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자님께.

이제나저제나 기약 없는 끝을 기다리며 한 해를 보냈습니다. 이 무기력한 시절에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요?

“주님, 어서 이 어려운 시기가 끝나게 해주세요.” 코로나 시기 내내 이 기도를 드렸는데, 어느 날 문득 시편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시 94:12) 아, 그저 빨리 지나가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기꺼이 징벌받아야 할 때이구나, 싶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생태계 질서의 파괴에서 기인한다고 하죠.

“우리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음터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인데요. 사람과 사람의 연결 너머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 생명들과의 연결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생태계 질서를 파괴하고 기후위기를 초래한 무분별한 욕망이 그 누구의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것이었음을 아프게 인정하고 회개하고, 기꺼이 징벌받을 때이구나 싶습니다. 더불어 모든 일에서 기꺼이 징벌받고, 책임지는 나음터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지난 한 해도 열심히 사랑으로 상담하고 강의했습니다. 그러나 고백컨대, 항상 잘하지 못했습니다. 연결을 기대하고 찾아오셨다 실망을 안고 돌아가신 분도 있을 것이고, 크고 작은 미숙한 행보들이 있었습니다. 아프게 돌아보고 있습니다. 내적 여정과 영성 상담을 통해 저희가 말하고 가르치는 바, “빛으로 가는 길은 그림자”에 있습니다. 어쩌다 이룬 작은 성공이 아니라 죄 된 본성으로 우리도 모르게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일을 더욱 살피겠습니다. 가르치는 바대로 살기 위해 더욱 돌아보는 나음터가 되려고 합니다. 저희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신선한 소식도 있답니다. 어쩌다 보니 나음터가 ‘금남의 집’ 같은 이미지가 있습니다. 올해 하반기 세미나에는 여성보다 남성이 더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진실한 자기를 만나고, 그 여정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여남 차이가 없다는 것을 기쁘게 확인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도자과정 여섯 분 중에 두 분이 남성이었고요.

보이지 않는 피라미드 조직도 생겼습니다. ^^ 글쓰기 모임 이후 여러 후속 모임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여기서 오히려 더 깊은 배움과 나눔이 일어나고 있어서 여간 보람이 되지 않습니다.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만큼 한 분 한 분 떠올리면 감사한 일들이 많습니다.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입니다.

나음터가 그러하듯 후원자님의 한 해도 그분의 은총이 맑은 날과 흐린 날로 얼굴을 바꾸며 다가오셨을 줄로 믿습니다. 다가오시는 그분의 얼굴을 알아보는 마음의 눈이 더욱 맑아지시길 기도드립니다.

올 한해 가장 감사한 이름, 후원자님의 몸과 마음이 주님 안에서 평안하시길 기도드리며...

2021년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의 시간에,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드림

* 후원 계좌 : 농협 301-0240-4119-71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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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글로, 송구영신]

송구영신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크로노스(Chronos)는 관성대로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입니다. 카이로스(Kairos)는 의미의 시간입니다. 멈춰 성찰하여 의미를 건져 올리는 시간, 그분의 시간일 것입니다.

송년회의 계절이기도 한데요. 좋은 사람들과 송년 파티, 선물교환, 맛있는 음식과 와인파티 같은 걸 그려보게 되네요. 나음터도 한 해 동안 연결되었던 분들과 송년회를 하면 좋겠다 싶지만 여러 한계가 있네요.

함께 카이로스를 누려보려고요. 시간의 주인이신 분과 함께요. 우주를 운행하는데 바빠서 도통 나같은 사람에겐 신경을 못 쓰다 송구영신 예배 말씀 뽑기 시간에 잠깐 오셔서 ‘내년의 말씀’ 하나를 점지하고 떠나시는 하나님(超越)일 수도 있지만, 단 한 번도 나와 떨어진 적 없으신 분(內住)이기도 합니다.

바쁘거나 귀찮아서 돌아보지 않았던 ‘나’에 고요히 머무르는 시간에 그분의 세미한 목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 그분의 시간과 교차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온라인에서 만나 함께, 그러나 홀로, 글로 나를 돌아보는 송년회를 마련했습니다.

온라인 오프라인 내적 여정, 지도자과정, 꿈 영성모임, 글쓰기 모임, 개인상담, 특강 수강자, 후원자님, 그냥 놀러 오셨던 분... 2021년 나음터와 연결되었던 분들 모두 얼굴 뵙고 싶습니다. 연결되었던 모든 분들께는 50% 할인 혜택 드리려고요. “나는 연구소에서 올리는 글 열심히 읽었다, 나도 연결되어 있다!” 하시는 분들도 무조건 할인입니다. 녀남소노, 글을 잘 쓰는 사람 못 쓰는 사람 모두 환영입니다. 일 년이 가도록 일기 한 줄 안 쓰시는 분, 특별히 환영합니다. 그냥 막 쓰게 해드리겠습니다.

[함께, 그러나 홀로, 글로, 송구영신]의 자리에 초대합니다.
  

✔ 일정과 신청 안내

+ 일시 : 2021년 12월 30일(목) 오후 8시~10시 30분
+ 인원 : 25명(선착순)     + 장소 : 온라인(zoom) 
+ 수강료 : 2만 원(연구소 프로그램 참가자 1만 원)  
+ 안내자 : 정신실 소장
+ 문의 : 010-4235-8020
+ 신청 링크 : https://bit.ly/2TAwI0C

 

홀로, 글로, 송구영신

2021년 나음터 글로 하는 송년회 신청 양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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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개소 3주년을 맞았다. 3이라는 숫자가 담은 무겁고 풍성한 것을 그대로 느낀다. 고요하게 느낀다. 벼르고 벼르던 신소희 수녀님의 '베긴(Beguine) 특강' 3주년에 맞출 수 있었다. 팬데믹 상황, 수녀님의 건강 등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결국 성사된 것 역시 '3'이라는 숫자에 부합하는 신비이다. 수녀님을 다시 만나 수녀님께 배우고, 무엇보다 '베긴 영성'을 만나지 않았다면 연구소 3년은 무겁기만 하고 아프기만 한, 향방 없는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몇 백 년 전 여성들의 선택과 삶, 삶과 신앙, 그렇게 일군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여성들의 공동체가 가슴을 뛰게 했다. 혼자 뛸 수 없어서 연구원들에게 소개하고, 우리끼리만 알고 누릴 수 없어서 특강을 마련했고 20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했다. 가족처럼 친밀한 사람, 모르는 사람, 심지어 가톨릭 신자도 세 분이 참석하였다. 어떻게 듣고 가셨든, 각자에게 새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것을 안다.

수녀님께서 커다란 꽃다발을 해오셨다. 어쩐지 수녀님께 어울리지 않는 선물이다. 아니나 다를까 민망하신 듯 말씀하셨다. "제가 커다란 꽃다발 못 사요. 그런데 어제 집 앞에 꽃집에서 이걸 사는데 같은 돈을 받고 두 배로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꽃다발이 꼭 연구소 선생님들 같죠? 제 돈은 반 밖에 안 들어갔어요. 반은 하느님이 내신 거예요. 그분이 연구소를 정말 축하해주고 싶으시구나, 했어요. 제가. 허허허." 수녀님의 존재가 꽃다발이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일깨우는 매개자라는 것을 아실까? 베긴 영성가 '하데위히'를 연구한 수녀님의 박사 논문을 읽으며 연구자로 수도자로 살아오신 수녀님 인생을 자꾸 생각해보게 된다. 그 고독한 연구와 수도의 삶이 오늘 내게 어떤 선물이 되고 있을지, 수녀님을 아실까?

베긴 영성을 오늘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궁금증으로 특강에 참여 하셨는데, 다 듣고 나니 "어떻게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 사랑을 살까"라는 질문이 남았다는 후기로 가슴이 뜨겁다. 연구소 3년, 아니 여성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공부도 강의며 자주 좌절하고 분노한다. 앤 윌슨이 말하는 '중독 사회'의 벽 앞에서다. 교회고 사회고 가릴 것 없이 '중독 사회'이다. 세상 모든 일은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고, 정답이 있고, 그 정답은 최종 권력자에게 있고, 파이는 정해져 있어서 누군가 누리는 만큼 나는 누릴 수 없으니 투쟁해야 하고 경쟁해야 하는 사회이다. 반드시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야 하고, being 하지 않으며 끝없이 doing 해야 한다. '백인 남성 시스템'이며 다른 말로 '중독 사회'라 부른다. 절절하게 공감한다. 이 피라미드 꼭대기부터 아래까지 견고하게 지탱하는 시스템이다. 그 맞은편에는 중독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동반 의존으로서의 여성 시스템'이 있고, 대안은 따로 있다고 앤 윌슨은 말한다. 그가 말하는 대안은 '과정으로서의 공동체'이다. 연구소 3년, 이걸 한 번 해보자고 다짐하였다.

쉬운 일은 아니다. 중독 사회에서, 나 역시 이미 중독된 존재인데 제 3의 방식을 선택한다는 것은. 연구소를 아니, 과정으로서의 인생 살기를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새로운 힘을 준 영성이 '베긴 영성'이다. 특강 마지막에 들려주신 무명의 베긴 여성이 쓴 시가 있다. 급진적으로 아름다운 이 공동체가 기존의 신학과 잣대로 규명되지 않자, 사제들과 남성 신학자들은 탄압하기 시작했다. 마녀로 지목되어 화형 당한 지도자도 있다. 그들의 탄압에 반응한 어느 베긴의 시라고 한다. 시 자체가 가르침이다. 최근에 공저로 내신 책 <이 시대에 다시 만난 여성 신비가들>과, 책 안쪽에 남겨주신 메모 또한 3주년에 받는 소중한 선물이다. 아래 시는 도미니크 수사에 의해서 편집된 글이라고 하는데, 수녀님이 번역하여 나눠주신 것에도 두 단어(배우고 -> 분석하고, 검사하고 -> 검열하고)를 내가 바꾸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여 행동하기로, 분석하는 대신 고요히 응시하고 머물기로, 흘러오는 일상의 강물에 몸을 맡기고 춤추기로... 다시 새로운 마음을 가져본다.

당신은 말을 하고, 우리는 행동한다.
당신은 분석하고, 우리는 응시한다.
당신은 검열하고, 우리는 선택한다.
당신은 씹고, 우리는 삼킨다.
당신은 노래하고, 우리는 춤을 춘다.
당신은 꽃을 피우고, 우리는 열매를 맺는다.
당신은 맛을 보고, 우리는 향기를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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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음터’라 불리는 연구소가 벌써 3주년을 맞았습니다. 누가 누굴 가르치거나, 상담가의 이름으로 내담자를 고치려 하지 않고, 후원자들을 향한 감사 기도로 연결된 공동체를 일궈보자 애를 써봤습니다. 그 열매는 주님이 허락하시는 몫만큼이겠지요.
중세에 ‘베긴(Beguine)회’ 라는 여성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사랑하여 그분처럼 살고 싶은 여인들이었습니다. 당시 여성들 앞에 놓인 두 선택지, 결혼이나 수도원이 아닌 세상 한복판 가장 낮은 곳으로 모여 특별한 봉헌의 삶을 살았던 분들입니다.
공동체이긴 하지만 창립자도 없고, 예규도 없고, 수도원 공간도 없는 자발적 공동체였다고 합니다. 이충범 교수는 <중세 신비주의와 영성>에서 베긴 공동체의 특이성을 말하면서 계급과 젠더 차이를 해소하고, 제도적 종교를 뛰어넘었으며, 관상적 삶과 사도적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신비주의 영성을 창조했다고 말합니다.
우리 시대와 먼 것 같지만 또 멀지도 않은, 다다를 수 없는 삶과 영성인 것 같지만 어쩐지 가슴을 뛰게 하는 살아 있는 이야기입니다. 연구소는 베긴 영성을 만나고 공동체, 여성 공동체를 향해 새로운 꿈을 꾸고 있습니다. 베긴회 신비가인 ‘안트베르펜의 하데위히(Hadewijch von Antwerpen)’ 연구로 박사논문을 쓰신 신소희 수녀님 모시고 특강 듣는 자리 마련했습니다.
여남 소노, 비신자, 신자, 가톨릭 신자, 개신교 신자… 누구라도 환영합니다.
 
 
여성, 영성, 공동체 : 베긴 영성 특강

+ 강사 : 신소희 수녀(성심수녀회 예수마음배움터,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전공)
+ 일시 : 2021년 12월 3일(금) 오후 1:30 ~ 3:30
+ 인원 : 25명 (선착순)
+ 장소 : 청년문화공간JU동교동 바실리오홀(마포구 월드컵북로 2길 49 / 홍대입구역 2번 출구 86M)
+ 참가비 : 이만 원
+ 코로나19 방역단계 변화에 따라 온라인 강의로 변경될 수 있습니다.
+ 신청 링크 : https://bit.ly/3kDbLf

 

 

여성, 영성, 공동체 : 베긴(Beguine)영성 특강

신소희 수녀님의 '베긴영성 특강' 강의 신청 양식입니다. + 강사 : 신소희 수녀 (성심 수녀회 예수마음배움터,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전공) + 일시 : 2021년 12월 3일(금) 오후 1:30-3:30 + 인원 : 25명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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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님께 누군가 질문했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온유한 성품을 가질 수 있습니까?" 그에 대한 답으로 교황님은 '꿈'을 얘기하셨단다. 내용은 이렇다. 교황님은 풀기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침대 옆에 있는 '꿈꾸는 요셉상' 앞에 편지를 써놓고 잠든다고 한다. 꿈으로 답을 주십사 하는 기도이다. 요셉은 가톨릭에서 꿈을 수호하는 성인이다. 약혼녀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듣고 '가만히 파혼하려' 했으나 꿈에서 천사의 메시지를 받고 일어나 결혼을 추진하였다. 교황님의 영상과 메시지를 자주 찾아본다. 다양하고 살아 있는 표정에 주목하게 된다. 진지하게 강론하는 중에 강단 위에 난입하는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눈빛, 어린아이처럼 환한 웃음, 트럼프 같은 이들과 마주할 때 화난 듯 굳은 얼굴을 본다. 감정을 느끼지 않고 전혀 영향받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투명하게 느끼고 적절하게 표현하는 사람이다. 교황 님은 그 좋은 예다. 꿈을 기다리는 태도는 자는 동안 하나님을 기다리는 겸손한 기도인데, 역시나! 싶다.

 

가을 꿈모임에 가톨릭 신자 한 분이 오셨다. S선생님이다. 늘 시간이 조금씩 늦는데 미사 반주를 하고 달려오면 그 시간이라고. 드물게 이렇게 가톨릭 신자 분이 연구소 여정에 함께 하시곤 한다. 경계를 넘나들며 가톨릭 영성을 배운(배우고 있는) 경험이 있어 마음이 많이 쓰인다. 고맙기도 하고. 첫 시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 얘기를 해드렸다. 꿈꾸는 요셉상을 곁에 두고 꿈 편지를 쓰신다는 얘기. 두 번째 모임이었다. 지난 모임 마치고 성당 교우에게 선물을 받았단다. 신기하다며 모니터 카메라에 가까이 대는데 꿈꾸는 요셉상이다. 편지도 함께. 뜬금없는 선물이 내 삶의 다른 부분과 하이파이브하면 '짝' 소리 낼 때면 그분이 조용히 열일하고 계시다 들킨 거라고 믿는 게 좋다. 꿈 여정을 시작한 선생님을 응원하시는 그분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시간엔 두 분의 꿈을 나눴는데, S선생님과 또 한 분. 일찍 수녀 서원을 하였으나 결혼한 여자로 살아온 세월, 결혼이 자신에게 맞지 않다고 여겨 다가오는 만남조차 거절하고 살아온 세월. 전혀 다른 두 세월이 담긴 꿈을 나눴는데, 어쩐지 마음에 남은 진실은 하나의 이야기 같았다. 꿈 여정을 하며 배우게 되는 것도 비슷하다. 사람 사람이 이토록 고유하구나! 누구의 인생도 누구의 고통도 남의 것과 견줄 수가 없구나! 하는 것. 다른 사람의 고통과 치유 여정에 섣부른 조언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나는 그 어리석은 업보를 얼마나 쌓고 살아온 것인가. 그러나 그 고유한 빛깔의 고통과 치유의 어느 길목은 꼭 나와 교차한다. 내 얘기가 아닌데, 나는 저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는데, 나는 수녀가 되려 한 적이 없고, 결혼을 피하지도 않았는데. 존재 깊은 곳에서 공명하고 울리는 것을 느끼게 되니 그것이 신기한 일이다. 

 

꿈 모임 마치고 며칠 지나 꿈꾸는 요셉상 하나가 우리 집으로 왔다. S선생님이 보낸 것이다. 침대 옆 협탁을 깨끗이 정리하고 모셨다. 꿈을 기다리는 잠은 주술이 아니다.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시는 주님께 내 영혼을 맡기는 시간이다. 낮의 곤한 삶을 위로하고 보상하심으로 자는 동안에도 복을 내리신다. '어떤 사람인지'가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지'에 연연하여 소진한 내 영혼을 다시 그분께 맡기는 시간이다. 겹겹이 썼던 가면, 사회적 얼굴들 뒤에 숨은 두려움, 슬픔을 가차 없이 만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니 악몽이어도 좋다. 악몽은 악몽대로 진실한 나로부터 도망치는 나를 보여주니 말이다. 악몽을 꾸는 것도 내게 유익이다. 꿈은 밤마다 받는 예기치 않은 선물이다. S선생님을 비롯, 자신의 인생을 끌고 나음터로 모여드는 사람 사람이 모두 예기치 않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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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면 예배는 이렇게 갑자기 조용히 다가왔다. 코로나로 인한 일상의 변화가 긴 과정이었든 회복 역시 과정일 것이다. 각 교회의 대표기도 내용 중 빠지지 않았던 기도가 이루어졌다. "어서 회복되어 교회당에 함께 모여 예배하고..." 인원 제한 없이 대면하여 예배드리는 것이 가능해졌다. 우린 정말 대면 예배를 기다렸나?

 

주일학교 찬양팀 준비하는 현승이를 태워가느라 예배 시간보다 한참 일찍 도착했다. 교회 주변의 모든 길은 단풍과 낙엽으로 그냥 그림이다. 길가에 추차하고 운전석에 앉아 있어도, 나와서 걸어도 풍경화 속에 있는 것 같다. 조금 춥지만 골목 공원에 가 앉았다. 책을 펼쳐도 온전히 집중하기 어렵다. 우수수... 바람과 나무의 합작품이 눈앞에 펼쳐지니 말이다. 

 

눈앞의 작품 멋짐에 밀리지 않는 재미가 있는 책이다. 말레이시아 원주민들 이야기에 금세 빠져들게 된다. 빠져들었다 싶으면, 우수수수. 자꾸 우수수수... 하니까 신기하지도 않아서 외면했더니 나풀나풀 읽고 있는 페이지에 나뭇잎 한 장을 떨어뜨린다. 누가? 바람이. 바람 같은 그분이? 

 

시간이 되어 교회로 향했다. 바삭바삭 쌓인 낙엽을 밟으며.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교회가 가까워지지 며칠 전 강의에서 내가 했던 말이 낙엽 밟는 소리와 함께 마음에 울렸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달라스 윌라드의 마지막 영성 수업>에 나오는 얘기다. 하나님 나라는 정치적인 곳이나 사회적인 곳이 아니라고 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곳이니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란다. 교회는 기껏해야 병원과 같다고 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 방식이 작동하는 곳은 차라리 자연이다. 방금 전 앉았던 공원의 벤치.

 

큰 기대 없었지만 역시 함께 드리는 예배는 달랐다. 내 목소리 적당히 묻혀 편안한 함께 드리는 찬양, 거리를 두고 앉았으나 거리 넘어 전해오는 사람들의 몸, 몸과 숨. 사람들 사이를 오가는 에너지. 현장에서 듣는 설교도 달랐고. 처음 사랑을 회복하자는 설교였다. 마음 깊은 곳을 울렸다. 교회를 향한 여러 행위, 수고, 외형을 달라지지 않았지만 '사랑' 즉 '진심'은 사라진 세월이다.

 

설교 마치고 기도하고 찬양하는데 사랑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어릴 적부터 내가 사랑하던 하나님. 교회 말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귀하신 이름은 내 나이 비록 어려도 잘 알 수 있지요" 얼마나 좋아하던 찬양이었던가. 어릴 적부터, 중고등 학교 시절, 청년 시절.... 하나님을 사랑했다. 하나님 사랑이 교회 사랑이었고, 교회가 하나님 나라인 줄 알았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인 줄 알았던 때에도, 하나님 나라여야만 한다고 주먹 불끈 쥐고 목에 핏대를 세우던 때에도 나는 한결같이 하나님을 사랑했다.     

 

예배 마치고 다시 차로 걸어가는 길에 다시 그 말이 울렸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맞아, 그렇다고 교회를 무시하지는 않는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는 걸 알아버렸기에 천진하게 사랑할 수는 없다. 그래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겠구나! 알게 되었다. 도적 같이 임한 대면 예배에서 은혜를 받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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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여름이었다. 여름 수련회 강사로 전국 각지의 수련회장을 누비고 다닐 수 없었지만, 수련회 철 강의 따라 이동하는 거리를 모두 합해도 한 번 다녀오는 것에 미치지 못할 먼 곳을 오가는 여름이었다. 네팔의 윤선이와 아홉 번을 만났고, "이게 실화냐! 윤선이와 수다라니!" 만날 때마다 믿기지 않았으나 결국 네팔을 아홉 번 다녀온 느낌이다. 책을 읽는다지만 그렇지 않다. 진정으로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내가 아니라 책이 읽는다는 것을 안다. 내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읽는다. 책일 나를 읽게 한 후에 마주 앉아 책이 읽어낸 '나'의 이야기를 나누는 대화의 기쁨은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아홉 번의 만남은 이래저래 민낯이었다. 일어나서 겨우 정신 정도 차리고 부숭부숭한 얼굴로 카메라를 켰다. 나는 아홉 시, 윤선이는 새벽 다섯 시 몇 분. 마음에도 무얼 찍어 바르고 그럴 일 없이, 책이 읽어낸 나의 수치심을 그냥 서로 말했다. 민낯으로 만나는 만남이 좋은 걸 어떻게 말로 치장하여 설명할 수가 없네.

벌써 십수 년 전, 남편이 신학교도 가기 전이었다. '가정교회'라는 셀모임을 하면서 윤선이 부부를 만났다. 결혼하고 바로 선교사로 나갈 젊은이들이었고, 함께 한 시간이 길지도 않다. 그런데 두 사람 보내면서 아까웠다. 너무나도 아까웠다. 저 두 사람이 함께 하는 공동체면 얼마나 좋을까? 나이가 나보다 한참 어린데 속이 깊이 무르익은 사람들이었다. 질문할 줄 알고 깊이 들을 줄 알고. 내게 좋은 사람은 진심으로 궁금하여 질문할 줄 알고, 마음의 귀로 듣는 사람이다. 나이와 상관 없는 능력이다. 함께 있으면 참 힘이 될 것 같아서, 이기심에 아까웠다. 막 좋은 계획을 세우며 사람을 사랑하는 버릇이 있어서 혼자 계획도 많이 세웠다. 윤선이가 아이를 낳으면 나는 모든 일을 전폐하고 한두 달 네팔로 가서 산후조리를 해줘야지! 같은 생각들. 돌아보면 마음은 진심이었는데, 비행기 값이 없어서 이루지 못한 꿈이다. 사실 함께한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는다. 잠시 가정교회에서 함께 하고 네팔로 갔고, 몇 년에 한 번 나오면 짧게 얼굴 보고... 내가 윤선일 생각하는 것보다 윤선이가 나를 훨씬 더 많이 생각했다는 걸 뒤늦게 안다. 이번 여름 이 뜨거운 만남은 팬데믹 덕분, Zoom 덕분이 아니라, 언니를 기억해준 윤선이 덕분이다.

평생 정말 많은 책모임을 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같이 읽자" 라고 말하는 것은 거의 "사랑한다"는 고백과 같다. 남편 김종필과도 그렇게 만나고, 함께 읽다 헤어지고, 각자 읽으며 다시 만나지 않았던가! 사랑한다 고백하고, 더 많이 사랑한 죄로 상처 받는 것처럼 이 사람 저 사람 같이 읽자고 부추기다 마음도 많이 다쳤다. 그렇게 긴긴 세월 같이 읽자, 같이 쓰자, 하면서 살아왔더니 이렇게 좋은 선물도 받는다. 책 읽는 모임이 아니라, 각자 책이 나를 읽게 한 후에 '읽혀버린 나'로 만나고, 헤어져 각자 또 쓰고, 또 읽고, 읽히고 카메라 앞에서 만나고. 잊지 못할 2021년 여름이다. 여름 수련회 대목 강의는 온데간데 없어졌지만, 네팔에 아홉 번 다녀올 비행기 값을 벌었으니 대박이 난 거다.

생각해 보니 이게 끝이 아니네. 연구소 지도자 과정에서 여름방학 동안 달라스 윌라드 <마음의 혁신>을 함께 읽었다. 여럿이 함께 하니 얻어가는 것이야 제각각이겠으나, 내게는 완주 자체가 큰 의미이다. 십수 년 전, 카타콤 같은 하남의 아파트 거실에서 혼자 읽으며 울다 기도하다 했던 책이다. 함께 읽을 이들이 이렇게 많아졌으니, 이 또한 큰 선물이다. 외롭게 혼자 읽고 써온 세월이 준 선물. 올여름 정말 뜨거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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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이 <수선화에게> 하는 말처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릴 일이 아니다. 가끔 하느님도 이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며 수선화를 위로한다. 수선화에게랴. 사람에게, 우리에게, 사람인 시인 자신에게 하는 말이려니. “너만 그런 것 아니야, 모두 외로워." 위안 또는 약간 안도는 된다. 그렇다고  외로움의 크기가 줄어드는 건 아니다.

나는 외로워서 책을 읽었고, 어떤 좋은 책을 혼자 읽을 수밖에 없어서 외로웠다. 포스트잇을 더덕더덕 붙이고 책꽂이에 꽂힌 책들은 외로운 시간과 마음의 흔적이다. 읽은 덕에 쓸 수 있었고, 쓰는 사람인 내가 참 좋으니 외로움은 또 얼마나 고마운 감정이었나. 그럼에도 늘 꿈꾼다. 어떤 좋은 책을 놓고 하염없이 얘기 나눌 사람과 시간을. 꿈만 꿨지 언제 그런 날 오겠나 싶어 다시 외롭다. 그러면 또 깊은 밤, 이른 새벽 혼자 읽는다.

 

지도자 과정의 H선생님이 첫 시간에 그런 말을 했다.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은 책을 안 읽고, 책을 함께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교회를 안 다니고..." 그 아쉬움을 지도자 과정에서 채울 수 있다는 기대로 좋다는 말이었다. 그 말에 나는 또 얼마나 좋았는지!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IVP. 1000 페이지 넘는 저 책 열 권을 쌓아두고 보기만 해도 든든하다. 4월, 지도자 과정 개강 이후 출간되었는데, 필독서와 과제를 바꿀까 싶도록 마음이 흔들렸다. '자아'로 씨름하고, 그리스도 안의 자아를 체험적으로 만남으로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는 과정이 아닌가. 42인의 자기를 찾는 여정 이야기라니. "하나님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살아낸 42 가지 이야기라니. 아브라함,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노르위치의 줄리언, 장 칼뱅, 아빌라의 테레사, 잔느 귀용 부인에 심지어 C. S., 플래너리 오코너를 포한한 42인이라니!

 

이미 정해놓은 커리큘럼을 바꾸지는 못하고, 책을 소개했다. 어쨌든 함께 사두기로 하고 단체로 구입하여 내년을 기약한다. 과정 마치고 후속 모임으로 함께 읽으면 좋겠다 싶다. 한 분 한 분의 내적 여정 선배님 42인을 만나는 지도자 과정 후속 모임, 생각만 해도 좋다.

두어 주 읽지도 쓰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시간을 보냈다. 드라마를 보고, 봤던 드라마를 또 보고, 우주를 나는 스마트폰 게임을 다운로드하여 '피융 피융' 하며 놀았다. 오늘에야 다시 정좌다. 마음이 자리를 찾아 앉으니 책이 손에 잡힌다. 마음 잡고 다시 손에 잡은 책이다. 함께 읽기를 꿈꾼다면 혼자 잘 읽어야 한다. 혼자 읽기로 행복해야 함께 읽기가 풍성해진다.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에는 외로움조차 얼씬거리지 않았다. 외로우니까 사람이고, 외로운 덕에 사람 꼴 하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마음 푹 놓고 외롭기로 한다. 외로운 독서를 누리기로 한다. 실은 외롭지 않다. 42인 선생님들께서 나 좀 만나 달라, 대기표를 뽑고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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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목요일 연구소 지도자 과정이 있다. 내 기도와 공부와 열정의 에너지는 이 시간을 중심으로 돈다. 일주일은 목요일을 중심으로 돌고, 2021년은 '상처 입은 치유자 2기'로 기억될 것이다. 연구소는 늘 공간 문제가 숙제이다. 미사 나음터가 베이스캠프인데, 많은 사람 모을 수가 없다. 사람이 와도 대기시켜야 하고, 돌려보내야 하는 형국이지만. 큰 문제라고 보진 않는다. 꼭 필요한 사람은 결국 어떻게든 찾아오고, 연결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도자 과정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고민이 깊어졌다. 고민 끝에 우리 교회 예배당에서 모이는 것으로 극적 해결점이 찾아졌다. 마침 우리 교회는 장소를 옮겼는데 공간 구획이며, 창밖의 뷰며, 무엇보다 교회당 구석구석에 닿은 교우들의 손길로 아름다운 공간이 되었다. 잠시라도 비워두기 아까운 곳인데, 모임 장소로 확정되었다. 수도권 전역에서 오는 길들이 멀어서 그렇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곳이다.

 

지난 모임이었다. 제일 먼저 도착하여 모임방 문을 열었는데, 이 무슨 손길! 테이블마다 꽃이 놓여 있는 것이다. 청년부 시절 설교에서 예화로 들은 것이 잊히지 않는다. 어느 방에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누군가 청소하고 정리한 흔적이 느껴졌고, 긴 설명 필요 없이 공간이 그 사람의 마음을 드러낸다, 이런 얘기였다. 그리고 아마 아래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에 나오는 말이 인용되었을 것이다. 그때 이후로 이 문구를 가슴에 새겼다. 집 책상에 앞에, 직장 책상 유리에 끼워두고 늘 읽었다. 인정과 칭찬에의 집착이 강하고, 보이는 모습에 연연하는 나를 한 번씩 멈춰 세우는 말씀이었다. 테이블에 꽂힌 꽃을 보고 그 시절 설교와 저 문구가 생각났다. 도대체 누가?라는 질문과 함께 한 분의 얼굴이 떠올랐다. 알지도 못하는 이들을 위해, 누가 알아주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고, 조용히 이래 놓으실 분. 별 거 아니에요. 마침 꽃이 있고, 시간도 있어서 그랬어요. 하실 분.

정말 마음이 환해졌나보다. 사진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카메라를 보며 지은 설정 웃음이긴 하지만, 설정된 웃음도 마음이 좋을 때와 아닐 때가 다르다. 사진을 본 남편, 채윤이가 좋아했다. 심지어 연구소의 그림 집단 여정인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에 참가한 벗이며 친척인 혜경이 그림을 그려 보내왔다. 사진에서 기쁨이 보였다고. 꽃을 가져다 놓은 집사님은 "별일 아닌데" 하실 것이다. 별일 아닌 것이 사랑으로 흘러가는 일이 흔하다. 하고, 그냥 하고, 잊어버릴 수 있는 작은 일들, 미처 '나(ego)'가 담길 새 없이 흩어지는 일들이 좋고 소중하다. 사랑은 준 사람이 아니라 받은 사람의 것이다. "내가 해준 게 얼만데!" '줌'에 방점이 찍힌 것들은 사랑에서 가장 먼 것, 심지어 폭력이 되기 십상이다.

사랑이 없다면 겉으로 드러나는 일은 아무 값어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그것이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해도 풍성한 열매를 맺게 마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이루어놓은 성과보다 그 사람이 얼마만 한 사랑으로 그 일을 했는가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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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30시간이 드는 [에니어그램 내적 여정]
여섯 번의 만남으로 총 15시간이 드는 [글쓰기 여정]
역시 6회기, 총 15시간으로 진행되는 [꿈 여정]
피정과 방학 책 나눔까지 두 학기, 총 100시간 넘게 함께 하는 [지도자 과정]
그리고 [그림 집단 여정][커플 세미나], 그리고 [개인 상담]

나음터라 불리는 연구소의 프로그램들이다. 이 모든 과정이 단 한 사람을 위해 시작되었다고 하면 믿어지려나. 한 사람을 위해 만든 프로그램이고, 지금도 한 사람을 위해 진행한다. "그러면 저는 이제 어떡해야 해요?" 이런 질문. 에니어그램 1단계를 듣고 다음 걸음을 묻는 분을 위해 2단계 강의를, 또 심화 강의를, 영성 강의를 하나 씩 열게 된 것이다. 아끼는 제자가 결혼하는데, 정말 잘 살았으면 좋겠는데 해줄 게 없어서 커플 세미나를 열었고, 배웠으니 어디 가서 가르쳐야 할 분들이 생겨나니 지도자 과정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의 모든 것에는 한 사람의 얼굴이 있다. 연구소의 모든 프로그램과 과정은 내게 모두 한 사람의 얼굴이다.

강의에 불려 다니는 것이 편하지, 깃발을 꽂고 사람을 불러 모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람 모으는 일이 제일 어려워요." 이름 걸고 뭔가 하려는 분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사람 모으는 일은 북 치고 장구 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너무 뻔한 말 같지만, 연애하고 싶다고 애인이 생기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어제 글쓰기 강의 모집 포스팅을 하고 한 시간이 안 되어 마감되었다. 대단한 강좌여서는 아니다. 모집 인원이 6명밖에 안 되는 데다, 전부터 기다리며 대기하는 분들이 계시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아쉬움 가득한 대기 문자가 바로 온다. 대기하신 분 중에는 내가 다 아쉬운 분도 있다. 아, 이분 지금 글쓰기 하시면 딱 좋겠는데! 아쉬워도 마음은 편하다. 이거 안 한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이번이 끝도 아니니까. 같은 패턴으로 같을 일을 하면서 배우는 것은, 내 눈에 보기에 어떻든 지금 주어진 만남이 최선이다. 지금 이것, 오늘 이것이 최선의 선물이다. 나에게든 당신에게든 그분에게든!

모든 과정이 한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은 한 프로그램으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절실함과 절실함이 만나면 치유와 성장의 포텐이 터지는데, 그러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참 많이 경험했다. (이건 조금 뼈가 아프게 경험했지) 내가 잘해서 잘 되는 것이고, 나만 잘하면 그냥 잘 되는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 내가 아무리 잘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것을 알았고, 내가 열심히 잘하는 것이 누군가에겐 아픔과 부담이 된다는 것을 배웠다. 실패의 기억을 늘 마음에 새기고 있다.

오늘 이 글은 블로그로 연구소 프로그램 정보를 얻으시는, 밴쿠버에 계시는 silver님을 위한 포스팅이다. 글쓰기와 꿈여정 개설할 때마다 시차 계산하며 생각하고 있다는 말씀드리려고. 오래 기다리다 막상 과정을 경험하시면 기대에 미치지 못할 확률이 크지만. 모집하는 여섯 자리 중 한 자리는 일단 silver님을 앉히고 있다는 말씀드리고 싶어서 쓰는 글이다.

보고 계시죠? ^^


 

[나를 지키는 글쓰기]


zoom을 통해 글쓰기 집단 여정을 하다 보면 ‘비대면’이란 표현이 무색해집니다. 진하디 진한 존재의 대면이 됩니다. 랜선을 따라 흐르는 글이 창조성과 치유력의 강이 되는 것 같습니다. 글을 쓰고 나누는 6주의 시간이 이렇게 좋지만, 더 좋은 것은 그 이후입니다. 참가하신 분들이 각자 ‘쓰게 된다는 것’, 무엇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축축하게 늘어진 몸을 일으켜서 겨우겨우 기지개를 펴고,
00이를 먹이고 옷도 잘 입혀서 어린이집도 보내고,
다시 앉아서 이렇게 글을 써.❞

연구소 카페에 올라온 글 한 편에 힘입어 6기 모집 안내에 박차를 가합니다. 새로운 이름 <나를 지키는 글쓰기>로 만나겠습니다.

✔ 일정과 신청 안내

+ 일시 : 6월 15일(화) ~ 7월 20일 (화)
+ 시간 : 오후 8시~10시 30분(6주간)
+ 인원 : 6명(선착순)
+ 수강료 : 15만 원
+ 동반자 : 정신실 소장
+ 문의 : 010-4235-8020
+ 신청 링크 : https://bit.ly/2SM3dbn

✔ 강의와 나눔 내용 :

1강. 나는 쓰고 말하는 나다 : 치유하는 글쓰기의 힘
2강. 나는 나의 기억이다 : 기억으로 쓰기
3강. 나는 나의 감정이다 : 얼어붙은 감정 글로 흘려보내기
4강. 나는 나의 감정이 아니다 : 수치심에 이름 붙이기
5강. 나는 나의 몸이다 : 말하는 몸, 쓰는 몸
6강.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이다 : 여자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 매주 글쓰기 과제가 있습니다.
모임 시간마다 바로 쓰고 나누는 글 있습니다.
Zoom으로 진행되는 온라인 모임입니다.

✔ 읽기 : <헝거> 록산 게이, 사이행성

 

나를 지키는 글쓰기(20210615)

<나를 지키는 글쓰기> 신청 양식입니다.

docs.goog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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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과정 2기 개강 날에 찍은(찍힌) 사진을 보고 남편도 채윤이도 좋아했다. 나도 좋다. 거울 앞에 한 분 한 분 이름을 새겨 달아 놓은 가랜드가 예뻐서 '거울 셀카' 찍는 중이다. 두 글자 이름 여섯이 말로 할 수 없이 소중하다. 벌써부터 마음에 담고 있었다. 작년 커리큘럼에 덧붙여 새로운 강의안을 만들고 있다. 신나게 만들고 있다. 이 신나는 기분은 감각적 즐거움보다는 차라리 기도에 가깝다.

 

아래 붙인 개강 날 후기를 연구소 SNS에 써서 걸었다. 다시 만감이 교차한다. 내 나이 서른여덟, 서른아홉. 신앙 사춘기의 정점에서 만난 에니어그램이다. 십 년을 훌쩍 넘기고 여기까지 왔다. 애써 불러 모으지도 않아도, 어디에선가 신앙하고 고민하던 사람들이 모여든다. 애써 모으지 않을수록 꼭 모여야 할 사람이 모이는 신비라니. '상처, 상처 입은 치유자' 같은 취약한 말로 그물을 쳤는데 걸려든 이들이니 흔하게 만나지는 사람들은 아니다. 첫날 강의에서 했던 말 중 '상처는 존재의 무늬'라는 말을 유난히 마음에 새기는 것 또한 내게 큰 힘이 된다. 힘이 되는 만큼 거룩한 책임감을 느낀다. 책임감이 무겁지만, 그 무게를 힘겹게 견뎌야겠지만, 이 역시 감각적인 고통이 아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 표현을 감히 빌자면 '감미로운 괴로움'이다. 깊은 기도로 이끌기 때문이다.

 

올 한 해, 이 여섯 분과 함께 살게 될 것이다. 목요일, 매주 목요일에 나눌 강의가 마음과 일상의 축이 될 것이다. 이것을 중심으로 독서하고, 또 책을 사고, 시도 때도 없이 메모하고 고민하게 될 것이다. 나의 일용할 양식이 될 것이다. 내게 그러하듯 이 분들에게도 하루 분량의 양식으로 나눌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돌아보면 서른여덟, 그때로부터 오늘까지 기적이라곤 없었다. 하루 분량의 공부와, 하루 분량의 아픔으로 여기까지 왔다. 꽤 멀리 온 것도 사실이다. "상처는 존재의 무늬예요. 나의 이야기, 나의 지질한 이야기로부터 그분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영적 존재인 나를 만나는 것은 나의 인간적 경험에서 시작합니다. 이 취약한 과정을 그대로 이웃에게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상처 입은 치유자입니다." 라고 한 마디 한 마디에 체험을 실어 말할 수 있으니. 서른여덟, 서른아홉 그때를 생각하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기도 하네. 어찌 되었든 문제는 일용할 양식이다. 하루 분량의 빵은 읽고 쓰기였다. 아무도 답해주지 못하는 것을 먼저 고민한 저자를 만나 읽고, 읽고 깨달아지는대로 아니 읽을수록 더 알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썼다. 저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줄기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쪽 저쪽의 줄기를 따라 올라갔는데 결국 만나는 곳은 고전이라는 것이 신기할 뿐.

 

읽고, 쓰고, 기도하는 것을 일용할 양식 삼는 사람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연구소 모든 과정에 담긴 사심인데 말이다.

    

어디를 보나 연둣빛, 말랑말랑한 생명의 향연입니다. 지도자과정, 말랑한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전날 밤, 한 선생님이 격리가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작년 한 해 지내며 돌발 상황이 기회가 되는 것을 경험한 우리. 당황하지 않고, 줌을 통한 대면 비대면 강의를 시도해 보았습니다. 성공적!

미사 나음터까지 먼 거리지만 살짝 기대도 되었다는 선생님은 음악을 크게 틀고 강변북로를 달리며 일주일간의 스트레스를 날려보리라는 상상을 하셨답니다. 그러나 막상 꽉 막힌 길, 하염없는 시간을 보내셨고, “아, 스트레스는 이렇게 날리는 게 아니구나.” 하셨답니다.

계획은 늘 있지만, 계획처럼 되는 일이 없습니다. 계획처럼 되지 않아 새로운 길에 접어들고, 마음같이 되지 않는 인생길 살다 여기까지 왔으니... 교육과정이며 매일 과제, 빡빡하게 채운 계획표로 시작하지만 여섯 분 고유의 여정이 되겠지요. 말하고, 듣고, 쓰고, 읽고, 상징을 담아 만들고, 기도하는 것으로 첫 모임 시작했습니다. 내내 이렇게 말하고 듣고 쓰고 읽고 기도하고 상징을 담아 나만의 의례를 만들어 가는 일 년의 여정이 될 것입니다. 모임 후기 일부와 사진 나눠봅니다.

❝교회에서 떠난 것, 그것은 배반이었고, 저는 잔뜩 움츠러들었습니다. 이제야 슬픔의 중심에 가봅니다. 슬픔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배웁니다. 외로웠는데, 이 길을 함께 걸을 수 있는 이들을 만났네요.❞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정작 알아야 할 것은 외면한 채 살아갔던 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새로운 여정 가운데 버릴 것은 버리고 담을 것은 담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무기, 능력은 수많은 상처들 뿐입니다. 정신과 치료, 심리상담을 수년간 다니며 지우고만 싶었던 그 상처들이 나를 이곳까지 안내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상처는 존재의 무늬다’라는 어제 말씀이 가슴 깊이 위로와 큰 힘이 되었습니다.❞

❝춤에 꽂혔습니다. 손끝과 발끝까지 짜릿해지는 기쁨. 생각만해도 참 행복했습니다. 모든 벽을 허물고, 가면을 벗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며 함께 춤출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나 다워지자! 있어야 할 자리로 원위치!!'를 마음속에서 외치곤 하는데 이 과정에서 성숙한 나다움을 지닌 나를 만나게 되길 소원해봅니다. '나'스러워지는 시작의 하나로 어제 모임 후 그동안 방치해둔 머리 스타일을 오랜만 단발로 컷트해 보았습니다.❞

❝나는 작년 6월, '상처가 문제'라고 말하는 목사를 떠났다. 그리고 올해 4월, '상처가 무늬'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났다. 작가였다가, 이제는 소장님, 신실쌤이 된 사람. 그리고 그녀가 알고 있는 더 많은 사람들. 내가 그 연결망 속으로 들어간 날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남편과 아들이 마중을 나왔다. 남편이 "살아서 돌아왔네."라며 웃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그럼, 살아서 돌아왔지.' 이제 정말 사는 것처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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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치유자들 1st  (0) 2021.03.06

 

 

 

 

 

 

작년 이 즈음, 엄마를 떠나보내고 현실감각이 없는 상태에서 한 내담자를 만났다. 내담자. 내담자였다. 연구소에서 개인 상담받으실 분인데, 시작 전에 나를 한 번 만나면 좋겠다고 하셨다고. 나는 개인 상담은 하지 않고 있고, 당시는 제정신도 아니었는데 왜 수락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내가 만나야죠!"하고 나갔다. 암흑의 봄, 유일한 공적 외출이었던 것 같다. 한 번 만나고 보니 '내담자'가 아니라 H라는 이름으로 마음에 새겨졌다. H님이 마주한 일상은 막막했다. 나도 그때는 막막했으니 유유상종의 미덕이 오갔으려나. 그날(아니 그즈음 모든 것)의 기억이 희미하다. "(막막한)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커요. 하지만 H님이 달라질 수는 있고,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에요." 이런 말씀을 드렸던 것도 같고. 

 

그때로부터 H님은 조용히 개인 상담, 내적 여정, 치유 글쓰기에 참여하셨다. 그리고 지금은 '꿈과 영성생활' 집단 여정에 함께 하신다. 한 주에 한 번씩 돌아가며 꿈을 나누는데, 이번 주 H님의 순서였다. 아름다운 꿈이었다. 꿈은 진실이다. 논리도 없고, 이치에 닿지 않아 개꿈이라 치부할지라도, 아무리 시덥지 않아도,  꿈은 내 안에서 나온 진실이다. 게다가 분명 내 안에서 나오지만 꿈을 통제할 방법은 없다. 꿈의 자율성이라고 한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어 간절히 그리는 그 사람이 내 맘대로 꿈에 나타나진 않는다. 꿈에서조차 떠올리고 싶은 치를 떨리는 일이 밤마다 꿈에 나와 나를 괴롭히는 것도 막을 길이 없다. 즉, 아름다운 꿈을 꾸고 싶다고 꾸어지는 것이 아니다. 꿈 작업을 하고 이 여정에 들어선 지 13년 정도 된 것 같다. 그간 수많은 꿈을 만났지만, 이렇듯 고요하여 침잠하게 하는, 요란스럽지 않게 아름다운 꿈은 처음인 것 같다. 이번 주 H님의 꿈을 떠올리기만 해도 다시 설렌다.

 

사람 참 변하지 않는데 말이다. 드물게 몇 개월이나 일이 년 사이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변하고 성장하는 이들이 있다. 정말 궁금하다. 치유와 성장을 돕는 일에 올인하여 살지만, 진정한 관심은 나 자신에 있다. 정말 궁금한 이유는 그들을 본받아 나도 성장하고 싶어서이다. 그래서 관찰하게 된다. 면밀히 관찰하게 된다. 그런 이들이 쓰는 글, 하는 말, 꾸었던 꿈을 마음에 새기고 글로 남겨 다시 들여다 보곤 한다.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벼랑 끝에 선" 그들이다. 역시 인간의 마음을 꿰뚫는 예수님의 눈이다. 팔복의 첫 번째,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이 말씀을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번역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너희는 복이 있다". 작년 이 즈음 H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벼랑 끝에 서 있었다. 텅 비어 있었고 마음은 한없이 가난했다. 그 무엇도 내세우지 못했다. 언뜻 봐도 착하고 성실하고 올바르게 살아왔건만, 그것을 내세우질 못했다. 그에게 들이닥친 상황이 그러했다. 벼랑 끝에서, 가난해져 텅 빈 마음으로, 스스로 지켜낼 아무것이 없는 그 자리게 복된 자리였다니.

 

복된 그 자리 반대편에서 울리는 소리도 안다. 꽤 옳고, 상당히 괜찮고, 나름 착하며, 많이 희생했고 이타적으로 살았다는 소리들. "이만하면 됐지! 나만큼만 하라고 해!" 상황이 막막해질수록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빽빽해 숨 쉴 공간 없어지는 것이다. 죄가 없(다 여겨서)어서 은혜가 들어설 자리 없는 자아의 풍경을 안다. 오래 봐서 익숙하고, 많이 해봐서 잘 안다. 넌덜머리 날 정도로 익숙하다. 익숙한 자리에서 변화란 없고, 성장이나 치유가 들어설 틈이 없다는 것도. 그 완고한 자아의 장벽 앞에서 무력감을 느낀다.  

 

꿈을 나눈 H님이 했던 마지막 말을 내 방식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1년 전, 이 즈음 두려움과 불안의 극한이었다. 가장 두려웠던 것은 (한 순간의 내 행동으로 인해) 남편에게 일어난 안 좋은 일, 그것이 최악의 결과가 될 것이 두려웠다. 아니,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버려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생각한다. 바로 그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남편에게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다. 심지어 버림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가능성을 받아들인다)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변함없지만, 나는 어쩌면 견딜 힘이 생겼다." 그의 꿈이 아름다운 건, 그의 의식상태가 이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의식이 이렇듯 넓고 깊어진 것은 꿈이 준 힘일 것이다. 둘 다이다. 벌어진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할 수 있다면 책임지겠다는 태도. 옥색 빛의 영롱하고 맑은 물이 반짝이며 흐르는 고요한 강물 같은 마음이다. H님의 꿈에 나온 그대로. 

 

누가 성장하는가?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가? 놀랍게도, 산상수훈의 이어지는 말씀들이 더욱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실존의 민낯을 그대로 마주하는 이들, 상처 입고 쓰라린 감정 사이를 묵묵히 걷는 이들이 결국에 누리는 복, 그것을 본다. H님의 꿈과 글에서처럼. 그것이 이 막막한 세상을 견디는 힘이다. '상처 입은 치유자들'이란 이름으로 살며 누리는 복이다. 그저 지켜 보고 감동으로 그칠 일인가. 내가 살고 거머쥐어야 할 복이 아닌가.

 

벼랑 끝에 서 있는 너희는 복이 있다.
너희가 작아질수록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은 커진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에야 너희는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길 수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자신의 모습 그대로 만족하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 너희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모든 것의 당당한 주인이 된다.

하나님께 입맛 당기는 너희는 복이 이다.
그분은 너희 평생에 맛볼 최고의 음식이요 음료이다.

남을 돌보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렇게 정성 들여 돌보는 순간 너희도 돌봄을 받는다.

내면 세계, 곧 마음과 생각이 올바를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에야 너희는 바깥세상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

경쟁하거나 다투는 대신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 너희는 진정 자신이 누구이며, 하나님의 집에서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알게 된다.

하나님께 헌신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 박해로 인해 너희는 하나님 나라에 깊이 들어가게 된다.

그뿐 아니다. 사람들이 내 평판을 떨어뜨리려고 너희를 깔보거나 내쫓거나 너희에 대해 거짓을 말할 때마다, 너희는 복을 받은 줄로 알아라.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진리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들이 불편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 너희는 기뻐해도 좋다. 아예 만세를 불러도 좋다! 그들은 싫어하겠지만, 나는 좋아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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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편력은 곧 나의 나다움의 산물, 또는 근거이며 동시에 외로움의 이유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떤 사람들과 이런 책을 얘기할 수 있고, 또 다른 이들과 저런 책을 공감할 수 있는데. 이런 책과 저런 책을 동시에 펴들고 만날 사람이 없다. 이건 '내 맘 같은 사람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겠다. 어느 때 무슨 책을 읽었는지는 그대로 나의 인생 역정이다. 신앙 역정이기도 하고. 눈물 없이 떠올릴 수 없는 어느 시기 어떤 독서도 있다. 진짜로. 주변 사람 아무도 모르는 책을 금서인 양, 숨어 읽던 시절도 있었다. 누가 친절히 소개한 책이면, 길이면 그렇게 두렵지 않았을 것이다. 혼자 더듬어 만난 낯선 저자들이 내 영혼을 뒤흔드는데, 어디다 말할 곳이 있어야지! 10여 년이 훌쩍 지나고, 그때의 나처럼 무엇인가 찾는 이들을 만나 함께 읽고 쓰는 오늘이다. 연구소의 상처 입은 입은 치유자 과정 2기의 필독서를 선정하며 심장이 벌렁거린다. 달라스 윌라드와 리처드 로어를, 아빌라의 테레사와 제랄드 메이를, 이런 책과 저런 책을 동시에 펴들고 만날 사람들이 있다니! 

(아래는 연구소 SNS에 올린 글이다.)

 


2기 상처 입은 치유자 과정이 곧 시작됩니다.

새 술만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 역시 새집에 모셔야겠습니다. 1기 때와 같은 커리큘럼이지만 담기는 것은 새로워질 예감입니다. 함께 하게 될 2기 수강자 대부분이 신학을 전공하고, 목회 또는 선교 현장에 계시면서 특유의 영성적 목마름을 갖고 계십니다. 무엇보다 제도권 교회 내에서 내적 여정의 영성을 일구는 것에 사명감을 느끼고 계시고요. 2기 여정은 보다 깊은 기독교 영성에 천착해 볼 예정입니다. 1기 때 함께 읽었던 필독서가 딱 알맞았다는 자체 평가를 하고 만족하고 있었는데. 2기의 필요는 새로운 교재를 고민하게 하였습니다. 2기 만의 필독서 네 권이 선정되었습니다.

신학자이자 인문학자인 달라스 윌라드의 <마음의 혁신>으로 복음주의 신학 안에서 내적 변화에 대해 정리해 볼 것이고요. 내적 여정 세미나에서 자주 언급되는 아빌라의 테레사 <영혼의 성>을 통해 중세 신비주의 영성에 에니어그램을 비춰보겠습니다. 이 시대의 영성가 제랄드 메이의 <영혼의 어두운 밤>은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두 분의 영성을 오늘의 언어로 안내해 줍니다. 남성 목사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남성과 영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리처드 로어 신부님이 쓴 남성성과 영성에 관한 책 <야생에서 아름다운 어른으로(Wild Man to Wise Man)>입니다.

필독서를 미리 공개하는 것은 2기 수강자들께 이미 시작된 우리의 여정을 기대와 기도로 기다려 주십사 하는 것이고요. 한 자리 정도 비어 있습니다. (장소가 협소하여 현재 인원으로 족하다는 생각도 하고 있지만) 2기 만의 이러한 여정에 마음이 움직이시는 분을 초대하기 위함입니다.

| ‘상처 입은 치유자 : 내적 여정 지도자’ 과정

✔ 2020년 4월8일(목) ~ 11월25(목) 오후1시~4시
11월 25일(목) ~ 26일(금) 1박2일 마침 피정
✔ 인원 : 5 ~ 7명
✔ 장소 : 미사 나음터(5호선 미사역 5분, 주차 가능)
✔ 대상 : 내적 여정 1단계부터 영성과정까지 수강하신 분
(지도자 과정 중에 전 과정 재수강 필수)
✔ 문의, 접수 : 전화로만 받습니다. (010-7242-8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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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지도자 과정을 1박 2일 마침 피정과 함께 마쳤다. 작년 11월 말의 계획이 방역 상황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다. 더는 미룰 수 없어서 모두 하루 이틀 전에 무증상자 검사를 받고 코로나 바이러스 음성 확인을 받고 모였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이 번거로움과 불편함조차 기도라 여기며 실행했다. 딱 일주일 전 주말의 일이다. 그러고는 무기력하게 한 주를 보냈다. 안 자던 낮잠까지 자면서 나른하고 몽롱한 시간이었다. 약간의 우울감까지 있어서 몸과 마음이 바닥에 딱 붙어 있었던 것 같다. 

 

연구소 단톡에 마음을 나누다 보니 괜한 무기력과 우울이 아니었다. 지도자 과정 1년을 위해서 전력질주 했던 것이다. 결승 테이프를 끊고 나서는 운동장 바닥에 드러누워 꼼짝 못 하는 시간 같은 것이었다. 집중하여 다 쏟아붓고 숨을 고르는 시간. 오늘 아침에야 몸과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이다. 지도자 과정 1년을 1박 2일 여정에 담아 나름대로 진한 시간을 보냈다. 본질을 생각하는 의미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했고, 재미와 즐거움 역시 포기하지 않으려 돈과 에너지를 아끼지 않았다. 그 행위 자체가 목적인 것, 지금 하는 행위 그것 외에 목적이 없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가 맞다면 행복한 시간을 보낸 것이다. 

 

 

 

연구소 2년은 공동체, 성장하는 공동체, 여성 공동체 가능성의 실험이다. 연구원 다섯 명은 5벤저스다, 어벤저스다. 늘 새로운 아이디어로 어제의 생각이 헌 것이 되는 게 내 장점이자 병인데. 그 새로운 생각을 구현해내는 사람들이 네 명의 연구원이다. 연구소와 연결된 사람들을 물질이든 영적으로든 꼭 필요한 방법으로 돕겠다는 마음 하나로 아이디어가 샘솟고, 아이디어는 금세 프로그램이 되고 작품이 된다. 1박 2일 피정은 그 결정체였다. 그래서 누린 순간순간의 기쁨과 감동은 말로 풀어낼 수 없다. 그 순간 자체가 목적이었기에 충분히 누린 것으로 족하다. 

 

페미니스트 심리학자인 앤 윌슨 섀프는 우리가 사는 사회에 이름 붙이기를 '중독 사회'라 하였다. 개별 알코올 중독자나 여타 중독 행위자가 드러내는 과정과 특성을 고스란히 지닌다는 뜻이다. 지금 이 시스템 속에서 권력이나 영향력이 주로 (백인) 남성에 의해 행해지기 때문 '백인 남성 시스템'이라고도 부른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배워왔고, 동참하고 있는 시스템이다. 가부장적 시스템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규칙과 답을 정하는 더 높은 힘과 권력이 있다. 완벽하게 논리적으로 합리적이며 객관적인 것은 가능하며 백인 남성 시스템은 그것을 알고 있다는 신화가 전제된다. 모든 중독이 동반 의존자라는 가동력자가 존재하는 것처럼 백인 남성 시스템도 '반동 여성 시스템'과 함께 간다. 앤의 제시하는 대안은 백인 남성 - 반동 여성이 아닌 '생동하는 과정 시스템'이라는 제3의 길이다. 답이 있고, 설명하고 가르치는 자가 있으며, 통제가 가능한 개인과 사회가 아닌 '과정'을 사는 개인과 사회이다.

 

처음 책으로 읽으면서 아하, 참 좋구나! 했지만, 구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연구소와 지도자 과정 여정 속에서 가능성을 보게된 것이다. 백인 남성 시스템에 대항하는 방식이 아니다. 생동하는 과정 시스템을 '신생 여성 시스템'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저 '전혀 새로운 접근'이라고 읽는다. 주류가 되지 못한 여성적인 것, 여성적인 방식 말이다. 옳고 그름, 맞고 틀림, 정통과 이단, 나와 너를 가르고, 잘하고 못함을 서열화하는 기존의 방식이 아니니 얼마나 생소한가. 생소하여 설명 또한 불가능하지만, 가능성을 경험한 것만은 분명하다.

 

역설적이게도 가능성 만큼이나 불가능성도 체감했다. 경험해보지 않은 방식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아니 믿고 싶지만 믿기 위해서도 최소한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프게 마주한다. 답을 정하는 사람이 있고, 따르기만 하면 되는 통제 가능한 방식은 얼마나 편하고 경제적인가. 자본주의와 성과주의, 아니 그냥 백인 남성 시스템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자기 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하나님 형상을 담은 나, 이미 수용되었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인지.

 

지도자 과정은 '상처 입은 치유자' 양성 과정이다. '상처 입은 치유자란, 자기 치유와 성장 여정을 이웃을 위해 내어 주는 사람입니다.'라고 정의하고 시작했었다. 결과가 아닌 과정, 즉 여정을 내어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갈수록 새롭게 체험한다. 메이크업 끝낸 얼굴이 아니라 시작도 하기 전의 맨 얼굴을, 짝짝이 눈썹이 조화로와지는 것과 생기 없던 피부가 물광이 되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줘야 하는 '과정' 말이다. 그래서 상처 입은 치유자는 상처 위에 또 새로운 상처를 더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도 시작할 사람이 누구랴.  

 

 

 

같은 재료로 같은 작품을 만들었는데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이것이 생동하는 과정 시스템의 아름다움이다. 내가 내 마음에 심은 단 하나의 씨앗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옳고, 맞고, 선하고, 아름답다. 여섯 사람이 여섯 개의 작품을 만들었다. '상처 입은 치유자' 여섯이 여섯 개의 길을 냈다. 우리는 모두 과정 위에 있었다. 과정의 순간순간은 다른 것을 목적하지 않았다. 그러니 행복했다. 여섯 개의 마음에 심긴 씨앗은 전혀 다른 여섯 개의 나무나 꽃으로 자랄 것이다. 그것을 믿는다. 나도, 이분들과의 연결로 또 하나의 씨앗을 심었다. 이 역시 또 하나의 생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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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전작 주의자로서 마음에 든 작가의 책은 절판도서를 웃돈 주고 사서라도 읽는다. 스캇 펙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저자이다. 전작이 다 뭔가, 전작을 기본 두세 번씩 어떤 책은 옆에 끼고 있다시피 한다. 그러나 실은 '전작'이라 할 수 없는 것이, 스캇 펙이 쓴 소설 두 권은 10년이 되었어도 읽지를 못했다. 받아들이기 싫었다. 나의 펙 박사님이라면 《아직도 가야 할 길》이나 《거짓의 사람들》의 스캇 펙이다. 스스로 '과학자'라 말하는 심리학자이다. '과학'의 배를 타고 합리적 추론의 노를 저어 영성의 섬에 닿는 기가 막힌 저서이다. 그러면 됐지. 과학자가 무슨 소설이란 말인가. 과학자를 표방하여 쓴 저서에서 그렇듯 투명하게 자신의 드러냈으면 됐지, 뭐가 부족하여 소설이란 말인가. 

 

 

소울 

 

영화 <소울>을 보았다. 어쩐 일인지 영화 중간에 졸고 말았다. 졸고 났더니 맥락을 다 놓쳐서 관람했다 할 수 없는 상태이다. 미리 접하고 간 영화에 대한 극찬이 무성했는데, 무색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함께 본 남편이 참 좋았다는데 뭐가 기억에 남았어야 말이지. 안 되겠다, 식구 중 유일한 미 관람자인 현승이와 함께 재관람하기로 했다. 식사 중에 픽사 애니메이션 얘기로 수다가 길어졌다. "엄마, 코코를 안 봤다고? 도대체 어떻게 그 영화를 안 봤을 수가 있지?" 하며 저녁 식사와 대화가 끝났다. 아이들 설거지하는 사이 바로 <코코>를 사러 네이버에 영화로 달려갔다. 영화가 끝나니 식구들은 모두 방으로 흩어지고 어두운 거실에 혼자다. 'Remember Me'를 들으며, 마마 코코가 "파파?" 하고 따라 부르는 'Remember Me'를 들으며 눈물 콧물을 쏟았다.다. 소울. 영혼. '영혼'에 대한 심상이라면 먼저 떠오르는 아버지, 그리고 지금은 엄마다. 세상을 떠난 영혼에 대한 관심은 그래서 바로 그리움으로 달려간다. 영화 <소울>을 보며 졸기 시작한 지점이 딱 생각난다. 몸을 입기 전 영혼은 내 흥미를 끌지 못한다. 오직 내가 아는 영혼들, 나와 연결되었던, 연결된 영혼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코코>의 해골바가지 영혼들이 참으로 정겨웠다.

 

 

소설

 

1월 말에 스캇 펙의 소설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 《창가의 침대》를 연이어 읽었다.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 벌써 여러 번 읽은 남편이 새해 다시 또 꺼내 읽고 책꽂이에 꽂으며 말했다. "나는 앞으로 새해가 시작될 때마다 이걸 한 번씩 읽을 거야." 괜히 질투가 나서 무작정 펼쳐 들었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심리적 영적 우울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남편이 이 책을 읽고 조금 달라졌었다. 하도 신기하여 나도 좀 읽어볼까 펼쳤었는데 영 마음이 펼쳐지질 않았었다. 결국 읽지 못했다. 그렇게 또 몇 년이 흐르고 단지 질투심에 펼쳐 든 책에 쏙 빠져버렸다.  《창가의 침대》 역시 출간 되자마다 보관함에 담아 두었었는데 영 마음이 향하질 않았다. 때가 되었는지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을 단숨에 읽고 바《창가의 침대》를 집어서 달렸다. 

 

 

소울

 

글을 얼마나 썼다고, 상상력도 빈약한 주제에 요즘 언감생심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하려면 허구의 장치가 필요하겠구나 싶다. 자칭 과학자인 스캇 펙이 소설을 쓰고만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스캇 펙은 '영혼'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에서는 몸을 떠난 사후 세계의 영혼을, 《창가의 침대》에서는 이 땅을 사는 영혼을 그린다. 과학자로서 치료자로서, 아니면 인간의 내면에 대한 지극한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의 역작은 《거짓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성장과 변화에 천착한 스캇 펙은 결국 '어떻게 해도 변하지 않는 사람'을 '악'에 가까운 존재로 지목한다. 두 소설은 그 이야기의 변주이고. 에고로 가득 찬 나르시시스트가 '자신의 병적인 자아의 정체를 (변화시키길 거부하고) 방어하고 보전하기 위해 (오히려)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파괴하는 데 힘을 행사하는 것'이 악이라고 정의한다. 치료 장면에서 그런 존재들을 만났고, 결국 '악' 또는 '거짓의 사람'이라 이름 붙이게 된 것이다. 왜 어떤 사람은 아프게 자기의 진실을 마주하며 성장하고, 어떤 사람은 끝내 변화하기를 거부하며 오히려 희생양을 찾는가. 그 차이는 무엇인가. 그 지점에서 스캇 펙은 '영혼'을 떠올린 것 아닐까.

 

 

소설 

 

소설 같은 이야기를 살았다. 재작년에 내적 여정에 오신 S 선생님은 조용히 여정의 전 과정을 수료했다. 그리고 연말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좋아하는 일이었고, 좋은 직장이었는데 내적 어려움을 유발하는 곳이기도 한 것 같다. 작년 1년을 쉬면서 치유 글쓰기에 참여했는데, 어찌나 지난하게 글로 자신을 만나가는지! 같은 주제로 한 번 더 글을 쓰시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제안했는데 기꺼이 재수강을 하셨다. 어떤 주제의 글을 써도 S샘의 글엔 '아버지'가 어른거렸고, 재수강에선 더욱 아버지가 새롭게, 또렷이 드러났다. S샘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새로 쓰는 일을 거침없이 해나갔다. 몇 바닥 씩 글을 쓰고 또 썼다. 올해 복직을 앞두고는 꿈 모임에 신청하여 참여했다. 몇 주 전 순서가 되어 자신의 꿈을 나눴는데, 또 아버지이다. 투명한 사람에겐 꿈도 투명하게 말을 걸어오는 듯. 투명한 말은 듣기에는 불편한 구석이 있다. 꿈 모임 마치고 더욱 마음이 불편해졌다고 했다. (이 땅에서의 온전한 화해가 가능할까, 특히 부모와.) 나 또한 S샘 생각으로 먹먹해져 지내다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을 선물로 보냈다. 그 책을 읽고 꿈의 메시지를 복기하면서 마음이 잘 정리되었다고 한다. 꿈 나눔 후 일주일을 그렇게 보내고 월요일 밤, 글을 한 편 쓰고는 "내일은 병원에 계신 아빠 면회를 편안한 마음으로 갈 수 있겠다" 하고 잠이 들었단다. 다음 날 화요일 새벽에 아버님 임종 소식을 들었다. 그렇게 아버님을 저 하늘로 보내드렸다. 조문을 가서 만난 S샘의 얼굴이 평안해 보였다. 장례식 마치고 꿈 모임 방에 올린 글로 보는 S샘의 마음의 여정은 그야말로 소설이다. 이 아름다운 마음의 여정으로 소설 한 편을 쓰고 싶을 정도이다.

 

소설, 소울

 

스캇 펙 같은 통찰력이 있는 것도, 인간에 대한 사랑이 깊은 것도 아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마주하는 일을 살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높은 도덕적 행동과 착한 모습 너머의 추하고 완고한 모습을 볼 때 혐오스럽고 동시에 몹시 두렵다. 내 안에 없는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인다'는 것은 내 것이라는 뜻이고 혐오스러움이 동시에 두려움이 된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 또는 스스로 의식하는 자아는 부족하고 선하지 않다며 스스로 작게 여기는 사람들 안에 빛나는 아름다움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땐 경외감이 든다. 어떤 아름다움 같은 걸 본다. 《창가의 침대》에서 평생 침대에 누워 살아야 했던 중증 장애인 스티븐의 빛나는 영혼, 그 빛을 알아본 상처 투성이 간호사 헤더의 빛은 나도 얼핏 접해본 것들이다.'그 20여 년 치료 장면에서 만난 아이들, 엄마들, 그리고 내적 여정이나 강의에서 만난 무수한 사람들, 아니 일상을 둘러 싼 사람들. 몸이 아니라 영혼으로 만나고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설명이 불가한 지점이다. 스캇 펙이 그려낸 인물 중 '스티븐'을 태어나서 한 번도 침대를 떠나본 적 없는 중증 장애의 몸을 가진 존재로, '그로초브스키 부인'을 마비된 몸을 가진 존재로 그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스스로를 돌볼 힘은 1도 없고, 온전히 남에게 의존해야 하는 몸과 대비된 그들의 영혼이 어떻게 얼마나 아름답고 자유로운지 상상함으로 보게 한다. 매캐덤스라는 흐트러짐 없는 외향(태도, 능력)을 갖춘 이가 논리를 통해 앞으로 살아갈 길을 고심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전신 마비의 스티브, 삶은 무질서하고 상처투성이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인 간호사 헤더, 매력 없는 외모와 일 못하는 원장 시터먼 같은 사람과 대비되는 매캐덤스의 멀끔한 외향은 그 자신의 영혼과는 또 어떻게 대비되는지. 

 

남편은 앞으로 새해가 시작 될 때마다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을 다시 읽겠다고 한다. 그가 그 책을 뽑아 들 때마다 나도 덩달아 그 옆에 있는 《창가의 침대》를 뽑아들까 한다. 융은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이유가 '성장하여 온전함'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했다. 만약 이 땅에서 온전히 성장하지 못하며 죽어서도 그 길을 가야 한다는 것. 스캇 펙은 그 말을 이렇게 하는 것이다.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 그렇다면 오늘 이 순간의 성장을 회피할 이유가 무엇인가, 소용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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