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는 선물이지! 크리스마스는 선물의 시간이다. 크리스마스에는 "선물 교환"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올해에는 연구소 5주년 특강에 마치고 [상처 입은 치유자 과정] 1, 2, 3기 선생님들 송년 모임에서 선물교환을 도모했다. 연결이 끈끈해진 선생님 몇 분에게 진행을 일임을 했더니 사랑과 센스가 반짝반짝 빛나는 선물교환을 기획해 주었다. 모든 선물은 "연결"이었다. 올 한해, 홀로 외로울 때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연결이었다. 선물은 가지각색이지만 뜻은 오직 연결! 별 걸 다 '연결'로 연결하는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이 사랑스러운 "상처 입은 치유자"들을 어쩔 것인가!
 

 

선물의 맛은 서프라이즈이다. 예상치 못한 순간, 예상치 못한 것이 갑자기 들이닥칠 때,  선물의 선물다움은 빛을 발한다. 작년 12월 마지막 날에 보이스톡으로 전화가 한 통 왔고. 그 전화는 작년 2022년 통틀어 가장 반가운 선물이었다. 잘 지내고 있다는... 일도 하고 있다는 그 말 밖에는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고맙다는, 정말 과분한 말도 들었다. 전화를 끊고 그 편안한 목소리에 한참 눈물이 났다. 나라면 잘 지낼 수 있을까? 어쩌면 잘 지낼 수밖에 없는 사람일지 모른다. 무한 '피해자'가 아니라 '살아 남은 자, 생존자'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러 왔고, 그보다 솔직하고 굳건할 수 없는 글을 써냈으니 결국 잘 지낼 사람이었을 것이다. 처음 만남을 떠올리면 더더욱 그렇다. 별칭을 '반짝이'라고 지었었다. 자신이 얼마나 반짝이는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그런 이름을 지었다. 목회자 성폭력 생존자 글쓰기 1기였는데. 모임을 동반하는 나도 처음이라 많이 긴장했었다. 그 긴장된 첫 모임에서 반짝이가 우리를 웃겼다 울렸다 그랬었다. 맞다. 결국 잘 지낼 사람이었다. 벌써부터 반짝이고 있었다. 잠시 어둠이 그를 둘러쌌으나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었다. 반짝이가 카카오톡으로 김을 보내왔다. 맨 김 참 좋아하는데.... 굽고 자르다 보면 가스레인지 주변이 난리가 나니까 아예 먹을 생각을 안 하는데. 구워서 딱 잘라진 김을 보내와서 간편하게 먹고 있다. "작가님 식사준비 편하게 하셨으면..."이라고. 작년 편안해진 목소리처럼 다시 눈물 나는 고마움이다. 누군가의 식사준비, 누군가의 일상을 챙기는 여유는 자기를 돌보고 지키는 내면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이 소중한 사람, 소중한 선물, 반짝이를 어쩔 것인가!
 
만남도 그렇다. 좋은 만남은 선물처럼 오고, 선물의 맛처럼 서프라이즈로 온다. 대학원 종강피정이 있었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긴 했는데, 논문발표 명목으로 참석했다. 타과로 진학하여 박사논문 쓴 선배 한 분이 먼저 발표를 했다. 논문 주제나 내용과 상관없이 "저 사람 좋은 사람이네" 감이 왔다. 논문이 아니라 논문 쓴 사람의 마음이 느껴졌달까. (아니! 논문에서 마음이 느껴져서야 되겠는가?) 내게 좋은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으니, 이유 불문 내가 느끼는 '좋은 감각'을 거침없이 지지하는 편이다. 이런 감각이 소중하고 신비인 것이,  내 논문발표 이후 이분은 또 "눈물이 났다"는 평을 내놓는 것 아닌가? (이게 논문을 사이에 두고 오고 갈 말이고 감정인가?) 선물 같은 만남이 되었고, 모든 순서 마치고 새벽 2시에 숙소로 함께 걷는 길에 믿을 수 없는 하늘을 보았다.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정말 별이... 그 짧은 순간 "실은 오늘 저희 아버지 42주기 추도식이에요." 누군가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꼭 하고 싶었던 그 말을 하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그 산속에 아침부터 문을 연 베이커리 카페가 동화처럼 서 있어서 깜짝 모닝커피도 했다. 괜한 끌림이 아니라, 기도하며 쓴 논문인 것을 서로 알아본 것이다. 집에 돌아와 책 선물을 주고받았는데 보내주신 책 안쪽에 "반짝반짝"이라는 단어가 쓰여있다. 이 신비로운, 반짝이는 만남을 어쩔 것인가!
  

 

자신이 얼마나 반짝이는지 모르는 이들이 반짝반짝 누군가의 삶에 침투한다. 침투하여 생명을 불러일으킨다. 자기를 인식하지 못한 어둠이 자기와 자기 사람들의 생명을 갉아먹는 것처럼... 2023년 성탄절, 예기치 못한 반짝임이 선물로 왔다. 크리스마스는 선물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어 선물로 왔다. 믿을 수 없는 사건이다. 전무후무한 선물이다. 
 
손수 만든 피조물인 사람을 얻고 싶어서,
사람이 되어버린!
신의 영광을 버리고 신의 광휘를 버리고...
신적인 반짝임을 모르기로 작정하고!!

오늘 말씀 묵상 본문이다.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요 1:3-5) 반짝이는 존재들이 자기 반짝임을 모르는 것처럼, 어둠은 제 어둠을 모른다. 자기를 모르는 어둠들은 필연 확신을 장착하고 빛을 거부한다. 밤하늘은 그래서 더욱 어두워진다. 하지만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 하늘이 까맣고 어두울수록 별빛은 더욱 빛나 동방의 세 사람을 베들레헴으로 인도하니...
 
이 성탄의 신비를, 이 선물을 어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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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고 얼마든지 걸을 수 있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빛이 부드러워지는 시간부터 노을이 물드는 시간을 걷다

달빛이 비칠 때쯤 집으로 돌아오는 그런 산책을.

 

 

봄가을로 좋은 날이 아니어도 괜찮다.

타고난 '좋음'으로 놓치기 아까운 날씨의 날들이 있지만,

요 며칠의 칼바람 날씨도 산책하며 생각하고 기도하기에 손색이 없다.

꽁꽁 입고 싸매고,

비무장지대 얼굴만 잘 버텨내면 된다.

이런 날도 '좋은' 날이다.

 

걸었다. 

두어 시간을 천천히 걸었다.

12월엔 가끔씩 주체할 수 없는 슬픔과 그리움으로 마음을 잃곤 하는데

걷다 보니 잃어버린 마음을 찾게 된다.

사람 하나 없는 산책 길을 혼자 걷는 시간,

슬픔과 그리움의 빛깔이 바뀌고 

벌써 마음이 따뜻한 집의 공기로 바뀌어 있었다.

 

 

다리는 아프고 꽁꽁 언 얼굴엔 감각이 사라졌는데

아파트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는 박새 한 마리.

대단한 일을 치르고 온 것도 아닌데, 

짹짹짹 귀여운 팡파르를 울려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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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에 하염없이 올려다본다. 하루가 다르게 텅 비어 가는 나무 사이를 바라보는 것이 좋다. 텅 빈 가지 사이로 하늘이 보이는 것이 경이롭다. 잎이 없는 나무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는데, 내가 그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젊은 시절을 보냈는데, 그러고 있는 나를 알게 되었고 이유도 알았다. 그리고... 슬픔도 두려움도 없이 텅 비어 뻗은 가지를 바라볼 수 있다. 심지어 경이롭게. 눈을 떼지 않고, 뒷목이 뻣뻣해질 만큼 오래오래.
 

이젠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 거야

 
자꾸 이 가사가 입에 맴돌아 찾아보았다. 이문세의 <시를 위한 시>일 거라 생각했는데  <옛사랑>이었다. 그리운 것을 그리운 대로 둘 수 있는 여유가 생겼는데. 그리운 것이 새롭게 생겨나서 "생각이 나면 생각난 대로 그대로 둬"지지가 않는다. 그리운 것 그 너머, 그리운 모든 것들 너머, 영혼의 바닥부터 그리운 그분인가. 
 
이제 나목의 아름다움에 눈 맞추고 볼 수 있지만, 다시 새롭게 그리운 것들은 어쩔 수가 없네.

 

 

 
 

Sabbath diary8_쓸쓸한 산

그 : 여보, 저기 봐. 멋지지? 수묵화 같은 모노톤의 산이 좋다. 나는 약간 쓸쓸함이 있는 느낌이 좋아. 나 : 나는 쓸쓸한 산 안 좋아해. 특히 막 시작되는 쓸쓸함은 더더욱...... (몇 년의 내적작업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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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음식 준비를 하다 손을 베었다. 상처가 크진 않은데 깊어서 피가 콸콸콸 솟아났다. 처음 있는 일인데 여러 번 겪었던 것 같고, 지금도 어딘가에서 명절 음식 준비하는 어느 여인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고, 내 일인데 내 일만 같이 않고, 남 일 같은 내 일, 내 일 같은 남 일이라 여겨졌다. 피의 연대... 여성들의 연대는 피의 연대!
 

 

음식 준비라야, 바비큐 재료 장 보는 것, 월남쌈 재료 준비, 국 하나 끓이는 정도였다. 아이들 다 빠지고 어른 다섯이서 펜션으로 가는 명절이라 (평소보다) 가벼운 일이었다. 명절이 내게는 (아니 모든 여성에게) 단지 일의 문제가 아니다. 구조의 문제이기도 마음의 문제이기도. 과도한 책임감, 그보다는 죄책감, 혐오감을 마주하고 내려놓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20여 년 전 명절의 기억으로 올 추석을 살지 않겠다 결심하고 기도하니 더욱 가벼워진다. 펜션 명절 이튿날은 화담숲 산책이었다.  이전의 기억이 아니라 오늘 여기의 공기를 호흡하며 걸으니 살아서 걷는 느낌이었다. 40년 전 명절의 기억으로 오늘을 아프게 살아가시는 어머니. 그 어머니를 도울 수 있는 부분과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을 받아들이는 시간이 길었구나 싶다. 한계를 인정하며 숲을 걷는 시간, 무겁지만 가볍고 슬프지만 감사했다.
 

잠시 혼자 걷는 시간도 생겼는데... 생명력 한껏 머금고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꽃봉오리들을 만났다. 소국! 아, 얼마나 고운가!

아주 재밌는 일이 있었는데. 다친 손가락이 엄지이다. 지혈하느라 꽁꽁 싸매기도 했고, 아프기도 하니 자꾸 힘을 주게 되어 엄지 척이 되었다. 바비큐 저녁 식탁. JP는 저쪽에 서서 고기를 굽고 나는 어머니, 시누이, 아주버님과 마주 앉아 식사하고 얘기를 나누는데 나도 모르게 자꾸 손가락으로 "쵝오!"를 외치고 있는 거다. 어머님이 말씀하셔도 쵝오! 평소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누지 않는 아주버님 말에도 쵝오! 고기 맛있어요, 쵝오! 달이 참 예뻐요, 쵝오! 그걸 깨닫고 현타가 와서 혼자 빵 터졌는데, '시'님들에 둘러싸여 있으니 이걸 나눌 수도 없고... 웃참 하느라 죽을 뻔한 나 진짜 쵝오! 큭큭큭.
 

 
남은 월남쌈 야채에 새우 한 봉지 다 데쳐서 편안한 저녁 식사, 쵝오! 어쨌든 쵝오! 누구든 쵝오! 당신도 쵝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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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오랜 시간 혐오한 죄를 회개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십자가 상'에 대한 혐오이지 우리 주님의 십자가는 아니다. 그럼에도 회개한다. 그 불경한 마음을, 그 교만한 냉소를 회개한다. 친히 십자가 지신 나의 예수님께서는 "딸아, 네 마음 다 안다. 그 혐오와 냉소가 나를 찾는 진정한 마음이었던 것을 잘 안다." 하시는 줄 알지만. 그럼에도 머리를 조아려 그 높아졌던 마음을 회개한다.
 
집 베란다 앞에 거대한 십자가 상이 있다. 어쩌면 저렇게 주변과의 조화를 철저하게 배제한 크기이며 배치일까,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저 십자가 상만 없으면...' 딱 마음에 드는 뷰라고 생각했었다. 이게 날이 갈수록 저 십자가가 좋아지니 무슨 조화냐? 새벽 어스름한 하늘을 배경으로 말없이 섰는 그리 예술적이지 않은 십자가가 자꾸 좋아진다. 십자가는 그대로이건만 계절 따라 날씨 따라 배경이 바뀌어서일 것이다. 폰 카메라 앨범에는 온갖 배경의 저 십자가 사진이 많아서 따로 폴더를 만들어야 할 지경이다.
 
십자가 상이 싫었지 예수님이 싫었던 적은 없었다. 십자가 상이 견딜 수 없었던 시절, 예수님을 향한 갈망은 더 절절했다고 이제는 더 확신있게 말할 수 있다. 지난주 어느 날,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이 있던 저녁이었다. 아이들과 식탁에 앉아 농담 따먹기 하고 있는데 베란다 밖으로 무지개가 떴다. 천공의 성 라퓨타 구름에서 뻗어 내리는 사다리처럼 기묘하게 떨어지는 무지개라니! 게다가 그 배경으로 구름을 향해 치솟은 십자가라니! 아, 이런 이미지를 나의 하나님 말고 누가 만들어 보일 수 있겠냐고!
 
남편에게 보냈더니 남편 있는 교회 쪽 하늘도 예사롭지 않은지, 남편은 그 시각 하늘 사진 사진 몇 장을 전교인 단톡방에 올렸다. 저 십자가. 교회 강대상에 놓인 사이즈도 모양도 참으로 적절하고 마음에 드는 십자가가 어떤 저녁 하늘을 배경 삼아 팔을 벌리고 서 있다.  이 역시 창조주 아닌 그 누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이미지가 아니다. 애초 화해한 상태로 가까워지고 멀어지고 하는 나의 예수님과 더 가까워진 저녁이었고, 십자가 상과 다시 화해하는 순간이었다.
 
베란다 앞 십자가 트라우마(?)는 10 년도 거슬러 올라가는 시절 명성교회 앞에 살던 시절의 것이다.  (2011.11.17 명성의 복이여, 영원하라) 매일, 매주일 마주하는 소음과 주차난의 불쾌감이었고, 한창 조용히 치열하던 신앙 사춘기 앓이의 통증이기도 했다. 교회 가야 하는 시간이 되면 배가 꼬여 거실 바닥에 뒹구는 일도 있었고, 어떻게도 해소되지 않는 차가운 분노가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기도 했다. 그래서 실제로 온몸이 아프기도 했었지.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다녔던 교회에는 십자가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건물 안팎으로 십자가가 하나도 없었다! 아, 그랬구나!  그 정신이 좋고 자랑스러웠던 젊은 시절에의 부끄러움과 억울함의 몸부림이었는지 모르겠다.
 
붉은 네온사인 십자가로 가득 찬, 무덤 같은 도시의 밤 사진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남아 있다.  그 붉은 무덤 십자가로부터 선을 긋고 "다른 크리스천"임을 피력하고파 '지성의 제자도'에 탐닉하던 시절도 있었네.

십자가 없이 내 인생을 설명할 수가 없구나. 십자가는 늘 그대로였는데, 계절 따라 날씨 따라 배경이 바뀌면서 내 마음의 풍경이 달라졌다. 날씨만큼이나 쉽게 바뀌는 내 마음이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대로이건만, 질곡의 시간을 견딘 십자가가 되었다. 주일 예배 찬양 중에 '어저께나 오늘이나'를 부르다 이 가사에 울컥했다. 
 

세상 지나고 변할찌라도
영원하신 주 예수 찬양합시다

 

 
 

명성의 복이여, 영원하라

지난 2년간 내 집 베란다에 앉아 명성이 자자한 이 교회의 대성전 건축을 목도하게 하셨으니 주의 은혜가 크시도다. 땅을 다질 때부터 온갖 공사 소음으로 환란을 주시어 내 인내를 연단하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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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과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땅에 있는 성전에서 섬깁니다." (히 8:5)

 

어제 자 묵상 말씀이다. 교회 말씀 묵상 밴드에서 히브리서를 나누고 있다.  "이 땅의 삶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천국을 바라보고 여기는 그림자처럼 여기며 살자. 천국은 좋은 곳, 여기는 하찮은 곳!" 이원론적 인식으로 가져갈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땅의 성전이 하늘을 반영한 것이라고 왔다. 땅에 있는 성전이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늘의 모형을 본떠 만든 것이다. 원형은 하늘에 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는 주기도문도 생각난다. 내가 지금 여기, 이 땅에서 하는 예배와 삶 전체가 하늘의 모형을 비춘 그림자여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들린다. 스캇 펙이 쓴 사후 세계에 관한 소설 제목은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는 말씀의 역방향의 가능성이다. 관계는 이렇듯 상호적인 것 아닌가.
 
하늘의 모형을 비추는 그림자가 된 오늘이 천국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사는 오늘 하루가 저 영원한 천국과 이어진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아침 말씀 묵상은 하루 분 일용할 영의 양식이라 여기는데... "오늘의 양식"이 그것이었다. 실은 전날 남편과의 말다툼으로 마음이 먹구름이었다. 오늘 마음의 지옥을 살면서 죽어 눈 뜬 곳이 천국이길 바랄 수 있겠는가, 생각하며, 지옥 같은 마음을 해결해야겠구나 싶었다. 오후에 용기 내어 남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사과할 용기, 내 잘못과 내 마음의 결핍을 인정할 용기는 오전에 있었던 "꿈 집단"의 나눔 덕이다. 진실한 대화로 내 마음을 알게 되었다. 전날 밤 남편에게 휘둘렀던 날카로운 말의 칼은 '연결'에의 갈망이었다. 꿈 작업의 힘을 빌어 자존심 내려놓고 진심의 사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었다. 한참 후에 답신이 오고... 지옥 같았던 마음에 천국이 조금씩 스며들었다.
 
모처럼 개인 하늘이 아까워 저녁 산책에 나섰다. 빗물 웅덩이에 하늘이 담겨 있는 이 멋진 장면을 발견! 누추하고 답이 없고 엉망진창인 웅덩이 같은 내 마음에도 하늘이 담겼다. 땅이 하늘에 가 닿을 수 없으니 하늘이 내려와 땅에 담겼다. 만나려면 서로의 간격이 좁아져야 한다. 중간 지점에서 만나든, 누가 더 빨리 달려 많이 움직이든 어쨌든 움직임이 필요하다. 오늘 여기서 하늘을 살 수 있는 이유는 하늘이 친히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것이 성육신 사건이다. 스펙터클한 내적 전쟁을 가만히 정리해 준 한 장면의 선물이다. 그러고는 오늘 아침의 연구소 묵상은 또 이러하지 않은가! 이분을 얼마나 성실한 분인가. 내게 필요한 말씀을 얼마나 성실하게 반복해서 또 하고 또 하고 또 들려주시는 분인가.
 

예수님의 육화는 우리가 인간으로 있는 곳에서 하느님이 우리를 만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하느님이 둘 사이의 간격을 하느님 편에서 완전하게 극복하신다. 구원의 문제는 그것이 십자가에서 극적으로 연출되기 전에 이미 해결되었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좋다는 사실은 베들레헴에서 이미 밝혀졌다.

자기를 지킬 수 없는 어린 아기 안에 하느님이 숨어 계시고 드러나셨듯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적 능력이 언제나 무능한 사람들 안에 감추어져 있다. 하느님이 사랑받고 나누이려면 나약한 인간의 몸을 입는 모험을 감당하셔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가슴을 울리고 일깨우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개념이나 신학 이론과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물론 이것을 시도하는 이들이 있긴 하다). 사람은 사람하고 사랑에 빠진다. 

나약한 어린아이 안에 하느님은 완벽하게 숨어 계시고 거기에서 완벽하게 그리고 더없이 사랑스럽게 드러나신다.

<리처드 로어 묵상 선집>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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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두고 간직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우연히 찾아든 선물같은(다른 더 좋은 표현이 없을까?) 시간이었다. 대학원 4학기를 완전히 마치는 마지막 종강 날이었다. 수업 마치고 늘 수녀님을 댁까지 모셔다 드리곤 했는데, 학생으로서 특혜였다. 그날 수업으로 시작하여 별별 얘길 다 나눈 것 같다. 이건 진짜 상상도 못 한 일인데. 대학원 생각을 하면서 학교를 결정하는 문제로 의논을 하기도 했었다. 이 학교로 결정하고 "어느 신부님 강의는 꼭 들어보라"는 말씀을 해주실 때도 이런 날을 상상이나 했냐는 말이다. 4학기 차에 수녀님이 우리 대학원에 강의를 나오시게 되고, 그 과목은 무려 <중세 여성 신비가들>이었고, 박사논문으로 연구하신 베긴(Begine) 신비교사 '안트위르펜의 하데위히' 강의였으니! 이건 하나님께서 너~어무도 나만 생각하시는 건 아닌가 싶으신 것이었다. 너무 내 위주로 커리큘럼 짜고 계신 건 아닌지. (나한테 왜 이러시냐고, 도대체 왜 나한테...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진짜 많이 투덜거리고 대들었는데... 하나님, 당신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학기 세 과목은, 아니 세 분의 교수님은 인생 종합 선물 세트였다. 오랜 시간 '스승의 날'마다 박탈감 같은 걸 안고 보냈다. 신앙 사춘기를 통해 젊은 날 존경하던 스승님들 다 보내고 텅 빈 마음이었을까? 올 스승의 날에는 정말 세 분 스승님께 정성을 다해 마음을 표현했다. 지난날의 박탈감이 다 치유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 수업 마치고는 수녀님과 차 한 잔 하자는 발걸음이었는데, 갑자기 정해진 반포대교, 그리고 입구를 잘못 찾아 들어가 카페와는 한참 멀어졌고, 걷는 게 힘드실 것 같아 빈 벤치가 보이면 무조건 앉자고 우겨서 자리를 잡았다. 앉자마자 이게 무슨 일! 바로 반포대교 분수쇼가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 자리는 로열석이었다!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 담을 넘었다고 생각했는데, 횡단이 아니라 종단이었다. 1517년 종교개혁 시대의 담을 넘어 초세기부터 16세기 스페인 영성에 이르는 영성의 강을 여러 차례 오르고 내린 것 같다. 간간이 고대 그리스까지도 거슬러 올랐었다.  이 강물에 몸을 맡겨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며 흘렀다. 예습, 복습, 자기주도 학습. '습'이란 습은 다 하며 행복했다. 목말랐던 바로 그 배움이 딱 거기 있었고. 그렇게 헤엄치다 발에 땅이 닿아 디디고 섰더니 원래의 내 자리이다. 내가 나고 자란 교회, 혹독하게 신앙 사춘기를 겪었던 엄마의 품, 엄마의 교회, 개신교회, 지금 여기의 교회. 그간 가졌던 많은 의문들이 2000년 영성의 강물 위에서 나뭇잎 한 장 같은 것이 되었다. 횡단의 대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종단으로 밝히 알게 된 출생의 비밀 같은 내 영성의 역사로 자부심이 커졌다. 그렇게 보낸 4학기 마지막 강의를 마친 밤에 참 잘 어울리는 종강파티였다.
 
논문만 쓰면 된다.
논문 따위!...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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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기만 한 컵이 아니라 의미 담긴 컵을 참 좋아하는데... 그건 아마도 컵을 영적 스승으로 삼은 조이스 럽의 "내 인생의 잔" 때문일 것이다.  취향저격의 컵 선물로 격려를 받아서 '취향저격려'이다. 컵을 좋아하고, 의미 있는 컵을 좋아하는 취향을 정확히 저격당한 것도 사실이고, 후쿠오카의 스벅에 갔는데 저 컵을 봤다면 덥석 사 왔을 디자인이라서 취향저격이다.
 
폴리백에 담긴 멸치가 취향저격이다. 맨입에 먹는 멸치 좋아하고, 뼈를 발라 국물 우려낸 축축한 멸치 진짜 좋아해서 버리지 못하고 혼자 먹는 취향을 갖고 있다. 그냥 고추장 찍어 먹으라는 이 멸치는 고추장 꺼낼 새도 없이 그냥 먹게 된다. 폴리백에 담긴 것이 흡사 <멜로가 체질> 야감독(손석구 분)이 해외로 떠나는 은정이에게 던져주는 빙어 같이 생겨서 더 좋다. 이걸 주신 분들도 쿨하기가 야감독 못지않은 분들이라. 
 
20대 말에 JP 썸타던 시절 이야기이다. 30대를 그냥 맞을 수 없다는 뜻으로 친구 M과 H가 '지리산 원정대'를 꾸렸다. 지리산 종주 여행에 JP도 함께 했고. 나는 엄두도 못 낼 일정이었고, 썸녀였던 나만 남았다. 주일 예배 마치고 잘 갔다 오라는 내 인사에 "어, 누나도 같이 가시잖아요." 해서 무슨 소리냐 했더니 '누나는 제가 마음에 담아 갈 건데요'라는 파렴치한 수작을 부렸었다.
 
오글거리는 말이긴 하지만, 사람은 사람을 마음에 담을 수 있다. 짧은 가족여행 다녀오시면서 초콜릿 하나를 주셨어도 "웬걸요!" 했을 일이다. 아니 뭘 주시는 자체가 가당치 않은 여행이다. 그 여행에서 컵을 고르고 사고 할 때 나를 기억하고 내 취향을 고려했다는 것이 참 고맙다. 멸치를 폴리백에 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누굴 줘야지" 하는 마음으로 멸치를 나눠 담을 는 짧은 순간, 담는 사람의 마음에 '누군가'가 담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순간의 '담김' 그게 참 격려가 된다. 내가 뭐라고... 나를 담아주시나요. 그리고 조그만 기도 안에 머물러도 알아차리게 된다. 내가 근본적으로 어디에 담겨 있는지. 이 취향저격 격려는 그분이 보내신 것이라는 걸. 내 어깨가 좀 처져 보이고, 내가 나를 싫어하려는 조짐이 보이니까 그분이 손을 쓰신 것이다. 어떤 이들의 선한 마음을 이용해서. 그분은 정확하게 취향을 저격하시는 분이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게 훨씬 많아서 늘 털리는 인생이라며 자기연민에 빠지는 적도 많지만, 정신 차리고 제대로 머물러 꼽아보면 그 반대다. 말되 안되게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많다. 받는 모든 것에 진심의 감사를 하는 것이 내 일상 또 하나의 기도이다. 감사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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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1시까지 줌으로 하는 내적 여정을 마치고, 점심을 먹고, 소파에서 기절하듯 낮잠을 잤다. 기절 낮잠은 참 오랜만이다. 이유 있는 기절 낮잠인 것이, 한 이십몇 년 만에 시험공부를 했는데, 그야말로 시험공부였다. 외우는 공부 말이다. 문제는 나와 있지만, 문제마다 답을 정리하는 것이 리포트 하나를 써야 하는 수준이고, 그걸 쓰자면 한 과목의 한 학기 공부를 정리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그간 의미 있게 들었던 과목을 내 것으로 정리하는 시간이 되고, 그걸 외우기 위해 안 쓰던 머리를 써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라고 지나고 나면 말할 수 있는 거지! 답을 정리하고 외우느라고 죽을 뻔했다는 말은 하지 말자.)
 
기절 낮잠을 자고 일어나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시험공부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 "아... 논문 쓰고 싶다. 외우는 고통에 비하면 논문 쓰기가 훨 낫네" 했었으니까. 정말 달콤한 책상 앞 시간이구나... 하는데, 채윤이가 등장하여 카페 가자고 난리를 친다. 점심 먹기 전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다. 장은 봐야 한다." 이런 얘길 했던 것 같은데, 분명히 가기로 했다고 떼를 쓰고 (진짜로) 거실 바닥을 구른다. 쟤가 미쳤나 싶어, 미친 애는 이길 수 없지 싶어 카페에 가기로 했다. 주섬주섬 책을 챙겼더니 "제발, 제에발... 그냥 보통 엄마처럼 카페에 가자"고 다시 발을 구른다. 책 가져가지 말라고. 쟤가 미쳤나 싶었지만, 기꺼이 져주기로 하고 지갑과 휴대폰만 챙겨 나섰다.
 
채윤이가 꼭 가고 싶었던 카페는 늘 지나다녔지만 카페인 줄도 몰랐고, 카페라 해도 "어반 런드렛", 세탁소 겸 카페라니 끌리지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끌려 나온 몸, 끌려가자 싶어 들어간 카페는, 오!!! 분위기 좋고, 뷰 좋고, 음료 마음에 들고! 1층은 카페, 2층은 세탁소라는 이상한 조합도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창가에서 보이는 내가 늘 걷는 탄천 길의 큰 나무였다. 오미자 신맛 좋아하고, 자몽의 쓴맛 정말 좋아하는데, 얘네 둘을 콜라보한 '오미자몽'도 신선한 경험이었다. 

한가로이 앉아서 즐기고 노닥거리는데 잃었던 어떤 것을 찾은 느낌이었다. 잃은 줄도 몰랐던 어떤 좋은 것 말이다. 커다란 덩치에 갑자기 다섯 살 채윤이가 되어 거실을 구르던 채윤이 덕에 예기치 못한 기쁨을 만났다. 게다가 이 얘기 저 얘기, 수다수다 하다 채윤이가 툭 던진 한 마디가 마음 깊은 곳으로 풍덩 들어왔다. 듣고 보니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는데,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던 그 말이었다. 듣고 보니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 복닥거리며 찾아다니던 것이 있었는데 채윤이 입에서 나온 한 마디였다. 이럴 땐 정말 "아이는 하나님의 메신저다."라는 말이 수사가 아니다. 다 큰 채윤이가, 힘을 써서 나를 끌고 나가서 내 지갑을 털고 제 욕구를 채우는 줄 알았는데 나를 위한 시간이었다.
 
끌려나갔더니, 내가 얼마나 쉬지 않고 달려왔는지, 달리는 것 자체에 취해서 어떤 감각을 마비시키고 살았는지 깨달아졌다. 문자 그대로 달린다는 뜻은 아니다. 내 방식으로만 일하고, 내 방식으로만 쉰다는 뜻이다. 카페에서 보이는 나무 아래는 내가 늘 걷는 길이다. 나름대로 쉼이며 멈춤이라 여기며 혼자 산책하는 길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내 방식대로 쉬는 고착이라는 것을 알겠다. 내 스케줄과 내 방식을 포기해야 비로소 늘 보던 나무 저편 아래에 카페가 있고, 상상치 못한 조합의 '오미자몽'이 있음을 체험하게 된다. 무엇보다 이런 딸, 잘 키운 딸, 열 친구 부럽지 않은 잘 키운 딸을 영접하게 된다.
 
마침 다음 날 주일 예배 설교의 본문은 이것이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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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천을 따라 약속이 있는 보정동 카페거리에 갔다. 어느 카페 앞에 수선화와 수국이 줄을 맞춰 서 있다. 수선화로구나! 봄이로구나!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세 시간 가까운 즐거운 수다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정호승 시인은 <수선화에게>가 생각났다. 수선화narcissus니까 외로운 거야... 나르시시스트 외롭지... 물에 비친 내 모습에 빠져서, 자아에 빠져서, 결국 자아에 빠져들어 죽는 건 가장 외로운 일이지... 
 
아까 찍은 수선화 자세히 들여다 보니 수선화답지 않게 서로를 마주 보는 둘이 있다. 뭔가 얘기가 오가는 중인 것도 같고.  아까 만난 내 젊은 친구와 나 같기도 하고. 나만 바라보면 외롭다. 내 모습에 도취되어 빠져 있으면 외롭지 않을 방법이 없다. "아까 만나러 가는 길 어느 카페 앞에서 찍은 사진이에요. 마주 보고 얘기하며 행복한 우리 둘 같죠? ^^ 우리 사이에 성령님께서 앉아 함께 기뻐하시고…"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정말 그렇다. 영락없이 우리 둘이고, 그 '사이'를 오가며 기뻐하시는,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시는 그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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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8일, 연구소 카페에서 아침마다 나누는 '읽는 기도' 묵상이었다. 『리처드 로어 묵상 선집』을 읽고 아래와 같은 글을 붙였다. 다음 날 주일 예배의 설교 제목은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였다. 전날 넋두리 같은 글에 대한 답처럼 주어진 설교였다. 남편의 설교를 대문에 걸어두는 게 설교자 당사자 만큼이나 민망하지만, 이 민망한 짓을 하고 싶다. 힘을 내보려는, 허무를 극복해 보려는 노력이다.

죽음이 끝이 아니다, 나는 죽어서 지옥 가지 않을 것이다, 정도를 부활 신앙으로 생각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묵상처럼 "부활이란 위대한 변형이며, 전혀 새로운 창조이고, 무엇보다 큰 '사랑'의 변형"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은총과 영광, 그 변형은 오늘도 일어나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믿어야 할 아침입니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거라는 기대가 없어서 무기력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은, 연구소는, 삶은, 신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오지 않은 날들이 창밖의 하늘처럼 뿌옇기만 합니다. 과거와 현재, 눈에 보이는 것만이 내일을 예측할 수 있는 근거라 믿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숫자입니다. 통장의 잔고, 나이, 데드라인, 남은 시간, 인생의 등수, 내 모든 점수... 보이는 것이 전부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볼 수 없겠다는, 보지 않겠다는 무력감과 허무입니다.

부활 신앙은 진정한 의미의 낙관주의이고, 하나님 사랑이 해내실 일을 미리 사는 일인데 말입니다. 그 막막한 페스트 펜대믹 시대에, 죽어가는 몸을 하고서도 "All shall be well!"이라 하신 노르위치의 줄리안이 그 증인이겠지요.

"당신은 아직 부활 신앙에 미치지 못했군요! 지금 이 순간, 진정한 낙관주의를 다시 발견하세요."
오늘 묵상글은 경고로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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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를 왜 사?

 

채윤이랑 장을 보는데 무화과를 사자고 한다. 무화과를 왜 사? 처음 클릭된 내 마음이었다. 그리 비싸지도 않고, 채윤이가 사자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냥 먹고 싶다는 것이다. 먹고 싶다는 것보다 정직한 이유가 있으랴. 그래, 사!라는 반응에 "어, 진짜?" 하는 게 조금 슬프다. 우리 엄마가 그랬듯 아이들이 뭘 사고 싶다거나 욕구를 드러내면 나는 일단 빨간불을 켜 들었다. "왜애? 그게 지금 필요해?" 엄마가 내게 그러는 게 그렇게 싫었으면서 아이들에게 그러고 있다. 그걸 인식한 순간부터 그러지 않으려고 뼈를 깎는 노력을 했으나 아이에게 가 닿는 건 몸의 언어이다. 표정과 세포로 말하는 것을 먼저 들었다. 그 행동이 맞고 틀려서가 아니라 엄마가 전적인 지지를 하지 않으니 아이는 불안한 것이다. 내 엄마가 내게 그랬던 게 그렇게 싫었는데... 그렇게 심긴 무의식적 메시지가 "네가 선택하는 것은 옳지 않아!"라서 그 메시지를 지우는데 긴 시간이 걸렸는데 내 아이에게 그러고 있었다. 그러지 않겠노라 결심한 세월이 짧지 않지만, 내 몸에 새겨진 것이 아이 몸으로 흘러가 버렸다. 

 

그래, 사.

 

어? 정말? 엄마 무화과 사준 적 한 번도 없잖아. 정말 사도 돼? 그렇게 무화과 한 박스를 사왔다. 아이의 몸에 새겨진 "안 돼! 필요 없는 것을 왜 사? 네 선택은 옳지 않다!" 트라우마는 이런 작은 경험으로 치유되어야 한다. 그렇게 무화과 한 박스를 사 와서 이렇게 저렇게 먹는 동안 무화과에 얽힌 나의 이야기가 하나 씩 둘 씩 풀어져 나왔다. 무화과에 얽힌 사연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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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요나단, 두 사람의 우정에 관한 설교를 들었다. 그 여운이 길다. 설교는 이런 내용이었다. 우정은 마음결이 같은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면서 싹튼다. 일단 알아본다. "같은 꽈구나!" 그리고 두 사람 사이 약속이 생기고(언어적일 수도 비언어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 약속을 지키겠다는 뜻이 생긴다. 아마 여기서 신뢰가 싹 틀 것이다. 세 번째가 신선한 통찰이었는데,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극복할 것은 '시기심'이다.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태도와 마음을 드러내는 성경 구절을 찾아볼 수 있다. 번호 붙여 정리하면,

 

1. 마음 결이 비슷한 사람이 서로를 알아본다.

2. 서로에 대한 믿음이 생기고 그것을 지킨다.

3. 어쩔 수 없이 올라오는 시기심을 알아차리고 극복한다.

 

나는 애정하는 여성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이 『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것』에서 키케로를 인용하여 정리한 것을 '우정'의 즐거움 또는 정의로 생각하고 있다. 우정의 즐거움은 농담과 뒷담화라고 했다. 누군가를 마음 편히 뒷담화 할 수 있고, 농담할 수 있는 사이. 그 정도면 찐 친구라고 생각한다. 위의 세 가지에 내 기준 두 개를 덧붙여 우정을 정의하고 더욱 일궈가야겠다.

 

학교 가는 즐거움 중 하나는 학식 먹는 즐거움이다. 내 공부를 기뻐해 주는 한참 젊은 '친구'(라고 하자)를 학교에서 만나 학식을 먹었다. 학교 카페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이 얘기 저 얘기 흘러가는 대로 이야기를 나누고. 갑자기 일어나 학교 앞 산에 가보자는 제안을 했다. 바로 앞에 공원 같은 산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언젠가 걸어봐야지, 하고만 있었다. 생각보다 좋은, 너무나 걷기 좋은, 내가 딱 좋아하는 그런 길이 펼쳐져 있었다. 좋은 공기 때문인지, 편안한 대화 때문인지, 영혼에 뭔가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친구 같다."는 말이 나왔는지, 속으로 했는지 모르겠다. 실은 '일로 만난 사이'이다. 이 날도 일을 도모하고 싶어서 만남을 청한 것이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일은 거들뿐, 살아가는 얘기, 살아갈 얘기 같을 것들로 대화의 주제가 종횡무진이다. 오솔길을 내려오니 뻥 뚫린 강남대로이다. 지하철 가는 길로 조금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 친구같다, 가 아니라 친구다, 라고 혼자 말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 기준이라고 치면 1번 항목 완전 체크로 시작했을 것이다. 일로 만나든 무엇으로 만나든 만나면 일단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은 MBC 문화방송이 아니라 마음 결의 동질성이지 싶다. 오늘 자 카페의 영적 독서 내용은 여성과 영성에 관한 내용이었다. 묵상글  본문을 올리고 덧붙이는 말에 "여자인 것이 참 좋다"라고 썼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여자라서 여자들과 맺을 수 있는 우정이 참 좋다. 몇 달에 한 번 만나도, 인생에 단 한 번을 만나도, 몸은 멀리 떨어져 있고 메시지 한 줄로 만나도 몸으로 확인되는 우정, 여자들의 우정이 참 좋다. Womanc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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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언 고닉의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를 읽자니 뉴욕의 거리가 살아온다. 체험이 이런 것이다. 뉴욕의 38번 가, 33번 가... 이것이 더는 숫자가 아닌 것이다. 그 길에 서봤기 때문에 더는 머릿속 이미지, 관념일 수 없다. 지난여름에 걸었던 뉴욕의 길들을 떠올린다.

뉴욕의 마지막 밤이다. 재즈바 Village Vanguard에서 나와서 그냥 걸어보는 길이었다. 마지막 밤이라고 큰 아쉬움도 없었다. 나는 그저 어서 내 집 내 침대에 돌아가 편안한 잠을 자고픈 소원 외에는 없었고. 그래도 돌아보면, 참으로 좋았던 순간이었다. 한적한 길을 느리고 가볍게 걸으며 사진 여러 장을 찍던 순간이 뉴욕 여행 "최고의 순간"까지는 아니어도 참 좋았다.

채윤이에겐 두 개의 얼굴이 있다. 미국 얼굴과 한국 얼굴. 무슨 일이 있어도 유학을 보내야겠다 싶은 건, 그 어떤 이유도 아니다. 미국 얼굴로 살게 하고 싶어서이다. 미국 얼굴은, '자기'가 된 얼굴이다. 최상급의 한국 얼굴은 예중 다닐 때 얼굴이고, 아빠가 목회하는 교회의 청년부에 가 앉아 있을 때의 얼굴이다. 미국 얼굴에는 생기가 있고, 사랑이 있다. 자발성이 있고 기쁨이 있다.

이런 사람이 어쩌다 내 인생에 들어왔는가. 타고난 영적 지능이 있어야 영성을 알아들을 수 있다고 어느 신부님이 말씀하셨는데.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나이와 경험 너머의 어떤 귀를 가진 것 같다. 정말 잘 알아듣는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올 여름 미국행에 다슬 샘이 함께 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그분이 둔 한 수였다.

극적인 체험이 담긴 사진이다. 여행 내내 제대로 잠을 못 잤지만, 그야말로 한잠도 못 잔 날이었다. 시차 적응 실패로 몸의 균형이 완전히 깨진 탓이기도, 거기에 마음까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일어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가는 길은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그렇게 바닥이던 몸과 마음과 영혼에 생기가 주입되어 살아난 것이다. 미술관 들어갈 때 얼굴 다르고 나올 때 얼굴 달랐는데, 달라도 너무 달랐는데 저렇게 행복하고 평온한 표정이라니!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세 여인 모두 그러했다. 참으로 행복하고, 뉴욕에 오길 잘했다! 정말 잘했다! 싶은 순간이었다.

루이즈 부르주아 특별전을 만난 것이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 미술 전공 다슬샘은 "저는 아무 계획 필요 없어요. 미술관만 가면 돼요." 했었다. 나 역시 시카고 미술관은 다시 가고 싶었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도 기대가 되었었다. 하지만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은 아니었다. "루이즈 부르주아 기획 전시회 한다! 눈물 날 것 같아요!" 먼저 도착해 있던 다슬 샘의 톡으로 극적 반전은 시작되었다.

다슬 샘이 하는 미술치료 그룹에 참석해서 큰 도움받았던 채윤이는 루이즈 부르주와를 닮았다. 어떤 조각품들은 채윤이를 형상화한 것 같다며 같이 웃었다. 마치 제가 그린 그림이라는 듯, 턱턱 그림을 읽어냈다. 뭉클하게 심장 깊은 곳을 찌르는 감상평을 쉽게 쉽게 내놓았다.

루이즈 부르주와는 페미니스트 작가라고 하는데, '마망(maman)'이라 이름하는 거대한 거미 작품으로 유명하다. 거미가 '엄마(마망)'라니. 엄마가 거미라니! 거미는 전통적으로 모성의 상징이다. 아, 모성은 얼마나 복잡한 것인가. 엄마로 딸로, 인습으로, 죄책감으로, 그리움으로 혐오로 얽히고 얽힌... 딸 채윤이와 루이즈 그림 앞에 사람대 사람으로 서서 그림에 비춘 마음을 나누었다.

다슬샘과 나란히 서서 치료자의 눈으로 루이즈 부르주와의 무의식을 들여다보았다. 말 한마디가 건너오면 내 안에서 다른 것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다시 건네면 또 따른 것이 되어 돌아온다. 이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티키타카이다. 영적 지능으로 이해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 소장님과 연구원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으로, 여자와 여자로 말한다.

루이즈 부르주와 그림 앞에서 나는 그냥 한 여자였다. 애증의 모성 거미줄에 얽힌 엄마이거나 딸로 분열적 자리에서 고군분투 하는 여자였고, 앤 윌슨 섀프가 말하는 '백인 남성 시스템'에 맨몸으로 던져졌던 여자였다. 그리고 내 앞에 강한 두 여자가 있었다. 딸도 아니고 연구원도 아닌 힘과 영적 지능을 가진 여자 사람 친구들이 있었다. 미국 오가는데 비행시간만 60여 시간. 노숙자 행색의 공항 셀카가 몇 장인지 모른다. 경유 비행기를 기다리는 기나긴 시간에, 꿈작업도 할 수 있는 우리 셋이었다. 꿈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담겼다. 친구라는 뜻, 영혼의 친구라는 뜻이다.

저러고 뉴욕 거리를 활보하는 다슬샘은 여행 중 만난 사고 때마다 가장 위험한 곳에 배치되곤 하였다. 내적인 사고든 외적인 사고든. 돌아오기 전날, 저녁 재즈클럽 일정 전 공원에서는 말 그대로 대형사고를 만났다. 제대로 깔렸으면 이후가 상상이 되지 않는 커다란 나무통이 떨어졌던 것. 제대로 아니고 살짝 각도가 비켜가 찰과상을 입는 것으로 끝났으니 다행이었고. 나 대신 그 나무를 맞아주었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세 사람 모두에게 두고두고 잊지 못한 대형 사고의 기억을 남긴 지난여름 시카고와 뉴욕이다. '미쿡 원정대' 공식 해단식을 하자, 하자 하면서 몇 번 셋이 만났는데 해단식은 계속하기로 했다. 해단식으로 모일 때마다 새로운 마음의 후기가 나오니 어쩔 수 없다. 뉴욕의 거리를 함께 걸었고, 길 위의 시간을 함께 겪어냈다. '체험'이란 그런 것이다. 함께 체험했으니, 끝나지 않는 해단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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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란다. 나와서 놀잔다. 바람이 말했다.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부는, 그 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를, 그 바람이 말했다. 오늘의 고생은 오늘로 족하니 함께 걸으며 무엇이든 흘려보내자고. 낮의 일로 마음의 온도가 아직 뜨겁냐 묻는다. 그런 것 같다 하니 시원하게 선선하게 불어준다. 명절이 다가오고, 어머니의 명절 증후군 증상이 부드럽고 소소한 화살이 되어 날아와 꽂힌 것을 바람도 알고 있었다. 이제 맞고만 있지 않는, 정확하게 말하고 상처드리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며느리가 되었다는 것도. 선선한 바람이 불어주어 금세 열이 떨어진다. 분노의 열기가 떨어지니 냉랭한 마음이다. 그래도 나오길 잘했다. 밤하늘 달이 좋고 바람이 이렇게 좋으니. 되돌려드린 말의 화살이 생각난다. 취약하신 어머니가 그 화살 붙들고 외로우실 생각에 죄책감이 밀려온다. 바람이 말했다. 언제 어디서나 두려움 대신 사랑을 선택할 수 있다고. 어머니께 전화했다. 그, 그래... 에미야. 낮의 그 말씀을 그대로 반복하시지만 느슨하고 힘 없이 당겨진 활시위라 화살이 멀리 날아오질 못한다. 전화선 어디서 툭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나는 활을 들지 않았다. 사실을 따지는 마음 없이, 모든 말을 믿어 드(리겠다 결심)렸다. 그러니까 어머니 금요일에 시간 비우시고 바람 쐬고 맛있는 것 먹고 그러기로 해요. 기억하세요. 금요일이요. 그래, 그래. 9일, 9일 금요일, 알았어. 마음에 찬 바람이 분다. 슬픈 바람이다. 어머니의 외로운 노년이, 연결되어 도울 수도 없는 노년이 슬프다. 내 마음 아는 바람이 함께 걸어주었다. 좋은 분에게, 선함을 불러 일으키는 분에게 카톡을 하라고 바람이 알려주었다. 몇 줄 메시지와 돌아온 짧은 답신으로 마음에 기쁨이 가득찬다. 집 앞에 다다랐을 때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이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고개를 드니 먼저 물든 나뭇잎이다. 손이 없는 바람이 단풍 든 나뭇잎을 흔들어 따뜻한 안녕 인사를 건네준다. 들어가 편히 쉬라고, 오늘 고생은 오늘로 족하다고. 잘 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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