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에 해마다 학교 대표로 독창대회에 나갔었다. 지정곡과 자유곡, 두 곡을 부르는데 3학년 때 지정곡이 이런 노래이다. "할머니 머리에 눈이 왔어요. 벌써 벌써 하얗게 눈이 왔어요. 그래도 나는 나는 제일 좋아요. 우리 우리 할머니가 제일 좋아요." 대회가 아니어도 나는 늘 혼자 노래를 부르며 노는 아이였고, 그 자체가 연습이었다. 그런데 이 노래는 집에서 잘 부르지 못했다. 특히 아버지가 있을 때는 부르지 못했다. "우리 우리 할머니"라는 말 때문이었다. 할머니라 함은 아버지의 엄마인데, 실향민인 아버지의 부모님은 북한에 계셨다. 한 번도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나는 아버지를 생각해서 그 노래를 부르지 못했다. 내가 이 노래를 해서 "할머니" 소릴 듣고 아버지가 할머니 생각이 나서 슬프면 어떡하지? 내가 "우리 우리 할머니"라고 노래할 때 딸에게 할머니를 주지 못해서 미안하면 어떡하지? 그 어린 나이에 순간적으로 전자동으로 거기까지 갔다는 것이, MBTI로 F가 높다는 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지나친 감정이입이다. 그렇다. 좋아하는 사람의 감정에 지나치게 이입이 된다.
감정에 편들어주는 일이 내게는 쉽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감정에 무조건 편들어주는 일이 쉬운 일이다. 이런 성향이 글 쓰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고,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지나치게 감정이입 되는 대상을 떠올리며 글을 쓸 때는 사투를 벌이게 된다. 수십 번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는 짓을 해야 감정이 거둬내지고 그나마 읽을만 한 글이 나온다. 그렇게 어제 마감인 글을 거의 마무리해 가는데, 이입된 마음을 뒤흔드는 일들에 글이 콱 막혀버렸다. (이것도 지나친 감정의 오지랖, 감정이입의 문제이다.) 글만 막힌 것이 아니라 마음도 막혀서 오후를 다 보내고 일몰 시간에 밖으로 나갔다. 다 예수님 때문이다. 글이 빨리 써지지 않았던 그 감정이입은 예수님과 관련된 것인데, 속을 헤집어 마음을 콱 막히게 한 일도 알고 보면 예수님의 일이다. 다 된 글에 예수님 빠트려 엉망이 되고 말았다. 아, 어쩌라고요! 하면서 걷는데 정말 짜증 나게 눈앞에 떡 하니 또 저 전광판! ”(데헷....)JESUS LOVES YOU" 란다. 참말로 속도 좋은 양반... 그래도 사랑한다니까 기분은 좋네.
메마르고 튀들린 마음 다잡아 글 마무리 할 수 있기를... 이 글 보는 아무나 기도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