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윤아!

끝내 어정쩡하게 굳은 얼굴로 널 유치원 현관으로 밀어 넣고 들어왔다.

널 들여보내고 들어오는 길에 갑자기 엄마 자신의 표정을 생각해 보게 되었단다.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처럼 엄마의 표정을 들여다 보았단다.

무뚝뚝해 보이고, 경직돼 있고,긴장돼 있고.... 이게 너를 대하는 엄마의 요즘 표정이더구나.


'엄마 다림질 하는 동안 스타킹 신고 있어'하는 말에 여전히 빈둥대면서,

'엄마! 어디가 앞이예여? 한 줄 있는데가 앞이예여? 두 줄 있는데여?' 하는 너한테 불같이 화가 치밀어 올랐어. 아침 내내 엄마는 경직돼서 농담을 받아줄 여유가 없었고 너는 언제나 처럼 까불고 능청 떨고, 깐죽거리고...


생각해보면 니 말을 여유있게 농담으로 받아치면서 유치원 갈 준비를 하면 너도 엄마도 행복해질텐데...문제의 가장 근본적인 발단은 경직된 엄마의 태도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실은, 할머니 보시는 아침 드라마에 빠져서 밥을 못 먹는 널 보면서 이미 엄마는 마음이 단단해졌어. 너를 탓할 일이 아니지. 누구라도 싸우는 소리가 나는 텔레비젼에서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으니까.

하루의 시작을  어른들 싸우는 소리, 너로서는 이해도 할 수 없는 갈등관계를 가지고 울고 불고 소리 지르는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하게 하는 것이 너무 속상했단다.

그러면 여지 없이 엄마는 할머니의 라이프 스타일에 불평을 하게 되고, 또 이렇게 이질적인 문화를 가지고 함께 살아야 하는 현실에 한탄을 하게 된단다. 엄마로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것 같고 말이다.


오늘 아침 그 스트레스가 결국 여느 때처럼 채윤이 한테 터져버린 것이다. 정말 미안하구나. 엄마가 스스로 감정 조절을 못하고 게다가 그 감정을 채윤이한테 폭발해 버리다니...


유치원 가는 길에 마음을 풀고 따뜻하게 품어주고 싶었지만 잘 안됐단다. 그래서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즐겁게 지내' 한 마디 하고 돌아섰다. 텔레비젼을 틀지 않는 게 방법이지 틀어 놓고 보지 말라고 하는 게 방법이 아닌 것처럼, 이미 황폐해진 엄마 마음인데 사랑 어린 말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지.


빨리 분가하도록 일이 잘 되었으면 좋겠구나. 그런데 언제 될 지 모르는 분가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이렇게 보낼 수는 없는데...오늘 엄마의 숙제란다. 오늘 아침과 같은 상황을 잘 극복해낼 방법을 모르겠어. 예전에 잘 될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방법을 잊어버렸어.


채윤이에게 편지라도 한 장 남기고 출근하고 싶은데....

(이럴 때는 채윤이가 빨리 글을 읽을 수 있게되면 좋겠다 싶구나)

암튼, 채윤이를 위해서도 엄마가 마음을 잘 다스려야 되겠구나 싶다. 이렇게 메마를 마음으로야 어찌 좋은 엄마가 될 수 있겠니. 하루 종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하고 살께. 메마른 마음에 풍성한 사랑이 은혜로 부어지기를...저녁 때 만날 때는 아주 여유있고 넉넉하고 밝은 표정으로 채윤이를 안아 주도록 할께.


미안한 마음과 사랑의 마음을 담아서 엄마가...

2005/10/19

채윤이가 지금 현승이 나이쯤 됐을 때(30개월) 처음으로 집을 떠나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했었습니다. 동생이 태어난 이후 독차지 하던 사랑을 빼앗긴 채윤이. 엄마로서도 그런 채윤이를 어디에 보내는 것이 새롭게 적응해야할 일이었습니다.

그 때쯤, 다른 클럽에 썼던 글이지요. 요즘도 채윤이와 현승이는 엄마를 놓고 서로 자기 엄마라고 싸우는데... 채윤이로서는 현승이의 등장은 참 당혹스러운 일이었던 것 같아요. 아직 자기중심적인 30여 개월 짜리 아기가 타의에 의해서 양보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그 때는 그런 채윤이가 너무 가엾어서 안타까운 마음 말할 수 없었죠. 스트레스 받고 상처 받아 우는 채윤일 보면 더더욱 마음이 찢어지고요...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채윤이는 나름대로 독립된 한 인간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상처 주지 않겠다는 결벽증도 사실 엄마가 먼저 치유 받아야 할 병이죠.


=================================================================================


처음으로 채윤이를 집 밖으로 내보내면서 적잖이 마음의 동요가 있었습니다.울며 불며 안 간다는 아이를 봉고에 태우고 매정하게 문을 닫고는 '안녕!' 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돌아섰지만 정신이 없었습니다. 며칠을 그런 실랑이 끝에 마음이 정말 오락가락 했는데...이걸 계속 보내? 말어? 하지만 또 집에 놔두면 어쩔 것인가? 할아버지 한테 현승이 괴롭힌다고 구박 받는 건 뻔한 일인데...


이래 저래 어떤 선택이든 채윤이의 하루하루는 먹구름 뿐인 것 같았습니다.어린이집 뿐 아니라 할아버지와의 관계에서도 채윤이는 예전의 그 '완전한 사랑'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현승이가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채윤이는 좋든 싫든 채윤이는 영아기를 벗어나 유아가 되고 있구요. 채윤이가 서러워 우는 시간이 많고 원치 않는 곳에 있어야 하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쓰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러다가 좋은 채윤이 성격 다 버리는 거 아닌가? 하면서요.그렇게 두어 달이 지났습니다.


결국 채윤이는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아침마다 가기 싫다고 하면서도 9시부터 어린이집 가방을 메고 한 시간 동안 '소화차(어린이집 차) 언제와요? 몇 시에 와요?' 하고 있죠.엄마 아빠가 현승이 목욕을 시키거나 옹알옹알 하는 현승이가 너무 이뻐 정신없이 빠져있는 동안에도 저기 한 구석탱이에 앉아서 혼자 블럭놀이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그런 모습을 발견하면 가슴이 싸~해 지면서 채윤이가 한없이 가엾죠. '에이그 자식, 현승이 없으면 아직도 할아버지 할머니 사랑 엄마 아빠 사랑 독점하고 있을텐에...'


채윤이에게 부모로서 더 이상 해 줄 수는 없습니다. 분명 채윤이가 원치 않는 상황에 자꾸만 던져지고 스트레스 받는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채윤이의 몫이 분명히 있는 것이겠죠. 그래서 마음에 아주 작으나마 쓴뿌리가 생긴다 하여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부모 되려 하여도 최선의 환경을 줄 뿐이지 천국 같은 환경을 줄 수는 없으니까요. 나머지 부분은 하나님의 은혜의 몫이겠죠.그렇게 생각하니 최선을 다하되 너무 결벽증을 가지진 말아야 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한결 마음이 편해져요. 좋은 부모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지만 그 이상은 그 분의 손에 의탁하는 것. 이 진리를 다시 한 번 되뇌 봅니다.


2005/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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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백이란 멋진 디자인이 있어야 그 의미가 사는 법! 그런 면에서 정신실 씨의 교육법은

정말 탁월하다! (여보, 나중에 당신 글 모아서 책 한번 내봐. 정말이야!!!) 놀이와 교육을

적절하게 잘 디자인해주고 슬쩍 빠져서 아이들이 결국 상상력으로 놀이를 마무리하도록 하는

당신의 능력은 볼 때마다 감탄이라니까...


2   

자녀 교육도 부부가 좀 죽이 맞아야 될 텐데, 생각보다 나는 너무 무개념, 무원칙, 불성실,

수동적인 것 같다. 그러면서 은근히 아이들의 놀이와 능력을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며 걱정하곤 한다. 게다가 아내가 저러다가 아이들 교육 시기를 놓쳐버리는 건 아닌가..하는

우려 섞인 생각도 하곤 한다.


3 

아이들에게 내 생각을 주입하기 위해 강요하지 말아야 할 텐데... 걱정이다. 공부하고,

대화하고, 기도해야 겠다.

2005/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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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4학년 때 교생실습을 나갔었다. 유아교육과니까 당연히 유치원으로 나갔다. 교생실습 막바지에 가면 교생 혼자서 일일교육 프로그램을 짜고 운영을 하는 일이 있다. 물론 이 때 채점이 되고 교생실습의 학점을 좌지우지 하게된다.

암튼, 내가 그 all day 수업을 하는 날에 담당 교수님께서 지도 방문을 오셨다. 그 시간은 실내 활동을 모두 마치고 바깥놀이 활동을 하는 시간이었다. 엄마를 만나듯 반가운 맘으로 교수님을 뵙고는 '이제 수업 다 끝났어요. 바깥놀이만 하면 하교예요' 했더니...'수업이 끝나다니? 바깥놀이는 수업이 아닌가?' 하셨었다.


그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아이들을 위해서 뭔가를 해 줄 때만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내 원시적인 교육관이 깨달아진 날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때의 경험인지....요즘 음악치료를 하면서도 나는 음악이 없는 순간, 그 순간의 소중한 치료적 의미를 깨달아간다. 열심히 북을 두드리고 나서 오는 조용한 침묵의 시간을 채우는 아이들의 행동 하나. 연주하는 시간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한다.


아이들에게 여백을 주기.


채윤이 유치원 친구들은 이미 거의 초등학교 수준의 과외들을 하는 것 같다. 한글, 영어, 발레, 수학, 미술, 피아노, 영어 뮤지컬 놀이......뺀뺀이 놀면서 글자 한 자 제대로 못 쓰는 애는 채윤이 밖에 없는 것 같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나도 좀 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친구네 집에가서 미술 전공한 친구 엄마랑 미술놀이 하는 것, 것두 미술은 한 30분 하고 네 시간 이상을 친구랑 놀다 오는 것이 채윤이 과외의 전부다. 최근 조금은 불안했었다. 소신 때문이 아니라 돈 때문이 못시키는 것 아닐까?하는 마음이 스스로 들 정도였다.


최근에 읽고 있는 <잃어버린 교육, 용기>라는 책을 읽으면서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아이들에게 여백을 줘야한다. 쉽게 말해서 아이들 스스로 시간을 채우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열심히 놀 수 있는 여백의 시간들이 있어야 한다. 유치원 교사를 할 때부터 내게 변하지 않는 소신 하나는 '잘 노는 아이가 잘 큰다' 이것이다. 잘 놀려면 잘 놀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제공되어야 한다.


요즘 들어 채윤이랑 현승이가 둘이서 미친듯이 놀아대는 시간이 길어졌다. 아이들이 놀이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최대한 아이들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고 방해하지 않으려 애쓴다. 충분히 상상하고, 충분히 환경을 조정하고, 충분히 에너지를 쏟아내라고. 그 시간을 확보해 주는 것이 여섯 살, 세 살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 정신실이 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가서 정만 신기하다는 듯이 아이들이 널어 놓은 난장판을 보면서 '와~아, 이게 뭐야?' 하고 경이를 표해주는 정도. 그 정도면 족하다는 생각이다. 채윤이가 어리고 혼자였을 때는 사실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해서 놀아줬었지만 지금은 두 녀석 노는 것에 마당만 잘 깔아주면 된다는 생각이다. 그 시간을 통해서 현승이는 말을 배우고, 의사소통의 방식들을 배우고, 삶을 배운다. 채윤이도 마찬가지겠지.


두 녀석이 싸우는 일이 갈수록 많아진다. 한 놈이 다른 놈을 때리지 않은 이상, 나는 싸움에 최대한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 싸움에 여백을 주기 위해서다. 그 여백을 통해서 싸움을 싸우고 해결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했으면 하는 바램 때문이다. 현승이 같은 경우 죽자 사자 울면서 엄마의 도움을 구해도 '니가 누나한테 한 번 말해봐. 가서 친절하게 말해봐'하는 정도로 멘트를 해주고는 일부러 딴청을 해본다. 물론 빨리 참견을 해서 상황을 정리하고픈 충동이 없는 것 아니다. 그런 때는 나와의 싸움이다. 최대한 개입하고 간섭하지 않기. 참자. 참자. 참아야 하느니라...하면서 최대한의 싸울 시간을 준다.


아이들이 넘어졌거나,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바닥에 떨어뜨렸을 때, 할아버지와 싸워서(?) 울 때도 내가 참을 수 있을 만큼 참으면서 여백을 확보해 보려한다. 역시 매 번 잘 되는 일은 아니다.


나는 특히나 S와 F 성향이 강해서 개입하고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습성이 있어서 아이들 문제가 아니더라도 훈련해야 할 부분이다. 그런 훈련이 거듭될수록 아이들이 커지는 만큼 나도 함께 자라갈 것이라는 기대와 기쁨이 있다.

2005.9.5.

내가 과연 잘할 수 있게 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 중에 제일은 운동이다.

도대체 유전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내 동생은 운동을 전공하려고 할 만큼 운동을 잘하고 좋아한다.

지금도 30대에 노익장을 과시하면 젊은 애들과 몇 시간 씩 농구를 하곤 한다는데...


나는 학교 다닐 때부터 운동을 못해도 그렇게 못할 수가 없다.

100M 21초. 체력장때 카운트 하는 선생님이 출발하기 전에 초시계를 먼저 눌러줘서 18초. 이게 신기록이다.


아~ 학교 다닐 때 체육시간을 생각하면.....

열등감의 매트에서 뒹굴고, 열등감의 공을 던지고 놓치고, 열등감의 철봉에 1초 매달렸다 떨어지고...

정말 가고 싶지 않지만 예전에 청년부에서 탁구장 같은델 가면 우와~ 다들 놀랜다. 탁구를 치는 것이냐? 테니스를 치는 것이냐?

라켓에 공이 도저히 맞지를 않는다. 마음같이 안 되는 내 몸이 밉고 부끄러웠다. 운동이라 이름 붙은 건 뭘해도 그러했다.


결혼하고 남편하고 베드민턴을 간간이 치는데 예전처럼 그렇게 삣나가진 않는 것이 신기하여 열심히 쳐봤다.

세상에 태어나서 나보다 못하는 사람과 스포츠를 해 보는 경험을 하게 됐다. 우후후후후....


어머니가 다니시던 수영장이 한 달에 36,000원으로 싸다는 이유만으로 지난 4월부터 수영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수영 역시 시도해 보지 않았던 운동은 아니다. 결혼 전에 몇 번 시도를 했어도 남들 다 진도 평영 접영하고 있는데

끝끝내 자유영 호흡이 안 돼서 쪽팔려서 그만두곤 했었다.

채윤이 임신하고 임산부 수영교실을 다니면서 그나마 어설프게 자유영 호흡을 배웠다. 부력 때문에 임산부는 물에 더 잘 뜬다나 뭐라나

아무튼 그런 잇점이 있어서 그 넘기 어려운 자유영 호흡의 산을 넘었다.


역시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지만 이번 수영을 하면서는 내 마음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알 수 있는 기회였다.

처음에 수영을 하러 갔는데 역시나 뭐든 배우는 대로 뒤쳐지는 내가 보였다.

쪽팔렸다. 어느 날 뭐가 그렇게 쪽팔린가 생각을 했더니 '저 사람들이 내 우스운 폼을 보고 얼마나 비웃을까?'

하는 생각에 컸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니 내가 이상한 폼으로 수영하는 사람들 보고 '폼 참 이상하네' 라고 생각은 할지언정,

그것으로 사람을 비웃고 그러지는 않았다.

아! 자꾸만 자신이 없어지는 것이 '비교' 때문이구나. 라는 것을 깨달을 날이 내 운동의 역사에 획을 긋게 되었다.

사람들을 보면서 비교하지 않기. 코치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듣고 자꾸 생각하면서 열심히 열심히 해보기.


아~ 이것이 역사를 만들어냈다.

수영을 잘 하게 되었다. 누구보다 더 잘하게 되지는 않았지만 예전의 나보다는 더 잘 하게 되었다.

비결은 꾸준히 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연습하는데 있었다.

가끔 이상한 폼을 고치라고 지적해주는 사람들이 있으면 더 도움이 된다. 그걸 생각하며 연습하면 고쳐지는 것이다.


마음도 그러리라.

예수님 닮지 않아서 힘든 이 마음. 뭐가 옳은 것인지 알면서 도저히 나로서는 안 되는 그런 마음의 경지가 있다.

몸을 단련하듯 자꾸 생각하며 자꾸 연습하면 마음도 자라겠구나. 몸이 단련되는 것보다 시간은 더 걸리겠지만 말이다.

옆을 자꾸 보면서 '내가 좀 낫다고, 나는 너무 못하다고' 비교하지 않으면서 하루하루 안된다고 너무 좌절하지 않고 노력하는 순간이

쌓이면 마음도 단련되겠구나.


올 한 해는 수영을 배우면서 몸이 많이 건강해지고,

배우는 즐거움도 알게 되고,
40년(으악! 40년!!!) 이 가깝게 나를 따라다니던 큰 열등감 덩어리도 하나 떼어낸 것 같다.


감사, 감사, 감사다.

2006/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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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린이 성가대 지휘를 하면서 피스를 없애 버렸다.

연습 때 악보를 나눠주면 일단 연습을 하고 집으로 악보를 가져가서는 일주일 동안 가사를 외워오는 것이다.

그리고 주일 예배 때는 악보를 들고 하지 않았다.

만약 가사를 못 외운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 알아서 그 주에 성가대에 서지 못하는 것이다.


이건,

보통 위험부담이 큰 모험이 아니다.

왜냐면 최악의 경우 한 명도 안 외워올 수도 있는 거니까.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찬양을 하다보니 애들이라는 특성 때문에 가사를 잘 이해하고, 묵상하고, 삶에 적용시키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애들 말로 잘 풀어서 설명도 하곤 했지만 만족할 만한 수준의 가사고백이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아예 그냥 가사를 외우게 시키자'였다.

'집에 가서 묵상해 와라' 이것처럼 애들한테 막연한 숙제가 있겠나 싶어서 '외워와라' 했었다.


처음에 그런 의도로 시작을 했지만.

이것은 애들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시험이었다.

믿거라 하는 녀석들이 가사 안 외워 와가지고 저~쪽 회중석에 앉아서 성가대 쪽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을 때..

'아~ 저 녀석 빠지면 소리 낼 애가 없는데...'하는 생각이 들면 오금이 저리고,

'저 녀석만 구제할까?'하는 갈등도 잠시 하게 되고 말이다.


그러면서 나 자신에게 철저한 훈련의 기회가 되었다.

'사람을 의지하거나, 사람을 바라보거나,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찬양'을 연습하기.


최악의 경우에 두 명인가 외워왔던 적이 있다.

애들은 내심 '이 정도 됐으면 선생님이 우리를 다 구제하겠다. 연습하면서 외우라고 하겠지'하는 기대를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더욱 두 명만 데리고 주일 찬양을 드렸다.

정말 그 때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떨리고, 절망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이란...

그러나, 그런 기회는 모든 성가대 아이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남기게 되었다.

준비되지 못한 사람은 찬양할 수 없다.

단지 노래를 잘 하거나, 연습할 때 빨리 외울 수 있는 머리를 가졌다해도 최소한의 준비되지 않은 마음으로는 찬양하는 것이

옳지 않다.


물론, 그거 안 외우고 찬양 드린다고 하나님께서 그 찬양 안 받으신다고 가르치지는 않았다.


또 지금 샬롬 찬양대 지휘를 하면서 '연습 안 하신 분들 서지 마세요' 이러지도 않는다.

오히려 '지휘자님! 죄송합니다. 제가 지난 주에 연습 빠졌어요. 제가 이렇게 서도 되는지 원...' 하시면

'예~ 물론이죠' 한다.


생각해보면, 애들이라는 특성을 고려해서 했던 좀 고약한 짓이었다.

그러나 그 훈련이 내게 오히려 약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샬롬찬양대에서 음악적으로는 물론,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시는 집사님 한 분이 중국으로 가셔서 빈 자리가 생겼다.

또, 솔리스트 이시면서 지휘자의 마음에 큰 자리를 차지하시는 집사님 부부가 먼 곳으로 이사를 하셔서 또 자리가 비었다.

마음적으로 많이 의지가 되는 분들이라서 한 두 주 연습시간에 힘이 들고 지치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면서 예전에 어린이 성가대에서 두 명 데리고 지휘하던 생각이 난 것이다.

그렇다. 성가대 뿐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것이다.

몇 분의 결원으로
연습시간이 더 힘겨워지고, 어느 파트의 소리가 더 거칠어진다고 해서 그것이 찬양 그 자체를 어찌하지 못한다.


찬양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 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2006/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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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방학에 남편이 수요예배 찬양인도를 할 때 옆에 서서 싱어로 도왔었다.

여느 때 처럼 나는 찬양만 시작하면 목이 메여오고, 눈물이 앞을 가리는데...

어떤 때는 연습 때부터 눈물이 나와서 주체하시 못하곤 했었다.


그 때 남편이 그런 말을 했다.

'찬양 인도를 할 때는 가사를 끝까지 묵상하면 안 돼. 가사에 완전히 몰입하면 눈물이 나와서 찬양이 안 돼'


항상은 아니지만 나는 조금만 마음을 다잡아 먹고 찬양을 부르기 시작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주일 아침예배 시간에도 마찬가지고 목자 큰 모임이나 이런 때 잠깐 참양을 할 때도 그렇다.

이런 경우의 눈물은 민망스럽기는 하지만 대충 옆 사람 눈치 안 채게 수습하면 된다.


문제는 찬양인도를 할 때나 지휘를 할 때가 문제다.

지휘를 하면서 나에게 있어서 제일 힘든 건 눈물을 틀어 막는 것이다.

내가 조금만 눈물을 보여도 찬양대 여집사님들에게 파급효과가 너무 크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일단 너무 쪽팔린다.^^;;


예배를 시작할 때마다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찬양을 시하는데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시네'하는 부분을 부르다보면 일주일 동안 또 다시 더러워진 나의 일상과 영혼으로

눈물이 쏟아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렇게 찬양을 하다가 기도송 지휘를 하러 눈이 뻘개져 가지고 나가면....

아~ 정말....죽갔다.


찬양 인도자 중에서, 그리고 가끔은 설교자 중에서 내가 젤 견딜 수 없는 스탈이

감동받기를, 은혜 받기를 강요하는 분들이다.

분위기를 조장해서 분위기로 결국 사람을 울게 만들고 결국 은혜 받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것 말이다.

아마도 내가 찬양인도를 할 때 눈물로 인해서 가지는 큰 부담 중에 하나는 그거일 지도 모르겠다.

인도자의 눈물이 회중들의 정서에 영향을 미쳐서 '가사를 묵상해서 스스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따라서 우는 눈물이 되게 하는 건 아닐까?

그러니까, 찬양  그 자체 아닌 다른 것으로 분위기만 그럴싸하게 만들어서 찬양받으실 하나님과 찬양 드리는 사람 사이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게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염려.


그렇다고 찬양하는 시간에 내 눈에 눈물이 마르는 걸 원하진 않는다.

쪽팔리긴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뜨겁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감사하고 감사한다.


다만, 찬양인도와 지휘를 해야하는 그 자리에서 이것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2006/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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