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하게 간직한 '전작 작가'들이 있는데 토마시 할리크 신부님은 최근에 맺은 인연이다. 그래서 전작을 가지고 있지만, 다 읽지는 못했고. 이분이 한국에 오신다니, 현장 강의에 가고 싶지만 시간은 없고. 유일한 서울 강의는 휴일 어린이날이었다. '어린이 없는 집'이니 JP만 혼자 놀도록 잘 떼어놓으면 되겠네. 여차저차 현승이 올라오고, 채윤이는 "오랜만에 넷이 차 타고 어딘가 가고 싶다"하고. 그 분위기에 또 빨리 마음을 접었다. "그래, 놀자! 넷이 같이 놀자. 엄마가 듣고 싶은 강의가 있었는데 포기할게. 모처럼 넷이 놀자."
5월5일 비 예보가 뜨고,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영화 얘기가 슬슬 나오고, 나는 생각할수록 토마시 할리크 실물영접이 아쉽고... 그래서 제안하고 확정된 것이 "어린이날, 합정동 프리덤!"이다. 강의 장소가 합정동이었다. 우리의 추억 합정동 메세나폴리스에 가서 같이 점심을 먹고 셋은 영화를 보고 나는 강의를 듣고. 저녁 약속, 연주 일정이 있는 아이들은 각자 제 갈 길 가고. 빗길을 달려 합정까지 가면서 길지도 짧지도 않은 자동차 안 수다가 좋았다. 참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혼자 걷는 합정동 길도 참 좋았고. 오래만에 빈브라더스 커피까지 테이크 아웃했다.
강연회는 안 좋았다. 70이 넘은 강사님을 혹사시킨 것 같았다. 여러 기관 합동 초청이니 '혹사시키다'의 주체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이 너무했다. 주일 도착, 월-화 피정, 수, 목, 금 강연이 전주, 광주, 왜관, 서울이라니. 강사를 배려하지 못하는데 수강자에 대한 배려까지 기대할 것은 아니었지만. 환대나 배려 같은 단어가 마음 어디서 오락가락 했다. 모처럼 몸으로 영접하는 좋은 선생님 만나는 자리가 많이 아쉬웠다. 이미 책이 나와 있고, 유튜브로도 줌으로도 만날 수 있는 세상인데. 이미 교재에 나온 강의안, 신부님은 그걸 그대로 읽고, 아나운서 같은 목소리로 번역된 걸 그대로 읽는 강의였는데. 고개를 들고 눈을 맞추는 시간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배려, 강사에 대한 배려, 빗속을 뚫고 모여든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일종의 '감각'의 문제이기도 하다. 진정성 없이 깔쌈한 것도 문제지만… 환대와 배려는 대상을 향한 열린 감각의 문제이다. 질의응답 시간에는 소통하는 강의가 될까 기대하며 기다렸는데, 더욱 갑갑하고 마음이 조금 민망해져서 중간에 나왔다.
한때 일상의 산책길이었던 절두산 성지와 한때 내 교회(어색하다...)였던 양화진 묘원을 잠깐 걸었다. 절두산 성지에는 비가 많이 오는데도 순례온 교인들로 울긋불긋(어쩐지 다들 등산복을 입고 있었다는 느낌) 북적이고, 기도초를 밝히고 또는 성모상에 손을 대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울타리 너머 양화진 묘원은 정말 고요하고 깔끔했다. '먼지 하나 없이 정돈된 느낌'의 묘원을 걷는 맛은 또 달랐다. 풀 한 포기까지 세련되게 기획된, 감각으로 치면 별 다섯 개의 정원이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나는 환대를 경험했나? 환대와 배려, 배려의 감각 같은 것들을 곱씹으며 운동화와 바짓단이 젖도록 걸어서 메세나폴리스에서 영화 보고 나온 가족을 만났다.
이래저래 양화진은 이야기가 많은 곳이다. 그 이야기 중, 천주교와 개신교의 화평한 조우를 모두어 양화진 책방을 열었다.
양화진 책방 유리에 적힌 말이다. 저 사진을 찍고, 저 글귀를 만난 때가 10년 전이다. 양화진은 이래저래 이야기가 많은 곳인데, 거기서 보낸 5년으로 내게는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남긴 곳이 되었구나. 저 사진을 찍고 저 글귀에 감동할 때만 해도 상상치 못할 이야기들이다. 교회에 대한 희망과 절망, 그래고 또 새로운 희망 같은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또 "천주교와 개신교의 화평한 조우"라는 말 역시 다소 낭만적으로 설레며 읽었는데... '화평한 조우'라는 말에는 '전쟁같은 갈라짐과 간극'이 전제되어 있음을 뒤늦게 조용히 체험하고 있다. 어쩌면 이래저래 많은 그 모든 이야기를 내 무의식은 알고 있었다. 모르고 싶었을 뿐이지. 무엇인가를 모르고 싶은, 모르기로 작정한 천진한 환상 덕에 오늘도 버티며 살고 있는 것 아닌가.
강연회는 실망스럽고, 토마시 할리크 신부님께는 실망보다는 강사 예우를 잘하지 못한 주최 측(한국사람)의 마음으로 죄송한 마음까지만 가기로 한다. 배려심은 크고 감각은 없는 한국에 오셔서 고생 많으셨겠다. 공산 정권 치하의 고통, 이후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탄압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재를 살아야 했던 더 큰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써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팬심보다는 감사의 마음. 비 오는 휴일에 가족을 버리고 거기까지 찾아간 진심은 그것이었다. 토마시 할리크 신부님, 몸과 영혼이 더불어 건강한 노년을 보내시길 기도한다. 입구에서는 “책 구매하시고 저자 사인 받으세요!” 하더니… 줄을 섰는데 “신부님 피곤하시니 여기까지만 사인 하시겠습니다.” 하는 바람에 사인 하나 못 받았네.
오늘날 세계의 많은 곳에서 우리는 '제도 종교의 쇠퇴, 종교 기관의 신뢰 상실, 종교적 언어의 명료성 상실을 목격합니다. 그러나 매우 다른 두 종교적 현상을 구분하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영성 또는 영적인 삶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반면에, 다른 한편에서는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가 그것입니다. (중략) 영성에 대한 관심이 상업적으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삶이라는 진정한 문화 대신에, 싸구려 밀교(密敎, esotericism)를 받아들입니다. 앞으로는 영적인 삶의 문화와 시민 사회 생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적극적인 참여, 그리고 이 둘의 관계 모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토마시 할리크, 강연록 중-
언젠가 최 선생님과 치매에 관해 얘길 나눈 적이 있다. 지금처럼 편한 사이도 아니었고, 여러모로 민망했던 기억이다. 내가 선생님과의 약속을 까맣게 잊은 것이다. 죄송한 마음, 당황한 마음으로 ‘아무말 대잔치’로 사과드리던 끝에 툭 나온 말로 선생님께서 정색을 하셨었다. 화내시는 모습을 처음 뵈었었다. 돌아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선생님을 몰랐다. 몰라도 한참 몰랐고, 무엇보다 노인과 편하게 대화할 태도가 되어있지 않았다. 존경심도 있었지만, ‘노화’를 주제로 노인과 대화하는 것이 조심스럽기만 했었다. 건망증, 치매 이런 얘기를 하던 끝이었는데, 어설픈 배려를 하려다 노인에 대한 선입견이 들통나 혼이 나고 말았다. 그렇게 시작한 솔직한 대화로 당시 부쩍 심해진 건망증으로 높아졌던 내 불안감은 해소되었고 선생님과는 한결 가까워졌다. 댁에 도착해 자리에 앉자마자 선생님께서 갑자기 그날을 기억하느냐 하셨다. 당연히 기억한다고 했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으셨다. 아니, 현관문을 열어주시던 때부터 표정은 이미 난감 그 이상이었다. 왜 갑자기 그날이 소환된 것일까? 무슨 일이 있으신 게 분명한데, 여쭙기도 어려운 무거움이어서 그저 가만히 기다렸다. 한참 만에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여셨다.
내 친구가 치매에 걸렸다면?
사람 입이 그렇게 가벼워서야... 그래, 입이 문제겠는고, 마음이 가벼운 것이지. 내가 그때 치매에 대해 어쩌구저쩌구 아는 척을 하며 입방아를 찧어 댔지.
아, 아니요... 선생님. 가볍다니요... 전혀...
뭐라고 했는지 정 선생 기억하우?
제 건망증에 대해 말씀해 주시고 책도 빌려주셨었죠. 다 생각나진 않지만, 긍정적인 얘길 해주셨어요. 그래서 그날 이후로 저 건망증에 대한 걱정 별로 안 하게 되었는데요. 선생님, 무슨 일이세요?
하아, 참나. 내 친구가 치매예요. 치매 진단을 받았어. 그것도 많이 진행된 상태라오.
아...
문제는 내가 벌써 감지한 게 있는데, 무심했어요. 가벼운 건망증이려니 하고 지나친 일이 여러 차례라고. 아마 내가 그때 정 선생한테 했던 말들이 화근이었을 거야. 지나친 자기 확신이었지. (끌끌 혀를 차신다.)
화근이라니요? 어떤 말씀이 화근이었다는 건지...
코로나 직전이었을 거예요. 친구가 약속을 까맣게 잊고 모임에 나오지 않는 일이 있었거든. 가볍게 생각했어요. 단기기억 저하는 어쩔 수 없는 노인네들의 뇌의 문제다, 하면서. 한 번이 아니었던 것 같아. 그러다 다른 친구와 다툼을 하기도 했지. 자기만 빼고 약속을 잡았다는 둥 우기는 바람에.
그러면 그때 이미 증상이...
그렇지. 그러고는 바로 코로나 터져서 모임이고 뭐고 문 닫았고, 연락도 서로 거의 못했어. 코로나 기간에 진행이 빠르게 된 것 같아요. 딸한테서 전화가 왔네. 요양병원으로 갔다고... 휴우... 참... 내가 자만에 빠져서 내 친구도 못 지켰어.
선생님, 무슨 말씀이요! 선생님께서 무슨 수로 친구분을 지키세요?
그래, 맞다. 내가 무슨 수로 지켜? 그래도 빨리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말이야.
치매가 치료되는 병이 아니라는 것, 조금 빨리 발견했다고 해서 더 나은 치료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이 아닐 것이다. 그 아쉬움과 자책감은 짐작이 가기에 뭐라 드릴 말씀이 떠오르지 않는다. 부모님의 치매는 차라리 받아들이기가 나을지 모르겠다. 내 친구가 치매에 걸렸다면? 상상이 되지 않는다.
내가 지나치게 낙관적이었어. 지나친 것에 항상 무엇인가 숨겨져 있지. 안 보고 싶었던 거야. 65세 이상 치매 확률이 5%다, 뭐다 하면서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아니 내 친구에게도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처럼 말이야.
선생니~임, 그때 말씀해 주신 감사 요법이 제게도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데요.
감사 요법?
네, 치매가 걸리더라도 예쁜 치매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기억을 많이 쌓아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인간의 뇌가 나쁜 경험, 아팠던 경험을 더 오래 기억한다고요. 억울한 것, 섭섭한 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환상을 잘라내는 것이 감사라고요. 그건 지나친 낙관이 아니에요. 선생님의 그 낙관, 지나치지 않았어요.
그래, 그래. 맞아. 허허, 울겠네, 이 사람! 내가 상심이 돼서 그래. 알았어, 알았어.
아니, 그게... 제가 왜 갑자기 울컥하는 거죠? 죄송해요. 제가 선생님을 위로해 드려야 하는데... 아, 진짜 이 부적절한 감정...
아니야, 아니야, 고마워요!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이지. 뭐가 부적절해? 오늘 정 선생이 잘 왔다. 슬프고 우울한 감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 뻔했는데, 감사 요법이 아니라 정 선생이 딱 끊어줬네. 뭘 좀 먹읍시다. 사람 오자마자 붙들고 자책에 한탄을 하고 앉아서 물 한 잔도 안 내주고 있었네.
이게 최 선생님이다. 화가 날 때 그것을 숨기지 않으시고 솔직하게 표현하시고, 금세 풀고 웃으시는 분. 감정이 물 흐르듯 한달까? 유연한 마음의 소유자라고나 할까? 뵈면 뵐수록 이 점이 정말 매력적이다. 마음이 뇌에 있다면 선생님의 뇌는 이렇듯 말랑할 텐데, 선생님 같은 분이 치매에 걸리실까?
이렇게 큰 딸기 봤수? 킹스베리라나 뭐라나? 무슨 딸기가 이렇게나 크냐 말이야.
와아, 저 보기는 봤는데요, 처음 먹어봐요.
두어 개 먹으니 배가 부르더라고. 상담 종결한 청년 내담자가 가져왔어요. 처음 왔을 때 비하면 내면도 외적 환경도 많이 좋아져서 내가 보람이 있어. 오랜 구직생활 끝에 취업을 했거든. 첫 월급 받았다고 통 크게 썼다는 거야. 그리고 가면서 하는 말이 힘들 때 또 상담하러 올 거니까 꼭 살아있으래. 하하.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해요?
그러니까 말이야. 아주 맹랑하다구.
선생님, 선생님은 치매는 절대 안 걸리실 것 같아요.
응?
그냥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선생님 같은 분은요...
이 사람도 맹랑하네. 하하. 왜? 치매 걸리는 사람이 따로 있나?
매사 긍정적이시잖아요. 유연하시고요.
장담할 수 없어. 내가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고 하는 게 그런 말이야. 나는 사실 치매 걸려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거든. 치매 안 걸리고 맑은 정신으로 사는 여생은 얼마든지 대비할 수 있지만, 걸린 후의 삶은 내 통제 밖에 있는 것 아니유? 걸리면 걸려야지 어떡하겠나.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하는 것도 있었어. 정 선생이 약속을 잊었던 날 말이야.
네, 그날로 제가 선생님께 완전히 빠져들었는데요. ‘단짠단짠’ 다 해주셨잖아요. 처음으로 제게 화도 내시고, 건망증에 대한 제 염려를 합리적으로 딱 설명해주셔서 안심도 시켜주시고... 그 유연함과 긍정성이요.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거야. 건망증도, 치매 초기 증상인 경도인지장애도 오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거든. 오는 치매 어쩔 수 없다. 지나친 민감함과 거부가 더 문제라고 말이야.
네, 그때 그렇게 말씀하셨었죠.
그 교만 때문에 내가 불을 보듯 훤한 내 친구의 치매 증상을 캐치하지 못한 거야. 전문가라고 하는 내가 말이야. 친구를 도울 골든 타임을 놓쳤다고. 그게 너무 안타까운 거라우.
선생님, 치매에도 골든 타임이 있나요?
음... 뭐, 완치가 없으니까 치료의 골든 타임은 말할 수 없겠지. 진행을 늦추는 약이 있을 뿐이니까. 그래, 얘기가 다시 원점으로 왔구만. 자책은 그만 하겠수다. 아무튼 친구가 약속을 잊고, 자기만 몰랐다고 우기면서 다른 친구들과 대거리하는 게 듣기 싫어서 귀를 닫고 있었거든. 그것이 치매 증상이었다는 것을 알았으면 조금 다르게 대했을 텐데 말이야. 그렇게 친구와는 소통이 끊어진 거잖우. 차라리 민감하게 의심이라도 했으면 오가는 마음이 있었을 것 아니유. 이제 요양병원으로 갔으니... 이승에서는 끝났지.
아... 그런 마음이시군요.
치매는 무능하기만 한 질환이 아니다.
정 선생 혹시 <더 파더>라는 영화 봤어요? 안소니 홉킨스가 나오는.
영화는 알아요. 보지는 못했고요. 주변에서들 많이 추천하던데, 저는 어쩐지 선뜻 보게 되질 않더라고요. 안소니 홉킨스가 치매 환자 연기를 그렇게 잘했다고요?
그래, 나도 참 보기가 힘들었어. 이제 와 얘기지만 보고 나서 며칠 우울해서 괜히 봤다 싶기도 했어. 그래도 한 번 봐요. 심리 치료하는 사람이니 꼭 봐야 할 영화야.
그렇군요. 영화가 왜 힘드셨는지 여쭤보면 맹랑한 거죠?
이런! 오늘은 또 맹랑하기로 작정을 하셨구만! 스포일링 해도 되겠소?
아, 저 스포일링 된 상태로 영화 보는 거 좋아해요. 반전, 소름, 이런 거 잘 못 즐겨요. 다 얘기해 주셔도 돼요.
특이한 것이 치매 환자 자신의 시점으로 그린 영화예요. 그렇게 보지 않으면 스릴러 같기도 하고 스토리 전개가 무척 혼란스럽다고. 치매를 앓는 이의 눈에 보이는 공간과 일상의 일들이 어떻게 혼란스러운지가 생생하게 그려진다우. 지식적으로는 모르던 바가 아니었지만, 다소 충격이었어.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치매, 그러면 가족들이 겪는 고통이 먼저 떠오르지 환자 당사자의 입장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이미 정신이 와해 된 상태이실 테니 이해 불가라는 생각도 들고요.
바로 그 점이야. 내가 지금 친구가 했던 말들이 하나하나 살아오면서, 단지 늙은이의 고집이나 어깃장이 아니었는데 싶은 거라우. 모르지도 않았던 내가 말이외다. 참... 휴우...
결국, 고집과 어깃장인 건 맞잖아요. 그래서 주변이 힘든 거고요.
아, 그렇지않아요. 그렇지 않다고 봐요. 무작정 억지를 부리고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이 단순한 치매 증상이라고 할 수는 없어.
무슨 말씀이신지?
이러려고 그랬는지, 칼 융(Carl Jung)이 말하는 동시성인지, 내가 얼마 전에 좋은 책을 하나 만났어요. 뇌과학자가 쓴 치매에 관한 책인데, 흥미롭게도 학술서적이나 논문이 아니야. 뇌과학자 자신의 어머니가 치매에 걸린 거예요. 과학자이며 딸로 2년 반 동안 치매 걸린 어머니의 변화를 일기 쓰듯 기록하고 깨달은 내용을 쓴 거예요.
오, 특별한 치매 서적이겠네요. 과학자이며 딸로서 쓴 책이라니.
그러니까 말이유. 그간 읽었던 어떤 논문보다 알츠하이머 치매에 대해 명쾌했고, 나는 감동적이기도 했어요. 치매로 전혀 다른 인격이 된 어머니에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리지 않은 ‘그 어머니다움’을 찾으려는 노력과 결국 찾아내는 눈이 감동이 되더라고.
그 책으로 선생님 친구분에 대한 이해를 다르게 하신 거군요.
아, 참! 그 얘기 하다 말았지. 치매 환자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건데. 치매는 아무것도 못 하는, 무능하기만 한 질환이 아니라는 거야. 치매로 인해서 여러 어려움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치매 환자들 스스로 곤란을 극복하고자 다양한 전략을 찾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제삼자가 봤을 때는 이상행동으로 보일 수 있지만, 나름 자신의 혼란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라는 거지.
아, 영화 <더 파더>의 관점처럼 치매 환자 자신의 입장을 헤아린다는 말씀이네요.
그렇지. 특히 초기에는 자신도 혼란스럽고, 실수하거나 이상하다는 말을 듣게 될까 두려워 뭔가를 하려고 애쓴다는 거지. 앞뒤가 안 맞는 얘기를 하는 것도 단지 인지능력 저하 때문만은 아니라, 나름의 자구책인 거예요.
아아...
내 친구가 약속을 잊고는 우기고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 나름의 노력이었단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렇게는 생각해보지 못했어요. 선생님. 친정어머니가 치매이신 친구가 있어요. 요양병원에 계신지 오랜데요. 처음엔 그 사실도 몰랐어요. 어쩌다 그 사실을 알게 됐는데, 친구가 너무도 의연한 거예요. 워낙 밝은 성격이기도 하지만요. 심지어 그렇게 말해요. 어머니가 다른 병 아닌 치매라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고요. 딸조차 못 알아보신대요. 당신 자신도 모르시고, 아무것도 모르시니 차라리 행복하지 않겠느냐고요. 그래도 되나 싶으면서도 끄덕여지는 부분이 있는 거예요. 자기의식이 없으실 테니 고통도 없으시겠구나 싶고요. 그 부분에 대해선 두 번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렇군요.
진행이 많이 되었을 때야 또 모르겠지요. 적어도 그 뇌과학자는 그래요. 증상이 심해져서 이전 어머니의 모습이 다 지워졌음에도 자기 어머니다움의 본질은 남아 있더라고요. 특별한 모녀 관계니 가능한 발견이긴 하겠지. 뇌과학자이며 어머니와의 관계도 좋았던 딸을 둔 치매 환자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수.
특유의 지적이면서도 재미있는 대화를 이끌며 생기를 찾으시더니 그새 다시 침울한 얼굴이 되셨다. 그렇지! 최 선생님이시니까 이런 주제를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시지 어느 노인이 치매를 가벼이 마주할 수 있을까. 게다가 가까운 친구분의 일이 되었으니... 다시 민망해진 마음이다. 뚝 끊어진 대화를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를 모르겠다. 어느새 뉘엿뉘엿 저녁 해가 넘어가고 있다. 역시 선생님이 먼저 힘을 내셨다.
끝까지 남는 건 감정 기억
어헛, 오늘 정 선생이 귀인이다. 치료사는 치료사야. 주거니 받거니 얘기하다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지 뭐야. 상담비 내야겠다. 저녁 뭐 사줄까?
네? 네! 상담비요? 그러면 저녁으로 상담비 퉁 치시면 안 되고요. 상담비는 따로 청구 들어갑니다. 헤헤.
그리 하구려. 백지수표 줄게. 허허.
네, 백지수표 접수합니다. 하하하.
고맙네. 친구 딸이 전화해서는 한참을 우는데 내 심장이 다 흔들리더라고. 천지분간 못하는 것 같은 제 엄마를 병원에 데려다 놓고는 마음이 추슬러지질 않는대. 왜 아니겠어?
저희 엄만 저를 늦게 낳으셨어요. 지금 아흔이 넘으셨거든요. 연세가 무색하게 정정하시고 특히 정신이 좋으셔서 치매 걱정은 해보지 않았는데요. 상상만 해도 막막하고 가슴이 쪼여오네요. 내가 아는 엄마가 사라지고 다른 엄마가 되었을 때,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글쎄, 다른 엄마가 된다... 아까 말한 책에서 말야. 저자가 찬찬히 관찰하고 기록하면서 깨달은 바가 있어. 인지기능이 만든 ‘그 사람다움’과 근본적인 감정이 만든 ‘그 사람다움’이 따로 있다는 거야. 쉽게 말하면 뇌 기능의 문제로 기억의 손실과 정보 입력의 혼란으로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지만, 감정적으론 자기 엄마 그대로이더라는 거야.
아, 감정이요? 엄마의 감정이요...
그래, 알츠하이머성 치매의 뇌에서 가장 먼저 세포사가 진행되는 곳이 기억 중추라고 하는 ‘해마’야. 기억 장애가 제일 먼저 일어나지. 그런데 끝까지 남는 것은 감정 기억이야. 내 친구도 말이야, 인지적으론 문제가 생겼지만, 느낌은 손상되지 않았던 거야. 평소보다 더 우기고 고집을 부렸던 건 자존심을 지키려는 발로였을 거야. 그랬을 것 같아.
선생님, 왜 노인치료에서는 ‘느낌’을 존중하라고 하잖아요. 노인 음악치료에서도 환자의 느낌에 대한 믿음으로 치료 디자인을 하라고 하거든요.
맞아, 치매 환자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으려면 왜곡된 생각을 바로잡으려는 불필요한 입씨름은 하지 않아야 해. 사실 모든 노인질환자, 아니 모든 노인을 대하는 태도일 거야.
아, 불필요한 입씨름... 그러네요. 이성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설득하려는 것이 의미가 없죠. 왜 박완서 선생의 소설에 노인들 이야기가 많이 나오잖아요. 그 기억이 나요. 뱃속에서 뭐가 잡힌다, 분명히 뭐가 잡힌다는 어머니가 있어요. 의학적으로 아무 문제 없는데 억지를 부린다며 자식들에게 타박 들으며 혼란스러워하는 장면이 아프게 남아 있거든요.
그렇구만! 어디 노인네들 뿐이겠소? 결국 사람이 관계 안에서 원하는 건 감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남녀노소 모두 같애. 그 흔한 공감이라는 말을 왜 다들 좋아하겠소? 상담까지 오는 이들이 찾는 건 공감이야. 결국 감정이라고! 평생 사람 속내 들어주는 일을 하고 살았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감정이야. 감정의 소통! 그러니 심리학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진짜 감정을 아는 사람이고. 치매에 걸리고 싶어서 걸리는 사람이 있겠어? 치매 예방을 위해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정보가 많지만, 그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내 친구만 해도 교장으로 은퇴하기까지 똑똑하고 일 잘하는 사람이었고, 누구보다 신앙심도 깊었다고. 내게는 정말 남의 일이 아니야. 당장 내일부터 내게 치매 증상이 와도 이상한 일이 아닐 거예요.
아오, 선생니임...
아니, 끝까지 들으라고. 그러니까 치매에 걸릴까 두려운 사람이 할 일은 투명한 감정으로 사는 거야. 정직한 감정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고, 하나님께도 그렇게 나아가야 해.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은 그거예요. 그리고 치매 걸린 노인을 도우려는 사람이라면, 보이는 행동이 어떠하든 그의 존엄을 지켜주고 싶다면 느낌을 믿어주고 귀 기울여주어야 하고!
아, 네. 알겠습니다! 저도 정리가 아주 딱 잘 되었어요. 지금 제 감정은 배고픔으로 인하여 살짝 짜증으로 가고 있사옵니다. 더 해주실 말씀은 식당으로 가서 하시면 안될까요?
그럽시다. 하하.
웃음이 절로 나온다. 선생님처럼 말랑한 마음, 투명한 감정의 소유자가 어디 있겠냐고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치매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다고 입바른 소리 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마음으로 기도했다. 주님, 우리 선생님 적어도 치매로부터는 지켜주세요. 더 오래 이런 맛있는 대화 나누며 배우고 싶어요.
운동하고 오는 길에 '몸'에 대해 생각했다. 운동을 꾸준히 하면서 인생 어느 때보다 건강한 몸인 것 같은데(오십견으로 삐뚜름하게 올라가던 팔이 거의 곧게 펴졌다), 건강하다고 늙지 않는 것은 아니다. 건강한 몸이지만 하루하루 노화되고 있다. 멈추지 않는 노화로 더는 어쩔 수 없는 몸이 되더라도 건강한 몸일 수는 있지 않을까? 노인이 되더라도 말랑한 마음으로 건강한 영혼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이런 생각에 빠져 걷는데....
아파트 입구에서 자그마한 할머니 한 분이 텅 빈 것 같은 백팩을 메고, 지팡이와 한 몸으로 선 채로 뭐라 말씀을 하셨다. 마스크를 끼셨고, 어느 지방인가의 사투리 억양이라 도통 리스닝이 되지 않았다. 뭘 도와드려야 하나, 네? 네? 여러 번 여쭈었는데... "장이 아이네. 장이 아이네. 허허" 허무한 웃음으로 마무리하신 말씀은 아파트 장 서는 날인 줄 생각하셨는데, 아니라는 말씀이다. "아, 벽산 장이요? 오늘 금요일이니까요. 월요일에 장이요."
빠른 걸음으로 내 갈 길 걷다 살짝 뒤돌아 보았다. 맞은편 단지 장 서는 아파트 쪽을 바라보시다 천천히 몸을 돌려 걸으시는 모습이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길을 가다 아이를 보면 영락없이 발걸음을 멈추고 눈을 맞추게 되는데 노인들을 그렇게 바라보는 일은 거의 없다. 이 할머니의 천진한 혼잣말이 사랑스러워 발걸음을 멈추었다. 혼잣말 같은 혼잣말 아닌, 지나가는 사람 끌어들이는 허망감 가득한 혼잣말과 표정이 사랑스러워! 나무 뒤에 숨어 도촬을 하고 말았다. 사진은 나무와 꽃에 안겨 "숨은 할머니 찾기"가 되었다.
사진을 들여다 보는데... 보나벤투라 성인의 말이 마음을 스쳐 지나갔고. "창조된 모든 것에는 신성한 지문이 찍혀 있다."
4월 한 달 "오후의 빛 학교"라는 이름으로 중년 세미나를 하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중년 부부 인생 학교"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내게는 "중년의 영성 학교"이다. 교회 집사님들 여섯 커플과 가볍게 즐겁게 (나는 혼자) 깊게 가고 있다. 이름은 <시니어 매일 성경>에 연재하는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에서 따왔다. 그 연재 글은 물론 여기저기서 하고 있는 강의를 갈아 넣어 4주간의 강의와 나눔, 1박 2일 피정으로 진행한다. 포스터은 우리 연구소의 하늘 샘이자, 우리 교회 사랑스런 청년 다슬의 작품이다. 발로 만들어도 고퀄, 발로 만들어도 마음을 담는 특별한 기술을 가진 자이다. 아, 글쎄 포스터의 뒷모습 중년부부는 누가 봐도 딱 아는 그들이고!
작년 2022년은 연구소 내적 여정, 꿈작업에 남성 수강자들이 대거 참여한 특별한 해였다. 더불어 내적 여정을 함께 하는 몇 커플이 함께 성장하는 모습에 큰 감동과 보람을 맛보았다. 오랜 세월 해결하지 못하거나 해결하지 않았던 부부 관계의 어려움이 '각자 자기를 돌보며' 서서히 다른 지점으로 가더니 한 지점에서 만나는 것이었다. 그 지점은 치유와 회복이었다. 내가 요란 떨 일은 아니라 조용히 마음에만 담아두고 있지만, 남편에겐 호들갑을 떨었다. "나 연구소 접어도 돼. 이것으로 충분히 보람 있고 할 일 다 했다고 생각해."
언젠가 중년 부부 세미나를 하게 되면 연구소의 그 벗님들과 하게 될 줄 알았다. 꿈꾸던 모임이었다. 생의 정오를 넘어 오후로 향하는 부부가, 마음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몸은 늙어가지만 영혼은 더 깊어지는 여정을 함께 가자고 마음의 손잡는 그런 모임. 손을 잡아도 설레는 것 하나 없지만, 스러지며 깊어질 나날을 그리는 고요한 만남. 교회 집사님들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영성생활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영성생활을 논하는 곳이 교회여야지, 교회에서 하게 될 줄은 몰랐다니, 하시겠지만. 적어도 현재 내게 제도교회는 종교생활에 더 많이 기울어 있고, 영성생활은 연구소를 통해 연구하고 '체험으로서의 교회'로 살고 있는 편이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오후의 빛 학교"가 벌써 마지막 시간이다. "오후의 빛 학교"가 있었던 4월 한 달, 교회 가는 길이 참 좋았다. 강의 부담, 모임 이끄는 부담이 없지 않았지만, 부담보다 '좋음'이 훨씬 더 컸다. 아, 이렇게 가볍게도 마음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이지. 심지어 지난 주일에는 에니어그램 유형 설명을 50분에 끊었다. 6시간에 해야 할 강의를 말이다. 2시간으로도 부족하다고 강의 요청을 거절하고 있는데 말이다. 성령께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신다는 <춤추시는 하나님>에서 읽은 말이 큰 힘을 주었다. 저렇게 둘러앉아 이야기 나누는 그 사이에서 무언가 화학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을 확신한다. 내 강의가 아니라, 각자 내어놓는 '물고기 둘 떡 다섯 개' 같은 소소한 이야기들로. 소소하고 진솔한 이야기들 말이다. 소소하고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준비가 된 집사님들이 만들어낸 '좋음'이다.
'사이'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을 돕는 최선의 방법은강사로서 무엇을 잘 가르쳐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은 것 아닐까 싶다. 3주 세미나 진행하면서 나와 우리 부부의 시간을 돌아보며 얻는 유익이 더 컸다. 하긴 젊은 부부들과 함께 했던 '육아 세미나'에서도 그랬다. 어린 아이들 키우는 이야기를 나누는데, 성인이 된 채윤 현승이와 나를 생각하게 되었었다. 강의 조금 내놓고, 젊은 부부들이 내놓는 소소하고 진솔한 고민을 들으며 다시 깨닫고 배우게 된 것이다. 역시나 성령은 사이에서 일하신다.
남편과 나란히 앉아 진행하는데(재미있는 세미나 진행을 위한 필살기이다. 목사 앉혀 놓고 디스 하면 무조건 좋아하신다!) 시작 찬양 부르는 모습을 한 집사님이 도촬 하여 보내주셨다. 오랜만의 기타 JP, 싱어 SS 투샷이다. 사진도 참 마음에 든다. 점점 스러져가는 인생 오후의 빛이 나는 참 좋더라.
모 선교단체 전국간사수련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일이 있었다. 강사로 내부자 아닌 외부자를, 무엇보다 신학도 하지 않은 여성을 부르는 것도 의외라 여겨지기에 늘 그렇듯 부담이 컸다. 그래도 흔쾌히 수락하고 기쁘게 그 시간을 기다린 것은 몇몇 얼굴이었다. 내적 여정의 벗이라는 말로도 조금 부족한데, 어쨌든 내게 가장 소중한 얼굴은 '내적 여정, 내적으로 연결된' 이들이다. 아니나 다를까! 의자에 앉았던 내게 일어날 기회도 주지 않고, 기습적으로 패밀리 레스토랑 직원처럼 자세를 낮추고 다가와 인사를 건넨 간사님과는 그 어정쩡한 자세로 안고 반가움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렇게 저렇게 아는 얼굴이 많다. 나를 단체에 자주 부르신 시니어 간사님은 "여기서 삼분의 일은 소장님이 만나셨던 얼굴일 것"이라고 하셨다. 신입 간사 훈련으로, 아니면 간사 재교육으로 내적 여정을 여러 그룹 진행했으니 그럴 만하다.
광고시간에 기수별 소개 시간이었는데, 죽 나와 서는 여섯 명이 지난 해 짧지 않은 '내적 여정'을 함께 했던 신입간사단이었다. 앞에 나와 섰는데 내가 왜 울컥하고, 든든하고, 자랑스럽고, 뿌듯한 거지? 삼분의 일을 알아도 내 마음에서 가까운 것이지, 찾아와 인사 나누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나라도 그럴 것이다. 몇 번 강의 들었다고, 나이 많은 강사에게 찾아가 인사하고 그러진 못한다. 그래도 나는 지난 수요일 이후로 마음이 꽉 채워진 느낌이다. 내적 여정으로 만난 분들은 많은 경우 나를 에니어그램을 가르친 '강사'로 기억하겠지만, 내 마음엔 그들이 '수강자' 이상으로 남아 있다. 나눠준 어떤 이야기들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고, 가끔은 "잘 살고 있을까?" 떠오르면 짧은 기도를 드리게 되기도 한다.
이상하게 그 날 이후로 "작고 작은 이 세상, 우리 사는 이 세상 아주 작고 작은 곳"이란 노래가 마음 어디서 자꾸 울린다. 내 마음이 작고 세상이 작다. 작은 마음에 들어오는 이들은 진실한 것을 나눴거나 나눌 것 같은 사람인 것 같다. 적절하게 차려입고, 적절한 말을 주고받으며 만나는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마음에 남는 만남은 포장지 걷어내고 함께 시간이다. 양量의 문제가 아니라 질質의 문제라고 할까? '질'의 시간, 진실의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들은 그가 나를 기억하건 말건, 내 마음에 소중하게 담겨 있다. 생각해 보니 가사가 이렇다. "함께 나누는 기쁨과 슬픔, 함께 느끼는 희망과 공포, 이제야 비로소 우리는 알았네, 작고 작은 이 세상" 오, 이거였구나! 내적 여정은 '기쁨과 슬픔, 희망과 공포'를 꾸미지 않고 나누는 자리이다.
브레넌 매닝은 "참된 삶이란 말이나 개념이 아니라, 지금 당장 내 앞에 있는 사람이나 사건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당장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진실하게 경험하는 것만이 진정한 삶이고 세상이라면, 세상은 작고 작은 것이 맞다. 나이 들수록 더욱 작고 작은 세상을 살아가야지, 마음먹게 된다. 그래서 자꾸 이 노래를 부른다.
지난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1시까지 줌으로 하는 내적 여정을 마치고, 점심을 먹고, 소파에서 기절하듯 낮잠을 잤다. 기절 낮잠은 참 오랜만이다. 이유 있는 기절 낮잠인 것이, 한 이십몇 년 만에 시험공부를 했는데, 그야말로 시험공부였다. 외우는 공부 말이다. 문제는 나와 있지만, 문제마다 답을 정리하는 것이 리포트 하나를 써야 하는 수준이고, 그걸 쓰자면 한 과목의 한 학기 공부를 정리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그간 의미 있게 들었던 과목을 내 것으로 정리하는 시간이 되고, 그걸 외우기 위해 안 쓰던 머리를 써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라고 지나고 나면 말할 수 있는 거지! 답을 정리하고 외우느라고 죽을 뻔했다는 말은 하지 말자.)
기절 낮잠을 자고 일어나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시험공부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 "아... 논문 쓰고 싶다. 외우는 고통에 비하면 논문 쓰기가 훨 낫네" 했었으니까. 정말 달콤한 책상 앞 시간이구나... 하는데, 채윤이가 등장하여 카페 가자고 난리를 친다. 점심 먹기 전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다. 장은 봐야 한다." 이런 얘길 했던 것 같은데, 분명히 가기로 했다고 떼를 쓰고 (진짜로) 거실 바닥을 구른다. 쟤가 미쳤나 싶어, 미친 애는 이길 수 없지 싶어 카페에 가기로 했다. 주섬주섬 책을 챙겼더니 "제발, 제에발... 그냥 보통 엄마처럼 카페에 가자"고 다시 발을 구른다. 책 가져가지 말라고. 쟤가 미쳤나 싶었지만, 기꺼이 져주기로 하고 지갑과 휴대폰만 챙겨 나섰다.
채윤이가 꼭 가고 싶었던 카페는 늘 지나다녔지만 카페인 줄도 몰랐고, 카페라 해도 "어반 런드렛", 세탁소 겸 카페라니 끌리지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끌려 나온 몸, 끌려가자 싶어 들어간 카페는, 오!!! 분위기 좋고, 뷰 좋고, 음료 마음에 들고! 1층은 카페, 2층은 세탁소라는 이상한 조합도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창가에서 보이는 내가 늘 걷는 탄천 길의 큰 나무였다. 오미자 신맛 좋아하고, 자몽의 쓴맛 정말 좋아하는데, 얘네 둘을 콜라보한 '오미자몽'도 신선한 경험이었다.
한가로이 앉아서 즐기고 노닥거리는데 잃었던 어떤 것을 찾은 느낌이었다. 잃은 줄도 몰랐던 어떤 좋은 것 말이다. 커다란 덩치에 갑자기 다섯 살 채윤이가 되어 거실을 구르던 채윤이 덕에 예기치 못한 기쁨을 만났다. 게다가 이 얘기 저 얘기, 수다수다 하다 채윤이가 툭 던진 한 마디가 마음 깊은 곳으로 풍덩 들어왔다. 듣고 보니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는데,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던 그 말이었다. 듣고 보니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 복닥거리며 찾아다니던 것이 있었는데 채윤이 입에서 나온 한 마디였다. 이럴 땐 정말 "아이는 하나님의 메신저다."라는 말이 수사가 아니다. 다 큰 채윤이가, 힘을 써서 나를 끌고 나가서 내 지갑을 털고 제 욕구를 채우는 줄 알았는데 나를 위한 시간이었다.
끌려나갔더니, 내가 얼마나 쉬지 않고 달려왔는지, 달리는 것 자체에 취해서 어떤 감각을 마비시키고 살았는지 깨달아졌다. 문자 그대로 달린다는 뜻은 아니다. 내 방식으로만 일하고, 내 방식으로만 쉰다는 뜻이다. 카페에서 보이는 나무 아래는 내가 늘 걷는 길이다. 나름대로 쉼이며 멈춤이라 여기며 혼자 산책하는 길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내 방식대로 쉬는 고착이라는 것을 알겠다. 내 스케줄과 내 방식을 포기해야 비로소 늘 보던 나무 저편 아래에 카페가 있고, 상상치 못한 조합의 '오미자몽'이 있음을 체험하게 된다. 무엇보다 이런 딸, 잘 키운 딸, 열 친구 부럽지 않은 잘 키운 딸을 영접하게 된다.
마침 다음 날 주일 예배 설교의 본문은 이것이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 21:18)
예수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진리'를 묻고 들었던 빌라도, 그가 어떤 예수님을 만났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한 마디가 제 마음을 울립니다. "이 사람을 보시오!" 죄 없으신 사람, 하나님이신 이 사람이 수난을 향해 한 걸음씩 가시는 것을 봅니다. 사랑으로 내어주신 주님의 몸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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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얼마나 우리를 끌어당기는 말입니까. 정말 그러고 싶습니다. 자유롭게 되는 것... 궁극적으로 영적인 자유이겠으나, 어쩌면 영적 자유의 한 부분일, 어쩌면 영적 자유로 가는 길에서 아주 중요한 경유지일 '정서적 자유'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 신부님의 정의는 간단하네요. 다른 누구에게 나를 증명할 것이 없고, 다른 누구로부터 지켜 낼(얻어 낼) 것이 없는 상태.
물론 마음을 닫고 있으면, 연결을 딱 끊으면 저런 상태가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나는 바라는 것 없다. 나도 바라지 않을 거다! 이런 마음은 자유가 아니라 차라리 감옥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요. 영향받지 않겠다는 심장은 자유라는 착각의 고립 상태입니다.
리처드 로어 신부님이 말하는 '정서적 자유' 공간이란... 충분히 작아지고, 충분히 벌거벗고, 충분히 수치당할 수 있는 자리인데요. 벗님들은 어디가 떠오르시나요? 저는 십자가가 떠오릅니다. 누명을 뒤집어쓰고, 맞고, 모욕당하고, 벌거벗겨져 누구라도 볼 수 있는 곳에 매달려 수치의 극한에 있되,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 자신이 지금 어떻게 보이더라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자기답게 생의 마지막 숨을 내뱉는... 정서적 자유 공간으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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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거두게 하여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의 제자인데, 유대 사람이 무서워서,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 "또 전에 예수를 밤중에 찾아갔던 니고데모도 몰약게 침향을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왔다."
잃어봐야 그 존재의 소중함을 비로소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 사랑하는 이들을 천국에 보내고 나서야 그분이 제대로 보였던 여러 경험이 있습니다. 상실의 공간은 얼마나 투명한 공간인지요. 예수님을 잃은 자리에서 두려워 숨어 있던 제자들이 커밍아웃 하여 그분의 시신을 수습합니다.
적막한 토요일. 예수님이 무덤에 내려가 계신 시간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의 손에서 장례가 치뤄지는 중 예수님을 배신하고 떠난 제자들은 얼마나 처절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요. 상실감과 슬픔, 죄책감으로 견딜 수 없는 시간일 것 같습니다. 가장 캄캄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제 상상도 못 했던 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것이고, 가장 부끄러운 이 시간으로 인해 남은 인생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더욱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 주님 버리고 떠나 홀로 계시게 했던(하는) 많은 시간들이 부끄럽고 슬픕니다. 이런 저를 위해 기꺼이 죄값을 "대신 지불하신" 당신을 더욱 사랑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 고난주간 한 주 간의 묵상 조각글이다. 하나는 학교 수업에서 렉시오디비나를 심플하게 가르쳐 주시는 신부님의 안내에 따른 것이고, 하나는 연구소 카페 아침 묵상으로 올린 것이고, 하나는 교회 큐티 나눔방에 댓글로 남긴 것이다. 세 공간이 어쩌면 너무도 이질적이어서 표현의 방식이 다르고, 표현하는 태도도 조금씩 다르다. 각각 다른 방식으로 조심스럽기도 하고. 하지만 내 마음은 하나다. 각각 다른 공간에서 거기 적절한 옷을 입고 그 자리에 부합하는 언어를 고르는 일을 분열적으로 하고 있지만, 내 마음이 하나인 것을 나의 그분께서 알아주신다. Behold the man! 고난을 향해 한 걸음 씩 걸어들어 가시는 예수님과 그 어느 해보다 길게 눈 맞추고 보낸 사순기간이다. 비 오는 날 산책길에서 만난 떨어진 벚꽃은 예수님의 심장에서 쏟아진 피 같았다. 흐르는 빗물이 그렇게 보이게 했는지 모르겠다. "우리 보좌 앞에 모였네 함께 주를 찬양하면... 십자가에서 쏟으신 그 사랑" 이 찬양에서 십자가에서 쏟으신 사랑은 콸콸 흐르는 피의 이미지로 떠올랐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인 예수님과 그 몸으로 겪어내신 고난이 감당 못할 사랑으로 나를 향해 흐른다.
JP가 저녁으로 삶은 계란을 싸가고 있다. 반숙, 반완숙 등을 주문하면 내가 또 기가 막히게 삶아서 주는데... 잘 삶아진 계란을 유리그릇에 담다가… 이것 말고 냉장고에 있는 날계란을 넣어 보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맛있게 먹을 생각에 두근두근 계란을 탁 깼는데 주르륵.... "으.... 정신실!!!!!" 남편 표정이 보이는 듯하다. 생각만 해도 웃기고 신이 난다. 이게 '감동란'이지.
교회에서 “이우 인생의 빛 학교"라는 이름으로 몇 개의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다. 작년부터 이어오는 육아 세미나는 생애 주기에 맞춰 '아침 햇살 학교'라 칭하는데, 2월에는 영화 <늑대 아이>를 보고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에게 온 아이들은 모두 늑대 아이이다. 사람인 내가 사람과 결혼한 줄 알았는데, 나와 본성이 완전히 다른 늑대였다는 발견과 함께 내가 낳은 아이도 반은 늑대라는 현타가 부부생활 부모생활의 시작인지 모르겠다. 늑대 남편은 죽고 혼자 남아 두 늑대 아이를 키우는 엄마 '하나(일본말로는 '꽃'이라는데)'가 인상적인데. 엄마 됨과 아빠 됨은 혼자 아이를 키우는 하나처럼 각자 걷는 '하나의 길'인지도 모른다. 육아 세미나 내내 하는 말은 '왕도가 없다'이다.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수밖에 없다.
지난 주일에는 <아빠가 책을 읽어줄 때 생기는 일들>을 쓰신 옥명호 대표 모시고 강의를 들었다. 강사 초대 메시지에 나도 모르게 쓴 '사랑스런 젊은 부부들'이란 표현을 그대로 따서 ppt 첫 화면에 '이우교회 사랑스런 젊은 부부 특강'이라고 써주셔서 내 마음이 심쿵했다. 부모교육 강사가 주로 여성이라, 늑대아이를 키우는 아빠 이야기 들어볼 기회가 전무하다. 책, 독서, 책 읽어주기...는 아이 잘 키우고 싶은 부모에겐 솔깃하는 주제라. 그걸 낚싯밥 삼아 '사랑스런 젊은 부부들에게 '적당히 뽐뿌질 하면서 강의를 기다렸다. 삶의 소중한 것들에는 전문가가 없고, 전문가가 필요치도 않다. 이렇게 자신의 삶을 고민하며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내는 한 발 앞선 선배들이 있어야 한다. 삶도 신앙도, 우리에겐 자기 삶을 사는 이들이 필요하다. 이미 들어본 강의인데 다시 들어도 좋았고, 마치고 단톡방에 올려준 후기들 보니 뿌듯하고 보람이 차오른다. 이러니 사랑스런 사람들이지. 이들의 후기를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다.
❝강의 어떻게 들었는지도 궁금해요. 사실 저는 '책 읽어주는'이 아니라 '아빠가'에 방점을 찍고 강사님을 초대했어요. 솔까말 누가 저 옥아빠님처럼 할 수 있겠어요? 그러나 야근야근야근.... 하는 삶 속에서 '아빠 됨'의 고민을 놓지 않고, 나는 받아보지 못한 '아빠와의 친밀감'을 내 아이에겐 남겨주고 싶은 열망과 시도들이 제게는 큰 울림을 줘요. 무엇보다 세상의 가치와 하나님 나라의 가치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여 꾸준히 쌓아가는 성실한 사랑을 배우고 싶고요. 한주간 여러분의 일상, 육아의 삶 속에 우리 주님이 주시는 깊은 평화가 함께 하길 기도해요. 파이팅!❞
라고 내가 단톡방에 썼더니 이후 줄줄 올라온 후기.
❝사모님 덕분에 너무 좋은 강의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집에오면서 남편과 여러 얘기 할 수 있어서 더 좋았구요. 감사합니당 모두 이번주도 힘내세용💕❞
❝성실한 사랑! 저도 그 꾸준함이 정말 대단하시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강사님 얘기하실때 신랑 무릎 친 사람 저예요.. ㅎ) 좋은 강의 들을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어제 강의 넘 좋았어요~~ 교회 다녀오면 피곤한 날도 있는데 어젠 동윤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넘 소중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어린시절 얘기도 남편과 나누고( 울아빠 디스였지만) 자기전 책 읽어주는 시간도 좀더 생동감있게 좀 글밥 긴걸로 읽어주니 또 읽어달라는 말에 감동 받았어요~~( 글밥 긴건 힘들어서 잘 안 읽어줬었는데…) 어제 밤에는 남편과 여행사진 사진첩 주문하기도 했어요~~ 성실한 사랑 노력해야겠어요^^❞
❝다 너무 공감돼요~ 저는 어렸을때 엄마랑 같이 독후감을 서로 편지처럼 썼었던 것도 생각나고 같이 책을 읽다가 낮잠을 잤던 것도 생각나면서 그런 노력이 엄마의 사랑이었겠구나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남편도 어제 저녁에 책 읽어주는데 평소보다 더 하이톤으로, 더 오버해서 아주 잘 읽어주더라구요. ㅎㅎ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 더 소중하고 감사하게 보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좋은 강의 듣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집에가서 너무 피곤하긴했지만 ㅎㅎ 어제 강의 유익하고 재밌게 잘 들었습니다. 은하도 자기전에 아빠가 책 읽어줄까 엄마가 책 읽어줄까 하니까 아빠! 하더라고요~ 저는 어린시절 아빠와 친밀하지 못했던 경험을 답습하지 않고, '책'이라는 매개를 스스로 찾아 적극적으로 소통한 용기가 너무 멋졌습니다! 그런 부모가 되도록 평생 노력해야겠습니다~❞
❝좋은 아빠가 되려면 일단 좀 독해져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밖에서 몸과 마음의 체력을 다 소진하고 집에 오면 물렁물렁해져 있기 십상이어서 아내가 특히 볼멘소리를 많이 하곤 하는데요.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정한 철칙이나 약속은 예외없이 지킬 줄 아는 독한 아빠, 독한 남편이 되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강의 듣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윤이가 책 재밌다고 한번 더 읽어달라고 하는데 그게 참 사랑스럽더라구요. 이런 아이가 우리한테 와서 감사하고. 같은 잠들기 전 시간인데도 언제 잠드나..가 아닌 책읽어주는 시간이다라고 기대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된 것 같아 감사합니다. 어젠 제 마음도 풍요로워진 날이었습니다.❞
❝어제 꽤 글밥있는 이야기 책을 읽어주었는데 은하가 생각보다 집중을 잘하더라구요. 앞으로는 이야기를 많이 읽어주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책은 하나의 좋은 수단이고 궁극적으로는 밀도있게 함께하는 시간이 중요한 것이라는 말도 마음에 새겼습니다. 아울러, 이야기를 통해 나를 발견하는 건 비단 아이 뿐만이 아니라 어른에게도 해당하는 말인 것 같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부쩍 책읽기를 즐기게 된 아내와 같이 저도 함께 읽기에 동참해야겠다는 다짐도 했구요. 강사님 책 서문에 남자목소리가 중저음이기에 책읽어주는건 오히려 아빠에게 제격이라고 써있는데, 제 아내는 목소리가 저음이라 우리부부는 책읽어주기에 참 유리하다 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
날카로운 인문학적 통찰력과 따뜻한 목회자의 심정으로 평생 참된 제자도의 삶을 연구한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의 역작 『마음의 혁신』 강독 모임에 초대합니다.
『마음의 혁신』은 내적 여정, 영적 변혁에 대한 성경적 토대를 제시하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유의 깊이과 폭넓은 신학적 지식을 밀도 있게 담긴 덕에(탓에) 쉽게 읽히지는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내적 여정을 신학적 언어로 이해하고 체험하기 원하는 분은 누구라도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5유형 추정) 달라스 윌라드를 사랑하여, 읽고 또 읽다 영혼의 치유를 경험한 (5유형) 목사님이 동반합니다.
결석 없이 성실하게 읽으실 분, 환영입니다.
✓ 일시 : 2023년 4월 17일(월) ~ 7월10일(월) 19:30-21:30 (12강, 6월5일 휴강) ✓ 인원 : 6명 ✓ 수강료 : 12만 원 ✓ 장소 : 온라인 zoom ✓ 동반자 : 김종필 목사 ✓ 문의 : 010-6209-0635 ✓ 신청 : https://bit.ly/3JQLWoq
"날카로운 인문학적 통찰력과 따뜻한 목회자의 심정"은 모임을 이끄는 김종필 목사도 웬만큼 갖추었으나, 차마 그리 소개하지는 못합니데이.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두는' 성정을 가진 사람을 어르고 달래고 협박하여 겨우 도모한 모임이네요. 달라스 윌라든 전작을 읽은 것은 물론이고, 거듭 읽은 책도 있답니다. 『마음의 혁신』은 마음 맞는 목사님들과 옹골지게 읽었고, 연구소 남성 수강생을 중심으로 파일럿 모임도 했습니다. 목회자 마인드의 지성적인 목사라 삼고초려을 불사하고 영입한 것입니다. 책은 어렵지만, 어려운 내용 잘 풀어 설명해주고, 더불어 지성의 거울에 마음을 비추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전 참여자들의 증언입니다.) 다.
엄마가 또 편지를 보내왔다. 아름다운 것, 사랑스러운 것을 총동원하여 마음을 보내왔다. 책상 앞에서는 뜯어볼 수 없는 편지라, 노트북 뚜껑을 딱 덮고 '봄날 우체통' 앞으로 나가야 했다.
2020년 봄은 잃어버린 봄이다. 봄과 함께 색도, 맛도, 생명도, 사랑도 모두 잃었었다. 여러 번 써서 퇴색한 단어이지만, 흑백 세상이었다. 퇴색... 색이 없는 봄이었다. 갑자기 눈앞에 색이 드러난 적도 있지만, 그럴 때는 상처를 받았다. “꽃 피지 마! 우리 엄마가 죽었는데 꽃이 피는 건 잔인해!” 그렇게 2020년 봄을 통째로 잃어버리고 맞은 2021년 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달랐다. "이렇게 아름답다고? 세상이?" 하면서 봄 산책을 다녔다. 엄마를 잃고 얻은 막연한 것이 있었는데, 그 막연한 것은 '영원한 것'과 닿은 것 같았지.
그는 주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사 53:2)
어제 29일, 산책을 나가 먼저 만난 것 연한 순들이었다. 아, 이사야 선지자가 쓴 '연한 순'이란 메타포는 이렇게 아름다운 아름답고 깊은 것이었구나! 살포시 올라온 연한 순에 눈을 맞추고 사진을 찍자니, 요즘 묵상하고 있는 요한복음 예수님이 마음에 살아왔다. 그분, 연한 순 같은 분이지. 그런 분이지.
엄마의 죽음이 사순시기 안에 있어서 더 큰 선물이 된다. 2022년 봄에는 바흐 칸타타 actus tragicus와 함께 엄마의 때가 얼마나 좋은 때였는지를 생각했었다.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것, 격리된 채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떠나신 것이 어떻게도 떨쳐낼 수 없는 아쉬움이었다. 이제 와 생각하니, 바흐 칸타타에 담아 엄마가 보낸 편지였다. 천국에서 바흐와 만나 작당했을지 모를 일이다. "자, 우리 신실에게 부활을 고대하라고, 소망을 불러일으킬 메시지를 보내기로 합시다. 당신의 음악을 좋아하니 적절한 곡 추천부탁이외다."
봄에 오는 엄마의 편지는 죽음이라는 편지봉투에 담긴다. 죽음의 계절이 오는 편지이다. 예고된 가장 비참하고 찬란하고 죽음,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온다. 꽃망울이 촛대처럼 달린 목련나무가 대부분인데, 벌써 피고 벌써 져버린 목련꽃이 있었다. 져버린 꽃이 슬프지 않다. 아, 슬프지만 다시 찬란한 슬픔이다. 죽음은 얼마나 좋은 것인가.
자, 이제 탄천 길이다. 민들레, 아장아장 걷는 우리 채윤이 첫걸음마를 축복하던 그 민들레다.
초점을 맞춰도 맞춰도 도드라지질 않아서 여기까지 찍었다. 저 보라색 꽃의 이름이 좀 충격적인데 "큰개불알꽃"이다. 가만히 눈 맞추고 이름을 불러보면, 어쩐지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꽃마리인 줄 알았다. 내적 여정 벗 중에 "꽃마리"라고 불리는 사랑스러운 사람이 있는데, 냉큼 톡을 보냈다. 그대의 계절!... 이라고. 꽃마리 아니라고, 검색해 보니 "봄맞이꽃"이라고. 아, 이건 재작년 엄마 무덤에서 본 그 하얀 꽃이다. 기억할게, 봄맞이꽃.
바닥에 딱 붙어 들여다보고 있는데, 지나가던 아저씨가 "이 꽃 이름 뭐예요?" 하기에 당당하게 "꽃마리요!" 했는데... 어떡하지? 아저씨한테도 미안, 벗님 꽃마리한테도 미안. 할 수 없다. 자꾸 이렇게 틀린 이름을 부르며 다시 들여다 보고, 미안해하고 하면서 나의 꽃이 되는 것이다. 그 아저씨 올봄에 꼭 진짜 꽃마리를 영접하시길.
처연하게 핀 냉이꽃이 화려한 벚꽃 못지않게 멋졌다. 화려한 자태로 주목받는, 친구들도 많아서 떼로 피어있는 벚꽃을 부러워하지 않고 자기로 피어있는 냉이꽃, 리스펙.
내가 주목하고 사진을 찍어주는 것에도 크게 개의치 않겠지만, 나는 너의 멋짐을 보았어!라는 의미로 다른 냉이꽃 독사진을 여러 장 찍어주었다.
이건 좀 보너스였는데. 더 많은 열매 맺기 위해 포도나무 가지를 치신다는 주일 설교가 생각나는 장면을 만났다. 여기에 그분의 센스와 익살! 저 멀리 경부고속도로변 간판 글 보시게나. "JESUS LOVES YOU" 사랑하니 가지 치는 거다. 가지치기는 사랑이다... ㅎㅎ
그리고 또 빼놓을 수 없는 제비꽃. 봄 편지 마지막은 노래로 마친다. 장필순이 부릅니다. 제비꽃.
영주가 학위논문으로 허난설헌의 시 연구를 택한 것은 허난설헌의 시에 끌렸기 때문이었다. 허난설헌에 감동하기 위해 많은 지식이 필요했던 건 아니다. 그 시대배경이나 집안환경에 대해서도 보통사람 수준의 상식이 전부였다. 물론 그녀의 한문실력으로 난설헌의 한시와 직관적으로 만나는 건 불가능했다. 그녀가 매혹당한 것은 시 자체의 뛰어남보다는 한 뛰어난 여자를 못 알아보고 기어코 요절토록 한 시대적 사회적 요인들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력이었다. 그러나 논문이 필요로 하는 것은 상상력이 아니라 출처가 분명한 실증할 수 있는 지식이었다.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그녀로 하여금 대학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충동질한 지도교수는 그녀의 상상력을 가장 경계했다. 영주가 제일 자주 들은 듣기 싫은 충고는 논문을 쓰면서 소설을 쓰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는 거였다. 박완서 <환각의 나비> 중
기고글 쓰다 참고하려고 오래된 소설을 꺼내 읽다, 저 부분을 발견하고 혼자 웃겨 뒤집어졌다. 누구라도 옆에 있어야 붙들고 읽어줄 텐데. "이거 들어 봐. 지금 내 얘기야. 대애박, 내가 지금 논문 붙들고 있다 연재 원고 쓰면서 모드 전환 문제로 끙끙거리고 있었거든. 상상력 금지, 상상력 금지, 출처 밝힐 수 있는 정보만! 논문 쓸 때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되뇐단 말이지.... 바로 이거라고!" 누굴 붙들고 얘기한들, 속에서부터 빵 터져서 뒤집어진 내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쓰던 원고에는 1도 관련 없는 구절에 꽂혀서 낄낄거리며 상상의 나래를 펴다 허튼 시간만 보내.... 앤 건 맞지만, 적잖이 위안이 되었다. 가끔은 혼자 웃기만 해도 위안이 되니까. 게다가 실은 이번 원고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주제였는데, 어쩐지 글은 술술 쉽게 쓰였다. 이유는 분명하다. 마음의 길을 따라 쓰면 되니까!
영성을 배우겠다고 대학원 입학을 결정했던 때, 논문은 생각 밖에었다. 영성사, 중세 신비주의, 영성신학... 과목만 보고 일단 들어가자! 결정했으니까. 내게 최적화 된, 과목과 교수님들이었다. 논문학기이다. 비논문 학위도 있어서 학점만 채우면 졸업이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또 지금 논문 쓰러 온 학생처럼 열심을 내고 있다. 그래서 논문이 잘 써진다거다, 좋은 논문을 쓸 거란 전망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논문을 위해 자료를 찾고 공부를 하자니 너무나 재미있고, 공부만으로도 기도가 달라져서 에라 논문은 때려치우고 이대로 혼자 공부하며 기도하며 살면 되겠네! 싶지만 그러지 않을 것이다. 학위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공들여 논문을 써도 누가 알아줄 리 없지만, 모든 것이 달린 것처럼 쓸 생각이다.
세월과 함께 만들어온 "정신실식의 상상력 플러스 글쓰기"와 "논문 글쓰기" 사이, 두 글쓰기 사이에서 적잖이 괴롭다. 두 세계에 끼어 괴로운 일은 하나 둘이 아니다. 끼어서 살아온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지만.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서 기도를 배우고 영성을 배우느라 많이 괴로운 시간은 논문과 함께 끝내야겠다. 대학원 들어가기 전, 두 세계를 은밀히 오가며 배우고 읽는 것이 은근 짜릿했었는데 말이다. 학기가 거듭될수록 쪼개진 두 교회 사이에 앉아서 이쪽도 좋고 저쪽도 좋은, 이쪽도 어이없고 저쪽도 어이없는 시간을 사는 게 여간한 일이 아니다. 영성과 영성사, 신비신학과 신비주의 역사를 배울수록 "교회는 하나다!"를 외칠 수밖에 없는데, "한 분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데. 역설적이게도 수업에 앉아 있자면 하나의 교회가 얼마나 골이 깊게 갈라져 있는지가 몸으로 느껴진다. 교회가 하나인 것을 확인하는 수업일수록 오늘 이 순간 분열의 아픔이 더 크게 느껴져 몸이 긴장하고 만다. 몸의 긴장을 마지막 학기나 되어서 알아차리고 있다. 이 긴장조차도 누려야지, 하며 다스리고 있다.
논문, 포기하지 않고 쓸 거예요(쓰고 싶어요). 조용히 기도의 응원을 보내주소서, 벗들이여.
나는 김치콩나물칼제비를 했다. 떡볶이의 분식스러움과 김치찌개의 정통집밥스러움,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하였다. 두 사람 모두를 만족시키고 나는 정말 행복했다. 일타쌍기! 한 메뉴로 두 사람을 기쁘게 하는 신공이었다. 이런 메뉴를 생각해 내다니. 나는 요 (리) 천 (재) 인가?
좋지? 맛있지? 나 기발하지?
내가 먼저 설레발쳐서 진심 어린 찬사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곤 하지만, 내가 좋으니 됐다.
그런데 이 TJ(사고/판단형) 두 사람아! 당신들은 모른다. 내가 수업에 읽어가야 할 분량이 얼마나 많았는지. 다 읽고 숙지할 시간이 부족한 것 같아 얼마나 조바심이 나는지. 논문도 좀 써야 하는데, 손도 못 대겠네 싶은 좌절도. 당신들은 모른다. 그러나 책 딱 덮고 벌떡 일어나 김콩칼수를 만들었다. TJ 느그들은 상상 못 할 헌신이다. 어거뚜라!
넷이 복닥거리다 셋이 남았는데, 하나가 나간 자리가 '하나' 이상으로 크게 느껴진다. 사람 마음이 다 비슷해서 각자 현승의의 빈자리를 마주하다 보니 셋이 뭔가 끈끈해지는 느낌이다. 이런 시간도 금방 지나고 익숙해지겠으나. "동아리 면접 봤대... 얘기 들었어?" 현승이로부터 오는 작은 소식 하나에 연연하는 것으로 하나가 되기도. "엄마, 나 4월에 포항에 한 번 가려고. 현승이가 혼자 코인노래방 갔대... 나 너무 마음이 그래." 자기 방식대로 그리워하기도.
채윤이는 제 생애 최초에 경험했던 가족을 다시 누리는 것일 수도 있겠다. 현승이는 태어나보니 누나가 기본설정이고 네 식구가 기본값이었지만, 채윤이에게 현승이는 자기 자리를 뺏으며 들어오는 존재였고, 엄마 아빠를 독차지하며 누렸던 세계를 뒤흔든 빌런이었으니... 무슨 이유에서든 셋이 끈끈하고, 그러다 보니 멀리 있는 현승이와도 더 깊이 연결되는 느낌이다.
끈끈하다 해도 각자 바빠서 룸메 셋이 사는 느낌이지만 말이다. 출근하고 학교가는 종필과 채윤이 텀블러에 커피를 담아 나갔는데. 텀블러 뚜껑을 닫으며 채윤이가 그런다. "아, 이렇게 가져가면 눈물 날 것 같은데..." "왜애?(또 현승이 생각?)" "아니, 어렸을 때 엄마가 물이나 음료수 같은 거 싸주면 학교에서 먹을 때 눈물 날 것 같았어. 엄마가 보고 싶어서...."
아... 이 말에 내가 눈물이 나네. 우리 엄마 버튼이 눌린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없는, 내가 모르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기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의 인생이 있(었고, 있고, 있을 것이)다는 것의 현타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