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꿈과 영성생활> 집단 여정에서 이런 질문이 나왔다. "내게 교회란?" 질문을 가져온 분의 답은 "엄마 아빠를 대신한 곳, 엄마 아빠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준 곳"이라고 했다. 교회 아닌 어디에서도 주목받거나 칭찬받지 못했는데 칭찬받고 사랑받았던 곳이라고. 비슷한 답을 하는 분들이 있었고, 내게도 교회는 그런 곳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절을 보낸 교회에 다녀왔다. JP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고, 두 아이를 낳은 곳이다. 두루두루 큰 사랑을 받았고 열정을 다해 사랑했던, 그러다 깊이 절망하고 상처를 안고 떠나온 곳이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늘 예측불가, 설명불가라... 좀 놀라운데 그냥 "다녀왔다"라고 쓰겠다. 모님이 강의하러 오신다고 다른 교회 다니고 있는 부러 수련회에 참석해 준 친구들이 큰 격려가 되었다.
그 시절, 사랑을 많이 주셨던 권사님들 뵈어서 울컥했다. 사랑받았던 기억이 되살아 났다. 권사님 아이들을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는 내 나이 스물 여섯 청년 시절에 만났으니, 얼마나 긴 세월인가. 스물여섯 청년이었던 나를 예뻐하시더니 권사님들을 이제 곧 스물여섯이 될 채윤이도 알고 기억한다. 제 나름의 사랑받았던 기억으로.
돌아보면 교회를 확신하는 시절이었다. 확신의 근거는 사랑받고 사랑했던 사랑의 유통이었고. 한때 받은 사랑이 몸에 축척되어 있어서 교회를 확신할 수 없던 메마른 날에도 잘 견딜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확신'이라 쓰고 '사랑'이라 읽어야 하는 건가. 확신 없는 날을 견디게 한 것이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기억이라면, 확신도 사랑이고, 확신 없음도 사랑인가?
<새롭게 하소서>에 출연한 영상이 있다. 6월에 찍고 8월에 방송에 나왔는데, 어쩌다 "교회의 딸"이란 캐릭터를 잡았다. 태어나보니 교회의 딸. 교회에 대한 확신은(사랑은) 아버지의 딸로 태어난 그 순간부터였나. 나는 교회의 딸의 운명을 안고 태어난 것인가? 오글거려서 제대로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영상을 뒤늦게 공유해본다.
아침 묵상과 기도를 마칠 즈음이면 벌컥, 벌컥, 벌컥 방문이 세 번 열리고 시간 차 공격으로 세 사람이 나온다. 오늘은 두 전사가 참전을 포기하고 현승이만 벌컥, 하고 등장했다. 채윤이는 연습 때문에 학교 앞에 고시텔을 잡아 나갔고 JP는 아직이다. 둘이 마주 앉아서 막 되는대로 아침을 먹었다.
아빠가 오늘 정말 아홉 시까지 자려나? 왜애? 어제 아빠가 그랬잖아. 오늘 월요일이니까 아홉 시까지 늦잠 잔다고. 그으으으....래? (얼음 박스 찾으며... 아드레날린 폭발!) 엄마, 제발... 그냥 조용히 자게 해 줘. (아, 우리 엄마 금쪽이지...) (안 들림)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엄청 큰 소리로 노래하기) 엄마, 하지마아... 아, 아... 말하지 말 걸... 금쪽이...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는데...
아이스라떼와 함께 아침 빵을 다 먹고...
현승아, 엄마가 지금 쌈장에 고추를 찍어 먹으면 어때? 먹어! (금쪽이가 뭘 물어?) 취향 이상하지? 먹어. 느끼하긴 하잖아. 그런데 나도 하나 먹고 싶다. 와아, 맛있네. 고추향이 살아 있네!
디저트는 비싸고 고급진 샤인머스캣.
약간 나사 풀려 금쪽이도 되고, 두서없이 먹고, 아무 말이나 하고 그랬다. 아홉 시까지 자는 걸로 피로가 풀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게도 그런 게 필요한 월요일 아침이기도 하다. 토, 일 이틀 강의가 있었고 토요일 강의는 약간 역사적인 사건이어서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많이 쏟아낸 것 같다. 나사 풀리고 삔또 나간 정신의 아침 식탁 수다로 주말 피로 풀고 새로운 한 주 시작한다.
이우교회 목사님께~~ 저는 이 동네에 사는 기독교인입니다. 혹시 주일을 위해 준비하시는 것 같아 커피 2잔을 동반했습니다. 드시고, 하나님 축복받으세요. 감사드립니다...
토요일 오후에 교회 단톡방에 사진이 한 장 올라왔다. 교회 청소하러 가신 집사님께서 발견하고 찍어서 올리신 것이다. 동네 교회 알지 못하는 목사에게 전하는 커피 두 잔이라니. 커피를 사고, 캐리어에 메모를 남기는 정성, 엘리베이터 타고 4층까지 올라와 가만히 커피를 두고 가는 마음이라니. 집에서 설교 준비를 하던 남편이 '존중'에 대해 고민하던 순간이었다고 한다. 갑자기 존중받는 느낌이 들었다고.
이 시대 부끄러운 이름 목사. 수치당하기 딱 좋은, 수치를 당해도 싼 이름이 목사이다. 기꺼이 수치당하고자 하는, 그 부끄러운 이름을 사는 동네 목사에게도 가끔 '존중받는 느낌'이 필요하다. 예기치 않은 어떤 정성이 그 느낌을 배달해 버렸네!
나는 오전 세 시간 줌 강의, JP는 그 시간에 결혼식, 그리고 저녁에는 둘이 함께 장례예배. 이런 일정 사이에 끼인 토요일 오후였다. 빡빡한 일정 속에 오아시스 같은 짧은 만남이었는데... 두리와 영주를 오랜만에 보는 거였다. 얼마나 오랜만인가 하면, 전에 만났을 때는 없던 생명체들이 생겨 인격의 모양을 또렷하게 드러내게 된 세월이다. 두리와 영주는 학부모가 되었고. 현승이를 '내복 왕자'로 기억하는 누나들이 그때 현승이 만한 아이들을 키우고 있으니 흘러버린 이 세월이란. 명일동 빠바 이층에 앉아 소개팅과 결혼을 논하며 막막하던 그 시절을 떠올리자니, 거대한 세월의 몸집과 존재감이다.
우리 교회에서 보기로 했는데. 강의 마치고 이동하는 짧은 순간, 머리에서 불이 날 정도의 회전이었다. 간식으로 뭘 준비하면 아이들의 인기를 얻을 수 있을까? 그 짧은 시간에 말이다. 진심 거의 기도하면서 움직였...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무엇인가를 만나기를! 빵을 사러 갔는데 뽀로로 쿠기가 있는 것 아닌가. 진짜 쾌재를 불렀다. 됐어, 됐어! 뽀로로는 대통령이니까! 처음 보는 늙은 이모로서 인기는 이미 따놓은 거야. 뽀로로니까!.... ㅜㅜ 혼자 행복했던 그 순간으로 족한 걸로. 아이들에게는 심드렁~그.냥.쿠.키...였다. 유아실의 자동차와 장난감의 인기에 지고 말았다. 괜찮아. 상상 속에서 행복했잖아...
그 짧은 시간 많은 주제를 건드려봤다. 학부모 고충, 아이들 성격 이야기, 일하며 육아하는 이야기, 신앙 생활화 공동체 이야기... 영주가 꼭 물어볼 것이 있다면서 요즘 꾸는 꿈 얘기를 했고. 그 끝에 "모님, 제가 결혼하기 전에 모님과 꿈으로 얘기할 때요. 제가 정말 불안해했었잖아요. 그때 모님이 안심하라고, 안심하고 결혼하고 문제가 생기면 모님이 평생 AS 해주시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런 확신을 어떻게 가지셨어요?"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그랬던 것도 같다. 아무리 그래도 평생 AS를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그랬던 것 같다. 그러게... 그 확신이 어디서 왔을까?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고 내내 그 질문이 맴돈다. 아마도 그것은 영주에 대한 확신이었다. 영주 안에 있는 힘, 행복하고자 하고 성장하고자 하는 힘에 대한 확신이었으며, 영주 안에서 영주를 돕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었을 것이다. (물론 예비 신랑을 이미 보았기에 근거가 충분한 확신이기도 하고!) 그 확신 틀리지 않아서 모님의 AS 필요 없이 잘 살고 있으니 할렐루야 아멘이다. 가정을 일구어 잘 살아내는 것이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두리도 영주도 잘하고 있었다. 잠시 만나봐도, 딱 봐도 알 수 있는 무엇이 있다.
두리와 영주의 젊은 날에 함께 했던 시간이 영광이란 생각이 든다. 모님, 모님 하면서 나를 그냥 따르고 좋아해 줬던,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만나줬던 아이들(이 아니고 지금은 어른)이 참 고맙다. "평생 AS!"를 거침없이 남발할 만큼 내게 확신을 줬던 아이들(아니고 아이들의 엄마), 그만큼 나를 믿어 주었던 이들이 참 고맙다. 인생 그럭저럭 기쁘게 살아갈 원동력이 사랑과 신뢰라면, 그 원동력을 빼앗기고 소진되는 곳이 있다면, 빼앗긴 양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양의 사랑과 신뢰 덕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세월이 가고 늙어가는 내가 다시 이렇게 좋다. 내가 확신했던 '너'들이 단단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을 확인하는 기쁨. 참 고마운 '너'들이다.
머리에 까치집 짓고 나와서 밤새 모기 한 마리와 사투를 벌인 이야기를 풀어놓다 갑자기... "엄마, 저기 십자가 위에 새가 앉아 있어. 까마귀... 아니 까치네!" 하고 보니 베란다 앞 커다란 십자가 위에 까치 한 마리 앉았다. "현승이 너 어렸을 적 했던 엉마... 까아치... 엉마 까아치... 그거 한 거지? 그거 어른 버전으로 말한 거지?" 하고 함께 웃었다. 블로그 뒤져보니 현승이 세 살 적부터, 아니 말을 배우기 시작하던 때였다. 서울 하늘에 새가 그렇게 많이 날아다닌다는 것을 처음 현승이에게 배웠다. 요즘 날아드는 새는 내게 하나님의 현존인데. 하나님의 현존을 가르쳐주러 내 인생에 들어오신 영적 스승 두 분.
예은이가 논문을 보내왔다. '우수 논문상'을 받은 논문이다. 우수 논문상을 받았다는데 놀랍지가 않다. 당연히, 예은이가 논문을 썼는데 그 정도 상은 졸업장 받는 일과 다르지 않지! 논문 표지를 보니 아득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잊고 싶은 부끄러움, 내 논문 생각이 난다. 예은이가 내 후배로 졸업을 한 것이다. 벌써 후배가 되었지만, 예은이의 입학이 썩 기쁘지가 않았었다. 엄마 돌아가시고 바로 팬데믹으로 멈춘 음악치료를 영영 멈추기로 마음먹었다. 치료를 접으니 20년 넘게 밥줄이었던 악기들이 처분 대상이 되었다. 당근이든 어디든 팔고자 하면 팔 수 있겠으나, 마음과 몸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생각나는 후배가 있었고, 어쩌면 예은이에게 그대로 다 물려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예은이 입학이 기쁘지 않았던 이유로 덥석 주지 못하고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예은이를 만난 게 내 나이 스물여섯, 예은이는 아마 다서 여섯 살이었을 것이다. 어찌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또 나를 어찌나 잘 따르는지. 다이어리에 예은이 사진을 끼워 넣고 다녔다. 전교인 수련회에 가면 엄마 대신 내 옆에서 잠을 자려했고, 청년부 모임에 따라오고, 내 옆에 앉아 어른 예배를 드리기도 했었다. 유초등부에 들어왔는데, 예은이를 성가대 시키고 싶어서 성가대원 학년 기준을 낮춰 버렸다. 3학년(4학년?)이 되어야 성가대를 세웠는데 이런저런 이유를 달아 1학년으로 낮췄던 기억이다. 내 결혼식 축가에서는 귀엽고 깜찍하게 솔로를 했다.
중등부가 된 어느 날 학교 숙제라면서 나를 인터뷰하겠다고 찾아왔다. 직업에 관한 숙제였는지, (당시에는 흔하지 않았던) 음악치료사에 대해 조사하겠노라고. 교회 본당 구석에서 인터뷰당했던 기억이 있다. 예은이는 음악도 공부도 다 잘했다. 음악을 하고 싶어 했는데, 진로 문제로 만나서 얘기를 나눈 기억도 있다. 공부를 잘했기에 좋은 대학에 좋은 학과에 진학했고... 학부를 마치고 뚝딱뚝딱하더니 덜컥 음악으로 대학원에 합격해 버렸다. 쉬운 일이 아닌 게 예은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논문을 썼는데 우수 논문상 받았다는 것이 당연지사처럼, 그 어려운 일이 예은이니까 가능하구나 싶었다. 그렇게 석사를 마치더니 어느 날 갑자기 음악치료대학원에 입학했다는 것이다.
공부도 잘하고 음악도 잘하는 예은이가 왜 하필 음악치료? 하는 마음이었다. 공부 못하고 음악 못하는 사람이 음악치료를 한다는 뜻은 아닌데... 나도 공부 잘하고 음악도 잘하는데 음악치료를 한 걸! 내 자신에겐 억누른 어떤 욕망이 투사된 건지 모르겠다. 왜 하필 돈도 안 되는 치료 일을 하려고 해? 공부도 잘하고 음악도 잘하는데 돈이 되는 번듯한 일을 해야지. 아니면, 내 콤플렉스가 투사되었는지 모른다. 노마드 전공 콤플렉스랄까? 예은이는 그러지 말았으면. 뭘 해도 잘할 건데, 한 우물을 파며 보란 듯 번듯한 무엇인가가 되었으면 싶었는지 모르겠다. 음악치료대학원에 가도 안 봐도 잘할 거였고, 당연히 잘했다. 공부와 병행하며 하는 일도 무엇이든 잘했다. 진로나 생의 중요한 일들로 찾아와 얘기 나눌 때마다 진심의 지지와 격려를 주곤 했는데, 음악치료를 시작했을 때는 하라고, 한 우물을 파서 '성공' 하라고 나무라고 그랬던 것 같다.
올 초 어느 날, 치료 악기를 모두 예은이에게 넘겼다. 예은이가 음악치료를 해도 좋고, 다른 무엇을 해도 좋겠는 마음이 되었달까. 인생의 갈림길에서 곁길로 가고 또 새로 난 길로 가면서 예은이 고유의 시간을 살 거라는 믿음의 발로일까 싶기도 하고. 그래도 괜찮다는 마음. 크고 작은 삶의 위기를 겪어내는 모습을 오래 지켜보면서 단단해지고 자기다워지는 예은이를 오래 보아왔기에 물 흐르듯 흘러가다 생긴 마음이다. 어쨌든 아주 가볍게 악기를 넘겼다. 악기로 꾸민 방 사진을 보니 기분 좋은 확신으로 마음이 더욱 편했다.
SNS에서 본 음악치료대학원 졸업식 사진에 뭉클했다. 한 존재를 오래 보고 자세히 보고 깊이 알아온, 먼저 난 사람만이 아는 은밀한 환희 같은 것이다. 논문이 담긴 택배 상자에 이것저것 선물이 함께 담겨왔다. 축하를 받아야 할 사람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해 받으니 이 또한 뭉클하다. 예은이가 처음엔 나를 '정신실 先生님'이라 불렀는데, 어느 때부턴가 '사모님'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청년부가 되었을 때는, 남편이 처음 전임사역으로 청년부 강도사님이었었지. 그러니까 예은이는 남편의 제자이기도, 남편이 아꼈던 찬양팀 리더이기도 하다.
먼저 나고, 먼저 살면서 뒤에 오는 존재들이 자기로 무르익어 가는 것을 보는 것이 큰 기쁨이다. 세월이 가는 것이 참 좋다. 세월과 함께 무르익는 오랜 만남들로 삶의 의미가 새로워진다. 고맙고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예은이에게 한 마디 했다.
<시니어 매일성경>에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이란 제목으로 중년의 영성에 대해 연재하는 글입니다. 3년 연재의 마지막 편 하나를 남겨 두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독자 메일을 받았는데, 여기 등장하는 최 선생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쓰신 책이 있는지 물어 오셨어요. 기분 좋은 메일이었습니다. 이 글은 픽션이고, 최 선생님은 만들어진 캐릭터이니까요.
중년 영성은 노년의 삶에 닿기에 치매, 존엄사 등으로 최근 글을 이어왔습니다. 그리고 이번 호의 주제는 죽음과 애도입니다. 픽션의 장점을 살려 상상력을 발휘하여 '어머니의 죽음'을 그려보았습니다. "엄마 방 엄마 침대에서 편안히 돌아가셨다면, 임종을 지켰다면, 장례식을 제대로 치렀다면..." 그대로 써보았는데 크게 위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쓰는, 내가 바랐던 『슬픔을 쓰는 일』이 된 셈인데... 어머니와의 마지막 시간이 내가 바랐던 방식이었다 해도 그리움과 슬픔의 처절함은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싶네요. 마지막 사랑은 정말 애도인 것 같습니다.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 17
조앤 디디온(Joan Didion)의 말처럼 모든 재난은,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죽음은, 평범한 순간에 들이닥친다. 엄마가 돌아가셨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휴대폰을 열었는데, 동생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예배 마치면 바로 전화 줘.” 평범한 순간에 평범하달 수 있는 메시지에 뭔가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누나, 엄마 돌아가셨어.” 평생 가장 두려웠던 그 말이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그리고 다음 상황들은 또렷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사천리로 장례식이 치러졌고, 그렇다, 치른 것이 아니라 치러진 것이다. 어느 순간 울고, 조문객을 맞아 대화를 나누며 어느 순간 웃기도 하고 그랬다. 호상이라고, 장례예배가 이렇게 은혜로울 수 있냐는 말도 기억에 남는다. 입버릇처럼 기도하다 돌아가시면 좋겠다 하셨는데, 주일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중 숨을 거두셨다. 폐렴으로 며칠 입원 후에 퇴원하셔서 한 달여 스르르 생기를 잃으시다 편안히 돌아가셨다. 미리 예행연습이나 해둔 것처럼 일사천리로 장례식을 치르고, 조문객들에게 감사 인사와 메시지를 보내고 유품을 정리하기까지 일주일, 딱 일주일 걸렸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던 듯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엄마가 돌아가셨다
뺨을 스치는 바람이 서늘하다 싶어 날을 헤아려보니 벌써 두어 달이 지났다. 여름의 뜨거움이 언제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최 선생님을 만나기로 했다. 장례 후 한두 번 메시지를 나누기는 했는데, 만나 뵐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밥 먹게 한 번 오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짬이 나질 않았다. 일이 많았다. 그러고 보니 최 선생님뿐 아니라 일 외에 누구를 만난 기억이 아득하다. 정말 지나시는 길인지, 일부러 하신 발걸음인지 모르겠는데 우리 동네 지하철역에서 만나자고 하셨다. 일 마치고 집 앞에 주차하고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오랜만에 걷는 동네 가로수 길이다. 나, 정말 일만 했구나! 초록이 옅어지고 노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나뭇잎들이 어쩐지 쓸쓸해 보인다. 금세 단풍이 들겠구나, 싶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 지하철 개찰구 앞에 섰다. 이른 퇴근 시간이라 오가는 사람이 많다. 멍하게 불을 바라보는 불멍, 파도를 바라보는 물멍, 지하철 도착하는 소리 후 밀려 나와 흩어지는 사람들 쳐다보는 사람 멍도 넋깨나 앗아가는 일이다. 선생님이 코앞에 다가오시도록 알아보질 못하고 있었으니.
어이구, 이 사람. 왜 이리 말랐어?
어머나, 선생님. 어디서 오신 거예요? 제가 계속 보고 있었는데...
아, 어디서 오긴? 저어~ 올 때부터 날 보고 있던 게 아니었어? 어쩐지... 그나저나 어찌 이리 말랐누! 이 사람... 참.
아니에요. 워낙 늘 말라 있어서 오랜만에 보시면 새롭게 그렇게 보이시는 거예요. 일단 나가세요. 선생님 점심 몇 시에 드셨어요? 이른 저녁 하실까요? 평양냉면 좋아하신다고 하셨죠? 나가면 바로 정통 평양냉면집 있는데요.
아니야, 고기 먹읍시다. 내가 정 선생 몸보신시키러 왔어. 소고기 먹을까? 삼계탕? 그래 삼계탕 좋겠다. 어때? 이 동네 삼계탕집이 있겠지?
아, 네... 저는 뭐든지.
미리 식당을 좀 생각해둘걸. 모처럼 뵌 것이고, 처음으로 우리 동네에 오셨는데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일 마치고 그럴 여유가 없었다. 늘 여유 있는 시간에 느긋하게 뵙던 터라 좀 낯선 분위기이기도 하다. 게다가 선생님께서 평소답지 않게 적극적이시니 죄송한 마음 주저앉히고 삼계탕으로 식사를 하고, 조금 번잡한 대형 카페에 가 앉았다.
선생님, 감사해요. 그리고 죄송해요. 엄마 장례식 때 마음 표해주셨는데, 뵙고 인사한다는 게 시간이 이렇게 가버렸네요. 제가 가서 뵈어야 하는데, 직접 오시고.
죄송은 무슨! 메시지도 주고 통화도 했잖우. 그래, 몸은 좀 괜찮아? 밥은 잘 먹고?
그럼요. 밥 잘 먹고요. 잘 지내고 있어요. 일이 좀 많아져서요. 정신없이 지내고 있네요. 선생님도 별일 없으시죠? 어.... 그 개정판 책은 잘 나가고 있나요?
그거야 뭐, 교과선데. 뭐. 늘 나가는 만큼 나가겠지. 정 선생 덕에 죽기 전에 옷 잘 갈아입혀 나와서 고마울 뿐이고. 아니, 무슨 일이 그렇게 많아졌어?
어쩌다 그렇게 됐네요. 기고하는 글도 마침 끝났고. 글이 통 써지질 않아서요, 대신 치료를 좀 늘렸어요. 아이들 대상 치료라는 게 몸을 많이 쓰게 되잖아요. 일 마치고 집에 오면 몸이 녹초가 되어 저녁 먹으면 금세 자고... 뭐 그렇게 지냈네요. 시간이 이렇게 간 줄도 몰랐어요.
그렇구만. 49제가 지났나? 아, 선생님 네는 그런 거 안 따지지?
네, 그럼요. 두어 달 지났네요. 한창 더워지기 시작할 때였는데... 아까 집에 차 두고 걸어오는데 가을바람이 느껴지더라고요. 더위가 언제 갔나 싶어요.
그래, 마음은 좀 어때?
(마음, 마음이라... 마음이 뭐지?) 마음이요? 음 그냥 뭐... 질문이 낯설게 느껴지네요. 그러게요. 왜 이러죠? 아, 죄송해요. (난데없는 눈물에 당황스럽다.)
죄송하긴. 괜찮아요. 괜찮아.
예상했던 것 같다. 선생님을 만나면 이런 질문을 하실 거라는 것을. 그래서 만나고 싶지만 피하고 싶기도 했고. 선생님을 마주하면, 뭔가 불편한 것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었다. 불편하지만 중요한 것을. 식사하면서는 부러 음식에 집중했고, 선생님을 똑바로 바라보고 눈을 맞추지 못했다. 그럼에도 특유의 낮고 진중한 목소리, 흐릿한 눈으로 힘없이 바라보면서 동시에 어딘가를 꿰뚫는 눈빛에 자꾸 무언가 무너져내렸다. 금이 간 항아리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 느낌의 눈물이 자꾸 조금씩 흘러나왔다. 애써 막고 있었던 것 같은데, 막아두고 잘 지내고 있었는데... 이러고 바라봐주시는 선생님 앞에 계속 앉아 있으면 눈물의 항아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다. 왁자지껄한 대형 카페에서 터지면 대형사고가 될 테니 일단 밖으로 나왔다. 바로 옆에 있는 교회에 공원 같은 선교사 묘원이 있다. 늘비한 비석이 바라뵈는 벤치에 가 앉았다. 저녁이 되어 더 서늘해진 바람이 금이 간 마음, 그 틈 사이로 불어드는 것 같았다.
엄마 이야기를 하고 싶다
선생님. 저 잘 지내고 있어요. 어... 아니 잘 지내고 있었어요.
응?
걱정하셨죠? 엄마 돌아가시고 생각보다 잘 지내요. 거의 울지도 않았고요, 열심히 일하면서 잘 지내고 있어요. 아니... 있었어요.
그래. 대견하네. 그런데 갑자기 잘 못 지내게 됐어?
그러니까요. 선생님을 뵈니까 갑자기 잘 못 지내게 된 것 같아요.
어이쿠, 내가 잘못했네. 이런! 노인네가 잘못했구만.
와, 빠른 인정! 바로 인정하시기예요? 하하, 이러시면 재미 없는데...
우리 정 선생 웃었네! 울다 웃었네... 이거. 허허.
저 정말 안 울고 잘 버텼는데, 어떻게 선생님을 뵙자마자 이러죠? 선생님 정말 묘한 분이세요.
뭘, 묘하기는... 정 선생이 내가 믿을만 한가 보네. 고맙네.
그런가요? 선생님, 그럼 저 울리러 오셨어요?
몸 보신시키러 왔다니까. 울어야 할 명목이 필요했다면 얼마든지 이유가 되어 드리리다. 허허. 울고 싶으면 울어, 정 선생. 괜찮아.
하이고, 울라고 하시니까 눈물이 쏙 들어가는데요! 헤헤.
허허허, 이제야 내가 아는 정 선생 같네 그려.
지난 두어 달이 없었던 시간처럼 느껴지네요. 가끔 무심코 엄마한테 전화해야지, 할 때가 있는데. 아, 엄마가 안 계시지, 하는 현실 자각이 오자마자 바로 생각을 멈춰 세웠던 것 같아요. 엄마 돌아가신 게 믿어지지 않는다, 어떻다 이런 생각조차 떠올리지 않았어요. 그게 무엇이든 떠올리지 않기 위해, 오직 덤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나 봐요. 감정을 억압하지 않고 만나줘야 한다는 이론을 너무 잘 알면서 말이에요.
그럴 필요가 있었을 거야. (따뜻하게 등을 쓰다듬으시며) 정 선생, 혹시 어머니 얘기를 하고 싶어요?
아... 엄마 얘기요? 엄마 돌아가신 얘기요? 정말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는데, 믿어지지 않게 말 그대로 예배드리다 돌아가셨죠.
그렇다고 했지? 기도를 많이 하셔서 그런가 보다. 음... 어머니 돌아가신 얘기만 말고, 그냥 어머니 얘기, 말이야. 하고 싶어요? 정 선생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어?
엄마요? 그냥... 엄마... 이야기요?
다시 눈물이 솟구쳐 말을 이을 수가 없다. 엄마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하고 싶은가? 그렇다. 엄마 이야기를 하고 싶다. 정말 듣고 싶은 질문이었던 것 같다. 돌아가시던 며칠에 대해선 장례식장에서부터 시작해 수십 차례 말했다. 그리고 입을 닫았다. 공식 장례 기간이 끝나고, 며칠 감사 인사를 하고 나니 더는 할 얘기가 없어졌다.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어요?” 물어주시니 엄마의 부재가 아니라 존재했던 엄마가 떠올랐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엄마 이야기를 했다. 내 어릴 적 엄마와 관련된 장면, 노인이 된 엄마, 대학입학 시험 치던 날의 에피소드, 그러다 갑자기 중고등학교 시절 사춘기 얘기로 가기도 하고. 무슨 얘길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는데 간간이 선생님께서 질문해 주시고, 고개를 끄덕여주시고, 같이 울어주시기도 했다. 그새 해가 지고 서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말인지 울음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쏟아놓음이 그치고 조용해졌다. 엉엉 울진 않았는데, 한참 제대로 통곡하고 난 느낌으로 뭔가 개운해지고 믿어지지 않게 말짱해졌다. 날이 어두워져 시야가 함께 흐릿해져 다행이었다. 말짱해진 마음과 고요가 덜 민망해졌으니.
개와 늑대의 시간이네. 알아요? 개와 늑대의 시간.
아... 알죠. 개늑시요. 어둠이 내려와 개와 늑대가 구별되지 않는 시간, 낮과 밤이 교차하는 애매한... 지금 시간을 말하는 거죠.
그래, 애매하게 젊을 때는 이 시간이 싫었는데, 이제는 좋더라고.
저는 애매하게 젊어서 이런 시간 별론데요. 헤헤. 지금은 좋네요, 울어서 팅팅 부은 얼굴도 안 보이고... 민망하고 창피한 것도 좀 숨겨주는 것 같고요. 죄송해요, 선생님.
뭐가 이렇게 자꾸 죄송해?
자꾸 울어서요. 모처럼 뵀는데, 선생님까지 우울하시게... 그런데 저 정말 엄마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 봐요. 누군가 물어주길 기다렸던 것 같아요. 감사해요, 선생님. 울어보니 알겠네요. 울지 않으려고, 엄마 생각 안 하려고 얼마나 힘을 주고 버텼는지... 이제야 알아져요.
죄송한 일 아닌 거 알면서! 이거 봐, 울고 나니 정 선생다운 표정도 말투도 나오잖아. 얼마나 힘을 주고 버티고 있는지 아까 지하철에서 만났을 때 그냥 느껴지더라.
엄마 돌아가시는 상상을 수십 수백 번 했거든요. 아마 아버지 돌아가신 그때부터였을 거예요. 아, 죽음이란 이런 거구나! 이렇게 갑자기 덮치는 거야. 어린 마음에 두렵기도 하고. 내가 자꾸 상상하고 마음으로 대비하면 이 두려운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 같은 생각에 엄마가 어디 가서 조금만 늦어도 최악을 상상했어요.
그랬구나.
결국, 장수하셨죠. 그래도 그 두려움은 늘 있었던 것 같아요. 밤에 잘 때도 휴대폰을 무음으로 해놓지 못했어요. 혹시 엄마 어떻게 되셨다는 전화가 올까 봐요. 그렇게 준비하고 있던 이별이니 슬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나 정 선생이 한 말 중에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는 말이 있는데. 치료실에 오는 사람들은 죄다 울러 오는 것이라며? 언젠가 충분히 울지 못했던 그것이 오늘의 고통으로 돌아온 것이라며? 감정은 충분히 느끼고 흘려보내면 더는 없는 것이 된다고 우리가 자주 하던 얘기잖아.
네... 그러니까요. 말만 번지르르했어요. 막상 닥치니 감정을 충분히 느끼도록 허락한다는 것이 쉬운 게 아니더라고요. 저는 사람들 앞에서 슬픔을 보이는 것이 정말 부끄러워요.
아아... 슬픔을 내보이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그러게요. 어떻게 될까요? 그냥 저를 싫어할 것 같아요. 아니, 가엾게 여길 것 같은데... 그런 취급당하는 것이 싫은가 봐요. 그러네요. 아버지 돌아가시던 때가 생각나요. 장례 치르고 첫 등교한 날 장면이 늘 마음에 남아 있거든요. 제가 워낙 까부는 아이였는데, 그 어느 때보다 밝은 얼굴로 교실로 들어갔어요. 친구들이 저를 가엾게 여길까 봐요. 자라면서도 늘 그랬던 것 같아요. 슬프거나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아버지 없는 아이라서 저래’, 하는 소리 들을까 봐요. 그래서 애써 더 밝은 사람이 되려고 했던 것 같고요.
그렇구나...
애도에는 완성이나 종결은 없다
선생님, 그런데요... 선생님의 ‘그렇구나’에 무슨 마법이 있나 봐요. 자꾸 묻지 않으신 얘기까지 하게 되네요. 후후.
어이구, 그랬으면 좋겠네. 마법이라도 있으면. 정 선생, 이제 마음을 풀어놔 줘. 울고 싶을 때 울고, 엄마 생각해요. 죽음으로 관계가 끝나는 것 아니잖우? 어머니와 새롭게 만나야지.
네? 새롭게요? 천국에서 만날 거란 말씀이세요?
물론! 천국에서 만나겠지. 여기서도 다시 만나고. 계속 더 깊이 사랑하고.
아... 무슨 말씀인지... 여기서 만난다니요?
마지막 사랑은 애도가 아닐까 싶어. 떠난 부모님 사랑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애도라고. 아다시피 내가 남편과 어머니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천국에 보내드렸잖우. 그 덕에 신앙을 가지게 됐고.
그러시죠. 참.
벌써 20년이 된 일인데... 그게 아직도 슬퍼요. 살다 보니 떠난 남편과 부모님과 지금의 나를 연결하는 것은 다름 아닌 슬픔이야. 사랑이라고. 자칫 그래서 슬픔에만 빠져 있을 수도 있겠지만,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면 슬픔이 그저 피해야만 하는 것이 아님을 이론이 아니라 체험으로 알게 됐어.
아, 그렇죠. 슬픔과 그리움이 사라지진 않죠. 저 역시 어릴 적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이 다 사라져서 이렇게 살아온 건 아니니까요. 그러네요.
자크 데리다(Jackie Derrida)는 애도에는 완성이나 종결은 없으며, 애도는 실패해야, 그것도 잘 실패해야 성공이라고 하는군. 내 인생은 그때, 20여 년 전 죽음의 경험 전과 후로 나뉘는데. 그 시절 지나고는 죽음, 애도, 같은 것을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아, 그래서 선생님 논문들이...
맞아. 그때 후로는 내내 사별 상담과 애도 상담에 대해서만 연구했어요. 언젠가 파리 여행 중 어느 미술관에서 외젠 뷔르낭(Eugene Bumand)의 「무덤으로 달려가는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란 그림을 본 적이 있어.
저 알아요. 그 그림 알아요. 어? 선생님 책상에 작은 액자로 놓여 있는 것 아닌가요?
허허, 맞아. 눈썰미도 좋아. 그때 사 온 거예요. 암튼 베드로의 모습이 충격적이었어. 그림을 보는 순간 애도라는 말이 딱 떠오르더라고. 놀람과 슬픔이 가득한 눈동자, 때가 꼬질꼬질한 손과 손톱은 물론 검은 옷까지요. 부활의 아침, 그 순간을 맞기까지 예수님 사후 사흘을 어떻게 보냈을까 상상이 되는 거예요. 사랑하는 선생님이 돌아가셨어. 수제자로서 마지막 임종과 장례식을 지키지도 못했을뿐더러 오히려 배신자로 끝이 났죠. 그 얼마나 혼란스러운 슬픔일까!
아... 그런 상상은 해보지 못했네요. 수난과 부활 사이의 시간을 상상해본 적이 없어요.
그렇지? 내가 철없는 신자라 성경을 보며 이런저런 상상력을 펼쳐서 그런가 봐. 암튼, 그 그림 앞에서 그냥 눈물이 나더라고. 많이 울었어. 몸의 부활을 확인시키고 다시 떠나신 그 선생님의 부재가 오히려 더 생생한 가르침으로 남았을 것 같아. 3년을 몸으로 함께 하며 들은 선생님의 목소리, 표정을 떠올리며 미치도록 그리웠겠구나 싶어. 그럴수록 복음 전하는 일에 담대하게 매진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재에서 베드로의 사랑은 더 깊어진 것이야.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깨달음 또한! 빈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베드로가 그렇게 읽히더군.
아! 선생님이 떠나신 빈자리에서 제대로 수제자가 되었군요. 베드로는.
나는 그렇게 읽히더라고. 애도는 완성이나 종결이 없다는 말도, 그분의 못다 이룬 삶과 사랑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으로 알아들어요. 어머니의 빈 자리에서 온전히 슬퍼하며 사랑을 멈추지 말아요.
엄마에 대한 사랑이군요. 애도는... 마지막 사랑은 애도라니...
그래, 그러니 슬픔을 틀어막지 말구려. 한 번 울면 멈추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그럴 수도 있어요. 우리가 머리로 아는 것보다 우리는 훨씬 더 눈물을 부정적으로 여기고 있다니까. 하긴 뭐, 문화가 그런 문화니까. 상담하는 우리 자신도 정작 내 눈물에 대해서는 이렇듯 미숙하니 말이에요. 애도 전문가 퀴블로 로스(Elisabeth Kübler-Ross) 여사가 그랬다고. 흘리지 못한 눈물은 슬픔의 샘을 더 깊게 채운다고. 30분 동안 울어야 할 울음을 20분 만에 그치지 말아야 한다고. 눈물이 다 빠져나오면 스스로 멈춰. 정 선생, 어머니와의 마지막 사랑을 잘 해나가. 나는 우리 아들과 손녀들이 내가 떠난 자리에서 충분히 울어주길 바래요.
네, 선생님 그럴게요. 베드로의 이야기가 크게 위로가 되네요. 감사해요, 저 이제 힘을 내서 울 만큼 울게요. 더는 울 필요가 없을 때까지 용감하게 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선생님과 헤어져 다시 집으로 걷는 길, 뭔가 마음이 묵직하고도 홀가분하다. 엄마를, 아니 엄마를 향한 마음을 느껴본다. 아직 어떻게도 말할 수 없는 띵하고 얼얼한 아픔이다. 메멘토 모리! 최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진리이지.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더는 관념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엄마를 기억하는 것이고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마지막 사랑이다.
아침 먹고 앉아 커피 마시며 노닥거리고 있는데 현승이가 가스레인지 불을 켜 프라이팬을 달구기 시작했다. 냉동 볶음밥을 만들어 점심 도시락을 챙겨 나가려는 것이다. 알아서 스스로 제 먹을 것 챙기는 뒷모습에 어찌 저릿하게 마음 어디가 아픈 것이냐. 수능 접수를 하고 나서 인지 긴장하고 위축된 등짝이 눈에 어른거려 온종일 둔탁한 통증이 가슴에서 가시질 않았다. 스터디 카페에서 돌아와 배고파 죽겠다는 현승에게 해줄 수 있는 게 기도 밖에 없어서 명란계란말이를 했다. 고기에 파김치만으로 좋아했겠으나, 냉장고 뒤져서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감동을 주고 싶었고, 그 감동 뒤에 "엄마는 정말 네 편이야!" 응원도 보내고 싶었고, 엄마가 바라는 건 너가 너 자신이 되어 행복한 것이라는 사랑을 전하고 싶었다. 그게 전해져 봐야 오늘 당장 지고 있는 삶의 무게와 부담을 더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나 싶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2023년 뜨거운 여름을 더욱 뜨겁게 했던 교회 수련회 '이우 가족 힐링캠프'를 마쳤다. '힐링 캠프 in 힐링 캠프'라는 프로그램을 맡아서 그 준비로 조용히 바쁜 몇 주간을 지냈고. 비밀에 부친 프로그램 진행을 위해 역할을 맡은 분들과 열세 개의 단톡방을 운영하며 준비하면서 "나 이벤트 회사 실장님 같애" 농담도 했는데. 잘 마쳤다.
'상처 입은 치유자'가 수련회 보이지 않는 주제였다. 내가 맡은 '힐링캠프in힐링캠프'가 그랬고, 남편의 설교도 가만 톺아보면 내내 그 얘기였다. 내 상처가 완전히 다 낫고 해결되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상처 치유를 위해 내 마음을 잇대는 것이 오늘 우리를 초대하시는 자리이구나! 생각하게 된다. 강의에 가끔 인용하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랍비 요쉬아 벤 레비는 랍비 시메론 벤 요하이의 동굴 입구에서 예언자 엘리야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엘리야에게 물었습니다. “메시아가 언제 오실까요?” “가서 그분에게 직접 물어보시오.” “그분은 어디 계십니까?” “성문에 앉아 계십니다.” “그분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습니까?” “그분은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앉아 계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를 한꺼번에 다 풀었다 다시 싸매지만, 그분은 한 번에 한 군데씩 상처를 풀었다 다시 싸매십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아마 내가 필요하게 될 거야. 그때 잠시도 지체하지 않기 위해 나는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만 해’라고 혼잣말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저 커다란 그림 <탕자의 귀향>은 어떻게 하다 저기 걸려 있게 되었는지 정확히 모르겠다. '탕자의 귀향'으로 연극을 한 조가 있었는데, 그 조에서 걸어 놓으신 건지... 헨리 나우웬 신부님이 저 그림 하나로 쓴 <탕자의 귀향>은 상처 입은 치유자를 연상시키는 또 하나의 서사인데 말이다.
그 그림 아래에서 노는 아이들! 수련회의 꽃은 역시 아이들이었는데. 강당 한쪽에 돗자리가 깔려 있고, 아이들은 저기 앉아 놀다가, 뭐든 따라 하다가, 뒤에 넓은 공간에서 뛰다가... 조에서는 마스코트 역할을 하면서 생기를 불어넣기도 하고. 아이들 생각만 하면 사랑이 차올라 내 입술을 깨물게 된다. 하필 저 그림 밑에 아이들 자리가 있다. 상처 입은 치유자의 그늘에서 사랑받으며 자라는 아이들! 이런 사진을 건지다니. 정말 멋진 2박 3일의 시간이었다.
광복절 휴일. 전날 월요일에 '놀월 안식일' 루틴으로 놀았는데 아이들이 각자 공부로 바쁘니 연이어 이틀을 둘이 놀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 영화 저 영화를 마음으로 전전하다 그냥 집에서 각자도생 휴일을 보내기로 했다. 수련회를 앞둔 터라 부담 때문에 놀아도 노는 게 아닐 테니. 각자 안방에서 거실에서 할 일을 하다 끼니때가 되면 약속이나 한 듯이 일어나 식탁 근처를 어슬렁거린다. 어제 남은 떡볶이와 순대로 순대볶음 만들어서 한 끼 먹고. 또 냉장고 털어서 카레로 한 끼 먹고. 따로 또 같이 제각각 모양의 유리잔에 아이스 핸드드립 커피도 한 잔. 혼자인 듯 둘이 같이, 둘인 듯 혼자서 휴일 하루 잘 보냈다.
퇴촌에 드라이브 갔다가 K 목사님 밥 사주고 올까? 오케이! 오늘 안 된다네. 남한산성 시장에 김치 사러 갈까? 오케이! 그냥 카페 갈까? 오케이! 와아, 이건 사진 찍으라는 프레이팅이네.... 찰칵찰칵... 찰칵... 아, 잠깐 또 찰칵... 잠시만! 찰칵... (촬영 끝나도록 하염없이 기다려 줌) 수련회에서 내가 맡은 프로그램 의논 좀 할까? 들어볼래? 오케이! 안 되겠다, 그냥 책 보자. 오케이! 에어컨 춥다. 갈까? 오케이! 돌고래 상가 가서 반찬 살까? 오케이! 기름 넣고 세차할까? 오케이! 저녁은 벽산아파트 장에서 떡볶이 사서 먹을까? 오케이! 나 떡볶이 사는 동안 세탁소에서 수선한 바지 찾아줄래? 오케이! 애들 삼겹살 숙주볶음 해주려고. 숙주 반 봉지만 씻어 줄래? 오케이!
기본적으로 안 되는 것이 없음.
당신 참 온유하고 수용적인 사람이야. 뭘 말하면 안 된다는 게 없어. (욕구가 뚜렷하고 안 되는 게 많은 나로서는 존경스럽지,라는 말은 하지 않음) 기본적으로 성찰적이고. 그래서 보통 사람, 보통 남자와는 차원이 다른 훌륭한 사람이야. 그런데 중년 고개를 넘어가면서 보니까, 위험한 지점이 있더라. (가끔 벽처럼 느껴진다는 말은 하지 않음. 아슬아슬했는데 '위험한 지점' 정도의 표현을 찾아냄) 중년의 고개를 넘으면 누구든 내 성격의 빛이 아닌 그림자를 마주하고 살아야 하는데... 그거 진짜 어렵지. 보통 남자들이 그 과업을 제대로 하는 걸 잘 못 봤어. 생애 전반에 착하게 살아온 사람일수록 더 어려운 것 같다. 당신도 그런 면에서는 경각심을 가져야 해. (딸이 그 지점에서 답답해 죽는다는 얘기는 안 했음) 다행인 건 당신이 설교하는 사람이라는 거야. 아니, 단지 설교하는 사람이 아니라 설교한 대로 살기 위해서 애쓰는 목사라는 거지. 설교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기도하기 때문에 뼈아픈 한 발을 내디디는 걸 알아. 당신이 목사인 것이 당신 자신에게, 내게, 아이들에게 진심 도움이 되는 것 같아. 소명 때문에 당신을 바꾸려 애쓰는 고군분투를 아이들도 알아. 당신 좋은 목사야. (좋은 남편이라고는 하지 않았음. 정확히 말하면 목사 점수보다 남편 점수가 조금 높다고 하는 게 좋겠는데... 남편 점수는 유동적이라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데… 요즘 좀 하락세라 각성이 필요하다는 것도 여기서만 밝혀둠)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오랜 시간 혐오한 죄를 회개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십자가 상'에 대한 혐오이지 우리 주님의 십자가는 아니다. 그럼에도 회개한다. 그 불경한 마음을, 그 교만한 냉소를 회개한다. 친히 십자가 지신 나의 예수님께서는 "딸아, 네 마음 다 안다. 그 혐오와 냉소가 나를 찾는 진정한 마음이었던 것을 잘 안다." 하시는 줄 알지만. 그럼에도 머리를 조아려 그 높아졌던 마음을 회개한다.
집 베란다 앞에 거대한 십자가 상이 있다. 어쩌면 저렇게 주변과의 조화를 철저하게 배제한 크기이며 배치일까,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저 십자가 상만 없으면...' 딱 마음에 드는 뷰라고 생각했었다. 이게 날이 갈수록 저 십자가가 좋아지니 무슨 조화냐? 새벽 어스름한 하늘을 배경으로 말없이 섰는 그리 예술적이지 않은 십자가가 자꾸 좋아진다. 십자가는 그대로이건만 계절 따라 날씨 따라 배경이 바뀌어서일 것이다. 폰 카메라 앨범에는 온갖 배경의 저 십자가 사진이 많아서 따로 폴더를 만들어야 할 지경이다.
십자가 상이 싫었지 예수님이 싫었던 적은 없었다. 십자가 상이 견딜 수 없었던 시절, 예수님을 향한 갈망은 더 절절했다고 이제는 더 확신있게 말할 수 있다. 지난주 어느 날,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이 있던 저녁이었다. 아이들과 식탁에 앉아 농담 따먹기 하고 있는데 베란다 밖으로 무지개가 떴다. 천공의 성 라퓨타 구름에서 뻗어 내리는 사다리처럼 기묘하게 떨어지는 무지개라니! 게다가 그 배경으로 구름을 향해 치솟은 십자가라니! 아, 이런 이미지를 나의 하나님 말고 누가 만들어 보일 수 있겠냐고!
남편에게 보냈더니 남편 있는 교회 쪽 하늘도 예사롭지 않은지, 남편은 그 시각 하늘 사진 사진 몇 장을 전교인 단톡방에 올렸다. 저 십자가. 교회 강대상에 놓인 사이즈도 모양도 참으로 적절하고 마음에 드는 십자가가 어떤 저녁 하늘을 배경 삼아 팔을 벌리고 서 있다. 이 역시 창조주 아닌 그 누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이미지가 아니다. 애초 화해한 상태로 가까워지고 멀어지고 하는 나의 예수님과 더 가까워진 저녁이었고, 십자가 상과 다시 화해하는 순간이었다.
베란다 앞 십자가 트라우마(?)는 10 년도 거슬러 올라가는 시절 명성교회 앞에 살던 시절의 것이다. (2011.11.17 명성의 복이여, 영원하라) 매일, 매주일 마주하는 소음과 주차난의 불쾌감이었고, 한창 조용히 치열하던 신앙 사춘기 앓이의 통증이기도 했다. 교회 가야 하는 시간이 되면 배가 꼬여 거실 바닥에 뒹구는 일도 있었고, 어떻게도 해소되지 않는 차가운 분노가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기도 했다. 그래서 실제로 온몸이 아프기도 했었지.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다녔던 교회에는 십자가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건물 안팎으로 십자가가 하나도 없었다! 아, 그랬구나! 그 정신이 좋고 자랑스러웠던 젊은 시절에의 부끄러움과 억울함의 몸부림이었는지 모르겠다.
붉은 네온사인 십자가로 가득 찬, 무덤 같은 도시의 밤 사진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남아 있다. 그 붉은 무덤 십자가로부터 선을 긋고 "다른 크리스천"임을 피력하고파 '지성의 제자도'에 탐닉하던 시절도 있었네.
십자가 없이 내 인생을 설명할 수가 없구나. 십자가는 늘 그대로였는데, 계절 따라 날씨 따라 배경이 바뀌면서 내 마음의 풍경이 달라졌다. 날씨만큼이나 쉽게 바뀌는 내 마음이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대로이건만, 질곡의 시간을 견딘 십자가가 되었다. 주일 예배 찬양 중에 '어저께나 오늘이나'를 부르다 이 가사에 울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