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은이가 논문을 보내왔다. '우수 논문상'을 받은 논문이다. 우수 논문상을 받았다는데 놀랍지가 않다. 당연히, 예은이가 논문을 썼는데 그 정도 상은 졸업장 받는 일과 다르지 않지! 논문 표지를 보니 아득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잊고 싶은 부끄러움, 내 논문 생각이 난다. 예은이가 내 후배로 졸업을 한 것이다. 벌써 후배가 되었지만, 예은이의 입학이 썩 기쁘지가 않았었다. 엄마 돌아가시고 바로 팬데믹으로 멈춘 음악치료를 영영 멈추기로 마음먹었다. 치료를 접으니 20년 넘게 밥줄이었던 악기들이 처분 대상이 되었다. 당근이든 어디든 팔고자 하면 팔 수 있겠으나, 마음과 몸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생각나는 후배가 있었고, 어쩌면 예은이에게 그대로 다 물려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예은이 입학이 기쁘지 않았던 이유로 덥석 주지 못하고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예은이를 만난 게 내 나이 스물여섯, 예은이는 아마 다서 여섯 살이었을 것이다. 어찌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또 나를 어찌나 잘 따르는지. 다이어리에 예은이 사진을 끼워 넣고 다녔다. 전교인 수련회에 가면 엄마 대신 내 옆에서 잠을 자려했고, 청년부 모임에 따라오고, 내 옆에 앉아 어른 예배를 드리기도 했었다. 유초등부에 들어왔는데, 예은이를 성가대 시키고 싶어서 성가대원 학년 기준을 낮춰 버렸다. 3학년(4학년?)이 되어야 성가대를 세웠는데 이런저런 이유를 달아 1학년으로 낮췄던 기억이다. 내 결혼식 축가에서는 귀엽고 깜찍하게 솔로를 했다.
 
중등부가 된 어느 날 학교 숙제라면서 나를 인터뷰하겠다고 찾아왔다. 직업에 관한 숙제였는지, (당시에는 흔하지 않았던) 음악치료사에 대해 조사하겠노라고. 교회 본당 구석에서 인터뷰당했던 기억이 있다. 예은이는 음악도 공부도 다 잘했다. 음악을 하고 싶어 했는데, 진로 문제로 만나서 얘기를 나눈 기억도 있다. 공부를 잘했기에 좋은 대학에 좋은 학과에 진학했고... 학부를 마치고 뚝딱뚝딱하더니 덜컥 음악으로 대학원에 합격해 버렸다. 쉬운 일이 아닌 게 예은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논문을 썼는데 우수 논문상 받았다는 것이 당연지사처럼, 그 어려운 일이 예은이니까 가능하구나 싶었다. 그렇게 석사를 마치더니 어느 날 갑자기 음악치료대학원에 입학했다는 것이다. 
 
공부도 잘하고 음악도 잘하는 예은이가 왜 하필 음악치료? 하는 마음이었다. 공부 못하고 음악 못하는 사람이 음악치료를 한다는 뜻은 아닌데... 나도 공부 잘하고 음악도 잘하는데 음악치료를 한 걸! 내 자신에겐 억누른 어떤 욕망이 투사된 건지 모르겠다. 왜 하필 돈도 안 되는 치료 일을 하려고 해? 공부도 잘하고 음악도 잘하는데 돈이 되는 번듯한 일을 해야지. 아니면, 내 콤플렉스가 투사되었는지 모른다. 노마드 전공 콤플렉스랄까? 예은이는 그러지 말았으면. 뭘 해도 잘할 건데, 한 우물을 파며 보란 듯 번듯한 무엇인가가 되었으면 싶었는지 모르겠다. 음악치료대학원에 가도 안 봐도 잘할 거였고, 당연히 잘했다. 공부와 병행하며 하는 일도 무엇이든 잘했다. 진로나 생의 중요한 일들로 찾아와 얘기 나눌 때마다 진심의 지지와 격려를 주곤 했는데, 음악치료를 시작했을 때는 하라고, 한 우물을 파서 '성공' 하라고 나무라고 그랬던 것 같다.
 
올 초 어느 날, 치료 악기를 모두 예은이에게 넘겼다. 예은이가 음악치료를 해도 좋고, 다른 무엇을 해도 좋겠는 마음이 되었달까. 인생의 갈림길에서 곁길로 가고 또 새로 난 길로 가면서 예은이 고유의 시간을 살 거라는 믿음의 발로일까 싶기도 하고. 그래도 괜찮다는 마음. 크고 작은 삶의 위기를 겪어내는 모습을 오래 지켜보면서 단단해지고 자기다워지는 예은이를 오래 보아왔기에 물 흐르듯 흘러가다 생긴 마음이다. 어쨌든 아주 가볍게 악기를 넘겼다. 악기로 꾸민 방 사진을 보니 기분 좋은 확신으로 마음이 더욱 편했다. 
 
SNS에서 본 음악치료대학원 졸업식 사진에 뭉클했다. 한 존재를 오래 보고 자세히 보고 깊이 알아온, 먼저 난 사람만이 아는 은밀한 환희 같은 것이다. 논문이 담긴 택배 상자에 이것저것 선물이 함께 담겨왔다. 축하를 받아야 할 사람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해 받으니 이 또한 뭉클하다. 예은이가 처음엔 나를 '정신실 先生님'이라 불렀는데, 어느 때부턴가 '사모님'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청년부가 되었을 때는, 남편이 처음 전임사역으로 청년부 강도사님이었었지. 그러니까 예은이는 남편의 제자이기도, 남편이 아꼈던 찬양팀 리더이기도 하다.

 

먼저 나고, 먼저 살면서 뒤에 오는 존재들이 자기로 무르익어 가는 것을 보는 것이 큰 기쁨이다. 세월이 가는 것이 참 좋다. 세월과 함께 무르익는 오랜 만남들로 삶의 의미가 새로워진다. 고맙고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예은이에게 한 마디 했다.

 

예은아, 박사과정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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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정동의 인도 음식점 '갠지스'의 맛과 비주얼을 다 따라잡았다. 핵심은 카레 담는 청동 그릇이다. 이것은 정말 따뜻한 관찰력, 세심하고 고요한 사랑의 결과이다. 뭘 먹었네, 어쩌네, 애들하고 농담 따먹기 하는 걸로 연명하는 이 블로그를 진심 다해 찾아와서는 행간까지 꼼꼼히 읽고 기도해 주는 윤선이 작품이다. 지난번 귀국해서 만났을 때 받았다. 보정동 카레 집 사진 올린 것을 보고, 거기서 본 카레 그릇을 찾아 여기저기 발품 팔았을 윤선이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말로 안 해도 느껴지는 그 마음. 언니... 이렇게만 불러줘도 느껴지는 마음.
 
깨끗이 씻어서 싱크대 안에 모셔 두었는데... JP는 “언제 그 그릇에 카레 먹냐"고 한 번씩 채근을 해댔고. 제대로 먹으려고 이렇게 저렇게 찾아보다 인터넷에서 파는 '난'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릇빨 제대로 살려서 카레를 먹었다. 그리고 하루 이틀 지나서 날아온 소식. 윤선 태훈의 책이 드디어 나왔다는 것이다. 그 소식을 남편에게 알리고 다음 날인가, 그다음 날인가. 알라딘에서 두 개의 택배가 왔다. 하나는 김종필, 하나는 정신실. 각각 득달같이 주문한 것이다. 같은 책 두 권을 나란히 놓고 보니, 이게 우리의 마음이구나 싶다. 그나마 윤선이와 나는 책으로 글로 자주 연결되고 있지만 태훈과 종필은 자잘한 소식을 주고받지는 않는다. 하지만  2004년에 가정교회에서 함께 했던 짧은 만남으로 우리 마음 깊이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다. 
 
내가 진심으로 신뢰하는 유일한 선교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JP 역시 태훈이라면 언제든 마음 활짝!이다. 네팔 파송 후 처음으로 귀국하여 했던 선교보고를 기억한다. 그때 내가 썼던 글의 제목도 생각난다. "자랑 없는 선교 보고"였다. 후원이 절실하지만, 후원을 위해서 사역을 팔지 않으려는 마음이 보였다. 잘한 게 왜 없겠냐만, 그저 받아들이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어떻게 고군분투하고 있는지만 말했었다. 잡은 그 자리에서 책을 다 읽었다. 기막힌 사연으로 네팔 언약학교를 맡아 경영하고 어려운 과정에서 하나님을 만나면서 '훈련받아' 좋은 선교사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네팔 선교사로 현장에서 훈련받기 전부터 이들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정직한 사람이어서 정직하고 좋은 선교사가 된 것이다. 자랑스럽다. 이들과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다. 
 
청춘을 드려
천국을 산다
 
제목 참 잘 지었다. 결혼하자마자 바로 선교사로 나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리 많은 나이도 아니었는데... 여러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파송되기 전 잠깐 우리 '목장'에서 머물렀었다. 짧은 시간이었다. 우려와 걱정과 안타까움으로 보냈었다. 청춘을 드린 건 내가 확실히 아는데... 천국을 살았을까? 살았다고 한다. 본인들이 살았다면 산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부부도 청춘을 드렸다. 천국을 살았을까? 산 것 같다. 살고 있는 것 같다. 불쑥 이런 마음이 든다면 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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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이우 인생의 빛 학교"라는 이름으로 몇 개의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다. 작년부터 이어오는 육아 세미나는 생애 주기에 맞춰 '아침 햇살 학교'라 칭하는데, 2월에는 영화 <늑대 아이>를 보고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에게 온 아이들은 모두 늑대 아이이다. 사람인 내가 사람과 결혼한 줄 알았는데, 나와 본성이 완전히 다른 늑대였다는 발견과 함께 내가 낳은 아이도 반은 늑대라는 현타가 부부생활 부모생활의 시작인지 모르겠다. 늑대 남편은 죽고 혼자 남아 두 늑대 아이를 키우는 엄마 '하나(일본말로는 '꽃'이라는데)'가 인상적인데. 엄마 됨과 아빠 됨은 혼자 아이를 키우는 하나처럼 각자 걷는 '하나의 길'인지도 모른다. 육아 세미나 내내 하는 말은 '왕도가 없다'이다.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수밖에 없다.   
 
지난 주일에는 <아빠가 책을 읽어줄 때 생기는 일들>을 쓰신 옥명호 대표 모시고 강의를 들었다. 강사 초대 메시지에 나도 모르게 쓴 '사랑스런 젊은 부부들'이란 표현을 그대로 따서 ppt 첫 화면에 '이우교회 사랑스런 젊은 부부 특강'이라고 써주셔서 내 마음이 심쿵했다. 부모교육 강사가 주로 여성이라, 늑대아이를 키우는 아빠 이야기 들어볼 기회가 전무하다. 책, 독서, 책 읽어주기...는 아이 잘 키우고 싶은 부모에겐 솔깃하는 주제라. 그걸 낚싯밥 삼아 '사랑스런 젊은 부부들에게 '적당히 뽐뿌질 하면서 강의를 기다렸다. 삶의 소중한 것들에는 전문가가 없고, 전문가가 필요치도 않다. 이렇게 자신의 삶을 고민하며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내는 한 발 앞선 선배들이 있어야 한다. 삶도 신앙도, 우리에겐 자기 삶을 사는 이들이 필요하다. 이미 들어본 강의인데 다시 들어도 좋았고, 마치고 단톡방에 올려준 후기들 보니 뿌듯하고 보람이 차오른다. 이러니 사랑스런 사람들이지. 이들의 후기를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다. 
 


❝강의 어떻게 들었는지도 궁금해요. 사실 저는 '책 읽어주는'이 아니라 '아빠가'에 방점을 찍고 강사님을 초대했어요. 솔까말 누가 저 옥아빠님처럼 할 수 있겠어요? 그러나 야근야근야근.... 하는 삶 속에서 '아빠 됨'의 고민을 놓지 않고, 나는 받아보지 못한 '아빠와의 친밀감'을 내 아이에겐 남겨주고 싶은 열망과 시도들이 제게는 큰 울림을 줘요. 무엇보다 세상의 가치와 하나님 나라의 가치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여 꾸준히 쌓아가는 성실한 사랑을 배우고 싶고요. 한주간 여러분의 일상, 육아의 삶 속에 우리 주님이 주시는 깊은 평화가 함께 하길 기도해요. 파이팅!❞

 

라고 내가 단톡방에 썼더니 이후 줄줄 올라온 후기.

❝사모님 덕분에 너무 좋은 강의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집에오면서 남편과 여러 얘기 할 수 있어서 더 좋았구요. 감사합니당 모두 이번주도 힘내세용💕❞

❝성실한 사랑! 저도 그 꾸준함이 정말 대단하시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강사님 얘기하실때 신랑 무릎 친 사람 저예요.. ㅎ) 좋은 강의 들을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어제 강의 넘 좋았어요~~ 교회 다녀오면 피곤한 날도 있는데 어젠 동윤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넘 소중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어린시절 얘기도 남편과 나누고( 울아빠 디스였지만) 자기전 책 읽어주는 시간도 좀더 생동감있게 좀 글밥 긴걸로 읽어주니 또 읽어달라는 말에 감동 받았어요~~( 글밥 긴건 힘들어서 잘 안 읽어줬었는데…) 어제 밤에는 남편과 여행사진 사진첩 주문하기도 했어요~~ 성실한 사랑 노력해야겠어요^^❞

❝다 너무 공감돼요~ 저는 어렸을때 엄마랑 같이 독후감을 서로 편지처럼 썼었던 것도 생각나고 같이 책을 읽다가 낮잠을 잤던 것도 생각나면서 그런 노력이 엄마의 사랑이었겠구나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남편도 어제 저녁에 책 읽어주는데 평소보다 더 하이톤으로, 더 오버해서 아주 잘 읽어주더라구요. ㅎㅎ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 더 소중하고 감사하게 보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좋은 강의 듣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집에가서 너무 피곤하긴했지만 ㅎㅎ 어제 강의 유익하고 재밌게 잘 들었습니다. 은하도 자기전에 아빠가 책 읽어줄까 엄마가 책 읽어줄까 하니까 아빠! 하더라고요~ 저는 어린시절 아빠와 친밀하지 못했던 경험을 답습하지 않고, '책'이라는 매개를 스스로 찾아 적극적으로 소통한 용기가 너무 멋졌습니다! 그런 부모가 되도록 평생 노력해야겠습니다~❞

❝좋은 아빠가 되려면 일단 좀 독해져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밖에서 몸과 마음의 체력을 다 소진하고 집에 오면 물렁물렁해져 있기 십상이어서 아내가 특히 볼멘소리를 많이 하곤 하는데요.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정한 철칙이나 약속은 예외없이 지킬 줄 아는 독한 아빠, 독한 남편이 되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강의 듣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윤이가 책 재밌다고 한번 더 읽어달라고 하는데 그게 참 사랑스럽더라구요. 이런 아이가 우리한테 와서 감사하고. 같은 잠들기 전 시간인데도 언제 잠드나..가 아닌 책읽어주는 시간이다라고 기대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된 것 같아 감사합니다. 어젠 제 마음도 풍요로워진 날이었습니다.❞

❝어제 꽤 글밥있는 이야기 책을 읽어주었는데 은하가 생각보다 집중을 잘하더라구요. 앞으로는 이야기를 많이 읽어주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책은 하나의 좋은 수단이고 궁극적으로는 밀도있게 함께하는 시간이 중요한 것이라는 말도 마음에 새겼습니다.
아울러, 이야기를 통해 나를 발견하는 건 비단 아이 뿐만이 아니라 어른에게도 해당하는 말인 것 같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부쩍 책읽기를 즐기게 된 아내와 같이 저도 함께 읽기에 동참해야겠다는 다짐도 했구요.
강사님 책 서문에 남자목소리가 중저음이기에 책읽어주는건 오히려 아빠에게 제격이라고 써있는데, 제 아내는 목소리가 저음이라 우리부부는 책읽어주기에 참 유리하다 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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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케 선영이에게서 생일 선물이 왔다. 쿠팡으로 아침 일찍 총알배송으로 온 택배라, 먹을 것인가 했는데 화장품이다. 왜 이리 비싼 걸 보냈냐, 얼마 전 현승이한테도 무리를 한 것 같은데, 쪼들리는 살림에 왜 이리 돈을 많이 써? 카톡에 떠들어 대고 가만 보니 노인네, 어디서 많이 본 노인네 말이네. (우씨, 우리 엄마 잖아...) 

 

동생한테 들으니  '언니한테 받기만 해서 좀 드리고 싶다. 내 돈 주고 못 사는 화장품이다.'라고 했단다. 나는 니네 돈이 더 아까운데... 계속 말하다가는 (짜증 유발하던) 우리 엄마 될 것 같아서 고맙다, 잘 쓰겠다 하고 입을 닫았다. 내가 동생네 뭘 해준 게 있다면 늘 미안해서였는데. 엄마 모시고 사는 선영에게 미안해서, 가끔은 뇌물이었다. '엄마 모시는 거 힘들지? 우리 엄마 힘든 사람이야. 그래도 너무 미워하지 말고, 잘 봐줘...' 

 

엄마가 딱 이 즈음에 낙상을 하고 병원에 격리되었던 터라, 엄마가 떠난 이후 내 생일은 전 같은 생일이 아니다. 3년 거리를 두고 다시 바라보면, 엄마 인생 마지막이 참으로 부럽도록 편안했고 아름다웠다. 이러고저러고 해도 동생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어서였는데. 그러느라 동생 부부가 질 수밖에 없는 일상의 짐이 있었다. 미안했던 엄마가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 "고맙다, 복 받어라"였는데. 동생네가 복을 많이 받고 살았으면 좋겠다.

 

나도 선물로는 몇 번 사 본, 내돈내산은 못해 본, 선영이도 지돈지산은 못 해봤을 비싼 화장품을 복잡한 고마움으로 받는다. 이 화장품 이름이 참 마음에 들더라. 雪花秀. 雪花. 눈꽃. 눈꽃을 받았다. 雪花秀 말고 雪花受. 눈 속에 피는 꽃을 받았다. 말 나온 김에 루이즈 글릭의 [눈풀꽃] 한 번 꺼내 읽고 간다.

 

 

눈풀꽃(snowdrops), 루이즈 글릭​

​내가 어떠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가.
절망이 무엇인지 안다면 당신은
분명 겨울의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자신이 살아남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었다,
대지가 나를 내리눌렀기에.
내가 다시 깨어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축축한 흙 속에서 내 몸이

다시 반응하는 걸 느끼리라고는.
그토록 긴 시간이 흐른 후
가장 이른 봄의
차가운 빛 속에서
다시 자신을 여는 법을
기억해 내면서.

​나는 지금 두려운가.
그렇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 다시 외친다.
‘좋아, 기쁨에 모험을 걸자.’

​새로운 세상의 살을 에는 바람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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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어떻게든 임보라 목사님을 보내드려야 할 텐데. 방법이 없다. 방법이 없어서 쓴다. 지난 토요일 늦은 밤, 뉴스에서 목사님의 부고를 접한 이후 삶의 어느 부분이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하루 이틀은 우울과 절망으로 가까이 있는 가족을 힘들게 했고. 애써 눌러보는 마음인데, 보고 싶지 않으면서 보게 되는 온라인상의 뉴스와 애도 글과, 왈가왈부하는 소리들에 마음이 추슬러지질 않는다.  "임보라 목사님!"하고 편지 글도 시작해 봤으나 한 마디도 나오질 않았다. 2인칭으로 쓰기에 너무나도 몸의 연결점이 없다.

 

'언제고 만나겠다' 는 마음이었지만 실제로 만난 적은 없다. 언제 어느 행사에서 만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더라도  내 주변머리로는 스쳐지나 듯하는 인사가 전부일 것이다. 이제 와... 공식적이고 사무적인 만남이라도 몸으로 만나 눈 한 번 마주치지 못한 것이 아쉽고 아쉽다. 추슬러지지 않는 감정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미안함과 부끄러움이다. 무고한 분이 최전방에서 혐오의 화살을 온몸으로 맞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미안함과 부끄러움이다. 무고하다는 건 뭘까. 더욱 무고한 혐오의 화살을 대신 맞았다고 해야 할까, 같이 맞았다고 해야 할까. 

 

성수소자와 시대의 약자들 편에 서서 함께 비를 맞은 것이 죄목이 되어 이단으로 지목되었을 때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뉴스로 보면서 숨이 턱 막히는 그 감정 때문에 끝까지 읽지도 못하고 화면을 껐던 것 같다. 내 마음이 이렇듯 무너지는데, 목사님과 함께 마음을 나누고 목사님으로 인해서 위로받았던 분들이 어떨까 생각하면 더욱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악에 맞서다 악과 닮아가기가 얼마나 쉬운가? 여러 선하고 아름다운 명분 너머 임보라 목사님에게 마음이 갔던 이유는 맑은 얼굴이었다. 기사 내용은 험악한데 거기 실린 당사자의 얼굴은 늘 맑고 선량하니 그 인상이 뭐라 설명할 수 없이 여운이 있었다.  어떤 얼굴이 어떻게 보이는 것은 대체로 보는 이의 것임을 안다. 투사(projection)다. 내 눈에는 천사인데 누구의 눈에는 사탄이고 이단인 것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함과 안타까움이지만... 그래서 더 슬프고 미안하고 부끄럽다.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지만, 그 맑은 얼굴로 짐작되는 존재의 비결을 영상에서 찾았다. "사랑은 혐오보다 강합니다." 임보라 목사님, 혐오에 혐오로 맞서지 않았구나! 이 노래가 자꾸 입가에 맴돈다.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을 피워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목사님, 당신이 존재로 피워야 할 사랑의 꽃을 다 피우신 것일까. 그립고 아름다운 아버지의 집에서, 차별도 혐오도 없고 정통도 이단도 따로 없는 아버지의 품에서 편히 쉬시길.

 

혐오보다 강한 사랑의 길, 따르겠습니다.

남겨진 자로서 사랑의 몫을 살겠습니다. 

 

흠모하고 있는 13세기 여성 공동체 베긴의 여성들이 떠오른다. 이 급진적으로 아름다운 이 공동체가 기존의 신학과 잣대로 규명되지 않자, 사제들과 남성 신학자들은 탄압하기 시작했고 마녀로 지목되어 화형 당한 지도자도 있다. 그들의 탄압에 반응한 어느 무명 베긴의 시이다. 곱씹어 읽어본다. 
  
당신은 말을 하고, 우리는 행동한다.
당신은 분석하고, 우리는 응시한다.
당신은 검열하고, 우리는 선택한다.
당신은 씹고, 우리는 삼킨다.
당신은 노래하고, 우리는 춤을 춘다.
당신은 꽃을 피우고, 우리는 열매를 맺는다.
당신은 맛을 보고, 우리는 향기를 맡는다.

 

 

여성 교인은 62.5%, '여성 담임 목회자'는 8.5%

[교회와 여성들] 여성 담임 목회자로서의 임보라 목사

www.newsnjo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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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모닝커피는 갑자기 쿠바다.
쿠바 원두는 아니지만,
쿠바에 가본 건 아니지만,
가본 사람의 마음이 담긴 잔에 담겼으니
쿠바 커피다.
그들의 몸과 영혼이 주님 안에서 행복하길.

쿠바가 담긴 잔에 커피를 마시니,
한 모금 한 모금에 기도를 담게 된다.

오늘 모닝은 갑자기 커피 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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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시끌벅적한 모임이 있다. 코로나 시작 전에 만났다니까 3년 만인데, 토요일 브런치(이 얼마나 느긋하여 편안한 만남인가!)로 모였다. 달력에 이 약속을 "명일친구"라고 적어 놓은 걸 채윤이가 발견하고 빵 터졌다. “하하하하… 명일… 명일… 명일 친구!” 명일'이 아니라 '친구'에서 터진 거지. 스무 살 차이 친구들. 전에 명일동 살 때 우리 집 거실, 어느 카페, 동네 놀이터 그네... 같은 데서도 시끌벅적 만나곤 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티키타카와 터지는 폭소로 만나는 시간 동안 오디오가 비는 구간이 없다. MBTI 얘기가 나왔는데, 정신 차리고 제대로 보니 나만 외향이고 나머지 셋이 내향이다. 초등 4, 5학년 때 어린이 성가대 지휘 선생님으로 만났고, 얘네들이 지금의 채윤이 나이이던 시절 청년부 목회자의 아내로 다시 만났으니 길게는 30년이다. 알아온 세월이 30년인데, 외향과 내향의 이름을 붙여보니 낯설다. 정말? 너가 내향이라고? "저 여기서만 이래요." "야, 나도 너 네하고 있을 때만 이래.ㅋㅋㅋ"

Carl Jung이 말하는 내향과 외향 개념이 말이 많고 적음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물론 외향과 내향이 드러나는 양상 중 하나가 '말'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렇게 결론을 냈다. 편안한 곳에 있으면 누구나 말이 많아진다. 누구나 거침없이 자기 얘기를 한다. 심지어 내향형도 그렇다. 얘네들하곤 단톡방도 시끄럽다. 감정도 있는 그대로 즉각적으로 드러낸다. 깔깔 웃었다가 갑자기 울었다가... 전에 한참 단톡이 활발할 때(아, 톡이 아니라 '마이피플'이었구나...ㅎㅎ) 방 이름이 "울고웃고"였다. 중간에 외향 하나가 더 투입되었다. 반주자였던 H는 나랑 딱 10년 차이의 외향-외향, 죽이 너무나도 잘 맞는 지휘자 반주자였는데. 액면가는 외향 다섯이서 토요일 아침 브런치 카페 구석에 앉아 말과 웃음으로 꽉 채우고 나왔다. 결론은.

맛있게 먹으면 무조건 0 칼로리!
편한 사람하고 있으면 무조건 외향형!

그래도 난 찐 외향형인 게, 말하고 웃고 에너지를 '소비함으로 채운' 게 되었다. 가득 주유한 몸과 마음으로 정자역에서 집까지 탄천을 따라 걸어왔다.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집에 다 왔는데 머리 위가 시끄러워서 고개를 들어보니 까치 다섯 마리가 나무에 앉아 떠들어 대고 있었다. 너네 친구들이 편하냐? 지금 다들 외향형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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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을 맞았다.

 

손글씨로

 

정성 폭탄

 

정 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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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초입 어느 날. 팔당대교 아래 메타세쿼이아 길을 걷고 있었다. 세 여인이 나란히 걷는데, 좌 엄마, 우 딸이다. 그러니까 내 위치는 모녀 사이이고, 나는 엄마와도 친구이고 딸과도 친구이다. 뭔가 몹시 자랑스러운 관계이다. 저 앞에는 두 남자가 걷고 있다. 한 사람은 JP, 또 한 분은 엄마 님의 남편이며 따님의 아버님. 풍경 사진을 찍던 엄마 님께서 앞의 두 남자 뒷모습을 앵글에 잡더니 말씀하셨다.

저기, 두 신부 같지 않아?(60대)
두 신부요?
그 영화 있잖아. 그거...
두 교황?
어, 그래. 두 교황.
푸하하하하... 두 신부...
느낌이 비슷하네요. 두 분 옷 색깔도 좀 그렇고. JP는 모르겠는데, 목짠님은 정말 그 라칭거 같아요. 그 배우 누구죠? 그 배우랑 느낌이 비슷한데....(50대)
아, 그 배우... 거 있잖아... 뭐지 이름이?(60대)
뭐였더라요? 생각이 안 나지?(30대)
알... 뭐 아냐? 알칸소....도 아니고, 알퐁스 도데도 아니고...(50대)
아, 거시기 있잖아.(60대)
안소니 홉킨스요!(30대, 검색해서 찾아냄)
맞아. 맞아. 앤서니 홉킨스!

이 에피소드 포스팅 하고 싶었었는데 바쁜 가을 지내느라 잊고 말았었다. 지난주 뉴질랜드에서 보내오는 사진을 보다 다시 떠올랐다. 두 신부 아니고 두 교황 아니고...

두 강사님으로 뉴질랜드 코스타에 함께 가셨다. 컨퍼런스 전에 한 교회의 극진한 환대를 받는 행복한 사진이 막막 날아왔는데, 앤서니 홉킨스 강사님 인맥 덕이었다. 어쩌면 그날 메타세쿼이아 길에서 입었던 옷과 같은 옷들을 입고 두 신부, 두 교황, 두 강사... 영화를 계속 찍고 계셨다.

채윤이는 두 사진을 보고 "오, 두 명의 아굴라! 그런데 엄마, 아굴라가 무슨 뜻이야? 옛날에 그렇게 불렀던 것 기억나는데..." (이 아이의 기억력을 사랑하고, 청순한 뇌를 사랑한다.) 20년 전 일이다. 가정교회 목짠님으로 만나서 참 행복한 교회를 경험했었는데... 거기서 분가라는 것을 하고, 또 분가라는 것을 하며 우리가 목짜가 되었을 때이다. 한 작명하시는, 서쉐석목짠님이라고도 (채윤에게) 불리셨던, 앤서니 홉킨스 목짜님께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목장'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셨다. 줄여서 AP목장이라고 불렀고, 목장 시절도 내 인생 어떤 '교회'를 누렸던 때이다.

세월을 두고 만남을 이어가고, 나이를 너머 친구가 되어가는 것이 좋다. 신형철의 책 제목 『인생의 역사』처럼.
인생의 역사, 만남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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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팬데믹으로 인한 비대면 영상 예배 최고의 수혜자는 남편 JP이다. 정확히 말하면 JP 목사. 인기가 말할 수 없이 치솟았다. 가장 어렵고 까칠하고 무서운 교인인 아가들에게! 도대체 아가들이 왜 이리 목싼님, 목싼님 하는 거지? 처음엔 영문을 잘 몰랐는데 영상 예배 효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양복 쫙 빼입고 일주일에 한 번씩 티브이에 나오는 남자다. 알 수 없는 무슨 말을 떠들어 대는데 엄마빠가 그 시간만 되면 순해지고 착해져서 고분고분해진다. 주일 예배 시간이다. 그 분위기에서 아가들은 목싼님에게 꽂힌다. 엄마빠 시선이 가 있는 거기에 머무르다 괜히 그 남자를 좋아하게 되는 거다. 목싼님보다 젊고 훨씬 잘 생긴 제 아빠가 결혼식에 가려고 양복을 입고 나서니 "하아, 아빠 너무 멋지다! 꼭 목사님 같애...."라고 했다는 간증도 있다. 목싼님 인기에 거품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비싼 아가(기본적으로 아가들은 다 비싸지만)가 집에 왔다. "목싼님 집에 갈까?" 이 말에 기대에 부풀어서 온 거다! 평상복 목싼님을 보고 동공지진이다. 양복도 안 입고... 니가 왜 여기서 나와... 혼란스러운 눈빛. 어디서 봤는데, 익숙하고, 좋은 사람인데, 낯설어... "목사님 집에 가자"는 말에 아가는 영상 속으로 들어가는 줄 알았겠지. 게다가 이 목사님 평소와 다르게 살갑고, 막 웃고, 막 기타 들고 반짝반짝 작은 별을 쳐주고... 아가는 정말 당황했다.

 

양복도 안 입고, 설교도 안 하는 목싼님은 잠시 그러다 조용히 사라졌다. 어디서 본 듯한 호들갑 아줌마가 나타나 호들갑에 호들갑을 떤다. 그게 나다. 정말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놀아줬다. 프라이팬 덕후 아가인지라, 온갖 프라이팬과 냄비 다 꺼내 주고. 얼음도 좋아하니까 미리 얼려놓은 얼음까지. 얼음이 녹아 국물이 되었을 때 소면도 대주고, 바질도 꺼내 주고... 냉 바질 국수라는 신메뉴도 같이 만들었다. 피아노도 쳐주고... 혼신의 힘을 다했는데. 

 

마지막엔 목싼님이었다. 인사하자고, 뽀뽀하자고 들이대는 나에게 저리 가라, 얼굴 치워라 소리를 지르고. 목싼님을 바라보는 눈빛은 나긋나긋했다. 분하다. 분하고 억울하다. 충분히 이해된다. 막 들이대는 거 나도 싫다. 싫겠다, 정말. 어쩔 수가 없다. 밀당이 안 된다. 좋으면 막 들어가게 된다. 참아지질 않는다. JP가 얄밉다. 양복 빼 입고, 영상 빨로 얻은 인기, 거품 낀 인기가 증말증말 질투가 난다. 밀당을 못하는 나여, 좋은 걸 참지 못하는 나여. 화로다 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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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즐거움은 '새로운 것'을 마주하는 설렘인데, 새로운 것은 낯선 것이기도 하다. 늘 걷던 길을 벗어나는 것이다. 늘 걷는 길은 대체로 예측 가능하다. 저만큼 가면 大자로 누워 있는 고양이가 있고, 오른쪽 탄천엔 사람들이 많을 거고, 왼쪽으로 가서 올라가면 조용하겠지만 그늘이 없어 더울 거고... 낯선 곳으로의  여행에도 나름의 '예측'을 장착하지만 그 예측이 모두 머리로 하는 것이다.  검색하고, 그려보고, 충분히 예측하고 떠난다. 직접 몸으로 걸어보는 것과는 다르다. 그래서 여행은 체험이다. 인공위성 사진으로 들여다보는 것과 직접 가서 거기 서보는 것의 차이는 얼마나 큰 것이다.

 

 

예기치 못한 즐거움과 예기치 못한 어려움이 사이를 오가는 것이 여행이다. 그 사이를 오가며 며칠 코스타 일정과, 시카고 뉴욕 여행을 마치는 마지막 날에 뉴저지에 있는 켈리 님을 만났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려면 코로나 검사 음성 결과 확인이 필요하다. 48 시간 이내의. 손쉽게 무료로 할 수 있다는 것이 '검색'을 통해 했던 예측이었는데, 그새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검사절차도 절차지만 1인당 200불의 검사 비용이 든다니! 여행 중 예측 못하는 많은 것 중에 타격감이 가장 큰 것은 사실 비용이다. 뉴욕 여행 중에 만나기로 한 켈리 님에게 이 사실을 알렸더니, 현지인 메리트에 타고난 정보 수집력을 발휘하여 문제를 해결해버렸다. 최소 비용으로, 자가검사 키트를 이용해 비대면 검사를 하는 것이었다. 이 검사로 얻은 결과지를 인정해주는지, 한국 당국에 메일까지 보내어 확인까지! 그리고 뉴욕 출발 당일 호텔로 와 검사 진행까지 깔끔하게 해 주셨다.

 

적지 않은 예측 불가의 사고를 경험한 여행이었다. 정말 사고였다. 출발 전날에는 일행 중 연구소 D 쌤이 공원에서 사고를 당했다. 천만다행으로 최소한의 상처를 입었지만,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사고였다. 외적인 사고만이 아니다. 내적 전쟁도 만만치 않았다. 여행의 즐거움이 적지 않았지만, 예측 못한 어려움으로 겪은 고충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 코로나 검사 문제가 해결되고도 여전히 남아 있는 걱정은 "우리 양성 나오면 어떡하지?"였다. 비행기는 어떡하고, 10여 일의 체류를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하냐고? "설마 하나님께서 그것까지 하시겠어? 그럼 너무 하지. 겪을 고난은 다 겪었지!" 셋이서 쓸데없는 예측 수다를 주고받곤 했는데, 다행히 모두 음성! 안도의 한숨!

 

켈리는 그렇게 우리에게 선물이었다. 두 딸(채윤이와 D쌤)은 켈리 님이 뉴욕 천사라고 했다. 존재 자체가 선물이었는데, 직접 만든 카드에 세 사람 따로따로 선물을 준비해 오셨다. 이메일 한 통으로 시작된 인연이다. <나의 성소 싱크대 앞>을 읽고 받은 감동으로, 그 밤에 바로 보냈다는 그 이 메일이 만남의 시작이었다. 책이 나올 때마다 멀리 미국에서 구매를 하고, 응원을 보내오고. 이러다 이 분 만나는 거 아냐! 싶었는데, 정말 한국에서 만나는 역사가 생겼다. 연구소 '일일 글쓰기 강좌'를 했던 2019년 가을. 20년 만에 한국에 나가는 언니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글쓰기 강좌에 등록을 하시겠다는 거였다. 어머, 이 분은 받아줘야지! 그리고 그날 글쓰기 모임은 두 분의 글로 더욱 풍성해진 기억. 그대로 헤어지기가 아쉬워 내가 데이트 신청을 했고, 두 분과 함께 남한산성에서 보낸 시간의 기억이 아련하다.

 

'

코로나 음성 확인까지 하고, 안도하며 체크아웃하고, 점심 대접까지 받았다. 여행객 또는 이방인으로서는 검색해서 찾을 수도 없고, 엄두도 내지 않을 식당에서 근사한 점심식사를 했다. 센트럴파크가 내려다 보이는 창가에서! 이 표현을 하자니 다시 눈가가 뜨거워진다. 2주간의 일정을 잘 지냈다고, 안팎의 사고를 잘 견뎌냈다고 베풀어 주시는 잔치상 같았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You treat me to a feast, while my enemies watch. You honor me as your guest, and you fill my cup until it overflows.)" 이번 코스타의 주제는 'Let us feast'였다. 이 아름다운 오찬으로 이방인 셋은 환대를 경험했다. 내 영혼의 잔이 넘쳤다. 켈리 님, 천사 맞다. 그분이 보내신 천사였다.

 

 

 

 

좋은 사람

Carl Jung은 '동시성'이라 하고 우리 동네에너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한다. 도모한 일이 흘러가다 누군가의 도모를 만나 내 통제 밖의 일이 되는 것. 그리고 일을 도모한 각각의 사람에겐 계획과

larinari.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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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4일, 뉴욕에서 실시간으로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 가져옴)

 

쌍둥이빌딩이 있던 자리에 만들어진 인공분수 앞에 섰다. 하염없이 떨어지는 물줄기가 그치지 않는 눈물로 보였고, 음각된 이름 하나하나를 읽자니 슬픔이 밀려왔다. 하나의 이름이 아니라 한 존재, 하나의 우주인 생명임을 느낄 수 있었다. 둘레를 따라 걷는데 어느 이름, 아니 생명 옆에 흰 장미 한 송이가 꽂혀 있다. 소중한 한 생명이었을 뿐 아니라 누군가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꽃을 꽂고 간 어느 분을 위해, 여기 새겨진 사랑을 잃은 분들을 위해 기도했다. 정방형 분수를 둘러싼 관광객들 역시 성별, 인종, 몸의 생김, 소속한 국가, 가진 이념…과 무관하게 아름다운 생명이어서 음각된 이름과 다름 없는 각각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했다.

코스타 기간에 교회 한 권사님께서 호스피스로 가셨단 소식을 들었다. 아직 권사님의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하루 이틀 지나 남편이 허락되지 않는 면회를 다녀왔다는 얘길 전해왔다. 꼭 권사님을 뵈어야겠고, 권사님 역시 자신을 기다리고 계실 거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렇게 권사님을 뵙고 손잡아 드리고 왔다고. 의식은 없으시지만 발을 만져드릴 때 반응하셨다고, 분명히 아시는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소천 소식을 전해왔다.

팔십여 년 권사님 생애 마지막 6년의 인연으로 만났다. 어릴 적부터 음악을 좋아하셨단 얘기, 약한 몸으로 태어나 고생이 많으셨던 얘기, 교회 분쟁을 맞기 전 성가대 봉사가 그렇게 즐거우셨단 얘기를 반복해서 들었다.  그 외 어떤 인생을 살아오셨는지는 잘 모른다. 생애 마지막 시간 목회자의 전횡으로 인한 교회 분쟁을 겪으시고 만난 목사가 남편이다. 남편이 권사님 생애 마지막 목사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몸이 편찮으시고 두려울 때 전화하셔서 “목사님, 기도해주세요.”라고 하셨다. 권사님께서 오래 섬겨오신 대형교회 당회장 목사가 가진 아우라나 영적 능력 같은 건 없는 목사이다.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들의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기도해 드리고 위로하는 남편을 볼 때 유일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목사하길 잘 했나 봐.”

그라운드 제로에 섰던 시간에 한국에선 권사님 발인예배를 드리는 시간이었다. 조용히 혼자 짧게 권사님 천국 환송 기도를 드렸다. 같은 시간 모마 미술관에 가 있던 벗이 사진을 보내왔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초를 켜고 기도 드렸다는 메시지와 함께. 저 눈물같은 분수와 불 밝힌 초에 권사님의 생명과 사랑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담는다.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이들의 슬픔에 잇대는 기도를 담는다.

한혜숙 권사님, 감사했고 사랑합니다. 머지않은 날에 천국에서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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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카드를 받았다.
정성 담긴 고운 필체로 뭐라뭐라 쓰여 있는데,
미래 문자라서 해독이 어렵다.
천국 문자다.
읽어낼 재주가 없다.
















다행히 번역이 붙어 있다.

스승의 날 카드다.
동윤아, 섭섭하다!
우리 친구 사이인 줄 알았는데...
동윤이랑, 나랑, 브라키오랑 친구잖아.
내가 선생이면 네 엄마 선생이지...
네 엄마랑도 요즘은 거의 친구 먹는다.
(아, 며칠 전에 네 엄마 문자를 씹었다. 나중에 답신 해야지, 하고 잊었네. 괜찮겠지?)
네 엄마가 스승의 날 선물에 너를 끼워 넣은 거구나.
취향 저격이네!

그렇다면... 고맙다, 내 친구 동윤이 엄마야.
(자꾸 문자 씹어서 미안해.)

오늘도 잘 살게!
못 살 이유가 백 개라도
동윤이가 잘 살으라 했으니 잘 살아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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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수업에서 반장을 하고 있다. 비대면으로 진행되다 보니 수업마다 일종의 조교가 필요하고, 반장이 그 역할이다. 뭘 시킨다고 하는 성격이 아닌데 좋아하는 교수님이라 덥석 하겠다고 했다. 좋은 수업의 반장으로 즐겁게 한 학기 보내고 있다. 학비 비싸다 비싸다 노래를 하지만, 이번 학기 세 과목 수업이 모두 좋아서 아깝지가 않다. 자본주의적 사고를 거두고 마음 가는대로 계산한다면, 한 학기 수업료 분을 한 과목 당 낼 만큼의 가치가 있다. 물론, 다른 학생들도 그리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다.

반장 일이라는 게 이런 것이다. 사이버 캠퍼스에 올라온 줌 수업 주소 단톡에 퍼 나르기. 교수님께 사소한 민원 접수하기. 반장으로서 가장 뿌듯한 일은 그거였다. 교수님의 사이버 캠퍼스 계정에 문제가 생겨서 강의 줌 주소를 이미지 파일로 카톡방에 올려주시는 거다. 반장으로서 학우들을 위하여 이 한 몸 불태우리!!! 돋보기 끼고 이미지 확대해 놓고는 한 땀 한 땀 쳐서 텍스트로 만들어 올려 바로 링크 접속이 되도록 하였다. 내가 연구소에선 소장이라. 연구소 샘들이 최고의 조교로 알아서 줌 열어, 줌 주소 올려, 중간에 문제 생기면 일일이 개인 톡 하고 통화해서 문제 해결해. 이런 대접받는 소장인데. 돋보기 끼고 "흠... 대문자 N, 그다음 소문자 q... 이건 뭐야? 대문자 I야? 소문자 l이야?...." 이런 봉사를 하였다. 너무나 즐거웠다. 사소한 민원처리 또한 즐거웠다.

바쁘고 분주한 스승의 날을 보냈다. 각 수업에서 반장 주도로 스승의 날을 챙겨달라는 원우회의 부탁. 이런 거 또 아무렇게나 하고 싶지 않은 태생적 이벤트주의자로서 아드레날린 방출이다. 줌 수업 상황에 맞춘 여러 아이디어들이 오가곤 했다. 손편지 써서 ppt로 띄우기... 등. 손편지는 다른 과목에서 이미 썼고. <음악과 영성> 수업이라 음악을 활용해보려 했으나, 일천한 콘텐츠로 교수님 앞에서 뭘 하기도 그렇고. 채윤에게 하나 연주해 줄래? 했다가 오버하지 말라고 까이고.

학우들 부담되지 않고, 교수님 너무 민망하지 않게 조촐한 서프라이즈를 도모했다. 교수님 강의 시작하는데 마이크 켜고 난입하여 "저, 신부님 드릴 말씀 있는데요..."를 신호로 학우들은 A4 용지에 감사 메시지를 써서 카메라에 비추기! 몇 초 안 되는 이벤트였는데 화면 캡쳐 하랴, 상황 살피랴, 심쫄이었다. 부끄러워하시는 교수님 얼굴을 제대로 감상도 못하고. 이 와중에 나는 팬심 가득 담아 교수님 성함으로 삼행지를 지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없는 시간 쪼개서 발품 팔아 선물을 준비하고, 연이은 강의와 원고 부담을 뒤로 하고 직접 전달하러 나섰다. 또 하나의 반장 임무였다. 가톨릭 신학교 교정을 걸어보고 좋은 시간이었다. 그냥 좋은 시간이 아니라 생각지도 못했던 땅에 서는 행운을 얻었다.(그 땅에 대해선 언젠가 공개하리!) "학생이 준비되면 선생이 온다." 중국 속담이란다. 나이 들어, 경계를 넘어가서 배우는 용기 내길 잘했다 싶은 것은 좋은 선생님들과의 만남이다. 감사한 선생님들께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몸으로 뛸 수 있어서 더 의미 있는 스승의 날이었다. 꽃집이 없어서 버스 한 정거장을 다시 거슬러 걸어가 꽃을 사고, 골목을 헤집어 문방구를 찾아 카드를 사고... 중고생이 된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면, 해마다 스승의 날 마음 한 구석 슬픔이 일렁였다. 오늘의 내가 혼자 된 게 아닌데. 감사할 선생님이 한둘 아닌데. 정작 감사를 표할 수 있는 선생님이 없다. 가지각색의 이유로 그렇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게 된 예전 어느 날의 배움이 더는 싫지 않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선생님들이 더는 밉지 않다. 그렇다고 기쁘게 감사를 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게 아니라도 고마운 선생님들이 너무 멀리 계시다. 마음의 감사를 그저 혼자 여러 번 드린다.

오랜만에 반장 완장을 차고 지난날 모든 스승님들께 하듯 선물과 이벤트와 꽃과 카드를 준비하니 그냥 좋았다.

스승의 날인 5월15일은 주일이었다. 어느 교회 청년부 예배에 강의를 갔는데, 광고하던 청년이 담당 목사님을 호명하더니 스승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여기도 또 서프라이즈 당하신 스승님! 꽃다발 안은 목사님이 놀라고 민망하여 스승의 노래를 듣고 계시는데, 내 마음이 울컥했다. 얼마 만의 스승의 노래인가. 아, 목사도 스승이었지. 목사도 언젠가는 스승이었다. 남편이 도사님으로 불리던 강도사 시절, 친구네와 휴양림으로 놀러 간 적이 있다. 스승의 날 지난 스승의 주일이었는데, 주일예배 마치고 늦게 합류한 남편이 커다란 꽃다발에 커다란 케이크를 들고 와 바비큐장이 환해졌던 기억이 아련하다.

우리에겐 모두 스승이 필요하다.
스승이 필요한데, 스승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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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김대중의 공부방  (0) 2022.03.09

귀여워서 쓰러지겠귀.

무자비한 귀여움 어택에 방어가 안되어... 이러다 내가 죽겠긔.

 

지난 주일 교회 아기들이 모두 과자 백팩을 메고 돌아다녔다. 어린이주일 선물로 선생님들이 준비하신 것인데, 세상에 이렇게 귀여운 백팩이라니! 아니다. 백팩 자체는 그냥 막 신박한데, 백팩 매시는 분들의 귀여움이다. 쟤가 보기보다 무거운 백팩이다. 사이드에 뽀로로 음료수가 한 병씩 달려 있으니, 저 쪼그만 등이 감당할 무게가 아니다. 사진의 저분도 수월 치는 않을 텐데 나름 그 무게를 이기고 의연함을 잃지 않으시지만(아오, 저 조그만 나이키 운동화는 또 어쩔!). 직립 보행한 지 얼만 안 된, 휘청휘청 걸음마하는 아기가 저도 가지겠다고 달려들었다. 백팩 메다 뒤로 넘어갈 뻔했다. 그렇지, 쌀가마니 수준 아닌가! 쌀가마니 등에 지는 수준 아닌가 말이다. 

 

귀엽고 사랑스러워 터지는 심장 부여잡고 커다란 하트를 보낸다. 나의 아기 친구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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