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야



<즐겁게 안식할 날> 린 바압, 윤인숙 옮김, IVP


안식일이 안 쉬는 날이 되는 이유


그 옛날 청년시절부터 나의 교회생활은 ‘봉사의 생활’이었다. 봉사라는 의미가 교회에서 사용될 때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다 안다.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성가대를 하고, 찬양팀을 하고, 소그룹의 리더를 하고....이런 모든 기능(?)을 한꺼번에 다 하고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가끔 교회봉사와 신앙생활, 때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바삐 움직이는 그 봉사의 현장 어느 곳에 숨어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 것도 있었다. 주일 이른 아침부터 끼니도 거르면서 밤이 맞도록 동분서주하면서 보내는 주일, 그리고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하고 집에 돌아와 누웠을 때 뭔가 할 도리를 다 한 듯 뿌듯한 자족감.  또 교회봉사를 열심히 하는 것이 돈 되는 일도 아니고 그저 희생뿐인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다. 열심히 봉사를 할 때 교회 어르신들과 동료들로부터 받는 ‘입 마르는 칭찬의 달콤함’ 맛보지 않으면 모르는 은근한 맛이렷다.

때로 힘에 부치는 봉사를 하며 주일을 너무 빡세게 보내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이 두 가지 메리트가 나를 쉬지 못하게 한다. 내가 이래 뵈도 구원을 공짜로 받았는데 하나님께 뭔가 도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그렇게 뼈 빠지게 봉사할 때 나를 어여삐 보아주시는 그 많은 따스한 눈길들.

그렇다. 내게 있어 안식일이 ‘안식일’ 되지 못하고 ‘안 쉬는 날’이 되는 이유는 내 자체로는 하나님도 사람도 만족시킬 수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존재만으로는 안 된다. 뭔가 성과를 내줘야 한다. 성과가 있어야 나는 사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 행위 없이 내 존재만으로도 사랑받을 수 있다면 나는 과감히 안식할 수 있다.


쉬어도 쉬는 게 아닌 이유


시간이 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끊임없이 관계를 찾는다.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셨다고 한다. 관계의 존재로 말이다. 내 속 얘기를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또 내가 털어놓는 만큼 내게도 자신을 드러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좀 더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던 어떤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친밀해지고 단짝이 되어가는 것을 보면 나는 뜬금없는 외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신뢰하는 어떤 친구가 내가 거북해 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는 걸 보는 것도 불편하다. 역시 예상치 못했던 감정, 배신감 같은 것이 고개를 든다. 가끔은 내가 친밀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과시하고 싶기도 하다.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깊은 교제를 하고 있는지 말이다. 그래서 오버하며 친한 척을 해보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들어떻게든 연결되고 걸쳐져야만 안심이 되는 내 본성은 내게 시간이 주어졌을 때조차도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없게 만드는 이유이다. 마음과 시간의 모든 공간을 그냥 텅 빈 상태로 두지를 못하고 어떻게든 사람들로 채워보려는 욕구 말이다. 시간이 나면 사람을 만나서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고 전화 통화를 한다. 그 정도의 여유조차도 나지 않는다면 늦은 시간 사이버로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미니홈피, 블로그를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시간을 죽이는 일은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은, 그러나 결코 진정으로 연결될 수는 없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묻는다. “엄마! 설거지 다 하고 뭐 할거야? 쉴 거야? 컴퓨터 하면서 쉴거야?” 컴퓨터 앞에 앉은 엄마에게 또 묻는다. “엄마! 지금 일하는 거야 쉬는 거야? 어? 이건 누구 홈피야?” 키보드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쉬지 않고 빠르게 타닥타닥 날 때는 엄마가 일을 하고 있는 것이고, 의자에 약간 기대앉은 상태로 느리게 따닥따닥 클릭하는 소리가 나는 건 쉬고 있는 것이다. ‘아니야! 사실은 엄마는 지금 쉬는 게 아니고 엄마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 정처 없이 돌아다니면서 쉼을 찾.아.다.니.고 있는 거야’라고 정직하게 고백을 해야겠다.


모든 것 내려놓고 안식하기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안식함’을 통해 거룩한 삶의 리듬 속에 살고 있는 <즐겁게 안식할 날-Sabbath Keeping>의 저자 린 바압, 그녀의 결단과 그에 따른 열매가 부럽다. 도통 삶에서 여백두기를 못견뎌하는 내게, 여백이 생기면 그 여백을 뭔가로 채우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내게 그녀는 조용하지만 따끔한 일깨움을 준다. 일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닌 하나님으로 채워야할 공간이 있는데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이다. 대충대충 일과 사람으로 틀어막아 수습하려했던 공허함은 바로 나를 만드신 분께로 가서 다시 튜닝이 필요하다는 싸인 이라고 말이다. 튜닝 되지 않은 악기는 합주에서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이고, 독주를 할 때도 스스로의 귀를 불편하게 만들고야 만다. 줄이 다 풀어져서 삶의 연주가 엉망진창이 된 후에야 뒤늦은 수습에 나설 것이 아니라, 저자 책에서 보여주는 삶처럼, 아니 하나님께서 보이신 방법대로 여섯째 날에는 정확하게 쉬는 자리로 가는 리듬을 회복해야겠다. 매일 매일 주어지는 나만의 시간을 무엇엔가 걸쳐지는 것으로 얄팍한 위안을 삼을 것이 아니라 비워두고 내려놓고 쉬는 시간이 되도록 의식적으로 노력 해야겠다.

저자는 우연한 기회에 중동에서 2년 동안의 살게 되었는데 그것이 안식일을 지키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한 사람이 우연히 고국을 떠나 낯선 땅에 살게 되고, 거기서 전혀 새로운 문화경험을 하면서 발견한 보물이 오늘 이 책을 통해서 내게 전해졌다. 그 간에도 나의 하나님은 수도 없이 내 귀에 속삭이셨을 텐데....‘얘야! 일은 그만하고 내게 안겨 그냥 쉬거라. 뭘 그리 다른 쉼과 위안을 찾아다니는 것이냐? 그냥 나를 부르기만 하면 언제든 너와 함께 산책하고 대화할 준비가 되어있단다. 내게로 와서 쉬거라. 지쳐서 파김치가 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바로 지금 나와 함께 휴가를 떠나자는 말이다.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들었단다. 나를 찾아와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만 너다워지고 너의 영이 충만해진단다. 내게로 오렴. 내게와 와서 쉬렴’ 그렇게도 안타깝게 속삭이셔도 도통 못 알아듣는, 도대체 ‘참된 쉼’을 모르는 나를 위해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그 분의 딸을 사용하셨다. 가 가장 알아듣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처방이 되는 ‘책’을 써서 내 손에 들려지게 하는 이 방식으로 말이다.

생신 때마다 요리사 기능,

심심하실 때 여행기능,

부부싸움 하실 때 스트레스 해소기능,

속상하실 때 상담기능,

무거운 거 드실 때 운전기능,

컴터 부팅부터 인터넷 뱅킹까지 24시간 대기 컴터 강사기능,

전도연이 여우주연상 받았으니 영화 예매기능,

패티김 콘서트 예매기능 까지....


 

진짜 다기능 멀티플레이어 며느리 아니옵니까?

 

-.,-

 
       
조혜연 ggggg 이런거 울남편 해킹하면 곤란한데....빨리 닫아야징!!ㅎㅎㅎ (07.05.30 14:37) 댓글삭제
조기옥 알토란같은 손주 앉겨드리는 재주까지....ㅎㅎ
저도 울 털보가 볼까봐 얼른 닫아야 겠어용~~~ㅎㅎㅎ (07.05.30 23:04) 댓글삭제
정신실 아~ 것두 있었네요. 아버님 편에서는 젤 맘에 드시는 기능이 그 놈의 손주 안겨드린 기능일 것인데요..
ㅎㅎㅎ (07.05.31 01:20) 댓글수정삭제
박영수 난, 해당사항 하나두 없다..... (07.05.31 08:31) 댓글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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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만날 아이들에게 진실함과 헌신으로 다가가기를....

음악, 사람의 행동을 조작하는 얄팍한 행동주의 이론만을 가지고 아이들을 만나지 않고,

순간 순간 성령님의 리듬을 의식하며 그 리듬에 춤을 추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비록 말을 못하고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아이들이지만 그 짧은 시간동안 이들의 가장 깊은 갈망을 읽어내고,

그 갈망을 나의 사랑과 목소리와 따스하게 만지는 손길로 채우기 원합니다.

그러나, 그로써 다 채워질 수 없는 그 빈 자리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채우기 원합니다.

 

기도하며 주님을 갈망하며 공부하는 남편.

기도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에 실패함 없게해 주시고,

잘 지치고 피곤한 몸을 강건케 하옵소서.

 

우리 채윤이.

몸에 맞이 않는 기성복 같은 학교생활에서 너무 많이 좌절하여 자존감이 낮아지지 않도록 해주시고,

자신의 장점을 잘 발휘하며 즐겁게 생활하게 해주세요.

혼자 걷는 위험한 길, 외로운 길에 채윤이가 마음으로 예수님을 부를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현승이가 순간순간 담대함으로 생활하고 키과 지혜가 쑥쑥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열심히 뛰어 놀 때 현승이가 키가 자라게 하옵소서.

 

이 홈에 드나드는 사랑하는 사람들.

오늘 하루 사람의 위로, 사람이 주는 달콤함보다 위로부터 오늘 것에 목말라하는 은혜를 누리게 하옵소서.

그럼에도 이 홈이 여기 드나드는 모듬 사람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게 하옵소서.

혹여 여기서 읽고 보는 것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늘 제가 겸손하게 삶을 나누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글을 올리게 하옵소서.

 

나는 메말랐다고 하는 날에도 여전히 주님은 제 곁에서 생명의 물을 흘려보내고 계셨음을 믿습니다.

 

오늘 하루 종일 주님과 더불어 일하고 사랑하고 살기 원합니다.

2007.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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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부터 결코 완전히 회복되지 않는 목.

부어있는 날이 더 많은 임파선,

최근에는 침을 삼킬 수 없을 만큼 아픈 목.

게다가 콧물이 줄줄 흐르는 비염.


이런 정도의 증상이면 '후두암'이 의심이 된답니다.


동네 이비인후과에서 치료가 신통치 않아서 예전에 다니던 병원을 찾았더니 '내일 금식하고 다시 오세요'했어요.

느낌이 참 안 좋아서 잠을 설치고는 다음 날 갔더니 후두 내시경을 했어요.

검사를 마치고는 '이제 아니니까 안심하고 말씀 드리는 건데 후두암을 의심했어요'하드라구요.


다행이 성대 조금 안 좋고,

목에 염증이 포진해 있는데 좀 오래된 정도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 날 집에 왔는데 얼굴 한 쪽이 완전 눈 아프고, 코 아프고, 이 아프고...

잠을 또 못 잤어요.

병원에 갔더니 축농증이래요. 비염의 합병증이라나 뭐라나.

축농증이 심하며 그렇게 아플 수가 있다네요.


목의 염증과 두터워진 성대, 게다가 축농증까지...

요즘 완전 걸어다니는 이비인후과임돠.



 

주일날 예배 마치고 차를 마시고 있는데 찬양대원 한 분이 살짝 부르시더니 주머니에서 이걸 꺼내 주시네요.

눈물이 날 뻔 했지 뭐예요.

 

이런 사랑을 받아 먹고 싹 나아야 할텐데....

2007.5.2.

 

1

태어나서 첨으로 그런 적나라한 욕을 면전에서 바가지로 먹어봤다.

어제 치료하러 월곡동에 가는 길이었다. 유턴을 하기 위해 짧은 거리에서 차선을 바꿔야 했다.

오토바이 하나가 천천히 오고 있었고 무리가 되지 않게 차선을 바꿨고 신호를 기다리느라 섰는데...

그 오토바이가 옆에 와서 붙더니만 다짜고짜 기가막힌 욕을 퍼부어댔다.

내 생전 그렇게 막하는 욕을 내 면전에 대고 그렇게 길게 하는 걸 첨 들어봤다.

하도 기가 막혀서 입을 벌리고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눈물이 줄줄 흘렀다.

 

하도 기가 막히고 멍해서 어떻게 신호를 받았는지도 모르게 신호 받아 유턴을 하고 오토바이는 갔나부다.

눈물이 막 흘러내리는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서러움이 복받쳐 왔다.

그 서러움은 오늘만의 일이 아니라 최근에 이런 일을 한 번 더 당했던 기억이 있는 것 같았다.

쉽게 생각나지 않아서 '언제였던가?'하고 되짚어 보았다.

 

생각해보니 이런 일이 아니었다.

그 서러움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라고 정리되는 그런 정황들이었다.

그 오토바이가 운전 중 그리 잘못한 것도 아닌 다른 운전자에게 다짜고짜 쌍욕을 퍼부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여자이기 때문이다.

남자였으면 욕을 했어도 그렇게 심하게 하지 못했을 것이고, 게다가 덩치가 있고 인상이 더러운 남자였으면 욕은 커녕 꼬리를

내렸을지 모를 일이다.

그 순간에 마음으로 '주님! 주님 다시 오실 그 날에 이 불평등과 부조리를 회복케 하실거죠?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남자들로부터

무시당하는 이 부조리한 세상을 처음 창조하셨을 때의 아름다움으로 회복시키실거죠?' 이런 기도도 아니고 독백도 아니고 대화도 아닌

말이 마음으로 차올라왔다. 너무 황당한 독백이며 기도일까?



2.

여자들의 더 힘이 없고 약한 몸은 하나님이 이 땅에 생명을 주시는, 출산과 양육을 위한 축복의 통로로서의 몸이 아닌가?

예전에 채윤이를 갖고 입덧을 심하게 할 때 어느 분이 '입덧은 부모한테 보내는 아기의 싸인'이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이제 막 아기가 생겨서 자리잡아가고 있는데 몸에 배가 부른 것도 아니고 몸에 별다른 자각증상이 없으면 엄마가 조심하지

않을 수 있을테니 싸인을 보낸다는 것이다.

말이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에게 양분을 주기 위해 더 먹어도 모자랄 판에 그 무엇도 먹을 수 없는 미식거림과 구토가 있다는 건

내 몸에서 얼마나 위대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를 인식하라는 아이러니다.

그러고보면 여자들이 신체적으로 남자보다 연약한 것은 '생명'에 대한 하나님께서 숨기신 깊은 뜻이 있는 지도 모른다.

남자처럼 근육이 많고 뼈가 굵고 과격한 운동을 좋아하도록 했다면 생명을 잉태하고 열 달을 품는데 얼마나 더 많은 주의가 필요할

것인가? 막 굴릴리야 굴릴 수 없는 연약함은 '생명'을 위한 축복이 아닐까?


3.

생명을 잉태하고 품고 양육하기 위해서 매여 있어야하는 여자들의 이 연약함은 고스란히 '핸디캡'이 되어버렸다.

거리에서 운전 중에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욕을 얻어 먹어도 싸고,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소명을 받아 간 신학교에서 '여성 목사 불가'라는 논란을 몸으로 받아내며 상처만 받고 있어야 하고....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산천초목도 타락으로 인해 훼손된 것으로부터 회복된다 하는데....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상처받는 이 땅의 절반의 사람들에게 온전한 회복의 날이 오기를....


 
 
        
정신실 성호삼츈!^^
저 사실은 상처 받았나봐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운전하다 욕을 먹고나서 알았어요. 여자 목사 안수 껀에 대한 까페에서의 논의를 보고 생긴 상처가 있다는 것을요...^^; (07.04.20 16:54) 댓글수정삭제
조기옥 그쪽 동네 차도 많고 길도 좁아서 운전 잘하는 사람도 거기만 가면 버벅거리게 되는 곳이예요..
저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할 때가 있었어요. 아마 제가 혼자인 줄 알았나봐요.
저를 보고 험상궂게 욕하려는데 제 옆에 털이 부술부술한 털보를 보더니 입을 다물고 그냥 지나가더라구요... 어찌나 황당하던지...
같이 욕을 해댈수도 없는 상황이라 눈물만 쏟아졌을거예요. 억울하고 분해서...
제가 대신 실컷 욕해줄게요. 나쁜 X이라고...
오늘은 충분히 위로해주실 분도 옆에 계시니... 두 분 함께 하세요~ (07.04.20 19:52) 댓글삭제
정신실 위로는 별로 안해주고 어떡하든 한 잠이라도 더 잘 생각만 하네요.ㅜㅜ (07.04.20 23:39) 댓글수정삭제
정운형 연락처 좀 받아 놓지. 한 번 뵙고 싶은데....^^ (07.04.25 20:10) 댓글삭제
정신실 그러잖아도 번호판 외워서 개혁연대로 전화할까 싶었지.
근데 그런 거 없어도 너 잡을 수 있쟈나.
(07.04.26 09:03) 댓글수정삭제
강성호 이제야 형수님의 댓글을 봤네요. 죄송합니다. 사실 저는 여자 목사 안수 문제가 여성과의 문제가 아닌, 여성목사안수를 찬성하는 남자들과의 토론으로만 인식하였는데, 제 인식이 너무 좁고 작았네요.

요즘 사역하면서 눈물이 많아집니다. 제가 넓지 못하고, 깊지 못하고, 지혜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많이 울고 있습니다. 카페에 자매 동기들의 글을 보고서 마음이 더 힘들고 미안하네요.

형수님, 죄송합니다. 어떤 문제든지 여자에게 막 대하는 사람들을 저도 아주 아주 싫어합니다.

(07.04.30 20:10) 댓글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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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몸살과 함께 끙끙 앓으면서 쓴 글.

감기가 와서 앓은 것인지,

글의 무게 때문에 앓은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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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혁명> - 클리포드 윌리엄스 지음, 최규택 옮김, 그루터기 하우스



오버가 필요한 찬양 인도자

애써 좀 무덤덤해지려 노력하는 편인데도 나는 ‘찬양 인도자’에 대한 취향이 좀 까칠한 편이다. 내가 하는 일이 그렇기 때문에 직업상 음악을 적절히 사용하고 배치하는 방식에 대해서 까다로울 수 있다고 스스로 진단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내가 걸려서 넘어가지 못하는 문제는 단지 음악의 문제가 아니라 단적으로 찬양 인도자나 싱어들의 ‘표정’ 이다. 아마도 찬양하며 받는 은혜가 충만하다보면 자연스레 나오는 감격에 넘치는 표정을 감추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가끔 찬양 인도자의 멘트나 표정이 ‘오버다’ 싶을 만큼 심하게 홀리하거나 가사와 상관없이 한결같은 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나는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모르겠다.

차라리 이렇게 회중석에 앉아서 찬양을 할 때는 오히려 낫다. 내 맘 하나 잘 추슬러서 찬양에 집중하면 되니까 말이다. 문제는 그렇게 회중석에 앉아서 인도자와 싱어를 씹어대던 내가 바로 그 자리에 설 때다. ‘다른 어떤 생각도 하지 말고 찬양의 가사에 마음을 쏟자’라고 다잡아먹지만 역시나 회중을 의식할 수밖에 없어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며 결국 어느 새 표,정.관.리.에 들어간 내 자신을 발견할 때의 난감함이란.

게다가 찬양팀의 윗분이나 교회의 어르신들이 ‘아놔~ 앞에 서 있는 싱어들 좀 웃으라고. 표정 좀 밝게 하고 방긋방긋 웃으면서 찬양을 좀 하란 말이지. 그래야 보는 사람도 찬양할 맛이 나는 거 아닌가?’ 이러실 때 정말 난감하다. 개그맨도 아닌데 마음의 상태와는 상관없는 표정을 지으란 말인가? 무대에 선 희극배우라도 된 것처럼 연기를 보여 달라는 것인가?


고상한 행동, 불순한 동기

교회 주일학교 게시판에 초등부 아이가 글을 하나 올린 걸 보았다. 내용이라곤 별로 없는 짧은 글이었다. 그 내용도 없는 글을 올린 이유를 밝혀 놓은 것이 재미있다. ‘제가 이 글을 올리게 된 이유는요… 1번 달란트 받고 싶어서, 2번 칭찬받고 싶어서…예요’ 아이니까 가능한 자기표현이 아닐까 싶다. 보다 현명한(?) 방법이라면 달란트(이걸 모으면 나중에 큰 선물과 바꾸게 된다)와 선생님들의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을 최대한 감추는 것이 아니었겠나? 이렇게 바로 오토매틱으로 돌아가는 어른들의 처세와는 달리 아이들의 꼼수는 치밀하지가 못하다. 생각해보면 이런 것들이 어른인 내게는 어떻게나 빠른 시간에 어떻게나 교묘한 방식으로 자동화되어있는지… 나 역시 칭찬 받고 싶어서, 내가 하는 훌륭한 생각을 드러내고 싶어서, 이런 멋진 나를 사람들이 좀 부러워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말을 하고 글을 쓰고 어떤 행동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사도바울의 서신에 ‘바울을 괴롭힐 요량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목숨을 내놓고 복음을 전해야하는 그 살벌한 시대적 상황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울을 괴롭히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단다. 그 사람들은 뭐라 하며 복음을 전했을까? ‘여러분,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살 길입니다. 제가 이렇게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1번 바울보다 더 유능한 전도자로 인정받기 위해서, 2번 바울의 속을 최대한 뒤집어 놓기 위해서 입니다’ 라 했을 리가 없다. 어쩌면 그들 자신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이기에 그렇게 목숨을 내놓고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는 않았을까?


분열된 마음의 통합혁명

내 속에서 결코 드러내고 싶지도, 나 스스로 인식하고 싶지도 않은 나의 불순한 동기들이 숨어 있는 방을 발견했다. 그 방에는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말을 건네고 안부를 물어보는 선한 행동과 짝을 이루어 ‘예수님을 닮은 자’처럼 보이고 싶은 불순한 동기가 숨어 있었고, 찬양을 하면서 짓는 은혜에 취한 표정을 통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은혜를 끼치도록 해야겠다는 발칙한 동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이 방을 발견하고 영 마음이 찝찝해 어쩔 줄을 모를 때 내 손에 들려진 책이 『마음의 혁명』이다. 그렇다.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내 속에 숨은 이기적인 동기를 인식하고 내 마음의 분열성을 인식하는 일은 ‘혁명’같은 경험이다. 감기 정도의 자각증상을 느끼며 藥이 되려니 하고 펼쳐든 이 책은 내게 ‘암’을 선고했고 수술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엄포를 놓았다. 선한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면 됐지 뭐 숨은 동기 까지 이 잡듯 뒤져야 하는 거냐고 물으니 바로 그거란다. 선한 행동으로 끼치는 유익과 그로 인해 오는 반대급부에 중독이 되어 있는 내 영혼의 엑스레이 사진을 내미는 것이다. 영원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영원을 소유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으로 살다가는 영혼이 죽는다며 ‘마음의 혁명’이 필요하다는 처방전을 내주었다. 정말 나쁜 사람은 누구인가? 나쁜 뜻을 가지고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 아니다. 나쁜 뜻을 가지고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헌데 그 뜻이 딱히 나쁘다기보다 불.순.하.다.면 그것은 날이 갈수록 나를 하나님과의 진실한 관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독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의 혁명’을 통과하며 나는 결심했다. 분열된 마음, 다중성 속에 빠진 마음을 인정하고 거기서부터 빠져나와 ‘마음의 투명함’을 위해 매일 매일 내 속의 숨을 동기를 들춰보겠다고 말이다. 마음의 단일성을 회복하는 길은 하나님도 사람도 내 이기적인 동기를 위해 도구로 삼지 않겠다는 결심과 다르지 않다. 찬양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과 하나님을 향한 칭찬일 뿐 사람들에게 내가 얼마나 은혜 충만한지를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다. 설령 그것을 드러냄으로 회중들에게 은혜를 끼치겠다는 의지가 있다하더라도 말이다. 사람들을 돌아보고 돕고 위로하는 것은 그 사람 자체가 목적이지 ‘내가 이렇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도구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찬양하는 찬양 인도자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찬송가 204장)’ 찬양인도를 위해 앞에 설 때마다 끊임없이 이 찬양을 되뇌인다. 찬양 인도자를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과 그들을 바라보며 내 마음 속에 순간적으로 생겨나는 수많은 자기중심적 단편 영화들의 필름을 잘라버릴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저 찬양 시간에 투명한 마음으로 서서 찬양하는 것으로 인해 ‘자아’도 간 곳 없고, 영향력을 끼치고픈 ‘사람들’도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록 말이다.

찬양 시간에 찬양만을 목적으로 진실하게 찬양하는 인도자, 삶에서 사람과 사랑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하여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 그렇게 통합된 마음과 자아로 이슬처럼 맑고 투명해지기를….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정도는 아니지만 프리렌서의 삶은 '믿음'의 시험대가 되기 충분한 것 같습니다.

학교나 장애 어린이집 등으로 치료를 다니다보니 보통 1년의 계약을 하게 되고 매 3월이 되면 다시 스케쥴을 짜느라

분주해집니다.


치료를 그리 못하는 것도 아니고,

인상이 나쁜 것도 아니고,

그리 불성실한 것도 아닌데 이런 저런 이유로 새로운 자리를 구해야 할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나이에 아직도 치료사 구인 사이트를 들락날락 하고 이력서를 보내고 있자면 좀 한심스럽기도 하였습니다.

이 경력에 어디 이력서 넣어서 꿀리는 데라곤 없으니까 사실 자리를 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헌데 해마다 참으로 일이 묘하게 꼬입니다.

첫 판에 내 입맛에 딱 맞는 시간표가 짜지는 것이 아니라 꼭 속을 태웁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두 군데서 오라는 시간이 같거나 이동거리가 너무 멀거나 이렇습니다.

그러다 이번 학기에는 그야말로 이틀 일하고 나머지 날을 다 노는 것으로 3월 초를 시작했습니다.

당장 생계가 막막하지만 심하게 좌절하지는 않고 그저 좀 착찹한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이것두 예전 같으면 심하게 좌절을 했을테지만 그나마 경험을 통해서 '믿음'이라 할 수도 없는 눈꼽 만큼의

'믿음'이 생겼나봅니다. 아니 어쩌면 진정한 믿음이 아닐지도 몰라요)


그러다 막판에 두 군데 학교가 되었습니다.

이 두 군데를 통해서 제게는 하늘 아버지로부터 '메세지'가 온 것이죠.


메세지 하나.


성수동에 있는 초등학교 특수학급에서 치료를 하기로 하고 인사를 갔습니다.

다른 요일에 일할 미술치료 선생님을 만났죠. 초면에 농담도 하고 시간되면 나가서 같이 밥 먹고 가자고 하는 등

사람이 더풀더풀하기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암튼, 이 선생님과 함께 교장 교감님 인사도 하고 그랬는데 작년부터 미술치료를 했다는 이 선생님에 대한 칭찬이 자자한 것입니다.

얘길 들어보니 미술치료 시간이 두 시간인데 어떤 때는 세 시간도 하고, 학교에서 시킨 것도 아닌데 아이들과 만든 작품을

액자를 해서 복도에 걸어놓고 정말 열심히 했던 것 같았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알고보니 미술치료 선생님도, 특수학급의 담임 선생님도 모두 크리스챤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내 치료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시간'에 연연하는 치료가 되었습니다.

어떻게든 45분 50분을 채우는 것을 목표로 치료하고 있는 건 아니었나?

그저 나는 내 시간을 채우면 된다. 시간을 채웠으니 돈을 받으면 된다. 이런 식이 되어버린 것 같았죠.

음악을 통해서 아이들의 마음을 만지겠다던 그 열정이 넘치던 음악치료사는 어디로 갔느냐고요?

그렇게 '일(치료)'를 '돈'으로 매치를 시키니 일이 재미없고 힘들 밖에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 동안에 최선을 다해서 내가 즐길 수 있도록 하자.

샬롬찬양대 지휘할 때 시간을 아끼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연습을 시키고 인내하면 또 파트연습시키듯 하자.

하고 결심을 했습니다.

 

메세지 둘.

 

성수동에서 인사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월계동에 있는 초등학교의 특수교사 선생님에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서울 시내에서는 방과후 치료가 세션당 가격이 정해져 있는데 이 학교는 시가(?)보다 25%가 낮은 페이였습니다.

착오가 있었나 하고 이력서를 내보기는 했지만 전화 통화를 하다보니 그게 전부였습니다.

특수교사 선생님 말이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학교는 좀 어려운 지역에 있다고 했습니다.

해서, 자신이 맡고 있는 아이들이 치료교육의 혜택을 거의 못 받고 있기 때문에 주어진 예산으로 최대한의 치료교육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력서를 보니 '성가대 지휘도 하시고 유리드믹스도 하시고...저로서는 정말 해주셨으면 좋겠지만 페이가 적어서 안되겠죠?'

'저희가 공부하고 연구한 것이 있는데 최소한의 대우를 받고 일하고 싶은 마음이 있거든요'

하고 설명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마음이 영 불편했습니다.

'나는 언제부터 음악치료를 돈벌이로만 생각하게 된 것인가? 내 전공으로 자원봉사도 해야할 판에 치료혜택을 받을 수 없는

아이들에게 단지 페이가 적다고 거절하다니...'

다시 그 선생님께 전화를 했습니다.

'선생님! 저 지금도 늦지 않았나요? 그 아이들 만나고 싶네요. 그리고 선생님의 열정을 배우고싶네요'했습니다.



참으로 강렬한 메세지였습니다.

'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일'이 없으면 '돈'을 못 버니 마음이 불편하고,

'일'을 하면은 쉬고 싶어서 죽겠는 말도 안 되는 아이러니 속에서 정신 못 차리고 있었습니다.


나이가 드니 악기를 보따리 보따리 들고 여기 저기 치료하러 다니는 것 참 힘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말 아이들을 만나는 그 시간 만큼은 나 스스로 음악에 빠져 행복하게 헤엄치는 시간이 되어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을 해봅니다.

아~ 단지 음악에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리듬을 기본박으로 깔아놓고 말이죠.

성령님! 도와주실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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