누군가 해다 바치는 식사를 하고 싶지만 그럴 처지가 못되시니 죽기 살기로 하시는거다. 아니, 어쩌면 며느리가 해다 줬으면 하시는 만큼 본인이 해주시는 거다. 나중에 '내가 수족을 못 쓸 때 그 때 에미가 해줘라' 하시는 말씀을 빼놓지 않으시며 바리바리 싸주신다. 당당하게 '밑반찬좀 해와라' 요구하고 싶지만 그건 용기가 안나시니 취중에 돌려돌려 하시는 말씀이 '며느리 두 년......#%&&%&%^&;'이신거였다.








어머니가 억지로 하셨다는 열무김치 먹어보니 너무 너무 달았다. 어머니 전화하셔서 '그 김치 너무 달지? 내가 입맛이 쓰다보니 그렇데 됐나보다. 에미는 단 거 싫어하는데 어떡하냐?' 이러시는데 눈물이 왈칵했다.
너무 힘드신 그 순간에 '나 국물있는 거 먹고 싶으니 누가 좀 해줘라' 이 한 마디 못하시고, 하고 싶지만 억누르시고 담구신 그 달디단 열무김치의 단맛이 슬프고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난생 처음 김치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그런 어머니께 '어머니만을 위한 김치'를 해드리고 싶어서다. 에니어그램이든 영적여정을 통해서 우리 안에 상처받은 어린 아이가 울고 있다고 배웠다. 그 아이는 성인이 된 내가 알아주고 달래줘야 한단다. 그러나 그건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비록 불완전한 사랑을 받았지만 사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온전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는 걸 인정할 수 있어야 비로소 치료든 치유든 성숙이든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그 온전한 사랑은 분명 보이는 사랑으로 받아봐야 어렴풋이 알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의 중요하고, 그것이 불완전하지만 우리가 서로를 사랑해야할 이유라고 생각한다. 우리 어머니, 오랫동안 하나님 믿어오셨지만 지금 누군가의 보이는 사랑으로 그 온전한 사랑을 확인하셔야 하는 때라고 믿는다. 그래야 만성두통이든, 오랜 불면증이든, 가슴의 통증이든, 화병이든 치유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믿는다. 그리고 어머니께 그 사랑을 줄 사람은 어머니의 목마름이 목마름이 보이는 사람? 호....혹....혹시.....저요?



그런 마음으로 김치를 담궜다. 어머니만을 위한 물김치를 담궈서 '어머니, 어머니만을 위한 김치예요. 어머니는 귀한 분이예요. 저 역시 가끔 어머니의 약점 때문에 어머니로부터 거리를 두고, 고개를 돌리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누구보다 귀한 존재예요' 라는 마음을 담아 무를 썰고, 배와 사과를 썰고, 국물을 만들고 정성스레 부었다.


잘해보겠다고 힘이 들어간 만큼 맛은 2% 부족한 동치미 국물이다. 정말 맛있기를 바라고, 맛있기를 기도하며 담궜지만 약간 짜고 약간 빈 듯한 이 맛도 오케이다. 사실 사랑은 결과보다 사랑하는 마음 그 자체의 의미니깐! 맛으로 실패했을지언정 사랑하겠다고 시작한 결단이기에 이건 무조건 성공적인 물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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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때마다 예배로 들어가면서 '비젼'을 부른다.
가사가 '비젼'이라는 제목과 어떻게 맞아떨어지는지 딱히 생각해보지 않았고,
아주 오래 전부터 부르던 찬양이다.
어찌하여 비젼일까?

지휘할 때도 그렇지만, 찬양인도를 할 때로 그랬지만, 예배 전 두 곡 정도의 찬양하는데 싱어로 서는 요즘에도 찬양에 몰입만 했다하면 오토메틱 수도꼭지 전원이 바로 on이다.
두 세곡 부르는 동안 어떻게 어떻게 틀어막고 있던 수도꼭지는 '비젼'에 기어이 제어장치 고장을 일으키고 만다. 어이하여 나의 비젼은 항상 눈물바람인가?



우리 보좌앞에 모였네. 함께 주를 찬양하며
'우리'이고 '함께'다.
이 '우리'는 가령 이런 모든 분들을 포함한다.
앉아 있는 모습만 봐도 마음 뭉클해지게 하는 분들,
눈빛으로 주고 받는 인사만으로도 '그리스도 안의 지체'됨으로 마음 가득 따스함으로 채우는 분들,
그리고 또
찬양팀 복장이 왜 그리 단정치 않냐, 선곡은 왜 그러냐 하시면 예배를 뭘로 아냐? 면서 거룩한 예배를 사수하기 위해 완전무장 하고 계신 분들,
'미치광이 북괴'를 하나님 앞에 고발하는 기도와 동시에 '평화통일'을 구하시는, 평화를 사랑하시고 나라사랑이 한 없으신 분들,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너희가 예배를 잘 드리나 못드리나 보신다. 그러니 똑바로 해라' 시며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듯 내게 경찰관 하나님을 일깨우시는 분들....

이런 모든 분들고 함.께. 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린다.
그러면 그 '함께'에 온전히 마음을 열지 못하는 못난 나 자신에 마음이 쿵하고 무너진다.
아주 마음이 아플 때 가슴부분에 신체적 통증이 느껴지는데 바로 그 통증에 주저앉고 싶어진다.


하나님의 사랑 그 아들주셨네. 그의 피로 우리 구원받았네.
그런 내게 폭탄처럼 바로 다음 가사가 쏟아부어진다.
하나님의 사랑! 아, 하나님의 사랑! 아들을 아니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확인시켜주신 그 분의 사랑. 나를 살렸던 사랑. 지금도 나를 살리고 있는 그 사랑.


십자가에서 쏟으신 그 사랑 강같이 온 땅에 흘러
나는 악인과 선인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골고루 내리신다는 그 공평하신 하나님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악인들에게는 촉촉하고 따스한 봄비는 커녕 번개와 천둥으로 즉각 반응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아, 물론 나는 항상 '선인'에 줄을 세우는 거다.ㅠㅠㅠㅠ
헌데 십자가에서 쏟으신 그 피, 그 사랑은 강같이 흐른단다. 흐르는 강은 억지로 막지 않는한 골고루 온 땅을 흘러 적신다. 그 어느 땅도 차별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쏟으신 그 사랑은 내게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사랑하시는 모든 사람에게 흐른다. 그럴 때 나는 선인도 아니고 악인도 아니다. 나는 그 분의 사랑받는 자녀일 뿐이다.


각 나라와 족속 백성 방언에서 구원받고 주 경배드리네
구원의 나의 전유물이 아니다. 구원은 그 분의 것이다. 그 분은 내 새끼 맞았다고 남의 새끼 가서 나무라는 이기적인 부모가 아니다. 그 분에게는 나를 포함한, 나를 선인이라 여기거나 나를 악인이라고 여기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여 사랑하는 자녀다.
구원은 그 분의 것이고, 그 분이 사랑하는 모든 자녀의 것이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이 쯤되면 나는 그 분께 이렇듯 편협하고 부자유하고 사랑이 부족한 나 자신을 맡길 수 밖에 없다. 이런 나를 구원하심은 오직 그 분께 있다. 그 분 안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맡길 때만 나는 지금의 이 감옥같은 이기심에서 구원받는다.
반복해서 마음을 다 쏟아 부를 수 밖에 없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온갖 두려움과 염려를, 스스로 나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나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교만을, 내 욕망을 위해서 사람들을 교묘히 이용하는 사랑을 가장한 죄악을 구원하소서. 구원하소서. 날 구원하여 자유하게 하소서.



나의 비젼은 매일 매 순간 십자가에서 쏟으신 그 사랑에 나를 맡기는 그것이다.
나를 바라보는 그 따스한 사랑과 긍휼이 내게만 국한되지 않음을 마음으로 믿는 것이다.
설령 때로 내게 '우리' '함께'라고 말하기가 너무 아픈 경우라도 그 분의 긍휼하심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나도 그 긍휼과 사랑의 마음을 조금씩 배우는 것이다.
나의 비젼은 사랑이다. 십자가에서 쏟으신 그 분의 사랑이다.




엣지 예수님!
일부러 생각한 건 아닌데 당신의 십자가와 고난을 생각하면,
당신의 골고다로 향하신 그 아픈 발걸음을 떠올리면 요즘 말로 '엣지'라는 단어가 맴돕니다. 엣지 예수님.


2년 전 이 즈음의 일기장을 펼쳐보았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당신의 고난의 순간순간을 묵상하며 그런 제목을 달아 일기를 썼었더군요. '담담히 고난 받으신 주님' 이라고요.
억울한 누명, 배신, 모욕.... 아 이렇게 언어로 늘어놓으니 당신이 맞닥뜨리셨던 그 현실들이 현실감 없이 다가오는군요. 아무튼, 한 때 당신이 베푸신 사랑, 그 기적의 떡과 물고기를 좋아라 먹었던 사람들이, 당신을 미워하던 종교지도자들의 온갖 부추김에 당신을 등지던 그 때요. 바로 그 사람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래 고래 고함을 지르던 그 사람이었을테니까요.
믿음이 연약한 제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어 의심치 않을 이유는 많지만 십자가를 향하시던 그 밤에 보여주신 당신의 담담함 입니다. 저라면 빌라도가 준 그 발언의 기회에 '이 때다. 마지막 설교를 할 때다' 하면서 온갖 교훈을 빙자한 자기변호를 떠들어댔을테지만 당신은 침묵을 지킬 뿐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당신의 침묵이 비겁함이지 않음은 가장 결정적인 질문,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물음에 거짓없이, 두려움 없이 답하셨습니다.
이런 태도가 '총독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겼다(마27:14)'라고 기록되었는데 제 마음에 역시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 모욕의 순간에 흐트러짐 없이,
저자세도 고자세도 아닌 정자세로 걸으신 당신의 갈보리 길은
엣지.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엣지 예수님! 당신의 깊은 내면의 엣지를 닮고 싶습니다.


2년 전엔 없었던 '일상의 언어로 쓰여진 성경 옆의 성경'이 제 손에 주어진 올해 고난주간입니다. 유진피터슨님의 '메세지' 덕에 당신의 고난을 맑은 눈으로 다시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난주간을 제대로 고난을 겪으며 보냈던 남편이 했던 수요예배 설교가 마음 깊은 곳으로 풍덩 들어와 고난의 현장에 서 있는 저를 발견하게 했습니다.


고난을 묵상하던 남편이 그랬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살인의 광기로 술렁였던 것 같다구요. 어느 핸가 월드컵 우승후보였던 콜롬비아(맞나?)에서 예선탈락을 하고나서 온 나라를 휩쓴 분노의 광기가 자책골을 넣은 선수를 총살하는 결과를 낳았다더군요. 그것과 흡사하다고 했습니다.
군중들이 끊임없이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눈을 가리고 머리를 때린 후에 '누가 때렸게? 맞춰봐. 하나님의 아들이라며?'  아, 하나님의 아들이고 유대인의 왕이라면 왕복이 필요하겠군. 옷을 벗겨서 왕을 상징하는 붉은 천조각을 걸치게 하고, '왕관도 있어야지' 라며 가시로 만든 왕관을 머리에 씌웠습니다. '왕이라면 홀을 들고 있어야지' 라며 갈대를 손에 들게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절하고, 절하고 나서 때리고, 때리고 나서 침 뱉고...


지나가던 행인들도, 대제사장들도, 로마군인들도 한결같이 조롱합니다.
'왕이라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며? 맞아서 억울하면 어서 당신의 힘을 보여. 당신 자신을 구원하라니까.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우리에게 복수해봐. 어서.어서 실력을 보이라구.  하하 저 자가 다른 사람을 구원하더니 자기는 구원을 못하는군!  아,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다 믿을텐데 말이야. 가만둬봐봐. 저 자가 십자가에서 내려오나 지켜보자구.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구해주나 보자 ...(마27:27-49)'


군중들의 당신을 향한 저 파렴치한 광기의 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물론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은(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당신이 누구인지 알지만 당신의 존재가 백성들에게 제대로 밝혀지면 자신들의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군중들의 눈을 멀기 하고 있지요.
군중들의 광기는 무엇일까요? 불과 일주일 전 예루살렘이 입성하는 당신을 향해 '호산나, 호산나'하면서 환호했던 군중들 말이지요. 저들의 구원에 대한 기대가 처참히 무너진 탓인가봐요. 로마의 폭정에서도 구원하고, 삶의 고통에서도 구원할 당신을 드디어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로마의 폭정은 물론이고 떡 다섯 개로 그 많은 사람을 먹이신 당신만 있다면 먹고 살 걱정도 없고, 다시 몸이 아파도 한 방에 낫게 하실 당신이 있어서 안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진짜 구원자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허약하신 예수님! 이럴 수가 있어요?
그런 당신이 그렇게나 약한 모습으로 잡히다니요. 잡혀서도 그렇게 유약하게 끌려다니다니요. 세상에 구원자가 그럴 수 있습니까?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서 당신을 팔아 자신의 안위를 공고히 하는 저 못된 인간들을 처단하셔야지요. 제 문제를 해결하셔야지요. 배신과 분노로 들끓는 저 군중들 속에 제가 있어요.  


제가 외치고 있어요. 2000년 전 그 군중 속에서 오늘의 제가 막 당신께 당신께 퍼부어대고 있어요. 그러면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못 박으시오! 저런 메시아는 소용없어요!'
하고 있어요.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우는 자칭 영적인 지도자들, 당신의 십자가를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지도록 하기 위해 왜곡된 말씀 해석으로 사람들의 눈을 멀게하는 지도자들이요.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의 땅을 당신께 바치고 당신께 바친 그 땅의 구석구석을 포크레인으로 긁어대며 상처내어 땅과 그 땅의 사람들에게 피눈물 흘리게 하는 영적이지 않은 지도자들.
그들을 왜 그냥 두시냐고,
그들로 인해서 눈물 흘리고 고통당하는 당신의 어린양들을 왜 그냥 두시냐고,
또 나의 이 현안들은 왜 해결해 주시지 않냐고? 내가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이들은 어떻게 키워야 할지,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어떻게 품어야 할지,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에 대한 복수는 언제쯤 해주실지.....
기도제목이라는 미명하에 당신에게 기대했던 많은 것들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을 때 당신께 쏟아부었던 제 분노들이예요. '빨리 능력을 보여주세요.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하나님이시니깐 빨리 좀 제 삶을 어떻게 해보시라구요!'


이제야 알겠어요.
그러면서 나 또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었다구요.
그걸 알고나니 당신의 사랑이 또한 다시 가슴 벅차게 밀려와요. '하나님, 저 명일동 정신실을 용서하십시요. 쟤는 지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지 몰라요. 몰라서 저러는 거예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단순히 하나님의 분노를 재우기 위한 응징으로 지신 십자가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당신 자신이 스스로 당신의 육신에 '죄의 근원' 그 자체를 뒤집어 쓰시고 죄와 맞닥뜨리셔서 변치않을 승리로 이끄시며 제게 당신의 '능력' 아닌 ''을 보이셨어요. '능력'을 구하는 저는 죽을 때까지 '자유'를 얻을 수 없지만 '사랑'을 알 때는 그 사랑을 한 번 힐끗 보기만해도 저를 자유케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요....


엣지 예수님!
죽을 곳으로 힘없이 끌려가시는 허약하신 예수님!
당신의 엣지의 근원,
그게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아요.
당신의 십자가 그늘에서 당신의 사랑을 알아, 사랑의 진리를 알아,
참자유의 삶을 살기 원해요.
제가 또 당신께 능력을 구하면 저를 옥죌 때 오늘 쓴 고백을 읽으며 다시 십자가로 가까이 갈께요. 부활의 주님을 기다려요.



사진설명 : 4대강 사업 저지를 위한 두물머리 생명평화 미사에서 forest님이 찍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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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그렇다면 나도 예수님께 묻고싶다.
예수님은 저를 누구라 하세요?



지난 토요일 저녁 교역자 가족 식사 모임이 있었다. 새로오신 두 사모님들과의 대화.



사모님 오늘 강의가셨다 오시는 거라면서요? 무슨 강의 다니세요?

아~ 모... 다닌다기 보다는 오늘은 다른 교회 청년들 데이트 스쿨에서 강의하고 왔어요.

네에~ 무슨 강의 하시는데요? 음악치료사라고 안그러셨어요?

그냥, 이성교제에 관한 강읜데요...흐흐흐... 어쩌다보니 그냥 이런 강의를 하고 있네요.

어! 사모님 지난 번엔 에니어그램 강의 하신다고 안 하셨어요?

예.... MBTI랑 에니어그램은 제가 그냥 제 마음이 궁금해서 배웠는데 가끔 강의도 해요.

음악치료하고 관련이 있는 거예요?

음냐음냐.. 음악치료는 본업이긴 한데 요즘은 힘에 부쳐서 거의 안하고 학교 강의만 하나 해요.

우와~ 그럼 교수님이세요?

아니... 일년에 한 학기요. 딱 한 학교에 한 학기요.

저희 막내 다닐 어린이집에서 수업하신다면서요?

예, 제가 유리드믹스 교사교육을 좀 받아서요. 비장애 아이들 음악수업도 해요.

그러면, 사모님 원래 음악을 전공하셨어요?

아니요, 학부에서는 유아교육 했는데... 음악도 좋아하다 보니 어쩌다 대학원에서 음악치료 하게 됐어요. 유치원 교사 때 음악교육에도 관심 많았어서요. 대학원 마치고 유리드믹스 교사교육 받았어요.

와~ 사모님 대단하시네요.

후로 살짝 민망하고 손발이 말려들어가는는 정적....
이 인터뷰식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마음에선 '난 뭔가? 뭐 하나 딱부러지는 것 없이 난 뭔가? 라며 고뇌가 깊어져 갔는데. 대화가 끝나고 보니 '나는 참 대단합니다~아' 라는 피력을 한 것인가 싶어서 가벼운 현기증도 왔다.

실은 데이트 스쿨 마지막 강의를 끝내고 간 자리였는데 강의 끝낸 마음이 묵직했었다. 난 뭐지? 내가 왜 여기 데이트스쿨에서 강의를 하고 있지?
원래 다른 분에 의해서 기획된 프로그램에 말하자면 두 번의 강사로 가게 된 것이었다.
이미 여러 번 진행되던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강사가 프로그램에 맞춰야하는 상황이었다. '남녀의 차이'라는 주제는 '인간의 차이, 인간의 다양성'으로 완전히 바꿔서 했고.
'자존감과 데이트'라는 마지막 강의였다. 실은 이 주제의 강의를 준비하느라 12월 1월 내내 뭔가 쫓기는 듯 보냈다. 강의를 잘하고 싶었다기 보다는 그간에 내 영적여정이 구슬 서 말이라면 이 강의 준비를 통해서 이 구슬들을 꿰는 작업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구슬을 꿰어 내게는 보배를 만다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정말 진실하게, 눈물로 호소하면서 '여러분 자신이 귀한 존재임을 조금씩 조금씩 더 잘 확인해 가야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데이트, 행복한 결혼생활 할 수 있다. 나를 사랑하지 않고는 타인을 사랑할 수 없다. 마음에 그릇에 사랑이 가득차서 자연스레 흘러 넘쳐야 그게 진짜 사랑이다' 며 목이 메이는 강의를 했다. 아~ 물론 오해 없으셔야 한다. 내가 거듭나서 새사람이 되기는 했지만 난 아직도 웃기지 않는 강의는 강의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물론 중간중간 웃겨주는 건 기본이었다.

암튼, 나와 친밀한 청년들과 개인적으로 대화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너무 진솔하고, 너무 마음을 찐하게 담아서 강의했나? 싶어서 살짝 부끄럽기도하고 급 '난 뭐지? 난 도대체 어쩌다 이런 잡식성 강의를 하고 있는걸까? 모 하나 전문적인 영역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싶으면서 존재론적인 질문이 떠오른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저런 인터뷰식 대화를 했으니,
내가 예수님께 묻고 싶지 않겠나?
그러면 예수님은 저를 누구라고 하세요?
저라는 인간 왜 이리 규명이 안되는 거예요?
전 뭐예요?
사모님이예요?

그.러.자.
그 분이 대답하신다.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 (이사야 43:4)
왜?


=============================

사진에 얽힌 재밌는 얘기.
관련 사진을 찍어놓은 게 하나도 없어서 daum에서 검색을 했다.
데이트코칭스쿨? 이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글이 있어서 클릭했더니 아름다운 재단의 박원순씨 개인홈피였다. 연대앞 창천교회를 지나다가 저 플랭카드를 보신 모양.
'세상에 별별 학교가 다 있더니 이젠 데이트를 코치해주는 학교도 있네요' 하는 포스팅이었다.
그냥 지나치기가 뭐해서 '저.... 저 프로그램의 강사였는데요...' 하고 한 마디 남겼다는. ㅎㅎㅎ
덕분에 박원순님과 댓글 대화를 주고받았다. 영광인줄 알고 있다. 그리고 사진은 거기서 업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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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by Anny님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데 혼자 결정하기 어렵거나,
사실 답은 알겠는데 머리로 아는 답과 가슴의 소리가 달라서 고민이 될 때,
누군가를 찾아가 마음을 터놓고 상담을 한다면 말이다.


상담을 하겠다고 치면 물론 나보다 어떤 의미든 뭔가가 나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도 기본이다. 내가 내 문제를 보는 시각보다 훨씬 위에서 보거나, 넓은 시각으로 볼 줄 아는 사람을 찾을테니 말이다. 그것 뿐이 아니라 그가 주는 답이 내가 내는 답보다는 현명해야 한다는 것도 말할 나위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난 날 아끼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찾을 것이다. 나보다 지혜가 있지만 그 지혜를 가지고 나를 이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얘가 나를 찾아와 자신의 얘기를 하다니.... 난 역시 대단해' 라는 식으로 엉뚱한 자아도취식 기쁨을 찾는 사람도 아니다.


그.리.고.

분명 나보다 나은 사람이기에, 나보다 경험이 많은 사람이기에 내 고민거리를 듣자마자 '아, 그거 별거 아냐.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되는거다' 라는 답이 한 방에 떠오르더라도 끝까지 내 얘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비록 그의 지혜와 나의 지혜가 하늘과 땅 차이라 할지라도 마음을 낮추어 내 말을 판단없이 들어주고 '뭐? 그런 생각을? 안 돼. 그건 아니다. 그건 니가 생각하는거야' 가 아니라 '그랬니? 세상에 그래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니?'라고 말해 주는 사람. 그게 맘으로는 '내가 미쳐. 이걸 가지고 상담을 해. 너 좀 생각이 있는 줄 알았더니 너 멀었구나' 라면서 입으로만 하는 말이 아니어야함은 물론이다.


.런.데.
난 아직 이런 이상적인 상담자를 만나보지 못했다. 희망이 없다.ㅠㅜㅜㅜㅜ


그.러.나.
그건 알게 되었다. 내가 '기도'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가면 바로 이런 상담과 대접을 받을 수 있음을 말이다.  우주의 창조자 앞에 60억 분의 1일 뿐인 내가 '하나님! 저요...어쩌구 저쩌구....왈랑왈랑....불라부라....'라며 다가가면 '이런, 또 사탄의 꾀임이 빠졌구나. 너 언제 사람될래?' 라며 비난과 회초리를 꺼내드시는 분이 아니란 걸 말이다.


항상 터무니 없는 위협으로 나를 쫄게 만들고, 마음으론 내 잘못을 일일이 체크하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하나님으로서의 고상함을 잃지 않기 위해 '들어주는 척, 이해해주는 척' 하는 분이 아니란 걸 말이다.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지만 어떻게든 말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한 수 가르치려는 두뇌 회전수를 가속화 시키는 나같은 분도 아니다.  그 분의 지혜에 비하면 비교도 할 수 없는 어리석음으로 투덜거리며 내 속내를 드러낼 때 '이런.... 아가! 얼마나 힘들었니'라며 앞되 뒤도 다르지 않는 사랑으로 받아주시는 분임을 말이다.


기도가 그런 분과 같이 상담도 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임을 알았다. 그렇게 그 분과 소리내어 때로는 말 없이 눈만 마추고 있는 시간에 내가 모르던 내 마음, 그 분의 마음을 보게 되기도 하였다. 기도가 어려운 일이 아닌 것임을 알았고,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 누구를 위한 말씀인지도 알았다.


기도가 그런 데이트라면, 그 데이트의 클라이막스는 예배이리라. 예배를 향하는 마음이 더욱 설레고도 뜨겁다.


아! 그러나 그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말이다. 바로 그 부분에서 나의 그 분이 안보인다. 분명 저 먹구름 너머에 푸른 하늘이 있음을 알고, 그 하늘에 햇빛이 있음을 아는데 그 순간 안 보인다. 눈 앞이 캄캄해진다.




                                                                                Photo by Anny님



사랑하는 사이에 어찌 중간에 먹구름이 좀 꼈다고 해서 안보이냔 말이다. 아니 안보일 수 있다. 안보인다고 마치 존재 자체가 없어진 것처럼 절망적이고 외롭고 그 분을 잃을 듯 앞이 캄캄하단 말이야? 이것은 푸른하늘의 문제인가? 먹구름의 문제인가? 먹구름을 극복하지 못하는 나의 문제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나는 예배를 향해 간다. 부르신 그 곳으로 예배하러 간다. 비록 오늘의 저 하늘처럼 마치 하늘은 원래 저렇다는듯 햇살 한 줄기, 푸르름 한 바닥 보이지 않지만.... 나는 예배하러 간다. 내 몸과 마음과 영혼을 추슬러 예배로 향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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