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월을 맞아 공인 목사로서의 짐을 벗은 남편과 좋은 아침을 누리고 있다. 렉시오 디비나 티키타카. 공인 목사로서 가장 좋아하는 일이 말씀 묵상을 가르치고 나누는 일이었지만, 자연인 JP로서는 말할 것도 없다. 나 역시 가장 잘하고 싶고, 늘 하고 싶은 것이 기도이고, 그중에 "말씀에서 솟아나는 기도"이다. 남편 블로그에 그날의 묵상이 "티키" 올라오면 댓글로 달아 "타카" 한다. 그분의 이끄심을 느낀다. 감사한 아침들이다. 어제의 묵상이다. 사순시기, 마태복음이 새롭게 읽힌다. "과정으로서의 수난"이다. 예수님을 위한 과정뿐 아니라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한 과정인 것이 알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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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들을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니”(마 17:27)
“저들을 공연히 건드릴 것 없으니”(메시지성경)

수난을 향해 한 걸음 씩 나아가시고 예수님이 느껴집니다. 제자들을 준비시키는 것이 곧 예수님 자신의 준비인가 봅니다. 다시 고난받을 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두려워서 근심합니다. 그 와중입니다. 세금 내는 문제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구비시킵니다. (베드로와 자신을 하나로 묶어서 "우리가"라는 주어를 쓰십니다.) 임금의 아들은 세금을 낼 필요가 없지만, 성전이신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저들을 "(우리가 저들을) 공연히 건드릴 필요가 없으니" 말입니다. 저들이 요구하는 건 내는 것이 낫습니다. 저들이 때리면 맞는 게 낫습니다. 저들이 빼앗아가면 빼앗기는 게 낫습니다. "하나님과 관계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 (17:22, 메시지성경) 을 공연히 건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베드로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살아야 할 운명의 길에 오른 베드로를 가르치기 위해서, 이제 곧 수난의 때가 오고, 당신의 때가 끝을 향하는 것을 아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구비시키기 위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돈이 없는 베드로에게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아 입만 열었는데 꼭 필요한 만큼의 동전을 얻는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물고기 잡는 일은 베드로에게 가장 익숙한 일입니다.

“하나님과 관계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당하실 예수님께서 두려워하는 베드로를 위해 일상의 작은 에피소드로 체험을 주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 두고두고 기억할 것입니다. 이 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야, 결국 그 사람들이 이길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손에 넘겨서 죽게 돼. 그들이 이기는 것처럼 보일 거야. 나와 네가 지고 실패한 것처럼 보일 거야. 세금을 징수하는 그 사람들이 강해 보이지만, 너는 하나님의 자녀야. 세금 따위는 내지 않아도 되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하나님과 관계하기 원치 않는 사람을 공연히 건드릴 필요가 없단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야. 저자세도 고자세도 아닌 정자세로 지킬 것을 지키도록 해. 원하는 것을 줘. 싸우지도 말고, 괜한 올무에 걸려들지도 마. 네가 가장 잘하는 고기 잡는 일 정도의 대가를 치르면, 필요한 기적을 볼 수 있을 거야. 나의 죽음을, 나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베드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 권력자라 해도, 강해 보여도, 하나님과 관계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

 

마태복음 17:22-27

22제자들이 갈릴리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인자가 곧 사람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23 사람들은 그를 죽일 것이다. 그런데 그는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날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24 그들이 가버나움에 이르렀을 때에, 성전세를 거두어들이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여러분의 선생은 성전세를 바치지 않습니까?"
25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바칩니다." 베드로가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말씀을 꺼내셨다.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냐? 세상 임금들이 관세나, 주민세를 누구한테서 받아들이느냐? 자기 자녀한테서냐? 아니면, 남들한테서냐?"
26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남들한테서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자녀들은 면제받는다.
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니, 네가 바다로 가서 낚시를 던져, 맨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서 그 입을 벌려 보아라. 그러면 은전 한 닢이 그 속에 있을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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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돌아가신 엄마의 생신이었다. 우리 나이로 100세 생신이다. 내년은 우리 엄마 탄생 100주년 기념의 해이다. 내일은 엄마의 기일이다. 4년이다. 마침 이때 '그리운 얼굴'을 주제로 기고글을 쓰고 있다. 일주일을 끙끙거리며 눈물을 훔치며 엄마 얘길 또 썼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려움이다. 글을 잘 쓰고 싶은데, 빨리 쓰고 털고 싶은데, 빨리 잘 쓰기 위해서 엄마를, 그리운 얼굴을 계속 떠올려 마주해야 한다. 도망치고 싶다. 빨리 탈고를 해야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탈고를 위해서는 이 고통에 머물러야 한다.  마감은 다가오는데 도망갈 수는 없고, 그 마음에 머무르자니 헤집어지고 헤집어져 글을 쓸 수 없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딜레마에 빠졌다. 그래도 거의 다 썼다. 엄마 생신, 엄마 기일 사이에 낀 오늘 탈상... 아니, 아니 탈고할 것이다. 글을 쓸 수 있어서, 글 쓸 기회가 주어져서 엄마를 자꾸 새롭게 만난다. 엄마를 새롭게 만나는 것은 다름 아닌 나를, 하나님을 새로 만나는 일이다. 

 

노트북 옆 프리지어가 향기로 함께 한다.

밤에는 초도 켠다.

낮으로 밤으로 향기와 빛으로 함께 하는 그분이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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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르망 장 드로아스(Germain-Jean Drouais, 1763-1788), 예수님과 가나안 여자, 1784년

 
자녀와 개,
누가 자녀이고, 누가 개인가?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자녀와 개를 구분하고 차별하시겠다는 뜻인가? 예수님이 그런 분인가? "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라고 말씀하셨던 분 아닌가. 바리새인들 안에 있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자의식, 자녀라는 특권 의식을 꿰뚫으시고 발에 차이는 돌로 여기셨던 분 아닌가. 발이 차이는 돌에 비하면 개는 더 나은 것 아닌가.
 
차별과 혐오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 대화의 기술을 통해 그 반대를 피력하려는 예수님이 느껴진다. 사려 깊고 따뜻하고 지혜로운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진다. 간절히 간청하는 여인을 귀찮아하는 제자이다. 이방 여자 한 사람의 필요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예수님이 이 (이방인) 여자를 어떻게 대할까, 꼬투리 잡기 위해 혈안이 된 눈들이 또한 번득이고 있다. 
 
"자녀"임을 자처하며 우월감과 특권의식에 싸인 이들의 마음에서 울리고 있는 바로 그 말을 예수님께서 육성으로 들려주신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옳거니! 했을 것이다. "이제야 바른말을 하는군! 어디 여자, 그것도 이방인 여자와 말을 섞고 부탁을 들어준단 말인가. 이제야 유대인 남자다운 모습을 보이는구만!"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 예수님이 절실한 사람 가나안 여인의 마음을 예수님은 아신다. 여인 안에 있는 절실함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기 위해서 어두운 배경을 만들어 내시는 예수님의 빅 피처이다. 말로 가르치는 설교가 아니라 체험 자체로 가르치신다. 개가 되든 무엇이 되든 오직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한 사람이 온몸으로 내보이는 간절함을 드러내신다. 이것이 필요하다고. 이 가난한 마음이면 된다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몸으로 대면하고도 회개하지 못한 자들은 모두 "자녀"임을 자부하는 특권의식의 소유자들이었다. 자기 확신에 매몰되어, 자기가 지키는 율법조항 몇 개를 무기 삼아 꼬투리 잡기에 혈안이 된 바리새인들은 그 어마어마한 성육신, 신의 현현을 눈앞에 두고도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 
 
가난한 마음이 복되다고 하신 산상수훈 첫 말씀을 기억한다. 치유와 성장이 필요하여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이들을 만나는 것이 일이다. 기적같은 치유와 성장을 내 눈앞에서 보여주는 이들이 있다. 하나같이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금이 간 존재, 진창에 빠진 자신을 또렷하게 인식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결국 치유되고 성장하고 만다. "이만하면 됐지" "나만큼만 하라고 해" "내가 너를 위해, 공동체를 위해 한 게 얼만데..." 하는 태도로 치유와 성장에 닿는 것을 보지 못했다. 높은 자만심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함께 병들게 한다.
 
주님, "자녀"라는 확신이 만든 우월감과 특권의식으로 당신을 알아보지 못한 시간들이 부끄럽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순간순간 분출하는 우월감으로 눈과 귀가 어두워지고 이쪽 저쪽에 벽을 세우기도합니다. 가나안 여인처럼 가난한 마음 하나로 족한 저이고 싶습니다.

 

마태복음 15:21-28

21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22 마침,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그 지방에서 나와서 외쳐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23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 때에 제자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간청하였다.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를 안심시켜서 떠나보내 주십시오."
24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나아와서, 예수께 무릎을 꿇고 간청하였다.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26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27 그 여자가 말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28 그제서야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바로 그 시각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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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must believe in spring!을 자꾸 읊조리고 다녔더니 예상치 못한 봄 같은 선물이 찾아들었다. 그럼에도 다시 봄은 아직 먼 것 같아 답답한  마음으로 저녁 산책을 나섰는데 "이래도 못 믿겠느냐!"면서 코 앞에 봄을 들이대는 것이었다. 움트는 저 생명을 "봄" 아닌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으랴.
 

 
탄천으로 내려가자마자 예쁜 새소리가 귀를 잡아 끄는데,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더듬고 더듬어 찾아보니 한 녀석이 앉아 노래를 해댔다. "주께서 사랑하신다... 지금 네 마음이 어떠하든, 지금 하는 그 생각 그대로 일지라도 사랑하신다!" 새는 늘 그렇게 운다. 한참 서서 듣다 다시 걸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반대편 경부고속도로 바로 옆길을 선택했다. 아까 그 녀석이 따라왔나? 그런데 조금 더 요란하다. 멈춰서 보니 동네 친구들 죄 불러 모아 합창을 부르고 있다. "봄이 오고 있다! 이제 봄이다!"
 

 
종일 하늘이 흐렸다. 돌아오는 길 하늘 저쪽에 요만큼의 노을이 보일락말락 한다. 그렇지, 흐려도 하늘이고, 흐린 하늘 너머에 해는 떠오르고 지는 것이지. 보이지 않아도 저기 해가 떠 있어... 조금 더 걷다 보니 "나, 여깄지!" 가드레일 틈새로 붉은 존재감!

 

연구소 카페의 읽는 기도는 토머스 머튼의 영적 여정에 이정표가 되었던 책과 인물 이야기가 한창 진행 중이다. 오늘은 소화 데레사라고도 불리는 리지외의 테레사의 저작과 이야기이다. 일상생활의 모든 자질구레한 일들, 만남들, 작은 모욕 등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탁이라 여겼다고 하는 소화 데레사이다. 작고 확실한 절망을 절망으로 마주하고, 작고 확실한 기쁨을 기쁨으로 마주하는 것이 "살아서 사는 것"이라고 일깨워주는 것 같다. 마음을 일으켜 나가 걷기 시작하면 금방 알아지는 진리이다.
 
오늘 아침 연구소 카페 "읽는 기도"에 붙인 댓글이다.

 

"리지외의 데레사가 걸어간 영성의 '작은 길'은,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빠진 영혼은 일상생활에서 신실한 행실로 그 사랑에 부응하게 되고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내게 보여주었다."_토머스 머튼

토머스 머튼이 만난 또 하나의 이정표인 리지외의 데레사는 '소화 데레사'라고도 불립니다. 24세로 일찍 생을 마감한 19세기의 성인입니다. 스스로를 "작은 꽃"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작은 꽃으로서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모래 한 알로 살고자 했으며, 일상생활의 모든 자질구레한 일들, 만남들, 작은 모욕 등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탁이라 여겼다고 합니다. 

며칠 잠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이유의 끝에는 말 한 마디, 작은 사건 하나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건 별 것 아니라고 하나 씩 외면해버리면  삶은 텅 비어버립니다. 리지외의 데레사는 그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작은 것 하나를 사랑으로 응답하는 길. 내 일상의 작은 기쁨과 작은 모욕 하나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일. 생각만큼 쉬운 것이 아닙니다. 너무 작고 미미해서 하나님과는 상관없고 영성의 삶과는 무관하다 여길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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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에반스의 "You Must Believe In Spring"을 들으며 책을 읽고 있었다. 책과 음악이 위로가 되긴 하지만, 어쩐지 일으켜 세워지지 않는 마음이다. 봄을 믿을 수 있을까? 오지 않을 것 같은 봄을 믿게 해 달라는 기도의 마음이다. 그래서 고른 음악이다. 휴대폰에 메시지 하나가 들어왔고, 세상에나... <우리는 봄을 믿어야 해요>라는 책을 쓰신 신부님의 메시지이다. 선물 같은 메시지를 받고 그분의 책을 다시 꺼냈다. 서문을 읽었다. 두 번 반복해서 읽고 나서 이대귀의 <내겐 봄과 같아서>를 플레이 리스트에 걸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이렇게 열심히 손짓하시는데... 봄을 믿어야 한다. 나는 봄을 믿어야 한다. 당신도 봄을 믿어야 한다. "내밀리고 밀리고 휘둘려서 마음이 황량해지는 대신에, 먼저 자유로이 광야를 품을" 결심을 늘 이 자리에서 새롭게 해야 한다.

 

봄을 믿는 사람은 희망을 가진 사람입니다.
희망은 믿고 의탁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희망과 믿음은 수원(水源)처럼, 소실점처럼
사랑에서 시작하고 사랑으로 향합니다.
봄을 믿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사랑으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믿음과 희망이
황량한 대지 어딘가에 남아 있었던
사랑의 흔적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이제는 분명히 알겠습니다.
"우리는 봄을 믿어야 해요"라는 말은
하느님이 들려주신 것이라는 것을
 
이 말을 벗들에게,
터널과도 같은 어려운 시기를
보내는 이웃들에게,
무엇보다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당신도 그 말을
내게 들려주시기를 청합니다.
당신의 이웃에게 들려주기를 청합니다.
우리가 서로 지치지 않고 이렇게 속삭이기를
하느님은 바라십니다.
"그래요, 우리는 봄을 믿어야 해요."
 
혹독한 광야와도 같은 시간이 우리에게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봄을 믿는다면, 광야의 시간은 축복의 때가 될 것입니다. 스스로 '도시의 광야'를 마음에 품고자 합니다. 내밀리고 휘둘려서 마음이 황량해지는 대신에, 먼저 자유로이 광야를 품기로 결심한 사람의 내면은 깨끗해지고 풍성해집니다. 그는 이웃을 향하고 하느님께 나아가며, 기뻐하는 것을 다시 배울 수 있습니다.
 
자, 이제 겨울 풍경을 눈에 담습니다. 두려워하고 움츠러드는 마음을 내려놓고, 흰 눈이 뺨에 닿는 감각에 깜짝 놀라 기뻐하는 순수한 어린아이처럼, 씩씩하게 겨울의 숲을 걸어갑시다. 겨울의 시간이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배웅합니다. 벌써 자라난 초록빛 새싹을 맞이합니다. 봄의 기운을 몸에 담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봄과 함께 찾아온 사순절의 시간 속으로 자유로이 들어섭니다. 그 시간을 흘러 보내는 것이 아니라 꼭꼭 씹듯이 살아가고 싶습니다. 생각과 마음과 삶이 변화하기를 갈망합니다. 마른나무에서 다시 잎이 나고 꽃이 돋는 자연의 기적이 나의 삶에서도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봄을 믿어야 해요> 최대환, 파람북, 들어가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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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이다. 엄마 기일보다 내 생일에 엄마 생각이 더 나는 걸 보면 엄마는 생명이다. 내 생명의 시작이 담긴 곳, 담긴 몸, 담긴 존재가 엄마이다. 우울하고 슬프고 가라앉는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다. 아침에 일어나 마주한 식구들이 누구도 "생일 축하해!"라고 말하지 않아서 섭섭했다. 점심으로 나가서 미역국을 먹자고 내가 먼저 제안했다. 사실 나와 채윤이, 연이은 졸업식에 생일 이벤트에 신경 쓸 수도 없는 남편의 상황이라 이렇게 지나가도 좋을 생일이다. 

 

 

오전에 운동 다녀 길에 선물을 받았다. 천국의 엄마가 보낸 선물 같기도 하고, 엄마를 소유하고 계신 그분이 직접 보낸 것 같기도 하고. 저 소리로 노래하는 새의 이름을 알고 싶은데 방법이 없다. 어느 가지 사이에 숨어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고 있나, 뒷목 아프도록 고개 들고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새가 목청껏 불러주는 생일축하 노래에 엄마를, 하나님을 느꼈다.

 

 

교회에서 진행한 "달빛학교"라는 여성 영성 세미나의 마지막 날이다. 늘 준비하는 리추얼의 탁자에 어느 때보다 더 마음을 담았다. 연구소에 있는 "여인들"이라는 상징물인데, 큰 사람, 큰 여인을 내가 강의하는 테이블에 세웠다. 여성의 영적발달을 달의 변화로 설명하는 박정은 수녀님의 따와서 6주간 나눔을 해왔다. 초승달-보름달-그믐달로 이어지는 여성의 발달이다. 초승달 시기의 끝에 아버지를 잃었고, 보름달의 시기에 엄마를 잃었고, 엄마 떠난 지 4년이 된 지금은 그믐달의 시작이 아닌가 싶다. 엄마의 딸이었던 내가 엄마가 되었고, 이제 더  큰 엄마가 되어야 하는 시기이다. 그러라고 초대하시는 그분의 메시지가 삶 구석구석에서 들리는 것 같다.

 

카카오톡 생일 알림이 민망해서 "내년엔 지워야지" 했었는데. 어쩐지 축하를 많이 받고 싶은 마음이 들어 그냥 두었다. 축하 메시지 하나하나가 소중하여 밤늦게 돌아와 진심의 감사를 드렸다. 독일에 있는 다슬샘이 축하 메시지를 전해오면서 세상에나! 황금 나리 사진을 보내왔다. "나리"라는 별칭을 쓰는 덕에 나리꽃 사진을 보내오는 벗이 많다. 별별 나리꽃 사진을 보다보다 황금 나리 사진을 보다니! 베를린 어느 성당에서 계단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황금 나리라고 한다. 야생의 들꽃 나리라고만 생각했는데 "너는 오늘 강하고 빛나는 황금 나리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달빛학교 세미나 하러 가는 길에 뱃속에 힘이 빡 들어왔다. 황금 같은 55세 생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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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작업이든 말씀 묵상이든 같은 텍스트를 읽고 제각각의 감동을 받는 것이 참으로 아름답다. 그 다른 묵상과 감동을 듣는 것 자체가 '배움'이다. 여럿이 함께 하는 아름다움이다. 어젯밤 늦은 시간까지 있었던 꿈작업에서 "남편과 함께 있다"라는 문장에 머무르며 남편과 함께 하는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다. 함께하지만 독립하고 싶고, 외롭기에 함께하고 싶은 갈망을 보게 되었고. 남편의 인생여정과 맞물려 돌아가는 나의 인생을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 말씀 묵상 본문은 마태복음 13:10-17인데. 같은 본문을 읽고 같은 메시지를 듣는 것이 신비롭다.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감동과 깨달음인 것을 느낄 수 있다. 샬롬이 깨진 두 마음에 말씀으로 주시는 그분의 위로와 소망이다. 

JP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자녀들을 세우시고 보내십니다. 그런데 마귀도 이 세상에 같은 일을 하는 모양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뒤섞여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금세 수긍이 가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좀 불편하기도 합니다. 역사를 생각해보면 정말 가라지 같은 인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의 샬롬을 깨뜨리고 찢으며 끊임없이 훼방했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부디 그들은 그 악행에 대한 정의로운 댓가를 받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아직 한 사람의 전인생이 끝나지 않은 현시점에 그가 밀인지 가라지인지 우리는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대체로 선한 사람인데, 후에 큰 악행을 저질렀음이 드러나는 경우도 있고, 지금은 대체로 나쁜 사람인데, 회개하여 개과천선하여 공익을 위해 희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정의를 위해 힘쓰고, 불의와 싸워야 하는 것은 언제라도 당연히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은 최후까지 좀 미뤄두는 것이 지혜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의 비유 해석이 여전히 알쏭달쏭합니다만, 붙들고 싶은 구절은 이렇습니다.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43)

주님, 영원하신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거든 빛나는 존재들과 더불어 제 영혼 빛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얼굴빛을 반영하고, 믿음의 조상들의 얼굴빛을 반영하여, 제 얼굴 제 영혼이 영원히 영광스러운 빛을 내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어두움, 모든 죄, 모든 악행, 모든 상처, 모든 눈물, 모든 죽어가는 것들이 다 말끔히 사라지고, 생명과 진리, 사랑과 신뢰의 빛 속에서 빛나고 또 빛나기를 원합니다. 그 나라 가기까지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의 자녀로 살게 하소서.

 
 

SS

"엉겅퀴를 묶어서 불사르는 장면은 마지막 막에 나온다. 인자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나라에서 엉겅퀴를 뽑아 쓰레기장에 던지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들은 높은 하늘에 대고 불평하겠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거룩하게 무르익은 삶들은 성숙하게 자라서, 자기 아버지의 나라를 아름답게 꾸밀 것이다." (메시지 성경 40-43절)

끝이 있다, 는 말씀에 소망과 두려움이 교차합니다. 끝이 있기에 그 끝을 믿고 오늘을 소망으로 견뎌야 합니다. 끝을 향해가는, 아직 완결되지 않은 '과정'으로서의 오늘이기에 판단을 유보하고 오늘 분량의 샬롬을 살아야겠습니다. 그 끝의 심판은 맥락없이 뚝 떨어지는 판결이 아니라 제 인생의 과정으로서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지 성경의 표현이 마음 깊이 다가옵니다. "거룩하게 무르익은 삶들은 성숙하게 자라서, 자기 아버지의 나라를 아름답게 꾸밀 것이다." 그 아름다운 끝을 향해, 그 끝을 믿고, 내적 외적인 상황이 어떠하든지 오늘 하루의 샬롬을 간절하게 지키고 살겠습니다.

주님, 함께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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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나오면 제일 먼저 베란다 앞에 서서 하늘을 본다.  이름을 잘 지어야 하는 것이, 하늘을 보면 "하늘"이라 불리는 연구소 연구원 선생님이 생각나곤 한다. 그리고 바로 글쓰기 모임에서 한 벗이 썼던 문장이 따라 나온다. "하늘이라고 늘 맑으라는 법이 있나." 오늘 하늘은 이 연상작용이 줄줄줄 제대로 맞아 떨어지는 그런 하늘이다. 아, 연구원 하늘이 유럽 여행을 가서 여기 없구나, 하늘이라고 맑으라는 법이 없으니... 하늘의 주인께서 오늘은 흐리기로 작정하신 날이구나. 베란다 앞 십자가는 무겁고 슬프구나. 입원 첫날을 보내셨을 어머니 생각, 안팎의 짐들의 무게가 저 십자가에 투영되었나? 어젯밤 늦은 시간까지 있었던 꿈모임에서의 문장들이 가슴 언저리에서 맴돈다. "상처에 피흘리며 기절하듯 고개를 떨군 여자"  "원래는 하늘로 솟구쳐야 하는데 건물 안이라..." "그냥 두면 안 되겠다, 나의 힘을 보여준다." 
 
이 마음 그대로 가지고 영적 독서와 말씀 묵상의 창들을 열었다. 말씀 묵상 밴드에 JP가 마태복음 12:22-32에 붙인 묵상이 마음을 울렸다.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 12:30)

이 세상의 역사가 흘러가는 동안, 가라지(원수가 뿌려 놓은 것, 악)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발본색원하여 이상사회를 만들려는 모든 시도는 다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인간 존재의 이중성 때문일 것입니다. 악은 사라지고 선한 시대가 열렸다고 생각한 순간, 어느새 마귀는 그 선한 사람들의 선한 행위가 누군가에게 악한 행위가 되도록 만들어 버리곤 합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로마 권력을 내몰고, 유대 권력을 붕괴시켜, 새로운 메시아 시대를 혁명적 방식으로 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겨자 씨와 같이 지극히 작은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이 동네 저 동네 뿌리시고 다니셨습니다. 그 일은 지극히 작은 운동이겠지만, 언젠가 나무로 자라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가루 서 말 누룩에 불과하지만, 언젠가 부풀어 올라 큰 빵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서서히 전진하게 됩니다. 사랑과 용서와 진리와 생명으로 변화된 이들이 포기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으면 눈물을 흘려 씨를 뿌리게 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열매 맺게 될 것입니다.

주님, 새들이 깃들이는 세상을 꿈꿉니다. 풍성한 나눔의 잔치가 일어나는 세상을 꿈꿉니다.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기대하고 소망하며 오늘도 눈물을 흘리며 말씀과 사랑의 씨앗을 심게 하소서.

 
나도 댓글로 묵상을 남겼다. 
 

" 내버려 두어라."

"주님, 뽑아 버릴까요?" "주님, 말씀만 하세요. 제가 뽑아 버릴게요!" 의협심의 옷을 입은 이 열정이 주님을 향한 마음인지, 내 유익과 의를 지키기 위한 발로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달려드는 저의 태도입니다. 제가 가라지라 규정한 것들이 진정 가라지인지, 어쩌면 내가 가라지인지도 모를 텐데요.

"내버려 두어라", 추수하는 날, 그 끝날까지 내버려 두어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저를 향한 인내와 자비의 마음이신 것을 알겠습니다. 제가 저 아닌 존재를 향한 태도로 주님께서 저를 대하신다면 벌써 뽑혀 버려졌을 텐데... 내버려 두시는 사랑, 내버려 두고 기다리시는 사랑으로 오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그러하시듯 저도 때로 내버려 두고 인내할 수 있게 하옵소서. 비록 열매를 보지 못하더라도 오늘 뿌릴 씨앗을 뿌리며 살게 하옵소서. 가려내지고 불태워질 마지막 추수의 날이 있음을 두려움으로 소망하며 오늘 순간순간 사랑을 선택하며 살겠습니다.

 
하늘이라고 늘 맑으라는 법이 있겠는가. 오늘 내게 주어진 하늘이 흐린 저 하늘이라면 오늘은 오늘의 하늘을 살아야지. 이 악물고 버티지 않으려고 한다. 흐린 하늘이라고 해서 하늘이 아닌 것은 아니니 오늘은 기꺼이 저 하늘을 살고, 저 하늘에 안기기로 한다. 하루의 끝이 올 것이고, 반드시 끝을 주시는 주님이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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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날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큰 의미를 부여한 졸업식은 아니었고, 사진이나 예쁘게 찍자! 싶었는데. 캠퍼스를 누비며 사진 찍는 즐거움마저 없겠으니... 글렀군! 가족 총출동의 졸업식이 어쩐지 시시할 것 같은 느낌으로 기분이 우중충했다. 학교 가는 길, 비 사이에 눈이 섞여 떨어졌다. 가지가지한다... 제대로 글렀군! 일찍 도착하여 방황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엄마, 밖에서 사진 찍어! 지금 눈이 엄청 와." 하는 소리에 튀어나가 인생 샷을 건졌다. 축복처럼 눈이 쏟아졌고, 예쁜 사진을 건졌다.
 

 
임의로 부는 바람처럼 좋은 사진은 우연의 렌즈에 걸려 얻는다. 눈 감은 이 사진이 어쩐지 너무나 마음에 드는데...  갑자기 쏟아진 눈처럼 그냥 주어진, 얻어 걸린 선물이다.
 

 
반백의 머리칼로 눈 맞으며 찍은 중년 부부의 사진이 뭐로 보나 포토제닉 감이지만. 조명도 별로 안 좋은 실내에서 찍은 이 사진은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으로 또 하나의 포토제닉이다. 이 멋진 청년들을 딸 아들의 이름으로 옆에 세우고 찍은 사진이라니.

 

가톨릭 신자 속 혼자 개신교인이라는 괜한 자격지심으로 스스로 왕따 된 면이 없지 않은데. 졸업, 마지막 날에 원우회에서 준비한 축하식에 참석하고 이리저리 몰려 사진도 찍고 보니 기쁘고 행복했다. 돌아보니 역시 사람을 얻은 시간이었구나! 수녀님, 수사님, 신부님. 좋은 벗들을 얻었다. 학위가 필요했던 것도 아니고, 시간이 남아돌았던 것도 아닌데. 굳이, 꼭 와야 했던 학교일까? 괜한 생각으로 마음의 에너지 많이 소비했는데. 마침표를 찍고 보니 굳이, 꼭, 바로 이때 있어야 할 곳이었다.  종교의 담을 넘어가 '사람'을 얻었고, 사람을 얻은 덕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음에도 다른 내가 되었다. '인맥'이 달라졌다는 뜻이다.

 

궂은날을 예상치 못했듯, 졸업식 하루가 어떨지 예상치 못했다. 안팎으로(외적으로 내면적으로) 이렇게 풍성한 축하를 받게 될 줄 생각지 못했다. 실은 은밀히 다닌 학교인데 말이다. 내 교회와 가톨릭 교회, 이쪽에서는 저쪽 말을 못 하고, 저쪽에서는 이쪽 말을 못 하며 공부를 했다. 축하식이 졸업생 나눔 시간에 이런 취지의 말을 되었다. "원없이 공부했다. 공부하면서 하나님이 한 분이시기에 교회도 하나이구나, 깨달았고. 하나인 교회가 또 얼마나 갈라져 있고 멀리 떨어져 있는 지도 느꼈다. 원없이 사랑했고, 원없이 아파했다." 

 

여러 개의 꽃다발, (그 지루한) 졸업식 자체도 기쁜 축제였다. 아프고 기쁜 체험이 참으로 소중하다. 그 체험은 오롯이 나의 것이다. 석사과정 자체, 가톨릭 학교라는 조금 무모한 선택 자체가 체험을 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애매한 정체성을 가지고 좋은 선생님, 좋은 공부에 몰입하여 매진하는 동안 나도 모르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다. 
 
아래 바실 패닝턴 신부님의 말에 동의한다. 나라면 "생활" 대신 "삶"이라고 번역했겠으나, 여하튼 깊이 동의한다. 쉽지 않았던 대학원 생활, 무지 어려웠던 논문 기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가장 자비롭고 은혜로운 초대였기에 말이다.  

 

❝저는 사람들에게 만약 제가 수도원에 들어오기 전에 누군가가 제게 수도생활의 고통과 어려움을 알려 주었더라면 빨리 진로를 바꿨을 것이라고 자주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수도원 그 자체는 제가 찾는 사랑 체험을 결코 저에게 전달해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체험은 오직 생활 안에서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체험을 한 후로 저는 단 하루도, 한 시도, 한 순간도 하느님의 가장 자비롭고 은혜로운 초대에 응한 것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 _ 바실 패닝턴 『향심기도』, 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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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에 해마다 학교 대표로 독창대회에 나갔었다. 지정곡과 자유곡, 두 곡을 부르는데 3학년 때 지정곡이 이런 노래이다. "할머니 머리에 눈이 왔어요. 벌써 벌써 하얗게 눈이 왔어요. 그래도 나는 나는 제일 좋아요. 우리 우리 할머니가 제일 좋아요." 대회가 아니어도 나는 늘 혼자 노래를 부르며 노는 아이였고, 그 자체가 연습이었다. 그런데 이 노래는 집에서 잘 부르지 못했다. 특히 아버지가 있을 때는 부르지 못했다. "우리 우리 할머니"라는 말 때문이었다. 할머니라 함은 아버지의 엄마인데, 실향민인 아버지의 부모님은 북한에 계셨다. 한 번도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나는 아버지를 생각해서 그 노래를 부르지 못했다. 내가 이 노래를 해서 "할머니" 소릴 듣고 아버지가 할머니 생각이 나서 슬프면 어떡하지? 내가 "우리 우리 할머니"라고 노래할 때 딸에게 할머니를 주지 못해서 미안하면 어떡하지? 그 어린 나이에 순간적으로 전자동으로 거기까지 갔다는 것이, MBTI로 F가 높다는 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지나친 감정이입이다. 그렇다. 좋아하는 사람의 감정에 지나치게 이입이 된다.  
 
감정에 편들어주는 일이 내게는 쉽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감정에 무조건 편들어주는 일이 쉬운 일이다. 이런 성향이 글 쓰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고,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지나치게 감정이입 되는 대상을 떠올리며 글을 쓸 때는 사투를 벌이게 된다. 수십 번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는 짓을 해야 감정이 거둬내지고 그나마 읽을만 한 글이 나온다. 그렇게 어제 마감인 글을 거의 마무리해 가는데, 이입된 마음을 뒤흔드는 일들에 글이 콱 막혀버렸다. (이것도 지나친 감정의 오지랖, 감정이입의 문제이다.) 글만 막힌 것이 아니라 마음도 막혀서 오후를 다 보내고 일몰 시간에 밖으로 나갔다. 다 예수님 때문이다. 글이 빨리 써지지 않았던 그 감정이입은 예수님과 관련된 것인데, 속을 헤집어 마음을 콱 막히게 한 일도 알고 보면 예수님의 일이다. 다 된 글에 예수님 빠트려 엉망이 되고 말았다. 아, 어쩌라고요! 하면서 걷는데 정말 짜증 나게 눈앞에 떡 하니 또 저 전광판!  ”(데헷....)JESUS LOVES YOU" 란다. 참말로 속도 좋은 양반... 그래도 사랑한다니까 기분은 좋네.
 
메마르고 튀들린 마음 다잡아 글 마무리 할 수 있기를... 이 글 보는 아무나 기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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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서 렉시오 디비나를 배우며 읽은 책이 엔조 비앙키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이다. 렉시오 디비나를 유난히 사랑하시는 신부님께 수업을 들었는데, '렉시오 디비나'가 얼마나 단순한 '말씀 기도'인지. 개신교 안에서 조용히 붐을 일으키는 렉시오 디비나는 얼마나 복잡하고, 군더더기가 많은지 생각했다. 가톨릭 학교에서 "영성신학"을 공부하며 결국 " Sola Scriptura, 오직 말씀으로"  회귀하게 되었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다. 더 신기한 것은 내 책상에 놓인 이 책을 보고 JP가 "어, 당신이 이 책을 왜 봐?" 하더니 자신의 말씀 묵상에 가장 좋은 텍스트가 되고 있다니 말이다. 이 일이 먼저였는지, 교회 말씀 묵상 밴드 참여가 먼저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매일 아침 연구소 카페에서 하는 영적 독서와 교회 말씀 묵상 밴드에서 나누는 말씀 묵상이 그야말로 '일용한 양식'이 되고 있다. 작년 한 해를 돌아보는 Big Family Day에서 JP의 감사제목 중 하나가 "정신실이 교회의 딸로 돌아온 것"이라고 했는데. 일면 동의가 된다. 언젠가는 긴 고백의 글을 쓰게 될 것 같은데... 매일 아침 성실하게 말씀 묵상하시는 교우들이 내게 큰 은인이다. 카를 융의 말처럼 나 자신이 되는 것이 인류를 위한 가장 큰 사랑이라는 말을 다시 실감한다. 나도 내 자리에서, 내게 주어진 일을 꾸준히 성실하게 하는 것으로 인류를 사랑해야지, 생각하게 된다. 오늘 마태복음 9:9-17 본문에 이런 묵상 댓글을 달았다. 용기가 필요한 고백이라 올리고 나서 한참 손이 떨렸지만, 말씀에서 솟아난 이 기도로 감사한 하루이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

남편이 전임 목회를 시작한 15년 전쯤, 신앙의 메마름이 시작되었습니다. 메마르고 메마르더니 캄캄해졌습니다. 끝이 없는 어둠인 줄 알았는데... 끝이 아니었고 어쩌면 저의 신앙 여정에서는 꼭 통과해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덕분에 영적 전통 안에 있는 기도를 배웠고 고독 속에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 시간을 지나와 "신앙 사춘기"라는 이름을 붙이고 책도 썼습니다. 그렇게 신앙 사춘기를 서서히 빠져나온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이전과 같은 신앙으로 돌아가기는 힘들었습니다.

신앙 사춘기 때부터 아침 일찍 식구들이 일어나기 전 혼자 일어나 말씀을 묵상하고, 영적 독서를 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저만의 방식으로 주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이곳 말씀 밴드에서 묵상 나눔을 하는 것을 알고 있고, 남편이 여기에 정성을 쏟는 것도 알았지만 들어올 생각이 없었습니다. 나대로, 내게 맞는 방식대로 하고 있으니까... (부끄럽게도 제 방식의 말씀 묵상이 더 우월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어느 날, 하루도 빠짐없이 밴드에 묵상을 나누는 분들을 보면서 마음에 흔들림이 생겼습니다. 매일 묵상하시며 달라지는 관점, 겸손한 기도... 저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굳게 마음 먹은 것은 아닌데 스르르 말씀 묵상에 참여하게 되었고, 어릴 적부터 해왔던, 청년 때는 정말 열심히 했던 QT 훈련의 감각이 깨어나면서 몸에 잘 맞는 옷을 다시 찾아 입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다시는 신앙 사춘기 이전의 마음을 되찾을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여기서 뭔가 되찾아가고 있습니다. 묵묵히 아침마다 말씀 묵상 나눠주시는 집사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신앙 사춘기를 겪으면서 "바리새인 같은 신앙인"들에게 진절머리가 났고, 그들의 심리를 분석하고 쪼개는 글을 써댔는데. 어느새 저는 영적인 우월감에 빠져 더 교묘하게 포장하고 치장한 바리새인이 되어 있습니다. 뼛속까지 새겨진 바리새인 DNA, 아침에 눈만 뜨면 함께 깨어나는 바리새인의 습성입니다. 하루 자고 나면 그만큼 낡아지는 가죽부대 같은 제 영혼입니다. 주님께서 날마다 새로운 포도주를 부어 주시는데.... 문제는 제 부대가 낡아 찢어지고 터져서 그 포도주를 간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침 이 시간 그나마 낡아지는 제 영혼의 가죽부대를 새롭게 하는 시간입니다. 말씀 묵상의 동지 집사님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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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는 선물이지! 크리스마스는 선물의 시간이다. 크리스마스에는 "선물 교환"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올해에는 연구소 5주년 특강에 마치고 [상처 입은 치유자 과정] 1, 2, 3기 선생님들 송년 모임에서 선물교환을 도모했다. 연결이 끈끈해진 선생님 몇 분에게 진행을 일임을 했더니 사랑과 센스가 반짝반짝 빛나는 선물교환을 기획해 주었다. 모든 선물은 "연결"이었다. 올 한해, 홀로 외로울 때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연결이었다. 선물은 가지각색이지만 뜻은 오직 연결! 별 걸 다 '연결'로 연결하는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이 사랑스러운 "상처 입은 치유자"들을 어쩔 것인가!
 

 

선물의 맛은 서프라이즈이다. 예상치 못한 순간, 예상치 못한 것이 갑자기 들이닥칠 때,  선물의 선물다움은 빛을 발한다. 작년 12월 마지막 날에 보이스톡으로 전화가 한 통 왔고. 그 전화는 작년 2022년 통틀어 가장 반가운 선물이었다. 잘 지내고 있다는... 일도 하고 있다는 그 말 밖에는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고맙다는, 정말 과분한 말도 들었다. 전화를 끊고 그 편안한 목소리에 한참 눈물이 났다. 나라면 잘 지낼 수 있을까? 어쩌면 잘 지낼 수밖에 없는 사람일지 모른다. 무한 '피해자'가 아니라 '살아 남은 자, 생존자'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러 왔고, 그보다 솔직하고 굳건할 수 없는 글을 써냈으니 결국 잘 지낼 사람이었을 것이다. 처음 만남을 떠올리면 더더욱 그렇다. 별칭을 '반짝이'라고 지었었다. 자신이 얼마나 반짝이는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그런 이름을 지었다. 목회자 성폭력 생존자 글쓰기 1기였는데. 모임을 동반하는 나도 처음이라 많이 긴장했었다. 그 긴장된 첫 모임에서 반짝이가 우리를 웃겼다 울렸다 그랬었다. 맞다. 결국 잘 지낼 사람이었다. 벌써부터 반짝이고 있었다. 잠시 어둠이 그를 둘러쌌으나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었다. 반짝이가 카카오톡으로 김을 보내왔다. 맨 김 참 좋아하는데.... 굽고 자르다 보면 가스레인지 주변이 난리가 나니까 아예 먹을 생각을 안 하는데. 구워서 딱 잘라진 김을 보내와서 간편하게 먹고 있다. "작가님 식사준비 편하게 하셨으면..."이라고. 작년 편안해진 목소리처럼 다시 눈물 나는 고마움이다. 누군가의 식사준비, 누군가의 일상을 챙기는 여유는 자기를 돌보고 지키는 내면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이 소중한 사람, 소중한 선물, 반짝이를 어쩔 것인가!
 
만남도 그렇다. 좋은 만남은 선물처럼 오고, 선물의 맛처럼 서프라이즈로 온다. 대학원 종강피정이 있었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긴 했는데, 논문발표 명목으로 참석했다. 타과로 진학하여 박사논문 쓴 선배 한 분이 먼저 발표를 했다. 논문 주제나 내용과 상관없이 "저 사람 좋은 사람이네" 감이 왔다. 논문이 아니라 논문 쓴 사람의 마음이 느껴졌달까. (아니! 논문에서 마음이 느껴져서야 되겠는가?) 내게 좋은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으니, 이유 불문 내가 느끼는 '좋은 감각'을 거침없이 지지하는 편이다. 이런 감각이 소중하고 신비인 것이,  내 논문발표 이후 이분은 또 "눈물이 났다"는 평을 내놓는 것 아닌가? (이게 논문을 사이에 두고 오고 갈 말이고 감정인가?) 선물 같은 만남이 되었고, 모든 순서 마치고 새벽 2시에 숙소로 함께 걷는 길에 믿을 수 없는 하늘을 보았다.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정말 별이... 그 짧은 순간 "실은 오늘 저희 아버지 42주기 추도식이에요." 누군가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꼭 하고 싶었던 그 말을 하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그 산속에 아침부터 문을 연 베이커리 카페가 동화처럼 서 있어서 깜짝 모닝커피도 했다. 괜한 끌림이 아니라, 기도하며 쓴 논문인 것을 서로 알아본 것이다. 집에 돌아와 책 선물을 주고받았는데 보내주신 책 안쪽에 "반짝반짝"이라는 단어가 쓰여있다. 이 신비로운, 반짝이는 만남을 어쩔 것인가!
  

 

자신이 얼마나 반짝이는지 모르는 이들이 반짝반짝 누군가의 삶에 침투한다. 침투하여 생명을 불러일으킨다. 자기를 인식하지 못한 어둠이 자기와 자기 사람들의 생명을 갉아먹는 것처럼... 2023년 성탄절, 예기치 못한 반짝임이 선물로 왔다. 크리스마스는 선물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어 선물로 왔다. 믿을 수 없는 사건이다. 전무후무한 선물이다. 
 
손수 만든 피조물인 사람을 얻고 싶어서,
사람이 되어버린!
신의 영광을 버리고 신의 광휘를 버리고...
신적인 반짝임을 모르기로 작정하고!!

오늘 말씀 묵상 본문이다.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요 1:3-5) 반짝이는 존재들이 자기 반짝임을 모르는 것처럼, 어둠은 제 어둠을 모른다. 자기를 모르는 어둠들은 필연 확신을 장착하고 빛을 거부한다. 밤하늘은 그래서 더욱 어두워진다. 하지만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 하늘이 까맣고 어두울수록 별빛은 더욱 빛나 동방의 세 사람을 베들레헴으로 인도하니...
 
이 성탄의 신비를, 이 선물을 어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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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고 얼마든지 걸을 수 있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빛이 부드러워지는 시간부터 노을이 물드는 시간을 걷다

달빛이 비칠 때쯤 집으로 돌아오는 그런 산책을.

 

 

봄가을로 좋은 날이 아니어도 괜찮다.

타고난 '좋음'으로 놓치기 아까운 날씨의 날들이 있지만,

요 며칠의 칼바람 날씨도 산책하며 생각하고 기도하기에 손색이 없다.

꽁꽁 입고 싸매고,

비무장지대 얼굴만 잘 버텨내면 된다.

이런 날도 '좋은' 날이다.

 

걸었다. 

두어 시간을 천천히 걸었다.

12월엔 가끔씩 주체할 수 없는 슬픔과 그리움으로 마음을 잃곤 하는데

걷다 보니 잃어버린 마음을 찾게 된다.

사람 하나 없는 산책 길을 혼자 걷는 시간,

슬픔과 그리움의 빛깔이 바뀌고 

벌써 마음이 따뜻한 집의 공기로 바뀌어 있었다.

 

 

다리는 아프고 꽁꽁 언 얼굴엔 감각이 사라졌는데

아파트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는 박새 한 마리.

대단한 일을 치르고 온 것도 아닌데, 

짹짹짹 귀여운 팡파르를 울려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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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에 하염없이 올려다본다. 하루가 다르게 텅 비어 가는 나무 사이를 바라보는 것이 좋다. 텅 빈 가지 사이로 하늘이 보이는 것이 경이롭다. 잎이 없는 나무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는데, 내가 그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젊은 시절을 보냈는데, 그러고 있는 나를 알게 되었고 이유도 알았다. 그리고... 슬픔도 두려움도 없이 텅 비어 뻗은 가지를 바라볼 수 있다. 심지어 경이롭게. 눈을 떼지 않고, 뒷목이 뻣뻣해질 만큼 오래오래.
 

이젠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 거야

 
자꾸 이 가사가 입에 맴돌아 찾아보았다. 이문세의 <시를 위한 시>일 거라 생각했는데  <옛사랑>이었다. 그리운 것을 그리운 대로 둘 수 있는 여유가 생겼는데. 그리운 것이 새롭게 생겨나서 "생각이 나면 생각난 대로 그대로 둬"지지가 않는다. 그리운 것 그 너머, 그리운 모든 것들 너머, 영혼의 바닥부터 그리운 그분인가. 
 
이제 나목의 아름다움에 눈 맞추고 볼 수 있지만, 다시 새롭게 그리운 것들은 어쩔 수가 없네.

 

 

 
 

Sabbath diary8_쓸쓸한 산

그 : 여보, 저기 봐. 멋지지? 수묵화 같은 모노톤의 산이 좋다. 나는 약간 쓸쓸함이 있는 느낌이 좋아. 나 : 나는 쓸쓸한 산 안 좋아해. 특히 막 시작되는 쓸쓸함은 더더욱...... (몇 년의 내적작업으

larinari.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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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음식 준비를 하다 손을 베었다. 상처가 크진 않은데 깊어서 피가 콸콸콸 솟아났다. 처음 있는 일인데 여러 번 겪었던 것 같고, 지금도 어딘가에서 명절 음식 준비하는 어느 여인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고, 내 일인데 내 일만 같이 않고, 남 일 같은 내 일, 내 일 같은 남 일이라 여겨졌다. 피의 연대... 여성들의 연대는 피의 연대!
 

 

음식 준비라야, 바비큐 재료 장 보는 것, 월남쌈 재료 준비, 국 하나 끓이는 정도였다. 아이들 다 빠지고 어른 다섯이서 펜션으로 가는 명절이라 (평소보다) 가벼운 일이었다. 명절이 내게는 (아니 모든 여성에게) 단지 일의 문제가 아니다. 구조의 문제이기도 마음의 문제이기도. 과도한 책임감, 그보다는 죄책감, 혐오감을 마주하고 내려놓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20여 년 전 명절의 기억으로 올 추석을 살지 않겠다 결심하고 기도하니 더욱 가벼워진다. 펜션 명절 이튿날은 화담숲 산책이었다.  이전의 기억이 아니라 오늘 여기의 공기를 호흡하며 걸으니 살아서 걷는 느낌이었다. 40년 전 명절의 기억으로 오늘을 아프게 살아가시는 어머니. 그 어머니를 도울 수 있는 부분과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을 받아들이는 시간이 길었구나 싶다. 한계를 인정하며 숲을 걷는 시간, 무겁지만 가볍고 슬프지만 감사했다.
 

잠시 혼자 걷는 시간도 생겼는데... 생명력 한껏 머금고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꽃봉오리들을 만났다. 소국! 아, 얼마나 고운가!

아주 재밌는 일이 있었는데. 다친 손가락이 엄지이다. 지혈하느라 꽁꽁 싸매기도 했고, 아프기도 하니 자꾸 힘을 주게 되어 엄지 척이 되었다. 바비큐 저녁 식탁. JP는 저쪽에 서서 고기를 굽고 나는 어머니, 시누이, 아주버님과 마주 앉아 식사하고 얘기를 나누는데 나도 모르게 자꾸 손가락으로 "쵝오!"를 외치고 있는 거다. 어머님이 말씀하셔도 쵝오! 평소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누지 않는 아주버님 말에도 쵝오! 고기 맛있어요, 쵝오! 달이 참 예뻐요, 쵝오! 그걸 깨닫고 현타가 와서 혼자 빵 터졌는데, '시'님들에 둘러싸여 있으니 이걸 나눌 수도 없고... 웃참 하느라 죽을 뻔한 나 진짜 쵝오! 큭큭큭.
 

 
남은 월남쌈 야채에 새우 한 봉지 다 데쳐서 편안한 저녁 식사, 쵝오! 어쨌든 쵝오! 누구든 쵝오! 당신도 쵝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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