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모닝커피는 갑자기 쿠바다.
쿠바 원두는 아니지만,
쿠바에 가본 건 아니지만,
가본 사람의 마음이 담긴 잔에 담겼으니
쿠바 커피다.
그들의 몸과 영혼이 주님 안에서 행복하길.

쿠바가 담긴 잔에 커피를 마시니,
한 모금 한 모금에 기도를 담게 된다.

오늘 모닝은 갑자기 커피 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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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시끌벅적한 모임이 있다. 코로나 시작 전에 만났다니까 3년 만인데, 토요일 브런치(이 얼마나 느긋하여 편안한 만남인가!)로 모였다. 달력에 이 약속을 "명일친구"라고 적어 놓은 걸 채윤이가 발견하고 빵 터졌다. “하하하하… 명일… 명일… 명일 친구!” 명일'이 아니라 '친구'에서 터진 거지. 스무 살 차이 친구들. 전에 명일동 살 때 우리 집 거실, 어느 카페, 동네 놀이터 그네... 같은 데서도 시끌벅적 만나곤 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티키타카와 터지는 폭소로 만나는 시간 동안 오디오가 비는 구간이 없다. MBTI 얘기가 나왔는데, 정신 차리고 제대로 보니 나만 외향이고 나머지 셋이 내향이다. 초등 4, 5학년 때 어린이 성가대 지휘 선생님으로 만났고, 얘네들이 지금의 채윤이 나이이던 시절 청년부 목회자의 아내로 다시 만났으니 길게는 30년이다. 알아온 세월이 30년인데, 외향과 내향의 이름을 붙여보니 낯설다. 정말? 너가 내향이라고? "저 여기서만 이래요." "야, 나도 너 네하고 있을 때만 이래.ㅋㅋㅋ"

Carl Jung이 말하는 내향과 외향 개념이 말이 많고 적음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물론 외향과 내향이 드러나는 양상 중 하나가 '말'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렇게 결론을 냈다. 편안한 곳에 있으면 누구나 말이 많아진다. 누구나 거침없이 자기 얘기를 한다. 심지어 내향형도 그렇다. 얘네들하곤 단톡방도 시끄럽다. 감정도 있는 그대로 즉각적으로 드러낸다. 깔깔 웃었다가 갑자기 울었다가... 전에 한참 단톡이 활발할 때(아, 톡이 아니라 '마이피플'이었구나...ㅎㅎ) 방 이름이 "울고웃고"였다. 중간에 외향 하나가 더 투입되었다. 반주자였던 H는 나랑 딱 10년 차이의 외향-외향, 죽이 너무나도 잘 맞는 지휘자 반주자였는데. 액면가는 외향 다섯이서 토요일 아침 브런치 카페 구석에 앉아 말과 웃음으로 꽉 채우고 나왔다. 결론은.

맛있게 먹으면 무조건 0 칼로리!
편한 사람하고 있으면 무조건 외향형!

그래도 난 찐 외향형인 게, 말하고 웃고 에너지를 '소비함으로 채운' 게 되었다. 가득 주유한 몸과 마음으로 정자역에서 집까지 탄천을 따라 걸어왔다.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집에 다 왔는데 머리 위가 시끄러워서 고개를 들어보니 까치 다섯 마리가 나무에 앉아 떠들어 대고 있었다. 너네 친구들이 편하냐? 지금 다들 외향형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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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을 맞았다.

 

손글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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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초입 어느 날. 팔당대교 아래 메타세쿼이아 길을 걷고 있었다. 세 여인이 나란히 걷는데, 좌 엄마, 우 딸이다. 그러니까 내 위치는 모녀 사이이고, 나는 엄마와도 친구이고 딸과도 친구이다. 뭔가 몹시 자랑스러운 관계이다. 저 앞에는 두 남자가 걷고 있다. 한 사람은 JP, 또 한 분은 엄마 님의 남편이며 따님의 아버님. 풍경 사진을 찍던 엄마 님께서 앞의 두 남자 뒷모습을 앵글에 잡더니 말씀하셨다.

저기, 두 신부 같지 않아?(60대)
두 신부요?
그 영화 있잖아. 그거...
두 교황?
어, 그래. 두 교황.
푸하하하하... 두 신부...
느낌이 비슷하네요. 두 분 옷 색깔도 좀 그렇고. JP는 모르겠는데, 목짠님은 정말 그 라칭거 같아요. 그 배우 누구죠? 그 배우랑 느낌이 비슷한데....(50대)
아, 그 배우... 거 있잖아... 뭐지 이름이?(60대)
뭐였더라요? 생각이 안 나지?(30대)
알... 뭐 아냐? 알칸소....도 아니고, 알퐁스 도데도 아니고...(50대)
아, 거시기 있잖아.(60대)
안소니 홉킨스요!(30대, 검색해서 찾아냄)
맞아. 맞아. 앤서니 홉킨스!

이 에피소드 포스팅 하고 싶었었는데 바쁜 가을 지내느라 잊고 말았었다. 지난주 뉴질랜드에서 보내오는 사진을 보다 다시 떠올랐다. 두 신부 아니고 두 교황 아니고...

두 강사님으로 뉴질랜드 코스타에 함께 가셨다. 컨퍼런스 전에 한 교회의 극진한 환대를 받는 행복한 사진이 막막 날아왔는데, 앤서니 홉킨스 강사님 인맥 덕이었다. 어쩌면 그날 메타세쿼이아 길에서 입었던 옷과 같은 옷들을 입고 두 신부, 두 교황, 두 강사... 영화를 계속 찍고 계셨다.

채윤이는 두 사진을 보고 "오, 두 명의 아굴라! 그런데 엄마, 아굴라가 무슨 뜻이야? 옛날에 그렇게 불렀던 것 기억나는데..." (이 아이의 기억력을 사랑하고, 청순한 뇌를 사랑한다.) 20년 전 일이다. 가정교회 목짠님으로 만나서 참 행복한 교회를 경험했었는데... 거기서 분가라는 것을 하고, 또 분가라는 것을 하며 우리가 목짜가 되었을 때이다. 한 작명하시는, 서쉐석목짠님이라고도 (채윤에게) 불리셨던, 앤서니 홉킨스 목짜님께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목장'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셨다. 줄여서 AP목장이라고 불렀고, 목장 시절도 내 인생 어떤 '교회'를 누렸던 때이다.

세월을 두고 만남을 이어가고, 나이를 너머 친구가 되어가는 것이 좋다. 신형철의 책 제목 『인생의 역사』처럼.
인생의 역사, 만남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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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팬데믹으로 인한 비대면 영상 예배 최고의 수혜자는 남편 JP이다. 정확히 말하면 JP 목사. 인기가 말할 수 없이 치솟았다. 가장 어렵고 까칠하고 무서운 교인인 아가들에게! 도대체 아가들이 왜 이리 목싼님, 목싼님 하는 거지? 처음엔 영문을 잘 몰랐는데 영상 예배 효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양복 쫙 빼입고 일주일에 한 번씩 티브이에 나오는 남자다. 알 수 없는 무슨 말을 떠들어 대는데 엄마빠가 그 시간만 되면 순해지고 착해져서 고분고분해진다. 주일 예배 시간이다. 그 분위기에서 아가들은 목싼님에게 꽂힌다. 엄마빠 시선이 가 있는 거기에 머무르다 괜히 그 남자를 좋아하게 되는 거다. 목싼님보다 젊고 훨씬 잘 생긴 제 아빠가 결혼식에 가려고 양복을 입고 나서니 "하아, 아빠 너무 멋지다! 꼭 목사님 같애...."라고 했다는 간증도 있다. 목싼님 인기에 거품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비싼 아가(기본적으로 아가들은 다 비싸지만)가 집에 왔다. "목싼님 집에 갈까?" 이 말에 기대에 부풀어서 온 거다! 평상복 목싼님을 보고 동공지진이다. 양복도 안 입고... 니가 왜 여기서 나와... 혼란스러운 눈빛. 어디서 봤는데, 익숙하고, 좋은 사람인데, 낯설어... "목사님 집에 가자"는 말에 아가는 영상 속으로 들어가는 줄 알았겠지. 게다가 이 목사님 평소와 다르게 살갑고, 막 웃고, 막 기타 들고 반짝반짝 작은 별을 쳐주고... 아가는 정말 당황했다.

 

양복도 안 입고, 설교도 안 하는 목싼님은 잠시 그러다 조용히 사라졌다. 어디서 본 듯한 호들갑 아줌마가 나타나 호들갑에 호들갑을 떤다. 그게 나다. 정말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놀아줬다. 프라이팬 덕후 아가인지라, 온갖 프라이팬과 냄비 다 꺼내 주고. 얼음도 좋아하니까 미리 얼려놓은 얼음까지. 얼음이 녹아 국물이 되었을 때 소면도 대주고, 바질도 꺼내 주고... 냉 바질 국수라는 신메뉴도 같이 만들었다. 피아노도 쳐주고... 혼신의 힘을 다했는데. 

 

마지막엔 목싼님이었다. 인사하자고, 뽀뽀하자고 들이대는 나에게 저리 가라, 얼굴 치워라 소리를 지르고. 목싼님을 바라보는 눈빛은 나긋나긋했다. 분하다. 분하고 억울하다. 충분히 이해된다. 막 들이대는 거 나도 싫다. 싫겠다, 정말. 어쩔 수가 없다. 밀당이 안 된다. 좋으면 막 들어가게 된다. 참아지질 않는다. JP가 얄밉다. 양복 빼 입고, 영상 빨로 얻은 인기, 거품 낀 인기가 증말증말 질투가 난다. 밀당을 못하는 나여, 좋은 걸 참지 못하는 나여. 화로다 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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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즐거움은 '새로운 것'을 마주하는 설렘인데, 새로운 것은 낯선 것이기도 하다. 늘 걷던 길을 벗어나는 것이다. 늘 걷는 길은 대체로 예측 가능하다. 저만큼 가면 大자로 누워 있는 고양이가 있고, 오른쪽 탄천엔 사람들이 많을 거고, 왼쪽으로 가서 올라가면 조용하겠지만 그늘이 없어 더울 거고... 낯선 곳으로의  여행에도 나름의 '예측'을 장착하지만 그 예측이 모두 머리로 하는 것이다.  검색하고, 그려보고, 충분히 예측하고 떠난다. 직접 몸으로 걸어보는 것과는 다르다. 그래서 여행은 체험이다. 인공위성 사진으로 들여다보는 것과 직접 가서 거기 서보는 것의 차이는 얼마나 큰 것이다.

 

 

예기치 못한 즐거움과 예기치 못한 어려움이 사이를 오가는 것이 여행이다. 그 사이를 오가며 며칠 코스타 일정과, 시카고 뉴욕 여행을 마치는 마지막 날에 뉴저지에 있는 켈리 님을 만났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려면 코로나 검사 음성 결과 확인이 필요하다. 48 시간 이내의. 손쉽게 무료로 할 수 있다는 것이 '검색'을 통해 했던 예측이었는데, 그새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검사절차도 절차지만 1인당 200불의 검사 비용이 든다니! 여행 중 예측 못하는 많은 것 중에 타격감이 가장 큰 것은 사실 비용이다. 뉴욕 여행 중에 만나기로 한 켈리 님에게 이 사실을 알렸더니, 현지인 메리트에 타고난 정보 수집력을 발휘하여 문제를 해결해버렸다. 최소 비용으로, 자가검사 키트를 이용해 비대면 검사를 하는 것이었다. 이 검사로 얻은 결과지를 인정해주는지, 한국 당국에 메일까지 보내어 확인까지! 그리고 뉴욕 출발 당일 호텔로 와 검사 진행까지 깔끔하게 해 주셨다.

 

적지 않은 예측 불가의 사고를 경험한 여행이었다. 정말 사고였다. 출발 전날에는 일행 중 연구소 D 쌤이 공원에서 사고를 당했다. 천만다행으로 최소한의 상처를 입었지만,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사고였다. 외적인 사고만이 아니다. 내적 전쟁도 만만치 않았다. 여행의 즐거움이 적지 않았지만, 예측 못한 어려움으로 겪은 고충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 코로나 검사 문제가 해결되고도 여전히 남아 있는 걱정은 "우리 양성 나오면 어떡하지?"였다. 비행기는 어떡하고, 10여 일의 체류를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하냐고? "설마 하나님께서 그것까지 하시겠어? 그럼 너무 하지. 겪을 고난은 다 겪었지!" 셋이서 쓸데없는 예측 수다를 주고받곤 했는데, 다행히 모두 음성! 안도의 한숨!

 

켈리는 그렇게 우리에게 선물이었다. 두 딸(채윤이와 D쌤)은 켈리 님이 뉴욕 천사라고 했다. 존재 자체가 선물이었는데, 직접 만든 카드에 세 사람 따로따로 선물을 준비해 오셨다. 이메일 한 통으로 시작된 인연이다. <나의 성소 싱크대 앞>을 읽고 받은 감동으로, 그 밤에 바로 보냈다는 그 이 메일이 만남의 시작이었다. 책이 나올 때마다 멀리 미국에서 구매를 하고, 응원을 보내오고. 이러다 이 분 만나는 거 아냐! 싶었는데, 정말 한국에서 만나는 역사가 생겼다. 연구소 '일일 글쓰기 강좌'를 했던 2019년 가을. 20년 만에 한국에 나가는 언니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글쓰기 강좌에 등록을 하시겠다는 거였다. 어머, 이 분은 받아줘야지! 그리고 그날 글쓰기 모임은 두 분의 글로 더욱 풍성해진 기억. 그대로 헤어지기가 아쉬워 내가 데이트 신청을 했고, 두 분과 함께 남한산성에서 보낸 시간의 기억이 아련하다.

 

'

코로나 음성 확인까지 하고, 안도하며 체크아웃하고, 점심 대접까지 받았다. 여행객 또는 이방인으로서는 검색해서 찾을 수도 없고, 엄두도 내지 않을 식당에서 근사한 점심식사를 했다. 센트럴파크가 내려다 보이는 창가에서! 이 표현을 하자니 다시 눈가가 뜨거워진다. 2주간의 일정을 잘 지냈다고, 안팎의 사고를 잘 견뎌냈다고 베풀어 주시는 잔치상 같았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You treat me to a feast, while my enemies watch. You honor me as your guest, and you fill my cup until it overflows.)" 이번 코스타의 주제는 'Let us feast'였다. 이 아름다운 오찬으로 이방인 셋은 환대를 경험했다. 내 영혼의 잔이 넘쳤다. 켈리 님, 천사 맞다. 그분이 보내신 천사였다.

 

 

 

 

좋은 사람

Carl Jung은 '동시성'이라 하고 우리 동네에너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한다. 도모한 일이 흘러가다 누군가의 도모를 만나 내 통제 밖의 일이 되는 것. 그리고 일을 도모한 각각의 사람에겐 계획과

larinari.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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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4일, 뉴욕에서 실시간으로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 가져옴)

 

쌍둥이빌딩이 있던 자리에 만들어진 인공분수 앞에 섰다. 하염없이 떨어지는 물줄기가 그치지 않는 눈물로 보였고, 음각된 이름 하나하나를 읽자니 슬픔이 밀려왔다. 하나의 이름이 아니라 한 존재, 하나의 우주인 생명임을 느낄 수 있었다. 둘레를 따라 걷는데 어느 이름, 아니 생명 옆에 흰 장미 한 송이가 꽂혀 있다. 소중한 한 생명이었을 뿐 아니라 누군가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꽃을 꽂고 간 어느 분을 위해, 여기 새겨진 사랑을 잃은 분들을 위해 기도했다. 정방형 분수를 둘러싼 관광객들 역시 성별, 인종, 몸의 생김, 소속한 국가, 가진 이념…과 무관하게 아름다운 생명이어서 음각된 이름과 다름 없는 각각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했다.

코스타 기간에 교회 한 권사님께서 호스피스로 가셨단 소식을 들었다. 아직 권사님의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하루 이틀 지나 남편이 허락되지 않는 면회를 다녀왔다는 얘길 전해왔다. 꼭 권사님을 뵈어야겠고, 권사님 역시 자신을 기다리고 계실 거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렇게 권사님을 뵙고 손잡아 드리고 왔다고. 의식은 없으시지만 발을 만져드릴 때 반응하셨다고, 분명히 아시는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소천 소식을 전해왔다.

팔십여 년 권사님 생애 마지막 6년의 인연으로 만났다. 어릴 적부터 음악을 좋아하셨단 얘기, 약한 몸으로 태어나 고생이 많으셨던 얘기, 교회 분쟁을 맞기 전 성가대 봉사가 그렇게 즐거우셨단 얘기를 반복해서 들었다.  그 외 어떤 인생을 살아오셨는지는 잘 모른다. 생애 마지막 시간 목회자의 전횡으로 인한 교회 분쟁을 겪으시고 만난 목사가 남편이다. 남편이 권사님 생애 마지막 목사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몸이 편찮으시고 두려울 때 전화하셔서 “목사님, 기도해주세요.”라고 하셨다. 권사님께서 오래 섬겨오신 대형교회 당회장 목사가 가진 아우라나 영적 능력 같은 건 없는 목사이다.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들의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기도해 드리고 위로하는 남편을 볼 때 유일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목사하길 잘 했나 봐.”

그라운드 제로에 섰던 시간에 한국에선 권사님 발인예배를 드리는 시간이었다. 조용히 혼자 짧게 권사님 천국 환송 기도를 드렸다. 같은 시간 모마 미술관에 가 있던 벗이 사진을 보내왔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초를 켜고 기도 드렸다는 메시지와 함께. 저 눈물같은 분수와 불 밝힌 초에 권사님의 생명과 사랑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담는다.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이들의 슬픔에 잇대는 기도를 담는다.

한혜숙 권사님, 감사했고 사랑합니다. 머지않은 날에 천국에서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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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카드를 받았다.
정성 담긴 고운 필체로 뭐라뭐라 쓰여 있는데,
미래 문자라서 해독이 어렵다.
천국 문자다.
읽어낼 재주가 없다.
















다행히 번역이 붙어 있다.

스승의 날 카드다.
동윤아, 섭섭하다!
우리 친구 사이인 줄 알았는데...
동윤이랑, 나랑, 브라키오랑 친구잖아.
내가 선생이면 네 엄마 선생이지...
네 엄마랑도 요즘은 거의 친구 먹는다.
(아, 며칠 전에 네 엄마 문자를 씹었다. 나중에 답신 해야지, 하고 잊었네. 괜찮겠지?)
네 엄마가 스승의 날 선물에 너를 끼워 넣은 거구나.
취향 저격이네!

그렇다면... 고맙다, 내 친구 동윤이 엄마야.
(자꾸 문자 씹어서 미안해.)

오늘도 잘 살게!
못 살 이유가 백 개라도
동윤이가 잘 살으라 했으니 잘 살아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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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수업에서 반장을 하고 있다. 비대면으로 진행되다 보니 수업마다 일종의 조교가 필요하고, 반장이 그 역할이다. 뭘 시킨다고 하는 성격이 아닌데 좋아하는 교수님이라 덥석 하겠다고 했다. 좋은 수업의 반장으로 즐겁게 한 학기 보내고 있다. 학비 비싸다 비싸다 노래를 하지만, 이번 학기 세 과목 수업이 모두 좋아서 아깝지가 않다. 자본주의적 사고를 거두고 마음 가는대로 계산한다면, 한 학기 수업료 분을 한 과목 당 낼 만큼의 가치가 있다. 물론, 다른 학생들도 그리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다.

반장 일이라는 게 이런 것이다. 사이버 캠퍼스에 올라온 줌 수업 주소 단톡에 퍼 나르기. 교수님께 사소한 민원 접수하기. 반장으로서 가장 뿌듯한 일은 그거였다. 교수님의 사이버 캠퍼스 계정에 문제가 생겨서 강의 줌 주소를 이미지 파일로 카톡방에 올려주시는 거다. 반장으로서 학우들을 위하여 이 한 몸 불태우리!!! 돋보기 끼고 이미지 확대해 놓고는 한 땀 한 땀 쳐서 텍스트로 만들어 올려 바로 링크 접속이 되도록 하였다. 내가 연구소에선 소장이라. 연구소 샘들이 최고의 조교로 알아서 줌 열어, 줌 주소 올려, 중간에 문제 생기면 일일이 개인 톡 하고 통화해서 문제 해결해. 이런 대접받는 소장인데. 돋보기 끼고 "흠... 대문자 N, 그다음 소문자 q... 이건 뭐야? 대문자 I야? 소문자 l이야?...." 이런 봉사를 하였다. 너무나 즐거웠다. 사소한 민원처리 또한 즐거웠다.

바쁘고 분주한 스승의 날을 보냈다. 각 수업에서 반장 주도로 스승의 날을 챙겨달라는 원우회의 부탁. 이런 거 또 아무렇게나 하고 싶지 않은 태생적 이벤트주의자로서 아드레날린 방출이다. 줌 수업 상황에 맞춘 여러 아이디어들이 오가곤 했다. 손편지 써서 ppt로 띄우기... 등. 손편지는 다른 과목에서 이미 썼고. <음악과 영성> 수업이라 음악을 활용해보려 했으나, 일천한 콘텐츠로 교수님 앞에서 뭘 하기도 그렇고. 채윤에게 하나 연주해 줄래? 했다가 오버하지 말라고 까이고.

학우들 부담되지 않고, 교수님 너무 민망하지 않게 조촐한 서프라이즈를 도모했다. 교수님 강의 시작하는데 마이크 켜고 난입하여 "저, 신부님 드릴 말씀 있는데요..."를 신호로 학우들은 A4 용지에 감사 메시지를 써서 카메라에 비추기! 몇 초 안 되는 이벤트였는데 화면 캡쳐 하랴, 상황 살피랴, 심쫄이었다. 부끄러워하시는 교수님 얼굴을 제대로 감상도 못하고. 이 와중에 나는 팬심 가득 담아 교수님 성함으로 삼행지를 지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없는 시간 쪼개서 발품 팔아 선물을 준비하고, 연이은 강의와 원고 부담을 뒤로 하고 직접 전달하러 나섰다. 또 하나의 반장 임무였다. 가톨릭 신학교 교정을 걸어보고 좋은 시간이었다. 그냥 좋은 시간이 아니라 생각지도 못했던 땅에 서는 행운을 얻었다.(그 땅에 대해선 언젠가 공개하리!) "학생이 준비되면 선생이 온다." 중국 속담이란다. 나이 들어, 경계를 넘어가서 배우는 용기 내길 잘했다 싶은 것은 좋은 선생님들과의 만남이다. 감사한 선생님들께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몸으로 뛸 수 있어서 더 의미 있는 스승의 날이었다. 꽃집이 없어서 버스 한 정거장을 다시 거슬러 걸어가 꽃을 사고, 골목을 헤집어 문방구를 찾아 카드를 사고... 중고생이 된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면, 해마다 스승의 날 마음 한 구석 슬픔이 일렁였다. 오늘의 내가 혼자 된 게 아닌데. 감사할 선생님이 한둘 아닌데. 정작 감사를 표할 수 있는 선생님이 없다. 가지각색의 이유로 그렇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게 된 예전 어느 날의 배움이 더는 싫지 않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선생님들이 더는 밉지 않다. 그렇다고 기쁘게 감사를 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게 아니라도 고마운 선생님들이 너무 멀리 계시다. 마음의 감사를 그저 혼자 여러 번 드린다.

오랜만에 반장 완장을 차고 지난날 모든 스승님들께 하듯 선물과 이벤트와 꽃과 카드를 준비하니 그냥 좋았다.

스승의 날인 5월15일은 주일이었다. 어느 교회 청년부 예배에 강의를 갔는데, 광고하던 청년이 담당 목사님을 호명하더니 스승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여기도 또 서프라이즈 당하신 스승님! 꽃다발 안은 목사님이 놀라고 민망하여 스승의 노래를 듣고 계시는데, 내 마음이 울컥했다. 얼마 만의 스승의 노래인가. 아, 목사도 스승이었지. 목사도 언젠가는 스승이었다. 남편이 도사님으로 불리던 강도사 시절, 친구네와 휴양림으로 놀러 간 적이 있다. 스승의 날 지난 스승의 주일이었는데, 주일예배 마치고 늦게 합류한 남편이 커다란 꽃다발에 커다란 케이크를 들고 와 바비큐장이 환해졌던 기억이 아련하다.

우리에겐 모두 스승이 필요하다.
스승이 필요한데, 스승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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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워서 쓰러지겠귀.

무자비한 귀여움 어택에 방어가 안되어... 이러다 내가 죽겠긔.

 

지난 주일 교회 아기들이 모두 과자 백팩을 메고 돌아다녔다. 어린이주일 선물로 선생님들이 준비하신 것인데, 세상에 이렇게 귀여운 백팩이라니! 아니다. 백팩 자체는 그냥 막 신박한데, 백팩 매시는 분들의 귀여움이다. 쟤가 보기보다 무거운 백팩이다. 사이드에 뽀로로 음료수가 한 병씩 달려 있으니, 저 쪼그만 등이 감당할 무게가 아니다. 사진의 저분도 수월 치는 않을 텐데 나름 그 무게를 이기고 의연함을 잃지 않으시지만(아오, 저 조그만 나이키 운동화는 또 어쩔!). 직립 보행한 지 얼만 안 된, 휘청휘청 걸음마하는 아기가 저도 가지겠다고 달려들었다. 백팩 메다 뒤로 넘어갈 뻔했다. 그렇지, 쌀가마니 수준 아닌가! 쌀가마니 등에 지는 수준 아닌가 말이다. 

 

귀엽고 사랑스러워 터지는 심장 부여잡고 커다란 하트를 보낸다. 나의 아기 친구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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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좋아한다. 사람의 손을 사람 인격 보듯 한다. 손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사람의 손을 자세히 보지 않는다. 덥석덥석 손을 잡지도 못한다. 남편의 손을 좋아하고, 약간 집착도 하는 편이다. 세상에서 몸을 통해 얻는 위로 중 최상급일 것이다. 남편이 손을 잡아주는 것. 특이한 손을 가져서 손이 늘 부끄러웠다. 늘 손을 감췄다. 언제 어디서든 손을 감추던 젊을 날에 성가대 지휘는 어떻게 했나 몰라. 그때 성가대 했던 아이들이 특이하게 생긴 내 손을 기억하고, 달랑거리던 반지를 기억한단 얘길 해오면 낯이 뜨거워진다. 엄마 손을 따뜻하게 잡아본 기억이 없다. 엄마 손이 싫었다. 엄마와의 스킨십은 어쩐지 조금 소름 끼쳤었다. 손을 잡는 것보다 사진으로 담아 들여다보는 것이 더 좋았다. 이제야 뒤늦게 잡을 수 없는 엄마 손이 그리워 허공을 잡아보곤 한다. 유튜브에서 나문희 선생이 노래하는 무대를 봤는데, 손 때문에 울었다. 얇은 피부, 튀어나온 혈관... 우리 엄마 손과 비슷한 정도로 나이 들어 있었다. 한 인생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손이었다. 손에서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세월을 담고, 인생을 새긴 손이 노래를 하고 있었다. 손만 봤다. 손의 소리만 들렸다.

* 손에 대해 글을 쓰려했더니, 작년 생일에 이미 구구절절 충분히 징징거려 놓은 게 있네.

껍데기 없는 생일

생일 아침에 미역국을 먹었다. 딸 채윤이가 전날 밤 11시가 넘어 끓이기 시작했다. 11시 넘어 줌 강의를 마치고 "그럼 엄마 먼저 잘게" 하고 누웠다. 딸이 끓이는 미역국, 참기름 냄새에 취해 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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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발길 닿는 대로 걷다 '소년 김대중의 공부방'을 만났다.
여행의 마지막 꿀같은 몇 시간은 소년 김대중을 만나는 시간여행이었다.
하의도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가족이 목포로 나왔다고 한다.
매일 저 바다 풍경을 바라보며 무르익었을
섬소년의 생각과 감수성이 조국 민주주의의 지성과 행동이 되었다.
그로 인해 겪을 고초들...
저 방 주인 소년 김대중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 <킹메이커>를 본 여운이 남아 있어서
벽에 걸린 포스터가 복잡하게 다가왔다.
지적이며 맑고 촉촉한 눈빛을 한참 바라보았다.

디지털 방명록이 있어서 흔적을 남겼다.
마침 대선 일주일 전이다.
간절한 기도를 적었다.

지난 토요일,
줄이 아무리 길어도 기쁘게 기다려 사전투표해야지,
하며 오전 강의를 마쳤는데.
사전투표하러 갈 시간에 PCR 검사 대기 줄에 서는 사태가 발생했다.
며칠 가슴에 품어 더욱 뜨거운 한 표가 되었다.
확진자는 6시 이후에 투표할 수 있다니,
간절한 마음 담아 미리 내놓으려 했던 한 표를
오늘 투표의 마침표로 찍겠다.
마침기도로 쓰겠다.

두렵고 떨리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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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어렸을 적, 아마도 현승이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다. 당시 교회 가정교회 카페에 올라온 사진 한 장을 부러움 가득 안고 바라본 기억이 있다. 안갯속에 싸인 미시령의 어느 길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와하, 나는 언제쯤? 우리는 언제쯤?"이 내가 붙인 사진 제목이었다. 그 당시 가정교회 목짠님이셨던 서쉐석 목짠님이 가족 여행 중 올려주신 사진이었고. 둘째 출산으로 다시 시작한 밤중 수유로 인간답게 사는 날이 아득하게 여겨졌던 시절이니. 아이들 데리고 여행을 한다는 것은 다다를 수 없는 행복처럼 느껴졌다. 그랬었다. 서목짠님 부부와 미사 강변을 걸었다. 살짝 비가 뿌리는 날씨였지만, 비 따위가 우리의 '걷기 사랑'을 막을 수 없지! 우산을 쓰고 이 얘기 저 얘기 천천히 걷는 길에 만난 안개 싸인 예봉산 풍경이다. 여기서 그때 그 미시령 사진이 생각났다. 꼽아보니 벌써 20년 전이다. 

 

서목짠님 부부는 20년 넘게 우리 부부 앞에서 서너 걸음을 사이에 두고 걸어주셨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우리도 제 발로 걷는 두 아이 데리고 미시령을 넘어 가족 여행을 갔고. 졸졸졸 뒤를 따라 생의 고개들을 넘었다. 아이들이 사춘기를 겪고, 대학을 준비하고, 성인이 되어 자기 길을 찾아가는 것을 딱 서너 걸음 뒤에서 지켜보았다. 자라는 아이들이 부모와 겪는 갈등을, 중년에 오는 마음의 어려움을, 연로한 부모님을 돌보는 일의 지난함을, 그러다 떠나보내드리는 것을... 딱 서너 걸음 뒤에서 지켜보며, 딱 그 길을 따라 살고 있다. 강변을 걷고 댁으로 가 함께 식사를 하는데, 모처럼 g와 g의 동생 G(쥐쥐쥐지 베이베...) 두 아이(가 아니라 성인인데...)가 다 집에 있었다. 아직 내게는 초등학생 중학생 같기도, 대학생 같기도 한 g와 G 남매가 새삼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웠다. 각각 자기 빛깔로 자기다움을 살아내는 것이 부럽고 자랑스러웠다.  

 

수영을 배우면서 돌파되지 않는 지점을 뚫어주는 가르침은 코치가 아니라 늘 한 레인 위의 형님이 주셨다. 그저 자기 수영을 열심히 하시는 어느 형님. 인생길 수많은 만남으로 배우고 사랑받으며 걷고 있다. 서너 걸음 앞의 서목짠님 부부는 묵묵히 자기 수영을 하시는, 그러다 가끔 만나 우리 이야기를 하염없이 들어주시는, 그러다 다시 우리 앞에서 서너 걸음 앞의 삶을 살며 가르침 주는 윗 레인 형님같은 분들이다. 갈수록 더 감사한 만남이다. 성인 초입에 들어선 채윤이와 현승이를 키우는 일은(이젠 키워지지도 않지만) 밤중 수유 때와는 또 다른 막막함이다. g와 G 남매가 나란히 서서 설거지하는 뒷모습을 참 좋아 보였는데, 우리 집에서도 익숙한 남매의 뒤태였다. 채윤과 현승의 서너 걸음 앞에서 자기 삶을 살아가는 g와 G를 보고 와서 어떤 좋은 마음이 무르익고 있다. 그 좋은 마음이 조금씩 염려를 먹어 치우고 있다. 이날 먹은 g가 제주에서 산지 직배송으로 주문한 대방어는 최고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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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부 설교를 했다. 한 20여 년 만이다. 한때 유치부 설교자였던 적이 있었다. 유치원 유치부 아이들의 성샘미, 어린이 성가대 선생님이었던 때는 순간순간 꿈틀대는 생명을 살았던 때다. 장애 비장애 아이들과 함께 했던 젊을 날이 없었다면 내적 여정 안내자로 사는 오늘 또한 없었을 것이다. 하늘 나라 같은 아이들의 세계를 맛보아 알기에 내적 여정에서 'Wonderful child'과 '상처 받은 내면 아이' 강의를 뜨겁게 전할 수 있다. 에니어그램 내적 여정은 리처드 로어 신부님 말씀처럼 "사랑 안의 성장에 관한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사랑의 안의 성장'을 가장 생생하게 체험하는 '체험, 사랑의 현장'이다.

돌아보면 20여 년 전 유치부는 '기-승-전-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셔'였다. 울고 짜증내고 장난치는 아이에게 산타 할아버지는 선물을 안 줄지 몰라도 하나님은 다르단다. 이번에도 내가 하고픈 얘기는 그거였다. 설교 준비는 다이소에서 했다. 다이소 돌아다니며 하트 모양 스티커를 , 하트로 된 장난감을 전수조사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하트 반지를 발견! 이건 뭐, 다이소에서 주운 다이아 반지. 내일 설교는 끝났네! 끝났어! 내가 이겼어!


은재야, 사모님은 은재 사랑하는데 은재는 어때?
(당연히) 나도 사모님 사랑해요!
그러면 은재는 누구를 제일로 사랑해?
은재를 제일 사랑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야?
와아, 진짜? 엄마가 언제 은재를 사랑해?
어... 말 잘 들을 때.
(걸려 들었쓰!)

엄마 아빠는 우리를 제일 많이 사랑하는데, 하나님은 더 많이 사랑한대. 하나님은 그리고 우리가 말 안 들을 때도 사랑해. 아무 때나 다 사랑해. 오빠랑 싸울 때도 사랑하고, 치카치카할 때도 사랑하고, 치카치카 안 할 때도 사랑하고, 똥 쌀 때도 사랑하고... 말 한마디 할 때마다 하트 스티커를 손에, 옷에, 얼굴에 막막 붙여준다. 이러다 보면 유치부 아이들 전체가 설교자가 된다. 애들이 정답을 너무 빠르게 파악! 피아노 칠 때 사랑하신대~애. (맞아, 그리고 피아노 안 칠 때도 사랑하신대.) 치과 가서 울 때도 사랑하신대~애. 온갖 고백과 간증이 터져 나온다.

 

그러다 7세 은준이의 총각 같은 한 마디. "죄 지을 때도 사랑하신대" 이 말에 맞장구치며 하트 스티커 붙여주다 울컥하고 말았다. "맞아, 죄 지을 때도 사랑하신다. 그런데 죄 지을 때는 더 많이 사랑하신대. 하나님이 너무 슬퍼서 막막 울면서 사랑하신대." 그리고 그 말이 내게 다시 돌아와 내내 가슴 한 구석을 건드리고 있다. 우리 엄마가 그렇게 좋아하던 찬송 '예수 사랑하심은' 3절 가사가 살아온다.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하트 스티커의 향연이 끝나고, 약속의 반지를 끼워주었다. 잊어버리지 마. 하나님이 매일매일 아무 때나 사랑하셔. 잊어버리면 안 돼. 다이아... 아니 다이소 반지를 소중하게 끼워주었다. 예배 마치고 "은재야, 사모님이 뭐 잊어버리지 말라고 했어?" "어... 음, 반지! 반지 잊어버리면 안 돼!" 아... 반지... 그래, 반지라도 잃어버리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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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래된 인연처럼 느껴지네요." 생각해보니 참 오래된 인연이 맞다. ⟪이프⟫ 초대 편집장으로 알게 된 박미라 선생이니 말이다. 확인해 보니 ⟪이프⟫는 1997년 창간이다. 그렇게 안면을 트게 된 페미니스트 박미라 선생을 <치유하는 글쓰기>의 저자로 다시 만났을 때 동명이인이 아닐까도 생각했다. 어쨌든 그러니까 내 편에서는 독자로 오래된 인연인 것이 분명하다. 치유 글쓰기 모임을 만들면서 수십 권의 책을 참고했지만 실질적인 안내는 <치유하는 글쓰기>를 통해 얻었다. <슬픔을 쓰는 일>을 쓰고 편집자님과 추천인 논의를 하며 이구동성 게임처럼 '박미라 선생'이 나왔을 때 신기했지만, 결국 선생의 추천사를 싣게 된 것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출간 이후 감사 메일을 보내고 답장을 받았다.

 

<상처 입은 당신에게 글쓰기를 권합니다> <모든 날 모든 순간 내 마음의 기록법>. 이번에 출간하신 두 권의 책을 직접 보내주셨다. (영광입니다!) 앞의 책은 <치유하는 글쓰기>의 개정판이고, 나머지 한 권은 글쓰기 매뉴얼이다. 서문에서 '내가 개발한, 나만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피 같은 글쓰기 기법을 아무에게도 뺏기지 않을 거야'하면서 전전긍긍하셨단 얘기를 읽었다. 완전 공감이 되고, 책 받기 전 온라인 서점에서 책 소개를 보고 나도 생각했다. 찐득한 경험으로 짜낸 필살기를 이렇듯 공개하다니! 이어지는 글이 이렇다. '욕심으로 노심초사하던 마음에서 해방되려고, 지난 17년 간 모아둔 치유적 글쓰기 방식을 책으로 만들어 여러분과 나누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역시 알 것 같은 마음이다.

 

책을 보내는 정성, 특히 포장하고 우체국을 찾는 노고를 안다. 새삼 '오래된 인연처럼' 느껴지고 감동과 위로가 된다. 오래된 사이라도 마음의 길이 닿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얼굴 한 번 보지 않았는데 오랜 인연처럼 깊은 연결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외로운 인생길 예기치 않은 선물이다.   

 

http://aladin.kr/p/vP75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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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모든 날 모든 순간, 내 마음의 기록법과 상처 입은 당신에게 글쓰기를 권합니다 세트 상품이다.

www.ala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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