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카눈으로 종일 비가 오는 날에

김치참치 부침개를 했다.

사진으로 보이진 않지만 참치도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기름병을 꺼내 부쳤다.

카놀라유이다.

맛있게 먹었다.

두 번째 판 주문이 들어와서 다시 구우려는데,

아, 들기름! 

들기름은 냉장고에 있어서 바로 생각을 못했다.

두 번째는 들기름에 들들 구웠다.

사진으론 구별되지 않지만 

위는 카놀라유, 아래는 들기름이다.

고소함의 차원이 다르다.

 

사진은 많은 '찐'을 담지 못한다.

 

'음식, 마음의 환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격려를 주고 싶었어  (2) 2023.08.31
채워짐  (0) 2023.08.12
호사, 에어컨 틀고 군고구마  (0) 2023.08.10
설레는 말  (0) 2023.08.10
굽은 자로 직선을 긋는  (4) 2023.07.27

보정동의 인도 음식점 '갠지스'의 맛과 비주얼을 다 따라잡았다. 핵심은 카레 담는 청동 그릇이다. 이것은 정말 따뜻한 관찰력, 세심하고 고요한 사랑의 결과이다. 뭘 먹었네, 어쩌네, 애들하고 농담 따먹기 하는 걸로 연명하는 이 블로그를 진심 다해 찾아와서는 행간까지 꼼꼼히 읽고 기도해 주는 윤선이 작품이다. 지난번 귀국해서 만났을 때 받았다. 보정동 카레 집 사진 올린 것을 보고, 거기서 본 카레 그릇을 찾아 여기저기 발품 팔았을 윤선이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말로 안 해도 느껴지는 그 마음. 언니... 이렇게만 불러줘도 느껴지는 마음.
 
깨끗이 씻어서 싱크대 안에 모셔 두었는데... JP는 “언제 그 그릇에 카레 먹냐"고 한 번씩 채근을 해댔고. 제대로 먹으려고 이렇게 저렇게 찾아보다 인터넷에서 파는 '난'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릇빨 제대로 살려서 카레를 먹었다. 그리고 하루 이틀 지나서 날아온 소식. 윤선 태훈의 책이 드디어 나왔다는 것이다. 그 소식을 남편에게 알리고 다음 날인가, 그다음 날인가. 알라딘에서 두 개의 택배가 왔다. 하나는 김종필, 하나는 정신실. 각각 득달같이 주문한 것이다. 같은 책 두 권을 나란히 놓고 보니, 이게 우리의 마음이구나 싶다. 그나마 윤선이와 나는 책으로 글로 자주 연결되고 있지만 태훈과 종필은 자잘한 소식을 주고받지는 않는다. 하지만  2004년에 가정교회에서 함께 했던 짧은 만남으로 우리 마음 깊이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다. 
 
내가 진심으로 신뢰하는 유일한 선교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JP 역시 태훈이라면 언제든 마음 활짝!이다. 네팔 파송 후 처음으로 귀국하여 했던 선교보고를 기억한다. 그때 내가 썼던 글의 제목도 생각난다. "자랑 없는 선교 보고"였다. 후원이 절실하지만, 후원을 위해서 사역을 팔지 않으려는 마음이 보였다. 잘한 게 왜 없겠냐만, 그저 받아들이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어떻게 고군분투하고 있는지만 말했었다. 잡은 그 자리에서 책을 다 읽었다. 기막힌 사연으로 네팔 언약학교를 맡아 경영하고 어려운 과정에서 하나님을 만나면서 '훈련받아' 좋은 선교사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네팔 선교사로 현장에서 훈련받기 전부터 이들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정직한 사람이어서 정직하고 좋은 선교사가 된 것이다. 자랑스럽다. 이들과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다. 
 
청춘을 드려
천국을 산다
 
제목 참 잘 지었다. 결혼하자마자 바로 선교사로 나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리 많은 나이도 아니었는데... 여러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파송되기 전 잠깐 우리 '목장'에서 머물렀었다. 짧은 시간이었다. 우려와 걱정과 안타까움으로 보냈었다. 청춘을 드린 건 내가 확실히 아는데... 천국을 살았을까? 살았다고 한다. 본인들이 살았다면 산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부부도 청춘을 드렸다. 천국을 살았을까? 산 것 같다. 살고 있는 것 같다. 불쑥 이런 마음이 든다면 산 것이다.
 

'꽃보다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를 확신했던 시간  (0) 2023.09.06
먼저 난 자의 기쁨  (0) 2023.09.02
늑대 아이 키우는 사랑스런 젊은 부부  (0) 2023.03.31
雪花, 受  (2) 2023.02.19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  (0) 2023.02.11

 

내일 아침은 뭐야?

군고구마.

하아, 생각만 해도 덥다.

그러네... 이 더위에 아침으로 먹을 게 못 되네.

엄마, 그러면 내일 아침에 군고구마 먹을 때 에어컨 틀게 해 줘.

콜! 에어컨 틀고 먹자.

 

(아닌 게 아니라 고구마 굽느라고 에어프라이어기 돌리니 소리만 들어도 덥고, 고구마 구수한 냄새가 그렇게 더울 수가 없었다. 시의적절한 선택에 대해 숙고함!)

 

 

'음식, 마음의 환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채워짐  (0) 2023.08.12
들기름과 카놀라유  (0) 2023.08.12
설레는 말  (0) 2023.08.10
굽은 자로 직선을 긋는  (4) 2023.07.27
절대 음식은 없다, 있다  (2) 2023.07.05

스터디 카페에 가는 현승이에게 오늘은 도시락 싸줄 게 없다고 했더니 샌드위치 사서 들어가겠단다. 아침도 빵인데 점심까지 빵은 좀 그렇다 싶어서 이리저리 굴려도 뭐가 떠오르질 않는다. 현승이가 "아, 간장 계란밥을 내가 해서 가져가야겠다!"라는 말에, "오, 그러면 엄마가 파기름 내서 계란볶음밥 해볼게!" 하고 텅 빈 냉장고에 생존한 계란과 파로 볶음밥을 만드는데 식탁 의자에 앉은 종알종알 현승이.

 

와, 오늘은 공부가 잘 되겠다.

왜?

맛있는 도시락이 있으니까. 그게 기분이 달라. (이런저런 종알종알....) 도시락, 도시락이란 말 자체가 좀 설레지 않아?

아닌데.... 엄마는 도시락이란 말이 부끄러움인데.

아, 이게 경험에 따라 말의 느낌이 다르구나.

 

(이때 냉장고 문 열렸다는 소리가 띠리링띠리링)

 

나는 저 소리가 싫어. 조르고 보채는 소리 같애.

그래? 엄마는 비난하는 소리 같애.

아, 이게 사람마다 같은 소리도 느낌이 다르구나...

 

 

 

 

'음식, 마음의 환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들기름과 카놀라유  (0) 2023.08.12
호사, 에어컨 틀고 군고구마  (0) 2023.08.10
굽은 자로 직선을 긋는  (4) 2023.07.27
절대 음식은 없다, 있다  (2) 2023.07.05
질문 한 번 잘하고 슈바인 학센  (0) 2023.07.02

엄마, 솔직히 닭갈비 이상해.
뭔가 싼 맛이 나고 맛이 없어.
 
대용량 양념 닭갈비를 사서 마늘, 파 등 더 넣고 양념을 했는데도 맛 감각이 뛰어난 애들 입맛을 속이질 못했다.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 냄새도 잡고 맛도 더 내줄 이런저런 양념을 추가하고 양배추, 고구마, 떡, 깻잎을 넣어 함께 볶았다. 정자동 닭갈비 맛집에서 넣는 걸 다 넣어본 것이다. 
 
캬아, 엄마! 역대급이야. 대박 맛있어.
너무 맛있는데! 안 되겠다. 식당처럼 사이다까지 한 캔 해야겠다.
 
하면서 두끼 연속 새로 태어난 닭갈비를 먹어줬다. 교만하게, 아주 교만하게 말했다. 
 
현승아, 하나님은 굽은 자로도 직선을 그으시는 분 이래. 엄마를 요리에 있어서 하나님 끕으로 인정해 주면 좋겠어. 엄마는 트레이더스 닭갈비를 정자동 맛집 닭갈비로 만드는 분이야. 엄마를 추앙해!(뒤늦게 ‘나의 해방일지’ 정주행 중)


 
 

'음식, 마음의 환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사, 에어컨 틀고 군고구마  (0) 2023.08.10
설레는 말  (0) 2023.08.10
절대 음식은 없다, 있다  (2) 2023.07.05
질문 한 번 잘하고 슈바인 학센  (0) 2023.07.02
육식동물을 위한 비빔면  (0) 2023.06.29

나는 (식구들보다 두어 시간은) 일찍 일어나는 새다. 일찍 일어나 연구소 카페에 '읽는 기도' 필사해서 올리고, 교회 말씀 묵상 밴드에 묵상 나누고, 기도하고, 글 좀 쓰고 있으면 늦게 일어나는 새들이 한 마리씩 나온다. 밤늦게까지 연습하고 늦잠 자는 채윤이를 제외하고  JP(제이피, 아니고 종필로 읽어야 함)과 현승 두 남자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한다. 이 여름 아침 식사는 아이스 라떼와 빵 한 조각이다. 그러고 앉아서 아침을 먹노라면 나는 뭔가 막 신이 난다. 신이 나서 이 얘기 저 얘기, 농담 따먹기를 하노라니... 어느 날 현승이가 말했다. "와, 나 여기 앉을 때부터 엄마가 입을 쉬지를 않네. 조잘조잘조잘조잘..." 그러자 JP이 "나 그래서 귀에 염증 생긴 거야." (귀가 아프고 어지러워서 '이석증' 재발인가, 하고 이비인후과에 갔는데 귀에 염증이 생겼단다.) 니 엄마 때문에 귀에서 피가 나. 이쪽 귀잖아. 딱. 그래서 염증 생긴 거야 "
 
나 저항 없이 인정했음. 왠지 정말 그런 것 같아...ㅜㅜ 그래도 좀 참을 수는 없음. JP은 매사 좀 귀찮아 하는 스타일이라... 귀찮게 하는 걸 정말 싫어하는데... 하지 말라고 짜증내면 더 귀찮게 하고 싶다. 귀 염증, 내 탓이라 여기겠음. 이번 기회에 진심 회개하고 장난 그만치기로! (JP에게는) 
 
늦잠 자고 싶은 채윤이가 "제에~발 좀 아침에 엄마 아빠 식탁에서 얘기 좀 하지 말라고오! 잠 좀 자자고오! 아, 진짜 그리고 얼음 꺼내는 소리... 진짜!!" 한다. (채윤이 방이 주방 바로 옆) 그런 말을 들으면 또 참을 수가 없다. 다음 날 아침, 라떼 만들려고 얼음을 푸다가... "김채윤 깨워야지, 김채윤 짜증 나게 해야지. 우헤헤..." 얼음삽으로 통을 휘저어서 소음을 일으켰다. 신이 나서 아드레날린이 폭발이다. 커피 내리던 현승이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 그러다 진짜 지옥 가!
(절레절레)

 

 
 

'JP&SS 영혼의 친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둘 하루  (0) 2023.08.16
Sabbath Diary 45: 목사인 게 도움이 됨  (4) 2023.08.14
꽃보다 남자들  (1) 2023.06.06
감동란  (0) 2023.04.05
축구에 진심, 설교에 진심  (3) 2022.12.08

 

아이들 키우면서 조건을 내거는 방식의 교육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조건적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필요하고 좋은 것이면 뭐든 해줄게"같은 메시지를 넣어주고 싶었다. "뭘 하면 뭘 해주겠다. 뭘 해주는 대신 뭘 해라"는 행동주의적 방식을 썩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방식이 당장 습관을 만들어주는 것에는 도움이 되는데, 자칫 조건적 사랑을 존재에 심을 수 있으니까. 대단한 양육철학이기보다 내 성격의 취약함(또는 강점)이라고 해두자.
 
대학생활 한 학기 마치고 반수를 하겠다는 다 큰 아들에게 조건을 내걸었다. "대신! 아침마다 독서 30분 하자."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침을 먹은 후에는 어김없이 소파에 앉아 독서를 한다. 누나 채윤이가 "꼭 학생부실에 끌려가서 인성 훈련 하는 것 같애"라며 좋아서 낄낄거리고. 내가 집에 없는 아침에는 학주 없어도 혼자 학생부실 가서 성실히 셀프 인성교육 하는 뒷모습을 촬영하여 보내기도 한다.
 
첫 책으로 <아직도 가야 할 길>을 읽었고, 그다음엔 성경의 '욥기'를 읽고 싶다 하여 <메시지 성경>으로 읽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친구들 독서모임에서 읽어야 한다며 <연금술사>를, 지금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읽고 있다.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내가 청년들 강의 때마다 권하는 책인데, 사실 현승이 취향은 아니다. 그래서 더욱 첫 책으로 추천했다. 예상대로 재밌는 책은 아니지만, 결국 한 주제를 얘기하지만, 사례가 많아서 읽을만했다는 평이었다. (스캇 펙이 반복해서 말하는 '한 주제'에는 스며들었을 것이라 나는 믿는다.) <욥기>를 읽으면서는 "속 터진다. 이거 가스라이팅 아니야? 욥이 억울해서 죽을려고 하는데..." 하는 신선한 평을 내놓더니, 아빠와 심도 있는 토론도 했다. 아침 루틴으로 잘 지키면서 첫 책 <아직도 가야 할 길>을 금세 끝냈기에 장하다는 칭찬 끝에 '책거리' 얘기가 나와서 수다수다 떨었다. 그러면서 자체 현승이식 책거리! (이런 개그가 난 그렇게 좋더라고...)
 

엄마, 여기 책걸이!
 

'기쁨이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덮밥)왕의 기도  (0) 2023.10.20
엉마, 까아아칭~  (3) 2023.09.05
부재  (2) 2023.07.16
미리 책임  (2) 2023.06.29
You’ve got a friend in me  (2) 2023.02.22

두어 달쯤 전인가. 연구소 선생님들과 내 꿈을 가지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었다. 가족들이 기차 타고 어딘가로 떠나고 나만 기차역에 남겨진 꿈이었다. 하룻밤을 어딘가에서 보내야 하는데, 내가 선택한 방은 독거노인이 살다 죽어서 생긴 방이었다.  이런저런 흥미진진한 질문과 대답 끝에 이런 질문이 왔다. "가족들이 없고 혼자라면 어떻게 살고 싶어요?" "수도자로 살고 싶어요." 툭 튀어나온 답이었다.
 
남편에게 꿈나눔 얘길 했더니 "당신 지금도 거의 수도자로 살고 있잖아."라고 했다. 그런가? 싶기도 하고... 이 꿈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초대인가. 지난주 며칠 수도원 피정에 다녀왔다. "기도하고 일하라"는 문장 그대로 살고 있는 베네딕도회 수사님들의 하루 일곱 번 기도에 함께 했다. 밥 챙겨 먹고 뒤돌아 서면 금세 기도 시간이 되어 버려서 나는 "기도하고 밥 먹어라“가 되었다. 수도원 진입로의 짧은 메타세쿼이아 길을 수십 번 오가며 걸었다. 잊지 못할 아름다운 길, 이제는 내 마음에 난 길! 그 와중에 장화 신고 나란히 걷는 노 수녀님들은 씬 스틸러였다.  
 

'영성 신학'을 제대로 배우고 싶은 마음에 10여 년은 이 학교 저 학교 신학교들 홈페이지를 검색하며 보냈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대단한 '영성'이 아니라 깊은 기도에 대한 갈망의 검색질이었다. 영성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에 관련된 것이고, 하나님을 찾는 인간 편에서의 행위는 '기도'이다. 기도하지 않으며 '영성'을 가르치는 신학자들에게 '영성'을 배울 수는 없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았던 것 같고. 그래서 오래 찾고 머뭇거렸지 싶다. 대학원 마지막 학기 "영성사" 수업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기도하는 교수님께 영성사를 배울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수업 마지막 날이 팀 발표 날이었고, 나는 토론을 이끌게 되었는데 그날 주제와 상관없는 '나를 위한 질문'을 끼워 넣었다. 한 학기(내게는 4학기) '문화와 영성'을 공부하며 얻은 것에 대한 자문자답이었다. 영성은 "생활과 증거"체험을 다룬다. 영성신학은 사변 신학이 아니다. 영성사(History of Spirituality)는 기도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역사, 기도의 역사이다. 나는 이렇게 나의 배움을 정리한다. '성인'이라 불리는 분들은 "다양한 상황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기도할 수 있고, 기도를 통해 '사랑'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모두 영성사 교과서 서문에 나온 말이다.) 기도하는 교수님께서는 종강 후 베네딕토회 수도원으로 초대하여 '시편 성무일도 피정'을 경험하도록 해주셨다. 
 
돌아보면 신앙 사춘기의 시작은 '기도의 메마름'이었다. 더 깊은 기도를 하고 싶은데, 더 깊은 기도의 길이 있을 텐데 내 앞은 막다른 길이었다. 더욱 막막한 것은 마침 목회자로 위치가 바뀐 남편 덕에 목회자의 아내가 되었는데... "새벽기도 출석"을 강요받으면서 어떤 무너짐이 시작되었었다. 영혼의 숨이 콱 막혀버린 상태로 어쩌다 만난 에니어그램, 그래서 알게 된 Centering Prayer, 그리고 내가 몰랐던 오랜 기도의 전통들, 기도의 대가들, 그리고 담을 넘어가 만난 오랜 영성의 전통, 그 끝에서 수도원의 기도 피정이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세운 치밀한 계획 같다.  기도 찾아 삼만 리, 수도원 찾아 삼만 리... 이제 신앙 사춘기의 마침표를 찍어야 할까 보다.
 

 

머물던 기간 중, 은퇴하신 노(老) 수녀님들이 피정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老 수녀님들이라... 아마도 장화 신고 우산 쓰고 메타세콰이아 길을 걷던 그분들이다. 또 한 분, 수도원 입회가 내 나이와 비슷한 수사님 한 분의 뒷모습이 자꾸 눈길을 사로잡았다. 수도회 입회한 때가 내가 태어나던 즈음이었다. 아기로 태어난 내가 중년이 된 이 긴 세월... 수사님은 평생 한 곳에서 "기도하는 일하는" 똑같은 하루를 쌓아오신 것이다. 그 수사님이 입장할 때마다, 그 뒷모습을 볼 때마다 뭉클하고 뜨거워졌다. 피정비를 내는 봉투에 이렇게 썼다. "한 곳에 머물러 기도하는 수사님들의 정주(定住) 덕에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끝없이 헤매는 세상과 거기 사는 저 같은 사람이 그나마 하나님을 잃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수사님들 한 분 한 분을 위해 기도드리겠습니다." 딱 이 마음이다.
 
* 봉쇄 구역을 지키는 저 귀여운 청솔모, 까꿍! ^^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낳고 키우고 성장하고  (2) 2023.11.05
인생의 빛 학교  (0) 2023.10.15
괭이밥의 인류애  (1) 2023.06.03
친교, intimacy  (3) 2023.05.30
너와 나의 리즈시절  (0) 2023.05.17

 

"그들은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과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땅에 있는 성전에서 섬깁니다." (히 8:5)

 

어제 자 묵상 말씀이다. 교회 말씀 묵상 밴드에서 히브리서를 나누고 있다.  "이 땅의 삶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천국을 바라보고 여기는 그림자처럼 여기며 살자. 천국은 좋은 곳, 여기는 하찮은 곳!" 이원론적 인식으로 가져갈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땅의 성전이 하늘을 반영한 것이라고 왔다. 땅에 있는 성전이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늘의 모형을 본떠 만든 것이다. 원형은 하늘에 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는 주기도문도 생각난다. 내가 지금 여기, 이 땅에서 하는 예배와 삶 전체가 하늘의 모형을 비춘 그림자여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들린다. 스캇 펙이 쓴 사후 세계에 관한 소설 제목은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는 말씀의 역방향의 가능성이다. 관계는 이렇듯 상호적인 것 아닌가.
 
하늘의 모형을 비추는 그림자가 된 오늘이 천국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사는 오늘 하루가 저 영원한 천국과 이어진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아침 말씀 묵상은 하루 분 일용할 영의 양식이라 여기는데... "오늘의 양식"이 그것이었다. 실은 전날 남편과의 말다툼으로 마음이 먹구름이었다. 오늘 마음의 지옥을 살면서 죽어 눈 뜬 곳이 천국이길 바랄 수 있겠는가, 생각하며, 지옥 같은 마음을 해결해야겠구나 싶었다. 오후에 용기 내어 남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사과할 용기, 내 잘못과 내 마음의 결핍을 인정할 용기는 오전에 있었던 "꿈 집단"의 나눔 덕이다. 진실한 대화로 내 마음을 알게 되었다. 전날 밤 남편에게 휘둘렀던 날카로운 말의 칼은 '연결'에의 갈망이었다. 꿈 작업의 힘을 빌어 자존심 내려놓고 진심의 사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었다. 한참 후에 답신이 오고... 지옥 같았던 마음에 천국이 조금씩 스며들었다.
 
모처럼 개인 하늘이 아까워 저녁 산책에 나섰다. 빗물 웅덩이에 하늘이 담겨 있는 이 멋진 장면을 발견! 누추하고 답이 없고 엉망진창인 웅덩이 같은 내 마음에도 하늘이 담겼다. 땅이 하늘에 가 닿을 수 없으니 하늘이 내려와 땅에 담겼다. 만나려면 서로의 간격이 좁아져야 한다. 중간 지점에서 만나든, 누가 더 빨리 달려 많이 움직이든 어쨌든 움직임이 필요하다. 오늘 여기서 하늘을 살 수 있는 이유는 하늘이 친히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것이 성육신 사건이다. 스펙터클한 내적 전쟁을 가만히 정리해 준 한 장면의 선물이다. 그러고는 오늘 아침의 연구소 묵상은 또 이러하지 않은가! 이분을 얼마나 성실한 분인가. 내게 필요한 말씀을 얼마나 성실하게 반복해서 또 하고 또 하고 또 들려주시는 분인가.
 

예수님의 육화는 우리가 인간으로 있는 곳에서 하느님이 우리를 만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하느님이 둘 사이의 간격을 하느님 편에서 완전하게 극복하신다. 구원의 문제는 그것이 십자가에서 극적으로 연출되기 전에 이미 해결되었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좋다는 사실은 베들레헴에서 이미 밝혀졌다.

자기를 지킬 수 없는 어린 아기 안에 하느님이 숨어 계시고 드러나셨듯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적 능력이 언제나 무능한 사람들 안에 감추어져 있다. 하느님이 사랑받고 나누이려면 나약한 인간의 몸을 입는 모험을 감당하셔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가슴을 울리고 일깨우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개념이나 신학 이론과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물론 이것을 시도하는 이들이 있긴 하다). 사람은 사람하고 사랑에 빠진다. 

나약한 어린아이 안에 하느님은 완벽하게 숨어 계시고 거기에서 완벽하게 그리고 더없이 사랑스럽게 드러나신다.

<리처드 로어 묵상 선집> 중

 

'마음의 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쵝오! 어쨌든 쵝오!  (0) 2023.09.29
사랑이 한 일, 십자가가 한 일  (0) 2023.08.14
종강의 밤  (2) 2023.07.02
취향저…격려  (2) 2023.06.01
오미자몽 데이트  (3) 2023.04.20


엄마 오늘 예배 끝나고 바로 와?
바로 가냐고?
아, 맞다! 연구소 워크숍이지? 아아아으… 엄마 요즘 왜 이렇게 어딜 많이 가?
왜애? 엄마 어디 가는 게 싫어? 엄마가 집에 있다고 크게 다른 것도 없잖아?

무슨 소리야? 엄마가 있는 집과 없는 집은 그 자체로 다르지. 엄마가 있어야 집이 집 같고, 안정감이 있고, 집에 들어오는 맛이 나고 그러지. 겉으로는 그냥 지낼지 몰라도 엄마가 없으면 마음이 텅 빈 것 같단 말야. 집에 들어올 때도 기대도 없고 그래....

 

정도의 답을 기대하며 물었는데, 예상과 달랐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하아... 없는 것보단 낫구나... 다행이다... 

 

 

'기쁨이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엉마, 까아아칭~  (3) 2023.09.05
책거리  (4) 2023.07.21
미리 책임  (2) 2023.06.29
You’ve got a friend in me  (2) 2023.02.22
붉은 사막 위의 HS, 부럽다  (5) 2023.01.28

마트에 감자가 박스로 나와 쌓이기 시작하면, 감자 가격이 만만해졌다 싶으면, 감자철이 온 것이다. 그러면 어김없이 채윤이가 "감자 샐러드 먹고 싶다. 엄마 감자 샐러드 해 줘." 한다. 우리 채윤이는 귀신이다. 많은 날 많은 끼니를 트레이더스 반 조리 음식으로 살고 있지만, 이럴 때 한 번 대대적으로 해봐야 한다. 오이도 사다 줘, 감자도 으깨 줘(부드럽고 착한 남자 현승이 손에 으깨진 감자라 이번 샐러드엔 덩어리가 무척 많음.) 현승이가 많이 도와줬다. 맛있게 만들어졌다. 만드는 것보다는 먹는 역할에 충실한 채윤이가 맛있게 드시면서...

 

"엄마, 그런데 감자 샐러드에 왜 햄을 넣는 거야? 다 햄이 들어가 있어. 그러면 완전히 맛이 이상해. 다른 맛이야."

 

보통은 다 넣는다. 너희는 엄마 샐러드에 익숙해서 그렇다. 처음부터 그렇게 먹었던 애들은 그게 또 제일 맛있는 거다. 그러니까 익숙한 맛을 맛있게 느끼는 거다. 주절주절 지루한 설명을 하고는 "그래서! 절대 음식은 없어! 다 상대적이야" 라고 했더니.

 

"아니야, 절대 음식은 있어! 엄마 음식!" 이라고 했다. 유후~

 

'음식, 마음의 환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레는 말  (0) 2023.08.10
굽은 자로 직선을 긋는  (4) 2023.07.27
질문 한 번 잘하고 슈바인 학센  (0) 2023.07.02
육식동물을 위한 비빔면  (0) 2023.06.29
쉪 컴 백  (0) 2023.06.23

두고두고 간직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우연히 찾아든 선물같은(다른 더 좋은 표현이 없을까?) 시간이었다. 대학원 4학기를 완전히 마치는 마지막 종강 날이었다. 수업 마치고 늘 수녀님을 댁까지 모셔다 드리곤 했는데, 학생으로서 특혜였다. 그날 수업으로 시작하여 별별 얘길 다 나눈 것 같다. 이건 진짜 상상도 못 한 일인데. 대학원 생각을 하면서 학교를 결정하는 문제로 의논을 하기도 했었다. 이 학교로 결정하고 "어느 신부님 강의는 꼭 들어보라"는 말씀을 해주실 때도 이런 날을 상상이나 했냐는 말이다. 4학기 차에 수녀님이 우리 대학원에 강의를 나오시게 되고, 그 과목은 무려 <중세 여성 신비가들>이었고, 박사논문으로 연구하신 베긴(Begine) 신비교사 '안트위르펜의 하데위히' 강의였으니! 이건 하나님께서 너~어무도 나만 생각하시는 건 아닌가 싶으신 것이었다. 너무 내 위주로 커리큘럼 짜고 계신 건 아닌지. (나한테 왜 이러시냐고, 도대체 왜 나한테...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진짜 많이 투덜거리고 대들었는데... 하나님, 당신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학기 세 과목은, 아니 세 분의 교수님은 인생 종합 선물 세트였다. 오랜 시간 '스승의 날'마다 박탈감 같은 걸 안고 보냈다. 신앙 사춘기를 통해 젊은 날 존경하던 스승님들 다 보내고 텅 빈 마음이었을까? 올 스승의 날에는 정말 세 분 스승님께 정성을 다해 마음을 표현했다. 지난날의 박탈감이 다 치유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 수업 마치고는 수녀님과 차 한 잔 하자는 발걸음이었는데, 갑자기 정해진 반포대교, 그리고 입구를 잘못 찾아 들어가 카페와는 한참 멀어졌고, 걷는 게 힘드실 것 같아 빈 벤치가 보이면 무조건 앉자고 우겨서 자리를 잡았다. 앉자마자 이게 무슨 일! 바로 반포대교 분수쇼가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 자리는 로열석이었다!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 담을 넘었다고 생각했는데, 횡단이 아니라 종단이었다. 1517년 종교개혁 시대의 담을 넘어 초세기부터 16세기 스페인 영성에 이르는 영성의 강을 여러 차례 오르고 내린 것 같다. 간간이 고대 그리스까지도 거슬러 올랐었다.  이 강물에 몸을 맡겨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며 흘렀다. 예습, 복습, 자기주도 학습. '습'이란 습은 다 하며 행복했다. 목말랐던 바로 그 배움이 딱 거기 있었고. 그렇게 헤엄치다 발에 땅이 닿아 디디고 섰더니 원래의 내 자리이다. 내가 나고 자란 교회, 혹독하게 신앙 사춘기를 겪었던 엄마의 품, 엄마의 교회, 개신교회, 지금 여기의 교회. 그간 가졌던 많은 의문들이 2000년 영성의 강물 위에서 나뭇잎 한 장 같은 것이 되었다. 횡단의 대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종단으로 밝히 알게 된 출생의 비밀 같은 내 영성의 역사로 자부심이 커졌다. 그렇게 보낸 4학기 마지막 강의를 마친 밤에 참 잘 어울리는 종강파티였다.
 
논문만 쓰면 된다.
논문 따위!...
엉엉...
 

'마음의 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이 한 일, 십자가가 한 일  (0) 2023.08.14
하늘을 품은 땅  (3) 2023.07.19
취향저…격려  (2) 2023.06.01
오미자몽 데이트  (3) 2023.04.20
외로우니까 수선화다  (0) 2023.03.08

현승이는 마주 앉은 사람 말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신공을 갖고 있는데... 비법은 '질문'이다. 사람사람에게 맞춤형 질문을 조곤조곤 던지는 것이다. 아빠에게는 철학이나 성경 관련, 엄마에게는 꿈을 비롯한 사람 마음에 관한 것, 누나에겐 음악이나 친구, 영화 같은 주제. 엄마빠 함께 앉아 식사하며 음식 얘기하는 중(내 보기엔 질문 꺼리가 떨어져서 대충 내보낸 질문) "학센 알아? 먹어봤어?" 한 마디 하고 주일 저녁으로 특템하였다. 주일 오후엔 아빠가 살짝 나사가 풀리면서 지갑도 막 느슨해지는데. 뭔가 색다른 맛있는 무엇을 먹으며 셀프 위안을 얻으려는 뜻도 있는 것 같고. 암튼 덕분에 남해 독일마을에서 먹어봤던 독일식 족발, 슈바인 학센을 먹었다.
 

'음식, 마음의 환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굽은 자로 직선을 긋는  (4) 2023.07.27
절대 음식은 없다, 있다  (2) 2023.07.05
육식동물을 위한 비빔면  (0) 2023.06.29
쉪 컴 백  (0) 2023.06.23
설탕 듬뿍 토마토  (0) 2023.06.19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16

 

최 선생님은 주변 모든 이들을 위한 상담자 같으시다. 선생님 댁 현관 앞에서 울며 나오는 한 여자분을 만났다. 내담자려니 했는데, 친구분의 며느리란다. 얼마 전 치매 증상으로 요양병원에 가신 선생님 친구분, 그 소식으로 선생님도 한동안 적잖이 힘겨워하셨었다. 듣자 하니 어머니 요양병원 입원 후 자녀들 사이 갈등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마음을 다친 며느리가 선생님을 찾은 것이다. 집에서 치매 어머니를 모시던 분이다. 스쳤지나 듯 마주쳤지만, 고통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일은 뭔가 남 일 같지가 않다.
 
     선생님, 힘들어 보이세요. 좀 쉬실까요?
그러게. 기력이 없네. 이젠 상담도 접어야 할 때가 됐나 봐. 잠깐 있어 봐. 으읏짜, 내가 뭘 좀 먹어야 한다.
     네, 선생님. 어여 홍삼 드시고요. 오늘은 좀 쉬세요. 저는 다음에 올게요.
예이, 사람아! 가긴 어딜 가? 노인네랑 놀아주고 가야지. 기력 없는 노인네 내쳐 두고 가버린다고? 걱정 마오. 벌써 다시 힘이 나는 걸.
     아니요, 기운이 없어 보이셔서요. 하긴 또 제가 인간 비타민이니까요. 에너지 팍팍 드리겠습니다. 헤헤. 힘든 얘기 들어주는 게 보통 에너지 드는 일이 아닌데, 선생님 대단하신 거예요.
그래? 정 선생은 상담할 때 들어주는 게 힘들어?
     저요? 어... 저는 인간 비타민이니까, 스스로 비타민 주입이 가능하니까 그리 힘들지 않죠. 헤헤. 상담 일 하는 사람들이 많이들 그렇잖아요. 번 아웃이 오기도 하고요. 선생님은 그런 적 없으세요?
왜 없어? 그런데 나는 아픈 얘기 듣는 거 어렵진 않아요. 차라리 부동산 얘기, 건강식품 얘기, 연예인 얘기하는 친구들 수다가 더 괴로워. 교만한 노인네야. 후훗...
     오, 그건 저도 마찬가지인데요.
나는 상담이 좋아요. 아프고 힘든 얘기 하려고 상담 오는 거니까, 사실 그게 다 인생의 진실 아니오! 진실한 얘기는 아플지언정 사람을 피곤하게 하지는 않아. 차라리 근사하게 포장하고 좋은 말만 오가는 대화가 에너지를 더 뺏더라.
     정말 그러네요. 좋은 말 대잔치가 피곤한 게 그런 거였군요. 진실한 대화! 그런 의미라면 저도 상담 안 힘들어요. 셀프 비타민 주입은 취소구요! 헤헤.
고통이 진실이지. 그래, 고통이 진실이야. 삶은 고해라고!
 
누가 문제예요? 딸이에요? 며느리예요?
 
     그런데 선생님, 친구분 자녀들이요. 따님도 계속 전화하시는 거 아니에요? 전에 따님이 소식 알려주시고 상담도 하고 그랬던 거잖아요. 올케 시누이가 마주하고 싸울 얘기를 각각 선생님께 하는 거 아니에요?
, 이제 정 선생이랑 내 친구네 집안사까지 나누는 사이가 됐구나. 며느리는 오늘 처음 온 거야. 상담을 받겠다고 하는데 일단 보자고 했지... 아니나 다를까, 어디든 억울한 감정 쏟아놓을 곳이 필요했던 거야. 사정 아는 사람에게 제 마음 보여주고 싶은 거지 뭐.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여하튼 부모님 모시는 사람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이쪽저쪽에서 좋은 소리는 못 듣는 건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 같아요.
어라, 부모 모시는 속내를 겪어보지도 않은 정 선생이 어떻게 알아?
     모셨다고 볼 수는 없지만요. 아이들 어려서 풀타임 일할 때 육아 때문에 함께 산 적 있거든요. 제 필요로 함께 사는 건데도요. 정말 힘들더라고요. 힘든 것 꼽자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뭐랄까. 같이 사는 건 일상이잖아요. 한 번씩 왔다 가는 자녀들과는 어떻게 비교할 수 없는 처지인 거죠. 아까 현관에서 잠깐 스쳤는데도 그 며느님 마음이 느껴지던데요. 저는 어쩔 수 없이 제 필요 때문에 함께 사는데도 그렇게 힘들었는데요. 연로하신 어머니, 그것도 치매 어머니를 모시는 게... 아아, 저는 상상이 안 돼요.
그러게나 말이야. 치매 걸리기 전에도 내 친구가 만만한 사람은 아니거든. 평생 교직에 있으면서 자부심도 컸고. 가르치는 습관이 몸에 배어서 말이야. 같은 사는 며느리 쉽지 않겠구나 싶었었어. 그 며느리 고생 많았지. 발병하고 요양병원 가기까지 한 3년인데, 처음에는 치매인 줄도 몰랐잖아. 하루하루 인격이 달라지는 시엄마 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 거든. 고생은 고생대로 했는데... 에효, .... 죄 없는 자식들이 서로 할퀴고 그런다. 어쩌겠어. 병원으로 가야지. 갈 데로 간 건데 딸은 또 못내 안타까우니까 제 올케한테 싫은 소리를 한 모양이야.
     아오, 정말! 딸이 너무한 거 아녜요. 자기가 한 번 모셔보라죠. 노인네 세 끼 식사 차려드리는 것만으로도 큰 일이라고요. 그것도 치매 어머니를요. 너무 이기적이에요!
허허허, 그렇긴 한데. 정 선생이 왜 이리 흥분을 해? ? 시엄마 모시게 될까 겁나?
     네?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제가 흥분했나요? 헤헤. 시어머니는 아직 젊으시고 혼자 지내는 것 좋아하시니까요. 아흔 넘은 엄마가 동생네하고 사시거든요. 올케한테 늘 미안하더라고요. 한 번씩 엄마 보러 가는데 눈치가 보여요. 올케는 이것저것 식사 한 끼라도 신경 쓰일 거고, 복잡하네요. 뭔가, 마음이...
그렇구나. 딸 말도 그래. 걔도 제 입장이 있더라고. 제 엄마 성질도 알고, 그 성질 받아내고 모셔 준 올케가 고맙고 미안하대. 그래서 제 딴에는 한다고 했다는 거지. 치매 엄마 병원에 넣고 보니 마음이 갈피가 잡히지 않았나 봐. 저는 힘든데 병원 보내고 좋아라하는 것 같은 올케가 이해도 되지만 섭섭했대. 어쩌다 그 말 한 마디가 나와서 옥신각신하게 된 모양인데, 말이 오가면서 감정이 커진 거지 뭐.
     아... 며느리가 좋아라 했어요?
속으로 좋아라, 했어도 좋다고야 했겠어? 벌써부터 병원으로 모시자고 한 건 딸이었어. 그런데 올케가 괜찮다, 괜찮다 했다는 거지. 싫은 소리 못하는 사람인 거 알고 제가 나서서 추진했는데... 사리분간 못하는 엄마를 병원에 혼자 놓고는 몇 날 며칠 눈물 바람을 하다가 참았으면 좋았을 말을 내놓았나 봐.
     어떤 말을 참아야 하는데요?
하긴, 참아야 하는 말이 따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
     그러면 선생님, 지금 누가 문제예요? 딸이에요, 아까 그 며느리예요? 양편 말을 다 들어보셨잖아요. 이런 경우 두 사람은 서로 어떻게 화해해야 할까요?
글쎄, 화해라... 화해만이 능사인가 싶고. 입장이란 게 있는 거잖아요. 정 선생도 며느리 입장으로 생각할 때와 딸 입장이 될 때 다르지 않은가?
     어... 그러네요, 선생님. 입장이란 게 있죠. 아니, 그러고 보니 도대체 이런 때 아들 사위는 왜 사라지고 없는 거죠? 요양병원으로 모시지 않는 한 부모님 수발은 거의 여성들 몫이잖아요. 그것도 주로 며느리요. 오래전 읽었는데 제목도 잊히지 않는 박완서 선생 소설 생각이 나요. 『환각의 나비』라는 소설인데요. 치매 어머니 돌보는 문제로 딸과 아들 사이 갈등인데, 어머니 자신이 “내가 아들이 있는데 왜 딸 집에서 죽어야 하냐?”는 식이었거든요. 아들 집이면 결국 돌봄 노동을 맡는 건 며느리잖아요. 젊을 때 읽었는데도 마음이 참 복잡했었던 게 생각이 나네요.
에이구, 그냥 병원으로 가야지! 병원! 뭐 아들 집, 딸 집이야? 에이구! 정말! 맞아, 시대가 달라졌다고 해도 유교적, 가부장적 사고방식이 뿌리가 깊어. 내 친구들만 해도 비슷하다니까. 노년에 딸 집에서 돌봄 받는 걸 은근히 부끄러운 것으로 여긴다고.
 
웰다잉, 잘 죽는 게 뭐지?
 
     하아... 선생님 참. 막막하네요. 저도 마주해야 할 일인데... 양가 어머니들 생각하니까요. 집에서 편안히 돌아가시는 건 이상일 뿐일까요? 존엄한 죽음 같은 것 말이에요.
글쎄... 존엄한 죽음이라. 요즘은 웰빙이 아니라 웰다잉 웰다잉, 많이 하던데. 둘 다 콩글리쉬잖아. 웰다잉... 그게 무슨 뜻이야? 잘 죽는 게 뭐지? 살던 집에서 자식들 돌봄 받으며 죽으면 잘 죽는 걸까? 시설 좋은 요양병원에서 비싼 간병 받으면 존엄한 죽음이 되려나? 집에서 모실 자식 없고, 좋은 요양병원 갈 돈 없는 사람은 웰다잉도 애초 틀려먹은 거유?
     그러게요. 저는 그 따님이 너무 이해되는 게, 제가 친정엄마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 딱 한 가지이거든요. 집에서, 엄마 방에서 돌아가시게 해주세요. 엄마도 늘 그러시죠. 잠자다 불러가시면 좋겠다. 기도하다 불러가시면 좋겠다. 엄마가 쓸쓸하게 병원에서 돌아가신다 생각하면... 아, 생각도 하기 싫으네요.
그걸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면 좋겠지, 정말 좋겠지... (한참 생각에 잠겨 말이 없으시다.) 퀴블러 로스(Elisabeth Kübler-Ross) 여사라고 알죠?
     그럼요. 죽음을 받아들이는 다섯 단계 말씀하신 분이죠?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였던가요? 애도 전문가시잖아요. 그 5단계는 정말 일리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 죽음에 대해 현대적 의미로 가장 잘 정리한 사람이 아닐까 싶어. 호스피스 운동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할 거야. 그 사람이 시한부 환자 5백여 명을 인터뷰하고 쓴 책이 죽음과 죽어감 On Death and Dying인데, 5단계가 그 책에서 나와요.
     아... 읽어봐야겠네요.
정신의학자라고 다 그러지 않을 텐데, 죽음과 상실에 대한 남다른 영적 감각을 타고난 사람 같아요. 병원에서 죽어가는 환자들을 대하는 의료진들을 보며 충격을 받았대. 환자 한 사람이 아니라 심박 수, 심전도, 폐 기능... 같은 것만 보더라는 거지. 사람, 그렇지! 한 사람의 죽음인데 말이야. 그런 계기로 일생 죽음을 연구했어.
     그러니까요, 선생님! 한 사람, 하나의 고유한 생명, 누군가의 어머니, 아버지인데 병원에서는 그렇지 않잖아요. 그럴 수도 없을 거고요. 그래서 노부모님 병원에 두는 게 애달픈 일인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친구분 따님 마음이 또 이해가 되고요.
그래, 말 잘했어. 죽음의 외주화라는 표현을 하지. 퀴블로 로스도 아까 말한 책에서 그런 얘기를 해요. 조부모가 집에서 임종을 마주하고, 아이들은 그 과정에 함께 하고, 심지어 죽음을 금기시하지 않고 대화하고, 가족들이 함께 애도할 수 있다면 인생에 대해 큰 가르침이 될 거라는 것이지. 맞아요.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 그 이상 좋을 수가 있겠나. 그런데 그야말로 이상이지.
     이상... 그렇죠. 저희 친정엄마도 지금은 혼자 화장실도 가시고 최소한의 자기 돌봄이 가능하니 집에서 사실 수 있는 거죠. 여기서 더 안 좋아지시면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아슬아슬해요.
어이구, 정 선생네도 올케가 고생이 많겠네.
     맞아요, 선생님. 동생 가족에게 늘 미안하고 고맙고 그렇죠. 그런데 말씀 듣다 보니 그 딸이 이해가 되는 게요. 무슨 말을 못 참았을지 딱 상상이 되네요. 가끔 엄마한테 가서 보면 제 눈에만 보이는 것이 있거든요. 조금 더 세심하게 챙겼으면 싶은 거예요. 그런 디테일들이 보일 때 참 힘들어요. 보여도 못 본 척해야 하는 거죠. 이런 것 좀 신경 써라, 잘 챙겨라, 한마디 하는 순간, 올케 입장에선 어이없고 서운하게 들릴 거예요. 그래서 꾹 참죠. 꾹 참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는 적도 많아요. 그러네요. 모두 마음이 어려운 상황에서 그런 말 한마디면 사이가 나겠어요. 에고, 저도 정신 바짝 차려야겠네요.
그래, 어려운 거지. 저이들이 양쪽에서 울고불고하는 게 누구 잘못이 아니라고 봐. 지금 같은 가족 구조에서 집에서 생애 말기 돌봄이 가능한 집이 얼마나 되겠으며. 아까 정 선생이 말 잘했다. 한다 한들 그 짐은 고스란히 딸과 며느리 여성의 것이 되는 구조는 또 어떻고? 돈이 좀 있고, 입주 간병인을 쓸 수도 있겠지. 그렇더라도, 이것 봐. 이 사람들처럼 자식들 사이에서 뒤늦게 터지는 갈등이라니 말이야. 단순한 문제가 아니에요. 웰다잉이니, 존엄한 죽임이니, 말은 그럴 듯하지만.

 
부활의 확신이 곧 웰다잉의 길
 
     선생님,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게. 어떻게 해야 할까? 착한 자식 없고, 돈 없는 노인들도 생애 말기에 조금 공평하게 인간적 대접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 복지국가가 뭐야. 이게 국가적인 대안이 생겨야지.
     그러네요. 선생님.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존엄한 죽음이라는 게 개인적인 문제만은 아니네요.
나도 곧 죽을 사람인데 말이야...
     어... 엇... 서, 선생님 오래오래 사셔야죠. 무슨 말씀이요?
뭐 그렇게 당황해? 허허. 기력이 없어서 상담도 못하겠는 노인넨데, 내일 당장 죽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래도요, 선생님...
괜찮아. 여태 우리가 한 얘기가 내 친구 얘기도 아니고, 정 선생 어머니 얘기만도 아니고 내 얘기야. 나한테는 생애 말기 시간이 안 오겠어요? 죽음이 나를 비켜가겠냐고?
     아...
나는 어떻게 죽고 싶은지 알아? 말해줄까? 허허허.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이라고 알아요? 수식어가 많이 붙지만, 평화주의자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분이 100세가 되었을 때 서서히 스스로 곡기를 끊으면서 생을 마감했어요. 자연사라는 게 기력이 떨어져 음식을 섭취할 수 없으면서 서서히 쇠약해지면서 죽는 것 아니유. 실제로 이런 식으로 죽게 되면 탈수 현상이 오고 피가 산성화되면서 고통 대신 행복감을 느끼게 된대요. 그런 복이 허락된다면 그리 죽고 싶네. 나는...
     스스로 곡기를 끊는다... 결국 자발적인 안락사인가요? 조금 혼란스러운데요, 선생님.
나는 의료행위로 생명을 연장하는 게 싫어요. 스콧 니어링처럼 하진 못해도, 적어도 의학의 힘으로 더 살고 싶진 않으네. 그래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신청을 해두었어요.
     아, 그러세요? 어떻게 그걸...
뭘 그리 놀라? 어떻게는 어떻게야. 그냥 가서 하면 되는 거야. 내가 신청했다 해도 나중에 가족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또 안 된대요. 나는 오래전부터 아들에게 얘기해뒀어요. 연명치료 하지 말아 달라고. 콧줄로 영양공급 하는 것도 원치 않아요.
     와아, 선생님. 디테일하시네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덤덤하게 행동하고 말씀하실 수 있으신 거죠? 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좀 놀라워요, 선생님. 이렇듯 스스로 죽음을 준비하고 관리하실 수도 있는 거군요.
죽음을 관리한다고? 에잇, 그렇지 않아. 죽음을 어떻게 통제 관리해? 차라리 나는 통제할 수 없기에 이러는 거예요. 사전 연명치료거부서를 작성해 놓는다고 내 죽음이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될까? 그걸 기대해서 한 건 아니야.
     그러면 왜 하신 거예요?
하하, 어찌 이리 순진한 표정이야? 내 말이 정신없는 노인네 같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니고요. 그냥 좀 마음이 먹먹하고, 뭔가 좀... 계속 말씀을 듣는 게 힘들고 슬프네요.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시니까요.
그래. 그럴 수 있겠네. 나는 웰다잉이란 말이 불편하더라고. 죽음까지도 자기 계발식으로 접근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내가 평생 상담 일 하면서 발견한 것은요. 자기계발식 노력과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게 많지 않아. 대부분의 고통이란 것이 인간의 통제 밖에 있거든. 하물며 죽음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실은 어떻게 죽을지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 내가 열심한 불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기독교 신앙으로 분명하게 방향을 바꾼 것이 가족들의 죽음이잖아요.
     아, 그 얘기해주셨었죠. 남편분과 어머님 돌아가신 후에 죽음에 관한 책을 읽으시며 슬픔을 이기셨다고요. 스캇 펙(Scott Peck) 박사의 소설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이었던가요? 그 소설 읽으시고 죽음의 문제를 다시 보게 되셨고 신앙생활 시작하셨다고요.
기억력도 좋네. 맞아.
     이제야 이해가 돼요. 선생님은 다른 게 아니라 죽음을 통해 회심하신 것이군요. 아까 속으로 생각했거든요. 어떻게 이렇게 의연하실 수 있을까? 의연함이 믿어지지 않아서 좀 혼란스러웠어요. 그래서 그 근자감에 대해 여쭤보고 싶었죠.
근자감? 그게 무슨 감이야?
     하하, 근거 없는 자신감이요! 젊은 많이 쓰는 줄임말이에요.
근거가 있는 자신감이지. 어머니와 남편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정말 죽음이 두려웠어요. 죽을 운명을 안고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더라고. 실은 남모르게 목숨을 거둘 생각도 했었다오. 내 비록 선데이 크리스천이고, 믿음도 적지만... 죽음 너머의 삶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확실히 알겠어요. 그리고 그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천국이라는 것도. 그 믿음으로 마지막 시간을 버티고 있지. 아니야. 버티는 거 아니다. 죽음 너머의 영원한 삶 때문에 사는 게 의미가 있어요.
     부활 신앙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선생님, 믿음이 이렇게 좋으셨어요?
, 부활 신앙. 그래, 나는 부활 신앙인이야. 부활을 믿으려면 먼저 죽음을 믿어야 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가끔 열심인 교인들을 보면서 안 죽을 것처럼 산다고 느껴질 때가 있거든. 사전연명의료향서 신청 왜 했느냐고 했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죽겠다는 게 아니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예요.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집이든 호스피스든 어디서 어떻게 죽든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존엄한 죽음 아닐까.
     아, 선생님 메멘토 모리요! 늘 메멘토 모리를 말씀하시는 이유이시군요.
그래, 메멘토 모리. 이 사람 참 기억력 좋고. 하하. 친구 며느리와 딸이 각각 괴로워하는 걸 보면서 더 그런 생각이 들어. 나도 마지막엔 어쩔 수 없이 하나 밖에 아들에게 의존해야 하겠죠. 정 선생 말대로 의연하고 싶지만, 그건 모르는 일이에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해둔 건, 아들이 져야 할 부담을 최소한으로 해주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고요. 어떻게 죽든 기꺼이 받아들이며 죽고 싶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존엄한 죽음이에요.
     선생님, 웰다잉의 가능성을 발견했어요. 부활에의 확신이 존엄한 죽음, 웰다잉의 길이에요. 부활을 믿으려면 내 죽음을 믿어야 하고요. 오늘 부활 신앙에 대해 한 수 배웠어요.
허허, 참 이 사람 기억력도 좋고 정리도 잘 해. 아이고, 배고프다. 죽을 때 죽더라도 배고플 땐 먹어야지. 밥 먹읍시다!
 
 
<시니어 매일성경> 7,8월 호 기고한 글

장맛비가 종일 내리는 날, 점심으로 비빔면을 했다. 고기만 달라고 하지는 않지만, 고기가 없으면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는 육식 인간 현승을 위해서 고기 몇 조각도 올렸다. 야채도 먹여야 하는데... 음, 배추를 얇게 썰어서 면과 함께 비볐다. 첫 입에 "으음... 역시 엄마가 삶으니까 면발이!"라고 한다. 면발의 식감을 말하는 건데, 아마 아삭거리는 배추의 지분도 있을 것이다. 비빔면을 베이스로 하여 고기와 야채를 균형 있게 잘 먹였다. 

'음식, 마음의 환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절대 음식은 없다, 있다  (2) 2023.07.05
질문 한 번 잘하고 슈바인 학센  (0) 2023.07.02
쉪 컴 백  (0) 2023.06.23
설탕 듬뿍 토마토  (0) 2023.06.19
이런 삼겹살 또 없습니다  (0) 2023.06.0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