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 온 걸 환영한다니! 내가 로마에 왔구나! 순례 일정 중 분명 로마가 끼어 있는데 얼마나 안중에 없었는지, 로마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 도착하여 "Welcom to Rome"이란 전광판 글씨를 보고 "아, 나 로마에 온 거지... 로마행 비행기였어..." 싶었다. 이탈리아 독일 베네딕토 수도원 순례이다. '수도원'과 '베네딕토'에만 온통 집중하고 있어서 로마 일정은 보고도 본 게 아니었다. 
 
남편의 안식월과 결혼 25주년이 겹쳐 가산을 탕진하는 긴 여행을 잡기 딱 좋은 시기였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남편에게 온전히 3개월 '홀로 있는' 시간을 주고 싶었다. 어떤 여행이든 굳이 같이 갈 필요가 있겠는가 싶(은 쿨한 지경에 이르렀다. 결혼 25년 만에)었다. 실은 그 와중에 내겐  '수도원 순례 여행' 씨앗이 떨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성 베네딕토회 왜관 수도원에서 주관하는 '베네딕토 수도원 순례'였으니.
 
남편의 마음을 움직여 '수도원 순례 여행'에 함께 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렉시오 디비나'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수도원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이다. 단순히 영성사가 아니라 말씀 묵상의 역사를 따라 올라가도 결국 이 수도원 전통과 닿아 있다는 것. 아마도 그것이 남편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그렇게 결혼 25주년 기념 여행은 '베네딕토 수도원 순례 여행'으로 정해졌고, 나는 지금 로마에 와 있다.
 
누르시아의 베네딕토는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라 불린다. 물론 베네딕토 수도회의 창설자이다. 무엇보다 오늘 날 많은 수도회들이 따르고 있는 <베네딕토의 규칙서>를 지어 문서로 남긴 것이 수도 생활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이 규칙서를 읽으며 깜짝 놀랐다. 6세기에 쓰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공동체로 사는 삶과 관계에 대해 주는 지침이 놀랍도록 섬세하다. 긴 여행에는 여러 권의 책을 심혈을 기울여 선택해서 가져오곤 하는데, 이번엔 거의 <베네딕토 규칙서> 한 권, 원 픽이다.
 
3년의 은수생활로 성 베네딕토는 오히려 유명해졌는데(은수, 숨어서 혼자 지내는 데 유명해지다니 말이다.) 은수생활 이전의 로마 유학 생활이 있었다는 것이 내게는 인상적이다. 학업을 위해 로마로 갔던 베네딕토 성인은 타락한 정치와 교회, 환락과 퇴폐로 물든 로마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그곳을 떠나 수비아코(Subiaco) 계곡의 동굴에서 은수생활을 하고, 거기서 하나님 체험을 하게 된다.
 
베네딕토의 여정에 몰입한 탓일까. 로마에 끌리지 않았다. 어서 몬테카시노(Montecassino) 수도원으로 날아가 그 회랑과 정원을 걸으며, 성당에 오래 앉아 기도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로마가 환영한단다. 은수처의 기도 이전에 학업의 꿈을 품고 갔던 로마가 있었고, 화려하고 풍요롭고 타락한 로마를 살았기에 환멸을 느끼기도 하였고, 떠나기도 하여 <베네딕도 수도규칙>을 오늘 내 손에 남겨주신 베네딕토 성인이 되었다.
 
Welcome to Rome!
로마가 환영한단다. 나도 로마를 환영하기로 한다. 7시 30분 로마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 내려 어두워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어느 호텔에서 순례 여행 첫밤을 맞는다. 하루가 공중에 붕 떠서 아침인지 저녁인지 모르겠는 몸으로 로마의 밤을 맞았다. 물론 잠은 오지 않고. 덕분에 1일 차 순례기를 썼고, 두어 시간이라도 잘 수 있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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