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딩 때부터 매 년 여름에는 수련회의 추억이 있습니다. 그 수련회의 기억은 나의 성장과 맞물려서 그 해마다 또렷한 빛깔로 분명한 이미지로 남아 있죠. 어느 해랄 것이 없습니다. 중1때부터 결혼하여 청년부를 떠날 때가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세월 동안 유독 수련회를 가지 않은 해가 있었습니다. 1991년 이었던가? 그 전 해 대학청년부 수련회를 다녀와서는 '내년에는 결코 가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었죠. 새로 바뀐 대학청년부 지도 목사님 때문이었고 그 목사님을 추종하는 청년부 임원들이 만드는 분위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그 목사님의 생각은 이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시사저널 같은 잡지를 보는 것은 영을 더럽히는 일이다' 그 때 나는 늘 시사저널을 끼고 다녔었는데 예배 설교 시간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암튼, 그 해 여름에 나는 수련회를 가지 않기로 결심했었습니다. 해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수련회 데려 갈려고 새벽기도를 하고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했던 정신실이 수련회를 가지 않는다고 하자.... 교회 안에서 여러 어른들이 '가당치도 않다'고 말씀하시면서 저를 설득하셨드랬습니다. 그렇게 말씀 하시는 분들은 평소 내가 존경해마지 않았고 나를 너무도 아끼는 분들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더욱 어려웠습니다.

그 때, 유일하게 제 손을 들어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전까지 대학청년부 지도를 하셨던 전도사님. 아마도 지금 돌이켜보면 청년부에게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친다는 괘씸죄에 걸려서 고등부로 좌천되어 가셨던 것 같습니다. 유일하게 내가 왜 그리도 수련회에 가기 싫은 지 그 이유에 대해서 귀 기울여 들어주는 분이었습니다. 그 수련회에 가지 않았고 수련회 기간 동안에 집에서 수련회 하는 마음으로 두꺼운 책 한 권을 독파했습니다(물론 전도사님의 추천으로 말이죠)

이 일을 경험하고부터 나는 전도사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 아무도 내 고통스런 외침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을 때 그 소리를 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귀를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분을 언제나 스.승.님. 이라고 소개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늦은 나이에 대학원 공부를 하게 된 것도 어쩌면 전도사님의 세뇌 때문이었는 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보고 싶은 책도 다 보지 못하시는 넉넉치 않은 살림에 항상 읽어야 할 책들을 선물해 주시고 '공부' 에 대한 끈을 놓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매주 주보에 쓰는 글을 보시면 '글이 살아있다. 물고기가 파다파닥 뛰어 노는 듯 하다' 라고 격려를 하시면 한 주 한 주 글 쓰는 일이 수월해지고 재미가 있어졌습니다. '어쩌면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일지도 몰라'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셨죠.

내가 인생의 시간을 돌려서 다시 한 번 과거로 날아갈 수 있다면 전도사님이 지휘하시는 성가대에서 다시 한 번 바흐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를 불러보는 것입니다. 나는 전도사님께 찬양도 배웠습니다. 찬양하는 사람이 어때야 한다는 것과, 찬양의 대상이 누군인 것도 분명해 배웠습니다. 그리고 지휘도 배웠습니다. 찬양대 지휘자가 음악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배웠을 뿐 아니라 찬양 대원으로 하여금 음악 이상의 것을 드리도록 연습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도 배웠습니다.

'기독교 세계관' 이라는 낯선 단어를 전도사님이 소개하시는 책에서 처음 배우고 그 이후로 나는 그 '기독교 세계관'에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 부부에게 모토가 되고 있는 '오늘 여기서 그 분을 위해'는 바로 그 때 배운 기독교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도사님과 함께 다니던 교회에서 보내 마지막 해에는(전도사님과 몇몇 친구들은 그 정들었던, 사랑하던 교회에서 우리 발로 걸어 나왔지만 사실은 쫓겨난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빡신 제자훈련을 받았습니다. 금요일 밤에 철야를 하면서 리더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밤을 거의 새면서 죤스토트를 비롯해서 많은 책들을 읽고 발제하고 나누고....또 큐티훈련을 받고, 한 사람을 어떻게 끝까지 붙들고 제자 삼는 지에 대해서 공부하고 배웠습니다. 결국 그 리더훈련은 끝도 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어디가 써 먹지도 못하고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다니고 있는 한영교회에 왔습니다.
요즘 목자부부가 되어 사람들을 섬기면서 새삼 그 때 받은 리더훈련은 오늘을 위한 준비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많은 것들을 한 분께 배웠습니다. 지유철 전도사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오늘의 정신실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나이가 서른 여섯인데(허걱!)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친구랑 여전히 친구다.
여자친구라면 뭐 그럴 수도 있지만 남자친구다.
고3때 독서실에서 만나서 같은 교회를 다니고 청년부를 함께 했었다.
청년부를 하면서 중창단을 만들어서 '사랑의 종소리'를 열심히 불러대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친구에게는 남다른 영력이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군 입대 할 때 일이다. 나랑 또 다른 친구 하나 이렇게 셋이서 같이 어울려 다녔는데 군입대 하기 전에 모란시장 가서 순대국밥도 먹고 그렇게 놀러 다녔던 것 같다.
모든 남자들 그렇겠지만 이 친구도 군대 가는 거 엄청 부담스러워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싫어라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갈 길은 가야하니까 교회에서는 송별예배 드리고 머리 깍고 결국 들어갔다.
그런데 웬 걸....
다음 주일 날 교회에 또 나타난 것이다. 잉?
내용인 즉슨, 입대하던 날 아침에 친구들이 배웅 가려고 모였었다. 그 친구 방에서들 빙 둘러 앉아 있는데 나갈 채비에 부산하던 이 친구가 비좁은 방 안에서 이동하기 위해 펄쩍 뛰었는데 발이 포크에 찔렸었다. 그것 때문에 결국 입대가 연기 됐단다. @@

암튼, 나이 사십을 바라보면서도 여전히 꿈의 냄새가 나고 전혀 아저씨스럽지가 않은 친구다.
아무리 젊어 꿈과 낭만을 말한다해도 현실을 살면서 그 순수함을 지켜내기가 어디 그리 만만하더란 말이냐? 그러나 이 친구는 여전히 꿈을 말하는데도 부적절하게 느껴지질 않는다.
무엇보다 나이가 들수록 그 꿈이 '예수 안에서 꾸는 꿈'이 되는 것이 느껴지니 참 부러울 따름이다.

이쯤 되면....
그의 아내는 이런 그를 두고 뭐라고 말할까?^^ 나는 내 남자 친구들 중에 이 친구가 결혼을 젤 잘했다고 늘 말하고 생각하곤 한다. 어디서 이렇게 좋은 사람을 찾아 냈을꼬?
최근에 이 친구 부부에게 MBTI를 해 줄 기회가 있었는데 이걸 마치고 그 생각은 다시 한 번 확신이 되었다. 나는 두 사람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성격유형은 전혀 다르다 한다. 그래서 힘든 부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점에 대해서 질문하는데 당장은 대답할 말이 없어서 얼버무렸던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두 사람의 성격이 다르지만 인격이 비슷하다. 두 사람 다 인격이 보기 드물게 훌륭하다. 바로 그거였다. 내가 두 사람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 말하자면 사람들이 수준이 있다는 것이다.(내가 너무 띄우나?^^) 비록 성격이 다른 점 때문에 서로 '아'하면 딱딱 알아듣는 의사소통이 되는 것 아니지만 둘이 옳다고 생각하는 지향점이 같다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을까?
그리고 탁 까놓고 얘기지 그렇게 꿈을 먹는 남편 옆에 아내 조차도 함께 꿈만 먹고 있으면 어찌됐겠는가? 그 친구가 순수함과 꿈에 대한 열정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음은 분명 아내의 덕이리라.

서른이 넘고 마흔을 바라보면서도 고3 때와 다름없는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는 것. 피차에 인격이 훌륭한 배우자 만난 덕이 아니겠는가?

자양동의 모닝베이커리에서는 빵과 함께 꿈을 굽는 아저씨가 아기 셋 키우며 마음 넓은 여인네와 함께 살고 있다. ^^
전주로 시집 가서 두 아들을 낳아 키우며 살고 있는 친구 화순이.

믿음 좋고, 잘 생기고, 능력 있고, 무엇보다 화순이라면 세상에서 제일의 여자로 아는 남편을 만나서
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다. 사실 이 글을 쓸 때(이 글 역시 3청에 있을 때 주보에 쓴 글이다) '서른, 잔치는 시작됐다' 에 내포된 뜻은 하나님께서 화순이의 30대에 결혼을 통해서 남다른 복을 주실 것을 기대하고 기도하는 마음이었다.
당시 3청에는 30 고개를 넘어가는 세 처녀가 있었는데 교회 안 팎에서 오는 결혼에 대한 압력은 우리를 적잖이 힘들게 했다. 그러다 '믿는 남자가 드물어' 라는 유행어가 생겨났다. 여름 수련회에서 이 제목으로 촌극을 하고 그걸 각색해서 성탄절 교회 행사 때 다시 공연하기도 했었는데.
'믿는 남자가 드물어' 라는 말은 당시 우리의 형편과 처지(?) 그리고 우리 신념을 너무 잘 표현했던 것 같다. 단지 믿는 남자가 아니라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갈 최소한의 준비가 안 된 남자에게 단지 결혼을 위한 결혼으로 시집가지는 않겠다는 의지도 있었던 것 같다. 때문에 쉽게 사람을 사귀지도 않았고 그래서 더 외롭고 어려운 미혼이었다.
그런 우리에게 특히 화순이처럼 순결하게(?) 마음을 지키며 20대를 보낸 딸에게 하나님이 제대로 된 신랑감을 주셔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있었다. 역시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어디서 저런 남자가 있었는가?' 싶은 남자가 전주에 있었고 '절대 서울을 안 떠나겠다'고 했던 화순이는 지금 6년 째 전주댁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러니까 96년에 쓴 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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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저녁 8시 10분쯤 본당. 수요찬양을 준비하느라 키보드를 설치한다, 가사를 쓴다, 간식을 먹는다..... 한참 분주한 시간. 찬양팀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속속 도착을 하고 준비를 하는데 이 친구가 나타나지 않는다. 시작할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나타나지 않는다. 마지막 기도를 하는데도 나타나지 않은 사람이 이 친구라면 찬양 인도자인 나로서는 별로 걱정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늦어도 반드시 올 것이기 때문에... 그녀를 10년 동안 옆에서 관찰해 온 나의 확신이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오래 전부터 이 친구에게 마음으로 붙여준 별명이 '한다걸'-한다면 하는 girl(?)-이다. 찬양이라면 죽고 못사는 데에 마음이 딱딱 맞아 친구가 된 지 벌써 10년이다. 때문에 새벽 1시에도 교회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아 시간 가는줄 모르고 찬양을 하곤했던 우리는 같이 한 찬양시간 만큼 싸운 시간도 많다. 싸움의 내용은 언제나 비숫한 것이었다. 예를들어 청년회에서 새로 뭔가 할 일이 생겼는데 내 생각에는 같이 할 친구가 이 친구밖에 없는데 절대 안 하겠다는 것이다. 같이 하자. 아니다. 나는 이 일에는 아니다. 아니다. 너다......

그렇게 무슨 일이든 새로운 일에 대해서 선뜻 해보겠다고 나서거나 하는 일이 좀체로 없는 친구다. 대충 하겠다고 대답을 하고 나중에 눈치껏 발뺌을 하는 방법도 있으련만 그 대답 한 번 듣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하겠다고 대답을 했다, 그러면 정말 하는 것이다. 성실하게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섣불리 입에 발린 말로 대답하는 법을 모른다. 그래서 '한다걸'이다.

수요찬양건이 최근의 일이다. 집은 상도동, 직장은 신림동, 교회는 명일동. 그러니까 수요일날 퇴근을 하고 1시간 반을 버스 2번 지하철 한 번을 타고 왔다가 다시 그 길을 되돌아 가야 한다. 그런 어려운 조건임을 알면서도 같이 참여할 것을 요청했고 그러기로 하고 1년이 지났다. 때로 어떤 사람에게 뭐 가까운 교회 나가지 뭐 이렇게 먼데까지 오느냐는 충고 아니 충고를 들으면서 꼬박꼬박 수요일 약속을 지켜준다. 한 번 하겠다고 한 이상 자신이 맡은 일이 크든지 작든지 이 친구에게 있어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다. 사실 빠지면 찬양이 절대 안 되는 반주자도 아니다. 찬양 리더 옆에 서서 그저 같이 노래하는 싱어일 뿐(?)이다. 핑계를 대자면 이런 핑계를 대서 얼마든지 적당히 할 수도 있는 일이다. 나는 그 성실함이 눈물겹다.눈물겹게 고맙고 눈물겹게 존경스럽다.

그렇다. 내가 10년을 보아온 이 친구는 그런 걸음걸이로 가는 친구다. 자신의 일에 대해서, 하나님 앞과 사람과의 약속에 대해서 그렇게 하겠다면 하는 친구다. 매사에 그랬었다. 자신이 한 대답에 대해서, 말에 대해서 그렇게 책임지는 친구였다.
이 친구가 나이 서른이 되기까지 걸어 온 걸음걸이가 그러하다. 그래서 이 친구에게 주신 신실하신 하나님의 상(?)이 무었일까? 지난 12월 2청의 3분 스피치 시간에 한 친구의 고백이다. '지난 한 해 자신의 기도에 대해서 늦어짐의 감옥-데이빗 씨맨즈의 <좌절된 꿈의 치유>에서 요셉이 갇혔던 감옥을 가리켜 한 말-으로 답해주심으로 더 깊은 기도와 간절한 기도를 하게 하시고 그로 인해 이전에 누리지 못한 기쁨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평소 자기 표현이 많지 않고 입에 발린 말 잘 하지 않는 사람임을 알기에 그걸 듣는 우리가 함께 감동 하는 시간이었음을 기억한다.

그렇게 20대를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요령 피울줄 모르고 하나님의 교회를 섬겨온 친구에게 하나님꼐서 잔치를 주시기 시작했다고 믿는다. 기쁨이라는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보상으로. 그리고 이것은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이렇듯 묵묵히 성실히 하나님과 사람 앞의 약속에 충실한 사람들에게 끝내 하나님께서 최고의 잔치를 베푸시리라 믿는다. 누가 이런 사람을 보면 감히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함께 몇 년을 같은 직장에서 일해도 전혀 상관없는 사람으로 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송미경과장님과는 9개월 동안 같은 곳에서 일했죠.
객관적인 이력을 소개하자면 너무 많은데......현재는 김포에 있는 모 정신병원에서 임상심리 전문가로 일하고 계시고 여기 저기 많은 학교들에 강의를 하고 계시고...박사논문을 낳기 위한(?) 산고 중에 계십니다.

어렸을 때 이랬었답니다. 하나님이 잠자리에 들기 전 자신이 하는 기도를 들으시고 주무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너무 늦게 잠자는 기도를 드리면 송구했다고 합니다. 그거 기다리다 못 주무시나 해서요...^^
그렇게 어려서부터 경.우.가 바른 어린이셨나봐요.

한 마디로 경.우.를 아는 분이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죠. 그 '경우'라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겠죠. 윗사람 아랫사람한테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것. 그 지켜야 할 것을 지키다 보니 경우에 없는 사람들은 자연히 이 분을 거북해 하게 되겠죠. 거북해 하다못해 별별 험한 소리를 다 들어도 정도를 포기하지않는 분이지요. 그러면서 직장에서 받은 상처가 너무 크셨죠.

무엇보다 제게 '헐랭이' 라는 이름을 붙여준 분이기도 합니다. 제가 입사하고 저를 딱 3일 정도 보시고는 '아냐 아냐! 헐랭이야~' 이러셨다죠.
함께 신우회를 만들기 위해서 은밀히 기도 모임을 하고 그렇게 준비하여 갈등과 반목이 심한 직장에서 신우회를 만들고 그렇게 9개월을 보내곤 직장을 옮겨 가셨습니다.

직장 옮기는 것을 결정하던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 보았습니다. 늘 계획적이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된 후라야 행동에 옮기고 기꺼이 변화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 직장을 옮기는 과정에서는 불투명한 것들이 너무 많았고 순간순간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것들이 많았습니다. 어려운 상황이었죠. 10년 넘게 다닌 직장이었으며 이 직장에서는 존경 받는 상사였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냥 그대로 직장에 남아 있어도 손해될 것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편할 수도 있었겠죠.
여기 저기 오라는 곳이 생기고 조건을 맞춰보고 면접을 보고 하시면서 '과연 내가 잘 하고 있는가? 이것이 하나님 뜻인가?'를 계속 물으면서 힘들어 하셨습니다. 과장님한테는 모든 변화는 충분한 검토와 계획 속에서 나왔기 때문이었습니다. 함부로 결정내리지 않으셨던 것이죠. 최종적인 결정을 해야 했던 날이 기억납니다. 매우 힘들어 하시면서 '나 이런 식의 결정은 태어나고 처음 해봐요. 불확실함 속에서 결정해 보기는 처음이야' 하면서 기도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셨었죠.

그 날 이후로 과장님의 수첩에 <모험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에 나오는 한 구절이 늘 적혀 있게 되었는데...내용은 하나님께 백지 수표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싸인하시고 하나님이 다~ 책임지시라는 뜻이었죠. 아마도...
능력도 있고 재능도 있는 분이기에 어떤 일을 해도 실패함이 없어서 당당할 수 밖에 없었지만 백지수표를 말하는 순간 '알 수 없는 내일'에 대한 주권을 하나님께 이양하겠다는 뜻으로 해석이 됩니다.
그리고 그 때 이후로 드물게 과장님을 만날 때마다 예전보다 더 많이 포기하고 더 많이 하나님께 삶의 주권을 이양한 사람의 평안을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 그 일들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중대한 결정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사람들에게 이거냐, 저거냐의 선택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완전히 믿고 선택하는 그 선택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 아닐까? 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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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날은 2001년 1월2일.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에 첫출근 한 날이다.
아직 사무실도 책상도 정해지지 않아 선임자 책상에서 멍청한 표정으로 보내야 했던 하루.
그 사무실에 약간 깍쟁이 같은 아가씨가 하나 앉아 있었다. 깔끔하고 세련되게 생겼는데 그리 따뜻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전화 통화를 간간이 들어보니 '전도사님...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이 아마도 교회는 다니나보다. 에? 책상에 시심(시냇가에 심은 나무 -큐티교재)이 있네. 나두 가방에 시심있는데...

조금씩 알게 되면서 인기가 좋다는 걸 알았다. 관계들 간에 갈등의 골이 깊은 직장이었는데 이 사람을 좋아라 하지 않는 사람 찾기가 어려웠다. 상담을 전공했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들 말에 잘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공감을 잘해주기도 하였다. 단지 그것만이 아니라.....그 이상의 매력이 있는데 뭘까?

성격유형은 ISTP. 에너지 절약가다. 웬만한 일에는 필요 이상으로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관계에도 마찬가지다. 그 점이 나로서는 부럽기도 한 면이다. 내가 기미나를 알고 맨 처음 배운 건 적당한 선에서 에너지 조절하기! 이것이다. (물론 기미나로서는 나한테 이걸 가르쳐준 적이 없다. 그냥 지 하고 싶은대로 사는 모습을 보면서 나 혼자 열심히 배웠다.
그리고 SP 기질이 나랑 딱 맞아 떨어진다. 놀면 힘이 난다. 일만 하면 죽는다. 가끔 그것도 갑자기 충동적으로 한 번 놀아줘야 한다. 그러면 또 그 힘으로 얼마간 버틴다. (우리는 피차 애교있는 아내 되기는 어렵다. 엽기적인 아내가 되어 남편을 즐겁게 해 줄 수는 있다^^). 이런 맘을 서로 알아줄 수 있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그런 ISTP 기질에 충실하지만 열심히 개발한 F 성향들. F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열 받아서 막말 할 때는 디게 무섭지만 그렇게 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들을 열심히 찾아내 자기 것으로 만든 것이 아마도 그녀의 매력인 것 같다. 사람들이 그걸 좋아라 하는 것 같다.

남편과 전화 통화를 하는 거 보면. '네~ 그러세요. 여보! 강의는 잘 끝났어요? 피곤하지 않아요?...' 어찌나 나긋나긋한지. 그러나 이것 역시 기미나의 본질적인 행동은 아니다. 그걸 원하는 남편에게 맞추다보니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이다.
영빈이를 대할 때도 차분히 자분자분 설명하는 모습을 자주 발견한다. 영빈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위해서 미래에 대한 염려 떨쳐 버리고 집으로 간 그녀다. 미래에 대해서는 주님께 맡기겠다는 믿음 하나로 사표를 던지고 영빈이 곁으로 갔다. 그리고 에너자이저 백영빈ㅡ이 뒤를 따라 다니면서 1년이 넘는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고 있다.

때론, 무슨 IVF출신이 이렇게 뜨거워? 싶게 기도, 말씀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 이건 아마도 남편과 함께 주고 받는 영향인 것 같기도 하다. 누구보다 기도의 필요성을 잘 아는 사람. 기도하지 않고 말씀 보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입버릇 처럼 말하는 사람.

그런데 특이하게 그녀는 애를 어깨로 낳는다. ㅋㅋㅋ 남들은 애를 낳고 나면 배가 나온다는데 그녀는 어깨가 넓어진다. 오늘도 그녀는 둘째 낳은 이후로 '이 어깨가 어찌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으리라.

내게는 그녀를 만난 게 은혜라고 여겨질 뿐이다. 위로부터 온 선물.
무엇보다 나의 wonderful counsell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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