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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부터 하루 한 번씩은 꼭 들었던 기도...
'우리 신실이 에스더 같은 믿음 주시고 우리 운형이 다니엘과 요석(셉)과 같은 믿음 주시옵소서......
새벽별 같이 빛나게 하여 주~씨 옵소서'

그러니까 함 계산해보자.
우리 엄마가 저 기도를 매일 가정예배 드릴 때 마다 했고, 새벽기도 드릴 때마다 했을테고, 금요일 철야기도때마다 했을테니...
36(년) * 365(일) * 2(번) = 26,280 (가정예배, 새벽예배)
36(년) * 52 (주) = 1,872(철야예배)
그 외에 1년에 두 달씩 철야하는 건 빼고라도.....토탈 28,152 번.

우리 엄마가 나를 향해서 '에스더 같은 믿음....새벽별 같이 빛나게....' 이렇게 기도하신 거이 30,000번에 가깝다는 얘기다.

나이 마흔 다섯에 나를 낳고 마흔 일곱에 내 동생을 낳고...내가 중학교 1학년 되는 해에 어버지가 돌아가셨으니 그 때 우리 엄마 심정이 어땠을꼬? 그 때는 아버지 잃은 내 슬픔만 생각했었는데 남편을 잃은, 것두 아직 어린 두 남매를 키워낼 뾰족한 방법도 없이 남겨진 우리 엄마의 심정을 어땠을꼬?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엄마는 우리 남매를 참 잘 키웠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나 자신 엄마가 되고 우리 아이들을 보면서 '니들이 엄마 만큼만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았음 좋겠다. 엄마 만큼만 좋은 사람들 만나고, 엄마 만큼만 소명을 발견하고, 엄마 만큼 좋은 배우자 만나서 기쁘게 살면 좋겠다' 싶으니 말이다.

우리 엄마가 우리를 양육하면서 가진 게 무엇이 있었나? 생각해 보면 정말 그 아무것도 없다. 돈은 물론이거니와 우리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젊은 감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엄마 자신이 많이 배워서 우리를 가르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우리 엄마는 죽으나 사나 예수님 한 분.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성전을 향해 기도하러 올라가는 그 발길. 그것 뿐이었다.

심지어 요즘도 '엄마 나 이번 토요일에 강의해' 하면 다시 전화가 온다. '몇 시에 강의 한다구?' 하고 물으시는데 그건 여지 없이 그 시간에 무릎 꿇고 기도하시겠다는 얘기다. 그렇다. 동생이 학생들 데리고 수련회 가면 그 기간 동안은 금식기도다.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시간 동안 꼼짝 않고 앉아서 기도하시는 게 우리 엄마의 요즘 하시는 일이다.
어렸을 때는 그런 엄마의 신앙을 보면서 '기복적이라느니....'하면서 주제 넘은 판단도 하고 까불어댔지만 대체 내가 그런 우리 엄마의 믿음을10분의 1이라고 따라갈 수 있을까?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아이들에게 어떤 환경을 어떻게 제공해 주어야 할까? 내가 주는 것이 부족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쓸데 없다는 생각이 든다. 대체 우리 엄마보다 내가 가진 것은 얼마나 많은가? 내 머리 속에 양육에 관한 얼마나 많은 데이터들이 입력되어 있는데....나는 우리 아이들과 의사소통하면서 코드를 맞추는 일에 얼마나 전문적인 사람인데....우리 엄마가 날 위해 했듯이 그렇게 기도할 수만 있다면 우리 아이들이 그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행복한 멋찐 사람으로 자랄텐데....

정말....나 정신차려 기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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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딩 때부터 매 년 여름에는 수련회의 추억이 있습니다. 그 수련회의 기억은 나의 성장과 맞물려서 그 해마다 또렷한 빛깔로 분명한 이미지로 남아 있죠. 어느 해랄 것이 없습니다. 중1때부터 결혼하여 청년부를 떠날 때가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세월 동안 유독 수련회를 가지 않은 해가 있었습니다. 1991년 이었던가? 그 전 해 대학청년부 수련회를 다녀와서는 '내년에는 결코 가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었죠. 새로 바뀐 대학청년부 지도 목사님 때문이었고 그 목사님을 추종하는 청년부 임원들이 만드는 분위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그 목사님의 생각은 이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시사저널 같은 잡지를 보는 것은 영을 더럽히는 일이다' 그 때 나는 늘 시사저널을 끼고 다녔었는데 예배 설교 시간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암튼, 그 해 여름에 나는 수련회를 가지 않기로 결심했었습니다. 해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수련회 데려 갈려고 새벽기도를 하고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했던 정신실이 수련회를 가지 않는다고 하자.... 교회 안에서 여러 어른들이 '가당치도 않다'고 말씀하시면서 저를 설득하셨드랬습니다. 그렇게 말씀 하시는 분들은 평소 내가 존경해마지 않았고 나를 너무도 아끼는 분들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더욱 어려웠습니다.

그 때, 유일하게 제 손을 들어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전까지 대학청년부 지도를 하셨던 전도사님. 아마도 지금 돌이켜보면 청년부에게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친다는 괘씸죄에 걸려서 고등부로 좌천되어 가셨던 것 같습니다. 유일하게 내가 왜 그리도 수련회에 가기 싫은 지 그 이유에 대해서 귀 기울여 들어주는 분이었습니다. 그 수련회에 가지 않았고 수련회 기간 동안에 집에서 수련회 하는 마음으로 두꺼운 책 한 권을 독파했습니다(물론 전도사님의 추천으로 말이죠)

이 일을 경험하고부터 나는 전도사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 아무도 내 고통스런 외침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을 때 그 소리를 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귀를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분을 언제나 스.승.님. 이라고 소개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늦은 나이에 대학원 공부를 하게 된 것도 어쩌면 전도사님의 세뇌 때문이었는 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보고 싶은 책도 다 보지 못하시는 넉넉치 않은 살림에 항상 읽어야 할 책들을 선물해 주시고 '공부' 에 대한 끈을 놓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매주 주보에 쓰는 글을 보시면 '글이 살아있다. 물고기가 파다파닥 뛰어 노는 듯 하다' 라고 격려를 하시면 한 주 한 주 글 쓰는 일이 수월해지고 재미가 있어졌습니다. '어쩌면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일지도 몰라'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셨죠.

내가 인생의 시간을 돌려서 다시 한 번 과거로 날아갈 수 있다면 전도사님이 지휘하시는 성가대에서 다시 한 번 바흐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를 불러보는 것입니다. 나는 전도사님께 찬양도 배웠습니다. 찬양하는 사람이 어때야 한다는 것과, 찬양의 대상이 누군인 것도 분명해 배웠습니다. 그리고 지휘도 배웠습니다. 찬양대 지휘자가 음악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배웠을 뿐 아니라 찬양 대원으로 하여금 음악 이상의 것을 드리도록 연습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도 배웠습니다.

'기독교 세계관' 이라는 낯선 단어를 전도사님이 소개하시는 책에서 처음 배우고 그 이후로 나는 그 '기독교 세계관'에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 부부에게 모토가 되고 있는 '오늘 여기서 그 분을 위해'는 바로 그 때 배운 기독교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도사님과 함께 다니던 교회에서 보내 마지막 해에는(전도사님과 몇몇 친구들은 그 정들었던, 사랑하던 교회에서 우리 발로 걸어 나왔지만 사실은 쫓겨난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빡신 제자훈련을 받았습니다. 금요일 밤에 철야를 하면서 리더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밤을 거의 새면서 죤스토트를 비롯해서 많은 책들을 읽고 발제하고 나누고....또 큐티훈련을 받고, 한 사람을 어떻게 끝까지 붙들고 제자 삼는 지에 대해서 공부하고 배웠습니다. 결국 그 리더훈련은 끝도 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어디가 써 먹지도 못하고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다니고 있는 한영교회에 왔습니다.
요즘 목자부부가 되어 사람들을 섬기면서 새삼 그 때 받은 리더훈련은 오늘을 위한 준비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많은 것들을 한 분께 배웠습니다. 지유철 전도사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오늘의 정신실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나이가 서른 여섯인데(허걱!)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친구랑 여전히 친구다.
여자친구라면 뭐 그럴 수도 있지만 남자친구다.
고3때 독서실에서 만나서 같은 교회를 다니고 청년부를 함께 했었다.
청년부를 하면서 중창단을 만들어서 '사랑의 종소리'를 열심히 불러대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친구에게는 남다른 영력이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군 입대 할 때 일이다. 나랑 또 다른 친구 하나 이렇게 셋이서 같이 어울려 다녔는데 군입대 하기 전에 모란시장 가서 순대국밥도 먹고 그렇게 놀러 다녔던 것 같다.
모든 남자들 그렇겠지만 이 친구도 군대 가는 거 엄청 부담스러워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싫어라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갈 길은 가야하니까 교회에서는 송별예배 드리고 머리 깍고 결국 들어갔다.
그런데 웬 걸....
다음 주일 날 교회에 또 나타난 것이다. 잉?
내용인 즉슨, 입대하던 날 아침에 친구들이 배웅 가려고 모였었다. 그 친구 방에서들 빙 둘러 앉아 있는데 나갈 채비에 부산하던 이 친구가 비좁은 방 안에서 이동하기 위해 펄쩍 뛰었는데 발이 포크에 찔렸었다. 그것 때문에 결국 입대가 연기 됐단다. @@

암튼, 나이 사십을 바라보면서도 여전히 꿈의 냄새가 나고 전혀 아저씨스럽지가 않은 친구다.
아무리 젊어 꿈과 낭만을 말한다해도 현실을 살면서 그 순수함을 지켜내기가 어디 그리 만만하더란 말이냐? 그러나 이 친구는 여전히 꿈을 말하는데도 부적절하게 느껴지질 않는다.
무엇보다 나이가 들수록 그 꿈이 '예수 안에서 꾸는 꿈'이 되는 것이 느껴지니 참 부러울 따름이다.

이쯤 되면....
그의 아내는 이런 그를 두고 뭐라고 말할까?^^ 나는 내 남자 친구들 중에 이 친구가 결혼을 젤 잘했다고 늘 말하고 생각하곤 한다. 어디서 이렇게 좋은 사람을 찾아 냈을꼬?
최근에 이 친구 부부에게 MBTI를 해 줄 기회가 있었는데 이걸 마치고 그 생각은 다시 한 번 확신이 되었다. 나는 두 사람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성격유형은 전혀 다르다 한다. 그래서 힘든 부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점에 대해서 질문하는데 당장은 대답할 말이 없어서 얼버무렸던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두 사람의 성격이 다르지만 인격이 비슷하다. 두 사람 다 인격이 보기 드물게 훌륭하다. 바로 그거였다. 내가 두 사람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 말하자면 사람들이 수준이 있다는 것이다.(내가 너무 띄우나?^^) 비록 성격이 다른 점 때문에 서로 '아'하면 딱딱 알아듣는 의사소통이 되는 것 아니지만 둘이 옳다고 생각하는 지향점이 같다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을까?
그리고 탁 까놓고 얘기지 그렇게 꿈을 먹는 남편 옆에 아내 조차도 함께 꿈만 먹고 있으면 어찌됐겠는가? 그 친구가 순수함과 꿈에 대한 열정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음은 분명 아내의 덕이리라.

서른이 넘고 마흔을 바라보면서도 고3 때와 다름없는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는 것. 피차에 인격이 훌륭한 배우자 만난 덕이 아니겠는가?

자양동의 모닝베이커리에서는 빵과 함께 꿈을 굽는 아저씨가 아기 셋 키우며 마음 넓은 여인네와 함께 살고 있다. ^^
전주로 시집 가서 두 아들을 낳아 키우며 살고 있는 친구 화순이.

믿음 좋고, 잘 생기고, 능력 있고, 무엇보다 화순이라면 세상에서 제일의 여자로 아는 남편을 만나서
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다. 사실 이 글을 쓸 때(이 글 역시 3청에 있을 때 주보에 쓴 글이다) '서른, 잔치는 시작됐다' 에 내포된 뜻은 하나님께서 화순이의 30대에 결혼을 통해서 남다른 복을 주실 것을 기대하고 기도하는 마음이었다.
당시 3청에는 30 고개를 넘어가는 세 처녀가 있었는데 교회 안 팎에서 오는 결혼에 대한 압력은 우리를 적잖이 힘들게 했다. 그러다 '믿는 남자가 드물어' 라는 유행어가 생겨났다. 여름 수련회에서 이 제목으로 촌극을 하고 그걸 각색해서 성탄절 교회 행사 때 다시 공연하기도 했었는데.
'믿는 남자가 드물어' 라는 말은 당시 우리의 형편과 처지(?) 그리고 우리 신념을 너무 잘 표현했던 것 같다. 단지 믿는 남자가 아니라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갈 최소한의 준비가 안 된 남자에게 단지 결혼을 위한 결혼으로 시집가지는 않겠다는 의지도 있었던 것 같다. 때문에 쉽게 사람을 사귀지도 않았고 그래서 더 외롭고 어려운 미혼이었다.
그런 우리에게 특히 화순이처럼 순결하게(?) 마음을 지키며 20대를 보낸 딸에게 하나님이 제대로 된 신랑감을 주셔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있었다. 역시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어디서 저런 남자가 있었는가?' 싶은 남자가 전주에 있었고 '절대 서울을 안 떠나겠다'고 했던 화순이는 지금 6년 째 전주댁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러니까 96년에 쓴 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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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저녁 8시 10분쯤 본당. 수요찬양을 준비하느라 키보드를 설치한다, 가사를 쓴다, 간식을 먹는다..... 한참 분주한 시간. 찬양팀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속속 도착을 하고 준비를 하는데 이 친구가 나타나지 않는다. 시작할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나타나지 않는다. 마지막 기도를 하는데도 나타나지 않은 사람이 이 친구라면 찬양 인도자인 나로서는 별로 걱정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늦어도 반드시 올 것이기 때문에... 그녀를 10년 동안 옆에서 관찰해 온 나의 확신이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오래 전부터 이 친구에게 마음으로 붙여준 별명이 '한다걸'-한다면 하는 girl(?)-이다. 찬양이라면 죽고 못사는 데에 마음이 딱딱 맞아 친구가 된 지 벌써 10년이다. 때문에 새벽 1시에도 교회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아 시간 가는줄 모르고 찬양을 하곤했던 우리는 같이 한 찬양시간 만큼 싸운 시간도 많다. 싸움의 내용은 언제나 비숫한 것이었다. 예를들어 청년회에서 새로 뭔가 할 일이 생겼는데 내 생각에는 같이 할 친구가 이 친구밖에 없는데 절대 안 하겠다는 것이다. 같이 하자. 아니다. 나는 이 일에는 아니다. 아니다. 너다......

그렇게 무슨 일이든 새로운 일에 대해서 선뜻 해보겠다고 나서거나 하는 일이 좀체로 없는 친구다. 대충 하겠다고 대답을 하고 나중에 눈치껏 발뺌을 하는 방법도 있으련만 그 대답 한 번 듣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하겠다고 대답을 했다, 그러면 정말 하는 것이다. 성실하게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섣불리 입에 발린 말로 대답하는 법을 모른다. 그래서 '한다걸'이다.

수요찬양건이 최근의 일이다. 집은 상도동, 직장은 신림동, 교회는 명일동. 그러니까 수요일날 퇴근을 하고 1시간 반을 버스 2번 지하철 한 번을 타고 왔다가 다시 그 길을 되돌아 가야 한다. 그런 어려운 조건임을 알면서도 같이 참여할 것을 요청했고 그러기로 하고 1년이 지났다. 때로 어떤 사람에게 뭐 가까운 교회 나가지 뭐 이렇게 먼데까지 오느냐는 충고 아니 충고를 들으면서 꼬박꼬박 수요일 약속을 지켜준다. 한 번 하겠다고 한 이상 자신이 맡은 일이 크든지 작든지 이 친구에게 있어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다. 사실 빠지면 찬양이 절대 안 되는 반주자도 아니다. 찬양 리더 옆에 서서 그저 같이 노래하는 싱어일 뿐(?)이다. 핑계를 대자면 이런 핑계를 대서 얼마든지 적당히 할 수도 있는 일이다. 나는 그 성실함이 눈물겹다.눈물겹게 고맙고 눈물겹게 존경스럽다.

그렇다. 내가 10년을 보아온 이 친구는 그런 걸음걸이로 가는 친구다. 자신의 일에 대해서, 하나님 앞과 사람과의 약속에 대해서 그렇게 하겠다면 하는 친구다. 매사에 그랬었다. 자신이 한 대답에 대해서, 말에 대해서 그렇게 책임지는 친구였다.
이 친구가 나이 서른이 되기까지 걸어 온 걸음걸이가 그러하다. 그래서 이 친구에게 주신 신실하신 하나님의 상(?)이 무었일까? 지난 12월 2청의 3분 스피치 시간에 한 친구의 고백이다. '지난 한 해 자신의 기도에 대해서 늦어짐의 감옥-데이빗 씨맨즈의 <좌절된 꿈의 치유>에서 요셉이 갇혔던 감옥을 가리켜 한 말-으로 답해주심으로 더 깊은 기도와 간절한 기도를 하게 하시고 그로 인해 이전에 누리지 못한 기쁨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평소 자기 표현이 많지 않고 입에 발린 말 잘 하지 않는 사람임을 알기에 그걸 듣는 우리가 함께 감동 하는 시간이었음을 기억한다.

그렇게 20대를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요령 피울줄 모르고 하나님의 교회를 섬겨온 친구에게 하나님꼐서 잔치를 주시기 시작했다고 믿는다. 기쁨이라는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보상으로. 그리고 이것은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이렇듯 묵묵히 성실히 하나님과 사람 앞의 약속에 충실한 사람들에게 끝내 하나님께서 최고의 잔치를 베푸시리라 믿는다. 누가 이런 사람을 보면 감히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함께 몇 년을 같은 직장에서 일해도 전혀 상관없는 사람으로 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송미경과장님과는 9개월 동안 같은 곳에서 일했죠.
객관적인 이력을 소개하자면 너무 많은데......현재는 김포에 있는 모 정신병원에서 임상심리 전문가로 일하고 계시고 여기 저기 많은 학교들에 강의를 하고 계시고...박사논문을 낳기 위한(?) 산고 중에 계십니다.

어렸을 때 이랬었답니다. 하나님이 잠자리에 들기 전 자신이 하는 기도를 들으시고 주무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너무 늦게 잠자는 기도를 드리면 송구했다고 합니다. 그거 기다리다 못 주무시나 해서요...^^
그렇게 어려서부터 경.우.가 바른 어린이셨나봐요.

한 마디로 경.우.를 아는 분이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죠. 그 '경우'라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겠죠. 윗사람 아랫사람한테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것. 그 지켜야 할 것을 지키다 보니 경우에 없는 사람들은 자연히 이 분을 거북해 하게 되겠죠. 거북해 하다못해 별별 험한 소리를 다 들어도 정도를 포기하지않는 분이지요. 그러면서 직장에서 받은 상처가 너무 크셨죠.

무엇보다 제게 '헐랭이' 라는 이름을 붙여준 분이기도 합니다. 제가 입사하고 저를 딱 3일 정도 보시고는 '아냐 아냐! 헐랭이야~' 이러셨다죠.
함께 신우회를 만들기 위해서 은밀히 기도 모임을 하고 그렇게 준비하여 갈등과 반목이 심한 직장에서 신우회를 만들고 그렇게 9개월을 보내곤 직장을 옮겨 가셨습니다.

직장 옮기는 것을 결정하던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 보았습니다. 늘 계획적이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된 후라야 행동에 옮기고 기꺼이 변화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 직장을 옮기는 과정에서는 불투명한 것들이 너무 많았고 순간순간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것들이 많았습니다. 어려운 상황이었죠. 10년 넘게 다닌 직장이었으며 이 직장에서는 존경 받는 상사였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냥 그대로 직장에 남아 있어도 손해될 것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편할 수도 있었겠죠.
여기 저기 오라는 곳이 생기고 조건을 맞춰보고 면접을 보고 하시면서 '과연 내가 잘 하고 있는가? 이것이 하나님 뜻인가?'를 계속 물으면서 힘들어 하셨습니다. 과장님한테는 모든 변화는 충분한 검토와 계획 속에서 나왔기 때문이었습니다. 함부로 결정내리지 않으셨던 것이죠. 최종적인 결정을 해야 했던 날이 기억납니다. 매우 힘들어 하시면서 '나 이런 식의 결정은 태어나고 처음 해봐요. 불확실함 속에서 결정해 보기는 처음이야' 하면서 기도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셨었죠.

그 날 이후로 과장님의 수첩에 <모험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에 나오는 한 구절이 늘 적혀 있게 되었는데...내용은 하나님께 백지 수표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싸인하시고 하나님이 다~ 책임지시라는 뜻이었죠. 아마도...
능력도 있고 재능도 있는 분이기에 어떤 일을 해도 실패함이 없어서 당당할 수 밖에 없었지만 백지수표를 말하는 순간 '알 수 없는 내일'에 대한 주권을 하나님께 이양하겠다는 뜻으로 해석이 됩니다.
그리고 그 때 이후로 드물게 과장님을 만날 때마다 예전보다 더 많이 포기하고 더 많이 하나님께 삶의 주권을 이양한 사람의 평안을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 그 일들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중대한 결정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사람들에게 이거냐, 저거냐의 선택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완전히 믿고 선택하는 그 선택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 아닐까? 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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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날은 2001년 1월2일.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에 첫출근 한 날이다.
아직 사무실도 책상도 정해지지 않아 선임자 책상에서 멍청한 표정으로 보내야 했던 하루.
그 사무실에 약간 깍쟁이 같은 아가씨가 하나 앉아 있었다. 깔끔하고 세련되게 생겼는데 그리 따뜻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전화 통화를 간간이 들어보니 '전도사님...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이 아마도 교회는 다니나보다. 에? 책상에 시심(시냇가에 심은 나무 -큐티교재)이 있네. 나두 가방에 시심있는데...

조금씩 알게 되면서 인기가 좋다는 걸 알았다. 관계들 간에 갈등의 골이 깊은 직장이었는데 이 사람을 좋아라 하지 않는 사람 찾기가 어려웠다. 상담을 전공했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들 말에 잘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공감을 잘해주기도 하였다. 단지 그것만이 아니라.....그 이상의 매력이 있는데 뭘까?

성격유형은 ISTP. 에너지 절약가다. 웬만한 일에는 필요 이상으로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관계에도 마찬가지다. 그 점이 나로서는 부럽기도 한 면이다. 내가 기미나를 알고 맨 처음 배운 건 적당한 선에서 에너지 조절하기! 이것이다. (물론 기미나로서는 나한테 이걸 가르쳐준 적이 없다. 그냥 지 하고 싶은대로 사는 모습을 보면서 나 혼자 열심히 배웠다.
그리고 SP 기질이 나랑 딱 맞아 떨어진다. 놀면 힘이 난다. 일만 하면 죽는다. 가끔 그것도 갑자기 충동적으로 한 번 놀아줘야 한다. 그러면 또 그 힘으로 얼마간 버틴다. (우리는 피차 애교있는 아내 되기는 어렵다. 엽기적인 아내가 되어 남편을 즐겁게 해 줄 수는 있다^^). 이런 맘을 서로 알아줄 수 있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그런 ISTP 기질에 충실하지만 열심히 개발한 F 성향들. F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열 받아서 막말 할 때는 디게 무섭지만 그렇게 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들을 열심히 찾아내 자기 것으로 만든 것이 아마도 그녀의 매력인 것 같다. 사람들이 그걸 좋아라 하는 것 같다.

남편과 전화 통화를 하는 거 보면. '네~ 그러세요. 여보! 강의는 잘 끝났어요? 피곤하지 않아요?...' 어찌나 나긋나긋한지. 그러나 이것 역시 기미나의 본질적인 행동은 아니다. 그걸 원하는 남편에게 맞추다보니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이다.
영빈이를 대할 때도 차분히 자분자분 설명하는 모습을 자주 발견한다. 영빈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위해서 미래에 대한 염려 떨쳐 버리고 집으로 간 그녀다. 미래에 대해서는 주님께 맡기겠다는 믿음 하나로 사표를 던지고 영빈이 곁으로 갔다. 그리고 에너자이저 백영빈ㅡ이 뒤를 따라 다니면서 1년이 넘는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고 있다.

때론, 무슨 IVF출신이 이렇게 뜨거워? 싶게 기도, 말씀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 이건 아마도 남편과 함께 주고 받는 영향인 것 같기도 하다. 누구보다 기도의 필요성을 잘 아는 사람. 기도하지 않고 말씀 보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입버릇 처럼 말하는 사람.

그런데 특이하게 그녀는 애를 어깨로 낳는다. ㅋㅋㅋ 남들은 애를 낳고 나면 배가 나온다는데 그녀는 어깨가 넓어진다. 오늘도 그녀는 둘째 낳은 이후로 '이 어깨가 어찌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으리라.

내게는 그녀를 만난 게 은혜라고 여겨질 뿐이다. 위로부터 온 선물.
무엇보다 나의 wonderful counseller !!

<복음과 상황> JP&SS의 사랑과 책_3
JP
나는 결혼한 후 어느 시점부터 ‘자유’를 상실했다. 나는 편안히 잠잘 자유가 없어졌다. 나는 우아하게 식사(외식) 할 겨를도 없다. 나는 내 진로를 내 뜻대로 선택하는데 심한 제약을 받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식’ 때문이다. 나는 자녀 둘을 얻는 조건으로 내 개인의 자유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어느새 ‘책임’이 꿰 차고 앉아 버렸다. 밤에 우는 녀석 재워야 할 책임, 밥그릇 뒤엎는 녀석 붙들고 밥 먹여야 할 책임, 아이들을 잘 길러내야 할 책임 말이다.(이 점에 관해서는 홍승우가 그린 <비빔툰>의 만화 한 컷 한 컷은 내게는 그야말로 아멘 아멘 이다) 자유를 가져가는 대신 책임을 두고 간 녀석들을 보고 사람들은 ! ‘하나님의 선물’이라 부른다. 근데 무슨 선물이 이렇게 사람 힘들게 하냐?

결혼 서약을 한 지 4년하고도 반이 지나갔다. 그 새 보금자리를 다섯 번이나 바꿨고 그 와중에 두 자녀가 태어났다. 한번도 계약 기간을 지켜보지 못한 우리의 이사는 아이들과 관계가 있다. 첫 번째 이사 때 첫째 채윤이가 생겼다. 두 번째 이사는 채윤이의 양육 때문에 하게 되었고, 세 번째 이사는 둘째 현승이의 출생과 함께 이루어졌다. 역시 양육 때문에 결정한 일이고 부모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에 한 네 번째 이사는 아예 부모님과 합치는 이사였다. 아이들 양육 때문이다. 두 번째 이사 때는 육아 관계로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그 때 어떤 분이 “아이들 때문에 인생이 꼬이는 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던 게 생각난다. 그렇지. 내 인생극장에 자녀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내 드라마의 전개는 예상치 못한 각본 수정을 했어야만 했? ? 분명 내 인생은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나 혼자 연극을 하는 게 아니다. 거기엔 여러 인물이 등장하고 영향을 준다. 그 중 으뜸으로 영향을 주는 것은 바로 자녀들이다. 그렇다면 이 녀석들을 왜 ‘하나님의 선물’이라 부르는 것일까? 이 녀석들이 나중에 자라서 내가 자기들 때문에 인생 곡예를 해야만 했다는 사실에,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이해는 해 줄지 미지수인데, 자녀들을 ‘하나님의 선물’이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렇게 까지만 생각한다면 나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는 철부지 아빠가 되겠지. 우선 아이들은 내가 그런 허튼 생각에 빠질 기회를 전혀 주지 않는다. ‘안아줘, 졸려워, 배고파, 놀아줘, 쉬 마려...’. 쉴 새 없이 요구하는 아이들은 내가 두 다리 쭉 뻗고 누워있을 틈을 주지 않는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지. 비록 피곤한 몸으로 아이들에게 응대하다보면 단지 내가 아빠라는 이유로 달려와 안기고, 허다한 사람들 속에서 유독 내 음성을 알아듣는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아빠!’ 라고 부른다. 그러면 그제서야 나를 짓누르던 책임감은 행복한 선물 보따리로 바뀌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당당한 사람이 된다. 나는 더 이상 부족할 게 없는 사람이고, 더 이상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자녀를 두고 선물이라 함이 마땅한 것 아니겠는가?

채윤이가 두 돌 쯤 됐을 때였나? 어느 날 정다운 목소리로 내게 “아빠~”라고 부르던 날이 생각난다. 종종 듣던 말이긴 했지만 그날따라 그 소리는 내 영혼에 만족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정겨운 소리로 들렸다. 내가 ‘아빠’라구? 나 김종필이 아빠가 됐단 말이지? 지금껏 이다지도 그윽한 표현으로 나를 불렀던 호칭이 또 있었던가! 그 ‘부름’은 마치 하나님이 나를 부른 듯이 내 영혼을 꽉 채우는 말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아이를 안고 춤추듯이 뛰면서 “나는 아빠다! 나는 아빠다! 나는 채윤이 아빠다!”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나의 자존감을 세워주고 정체성을 훌륭하게 이해해준 아이로 인해 나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기 때문이었다. 잊을 수 없는 그 때의 경험은 자녀교육에 있어서 엄청난 인식의 변화를 가져다 준 것 같다. “이 아이는 내 자녀다”라는 인식과 “나? ?이 아이의 아빠다”라는 인식의 차이는 모든 관점을 전혀 새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전자의 말로 고백할 때 나는 불안하고 피곤하다. 그러나 후자의 말로 고백할 때는 자신감이 생기고 당당해진다. “나는 채윤이와 현승이의 아빠다! 나보다 훌륭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구 해!”

결혼하고 몇 개월 후, 아내가 불쑥 할 얘기가 있다고 하면서 사뭇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엔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나는, 아내의 임신 발언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일어난 현기증을 눈치 채지 못하게 다스려야만 했었다. (어? 지금 내 감정은 텔레비전에서 본 것과 다른데... 왜 그렇지?) 애써 반가운 표정을 지으려다가 이내 두려운 마음을 감추는 데 실패한 나는 곧장 아내에 추궁을 피할 궁리를 해야만 했었다. 왜 갑자기 애가 생긴다고 하니까 두려워졌던 걸까? 배우자를 만나 사랑하다보니 결혼까지 했고 행복하기 그지없는 나날을 보내기야 했지만 사실 자녀문제에 있어서 나는 진지하게 마음의 준비를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내 일로도 벅찬데, 아직 난 준비가 안됐는데...) 아빠가 된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 나는 어디서 들어보지도 못했고, 그저 멀게만 여겨지던 거였는? ?그게 내 삶에 현실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얄궂게도 그 일은 아내가 내 반응을 떠 볼 요량으로 해 본 거짓말에 (언제나 그렇듯) 내가 보기 좋게 걸려든 꼴이지만, 그 일로 인해 나는 아빠 되기 위한 공부길에 들어서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나는 자녀 교육에 대해 특별한 지식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특출나게 지혜롭거나 어린이다운 천진난만한 감각과 재능을 가지고 있는 건 더더욱 아니다. 나는 어린이와는 꽤 먼 사람이었고, 임신 소식에 기겁까지 한 사람이었으니 뻔한 대한민국의 남성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뿐이다. 게다가 내 나이 서른을 전후로 한 시점에서 재능, 진로, 비전 등의 문제로 적잖이 실패의식과 싸우기에 여념이 없던 때였으니, 자녀교육은 내게 너무너무 버거운 과제임에 분명했다. 그렇지만 탁월한 유아교육가인 아내의 요청과 도움은 아무래도 자녀교육에 대해 철저하게 공부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었다.

내가 처음 접한 자녀교육서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여성잡지였다. 아내가 매일 숙제검사하다시피 확인했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거니와, ‘다 실패해도 좋으니 좋은 가정 만드는 것만큼은 실패하지 말자’ 라는 선언도 했었기에 틈틈이 태아와 산모의 변화에 관한 정보를 훑어보았다. 그러다보니 태아의 변화에 주목하게 되었는데, 이왕이면 애칭을 지어주는 게 좋겠다 싶어 채윤이는 ‘푸름이’, 현승이는 ‘기쁨이’라고 불러 주게 되었다. 그리고 어린이용 성경인 ‘지혜성경’을 매일 조금씩 읽어주었는데, 그게 계기가 돼서 채윤이의 이름 뜻은 지혜와 관련하여 붙여지게 되었다.

아내의 출산 직전에 읽은 프레드릭 르봐이예라는 의사가 지은 『폭력없는 탄생』은 출산과 태아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주었다. 제목이 이미 시사해 주는 바와 같이 아기들은 폭력적으로 태어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증명해준 르봐이예는 아기의 출생 과정 하나하나가 얼마나 어른 중심으로 이루어지는지 그래서 아기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는지 생생하게 고발하였는데, 그 책을 읽고 나니 애 낳는 일이 참 두려운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해서 가급적 좋은 병원,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있는 의사를 찾아보려고 적잖이 노력한 듯하다. 그렇지만 우리 아기들은 인격적이고 우호적인 환경에서 결국 태어나지는 못했다. 참 미안하기 그지없다. 우리나라 산부인과에서의 분만은, 적어도 내가 목격한 바에 의하면, 더 이상 ‘자연분만’이 아니다. 인위적으로 무자비하게 끄집어내는 게 아닌가 싶? ?정돈데, 막상 아이한테도 아내한테도 도움을 줄 수 없이 맹하게 서 있어야 하는 남편의 처지가 막막하기 그지없을 뿐이었다. 우리 사회가 언제쯤에야 인격적으로 아이를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을까? 아~ 자녀 얘기는 정말 끝이 보이질 않는구나! 사실 이제 시작에 불과한데 이미 난 내 지면을 다 채운 것 같다. 이제 잡설은 접고 본격적인 자녀교육론을 아내로부터 들어보기로 하자.



SS
‘아하! 남편의 글을 읽다보니 내 작전은 120% 성공한 작전이 됐구만...’ 결혼 전 나는 여성학을 전공할 꿈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 세계관과 페미니즘 사이에 다리를 놓겠다는 야무진 꿈 말이다. 결국 정식으로 코스를 밟아 공부하는 길은 가지 못했지만 내 삶에서 ‘기독교 세계관적으로 살기’와 더불어 ‘페미니즘적으로 살기’에 대한 밑그림이 생겼다는 것이 어쩌면 더 중요한 일일지 모르겠다.

지금은 많이 알려진 ‘또 하나의 문화’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부정기 간행물의 시리즈 1권의 제목은 <평등한 부모, 자유로운 아이>이다. 이 책은 내게 여성학을 소개해준 책이기도 하지만 ‘부모됨’에 대한 준비를 일찌감치 시작하게 해 준 책이기도 하다. 자녀교육은 부모된 내가 내 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정정도 시대정신을 대물림 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결국 그 시대정신이란 부모로부터 보고 배우는 과정을 통해 전수받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특별히 ‘남녀관계’에 대한 관점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 아직 젊은 시절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꿈꾸던 부모는 다름 아닌 ‘평등한 부모’였으며 그 기대와 꿈은 계속해서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남편과 만나 결혼할 때까지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결혼해 보니 남편은 평등한 부모는커녕 ‘부모됨’에 대해서! 도 거의 ‘have no idea’ 였다. ‘이 남자를 의식화시켜야 할텐데...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독서에도 자기 스케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 섣불리 뭔 책을 들이댈 수도 없고. 그래! 만화부터 시작하자!’ 슬쩍 화장실에 <여성신문>에 게재됐던 만화를 책으로 묶어 낸 <반쪽이의 육아일기>를 가져다 놓았다. 아침마다 화장실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한다. ‘킥킥킥’ 혼자 웃는 소리도 들리고. 어느 새 책꽂이에 꽂힌 <반쪽이의 가족일기 1, 2>를 스스로 가져다가 화장실에 놓고 읽고 있다. ‘흐흐흐, 1단계 작전 성공!’ 여기서 반쪽이는 누구인가? 그렇다! 엄마가 아닌 아빠다! 화가인 아빠가 직업상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밖에서 일하는 아내 대신 딸의 주 양육자가 되어 키우면서 만화로 그린 육아일기이다. 아내는 영화평론가이자 여성운동가라 할 수 있고 만화를 쓴 반쪽이 역시 자칭 타칭 페미니스트이다. 만화의 내용에서 주는 메시지와 상관없이 우리 사회에서 아빠가 주양육자로 집에 들어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의식에 환기’를 주고 있지 않은가? 평소 ‘그리스도 안에서 건강한 가정 세! 우기’에 대한 꿈에 전적으로 합의하고 있는 남편이기 때문에 그 만화 하나 로 ‘평등한 부모’에 대한 청사진을 스스로 금방 그려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더 이상 의식화 교육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 번 싹이 나기 시작한 ‘평등한 부모 되기’ 에 대한 의식은 이미 그의 의식과 일상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었으니까.

 아직 어린 현승이는 잘 모르겠지만 큰 아이 채윤이는 유난스럽게 아빠를 밝힌다. 특히, 쉬 마려울 때, 안아 달라고 할 때, 졸릴 때... 말하자면 어른 힘들게 할 일에는 꼭 아빠를 찾는다. 이런 걸 보는 주위 사람들은 ‘애가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하네’ 하면서 엄마인 나보다 더 민망해 한다. 그러면서 한편, ‘아무리 그렇다고 아빠가 똥 기저귀 갈고 있는데 엄마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태연하게 수다 떨고 있냐?’ 하는 지도 모른다. ‘기울기에 기울기’라 하였던가? 우리 사회에 가사와 육아가 이유 불문하고 여자의 일이라는 의식이 상식이라고 기울어져 있는 이상 상식에 익숙한 눈에 거슬리는 일이 없이 어찌 평등으로 가는 일이 가능하겠는가? 그러자면 저 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는 만큼 이 쪽으로 기울어지는 껄끄러움이 있어야 어느 정도 중심으로 가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난 언! 제나 당당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이에 동의해 주는 남편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전공이 유아교육이고 아이를 좋아하다 보니 이런 저런 양육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은 예전부터 습관처럼 된 일이다. 양육에 관한 지침서들이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 아이를 키우면서 부딪치는 문제들은 결국 내 인격의 성숙과 신앙의 성숙에 따라 해결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누가 진정한 양육은 부모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존재’에 의해서 되는 것이라 했던가? 어떤 양육서를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됨을 위해서 우리가 계속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라는 것을 어느 때부턴가 확신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양육에 관한 전문적인 책보다는 의외의 책을 읽으면서 양육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얻을 때가 있다.

채윤이의 돌을 얼마 남겨두고 있던 때였다. 일단 우리 부부는 전통적으로 하는 돌잔치는 하지 않기로 하고 보다 의미 있는 세리모니를 위해 아이디어를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돌잔치를 하지 않겠다는 말에 부모님은 벌써 말도 안 되는 얘기라 하시며 이미 적잖은 갈등이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정말 잔치다운 잔치가 없을까를 고민하던 중 퇴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빌 하이빌즈의 <살아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읽다가 번쩍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 책은 잠언을 구체적 삶에 적용하기 쉽게 쓴 강해서 형식의 글이었는데 어느 부분을 읽다가 ‘무릇 잔치를 하려거든... 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불러다 하라’는 말씀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무릎을 탁 치게 된 것이었다. 금반지 한 돈 씩 들고 올 수 있는 지인들을 부르는 것 말고, 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라는 잔치, 바로 그 잔치를 ! 해보리라 마음먹게 된 것이었다. 우리 부부는 청년부 때 정신지체인 공동체에서 매달 식탁봉사를 했던 경험이 있었다. 잠시 결혼으로 인해 잊고 있었던 그 분들을 오랜만에 다시 초대해서 채윤이의 첫 생일을 함께 나누기로 한 것이었다. 그건 채윤이에게도 나중에 소중한 경험으로 남게 될 것이었고, 우리 가정의 궁극적 지향점을 상징하는 일이란 생각도 들었기에 주저없이 진행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암튼, 그렇게 답을 얻어 치룬 채윤이의 돌잔치는 우리 부부 뿐만 아니라 채윤이게도 참으로 의미 있는 세리모니가 되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채윤이는 잠언과 인연이 많다. 채윤이를 가질 즈음 남편과 함께 읽던 성경이 잠언이었고, 채윤이 임신해서는 어린이용 잠언성경인 ‘지혜성경'을 밤마다 아빠가 읽어 주었고, 한참 입덧이 심할 때 침대에 누워 꼼짝 못하던 때 읽던 책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지혜>이고, 그 책을 다시 읽으면서 돌잔치에 대한 생각을 얻고 말이다.


유명인사 11인이 자신들의 자녀양육에 관한 생각을 자유롭게 쓰고 엮은 <사랑하는 법을 바꿔라>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저자는 대부분 중년 이후의 연배들로 그야말로 양육에 있어서 산전수전 다 겪은 분들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박완서, 손봉호, 이원영, 김용택 등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분들이 저자의 반을 넘으니 그것만으로도 참 좋은 책이다. 양육 초년병들로서 그분들의 경험담을 듣는 일은 언제든 큰 위로 아니겠는가! 그분들 각각의 글들은 하나도 버릴 것 없이 다 유익을 주었는데, 특히 다일 공동체 최일도 목사님의 글은 오랫동안 마음 한 켠에 남아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배고프고 외로운 이웃을 위해 젊음을 바치는 일로 바빴던 아빠 최일도 목사님은, 아이와 친밀한 관계를 맺을 시기를 놓쳐 버린 것에 대해 때 늦은 회한과 뼈아픈 고백을 담아 후배들에게 권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비전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부모’로서의 책임을 담보로 내주는 것에 대해서 신중히 생각하라고 조심스레 경고하고 있었는데, 교회 일로 바쁜 우리들이 걸려 넘어지기 쉬운 일임에 분명했고, 다시금 자녀양육에 대해 여러모로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게 만들었다.

우리가 다니는 교회는 올 해에 가정교회라고 부르는 방식을 도입했다. 교회를 수십개의 가정교회로 나누어 운영하는 방식인데, 그 모임을 다들 ‘목장모임’ 이라 부른다. 매주 금요일 밤마다 온 가족이 모이는 이 모임이 주는 유익은 참으로 많다. 특히나 아이들에게도 더 없이 좋은 공동체를 만난 셈이었는데, 많은 언니 오빠 형아 누나가 생겼고 호적에는 나와있지 않는 큰엄마 큰아빠도 생겼으니 아이들이 매주 목장모임을 기다리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대 사회에서 양육의 문제를 가정 내에서, 부부에 의해서만 해결하기는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우리 같은 맞벌이 부부에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는 하지만 단지 현실적인 요구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나는 보다 더 좋은 양육을 위해서 ‘공동육아’를 꿈꾼다. 그런 꿈은 먼저 ‘또 하나의 문화’에서 출판된 <함께 크는 우리 아이>, <코뿔소~ 나들이 가자>, <놀면서 자라고 살면서 배우는 아이들> 등의 공동육아 시리즈를 통해서 꾸게 되었고 나는 그 안에서 ‘더불어 양육하기와’ ‘그 안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자유로움’을 배웠다. 그렇지만 ‘자연과 친하게 지내는 아이로 양육하기’, ‘권위로 가르치지 않고 스스로 알게 하는 교육’, 등등 이런 것들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나는 그 부족분을 부르더호프의 리더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가 쓴 <부르! 더호프의 아이들>에서 찾는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동체교육과 공동육아는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비폭력과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국제적인 공동체 부르더호프에서 아이의 양육과 교육을 어떻게 하는지 보여주는 이 책은 서점에 가면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는 수 십 수 백의 온갖 양육관련 책들과 바꿀 수 없는 한 권의 책이라 생각된다. 이 책은 내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부모의 역할이 단지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며, 우리 자녀들이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인도할 수 있다’고. 그리고 나는 요즘 비록 7개월 된 아기로 인해서 잠 못 자고, 외식도 못하고, 제대로 예배 한 번 못 드리는 현실이지만 그 부모됨의 특권을 누리느라 후회 없이 행복하다. 이 또한 부모됨을 위해 부부가 함께 독서하기/공부하기가 가져다 준 유익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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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우, <비빔툰1, 2>, 한겨레 신문사

홍승우, <비빔툰3, 다운이에게 동생이 생겼어요>, 문학과 지성사

르봐이예, <폭력 없는 탄생>, 샘터

최정현, <반쪽이의 육아일기>, 여성신문사

최정현, <반쪽이의 가족일기 1, 2>, 김영사

또 하나의 문화 편집부, <평등한 부모 자유로운 아이>, 평민사

한국 청소년 상담원 엮음, <사랑하는 방법을 바꿔라>, 샘터

빌하이빌즈, <살아 있는 하나님의 지혜>, IVP

공동육아연구회, <함께 크는 우리 아이>, 또 하나의 문화

공동육아연구원, <코뿔소~ 나들이 가자>, 또 하나의 문화

이부미, <놀면서 자라고 살면서 배우는 아이들>, 또 하나의 문화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브루더호프의 아이들>, 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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